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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일성 전(前)주석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북한 김일성 전(前)주석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CIA Bear 허관(許灌) 2006. 12. 16. 10:28

1.김일성의 생애

(1)김형직과 강반석

김형직(金亨稷)은 김일성의 아버지이다 김형직의 먼 조상은 전라도에서 살았다

김형직은 전주(全州 또는 完山) 김씨로 1894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나 평양숭실학교를 마쳤고 1917년 3월 강동군에서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국민회를 결성했다 조선국민회 활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뒤 만주로 망명했다

북한의 문헌에 의하면 비합법적 단체 조선국민회와 함께 학교계, 비석계, 향토계등의 계를 결성하였고 중강, 무송등지에서 광제의원, 무림의원, 순천의원등을 설립, 의료사업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항일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북한 정권 수립이후 아내인 강반석과 함께 <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로 추앙 받아 김형직사범대학, 김형직 인민병원등이 설립되었다 북한에서는 국가적인 위대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관련된 자료가 모두 북한 것으로 한정되어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강반석(康班石)은 김형직보다 두살 위로 1892년 4월 21일 기독교 목사이며 교육자 강돈욱의 둘째 딸로 태어나 기독교계 평양숭실학교를 나온 김형직과 결혼하여 김형직 나이 18세, 강반석 나이 20세때 김성주(김일성) 첫 아이를 낳았고 그 후 둘째 아이 김철주(김철주는 낳았는데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막내 김영주등 삼형제를 낳았다 (김일성은 북한 주석을 지냈고 김영주는 북한 부주석을 역임했다)

 김형직은 김일성의 나이 14세때 1926년 32세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으며 강반석은 김형직을 따라 만주로 이주하여 한약상을 하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다가 1932년 7월 31일 40세로 병사(病死)했다

김형직과 강반석 집안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집안이었다

 평안도는 조선후기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곳이고 그 지방의 기독교도들은 그 시대의 상황에 비추어 볼때 모두 지식인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강반석의 집안은 김형직의 집안보다 더 독실한 기독교인들로 강반석의 부친 강돈욱은 만경대 일대에서 신임을 받던 교육자이자 장로교 교회의 장로로 열심히 성경을 가르쳤다

1992년 김일성은 회고하기를 그의 어머니가 자신을 교회의 장로로서 열심히 성경을 가르쳤다고 했다

청년시절의 김일성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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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TV는 5월31일 시리즈 다큐멘터리 '조국광복을 위하여'에서 해방직후 만경대 고향집으로 돌아온 김일성의 청년시절 모습 사진(가운데)을 방영했다. 김일성 좌우 인물은 조부모인 김보현과 리보익./북한/조선중앙TV촬영/2005.6.1 (서울=연합뉴스)

(2)김일성의 생애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이며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 오늘날의 만경대의 농가에서 중농계급의 집안에서 출생했으며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 사이에 장남이며 그의 동생 김철주(金哲柱), 김영주(金英柱)를 두었다

김성주(김일성)은 어려서는 일골살 나이 1919년에 부모을 따라 만주 지린성(吉林省) 푸쑹(撫松)등의 만주로 이사하여 그의 부친 김형직의 한인동포를 상대로 의사노릇을 했으며 김성주(김일성)은 만주에서 <정의부>라는 독립운동단체가 운영하는 화성의숙에서 수학했다

화성의숙의 숙장(교장)은 천도교 신자이면서 민족주의자인 최동오선생이었다 최동오는 뒤날 상해임시정부의 간부가 되었는데 그의 아들이 대한민국에서 육군소장과 박정희정부때 외무부장관 및 서독대사를 역임하고 나중에는 월북한 최덕신이다

1926년 김성주(김일성) 나이 14세때 그의 부친 김형직 갑자기 사망했고 1926년 지린(吉林省) 길림의 육문중학교(위원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의 어려움 환경 속에서 이 학교에서 막스 레닌주의(마르크시즘과 레닌니즘)에 접했으며 공산주의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곧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하여 1929년 중학교 2학년 때 퇴학을 당했고 길림에 있는 감옥에 얼마 안되는 기간이지만 투옥되기도 했다

 이런 배경을 놓고 볼때 김성주(김일성)은 어린 시절을 만주에서 지냈기 때문에 중국의 생활풍습과 중국어에 상당히 익숙해졌다는 점이다 김성주(김일성)은 중국 공산당의 한 산하조직에서 공산주의자로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김일성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기는 그가 스무 살이던 1932년에 일어났다 그 해는 그의 어머니가 죽고 일본 제국주의가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 해였다 그 해에 김성주(김일성)은 남만주에서 조선인들에 의해 조직된 작은 규모의 항일 유격대에 가담하였던 이 유격대는 같은 해에 중국인 양징위(양청우, 楊晴宇)가 지휘하는 <東北抗日聯軍>의 산하로 통합했다

 김성주는 이때부터 항일운동가 전설적인 영웅 김일성(김경천= 金光瑞장군) 이름을 도용하여 김일성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金光瑞은 일본육사 23기 기병과 출신으로 항일무장투쟁 때는 김경천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 부대는 몇 해 안에 규모도 커지고 활동영역도 넓어지게 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이 1936년 초에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 조직되고 여름부터 팔로군 제도가 실시됨으로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로군(第1路軍) 제6사(第6師)로 된 제6사장(第6師長) 김일성가 되었다

김일성의 대표적인 업적이 1937년 6월 4일 보천보습격사건이다 동북항일연군 제1팔로군 제6사장 김일성부대가 자행한 보천보 습격은 철저히 물자조달을 위한 약탈사건이었다는 것이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김일성은 몇몇 전투에 참가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일제는 동북항일연군의 뿌리를 뽑아버릴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물론 회유작전도 병행했다 일제에 투항하면 돈을 주기도 하고 처벌을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관동군의 2중작전은 효력을 발휘하여 투항자가 속속 출현했다

1940년 2월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로군 사령관 양징위도 마침내 관동군에 쫓기다 살해 되었다

관동군은 그의 배를 갈라 보았다 그의 백 속에는 나무 껍질이나 풀 따위가 남아 있을 뿐 곡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극악무도한 관동군이라도 양징위에 대하여 경의를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불교의 스님을 모셔다가 극락왕생을 비는 염불도 올리게 하고 묘를 만들어 주었으며 좋은 비석도 세워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만주에서의 동북항일연군의 유격대원들이 얼마나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었나를 극명하게 증명한 사건이었다 일본군에 끊임없이 쫓겨면서 전투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보급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동북항일연군도 살아남기 위해서 일종에 마적이나 공비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김일성도 쫓겨다녔다

그는 여섯명의 대원을 이끌고 두만강변을 따라 1941년 3월에 극동 러시아로 탈출했다 김일성은 곧 블라디보스그톡 (연해주) 근처의 <오스케얀스카야 야전학교>에 배치되어 군사훈련을 받았다 최용건, 김책, 안길, 김광협, 서철, 최춘국등도 이 지역 배치되어 군사훈련을 받았다

 일본과의 전쟁의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판단한 소련 극동군은 하바로프스키 근처의 비밀 기지인 브야츠크에 <88특별여단>을 창설했다 이 부대는 동북항일연합군에서 활동 중인 유격대원들로 구성되었는데 총인원은 조선인 60여명과 중국인 1백여명에 소련인 40여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산하 4개 대대 가운데 김일성이 대위로서 제1대대장을 맡았으며 강건이 제4대대장을, 김책이 제3대대 정치위원을 맡았다 김일성은 이 무렵 자신의 유격대원이었고 함북 회령 출신으로 자신과 함께 극동러시아로 탈출해 온 김일성보다 여섯 살 연하 김정숙(金貞淑)과 결혼했다

