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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일성 전(前)주석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본문
1.김일성의 생애 (1)김형직과 강반석 김형직(金亨稷)은 김일성의 아버지이다 김형직의 먼 조상은 전라도에서 살았다 김형직은 전주(全州 또는 完山) 김씨로 1894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나 평양숭실학교를 마쳤고 1917년 3월 강동군에서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국민회를 결성했다 조선국민회 활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뒤 만주로 망명했다 북한의 문헌에 의하면 비합법적 단체 조선국민회와 함께 학교계, 비석계, 향토계등의 계를 결성하였고 중강, 무송등지에서 광제의원, 무림의원, 순천의원등을 설립, 의료사업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항일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북한 정권 수립이후 아내인 강반석과 함께 <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로 추앙 받아 김형직사범대학, 김형직 인민병원등이 설립되었다 북한에서는 국가적인 위대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관련된 자료가 모두 북한 것으로 한정되어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강반석(康班石)은 김형직보다 두살 위로 1892년 4월 21일 기독교 목사이며 교육자 강돈욱의 둘째 딸로 태어나 기독교계 평양숭실학교를 나온 김형직과 결혼하여 김형직 나이 18세, 강반석 나이 20세때 김성주(김일성) 첫 아이를 낳았고 그 후 둘째 아이 김철주(김철주는 낳았는데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막내 김영주등 삼형제를 낳았다 (김일성은 북한 주석을 지냈고 김영주는 북한 부주석을 역임했다) 김형직은 김일성의 나이 14세때 1926년 32세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으며 강반석은 김형직을 따라 만주로 이주하여 한약상을 하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다가 1932년 7월 31일 40세로 병사(病死)했다 김형직과 강반석 집안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집안이었다 평안도는 조선후기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곳이고 그 지방의 기독교도들은 그 시대의 상황에 비추어 볼때 모두 지식인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강반석의 집안은 김형직의 집안보다 더 독실한 기독교인들로 강반석의 부친 강돈욱은 만경대 일대에서 신임을 받던 교육자이자 장로교 교회의 장로로 열심히 성경을 가르쳤다 1992년 김일성은 회고하기를 그의 어머니가 자신을 교회의 장로로서 열심히 성경을 가르쳤다고 했다
(2)김일성의 생애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이며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 오늘날의 만경대의 농가에서 중농계급의 집안에서 출생했으며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 사이에 장남이며 그의 동생 김철주(金哲柱), 김영주(金英柱)를 두었다 김성주(김일성)은 어려서는 일골살 나이 1919년에 부모을 따라 만주 지린성(吉林省) 푸쑹(撫松)등의 만주로 이사하여 그의 부친 김형직의 한인동포를 상대로 의사노릇을 했으며 김성주(김일성)은 만주에서 <정의부>라는 독립운동단체가 운영하는 화성의숙에서 수학했다 화성의숙의 숙장(교장)은 천도교 신자이면서 민족주의자인 최동오선생이었다 최동오는 뒤날 상해임시정부의 간부가 되었는데 그의 아들이 대한민국에서 육군소장과 박정희정부때 외무부장관 및 서독대사를 역임하고 나중에는 월북한 최덕신이다 1926년 김성주(김일성) 나이 14세때 그의 부친 김형직 갑자기 사망했고 1926년 지린(吉林省) 길림의 육문중학교(위원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의 어려움 환경 속에서 이 학교에서 막스 레닌주의(마르크시즘과 레닌니즘)에 접했으며 공산주의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곧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하여 1929년 중학교 2학년 때 퇴학을 당했고 길림에 있는 감옥에 얼마 안되는 기간이지만 투옥되기도 했다 이런 배경을 놓고 볼때 김성주(김일성)은 어린 시절을 만주에서 지냈기 때문에 중국의 생활풍습과 중국어에 상당히 익숙해졌다는 점이다 김성주(김일성)은 중국 공산당의 한 산하조직에서 공산주의자로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김일성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기는 그가 스무 살이던 1932년에 일어났다 그 해는 그의 어머니가 죽고 일본 제국주의가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 해였다 그 해에 김성주(김일성)은 남만주에서 조선인들에 의해 조직된 작은 규모의 항일 유격대에 가담하였던 이 유격대는 같은 해에 중국인 양징위(양청우, 楊晴宇)가 지휘하는 <東北抗日聯軍>의 산하로 통합했다 김성주는 이때부터 항일운동가 전설적인 영웅 김일성(김경천= 金光瑞장군) 이름을 도용하여 김일성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金光瑞은 일본육사 23기 기병과 출신으로 항일무장투쟁 때는 김경천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 