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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지능(I=intelligence)센타:박정희 전(前)대통령 생애(生涯)와 제5대 대통령 취임사 "생각하는 국민! 일하는 국민! 협조하는 국민이 되자!"연 본문
대한민국 전직대통령 자료
동아시아 지능(I=intelligence)센타:박정희 전(前)대통령 생애(生涯)와 제5대 대통령 취임사 "생각하는 국민! 일하는 국민! 협조하는 국민이 되자!"연
CIA Bear 허관(許灌) 2006. 8. 7. 14:081.박정희 전(前)대통령 생애(生涯)
박정희(朴正熙) 전(前)대통령은 고령박씨 28세손 부친 박성빈(朴成彬,46세).수원백씨 모친 백남의(白南義, 45세) 사이에서 7남매 5형제의 막내둥이로 1917년 음력 9월 30일(양력: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부락(현주소:경북 구미시 상모동)에서 중농(中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성(姓)은 고령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정희(正熙)이고 호는 중수(中樹)이다 본래 그의 선조는 고령에서 성주로 이사하였다가 1914년 현 위치인 경북 구미시 상모동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대구사범대학교를 졸업한 뒤 1940년까지 문경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1942년부터 1944년 만주 신장(新京: 지금의 장춘) 군관학교를 거쳐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38도선 이북 조선총독부 관동군사령부 소위로 임관하였다(조선총독부 군대는 38도선 이북 관동군사령부와 38도선 이남 조선군사령부로 나누어 주둔하였고 그 중 관동군사령부는 대소참전 군대로 만주와 소만국경선에 배치되어 전투했으며 조선군사령부는 태평양참전군대로 태평양과 동남아지역 배치되어 전투를 했다 본래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정세에 따라 동요가 강하게 나타나는 조선군 자치부대로 바라보면 정확하다) 그는 그 뒤 관동군에 근무하다가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 독립군(광복군) 귀순하여 한국으로 귀환 후 한국군에 들어가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前身) 2기생으로 졸업하고 육군대위로 임관 하였다
1949년 여수. 순천반란 사건과 관련되어 공산주의 혐의로 군법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만주군관학교 군 선배, 동료등의 구명운동으로 석방 예편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소령으르 군에 복귀하여 육군정보국 작전정보과장, 제9사단 참모장을 거쳐 소장으로 승진하였다
1959년 서울군관구사령관, 1960년 부산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 할 당시 4.19혁명을 지지하였고 그 후 군(軍) 정풍운동 주도를 하다가 2군부사령관으로 있던 1961년 김종필 소령등을 비롯한 육사 8기생 장교 중심으로 5.16군사혁명을 일으켰다
군사혁명위원회(병정분리주의로 국가원수는 윤보선전대통령이며 군 총사령관은 박정희 소장)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고 의장에 취임한 박정희는 2년 7개월간 군정을 실시하여 정치. 사회개혁, 경제개발계획 관철등 조국 근대화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는 군의 정치적 중립을 준수하지 못하고 군이 직접 정치를 장악하여 실행하는 장군 반공 민주주의를 내세워 1963년 대장으로 예편하고 민정에 참여하여 민주공화당 총재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 윤보선 전대통령을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는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미국의 군사원조와 일본의 경제원조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미국과 유대를 강화하는 한편 1965년에는 6.3사태등 국민의 반대를 무릎쓰고 한일국교를 정상화 시켜 대일청구권 자금을 이끌어냈으며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 전쟁에 국군을 파병하였다
또한 1962년 사회주의 경제모델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일본자금과 차관등을 들여와 산업기지, 수출드라이브 정책등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국민의 절대빈곤을 해소하였고 도시와 농촌의 빈부격차를 없애기 위한 <사회주의 운동 집단동원 건설 새마을 운동>을 펼치는 등 과감한 경제성장 정책을 실시하였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었으며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하고 포항제철, 지하철등을 건설 한국 경제를 고도성장 궤도에 올려 놓음으로써 한국은 개발도상국 가운데 가장 빠른 발전을 이룩한 공업국가의 하나가 되었다
3선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의 길을 연 박정희 대통령은 김대중 신민당 후보와 맞서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고 1972년 7월 남북대화를 추진하여 <남북공동선언>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박정희정부의 3선개헌으로 고위층 공무원들의 부패 만연, 노력동원 경제한계(새마을 운동),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저항하는 노동운동 그리고 교련과목 도입등으로 대학자율권 침해와 학생운동, 일부권력층과 재벌중심의 경제독점에 대한 우려로 충산층들의 자유화 개방화 확대와 민주화 요구, 민주화 투쟁으로 야당의 약진, 외채상환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 중국과 미국 수교와 중.미.일 안보결속력 강화등으로 닉슨독트린을 둘러싼 주한미군 철수 문제, 중국과 미국수교. 일본과 중국 수교이후 북한의 군사적 모험주의적 대남전략에서 남한 진보세력 중심의 당(통일혁명당)건설 입장으로 전환함으로 국내외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72년 10월 정당 및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뒤 유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8대 대통령이 당선되어 <유신시대>에 들어갔다
그는 개인자유의 제한<장발금지와 초등학교 학생들의 등.하교때 깃발로 줄 세워 다니기 운동, 초등학교 학생들의 거름이나 옛날 물품 모으기 운동, 주민감시 5호담당제 실시, 중학교와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체력단련 과목과 교련 도입으로 총검술등>, 언론 및 야당에 대한 탄압, 사법제도 및 대학통제등으로 반독재를 부르짖는 국민의 저항이 거세어지자 <대통령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민주화 요구와 경제적으로 소외된 국민들의 생존권 요구를 억압하였다
