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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玄石) 최규하 전(前)대통령 생애 주요 자료와 사진 본문
최규하(崔圭夏, 1919년 7월 16일, 강원도 원주시 ~ 2006년 10월 22일, 서울특별시)는 대한민국의 제 10대 대통령이다. 호는 현석(玄石)이며, 부인은 홍기(洪基)이다.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정치적 격동기에 대통령 자리를 맡았으며, 최규하 정권은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정치군인의 모임인 하나회에 의해 좌우되며 결국은 군인 전두환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만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당시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최규하는 권력을 이양받게 됐다. 암살 직전까지 계속되었던 독재적 통치로 유발된 정치적 불안은 계속 되었으며, 최규하는 유신헌법을 대신하는 신헌법과 민주적 선거를 약속한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뜻을 같이하는 군인들은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국군참모총장인 정승화를 자리에서 밀어내고 1980년 초에는 결국 정부를 장악하게 된다.
1980년 4월 전두환과 다른 정치가들의 압력에 밀려 최규하는 전두환을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왔던 중앙 정보부장으로 임명하기에 이른다. 5월에는 전두환은 계엄령을 내리고, 실질적인 통치자의 역할을 한다. 이 때까지 서울과 광주 등지에서는 민주화를 기대하는 학생들의 시위로 격앙되어 있었다. 광주의 시위가 계속 되었고, 이를 빌미로 전두환정권은 광주에 계엄군을 출동시켜 광주민주화운동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5일간의 이 사건으로 200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최규하는 사건 이후 곧 사임했으며, 전두환은 1980년 9월 1일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006년 10월 22일 오전 6시께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돼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전 7시37분께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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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7. 16 강원 원주~. 제10대 대통령. | ||
1945년 8·15해방 후 서울사범대학에서 조교수로 교편을 잡았다가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공무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농림부 양정과장이 되었으며, 그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FAO) 아시아 지역 미곡위원회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이 회의에서 그는 외국어 구사능력과 국제회의 대표로서의 활동력을 인정받아 인재의 적재적소 보임을 주장하던 당시 외무부장관 변영태에게 발탁되어 9월 10일 외무부 통상국장이 됨으로써 외교관으로서의 첫발을 내딛었다. 1952년 7월 17일 주일대표부 총영사, 1957년 5월 16일 주일대표부 참사관, 1959년 3월 20일 주일 공사 등으로 재임하면서 아시아 극동경제위원회(Economic Commission for Asia and the Far East/ECAFE) 제11·12·13차 총회와 제4차 한일회담에 한국대표로 참가하는 등 건국 초기 외교기반구축에 진력했다. 1959년 9월 12일 외무부차관이 되었으나 4·19혁명 후인 1960년 5월 12일 사임했다. 1962년 외무부장관 고문, 1963년 외무부 대사, 1964년 11월 주말레이시아 특명전권대사 등을 지냈다. 1967~71년 외무부장관으로 재임시 '조용한 외교'를 표방하면서 외무행정조직의 강화를 꾀했고 통상외교를 강화했다. 1971~75년 대통령외교담당특별보좌관을 지내며,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으로 2차례 평양을 방문했고 대통령특사로 7회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이란·에티오피아 등 24개국을 친선방문하기도 했다. 1975년 12월 19일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고, 1976년 3월 13일 국회의 동의를 거쳐 국무총리가 되었다. 4년간 국무총리로 재임하면서 외교관 출신의 총리로서 안보와 경제에 중심을 둔 외교활동을 펼쳤으며, 근검절약하고 깨끗한 공직생활에 진력했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자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고, 그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제10대 대통령이 되었다. 1980년 5월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장을 지냈고, 그해 8월 16일 대통령에 당선된 지 8개월여 만에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1981~88년 제5공화국 헌법 제66조 2항에 의거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지냈다. 1985년 강원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93년 민족사 바로 찾기 국민회의 의장을 지냈다. 한국 헌정사상 정당에 관여하지 않은 직업공무원으로서 과장·국장·차관·장관·국무총리를 차례로 거쳐 대통령이 된 첫번째 사람이었다. 무궁화대훈장, 수교훈장 광화장, 벨기에 왕관십자대훈장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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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전 대통령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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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2004년 8월 한나라당 박근혜대표가 서울대병원에 입원중인 최규하 전 대통령을 예방하고 있는 모습.
22일 타계한 최규하(崔圭夏) 전 대통령은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로 귀감이 된 인물이었다.
최 전 대통령은 40년간 서울 서교동의 2층 짜리 조그마한 단독주택에서 별다른 수리도 하지 않은 채 살았다. 서교동 자택은 지난 2004년까지 연탄보일러를 땠는 데 그것도 오래돼서 바꾼 게 아니라 연탄을 구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교체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 전 대통령이 이처럼 연탄보일러를 고집했던 것은 국무총리 시절이었던 1978년 1월 장성탄광 막장에서 고생하는 광부들을 보고 "끝까지 연탄을 때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 전 대통령은 또 딸이 태어났을 때 쓰던 50년 된 선풍기를 그대로 사용했고 에어컨도 언제 구입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것을 썼다는 후문이다. 메모지도 달력을 잘라서 쓰도록 비서관들에게 권했고 식사도 무염식 위주로 검박하게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최 전 대통령은 이같은 검소한 생활속에서도 종손이 남에게 매매한 선산 등을 재구입하고, 선영에 가서 직접 풀도 뽑는 등 조상에 대한 효(孝)를 다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흥순 비서실장은 "최 전 대통령은 구두도 옛날 것, 늘 같은 것을 신었다"며 "생활 전반적으로 절약하는 습관이 몸이 밴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사진은 지난 03년 2월 25일 김대중.김영삼.노태우.전두환. 최규하 전직 대통령(왼쪽부터)이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열린 노무현대통령 취임식에 나란히 자리를 함께하고 있다 자유민주정부를 굳건히 하는데 공헌한 분들(전직 대통령들의 만남과 단결된 모습이 자유민주정부 입장에서 남과 북이 하나됨 국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大韓은 三韓正統說 입장에서 건국한 국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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