 김정숙은 1942년 2월 16일에 브야츠크 야영에서 쌍둥이 유라(김정일)와 슈라를 낳았다 극동 러시아의 빨치산 생활 가운데 중요한 전기는 1945년 7월에 이루어졌다 <88특별여단>에 속한 조선인 전사들이 중국인 전사들과 소련의 전사들로부터 분리된 <조선공작단>을 결성했는데 김일성이 단장으로 뽑힌 것이다 그들은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획하던 가운데 한달 뒤인 8월 15일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8.15광복과 더불어 소련군을 따라 평양으로 들어와 김영환이라는 가명으로 정치공작을 폈는데 그해 10월 14일 소련군 사령관 로마넨코가 평양시민들 앞에서 <김일성장군>이라고 그를 둔갑시켜 소개한 뒤부터 김일성으로 행세하였다

*사진 설명: 소련군정 및 북로당 간부들

앞줄 우로부터 허가이. 김일성. 소련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령. 김두봉. 소련군 정치국장 이그나치포 대좌. 김책 뒷줄 우로부터 주영하. 박일만. 최창익등

 

 처음에는 자신을 제6사단장 및 제2방면 군장이던 김일성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1949년부터는 동북항일연합군과의 관계를 내세우지 않고 만주사변 후부터 독자적인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여 일제와 싸운 것처럼 날조된 정치적 선전을 하였다

그는 소련군의 힘으로 조선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 책임비서,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내각수상, 인민군 최고사령관을 맡고 원수 칭호까지 썼다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장 겸 국방위원회 위원장등 최고위직을 역임하였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 통일을 주도했고 그후 여러 차례 전쟁통일 추구했다 김일성은 남침전쟁을 이렇게 묘사했다

 남조선노동당등 국내파와 소련파,중국 연안파등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개인우상화 신격화 권력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는 1990년말 그의 아들 김정일에게 인민군 총사령관을 물려주었고 전통과 계승이라는 세습제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한 후 1994년 7월 8일 심근경색증으로 사망하였다

蘇극동군 “김일성 이념무장 잘 돼있다”
  동아일보  2004-09-12 23:10:20
 
 
 
 

 ①소련군 환영대회에 모습 드러낸 김일성
김일성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군중대회’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태극기가 걸려 있는 게 인상적이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뒷날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이 사진을 변조했다. 뒤에 서 있는 소련군 지도부는 물론 김일성 가슴에 단 소련무공훈장까지 지워 버린 사진을 각종 기록에 게재했다.
②‘김일성 조련’ 주역과…
‘소련군 환영 군중대회’ 막간에 김일성(가운데)이 소련군 그리고리 메클레르 중좌(오른쪽)와 강미하일 소좌와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소련 극동군 정보 및 정치공작 담당 과장이던 메클레르는 1945년 9월부터 1년여 동안 김일성을 대중성 있는 정치지도자로 조련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③김일성의 부상과정

-김일성과 한인(韓人) 소련88여단 모습

두 장의 사진은 백범 김구 선생이 1948년 4월 남북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 주석과 함께 찍은 것으로 기념관 2층에 전시돼 있다. 사진 밑에는 ‘1948년 4월22일 김일성 주석의 안내로 남북연석회의장에 입장하는 백범 김구선생’이라고 적혀있다.

김일성과 박헌영
  동아일보  2004-11-21 22:32:54
 
   1945년 9월 하순 평양에 도착한 소련군 고위 정치장교들은 박헌영에 대해 오류와 결함이 많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그는 여전히 조선공산당의 ‘중앙’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후원으로 김일성이 부상하면서 박헌영의 위상도 달라진다. 1946년 9월 미군정청의 지명수배 직후 월북한 박헌영(오른쪽)이 평양에서 김일성과 만나는 모습.

사진


-김일성 찬양 포스터

김일성 찬양 포스터
자전거를 탄 북한 주민들이 27일 개성 시내에서 고 김일성 주석의 대형 포스터 앞을 지나가고 있다. 북한은 최근 들어 김일성에 대한 찬양이 부쩍 증가했다.

개성=AFP연합뉴스

 http://news.media.daum.net/politics/north/200503/31/segye/v8729743.html

 

 

1947년 김일성이 조선의 한 농촌마을을 시찰할때 모내기를 하는 장면이다.

 

 

 

사진은 1989년3월에 김일성이 한국목사 문익환을 만날을때의 장면이다.

 

 

사진은 1972년8월에 조선을 방문한 재일조선소년들과 함께 있을때 장면이다.

 

 

 

                 김일성과 백범 김구선생

 

 

김일성, 방중 마오쩌뚱 중국 주석과 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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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tv는 김일성주석이 1958년 11월 방중 마오쩌뚱 주석과 회담을 갖고 "국제정세와 상호 관심사로 되는 문제들에 대해 토의하고 완전한 견해 일치를 보았다"고 보도했다./북한/조선중앙TV촬영/2005.4.11 (서울=연합뉴스)

 

 

 

            조선전쟁시기의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총사령 팽덕회

 

등소평에게 담배 불을 붙여주는 김일성

 

 

성경책을 보고있는 김일성주석

1992년 4월 북한을 방문했던 세계적인 부흥전도사 빌리 그레이엄목사가 고 김일성주석에게 성경책을 선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현 부시대통령의 정신적 지주로 알려져 있다.사진은 한국컴퓨터선교회(kcm.co.kr)의 자료사진/북한/ 2005.8.29 (서울=연합뉴스)


(3)김정숙

김정숙은 1917년 12월 24일 함북 회령 출신으로 김일성보다 5년 연하의 여성으로 김일성과 유사한 배경을 가진 빨치산이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 부친을 찾으러 어머니와 함께 만주로 들어갔다가 모친 사망 후 고아가 되었으며 1935년 16세 때 빨치산부대에 입대하여 밥짓는 일을 맡았다

동북항일연합군의 무력투쟁이 내리막길을 걸던 1940년 말경 김일성과 김정숙은 결혼했고 다음해 3월쯤 김일성을 따라 소련으로 도피, 88여단에 가입했다

 1942년 2월 16일 하바로프스크 바트코스예 마을에서 쌍둥이 아들 유라(김정일)와 딸 슈라를 낳았다 슈라는 3-4세때 하바로프스크 바트코스예 마을 우물에 빠져 죽었다 아직도 슈라의 무덤이 있다 김일성과 김정숙은 해방 후 평양에서 장녀 김경희를 낳았다 그녀는 북한 남아 있는 김정일의 유일한 누이 동생이며 장성택이라는 당간부와 결혼하여 김정일을 보좌하고 있다 김정숙은 1949년 9월 22일 네 번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모자가 함께 사망했다

1954년 김정일 위원장 일가 모습
  연합뉴스  2006-03-16 08:03:35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인 조선신보가 15일자로 보도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일가의 과거 사진. 동그라미 안의 인물은 왼쪽부터 김일성 주석의 사촌 여동생이자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의 전 부인 고 김신숙, 김 주석, 김 위원장의 동생인 김경희 노동당 경공업부장, 양 부위원장, 김 위원장. 1954년 8월 1일 촬영된 이 사진은 평양 만경대혁명사적관에 최근 전시됐다.

