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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지능(I=intelligence)센타: 2005년 3월 1일 노무현정부가 건국훈장 대통령상을 서훈한 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자 몽양(夢陽) 여운형 선생 본문

대한민국 전직대통령 자료

동아시아 지능(I=intelligence)센타: 2005년 3월 1일 노무현정부가 건국훈장 대통령상을 서훈한 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자 몽양(夢陽) 여운형 선생

CIA bear 허관(許灌) 2006. 8. 15. 10:28
1.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자 몽양(夢陽) 여운형선생 생애(生涯)
몽양 여운형선생 추모사업회 http://mongyang.org/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선생은 19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楊平)군 양서면 신원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몽양(夢陽-깨어나라 뜻)이고 본관은 함양(咸陽-경남 함양)이다
그는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이승만 박사 후배)에 입학하였다가 민영환이 설립한 흥화학교(興化學校)로 옮겼다 중도에 홍화학교를 그만두고 관립 우체학교인 우무학당에 입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분개하여 졸업 직전 학교를 그만두었다
1906년 아버지가 돌아가자 자기집 종을 모아놓고 <이제는 사람마다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종문서를 전부 불태웠다
1909년에는 광동학교를 세워 청년들을 교육하였고 1910년에는 선교사인 찰스 알렌(곽안련)을 알게 되어 기독교를 믿게 되고 평양장로신학교에까지 입학하였으나 역시 중도에 그만 두었다 1916년 망명겸 유학을 목적으로 중국 남경에 건너가 중국 난징(南京)의 진링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다가 중단하였다 이후 주로 상해에 머물렀다
신학문. 기독교 사상등을 접한 그는 이후 교육사업과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다가 민족주의자로서 독립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1918년 8월 하순 경 상하이(上海)에서 김규식. 장덕수. 김철. 선우혁. 조동우등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였다 그런데 이해 11월 11일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후 평화회의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미국 대통령 특사인 크레인이 중국에 파견되어 왔다 이때 신한청년당 대표로서 환영대회에 참석하였고 크레인이 파리 만국평화회의에서는 전후 식민지 문제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해 피압박민족의 의사가 존중되어 처리될 것이라는 요지의 연설을 하는 것을 들었다 즉시 이러한 사실이 한국독립에 좋은 기회일 것으로 생각하여 후일 이 회의에 중국측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하게 되는 왕정정의 소개로 크레인을 단독면담 하였다
이 면담에서 한국의 독립의사를 설명하고 파리회의에 한국대표를 파견할 생각이라며 협조를 요청하였다 크레인이 개인적으로 이 제의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김철. 김규식. 장덕수. 선우혁등과 논의하고 국내. 일본에 있는 동지들과 긴밀히 논의한 결과 1919년 2월 1일 김규식을 한국대표로 파리회의에 파견하였으나 독립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이해 겨울에는 일본측이 조선의 자치문제에 대해 의견을 타진해 오자 장덕수등과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 자신이 일본에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독립운동은 나의 사명이며 필생의 사업이다>라고 한국독립의 당위성과 자신의 사명을 당당히 밝혔다
일본 조야 각계에 한국독립(조선독립)의 필요성을 적극 역설하는 등 외교론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 이동휘의 공산주의 그룹서 참가하고 1921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하였으며 같은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원으로 모스크바의 원동피압박민족대회(遠東被壓迫民族大會)에 참석, V.I 레닌등과 면담하기도 했으며 모스크바에서 돌아와서는 중국측의 손문(孫文)과 협력하여 중국혁명을 통해 조선민족이 해방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중국 혁명운동에 적극 참가하였고 1921년에는 테러를 당해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으나 임정 뿐만 아니라 공산계열과도 독립을 위해서는 모두가 단결할 것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1929년 영국의 식민지정책을 비판하다가 영국경찰에 체포되어 일본경찰에 넘겨진 뒤 나가사끼를 거쳐 본국으로 압송되었고 1930년 제령위반죄로 복역하다가 형기가 끝나기 직전인 1932년 7월 27일 3년간 옥고를 치러 뒤 가석방되었다 당시 조선총독 우단일성. 경무국장 지전청등이 자주 만나며 회유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았다 1933년 봄 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민족과 독립정신을 고양하는데 앞장섰다
1933년 봄 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민족과 독립정신을 고양하는데 앞장섰다 1936년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중앙일보가 무기정간을 당하자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의 패망이 멀지 않았음을 간파하고는 일본을 드나들면서 대외정세를 주시하는 한편 일본에 있는 한국 청년들과 세계 정세를 논의하면서 동지적 결속을 굳혔다
그러나 1942년 12월 <일본은 곧 망한다>는 발언으로 인해 구속되었고 1943년 6월 유언비어 유포죄로 1년형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출옥 후 더욱 독립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여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했다
이러한 활동 결과 1943년 8월 서울 경운동에서 현우현. 조동우등과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또 1944년 8월에는 고향인 양평 용문산에서 농민동맹을 조직하고 이 조직으로 하여금 건국동맹을 인한 보조활동을 하게 하였다 1945년 5월 말에는 연안독립동맹의 군대인 조선의용군과 협동작전을 전개할 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경(重慶) 임시정부에도 국내 정세를 보고하고 항일 협동작전을 추진할 것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15일 아침 총독부 정무총감 원등유작으로부터 치안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를 수락하여 바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그 위원장에 취임하여 민족해방을 맞았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광복 직후 권력의 공백기에 조선 민중의 자치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단체였으나 박헌영세력의 주도에 의해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된 뒤 우익진영의 참가거부와 미군정의 탄압으로 인해 유명무실해지자 이에 1945년 12월 건국동맹을 조선인민당으로 전환시켜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대중정당을 조직하였다
한편 1946년 1월 좌익의 집결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결성에 참여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었고 1946년 5월부터 중간우파를 대표하는 김규식과 함께 좌우익합작을 주도하였으며 박헌영이 주도하는 조선공산당. 신민당. 인민당등의 3당 통합에 반대 남로당에 참여하지 않고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지나친 좌경화에 반대하여 이를 탈피하고 근로인민당을 결성하는등 중간좌파로서 민주적 사회주의 건설과 통일졍부의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다가 1947년 7월 19일 한지근(韓智根, 본명:이필형)에게 종로구 혜화동 로타리(혜화동 카톨릭대 앞)에서 암살당했다
그의 정치노선은 시기에 따라 부르조아적 계몽주의에 입각하기도 하고 사회주의적 입장에 바탕을 두기도 하지만 1944년 이후부터 암살당하기 전까지는 사회주의자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그의 사회주의적 이념은 박헌영의 투쟁적이고 비타협적인 성향과는 달리 좌우통합적이었다 더욱이 통일전선의 관점에서 볼때 그의 노선은 박헌영의 노선보다 융통성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타협적 성격이 기회주의로 매도되기도 하지만 좌우합작은 당시의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방안이었다고 평가된다

