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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건국자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발해 건국자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

CIA Bear 허관(許灌) 2006. 11. 18. 15:18
  

?~719(천통 21).

발해의 시조(699~719 재위).
[개요]

왕호는 고왕(高王). 아버지는 걸걸중상(乞乞仲象)이다. 그러나 그의 가계나 고구려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는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 〈구당서 舊唐書〉 발해전(渤海傳)에는 그를 고구려인의 별종이라고 했고, 〈신당서 新唐書〉 발해전에는 원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의 족속인데 나중에 고구려에 부속되었다고 했으며,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 渤海考〉를 비롯한 우리의 선인들은 모두 그를 고구려인으로 보고 있다.

 

[주변정세]

은 668년(고구려 보장왕 27)에 수도인 평양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사실상 당이 장악한 곳은 요동(遼東) 일대에 불과했고, 압록강 상류와 동북 만주지방에는 여전히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이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 고종은 고구려가 망한 그해 12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고자 했고, 아울러 고구려의 잔여세력을 강제로 분산시켜 거세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강행하여 고구려 유민 3만여 호를 요하(遼河) 서쪽인 당의 영주(營州) 지방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 3만 호 중에 대조영의 일가도 끼어 있었다. 즉 그는 당의 전후(戰後) 수습책에 희생되어 요하의 서쪽 영주에 옮겨 살게 되었던 것이다.

영주를 중심으로 한 요서지방은 일찍부터 지정학적 또는 국방상의 가치 때문에 전국시대 연(燕)의 진개(秦開)가 정복한 이후 역대 한민족 왕조에서 동북과 서북에서 남하하려는 비한족세력(非漢族勢力)을 가로막는 요충지였으며 동방 침략의 근거지였다. 마침 이무렵의 영주 부근에는 고비 사막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고 동남으로 세력을 뻗치려 하던 투르크족의 돌궐과 동쪽의 고구려 세력에 시달리며 시라무렌(Sira Muren) 유역을 방황하던 거란족이 당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당은 이들 이민족에 대하여 배타적인 통치방법을 써서 끊임없이 감시하고 억압했다. 당은 거란족의 추장 이진충(李盡忠)에게 송막도호(松漠都護), 손만영(孫萬榮)에게는 귀성주자사(歸誠州刺史)의 직함을 주어 무마하면서 통치하고 있었으나, 당시 영주도독 조홰(趙)는 잔인함과 거란족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으로 그들을 자극했다. 부당한 대우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이진충과 손만영은 696년 요서지방에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고 예속민들이 굶주리자, 거란의 무리를 이끌고 예속민의 호응을 받아 조홰를 죽인 뒤 당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당은 토벌군을 보내어 그해 10월에 이진충을 죽였으나, 손만영 등은 반항을 계속하여 이듬해 3월 하북(河北)의 영평(永平) 부근에서 왕효걸(王孝傑)이 이끈 당 군대를 격파했다. 이 난은 돌궐의 힘을 빌려 1년 만에 진압되었으나, 당시 영주 부근에서 당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민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발해 건국과정]

대조영은 이와 같은 당나라 동북정책의 혼란과 이진충의 반란을 기회로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그 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했다. 이에 당황한 당의 측천무후는 회유책으로 이전의 행동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대조영에게는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여 다시 복속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를 거부당하자 당은 추격군을 파견했다. 거란족 출신 장군인 이해고(李楷固)가 이끈 당 군사가 공격해오자 말갈족이 먼저 교전했으나 대패했으며, 걸사비우도 전사했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당 군대의 예봉을 피해 동으로 이동하면서 한편으로는 흩어진 말갈족을 규합했다. 당 군대가 계속 추격해오자, 대조영은 지금의 훈허 강[渾河]과 휘발하(輝發河) 분수령인 장령자(長嶺子) 부근에 있는 천문령(天門嶺)의 밀림에 둘러싸인 산악지대로 유인하여 크게 격파했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당 군대는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하고 이해고는 겨우 몸을 피해 되돌아갔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대조영으로 하여금 발해 건국의 지도자가 되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요서지역 거란족의 난으로 신성(新城)의 안동도호부가 공격을 받게 되어,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돌궐의 힘을 빌렸던 당이 결국 이 지역에 있어서 거란 및 해족(奚族)까지 포용한 돌궐의 세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당 본국과 요동의 교통이 두절되면서 당으로서도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의 건국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천문령 전투에서의 승리와 함께 발해 건국의 객관적 정세를 형성한 것이었다.