김일성 품속에 안긴 세쌍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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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학대학 병원관계자는 8일 조선중앙TV에 출연해 지금것 평양산원에서만 400 쌍의 세쌍둥이들이 태어났고 세쌍둥이들을 무척 귀여워한 고 김일성주석의 유지를 받들어 각 도에 ' 삼태자과'를 두어 특별관리하고있다고 밝혔다/북한/조선중앙TV촬영 2005.3.8 (서울=연합뉴스)

체 게바라와 환담하는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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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10일 방송한 기록영화에서 1960년 12월 쿠바 상공부장관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체 게바라와 환담하는 김일성의 모습을 내보냈다. 방송은 김일성이 그와 '혁명적 우애의 정이 넘치는 따뜻한 담화를 나누었다'고 전했다./북한/조선중앙TV촬영/2005.4.11 (서울=연합뉴스)

 -나란히 선 카스트로와 김일성

나란히 선 카스트로와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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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텔레비젼은 22일 기록영화에서 86년 3월 북한을 방문한 쿠바 지도자 카스트로와 김일성이 한 시설을 방문, 어린이들의 환영을 받는 장면을 내보냈다. 그러나 방송은 구체적인 날짜와 장소는 밝히지 않았다./북한/조선중앙TV촬영/2005.4.23 (서울=연합뉴스)

http://ucc.media.daum.net/uccmix/photo/general/200504/23/yonhap/v8912236.html?u_b1.valuecate=4&b1.svcid=02y&u_b1.objid1=16602&u_b1.targetcate=4&u_b1.targetkey1=16967&u_b1.targetkey2=8912236

 

-40년전 김일성과 김정일..그리고 메가와티?

40년전 김일성과 김정일...그리고 메가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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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와티 수카르노 푸트리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김일성 전 북한 주석 간의 돈독한 관계를 보여주는 40년전 사진이 한 재미교포에 의해 공개됐다. 문제의 사진은 지난 65년 4월 김일성 주석이 아들 김정일(당시 24세)과 함께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을 때 찍은 것으로, 김일성(왼쪽 세번째)과 다정하게 팔짱을 낀 인도네시아 전통의상 차림의 여성이 메가와티(당시 19세)로 추정된다. 오른쪽 끝의 남자는 당시 노동당 지도원 자격으로 부친을 수행했던 김정일인 것으로 보인다. 재미교포는 최근 북한 방문시 우연히 이 사진을 발견했다고 밝혔다./문화일보제공/북한/ 2005.4.22 (서울=연합뉴스)

http://ucc.media.daum.net/uccmix/photo/general/200504/22/yonhap/v8907244.html?u_b1.valuecate=4&u_b1.svcid=02y&u_b1.objid1=16602&u_b1.targetcate=4&u_b1.targetkey1=16967&u_b1.targetkey2=8907244

 

<김정일 16세때 김일성 홍명희 뱃놀이장면 촬영>
(서울=연합뉴스) 최선영 기자 = 역사소설 '림꺽정' 저자인 월북작가 벽초 홍명희(1888∼1968) 집안에서는 벽초와 고(故) 김일성 주석이 평양시 교외의 한 호수에서 뱃놀이하는 사진을 '가보'(家寶)로 보관하고 있다.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한 조용한 호수에서 김 주석이 밝게 웃으며 직접 노를 젓고 마주 앉은 벽초 역시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사진을 찍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흑백의 이 사진은 1958년 5월 1일 국제노동자절 행사가 끝난 직후 촬영한 것으로 김 주석의 인품을 소개하는 수많은 사진 중에서도 명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또 김 주석의 활동에 관한 대다수 사진이 그렇듯 이 유명한 장면을 찍은 사람도 당연히 김 주석의 전용 사진사나 관련 간부 정도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난해 12월 중순 간부들에게 처음으로 이 사진을 자신이 직접 찍었다고 46년만에 밝혔다.
18일 평양방송과 노동신문(3.15)은 이같은 사실을 공개하면서 이 사진에 얽힌 사연을 소개했다.
평양방송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김 주석과 벽초의 인연을 회고하던 중 "수령님께서 홍명희 선생과 단 둘이 탄 배에서 직접 노를 저으시는 역사적인 화폭을 담은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은 내가 찍은 것이다"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그때 내가 배를 타고 노를 저으면서 그 모습을 찍으려고 하니 홍명희 선생은 사진을 잘 찍어달라고 했다"며 "수령님께서 홍명희 선생과 함께 배를 타시는 뜻깊은 사진은 이렇게 마련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당시 내각 부수상으로 일하던 벽초가 일부 종파분자들의 모함으로 마음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김 주석이 이를 헤아려 바쁜 시간을 내 호수로 데려갔다고 설명했다.
김 주석이 벽초에게 "나이많은 분이 언제 배를 타봤겠느냐. 오늘은 함께 배를 타며 푹 쉬자"면서 직접 노를 잡았다는 것.
어느덧 배가 잔잔한 호수 한 가운데 이르고 두 사람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김 위원장은 사진기를 들고 있던 간부에게 빨리 그 장면을 촬영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 간부가 노를 저을 줄 몰라 결국 김 위원장이 직접 노를 저어 김 주석과 벽초가 탄 배 근처로 다가가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다.
충북 괴산 출신인 벽초는 1948년 월북 후 내각 부수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 등을 지냈다.
그의 아들 홍기문은 이조실록을 완역한 유명 국학자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 조평통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손자인 석형은 현재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함경북도당 책임비서이고 석형의 동생 석중은 `황진이'를 쓴 유명 소설가다.
chsy@yna.co.kr
(끝)
사진찍는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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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조선중앙텔레비젼이 15일 오후 8시 보도시간에 방영한 사진찍는 김일성 모습. 중앙TV는 김일성이, '교복입은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럽고 대견해 사진을 찍었다'고 전했으나 구체적인 날짜는 밝히지 않았다./북한/조선중앙TV/2005.3.15 (서울=연합뉴스)
유람선의 김일성과 지미 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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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TV는 8일 김일성 주석 11주기를 맞아 기록영화 '위대한 생애의 1994년'을 통해 1994년 6월 개인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선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방영했다./북한/조선중앙TV촬영/2005.7.8 (서울=연합뉴스)

[ 중국군의 참전을 호소하는 김일성, 맥아더는 김일성에게 무조건 항복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는 중국과 소련을 오가면서 한국전쟁에 개입해 줄 것을 필사적으로 요청했다. ]


2.김일성의 사상

김일성은 NLPDR계열내 공산주의자 그룹의 리더었다 그는 중국 공산당계열에 참여했고 그 이후 중국 모택동부대나 스탈린부대로 활동할때도 사회주의자보다는 공산주의자 원칙을 준수하면서 투쟁해온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김두봉, 허정숙등이 민족주의자로 사회주의 계열이라면 김일성, 허가이, 김책, 강건, 박헌영등은 국제공산주의 운동가로 공산주의 계열로 투쟁해 온 사람들이다

(1)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노선

 반제. 반미. 반일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노선이 NLPDR이다

 NLPDR노선은 남침도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전쟁으로 정당한다는 입장이다

ㄱ.민족해방(NL)--좌우익연합전선 구축(1단계-연합론)

남침도 민족해방전쟁으로 정당하며 통일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ㄴ.인민민주주의 혁명(PDR)--자본가와 자산계급을 타도하고 사회주의 국가 수립(2단계-우파제거)

ㄷ.NLPDR입장에서 인민해방전쟁(남침)

1단계--좌우익연합정부 수립 -->전쟁통일과 당중심으로 권력장악론

2단계--좌익정부 수립(김일성 김정일주의 주체정부 수립) 그리고 남북연합과 해방전쟁

-->계급투쟁으로 해방전쟁으로 자본가와 자산계급(지주) 타도

(2)주체사상--전통과 계승(김일성 가계 세습왕조 구축) 김일성은 신(神)이며 김일성 주변에 모든 북한주민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공산주의 체제가 바로 우리식 사회주의 주체사상이다

 ->남북통일은 주체사상 즉 김일성 김정일주의로 통일을 완수한다

 ->주체사상은 NLPDR 완결이며 최고의 단계이다

김일성 노래부르는 모습 공개







[앵커멘트]

김일성 북한 주석이 생전에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공개됐습니다.