(1)출생---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
ㄱ.호--몽양(夢陽):깨어나라
ㄴ.본관--함양(咸陽): 경남 함양
(2)학력
ㄱ.배재학당 --이승만 박사 후배
ㄴ.흥화학교
ㄷ.평양장로신학교
ㄹ.남경 금릉대학 영문학과
-각 학교 영어교사로 활동함
(3)경력
ㄱ.1918년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창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모델로 활동
여운형과 김규식선생이 주도하여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여 그 단체 모체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구성했다
ㄴ.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참여와 외교활동 참가
일본 동경과 모스크바등지에서 대한독립 호소 그리고 1920년도 이동휘등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레닌과 면담
ㄷ.1930년대 중순 경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사장 역임 그리고 조선체육회장 역임
ㄹ.1945년 8월 15일 전후 조선 건국동맹위원장 역임
ㅁ.1945년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여운형. 수상:박헌영. 내무장관:김구. 외무장관:김규식. 군사장관: 김원봉등으로 좌우익연합정부로 선포함
ㅂ.1945년 12월 조선인민당 당수
ㅅ.1946년 1월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의장
ㅇ.1946년 6월 김구식 여운형등의 주도로 좌우익합작운동과 남북통일정부 수립 추진 그리고 북쪽을 방문하여 김두봉 김일성등과 회담 그러나 남북협상 실패 그 후 노동당 참당 참가 거부 그리고 근로인민당 창당
-북한정부와 남로당 조직원들은 몽양선생을 보고 공산주의자가 아닌 기회적 사회주의자로 지칭하면서 미군정의 압잡이로 내몰았고 반민족주의자로 취급하면서 처단대상으로 취급함
ㅈ.1947년 7월 19일 종로구 혜화동 로타리(혜화동 카톨릭대 앞 로타리)에서 한지근(韓智根, 본명:이필형)에 의해 암살되었다
ㅎ.2005년 3월 1일 노무현정부 건국훈장 대통령상 서훈 부여
*夢陽(깨어나라) *夢--꿈 몽(夢) *陽--볕 양(陽)
(4)몽양 여운형선생과 외국지도자의 만남
ㄱ.미국 대통령 특사 찰스 크레인과 만남
ㄴ.레닌과 만남
ㄷ.손문과 만남
ㄹ.장개석과 만남
ㅁ.모택동과 만남

