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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국무위원장 연구모임 발표대회를 주최하는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은 좌익파시즘 단체인가 주체연호 1인 종신직 세습제 좌익군정 김일성 김정일주의를 추종하는 반제민족민주전선인가? 본문

Guide Ear&Bird's Eye/국가안보 위해사범(NLPDR) 자료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구모임 발표대회를 주최하는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은 좌익파시즘 단체인가 주체연호 1인 종신직 세습제 좌익군정 김일성 김정일주의를 추종하는 반제민족민주전선인가?

CIA Bear 허관(許灌) 2020. 5. 13. 18:28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회원들이  23 일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환영하는 캠페인을 열고 행진을 하고 있다

김정은은 주체연호 1인 종신직 세습제 좌익군정 파시즘 두목이다

2기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구모임 발표대회를 주최하는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은 좌익 파시즘 단체인가

아니면 좌익 파시즘 세력을 옹호하는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은 주체연호 1인 종신직 세습제 좌익군정 김일성 김정일주의를 추종하는 재한종련(반제민족민주전선) 그룹인가 

아니면 좌익 파시즘 세력을 옹호하는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은 노동당 당원인가

북한의 주체사상은 노동당 당원은 잘살고 인민(평민층)은 헐벗는 것이 현실이다

북한 노동당 당원은 400만명(2015년 추정치)에 이르고 있으며 북한 노동당 공식적 이념은 반수정주의, 반제국주의, 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를 고수하는 민족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 노선 주체연호 1인 종신직 세습제 좌익군정 김일성, 김정일주의자들이다

현역군인이나 군() 경력이 없으면 원칙적 북한 노동당 당원이 될 수 없다

북한 노동당 당원은 군인이다

남북한 권력자는 재한총련(반제민족민주전선) 회원들에 대한 태어날 때부터 생존 당시까지 뇌 기억 검증기구로 사용하여 일부 인사를 정치적 이용물로 이용(취급)하지 말아야 한다

더불어 민주당과 문재인정부는 남북한 브로커(중개인) 문화를 중단해야 하고 남북 경제 교류의 매개체(중개역)로서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당 내부나 정부 내부의 풍조를 쇄신해야 할 것이다

 

 

 

대진연, 2기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구모임 발표대회 개최한다!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하 '대진연')이 오는 7월 11일, 제2기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구모임 발표대회를 개최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제1기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구모임 발표대회가 끝난 뒤 다같이 찍은 단체 사진이다. 

대진연은 지난해 6 8, 1기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구모임 발표대회를 진행한 바 있다.

 

1기 발표대회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음악정치, 겸손함, 헌신성, 민족애, 대담함, 후대사랑, 주민사랑 등 연구결과 동영상 6편과 노래 영상 2편이 출품되었다. 

 

당시 출품된 영상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 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MKLAtYGKH8&list=PLBlo2bwyHetgFwUFhUOv9fsoogOc6hd9_)

 

대진연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2기 연구모임 발표대회를 7월 11일 오후 1시에 개최하겠다고 5월 3일 밝혔다.

 

아래는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온 공지 전문이다.

 

--------------------------------아래-------------------------------------

 

<공지 : 2기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구모임 발표대회>

 

작년 6월 8일, 1기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구모임 발표대회가 열렸습니다.

대학생 참가자들이 총 9편의 동영상을 출품하였는데 북한 지도자를 사실과 객관적인 자료에 기초하여 알아보고 소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올 여름, 2기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구모임 발표대회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지난 총선에서 4.27 판문점 선언 이행의 걸림돌이었던 미래통합당이 참패하였습니다. 국민들은 4.27, 9.19 남북공동선언들을 반대하는 반민족, 반통일 정책과 세력을 심판하였습니다. 이런 국민들의 뜻은 남북공동선언들을 이행하고, 통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도 북한 지도부의 건강이상설등 반통일세력들은 왜곡과 대결논리로 통일을 가로막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근거 없는 사실을 보수언론을 통해 확산시키면서 한반도 대립과 불안을 증폭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북한을 정확히 알아야 통일로 나아갈 수 있고, 북한을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해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남과 북이 서로에 대해 있는 그대로 잘 아는 것은 건강한 통일의 필수전제조건이라 할 것입니다. 서로에 대해 왜곡해서 알면 그만큼 상대를 보는 눈이 비뚤어지고 마음속에 상처와 대결심리가 증폭되며 통일이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실현에 이번 행사가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잘 준비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일시 : 7월 11일 오후 1시

장소 : 추후공지

주최 : 한국대학생진보연합 2기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구모임

 

북한의 주체사상은 노동당 당원은 잘살고 인민은 헐벗는 것이 현실이다

북한 평민층들의 근로동원 모습(한우나 수레등은 개인 소유로 인정하고 있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노동당 당원은 잘살고 인민(평민층)은 헐벗는 것이 현실이다

 

북한 노동당 당원은 400만명(2015년 추정치)에 이르고 있으며 북한 노동당 공식적 이념은 반수정주의, 반제국주의, 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를 고수하는 민족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 노선 주체연호 1인 종신직 세습제 좌익군정 김일성, 김정일주의자들이다

현역군인이나 군() 경력이 없으면 원칙적 북한 노동당 당원이 될 수 없다

 

북한 노동당 당원은 군인이다[先軍정치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북한은 14세가 되는 해 징병대상자로 등록된 후, 16세 때 징병검사를 받는다. 이듬해 17세에 정식으로 입대한다. 복무기간은 남성 보병부대 10년 특수부대 13, 여성 보병부대 5년 특수부대 7. 복무 중 의무적으로 경제활동에 투입되므로, 북한 인민군은 농업, 공업과 공공기업체 기능도 겸하고 있다. 이들은 제일 거대한 생산집단이며, 동시에 소비집단이다. 전역 후 계급에 상관없이 60세까지 예비역으로 복무한다.

2000년대 들어 병무행정이 원활히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 대학입시를 통해 대학에 들어가거나 예술가, 운동 선수, 징병검사를 통한 심신 상태나 자질 문제가 있는 사람은 징병되지 않는다. 징병되지 않는다고 다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와 운동선수는 장교에 준한 대우를 받는 반면 심신 또는 자질에 문제가 있어서 징병되지 않은 사람은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어 평생 차별을 당한다

공식적은 북한 군은 120만명이다. 실질적으로 군복무를 하고 있는 수는 한국과 비교했을 때 절반 이상인 70만명이 많다. 북한의 나머지 군인들은 민간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이 민간 업무란 양돈, 어획, 광산, 공장 등에서 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임급으로 일을 시키는 것이다

북한 무상교육 중학교 졸업생 중 30%이내 학생들이 개인의 능력과 유상교육기관 대학에 진학한다

중국은 직업군인 지원 모병제이지만 북한은 남녀 징병제국가로 중학교 졸업 후 남자는 10년간, 여자는 7년간 현역군인이나 다른 군복무형태  직장 등지에서 군복무를 해야 한다

통상 군부에 해당되는 선거구나 대의원 수는 상세히 공개되지 않는다. 다만 발표된 선거결과로 군부 관련 선거구와 당연직으로 선출되는 중요 인물들의 인적사항 등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총정치국과 총참모부, 인민무력성의 주요 직책을 포함하여 군종 별 사령부와 군단급에서 당연직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고찰하면 제13기의 경우 대략 80여 명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번 제14기에서는 이보다 20여 명이 적은 60 여개의 선거구에서 군부(군인) 대의원이 배출된 것으로 나타났다(12기 대의원중 군인 비율은 16.9%로 노동자 대의원에 비해 큰 비중을 차지, 북한의 `선군정치'를 반영했다)

 

북한은 민영자본체제가 아닌 국영자본체제이다 국영자본체제는 국가가 운영하는 자본주의(국영기업, 국영농장)를 의미한다

북한에서 생산수단은 국가와 사회협동단체가 소유한다(북한 헌법 제20)

국가소유는 전체 인민의 소유이다. 국가소유권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다. 나라의 모든 자연부원, 철도, 항공운수, 체신기관과 중요공장, 기업소, 항만, 은행은 국가만이 소유한다. 국가는 나라의 경제발전에서 주도적역할을 하는 국가소유를 우선적으로 보호하며 장성시킨다(북한 헌법 제21)

사회협동단체소유는 해당 단체에 들어있는 근로자들의 집단적소유이다. 토지, 농기계, , 중소공장, 기업소 같은것은 사회협동단체가 소유할수 있다. 국가는 사회협동단체소유를 보호한다(북한 헌법 제22)

개인소유는 공민들의 개인적이며 소비적인 목적을 위한 소유이다. 개인소유는 로동에 의한 사회주의분배와 국가와 사회의 추가적혜택으로 이루어진다. 터밭경리를 비롯한 개인부업경리에서 나오는 생산물과 그밖의 합법적인 경리활동을 통하여 얻은 수입도 개인소유에 속한다. 국가는 개인소유를 보호하며 그에 대한 상속권을 법적으로 보장한다(북한 헌법 제24)

 

북한정부도 토지, 농기계등 국가소유나 사회협동단체 소유 이외 모든 물건(주택이나 상가, 자동차등) 개인 소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평양시내 아파트 매매를 허용하고 있다 토지는 국가나 협동농장 소유이다

평양정부 내부  상류층과 평민층, 빈곤층등의 빈부격차도 심각하다

북한 주민 계층은 상류층, 평민층, 빈곤층(식량난이나 영양실조 계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북한 상류층 30%이내이며 평민층 70%, 평민층 중 빈곤층 33%이내: 북한의 배고픈 사람들(식량난과 기아위기 주민들) 1990년대  초반 420만명, 중반 700만명이었고  긴 식량 위기의 10 년 후, 2007 년까지 북한  전체 주민의 33 %,  780만명이 영양실조 상태이다]

북한은 교육, 의료, 주거의 무상화를 실시하고 있다고 칭하고 있지만 북한 경제 빈곤화로 실업자나 빈곤층에게는 교육,의료, 주거등의 무상화가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북한 주민은 상류층과 서민층(평민층)으로 구분 돼 있고 서민층(평민층) 중에는 식량위기 계층 빈곤층이 전체 주민 33%이다

 북한은 계획 경제를 실행하고 있지만 의식주(衣食住), 외출이나 쇼핑에는 (입장권·승차권 등의) , 상표권과 돈이 필요하다. 교육,의료,주거 무상화로 직원 급여가 아니라 생활비만 지급된다. 주택(주거)도 개인소유를 인정함으로 점차 사유화 돼 가고 있다

목재가스 동력의 승리-58 트럭(봉천읍)
봉천군 봉천읍의 거리 수리점
봉천군  거리 광경
봉천읍 외화벌이 사업소
봉천읍의 아파트
북한의 곽산지방
북한의 도로공사 새벽 별보기 운동
안주- 신의주간 도로건설
북한의 도로공사 새벽 별보기 운동
황해남도 봉천군 봉천읍 선거 캠페인 모습

 

 

북한의 운천 지방 모습
황해남도 벽성군의 거리 광경 
청단군의 거리 시장

유엔 산하 기구인 유엔식량농업기구 (UN FAO)가 발표한 ‘2014 세계 식량 불안상황(State of Food Insecurity in the World 2014)’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인구의 37.5%가량인 930만 명의 주민이 영양부족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보고서를 보면, 1990년대 초반에 영양부족을 겪은 북한 주민 수는 480만명이며, 이 수치는 2000년대 초반 870만명, 2000년대 후반에는 1천만명까지 솟았다가 2012년에서 2014년 사이에는 직전 수치보다 약간 줄어든 930만명의 주민들이 영양부족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발표된 영양부족 비율은 고난의 행군 전인 1990년대 초반보다 2배 가까이 되는 수치이다.

 

북한의 이 같은 영양부족 비율은 아시아 38개국 중 가장 높으며, 전 세계적으로도 북한보다 영양부족 비율이 높은 나라는 아프리카 잠비아와 아이티, 단 두 개국뿐이다.

 

한편, 유엔식량농업기구는 2015년까지 전 세계 영양실조 인구를 1990년의 절반으로 줄인다는 새천년 계획을 세워 개발도상국 25개국이 달성했으나, 북한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으로 전망했다.

 

 

북한은 국가평가로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실패국가입니다

                                                                                      북한 아동 훈련용 목총(木銃) 모습

북한은 국가평가로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실패국가입니다
안보능력은 핵무기와 핵탄두 탄도미사일을 보유했지만 인권침해와 반정부세력 확대로 인민군 120만명 배치(60%이상 치안군) 그리고 중국 러시아등 유엔안보리 입장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을 지지로 약한국가로 평가하고 있으며 경제능력은 기아와 평민층 식량난으로 외부로부터 식량원조국가로 실패국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정치능력은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노선 좌익파시즘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세습제 좌익군정으로 실패국가로 평가되어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실패국가이다
-머리소리함(知積能力團) 논의내용-

 

*안보능력: 내전위기 여부, 동맹국 여부 , 군사력 여부

*경제능력: 민생경제(식량난이나 의식주 여건)

*정치능력: 의회 민주주의와 주민 자치능력 그리고 지도자의 개인 능력

북한은 전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 의견입니다

북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권력은 세습제 좌익군정  체제유지에 주력해왔습니다

북한 김정은정부는 내전을 북한내부 지역 전쟁이나 북한 주민들의 반김정은세력 무장투쟁이 아닌  남북전쟁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머리소리함으로 논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북한정부의 안보능력은 약한국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안보능력은 핵무기와 핵탄두 탄도미사일을 보유했지만 인권침해와 반정부세력 확대로 인민군 120만명 배치(60%이상 치안군) 그리고 중국 러시아등 유엔안보리 입장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을 지지로 약한국가로 평가되고 있다

 

 

(1)북한정부의 군사력

북한은 재래식 핵무기(핵 폭탄, 수송기로 투하하는 대량살상무기)와 신형무기 핵탄두 탄도미사일(로켓이나 미사일로 투하하는 대량살상무기)을 보유하고 있다

북한의 군사력은 중국이나 러시아 극동지역 조차도 위협이 되고 있다

30분으로 서울을 평평하게 서울 불바다 이론이 바로 북한정부의 전술 핵무기와 전략 핵무기 이론이다

남한의 위협은 재래식 핵무기 원자폭탄과 핵 대포나 핵 배낭,핵 어뢰 등 전술 핵무기, 단거리 탄도미사일 전략 핵무기이고 일본, 중국, 러시아 극동의 위협은 중거리 탄도 미사일 전략 핵무기이며 미국등 태평양 연안국의 위협은 장거리 탄도 미사일[ICBM,탄도로켓] 전략 핵무기이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개발 수준이 고저(高低) 각도 발사로 비행거리를 조정하는 "로프티드 궤도(lofted trajectory)[高低角度 발사] 모델" 수준이고 북한 장거리 탄도 미사일[ICBM,탄도로켓] 전략 핵무기도 남한(한국)이나 일본, 중국, 러시아 극동지역의 위협되고 있다

 

 

 

 

 

 

The news came hours after state media showed North Korean leader Kim Jong-un inspecting what it said was a hydrogen bomb[미사일 핵탄두]

미사일 요격 방어시스텀 미국 사드나 러시아 S-400는 수송기(폭격기)나 로켓,탄도 미사일도 요격이 가능하다

미사일 방어 전투는 미사일 탄두를 식별하고 그 미사일 탄두를 파괴하기 위한  한 순간의 전쟁이다. 한국이나 아시아 태평양지역도 나토처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DD) 배치로 탄도 미사일은 물론이고 지구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탄도로켓]까지 요격할 수 있는 미사일 방어체제(MD)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북한 로켓부대(미사일과 포부대) 이외 지상군(地上軍, ground army)은 남한보다 열세이다

 

 

(2)내전위기 여부

북한 김정은정부는 내전을 북한내부 지역 전쟁이나 북한 주민들의 반김정은 세력 무장투쟁이 아닌  남북전쟁으로 척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남녀 징병제 국가로 120만명의 인민군을 보유하고 있다[남자는 10년, 여자는 7년 군복무]

북한 인민군의 60%이상이 북한내부 법과 질서(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를 지키는 치안군이다

북한정부의 군사력에서 가장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치안군이다

북한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 김정은 부대가 남침이나 일본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할때 내전이 일어날 수 있으며 반김정은 세력이 대량살상무기를 장악할때는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이 붕괴될 것으로 본다

중국이나 러시아 정부도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에서 핵무기를 포기하고 민생경제로 전환할 수 있는 모델 수평적 권력교체를 선호해왔다

 

 

 

                                                                           

 

 

                                                                   

 

 

 

 

 

 

 

 

 

 

 

                                              

 

 

 

 

                                        

 

 

 

                                     

 

 

 

 

(3)동맹국 여부

과거 북한정부의 동맹국 러시아나 중국은 유엔안보리 5개국 상임이사국으로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 유엔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는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 살상 무기와 탄도 미사일[핵 대포, 핵 배낭, 핵 어뢰, 핵 기뢰등 전술 핵무기와 탄도 미사일(공중발사 순항 미사일이나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단거리 탄도미사일) , 탄도 로켓(대륙간 탄도 미사일 ,사거리 5,500km 이상)  등 전략 핵무기]의 완전한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폐기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북한의 자금이나 경제, 외교의 활동을 제한하는 것이다

중국이나 러시아 정부도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에서 핵무기를 포기하고 민생경제로 전환할 수 있는 모델 수평적 권력교체를 선호해왔다

북한정부 내부 핵무기와 핵탄두 탄도미사일 개발을 추진해 온 세력은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이다

주체연호(세습제 좌익군정) 청산이 수평적 권력교체이며 핵무기 포기정책이다

 

*조소 우호 협력 및 상호 원조 조약[朝蘇友好協力─相互援助條約]

1961년 7월 6일 북한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양국 간의 군사동맹조약.

정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 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이다. 이 조약의 특징은 유사시 군사적 자동개입을 규정한 양자동맹조약이라는 것이다. 김일성의 소련 방문 중 체결된 이 조약은 6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핵심 내용은 ‘체약 일방이 어떠한 국가 또는 몇 개 국가들의 연합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체약 상대방은 지체 없이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조선·소련 양국 간의 경제·문화·기술의 원조·제공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당시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 등 다자간 안보조약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는 양자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대국-소국 간의 군사동맹이 소국의 수도에서 협정이 체결되는 것에 반하여, 이 조약은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체결되었다.

소련 측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에 통보하지 않고, 두 개의 조소, 조중 군사협정을 5일 간격으로 체결했다. 따라서 체결 당시부터 협정의 강제성이 의문시되었다

(1)역사적 배경

북한과 소련 간의 조약 체결은 1950년대 후반 치열해지는 사회주의 진영의 중소갈등과 중인전쟁, 그리고 한국의 5·16군사정변 및 한일관계 정상화 움직임,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 통합 전략 구상 등으로 북한을 둘러싼 안전보장 환경이 악화되면서 체결되었다. 그러나 동맹 체결 직후 중소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조소관계는 실질적으로 중단되었고, 허울뿐인 동맹으로 전락하였다. 조약 체결 이후 김일성은 국내외적으로 소련, 흐루시초프, 현대수정주의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61 11월부터 1964 10월까지 소련은 북한에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했다. 더욱이 소련은 중국, 북한과의 경제 원조를 중단했으며, 북한에 제공했던 차관을 황금으로 상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2)경과

이 조약은 10년간 효력을 가지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체약 일방이 기한 만료 1년 전에 조약 폐기에 관한 희망을 표시하지 않는다면 자동으로 5년간 연장되도록 되어 있었다. 탈냉전 분위기와 더불어 1990년 한국과 소련의 국교정상화 이후 조약의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1994 6월 김영삼 대통령 러시아 방문 시 옐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동 조약의 폐기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1995 8 7일 러시아 동 조약을 연장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북한에 통보하여, 1996 9 10일 이후 효력 상실했다. 2000 2월 이바노프 외무장관의 평양 방문에서 조러 친선선린 협조조약(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 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을 정식으로 체결했다. 북한은 2000 4, 러시아는 7월에 이를 비준했다. 새 조약에는 쟁점 조항인 자동군사개입 규정이 삭제되었으며, 경제·문화·기술 협력에 대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3)의의와 평가

냉전 시기 북중우호조약과 더불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한 주요 군사동맹조약. 1961 7월 북중우호조약과 북소우호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북소조약 체결 직후 북소관계의 악화와 더불어 1962-64년 북소관계에 따라서 허울뿐이 조약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냉전시기 북소동맹조약의 불완전하게 작동함으로써 북한의 안전보장이 불완전하게 되었다.

 

*조중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

1961년 7월 11일에 북한과 중국 사이에 맺은 조약.

조중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은 1961 7 11일 베이징에서 체결됐다. 북한 김일성 주석과 당시 저우언라이(주은래) 중국 총리가 양국 전권 대표로 서명했다. 양국이 평화와 안전을 지키는 것을 전제로 어느 한쪽이 타국의 침략을 받아 전쟁에 들어갈 경우 양방은 의무적으로 모든 노력을 다해 군사적 지원 등을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지난 1981년과 2001년에 2차례에 걸쳐 자동 연장됐고 앞으로 유효기한은 2021년이다.

그러나 북한의 핵무와 탄두 미사일 개발이 평화와 안전을 지키는 의무를 위배한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조중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 내용

1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아시아와 세계 평화 그리고 양국 국민의 안전을 위해 모든 분야에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2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모든 조치를 공동으로 맡으면서 체결국에 대한 특정 국가의 침략을 방지한다. 체결국 가운데 한 쪽이 몇몇 동맹국의 침략을 받을 경우 전쟁 상태로 바뀌는 즉시 군사적 원조를 제공해야 한다.

3조 어느 체결국도 다른 체결국과 맺은 동맹에 참가하지 않으며 다른 나라에 대한 특별한 집단, 행동, 조치에도 참가하지 않는다.

4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양국 공통의 이해 관계가 있는 모든 중대한 국제 문제에 대해 서로 협의하기로 한다.

5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주권의 상호 존중, 내정 불간섭과 평등 호혜의 원칙, 우호-협력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양국간의 사회주의 건설 사업에서 가능한 한 경제-기술 원조를 진행하며 양국간의 지속적인 경제, 문화, 과학, 기술 협력을 통해 발전시킨다.

6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조선의 통일이 평화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실현되는 것을 원하며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조선 인민의 이익 및 동아시아의 평화 옹호 목적과 일치하는 것을 인정한다.

7조 이 조약은 양국 의회가 비준하지 않으면 효력이 생기지 않으며 양국이 비준서를 교환한 날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비준서는 평양에서 교환하며 양국이 조약의 개정 또는 효력의 상실에 대해 합의하지 않는 이상 효력이 유지된다

 

핵 보유를 위한 북한의 시도는 자국과 지역의 안전에 충격을 줬고 중국의 국가안보 이익에도 심각한 피해를 줬기 때문에 이는 조약 위반 사안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조약은 침략을 단호히 반대한다고 명시했는데 북한이 고집대로 핵을 개발하고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위배되는 미사일 발사시험을 진행하고 있다"면서 "이는 조약을 체결했을 당시와 2001년 조약이 마지막으로 갱신됐을 때와는 다른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신문은 "북한은 반드시 핵실험을 중단해야 하고 한미 양국도 북한을 겨냥한 군사적 위협을 멈춰야 하며 양측은 한반도 안정과 평화를 위해 각자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간의 북중관계가 외부로 비치는 것보다 그리 끈끈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한중 수교 다음 해인 1993년 북한은 2000년 올림픽 유치 경쟁에서 중국이 아닌 호주를 지지했고, 1997년 덩샤오핑(鄧小平) 사망 때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대사관에 조전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즈화(沈志華) 화둥사범대 교수가 북중 혈맹관계 와해를 주장하며 조선(북한)은 잠재적 적국이고 한국은 가능한 친구라고 말한 강연록도 회자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은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지지했습니다[한반도 통일국가는 군국주의나 국가사회주의 노선으로 전쟁에 의한 통일이 아닌 남북 주민이 선출한 남북의회에 의한 자유사회(민주화 사회) 평화통일이다  한반도 비핵화 원칙이 군국주의나 국가사회주의 정책 노선이 아니다]

러시아나 중국정부는 수정주의(실용주의) 노선이다. 수정주의(실용주의) 노선은 새로운 정세에 점진적이고 온건한 입장에서 대응하기 위하여 기존의 이론이나 학설을 수정하려는 경향이다

수정주의를 실용주의로 표현하고 있다

볼셰비키 혁명 후 수정주의라는 용어는 공산주의자들이 확립된 견해로부터 벗어나는 어떤 종류의 이견들을 매도하는 데 쓰이게 되었다.

실용주의란 말은 이상주의나 세계를 불변의 것으로 파악하는 원칙보다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에 촛점을 두고 실용성을 중시하는 정치적 입장이다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북한정부의 안보능력은 남침을 할 수 없을 만큼 약한 국가이다

남침이나 일본 미사일 발사, 지역분쟁을 할때는 유도적 전술 오판이나 북한 내부 권력투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유엔안보리는 남침이나 일본 미사일 발사, 지역분쟁을 할 수 있는 세력에게 대북제재를 가하고 있다

 

2.북한정부의 경제능력은 실패국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북한정부의 경제능력은 기아와 평민층 식량난으로 외부로부터 식량원조국가로 실패국가로 평가되고 있다

(1)외부의 식량 지원이 필요한 나라

유엔이 또다시 북한을 외부의 식량 지원이 필요한 나라로 분류했습니다. 스위스의 비정부기구는 북한을 인도적 위기국으로 꼽았습니다.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FAO) 7 1분기 곡물 작황 식량 상황 보고서에서, 북한을 외부의 식량 지원이 필요한 세계 41개 나라 가운데 하나라고 밝혔습니다.

보고서는 2018년 곡물 생산량이 예년 평균 수준에 미치지 못했던 전년도 보다 더 감소할 것으로 공식 추산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이는 지난 해 7월과 8월 사이의 높은 온도와 적은 강수량 때문이라며, 그 결과 대부분의 가구의 식량 소비율이 계속 경계선상에 있거나 열악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에서는 식량 불안정에 관한 우려가 계속 남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보고서는 지난 해 말을 기준으로 북한의 식량 수입 필요량이 64 1t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보다 앞서, 북한주재 유엔 상주조정관실은 6일 발표한 ‘2019년 북한 필요와 우선순위 보고서에서, 지난 해 북한의 식량 생산량이 495t으로 전년도 545t에 비해 50t 감소했다고 밝혔습니다.

보고서는 북한에 만성적인 식량 불안정과 영양실조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며, 전체 인구의 43%인 약 1 100만 명이 영양결핍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타판 미슈라 상주조정관은 특히, 지난 해 북한의 식량 생산량이 전년도에 비해 9% 감소하면서 1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점이 우려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로 인해 상당한 식량 부족이 초래됐다며, 적절한 자금 지원이 없을 경우 북한의 인도적 상황이 악화되고 영양실조와 질병이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한편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비정부기구인 ACAPS 7일 북한을 인도주의 위기국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의 복합적인 인도적 위기는 정치 경제적 요인과 함께 자연 재해로 인해 촉발된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야욕이 국제 제재로 이어졌고, 이는 지원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입니다.

또한 북한은 폭우와 홍수, 가뭄 등에 주기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으며, 2018년에도 심각한 홍수를 경험했고, 8월에는 태풍 솔릭이 북한을 강타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북한  평민층 식량난과  영양부족(실조) 북한 아동들 모습[Famine grips North Korea]

A malnourished boy stands in an equally emaciated cornfield,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29, 2011. [북한 함경남도 옥수수 밭에 서 있는 영양부족(영양실조) 북한 아동모습(2011년 9월 29일)]

 

 

             A homeless woman prepares a few shriveled ears of corn for lunch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30, 2011(점심 밥)

 

           Students and volunteers dig a canal on October 1, 2011 in Haeju , capital of Hwanghaenam-do, North Korea.(학생과 주민 자원자들 동원 근로사업)

 

                                        A woman cooks at home on September 29. 2011, in Hwanghaenam-do, North Korea(옥수수 밥을 준비하는 북한 어머니 모습)

 

    A malnourished boy lies on a hospital bed in Haeju, capital of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October 1, 2011.(영양실조로 병원에 누워 있는 소년 모습) 

 

 

                                          A mother cares for her clinically malnourished child(영양실조로 누워 있는 아동을 간호하는 어머니 모습)

 

Malnourished infants lie on hospital beds in Haeju, capital of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October 1, 2011(함경남도 해주 병원 입원한 영양실조 북한 아동들 모습)

 

 A boy prepares the soil for crops on a collective farm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30, 2011(집단농장에서 농작물을 위해 흙을 준비하는 소년모습)

 

 

         Women work on a collective farm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30, 2011(집단농장에서 일하는 북한 여성들 모습)

 

 

                                        Pak Su Dong, the boss of the collective farm in Hwanghaenam-do, North Korea(집단농장 책임자 박수동씨 모습)

 

 

                                          Jo Tae Kun, a health-care assistant in a small village in Hwanghaenam-do, North Korea(마을 영양사 조태곤씨 모습)

 

 

            Two North Korean orphans dress to impress a foreign delegation(두 명의 북한 고아들이 외국 파견단 방문용으로 좋은 옷을 입은 모습)

 

자료:중국정부

http://www.china.org.cn/photos/2011-10/11/content_23591611_6.htm

 

 

(2)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노선 좌익 파시즘 북한 인민군 경제

공식적은 북한 군은 120만명이다 북한의 나머지 군인들은 민간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이 민간 업무란 양돈, 어획, 광산, 공장 등에서 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임급으로 일을 시키는 것이다 [북한은 남녀 징병제국가로 중학교 졸업 후 남자는 10년간, 여자는 7년간 현역군인이나 다른 군복무형태  직장 등지에서 군복무를 해야 한다]

인민군은 농업, 공업과 군수산업 중공업, 공공기업체 기능도 겸하고 있다. 이들은 제일 거대한 생산집단이며, 동시에 소비집단이다 북한 핵무기 개발이나 미사일 개발 비용이 대부분 인민군 경제활동에서 충당하고 있다.

 

북한 경제는 국영자본체제 북한 인민군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남북 경협이나 외부 경협이 인민군  영향력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대북 투자는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주체연호 세습제 좌익군정 좌익 파시즘을 지지해야 한다 민간경제 대북투자는 실패 가능성이 높은 위험국이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북한 인민군 제549부대 양돈장(養豚場) 시찰하여 돼지 사육과 도축 그리고 돼지고기 제품 판매 현황등을 시찰했습니다

 

 

 

 

2013년 5월 21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북한 인민군 제621호 육종장(育種場)을 방문했습니다. 인민군 제621호 육종장(育種場)은 면적이 349만 평방미터로 인민군 가축 식량기지로 양등을 사육해오고 있습니다

 

일본 홋카이도 마쓰마에초 부근 해역에 위치한 무인도 마쓰마에고지마에서는 지난달 28일, 북한을 출항한 목조선이 정박해 10명의 선원 가운데 일부가 상륙했는데 경찰 등의 조사에 따르면 섬 건물에서 TV와 소형이륜차 등이 없어진 것으로 밝혀진 바 있습니다.

이들 10명의 선원 가운데 약 절반이 해상보안본부 등의 조사에서 이전에 조선인민군 소속이었다고 밝힌 사실이 관계자를 대상으로 한 취재에서 밝혀졌습니다.

목조선에는 북한 인민군 제854군부대라고 쓰인 표식이 달려 있는데 무기 등은 없었고 북한에서는 군이 외화획득을 위해 수산업에 관여하고 있는 점으로 미뤄 군부대 소속 어선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경찰과 해상보안본부는 선원이 과거 어떤 부대에 소속했는지도 포함해 계속해서 군부대과의 관련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있습니다.

 

(3)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 북한 제4공화국 헌법은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북한식 국영자본체제

북한 제4공화국 헌법 제24조 개인소유는 공민들의 개인적이며 소비적인 목적을 위한 소유이다. 개인소유는 로동에 의한 사회주의분배와 국가와 사회의 추가적혜택으로 이루어진다. 터밭경리를 비롯한 개인부업경리에서 나오는 생산물과 그밖의 합법적인 경리활동을 통하여 얻은 수입도 개인소유에 속한다. 국가는 개인소유를 보호하며 그에 대한 상속권을 법적으로 보장한다[북한 제4공화국 헌법 제24조]

 

1936년 스탈린 헌법 제11조 시민소유는 그 시민개인의 재산이며 물질적·정신적 만족을 위하여 사용된다. 시민소유에는 노동에 의하여 또는 법률에 위반되지 아니하는 범위내에서 취득된 소비용 또는 산업용의 모든 재산이 포함된다. 다만, 시민의 소유로서 인정되지 아니하는 취득물은 이에서 제외된다. 농업과 개인의 부업경영 기타 법률에 규정된 목적을 위하여 시민은 영대사용(永代使用) 상속의 대상으로서 토지를 전유하거나 사용할 권리가 있다. 시민재산의 상속권은 법률에 의하여 인정되고 보장된다.[1936년 스탈린 헌법 제11조]

 

북한 제1공화국 헌법 제6조 전 일본국가와 일본인의 소유토지 및 조선인 지주의 소유토지는 몰수한다.
소작제도는 영원히 폐지한다.