김 주석이 부른 노래는 자신이 학생 때 직접 만든 곳인데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내용입니다.

류재복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현장음]
"고향을 떠나올 때 나의 어머니 눈앞에서 눈물 흘리며"

북한 금수산 기념궁전으로 보이는 곳에서 북한 김일성 주석이 걸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릅니다.

희끗희끗한 머리로 보아 말년의 모습인 듯합니다.

주변엔 간부들이 모여 있고 따라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현장음]
"귀에 쟁쟁해"

이 노래는 김주석이 중학생 때 직접 만든 '사향가'입니다.

타향에서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내용입니다.

북한의 조선 중앙 TV는 김 주석의 생일을 맞아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 이 장면을 1분 가량 방송했습니다.

북한 매체들이 사향가를 부르는 김주석의 기사는 자주 다뤘지만 실제로 그의 육성을 내보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YTN 류재복[jaebogy@ytn.co.kr]입니다

 

3.일본육군사관학교 23기 기병과 김광서(金光瑞)장군--항일운동가 진짜 김일성장군 동일 인물
(1)조선군사령부(대명사. 지음 古野直也. 옮김 김해경) 김광서(김일성) 내용
ㄱ.북조선 지도자의 김일성도 젊었을때는 항일 게릴라의 일원이었다는데 1935년을 전후로 하여 활약했던 이육사의 광야 시 주인공 김광서 즉 김일성일까?
그가 항일전에 참가 했던 사실은 없는 것 같다 이 거짓을 발견한 북조선정부의 고관은 살해되려던 직전 소비에트로 도망쳤다 하지만 김일성의 옛 동료들은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진상은 불명 그대로이다
일본 육사 23기생으로 일본 육군을 탈주한 김광서(金光瑞)가 김일성이라는 의명(儀名)으로 항일 게릴라를 하여 조선의 전설적 영웅이었기에 인기 높은 이 이름을 차용해 속임수 이름 (김일성)을 자칭했다고 생각된다
800km가 넘은 압록강이니 야간에 강을 건너와 부락을 불지르고 도망치는 정도라면 현대의 과격파 학생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북한 김일성이 1937년 6월에 함경남도 갑산군의 보천보 마을 공격해 김일성은 항일영웅이 되었다는데 사실은 일본인 순사 한 명이 당직하고 있는 파출소를 불태운 것 뿐이다<문예춘추사의 제군 1990년 9월호 게재 글. 북조선 내무차관 출신 강상호씨의 증언>
ㄴ.김부인(탈주해 시베리아로 간 육사 23기 김일성=김광서의 처)은 몇 년전의 부채와 생활난에 시달려 작년 겨울 살던 가옥을 매각, 부채를 정리하고 남은 돈으로 생계를 꾸려 가면서도 지부인(지청천 장군 부인)의 비참한 경우를 동정 가옥매각 때 일금 100엔을 지 부인(지청천 장군 부인)에게 기부하였다 <전의회 회보 全誼 1926년 1월 17일 게제 된 글>
ㄷ.일본정부 극비자료가 조선군사령부 책자에 많은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다

(2)신흥무관학교(교육과학사. 지음 안천)
ㄱ.김광서(金光瑞)
김광서은 일본육군사관학교 23기 기병과를 나와 일본군 장교였는데 탈출하여 신흥무관학교 달려간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역사상 극비 신비의 인물이다 비슷한 출신에다가 동시에 비슷한 길을 간 이청천(지청천)의 모든 것이 알려진 바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이 가려져 있다
그는 너무나 위장을 많이 해서 성은 물론 본관까지 바꾼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원래 이름이 김현충(金顯忠)이었다 그런데 일본육사를 다니면서 김광서(金光瑞,일본육사23기 기병과)로 바꾼다 김광서장군이 육사23기생이며 이청천이나 홍사익장군이 육사 26기이며 김석원장군이 육사27기생이었다 그리고 박정희장군이 육사57기생이다
그리고는 호적을 바꾸면서 김해(金海) 김씨를 시흥(始興) 김씨로 바꾼다
그러나 그는 경기도 시흥(始興)과는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물이고 <본인이 시작하고 일으켜 흥하게 한다=始興>는 단호한 의지를 본관으로 쓴 듯하다 그러니 그는 시흥 김씨 시조인데 그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었다 그렇다면 그 딸들이 현재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다는데 시흥 김씨는 대가 끊긴 것이라고 보아야 할 듯 하다 그 딸에 양자라도 이어야 옳지 않을지? 김해 김씨 가문에서라도 나서야 옳지 않을까?
그러나 김광서는 일본군을 탈출하면서 이름을 또 바꿔서 위장하면서 김경천(金敬天)으로 불렀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청천 같이 모친의 성을 따서 윤경천으로 쓰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때부터 역사 속에 별안간 사라진다 그가 바로 원조(元祖)의 진짜 김일성이란 학설이 날로 강해지고 있다 그가 다시 그의 이름을 김일성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당시 독립지사들은 흔히 가명을 쓰고 있었으며 동지라 할지라도 피차 자기 정채를 알리지도 묻지도 못했던 때였다 이것은 그들의 불문율이었다>