부대는 몇 해 안에 규모도 커지고 활동영역도 넓어지게 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이 1936년 초에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 조직되고 여름부터 팔로군 제도가 실시됨으로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로군(第1路軍) 제6사(第6師)로 된 제6사장(第6師長) 김일성가 되었다 김일성의 대표적인 업적이 1937년 6월 4일 보천보습격사건이다 동북항일연군 제1팔로군 제6사장 김일성부대가 자행한 보천보 습격은 철저히 물자조달을 위한 약탈사건이었다는 것이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김일성은 몇몇 전투에 참가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일제는 동북항일연군의 뿌리를 뽑아버릴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물론 회유작전도 병행했다 일제에 투항하면 돈을 주기도 하고 처벌을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관동군의 2중작전은 효력을 발휘하여 투항자가 속속 출현했다 1940년 2월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로군 사령관 양징위도 마침내 관동군에 쫓기다 살해 되었다 관동군은 그의 배를 갈라 보았다 그의 백 속에는 나무 껍질이나 풀 따위가 남아 있을 뿐 곡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극악무도한 관동군이라도 양징위에 대하여 경의를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불교의 스님을 모셔다가 극락왕생을 비는 염불도 올리게 하고 묘를 만들어 주었으며 좋은 비석도 세워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만주에서의 동북항일연군의 유격대원들이 얼마나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었나를 극명하게 증명한 사건이었다 일본군에 끊임없이 쫓겨면서 전투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보급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동북항일연군도 살아남기 위해서 일종에 마적이나 공비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김일성도 쫓겨다녔다 그는 여섯명의 대원을 이끌고 두만강변을 따라 1941년 3월에 극동 러시아로 탈출했다 김일성은 곧 블라디보스그톡 (연해주) 근처의 <오스케얀스카야 야전학교>에 배치되어 군사훈련을 받았다 최용건, 김책, 안길, 김광협, 서철, 최춘국등도 이 지역 배치되어 군사훈련을 받았다 일본과의 전쟁의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판단한 소련 극동군은 하바로프스키 근처의 비밀 기지인 브야츠크에 <88특별여단>을 창설했다 이 부대는 동북항일연합군에서 활동 중인 유격대원들로 구성되었는데 총인원은 조선인 60여명과 중국인 1백여명에 소련인 40여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산하 4개 대대 가운데 김일성이 대위로서 제1대대장을 맡았으며 강건이 제4대대장을, 김책이 제3대대 정치위원을 맡았다 김일성은 이 무렵 자신의 유격대원이었고 함북 회령 출신으로 자신과 함께 극동러시아로 탈출해 온 김일성보다 여섯 살 연하 김정숙(金貞淑)과 결혼했다 김정숙은 1942년 2월 16일에 브야츠크 야영에서 쌍둥이 유라(김정일)와 슈라를 낳았다 극동 러시아의 빨치산 생활 가운데 중요한 전기는 1945년 7월에 이루어졌다 <88특별여단>에 속한 조선인 전사들이 중국인 전사들과 소련의 전사들로부터 분리된 <조선공작단>을 결성했는데 김일성이 단장으로 뽑힌 것이다 그들은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획하던 가운데 한달 뒤인 8월 15일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8.15광복과 더불어 소련군을 따라 평양으로 들어와 김영환이라는 가명으로 정치공작을 폈는데 그해 10월 14일 소련군 사령관 로마넨코가 평양시민들 앞에서 <김일성장군>이라고 그를 둔갑시켜 소개한 뒤부터 김일성으로 행세하였다 *사진 설명: 소련군정 및 북로당 간부들 앞줄 우로부터 허가이. 김일성. 소련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령. 김두봉. 소련군 정치국장 이그나치포 대좌. 김책 뒷줄 우로부터 주영하. 박일만. 최창익등
처음에는 자신을 제6사단장 및 제2방면 군장이던 김일성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1949년부터는 동북항일연합군과의 관계를 내세우지 않고 만주사변 후부터 독자적인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여 일제와 싸운 것처럼 날조된 정치적 선전을 하였다 그는 소련군의 힘으로 조선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 책임비서,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내각수상, 인민군 최고사령관을 맡고 원수 칭호까지 썼다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장 겸 국방위원회 위원장등 최고위직을 역임하였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 통일을 주도했고 그후 여러 차례 전쟁통일 추구했다 김일성은 남침전쟁을 이렇게 묘사했다
두 장의 사진은 백범 김구 선생이 1948년 4월 남북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 주석과 함께 찍은 것으로 기념관 2층에 전시돼 있다. 사진 밑에는 ‘1948년 4월22일 김일성 주석의 안내로 남북연석회의장에 입장하는 백범 김구선생’이라고 적혀있다.