토지는 자기의 로력으로 경작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다.
토지소유의 최대한도는 5정보 또는 20정보로 한다.
토지소유의 최대한도는 지역 및 조건에 따라서 따로 법령으로 규정한다.
토지의 개인소유와 아울러 국가 및 협동단체도 토지를 소유할 수 있다.
국가 및 협동단체의 토지소유면적에는 제한이 없다.
국가는 로력농민의 리익을 특히 보호하며 경제적 정책이 허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방조한다.[1948년 북한 제1공화국 헌법 제6조]

 

북한은 인민경제 제1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1972년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립이후 북한  경제는 민간경제(인민경제)에서 인민군이나 집단농장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경제로 전환돼 왔다

북한 경제는 스탈린헌법보다도 반민간경제(반민생경제) 국가이다

국영자본체제는 국가가 운영하는 자본주의(국영기업)를 의미한다

북한정부도 토지이외 모든 물건(주택이나 상가, 자동차등) 개인 소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평양시내 아파트 매매를 허용하고 있다 토지는 국가나 협동농장 소유이다 북한 평양시민 중 경제적으로 풍요한 사람은 개인 소유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

 평양 시내  상류층과 평민층, 빈곤층등의 빈부격차도 심각하다

 북한 주민 계층은 상류층, 평민층, 빈곤층(식량난이나 영양실조 계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북한 상류층 30%이내이며 평민층 70%, 평민층 중 빈곤층 33%이내: 북한의 배고픈 사람들(식량난과 기아위기 주민들) 1990년대  초반 420만명, 중반 700만명이었고  긴 식량 위기의 10 년 후, 2007 년까지 북한  전체 주민의 33 %,  780만명이 영양실조 상태이다]

  북한은 교육, 의료, 주거의 무상화를 실시하고 있다고 칭하고 있지만 북한 경제 빈곤화로 실업자나 빈곤층에게는 교육,의료, 주거등의 무상화가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북한 주민은 상류층과 서민층(평민층)으로 구분 돼 있고 서민층(평민층) 중에는 식량위기 계층 빈곤층이 전체 주민 33%이다

 북한은 계획 경제를 실행하고 있지만 의식주(衣食住), 외출이나 쇼핑에는 (입장권·승차권 등의) , 상표권과 돈이 필요하다. 교육,의료,주거 무상화로 직원 급여가 아니라 생활비만 지급된다. 주택(주거)도 개인소유를 인정함으로 점차 사유화 돼 가고 있다

북한 빈곤층 생활 모습은 TV 방영 되지 않고 있다

 

 

 

 

 

 

 

                                                                   

 

 

 

                                                                 텃밭이나 개인 부업을 하는 북한 주민들 모습

 

 

3. 북한정부의 정치능력은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노선 좌익파시즘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세습제 좌익군정으로 실패국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북한은 제1공화국 헌법 인민회의정부론 인민 민주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제2공화국 헌법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주체사상을 공식적으로 국가제도로 인정한 이후 의회 민주주의 정치와 주민자치가 사라지고 지역 군사위원회나 중앙 국방위원회에 의한 통치를 해오고 있다

이때부터 인민의회정부론(인민회의정부론) 노선 인민 전쟁론[의회에 의한 전쟁방식]에서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노선 전쟁론[군대에 의한 전쟁방식]으로 변경 되었다 

 

(1)당군이론과 선군정치 노선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 

현역군인이나 군() 경력이 없으면 원칙적 북한 노동당 당원이 될 수 없다

북한 노동당 당원은 군인이다[先軍정치와 국방위원회]

북한은 14세가 되는 해 징병대상자로 등록된 후, 16세 때 징병검사를 받는다. 이듬해 17세에 정식으로 입대한다. 복무기간은 남성 보병부대 10년 특수부대 13, 여성 보병부대 5년 특수부대 7. 복무 중 의무적으로 경제활동에 투입되므로, 북한 인민군은 농업, 공업과 공공기업체 기능도 겸하고 있다. 이들은 제일 거대한 생산집단이며, 동시에 소비집단이다. 전역 후 계급에 상관없이 60세까지 예비역으로 복무한다. 2000년대 들어 병무행정이 원활히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 대학입시를 통해 대학에 들어가거나 예술가, 운동 선수, 징병검사를 통한 심신 상태나 자질 문제가 있는 사람은 징병되지 않는다. 징병되지 않는다고 다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와 운동선수는 장교에 준한 대우를 받는 반면 심신 또는 자질에 문제가 있어서 징병되지 않은 사람은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어 평생 차별을 당한다

북한 무상교육 중학교 졸업생 중 30%이내 학생들이 개인의 능력과 유상교육기관 대학에 진학한다

 

통상 군부에 해당되는 선거구나 대의원 수는 상세히 공개되지 않는다. 다만 발표된 선거결과로 군부 관련 선거구와 당연직으로 선출되는 중요 인물들의 인적사항 등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총정치국과 총참모부, 인민무력성의 주요 직책을 포함하여 군종 별 사령부와 군단급에서 당연직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고찰하면 제13기의 경우 대략 80여 명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번 제14기에서는 이보다 20여 명이 적은 60 여개의 선거구에서 군부 대의원이 배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 대의원은 대부분이 현역군인이나 퇴역군인이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개최 모습

 

 

                      4 11일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4 5차회의가 열렸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2) 김일성 김정일 가계 세습제 유일사상과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 김정일주의자가 돼야 국가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주의 주체사상(주체연호)과 김정일주의 선군정치를 지지해야 정치범이 아니다

 

북한정부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가계 세습제 유일사상 이외는 모든 세력이 적이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를 버려야 종파분자가 되지 않는다 김일성 주체사상과 김정일 선군정치 유일사상으로 무장하라

-국제적 반미투쟁가와 연대를 하라 그래야 반미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 중국정부 내 친미인사를 제거하라 일본정부나 한국정부 내부 반미인사를 포섭하라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후보 자격은 다음과 같다

"선거에 참여할 정당과 개인은 선거연합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가입하며 해당 선거연합은 모든 지역구에서 후보를 단일화한다"

후보를 내는 곳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뿐이기에 모든 지역구에서 단독 후보가 출마하게 되고 홍보나 선전 활동 등 선거 유세도 없다. 투표용지에 적힌 후보자를 지지할 경우에 기표소에 들리지 않아도 된다고 보장하였으니 기표소에 들리는 것 자체가 해당 후보자를 반대한다는 표시가 되는 '공개투표'가 된다. 선거가 끝나면 다 같이 모여서 춤을 추는데, 개표가 끝난 뒤가 아니고 투표가 끝난 뒤에 한다는 점도 선거에서 반대 의견을 내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통일전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선로동당 (여당) ·

조선사회민주당 ·

천도교청우당

해외 김일성 김정일 가계 세습제 유일사상 단체[조총련등]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은 북한의 정치 단체이다. 흔히 조국전선으로 약칭한다.

1.개요

1949 6월에 평양에서 남한의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북한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통합하여 창립되었다. 북한 노동당을 포함하여 북한의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단체이다.

 

단체의 목적은 북한 노동당의 정책, 특히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정책을 지지하며 옹호, 관철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남한에 대한 대남 활동을 펼치는 것이 주요 기능이었지만, 현재는 정당 및 사회단체의 연합체로서 총선거 후보자를 배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2.배경

민전의 통합은 남조선로동당과 북조선로동당의 합당으로 조선로동당이 탄생한 것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미군정 시기인 1946 2월에 박헌영과 여운형, 허헌 등이 만든 단체이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소군정 영역에서 김일성과 김두봉, 최용건 등이 주축이 되어 구성되어 있었다. 모두 사회주의 계열의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해 창립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다. 이에 1949 6 25일부터 평양에서 회의가 열려 두 단체는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으로 통합했다.

 

3.기능

북한에서는 이 단체를 "노동계급이 영도하는 노농동맹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우리나라의 모든 애국적 민주주의 역량을 묶어 세운 강력한 정치적 조직체"로 규정한다. 북한 노동당의 통일전선 전술의 전위를 맡고 있었으며, 대한민국 내의 북한 노동당 지지 세력을 단합시켜 북한 노동당과 연계 활동을 펼치는 것이 목적이었다.

 

주요 활동은 대한민국에 대한 성명과 담화, 기자회견 등을 통해 여러 제의와 선전 활동을 펼치는 것이었다. 한국 전쟁 전의 대표적인 제의로는 1950 5월의 총선거 실시 제의가 있다. 남북한의 통일된 입법기관을 설립하기 위한 총선거를 함께 실시하자는 내용이었다.

 

최고 기구는 중앙위원회이며 산하에 하부조직과 단체를 두고 있다. 북한 노동당 비서를 지낸 김용순과, 여운형의 딸 여원구, 남한 출신인 류미영 등이 공동 의장을 역임한 바 있다.

 

1961년 창설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과 유사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현재는 각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총선거 후보자를 배출하는 연합체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북한 선거에는 후보자가 한명밖에 입후보하지 않는다.

 

일본 조총련이나 남한 친북세력 김일성 김정일주의(주체사상이나 선군사상) 단체[한국민족민전선 서울대표부] 그리고 해외 친북세력 김일성 김정일주의(주체사상이나 선군사상) 단체들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통일전선] 하부조직으로 활동하면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북한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은 북한 김정은정부 친위대이며 자금줄(돈줄)이다

특히 해외 단체 북한정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은 북한정부 인적자원단체이며 자금줄(돈줄)이다

남한에서는 북한 김일성정부가 박헌영과 남로당을 체제전복 범죄행위와 미국의 간첩으로 처형된 이후 남한에서 친북세력이 와해 되었고 박정희정부 때 남한 최초의 김일성노선 통일혁명당을 조직했고 1972년도 주체사상 선포와 함께 남한, 조총련 해외단체에 대의원을 선출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구축해왔다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노동당이 크게 패배하고 인민민주주의 노선 인민회의정부론 인민공화국을 포기하고 자국 사회주의 국가 주체사상과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2 12 27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회의에서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을 채택하여 북한 제2공화국을 선포했다

 

(3)자유화 민주화운동 세력 탈북민

-김정은 독재 정권 종식할 때 진정한 평화통일-

                                                                         ▲북한 민주화위원회 허광일 위원장

제16회 북한자유주간 3일째인 4월 30일 오후 2시(현지시간) 워싱턴 D.C. 헤리티지재단에서 '북한 인권과 안보 위협 사이의 정책 격차 좁히기'를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발표자로 나선 허광일 위원장(북한민주화위원회), 김흥광 대표(NK지식인연대), 김성민 대표(자유북한방송)의 발표 내용을 아래 요약했다

 

허광일 위원장

북한민주화위원회는 황장엽 선생이 북한 민주화와 해방을 위해 운영해 온 탈북자 조직이다. 해마다 워싱턴과 서울을 오가며 진행되는 북한자유주간은 17년 전 황장엽 선생을 미국에 초청해 강연을 했던 수잔 솔티 여사가 그 때를 기점으로 매년 해오고 있는 국제적인 행사다. 북한 2,300만 주민들의 자유를 위해 앞장서서 투쟁해 온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여러분들도 다 알다시피 인권이라는 것은 천부적인 권리로 인권탄압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2,300만 북한 주민들은 오랜 세월동안 인권을 유린당한 채 노예와 같이 살아왔다. 고난의 행군 때에는 350만의 무고한 주민들이 굶어 죽었다. 당시 350만 아사의 대참사와 같은 사건에 대해 우리 탈북자들은 이를 살인 독재자 김정일에 의한 인위적인 대학살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때문에 북핵 문제를 비롯한 북한 문제 해결에서 중심은 부득불 북한 인권 문제가 중점에 설 수 밖에 없다. 북한 인권 문제를 해결해야 북한의 3대 세습 문제도 종식시키고 한반도의 통일도 기약할 수 있다.

북핵은 3대 세습 마지막 독재자 김정은의 생존 수단으로 북한 정권의 운명과 직결돼 있고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북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권유린과 독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여서 북한과 같은 독재 체제에서의 인권 문제는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한 주민은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몰랐고 착취 계급이 피착취 계급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북한 주민들의 이 같은 인식은 그들을 정신적 불구로 만들려는 북한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과 함께 시작된 북한 장마당은 북한식 변화의 민감한 촉진제 역할을 해 왔다.

장마당을 통해 외부정보가 자연스럽게 유입될 수 있었고 이는 북한사회를 꾸준히 변화시켜 왔다. 그 결과 장마당을 시시때때로 단속하는데 대한 주민들의 반발은 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는 북한의 보편적인 생활로 자리 잡았다.

최근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현재 한류를 비롯한 외부 정보에 대한 처벌은 강화되지만 정보 확산 속도를 따라 가지 못하기 때문에 김정은 정권의 운명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 같은 상황 때문에 북한은 탈북자들에 대한 전방위적인 압박과 협박을 가하고 있다.

저와 같은 경우만 해도 북한은 십 여년 전부터 저의 북한 행적을 면밀히 알아보고 저에게 북한 보위부 소속의 고위급이 직접 저희 딸을 내세워서 전화를 해서 북한으로 유인하기 위해 갖은 모략을 다 꾸며왔다.

심지어 이들은 북한에 있는 제 가족들의 동영상을 저에게 보내주면서 다시 북한으로 온다면 특별 대우를 해주겠다는 제안도 해왔다.

결론적으로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통일은 김정은 독재 정권이 종식할 때 이뤄진다. 특히 김정은 정권의 종식은 북한 인권 문제가 중점적으로 거론될 때 이뤄질 수 있다. 북한 체제가 무너지고 자유 대한 세력이 힘을 얻게 될 때 든든한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평안이 찾아올 것이다.

 

 

                                                                  ▲김흥광 대표가 발표하고 있다

 

김흥광 대표

북한은 고도로 폐쇄된 사회다.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고발도 세계가 알 수 없다.

구체적인 액션도 그것을 취했을 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알아야 접근할 수 있는데 피드백을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구체적인 정책을 수정하거나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 정부는 북핵 문제의 첫 단추를 잘 못 끼웠다. 그 악마를 보통 사람과 친구로 만났다. 김정은의 거만성이 지금 매우 높은데 매우 나쁜 신호다.

탈북자들은 10여 년 동안 북한 붕괴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3가지 생각이 있다.

1. 핵으로 무장한 북한과 핵무기를 어떤 협상이나 보상으로 둘을 갈라 놓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적합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권을 붕괴시키면 핵도 없어진다. 북한이 민주화 되면 핵무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된다. 북한 정권에서 핵무기를 떼어내기 위한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인권에 관한 것이다.

북한과 협상을 할 때, 정치범 수용소를 해체하라거나 이동의 자유, 해외 여행의 자유를 보장하게 하라고 하면 북한 붕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비핵화와 장거리 미사일까지 무력화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2. 북한 내부로 외부 정보를 강물처럼 흘려 보내야 한다. 미 국무부와 많은 북한 단체를 통해서 북한에 들여보낸 많은 정보들이 오늘날 북한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동력으로 작용했다.

혁명이 일어나려면 사회에 크게 3가지 변화가 필요하다. 첫째는 속삭이는 사회다. 그리고 거기서 더 깨어나서 통하는 사회처럼 대 놓고 소통하는 사회가 두번째 단계다. 그리고 마지막은 행동하는 사회로 들어서게 된다.

 

북한자유주간 대표단 가운데 다양한 시대별로 온 사람들이 있는데 의식이 다르다. 북한에서 정보를 접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현 주소는 웅성거리는 사회로 진입했고 공개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이제는 행동하는 사회로 진입하는 것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비핵화 문제 해결 방안이나 21세기 히틀러가 될 수 있는 김정은에 대한 대안은 탈북자라고 생각한다. 호랑이는 호랑이로 친다는 말이 있다.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한 많은 보고서는 탈북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탈북자들은 북한의 현재 인권 상황 가운데 행동하는 사회로 이끌기 위해서는 북한에 인터넷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대담한 시도와 기술적 대안을 가지고 있다.

북한에 있는 각급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한 탈북자들이 60명이 넘어서지만 북한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한 사람은 없다. 정보를 함께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북한에 다양한 풀뿌리 조직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시장 조직, 사회 조직, 군사 조직까지 만들어야 하며 이런 활동을 위한 후원도 필요하다.

 

 

                                                                               ▲김성민 대표가 발표하고 있다

 

김성민 대표

한국 현지시간 새벽 3 15분이면 만조를 통해서 물풍선을 보내고 있다. 페트병에 쌀을 담아서 보내는 것도 있는데 새벽 만조 때 이뤄지는 것은 김정일 김정은의 왜곡된 영상과 함께 쌀과 약재, 성경을 담아 보내는 것이다.

현장에서 보신 분들이 많겠지만 물 흐름을 따라서 김정은 머리가 이어지고 있는데 정말 장관이다. 이것이 탈북자들의 힘일 수 있다. 북한이 남쪽에서부터 이상한 물건이 떠내려오면 간첩물자라고 생각하고 총으로 쏜다. 그런데 김정은 사진이 있는 풍선 때문에 이 물자를 쏘지 못한다.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을 먼저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지금 보여드린 것처럼 페트병, 아이스박스, 김일성 머리 풍선, 대북전단, 제가 하는 대북 라디오, 최정훈 사령관이 하는 USB. 이런 모든 대북 정보 유입사업들을 누가 할 것인가. 대한민국 국민들은 아주 적은 사람들이 할 뿐 대부분 탈북자들이 하고 있다. 그 많은 정보유입을 탈북자들이 해 왔고 할 것이다.

첨단기기들이 북한에 들어오면 북한 당국은 그 물건에 대해 '남조선 괴리놈들 꾀임에 빠진다'면서 SD카드 구멍을 폐쇄하거나 갖은 방법으로 정보 유입을 막는다. 그러나 우리 탈북자들은 그 때마다 새롭게 테크놀로지를 개발해서 그 장벽을 뚫고 있다. 마치 북한이 모든 철의 장벽을 치고 있다면 우리는 '뚫는다' 하고 들어가고 있다. 북한의 인권 문제는 북핵 문제와 결부돼 있다.

김정은은 한반도의 비핵화를 말하는데 이는 기만전선에 전 세계를 빠뜨리는 것이다. 이 북핵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미국을 겨냥한 전술무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핵을 이용한 북한의 대미 전략은 첫째는 체제 안전보장이며 둘째는 대북제재 해제이다. 미군이 철수하고 적화통일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북핵을 포기 않을 것인데 그동안 김정은은 북핵폐기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라는 언어전술로 미국을 기만해 왔다.

핵포기를 전제로 한 빅딜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정이 여기에 있다. 이 자료들은 우리가 북한과 직접 전화통화를 해서 카카오톡이나 USB로 받은 자료이다. 여기 오신 단체장들이 다 수고해서 얻은 정보들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정보 부서나 국방부는 가질 생각을 안 한다. 작년부터 차곡차곡 모은 자료인데 이것을 해리티지재단에 기증하려 한다. 이 같은 핵문제를 포함한 북한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 인신매매, 가짜 달러, 가짜 화폐, 마약, 납치, 국군포로, 정치범수용소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제일 손쉬운 것은 인권 문제 아니겠는가. 아킬레스건이다. 꾸준히 제기하면 되는데 유감스럽게 미국이나 한국 정상이 김정은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 인권 문제 제기는 탈북자 입장에서는 매우 긴박한 문제이다. 김정은이 북핵만 포기하면 체제도 인정해주고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반대한다. 인권 문제가 제기돼야 한다.

최근에 온 탈북자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면 100명 중 90명이 한국 드라마를 봤다고 한다. 재미있으니까 봤다고 했다. 북한은 오직 당에 충성하는 관계로만 사람들을 만나니 재미가 없다. 사랑도 통제돼 있다. 그런데 한국의 드라마는 사랑 이야기도 재미있다. 그런데 탈북자들이 한국 드라마에 대해 자랑하려고 세트장에서 찍은 것이 아니냐고 한다. 한국 드라마는 정형적으로 만든다는 학습효과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탈북자들이 하는 대북 정보 유입 사업은 기존 북한 주민들의 학습 효과를 깨는 효과를 가져다 준다. 자유를 한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권유하면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북한자유주간의 주제는 '탈북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한 걸음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자금이 필요하다. 탈북자들이 이런 일에 도움이 필요하구나 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달라.

 nydaily@gmail.com

 

-북한 이탈 주민(탈북민)의 규모는 1950년부터 1989년까지 누계 607명이었다. 또한 1993년까지 누계 641명이었으나 1994년부터 그 수가 꾸준히 증가하여 2000년에는 누계 1,405명이었고, 2017년에는 누계가 31,340명이나 되면서 마침내 북한이탈주민들이 30,000명의 시대를 맞이했다.

-탈북민 여성의 입국비율은 1989년 이전에는 7%에 불과하였으나, 1997 35%, 2000 42% 등 꾸준한 증가 추세를 보이다가, 2002년을 기점으로 남성비율을 넘어섰음.

[남녀 징병제 때문에 젊은 여성들의 탈북민 많음] 

-남과 북은 단일 민족이면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과 주체사상, 선군정치 주체연호 세습제 좌익군정 좌익 파시즘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존속해오고 있습니다

북한이 본래 인민회의정부 제1공화국 정부가 될 때 남북은 의회연합으로 통일국가가 가능합니다

남한으로  탈북민이 많을수록 남북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통일 이후 북한 경제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중국 선양 주재 일본 총영사관 철문 안 쪽에서 두 명의 중국 공안원들에 의해 영사관 바깥쪽으로 끌려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어린-당시 생후 2년 4개월이었다- 김한미 양의 모습은 TV화면을 통해 전 세계 방영됐고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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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4월 20일 오후 황장엽과 김덕홍, 서울 도착 모습

41세 북한 농민이 남한 비무장지대 국경  철조망으로 넘어 1996년 7월 24일 남한으로 망영한 박철호(朴哲浩),  "북한에 너무 배고파." 남한으로 도망 왔다고.

 

 

 

 

 

 

 

                                1996년 5월 23일 북한 이철수 대위 미그(Mig)-19 전투기로 수원 공군 비행기장 도착

 

                           남북한 기술적으로 전쟁 중인  비무장지대 귀순자의 전화기(사진)

 

한국정부나 미국정부는 대북정책에서 북한 특권층이나 상류층 입장보다는 북한 평민층 입장을 존중해야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노선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을 청산하고 평민층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개혁개방세력으로 수평적 권력교체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달픈 북한 서민(평민)들은 지금 무엇을 원할까 무기도 아닌 (개인의 생존권 衣食住)입니다

반제민족민주전선 "경애하는 김정은국무위원장님께 삼가 드립니다"

                                                                                               반제민족민주전선의 로고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반제민족민주전선중앙위원회'의 단체 이름으로 "희세의 천출위인이시며 민족의 최고령도자이신 경애하는김정은 국무위원장님께 삼가 드립니다"고 15일 보도하였다.

 

다음은 보도 전문.

 

희세의 천출위인이시며 민족의 최고령도자이신

경애하는김정은국무위원장님께 삼가 드립니다

 

오늘 온 겨레는 반만년민족사에 가장 빛나게 아로새겨질 주체조선의 비상한 국력과 눈부신 위상을 절감하며 강성번영할 민족의 찬란한 미래를 환희롭게 내다보고있는 격동적인 시기에 민족의 태양이시며 만고절세의 애국자이신 위대한김일성주석님의 탄생 108돐을 뜻깊게 맞이하고있습니다.

화창한 4월의 봄과 더불어 민족의 영원한 어버이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오는 태양절의 이 아침 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는 남녘의 전위투사들과 각계 애국민중의 다함없는 경모의 마음을 담아 위대한김일성주석님께 최상최대의 경의를 삼가 드리며 백두에서 개척된 주체혁명위업을 승리와 영광의 한길로 향도하시는 경애하는 김정은국무위원장님께 가장 열렬한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돌이켜보면 위대한김일성주석님께서 탄생하신 1912년 4월 15일은 삼천리강토에 무겁게 드리운 망국의 암운을 헤가르며 위대한태양이 찬란히 솟아오른 민족사적대통운의 날, 자주의 새시대가 열린 인류사적사변의 날이였습니다.

장장 80여성상에 이르는 위대한주석님의 한평생은 겨레의 운명과 민족의 밝은 앞날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신 걸출한혁명가, 탁월한 정치가, 자애로운어버이의 성스러운 행로로 빛나고있습니다.

천리혜안의 비범무쌍한 예지로 시대발전의 추이와 민중의 념원을 과학적으로 통찰하신 위대한주석님께서는 10대에 벌써 근로민중을 력사의 주체로 내세우는 영세불후의 주체사상을 창시하시여 우리 민족을 자주시대를 앞장에서 열어나가는 영광스러운 선구자로 내세워주시였으며 민족과 인류가 나아갈 가장 정확한 운명개척의 길을 밝혀주시였습니다.

20성상 항일혈전의 불바다, 백두의 설한풍을 헤치시여 포악한 일제를 격멸하고 조국해방의 력사적대업을 이룩하시였으며 3년간의 반미대전에서 세계《최강》을 자랑하던 미제의 《강대성의 신화》를 불사르시여 영웅조선의 기개를 만방에 떨쳐주시고 반제반미투쟁의 세계사적모범을 창조하신 주석님은 정녕 불세출의 전설적영웅, 백승의 령장이시였습니다.

이민위천의 숭고한 민중관을 지니신 위대한주석님께서는 한평생 민중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시면서 북녘땅우에 자주정치로 존엄높고 자립경제로 번영하며 자위군력으로 위용떨치는 주체의 사회주의강국, 민중이 하늘로 떠받들리우는 인류의 리상향을 펼쳐주시였습니다.

우리 겨레에게 통일된 조국을 안겨주시기 위해 끝없이 로심초사하시며 조국통일3대원칙과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을 비롯한 가장 공명정대하고 현실적인 통일방략을 제시하시고 온 겨레의 자주통일운동을 힘있게 떠밀어주시였으며 정력적인 대외활동으로 20세기의 정치흐름을 주도하시며 세계자주화위업실현에 특출한 업적을 쌓아올리신 주석님의 영광찬란한 력사는 오늘도 세인의 끝없는 칭송을 받고있습니다.

참으로 탁월한 사상과 현명한 령도, 숭고한 덕망과 거창한 혁명실천으로 조국과 민족, 시대와 력사앞에 영구불멸할 업적을 이룩하신 위대한주석님을 주체의 영원한 태양으로 높이 모신것은 우리 민족의 무상의 영광이고 행운입니다.

위대한김일성주석님께서 개척하신 주체혁명위업은 절세의 애국자이신 위대한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의 고결한 충정과 비범특출한 령도에 의해 빛나게 이어지고 오늘은 천하제일위인이신 경애하는 김정은국무위원장님을 모시여 최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경애하는 국무위원장님께서는 가장 숭고한 도덕의리로 수령영생위업의 빛나는 귀감을 창조하시고 탁월한 사상리론활동으로 위대한김일성-김정일주의를 주체조선과 우리 민족을 이끄는 영원한 향도적기치로 더욱 빛을 뿌리게 하시였습니다.

특히 천재적인 군사적예지와 무비의 담력을 지니신 경애하는 국무위원장님께서는 주체조선을 무적의 군사강국으로 더욱 빛내이시기 위해 불면불휴의 령도로 주체병기탄생의 승전포성을 련속 터쳐올리시여 그 어떤 대적도 감히 덤벼들수 없는 위대한 강국의 전성시대를 펼쳐주시였으며 우리 민족의 존엄과 위상을 만방에 높이 떨쳐주시였습니다.

철의 신념과 의지의 최고체현자이신경애하는 국무위원장님께서 이북민중을 백두의 혁명정신, 백두의 칼바람정신을 지닌 사상과 신념의 강자들로 억세게 키워주시였기에 주체조선에서는 사회주의전진을 가로막는 미증유의 시련과 난관속에서도 자력자강의 정면돌파전으로 민중의 행복을 위한 창조대전이 힘있게 벌어지고 기념비적창조물들이 우후죽순처럼 일떠서 세인을 끝없이 격동시키고있습니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악성전염병이 전세계를 휩쓸고있는 오늘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최우선시하는 강력한 국가적초특급방역조치들이 취해지고 수도중심부의 풍치수려한 명당자리에 민중의 무병무탈과 건강증진을 위한 현대적인 평양종합병원이 건설되고있는 희한한 현실은 민중제일주의를 자기의 본성으로, 신성한 정치리념으로 내세운 조선로동당이 령도하는 주체조선에서만 펼쳐질수 있는 경이적인 화폭입니다.

세계적인 동란과 온갖 적대세력들의 악착하고 비렬한 압살책동에도 끄떡없이 신심과 락관에 넘쳐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창건 75돐을 향하여 질풍노도쳐 나아가는 이북의 용용한 기상과 자랑찬 성과들은 위대한 령수를 대를 이어 모실 때 위대한 나라, 위대한 민중의 승리의 력사가 변함없이 이어지고 민족만대의 강성과 번영의 확고한 담보가 마련된다는 철리를 깊이 새겨주고있습니다.

하기에 지금 남녘의 전위투사들과 각계 애국민중은 현시대의 가장 걸출한위인이시고 민중사랑의 숭고한 체현자이신 경애하는 국무위원장님을 일구월심 따르는 길에 조국통일도 민족의 찬란한 래일도 있다는것을 더욱 확신하고있습니다.

우리 반제민전은 앞으로도 위대한김일성주석님과 위대한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을 영원한 민족의 태양으로 높이 받들어모시고 경애하는 김정은국무위원장님만을 굳게 믿고 따르는 불패의 전위대오, 애국의 충신대오로 철저히 준비하며 백전백승의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기치밑에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변혁운동을 더욱 과감히 전개해나가겠습니다.

우리들은 출중한 령도력으로 주체조선을 이끄시고 겨레의 운명과 이 땅의 평화를 수호해가시는 경애하는 국무위원장님의 절세의위인상을 마음속깊이 간직하고 경향천지에 우리 민족의 위상과 겨레의 전도에 대한 옳바른 인식을 새겨주며 통일운동의 선도자, 선봉대가 되여 반미자주화투쟁을 더욱 힘있게 벌려나가겠습니다.

친미사대를 배격하고 민족자주를 지향하는것은 오늘 이 땅의 민심으로 되고있으며 자주정치, 군사강국으로 위용떨치는 주체조선은 우리 남녘의 전위투사들과 애국민중의 앞길을 밝혀주는 희망의 등대, 투쟁과 전진을 가속화해주는 원동력으로 되고있습니다.

우리들은 력사적인 조국해방 75돐이 되는 뜻깊은 올해에 조국통일위업실현의 전환적국면을 열어나가며 민족의 열망과 대세에 도전해나서는 외세와 온갖 반역무리들을 청산하기 위한 투쟁에 총매진해나가겠습니다.

경애하는 국무위원장님의 건강과 안녕은 우리 민중과 온 겨레의 한결같은 념원입니다.

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는 남녘의 전위투사들과 각계 애국민중의 열화같은 충성의 일편단심을 모아 민족의 존엄과 위상의 상징으로 빛나는 주체조선의 무궁창창한 앞날을 위하여, 조국통일위업과 인류자주화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절세의 영웅이시며 민족의 최고령도자이신김정은국무위원장님께서 부디 건강하시기를 삼가 축원합니다.

 

반제민족민주전선중앙위원회

2020년 4월 15일 서울

 

반제민족민주전선

반제민족민주전선(反帝民族民主戰線, 약칭 반제민전(反帝民戰))은 북한을 지원, 지지하는 대한민국(남한)의 지하 조직이다. 공산주의, 주체사상, 선군정치를 지도 이념으로 하며 대한민국(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 미군과 주한 미군 기지 철수, 북한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목표로 한다. 현재는 존재 여부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반제민전의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반제민전은 1964 3 15일에 비밀리에 결성된 통일혁명당 준비위원회(統一革命黨 準備委員會)가 전신이라고 한다. 1969 8 25일에 통일혁명당(統一革命黨, 약칭 통혁당(統革黨))이 설립되었고 1985 7 27일에 한국민족민주전선(韓國民族民主戰線, 약칭 한민전(韓民戰))으로 이름을 바꿨다. 2005 3 23일에 지금과 같은 이름으로 바뀌었다.

