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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 본문
영국에서 가장 오래 재위한 왕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향년 96세로 밸모럴성에서 서거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70년간 재위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가족들은 8일(현지시간) 오전 여왕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전해진 직후, 여왕이 머물고 있는 밸모럴성에 모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지난 1952년 왕위에 올랐다. 이후 많은 사회적 변화를 목도했다.
여왕이 서거함에 따라 그의 첫째 아들인 찰스(전 웨일즈의 왕자)가 찰스 3세로서 새 영국 왕이자 영연방 소속 14개 왕국의 수장으로서 슬픔에 빠진 나라를 이끌게 됐다.

버킹엄궁은 성명에서 "여왕은 오늘 오후 밸모럴성에서 평화롭게 사망했다"며 "왕과 왕의 배우자 왕비는 오늘 저녁 밸모럴성에 머무를 것이며 내일 런던으로 돌아간다"고 밝혔다.
앞서 버킹엄궁은 이날 오전 성명에서 "의료진의 진찰 결과, 여왕의 건강 상태가 우려된다는 판단이 나왔다"며 "주치의들은 여왕에 대해 의료적 관찰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고 밝혔다.
버킹엄궁이 96세인 여왕의 건강 문제와 관련해 이 같은 성명을 내는 건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평가됐다.
밸모럴성이란?

영국 스코틀랜드 애버딘셔에 위치한 밸모럴성은 통상 여왕이 여름을 보내는 곳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지난 6일 이곳에서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의 사임을 보고받았다.
이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밸모럴에서 리즈 트러스 신임 총리를 임명하는 업무를 진행했고, 당시 여왕의 모습이 사진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지난 7일 휴식을 취하라는 의사들의 권고로 하루 일정을 취소했다.
이날 여왕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 왕실 가족들은 일제히 밸모럴성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여왕의 윌리엄 왕세손도 밸모럴성 인근 애버딘 공항에 급히 도착한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 - BBC News 코리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했다고 영국 왕실이 밝혔다.
www.bbc.com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왕실과 국민을 위해 평생 헌신했다.
많은 사람들이 왕실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급변하는 영국 사회의 중심을 잡는 역할을 했다.
출생 당시 아무도 그녀의 즉위를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실을 지켜낸 그녀의 활약은 더욱 돋보인다.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 윈저는 1926년 4월 21일, 런던 버클리 스퀘어에서 조지 5세의 둘째 아들이자 요크 공작이었던 알버트와 엘리자베스 보우스 리온의 장녀로 태어났다.

엘리자베스와 1930년 태어난 그의 여동생 마거릿 로즈는 재택교육을 받으며 사랑으로 가득찬 가족환경에서 자랐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조지 5세와 매우 가까웠다.
엘리자베스는 6세가 됐을 때 승마 강사에게 "말과 강아지가 많은 시골 아가씨"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매우 어릴 때부터 놀라운 수준의 책임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윈스턴 처칠은 총리가 되기 전 시절 엘리자베스가 "아기로는 믿기 어려운 품격있는 분위기"를 지녔다고 말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학교를 다니진 않았지만, 언어에 능숙하고 헌정사에 대해 깊이 공부했다.
그가 동갑내기들과 교제할 수 있도록 '제1 버킹엄궁(1st Buckingham Palace)'이라는 특별 걸가이드 단체가 설립되기도 했다.

긴장의 고조

조지 5세가 1936년 서거한 뒤 당시 데이빗으로 불리던 그의 장남이 에드워드 8세가 됐다.
하지만 그가 2번 이혼한 미국인 월리스 심슨을 부인으로 선택하자 그의 결정은 정치·종교적 이유로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그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요크 공작이 마지못해 조지 6세가 됐다. 그의 즉위식은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의 미래에 대한 맛보기였다. 엘리자베스는 이후 아버지의 즉위식이 "아주 아주 멋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유럽의 긴장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새로 즉위한 왕과, 그의 부인 엘리자베스 왕비는 왕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되찾는데 주력했다. 장녀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본보기를 놓치지 않았다.
1939년, 13세 엘리자베스 공주는 왕과 왕비와 함께 다트머스 왕립해군사관학교를 방문했다.
이 곳에서 엘리자베스 공주와 그의 여동생 마가렛은 사관후보생의 호위를 받았는데, 그는 다름아닌 엘리자베스의 팔촌, 그리스의 필립 왕자였다.
걸림돌