-김일성 찬양 포스터
http://news.media.daum.net/politics/north/200503/31/segye/v8729743.html
1947년 김일성이 조선의 한 농촌마을을 시찰할때 모내기를 하는 장면이다.
사진은 1989년3월에 김일성이 한국목사 문익환을 만날을때의 장면이다.
사진은 1972년8월에 조선을 방문한 재일조선소년들과 함께 있을때 장면이다.
김일성과 백범 김구선생
조선전쟁시기의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총사령 팽덕회
등소평에게 담배 불을 붙여주는 김일성
(3)김정숙 김정숙은 1917년 12월 24일 함북 회령 출신으로 김일성보다 5년 연하의 여성으로 김일성과 유사한 배경을 가진 빨치산이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 부친을 찾으러 어머니와 함께 만주로 들어갔다가 모친 사망 후 고아가 되었으며 1935년 16세 때 빨치산부대에 입대하여 밥짓는 일을 맡았다 동북항일연합군의 무력투쟁이 내리막길을 걸던 1940년 말경 김일성과 김정숙은 결혼했고 다음해 3월쯤 김일성을 따라 소련으로 도피, 88여단에 가입했다 1942년 2월 16일 하바로프스크 바트코스예 마을에서 쌍둥이 아들 유라(김정일)와 딸 슈라를 낳았다 슈라는 3-4세때 하바로프스크 바트코스예 마을 우물에 빠져 죽었다 아직도 슈라의 무덤이 있다 김일성과 김정숙은 해방 후 평양에서 장녀 김경희를 낳았다 그녀는 북한 남아 있는 김정일의 유일한 누이 동생이며 장성택이라는 당간부와 결혼하여 김정일을 보좌하고 있다 김정숙은 1949년 9월 22일 네 번째 아이를 출산하다가 모자가 함께 사망했다
-나란히 선 카스트로와 김일성
-40년전 김일성과 김정일..그리고 메가와티?
2.김일성의 사상 김일성은 NLPDR계열내 공산주의자 그룹의 리더었다 그는 중국 공산당계열에 참여했고 그 이후 중국 모택동부대나 스탈린부대로 활동할때도 사회주의자보다는 공산주의자 원칙을 준수하면서 투쟁해온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김두봉, 허정숙등이 민족주의자로 사회주의 계열이라면 김일성, 허가이, 김책, 강건, 박헌영등은 국제공산주의 운동가로 공산주의 계열로 투쟁해 온 사람들이다 (1)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노선 반제. 반미. 반일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노선이 NLPDR이다 NLPDR노선은 남침도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전쟁으로 정당한다는 입장이다 ㄱ.민족해방(NL)--좌우익연합전선 구축(1단계-연합론) 남침도 민족해방전쟁으로 정당하며 통일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ㄴ.인민민주주의 혁명(PDR)--자본가와 자산계급을 타도하고 사회주의 국가 수립(2단계-우파제거) ㄷ.NLPDR입장에서 인민해방전쟁(남침) 1단계--좌우익연합정부 수립 -->전쟁통일과 당중심으로 권력장악론 2단계--좌익정부 수립(김일성 김정일주의 주체정부 수립) 그리고 남북연합과 해방전쟁 -->계급투쟁으로 해방전쟁으로 자본가와 자산계급(지주) 타도 (2)주체사상--전통과 계승(김일성 가계 세습왕조 구축) 김일성은 신(神)이며 김일성 주변에 모든 북한주민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공산주의 체제가 바로 우리식 사회주의 주체사상이다 ->남북통일은 주체사상 즉 김일성 김정일주의로 통일을 완수한다 ->주체사상은 NLPDR 완결이며 최고의 단계이다 김일성 노래부르는 모습 공개
