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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지능(I=intelligence)센터:우남(雩南) 이승만 전대통령 생애(生涯)와 유엔군 사령부(United Nations Command) 본문

대한민국 전직대통령 자료

동아시아 지능(I=intelligence)센터:우남(雩南) 이승만 전대통령 생애(生涯)와 유엔군 사령부(United Nations Command)

CIA bear 허관(許灌) 2006. 9. 25. 01:35
이승만선생(李承晩, 1875년--1965년)은 독립운동가이며 한성정부 대통령,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조선인민공화국 대통령 추대와 거절 그리고 제헌의회 의장,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대한민국 제헌헌법과 제1공화국 헌법,제2공화국 헌법 전문 밑에 대한민국 제헌국회 의장 이승만으로 표기 되어 있다 이 의미는 대한민국 건국자가 이승만 선생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이다>
이승만(李承晩, Rhee Synaman) 선생의 본명(本名)은 이승룡(李承龍)이고 호는 우남(雩南)이며 1875년 5월 1일 이경선(李敬善)의 아들로 황해북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우남 이승만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며 1894년 배제학당을 졸업하고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1907년 조지워싱턴대학을 졸업하였다 이어 1908년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10년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으로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자 친일정권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1896년 서재필선생이 미국에서 돌아와 독립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자 이에 가담하였으며 <협성회보>와 <매일신문>의 주필을 지내면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개화 독립운동을 전개 하였다
또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고 중추원 설치를 주장하다가 1898년 황국협회의 무고로 체포, 투옥되었으나 1904년 출옥하였다 그해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에 건너가 T.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뒤 귀국 이상재 선생등과 조선기독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후진을 양상하다가 1912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914년 <한국 태평양>지를 발간하였고 1919년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국무총리로 추대 되었다 임시정부의 직제를 대통령제로 바꾸고 1920년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1921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돌아오지 않자 의정원의 불신임을 받았다
그 뒤 워싱턴, 하와이등지에서 태평양 일본군참전 한국인 장병들 상대로 심리전 미국의 소리 방송원으로 활동을 했고 항일외교활동을 벌이다 광복 후 귀국 , 독립촉성중앙위원회 총재, 민족통일총본부 총재등을 지내며 반공. 반탁을 주장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 의원으로 당선되고 이어 초대 국회의장, 대통령이 되었다
6.25동란때 정부가 부산에 피란해 있던 1951년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자유당(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 정당)을 창당 이듬해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54년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조항 철폐를 골자로 한 사사오입 개헌으로 대통령에 3선 되었고 1960년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혁명으로 하야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1965년도 죽었다
저서로 <독립정신> <일본폭로기>등이 있다..

부인 프란체스카(Francesca Rhee 1990-1992) 여사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이며 한국 이름은 이부란(李富蘭)이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에서 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스코틀랜드에 유학해 국제통역사. 속기사 자격을 획득하였으며 1933년 독립운동을 위해 방문한 이승만을 만나 다음해 결혼하였다
그 뒤 망명생활을 하는 남편을 12년 동안 뒷바라지 하였으며 1945년 광복이 되자 한국에 왔다 1948년 이후 대통령 부인으로 6.25동란과 4.19혁명등 한국의 격동기를 체험하였고 남편의 하와이 망명길에 동행하여 그가 죽을 때까지 병상을 돌보았다
1970년에 귀국하여 1992년까지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화장(梨花裝)에서 아들 이인수(李仁秀) 부부와 함께 살았다 프란체스카가 살아있는 동안 이화장(梨花裝)에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유엔군 사령부(한국전쟁 자료)
http://www.usfk.or.kr
청와대 역대 대통령 자료실
http://www.president.go.kr/warp/kr/visit/museum/expresident/media/list.php?f_cat=lsm
이승만 전대통령 사진 자료
http://kr.imagedir.yahoo.com/isurf/84/231/232/23138/16502/imgthumb_0.html
1.이승만 전(前)대통령 성명
본명(本名)은 이승룡(李承龍)이고 회자 이름은 이승만(李承晩)이다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2.이승만 전(前)대통령의 호
우남(雩南)---기우제 우(雩,祈雨祭名). 남녁 남(南)
雩南의 의미는 가물때 해갈이 의미 또는 일(日)보다는 샘물(泉이나 水)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3. 우남 이승만 전대통령 주요 약력
(1)황해북도 평산(平山) 출신
이승만은 평양과 서울의 중간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1875년 5월 1일 이경선(李敬善)의 아들로 태어났다
(2)1894년-- 배재학당 졸업
ㄱ. 배재학당(培材學堂)
배재학당은 1885년 고종 12년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H.G 아펜젤러가 설립한 근대적 사립학교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으로 기독교 정신과 개화 사상의 바탕 아래 근대교육의 선구자적 기능을 담당 하였다
초기에는 중등과정의 특별과(보통과) 및 대학과정의 본과를 두고 한문, 영어, 만국지지등을 가르쳤다 1887년 한국최초의 르네상스식 벽돌교사를 신축하고 교원과 학과목수를 늘리고 수업연한도 보통과 4년, 본과 5년으로 정하였다
교과목은 만국지기, 사민필지(士民必知), 위생, 창가. 도화, 체조등이었고 과외활동으로서 연설회, 토론회 같은 사상 발표 훈련과 야구, 축구, 테니스등의 체육활동을 실시하였다
입학자격은 17세 이상의 남자로서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고 한글을 이해할 수 있으며 가능하였다 1909년 배재고등학당으로 인가받고 1916년 5년제 배재고등보통학교의 신설인가를 받았으며 1937년 6년제 배재중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51년 3년제 배재중학교와 분리되어 배재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