1974년 8월 15일 조총련계 문세광의 저격으로 부인 육영수여사를 잃었고 1977년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과 김형욱 전(前) 중앙정보부장의 미국 의회증언과 박정희정부 비화(秘話) 김형욱 회고록 출간등으로 국제적 스캔들에 휘말렸으며 1970년대 후반에는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주국방을 위해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였다
그의 군인적인 우국충정, 상의하달식 강권지배와 국가재건국민운동, 새마을운동등은 경제성장에 큰 힘을 발휘했으나 장기독재로 인해 부정부패(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과 그 줄 앞잡이 말단공무원들의 부정부패 만연), 빈부격차등 사회적 모순과 갈등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유신정부 말기때에서는 박씨들의 권력독점과 공화당 하부 장악, 강제적 동원 거름모으기 운동이나 깃발로 등.하교 줄서기 운동등으로 초등학교학생들까지 독재반대운동과 인권탄압에 항거하는 분위기었다
1979년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비판한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을 박탈하자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지지기반이던 부산. 마산지역을 중심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10.26사변가 발발 한달 이전에 김형욱 전(前)중앙정보부장이 피살됨으로 미국. 프랑스등의 국가차원의 반(反)박정희 분위기가 되었다
부마항쟁과 김형욱 피살등 처리를 놓고 강경파 차기철 경호실장과 온건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갈등 끝에 그는 오랜 측근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에 생애를 마감했다
박정희전대통령은 개발독재의 그늘 아래 정경유착과 일그러진 군사문화 유산을 남기는 등 한국사회 경제구조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억압하였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으나 한국근대화와 경제적 성장을 위한 일념으로 고뇌한 대통령 경부 고속도로를 세우고 포항제철을 세우는 등 조국 발전의 탄탄대로를 닦아 오늘의 세계 속 경제 강국 한국이 있게 한 위대한 지도자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는 전두환정부의 자유화 개방화정책으로 우리식 사회주의 노선 새마을운동이 허구라는 사실을 입증함으로 경제적 평가도 별 가치가 없다는 입장이다
자유화 개방화 국가일때는 1인당 GDP 1만달러가 될 수 있으며 우리식 사회주의 운동 새마을 운동으로는 1인당 GDP 1백달러 수준 나라 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선진국과 오늘의 중국 경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북한등의 우리식 사회주의 노선 나라들은 아직도 가난한 나라로 있다
새마을운동은 소비가 투자가 아니라 저축이 투자라는 경제원칙으로 우리식 사회주의 노선이다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국가에서는 저축이 투자가 아닌 소비가 투자라는 경제원칙으로 국가를 운영함으로 급진적 경제성장과 고도소비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요즘도 일부 세력 중에서는 지방자치제도 폐지와 대통령 지방자치단체장 임명, 장발금지과 교련과목 추가, 인간중심의 법에서 국가와 지도자 중심의 법.영어과목 폐지와 유신헌장 외우기(유신법관-유신사법시험), 소비억제와 저축권장, 봉쇄경제와 우리식 경제운동 추구, 독자적 핵무기 개발과 자주국방등을 내세우는 분도 있다 우리는 이들을 보고 국가사회주의자 유신 아류라고 한다
*유신정부에서는 사법 시험과목에 영어등 외국어 과목이 없었다 왜냐하면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영어등 외국어 과목을 시험과목으로 추가하지 않았다 전두환정부부터 외국어 과목을 사법고시 1차시험 과목으로 신설했다
1917년 11월 14일 경북 구미 출생
1937년 대구사범학교 졸업
1937년-1940년 문경소학교 교사 역임
1942년-1944년 만주군관학교 졸업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1944년-1945년 8월 일본 육군 소위와 중위로 근무
1945년 8월-1946년 광복군으로 귀순과 귀환 그리고 한국군으로 편입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前身) 제2기로 졸업
1946년 육군 대위 근무
1949년 여수.순천 군사반란 가담 혐의로 사형. 무기, 무고혐의로 무죄석방 예편
박정희 대위가 남로당 군사부장이라는 밀고로 체포되어 사형. 무기 징역에서 나중에는 무고혐의로 인정되어 무죄로 석방 후 군 예편(박정희가 일본군에서 김구계열 독립군으로 귀순함으로 김구와 만주 항일운동계열과 그의 형 박상희의 대구 폭동 가담등으로 낙인 찍혀 그것이 남로당 군사부장으로 몰렸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으로 육군정보국 제1과장으로 복귀
1953년 육군준장
1955년 제5사단장
1957년 제7사단장
1958년 육군소장
1960년 육군 군수기지 사령관. 육본 작전참모부장
1961년 제2군 부사령관 재직 중 5.16군사혁명(군사구데타) 주도
윤보선 전(前)대통령께서 군인들의 의거를 합법적으로 인정했다는 측면에서는 혁명이며 대한민국 헌법전문을 전면적으로 삭제와 수정했다는 측면에서는 반란으로 보고 있다 헌법전문은 대한민국 제헌 헌법때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제2공화국에서 조차도 수정하지 못했다 제헌헌법은 헌법 제정과정과 국회의장 이승만을 기록하고 있다 제2공화국 헌법도 증보식 헌법모델이었다
그런데 제3공화국 헌법은 헌법전문을 삭제함으로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을 부정하는 입장의 헌법임으로 군사반란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전문은 대한민국 건국 정통성과 제헌헌법 선포등을 예시하고 있다
1961년-1963년 제2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62년-1963년 대통령 직무대행
1962년 내각수반
1963년 육군대장 예편
1963년-1979년 제2대 민주공화국 총재
1963년-1967년 제5대 대통령 역임
1967년-1971년 제6대 대통령 역임
1971년-1972년 제7대 대통령 역임
1972년 헌정중단과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유신헌법--국가사회주의 헌법 선포)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등.하교때 줄서기와 박정희 대통령 개인 우상화. 신격화 노래 배우기 운동,초등학교 학생도 풀베기와 퇴비 만들기 운동 참가 그리고 중.고등학교부터 군사교육(체력단련과 교련)등
-북한 체제와 비슷한 모델(국가사회주의 운동)
1972년-1978년 제8대 대통령 역임
1978년-1979년 제9대 대통령 역임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피격 사망
(1)성(姓)과 이름
ㄱ.성(姓)-고령(高嶺) 박씨(朴氏)
ㄴ.이름--정희(正熙): 바르게 빛나는 것
(2)호--중수(中樹): 숲
(3)출생지---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부락
(4)생년월일--1917년 9월 30일(음력). 1917년 11월 14일(양력)
부친 박성빈(46세)과 모친 백남의(45세) 사이에서 태어난 늦둥이.