2.몽양 여운형선생의 연설문 "한국의 독립은 세계대세의 요구"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쓴 연설문
-1919년 3월 1일 우리민족의 열화같은 독립운동이 폭발되었을 당시 몽양 여운형씨는 일본정부의 신변보장을 받고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으로 상해에서 일본 동경에 갔다 여기에 수록된 웅변원고는 동년 12월 27일 일본 동경 제국호텔에서 한국인 유학생 각국 신문기자 다수의 인사 정치인등 500여명을 초청하고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일으킨 사실과 한국이 독립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토로한 역사적 기록이다-

내가 이번에 일본에 온 목적은 일본당국자와 그 밖에 사자를 만나 한국독립운동의 진의를 말하려 일본 당국의 의견을 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다행이 일본각원(日本閣員)들과 식자제군(識者諸君)들과 간격없이 의견을 교환하게 된 것은 유쾌하고 감사합니다
나는 독립운동이 내 평생 일입니다
구주전란(歐洲戰亂)이 일어난 때에 나와 우리 한국이 한 독립국가로서 대전(제1차대전)에 참가하지 못하고 동양 한 모퉁이에 쭈구리고 앉아 우두커니 방관만하고 있었던 것은 심히 유감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장래가 신세계 역사의 한 페이지는 반드시 오리라고 자신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표연히 고국을 떠나 상해의 모든 교회와 절(寺院)에서는 평화의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우리는 신의 사명이 머리 위에 내린듯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동지 김규식(김규식)을 파리에 보내고 3월 1일에 내지(內地)에서는 과연 운동을 힘차게 일으키어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습니다
이것이 곧 대한민국이 완전히 각성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굶주린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을 위하여 당연한 요구입니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습니까?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면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것입니까? 일본인이 있는 것을 한인(韓人)이 긍정하는 바요 한인(韓人)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神)이 허락한 바입니다
일본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이제 세계는 약소민족 해방과 노동자 해방등 세계개조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입니다 한국의 독립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입니다
건너집 새벽 닭이 울면 이웃 닭이 따라 우는 것은 닭 하나 하나가 다 울때를 기다렸다 때가 되어서 우는 것이요 남이 운다고 우는 것은 아닙니다
때가와서 생존권이 양심으로 발각 된 것이 한국 독립운동이요 결코 민족자결주의에 도취한 것이 아닙니다
신은 오직 평화행복을 우리 인간에게 주려합니다 과거의 약탈 살륙을 징계하고 세계를 개조하는 것이 신의 뜻입니다
세계를 개척하고 개조를 달려나아가 평화적 천지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조상은 칼과 총으로 서로 죽였으나 이후로는 서로 붙들고 도웁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신은 세계의 장벽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제 일본이 자유를 부르짖는 한인(韓人)에게 순전히 자기 이해만을 가지고 한국합병의 필요를 말했습니다
첫째 일본은 자기 방위를 위하여 한국을 합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제 무너진 이상 그 이유가 설립되지 않습니다 한국이 독립한 후에라야 동양이 참으로 단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독립은 실상에 있어서 일본의 이익이 될 것입니다
둘째로 <한국은 독립을 유지할 실력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병력이 없습니다 그러한 한족(韓族)은 이제 깨였습니다 열화같은 애국심이 이제 폭발하였습니다 붉은 피의 생명으로써 독립에 이바지 하려는 것을 무시할 수 있습니까?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면 한국은 다시 적(敵)은 없습니다 서쪽 나라 이웃인 중화민국은 확실히 한국과 친선할 것입니다 일본이 솔선해서 한국을 승인하는 날이면 한국은 마땅히 일본과 친선할 것입니다
우리의 건설국가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 인민이 다스리는 국가일 것입니다
이 민주공화국은 대한민족의 절대요구요 세계대비의 요구입니다
평화라는 것은 형식적 단결로서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이제 일본이 암만 첩첩이구(堞堞利口)로써 일지친선(日支親善)을 말하지만 무슨 이익이 있는가?
오직 정신적 단결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동양에서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 동양인이 이러한 경우에 서로 반목하는 것이 복된 일이겠습니까?
한국독립문제가 해결되면 중국문제도 용이하게 해결될 것입니다 일찌기 한국독립을 위하여 일청(日淸)전쟁과 일로(日露)전쟁을 한 일본이 한화(韓華) 두 민족이 일본을 원한하는 원인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국독립은 일본과 불리하는 듯 하나 원한을 버리고 동일한 보조를 취하여 함께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합일(合一)이요 동양평화를 확보하는 것이며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제일의 기초입니다 우리는 꼭 전쟁을 하여야 평화를 얻을 것입니다
일본이여! 깊이 생각할지어다.