ㄴ. H.G 아펠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H.G.아펜젤러는 미국 감리교 목사이며 교육자이다
그는 펜실베이니아주 손더튼 출생이고 개신 장로교파였으나 감리교파로 개종하였다
그는 1882년 프랭클린마셜대학 졸업한 후 드류신학교에 입학하여 1885년 졸업했다
그는 1884년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고 일본에서 한국 유학생 이수정(李樹庭)에게 한국어을 배웠다 1885년 인천에 도착 그해 서울에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그는 1887년 H.G. 언더우드와 J.S.게일등과 성서의 한글 번역에 참여 <마태복음> <고린도전. 후서> 를 맡아 1900년 완료했다
1889년 한국 최초의 월간잡지 <교회>을 발간하여 자유주의 사상과 민족의식을 불여넣고 독립정신 배양에 힘썼다
1895년 월간지 "한국회보를 복간 편집하였고 암기를 강조하던 한국의 교육방식을 판단위주의 교육방식으로 고치는데 공헌했다
그는 1902년 성경번역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항을 출발 목포(木浦)를 향해 가다가 충돌사고로 익사했다
(3)배재학당 교사 역임
(4)1896년--협성회보 기자 역임과 독립협회 가담 활동
(5)1898년--독립협회 사건으로 7년간 옥고
(6)1904년--석방과 도미
(7)1904년--미국으로 건너가 고종밀서 T 루스벨트 대통령과 만남 그리고 도움요청
(8)1907년---조지워싱턴대학 졸업
(9)1908년--하버드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받음
(10)1910년--프린스대학교 철학박사 학위 받음
박사학위 논문 제목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
(11)1912년--세계 감리교 대회 한국대표 역임
ㄱ.감리교(監理敎,Methodism)
감리교는 프로테스탄트 교파(敎派)의 하나이다
감리교의 창립자는 영국의 J.웨슬리이다
영국 교회 사제(司祭)로서 모교인 옥스퍼드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을때 동생 찰스등과 함께 "성서에 나타나 있는 방법(Method)에 따라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한 종교클럽에 속했기 때문에 메소디스트라 불리게 되었다
J.웨슬리는 1735년부터 2년간 식민지시대의 미국 조지아에 전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귀국했다 좌절감에 빠져 있던 어느 날 회심경험(回心經驗)을 하고부터는 열심히 길거리나 야외에서 설교하고 각지로 전도여행에 나섰다
이 설교운동이 영국교회로부터 분리하여 독립한 감리교회로 된 것은 J.웨슬리가 죽은 뒤였으나 그것은 그가 1784년에 미국에 파견한 선교사들 특히 F.아스베리의 전도가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개척자들이 점차 서부로 이동함에 따라 감리교 순회 설교자는 말을 타고 개척질에 전도하여 개척자의 종교로서 서부로 퍼져갔다
칼빈(칼뱅)주의와 달리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은 자력으로 개척하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금욕주의와 결부된 근면한 윤리적 생활을 추진하는 힘이 되어 급속히 교회 신도 수가 증가해 갔다
남북전쟁 때 교회도 남북으로 분열되었으나 1939년에 교세가 확장하였다
감리교의 발전은 교구제도와 경건한 신앙을 고수하는데 있었다
1791년 J.웨슬리가 사망했을 때의 교세는 영국 전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등)에 확장하였고 미국에서는 G.휘필드의 주도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감리교의 교리는 사도신경 속에 제시된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앙에 근거하고 있으며 교리보다도 실제적인 생활과 성경의 진리를 실천하는 데 중점을 둔 조직의 기본단위는 구역이며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교회로 조직된다
각 구역은 지역적으로 지방회를 조직, 교회조직과 사업발전에 힘을 기울이고 지방회는 다시 더 큰 집단을 형성하여 연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최고기관인 총회가 있다
ㄴ.한국의 감리교
한국의 감리교는 가장 오래 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하나로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한국 기독교 2대 교파(장로교와 감리교)의 하나이다
1884년 6월에 미국 감리교의 선교사 R.S.매클레이가 서울에 와서 1884년 7월 3일 고종으로부터 선교개시의 허가을 받고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통해 선교를 시작하였다
현재의 한국 감리교는 4년에 한번 열리는 총회와 총회 밑에 5개 연회(서울.중부.동부.남부.삼남)가 있고 연회 밑에 100여 개의 지방회가 있는데 평균 한 지방회에 30여개의 교회가 소속되어 있다(1983년도 자료)
1984년 선교 1세기를 맞아 북한선교와 동양선교를 위한 도약적인 태세확립과 선교방법 개발에 힘쓰는 한편 교권 싸움을 지양하여 현대 실정에 맞는 선교신학을 확립하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ㄷ.북한 김일성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감리교 목사 출신이다
ㄹ.조오지 부시 미국대통령 일가 감리교 출신이다
(12)1914년---하와이에서 주보 <태평양> 발간
(13)1917년---호놀룰루에 기독교학원 독립군관학교 설립
(14)1919년---상해 임시정부 대통령 취임
1921년---21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돌아오지 않자 의정의원 불신임 그리고 미국에서 독자적 독립운동
(15)1944년 --하와이등지에서 미국의 소리 방송원으로 태평양지역 일본군으로 참전한 한국인 사병 설득과 귀순 유도
(16)1945년---귀국,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 민주의원 의장
(17)1948년----제헌 국회의장, 초대 대통령 역임