이들의 만남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엘리자베스가 필립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처음이었다.
필립 왕자는 해군에서 휴가를 나올 때면 왕실 친척들을 찾았다.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18세가 되던 해인 1944년, 그는 분명히 필립 왕자와 사랑에 빠져있었다. 그는 필립 왕자의 사진을 방에 두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전쟁 후반기에 어린 공주는 여자국방군(ATS)에 입대해 대형 트럭 운전과 정비를 배웠다.
유럽 전승일에 엘리자베스는 버킹엄궁에서 왕가에 합류해 '더 몰(버킹엄 궁 앞으로 늘어선 큰 길)'에 모인 수천명의 국민들과 유럽 내 전쟁의 종료를 함께 기념했다.
그는 향후에 "우리는 부모님들께 밖에 나가 직접 볼 수 있는지 물어봤다"고 회상했다.
"누가 알아볼까 무서웠던 것이 기억난다. 화이트홀(영국 런던에 관청이 늘어선 거리)에 낮선 사람들이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과, 우리 모두가 행복과 안도의 물결에 휩쓸렸던 것을 기억한다."
전쟁이 끝난 뒤 필립 왕자와 결혼하고 싶었던 그의 갈망은 여러 장애물에 맞닥뜨렸다.
국왕은 사랑하는 딸을 잃는 것을 주저했고, 필립은 그의 외국계 혈통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기득권층의 편견을 극복해야만 했다.
아버지의 죽음
그럼에도 엘리자베스와 필립의 소망은 이뤄졌다. 이 둘은 1947년 11월20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에든버러 공작이 된 필립은 결혼 이후에도 해군 장교로 근무했다. 그가 몰타해에서 근무할 당시 여왕 부부는 짧게나마 평범한 부부처럼 생활할 수 있었다.
1948년에 첫째 아들 찰스가 태어났고, 2년 후에는 딸 앤이 태어났다.
당시 왕은 평생의 흡연으로 폐암이 발병해 투병 중이었다.
1952년 1월, 당시 25세였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남편 필립공과 함께 해외 순방에 나섰다. 왕은 의사의 권유를 뿌리치고 공항에 나와 딸 부부를 배웅했는데, 이것이 엘리자베스 여왕이 생전 아버지를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케냐 순방길에서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은 여왕은 즉시 런던으로 복귀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당시를 회상하며 "나를 가르쳐 줄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삶에 급작스러운 변화가 생겼고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야 했다"고 말했다.
호주와 뉴질랜드

1953년 엘리자베스의 즉위식은 윈스턴 처칠 총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으로 방송됐고, 수백명이 텔레비전 세트 앞에 앉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를 지켜봤다.
당시 영국은 여전히 전쟁 후 궁핍을 견디고 있었는데 해설자들은 이 즉위식을 신(新) 엘리자베스 시대의 시작으로 평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대영제국의 끝을 앞당겼다. 새 여왕이 영연방 장기 순방을 시작한 1953년 11월에는 인도를 포함한 많은 과거 식민지들이 독립을 얻어낸 상태였다.
엘리자베스는 호주와 뉴질랜드를 방문한 첫 현 군주였다. 당시 호주 국민의 4분의 3이 여왕을 직접 보기 위해 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대 더 많은 나라들이 영연방 국기에 모였고, 많은 전 식민지와 자치령들이 자발적 연합체로 하나가 됐다.
많은 정치인들은 새로운 영연방이 새로 시작한 유럽 경제공동체(ECC)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어떤 의미에서 영국은 대륙에서 멀어졌다.
사적인 공격
하지만 영국의 영향력은 1957년 수에즈 사태로 더욱 약해졌다. 영연방이 위기 상황에서 협력할 의지가 없다는 게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막기 위해 영국이 군대를 파견한 결정은 수치스러운 철수와 앤서니 이든 총리의 사퇴로 결말이 났다.
이 사태는 여왕을 정치적 혼란에 휘말리게했다. 보수당은 새 지도자를 선출할 장치가 없었고, 일련의 상담 이후 여왕은 해럴드 맥밀런이 새 정부를 꾸리도록했다.
여왕은 또 로드 알트린참으로부터 사적인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는 매거진 기사에서 여왕의 궁궐이 "너무 영국"스럽고 "상류층"이라면서 여왕이 원고없이는 단순한 연설조차 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그의 발언은 여론을 흥분케 했고, 로드 알트린참은 거리에서 '제국로열리스트동맹(the League of Empire Loyalists)' 소속원에게 물리적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영국 사회와 군주제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고, 과거에 확실하게 여겨졌던 것들에 이의가 제기되고 있는 것을 보여줬다.
군주에서 왕가로