2.김두봉.김일성등 북한 지도자들과 두 번째 만남 그리고 암살 과정 자료
(1)몽양은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회주의자었다
몽양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했고 개인의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우시장경쟁원리등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를 거부했다
(2)박헌영등이 주도하는 남로당 창당 참가 거부와 근로인민당 창당
(3)김규식과 함께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 노선 견지와 통일정부 수립 좌우합작운동 주도
(4)암살
ㄱ.좌파세력 암살사주
좌익통합정당과 좌익세력 통일전선 방해세력 인물로 지칭
ㄴ.우파세력 암살사주
남한단독정부 수립 방해 인물로 지칭
ㄷ.결론
몽양은 우남과 가까움 사이었고 그는 북쪽 소련군정보다는 남쪽 미군정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자로 공산주의 노선 노동당 창당 참가를 거부했고 북한단독정부 수립을 거부했다
몽양을 죽인 자는 국가사회주의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세력으로 알려지고 있다


3.몽양 여운형은 공산주의가가 아닌 사회주의자로 알려진 인물
그는 왜 암살되었는가
공산주의자는 자본주의 3대 원칙 개인의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시장경쟁원리등을 부정하고 있으며 사회주의자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개인의 사유재산과 영리추구, 자유시장경쟁원리등을 인정한 주자론자 입장에서 실용주의자 노선이다
몽양 여운형은 공산주의자 박헌영과 김일성보다는 사회민주주의자로 김규식 김두봉 노선을 옹호했고 그 과정에서 극단주의 공산주의자와 극우 반공주의자 중상 모략으로 암살되었다
몽양 여운형은 북쪽 소련군정보다는 남쪽 미군정을 선택했고 공산주의 마스-레닌주의보다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 노선 실용주의를 선택했다
몽양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입성하기 전에 박헌영과 더불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보다는 이승만선생을 옹호했고 일제말기 자치정부 노선 조선총독부를 인정했다 조선인민공화국 선포때 대통령은 이승만, 부통령 여운형, 수상 박헌영, 내무장관 김구, 외무장관 김규식, 군사장관 김원봉등으로 영입하여 공개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미소의 거부로 좌절되었고 한국독립이 신탁통치냐 반탁이냐 싸움 중에 죽었다 그는 남과 북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미국과 소련 도움을 요청했고 평양방문으로 김두봉.김일성등 북한지도자들을 두번 만났다