4.유엔군사령부와 유엔묘지<부산시 남구 대연동 6.26참전 유엔군 전사자 묘지>
(1)유엔군 사령부(United Nations Command)
http://www.usfk.or.kr(유엔군사령부 자료)
ㄱ.유엔군 사령부 연혁(沿革)
1950년 6월 25일 비가 내리는 평화로운 새벽의 정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야포와 자동화기의 굉음과 함께 북한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 되었다
침략군은 이내 38도선을 넘어 반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 경찰군을 밀어내며 수도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틀 후 유엔은 북한군의 침략저지를 위한 회원국의 단결과 원조를 요청 하였다 유엔안보이사회 결의안을 통해 미합중국을 결의안 내용의 실행과 한국내 유엔군 작전지휘를 담당할 집행국가로 선정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미합중국 대통령 해리 트루만은 자유세계에 대한 위협을 인지하고 공산세력이 자유국가를 짓밟는 행위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음을 천명 하였다
당시 미 육군 극동사령부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침략을 격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는 명령에 따라 미 공군 및 해군을 투입하고 1950년 7월 24일 일본 도쿄에서 유엔사령부 총사령본부를 설치하였다

ㄴ.유엔의 호소
한편, 유엔은 모든 회원국에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항전노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군사 및 원조제공을 촉구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미 보병 24사단, 21보병연대가 유엔 지상군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전쟁에 참전 하였다
이른바 <스미드 특수임무 부대>로 명명된 이들은 일본내 주둔지로부터 공수된 병력으로 1950년 7월 5일 오산에서 북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러진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한국과 미국 양국의 군대는 우세한 전력의 북한군을 상대로 점차 남쪽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유엔사령부는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즉 수적으로 장비 측면에서 열세인 가운데 유엔의 다른 회원국이 약속한 지원을 기다리며 조금씩 후퇴하면서 시간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 8월 29일 영국 제27여단이 부산에 도착, 한국군 및 미군으로 구성되어 있던 유엔사령부에 합류했으며 곧 대구 서쪽의 낙동강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호주, 벨기에, 캐나다, 콜롬비아, 이디오피아, 프랑스,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터키가 자국 병력을 파병 하였고 남아프리카연합은 공군병력을 파견했고 덴마크,인도, 노르웨이 스웨덴등은 의무부대를 지원 하였고 당시 비회원국이던 이탈리아는 병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ㄷ.자유세계의 자유를 수호하다
3년간의 한국전쟁을 통해 연합군에 소속된 장병들은 유엔사령부의 일원으로서 목숨을 바쳐 싸웠다
한국인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침략행위 저지를 위한 유엔군의 의지를 확인시켰다
한국 땅의 혹설기와 혹한기를 견뎌내면서 영국, 이디오피아, 한국, 태국, 터키, 미국등을 비롯한 연합군 출신의 젊은이들은 북한과 중국 인민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이야 말로 현대전쟁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었다고 과언이 아니다
피의 능선, 장진호, 함흥, 단장의 능선, 화천호, 철의 삼각지, 펀치볼, 부산등은 한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격전지들이다