천문령 전투 후, 대조영은 동부 만주 쪽으로 이동하여 699년 지금의 지린 성[吉林省] 둔화 현[敦化縣]인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진(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했다. 이곳을 터전으로 정한 것은 고구려의 고토(故土)라는 점도 있지만, 요서의 영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밀림지대여서 방어상 유리한 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만주의 지리적 가치는 비단 전략상의 이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지역은 경제적으로는 현주(顯州)의 포(布), 옥주(沃州)의 면(綿), 용주(龍州)의 명주, 노성(盧城)의 벼와 고대 전쟁에서 최대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솔빈(率賓)의 말, 위성(位城)의 철(鐵) 등의 특산물 생산지였다. 대조영은 동으로 빠져나와 먼저 이 철의 생산지였던 위성부터 점령했다.

대조영은 동모산에 진국을 세우고 자립하자 곧 돌궐과 손을 잡았다. 돌궐과 손을 잡음으로써 당시 동북아시아에서의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났고, 당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던 돌궐을 통해 당의 침략야욕을 막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당으로서는 대조영의 자립을 기정사실화할 수밖에 없게 되자, 무력으로 적대시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이에 당 중종(中宗)은 회유책의 일환으로 705년 시어사(侍御史) 장행급(長行)을 보내어 화해를 청하였다. 이에 양국 간의 화해가 성립되어 대조영의 둘째 아들 대문예(大門藝)가 당의 수도에 가서 입시(入侍)하게 되었으며, 당과의 평화적 외교의 기틀이 잡혔다. 당과의 화해는 대조영으로서도 호전적인 유목민족인 돌궐과의 불안한 동맹에서 벗어나 왕국의 영속성을 찾고 발전된 당의 문화 유입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후 에서는 대조영을 곧 책립(冊立)하려 하였으나, 거란·돌궐의 침구가 잦아 진국과의 교통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713년(당 예종 2) 최흔(崔)이 해로를 통해 요동반도의 뤼순[旅順]에 상륙하여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하였다. 이에 대조영은 곧 국호를 진국에서 발해국으로 고쳤다. 719년 대조영이 죽자 그의 아들 대무예(무왕)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대조영은 한국인가 만주족인가  
 

한국 역사를 살펴볼 때 패망한 국가의 터에서, 성공적으로 국가를 개국했던 나라는 발해가 처음이자 마지막 국가가 아닐까 싶다. 다른 국가들은 단순히 왕조 교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발해가 이민족에 의해서 멸망했기에 그 역사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결국 발해의 건국자에 대한 출신 문제가 논란이 되는 것이다.

중국.남북한.러시아가 서로 자국의 역사로 주장하면서, 제각각 대조영을 자기네 역사의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지하에서 대조영이 듣고 있으면 통탄할 일이다. 대조영의 출신 문제는 논란이 많고, 다양한 주장이 있기에 대조영의 출신을 인용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료로 평가 받고 있는 구당서, 신당서, 삼국 유사를 중심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중국측 사료: 구당서, 신당서

두 사서의 기록을 살펴보자.

구당서 발해말갈전1)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려 별종이다.
渤海靺鞨大祖榮者 本高麗別種也

신당서 발해전 2)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덧붙여, 성은 대씨이다.
渤海 本粟末靺鞨 附高麗者姓大氏

구당서와 신당서에 나오는 대조영과 관련된 내용을 필자가 정리하였다.

구당서를 살펴보자.

종족 출신-영주 생활-이진충의 반란-대조영의 역할-이진충 사망-이해고의 추격-걸사비우 전사-전열 보강-천문령 전투-도로 두절-동모산 도착-성축 쌓음-성품-진국왕 즉위-돌궐
과 통교-진국의 영토와 인구,병사 소개-당과 통교-당의 책립.

신당서의 경우에는,

발해 출신-고려멸망-동모산 건국-영토-성축 수축 및 주민 돌아옴-이진충 반란-사리걸걸
중상-걸사비우-이동-태백산 도착-성의 수축 및 방어-당의 측천무후 허국공,진국공 임명-
거절-이해고 공격-중상 사망-대조영 등장-천문령 전투-이해고 패배-길이 막힘-대조영
건국-진국왕이라 자칭-돌궐과 통교-영토,인구,병사 소개-당과 통교-당의 책립.