 

1968 8 24일 대한민국 중앙정보부가 김종혁이 결성한 통일혁명당 준비위원회 관련자들을 검거한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인해 통일혁명당은 소멸되었다. 이후에 설립된 조직인 한국민족민주전선에 대해서는 실체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반제민전은 대한민국(남한)의 서울특별시에 본부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며 북한의 평양직할시, 일본 도쿄도에 지부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남한)에서는 국가보안법에 따라 반국가 단체, 이적단체로 분류되어 있으며 반제민전의 공식 홈페이지 또한 대한민국에서 접속이 차단되어 있다. 따라서 평양지부가 사실상의 본부 역할을 한다.

 

반제민전 편집국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각종 논평, 칼럼 등을 발표한다. 대한민국의 시사 문제에 관한 뉴스도 발신하고 있지만 이러한 활동에 대해서는 실체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평양에서 보도한 뉴스를 발신하고 있지만 조선중앙통신, 로동신문을 인용한 기사에 불과하다.

 

반제민전의 라디오 방송으로는 1967 3월 평안남도 순안군에 남조선해방민주민족연맹방송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1970 3월에는 통일혁명당의 목소리방송, 1985 8월에는 구국의 소리 방송, 2005년에는 반제민전 방송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Founder: Kim Jong-tae

                     Choi Yong-do

Headquarters: Seoul

 

Founded: 25 August 1969(Revolutionary Party for Reunification)

27 July 1985(National Democratic Front of South Korea)

23 March 2005(Anti-Imperialist National Democratic Front

Ideology: Juche, Songun

 

한국민족민주전선(민민전)

'한국민족민주전선'(민민전)은 북한이 한국내 지하당으로 선전하고 있는 대남 혁명투쟁의 전위조직으로 당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대남사업 담당) 소속기구이다.

 

북한은 남한의 4·19혁명이 자유민주주의체제 전복의 기회로 연결되지 못한 원인을 인민들을 혁명으로 이끌 지하당이 없었기 때문’(조선대백과사전 23)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간첩 김송무(金松武)를 남파시켜 1964 3 '통일혁명당'(통혁당)을 결성했으나 1968 7월 위원장 김종태를 비롯한 조직원들이 체포됨에 따라 와해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9 8 25일 지하방송을 통해 전격적으로 통혁당 창당선언문과 강령을 발표했다. 북한은 이 조직이 "남조선인민 자신이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남조선내에 결성했다"고 주장하면서 남한 사회 내에서 자생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1985 7 27 '통일혁명당'은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민족민주전선'(민민전)으로 그 이름을 바꾸고 평양과 일본 등에 대표부를 개설했다. 산하에는 '칠보산연락사무소'를 두고 2003 8 1일 방송을 중단할 때까지 대남방송 중 우리 체제와 사회에 대해 가장 노골적인 비난을 했던 구국의 소리방송’(옛 통일혁명당 목소리방송) '민중의 메아리방송' (1989.6 중단) 등도 주관해 왔다.

 

2005 3 23 한국민족민주전선’(민민전)은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반제민족민주전선’(반제민전)으로 다시 개칭했다(조선중앙통신, 2005.3.25). 조선중앙통신은 23일 열린 민민전 중앙위원회에서 이와 같이 결정했다고 보도하고 그 배경에 대해 "반외세 자주통일 운동단체들이 수많이 출현하고 각계민중의 반미반일투쟁이 새로운 높은 단계로 발전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해 한민전 명칭을 반제민전으로 개칭하기로 의결했다" 고 밝혔다(조선중앙통신, 2005.3.25).

 

이에 따라 민민전 평양지부는 반제민전 평양지부로, 한민전 일본대표부는 반제민전 일본대표부로 각각 개칭했다.

 

또한 반제민전은 '구국전선'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기관지 '구국전선', 기관잡지 '청맥등을 발행하고 있다.

 

웹사이트 구국전선은 민족자주정권 수립 자주적 민족경제 건설 민족문화 건설 등 반제민전의 행동강령에 따라 이와 관련한 각종 내용을 내보낸다.

 

이 사이트는 노동당 창당 60주년(2005.10.10)을 맞아 '특집을 내보내는가 하면 한- 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52주년(2005.10.1)을 기해 이의 폐기 및 미군철수를 촉구하기도 했다.

 

또 국회의 남북관계특위 구성 비난, 맥아더동상 철거 옹호, 이라크 파병 자이툰부대 철수 등 남한 내 주요 쟁점과 관련해 그때그때 반제민전 대변인 담화를 전달했다.

 

이와 함께 김일성 주석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비롯해 북한의 각종 체제 및 김정일 국방위원장 가계 '영도력찬양 등 북한의 선전물을 그대로 내보내고 있다.

 

이 사이트에는 남한이나 해외에서 발표된 글도 다수 올라 있으며 다른 사이트에서 '온 것일 가능성이 크다.

 

최근에는 일부 사회단체 게시판에 김일성 주석 10주기 추도와 관련한 이 사이트의 글이 게재돼 파문이 일기도 했으며, 강정구 교수의 글이 게재되어 있다.

 

이 사이트는 2004 11월 정부의 '친북 사이트차단조치로 접속이 차단됐으나 최근 다시 접속되고 있다.

 

민족민주혁명당 사건

                       ▲ 엄익준 국가정보원 2차장이 1999년 9월 9일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증거 물품들을 설명하고 있다

민족민주혁명당 사건(民族民主革命黨 事件, 약칭 민혁당 사건) 1999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령을 받아 대한민국 내에서 지하 정당 활동을 하던 민족민주혁명당을 적발하여, 그 구성원인 김영환, 하영옥, 이석기 등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1.사건 개요

북한은 1980년대 학원가 친북 투쟁을 주도한 주사파 핵심세력을 포섭해 조선노동당에 가입시켜 남한 내 혁명 전위조직으로 민혁당을 구축했다. 이에 따라 김영환, 이석기, 하영옥 등은 1989년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청년혁명조직인 반제청년동맹 을 결성하고, 이후 전국적인 조직사업을 위해 이를 당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하고 1992년 민혁당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남한 사회를 '식민지 반자본주의사회'로 규정하고, 민족자주권을 쟁취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며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한다는 당면목표 아래, 노동자, 농민,인텔리, 학생, 도시 소시민, 소자본가들을 동력으로 하여 반미 자주화와 반파쇼 민주화를 투쟁노선으로 채택하여,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NLPDR)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활동하였다.

 

민혁당 중앙위원 김영환은 조선노동당에 가입하고 2차례 밀입북해서 김일성을 만나 공작금을 수령하였으며, 하영옥은 김영환의 권유로 조선노동당에 가입하고 북한훈장을 수여받았다. 민혁당은 김영환, 하영옥, 박아무개(이석기는 나중에 중앙위원이 됨)로 구성된 당 중앙지도부 아래에 도당 성격의 경기남부위원회, 영남위원회, 전북위원회와 지역별위원회(울산, 성남, 부산, 마산·창원), 부문별 사업지도부(청년운동, 통일운동, 시민단체, 학생운동, 수도남부지역)를 두었다.

 

이석기는 민혁당 경기남부위원회 위원장이었고, 이상규는 수도남부지역을 담당하였으며, 이의엽, 박경순은 민혁당 지역조직인 영남위원회 위원장(부산위원회 및 울산위원회 등)이었으며, 김창현, 방석수는 영남위원회 조직원이었고, 서울대의 애국청년선봉대를 비롯한 학생운동도 민혁당의 지도 하에 있었다.

 

민혁당의 존재는 1998년 여수에서 격침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반잠수정에서 하영옥이 간첩과 연락해 왔다는 증거가 나오면서 처음 밝혀졌다. 이후 민혁당 및 이른바 '영남위원회'는 법원에서 반국가단체 또는 이적단체로 인정되었고, 위 사건 관련자들은 국가보안법위반죄로 유죄판결이 선고되어 확정되었다.

 

서울고법 형사1부는 피고인 이석기에게 징역 2 6개월을 선고하면서 민혁당은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북한의 대남 혁명전략 전술에 따라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목표로 활동하기 위해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구성된 반국가단체라며 “(민혁당을 만든 김영환 씨가 북한과 수시로 연락하며 지침을 받고 상황을 보고하는 등 북한과 연계해 왔던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석기에 대해선 민혁당 경기남부위원장으로 종사했다고 명시했다.[

 

2.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민혁당과 관련된 무장간첩사건
-이선실 여간첩 사건[이선실은 한민전 부위원장 출신, 제주출신으로 이화전문대(이화여대) 졸업]

남한 조선노동당사건이나 중부 노동당 사건, 김동식 간첩사건, 민혁당 사건등 한민전 부위원장 이선실 간첩 배후 조종(남한 간첩사건이 대부분 남한사람 월북자 단체 반제민족민주전선<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이 주도해왔다)
-1995년 10월 24일 부여침투 무장간첩 김동식 사건
-1996년 9월 18일 강릉무장간첩 사건
-1997년 10월 최정남 강연정 부부간첩 사건(울산지역)
-1998년 12월 17일 여수근해 반잠수함 격침사건

3.남한지역의 한국민족민주전선 변천사[전두환정부 이후 남한지역 자생 친북 반미단체] 
반제청년동맹(강철서진, NLPDR)-->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 김일성주의)--->한국민족민주전선(90년 1월, 새세대-주체사상과 김정일주의)-->반제민족민주전선(2005년 1월) 

1990년 말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새세대 신문 입수와 반미청년회 조직파악<한민전 90년 최초 1월호 새세대 지하신문 자료>
반제동맹(강철서신: 김영환씨 편지 글)--->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한국민족민주전선(새세대)

민혁당은 한민전 서울대표부 조직으로 전국적으로 1990년 1월 새세대 지하신문 발간으로 창립되었다[통일혁명당이나 민족민주혁명당(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지도부  검거방법은 지하신문 배포망 발견이다. 반제민족민주전선 하부조직은 반미, 반일단체이면서 김일성 김정일주의(주체사상과 선군정치) 학습단체이다(반제민족민주전선 하부조직은 NLPDR단체이다) ]

 

북한정부는 1990년 1월 남한지역 반미청년회를 한국민족민주전선(민혁당)으로 개편하여 김정일 중심으로 세력개편을 추진했으며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1992년 4월  북한국가 원수, 1993년 4월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돼 북한 인민군과 북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직무를 맡았으며 1991년 12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직무를 맡았다. 1992년 4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원수로 당선되었다. 1993년 4월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당선되었으며 1997년 10월 조선노동당 총서기 직무를 맡았다. 1998년 9월과 2003년 9월에 재차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추천받았다-북한관련 중국자료)

 

주사파 제거는 김영삼정부 때 주사파 세력 파악, 김대중정부 때 남북정상회담과 이명박정부의 러시아, 중국 등지 북한 자료 공개로 학원가에서 완전히 제거 되었다   문재인정부 출범과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이후 학원가 등지에서 반제민족민주전선 지하신문과 김정은 우상화 세력이 등장하고 있다

 

 

 

  한국민족민주전선 해체 작업과정에 일어난 북한 잠수함 사건

 

한국은 민주국가(민주공화국)로 진보세력을 인정하지만 좌파 사회주의 국가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파는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를 지지하는 분들을 말한다면 좌파는 노동계급의 령도 노농연맹(勞農聯盟)의 사회주의 국가(인민공화국이나 사회주의 공화국)를 지지하는 분들을 말한다

우파는 입헌군주국을 인정하지만 좌파는 공화국만을 인정한다

한국정부 내부 좌파는 친북세력 즉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북한정부(주체사상, 김일성주의)를 인정하는 세력을 지칭하고 있으며, 우파는 북한 김일성 정부(김일성 가계 김정일, 김정은정부)를 사회주의 국가 독재체제나 전체주의 독재정부로 인정하는 세력들을 지칭하고 있다

우파와 좌파에서 진보와 보수와도 구분해야 한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전체주의(독재주의)이며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이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 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국가)는 우파세력으로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 자유무역)를 지향하는 세력을 보수세력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생존권, 보호무역)를 지향하는 세력을 진보세력으로 지칭하고 있다"

 

 

반제민전 창립 50주년 담화

통혁당을 재건한 반제민전이 창립 50주년을 맞아 담화를 발표했다.

반제민전 부위원장은 담화에서

자주 민주 통일의 활로를 개척해 온 그 기세로 앞으로도 내외의 역풍을 뚫고 역사적 임무를 수행할 의지를 분명히 했다.

 

8 26일 우리 민족끼리에 게재된 담화 전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남조선 인터넷홈페이지 구국전선(http://www.aindft.com)에 의하면 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선전국이 창립 50돐이 되는 것과 관련하여 반제민전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절세의 위인 받들어 주체의 항로 따라 나아가는 반제민전의 위업은 필승, 불패이다.

 

-창립 50돐에 즈음한 반제민전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담화-

위대한 향도의 빛발 따라 남녘의 전위투사들과 각계 애국 민중의 변혁 운동이 새로운 전환적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반제민족민주전선창립 50주년을 맞이한다.

 

 

1969 8 25일 통일혁명당으로 창건되어 한국민족민주전선을 거쳐 2005 3월 반제민족민주전선으로 강화, 발전되어온 우리 당은 지난 50토요일을 이룩하기 위한 간고하고도 성스런 혈로를 헤쳐왔다.

 

그 나날은 우리 반제민전이 영생불멸의 위대한 김일성-김정일 주의 기치 밑에 이남 변혁운동을 승리로 결속하는 일로 매진시켜온 자랑찬 노정이었으며 민족해방과 민주주의, 자주통일을 위한 경향 민중의 성스러운 투쟁을 선도하는 애국적 전위대로서의 사명과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여온 자랑스러운 연대기였다.

 

반제민전은 연대와 세기의 교차 속에서도 일구월심 백두산 절세위인들을 불세출의 영웅, 조국통일의 구성으로 높이 우러러 모시고 우리의 전위투사들과 경향 각지 각계 민중 속에서 열화와 같은 위인숭배 심을 뜨겁게 분출시키기 위한 활동에 총력을 경주하여왔다.

 

 쉼 없이 몰아치는 전대미문의 광풍과 동서 좌우에서 덮쳐드는 형형색색의 돌풍 속에서도 영생불멸의 주체사상만을 유일무이의 향도 이념으로 삼고 이 땅 변혁 운동을 수미일관 주체의 항로로만 편차 없이 전진시켜온 우리 당이다.

 

 

 

반제민전은 절세의 애국자들이신 백두산 절세위인들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을 받들어 주체 조국의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방안들을 적극 지지·환영하고 그를 실천하기 위한 투쟁을 내외 반통일세력들의 악랄한 대결과 전쟁 도발 책동을 반대하는 투쟁과 결부하여 줄기차게 전개해왔다.

 

 

 

변혁 운동의 매 시기, 매 단계마다 각종 문건들을 발표하여 이 땅의 정치정세와 현안문제들에 대한 반제민전의 정당한 입장과 의지를 내외에 엄숙히 천명하고 민중운동에 대한 좌표와 향방을 제때에 명시해줌으로써 우리 당은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각 계층의 투쟁을 중단과 탈선 없이 정확하게 이끌어올 수 있었다.

 

 

 

하기에 반제민전의 정의의 주장들과 괄목할 애국 투쟁은 우리 민중과 국제 반제역량의 적극적인 지지 성원을 받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비상히 확대되고 있다.

 

반제민전의 자랑찬 50년 행로와 날로 드높아지고 있는 위상은 찬란한 향도의 위인을 높이 모신 최상최대의 영광으로 하여 받아안은 고귀한 결실이며 주체의 광휘로운 빛발을 따르는 길에서 차려진 필연적 귀결이다.

 

 

 

오늘 반제민전 앞에는 세기를 이어 지속되고 있는 외세의 강점통치에 종지부를 찍고 불의의 어지러운 사회풍토를 변혁시키며 평화와 통일을 갈구하는 민중적 염원을 하루빨리 성취하기 위한 투쟁을 일층 강화해야 할 중차대한 과제가 나서고 있다.

 

 

 

지난 세기 중반기로부터 장장 70여 년 우리 민중이 일관되게 새 사회, 새 정치, 새 생활을 갈구해 왔지만 그 성취의 꿈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절세 위인의 광폭의 도량과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 담대한 결단에 의해 마련된 역사적인 대사변들이 내외 적대세력들의 악랄하고 비열한 방해 책동으로 하여 응당한 결실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남의 호전세력들은 막대한 군비를 탕진하면서 최신 첨단 전쟁 장비들을 대대적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외세에 추종하여 북을 반대하는 침략적인 전쟁연습을 광란적으로 벌이면서 정세를 극도로 긴장시키고 있다.

 

 

 

이 땅의 극우 보수 패당은 역사적인 공동선언들의 이행을 피를 물고 반대해 나서면서 각계 민중의 지향과 시대적 흐름에 공공연히 도전해 나서고 있으며 반역적인 보수통치시대를 되살려보려고 필사 발악하고 있다.

 

 

 

조성된 정세는 반제민전의 전위투사들과 각계 민중으로 하여금 지난 수십 년간 전개해온 정의의 투쟁을 조금도 중단함이 없이 더욱 강력히 전개해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반제민전을 천하 절세의 위인들을 대를 이어 높이 모신 무상의 영광과 자긍심을 안고 어떤 역경 속에서도 경애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님을 조국 통일의 구성으로 추앙하는 남녘의 향일화, 영생불멸의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 기치 따라 전진하는 주체의 전위 대오로 더욱 튼튼히 다져나갈 것이다.

 

 

 

우리는 외세의 지배에 하루빨리 종지부를 찍고 친미·친일의 사대 매국적인 반역통치와 수구 보수세력을 척결하고 민중이 주인 된 자주 정치, 민주가 실현된 정의사회를 안아오기 위한 투쟁을 기어이 승리의 종착역으로 견인해갈 것이다.

 

 

 

가장 애국애족 적이고 공명정대한 주체 조국의 통일방안들을 확고한 이정표로 삼고 자주통일 투쟁을 보다 강력히 전개하며 그에 역행해 나서는 내외 반통일세력들의 악랄한 동족 대결과 북침 전쟁 도발 책동을 단호히 짓부숴버리기 위한 투쟁을 더욱 가열차게 전개해 나갈 것이다.

 

 

 

투쟁은 험로 역경이지만 천하 절세의 위인 받들어 찬란한 향도의 빛발 따라 주체의 항로로 나아가는 반제민전의 위업은 필승불패이다.

 

반제민전은 지난 50년간 간고한 투쟁 속에서도 추호의 흔들림 없이 동고동락해온 전위투사들, 각계 애국 민중과 함께 자주와 민주, 통일을 위한 성스러운 투쟁의 혈로를 선봉에서 헤쳐나감으로써 이 땅 변혁 운동의 애국적 전위대로서의 역사적중임과 역할을 다해나갈 것이다.

 

 

 

 

김일성 주석 탄생 108돌, 재일총련, 재중총련,반제민전에서 축하 편지

1943 10 5일 야전 훈련 후 촬영한 제88독립저격여단(국제여단, 각 민족 빨치산 부대) 대원 사진. 1열 좌로부터바탈린( N. S. Batalin, 巴达林, 소련), 정치 부여단장 이조린(李兆麟, 일명 張壽籛[张寿篯], 중국), 왕일지(王一知, 주보중 부인), 여단장 주보중(周保中, 중국), 김일성(金日成, 1영장, 조선), 부여단장 시린스키(Timofei Nikitovich Shirinsky, 什林斯基, 1904~?)2장광적(张光迪, 중국), 풍중운(冯仲云, 중국), 왕효명(王效明, 중국), 왕명귀(王明贵, 중국), 팽시로(彭施鲁, 중국)3양청해(杨清海, 중국), 서철(徐哲, 조선), 강신태(姜信泰, 강건, 조선), 김광협(金光侠, 조선), 수장청(隋长青, 중국)4 : 안길(安吉, 조선), 박덕산(朴德山, 조선), 최용진(崔勇进, 조선), 도우봉(陶雨峰, 중국), 김경석(金京石, 조선)[사진: 소련 제88국제여단 소속원 - 중국 길림성 도서관]

 

김일성 주석 탄생 108돌을 맞은 15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중앙상임위원회가 축하 편지를 드렸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편지 내용을 공개했다.

 

총련은 편지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께서 탄생하신 주체1(1912)년 4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반만년역사에서 처음으로 위대한 인민의 태양을 맞이한 대통운의 날이며 인류자주위업의 새 기원이 열린 뜻깊은 역사의 날”이라고 밝혔다.

 

이어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으로 시대와 혁명의 앞길을 밝혀주시고 현대역사를 자주의 궤도 우에 올려세우신 걸출한 사상이론가, 위대한 실천가이시며 한세대에 두 제국주의를 타승하시여 조국과 민족을 구원하시고 조국땅우에 자력부강, 자력번영의 만년 토대를 마련하여주신 민족 재생의 은인,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라고 강조했다.

 

또 총련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께서 시원을 열어놓으시고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대원수님께서 세계해외교포 운동의 본보기로 이끌어주신 총련애국위업은 오늘 경애하는 최고영도자 김정은 원수님을 높이 모심으로써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위대한 대원수님들께서 재일 동포들과 맺어주신 뜨거운 정과 혈연의 역사는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라고 말했다.

 

끝으로 총련은 전체 총련 일꾼들과 재일 동포들이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전원회의의 기본사상, 기본정신을 총련애국위업에 철저히 구현하여 재일조선인운동의 전성기를 앞당기기 위한 투쟁에서 전진을 이룩해나갈 결의에 충만되어 있다”면서 “어머니 조국을 옹위하고 조국의 사회주의 강국건설에 특색있게 이바지하며 격변하는 정세의 요구에 맞게 조국통일운동과 일본 인민들과의 대외활동을 진공적으로 벌려나가겠다”라고 강조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재중조선인총연합회(재중총련)와 반제민족민주전선(반제민전) 중앙위원회도 축하 편지를 보내왔다면서 내용을 공개했다.

 

재중총련은 김일성 주석이 “10대의 어리신 나이에 혁명의 길에 나서시어 장장 20성상 피어린 항일대전의 만고풍상을 다 헤치시며 조국 해방의 역사적 대업을 이룩하시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희세의 위인을 최고영도자로 높이 모신 사랑하는 내 조국을 충성 다해 받드는 길에 재중조선인총연합회와 전체 재중 동포들의 창창한 앞날과 승리가 있다는 것을 폐부로 절감하면서 위대한 김정은 시대에 사는 공화국의 해외공민된 더없는 긍지와 영예를 끝없이 빛내어갈 굳은 결의에 넘쳐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재중총련은 “전체 일꾼들과 재중 동포들의 절절한 소망을 담아 태양 민족의 무궁한 번영과 주체의 사회주의 강국건설의 승리를 위하여,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위하여” 김정은 위원장의 안녕을 축원했다.

 

반제민전은 “역사적인 조국 해방 75돌이 되는 뜻깊은 올해에 조국통일위업 실현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며 민족의 열망과 대세에 도전해 나서는 외세와 온갖 반역무리들을 청산하기 위한 투쟁에 총매진해나가겠다”면서 김정은 위원장의 건강을 축원했다.

 

 

                                                       ▲ 북의 국가우표발행국에서 태양절(김일성 주석 탄생일 4월 15일)을 맞으며 우표를 발행했다

 

-김일성 김정일 가계 세습제 유일사상과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 김정일주의자가 돼야 국가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주의 주체사상(주체연호)과 김정일주의 선군정치를 지지해야 정치범이 아니다

북한정부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가계 세습제 유일사상 이외는 모든 세력이 적이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를 버려야 종파분자가 되지 않는다 김일성 주체사상과 김정일 선군정치 유일사상으로 무장하라

-국제적 반미투쟁가와 연대를 하라 그래야 반미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 중국정부 내 친미인사를 제거하라 일본정부나 한국정부 내부 반미인사를 포섭하라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후보 자격은 다음과 같다

"선거에 참여할 정당과 개인은 선거연합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가입하며 해당 선거연합은 모든 지역구에서 후보를 단일화한다"

후보를 내는 곳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뿐이기에 모든 지역구에서 단독 후보가 출마하게 되고 홍보나 선전 활동 등 선거 유세도 없다. 투표용지에 적힌 후보자를 지지할 경우에 기표소에 들리지 않아도 된다고 보장하였으니 기표소에 들리는 것 자체가 해당 후보자를 반대한다는 표시가 되는 '공개투표'가 된다. 선거가 끝나면 다 같이 모여서 춤을 추는데, 개표가 끝난 뒤가 아니고 투표가 끝난 뒤에 한다는 점도 선거에서 반대 의견을 내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통일전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선로동당 (여당) ·

조선사회민주당 ·

천도교청우당

해외 김일성 김정일 가계 세습제 유일사상 단체[재일총련, 재중총련,반제민전등]

민전의 통합은 남조선로동당과 북조선로동당의 합당으로 조선로동당이 탄생한 것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미군정 시기인 1946 2월에 박헌영과 여운형, 허헌 등이 만든 단체이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소군정 영역에서 김일성과 김두봉, 최용건 등이 주축이 되어 구성되어 있었다. 모두 사회주의 계열의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해 창립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다. 이에 1949 6 25일부터 평양에서 회의가 열려 두 단체는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으로 통합했다.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은 "노동계급이 영도하는 노농동맹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우리나라의 모든 애국적 민주주의 역량을 묶어 세운 강력한 정치적 조직체"로 규정한다. 북한 노동당의 통일전선 전술의 전위를 맡고 있었으며, 남한 내부의 북한 노동당 지지 세력을 단합시켜 북한 노동당과 연계 활동을 펼치는 것이 목적이었다.

현재는 정당 및 사회단체의 연합체로서 총선거 후보자를 배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 대의원이나 해외 주체사상 연구회나 친북단체 대표들이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단체 구성원들이다

남한 친북 주체사상파들이 북한정부 대의원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일본 조총련처럼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에 가입하고 활동하는 단체로 보면 된다 일본 조총련이나 남한 친북세력 김일성 김정일주의(주체사상이나 선군사상) 단체[한국민족민전선 서울대표부] 그리고 해외 친북세력 김일성 김정일주의(주체사상이나 선군사상) 단체들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통일전선] 하부조직으로 활동하면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북한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은 북한 김정은정부 친위대이며 자금줄(돈줄)이다

특히 해외 단체 북한정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은 북한정부 인적자원단체이며 자금줄(돈줄)이다

남한에서는 북한 김일성정부가 박헌영과 남로당을 체제전복 범죄행위와 미국의 간첩으로 처형된 이후 남한에서 친북세력이 와해 되었고 박정희정부 때 남한 최초의 김일성노선 통일혁명당을 조직했고 1972년도 주체사상 선포와 함께 남한, 조총련 해외단체에 대의원을 선출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구축해왔다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노동당이 크게 패배하고 인민민주주의 노선 인민회의정부론 인민공화국을 포기하고 자국 사회주의 국가 주체사상과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2 12 27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회의에서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을 채택하여 북한 제2공화국을 선포했다

 

 

 

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 인물 저우바오중(周保中, 주보중)-붉은 군대 예하부대 각 민족 빨치산(공산당 무장단체) 부대 

1943 10 5일 야전 훈련 후 촬영한 제88독립저격여단(국제여단, 각 민족 빨치산 부대) 대원 사진. 1열 좌로부터바탈린( N. S. Batalin, 巴达林, 소련), 정치 부여단장 이조린(李兆麟, 일명 張壽籛[张寿篯], 중국), 왕일지(王一知, 주보중 부인), 여단장 주보중(周保中, 중국), 김일성(金日成, 1영장, 조선), 부여단장 시린스키(Timofei Nikitovich Shirinsky, 什林斯基, 1904~?)2장광적(张光迪, 중국), 풍중운(冯仲云, 중국), 왕효명(王效明, 중국), 왕명귀(王明贵, 중국), 팽시로(彭施鲁, 중국)3양청해(杨清海, 중국), 서철(徐哲, 조선), 강신태(姜信泰, 강건, 조선), 김광협(金光侠, 조선), 수장청(隋长青, 중국)4 : 안길(安吉, 조선), 박덕산(朴德山, 조선), 최용진(崔勇进, 조선), 도우봉(陶雨峰, 중국), 김경석(金京石, 조선)[사진: 소련 제88국제여단 소속원 - 중국 길림성 도서관]

 

 

주보중(周保中, 1902 - 1964 2 2)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 중국 남서부 윈난성(雲南省, 운남성)에 사는 소수민족 바이족(白族, 백족) 출신이다 건국 전에 김일성, 최용건 등 조선인의 항일 빨치산도 소속한 동북 항일련군(東北抗日聯軍)의 제2군로군(第二路軍)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고 동북항일련군(東北抗日聯軍)이 적군(赤軍, 소련군)의 제88 독립저격여단(88独立狙撃旅団)으로 조직 개편할 때 제88 독립저격여단(88独立狙撃旅団)의 여단장이 되었고 소련군 제88독립저격여단의 만주침공 이후 소련군의 장춘위수부사령관(長春衛戍副司令官)이 된다. 국공 내전에서 동북 인민해방군의 부사령관으로 활동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윈난성 인민정부 부주석,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 위원 등을 역임한다.

 

주보중(周保中) 1902년 윈난성(雲南省, 운남성) 다리시(大理市,대리시)에서 태어났다.

1917  15세의 나이에 호법운동(護法運動,에 참여했고, 1922년부터 1924년까지 윈난성(雲南省, 운남성) 육군강무당(陸軍講武堂)에서 수학(修學)했다.

1926년부터 북벌(北伐)에 참가했고 국민 혁명군 제6(国民革命軍第6)으로 활동했다.

1927 7월에 우한시(武漢市, 무한시)에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27 12월 후난성(湖南省, 호남성), 저장성(浙江省, 절강성), 허베이성(河北省, 하북성) 등으로 수송과 연락 임무에 종사했다. 국민혁명군(国民革命軍) 6군의 제18사단의 부사단장을 맡고 있었다.

1928년 소련 모스크바 국제 레닌 학교에 유학했다.

 

1931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귀국하여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만주지역의 랴오닝성(遼寧省,요녕성) 등으로 김일성과 최용건등의 조선인과 협력하여 항일 게릴라를 조직 하였고, 1935년 동북항일연군이 조직되면 제2군 군장(2軍軍長)에 취임하였고, 1937년 연군 개편시(聯軍改編時)에 제3로군장(3路軍軍長)이 되었다

길림성 동부(吉林省東部)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의 소탕작전에 의해 큰 타격을 받게 되면서 1940년에 소련의 극동 지방에 탈출하여 소련군의 산하 제88독립 저격여단(88独立狙撃旅団)의 여단장(중령)이 되었다. 김일성은 대대장(대위)이었다.

 

1945 8월 소련군의 만주침공과 함께 만주로 돌아와 소련군 장춘 위수 부사령관((長春衛戍副司令官)에 임명된다 같은 해 9월 이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동북인민자위군(東北人民自衛軍)으로 개칭되고, 총사령관에 임명 되었다

10 31일 이전 항일련군(抗日聯軍)과 토착 무장조직을 규합하여 새로운 동북 인민자치군(東北人民自治軍)이 편성되면서 임표 총사령관에서 주보중 부총참모장에 임명 되었다.

 

1946 1 14일 동북인민자치군(東北人民自治軍)이 동북민주련군(東北民主連軍)으로 개칭되면서 임표 사령원(司令員)에서 주보중 부사령원(副司令員)에 임명 되었다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과의 국공내전이 시작되면서 1946년부터 1948년 국공내전에서 중국 동북부 장춘시 해방 전투에서 활약했고. 1948 10월 제2차 장춘시 해방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1948 1월에 민주련군(民主連軍)이 동북 인민해방군(東北人民解放軍)으로 개칭 된 뒤 11월 제4야전군(第四野戦軍)으로 개편되면서 주보중 부사령원을 해임 되었다

 

1949 10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1950 2월부터 윈난성 인민정부 부주석(雲南省人民政府副主席), 서남 군정위원회 정법위원회 주임 겸 민정부장(西南軍政委員会政法委員会主任 兼 民政部長) 등을 역임했다.

1951 10월부터 1957 5월까지 운남대학 교장(雲南大学校長)을 역임했고 또한 1953 8 월부터 1954 10월까지 서남정법학원 원장 겸 당 위원회 위원장(西南政法学院院長兼党委員会書記)을 역임했다

1954 9 29일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의 결정에 따라 국방위원회 위원에 임명 되었고, 1955년에는 일급팔일훈장(一級八一勲章), 일급독립자유훈장(一級独立自由勲章)을 수여 되었다.