(5)가족관계---육영수 사이에 2녀 1남 출생
육영수(陸英修, 1925-1974)여사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부인이다
그녀는 충청북도 옥천(沃川)에서 부잣집 딸로 태어나 1942년 배화여고를 졸업한 뒤 옥천여자중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1950년 부산에 피란 갔을때 8살 연상 남자 육군 중령 박정희와 결혼하였다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각종 사회. 육영사업에 힘써 양지회(陽地會)를 결성하고 고아와 노인등 불우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또한 남산이 어린이회관, 능동(陵洞). 구의동(九宜洞) 일대에 어린이대공원을 조성하였고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를 발간하였다 또한 정수직업훈련원을 설립하는 등 사회복지사업에 앞장섰고 적십자활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자연보존협회 총재등을 지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문세광(文世光)에게 저격당했다 정례는 국민당으로 치러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2.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 제6대 대통령 박정희전(前)대통령 취임사 연설문 "생각하는 국민! 일하는 국민! 협조하는 국민이 되자!"
(연설문)
단군선조가 천혜의 강토 위에 국기(國基)를 닦으신지 반만년 연연히 이어온 역사와 전통 위에 이제 새 공화국을 바로 세우면서 나는 국헌을 준수하고 나의 신명을 조국과 민족 앞에 바칠 것을 맹세하면서 겨레가 쌓은 이 성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삼천만 동포들이여!
나는 영예로운 제3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이 중대한 시기에 나를 대통령으로 취임케 하여 주신 국민 여러분엑세 감사드리면서 보람있는 이 날의 조국을 보전하기에 생명을 바치신 순국 선열과 공산침략에서 나라를 지키온 충용스러운 전몰장병 그리고 독재에 항거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한 영웅적인 4월혁명의 영령 앞에 나의 이 모든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한편 나는 국내외로 매우 중요한 이 시기에 대통령의 중책을 맡게 됨에 그 사명과 책무가 한없이 무거움을 깊이 통감하고자 자주와 자립과 번영의 내일로 향하는 민족의 우렁찬 전선(戰線)의 대오(隊五) 앞에 겨레의 충성스러운 공복(公僕)이 될 것을 굳게 다짐하는 바입니다
아시아의 동쪽에 금수강산이라 불리우는 한반도에 선조의 거룩한 창국(創國)의 뜻을 받아 찬란한 문화로 지라난 배달의 겨레가 5천년의 역사를 지켜 온 이 땅이 우리들의 조국입니다
한 핏줄기 이민족의 가슴 속에 붉은 피용솟음치는 분발의 고동과 약진의 맥박은 결코 먼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세기의 고된 역경을 밟았으되 일본제국주의에 항쟁한 3.1독립정신은 조국과 광복을 쟁취하였고 투철한 반공의식은 6.25동란에서 공산침략을 분쇄하여 강토를 보위(保衛)하였으며 열화(熱火) 같은 민주주의 신념을 4월혁명(4.19혁명)에서 독재를 물리쳐 민주주의를 수호하였고 5월혁명(5.16혁명)으로 부패와 부정들 배격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되찾아 오늘 여기에 우람한 새 공화국을 건설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당면한 현실은 목적지 도달의 안도(安堵)가 아니며 준험(峻險)한 노정에의 새 출발인 것입니다
4월혁명(4.19혁명)으로부터 비롯되어 5월혁명(5.16혁명)을 거쳐 발전된 1960년대 우리 세대의 한국이 겪어야만 할 역사적 필연의 과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 걸쳐 조국의 근대화를 촉성(促成)하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우리는 조성된 계기를 일실(逸失)함이 없이 성공적으로 이 과업을 성취시키는데 범국민적인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여기 3.1운동 정신을 반들어 4.19혁명과 5.16혁명 이념을 계승하고 당위적(當爲的)으로 계기된바 민족적인 제 과제 수행할 것을 목표로 나는 오늘의 뜻 깊은 자리를 빌려 일대 혁신운동을 제창하는 바이며 이 범국민적 혁명대열에 적극적 호응과 열성적인 참여 있기를 호소하는 바입니다
격동하는 시대 전황의 시점에서 치욕과 후진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오늘의 시대에 생존하는 우리들의 생명을 건 희생적 노력을 다하지 않는한 내 조국 내 민족의 역사를 뒤업는 퇴영(退瓔)의 먹구름은 영원히 걷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적 자주와 경제적 자립 사회적 융화안정을 목표로 대혁신운동을 추진함에 있어서 우라는 먼저 개개인의 정신적 혁명을 전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국민은 한 개인으로부터 자주적 주체의식을 함양하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쳑한다는 자주자조의 정신을 확고히 하고 이 땅에 민주와 번영! 복지사회를 건설하기에 민족적 주체성과 국민의 자발적 적극 참여의식 그리고 강인한 노력의 정신적 자세를 바로 잡아야 하겠습니다
불의와의 타협을 배격하며 부정부패의 소인(小人)을 국민 스스로가 절개 청산해야 하겠습니다 탁월한 지도자의 정치적 역량이나 그의 유능한 정부라 할지라도 국민 대중의 전진적 의욕과 건설적 협조없이는 국가사회의 안정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들의 최대의 적(敵)은 선거과정에서의 상대정적이나 대립정당도 아니며 바로 비협조와 파쟁으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 그 자체인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 대 혁신운동의 정치적 목표의 일환으로 정치적 정화운동을 통한 새로운 차원의 정치활동 향상을 실현하고 국가 공동 목적을 위한 협조의 전통을 세워 나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중단도 후퇴도 지체의 여유도 없습니다 방관과 안일 요행과 기적을 바라며 공론과 파쟁으로 끝끝내 국가를 쇠잔케한 곤욕의 과거를 되풀이 할수는 업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정치제도 운용의 역사가 얕다거나 시행착오라고 하기에는 또 다시 강력정치를 빙자한 독재의 등장도 민주주의를 도용한 무능부패의 재현도 당연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하한 이유에서도 성서를 읽는다는 명목아래 촛불을 훔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새공화국의 대통령으로써 나는 국민 앞에 군림하여 지배하려함이 아니요 겨레의 충복으로 봉사하려는 것입니다 시달리고 피곤에 지쳐가는 동표를 일깨워 용기를 돋우며 정의 깊은 대중의 벗으로 격려와 의논과 설득으로 분열과 낙오없는 대오의 향도가 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민의 지워 준 멍에를 성실하게 매고 이끌어 고난의 가시밭을 헤쳐 새공화국의 진로를 개척해 나갈 것입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선거에서 패배한 소수자의 의견을 존중하고 또 그를 보호하는데 더욱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선거에서 승리한 집권당이 평면적 다수의 결방식을 근거로 만능우월 의식에서 독선과 횡포를 자행하며 소수의 의사를 유린할때 이 나라 민주주의 전도에는 또 다른 비극의 씨가 배태될 것입니다