여왕은 궁궐의 답답함을 불편해한 것으로 악명높던 남편의 격려로 새로운 체재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결혼 적정기에 접어든 각 가문의 숙녀들이 궁전을 방문해 여왕을 알현하는 의식은 폐지됐고, "군주(The monarchy)"라는 표현은 점진적으로 "왕가(the royal family)"로 교체됐다.
1963년 해럴드 맥밀런이 총리직에서 사임하면서 여왕은 또다시 정치적 갈등의 중심에 섰다.
보수당은 여전히 새 지도자를 뽑을 시스템을 설립하지 못했고, 여왕은 그의 조언에 따라 홈 백작을 총리직에 앉혔다.
군주와 정부의 분리와, 헌정상 올바름(constitutional correctness)이 특징이었던 이 시절은 여왕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여왕은 정보를 전달받고, 조언하고 경고하는 권리를 매우 중요시 여겼지만, 이 선을 넘으려고 하진 않았다.
여왕이 이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건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보수당은 드디어 새로운 지도자가 "발생(emerged)"하는 전통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시스템을 도입했다.
차분한 분위기
1960년대 말 버킹엄궁은 왕실이 국민에게 보다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결과로 획기적인 다큐멘터리 '로열 패밀리'가 있다. BBC는 윈저가의 집안 촬영을 허락받았다. 가족이 바베큐를 즐기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고, 드라이브를 가는 등 여태 공개되지 않았던 왕실의 일상을 담은 사진들이 공개됐다.
일각에서는 이 다큐멘터리가 필립공이 밸모럴성에서 소시지를 굽는 등 지나치게 평범한 모습으로 왕실의 신비주의를 깼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다큐멘터리는 왕실에 대한 호감도를 높이고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7년 여왕의 실버 주빌리(재위 25주년)땐 사람들은 곳곳에 길거리 파티를 여는 등 진정한 애정을 보였다. 군중의 사랑 속 군주일가는 안정적으로 보였고, 대부분의 사랑은 여왕을 향해 있었다.
2년 뒤 영국은 최초의 여성 총리 마가렛 대처를 맞이했다. 여성 국가원수와 여성 정부 수반의 관계는 어색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스캔들과 재난들

본인이 수장으로 있는 영연방에 대한 여왕의 헌신은 어려운 부분 중 하나였다. 엘리자베스는 아프리카 지도자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명분에 우호적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대처 수상의 태도와 대립적인 스타일에 대해 "어리둥절(puzzling)"하게 느꼈다. 대처 수상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제재에 반대하는 것 또한 그랬다.
매년 여왕의 공적 의무는 이어졌다. 1991년 걸프전 이후 그는 미국을 방문해 영국 군주로는 최초로 합동의회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당시 대통령이던 조지 H.W. 부시는 여왕을 "우리가 기억만큼 오래된 자유의 친구"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1년 뒤 각종 스캔들과 재난들이 왕가에 영향을 줬다.
여왕의 둘째 아들인 요크 백작과 그의 부인 사라가 결별했고, 앤 공주와 마크 필립은 이혼했다. 웨일즈의 왕자와 공주(찰스와 다이애나)가 매우 불행했다는 것이 드러났고, 결국 이들도 헤어졌다.
이 해는 여왕이 가장 좋아하는 거주지인 윈저성의 대화재로 막을 내렸다. 위기에 처한 왕가를 상징하는 듯 했다. 또 윈저성의 수리비용을 납세자가 부담해야 할지 여왕이 직접 내야 할지에 대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공공 토론 중 위엄
여왕은 1992년을 자신의 "아누스 호리빌리스(Annus Horribilis·최악의 한해)"로 불렀다. 그리고 시티 오브 런던 연설에서 덜 공격적인 언론의 대가로 더 개방적인 군주제의 필요성을 수긍하는 것 같이 보였다.
"그 어떤 기관, 도시, 군주라도 충성과 지지를 주지 않는 이들과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의 감시로부터 자유롭기를 기대해선 안된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우리 국민사회의 일원이며, 이 감시를 상냥함과 쾌활함, 그리고 이해심있게 한다고 해도 그 못지않게 효과적일 수 있다."
군주제는 분명히 수세에 몰려 있었다. 버킹엄궁을 방문객들에게 개방해 윈저성 수리 비용을 조달했고, 여왕과 웨일즈의 왕자도 투자수익에 세금을 내기로 발표했다.

여왕의 통치 초기엔 매우 높았던 영연방에 대한 희망은 해외에선 실현되지 못했다. 영국은 유럽과 새로운 합의를 위해 과거 파트너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럼에도 여왕은 영연방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21세 생일을 맞이했던 곳이기도 한 남아공이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하자 여왕은 매우 흐뭇해했다. 그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95년 3월 남아공을 방문하기도 했다.
고국에선 군주제에 미래가 있는지에 대한 공공 토론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여왕은 군주의 위엄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