1956년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대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으로 선출 되었다. 1956 9월 중국 공산당 제8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후보 위원에 선출 되었고, 1959 4 28일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민족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됨과 동시에 동 회의의 결정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재임 되었고 1964 2 2일 베이징시에서 질병으로 사망했다

 

북한 노동신문에서도 칭찬되고 있는 북중 관계의 상징이자 김일성의 친밀한 상관이고 소련에 소개한 은인이기도 한 주보중과 그의 일족은 광물 자원과 예술과 무기 거래 등 외화 획득에 중요한 사업으로 다양한 편의를 도모하고 북한 경제의 버팀목이 되어 있는 것이 해외 언론에 보도 되고 있다

 

                                                                           1946년 8월 길림성 연길 주보중 장군

                                                                                             주보중 장군이  착용한 비옷

*호법운동(護法運動

1917년에 중국의 북양 군벌 돤치루이에 반대하여, 남방의 혁명 세력이 일으킨 운동. 돤치루이가 정권을 장악하여 안후이파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회를 구성하자, 쑨원 등 남방의 혁명 세력이 옛 국회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일으켰다

 

*주보중 약력

1902년 운남성 대리시에서 태어났다.

1917 15세의 나이에 호법 운동에 참가했다.

1922 ~ 1924년까지 운남육군강무학당에서 수학했다.

1926년 국민혁명군 제6군에서 활동, 북벌에 참가했다.

1927 7월 우한시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27 12월 국민혁명군 제6군 제18사단 부사단장을 역임하여 호남성, 절강성, 하북성 등에서 수송 및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28년 소련 모스크바의 국제레닌학교에 유학했다.

1931 9월 만주 사변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만주 요녕성 등에서 항일 게릴라 조직을 결성했다.

1935년 동북항일연군이 조직되면서 제2군 군단장에 취임했다.

1937년 동북항일연군이 개편되면서 제3로군 군장에 취임하여 길림성 동부의 산악 지대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다. 일본 관동군의 대대적인 소탕 작전 때문에 1940년 소련 연해주로 피신했다. 그리고 소련군 산하 제88독립저격여단의 여단장(중령)이 되었다.

1945 8월 소련군의 만주 침공과 함께 만주로 돌아가 소련군 장춘위수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45 9월 동북항일연군이 동북인민자위군으로 개칭되면서 총사령에 임명되었고, 10 31일 동북항일연군과 토착 무장조직들이 규합하여 동북인민자치군이 편성되자 총사령 린뱌오 밑에서 부총참모장을 역임했다.

1946 1 14일 동북인민자치군이 동북민주연군으로 개편되자 린뱌오 사령원 밑에서 부사령원을 역임했다.

1946 ~ 1948년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중국 동북부의 장춘시 전투에서 활약했고, 1948 10월 제2차 장춘시 해방 전투에도 참가했다.

1948 1월 동북민주연군이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된 후, 11월 제4야전군으로 개편되면서 부사령원에서 해임되었다.

1949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1950 2월부터 운남성인민정부 부주석, 서남군정위원회 정법위원회 주임 겸 민정부장을 역임했다.

1951 10 ~ 1957 5월까지 운남대학 교장을 역임했다.

1953 8 ~ 1954 10월까지 서남정법학원 원장 겸 당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54 9 29일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의 결정에 따라 국방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55년 일급팔일훈장 및 자유독립훈장이 수여되었다.

1956년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6 9월 중국공산당 제8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고, 1959 4 28일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민족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및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재임되었다.

1964 2 2일 베이징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1936년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만주에서 만들어진 항일 빨치산 조직(소련군의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성격)으로 지금까지 만주에서 활동하던 공산당계의 조선인, 중국인 빨치산 부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문호를 넓혀 우파 항일 무장단체를 받아 들여 1936년부터 개편되어 갔다.

주보중이나 김일성 등 중국인과 조선인의 유명한 파르티잔(Partizan, 빨치산) 소속으로 나중에 소련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조직으로 개편하여 그 구성원 중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한 권력의 중추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동북항일연군을 만주파로 지칭하고 있다)

 

1.성립

1930년대 초반에서 만주국(満州国, 1932 3 1일 건국일)에서 중국 공산당 지도하에 조선인, 중국인의 항일 빨치산 부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편성되어 있었지만, 조선인 대원 400명 이상이 친일 스파이로 의심 받고 숙청된 민생단 사건(民生団事件) 등으로 탈출도 잇따라 조직이 효과적으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한편,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통일 인민전선(統一人民戦線)의 결성을 호소되면서 중국 공산당도 8월 테제를 발표하고 제2차 국공합작(2次国共合作)을 호소했다. 이에 따라 만주에서도 항일 반만(抗日反満)” 구호로 내세우면서, 국민당 계열의 독립 무장단체를 포함한 모든 단체와 합작하여 흡수를 목표로 정책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 이미 1934년경부터 국민당계열의 마적(馬賊, 말 타고 다니는 소수 무장단원의 군벌)이나 의용군(義勇軍)도 공산당의 지도하에 정리하려고 시도했던 것이지만, 토착 무장단체는 주로 부농(富農), 부호(富豪)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해 공산주의 색깔(노동자 계급 령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을 싫어하여 국가자본주의(국가사회주의) 일만측(日満側, 일본과 만주국)에 돌아는 경우가 많았다. 최대한 공산주의 색깔을 엷게 하여(통일전선 구축) 존속하고 있는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소규모 마적과 독립 무장단체를 흡수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재편되어 갔다.

 

그러나 통화성(通化省)을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계열의 최대의 항일 무장단체 왕봉각(王鳳閣)

의 반만항일군(大刀会, 대도회)과 만주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조선인 민족주의자 무장단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우파는 공투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집단의 참여를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큰 세력이 될 수 없었다.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제1. 2군이 남만주, 4. 5. 7. 8. 10군이 동만주, 3. 6. 9. 11군이 북만주로 확장했다

1936년 우선 남만주군(南満)이 제1로군(第一路軍)이 되고, 이것이 두고 두고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주력부대인 것으로 계속되어 나가게 되었다. 남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거주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간도는 민생단 사건이 꼬리를 이어 내분이 계속되고 좀처럼 재편은 부진했지만 1937년에는 동만주군 제2로군(東満軍 第二路軍)이 되었고, 1939년 북만주군 제3로군(北満軍 第三路軍) 것으로, 일단의 재편을 하게 되었다[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제1군으로부터 제11군까지 존재했으며, 1, 2군이 남만주에서, 4, 5, 7, 8, 10군이 동만주, 3, 6, 9, 11군이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다. 후에 남만주의 군은 제1로군으로 동만주의 군은 제2로군으로 북만주의 군은 제3로군으로 재편성되었다]

 

2. 편성

편성 당시의 제1로군(1路軍)의 인원은 중국 공산당측 자료 "中共延辺党組織活動年代記(중공연초당조직활동연대기)“ ”동북항일연군투쟁사(東北抗日聯軍闘争史)“  6,000여명 추측되고 일본측의 만주공산 비적의 연구(満州共産匪研究)“에 따르면 1,630명 정도에서 상당한 차이가있다.

 

또한 동북항일연군 아래의 인물은 사사키 하루타카(木春隆) "한국전쟁 이전의 한국 독립운동 연구와 강재언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에 따라했다.

서대숙 "김일성 사상과 정치 체제가 자세 하지만, 동북인민혁명군 시대(東北人民革命軍時代)에 전사 한 인물이 실리는 등 착오가 보여 자료로 피했다.

해방 이후 최현(崔賢), 김일성(金日成), 최용건(崔庸健), 김책(金策), 강건(姜健), 최용진(崔勇進). 김일(金一), 이영호(李永鎬)은 살아남아 나중에 북한의 요직을 차지한다[동북항일연군을 만주파로 지칭하고 있으며 제88독립저격여단을 소련군으로 지칭하고 있다]

 

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第一路軍 総司令-楊靖宇]

부총사령 왕덕태 [副総司令-王徳泰]

정치위원 위증민[政治委員魏拯民]

 

 1로군 군단장 양정우[ 第一軍 軍長-楊靖宇]

1사단 사단장 정빈[第一師 師長-程斌]

· 3여단 정치부 주임 이질수[3 政治部主任-李鉄秀]

4여단 단장 수상태 [4 団長-隋祥太]

6여단 단장 유인봉[6 団長-劉仁鳳]

2사단 사단장 조국안[第二師 師長-曹国安]

8여단[8]

3사단 사단장 왕인재[第三師 師長-王仁斎]

5여단[5]

7여단[7]

 

2로군 군단장 왕덕태[第二軍 軍長-王徳泰]

정치주임 오성륜(),이청()[政治主任-呉成崙. 季青]

4사단 사단장 안봉학[第四師 師長-安鳳学]

1여단 단장 최현[1 団長-崔賢]

2여단[2]

3여단[3]

5사단 사단장 진한장[第五師 師長-陳翰章]

4여단[4]

5여단[5]

6여단[6]

6사단 사단장 김일성[第六師 師長-金日成]

7여단 단장 김주현[7 団長-金周賢]

8여단 정치위원 박덕산(김일)[8 政治委員朴徳山金一]

9여단[9]

10여단[10]

 

독립여단 여단장 방진성[独立旅 旅長-方振声]

1여단 단장 최춘국[1 団長-崔春国]

2여단[2]

 

교도여단[教導団]

 

2로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주보중[第二路軍 総司令兼政治委員-周保中]

  참모장 최용건(최석천)[参謀長-崔庸健崔石泉]

4군 군단장 이연평[第四軍 軍長-李延平]

부군단당 왕광우[副軍長-王光宇]

1사단 사단장 관서범[第一師 師長-関書範]

1여단[1]

2여단[2]

3여단[3]

2사단[第二師]

2사단 정치위원 도정비[第二師 政治委員-陶浄非]

4사단 정치위원 김광협[4 政治委員-金光侠]

5여단 정치위원 박동화[5 政治委員-朴東和]

6여단[6]

3사단 사단장 이문빈[第三師 師長-李文彬]

8여단[8]

9여단 정치위원 강신태(강건)[9 政治委員姜信泰姜健]

 

7군 군단장 이학복[第七軍 軍長-李学福]

군단장 대리 최석천(최용건), 경낙정[軍長代理-崔石泉,景楽亭]

정치주임 정로암, 포림(政治部主任-鄭魯岩,鮑林)

1사단 사단장 왕여기[第一師 師長-王汝起]

  정치부 주임 팽시노[政治部主任-彭施魯]

1여단 여단장 최용진[第一団団長-崔勇進]

2사단 사단장 유기창[第二師 師長-鄒其昌]

7여단 정치위원 이영호[第七団政治委員-李永鎬]

3사단 사단장 경낙정,운학영, 수장청[第三師 師長-景楽亭,雲鶴英隋長青

 

8군 군단장 사문동[第八軍 軍長-謝文東]

10군 군단장 왕악신[第十軍 軍長-汪雅臣]

구국군[救国軍]

의용군[義勇軍]

 

3로군 총사령관 장수전(이조린)[第三路軍 総司令-張寿籛李兆麟]

참모장 허형식[参謀長-許亨植]

정치위원 빙중운, 김책[政治委員-馮仲雲, 金策]

3군 군단장 허형식[第三軍 軍長-許亨植]

6군 군단장 장수전[第六軍 軍長張寿籛]

7군 군단장 이화당[第九軍 軍長李華堂]

11군 군단장 기치중[第十一軍 軍長祁致中]

정치부 주임 김정국[政治部主任金正国]

 

                                                                                             1932년 3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만주국 지도] 

3.활동 상황

(1)1일로군 제1(一路軍第一軍)의 서쪽정벌

1936년 남만주에서 제1일로군(第一路軍)이 성립한 당시 중국 공산당은 소위 장정(長征) 한창이었지만, "항일동정(抗日東征)“ 깃발을 들고 산서성(山西省)에서 하북성(河北省)에 진출하여 동쪽으로 향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1일로군 1(第一路軍第一軍)의 첫 번째 활동은 이에 잇따라 움직을 하여 서쪽을 정벌하는 것이었다.

 

1차 서쪽 정벌은 제1사단(第一師)에 의해 이루어졌다. 1936 6월 하순, 번시(本渓,본계-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동부의 중공업도시)와 안동성 봉성현(安東省鳳城県)의 경계에 있는 화상 모자산(和尚帽子山)을 출발하여 요양(遼陽)에서 남만주 철도와 요하(遼河)를 넘어 요서(遼西)에서 열하(熱河)로 나아 가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 요녕성 수암현(岫岩縣)의 산악 지대에서 만주국군(満州国軍)에 포위되어 뚫고 탈출했지만, 다수의 도망자, 전사자를 내고 돌아갔다.

 

2차의 서쪽정벌은 제3사단(第三師)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전원이 기마대(騎馬隊)가 되어 결행(決行) 하게 되었고, 1936 11월 하순 싱징현(흥경현,興京県) 경계에서 기마로 출발하여 만주국군(満州国軍)의 추격을 받으면서 청원(清原)에서 철령(鉄嶺)을 넘어 요하(遼河)유역에 도달 하였다

그러나 따뜻한 겨울을 위한 요하(遼河)가 결빙(氷結, 물 따위가 얼어붙음) 되지 않고, 한달의 행군으로 피폐 결국 되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 기간 동안 400명의 대원이 백 수십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3사단(第三師)의 대원 수가 400명이었다고 한다면, 6개사단(6個師) 모든 동일 숫자라고 하는 단순 계산으로 제1일로군 전체(第一路軍全体) 2400명 정도가 6000여명으로 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과대 포장되었다고 알 수 있다

 

이듬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1로군 제1(一路軍第一軍)은 서쪽 정벌에 실패하면서도 또한 팔로군(八路軍)과의 연계를 지향 일본군의 후방을 위협하는 목적으로 제3사단(第三師)의 생존을 중심으로 청원(清原), 서풍(西豊), 개원(開原) 일대로 활동을 계속하였고 별동대가 심양(瀋陽), 무순(撫順) 일대에 진출하는 등 소모(消耗)를 거듭했다.

 

(2)김일성 부대에 의한 보천보 습격

한편, 1936년 제1로군의 제2(第一路軍 第二軍)은 장백지구(長白地区)에 근거지를 만들려고했다. 4사단 사단장(第四師 師長) 안봉학(安鳳学)체포되어 투항하였고 제2군 군단장(第二軍軍長) 왕덕태(王徳泰)이가 만주국군에 포위되어 전사하는 등 상당한 희생하면서 우선 김일성이가 사단장을 맡고 있는 제6사단(第六師)의 근거지 개척에 성공하여 1937년에는 제1로군(一路軍)의 제1군 제2사단(第一軍第二師)과 제2군 제4사단(第二軍 第四師)이 장백(長白)에 근거지를 옮기고 있었다.

 

원래 1932년에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을 시작한 것은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반석현위원회(中国共産党満州省委磐石県委)이었지만, 그 당시부터 고참 조선인 멤버에 오성륜(呉成崙) [全光, 전광]], 이상준(李相俊)[이동광(李東光)]이가 있었다.

오성륜(呉成崙) 2(第二軍)의 정치주임이었고 이상준(李相俊)도 제2군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보여지지만, 그들은 민생단 사건(民生団事件)의 반성에 따라 정치 위원 위증민(魏拯民)의 지지를 얻고 조선인의 민족의식에 호소하기 위하여 재만주지역 조선인 조국광복회(祖国光復会)를 조직하는 방침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장백(長白) 침공은 이에 따른 것으로 제6사단(第六師)의 지지기반 구축 공작을 시작하고 그 일환으로 압록강 유역의 조선반도 내부 함경남도 (현재 양강도) 갑산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박금철(朴金喆), 박달(朴達) 등 공산주의 단체 (후에 조선 노동당 갑산파)와 연락을 하게 되었다.

 

1937 6월 제6사단(第六師)은 압록강을 건너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甲山郡普天面保田里)[보천보(普天堡)]의 습격(보천보 전투)에 성공했지만, 이것은 갑산그룹 안내와 참가해서 성공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은 조선뿐만 아니라 조선반도를 단속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일본측에서도 공비[共産党匪賊(공산당 비적)]으로 거물시 되는 것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이 권력을 독점 하는데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고도 한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이 전년(前年) 6사단(第六師)의 장백(長白, 백두산) 근거지 만들기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수 십명 규모의 소대 김일성 부대를 자칭 무송(撫松)과 장백(長白)에 출몰하여 약탈을 반복 만주군 수비대와 충돌을 거듭하고 있었다. 또한이 해()에 들어서는 갑산 그룹의 활동도 활발해 지고 조선인 부호(朝鮮人富豪)에서 금품을 갈취 등의 사건도 있었다. 또한, 최현를 단장으로하는 제4사단 제1여단(第四師第一団)이 두만강을 넘어 함경북도 무산(茂山)에 진입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미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을 전년(前年) 조선반도의 신문은 김일성 부대의 동향을 전했다. 1936 9 11일자 매일신보는 "혜산 건너 편에 출몰하는 적단(賊団, 도적 단체) 150 - 160명으로, 3분의 1이 만주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이고 ... 관헌과 같은 복장으로 소련식 중국식의 소권총, 강한 기병2(軽機二丁), 대포1(大砲一門)을 가지고 있었다

동북항일연군계(東北抗日聯軍系)에서 장백현(長白県) 방면에 파견된 이 부대의 수령(首領) 김일성이라고 한다. 이들은 15-20 명씩 소대 약탈반을 꾸어 조선인 부락에서 식량을 약탈하였다"와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고 정보를 싣고 있다. 참고로 뒤를이었다 경성일보 기사에서는 "비수(匪首, 도덕의 두목) 김일성 일당이 있고, 6사단(第六師) '김일성 부대'를 자칭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1937 5, 최현 부대(崔賢部隊)가 무산(茂山)에서 남하(南下) 하여 혜산 경찰서 관내(恵山署関内),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태리 상흥경수(上興慶水) 부락 고뢰조재목작업소(高瀬組材木作業所,)을 습격했다

금품 많은 것을 약탈 한 후, 주 임무인 일본인 1, 조선인 5, 중국인 30명을 납치해 강유역으로 도망친 후 몸값을 요구했다.

그에 이은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이다. 보천보 300호 남짓의 마을에서 일본인 26, 중국인 2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인이다. 그래서 무차별 적으로 금품을 강탈하고 동사무소 나 소방 회관, 우체국, 초등학교 등에 방화하고 도망한 것은 충격을 받은 단속측 조선총독부는 김일성과 최현에 거액의 상금을 걸고 수배하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크게 보도했다. 이 신문의 논조는 그들을 비적(匪賊)으로 비난하고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동정(同情)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이 시기의 조선에서는 관헌 (조선 총독부)에 의한 검열을 위해 항일운동을 긍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곤란이기도 했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중국 공산당과의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소련의 원조도 얻고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물자 보급을 위해 종종 일본인, 조선인, 현지인의 구별없이 금품강탈이나 몸값 목적의 유괴 등 폭력적인 약탈 행위도 했다. 또한 몸값 목적 외에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주민을 납치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불어 넣어 인원 충당하고 있었다. 물자와 인력의 공급 수단에 있어서는 비적(匪賊)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하는 연구자도 있다

 

보천보전투 양강도는 중국 장백산과 한국 백두산으로 접경을 두고 있으며 두만강, 압록강이 양국으로 접경하고 있다  

(3)혜산사건과 제1로군(第一路軍)의 편성 기준

김일성부대의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에서 추격한 혜산경찰서의 경찰부대는 매복을 받아 32 명 중 7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상에 급히 함흥 보병 제74연대 김인욱(金仁旭) 소좌(소령)이 혜산 수비대장으로 임명 되었다.

이 혜산 수비대가 경찰부대와 협력하여 최현 부대와 합류하고 있는 김일성 부대를 급습하여 타격을 주었다. 이는 김일성 부대가 다시 국경을 넘어 조선에 침공하는 것은 없어졌지만, 갑산 그룹의 활동은 운흥면(雲興面) 금광을 습격하여 사금(砂金)을 강탈 하였다. 도적단이 김일성 부대를 자칭하는 삐라를 뿌리고 있던 것으로부터, 동조(同調) 갑산 그룹의 존재가 드러나고, 갑산측에서 162, 장백현에서 59명이 검거됐다. 혜산사건의 시작이다 .박금철도 이 때 검거 되었다.

혜산사건(恵山事件) 1차 검거의 자백도 이듬해 1938년에는 박달을 포함한 279명이 검거 돼 만주국 주재 조선인 조국광복회(在満韓人祖国光復会)와 거기에 기담한 갑산그룹이 괴멸했다.

한편, 1938년 초에 제1로군(第一路軍) 주력군은 주로 집안현(輯安県)의 삼림 지대에 있었다. 중국인 총사령관 양정우(楊靖宇)와 정치 위원 위증민(魏拯民)은 팔로군과 연락을 고집해 여러 번 서쪽 정벌을 계획했다.

그런데 그 중에 제1사단(第一師)의 사단장 정빈(程斌)과 그의 부대가 일만토벌부대(日満討伐部隊)에 투항했다. 일만측(日満側)은 투항자를 처형하지 않고 상금이나 직장을 보장하는 귀순 전략을 취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한 것이다. 따라서 서쪽 정벌은 중지(中止)가 다음과 같이 제1로군(第一路軍)의 편성 기준이 이루어졌다.

인원의 숫자는 강재언(姜在彦)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에 따른다.

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 정치위원 위증민, 군수처장 오성륜, 총서령부경위여 여장 방진성 (500 )[第一路軍 総司令楊靖宇 政治委員魏拯民 軍需処長呉成崙 総司令部警衛旅 旅長方振声 (500]

1방면군 지휘 조아범(250)[第一方面軍 指揮曹亜范 (250]

2방면군 지휘 김일성(350)[第二方面軍 指揮金日成 (350]

3방면군 지휘 진한장(300여명)[第三方面軍 指揮陳翰章 (300人余)]

이 중 제2방면군(第二方面軍), 3방면군(第三方面軍)은 기존 제2로군(第二路軍)의 활동 범위로 되어 있던 동만주의 화룡(和竜), 안도(安図), 연길(延吉), 왕청(汪清), 혼춘(琿春) 등 조선인이 많이 사는 지역 이 활동 구역으로 통합 되었다.

 

(4)1로군(第一路軍)의 괴멸

중일전쟁이 발발했던 1937년 소련은 만주국, 조선과 접하는 국경을 경계하여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조선인) 모두 친일세력으로 간주하고,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렇게 한 것은스탈린의 대숙청에 처음부터 관계 당국 극동 내무 인민위원회(국가 정치부) 장관에 있었다

극동 내무 인민위원회(국가 정치부) 장관 겐리후 류시코후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몸이 위태로워 것을 헤아려 1938 6월 연해주에서 국경선을 넘어 만주국로 망명했다. 류시코후는 혼춘( 琿春)헌병대에 연행 된 후 도쿄의 참모 본부에 보내 망명 기자 회견을 열었다.

 

이 망명 사건에서만 아침의 국경은 극도로 긴장하여 소련군과 일본군 수비대가 충돌하는 장고봉사건이 일어난다.

 

또한 이듬해 1939년 노몬한 사건이 일어나 일단 휴전은 되었지만, 일본측의 경계가 높아져 관동군에 의해 만주 국내 항일세력에 대한 철저한 단속이 시작 되었다. 2 독립수비대 사령관 노조에(野副昌德) 소장에 만주국군(満州国軍) 7개여단, 경찰대 30개 대대가 배속되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대하여 대적 하게 되었다

 

노조에(野副昌德) 토벌대의 작전은 군, 경찰, 행정기관, 민간조직의 연락을 긴밀히하여 그물망을 잘게 치고 게릴라 활동을 봉쇄 민중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 일반 주민에게 토벌대와 게릴라 부대가 교대로 나타나는 상황에서 신변안전을 위해 쌍방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지만, 토벌대가 게릴라 부대를 몰아 약탈과 납치 위협을 완전히 봉쇄하여 치안을 유지한다면 게릴라 부대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적극적으로 토벌대에 협력하게 된다. 결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사람이 없는 삼림 지대에 몰려 식량과 의류의 확보도 곤란해 질 것이다

 

토벌대 중에서도 가장 유능하게 움직인 것은 정빈(程斌) 등 투항한 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 구성하고 있는 경찰부대였다. 그들의 활약으로 제1로군(第一路軍)은 점차 멀리 분산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940년 초에는 경위여장(警衛旅長) 방진성(方振声) 체포되어 처형, 투항들도 잇 따랐다. 그 투항자 때문에 총사령관 양정우의 동정(動静)이 알려져 단신 행동을 강요 될 때까지 되었다. 양정우는 몽강현(濛江縣)[현재는 양정우을 따서 정우현으로 개명 됨]에서 산 일에 들어간 주민과 접촉하여 통보돼 투항을 거부 사살 되었다. 토벌대는 최후의 절개에 흠모하여 불교행사를 영위하고 영혼을 달랬다.

 

양정우 사후, 1로군(第一路軍) 지도자로 추대된 위증민(魏拯民)은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주력 부대를 북상시키기 위해 제1방면군(第一方面軍)은 남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계속한다는 방침을 내놓았지만 그 직후 지휘관 조아범(曹亜范)이가 대원에 의하여 살해 되었고 제1방면군(第一方面軍)은 내분에 의해 해체 되었다.

 

그런 중에도 김일성이가 이끄는 제2 방면군(第二方面軍) 100 ~ 300명 정도의 집단 활동을 유지하고 습격, 약탈, 납치를 성공시키고 있었다. 1940 3월에는 안도현(安図県) 대마록구(大馬鹿溝) 산림 경찰대(森林警察隊)를 습격하여 사상자 각 2명의 피해를 주고 금품 2 3천엔을 약탈하고 대충 약 140명을 납치했다. 이틀 뒤 피랍자 중 25(일본인 1, 조선족 13, 만주족 9, 백계 러시아인 2)을 석방. 나머지 납치 인질 70여명과 함께 도망을 계속했기 때문에 만주 경찰과 마에다군단(前田隊)의 쫓는 곳이 되었지만, 2 방면군(第二方面軍)의 매복으로 마에다대(前田隊) 140명 중 일본측 문서 전사자 수 58, 전상자 27, 실종자 9명이라는 엄청난 타격을 주고 건재함 인상을 남겼다.

 

이 가을에서 노조에(野副昌德) 토벌대의 활동은 다시 활발해지면서 제2 방면군을 주요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김일성 부대도 소수 부대에 분산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의식(衣食)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제1로군 중추의 위증민도 연락이 취하지 못하고 김일성을 포함한 수십명은 8월에서 10월경에 자신의 판단으로 소련령으로 도망쳤다. 소련 측과의 연락도 없이 갑자기 입소였기 때문에 김일성은 억류 돼 한때 투옥 되었다.

 

3 방면군(第三方面軍) 1939년 제2로군 제5(第二路軍第五軍)과 대규모 공동 작전에서 한때 안도현 대사하진(安図県大沙河鎮)을 점령하는 등의 활약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 해 겨울부터 군 단위(軍単位)의 활동은 불가능하므로, 전사, 전상(戦傷), 도망, 투항자가 이어 괴멸 상태가 되었다. 1940년말 지휘관의 진한장은 추격에 의하여 전사한다.

그러나 활동을 계속 되어 김일성 부대 입소 이후 소수 인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소련에 입국했다. 13여단(十三団)을 이끌던 최현도 그 안에 포함돼 있다.

 

1로군 총사령부(第一路軍総司令部)도 괴멸 상태였지만, 1940 11월경에는 군의관 처장 서철(徐哲)도 경위대 살아남은 몇 명을 데려 입소했다. 만주에 남은 제1로군 수뇌부에 관해서는 1941 1월에 오성륜(呉成崙) 투항 귀순. 3월 질병에 시달리고 고립되어 있던 위증민이 토벌대에서 발견되어 전사 혹은 병몰 후 발견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제1로군의 만주에서의 활동은 거의 끝났다.

 

                                  1939年秋魏拯民左二與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指戰員在一起

(5)2로군(第二路軍), 3로군(第三路軍)과 소련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원래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재편 된 것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있었지만, 소련의 극동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대한 대응은 상황에 따라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1로군(第一路軍)의 활동 범위는 소련 국경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원래 지원을 받을 수도 적었지만 국경 근처의 동만주나 북만주에 있던 제2로군(第二路軍), 3로군(第三路軍) 밀접하게 소련과 염려 했다.

 

국경선이 긴장하고 있던 1938년 말에는 개편 이전의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제65(第六軍五師)가 일본군에 쫓겨 부대마다 월경했지만 사단장(師長)이 체포 될 뿐만 아니라 전원이 신장성(新疆省)으로 보내졌다.

 

2로군(第二路軍), 3로군(第三路軍)은 함께 대규모 내분을 안고 있었지만, 그 조정(調整)에 지도력을 발휘하고 양군 통해의 중심이 되어 있던 것은 제2로군(第二路軍) 총사령관 겸 정치 위원 주보중(周保中)이었다. 1940년의 1월 그가 중심이 되어 소련 극동당국과 1차 하바롭스크 회의를 받고 중국 공산당 중앙과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상황 소련 극동당 조직과 극동 방면 군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임시 지도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 합의가 성립했다.

 

1940 11월 주보중과 참모장 최용건은 사전에 소련측의 연락을 받고 부대마다 입소하고 살아 있던 제2로군(第二路軍) 다른 대원도 그 뒤를 이었다. 투옥되어 있던 김일성의 신원을 보증한 것은 주보 중이다.

 

3로군(第三路軍)은 총사령관 이조린(李兆麟) 등의 간부는 입소했지만, 소련에 불신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있고, 참모장의 허형식(許亨植)의 지휘 아래 부대의 절반이 북만주에 남아 싸움 계속했다

.허형식(許亨植) 1942년 경안현 청봉령(慶安県青峰嶺)에서 장렬한 전사를 이루었다. 일단 입소했던 정치 위원의 김책은 허형식(許亨植)의 의지를 이어 1943년 연말까지 입소를 거부하고, 봉산현(鳳山県)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1941년의 시점에서 제1로군에서 입소한 인원은 88명 정도 제2로군에서 110명 정도로,  200여명이 소련령에 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동북항일연군    김일성 (뒷줄 중앙)

                                1939년 김일성(앞줄 좌로부터 네번째)과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지휘부 전투지휘자들이 함께 촬영한 사진

[金日成前左四與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第二方面軍指揮部指戰員攝於1939金日成於1932年春到安圖創建游擊隊先後擔任汪清反日游擊大隊政委東北人民革命軍第二軍獨立師第三團政委第二軍第三團政委東北抗日聯軍第二軍第三師後改為第六師師長第一路軍第二方面軍指揮]

 

                                                 東北抗日聯軍第第一路軍女戰士左三為金貞淑

 

                                       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警衛旅部分指戰員攝於1939年夏

 

3.그 후

소련에 망명한 구성원은 제88 특별여단(교도 여단, 88독립저격여단)에 편입 되었다. 이 여단은 소련군에 흡수된 형태였지만, 소련 사람을 섞으면서 그 구성원이나 직책 등 주보중이 여단장되는 등 대체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조직 구조를 유지하고 있어 중국 공산당은 이 여단을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이라고도 호칭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대원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서 분리 된 소련군 정보국 직속되어 만주국에 침투해 공작에 종사했다. 위험한 임무에 종사한 그들이었지만, 숙청과 일본군의 스파이로 간주 형을 받은 사람도 있다.

 

또한 김일성은 스스로의 조선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에 편입 된 것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출판)"로 인정하지만 소련군과는 연계된 것만으로 제88 특별여단(교도 여단, 88독립저격여단)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고 소련군이 조선반도의 해방군이 되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조선인 대원은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38 도선 이북의 조선)에 돌려 보내 북한 인민위원회와 조선 공산당 (이후 조선 로동당) 및 조선 인민군의 요직에 올랐다.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후 동북항일연군 출신은 만주파 (파르티잔파, 빨치산파)라는 파벌이 되어 남로당파 (남조선 노동당 출신), 연안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중국에서 귀국 한 자, 조선의용군) 소련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소련에서 파견 된 자. 소련군 출신이나 행정,기술관료 출신), 갑산파(보천보 전투 등으로 동북항일연군과 공동 투쟁 한 자)을 잇따라 숙청하고 북한 권력을 독점했다. 조선 로동당에서 정적을 제거하고 구축한 만주파는 1967년에 당의 지도 이념으로 유일사상 체계를 채택하고 이후 북한은 주체 사상에 기초한 독자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걸어 가게 된다.

