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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유적지--장보고기념탑(張保皐紀念塔, 김영삼 전대통령 친필 휘호) 본문

대한민국 전직대통령 자료

중국 유적지--장보고기념탑(張保皐紀念塔, 김영삼 전대통령 친필 휘호)

CIA bear 허관(許灌) 2006. 8. 27. 09:41

중국 유적지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 "장보고기념탑(張保皐紀念塔) 친필 김영삼 전(前)대통령 휘호(揮毫)"와 성산두(成山頭)에 있는 "천진두(天盡頭) 친필 후야오방 (胡耀邦) 중국 전(前) 총서기 휘호(揮毫)"는 후세 역사에 남을 만큼 값진 글씨체이며 많은 중국 방문 관광객들이 보고 관람하고 있는 글씨체이다

一.張保皐紀念塔--김영삼(金泳三) 전(前) 대통령(大統領) 친필(親筆) 휘호(揮毫)
장보고 장군 기념 탑. 장보고 장군을 생각하며 기억하는 탑 그리고 韓中 양국의 친선 영원함 상징 탑
*張--이름 장(張), 베풀 장(張)
*保--보전할 보(保)
*皐--못 고(皐)
*紀--벼리 기(紀)
*念--생각할 념(念)
*탑(塔)--탑 탑(塔)
*揮--휘두를 휘(揮)
*毫--붓 호(毫)
*휘호(揮毫)--붓을 휘둘러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림, 휘필 휘쇄(揮灑) 그리고 신춘(新春)휘호



-장보고기념탑(張保皐紀念塔)은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의 북쪽에 있는데 1991년 한국 성신여대 교수 세계한민족연합회(世界韓民族聯合會) 회장 최민자(崔珉子) 교수가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 왔다가 한민족의 선각자 장보고 대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1994년 7월 24일에 준공했으며 탑의 설계가 특이한 뿐만 아니라 그 의미<한국과 중국 양국의 친선이 영원함>가 더욱 깊다고 하겠다
"장보고기념탑(張保皐紀念塔) 여섯 글자는 김영삼(金泳三) 전(前) 대통령의 친필(親筆) 휘호"이다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은 역사가 유구할 뿐만 아니라 한.중양국(韓.中兩國) 국민의 친선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은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石島鎭) 적산(赤山)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당조(唐朝)시기 신라인 장보고(張保皐)가 지은 것으로 창립초기에 법화경(法華經)을 읽었다 하여 유래된 것인데 당시 산동에서 규모가 제일 큰 불교사원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먼 옛날에 적산은 온통 붉은 것으로 뒤덮혀 있었는데 여기에 사는 적산신(赤山神)이 오가는 선박들의 안전을 가져다준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불공을 드렸다
역사서(歷史書)에는 당조(唐朝) 전성기에 신라인 장보가 출세를 위해 당(唐)나라로 불법이민 하였다
무예가 능하고 전쟁에 용감하였기에 그는 당시 산동성 서주 절도사 휘하 주력부대 무령군의 군중소장(1000명 병사를 지휘하는 장교)으로 있었다고 한다 흥덕왕 3년에 신라로 귀국하여 청해진을 창설하고 대사를 봉해 받음으로써 한(韓).중(中).일(日) 삼국의 해상무역을 독점하고 한(韓).중(中).일(日)간의 <해상실크로드>를 개척하여 해상무역왕으로 불러왔다
그는 해상운송사업이 번영하기를 기원하면서 적산(赤山)에 불교사찰을 지어 많은 스님들을 모셔와 "법화경(法華經)"을 읽어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기원 838년 일본 스님 옌닌대사 일행은 견당사로 입당하여 법화원(法華院)에서 3년 가까이 묵으면서 법화원(法華院) 많은 신세를 졌다 옌닌은 당조(唐朝)의 정치 문화 경제등 여러 방면의 지식을 배우면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란 여행기를 썼는데 여행기에 법화원을 상세히 묘사하였다 귀국한 뒤에도 옌닌은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을 은혜를 잊지 못해 일본 교또의 소야산에 적산 이름으로 "적산선원(赤山禪院)"을 세웠으며 일본 불교 중종의 3세 좌주에 까지 올랐다 1988년 영성시(榮成市)에서는 민족문화를 발전시키고 선조들의 위업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하여 원래의 위치에 재건 하였다
적산법화원의 주요 건물인 "대웅보전(大雄寶殿)"에는 석가모니 상이 모셔져 있고 "관음전(觀音殿)"에는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으며 북쪽 벽에 장우성 화백이 그린 장보고 대사의 화상이 모셔져 있다 그뒤에 있는 건물은 "삼불전(三佛殿)"으로 2000년에 새로 건축한 대법당(大法堂)이다