ㄴ.사라진 김광서(金光瑞) 편
청산리 대첩이 있기 얼마 전에 신흥무관학교의 핵심 인물 하나가 홀연히 사라진다
그가 사라진 것은 3.1만세 항쟁이 사그러 들면서 국내가 조용해질 무렵이니 1919년 초겨울의 어느날이었다
신흥무관학교의 맹장들은 꺼져가는 3,1운동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1920년 3월 1일의 제1회 삼일절에 해당할 날에 제2차 3.1운동을 일으킬 방안을 골똘히 궁리하게 된다 그렇게 되려면 국내로 진입하여 국내 봉기를 유발시켜야 하겠고 그러려면 당연히 무기가 필요했다
무기 구입의 중대한 임무를 띠고서 무기 구입 비밀통로를 개척하기 위해서 김광서는 용기 있게 삼원포를 떠났다 삭풍이 몰아쳐 오면서 새로운 겨울에 접어드는 합니하 강변을 떠난 김광서! 그는 그후 시베리아의 소만(蘇滿) 국경지대를 넘나들며 항일 전투를 벌이는 새로운 길을 간다 그리하여 김광서는 신흥무관학교의 맹장이면서 청산리 대첩에는 참여치 못하는 핵심 인사가 된다
그러나! 김광서의 위치는 결코 무시될 수 없는 것으로서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시베리아등으로 끌어내며 분산 작전을 펴는 등의 중대한 일을 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김광서가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려고 할 무렵에는 불행히도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고 말았으니 그는 시베리아를 넘나드는 항일전투의 길에 정면으로 나섰을 것이라 생각된다 김광서는 몇 가지 재미 있는 특징이 있다
첫째로 김경천(金敬天)이라는 이름으로 곳곳에 출몰하여 일본 정보문서에는 김경천(金敬天)이란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두목이 곳곳에서 부하를 규합하여 무장투쟁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예전에 많은 동포들과 독립군이 있던 소만(蘇滿)국경지역이 일본군에 의해 폐허가 되면서 수 많은 동포들이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을 보면서 곳곳의 침략군을 응징했고 신출귀몰하는 전법으로 일본군을 괴롭히며 동포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러다가 일본 정보문서에는 훗날 그가 김광서(金光瑞)라는 것이 밝혀진다
둘째로 그는 신문기자들에게 당당하게 본인의 전투내용을 떳떳이 알린 듯하다 신문에 알릴때는 김광서(金光瑞)라는 본명으로 알려줬기에 독립군 대장으로 신문에 인터뷰한 기사가 상당히 많아 남아 있다
동아일보에는 당시의 김광서장군이 나폴레옹에 본인을 비유하는 대담한 지휘자였음을 말한 내용까지 실려 있을 정도이다 그가 일본육사 23기 기병과를 나왔고 탁월한 지휘자임이 상세히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아마도 신문기자들에게 독립운동의 꿈이요 태양과 같은 존재로 보였던 듯 하다 독립군 대장으로 인터뷰 기사가 나간 사례는 거의 독보적인 사례에 해당할 정도의 용기 있는 행위였다
그런데! 그는 결정적인 데에서는 동포들에게 본인을 김일성(金日成)이라고 말하고 떠난 듯하다 그는 흡사 의적 일지매나 임꺽정같은 행동도 하고 백마를 타고 홀연히 나타나 일본군을 단호히 혼내 주고는 동포를 도와준 뒤에 귀신같은 사라지는 멋진 행위를 만주동포들에게 서서히 신화 같은 인물로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가며 날로 신비성을 증폭시키는 가운데 <김일성 신화>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불행한 영웅이었던 듯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본의 적(敵)인 공산 소련군과 손을 잡기도 하며 공동작전을 펴는 등의 전투를 하다가 서서히 소련군에 잡혀 버리는 길을 가고 끝내 그들에게 이용당하며 인생을 마친 듯하다
어떻든 <김일성 신화>는 그가 사라졌어도 만주 땅에 강력히 남았었고 그것이 이어지며 말기에는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김광서 장군)을 빌려쓰면서 6.25동족상잔을 일으켜 <김일성 신화>에 흙칠을 하고 마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내래 어렸을 때는 진짜 옛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수다래. 부친이 늘 우리 형제에게 너희들도 그런 훌륭한 분처럼 되라고 애기하여 주었수다래. 성주형님은 만주에 있는 우리 독립군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리고 전투를 잘했기 때문에 진짜 김일성 장군이 이름을 물려준 거야요. 형님에게 이름을 물려 준 김일성장군도 역시 그 전대의 진짜 장군으로부터 이름을 물려 받은 거야요>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가진 엄청난 공백이다 몰라서 만들어진 공백? 사회주의라는 이유에 의한 공백! 소련군과 연합으로 전투하였다고 공백! 스탈린에 무참히 끌려간 홍범도나 공산당에 잡혀 가시밭길을 간 김광서를 오랫동안 버려둔 공백! 일본 경찰의 문서조작에 의한 공백! 일본정부의 독립군 분야 비밀문서 미공개 공백!등 수 없는 공백이 있다
신흥무관학교 10년사가 토대가 된 청산리 신화도 현재로서 많은 연구가 되어 있으나 아직도 수 많은 공백이 있을 것이다 그런 공백의 대표적 사례에 해당할 것이 위대한 영웅이며 백전백승의 명장이며 불세출의 지도력을 가졌던 민족의 태양인 진짜 김일성 장군의 실종이 아닐까?

(3)전설의 김일성 장군 유족에 건국훈장 수여 (옥포誌 2000년 1월호) 정 현 백 자료
한인들 사이에 전해져 온 김일성장군에 관한 전설은 한인들이 그저 알고 있기로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약탈하던 그 때부터 '김일성 장군'이란 용맹한 항일전사가 있어서 오랜 세월을 두고 韓滿국경 혹은 露滿국경에서 일본의 군경과 숱한 전투를 백전백승으로 치루어 낸 특출한 군략가이며 애국자였다는 이야기였다. 구전으로 퍼져 와 그야말로 전설적이었던 까닭에 주인공 '김일성'의 이름자가 金日成인지 아니면 金一成인지 또 아니면 金一星 또는 金日星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이러한 전설이 생겨날 만한 사실상의 근거가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는데 그것은 '金一成 장군'이란 항일투사와 또 한 사람, 같은 발음의 '金日成 장군'이라는 항일투사 두 사람의 투쟁사에 얽힌 이야기였었다. 그 전설적 김일성장군 그 중의 한 사람인 김경천 장군의 혈육이 8·15 50주년을 맞아 지난 98년에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게 되었다고 하니 후손 된 우리로서 심히 민망스러워 몸둘 곳을 모르겠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작년 8·15 50돌 기념식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은 독립군 장령 김일성장군(金一成. 1888년 함남태생) 즉 김경천 장군에 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백마를 타고 번개같이 날아다녔다는 김경천 장군의 본명은 '김광서'로서 함경남도 북청출신이며 1911년 일본 육사 23기생으로 기병과를 졸업하고 도쿄 기병 제1연대에 근무한 바 있고, 1917년 1월에서 9월까지는 육군기병실시학교에서 용병법과 기마술을 교육받은 바 있으며 일본육사출신 한인 친목 모임인 "전의회"의 회장으로서 그 회원 중에는 일본 육사 26기 흥사익, 이응준, 27기 김석원, 김인욱 등 34명이 있었다. 앨범에 적힌 김경천(본명 김광서)의 생일은 1887년이나, 종로구청 호적계의 제적서고에 있는 그의 호적등본에는 1888년 6월 5일로 되어있으며, 1919년 6월 망명이전까지의 주소는 사직동 166번지인데 1912년 12월 2일 본인 출원에 의한 취적 등록이라 되어있고 본적도 이곳으로 옮겨져 있고, 본관도 김해에서 시흥으로 되어 있는데 본인 출원에 의한 정정이라 기록되어 있다. 동향인의 증언에 의하면 북청군 해안의 승평태생임이 틀림없다고 한다. 육사 재학 중에 이름을 김광서로 개명했고 그 이전의 이름은 김현충이며 김경천, 윤경천 등의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父 김정우는 구한말 포병부령까지 지낸 자로서 1857년생이며 1894년 5월 38세의 나이로 일본 경응의숙보통과에 입학하였다. 그의 반에는 윤치성(윤치영의 형) 노백린 등이 함께 했는데, 이들은 육사 11기로 1899년에 졸업하게 되고 김정우는 동경고등공업학교를 거쳐 포병공작창에서 총탄제조법을 익힌 후에 돌아와서는 군기창장을 지낸 바 있으며 1906년에는 윤치성과 함께 부령으로 승진된 바 있는 사람이다.