 

김일성은 만주국(만주지역 조선족 자치정부) 조선 공산당 활동가에서 소련군 예하 각 민족 빨치산부대로 그리고 2차대전 때는 소련측(좌파진영) 연합군 조선인(한국인) 부대로 활동했다

김일성은 민족주의자보다는 철저한 마스-레닌주의 노선 공산주의자이며 스탈린 추종세력이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스탈린을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후에 그는 바트당(아랍 사회당)을 조직한 사담 후세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 북한의 주체사상 김일성, 리비아의 카다피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련 공산당 스탈린 일국 사회주의 이론이 독일 노동자당 히틀러 국가사회주의 이론 비슷한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국영 자본체제) 이론이다  소련 공산당은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과 소련 공산노동당 그룹이 있다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이 수정주의자(실용주의자)라면 공산노동당 그룹이 교조주의자들이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사회주의 공화국(사회주의 국가) 세력은 국가자본주의 일본제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수립할 때 민족해방과 왕권신수설 전체주의 군주, 지주계급이나 매판 자본가를 타도하고 노동자 계급 령도 노농연맹 인민민주주의 혁명 체제 사회주의 국가 승리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개인 우상화, 신격화로 1인 장기집권으로 왕권신수설에 도취되고 있다

   

만주국을 승인한 국가

중국은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무역, 교통, 통신을 위해서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33년 국제연맹이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를 채택하여 만주가 중국의 일부임을 선언하자 일본은 연맹에서 탈퇴한다. 미국은 만주국이 건립하자 무력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 관계의 변화를 거부하는 스팀슨 독트린(Stimson Doctrine)을 선언한다.

 

국제 연맹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은 엘살바도르(1934 3 3)와 도미니카 공화국(1934), 소비에트 연방(사실상 1935 3 23, 법률상 1941 4 13), 이탈리아(1937 11 29), 스페인(1937 12 2), 독일(1938 5 12), 헝가리 (1939 1 9)에 승인되었다.

 

2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 만주국은 일본의 동맹국 독일의 지배를 받거나 영향하에 있던 국가인 슬로바키아(1940 6 1), 프랑스(1940 7 12), 루마니아(1940 12 1), 불가리아(1941 5 10), 핀란드(1941 7 18), 덴마크(1941 8), 크로아티아 독립국(1941 8 2)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일본의 영향하에 있던 중국 왕징웨이 정권(1940 11 30), 태국(1941 8 5), 필리핀도 만주국을 승인했다

 

만주국 인구와 오족협화

만주인(한족·만주족·한민족) 30,190,000 97.8%

일본인 590,760 1.9%

타인종(러시아인·몽골인 등) 98,431 0.3% 

-1932년 3월 1일 만주국 건국이후 만주지역 항일운동은 만주국 협화회(의회) 조선족 협화회(만주국 의회 조선족 의원, 조선족 자치조직)를 파악해야 잘 이해할 수 있다

만주국 협회(만주국 의회)는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한민족(조선족), 일족(야마토 민족의 연합정부 오족협화를 의미한다

만주국은 강덕제를 원수로 하는 국가로서,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한민족(조선족), 야마토 민족의 오족협화로 이루어진 만주인에 의한 민족자결의 원칙에 기초에 둔 국민국가를 표방했다. 그러나 실제 통치는 관동군이 주도하였다.

김일성(김성주)은 만주국 건국 이후 남만주나 동만주 지역에서 반일이나 반만주국(반만국) 활동을 했다 그리고 그의 동생 김영주는 관동군 헌병 보조원[만주군 통역 ]으로 생활했다

만주국과 조선총독부는 다른 성격이다

만주국은 자치를 보장된 위성국가이며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직할지역이다

만주국 협화회에 가담한 조선족 자치조직이 만주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만주국 협화회 조선족 자치협화회가 조선족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종일전쟁 때 중화민국 지원국과 일본제국 괴뢰국

중화민국 지원국:

미국 (1941-)

소련 (1937-1941, 1944-)

영국 (1942-)

나치 독일 (1933-41)

공동 교전국

몽골 몽골 인민공화국 (1945)

비시 프랑스 비시 프랑스 (1940)

 

일본제국 괴뢰국가:

만주국 (1932-)

몽강연합자치정부 (1936-)

왕징웨이 정권 (1940-)

둥방공자치정부 (-1938)

중화민국 임시정부 (-1940)

중화민국 유신정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파쇼 인민전선론'이 채택되면서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여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기조가 일어나자, 당시 만주에 존재하던 공산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에 의해 '인민전선론'이 대두됐다

조국광복회 간부들은 대부분이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간부들로 채워졌으며, 군사활동뿐 아니라 국내 정치활동에도 주력, 기관지 <3·1월간>을 발간하는 등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반일 성향을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자·천도교·지주까지 참가시켰다[조국 광복회와 보천보 전투]

북한 공산주의자 김일성, 김책, 강건 등 은 만주지역에서 만주국 조선 공산당  항일 운동이 소련정부의 대일정책에 따라 움직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이 중일전쟁때 중화민국 지원국일때 1937년부터 1941년까지는 활동이 대단했고 소련이 공식적으로 만주국을 승인할 시기에는 1941년 부터는 만주국 내부에서 공산당 활동이 침체되었고 협력자들이 등장했다 1944년 경부터  소련이 연합군으로 가담하여 반일투쟁을 주도할때는 만주국 내부 공산당 세력들이 반만주국 반일 투쟁 활동과 만주국 점령 군사훈련을 주도했다

만주 전략공세작전은 제1전선 구축 소련군 주도, 제2전선 구축 소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 극동지역 공산주의자 주축으로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만주국 오족협화] 소련 제1극동전선군  88독립 저격여단 연합으로 추진 되었다

 

1937 7 7일 중일전쟁과 소련의 만주국 승인 그리고 만주국 협화회 조선족 자치협화회 등을 정리될 때 정확하게 만주지역 조선족 좌파(소련 원조 공산당)나 우파(중국 장개석정부) 항일운동을 재정리할 수 있다

 

한민족(조선족)의 3개 정부

남한(대한민국)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길림 연변조선족 자치정부 등 한민족(조선족)의 3개 정부입니다. 중국에 한국어(조선어)를 사용하는 조선족이 약192만명에서 약 200만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한족, 만주족(동북3성), 몽골족(내몽골), 위구르족(후이족=회족, 신장), 티베트족(티벳) 등 5개 큰 민족과 50개 소수민족으로 건국한 연합국가입니다 

만국(만주국)은 한족,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일족(일본족, 야마토민족) 등 5개 종족 연합국이었습니다

만주국의 국기에는 노란색(만주족) 바탕 왼쪽 상단에 네 가지 색[빨간색(일본 민족), 파란색(한족), 하얀색(몽골족), 검정색(조선인)]의 가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오족협화의 이념을 뜻합니다

조선족이 만주국에서도 조선족 자치정부로 참여하여 상류층으로 생활했습니다

 

 

                                                                                   동북3성 다수민족 한족,만주족과 소수민족 조선족, 거란족, 몽골족 자치정부

 

 

 

*파르티잔(Partizan, 빨치산)

1943, 소비에트 유격대.

 

파르티잔(러시아어: партизан, 영어: partisan)은 무장한 전사로서 정규부대의 정식부대원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파르티잔을 음차한 빨치산이라는 단어로도 부른다. 제복이나 계급장 등도 없기 때문에 인식 내지 판별이 어렵다. 파르티잔 전투는 거의 예외 없이 침략군 내지 정복군, 점령군, 식민주의자 등에 대한 방어 전쟁을 수행한다. 또한 내전이나 기타 국가 내부의 분쟁에서도 볼 수 있다. 파르티잔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국민의 해방 요구에 응하여 전투 등을 수행한다. [소련군 2극동전선군 제88독립저격여단이 각 민족 지역 빨치산부대이다] 

단체

-소련 유격대

-조선인민유격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빨치산파

 

유사 단어

-시민군

-의병

-레지스탕스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점령한 것은 1941 4월이었지만, 그 해 6월 독일의 소련 침공이 시작된 뒤에야 유고슬라비아의 공산당원들이 파르티잔 분대를 조직화하여 추축국의 점령에 대한 민중 봉기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1941 9월까지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걸친 넓은 지역이 파르티잔과 체트니크에 의해 해방되었지만 이 두 운동단체가 주로 체트니크의 도발로 이내 내전에 휘말렸으며, 1941 11월 독일군이 두 저항군 세력을 세르비아에서 모두 축출했다. 그 후 2년 동안 파르티잔은 독일군을 상대로 군사적으로 힘든 싸움을 벌였는데 체트니크가 기반을 잃은 반면 파르티잔은 수적으로 세력이 불어났다.

 

이것은 침략 추축군에 대한 통일된 저항정책으로 모든 인종의 유고슬라비아인을 흡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체트니크들은 세르비아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기본적으로 독일군과 싸우기를 원하지 않았다.

 

1943년말까지 연합군이 보기에 파르티잔은 독일군에게 맹렬히 저항하는 반면 체트니크는 상당수가 사실상 독일군과 협력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연합군측의 정부들은 체트니크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고 티토를 유고슬라비아 저항군의 지도자로 인정했다. 그때부터 영국과 미국의 무기와 장비가 파르티잔에게 계속 증량·공급되어 파르티잔들의 병력이 증강되었다.

 

1943년말까지 파르티잔이 약 30만 병력으로 늘어나 독일군 20개 사단을 물리칠 수 있었다. 파르티잔은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7차례 유도하여 다수의 적군이 다른 연합군 전선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1944년 여름에는 파르티잔이 유고슬라비아의 산악지방을 대부분 장악했으며, 10월에는 소련 적군(赤軍)의 베오그라드 해방전에 파르티잔 부대가 참가했다. 대전중에 파르티잔은 2차례의 정치회담(1942 11월의 비하치 회담과 1943 11월의 자즈체 회담)을 개최하여 그들이 해방시킨 지역들 내에 지방과 연방의 임시정부들을 수립했다. 파르티잔이 장악한 이 지방정부망은 공산당이 전후에 정치적 성공을 거두는 데 기여했다. 1945년까지 티토의 공산당은 정치적·군사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대전중 파르티잔 사이에 형성된 티토에 대한 충성심과 국민적인 감정이 1948년 티토가 스탈린의 정치적 공격에 저항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이 파르티잔의 발음이 전와되어 빨치산이 되었다. 빨치산

 

 

 

 

88독립 저격여단 

88독립 저격여단 (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 소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 극동지역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 1개이다

88독립 저격여단은 극동전선 정보과 직속 만주, 한반도에서 정찰 , 파괴 공작임무을 수행했다[소련군 특수부대 빨치산]

88독립 저격여단 원래 동북 항일연군(聯軍) 장병 핵심이 주로 중국인과 조선인에서 편성 되었다. 후일 북한 국가 주석 김일성  여단  1 대대장 맡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 공식 견해에서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 조직하여 동북 항일연군 본체 공투하면서도 다른  행동이었다고 하고 다음 88독립 저격여단  사실 무시되고 있다(부정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자주노선과 주체정부 노선으로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군 참여를 부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부대 동북 항일 연군 교도여단이라고 칭하고 있다.

 제88독립 저격여단 핵심 동북 항일연군(聯軍) 1939년경부터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만국)군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수 많은 전사자가 등장했고 내부적으로는 일본 당국 귀순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남은 자들 물자 부족으로 인해 활동 계속이 곤란해 졌다. 따라서 그들은 소련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12월 말 동북 항일연군(聯軍)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 영내에 들어갔다. 소련 영내에서는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의 활동 지원을 위해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과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두 곳에 분산 수용했다

남야영과 북야영은 각각 B 캠프와 A 캠프로도 불리는데, 보로쉴로프(Вороши́лов)와 아무르(Амур)강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

당초 100여명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후 200 ~ 300명으로 증가했다
독소전 발발 후 1941년 7월 중순, 소련 정부는 일본의 북진에 대비하여 이 야영지에 따라 제88 독립 저격 여단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여단은 하바로프스크시의 부쯔코에나 나아무레 (Вятское-на-Амуре)에 배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21일 극동 전선사령관 이오 시프 아빠나센코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0132호에 따라 여단의 편성 기간은 같은 해 7월 28일부터 9월 15일까지로 정해졌다.

부대 편성 동북 항일연 중국인 병력과 조선인 병력 외부 중국계 · 조선계,  소련인, 기타 소수 민족 (몽골족, 민주족등 )에서 열렸다. 여단 대원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조선인은 10% 불과했다. 그 후, 후속하여 소련 영내 들어간 부대도 합류해, 88독립저격여단 병력 수는 1,500 명을 넘어 섰다.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에서 온 많은 사람들 소련 군사 학교 촉성 지휘 과정 또는 관구 소위 과정 받은 적군 계급 수여했다 (여단장 주보중 중령, 김일성은 대위). 일반적으로 여단 지휘 관직에는 중국인이었고, 지휘 관직 붉은 군대(소련군) 장교 임명 되었다. 병사 적군 군복 착용했다.

 

1944  4  현재 편제.
여단 본부 - 여단장 : 주보 중령, 참모장 : V. 사마루첸코 소령
정치 과학 - 정치 위원 : V. 세레긴 소령
방첩 - 스 메르시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2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효명 대위
 3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명귀 대위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자동소총 대대
무선대대
독립 박격포 중대
독립 공병 중대
독립 대전차 소총 (PTR) 중대
독립 경제 중대
독립 기관총 소대
군사 통역 과정 특수 분대
 독립 저격 대대는 3 개 중대로 구성되어  중대는 3 개 소대에서 되었다.

 

장비 (1942  9  ~ 1943  7  현재) 소총 x4,312 테이, 자동 소총 x370 , 중기관총 x48 자루, 경기관총 x63 정,  화포 x21 문, 대전차 소총 x16 테이, 자동차 x23 .
 88 여단 병사 만주, 한반도 지역에서 정찰과  파괴 공작활동에 종사했다.  자세한 것은 불명이지만, 여단장 주보 1940  ~ 1943  사이  89 명의 감원 (손해)이 있었음 보고하고 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 2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9명
제 1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26명
미 귀환 - 24명
스 메르시에 인도 - 6명
환자를 위한 후송 - 15 명
사망 - 2명
여단 복귀 - 7명
1945년 7월 소련 대일 참전에 대비하여 여단에서 무전기를 장착 한 100명을 투입하는 전투 행동 계획이 수립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급속한 진격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 88 독립저격여단  1 독립 저격 대대  대대장 김일성이 한반도의 해방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가 되었고 소련군과 함께 방문했다.
1945년 8월 29일 제 2 극동 전선 사령관 막심 뿌루카에후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10 호 / n에 따라 "일본 침략자와 싸우는 전선에서 전투 지휘 임무의 모범적인 수행과 이 때 발휘 된 용기"에 김일성에게는 적기 훈장이 수여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88 독립저격 여단 장병 21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9 월 10 일에 더욱 58 명 추가).

  88여단(외국인군단, 대일연합군) 1945 10 12일자 극동군관구 사령관  042호에 의해 해산 되었다.

 

이 사진은 김일성이 토벌군에 쫓기다가 소련으로 도주했을 당시 오케얀스카야에서 좌로부터 김철호(최현의 부인), 리영숙(안영의 부인), 김정숙(김일성의 부인), 황순희(류경수의 부인 조선혁명박물관장)의 모습이다.

 

                                                           1941년 동북항일연군 전투지휘자들이  소련 남부 야영 훈련장에서 촬영한 사진

[在南野營整訓的部分東北抗日聯軍指戰員攝於1941

前右金日成

一排右李英淑第七軍戰士)、右三金貞淑第二軍戰士)、右四黃順姬第二軍戰士)、右五金哲鎬第二軍戰士)。

二排右沈鳳山第一路軍警衛旅一團團部警衛員

三排右一沈鳳山第一路軍警衛旅一團團部警衛員三排右一柴世榮右二季青。]

 

                                    제88 독립저격여단 시절 사진. 좌로부터 김일성(金日成), 계청(季青, 중국인), 최현(崔贤), 안길(安吉)

88독립 저격여단 소부대 활동시기 촬영한 사진[在小部隊活動時期的合影]

金日成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營長

季青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四營政治副營長

崔賢曾任東北抗日聯軍第二軍第一師後改為第四師第一團團長第一路軍第三方面軍第十三團團長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第一連連長

安吉曾任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第三方面軍第十四團政委第三方面軍參謀長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政治副營長

 

                                          동북항일연군 지도여단의 일부[東北抗日聯軍教導旅部分乾部]

일렬(一列)심태산(沈泰山)최명석(崔明錫)김경석(金京石)서철(徐哲)장광적(張光迪)

두렬(二列)바슈코비츠(瓦什科維茨,와십과유자)최춘국(崔春國)강신태(姜信泰)양청민(楊清海)도우봉(陶雨峰)주암봉(周岩峰)

삼렬(三列)장석창(張錫昌)유철석(劉鐵石)범덕림(范德林)고만유(高萬有)교수귀(喬樹貴)유안래(劉雁來)진덕산(陳德山) [19457月的合影(1945 7월 촬영)]

 

1947 5, 왕효명. 팽시로, 왕일지 등 동북항일연군 관계자는 조선인 출신 동북항일연군 인사를 조선인민군 총사령부에서 만났습니다

[19475王效明彭施魯王一知分另受有關部門委派先後赴朝鮮平壤圖為他們與原東北抗日聯軍的朝鮮戰友在朝鮮人民軍總司令部合影留念]

앞열(前排)김일(金一)주위(周偉)왕일지(王一知)왕효명(王效明)안길(安吉)팽시로(彭施魯)

가운데열(中排)이영호(李永鎬)최광(崔光)김광협(金光俠)심태산(沈泰山)최춘국(崔春國)유창권(柳昌權)이을설(李乙雪)

뒷열(後排)박우섭(樸禹燮)김려중(金麗重)최용진(崔勇進)강상호(姜尚鎬)유경주(柳京珠)오진우(吳振宇)김창봉(金昌鳳)오백룡(吳伯龍)전문섭(全文燮).

 

 

 

 

 

소련군을 환영하는 김두봉 북한 초대 국가수반과 북한지역 지도부들  

 

 

 

 

만주 전략공세작전

만주 전략공세작전(러시아어: Манчжурская стратегиче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만츠주르스카야 스트라테기체스카야 나스투파텔나야 오페라치야[*]) 또는 줄여서 만주 전역(러시아어: битва за Маньчжурию), 다른 명칭으로 소련의 만주 침공은 1945 8 9일 소비에트 연방이 일본 제국의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침공해 벌어진 전투이다. 일본 제국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종전되었다. 이 전투는 일본 제국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앞당기는데 기여했다.

 

이 전투는 일본 제국의 또 다른 괴뢰 정권인 몽강국(내몽골 지역), 일본의 점령지였던 한반도, 사할린, 쿠릴 열도에 대한 공격도 포함된다. 이 전투는 1939년 할힌골 전투 이후 맺은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이루어졌다. 얄타 회담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유럽 전쟁이 끝난 3개월 후,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기로 이미 다른 연합국과 약속한 바 있었다. 공격은 정확히 나치 독일이 항복한 5 8(모스크바 표준시로 5 9 0 43)에서 3개월이 지난 8 9일에 이루어졌다. 8 6일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졌고, 8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공격은 이 두 원자 폭탄 투하 못지않게 일본에게 충격을 주었다.

 

전쟁이 계속 되었더라면 소비에트 연방은 다른 연합군이 규슈에 도달하기 전에 사할린을 거쳐 홋카이도까지 점령할 생각이었다. 독소 전쟁으로 경험을 쌓았고 질적으로 크게 발전한 소련군과 비교하여, 일본군은 전력의 태반이 남방으로 가 있는 데다가 새로 모집한 병력은 훈련 부족과 10만 명 이상이 소총조차 지급받지 못하는 물자 부족 상태에 있었다. 이 때문에 만주 곳곳에서 일본 관동군은 격파되었고 일본은 8 15일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지만, 소련군의 공격은 8월 말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8월의 폭풍 작전(Operation August Storm)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1983년 미국의 군사역사학자 데이비드 글랜츠의 논문에서 처음 등장한 표현으로 2차대전 당시 소련군은 이러한 이름을 전혀 쓰지 않았다.

1.배경

할힌골 전투에서의 참패를 계기로 일본은 소련군의 강력함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소련과의 충돌을 가급적 삼가고자 하는 것이 군부의 일반적 의견이었다. 반면, 소련에게 있어서 일본은 잠재적인 적국임이 분명했지만, 머나먼 아시아보다 당장 눈앞의 나치 독일이 더 큰 위협적 존재임이 분명하였기에, 소련 역시 일본과 굳이 충돌하려 하지 않았다.

 

이처럼 양국의 이해가 일치하여, 1941 4월에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독소전쟁 발발 이후에 더 심화되었다. 당장 모스크바가 함락될 위기에 처한 소련에게 일본은 관심쓸 겨를이 없었다. 일본 역시 그 시기에 대미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독일의 희망사항이던 소련 뒤통수치기 식의 선전포고는 할 여력이 없었다. 덕분에 소련은 극동과 시베리아의 병력을 모두 유럽으로 돌려서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양국의 이해관계는 1945 5월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최대 주적인 독일을 제거한 소련은 일본을 공격할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동시에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결사 항전에 생각보다 큰 희생을 치른 미국은 거듭해서 소련에 대일전 참전을 요구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 침공 작전인 올림픽 작전이 벌어지면 서방 연합국은 백만 명 정도의 엄청난 인적 손실이 예정된 마당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이 손실을 없애는 데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일본의 위협을 제거하고 극동에서 전략적 위치를 점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미국의 요구와 소련의 필요가 맞물리자 스탈린과 소련군 지도부는 유럽에서 승리한 뒤 3개월 이내에 만주의 일본군을 공격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자 소련은 만주 공격을 결정하고 그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 스타브카는 8월 중순 만주지역에 전면적인 공세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미국이 8 6일 히로시마에 핵공격을 단행하자, 일본이 조기에 항복해 향후 전리품 분배에 참여할 수 없게 될 거라는 불안감은 소련의 공세 계획을 앞당기게 했다.

 

8 8일 오후 5(모스크바 현지시각, 서울·도쿄 시각으로는 오후 11)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사토 나오타케 주소 일본 대사를 불러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의 파기와 선전포고를 통보했다. 8 9일 오전 0시에 만주 전역에서 소련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1) 관동군의 상황과 소련군의 딜레마

만주를 관할하는 일본 중 25개 사단이 1945년 창설된 신규사단이고, 그 병력 자원의 질적 수준도 최하였다. 게다가 관동군의 사단 편제는 당시 세계적으로 표준이 된 3개 연대+1개 포병연대의 삼각편제가 아닌 제1차 세계 대전식의 4개 연대 편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관동군이 아무리 장비나 병력이 빈약하더라도 만주국군까지 합하면 90만 명에 가까운 병력 수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독소전쟁에서 군인 1천만 명을 포함해 약 3천만 명 이상에 이르는 인적 손실을 입은 소련으로서는 관동군과의 싸움에서 다시 큰 인적 손실을 낸다면 더욱 힘든 세월을 보내야 할 판국이었다.

 

또한 만주의 지형 또한 소련군의 공격을 어렵게 하는 한 요소가 되었다. 만주의 주위 삼면은 산과 삼림으로 에워싸여 있어 통행이 어려운데, 특히 서쪽의 대싱안링 산맥은 해발 1,900m에 이르고 산 너머 내몽골 지역은 광활한 반사막 지대이다. 몇 안 되는 고개도 늪지인 데다가 장마철이 되면 더 심해져서 습도, , 진흙으로 작전을 펼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통행의 어려움에 더해서 만주의 엄청난 크기는 잠재적인 공격 측의 기를 꺾어 놓았다. 만주 북쪽 끝에서 황해까지의 거리는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코 앞까지의 거리였다. 관동군 사령부는 이 험한 지형을 이용, 인적 물적 열세를 지형적 이점으로 상쇄해 소련군을 격퇴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소련군이 대싱안링 산맥을 넘기 힘들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병력의 대부분을 동쪽, 북쪽, 북서쪽의 철도를 따라 집중시켰다. 이 지역의 국경은 수많은 국경 요새들로 보호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제1방면군은 종심 방어를 위해 휘하 부대들을 후방으로 물렸다. 3방면군은 만주의 서부를 담당했는데, 휘하 병력은 만주 평원 안쪽에 넓게 퍼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붉은 군대가 마냥 물량만으로 관동군을 이기기에는 감수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2) 소련군의 공격 준비

대일전 시작 전 극동 지역에는 종래에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둔 극동전선군(Far Esatern Front)과 보로실로프(현 우수리스크)의 연해주군단(Primorsky Group of Forces)이 있었다.

 

스탈린은 만주에서 한참 떨어진 모스크바에서 작전을 지휘할 수 없자 극동의 전선군들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자체 사령부인 극동군 총사령부(Far East Command)를 하바로프스크에 설치하고, 그 아래에 만주동부 전선을 담당하는 연해주군단을 개편한 제1극동전선군, 만주북부 전선을 담당할 종래의 극동전선군을 개편한 제2극동전선군과 만주서부 전선을 담당할 트랜스바이칼 전선군을 설치한다. 극동군 총사령관에 전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를 임명하고 공격 준비에 착수하게 했다. 할힌골 전투에서 관동군과의 전투 전력이 있는 총사령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적임자라는 말이 많았으나 스탈린은 바실렙스키를 택했는데 이는 스탈린이 독소전쟁에서 높아질 대로 높아진 주코프의 위신을 제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렙스키는 위의 딜레마들을 고려하며 단독으로 8월의 폭풍 작전을 입안하고 작전에 따른 전선군의 진군 방향과 사령관들 교체를 시작했다.

 

극동의 각 전선군 사령관들이 스타브카에 의해 교체되었는데 제1극동전선군에는 북부에서 핀란드군과 독일 북부 집단군을 상대로 많은 경험이 있었으며 경보병 군단의 창설자인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가 임명되었고 트랜스바이칼전선군에는 쿠르스크 전투 직후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에서 명성을 쌓고 중앙유럽 중부를 석권하며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점령한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가 임명되었다. 2극동전선군에는 종래 극동전선군의 사령관인 막심 푸르카예프 대장이 임명되었다. 극동함대 사령관에는 해군대장 이반 유마셰프 제독이 임명되어 쿠릴 열도와 사할린 상륙 작전을 책임질 예정이었다.

 

한편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수송 능력이 제한된 데다가 극동에 전방 배치된 소련군이 별반 활동을 보이지 않자, 일본은 1945 8월에도 공격은 없을 것이라고 보았고, 심지어 1945년 봄까지도 소련의 공세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연히 이와 달리 소련군 지도부는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된 최정예 부대 약 90여 개 사단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은밀하게 극동 지역으로 전개시켰다. 부대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부담을 덜 주기 위해 자신들의 차량으로 이동했다. 4년 동안이나 나치 독일을 상대로 생사를 건 전쟁을 하고 겨우 살아남은 소련으로서는 이 작전은 엄청난 역작이었다. 이 작전에 참여한 많은 부대가 대개 중년과 소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2. 전개

소련군은 보로쉴로프(현재의 우수리스크)의 제1극동전선군, 하바로프스크의 제2극동전선군, 그리고 시베리아와 몽골에 전개한 트란스바이칼전선군을 통해 만주를 좌우로 협격하는 것을 시도했다.

 

트랜스바이칼전선군은 제6근위전차군을 주력으로 하여 고속 진격과 이를 통한 만주와 중국 본토의 단절, 일본군의 분산 및 포위를 시도했다. 이들의 좌측을 엄호하는 제36군은 하이라얼을 공략하는 한편, 다른 부대로 남하하여 일본군을 대싱안링 산맥으로 거세게 밀어붙였다.

 

1극동 전선군은 동쪽에서 만주의 중심으로 진격하며, 8 13일에는 무단장까지 진출,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여 8 15일에 도시를 함락시켰다. 1극동전선군 예하 제25군은 주력부대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로 진격하여 함경북도 일대의 일본군을 격파했다.

 

조공 성격인 제2극동전선군은 15군과 2군을 투입해 각각 하얼빈과 치치하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러한 소련군의 공세에 맞서, 일본 관동군은 나름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장비, 물자, 병력, 화력 등 모든 면에서 소련군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독일을 상대로 단련된 소련군의 고속 진격은 독일이 1940년에 보여준 전격전의 재현이라고 할 정도였다. 소련군의 전차 및 기계화부대의 쾌속 진격 앞에 관동군은 산산조각이 났고, 주요 도시나 요새는 보병들의 맹공격으로 하나하나 함락당했다.

 

8 15일 일본의 항복 당시, 소련군은 이미 만주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관동군에 대한 전과확대 단계에 진입한 상태였으며, 한반도에서도 8 9일에 총공격을 개시하여 8 11일 웅기(선봉)를 시작으로, 8 12일에는 나진을 점령하고 8 13일에는 청진으로 진격했는데 이곳은 일본의 항복 후에도 전투가 계속되어 8 16일이 돼서야 점령했고 소련의 고려인 정상진도 소련 부대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웠다.[4] 소련군은 일본의 항복선언을 무시하고 계속 진격해서 한반도의 함흥을 거쳐 중부의 개성시(8 23일 진주, 9 2일에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 38선 분할 점령에 합의하면서 철수)와 랴오닝 반도의 끝인 뤼순까지 진출했다. 트랜스바이칼 전선군은 베이징을 공격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3. 결과

8월 폭풍 작전은 미국을 상대로 한 본토 결전에만 대비하고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던 일본제국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원자폭탄 투하만으로도 국가 멸망 및 민족 멸절의 위기를 맞이하는 상태에서 소련의 참전은 일본군 수뇌부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8 19일 관동군 사령관 야마타 오토조 대장이 항복조칙에 따라 무조건 항복하였고, 8 30일까지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있던 일본 관동군에 대한 전면 무장 해제가 이루어졌다. 불과 1주일(1945 8 9~15)의 짧은 기간동안 2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전사했으며, 60만 명이 넘게 포로로 잡혔다. 반면, 소련군의 전사자는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소련은 이 작전을 통해 일본 제국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과 몽강국을 붕괴시키고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서방 연합국과의 사전 약속에 따라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자국 영토로 흡수하였다. ,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 북부에 군대를 진주시켜 미국과 함께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하였다.

쿠릴 열도 상륙 작전(러시아어: Курильская десантная операция, 영어: Invasion of the Kuril Islands, Kuril Islands Landing Operation)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 8월 소련군이 일본 제국이 지배하던 쿠릴 열도에 상륙한 작전이다. 이 작전이 성공하여 쿠릴 열도는 소련의 영토가 되었다

 

                                                                             Soviet marines or infantry are loading on a ship[쿠릴 열도 상륙 작전]

 

 

2극동전선군

 

                                                                              아무르강을 건너는 제2극동전선군 예하 제2적기군

 

2극동전선군 (2-й Дальневосточный фронт)은 서구의 군집단과 같은 규모인 소련 육군의 전선군 중 하나였다. 이 군단은 만주 전략공세작전 직전에 창설되어 1945 8 5일 임무를 시작했으며 같은 해 10 1일 해산되었다.

1.역사

창설된 직후 제2극동전선군은 일본 제국의 제1방면군과 제5방면군, 4군을 상대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2극동전선군이 상대해야 할 일본군은 만주, 사할린섬, 그리고 쿠릴 열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전선군이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을 건너 일본군의 저항을 무력화하는데 성공했다. 8 20일 전선군의 제15군이 하얼빈을 점령했으며, 이후 제2적기군이 칼로찬과 륜츠전 지역에 입성했다. 15군은 이 사이에 산신 군을 점령했고, 5소총군단은 볼리 지역에 입성했다. 대부분의 일본군은 8 20일 이후 소련군에 항복하기 시작했다.

한편 8 11, 16군은 남부 사할린에 공세를 가해 8 18일까지 섬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8 19일부터 25일까지 제16군은 홀름스크 항구에서 상륙작전을 개시하였고 코르사코프에서 공정작전과 상륙작전을 동시에 수행했다. 8 25일 소련군은 사할린의 행정중심지인 유즈노사할린스크를 점령했다. 9월 초 일본군의 저항은 끝났지만 소련군의 침공이 지연되어 일본 본토에 위치한 홋카이도 침공 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다. 한편 제101소총사단은 쿠릴 열도를 점령했다.

1945 10 1, 스타프카 VGK의 지시로 전선군은 해산되어 극동군관구로 재조직되었다.

 

2.1945 8월 구성부대

T2극동전선군은 1945 8 9일에 아래와 같은 예하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2적기군

-제5소총군단

-제15

-제16

-제10항공군

-캄차카 방어군단 제101소총사단

-아무르 군사전단

-북태평양 전단

 

3.참전

만주 전략공세작전의 주요 공격군[역할]

-만주 전략공세작전 남사할린 침공

-쿠릴 열도 상륙작전

-슘슈 섬 전투

 

 

막심 푸르카예프

 

                                                                                                                           1940년대의 막심 푸르카예프 대장

막심 알렉세비치 푸르카예프(Максим Алексеевич Пуркаев, Maxim Alekseevich Purkayev, 1894.08.14~1953.01.01)는 소련의 군인이다. 1940년대 전반 소련 하바로프스크의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 사령관으로 김일성이 소속되었던 제88국제여단을 관할하였고, 1945 8월의 소련의 만주 침공 작전 당시 만주 북부 전선을 담당한 제2 극동전선군을 지휘하였다.