二.天盡頭----후야오방(胡耀邦) 중국(中國) 전(前) 총서기(總書記) 친필(親筆) 휘호(揮毫)
하늘의 끝나는 곳( 육지의 끝). 태양이 떠오르는 곳(중국의 희망봉)
*天--하늘 천(天)
*盡--다할 진(盡)
*頭--머리 두(頭)
*天盡頭=日出之也=日出之本=朝鮮(중국인들도 한국인이고 한국인도 중국인이다)

-성산두(成山頭)
성산두(각)(成山頭, 頭=角)는 일명 "천진두(天盡頭)라 하는데 산둥성(山東省) 영성시(榮成市) 용수도진(龍鬚島鎭)에 있다 성산산맥의 초동단에 위치하여 있기에 얻은 이름이다 성산두는 중국 바닷가에서의 최동단으로 제일 먼저 해상일출을 보는 곳으로서 예로부터 "태양이 떠오르는 곳(중국의 희앙봉)"으로도 불리운다
고대로부터 성산두는 태양신이 거주하는 곳이라 했으며 사서에 의하면 중국 역대 황제들도 여러 차례 이곳을 시찰했다 제일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도 두번이나 이곳으로 순해했으며 태양신에게 제를 지내고 장생불로초를 구하려 하였다 이는 물론 이 지역이 동방의 해상으로 진출하는 전략적 가치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진교유적(秦橋遺跡), 진대화석(秦代化石), 사교대(射鮫臺), 진시황 사당(秦始皇 祠堂), 진동문(秦東門)등 진시황과 관련된 많은 유적들이 있다
성산두는 예로부터 군사 요충지로서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많은 전쟁을 겪었다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조선과 전쟁을 벌인 한무제도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냈으며 백제를 치기 위하여 소정방이 13만의 수군을 거느리고 출발한 항구도 이곳이다
청.일 갑오전쟁의 황해대전도 성산두의 동쪽 해상에서 벌어졌는데 중국의 민족영웅 등세창(鄧世昌)도 이곳에서 나라를 위하여 순직하였다 그 외에도 현재 중국의 많은 지도자들도 이곳을 방문했는데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은 이곳에서 "천진두(天盡頭)"란 휘호를 남겼다
*頭--머리 두(頭), 頭=角(뿔 각)
*榮--꽃 영(榮).빛날 영(榮). 명예로울 영(榮)
*鬚--수염 수(鬚)
*射--쏠 사(射)
*鮫--상어 교(鮫)

-진시황(秦始皇) 사당(祠堂)
원래 진시황이 동쪽으로 순찰을 하며 머물었던 행궁인데 후에 백성들에 의해 시황묘(始皇墓)로복구되었고 현재는 중국에서 유일한 진시황 사당이다 여기에는 진조(秦朝) 암석 이외에더 몇점의 청대(淸代)의 문화재들이 진열되어 있다
*秦--벼 이름 진(秦). 나라 이름 진(秦)
*祠--사당 사(祠)

-진교유적(秦橋遺跡)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진시황이 성산두 맞은 편 해상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의 장생불로초를 구하러 이곳에서 다리를 놓으려 하자 동해용왕이 감동하여 부하 해신(海神) 파견하여 하루사이에 다리를 만들었다
이에 감격한 진시황은 한번 만날 것을 간청하여 해신의 화상을 그리지 않겠다는 전제하에 만났으니 약속을 어기고 몰래 화가를 숨겨놓았다 이에 노한 해신을 건설했던 더리를 일시에 파괴하였는데 지금은 그때의 교각만 4개 남아있다고 한다

-사교대(射鮫臺)
진시황이 불로장생초를 구하려고 애를 쓰고 있을 때 방사 서북(徐福)이 자청하여 구하겠다고 나섰으니 못구하고 되돌아와서 불로장생초를 캐려고 하는데 큰 상어가 지키고 있어 실패했다고 하니 이에 노한 진시황이 백만대군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상어가 있는 방향을 향하여화살을 세번 날렸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三.중국 유적지 사진 자료
http://qdmandarin.com/www_qdmandarin/curriculum/200411_005.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