**자료** -평양숭실학교 1897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W.M. 베어드(한국명: 裵緯良)에 의해 평양에서 숭실학당(崇實學堂)으로 출발했다 1905년 대학교육을 시작 1906년 숭실학당 대학부를 설치하였다 1912년 숭실대학으로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한국 초초의 대학이 되었으나 1925년 일제의 <전문학교규칙>에 의해 4년제 문과만으로 편성된 숭실전문학교가 되었다 1938년 3월 자진 폐교했다가 1954년 다시 개교하였고 1957년 6월 서울시 동작구 상도5동 현위치로 이전했다 평양숭실학교 출신으로 김형직,조만식, 안익태, 현제영등 민족주의자 다수가 배출된 기독교 학교었다
- 정의부(正義府)와 화성의숙(樺成義塾) 정의부(正義府)는 1925년 1월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1920년 청산리전투 후 일본군의 간도지방에서의 학살과 1921년 자유시참변등으로 한때 만주.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이 침체, 분산되어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이 요구되었다 이에 통의부(統義府)를 중심으로 하여 군정서(軍政署). 의우단(義友團). 광정단(光正團).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변론자치회, 노동친목회. 고본계(固本契)등 8개단체 대표들이 통합하여 1924년 11월 정의부를 결성하기로 합의한 뒤 다음해 1월 길림성 화뎬현(樺旬懸)에 본부를 두고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중앙집행위원장 이탁(만주사변 후 변절), 총무위원장 김이대(金履大,만주사변 후 변절),군사위원장 지청천(池靑天), 재무위원장 오동진(吳東振), 민사위원장 김호(金虎), 법무위원장 이진산(李震山), 외무위원장 현익철(玄益哲), 공안부위원장 김철(金喆), 산업부위원장 장승언(張承彦)등을 선임하였고 무장력은 7개 중대에 이르렀다 군사행동을 주목적으로 하는 한편 치안행정. 교육사업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근대적 헌법체계인 삼권분립제도, 내각책임제, 지방자치제를 채택한 새 헌장(憲章)을 제정하였다 그 밖에 농민조합과 농업공사를 설립하여 황무지를 사들이고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을 정착시켰다 또한 각지에 소학교를 설립, 보통교육을 의무화하고 화흥중학교(化興中學校) 동명중학교(東明中學校) 화성의숙(樺成義孰)을 세워 중등교육과 간부양성에 힘쓰며 기관지 <전우> <대동민보>를 간행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참의부(參議府)와 함께 남만주지역의 2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1927년 12월 수뇌부가 일본경찰에 붙잡힘으로써 해체되었다 1928년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간부들이 연합,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기성단체 인정 문제로 분열되었다 1929년 참의부 일부세력과 신민부 민정파가 국민부(國民府)로 통합되었다 김성주(김일성)은 정의부 화성의숙 출신이다 -길림성 통화에 있는 항일전쟁의 영웅 양징위(楊晴宇)의 무덤과 눙안(農安)에 있는 팔각 13층의 랴오(遼)국 고탑 http://www.heraldbiz.com/SITE/special/200403180001/2004/04/22/200404220059.asp 2차대전 중 중국 동북지방의 항일군사령관이던 양징위(楊靖宇) 장군이 전사하자 시체를 일본군이 해부했는데 위 속에 남아있는 풀뿌리를 보고 그 각고정신에 감탄했다. 그리하여 강경 일변도의 전략으로는 중국을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 전략을 바꾸게 한 일은 유명하다.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독재주의!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세상!