4.몽양 여운형선생의 자료
(1)21세기 아시아의 거목, 몽양 여운형
몽양의 진보 이념으로 아시아연대와 남북 좌우합작의 새로운 지평 열어야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8095§ion=section1
아마도 20세기 한국 근대사에서 명멸했던 수 많은 인물들 중에 몽양만큼 그 정치적 이념의 색채를 놓고 많은 논란에 쌓였던 사람도 없을 것이다
박헌영 김일성계의 공산주의자들로부터는 미국의 주구 협력자. 전형적 기회주의자요 자유주의자라는 딱지로 몽양 여운형을 몰아세웠고 한민당 우익으로부터는 음흉하게 위장하고 있는 빨갱이. 김일성과 한통속에라는 저주를, 김구등의 우익 민족주의자들로부터는 일제의 주구와 협력자라는 욕까지 들어먹었다
(2)여운형암살 계획범죄
http://www.minjok.com/news/news.php3?category=pltc&code=26547
1982년 김두환의 월간조선 회고에 따르면 평북 영변출신으로 월남한 21살의 이필영을 한지근이라는 가명으로 바꾸고 암살 전날 권총을 주었다 암살 후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자신을 불러 왜 몽양을 죽여서 시끄럽게 만들었냐며 꾸중을 들었다고 했다
(3)좌우익을 넘나든 항일영웅의 아들 김두한, 그러나 미워하기 힘든
http://h21.hani.co.kr/section-021075000/2002/11/p021075000200211060433042.html
김두환은 회고록에서 여운형을 암살한 한지근에게 자신에 권총을 주었다고 하였으나 여운형 암살이 일어난 1947년 7월은 김두한이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풀려나지는 못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이니 이 또한 사실과 다른 암살 영웅담
(4)백의사(白衣社) 총사령관 염응택(염동진)
http://www.pajooyom.com/eungtaek.htm
여운형 범인은 한지근이라는 젊은이였다 이성열과 CIC에 출입하던 정치인 양인 신동운을 통해 아는 사이였다 실리보고서는 여운형 암살에 백의사가 개입했으리라고 시사하고 있지만 이씨는 이를 부인했다
(5)묘소 뒤 훤출한 홍송에서 몽양의 기게 느꺼질 뿐
http://www.khistory.or.kr/visit/read.asp?num=16&page=1
당시 경찰은 한지근(본명:이필형)이 단독범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공소시효가 끝난 1974년 김홍성. 김영성 형제와 김훈. 유용호 네 사람이 자신들이 몽양을 죽었다고 밝혔다
암살이유는 몽양이 좌우합작운동을 하고 평양을 여러 차례 다녀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들은 당시 경찰도 암살 사실을 알고 있었고 범행 후에도 경찰은 자신들과 타협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암살의 몸통에 대해선 끝내 입을 다물었다
김규식 박사의 서기를 지냈던 신기언선생은 사건이 일어나기전 프랑스 영사관에서 열린 소연화회에 참가했다가 돌아오는 승용차체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몽양을 제거함으로써 혼란된 정국을 수습하고 북조선의 노선을 지지하는 다른 사람들도 정신 차리게 하라는 하지의 지령을 받았다>
5.결론
노무현정부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공존 열린정부를 표방하고 있다 남과 북이 단일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해방전후 역사 인물들의 재평가 필요하다 북한정부가 수평적 권력교체만 되더라도 좌익계 평가가 새로운 입장에서 서술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북한정부내 한국전쟁 책임자와 각종 의혹사건들을 북한 신정부의 등장으로 의회청문회 조사로 규명될때 김일성 김정일직계세력이 항구적으로 제거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구소련이나 동구권등 역사에서도 이런 과정을 걸치면서 통일국가나 자유국가로 나아가게 되었다
북한정부의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될수록 김일성 가계 중심의 우상화 신격화 역사가 아닌 북한 역사교과서 있는 그대로 서술되어갈 것으로 본다 그리고 김일성 김정일정부때 대북투자세력이나 대남직계세력이 제거될 것이며 세력 재개편이 일어날 것으로 미국정부는 내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