1919년 2월 20일 김경천은 병가를 얻어 귀국하여서는 6월에 일본육사 3년 후배인 이청천(지대형)과 함께 만주로 탈출 신흥무관학교에 찾아가 독립군 교육부터 담당했다. 이 소식에 고무되어 열혈청년이 600여명이나 신흥학교에 몰려들었다 한다. 이 때에 구한국군 정위(대위) 신팔균도 함께 교관으로 있었는데 세 사람이 합심단결하여 조국광복을 쟁취하자는 뜻에서 天자 돌림 별호를 쓰기로 하여 신동천, 김경천(또는 윤경천, 母가 윤씨), 지청천(이청천, 母가 이씨)으로 서로 불렀는데 한인 사회에서는 이들을 남만삼천(南滿三天)이라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이 남만 3천에 열혈 청년장교가 한 사람이 더 끼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철기(鐵騎)란 별호를 가진 이범석(李範奭)이었다. 그는 그해 봄에 중국의 운남성에 있는 운남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장교로 배치되었는데 남만의 신흥무관학교가 독립군의 집결지라는 소문을 듣고 그해 여름에 그리로 찾아와서 남만 3천과 합세했다. 이들 4사람의 장교들은 당면 목표를 다음해(즉1920년) 3월 1일을 기해 국경을 넘어 조선 땅으로 진격함으로써 3·1민족봉기를 재현시키는 일대 계기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범석씨(1900-1972) 증언에 따르면, 1920년 3월 1일을 기하여 국내로 진격하기 위한 거사 계획의 일환으로 김경천은 1919년 초겨울에 무기구입차 소련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때 시베리아에는 볼셰비키 혁명의 파급을 막기 위해 일본군이 출병해 있었는데 일본군의 한인 독립운동 근거지에 대한 공격 때문에 김경천은 독립군을 규합하여 日軍과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원리에 따라 赤軍(볼셰비키군)과 연합하여 일본군 또는 白軍(反볼셰비키군)과 싸웠는데 이때에 그는 김일성이란 또 하나의 별호를 쓰게 되었다. 1920년대 전반의 독립운동 소식으로는 김경천에 관한 기사가 가장 으뜸으로써 그에 관한 기사내용이 허다하나 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빙설에 쌓인 서백리아(西伯利亞)에서 홍백전쟁을 한 실지 경험담'이란 장문의 인터뷰 기사가 유명하다. 오늘날 누구나 읽어 볼 수가 있다. 전설의 김일성 장군 즉 김경천 장군은 매우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그 인터뷰기사 말미에는 그가 읊은 '시베리아의 별'이란 시가 실려 있는데 옮겨본다.

뜬구름도 방황하는 시베리아 별
칼을 짚고 출로 서서 흰뫼 저편을 바라보니
사랑하던 무궁화는 희미하고

자유에 목마른 사람이 이천만 애처롭다
뜻이 열 곳이 없으므로
흑룡수에 눈물 뿌려 다시 맹세하노라


그러나 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 김경천에게도 불행은 닥쳐왔다. 동맹이었던 볼셰비키의 배신으로 독립전쟁의 꿈이 수포로 돌아갔다.

1922년 가을, 일군이 시베리아로부터 철수하자 볼셰비키는 의리부동하게도 한인 독립군부대들에 대해서 赤軍에의 편입, 영외로의 추방 무장해제 등등의 조치를 취했던 바 "약소민족 해방" 구호에 고무되어 赤軍의 편에 섰던 김경천으로서는 그들의 배신과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부하대원들을 소만 국경으로 이동시켜 둔전병제를 실시하려고 간도방면으로부터 많은 대원들을 모집하여 병력이 일천여명에 이르게 되었고 구로지꼬 부근에 무관학교까지 설립할 계획까지 세웠으니 볼셰비키들의 의도와는 정반대 되는 입장에 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25년 4월 28일자 매일신보'에는 '김광서가 독립노선 문제 때문에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하였다'는 보도가 실려있고 '1925년 6월 21일자 동아일보'에는 '김광서가 1924년 3월에 한족군인구락부를 조직하여 본부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지부롤 니콜스크에 두고 제2차 국민회의를 조직하려는 등 그 활동이 매우 컸으며 초지를 관철하기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여 대대적인 활동을 개시하고자 한다'라고 전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의 소식은 두절되었다. 그후 '1925년 7월호 '전의회'의 회보에 '김광서의 부인이 세 딸을 데리고 한국을 떠나 어디로 사라졌다'는 소식이 실려있는데 김경천(본명 김광서)에 관한 마지막 소식이었다.

김경천과 시베리아에서 얼마 동안 활동을 같이 한 적 있는 "김 마트웨이"라는 사람(소련거주한인)이 20여년 전에 그의 회고록에서 밝힌 김경천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김경천은 그 후 소련의 여러 군사기관에서 군사지도원 또는 원동조선사범대학의 군사교관으로 있은 적이 있고 1933년부터 1936년까지는 소련당국에 의하여 투옥되었는데 그 원인은 밝혀진 바 없었으나 스탈린의 민족주의 말살정책의 일환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석방된 이듬해인 1937년에 다른 한인들과 함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는 비운을 맞게 되고 그곳의 한 협동농장의 작업반장으로서 노동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1939년 2차로 체포된 다음 그 후의 소식은 알 길이 없으나 풍문에 의하면 독소전쟁 발발후 서부 전선의 로고스프스키 장군 밑에서 대령계급으로 사단을 지휘하다가 1945년 초에 전사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그런데 금번에 찾은 혈육으로부터 그분이 감옥에서 심장질환으로 병사했다는 사실과 소련정부가 그의 사망 17년만인 59년에 복권시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자료** -평양숭실학교

1897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W.M. 베어드(한국명: 裵緯良)에 의해 평양에서 숭실학당(崇實學堂)으로 출발했다 1905년 대학교육을 시작 1906년 숭실학당 대학부를 설치하였다

1912년 숭실대학으로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한국 초초의 대학이 되었으나 1925년 일제의 <전문학교규칙>에 의해 4년제 문과만으로 편성된 숭실전문학교가 되었다

1938년 3월 자진 폐교했다가 1954년 다시 개교하였고 1957년 6월 서울시 동작구 상도5동 현위치로 이전했다 평양숭실학교 출신으로 김형직,조만식, 안익태, 현제영등 민족주의자 다수가 배출된 기독교 학교었다

 

 - 정의부(正義府)와 화성의숙(樺成義塾)

정의부(正義府)는 1925년 1월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1920년 청산리전투 후 일본군의 간도지방에서의 학살과 1921년 자유시참변등으로 한때 만주.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이 침체, 분산되어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이 요구되었다 이에 통의부(統義府)를 중심으로 하여 군정서(軍政署). 의우단(義友團). 광정단(光正團).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변론자치회, 노동친목회. 고본계(固本契)등 8개단체 대표들이 통합하여 1924년 11월 정의부를 결성하기로 합의한 뒤 다음해 1월 길림성 화뎬현(樺旬懸)에 본부를 두고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중앙집행위원장 이탁(만주사변 후 변절), 총무위원장 김이대(金履大,만주사변 후 변절),군사위원장 지청천(池靑天), 재무위원장 오동진(吳東振), 민사위원장 김호(金虎), 법무위원장 이진산(李震山), 외무위원장 현익철(玄益哲), 공안부위원장 김철(金喆), 산업부위원장 장승언(張承彦)등을 선임하였고 무장력은 7개 중대에 이르렀다 군사행동을 주목적으로 하는 한편 치안행정. 교육사업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근대적 헌법체계인 삼권분립제도, 내각책임제, 지방자치제를 채택한 새 헌장(憲章)을 제정하였다 그 밖에 농민조합과 농업공사를 설립하여 황무지를 사들이고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을 정착시켰다 또한 각지에 소학교를 설립, 보통교육을 의무화하고 화흥중학교(化興中學校) 동명중학교(東明中學校) 화성의숙(樺成義孰)을 세워 중등교육과 간부양성에 힘쓰며 기관지 <전우> <대동민보>를 간행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참의부(參議府)와 함께 남만주지역의 2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1927년 12월 수뇌부가 일본경찰에 붙잡힘으로써 해체되었다 1928년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간부들이 연합,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기성단체 인정 문제로 분열되었다 1929년 참의부 일부세력과 신민부 민정파가 국민부(國民府)로 통합되었다