북한 김정일 공산정부도 공산독재체제를 버리고 중국 호금도 사회정부처럼 사회정부나 러시아 푸틴 자유민주정부처럼 자유민주정부로 변모돼야 할 시기입니다 이데올로기는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라는 것을 역사 책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반미청년회) 제거와 북미수교 추진 세력---동아시아 지능센터(머리소리함)
1.노태우정부 대북추진--남북총리회담과 남북동시 유엔가입
-소련도 패권주의로 규정하여 자국 소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앙아시아나 중국, 한반도, 동유럽등지이에서 전쟁을 추진할 수 있다는 의견제시(1985년 의견 자료 제출)
-한국정부나 친미정부들이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를 추진할수록 일당 독재 공산정부가 붕괴될 수 있다는 의견 제시(3당 합당과 김대중세력등이 한국정부 세력으로 편입)
-중국정부의 수평적 권력교체 추진
등소평주석이 강택민주석에게 권력을 넘겨 줌으로 중국정부내 일인 독재정치 청산 그리고 수평적 권력교체 추진(중국정부도 소련 공산당 일당 독재정부가 중국 발전에 저해되고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지역에서 전쟁세력이 될 수 있다는 의견제시)
-남북연합정부 기반으로 연방정부 추진
남북 동시 유엔가입과 남북대화 추진
-소련군부쿠데타 세력 제거와 러시아등장 그리고 독일 통일
*우려 대상
남북한 정치세력 끼리 연합이나 반목으로 국제사회를 능통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북한 한국민족민주전선을 결성하여 남한 선거에 개입해왔으며 향후 전쟁도 모색해왔다 그리고 남한도 탈북자나 북한정부를 적으로 규정하여 남북협상세력을 좌익이나 친북세력으로 내몰았다 특히 남북협상세력을 좌경화 세력으로 규정하여 척결대상으로 의식화하여 그들이 반정부세력으로 내몰았고 그런 연유로 많은 젊은 학생들이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남한정부 내부 세대간의 의식격차와 교육 차이로 지도자들 의식수준이 남북협상세력을 주도하는 학생세력보다 낮은 형편이었다 실제로 6공화국 헌법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자유민주정부인데도 NLPDR 한국민족민주전선과 남북협상세력을 구분 못하여 민자당 정권이 붕괴위기이었다
북한에도 수평적권력교체나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세력과 남북전쟁세력 NLPDR를 구분 못함으로 탈북자가 증가하고 북한정부 내부 권력투쟁으로 남북긴장이 조성되어왔다
2.김영삼정부 대북정책과 남북정상회담 추진
김영삼대통령이 김대중선생과 연합으로 정국을 추진하여 김대중선생이 남북정상회담 협조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는 모델
-전두환전대통령이나 노태우전대통령은 양김연합으로 권력유지를 바라는 입장이었고 항구적으로 점진적 개혁요구(개인적인 사후보장:광주문제는 정치적 문제임으로 양김이 전직대통령의 지위와 역할을 보장)
-한국민족민주전선은 남북정상회담이 남북한 권력연합으로 나아갈 것으로 추측하여 반미투쟁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반김영삼투쟁을 감행했다
북한정부 내부 반미세력 NLPDR 월북자세력이 문제이다
이들이 남북냉전시대에도 남북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데 남북정상회담이나 남북대화 협력이 증가될수록 소외계층이나 숙청세력으로 분류되어왔다
*김영삼정부 대북추진과 남북정상회담 실패
김영삼정부의 김일성주석 항일운동 인정---->한국전쟁 남침으로 규정하여 중국정부 사과---->김대중대통령 남북정상회담 지지---->미국정부 남북정상회담 지지와 북미수교 추진 시사----->민혁당 지도부 월북과정과 일부 재야세력 투쟁(이선실 간첩)---->김일성주석 사망
-남북한정부 모두 한민전 세력을 사전에 제거하지 못함으로 외세나 극렬민족주의 세력에게 이용되었다는 사실
-북한정부 내부의 대남정책 추진세력의 이원화 조직
-남한정부 내부 일부 극우민족주의 반러시아세력이 탈레반세력 처럼 체친반군세력을 지원하여 중앙아시아나 중국정부, 북한정부 붕괴를 유도하거나 공산주의 세력을 이용하여 선거를 준비하는 모델로 언론 공격화 추진
-남북이 너무 장벽이 많았고 특정세력만이 남북정보를 공유하는 분위기
북한사회도 중국이나 베트남 사회와 비슷하다는 것과 남한정부는 일본이나 미국처럼 자유화사회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었다
-김영삼정부 인사들이 사전에 지능센터 의견처럼 한민전 서울대표부를 제거한 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다면 남북대화는 김영삼정부에서 중단되지 않았으며 강릉사태나 이선실 파일이 등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김일성주석 항일운동도 가짜나 조작으로 규정해야 할 형편에 이인모 장기수 북송이나 남북협력은 별 효과가 없었다 그리고 북한 서적 한 권을 보고 있다고 좌경학생이나 불온서적 탐독자로 취급하여 재판에 구속하는 좌경화 악마들의 행진도 해왔다