연합군의 용맹스런 장병들이 흘린 피는 불모고지의 흙 먼지와 한강과 임진강의 흐르는 강물도 붉게 물들였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총성은 멈췄다
판문점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은 전투의 종결과 함께 정치적 타협의 기회를 제공 하였다
양측은 휴전선으로부터 2,000미터씩 물러나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두고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야 했다

ㄹ.자유의 대가
부산항 부근에 위치한 당곡평야에는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수 많은 흔적들이 남아 있다 빛 바랜 터키와 이스라엘의 <초승달과 별> <다윗의 별> 문양 옆에 세워진 하얀 십자가들은 33,629명의 미군과 수 많은 한국병사들, 717명의 터키 병사들 그리고 1,109명의 영국군이 치멸한 전투 속에 산화해 간 흔적인 것이다
이 곳은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죽어간 12개국 병사들의 시신이 묻혀 있는 영광의 장소이기도 하다
휴전협정과 함께 유엔사령부 회원국들은 전쟁으로 피폐한 한국의 경제를 재건하는데 힘을 쏟기 시작했다 도시와 농촌을 온통 폐허로 만들어 버린 전후 한국의 재건과 복구를 돕는 일은 수 년의 시간이 걸린는 거대한 작업이었다

ㅁ.병력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당시 유엔연합군의 병력은 932,964명으로 최대규모를 이루었다
각국별 병력 사항은 다음과 같다
한국---590,911명
콜롬비아---1,068명
미합중국---302,483명
벨기에----900명
영국---14,198명
남아프리카---826명
캐나다---6,146명
터키---5,455명
룩셈부르크---44명
호주---2,282명
필리핀---1,496명
뉴질랜드---1,389명
태국----1,294명
이디오피아--1,271명
그리스--1263명
프랑스---1,119명

(2)유엔묘지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6.25참전 유엔군 전사자 묘지--
부산광역시 남구(南區) 대연동(大淵洞)에 있는 6.25참전 유엔군 전사자의 묘지이다
1951년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설립안이 채택되어 참전 16개국 1만 1,000명이 안장되었는데 유해를 본국으로 이장하기도 하여 11개국 2,300여구가 남아 있다
1955년 이후 UN에서 관리해 오다가 1974년부터 이곳에 유해를 남기고 있는 참전국과 한국이 공동관리하고 있다
참전국 국민에게 널리 알려져 해마다 많은 내외국인이 방문, 참배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3호이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세상으로!!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
가자! 가자!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전사들이여!
피의 전선, 혁명의 전선으로 가자!
자유의 전선은 영원 하리라

***유엔군 참전용사 진혼가***
---통일의 그날, 해방의 그날--
북소리
장구소리
징소리
지금도 피 끓은 젊음을 되새이면서
체험하고 땀을 흘리면서 밤새껏 연습하던
그때가 그립다
징소리 들렸다 북소리 들렸다
메마른 이 강산을 적의 피로 물들이자
가자 가자 가자 혁명의 전사들아
가자 가자 가자 피의 전선으로
무얼을 두려워랴 삶의 두려우랴
죽기로 싸운다면 우리는 승리하리라
가자 가자 가자 혁명의 전사들아
가자 가자 가자 피의 전선으로
쓰려져간 동지의 사슬을 끊으로
통일의 그 날, 해방의 그 날.............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만만세!!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공존 세상으로...

남과 북 지도자들이 밤에 잠을 들때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 외우고 아침에 일어나서 저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고 보고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공존 사회!를 외칠때 남과 북은 하나의 국가 통일 조국이 될 것이다
그런 위대한 남북한 지도자는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