 김성주(김일성)은 정의부 화성의숙 출신이다

 -길림성 통화에 있는 항일전쟁의 영웅 양징위(楊晴宇)의 무덤과 눙안(農安)에 있는 팔각 13층의 랴오(遼)국 고탑 http://www.heraldbiz.com/SITE/special/200403180001/2004/04/22/200404220059.asp

2차대전 중 중국 동북지방의 항일군사령관이던 양징위(楊靖宇) 장군이 전사하자 시체를 일본군이 해부했는데 위 속에 남아있는 풀뿌리를 보고 그 각고정신에 감탄했다. 그리하여 강경 일변도의 전략으로는 중국을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 전략을 바꾸게 한 일은 유명하다.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독재주의!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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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일 공산정부도 공산독재체제를 버리고 중국 호금도 사회정부처럼 사회정부나 러시아 푸틴 자유민주정부처럼 자유민주정부로 변모돼야 할 시기입니다 이데올로기는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라는 것을 역사 책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반미청년회) 제거와 북미수교 추진 세력---동아시아 지능센터(머리소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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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노태우정부 대북추진--남북총리회담과 남북동시 유엔가입

-소련도 패권주의로 규정하여 자국 소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앙아시아나 중국, 한반도, 동유럽등지이에서 전쟁을 추진할 수 있다는 의견제시(1985년 의견 자료 제출)

-한국정부나 친미정부들이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를 추진할수록 일당 독재 공산정부가 붕괴될 수 있다는  의견 제시(3당 합당과 김대중세력등이 한국정부 세력으로 편입)

-중국정부의 수평적 권력교체 추진

등소평주석이 강택민주석에게 권력을 넘겨 줌으로 중국정부내 일인 독재정치 청산 그리고 수평적 권력교체 추진(중국정부도 소련 공산당 일당 독재정부가 중국 발전에 저해되고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지역에서 전쟁세력이 될 수 있다는 의견제시)

-남북연합정부 기반으로 연방정부 추진

남북 동시 유엔가입과 남북대화 추진

-소련군부쿠데타 세력 제거와 러시아등장 그리고 독일 통일

*우려 대상

남북한 정치세력 끼리 연합이나 반목으로 국제사회를 능통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북한 한국민족민주전선을 결성하여 남한 선거에 개입해왔으며 향후 전쟁도 모색해왔다 그리고 남한도 탈북자나 북한정부를 적으로 규정하여 남북협상세력을 좌익이나 친북세력으로 내몰았다 특히 남북협상세력을 좌경화 세력으로 규정하여 척결대상으로 의식화하여 그들이 반정부세력으로 내몰았고 그런 연유로 많은 젊은 학생들이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남한정부 내부 세대간의 의식격차와 교육 차이로 지도자들 의식수준이 남북협상세력을 주도하는 학생세력보다 낮은 형편이었다 실제로 6공화국 헌법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자유민주정부인데도 NLPDR 한국민족민주전선과 남북협상세력을 구분 못하여 민자당 정권이 붕괴위기이었다

북한에도 수평적권력교체나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세력과 남북전쟁세력 NLPDR를 구분 못함으로 탈북자가 증가하고 북한정부 내부 권력투쟁으로 남북긴장이 조성되어왔다

 

2.김영삼정부 대북정책과 남북정상회담 추진

김영삼대통령이 김대중선생과 연합으로 정국을 추진하여 김대중선생이 남북정상회담 협조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는 모델

-전두환전대통령이나 노태우전대통령은 양김연합으로 권력유지를 바라는 입장이었고 항구적으로 점진적 개혁요구(개인적인 사후보장:광주문제는 정치적 문제임으로 양김이 전직대통령의 지위와 역할을 보장)

-한국민족민주전선은 남북정상회담이 남북한 권력연합으로 나아갈 것으로 추측하여 반미투쟁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반김영삼투쟁을 감행했다

북한정부 내부 반미세력 NLPDR 월북자세력이 문제이다

이들이 남북냉전시대에도 남북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데 남북정상회담이나 남북대화 협력이 증가될수록 소외계층이나 숙청세력으로 분류되어왔다

 

*김영삼정부 대북추진과 남북정상회담 실패

김영삼정부의 김일성주석 항일운동 인정---->한국전쟁 남침으로 규정하여 중국정부 사과---->김대중대통령 남북정상회담 지지---->미국정부 남북정상회담 지지와 북미수교 추진 시사----->민혁당 지도부 월북과정과 일부 재야세력 투쟁(이선실 간첩)---->김일성주석 사망

-남북한정부 모두 한민전 세력을 사전에 제거하지 못함으로 외세나 극렬민족주의 세력에게 이용되었다는 사실

-북한정부 내부의 대남정책 추진세력의 이원화 조직

-남한정부 내부 일부 극우민족주의 반러시아세력이 탈레반세력 처럼 체친반군세력을 지원하여 중앙아시아나 중국정부, 북한정부 붕괴를 유도하거나  공산주의 세력을 이용하여 선거를 준비하는 모델로 언론 공격화 추진

-남북이 너무 장벽이 많았고 특정세력만이 남북정보를 공유하는 분위기

북한사회도 중국이나 베트남 사회와 비슷하다는 것과 남한정부는 일본이나 미국처럼 자유화사회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었다

-김영삼정부 인사들이 사전에 지능센터 의견처럼 한민전 서울대표부를 제거한 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다면 남북대화는 김영삼정부에서 중단되지 않았으며 강릉사태나 이선실 파일이 등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김일성주석 항일운동도 가짜나 조작으로 규정해야 할 형편에 이인모 장기수 북송이나 남북협력은 별 효과가 없었다 그리고 북한 서적 한 권을 보고 있다고 좌경학생이나 불온서적 탐독자로 취급하여 재판에 구속하는 좌경화 악마들의 행진도 해왔다

북한의 모든 서적이나 문화 ,사회제도, 인사등이 불온이나 적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인정하거나 객관적 역사 자료 그리고 사회주의 연구자료등은 불온이나 좌경이 아니다

-김영삼정부 인사들이 차기 대통령 선거를 민혁당 사건으로 준비해오고 있다는 미국정부 정보를 입수하고 사전에 제거하고 김종 필선생이나 김대중선생이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명단을 입수함으로

양김공동정부 탄생이 되었다 남북정부는 간첩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아야 남북대화나 협력이 중단되지 않는다

남한정부 극단적 민족주의자 우파도 한민전을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전두환 노태우전대통령 재판회부도 쓸데없는 말을 지능센터(머리소리함)에 지껄리기 때문이다 한민전은 반미청년회조직이었다  반미청년회는 전두환 민정당 집권시기에 창당 되었고 노태우정부때 한민전으로 개편했기 때문에 전두환 노태우정부 정보책임자들이 반미청년회와 한국민족민주전선을 잘 알 것이다

전두환정부때 남한은 GOP 3중철책선을 구축했으며 중국과 미국 수교로 중국이 실용주의 친미정부이다 잠수함이 남한 해안에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전두환 노태우 정부 정보책임자들 모두 구속해야 할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은 보고 좌익이나 친북세력으로 교육화나 의식화그룹이 전두환 노태우전대통령 구속으로 사라졌다는 것도 영남지역의 특징이었다 김대중대통령은 한국전쟁 당시 전남 해상자위대 부사령관으로 활동하여 많은 인민군을 사살했다 한국전쟁때 국군이 부산으로 남하하여 지하우익세력이 바로 자위대(치안대)이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인민위원회를 제거하고 등장한  합법조직이 치안대(자위대)이다 *자위대(치안대):민병대-향토예비군