북한의 모든 서적이나 문화 ,사회제도, 인사등이 불온이나 적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인정하거나 객관적 역사 자료 그리고 사회주의 연구자료등은 불온이나 좌경이 아니다
-김영삼정부 인사들이 차기 대통령 선거를 민혁당 사건으로 준비해오고 있다는 미국정부 정보를 입수하고 사전에 제거하고 김종 필선생이나 김대중선생이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명단을 입수함으로
양김공동정부 탄생이 되었다 남북정부는 간첩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아야 남북대화나 협력이 중단되지 않는다
남한정부 극단적 민족주의자 우파도 한민전을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전두환 노태우전대통령 재판회부도 쓸데없는 말을 지능센터(머리소리함)에 지껄리기 때문이다 한민전은 반미청년회조직이었다 반미청년회는 전두환 민정당 집권시기에 창당 되었고 노태우정부때 한민전으로 개편했기 때문에 전두환 노태우정부 정보책임자들이 반미청년회와 한국민족민주전선을 잘 알 것이다
전두환정부때 남한은 GOP 3중철책선을 구축했으며 중국과 미국 수교로 중국이 실용주의 친미정부이다 잠수함이 남한 해안에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전두환 노태우 정부 정보책임자들 모두 구속해야 할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은 보고 좌익이나 친북세력으로 교육화나 의식화그룹이 전두환 노태우전대통령 구속으로 사라졌다는 것도 영남지역의 특징이었다 김대중대통령은 한국전쟁 당시 전남 해상자위대 부사령관으로 활동하여 많은 인민군을 사살했다 한국전쟁때 국군이 부산으로 남하하여 지하우익세력이 바로 자위대(치안대)이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인민위원회를 제거하고 등장한 합법조직이 치안대(자위대)이다 *자위대(치안대):민병대-향토예비군
미국정부와 유엔등이 1992년 선거때 만화 김대중 책자에서 자위대 활동자료 입수
-남한정부에서 공안정국을 주도하는 세력이 검찰 공안부와 경찰,국방부,국가안전기획부었다 경찰도 자치경찰이 등장하고 있으며 국정원이나 국방부도 많이 변화되고 있으며 선진국으로 나아가고 있다 아직도 검찰 공안부가 국제적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인권침해 사례 주요 부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유엔의견이다 검찰 공안부도 재야출신들이 많이 영입되어 간첩이나 각종 사건등을 선진화 해주기를 바라는 입장이다 김대중대통령이나 많은 민주화 인사를 구속하고 처벌한 단체는 검찰 공안부이다
-북한정부도 수평적 권력교체나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를 추진하지 않는다면 남북전쟁세력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세력을 이용할 것으로 본다 중국정부도 항시 남북거래 세력 NLPDR세력 동향과 그 세력을 이용하는 북한정부 주요인사 세력를 파악하고 있다
-북한도 남한정부에 선거개입을 하지 말아야 하며 남한도 북한정부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본래 선거나 간섭을 추진하는 세력은 남북 공안부세력들이다
이들은 국가발전이나 남북통일에 부정적이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인사청문회나 민선으로 선출하여 국가의식이나 민족의식을 가르쳐 주고 있다
3.김대중정부의 대북정책과 남북정상회담
남한 공안세력 제거(영남정부 수립론자나 재벌기업 위주로 정부수립자 제거)---->남침세력 즉 NLPDR 세력 이선실 파일제거(민혁당과 남한 간첩세력 일당 타진)----->남북정상회담------>남북한 비밀거래나 각종 의혹 언론화나 과거청산 추진---->뉴욕참사와 국제적으로 극우세력 제거(반소련 국가사회주의 그룹)---->중국정부 수평적권력교체와 푸틴등장 그리고 중앙아시아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바람----->북한정부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추진과 김정일 후계자를 제3자 인물로 추대 가능성 시사, 김일성 친척권력 청산 추진---->핵무기 포기와 북미 북일수교 추진 그리고 프랑스 이외 모든 유럽연합국가와 수교---->남북 2개정부 인정과 남북연합국가 추진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자유민주정부를 부정하는 모든 세력 제거 추진(극단적 민족주의 세력인 NLPDR과 국가사회주의 그룹 제거 추진)
-남북한 정보 자유화 개방화 추진
과거에 전대협이나 한총련등이 통일부 북한 자료 일일 선전자료를 이용해왔다 통일부도 북한 자료를 개방화 자유화하여 특정단체들이 북한자료를 독점화하여 극단적 반미 친북단체로 나아가는 것을 차단해야 하며 북한을 연구하고 남북통일에 노력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전대협이나 한총련도 남한정부 입장에서 볼때 자유민주정부를 인정하는 통일부 단체들이다