또 일방진부한 관록이나 허망한 권위의식에서 대국을 망각한 소아병적 도발로 정쟁을 벌리고 정국을 어지럽히며 사회를 혼란시킨다면 이 나라는 또 다시 역사의 뒤로 후퇴하는 슬픈 결말을 초래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세와 책임을 수반하는 민주적 정치질서를 확립해가면서 대중의 이익에 벗어나는 정치적 처사에 대하여는 정당한 비판과 당당히 반대할 수 있는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본인과 새 정부는 정치적 활동양식에 있어서 보다 높은 윤리규범을 정막하여 극열한 증오감과 극단적 대립의식을 불식하고 여.야의 협조를 통해 의정의 질서와 상궤를 바로 잡는 것이며 유혈보복으로 점철된 역사적 악유산을 청산하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한 복수정당의 발자(發刺)한 경쟁과 신사적 정책 대결의 정치 풍토 조성에 선도적 역할을 다할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몇 사람의 지도자나 특수계급의 교양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각과 책임 그리고 상호의 타협과 관용을 통한 사회적 안정 속에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국민은 질서 속에서 살며 정부로부터 시혜(施惠)를 기대하기에 앞서 스스로 의무를 다하며 때늦은 후회 이전에 현명하고 과감하게 권리의 지위를 도모하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또는 대국적 안목과 이성적 통찰로써 초가삼칸의 소실을 초래하는 우(愚)를 범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질서와 번영 있는 사회에 영광된 새 공화국 건설의 기지를 높이들고 다시는 퇴영과 빈곤이 없는 내일의 조국을 기약하면서 나는 오늘 사랑하는 동포 앞에 다시 한번 민족의 단합을 호소하는 바입니다
지금 우리는 조국의 근대화라는 막중한 과업을 앞에 두고 불화와 전쟁과 분열로 정체(停滯)와 쇠잔을 되풀이 할 것인가 아니면 친화와 협조와 단합으로 민족적인 공동의 광장에서 새로 대오를 정비할 것인가의 기로에 선 것입니다
또한 한 핏줄기의 겨레 우리는 이미 운명을 함께 한 같은 배에 탄 것입니다 파쟁과 혼란으로 표류와 난파를 초래하는 것도 협조와 용기로써 희망의 피안(彼岸)에 닻을 내리는 것도 오로지 우리들 스스로의 결의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동포 여러분의 현명한 결단과 용맹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오늘 역사적인 새 공화국 탄생에 성전에 임해 이 날에 환희를 함께 하지 못하며 자칫 우리의 뇌리에서 소원(疎遠)해가 쉬운 복한 1천만 동포의 노예상태에 대해 이 땅에서 자유를 향유하는 우리들의 경각을 높이하고자 합니다
본인과 새 정부는 안으로는 조속히 건실한 경제와 사회적 토대를 이룩하고 현 군사력 유지와 발전을 포함한 단합된 민족의 힘을 결속할 것이며 밖으로는 유엔과 자유우방 그리고 전 세계 자유애호 인민들과 유대를 공고히 하여 여하한 상황과 조건하에서도 공산주의에 대항 승리할 수 있는 민주적 역량과 민족진영의 내실을 기하여 우리의 숙원인 민족통일의 길로 매진할 것입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우리가 당면한 현실적인 제문제를 일일히 논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제문제를 비롯한 난국타개의 숙제는 이미 공약을 통해 자청한바 있으며 신정부는 이를 위하여 능률적인 태세로써 문제해결에 임할 것입니다
시급한 민생문제의 해결 그리고 민족자립의 지표가 될 경제개발 10개년 계획의 합리적 추진은 중대한 국가적 과제로써 여야 협조와 정부, 국민간의 일치 단합된 노력으로써 그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운 목표를 향하여 인내와 자중으로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나가는 근로정신의 소박한 생활인으로 돌아가 항상 성급한 기대의 후면에는 허무한 낙망 이상 접함을 명심하고 착실한 성장을 꾀하는 경제국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여기에 우람한 새 공화국의 아침은 밝았습니다
침체와 우울 혼돈과 방황에서 우리 모든 국민은 결연히 벗어나 "생각하는 국민" "일하는 국민" "협조하는 국민"으로 제기합시다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세로서 희망에 찬 우리의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갑시다
끝으로 하느님의 가호 속에 탄생되는 새 공화국의 전도에 영광 있기를 빌며 이 식전에 참석하신 우방 벗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함과 아울러 동포 여러분의 건투와 행운 있기를 축원하는 바입니다(끝:1963.12.17)
<연설 자료 요약>
-일본제국주의에 항쟁한 3.1독립운동은 조국과 광복을 쟁취하였고 투철한 반공의식은 6.25동란에서 공산침략을 분쇄하여 강토를 보위 하였으며 열화같은 민주주의 신념은 4월혁명(4.19혁명)에서 독재를 물리쳐 민주주의를 수호하였고 5월혁명(5.16혁명)으로 부패와 부정을 배격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되찾아 오늘 여기에 우람한 새 공화국을 건설하기에 이른 것입니다(제3공화국 건국 노선)
-국민은 한 개인으로부터 자주적 주체의식을 함양하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다는 자주 자조의 정신을 확고히 하고 국민의 자발적 적극 참여의식(1980년 북한 주체사상의 태동 내용)
-전세계 자유애호 인민들과 유대를 공고히 하여 여하한 상황과 조건하에서도 공산주의에 대항 승리할 수 있는 민주적 역량과 민족진영의 내실을 기하여 우리의 숙원인 민족통일의 길로 매진(인민 용어 사용)