영국이 새로운 미래를 찾으려고 힘겹게 노력하는 동안, 여왕은 국민들에게 안심을 주는 역할을 했다. 그의 미소는 엄숙한 분위기도 밝히기에 충분했다. 여왕이 가장 중요시 여긴 역할은 '나라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1997년 8월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왕실은 충격을 받았다. 여왕 또한 이례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대중이 왕세자빈을 애도하기 위해 런던 곳곳의 궁으로 모이는 상황 속에서 여왕은 평소와 다르게 구심점 역할을 꺼려하는 듯 했다.
여왕을 비판하는 이들을 그녀가 공개석상에서의 과도한 애도를 기피하는 세대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왕은 또 할머니로서 가족의 사적 울타리 안에서 손주들을 위로하고 싶어 했다.
여왕은 결국 생방송으로 며느리의 죽음을 애도하고 왕실이 이 변화에 적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상실과 축하

2002년 여왕의 어머니인 '대왕비'와 동생 마가렛 공주의 죽음으로 왕실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와 군주제의 미래에 대한 토론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재위 50주년인 '골든 주빌리'를 맞아 백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버킹엄궁 앞에 모였다.
2006년 4월에는 여왕의 80세 생일을 맞아 수천명의 지지자가 윈저를 찾아 그녀의 비공식 산책길을 반겼다.
2007년 11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여왕과 필립공의 60주년 결혼기념일 예배에는 2000여 명의 사람이 참석했다.
2011년 4월 여왕의 손주인 윌리엄 왕세손 (정식 명칭은 케임브리지 공작)과 캐서린 미들턴의 결혼으로 왕실은 또 하나의 경사를 맞았다.
같은 해 5월 여왕은 왕실 최초로 아일랜드 공화국을 방문했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대단히 의미 있는 행사였다. 여왕은 아일랜드어로 한 연설에서 관용과 화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민 투표

1년 뒤 여왕은 재위 60주년인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맞아 북아일랜드를 방문해 전직 아일랜드공화국군(IRA) 사령관 마틴 맥기네스와 악수했다.
이는 매우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여왕의 친척인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이 1979년 IRA의 폭탄에 숨진 바 있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맞아 수천 명들이 길에 나와 축제를 즐겼고, 런던에서의 주말 축제로 마무리됐다.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는 여왕에게 도전적인 시기였다. 여왕이 연합왕국(United Kingdom)에 대한 신념을 분명히 한 1977년 연설은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왕과 여왕들, 웨일즈의 왕자들을 선조로 꼽는 나는 이 염원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연합왕국과 그레이트브리튼,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여왕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것도 잊을 수 없다."
여왕은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 전날 밸모럴성을 찾은 지지자들과의 대화에서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조심스럽게 생각해보길 희망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여왕은 공개성명을 통해 연합이 온전하게 유지된 것에 대한 안심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정치적 지형이 바뀌었다는 것은 인정했다.
"다양한 의견이 표출됐지만, 이제 앞으로 나아가면서 스코틀랜드를 향한 공통된 사랑이 있고, 이것이 우리를 통합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여왕은 2015년 9월 9일 고조모인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을 넘어서면서 '영국 최장수 군주' 기록을 세웠다.
여왕은 그녀답게 "딱히 열망했던 것은 아니다"라며 수선을 떠는 것을 거부했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2016년 4월, 여왕은 90세 생일을 맞았다.
그녀는 90대가 돼서도 공공 의무를 이어갔고, 2017년 에든버러의 백작이 은퇴한 뒤에는 혼자서 이를 감당한 경우도 많았다.
여왕의 가족에겐 압박이 끊이지 않았다. 남편의 자동차 사고와 요크 공작 앤드류의 유죄 판결을 받은 미국 사업가와의 무분별한 관계, 왕가의 생활에 환멸을 느낀 해리 왕자 등을 꼽을 수 있다.
여왕 재임 동안 왕실의 위엄은 약해졌을지 몰라도, 여왕은 영국 국민이 애정으로 존경할 수 있는 왕실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여왕은 재위 25주년인 '실버 주빌리'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30년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순방을 회상하며 "나는 21살에 내 삶을 국민을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하고 신의 도움을 구했다. 햇병아리 시절 한 다짐이지만 나는 그 다짐을 한 단어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부고]엘리자베스 2세 여왕 - BBC News 코리아
[부고]국민을 위해 평생 헌신했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 BBC News 코리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강한 의무감을 갖고 긴 세월을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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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96세로 서거... 70년 재임기간의 역사
영국의 최장수 군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96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여왕의 70년 재임기간 동안 세상은 극적으로 변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과 영연방 시민들의 삶에서 변함없이 함께해 왔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96세로 서거... 70년 재임기간의 역사 - BBC News 코리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96세로 서거... 70년 재임기간의 역사 - BBC News 코리아
영국의 최장수 군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96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여왕의 70년 재임기간 동안 세상은 극적으로 변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과 영연방 시민들의 삶에서 변함없이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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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여왕: 사진으로 보는 그의 생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일생을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살았다. 유아, 후계자, 영국의 최장기 재위 왕까지, 그의 통치기를 되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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