 

 

 

푸르카예프는 1915년 러시아 제국 군대에 징집되었고, 1918년 적군에 가담하였다. 1936년부터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Frunze Military Academy)에서 공부하였다. 1943 4 25일부터 1945 8 4일까지 하바로프스크의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 사령관을 지냈다. 소련이 만주 침공을 단행할 때인 1945 8 5일부터 10 1일까지는 만주 북부 전선을 담당한 제2 극동전선군(2nd Far Eastern Front) 사령관으로 소련의 만주 침공 작전을 지휘하였다.[1][2] 전후에는 1947 1월까지 제2 극동전선군이 개편된 극동군관구(Far Eastern Military District)의 사령관을 지냈다.

 

그는 김일성이 소속되었던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제88국제여단을 관할하였고, 1945 8월말 또는 9월초 극동군 총사령부에서 북한 지도자 후보로 김일성을 면접 심사할 때 이오시프 쉬킨 상장과 함께 면접위원이었다. 이후 평양의 소련군정은 제25군이 소속된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 휘하의 제1 극동전선군(1st Far Eastern Front)이 개편된 보로실로프(지금의 우수리스크)의 연해주군관구(Primorsky Military District) 사령부가 관할하였다.

 

키릴 아파나시예비치 메레츠코프

 

키릴 아파나시예비치 메레츠코프(Кирилл Афанасьевич Мерецков, 1897 6 7 ~ 1968 12 30)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야전군 지휘관이었으며,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후에는 극동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을 격파하고 한반도 북부에도 진주했다.

1.성장과정

메레츠코프는 모스크바 남동쪽 라잔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6 6월에 러시아 제국군에 자원입대하여 정비병으로 복무했으나, 1917 8월에 볼셰비키 당원이 되었다. 이듬해인 1918년에 붉은 군대에 입대했고, 붉은 군대의 전신인 적위대에서 참모장이 되었다. 내전 중에 군사학교에 입학했으나 여러 차례 전투에 투입되어 졸업하는데 시간이 걸려 1921년에 졸업했다.

1924년부터 1931년까지 모스크바 군관구에서 근무했으며, 1936년 에스파냐 내전이 발발하자 1년여간 군사고문관으로 공화파를 지원했다. 1937년에 귀국한 메레츠코프는 1939년에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소련군은 대숙청의 홍역을 치렀지만, 메레츠코프는 별 탈 없이 넘겼다.

 

2.겨울전쟁

소련은 그 해 12월에 보로실로프를 사령관으로 하여 핀란드와 전쟁을 시작했다. 핀란드의 접경지대인 레닌그라드 군관구를 맡고 있던 메레츠코프도 이 전쟁에 참전한다. 그러나 전쟁은 12월 중순에 이르러 모티 전술과 같은 효율적인 전투 방식을 개발한 핀란드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었다. 손실에 대한 비난에서 야전군 지휘관인 메레츠코프도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 책임은 메레츠코프의 탓으로만 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이 무렵 소련군은 전략적 지침도 존재했고, 당시 서방과 다른 군사전략을 수립하고 있었지만, 대숙청의 여파로 경험 부족의 장군 및 장교들이 지휘하는 사단급 및 그 이하 제대의 전술 수행 능력과 전투 능력 자체에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스탈린은 메레츠코프를 다시 7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다시 한 번 전쟁을 지휘하도록 했다. 세묜 티모셴코가 보로실로프를 대신하여 레닌그라드군관구 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1940 2, 소련군은 재차 공세를 가했고, 이번에는 크게 승리했다. 메레츠코프도 소련 국가영웅 칭호를 수여받았고 더 나아가 총참모장이 되었고, 방위위원회 멤버가 되었다.

 

3.독소전쟁

1941 6 22,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메레츠코프는 소련군 최고사령부인 스타브카(STAVKA)의 구성원이 되었고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노력을 계속 경주했다. 그러나 1941 9 NKVD 수장인 라브렌티 베리야가 그를 반역자로 체포했다. 체포된 메레츠코프는 10월까지 구금되었고,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유능한 장군이 부족했던 스탈린은 그를 석방시켰고, 12월에 북쪽의 볼크호프(Volkhov)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944 2월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볼크호브 전선군 사령관으로서 메레츠코프는 북쪽 방면의 독일군 북부집단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레닌그라드가 완전히 포위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레닌그라드는 라도가 호수를 통해 소량의 보급품을 어느 정도 공급받을 수 있었다). 메레츠코프와 볼크호프 전선군은 레오니트 고보로프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협동으로 독일군의 포위망을 깨고자 노력했고, 마침내 1943 2, 두 전선군은 시니아비노(Siniavino)에서 서로 연결되었다. 이후 두 전선군은 독일군을 서쪽으로 몰아내고 레닌그라드 포위망을 깨기 위한 일련의 공세를 개시했다. 이 시도들은 1944 2월에 마무리되었다.

1944 2, 메레츠코프는 볼크호브 전선군을 떠나 더 북쪽의 카렐리안 전선군으로 부임했다. 여기서는 그는 핀란드를 공격하려는 고보로프의 레닌그라드 전선군을 지원했다. 10, 메레츠코프는 핀란드 북부를 통해 노르웨이로 철수하는 독일군을 추격했다. 10, 메레츠코프는 핀란드 북부의 페차모를 쓸어버리라는 명령을 받아 그가 가진 극지전에 관한 지식을 활용하여 페차모-키르케네스 작전(Petsamo-Kirkenes Operation)을 실시했다. 이 작전으로 독일군은 완전히 밀려났으며, 이 공로로 메레츠코프는 원수로 승진했다.

 

                                                                     1944년 핀란드 전선. 붉은 색 화살표는 소련군의 진격이고, 검은색은 독일군의 후퇴다

 

왼쪽 지도에서 붉은 화살표는 소련군의 공격 방향이며, 검정색은 독일군의 후퇴 방향이다. 스웨덴이 나름대로 야무진 군대를 가진 중립국인데다가 독일의 주요한 철광석 공급원인 관계로 독일군은 스웨덴을 거칠수 없었고 핀란드를 관통하여 노르웨이로 철수해야 했다. 붉은 화살표중 위쪽의 것이 메레츠코프이다.

소련은 노르웨이까지 독일군을 추격할 심산이었으나, 전후 처리 문제에서 소련이 노르웨이를 장악하는 것을 영국이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스탈린은 노르웨이-핀란드 국경에서 진격을 중지시켰다. 이후 종전 때까지 이 전선은 큰 전투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메레츠코프에게는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4.만주 전략공세작전

메레츠코프의 다음 부임지는 만주였다.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메레츠코프는 1 극동전선군을 이끌고 만주 전략공세작전이라는 작전명으로 만주를 공격했다. 메레츠코프의 부대는 손쉽게 관동군을 격파했다. 이미 1938년 노몬한 사건에서 게오르기 주코프가 일본 관동군을 무참하게 격파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이 무렵의 소련군은 독일과 4년간 격전을 치르면서 단련된데다가 걸작 T-34/85로 대표되는 기갑 전력 또한 일본을 충분히 압도했다. 메레츠코프는 만주를 거쳐 한반도 북부에도 진주했다. 평양에 입성한 25군 및 치스차코프 25군 사령관도 메레츠코프의 휘하였다. 이후 메레츠코프는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극동군관구 사령관으로서 군정사령관 치스차코프를 지휘했다.

 

5.전후

전쟁 후 메레츠코프는 극동군관구 사령관직을 수행한 후 여러 군관계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968 12 30일에 사망했다. 그의 시체는 화장되어 현재 크렘린 궁에 묻혀 있다.

 

메레츠코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장 유능한 장군들 중 한 명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하며, 소련 국가 영웅 호칭을 비롯하여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인물 중 한 명이다. 러시아군 전차학교는 현재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고, 모스크바, 노보고로드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존재한다.

  

 

소련 군정 북한 최고지도자 시티코프 중장(中將)과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 레베데프 소장(小將)

             1947년 7월 서울의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담소하는 미소 양군 대표: 좌로부터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 중장, 소련측 대표 레베데프 소장과 스티코프 중장 [사진]

.소련 군정 북한 최고지도자 스티코프 중장(中將)

테렌티 포미치 시티코프(러시아어: Терентий Фомич Штыков, 벨라루스어: Цярэнцій Фаміч Штыкаў 차렌치 파미치 슈티카우, 1907 2 28 ~ 1964 10 25)는 소련의 군인이었다. 그는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있으면서 해방 후 북한의 소련 군정을 총지휘했다. 그의 유고 "시티코프 일기"는 해방 직후 남북한 역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1.생애

(1)생애 초기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고교 졸업후 레닌그라드의 기관차 수리공장에 취직하여 노동자로 근무하였다.

 

(2)공산당 입당

22세 때인 1929년 소련공산당 레닌그라드시당에 입당했다. 그는 곧 소련공산당 레닌그라드시 지구당 제1서기이자 소련공산당 중앙당 정치국원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측근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눈에 들어 가까운 사이가 되고, 고속승진하여 평당원에서 얼마 뒤 레닌그라드시당 제2서기로 올라갔다. 시티코프가 즈다노프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다는 루머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1941년 겨울부터 약 900일 동안 진행되었던 레닌그라드(페체르부르크) 포위전 때 '식인단속 기동타격대' 대장을 역임한 바 있다. 당시 굶주린 시민들이 인육을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시티코프는 식량배급, 방첩 부대, 즉결처형부대 운영, 외부 연결통로 운영 등 생사여탈권을 휘둘렀다

 

(3)소련군정 지도자

소련은 1945 3월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둔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에서 분리하여 보로실로프(오늘날 우수리스크)에 연해주 군단(Maritime Group of Forces)을 설치하였다. 1945 8월 초 대일본전을 위해 보로실로프의 연해주 군단은 제1극동전선군으로, 하바로프스크의 종래의 극동전선군은 제2극동전선군으로 개편하고, 만주서부를 침공할 트랜스 바이칼 전선군 등을 설치하며,  3개 전선군을 총지휘할 극동군 총사령부(Far East Command)를 하바로프스크에 두었다. 일본전이 끝난 후인 9 30일에 제1극동전선군은 연해주군관구(Primorsky Military District)로 개편된다. 시티코프는 1945 4월 보로실로프의 연해주군단으로 부임해와 제1극동전선군, 연해주군관구로 명칭이 바뀌는 동안 줄곧 사령관인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 휘하의 군사위원으로 있었다.

 

시티코프가 한국문제에 관여한 시기에 그의 정치적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1945 9 20일 스탈린이 연해주군관구와 25군 사령관에게 하달한 명령서에 북한의 민간행정에 대한 지도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에서 수행할 것을, 즉 시티코프가 총괄할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은 제1극동전선군(연해주군관구) 산하 부대이다. 평양 소련군정의 최고사령관은 표면적으로는 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1900~1979) 대장이었지만 그는 정치를 잘 모르는 야전군인이라, 실제로는 연해주 군관구의 군사위원 시티코프가 보로실로프와 평양을 오가며 소련군정을 총지휘하였다. 평양에 상주한 25군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는 뒷날 증언에서 시티코프에 대해 '그가 조선에 있건 연해주군관구에 있건 또는 모스크바에 있건 간에 그의 참여 없이 38선 이북 조선에서 이뤄진 조치란 하나도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4)북한 주재 대사

a.북한의 전쟁 준비 동향 보고

한편 남한의 미군정을 빨리 철수시킬 생각으로 38선 이북 북한에 임시인민위원회를 세우라고 하고 정권을 이양했지만 미군은 1949년까지도 남한에 머물러 있었다. 북한 주재 소련 대사로 있던, 시티코프는 1949 115~25일 중 남한의 군인과 경찰이 수차에 걸쳐 38선을 넘어 침입해 온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고(1 27)했다. 그러나 그는 대내외상황을 고려할 때 현시점에서 남한군의 침입이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고 보고 남한의 38선 부근 병력 집결은 북한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했다.

2 3일에는, 38선 부근에서 일어난 북한군 초소에 대한 남한군의 공격에 관해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북한군은 1명당 소총 탄약이 3~10발 정도밖에 없어 대부분의 경우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하고 극동군구 사령부가 북한의 2개 여단에 대한 무기공급을 지연시키고 있는 바 무기가 조속히 공급될 수 있도록 몰로토프 외무장관이 개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다음 날(2 4)에도, 그는 남한군의 초소 공격과 관련해 북한 내무성이 상세한 사실을 알리는 문서를 2 5일 발간할 예정임을 보고하였다. 이 문서는 이러한 무력도발이 유엔 한국위원단의 도착에 즈음해 발생하고 있음과 미군의 한국철수를 늦추기 위한 책략임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8 27, 그는 8 12~14일의 김일성과의 면담내용을 스탈린에게 보고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북한의 대남공격이 불가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1. 현재 한반도에는 두 나라가 존재하며 그중 남한은 미국 및 기타 국가에 의해 승인됨. 북의 공격시 미국은 남쪽을 무기탄약 공급뿐 아니라 일본군의 파견을 통해 지원할 가능성이 있음. 2. 북의 대남공격은 미국이 대소련 모함선전에 이용할 수 있음.

3. 정치적 측면에서 북의 공격은 남북한 인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으나 군사적 측면에서 북은 아직 남에 대해 압도적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

4. 남한은 이미 상당수 강한 군대와 경찰력을 창설하였음.(시티코프는 김일성이 제의한 강원도 지역의 '해방구역' 창설계획에는 찬성하고 또한 인민군에 의한 옹진점령계획도 군사적으로 타당하다고 보고했으나 남한의 반격시 이 작전이 지구전이 돼버릴 수 있다고 언급)

스탈린에게 제출한 9 15일자 보고서에서, 그는 김일성과 박헌영은 현 정세하에서는 평화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북이 남한 정부를 무력공격하면 남북양쪽의 인민들이 이를 지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지금 무력통일을 안하면 통일이 연기될 뿐이고 그동안 남한 정권은 좌익세력을 탄압하면서 북진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통일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진을 시작할 때 소련과 중공이 원조해줄 것을 기대하는 듯하다.”고 썼다. 그의 견해는 남북의 내전은 북에 유리하나 북한군이 남한 공격을 개시하면 소련이 국제적 비난을 받게 되며 미국이 끼어들 것은 물론 남한을 적극 지원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 물론 북한이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을 강화하는 것은 좋다. 옹진작전은 유리한 상황하에서는 실시 가능하고, 이를 위해 38선 지역에서 남쪽의 도발을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그러나 이에 대해서 소련 공산당 중앙위는 현재의 대내외적 상황으로 보아 남한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지침을 시티코프에 하달하였다.(9 24)

 

b.소련의 한국전쟁 승인 중개

시티코프는 1950 1 17일 박헌영 관저에서 열린 리셉션에 참석하여, 김일성의 전쟁 승인 요청을 받았다. 1 29일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비공개회의(1 6)의 내용을 외무부에 보고했다. 그 내용은

1) 분쟁 발생시 미국이 한국을 도와줄 희망은 별로 없다는 것,

2) 미국은 대만방어를 위해 장제스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

3) 영국의 중국 승인(1950 1 6)은 서방의 북한 승인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3 20, 김일성은 시티코프와의 면담에서 4월 초에 자신과 박헌영이 스탈린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김일성은 이번 방문을 46년의 방문처럼 비공식(비밀)으로 할 것을 제의하였다. 김일성은 남북한 통일의 방법, 북한 경제개발의 전망, 기타 공산당내 문제에 관해 스탈린과 협의하기를 원하였다

 

(5)소련으로 소환

한국전쟁 시기 북한 주재 소련대사의 직을 맡고 있던 시티코프는 1951년 초 갑자기 모스크바로 소환 당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한 전세 역전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보인다. 그는 1964 10 2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심한 증세가 아니었으나 그날이 일요일이라 병원에 의사도 없고, 제때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것이 주된 사인이다. 김일성은 그가 사망했을 때 조전(弔電)조차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2.스티코프 일기

그가 기록한 "시티코프 일기"가 구소련 붕괴 후에 발굴되었는데, 소련군정의 북한 통치와 대남공작에 대한 주요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1. 스티코프는 누구인가 게 재 일 : 1995 05 09 10(40)

45 4월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부임하면서 한국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한 스티코프는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47~48), 북한주재 초대 소련 특명전권대사(48~51)를 지냈다.

북한에서의 경력에서 보듯 북한정치문제를 담당하면서 북한정권수립(48)과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정권수립이후에는 특명전권대사를 맡는 등 사실상 북한 최고 실력자다. 그는 김일성. 김두봉. 박헌영 등 북한의 정치지도자 뿐 아니라 남로당 등 남쪽 좌익까지 떡 주무르듯 했고 북한의 모든 것이 그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1,2 美蘇공동위원회(46 3~5,47 5~8) 소련 측 수석대표로 나서 군정과의 협상에서도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929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스티코프는 한국에오기전 38년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2비서, 39년 소련. 핀란드전쟁시기에 제7군 군사평의회 위원, 43년 볼호프스키 전선 군사평의회위원, 44년 카렐스키전선 군사평의회위원 등을 역임했다. 군인이면서 철저한 공산주의자요, 노련한 정치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는 56~61년 소련공산당중앙위원, 63년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 당국가검열위원회 부위원장 등 당 경력도 화려하다. 64년 휴가차 레닌그라드에 갔다가 지병인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2. 9월총파업과 10월폭동 게 재 일 : 1995 05 09 10(40)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가 발굴한 스티코프 비망록은 북한정권 수립 기에 북한의 최고실권자였던 스티코프가 그날그날 있었던 구상과 생각들을 꼼꼼히 일기형식으로 적어놓은 중요 사료(史料).

이 비망록은 스티코프를 정점으로 한 소군정이 북 한을 이미 완전히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은데 이어 남한 정세에까지 깊숙이 개입한 사실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스티코프 비망록은 이런 점에서 북한정치사는 물론 남한정치사의 또 다른 이면적 진실을 밝혀주는 실마리를 제공한 셈이다.

따라서 비망록은 기존 가설을 문서로 입증해주거나 전혀 새로운 사실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해방정국에서 매몰되고 유실된 우리역사를 복원, 한국 현대사를 다시 쓰게 하고 있다.

이로써 중앙일보는 지난해 12월 소25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에 이어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스티코프 비망록까지 발굴함으로써 북한정권수립의 내막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게 됐다.스티코프 비망록의 주요 내용을 주제별로 분류, 6회에 걸쳐 해설과 함께 연재한다. [편집자]

1946 9월 좌익계열의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全評)가 주도한 9월 총파업 때 북한의 군정이 2백만엔을 , 뒤이어 발생한 10월 폭동때는 3백만엔의 자금을 지원한 것은스티코프비망록에서 처음 밝혀진 사실이다. 이는 당시 남한정세 에 소련이 깊숙이 개입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까지 9월 총파업은 조선공산당 지시에 따라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왔다. 10월 폭동에 대해서도 일부 학자는 조선공산당의 개입사실을 부인해 왔다. 그러나 비망록은 9월 총파업이 조선공산당의 지시 차원을 넘어 군정의 지시에 따른 것 이고, 10월 폭동에도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물론 군정까지 직접 개입한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그동안 조선공산당과 소련의 개입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불식시킨 셈이 됐다.

9월 총파업은 46 7월 조선공산당이 군정에 대한 종래의 우호정책을 철회하고 군정의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운동을 강력히 전개하기 위해 채택한 신 전술의 구체적인 행동표현이었다.

신 전술이 채택된 같은 달 중순 전평 상무위원회는 당의 신 전술 지령에 입각해 46 10월 파업투쟁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이 계획을 바꿔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길 것을 지시했다. 김남식(金南植.평화연구원)연구위원은조선공산당이 군정 운수부가 운수부 노동자 25%를 감원하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기로 한 기회를 이용하려 했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비망록은 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 있다. 총파업일정을 앞당긴 결정은 바로 군정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이다. 비망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46 99일 박헌영(朴憲永) 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했다.이에 대해 스티코프는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시위를 벌이고 항의집회를 개최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비망록에는 스티코프의 이런 지시가 9 11일과 16일 두 차례에 걸쳐 내려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전평 지도부의 긴급회의가 910일 소집돼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길 것을 결정한 점으로 미뤄 볼 때 아마도 스티코프의 지시는 박헌영이 이 문제에 대해 질의한 99일이나 아니면910일 이른 아침에 하달됐을 가능성이 크다.

계획대로 총파업은 46 923일 부산철도 노동자 7천여명이 일급제 반대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감으로써 불을 댕겼다.

다음날 서울을 비롯한 철도종업원 4만명이, 925일에는 출판노조가, 연이어 전신관계 종사자들이 동조파업을 단행함으로써 파업여파는 각 부문으로 확산됐다.

총파업 기간에 대한 비망록 내용 중 주목을 끄는 대목은 군정이 총파업이 최고점에 달한 926일과 28일 두 차례나 파업투쟁 방향을 지시한 점이다.

특히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등 정치문제를요구조건 속에 포함시켜 이를 관철할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하라고 지시한 것은 총파업을 정치투쟁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군정이파업투쟁 자금으로 2백만엔을 긴급 지원한 사실 역시 파업투쟁을 고취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총파업이 각 지역에서 계속되는 가운데 101일 대구에서는 1천 여 명이 식량 배급을 요청하며 시위를 벌였다. 파업노동자 등의 가세로 시위가 점차 확대되자 경찰은 진압을 위해 발포했다. 이 와중에 시위군중 한명이 숨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

다음날 흥분한 대규모 시위대가 경찰서 무기를 탈취하는 등 극렬 행동을 서슴지 않자 군정 당국은 대구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출동시켜 소요를 진압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부터 시위는 대구인근 지역으로 번졌고 급기야 11월 중 순까지 경북전지역과 경남 강원. 전남 등지에서 계속됐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교량. 철도가 파괴됐으며 우체국 등이 방화돼 통신망이 두절 됐다. 왜관에서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수명의 경찰관이 학살됐다.

그러나 시위는 군정과 경찰, 그리고 우익단체들의 적극적인 진압노력으로 11월 중순을 고비로 그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이제까지 일부 학자는 10월 폭동에 조선공산당 지도부가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주장해 왔다. 그러나 비망록은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물론 군정까지 10월 폭동에 깊이 관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망록에 따르면 10월 폭동이 시작된 그 다음날 스티코프는 남조선 투쟁기금으로 3백만엔을 보낼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조두원(趙斗元)은 폭동이진행중인 1021 군정에 대해그들의 향후 투쟁방침에 대한 교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이런 사실들은 10월 폭동 역시 조선공산당이 상황전개에 따라 군정과 교감을 가지면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3. 스티코프비망록 1. 일지 게 재 일 : 1995 05 09 10(40)

박헌영은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하고 있다(4699)

남조선 정세와 지원조치. 로마넨코 . 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항의집회를 조직할 것(46 911)

북조선에서 남조선으로 반입할 출판물을 증대시킬 것을 요청하고 있다. 대중적인 시위와 항의를 조직할 것. 미군정과 남조선 반동파의 행동을 폭로하는(46 916)

레베데프에게 전화 걸었다. 남조선 좌익의 활동방향에 대해(46921)

로마넨코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달하다.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은 공산당지도부에 대한 체포명령의 취소, 좌익의 석방, 테러중지를 요구할 것. 로마넨코. 4만 명의 철도종업원들이 파업에 돌입. 남조선에서는 파업투쟁이 진행 중이다. 철도종업원들이 파업을 시작했다.

9 25일 오후부터 출판인쇄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됐다(46926)

로마넨코. 남조선에서 파업투쟁이 확산되고 있다. 학생들이 파업투쟁에 합류했다. 요구조건의 관철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경제적인 제 요구,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권력의 양도 요구를 잠시 철회. 5백만엔을 요청하고 있다. 재정지원을 위해 2백만 엔을 지급.

남조선 파업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경제적인 제 요구, 임금인상,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에 의해 폐간된 좌익신문들의 복간,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 철회 등의 요구가 완전히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할 것. 이 요구가 충족될 때 파업투쟁을 중지할 것. 인민위원회에 권력을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 미군정과 협상을 지속할 것이라고 성명할 것(46928)

남조선 사태에 대한 북한의 반응. 남조선 인민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집회 개최와 남조선 인민을 지원하기 위해 매일 두 시간씩 노동시간을 늘려 그 임금액을 남조선 지원기금으로 공제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서울 에서 시위를 시작할 예정이다. 3백만엔을 더 요청하고 있다. 불가닌에게 전화하다. 우리의 (남조선)동지들에게 3백만엔의 재정지원을 제공하는 문제 및 집회개최와 공제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듣다(46101)

3백만엔의 지원과 집회개최를 위해 작업시간을 단축하는 문제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46102)

46106일 박헌영이 남한을 탈출해 북한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9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 했는데, 그를관에 넣어 옮겼다. 박헌영이 휴식을 취하도록 지시했다(46 107)

부산에서는 농민들의 진출이 시작됐다. 지금 파업운동은 어느 정도 축소됐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조두원은 향후 투쟁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문의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빨치산부대들이존재하고 있으며, 반동진영과 민주진영 사이에 전투가 전개되고 있다. 그는 빨치산투쟁을 본격적으로 개시해야 할지 혹은 자제해야할지를 문의하고 있다. 박헌영. 파업투쟁은 폭동으로 성장 진화했다.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다. 그들의 향후 투쟁방침에 대한 교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가까운 시일에 농민 투쟁이 개시될 수 있다(461021)

발라사노프와 샵쉰을 호출해 남조선 정세에 대한 그들의 정보보고를 청취했다(461022)

김일성. 박헌영과 회담할 것. 회담 때 남조선에서 전개되고 있는 제반 사태에 대한 평가를 전달할 것(46114)

(정체불명)은 박헌영에게 39만엔이 지출됐다고 보고했다. 더 지급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46126)

로마넨코. 그의 계좌에 있는 122만루블에 대해 논의했다. 그 돈을 박헌영에게 전달하고 계좌를 정리할 것을 명령했다(46127)

 

4. <인터뷰>스티코프 장남 빅토르씨  게 재 일 : 1995 05 11 09(40)

중앙일보 현대사 자료 발굴 팀이 7개월간에 걸친 수소문 끝에 찾아낸스티코프비망록은 스티코프의 장남 빅토르(61)의 집 차고 먼지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안성규 모스크바 특파원, 전현수 연구위원 등 본사자료 발굴 팀은 빅토르를 끈질기게 설득, 비망록을 본사에 기증하게 됐다. 한국현대사를 다시 쓰게 하는 귀중한 사료가 비로소 빛을 본 순간이었다.

자료팀은 아버지의 화려한 삶과는 달리 평범한 노동자로 쓸쓸히 노후생활을 보내고 있는 빅토르를 만나 아버지 스티코프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아버지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습니까.

아버지가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위원으로 북한문제에 깊이 개입하셨고 초대 북한주재 소련대사를 지내셨다는 사실 외에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가 너무 어렸을 때니까요.

 

-아버지가 자료를 많이 남겼다고 들었습니다.

상당히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앨범. 문서. 노트. 사진들을 많이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년 뒤인 66년 북한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자료들을 거의 모두 가지고 갔습니다.

 

-자료유실이 어느 정도입니까.

86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부터는 모든 자료를 제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이사를 40번이상이나 다녀야 했고 제가 이 분야를 잘 알지 못해 관리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상당한 양이 없어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아버지는 평소 심장병을 앓았지요. 아버지는 64년 여름휴가를 레닌그라드에서 보냈는데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아버지가 이날도 시내 러-일전쟁 기념비를 촬영하러 가다가 네프스키 프로스펙트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습니다. 같이 있던 당시 운전사 의 말에 의하면 심한 증세는 아니었는데 그날이 일요일이라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바람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평양을 다녀오신 적이 있습니까.

47 2차 미소공위가 진행 중일 때 여름방학을 이용해 아버지와 함께 평양과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평양과 서울 모두작지만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한국이 어째서 아직도 합쳐지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일기가 공개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광일 뿐입니다. 지면에 공개되면 꼭 보내주십시오.

빅토르 스티코프는 중령까지 군 생활을 하다 아버지가 외무부고문으로 있을 때 퇴역, 열차운전사로 일했다. 얼마 전 은퇴하고 지금은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는 부인 잉가 니칼라예브나(61)와 함께 상트 페테르부르크 변두리의 두칸짜리 아파트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그나마 페레스트로이카가 몰고온 생활고 때문에 연금으로는 모자라는 생활비를 벌 기 위해 열차관리소에서 야간수위를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모스크바=안성규 특파원. 전현수 연구위원]

 

5. 스티코프비망록 2. 3당합당  게 재 일 : 1995 05 11 09(40)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을 두 달 앞둔 1946 7월 남북 좌익세력의 새로운 판짜기가 시작됐다. 북에서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당해 북조선노동당(북로당), 남에서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 좌익3당이 합당해 남조선노 동당(남로당)을 결성하는 작업이 추진된 것이다. 공산당이 유일집권당으로 등장해 사회주의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였고, 남에서는 흩어져 있던 좌익세력들을 통합해 구심점을 형성한 후 군정과 본격투쟁에 나서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북로당의 결성은 군정의 후원을 받아 8월 말 순조롭게 완성됐지만, 군정의 탄압과 3당간의 이해관계가 얽힌 남로당결성은 예정보다 3개월이나 늦게 이루어졌다. 그만큼 좌익 3당 합당을 통해 남로당이 결성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 을 겪어야 했다. 3당 합당이 지연되자 군정 최고지도부와 북로당은 합당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직접 남쪽 정치상황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발굴한스티코프 비망록은 이러한 상황을 세세한 부분까지 보여준다. 3당 합당 과정에 군정이 직접 개입했음이 문서로 처음 밝혀진 것이다.

남쪽에서 3당 합당은 박헌영(朴憲永)이 비밀리에 평양과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46 712일 서울로 돌아온 직후 갑작스럽게 여운형(呂運亨)에게 좌익 3당 통합문제를 통보하면서 시작 됐다. 이 소식을 들은 여운형도 7월말 북쪽의 진의파악을 위해 급거 평양을 방문했다.

8 3일 인민당은 합당을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공산당. 신민당에 합당제안문을 발송했다. 이에 공산당과 신민당이 즉시 합당교섭을 개시하자는 회답을 보내면서 3당 합당이 구체화됐다. 그러나 군사령부. 북로당의 지시에 따라 순조롭게 출발한 합당작업은 잠재돼 있던 공산당 내부의 갈등이 폭발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반전(反轉)됐다.

85일 이정윤(李廷允). 강진(姜進) 박헌영 간부 6인이 합당을 하기 전 당대회를 열고 지도체계를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반대파를 제명. 무기 정권시켰다. 이후 당대회 소집을 둘러싼 논란이 확대되면서 공산당은 완전히 두 파로 갈라졌다.

이렇게 되자 인민당과 신민당도 합당을 신중하게 추진하자는 의견이 대두돼 좌익3당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상태에 직면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박헌영은 94일 합당을 지지하는 세력만으로3당 합당을 추진해 남로당 준비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인민당 당수 여운형과 신민당 당수 백남운(白南雲)등이 반발하자 3당 합당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당황한 군정의 움직임도 바빠졌다.스티코프비망록은 스티코프가 910일 북로당위원장 김두봉(金枓奉)을 호출해 남쪽의 3당 합당문제 및 지원대책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사실을 보여준다. 밀사를 파견해 남쪽의 정세를 파악한 사실도 드러났다.