박정희(朴正熙) 전(前)대통령은 고령박씨 28세손 부친 박성빈(朴成彬,46세).수원백씨 모친 백남의(白南義, 45세) 사이에서 7남매 5형제의 막내둥이로 1917년 음력 9월 30일(양력: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부락(현주소:경북 구미시 상모동)에서 중농(中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성(姓)은 고령 박씨(朴氏)이고 이름은 정희(正熙)이고 호는 중수(中樹)이다 본래 그의 선조는 고령에서 성주로 이사하였다가 1914년 현 위치인 경북 구미시 상모동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대구사범대학교를 졸업한 뒤 1940년까지 문경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1942년부터 1944년 만주 신장(新京: 지금의 장춘) 군관학교를 거쳐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38도선 이북 조선총독부 관동군사령부 소위로 임관하였다(조선총독부 군대는 38도선 이북 관동군사령부와 38도선 이남 조선군사령부로 나누어 주둔하였고 그 중 관동군사령부는 대소참전 군대로 만주와 소만국경선에 배치되어 전투했으며 조선군사령부는 태평양참전군대로 태평양과 동남아지역 배치되어 전투를 했다 본래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정세에 따라 동요가 강하게 나타나는 조선군 자치부대로 바라보면 정확하다) 그는 그 뒤 관동군에 근무하다가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 독립군(광복군) 귀순하여 한국으로 귀환 후 한국군에 들어가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前身) 2기생으로 졸업하고 육군대위로 임관 하였다
1949년 여수. 순천반란 사건과 관련되어 공산주의 혐의로 군법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만주군관학교 군 선배, 동료등의 구명운동으로 석방 예편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소령으르 군에 복귀하여 육군정보국 작전정보과장, 제9사단 참모장을 거쳐 소장으로 승진하였다
1959년 서울군관구사령관, 1960년 부산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 할 당시 4.19혁명을 지지하였고 그 후 군(軍) 정풍운동 주도를 하다가 2군부사령관으로 있던 1961년 김종필 소령등을 비롯한 육사 8기생 장교 중심으로 5.16군사혁명을 일으켰다
군사혁명위원회(병정분리주의로 국가원수는 윤보선전대통령이며 군 총사령관은 박정희 소장)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고 의장에 취임한 박정희는 2년 7개월간 군정을 실시하여 정치. 사회개혁, 경제개발계획 관철등 조국 근대화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는 군의 정치적 중립을 준수하지 못하고 군이 직접 정치를 장악하여 실행하는 장군 반공 민주주의를 내세워 1963년 대장으로 예편하고 민정에 참여하여 민주공화당 총재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 윤보선 전대통령을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는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미국의 군사원조와 일본의 경제원조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미국과 유대를 강화하는 한편 1965년에는 6.3사태등 국민의 반대를 무릎쓰고 한일국교를 정상화 시켜 대일청구권 자금을 이끌어냈으며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 전쟁에 국군을 파병하였다
또한 1962년 사회주의 경제모델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일본자금과 차관등을 들여와 산업기지, 수출드라이브 정책등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국민의 절대빈곤을 해소하였고 도시와 농촌의 빈부격차를 없애기 위한 <사회주의 운동 집단동원 건설 새마을 운동>을 펼치는 등 과감한 경제성장 정책을 실시하였다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었으며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하고 포항제철, 지하철등을 건설 한국 경제를 고도성장 궤도에 올려 놓음으로써 한국은 개발도상국 가운데 가장 빠른 발전을 이룩한 공업국가의 하나가 되었다
3선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의 길을 연 박정희 대통령은 김대중 신민당 후보와 맞서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고 1972년 7월 남북대화를 추진하여 <남북공동선언>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박정희정부의 3선개헌으로 고위층 공무원들의 부패 만연, 노력동원 경제한계(새마을 운동),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저항하는 노동운동 그리고 교련과목 도입등으로 대학자율권 침해와 학생운동, 일부권력층과 재벌중심의 경제독점에 대한 우려로 충산층들의 자유화 개방화 확대와 민주화 요구, 민주화 투쟁으로 야당의 약진, 외채상환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 중국과 미국 수교와 중.미.일 안보결속력 강화등으로 닉슨독트린을 둘러싼 주한미군 철수 문제, 중국과 미국수교. 일본과 중국 수교이후 북한의 군사적 모험주의적 대남전략에서 남한 진보세력 중심의 당(통일혁명당)건설 입장으로 전환함으로 국내외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72년 10월 정당 및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뒤 유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8대 대통령이 당선되어 <유신시대>에 들어갔다
그는 개인자유의 제한<장발금지와 초등학교 학생들의 등.하교때 깃발로 줄 세워 다니기 운동, 초등학교 학생들의 거름이나 옛날 물품 모으기 운동, 주민감시 5호담당제 실시, 중학교와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체력단련 과목과 교련 도입으로 총검술등>, 언론 및 야당에 대한 탄압, 사법제도 및 대학통제등으로 반독재를 부르짖는 국민의 저항이 거세어지자 <대통령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민주화 요구와 경제적으로 소외된 국민들의 생존권 요구를 억압하였다
1974년 8월 15일 조총련계 문세광의 저격으로 부인 육영수여사를 잃었고 1977년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과 김형욱 전(前) 중앙정보부장의 미국 의회증언과 박정희정부 비화(秘話) 김형욱 회고록 출간등으로 국제적 스캔들에 휘말렸으며 1970년대 후반에는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주국방을 위해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였다