구당서는 후진 시대에 재상 유구 등이 편찬하여 장소원에 의해서 945년에 완성한 사서이며
, 신당서는 북송에서 다시 구양수 등이 편찬하여 1060년에 완성된 사서이다. 구당서에 나오
는 대조영의 기록은 사건 전개가 시간상으로 정확하다. 신당서의 경우 시간과 장소가 맞지
않는 곳이 있으며 구당서에서 누락한 내용이 보강 되었다. 두 사서의 큰 차이점이라면 대조영의 종족 출신 문제이다.

구당서에 따른다면 대조영은 고구려인이고, 신당서에 의하면 속말 말갈인이다. 별종이라는
의미는 이미 노태돈 교수의 해석처럼 원 종족에서 분리된 종족으로 보는데, 신당서 권 229
동이 고려편에 '高麗,本扶餘別種也' 이라고 하여 '고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의미는 구
당서의 고려별종과 같은 의미로 해석 되어진다.

상이한 기록 때문에 대조영의 출신 문제는 남북한, 중국 학계가 다른 입장이다.

한국측 사료: 삼국 유사

고려 시대 발해 관련 사서를 참조한다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제왕운기이다. 삼국사기는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이기에, 발해 부문은 생략 되어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별도로 '말갈,발해전' 이라 하여 발해 역사를 포함시키고 있으며, 제왕운기는 발해를 한국사 내로 편성 시키고 있다.

삼국유사 3),

"삼국사에서 말하기를, 의봉 3년 고종 현술에 고려의 남은 세력들이 서로 모여 북쪽의 태백
산 아래 의지하였다.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개원20년 경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토벌하
였다. 또한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범하였다. 이에
현종이 토벌하였다. 신라고기에 말하기를 고려의 옛 장수 조영은 대씨이다. 남은 병사들을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三國史云,儀鳳三年高宗戊寅 高麗殘?類聚 北依太伯山下.國號渤海.開元二十年間 明皇 遣將
討之.又聖德王三十二年玄宗甲戌 渤海靺鞨越海侵唐之登州.玄宗討之.又新羅古記云 高麗舊
將祖榮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

여기서 삼국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말한다. 즉,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 삼국사기를 참조한 것이다. 이 글에서 중요한 인용 사서가 나오는데,바로 '신라고기'이다. 일연 스님은 당시 전해져 내려오던 '신라고기'를 인용해서 대조영의 출신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신라고기' 는 고려 이전에 저술된 것으로 추측 되는데, 당대의 신라인이 국경을 접하고 있던 발해의 건국자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당서와 후대에 쓰여진 신당서보다 신빙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신라고기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것은 다음 두 사료이다. 이 두 사료는 그가 무장 출신이라는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구당서 하 199

조영은 날쌔고 용감하며 병사를 잘 활용하였다.
祖榮驍勇善用兵

발해고 군고 4)

고왕의 휘는 조영으로, 진국공의 아들이다. 일찍이 고구려의 장수였으며, 날쌔며 용감하고 말타기와 활을 잘 하였다.
高王諱祖榮,震國公子也,嘗爲高句麗將,驍勇善騎謝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 기이편에 말갈의 역사를 포함시킨 것은 말갈이 한국사의 범위로 설정 할 수 있는 인식을 제공해 준다. 고구려, 말갈인의 차이를 인정하고 말갈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한국사 내로 설정하여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말갈의 역사를 고구려 종속민의 역사로 폄하하여 바라보는 시각은 재고 되어야 한다.

민족 출신이 중요한가?

대조영이 고구려인이든, 말갈인이든 그의 출신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근래에 페루의 대통령이 일본계라고 해서 페루의 역사를 일본사로 편성시키지 않듯이, 발해 역시 핏줄보다는 지배층의 국가 통치 운영 방향이 중요하다고 본다.

대조영과 지배층은 국가의 통치 체제와 운영을 중국식이나 말갈 형태가 아닌 고구려의 지배 체제를 계승했다는 점에서, 발해 존속 기간 동안 보여준 지배층의 일관된 태도에 대조영의 출신 문제는 답이 나오지 않나 싶다.

 

*중국 북방민족--김해민족이라는 설

수(水)--발해(渤海)--금(金)--청(淸)

한국이 만주족(여진족)과 연합으로 남북통일정부 수립에 노력해야 할 시기이다 종합대학에서도 만어학과(만주족언어학과)를 신설하여 만주족 역사와 삶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할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