그들을 북한정부 단체라고 보기는 참으로 잘못되었다고 본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부정하고 있으며 자본주의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정부에서도 많은 자료를 연구하면서 과거 특정단체가 권력을 독점할때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고 있다
-남한도 북한정부 특권층이 사라지고 있다
북한정부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돈거래나 무역상사등으로 활동하는 분 그리고 북한정보를 특정단체가 독점화 하는 시대는 사라지고 있다
지금 남과 북도 형식적으로 대표부 수준이면 몇년 이내 대표부로 합법화 될 것이다 그 이후에는 북한 자료도 객관적이고 수준 높은 정보사회가 될 것이다
간첩도 사라질 것이고 거짓말 정보가 사라질 것이다
냉전시대 남북거래나 간첩건수로 돈을 착복한 인사들도 사라질 것이다
-남과 북도 중요하지만 호남과 영남 지역분열 추진세력도 사라져야 한다
부산세력이니 신라세력이니 호남향우회니 광주세력이니 하면서 정권을 재창출하겠다는 논리개발도 중지해야 한다
김대중대통령은 노무현대통령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그것은 김대중대통령이 지역분열정책을 싫어했고 지능센터(머리소리함)이 지역대결구도 청산을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아직도 노무현 부산지지자세력이니 울산세력이니 하면서 공안이나 경찰등을 단결을 조성하는 세력도 있는 것으로 조사해왔다 특정세력이 국가권력을 넘겨보는 행위는 중지돼야 한다
이제부터는 지역대결도 아닌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자유민주정부에서 진보와 보수세력으로 개편할때 남북통일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노무현대통령도 특정지역 개인 사조직이 권력을 장악하려는 계획도 중지돼야 하며 특정 부서(통일부나 복지부, 해양수산부등)가 권력을 넘겨보는 것도 중지돼야 한다
한국 정당이 하루 아침에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 천년이나 만년까지 지속하는 정당으로 나아가야 하며 정치는 정당정치 또는 의회정치가 돼야 하며 한국 정당도 자금을 확보하고 지속적인 재산이 있는 정당이 돼야 한다 대기업,공안부나 경찰, 군부, 정보부 정치가 지금 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노무현대통령이 당선되게 한 것은 노사모도 아닌 민주당이다
-북한 김정일 실권자나 여러 지도자들도 국제사회 환경을 알아야 한다
러시아는 자유민주정부이고 중국도 사회정부이다
남과 북이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북한이 사회정부나 자유민주정부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고 북한정부가 핵무기를 포기하고 경제대국 모델로 나아가는 것이다
북한은 남한 보다 넓은 국토와 자원이 있다
북한이 자유민주정부나 사회정부가 되어 남한보다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김일성 김정일 가계의 특권의식을 버리고 북한이 중국이나 러시아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 있을때 권력유지보다는 내가 죽었을때 처형이나 화형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인간은 죽는다 위대한 민족운동가라면 조국을 생각하면서 죽을 것이다 권력 도취나 돈 유혹을 버리고 후손들 생각하는 위대한 인물이 돼야 한다 북한정부의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가 남한정부 내부 공안세력이나 대기업세력들이 사라지고 국민 대다수가 참여하는 자유민주정부가 될 것이다 북한정부 남침세력 NLPDR이 확대 할수록 남한정부는 극단적 권력 독점세력들이 등장하여 국민들을 수탈하고 착취할 것이다 극우세력과 극좌세력 공존이 남북분단이다 이들을 머리소리함이 심장마비나 뇌졸도로 제거해야 한다 돈을 좋아하면 기업을 운영해야 하며 공안부서나 군인,경찰이라면 국가안전과 국민안위를 위해서 살아라 "
-미국,중국등 유엔도 남북한 전쟁세력을 항구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미국을 이용하거나 중국을 이용하여 전쟁을 추진하는 세력도 사라져야 한다
그리고 중국이나 북한도 공산주의 운동을 중지해야 하며 그들이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적이 되지 말아야 한다
-북한정부는 핵무기를 즉각 포기하고 북미, 북일, 남북외교관계를 수립하여 남북거래 특권층을 하루 속히 청산하고 합법적인 남북협력으로 확대돼야 할 것이다
-남북한은 냉전시대나 남북정상회담 이전에 남북연구나 조작된 간첩사건등으로 고생한 분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는 것이 올바른다
남북 공동정부 과거사 청산위원회를 구성하여 각종 의혹들을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중국정부나 미국정부 참여하여 의혹사건을 규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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