그의 군인적인 우국충정, 상의하달식 강권지배와 국가재건국민운동, 새마을운동등은 경제성장에 큰 힘을 발휘했으나 장기독재로 인해 부정부패(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과 그 줄 앞잡이 말단공무원들의 부정부패 만연), 빈부격차등 사회적 모순과 갈등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유신정부 말기때에서는 박씨들의 권력독점과 공화당 하부 장악, 강제적 동원 거름모으기 운동이나 깃발로 등.하교 줄서기 운동등으로 초등학교학생들까지 독재반대운동과 인권탄압에 항거하는 분위기었다
1979년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비판한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을 박탈하자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지지기반이던 부산. 마산지역을 중심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10.26사변가 발발 한달 이전에 김형욱 전(前)중앙정보부장이 피살됨으로 미국. 프랑스등의 국가차원의 반(反)박정희 분위기가 되었다
부마항쟁과 김형욱 피살등 처리를 놓고 강경파 차기철 경호실장과 온건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갈등 끝에 그는 오랜 측근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에 생애를 마감했다
박정희전대통령은 개발독재의 그늘 아래 정경유착과 일그러진 군사문화 유산을 남기는 등 한국사회 경제구조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억압하였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으나 한국근대화와 경제적 성장을 위한 일념으로 고뇌한 대통령 경부 고속도로를 세우고 포항제철을 세우는 등 조국 발전의 탄탄대로를 닦아 오늘의 세계 속 경제 강국 한국이 있게 한 위대한 지도자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는 전두환정부의 자유화 개방화정책으로 우리식 사회주의 노선 새마을운동이 허구라는 사실을 입증함으로 경제적 평가도 별 가치가 없다는 입장이다
자유화 개방화 국가일때는 1인당 GDP 1만달러가 될 수 있으며 우리식 사회주의 운동 새마을 운동으로는 1인당 GDP 1백달러 수준 나라 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선진국과 오늘의 중국 경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북한등의 우리식 사회주의 노선 나라들은 아직도 가난한 나라로 있다
새마을운동은 소비가 투자가 아니라 저축이 투자라는 경제원칙으로 우리식 사회주의 노선이다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국가에서는 저축이 투자가 아닌 소비가 투자라는 경제원칙으로 국가를 운영함으로 급진적 경제성장과 고도소비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요즘도 일부 세력 중에서는 지방자치제도 폐지와 대통령 지방자치단체장 임명, 장발금지과 교련과목 추가, 인간중심의 법에서 국가와 지도자 중심의 법.영어과목 폐지와 유신헌장 외우기(유신법관-유신사법시험), 소비억제와 저축권장, 봉쇄경제와 우리식 경제운동 추구, 독자적 핵무기 개발과 자주국방등을 내세우는 분도 있다 우리는 이들을 보고 국가사회주의자 유신 아류라고 한다
*유신정부에서는 사법 시험과목에 영어등 외국어 과목이 없었다 왜냐하면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영어등 외국어 과목을 시험과목으로 추가하지 않았다 전두환정부부터 외국어 과목을 사법고시 1차시험 과목으로 신설했다
1917년 11월 14일 경북 구미 출생
1937년 대구사범학교 졸업
1937년-1940년 문경소학교 교사 역임
1942년-1944년 만주군관학교 졸업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1944년-1945년 8월 일본 육군 소위와 중위로 근무
1945년 8월-1946년 광복군으로 귀순과 귀환 그리고 한국군으로 편입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前身) 제2기로 졸업
1946년 육군 대위 근무
1949년 여수.순천 군사반란 가담 혐의로 사형. 무기, 무고혐의로 무죄석방 예편
박정희 대위가 남로당 군사부장이라는 밀고로 체포되어 사형. 무기 징역에서 나중에는 무고혐의로 인정되어 무죄로 석방 후 군 예편(박정희가 일본군에서 김구계열 독립군으로 귀순함으로 김구와 만주 항일운동계열과 그의 형 박상희의 대구 폭동 가담등으로 낙인 찍혀 그것이 남로당 군사부장으로 몰렸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으로 육군정보국 제1과장으로 복귀
1953년 육군준장
1955년 제5사단장
1957년 제7사단장
1958년 육군소장
1960년 육군 군수기지 사령관. 육본 작전참모부장
1961년 제2군 부사령관 재직 중 5.16군사혁명(군사구데타) 주도
윤보선 전(前)대통령께서 군인들의 의거를 합법적으로 인정했다는 측면에서는 혁명이며 대한민국 헌법전문을 전면적으로 삭제와 수정했다는 측면에서는 반란으로 보고 있다 헌법전문은 대한민국 제헌 헌법때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제2공화국에서 조차도 수정하지 못했다 제헌헌법은 헌법 제정과정과 국회의장 이승만을 기록하고 있다 제2공화국 헌법도 증보식 헌법모델이었다
그런데 제3공화국 헌법은 헌법전문을 삭제함으로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을 부정하는 입장의 헌법임으로 군사반란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전문은 대한민국 건국 정통성과 제헌헌법 선포등을 예시하고 있다
1961년-1963년 제2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62년-1963년 대통령 직무대행
1962년 내각수반
1963년 육군대장 예편
1963년-1979년 제2대 민주공화국 총재
1963년-1967년 제5대 대통령 역임
1967년-1971년 제6대 대통령 역임
1971년-1972년 제7대 대통령 역임
1972년 헌정중단과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유신헌법--국가사회주의 헌법 선포)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등.하교때 줄서기와 박정희 대통령 개인 우상화. 신격화 노래 배우기 운동,초등학교 학생도 풀베기와 퇴비 만들기 운동 참가 그리고 중.고등학교부터 군사교육(체력단련과 교련)등
-북한 체제와 비슷한 모델(국가사회주의 운동)
1972년-1978년 제8대 대통령 역임
1978년-1979년 제9대 대통령 역임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피격 사망
(1)성(姓)과 이름
ㄱ.성(姓)-고령(高嶺) 박씨(朴氏)
ㄴ.이름--정희(正熙): 바르게 빛나는 것
(2)호--중수(中樹): 숲
(3)출생지---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부락
(4)생년월일--1917년 9월 30일(음력). 1917년 11월 14일(양력)
부친 박성빈(46세)과 모친 백남의(45세) 사이에서 태어난 늦둥이.