스티코프는분파주의자들은 북조선의 압력과 관련하여 잠잠해졌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박헌영 반대파들은 9월 총파업 진행 중인 28일 당 대회 준비모임을 갖고 총파업반대와 당대회 소집을 주장했다. 다른 당의 대표들도 평양의 소련군사령부를 직접 방문해 박헌영의 독선적 태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비망록은 남조선신민당 중앙위원 고찬보와 여운형의

평양방문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스티코프는 923일부터 30일까지 평양을 방문한 여운형에게 각별히 신경을 썼다. 여운형은 새로 만들어진 남로당의 당수로 내정돼 있었다. 스티코프가 여운형에게 북조선 지도자들과의 회담을 허용하고 북조선이 그를 신뢰하고 있다고 말 할 것을 지시한 것은 여운형이 정치력을 발휘해 좌익정당 내부의 분열을 수습해 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또 비망록은 신민당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합당에 비판적인 백남운을 물러나게 하고 합당에 적극적인 정노식(鄭魯湜)을 신민당 위원장으로, 무소속이며 박헌영 지지자였던 허헌(許憲)을 부위원장으로 추대하는 작업이 군정과의 교감 속에서 추진되었음을 보여준다. 10 7일 이그나치예프 대령은 합당사업이 수준까지진척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10 16일 백남운. 강진등 박헌영의 독주에 반대하는 세력이 남로당과는 별개로 사회노동당을 결성하면서 3당 합당은 두 갈래로 추진되는 혼선을 빚게 된다. 좌익세력의 단결을 위해 추진된 3당 합당이 분열의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6. 스티코프비망록 2. 일지  게 재 일 : 1995 05 11 09(40)

김두봉(金枓奉.북로당 위원장)을 호출하다. 남조선의 정세 ,남조선 3당 합당 문제 및 지원대책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다.(46910)

보로실로프에서 로마넨코(蘇軍民政사령관)와 남조선정세에 대해 전화 논의. 아널드(군정장관)가 여운형(呂運亨.조선인민당 당수)을 호출해 미군사령부는 남조선 좌익3당의 통합을 현재로서는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명했다.(916)

로만넨코 보고. 남조선에서 912일 밀사가 도착했다. 여운형은 아마도 곧 합당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백남운(白南雲.남조선신민당 당수)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분파주의자들은 북조선의 압력과 관련해 잠잠해 졌다. 이강국(李康國.남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사무국장)은 자신의 거처와 관련해 북조선으로 활동공간을 옮기는 것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합당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남조선에 좌익3당을 그대로 존속시킬 것을 요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두 명의 지도자, 여운형과 백남운이 반대한다면 합당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919)

로마넨코. 오늘 남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가 김일성(북로당 부위원장)을 방문했다. 그들은 변장을 하고 머리. 수염 등을 깎았다. 찬보(高贊輔)는 신민당 중앙위원이자 인민당 중앙위원이다. 그는 3일간의 일정으로 북조선을 방문했다. 그는나는 북조선에 의지하고 있지만 북조선은 나를 신임하지 않는다. 나는 좌익이다. 미군정은 나를 못살게 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당분간 통합을 추진하지 말 것을 제기했고,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에 입당하고 있는데, 그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하게끔 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또한 박헌영(朴憲永.조선공산당 당수)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박헌영이 무엇인가 일을 추진하면 10일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그에게 3명의 지도자를 추천했는데 이중 2명이 공산주의자였다. 그는내가 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의 서신들을 접수했지만 나는 그것들을 당신의 서한으로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 스탈린 동지 앞으로 암호전문을 보내 여운형에게 어떠한 답변을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령을 요청했다(921)

로마넨코 보고. 김일성과 여운형의 회담이 있었다. 여운형은 재차 소련군사령부 지도부와의 회담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여운형에게 어떠한 답변을 줄 것인가에 대해 지시를 하달(925)

로마넨코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들을 하달했다.

 

 

-북조선 지도자들과 여운형의 회담을 허용할 것.

-남조선 좌익3당의 합당을 잠시 중단할 것.

-공산당은 반드시 합법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체포명령의 취소, 감옥으로부터 좌파의 석방, 테러중지를 요구할 것.

-북조선의 상황과 북조선에서 실시되고 있는 민주주의적 제 개혁에 대해 설명해 줄 것. 북조선은 여운형을 신뢰하고 있다고 말할 것.

로마넨코 보고. (신원불명)와 중앙위원회 위원 2, 김일성, 김두봉, 영하(朱寧河.북로당부위원장), 장주익, 허가이(許哥而. 북로당 조직부장)등 회의.

인민당과 신민당 두 정당의 합법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공산당은 지하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는 남조선의 정세에 대해 보고했다. 남조선의 정세에 대해 논의했다. 종파주의자들이 대회를 소집했고, 2백명이 대회에 출석하였다. 대회에서 어떠한 문제들이 심의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신민당은 대회를 개최해공산당 지지자들을 모두 당에서 축출했다. 대회는 백남운을 위원장으로 하는 중앙위원회를 선출했다(926)

 

로마넨코 보고. 서울에서 남조선신민당 조직부장 심운(沈雲)의 연락원이 도착했다. 신민당 중앙위원회의 다수는 백남운에게 사퇴를 요구했다. 백남운은 미군정과 경찰의 보호 하에 당 대회를 소집했는데, 대회에는 당에서 제명당한 사람들이 참석했다. 김두봉은 대회를 무효로 인정할 것과 부위원장 정노식(鄭魯湜)을 위원장으로, 허헌(許憲)을 부위원장으로 승인할 것을 제안했다(102)

이그나치예프 대령(민정부 정치부 차장). 합당사업은 도 수준까지 진척되었고 지하에 정치위원회가 조직되었다(107)

 

7. 스티코프비망록 3. 3당합당  게 재 일 : 1995 05 16 10(40)

박헌영파(朴憲永派)가 남로당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수습 기미를 보였던 좌익 3당 합당은 1016일 박헌영 중심의 합당에 반대하는 강진. 백남운 등이 독자적으로 반대파를 규합해 사회노동당(사로당)을 결성하면서 또 한 차례 폭풍에 휩싸이게 된다. 뜻밖의 사태전개에 당황한 군정과 북로당은 남쪽 상황에 더욱 깊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스티코프비망록은 이러한 개입의 사례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우선 로마넨코와 김일성. 김두봉이 반대파의 대부격인 강진. 백남운을 각각 만나왜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가를 추궁했다. 지금까지 반대파들이 북으로부터 비판당했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그 구체적 내용이 밝혀진 것은 처음이다.

군정과 북로당의 호된 질책을 받은 백남운과 강진은 남으로 내려오자마자 사로당이 자신들과 관계가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사로당 해체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111일 사로당은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백남운. 강진이 포함된 중앙위원을 선출했지만 여운형. 강진. 백남운은 참석하지 않았다.

북로당 중앙위원회는 개별인물에 대한 비판 외에도 사로당을 공식 비판하는 결정서를 채택했다.

1116일 북로당은 남로당 정치노선 절대지지와 강진등을 분열주의자로 규정하는사로당에 관한 북로당의 결정서를 발표했다. 이것은 군정의 지지를 기대했던 사로당에는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군정의 입장이 강력하게 표명되자 사로당에 참여한 공산주의자들이 급속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간부들의 탈당성명이 잇따랐다.

 

결국 남로당은 1123~24일 양일간 결성대회를 갖고 공식 출범했고, 사로당은 47 2월 당 대회를 열고남조선 민주진영의 세력을 분열시키는 역할을 했다 는 자기비판과 함께 해체를 선언했다. 군정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박헌영의 승리가 확정된 것이다.

스티코프는 122성공적으로 그러나 어렵게 성취된 합당사업에 대해 박헌영에게 축하할 것을 지시해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어렵게 결성된 남로당은 합법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군정의 기대와는 달리 이미 10월 폭동을 겪으면서 불법화된 상태였다. 대중적 기반도 약화됐다.

남로당과 북로당 창당 작업이 완료되자 두당간의 원만한 관계 정립이 현안으로 등장했다. 스티코프가김일성과 박헌영은 업무상 긴밀한 연계를 확보해야한다고 지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티코프는 126일에도 같은 지시를 내렸다.

이와 관련, 46 1212일자비망록은 전혀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박헌영이 남북조선노동당의 단일한 비합법적 중앙을 창설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고 이에 김일성도 동의했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진 것이다. 이것은 48 825 일 만들어진남북노동당 연합중앙위원회구성을 북로당이 남로당을 흡수하기 위해 강요했다는 통설을 뒤집는 내용이다.

박헌영은 월북 후 자신의 당내입지를 마련하기 위해 남북노동당의 연합중앙위원회 구성을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46 123일 스티코프는 모스크바로3당 합당에 대한 보고서를 보냈다.

이로써 4개월간에 걸쳐 파란을 겪었던 3당 합당이 사실상 마무리 됐다. 그러나 남한 좌익정당의 단결과 강화를 위해 추진된 3당 합당은 좌익세력 내부의 갈등과 분열의 앙금만을 남겼다.

단일한 좌익정당을 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군정에 대한 투쟁을 강화하려던 군정의 의도도 합당 전에 10월 폭동이 발발함으로써 사실상 좌절됐다.

 

8. 스티코프비망록 3. 일지  게 재 일 : 1995 05 16 10(40)

로마넨코(蘇軍民政사령관)와 대화했다. 강진(姜進.조선공산당 중앙위원) 1029일까지 북조선에 머물도록 약속 했다. 로마넨코와 강진의 회담 후에 김일성(金日成.북조선노동당부위원장)이 강진과 대담할 것이다.(461019)

김일성 보고.

종파주의자들과 강진은 인민대중을 기만했다. 그들은 170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소집,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반대파의 통합이라는 구실 하에 대회를 개최해 다시 한 번 인민대중을 기만했다. 여운형(呂運亨. 조선인민당 당수)도 대중을 기만 했다. 그는 사회노동당(사로당)중앙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두 조직의 중앙위원회 성원은 모두 종파주의자들과 친미분자들로 구성되었다. 여운형을 비판할 것. 그러나 너무 과격하지 않게.(1021)

김일성의 보고.

김두봉(金枓奉.북로당위원장)이 백남운(白南雲.남조선신민당 당수)과 만났다. 과 함께 3명이 북조선에 도착했다. 은 사로당을 정당화하기위해 북조선으로 왔다. 여운형은 그가 북조선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 하지(미군사령 관)가 불러 좌우합작의 필요성을 인정할 것을 요청했다며 편지를 보내왔다.

는 우리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고 북조선을 방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김두봉은 에게 왜 좌우합작에 동조 했으며,왜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가를 물었다. 은 자신이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로당을 조직했다고 대답했다.

강진과 만났다. 나는 합당사업이 결렬된 모든 책임이 강진에게 있다고 말했다. 또 나는 그에게 제국주의의 주구인지 아닌지는 확증할 수 없지만, 미국인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당신에 의해 소집된 대회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와의 통합을 위한 것이 아니라 투쟁을 위한 것이었다.

당신은 대회를 소집할 자격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에서 제명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합당을 방해할 목적으로 대회를 소집했다. 박헌영 동지의 결정은 그 자신만의 견해가 아니라 북조선 40만당원의 견해이기도 하다. 당신은 당으로부터 권한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당신은 박헌영 동지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을 구실로 삼고 있지만, 당에 손실을 입힐 권한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당신이 지금까지 행동해왔던 것과 다른 진정한 혁명가가 되고자 한다면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가. 그는 조언을 구하러 왔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좋게 평가하기를 원한다면 당신 스스로가 분파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당신을 전에 이미 호출했지만, 당신은 오지 않았다. 그는 남조선노동 당과 사회노동당을 통합시키겠다고 대답했다.(1022)

김두봉과 대담하다. 그는 남조선 정세에 대해 동요하는 입장을 보였고 남조선 반동파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1025)

로마넨코, 3당 합당 상황에 대해 보고. 수준에서통합이 완료되었다. 준비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고 중앙위원회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중앙위원회 대표가 허헌(許憲.남로당 당수)을 만나 박헌영의 지시를 전달했다. 반대파들은 사로당을 결성했다. 사로당의 강령이 발표된 후 대중들은 이 당을 거부하고 있다. 사로당이 우익과 합동을 도모하고, 입법기관의 조직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좌익정당의 분개를 사고 있다.

사로당은 파업과 무장봉기를 이유로 공산당을 비난했다. 백남운은 사로당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며, 사로당의 선언이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성명했다. 강진도 자신의 오류에 대한 비판을 표명하고 있다. 여운형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성명했다.(1112)

로마넨코, 남조선 노동당대회 총괄보고. 지시를 내리다.

1.성공적으로, 그러나 어렵게 성취된 합당사업에 대해 박헌영에게 축하할 것.

2.다른 정당들이 파악할 수 없도록 당중앙위원회를 구성할 것.

3.박헌영은 향후 행동방침에 대한 지령을 허헌에게 하달해야한다.

4.박헌영이 수행할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선전사업에 대한 방침을 숙고할 것.

5.김일성과 박헌영은 업무상 긴밀한 연계를 확보해야 한다.

6.급사를 통해 일체의 당대회 자료를 보내도록 지시를 내릴 것.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로 보낼 남조선 3당 합당 사업총결 보고서를 준비하도록 크라프초프에게 지시를 내리다.

박헌영은 남북조선노동당의 단일한 비합법적 중앙을 창설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나는 김일성의 의향을 알아보았다. 그도 역시 동의했다.(1212)

크라프초프가 전화했다. 사로당 문제로 서울에서 보고가 있다고 알려왔다. 우리의 지시가 대개는 전적으로 받아 들여졌으며, 사로당의 붕괴가 계속되고 있다. 당 축소의 지지자는 강진이다.(1217)

9. 스티코프비망록 4. 좌우합작 추진 말라  게 재 일 : 1995 05 18 10(40)

1946 5 군정이 김규식(金奎植)과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추진할 때 소군정(蘇軍政)이 이를 강력히 저지하려 한 사실이스티코프비망록에서 처음 밝혀졌다.

또 좌우합작 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미군정이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하려 하자 소군정이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 주장등 그에 대한 대응책을 남조선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직접 지시한 사실 역시 새롭게 드러났다.

이 같은 사실들은 당시 박헌영(朴憲永)이 이끈 남한의 좌익계열이 좌우합작에 반대하고 입법의원선거를 전면 거부한 배경을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군정은 난항에 빠진 한국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좌우합작이라는 새로운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남한에 소련 측이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세력을 등장시켜 이들로 하여금 남한의 정치적 통합을 주도하게 함으로써 장차 소련과의 협상을 원만히 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또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온건좌파를 분리시킴으로써 공산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도 함께 포함됐다.

한편 여운형의 측근이었던 이만규(李萬珪)여운형은 자신이 좌우세력을 통합시켜야 한다는 개인적 사명 때문에 좌우합작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당시 좌파의 지도권을 놓고 박헌영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터에 미 군정으로부터 좌우합작 추진 제안을 받자 박헌영을 고립시킬 수 있는 기회로 판단하고 이를 수락한 측면이 강했다.

반면 김규식은독립정부를 수립해보겠다는 의욕에서 좌우합작에 뛰어들었다고 스스로의 입장을 밝혔다.

좌우합작운동은 46 525일 좌우익 지도자들 간에 첫 회합을 가진 이래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같은 해107좌우합작7원칙이라는 합의점을 도출해 냈다.

지금까지 김일성(金日成)을 비롯한 북한지도부가 좌우합작에 반대한 것은 알려져 왔다. 그러나 소군정이 좌우합작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비망록에 따르면 스티코프는 46 924일 북한을 방문한 여운형에게 무슨 답변을 주어야 할지 스탈린의 지령을 요청했고, 이틀 후 소군정 민정(民政)사령관인 로만넨코에게남조선 좌우합작을 추진하지

 

                                                         북한 정권 수립의 막후 인물인 스티코프 中將(왼쪽)과 니콜라이 레베데프 少將(오른쪽).

 

                                                               1946년 미소공위에 참석하러 서울에 온 시티코프가 덕수궁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가운데가 스티코프중장

 

                                                1946 5, 1차 미소공위 미국측 대표인 브라운 소장과 악수하는 여운형(가운데가 스티코프 중장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스티코프, 안재홍

 

 

1945 10 14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뒤의 소련군 장성들 중 맨 오른쪽이 레베데프 소장이다. 그리고리 메클레르 중좌가 개회를 선언하고, 이어 레베데프 소장이 등단하여 소련군이 온 의의와 진의를 설명하고 조선인민에게 축하와 격려의 말을 하였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 레베데프 소장(小將)

니콜라이 게오르기예비치 레베데프(러시아어: Николай Георгиевич Лебедев, 1901 ~ 1992 5 10)[1]는 소련군 장성이다. 1945년 해방 당시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평양의 소련군정에서 김일성 정권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N. G. 레베데프는 1901년 러시아 칼루가 주(Калужская область) 지즈드린스키 군(Жиздринский район)의 부다(Буда) 마을에서 태어났다. 1916년까지 부드스크 젬스트보 학교(Будская земская школа)에서 공부했다. 1920년부터 적군(Красная армия)에 복무했다. 1941 6 15일에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고, 1942 12 6일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5 8월 제1극동전선군 산하 제25군의 대일본전 지도자의 한명으로 북한에 진주하였다. 평양 소련군정의 명목상 최고 책임자는 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 대장이었으나 그는 정치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았고, 소련군정을 실제로 총지휘한 사람은 보로실로프(지금의 우수리스크)의 연해주 군관구 군사위원 테렌티 스티코프였다. 레베데프 소장은 25군의 군사위원으로 평양 현지에서 스티코프 등 상부의 지시를 받아 이행하는 실질적 책임자였다.

 

그는 국내에서 무명 인사에 지나지 않았던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드는 여러 정치 공작을 지휘했다. 당시 김일성대 부총장으로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교습한 박일(朴一)은 레베데프 소장이 최초로 김일성 우상화 공작을 시작한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1948 9 10일 공식적인 북한 정부 수립 후 소련으로 귀환하는 그에게 김일성은 훈장을 수여하였으며, 이후 한동안 매년 그를 북한으로 초청하였다 한다.

 

그는 비교적 장수하여 1990 10월 한-소 국교수립 직후인 1991년에 모스크바의 자택으로 찾아간 중앙일보 특별 취재팀에게 소련군정 당시의 여러 일들에 대해 많은 증언을 해 주었고,[7] 이듬해인 1992 5 10일 모스크바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남긴 레베데프 비망록은 소련군정의 북한통치 및 대남공작과 관련한 중요한 역사 자료이며 구 소련 붕괴 후에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에 응하여 남긴 증언도 많이 있는데, 평양의 소련군정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

 

레베데프는 한반도 분단의 한 축을 담당했던 소련 점령군 사령부 핵심인물이다. 그는 북한의 소비에트화를 위해 정열적으로 일했으며 그 내용을 소상하게 일기로 쓴 것이 바로 이 비망록이다.
편자는 이 비망록을 통해 북한 정권창출에 소련이 어느 정도 개입했으며, 그리고 남북협상의 추진 내막과 진행과정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책을 통하여 한국현대사 연구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1946 8 28일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한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주석단. 오른쪽 부터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김일성, 박정애이다.

 

               1947년 김두봉,김일성과 소련군 장성들이 담소하는 장면 사진. 오른쪽 끝이 김일성, 가운데서 왼쪽을 보며 이야기하는 사람이 레베데프 소장이다.

 

                                             북한 정권 수립후 1948년 말 소련으로 귀환하는 레베데프 소장에게 김일성이 메달을 달아주는 장면

 

 

. 소련 제25군의 사령관이며 평양 소련군정의 최고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 대장(大將)

이반 미하일로비치 치스차코프(러시아어: 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Чистяков 이반 미하일로비치 치스탸코프, 1900 9 14 - 1979 3 7)는 소련의 군인으로, 1945 8월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의 사령관이었으며, 평양 소련군정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소련 제1극동전선군 산하 제25군은 소련의 대일전 개시와 함께 1945 8 9일 북한지역으로 침공해 들어온다. 1945 8 15일 일왕이 라디오로 무조건적인 태평양 전쟁 항복선언을 하였다. 8월말까지 소련 제25군은 북한 전역을 장악하고, 사령관인 이반 치스차코프 대장은 북한 소련군정의 명목상 최고 책임자가 된다. 8 26일 비행기로 평양에 도착한 그는 일본군 평양사관구(平壤師管區)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竹下義晴) 중장을 숙소인 평양 철도호텔로 불러 항복을 받는다. 그 장소에는 조만식도 입회하였다. 같은 날 밤 후루카와 가네히데(古川兼秀) 평안남도 지사를 역시 철도호텔로 불러 행정권을 이관 받았다.

 

하지만 그는 야전군인이라 정치문제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고, 소련군정을 실질적으로 총지휘한 사람은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테렌티 스티코프 상장이었다. 평양 현지에서는 25군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이 스티코프의 지시를 이행하는 책임자였다.

 

평양에 온 그가 발한 이른 바 치스차코프 포고문은 맥아더 포고령[5]과 대비되어 오늘날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치스차코프 포고문의 내용과는 달리 소련은 주민들의 의사와는 아무 관계없이 대중의 지지가 높은 조만식을 제거하고, 각종 정치공작을 통해 자신들이 88 국제여단(88독립 저격여단)에서 교육시킨 대리인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워 북한을 공산화시킨다는 확고한 정책을 강제로 밀고 나갔다.

 

이외에 소련군정 사령관으로서 치스차코프가 한 결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의 수도를 함흥과 평양 중 어디로 할지를 결정하라는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의 지시를 받고 평양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병사들이 벌인 민간인 약탈, 강간 등의 만행, 일제가 남긴 산업시설들을 해체하여 소련으로 반출한 것, 반탁 데모와 반공 의거를 강제 진압하면서 많은 인명 피해를 낸 것 등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그는 1947 3월 소련으로 귀국했고 후임 사령관으로 겐나디 페트로비치 코로트코프(Gennadii Petrovich Korotkov, 1898  1982) 중장이 부임했다.

 

저서로 25군의 전투행로가 있다.

I.M.치스챠코프, 25군의 전투행로, 소련과학아카데미 편, 레닌그라드로부터 평양까지 : 조선해방에 있어 소련장성 11인의 회고록 (서울: 함성, 1989.05.01)에 수록됨.

소련으로 망명한 전 북한 외무 부상 박길용 (朴吉用, 1920~1997은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일본군을 물리치고 조선을 해방시켰다는 북한 역사책들의 주장은 치스차코프의 회고록 25군의 전투행로에 나오는 내용중 소련군 25(88독립 저격여단)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바꾸어 옮겨적은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1945 8 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이 일본군 평양사관구(平壤師管區)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竹下義晴) 중장()을 숙소인 철도호텔로 불러 항복을 받는 장면으로 그 장소에 조선인 대표로 조만식()도 입회하였다

 

정권 이관의 광경: 1945 8 26일 밤 철도 호텔에서 왼편의 소련 제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Ivan Chistyakov) 대장이 오른 편의 후루카와 가네히데(古川兼秀) 평안남도지사로부터 행정권 이양을 받는 모습

 

1945 8 24일 함흥에 도착한 치스차코프가 환영나온 군중들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이때까지 함흥과 평양 중 어디를 수도로 할 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함흥에 먼저 들린 것으로 보인다. 평양을 북한 수도로 결정한 사람은 치스차코프로 알려져 있다

 

  모스크바 거주 레베데프씨가 제공한 사진 내용물 중 소련군정과 북로당 간부들...
<지도자 김은 스티코프가 주도한 소련군 극동사령부 작품이었다 1946년 8월 30일 소련군정 지도부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을 합당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한 후 당 고위간부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쪽에는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뒷 줄 오른쪽에는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등>

소련공산당과 소련군이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6일부터 진주하여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그리고 1948년 10월 19일부터 철수하여 1948년 말까지 철군했다 

 

-한국전쟁 남침은 노동당 계열 내부 대남 강경파 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복조선분국 김일성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박헌영) 계열 주도로 추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 부대 또는 저격여단) 등 이다[빨치산부대를 소련에서는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공수부대로 표현하고 있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전선사령관 김책[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총참모장 강건[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조선의용대 중국 팔로군 출신]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을 임명했다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는 다음과 같다

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소련 육군 극동사령부]은 스탈린 부대(일국 사회주의노선, 자국사회주의 성향 사회주의(민주사회주의) 그룹]이며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은 모택동부대[신민주주의 노선, 인민민주주의 그룹],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은 레닌부대[공산주의 노선, 마스-레닌주의 공산당 그룹]이다

 

 

-스탈린의 한국 전쟁 개입

1949 3 5, 북한의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인민군이 남한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남한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 12월 남한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남한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1950 1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북한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남한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1 30, 스탈린은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4,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공(중국 공산당)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5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공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1950 6 25일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했다. 1949년 갑자기 남한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 것을 언급하며 혹시 모를 미국과 자본주의 진영의 함정이라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그러나 무려 48회에 달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끝까지 남침을 고집한 탓에 스탈린이 이를 허락했는데 그렇게 발발한 한국 전쟁은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스탈린은 공식적으로는 한국 전쟁 관여를 부인하였지만 포스트 냉전 시대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스탈린의 명시적 허가와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무려 48번이나 시도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시한 입장은 아니고 김일성이 남침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해서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 김일성이 남침을 끈질기게 고집했을 때 스탈린은 애초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제관으로 임명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김일성에게 한반도 북부의 통치를 책임지게 한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김일성이 파견되자마자 한반도 북부지역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이후였기 때문이였다.

 

한국 전쟁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던 그는 뇌질환과 중풍 증세로 손과 발을 쓰는 것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고 체력이 소모되었음을 알고는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의심과 망상증세가 한층 강화되었다. 모스크바와 소련의 대도시에는 오직 스탈린 자신만이 리모콘과 장비로 열 수 있는 건물이 건립되었는데, 그 건물들에는 같은 모양의 방이 여러 개가 있어 아무도 스탈린을 쉽게 찾기 어려운 구조였다. 또한 그는 비행기와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장거리 여행도 열차로 했다.

 

-모택동의 한국전쟁 개입에 대한 후회

1950년 한국전쟁 기간부터, 친소련파였던 김일성으로는 북한에 영향력을 미치기 어렵다고 본 마오쩌둥(모택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 김두봉, 김무정 김원봉등의 조선의용대(독립동맹-모택동의 신민주주의와 중국 공산당 계열)을 통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그러나 이들과의 교류는 김일성에 의해 차단된다.

그는 1948년에 이미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고려 공산당 계열) 박헌영을 통해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영향력 행사를 기도하였으나,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은 김일성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수반으로 낙점한다. 한국전쟁 기간 중 그는 김일성의 견제세력으로 박헌영과도 연결을 시도했는데, 박헌영을 김일성의 대안으로도 고려했다. 1953년부터 1955 8월 종파 사건으로 북한의 남노동당원들이 대규모 감금, 체포, 처형당했을 때 그는 북한 외무성을 통해 압력을 넣어 박헌영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김일성의 박헌영 처형 의지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전쟁 중 국군과 유엔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김일성은 북한 인민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중공군과의 상의도없이 멋대로 북한 인민군을 후퇴시켜 결국 중공군은 유엔군의 기습으로 막대한 인명피해와 보급 손실을 받았다. 마오쩌둥(모택동)은 그 소식을 듣고 분노하였다. 그후 북중 관계는 악화되었다. 1975년 김일성은 베트남 공산화와 남한 박정희 유신정부 혼란으로 남침을 할 수 있는 국내외 상황의 기회로 보고 마오쩌둥(모택동)에게 찾아가 다시 한국전쟁을 일으키려 했지만 마오쩌둥(모택동)은 거절하였다. 이유는 1972년 마오쩌둥은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고백을 했고 김일성은 매우 무례하고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망나니놈이라고했고 북한에 군대를 파병보내 김일성과 북한을 도운 것을 후회하였고 한국(남한)이 통일되게 나뒀어야 했다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남북통일이 군사력보다는 신민주주의(민주화) 입장에서 남북통일을 지지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은 남북통일을 개인 우상화와 자주노선 국가사회주의 성향 군사력에 치중함으로 남북 주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남한 제6공화국 수립이후 남한정부 주도 민주화 정책으로 남북통일을 주도하고 있으며 남북 주민들이 지지하고 있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인민의(民有,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그리고 쿠바 등 4 개국에 불과하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hwp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hwp

 북한헌법.hwp

 

좋은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 The Death of Stalin!)"

권력을 향한 싸움이 시작된다

1953년 소련의 절대 권력자 스탈린이 갑작스럽게 쓰러진다.

권력을 향한 치열한 암투가 시작되고

스탈린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운명의 날은 밝아온다.

 

 

 

 

 

 

 

 

독재자와 그의 사후 권력을 잡기 위한 쟁탈전에 폭소가 터진다.

오는 18일 개봉하는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 1953년 소련의 절대 권력자 스탈린이 갑작스럽게 쓰러진 후 그의 장례식날까지 권력을 향한 암투를 벌이는 측근들 이야기를 유쾌하게 담았다

영화 첫 장면, 교향악 연주를 생중계하는 방송국으로 스탈린의 전화가 걸려온다. 17분 뒤 전화하라는 스탈린은 방금 생중계된 교향악 연주의 녹음본을 자신에게 보내라는 명을 남긴다. 그러나 연주는 녹음되지 않은 상태. 방송국 직원은 벌벌 떨며 퇴장하려는 교향악단과 관객들을 다시 붙잡아 다시 연주를 시킨다.

같은 시각, 스탈린의 내무인민위원회(NKVD)는 무작위로 사람들을 체포한다. 이 과정에서 쓰러진 지휘자를 대신해 불려온 또 다른 지휘자는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이처럼 초반부터 영화는 절대권력의 근거 없는 폭력성을 코믹한 방식으로 그려낸다.

그러던 스탈린이 갑작스럽게 죽고, 권력은 비밀경찰의 우두머리인 베리야(사이먼 러셀 빌)에게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례식을 기점으로 권력 중심은 흐루쇼프(스티브 부세미)에게 이동한다. 이는 영원한 절대권력이란 없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흐루쇼프 역시 이후 브레즈네프한테 실각한다.

무작위로 사람들을 데려가 총살한 스탈린이지만, 인민들은 스탈린 장례식에 줄지어 와 참배하는 것도 아이러니다.

극 중 사건들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지지만, 이는 대부분 실화라고 한다. 초반 녹음이 되지 않아 다시 연주되는 교향악 연주도, 경비병들이 스탈린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무서워했기 때문에 제때 발견되지 않아 소변을 질질 흘린 상태로 발견된 것 등은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이다.

1950년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실존 인물들을 다루지만, 배우들은 모두 영어로 연기한다. 유럽 대륙의 시대극에 영어권 배우들이 출연해 영어로 연기하는 일은 흔히 있지만, '스탈린이 죽었다!'에서는 이것도 블랙코미디 요소로 십분 활용한다. 스티브 부세미가 연기한 흐루쇼프는 미국식 억양의 영어를 쓴다.

파비안 누리와 티에리 로빈의 그래픽 노블 '스탈린의 죽음'과 그 후속작 '2-장례식'이 원작으로, '인 더 루프', '' 등을 연출한 아르만도 이아누치 감독이 연출했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그를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스탈린은 러시아 등 구 독립국가연합의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의 하나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들이 스탈린을 독일을 물리친 강력한 서기장으로 기억하고 있는 점도 스탈린이 영웅대접을 받는 이유다

 

                                                                                         1919년 스탈린, 레닌, 칼리닌

 

 

1.아르메니아 2.아제르바이잔 3.벨로루시 4.에스토니아 5.그루지야 6.카자흐 7.키르기스 8.라트비아 9.리투아니아 10.몰도바 11.러시아 12.타지크 13.투르크멘 14.우크라이나 15.우즈베크..

소비에트(сове́т)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농민·인민들의 민주적 자치 기구이다. 소비에트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를 뜻한다. 1905 10월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창설되었으며 이후에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자주적인 소비에트가 설립되었다.

1917 3월에 일어난 러시아 2월 혁명 당시에는 노동자 소비에트와 농민 소비에트 간의 연합 세력이 형성되었고 혁명 이후에 탄생한 러시아 임시 정부에서 소비에트가 실권을 잡았다. 1917 11월에 일어난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정권을 잡았다. 이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은 소비에트 러시아가 되었고 1922년 소련(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소련)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자발적 협회의 기초 위에서 형성된 연방국가이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The Russian Soviet Federated Socialist Republic)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Ukrai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벨라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Byeloruss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Azerbaidjan Soviet Socialist Republic)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Georg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Arme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Turkmen Soviet Socialist Republic)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Uzbek Soviet Socialist Republic)

타지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Tadjik Soviet Socialist Republic)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azakh Soviet Socialist Republic)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irghiz Soviet Socialist Republic)

카렐로-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arelo-Finnish Soviet Socialist Republic)

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Moldav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Lithua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Latv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Esto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hwp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전제정치) 사회주의 국가이다

 

                                                                          카이로회담에 참석한 장개석, 루즈벨트, 처칠(1943)

 

                                                                            1945 2, 얄타 회담에 모인 수뇌들 (좌로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1945 7 25. 포츠담 회담.

 

                                                    포츠담 회담  앉은 사람 왼쪽 부터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 소련 스탈린

베트남의 호찌민은 그를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스탈린은 러시아 등 구 독립국가연합의 젊은이들이 열광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의 하나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들이 스탈린을 독일을 물리친 강력한 서기장으로 기억하고 있는 점도 스탈린이 영웅대접을 받는 이유다

 

                                                    테헤란 회담(Tehran Conference)에서 왼쪽부터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의 모습

 

 

1949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70회 생일 기념식에 참가했을 때 촬영된 사진. 왼쪽부터 마오쩌둥의 러시아어 통역관 스저, 마오쩌둥, 소련 국방장관 니콜라이 불가닌, 스탈린, 동독 부수상 발터 울브리히트, 몽골 인민 혁명당 서기장 욤자깅 체뎅발이다

 

 

 

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전제정치) 사회주의 국가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이오시프 스탈린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1878 12 18 ~ 1953 3 5)은 러시아의 정치가, 공산주의 운동가 · 노동운동가이자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정치인·작가·시인, 언론인이다. 1924 1 21일부터 1953 3 5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권력자였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조지아(그루지야) 출신으로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를 꿈꿨으나, 공산주의 혁명 사상에 감화되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공산주의 운동가·노동운동가가 되었다.