미국정부와 유엔등이 1992년 선거때 만화 김대중 책자에서 자위대 활동자료 입수

-남한정부에서 공안정국을 주도하는 세력이 검찰 공안부와 경찰,국방부,국가안전기획부었다 경찰도 자치경찰이 등장하고 있으며 국정원이나 국방부도 많이 변화되고 있으며 선진국으로 나아가고 있다  아직도 검찰 공안부가 국제적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인권침해 사례 주요 부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유엔의견이다 검찰 공안부도 재야출신들이 많이 영입되어 간첩이나 각종 사건등을 선진화 해주기를 바라는 입장이다 김대중대통령이나 많은 민주화 인사를 구속하고 처벌한 단체는 검찰 공안부이다

-북한정부도 수평적 권력교체나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를 추진하지 않는다면 남북전쟁세력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세력을 이용할 것으로 본다 중국정부도 항시 남북거래 세력 NLPDR세력 동향과 그 세력을 이용하는 북한정부 주요인사 세력를 파악하고 있다

-북한도 남한정부에 선거개입을 하지 말아야 하며 남한도 북한정부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본래 선거나 간섭을 추진하는 세력은 남북 공안부세력들이다

이들은 국가발전이나 남북통일에 부정적이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인사청문회나 민선으로 선출하여 국가의식이나 민족의식을 가르쳐 주고 있다

 

3.김대중정부의 대북정책과 남북정상회담

남한 공안세력 제거(영남정부 수립론자나 재벌기업 위주로 정부수립자 제거)---->남침세력 즉 NLPDR 세력 이선실 파일제거(민혁당과 남한 간첩세력 일당 타진)----->남북정상회담------>남북한 비밀거래나 각종 의혹 언론화나 과거청산 추진---->뉴욕참사와 국제적으로 극우세력 제거(반소련 국가사회주의 그룹)---->중국정부 수평적권력교체와 푸틴등장 그리고 중앙아시아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바람----->북한정부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추진과 김정일 후계자를 제3자 인물로 추대 가능성 시사, 김일성 친척권력 청산 추진---->핵무기 포기와 북미 북일수교 추진 그리고 프랑스 이외 모든 유럽연합국가와 수교---->남북 2개정부 인정과 남북연합국가 추진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자유민주정부를 부정하는  모든 세력 제거 추진(극단적 민족주의 세력인 NLPDR과 국가사회주의 그룹 제거 추진)

-남북한 정보 자유화 개방화 추진

과거에 전대협이나 한총련등이 통일부 북한 자료 일일 선전자료를 이용해왔다 통일부도 북한 자료를 개방화 자유화하여 특정단체들이 북한자료를 독점화하여 극단적 반미 친북단체로 나아가는 것을 차단해야 하며 북한을 연구하고 남북통일에 노력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전대협이나 한총련도 남한정부 입장에서 볼때 자유민주정부를 인정하는 통일부 단체들이다

그들을 북한정부 단체라고 보기는 참으로 잘못되었다고 본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부정하고 있으며 자본주의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정부에서도 많은 자료를 연구하면서 과거 특정단체가 권력을 독점할때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고 있다

-남한도 북한정부 특권층이 사라지고 있다

북한정부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돈거래나 무역상사등으로 활동하는 분 그리고 북한정보를 특정단체가 독점화 하는 시대는 사라지고 있다

지금 남과 북도 형식적으로 대표부 수준이면 몇년 이내 대표부로 합법화 될 것이다 그 이후에는 북한 자료도 객관적이고 수준 높은 정보사회가 될 것이다

간첩도 사라질 것이고 거짓말 정보가 사라질 것이다

냉전시대 남북거래나 간첩건수로 돈을 착복한 인사들도 사라질 것이다

-남과 북도 중요하지만 호남과 영남 지역분열 추진세력도 사라져야 한다

부산세력이니 신라세력이니 호남향우회니 광주세력이니 하면서 정권을 재창출하겠다는 논리개발도 중지해야 한다

김대중대통령은 노무현대통령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그것은 김대중대통령이 지역분열정책을 싫어했고 지능센터(머리소리함)이 지역대결구도 청산을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아직도 노무현 부산지지자세력이니 울산세력이니 하면서 공안이나 경찰등을 단결을 조성하는 세력도 있는 것으로 조사해왔다 특정세력이 국가권력을 넘겨보는 행위는 중지돼야 한다

이제부터는 지역대결도 아닌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자유민주정부에서 진보와 보수세력으로 개편할때 남북통일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노무현대통령도 특정지역 개인 사조직이 권력을 장악하려는 계획도 중지돼야 하며 특정 부서(통일부나 복지부, 해양수산부등)가 권력을 넘겨보는 것도 중지돼야 한다

한국 정당이 하루 아침에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 천년이나 만년까지 지속하는 정당으로 나아가야 하며 정치는 정당정치 또는 의회정치가 돼야 하며 한국 정당도 자금을 확보하고 지속적인 재산이 있는 정당이 돼야 한다 대기업,공안부나 경찰, 군부, 정보부 정치가 지금 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노무현대통령이 당선되게 한 것은 노사모도 아닌 민주당이다

-북한 김정일 실권자나 여러 지도자들도 국제사회 환경을 알아야 한다

러시아는 자유민주정부이고 중국도 사회정부이다

남과 북이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북한이 사회정부나 자유민주정부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고 북한정부가 핵무기를 포기하고 경제대국 모델로 나아가는 것이다

북한은 남한 보다 넓은 국토와 자원이 있다

북한이 자유민주정부나 사회정부가 되어 남한보다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김일성 김정일 가계의 특권의식을 버리고 북한이 중국이나 러시아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 있을때 권력유지보다는 내가 죽었을때 처형이나 화형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인간은 죽는다  위대한 민족운동가라면 조국을 생각하면서 죽을 것이다 권력 도취나 돈 유혹을 버리고 후손들 생각하는 위대한 인물이 돼야 한다 북한정부의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가 남한정부 내부 공안세력이나 대기업세력들이 사라지고 국민 대다수가 참여하는 자유민주정부가 될 것이다 북한정부 남침세력 NLPDR이 확대 할수록 남한정부는 극단적 권력 독점세력들이 등장하여 국민들을 수탈하고 착취할 것이다 극우세력과 극좌세력 공존이 남북분단이다 이들을 머리소리함이 심장마비나 뇌졸도로 제거해야 한다 돈을 좋아하면 기업을 운영해야 하며 공안부서나 군인,경찰이라면 국가안전과 국민안위를 위해서 살아라 "

 

-미국,중국등 유엔도 남북한 전쟁세력을 항구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미국을 이용하거나 중국을 이용하여 전쟁을 추진하는 세력도 사라져야 한다

그리고 중국이나 북한도 공산주의 운동을 중지해야 하며 그들이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적이 되지 말아야 한다

 

-북한정부는 핵무기를 즉각 포기하고 북미, 북일, 남북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남북거래 특권층을 하루 속히 청산하고 합법적인 남북협력으로 확대돼야 할 것이다

 

-남북한은 냉전시대나 남북정상회담 이전에 남북연구나 조작된 간첩사건등으로 고생한 분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는 것이 올바른다

남북 공동정부 과거사 청산위원회를 구성하여 각종 의혹들을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중국정부나 미국정부 참여하여 의혹사건을 규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