(5)가족관계---육영수 사이에 2녀 1남 출생
육영수(陸英修, 1925-1974)여사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부인이다
그녀는 충청북도 옥천(沃川)에서 부잣집 딸로 태어나 1942년 배화여고를 졸업한 뒤 옥천여자중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1950년 부산에 피란 갔을때 8살 연상 남자 육군 중령 박정희와 결혼하였다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각종 사회. 육영사업에 힘써 양지회(陽地會)를 결성하고 고아와 노인등 불우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또한 남산이 어린이회관, 능동(陵洞). 구의동(九宜洞) 일대에 어린이대공원을 조성하였고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를 발간하였다 또한 정수직업훈련원을 설립하는 등 사회복지사업에 앞장섰고 적십자활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자연보존협회 총재등을 지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문세광(文世光)에게 저격당했다 정례는 국민당으로 치러져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2.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 제6대 대통령 박정희전(前)대통령 취임사 연설문 "생각하는 국민! 일하는 국민! 협조하는 국민이 되자!"
(연설문)
단군선조가 천혜의 강토 위에 국기(國基)를 닦으신지 반만년 연연히 이어온 역사와 전통 위에 이제 새 공화국을 바로 세우면서 나는 국헌을 준수하고 나의 신명을 조국과 민족 앞에 바칠 것을 맹세하면서 겨레가 쌓은 이 성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삼천만 동포들이여!
나는 영예로운 제3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이 중대한 시기에 나를 대통령으로 취임케 하여 주신 국민 여러분엑세 감사드리면서 보람있는 이 날의 조국을 보전하기에 생명을 바치신 순국 선열과 공산침략에서 나라를 지키온 충용스러운 전몰장병 그리고 독재에 항거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한 영웅적인 4월혁명의 영령 앞에 나의 이 모든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한편 나는 국내외로 매우 중요한 이 시기에 대통령의 중책을 맡게 됨에 그 사명과 책무가 한없이 무거움을 깊이 통감하고자 자주와 자립과 번영의 내일로 향하는 민족의 우렁찬 전선(戰線)의 대오(隊五) 앞에 겨레의 충성스러운 공복(公僕)이 될 것을 굳게 다짐하는 바입니다
아시아의 동쪽에 금수강산이라 불리우는 한반도에 선조의 거룩한 창국(創國)의 뜻을 받아 찬란한 문화로 지라난 배달의 겨레가 5천년의 역사를 지켜 온 이 땅이 우리들의 조국입니다
한 핏줄기 이민족의 가슴 속에 붉은 피용솟음치는 분발의 고동과 약진의 맥박은 결코 먼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세기의 고된 역경을 밟았으되 일본제국주의에 항쟁한 3.1독립정신은 조국과 광복을 쟁취하였고 투철한 반공의식은 6.25동란에서 공산침략을 분쇄하여 강토를 보위(保衛)하였으며 열화(熱火) 같은 민주주의 신념을 4월혁명(4.19혁명)에서 독재를 물리쳐 민주주의를 수호하였고 5월혁명(5.16혁명)으로 부패와 부정들 배격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되찾아 오늘 여기에 우람한 새 공화국을 건설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당면한 현실은 목적지 도달의 안도(安堵)가 아니며 준험(峻險)한 노정에의 새 출발인 것입니다
4월혁명(4.19혁명)으로부터 비롯되어 5월혁명(5.16혁명)을 거쳐 발전된 1960년대 우리 세대의 한국이 겪어야만 할 역사적 필연의 과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 걸쳐 조국의 근대화를 촉성(促成)하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우리는 조성된 계기를 일실(逸失)함이 없이 성공적으로 이 과업을 성취시키는데 범국민적인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여기 3.1운동 정신을 반들어 4.19혁명과 5.16혁명 이념을 계승하고 당위적(當爲的)으로 계기된바 민족적인 제 과제 수행할 것을 목표로 나는 오늘의 뜻 깊은 자리를 빌려 일대 혁신운동을 제창하는 바이며 이 범국민적 혁명대열에 적극적 호응과 열성적인 참여 있기를 호소하는 바입니다
격동하는 시대 전황의 시점에서 치욕과 후진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오늘의 시대에 생존하는 우리들의 생명을 건 희생적 노력을 다하지 않는한 내 조국 내 민족의 역사를 뒤업는 퇴영(退瓔)의 먹구름은 영원히 걷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적 자주와 경제적 자립 사회적 융화안정을 목표로 대혁신운동을 추진함에 있어서 우라는 먼저 개개인의 정신적 혁명을 전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국민은 한 개인으로부터 자주적 주체의식을 함양하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쳑한다는 자주자조의 정신을 확고히 하고 이 땅에 민주와 번영! 복지사회를 건설하기에 민족적 주체성과 국민의 자발적 적극 참여의식 그리고 강인한 노력의 정신적 자세를 바로 잡아야 하겠습니다
불의와의 타협을 배격하며 부정부패의 소인(小人)을 국민 스스로가 절개 청산해야 하겠습니다 탁월한 지도자의 정치적 역량이나 그의 유능한 정부라 할지라도 국민 대중의 전진적 의욕과 건설적 협조없이는 국가사회의 안정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들의 최대의 적(敵)은 선거과정에서의 상대정적이나 대립정당도 아니며 바로 비협조와 파쟁으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 그 자체인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 대 혁신운동의 정치적 목표의 일환으로 정치적 정화운동을 통한 새로운 차원의 정치활동 향상을 실현하고 국가 공동 목적을 위한 협조의 전통을 세워 나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중단도 후퇴도 지체의 여유도 없습니다 방관과 안일 요행과 기적을 바라며 공론과 파쟁으로 끝끝내 국가를 쇠잔케한 곤욕의 과거를 되풀이 할수는 업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정치제도 운용의 역사가 얕다거나 시행착오라고 하기에는 또 다시 강력정치를 빙자한 독재의 등장도 민주주의를 도용한 무능부패의 재현도 당연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하한 이유에서도 성서를 읽는다는 명목아래 촛불을 훔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새공화국의 대통령으로써 나는 국민 앞에 군림하여 지배하려함이 아니요 겨레의 충복으로 봉사하려는 것입니다 시달리고 피곤에 지쳐가는 동표를 일깨워 용기를 돋우며 정의 깊은 대중의 벗으로 격려와 의논과 설득으로 분열과 낙오없는 대오의 향도가 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민의 지워 준 멍에를 성실하게 매고 이끌어 고난의 가시밭을 헤쳐 새공화국의 진로를 개척해 나갈 것입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선거에서 패배한 소수자의 의견을 존중하고 또 그를 보호하는데 더욱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선거에서 승리한 집권당이 평면적 다수의 결방식을 근거로 만능우월 의식에서 독선과 횡포를 자행하며 소수의 의사를 유린할때 이 나라 민주주의 전도에는 또 다른 비극의 씨가 배태될 것입니다
또 일방진부한 관록이나 허망한 권위의식에서 대국을 망각한 소아병적 도발로 정쟁을 벌리고 정국을 어지럽히며 사회를 혼란시킨다면 이 나라는 또 다시 역사의 뒤로 후퇴하는 슬픈 결말을 초래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세와 책임을 수반하는 민주적 정치질서를 확립해가면서 대중의 이익에 벗어나는 정치적 처사에 대하여는 정당한 비판과 당당히 반대할 수 있는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본인과 새 정부는 정치적 활동양식에 있어서 보다 높은 윤리규범을 정막하여 극열한 증오감과 극단적 대립의식을 불식하고 여.야의 협조를 통해 의정의 질서와 상궤를 바로 잡는 것이며 유혈보복으로 점철된 역사적 악유산을 청산하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한 복수정당의 발자(發刺)한 경쟁과 신사적 정책 대결의 정치 풍토 조성에 선도적 역할을 다할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몇 사람의 지도자나 특수계급의 교양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각과 책임 그리고 상호의 타협과 관용을 통한 사회적 안정 속에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국민은 질서 속에서 살며 정부로부터 시혜(施惠)를 기대하기에 앞서 스스로 의무를 다하며 때늦은 후회 이전에 현명하고 과감하게 권리의 지위를 도모하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또는 대국적 안목과 이성적 통찰로써 초가삼칸의 소실을 초래하는 우(愚)를 범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질서와 번영 있는 사회에 영광된 새 공화국 건설의 기지를 높이들고 다시는 퇴영과 빈곤이 없는 내일의 조국을 기약하면서 나는 오늘 사랑하는 동포 앞에 다시 한번 민족의 단합을 호소하는 바입니다
지금 우리는 조국의 근대화라는 막중한 과업을 앞에 두고 불화와 전쟁과 분열로 정체(停滯)와 쇠잔을 되풀이 할 것인가 아니면 친화와 협조와 단합으로 민족적인 공동의 광장에서 새로 대오를 정비할 것인가의 기로에 선 것입니다
또한 한 핏줄기의 겨레 우리는 이미 운명을 함께 한 같은 배에 탄 것입니다 파쟁과 혼란으로 표류와 난파를 초래하는 것도 협조와 용기로써 희망의 피안(彼岸)에 닻을 내리는 것도 오로지 우리들 스스로의 결의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동포 여러분의 현명한 결단과 용맹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오늘 역사적인 새 공화국 탄생에 성전에 임해 이 날에 환희를 함께 하지 못하며 자칫 우리의 뇌리에서 소원(疎遠)해가 쉬운 복한 1천만 동포의 노예상태에 대해 이 땅에서 자유를 향유하는 우리들의 경각을 높이하고자 합니다
본인과 새 정부는 안으로는 조속히 건실한 경제와 사회적 토대를 이룩하고 현 군사력 유지와 발전을 포함한 단합된 민족의 힘을 결속할 것이며 밖으로는 유엔과 자유우방 그리고 전 세계 자유애호 인민들과 유대를 공고히 하여 여하한 상황과 조건하에서도 공산주의에 대항 승리할 수 있는 민주적 역량과 민족진영의 내실을 기하여 우리의 숙원인 민족통일의 길로 매진할 것입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우리가 당면한 현실적인 제문제를 일일히 논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제문제를 비롯한 난국타개의 숙제는 이미 공약을 통해 자청한바 있으며 신정부는 이를 위하여 능률적인 태세로써 문제해결에 임할 것입니다
시급한 민생문제의 해결 그리고 민족자립의 지표가 될 경제개발 10개년 계획의 합리적 추진은 중대한 국가적 과제로써 여야 협조와 정부, 국민간의 일치 단합된 노력으로써 그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운 목표를 향하여 인내와 자중으로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나가는 근로정신의 소박한 생활인으로 돌아가 항상 성급한 기대의 후면에는 허무한 낙망 이상 접함을 명심하고 착실한 성장을 꾀하는 경제국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여기에 우람한 새 공화국의 아침은 밝았습니다
침체와 우울 혼돈과 방황에서 우리 모든 국민은 결연히 벗어나 "생각하는 국민" "일하는 국민" "협조하는 국민"으로 제기합시다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세로서 희망에 찬 우리의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갑시다
끝으로 하느님의 가호 속에 탄생되는 새 공화국의 전도에 영광 있기를 빌며 이 식전에 참석하신 우방 벗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함과 아울러 동포 여러분의 건투와 행운 있기를 축원하는 바입니다(끝:1963.12.17)
<연설 자료 요약>
-일본제국주의에 항쟁한 3.1독립운동은 조국과 광복을 쟁취하였고 투철한 반공의식은 6.25동란에서 공산침략을 분쇄하여 강토를 보위 하였으며 열화같은 민주주의 신념은 4월혁명(4.19혁명)에서 독재를 물리쳐 민주주의를 수호하였고 5월혁명(5.16혁명)으로 부패와 부정을 배격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되찾아 오늘 여기에 우람한 새 공화국을 건설하기에 이른 것입니다(제3공화국 건국 노선)
-국민은 한 개인으로부터 자주적 주체의식을 함양하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다는 자주 자조의 정신을 확고히 하고 국민의 자발적 적극 참여의식(1980년 북한 주체사상의 태동 내용)
-전세계 자유애호 인민들과 유대를 공고히 하여 여하한 상황과 조건하에서도 공산주의에 대항 승리할 수 있는 민주적 역량과 민족진영의 내실을 기하여 우리의 숙원인 민족통일의 길로 매진(인민 용어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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