 

1924 4 3일부터 1953 3 5일까지는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을 지냈다. 1941 5 6일부터 1945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총리를 지내고 1945년 다시 총리에 재선되었으며 1941 7 19일부터 1947 3 3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국방상을 겸하였다. 1945 6 27일부터 1953 3 5일까지는 소련군 대원수였다.

 

2차 세계 대전 이전인 1939년에는 나치 독일과의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독일이 1941년 침공하여 발발한 독소전쟁 초기에는 제대로 된 군사정책을 발휘하지 못하여[,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위협받았으나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를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켜, 결국 독일군의 항복과 함께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철저한 정적 숙청과 동지들마저 반혁명 혐의로 숙청하여 그의 자위를 확고히 했다. 경제발전과 계속된 승전 등의 성과를 바탕으로 철저히 우상화되었으나 죽음 이후,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강력한 비판을 받고 격하당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공산주의 변질과 정적 숙청을 자행한 독재자로 평가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사람들이 삶이 어려워지고 국가 위상이 곤두박침에 따라 스탈린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집권 이전에는 '선생님'이라는 애칭이 있었으나, 집권기간 중 스탈린은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조직자',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서 찬양을 받았고, 한때는 러시아 정교회의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로도 불렸다. 사후에는 공산주의를 변질시킨 독재자로 재평가받고 '조지아(그루지야)의 인간 백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의 수많은 가명 중 하나인 '스탈린'이라는 가명은 '강철'을 뜻하며, 트빌리시 신학교 시절의 필명으로 쓰던 것이 굳어져서 본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스탈린의 본래 이름은 조지아어로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조지아어: 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러시아어: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Джугашви́ли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이며, 소소(조지아어: სოსო)는 그의 초명인 동시에 애칭이었다.

   

1.초기생애

(1)출생과 가정 배경

스탈린은 1878 12 18일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이던 조지아(그루지야)의 고리에서 구두 제화공과 신기료 장사를 하던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슈빌리(조지아어: ბესარიონ ჯუღაშვილი)와 재봉사이던 어머니 에카테리네 겔라제(조지아어: ეკატერინე გელაძ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스탈린 전기의 저자인 로버트 서비스에 따르면 1938년 소련에서 출판 된 스탈린 전기는 그의 생애를 1879 12 21일로 표기해 놓고 있으나, 그가 그루지야에 가서 문서를 확인해 본 결과 그의 출생일은 1978 12 18일이라고 한다. 알콜중독자에 술주정꾼인 아버지 베사리온을 두었던 그는 어린 시절 무자비한 구타, 폭행을 겪으며 자랐다.

 

아버지 베사리온은 불같은 성격이었으며 경제적으로 무능력하였다. 베사리온은 구두 장사가 잘되지 않자 알콜중독에 걸려 계속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어머니 에카테리네는 아버지 베사리온에게 수시로 폭행당했는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 분개한 스탈린은 아버지에게 대들며 칼을 던졌다고 딸 스베틀라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이후 아버지의 보복을 두려워 겁을 먹었던 스탈린은 아버지의 화가 풀릴 때까지 이웃집에서 머물렀다

 

(2)유년기

7(1886)에 그는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천연두를 손과 바늘로 짠 탓에 그의 얼굴은 곰보가 되었다. 후에 소련의 사진들은 스탈린의 천연두 자국을 모두 편집, 삭제하였다.

 

기억력이 좋고 영민했던 그는 독서와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체력이 강했다 하나 약체에 발육부진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엄청난 의지력을 가졌던 그는 일찍부터 본심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는 법을 터득했다. 또한 피의 복수를 하는 캅카스인의 전통대로 자기를 모욕한 자들에 대한 장기적인 복수를 꾀하는 데 있어 아무에게도 꺾이지 않을 집념을 키워 나갔다. 아버지를 경멸하고 증오했던 그는 주변의 친구들과도 원만하게 어울리지 못했다. 오직 독서만이 그의 외로움을 달래는 길이었는데,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던 어머니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신앙심 깊고 영리한 스탈린은 어머니의 기대와 바람대로 10(1889) 때 교회 소학교에 입학했다.

 

(3)학창 시절

스탈린은 일찍부터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하였다. 1888(9) 그는 교회 소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구두공장에 취직한 아버지가 어린 스탈린을 강제로 구두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하였다. 어머니는 지역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하여 구두 공장에 찾아가 아들을 되찾아왔다. 어머니의 기대와 노력 덕에 스탈린은 성직자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 교회 학교들은 조지아 민족들에게 러시아인이 되는 교육을 강요하였다. 스탈린은 교육 과정과 수업 내용에 대해 강한 반발과 교사들, 제도에 대한 반항심을 갖게 되었다. 12(1891) 2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당하였다.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이후 스탈린은 왼쪽 팔이 영구히 불구가 되었고, 청년기 때는 병역도 면제될 정도였다. 발육부진으로 키는 160cm를 약간 넘었다. 스탈린은 고리 시내에 있는 교회학교에서 러시아어를 배웠고 외부에서는 러시아어를 사용했다. 그의 러시아어는 약간 불완전하여 항상 후음성의 조지아어 액센트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집에서는 조지아어만을 사용하였다. 1894(15) 초 스탈린은 최고 성적으로 종교학교를 졸업하였다.

 

 

 

                                                                                                                                 1894년의 어린 스탈린

1894 15살에 그는 장학금을 받고 조지아의 트빌리시에 소재한 트빌리시 신학교에 입학하였다.[4] 트빌리시 신학교는 조지아 정교회에서 운영하는 신학교였다. 트빌리시 신학교에서 스탈린은 성직자 교과목 외에 문학과 역사, 라틴어, 수학, 그리스어 등 폭넓은 교육을 받았고, 성적은 우수하였다. 트빌리시 신학교 1학년 재학 중 스탈린은 지역 신문에 시를 발표했는데, 그루지아 문인들과 지역 유지들을 감동시켜 격찬을 받았다. 그가 시에서 다룬 주제는 대지와 자연, 민족정신 등이었다.

 

신학교 2학년 이후 그는 조지아를 지배하고 있는 러시아에 반감을 가지고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 러시아인을 만드는 교육을 강요하는 스승들과 마찰이 잦았다.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 플레하노프, 블라디미르 레닌 등의 공산주의 서적을 접하면서 종교와 민족보다는 마르크스주의를 중시하게 되었다. 동시에 제국주의와 종교적 질서에 대한 혁명을 꿈꾸게 되었다. 가정 환경이 어려웠음에도 재학 중 성적이 우수하여 장학금을 받았다.

 

신학교 성적은 좋은 편이었으나, 재학 중 그는 국제 공산주의의 최고 이론가인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이 쓴 저서와 다른 금서들을 비밀리에 탐독하다가 신학교에서 그는 불량 학생으로 낙인찍혔고 비밀 결사조직인 '메사메 다시(조지아어: მესამე დასი)'에 가담하기도 했다. 신학교 졸업 전 해인 1899년 말 스탈린은 기말고사 시험을 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티플리스 신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당시 신학교의 문서에는 그가 수업료를 낼 수 없어서 퇴학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에서 세계를 다르게 해석하는 방식을 발견하여 미련 없이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고 혁명가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혁명 활동을 하다가 퇴학 처분을 당하였으나,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했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몸이 쇠약해져 중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사제가 되기를 바랐으나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어머니의 뜻을 저버렸다. 신학교를 떠난 직후 스탈린은 레닌의 저작과 관련 서적들을 폭넓게 읽었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4)노동활동과 혁명에 투신

1899 12월 스탈린은 트빌리시 천문대에 채용되어 천문대 서기로 수개월간 근무했다. 트빌리시 천문대의 공무원은 그가 정치 이외의 분야에서 월급을 받고 일한 유일한 직업이라 한다. 그가 육체 노동은 전혀 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조지아의 유대인 재벌인 로스차일드 일가가 소유한 정유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1900(21) 지하 정치운동에 가담하고, 지하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00년부터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며 그는 캅카스 지방의 주요 공단 지대에서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을 선동했지만, 스탈린은 탁월한 언변으로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웠다. 스탈린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워 경찰과 유혈 충돌을 벌이게 하는 데 지나치게 열성을 보이면서 동료 공산주의 혁명가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했다. 그는 인간을 도구로 이용하려 든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제국 정부의 탄압으로 이러한 비난은 조직 내부의 단결을 저해한다는 논리로 대응한다.

 

                                                                                                                                          20대 초반의 스탈린

이후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 혁명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였고, 그가 존경하고 탐독하던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났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멘셰비키파와 볼셰비키파로 분당하게 되자, 스탈린은 보다 혁명운동에 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었던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이후 러시아 제국의 비밀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1902 4(23)부터 1903 3(24)까지 스탈린은 혁명 활동을 하다가 7번 체포되어 투옥과 추방을 되풀이했다. 1902년에서 1903년 무렵 연인 에카테리네 스바니제(조지아어: ეკატერინე სვანიძე)를 만났는데, 스바니제는 러시아 육군 군복제조사 미싱공으로 일하였다. 시짓기와 작문 재주가 탁월했던 스탈린은 연인에게 잘 보이려고 노래를 부르고 시도 읊었다고 한다. 1903년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당에 정식으로 입당했고, 곧 차르의 비밀경찰의 추격을 받았다.

 

                                                                                         첫 부인 에카테리네 스바니제

 

   

2. 혁명활동

(1)볼셰비키 지도자

1903년말 스탈린은 캅카스 지역 볼셰비키의 주요 인물이 되었으며, 전업혁명가로서 여러 비합법적인 혁명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런 활동에는 파업 선동, 정부 비판, 사회 부조리 지적, 민병 조직, 민중 선동뿐 아니라 자금확보를 위한 은행강도, 반대파 요인 암살, 테러, 몸값 납치 같은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1905년 핀란드 탐페레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정책 결정 회의에 참석하였고,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정책 결정 회의에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참석했지만 회의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1905년 무렵 스탈린은 조지아 볼셰비키의 지도자가 되었다. 조지아 볼셰비키의 지도자가 된 그는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논쟁하고, 각종 시민사회 단체들을 조직하였다.

 

1905년 그는 동료에게 은신처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고 거기에서 첫사랑 에카테리네 스바니제(애칭은 카토)를 다시 만났다. 1906년 스톡홀름 회의에 참석했다.

 

스바니제와의 꾸준한 교제 결과 스바니제의 마음을 움직여 1906 7월 스탈린은 스바니제와 결혼하였고, 후에 아들 야코프를 얻었다. 신혼여행도 없고 미래도 불투명했지만 마냥 행복했다. 스탈린의 한 혁명 동료는 신혼 초기의 스탈린에 대해 혁명에만 몰두하던 그가 아내에게만은 부드럽고 세심하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가난과 외로움으로 고생했던 예카테리나는 결국 병이 들어 사망했다. 아내 카토가 고생하며 늘 그가 경찰에 붙잡히지 않기만 기도한 것을 전해들은 그는 크게 상심하였다. 그는 "첫 아내의 죽음 이후로 나는 모든 인간성을 버렸다."란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곧 1907년 스탈린은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정책 결정 회의에 참석했다.

 

(2)조직 확장 노력

그는 볼셰비키 조직 확장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른 새벽부터 자정까지 인쇄물과 홍보 팜플렛을 다량으로 인쇄하여 도심에 뿌리고, 각지를 다니며 홍보와 연설, 강연 등을 통해 볼셰비키가 민중을 구제하기 위한 집단임을 선전했다. 이는 비가 오거나, 대량 폭설로 교통이 막히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러시아 각지를 순행하는 것으로 열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선전, 홍보 등으로 인력과 조직을 끌어모으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1907 6 25(음력으로는 6 12) 스탈린은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티플리스 시내에서 대규모의 수송방해작전을 획책하는 데 기여했다. 은행 강탈은 성공하여 대량의 현금을 확보했고, 며칠 뒤 가족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 바쿠로 피신했다.

 

1903년부터 그가 시베리아로 망명하던 1913년까지 스탈린은 볼셰비키 세력 확장을 위해 노력했다. 전국에 지하당을 조직하고 당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담한 강도 행각도 서슴치 않았다. 계속 성공에 성공을 거듭한 스탈린의 은행강도 행각은 농촌과 중소 도시 은행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의 대도심의 대형 은행과 현금 수송 차량까지도 성공적으로 탈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여러 번 체포되었는데, 그때마다 탈출에 성공해 전제 러시아의 비밀경찰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호송 차량에서 뛰어내려 도망치기도 했고, 경찰과 격투를 벌여 때려눕히고 도주하기도 했다. 스탈린의 현상금을 내걸은 포스터가 걸리기도 했지만 역시 그는 체포되지 않고 각처를 은신해 다녔다.

 

                                                                              체포 후 교도소에서 촬영한 사진(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여러 번 탈출에 성공한다)

 

 

(3)첫 아내와 사별, 성격의 변화

첫 아내 스바니제와의 비극적인 사별은 스탈린의 냉혹하고 난폭한 성격을 한층 더 강화시켰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이 정치 자금 확보를 위한 은행 강도를 금지하자, 스탈린은 이에 항의하여 잠시 사임하였다. 이후 현금수송차에 대한 대규모 강탈을 지휘하였는데, 이때 40여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스탈린은 다시 바쿠로 도피했는데, 여기서 1908 12월 부인 스바니제가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하였다.

 

냉혹한 혁명가가 되기 전 그는 매력적이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청년이었다. 에카테리네 스바니제에게 잘 보이려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시도 읊었다. 바보 연기로 주변을 웃기기도 했다

 

결혼한 지 16개월 만에 아내 스바니제가 트빌리시에서 발진티푸스로 숨지고 말았다.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스탈린은 급히 아내에게 달려왔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숨을 거뒀다. 스탈린은 아내의 눈을 감겨준 뒤 끌어안고 오열하다가 결국 실신했다. 그는 직접 관을 준비해 아내의 장례를 치렀다. 어머니 겔라제의 일기에는 스탈린은 아내의 장례식이 있던 날 그 자리에서 오열하다 실신했다고 한다. 첫 아내인 스바니제의 비극적인 죽음은 스탈린의 냉혹한 성격을 더욱 강화시켰다. 스탈린은 술에 취하면 곧잘 병중인 스바니제를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을 동료들에게 곧잘 털어놓기도 했다. 그녀가 죽자 스탈린은 심히 오열했는데 어머니 겔라제 역시 그가 그렇게 슬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는 내용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해두기도 했다.

 

스바니제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야코프는 1920년대 말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했는데, 스탈린은 그를 약골이라고 부르면서 경멸하였다. 스바니제를 잃고, 바쿠에서 체류하며 스탈린은 아제르바이잔인과 페르시아인 무슬림, 수백명의 흑인들까지 포섭, 게릴라 단체를 조직하여 파르티잔 운동을 시작했고, 노동자 파업과 각종 집회, 선전 선동을 기획하였으며 많은 수의 러시아 차르의 지지자들을 살해하는 등 파르티잔 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몸값 납치, 강도, '보호료' 뜯기, 위조 화폐 제작 등의 범죄적인 활동으로 자금을 확보하였다.

 

(4)체포와 피신, 언론 활동

스탈린은 결국 경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에 7번이나 추방되지만 마지막 세 번을 제외하면 그때마다 탈출하였다. 그러나 그가 받은 형량 선고가 가벼운 데다가 번번이 쉽게 은신하고 도피했기 때문에, 동료 공산주의혁명가들로부터 '제국경찰의 보수를 받는 프락치'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1912 2월 당시 러시아 국외에 체류중이던 레닌이 멘셰비키파와 최종적으로 결별한 볼셰비키당을 조직하면서, 1차 중앙위원회에 그를 신입 위원으로 선출하였다.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그는 볼셰비키당 내에서 주목받게 되었다.

 

1912 4월 스탈린은 풀려나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서 잡지 프라우다를 창간하였다. 평소 과묵하고 그다지 말주변이 없는 스탈린은 당의 공식 신문인 프라우다의 초대 편집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강철의 인간'이라는 뜻인 "스탈린" {스탈(стал)은 러시아어로 강철을 뜻한다.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반격 암호로 쓰이기도 했다.}이라는 가명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 이름으로 당의 출판물에 기고하고, 언론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제국 경찰의 체포령이 떨어졌을 때 기민한 피신과 체포 뒤에도 성공적으로 탈출하는 것에 대한 당내 첩자 의혹, 제국 비밀경찰 의혹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런 의혹 속에서도 레닌은 1912년 스탈린을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하도록 승격시켰다. 레닌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의 후광 덕에 스탈린에 대한 각종 의혹은 해소되거나 서서히 묻혀져갔다. 그러나 뒤에 레닌은 임종 직전 자신의 스탈린 후원을 크게 후회하였다 한다.

 

스탈린은 프라우다를 간행하면서 각종 학술 용어 보다는 지역과 하층민들이 두루 읽을수 있도록 비전문 용어와 지역지부에서 간행되는 신문에는 지역 방언의 활용 등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의 마케팅 효과는 성공을 거두어 프라우다의 구독, 배달은 타타르와 중앙아시아까지 확장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탈린은 징병대상자가 되지만, 12세 때 당한 교통사고로 인한 왼쪽 팔의 장애 때문에 병역 면제되었다.

 

 

3.정치 활동

(1)망명과 귀국

1913년 스탈린은 시베리아로 망명하였으며, 이후 각지를 전전했다. 이 기간 중 그는 황실과 귀족에 대한 적개심과 원한을 키워나갔다.

 

                                                                                                                         이오시프 스탈린 (1915년 무렵)

 

1917 3월 니콜라이 2세가 제위에서 퇴위된 후에야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17 2월 혁명이 벌어져 제정이 무너지고 케렌스키의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당시 스탈린은 차르 니콜라이 2세를 비롯한 황제의 가족은 물론 황족들을 사형에 처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차르와 그 가족의 처형에는 일부 공감하였으나, 귀족과 황족까지 처형하는 것을 놓고는 케렌스키의 임시정부, 그리고 볼셰비키에서 조차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를 망설이며 주저하였다.

 

3월 초 스탈린은 처음에는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를 반대하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를 프라우다의 편집에서 추방하였다. 그러나 곧 4월의 당 회의에서 레닌의 견해를 듣고 그의 '4월 테제'를 재빨리 지지하였고, 입장을 바꾸어 임시정부를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볼셰비키 당원 중 앞장서서 혁명으로서 임시정부를 접수하고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하였으나, 블라디미르 레닌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서서히 장악하자며 만류하였다.

 

(2)10월 혁명과 공산주의 국가 수립

1917 4월에 스탈린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임시정부에 의해 체포령이 내린 레닌이 해외로 도피하는 것을 돕기도 하고, 유혈극을 피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포위된 볼셰비키 당원들에게 항복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레닌은 핀란드로 피신시키고 스탈린은 혁명의 혼란기에 일시적으로 숨어 있었다. 1917 3 25일 시베리아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온 스탈린은 프라우다의 편집 책임을 다시 맡았다.

 

스탈린은 레닌이 없는 볼셰비키 당을 지도하면서 위태로운 순간을 넘겼으며, 불안정한 권력을 승계한 중산층 자유주의자들의 임시정부에 볼셰비키가 협조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의 영향을 받아 스탈린은 임시정부에 대한 협조적 의사를 번복, 볼셰비키당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보다 호전적인 생각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한편 스탈린은 제정의 압력을 피해 핀란드에 출국중이었던 레닌의 귀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결국 돌아오게 하였다. 한편 10월 임시정부는 독일군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위협하자 체포되었던 볼셰비키 당원을 석방시켜 방위전에 참가시키려고 하였다. 볼셰비키는 이를 이용하여 임시정부를 전복할 혁명을 꾸몄다. 레닌, 레프 트로츠키, 스탈린을 비롯한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스모르니 학원에서 열린 회의에서 이를 가결하였고 11 7(율리우스력으로는 10 25) 케렌스키가 전선을 방문한 틈을 이용하여 실행에 옮겼다. (10월 혁명) 이는 별다른 희생 없이 성공했고, 11 8일 임시정부 각료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1917 11월 당시, 11월 혁명이 일어났을 때 스탈린은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했지만, 레프 트로츠키의 역할만큼 눈에 띄지 못했다. 트로츠키는 이후 그의 최대 라이벌로 성장했다.

 

(3)내전 기간 중 (1917-1919)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집권한 직후, 스탈린은 인민위원회 내무인민위원(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17년 인민위원회 인종문제담당 인민위원(인종문제담당 장관)을 겸임하였다. 곧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세력(하얀 군대)이 일어나 러시아 내전이 개시되었다. 레닌은 5명으로 구성된 볼셰비키당 정치국을 신설하였으며, 여기에는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포함되어 있었다. 레닌은 스탈린을 볼가 강변의 차리친 시의 수비를 위해 보냈고, 1918 5월 차리친에 도착했다. 스탈린은 붉은 군대의 유력 지휘관이었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세묜 부됸니와 친구가 되어 군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당시 국방인민위원을 맡아 붉은 군대를 총지휘하고 있던 트로츠키의 정책에 자주 반대했다. 내전 중 스탈린을 포함한 붉은 군대 지도자들은 승리를 위해 잔인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작농을 협박하여 식량을 강탈하는가 하면 식량징발에 반발하는 마을을 불태우도록 했고, 서부 전선에서의 대량 탈영을 막기 위해 탈영자들을 공개처형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레닌과 함께 한 스탈린 (1919)

 

1919년 스탈린은 국가정보통제담당 인민위원(보안담당 장관)에 임명되어, 인종 문제 담당 인민위원과 국가 정보 통제 담당 인민위원을 겸임하였다. 그해 스탈린은 옛 공산당 동료의 딸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러시아어: Наде́жда Серге́евна Аллилу́ева, Nadezhda Alliluyeva)와 재혼했다. 시를 짓는 재주가 있던 그는 평소 냉정한 합리주의자였으나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와 연애하면서 갑자기 낭만주의자, 낙천주의자로 변신하여 동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는데, 스탈린은 크렘린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

(4)소련-폴란드 전쟁(1920-1921)

소련 내전이 마무리될 무렵, 볼세비키는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독립한 폴란드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폴란드-소비에트 연방 전쟁) 스탈린은 남부 전선의 사령관으로서 폴란드의 도시인 리보프를 향한 공세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레닌과 트로츠키는 더 북쪽에 있는 바르샤바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트로츠키는 바르샤바 전투에서 폴란드 지휘관 부아디스와프 시코르스키의 군대와 교전했다. 그러나 리보프에 있던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지원하는 것을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트로츠키와 스탈린 모두 후퇴하여 리보프와 바르샤바는 모두 점령하지 못했고, 스탈린은 비판에 직면하였다. 스탈린은 1920 8월 모스크바로 돌아와 자신을 변호하고 군사지휘를 사임하였다. 9 22일 제9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는 공개적으로 스탈린을 비판하였다. 1923년 인종문제담당 인민위원직과 국가통제인민위원직을 사퇴했다.

 

후에 스탈린은 1920년의 실패를 가져온 이들에게 철저히 복수했다. 그리하여 후에 자신을 비판한 트로츠키를 암살하고 1939년 나치와의 협정을 통한 폴란드 침공으로 르보프를 소련영토로 만들고 그때 포로로 잡은 폴란드 군 장교들을 대규모로 처형하였다. (카틴 숲의 학살). 후에 연합국의 수뇌부가 모인 얄타 회담에서도 리보프는 전후에도 반드시 소련영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전위대를 잘 조직했던 그는 트로츠키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등 사적인 조직 업무에 관심이 없는 라이벌들의 헛점을 공격하며 당내 입지를 굳혀 나갔다.

 

1921년부터 소련의 국가 원수인 레닌이 병석에 누워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정책을 추진하면서 병든 레닌의 의사를 무시하고 능멸하였다. 레닌은 죽기 1년 전 스탈린을 서기장직에서 해임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유언'을 썼는데, 이는 레닌 사망 직후와 스탈린 자신의 사망 직후에 스탈린을 비판하기 위한 자료로 널리 선전되었다

 

 

4. 집권 기간

 

                                                                                  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

 

(1)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의 폭력적 정치수단, 지나친 러시아주의 그리고 관료주의적 성향은 스승인 레닌에 의해 비판받기도 하였다. 레닌은 특히 그의 유명한 유언장에서 "스탈린에 최고 지도자 자리를 주지 말라."고 할 정도로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으나, 1924년에 이르러 이미 거의 모든 내부 정치 조직체는 스탈린의 지배권하에 들어갔다. '레닌의 유언'문서는 레닌이 친필로 직접 작성한 것이라 스탈린의 당내 지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지만, 스탈린은 용의주도함 때문에 레닌의 유언을 은폐하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평가절하시킬 수 있었다. 1920년대 말에 스탈린은 레닌 이후 소련 공산당의 두뇌로써, 국제 공산주의 혁명을 주장하던 레온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다.

 

                                                                                                                      레닌 장례식 때 스탈린

1924 1 21일 레닌이 죽은 후 스탈린은 그를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뒤 준()비잔틴식으로 우상화했다. 레닌주의의 대제사장이 된 스탈린은 경쟁자들을 축출한 후 최고권력자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자신의 우상화도 함께 추진했다. 1925년 차리친 시를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로 개명하였다.

 

경쟁자 이전에 견해가 달랐던 트로츠키와는 수시로 충돌했는데, 국적과 국경을 초월한 국제 노동자, 무산자 연대를 통해 전 세계의 공산주의화를 이룩해야 공산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맞서 그는 소련 단독으로도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고, 한 국가를 공산주의화 시킨다는 일국공산주의론을 확립했다. 권력투쟁 과정에서 스탈린의 용의주도함과 치밀함을 간파하지 못한 트로츠키는 망명하였다.

 

한편 이론가 빅토르 세르주는 강화되어 가는 스탈린의 독재를 비난했다. 빅토르 세르주는 스탈린주의자들로부터 트로츠키파로 분류되기도 했다. 1928년 강화돼가는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한 이론가 빅토르 세르주를 공산당에서 출당하고 5년 뒤에는 투옥시켰다.

 

(2)집권과 군부 장악

집권 직후 스탈린이 집단화와 산업화, 중공업을 통한 경제발전을 선언하자 소비에트 연방 사회 일각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우파 자본주의 세력은 레닌의 죽음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공산주의 정권을 타도할 계획을 세운다. 정보원들을 통해 자본주의 세력의 움직임을 간파한 그는 우파 인사들의 집회장소를 급습하여 체포, 숙청한다. 또한 1924년부터 레닌의 유지 계승, 트로츠키파 지지자에 의한 스탈린 암살 비밀조직들이 비밀리에 조직됐다가 적발되면서 스탈린의 의심과 분노는 한층 극에 달하게 된다.

 

1925년 이후부터 반대파 인사에 대한 가혹한 숙청이 계속되었고, 1930년 이후에는 그의 반대파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또한 그는 소련군 내부의 장군급 인사를 단행한 뒤, 군 장군을 숙청한다. 특히 1937 6월까지 비밀재판을 통해 투하체프스키와 스베친, 트리안다필로프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스탈린 체제에 위협하는 인물로 인식되어 숙청되었다. 이들은 모두 소련군의 군사전략가들이었는데, 이들의 숙청과 동시에 스탈린은 작전술에 대한 연구를 금지시켰다. 이들 소련군 초기 군사연구가들의 작전술은 스탈린이 죽고난 뒤에야 재개된다. 장군들을 숙청, 처형시킨 후 스탈린에게 충성을 맹세한 새로운 장교들을 장군으로 승진 발탁한다.

 

투하체프스키와 스베친, 트리안다필로프와 그의 동료들 등 소련군 초기 핵심 군사이론가들에 대한 처형과 숙청, 장군들에 대한 숙청 등은 그들이 만들고 연구했던 보고서와 군사이론서들까지도 반민중적 불온사상으로 규정되어 금서가 되었으며, 그들의 이론들은 토론과 적용조차 금지되었다. 그러나 핀란드 침공작전의 실패와 2차 대전 초기의 독일의 기습공격과 모스크바까지 패퇴하는 참담한 결과를 불러온다. 이들의 이론을 활용하지 못한 점이 패퇴의 원인이라는 견해가 나타나면서 기갑, 기계화 부대를 통한 작전술 이론의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었으나 스탈린의 연구 금지와 의심으로 아무도 공식적으로는 이를 언급하지 못했다.

 

그는 중견 장교들과도 꾸준히 면담했는데, 이는 그들을 통해 장군들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1938년까지 대략 2백만 명 정도를 숙청했고, 이 중 20만 명 정도는 해외 유학파, 당 중앙위원과 현역, 예비역 군 장군, 기술관리들을 포함한 고급인력들이었다. 이후 그는 내부에서 적을 만들고 그 적을 숙청하여 권력을 공고히하고 측근과 군부의 충성심을 유도했다

 

(3)경제 개발 정책

1928년 스탈린은 시장경제를 부분 수용했던 레닌의 준 자본주의적인 신경제정책을 버리고, 국가가 직접 기간산업을 관리하는 국영산업화 정책을 채택하여 일련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 추진했다. 기간 산업을 국영화함과 동시에 경제 정책을 국가 주도로 통제하는 형태로 경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스탈린은 농민들을 도시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도시로 떠나지 않던 농촌의 약 2,500만 세대가 2, 3년 내로 집단농장이나 국영농장에서 집단 생활을 하도록 강요당하였다. 이에 필사적으로 반발 저항하던 농민들은 소련군과 비밀경찰로부터 공격을 받고 체포, 사살되었다. '쿨라크'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이들, 스탈린의 경제개발 정책에 비협조적이던 농민들은 집회·시위를 벌였으나 경찰과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도시로 강제추방되거나 총살당하였으며, 일부는 수감자의 폭증으로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던 집단수용소에 수감되어 극심한 악조건 속에서 강제노동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레닌의 신경제 정책을 5개년 경제 개발 계획으로 대체해 산업화와 특히 농업 생산물의 공동생산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후에 공산주의의 한 취약점으로 꼽히게 되는 강제 노동 생산 즉, 생산성 없는 경제 활동의 첫 장을 열었다. 그러나 강제 산업화와 노동 생산은 제정 러시아 사회에서 가난과 억압을 받던 러시아 민중들에게 옛 소련의 산업화를 통한 부강한 나라 건설이라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두 번째 부인 나데즈다와 함께한 스탈린

 

한편 1932년 혁명 기념 만찬에 참석했다가 만취 상태로 공개 석상의 여러 사람 앞에서 후처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모멸감을 느낀 나데즈다는 바로 파티장을 뛰쳐나갔고, 그날 밤 스탈린의 인간적인 결점과 정치적 실패를 비판하는 서신을 남기고 자살했다. 두 번째 아내의 자살 이후 스탈린은 신혼 살림을 차렸던 아파트를 떠나, 크렘린의 다른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들이 함께 살았던 곳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나데즈다의 자살로 충격을 받은 그는 정치국 회의에서 정치국 위원직을 사퇴하려 했으나 정치국 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만류로 번복하였다.

그러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화되고 격무에 시달리자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폭력과 폭언을 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고, 여성들을 가까이하기도 했다. 반면에 그의 딸 스베틀라나에게는 아들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편애를 하게 된다.

 

                                                                           1967년 미국 뉴욕에서 기자회견 중인 스베틀라나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그는 당시 소련 국내 생산품의 사용을 유도하였고, 수입품 억제와 함께 수출산업 육성과 자국제품 수출 증대에 힘썼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엄청난 실패와 기계 고장 등의 부작용들도 수반되었으며, 이는 반대파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각종 시위에 직면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반발을 무마하고자 강경 진압을 하는 한편, 회사 간부·산업 관리인들을 비판, 규탄하고 그들의 경영 잘못으로 몰아 여론재판에 계속 회부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피고들은 겁에 질려 허위자백을 하고 희생됨으로써 그의 경제실책으로 야기된 재앙을 대신 짊어지는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경제정책은 상당부분 효과를 거두어 수출력과 생산력을 향상시켰다. 1928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강철은 5, 전력은 8, 시멘트는 2, 석탄은 4, 석유는 3배로 생산고가 늘어났고 철도를 포함한 수송수단은 4배로 늘어났다. , 스탈린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들은 농업 중심의 후진국을 급속도로 근대화·산업화·도시화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며, 그는 소련 국내외에서 폭넓게 인정받았다. 스탈린의 잠재적 경쟁자이자 동지였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그리고 허버트 조지 웰스, 조지 버나드 쇼 등 유명 작가들과 예술인, 당대의 열광적인 외국인 목격자들에게도 널리 인정받았다. 뿐만 아니라 스탈린은 경제정책과 동시에 교육 분야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90% 이상이나 되던 소련의 문맹률이 교육 정책을 통하여 1%까지 감소하였고, 또 다른 지식층을 양성하였다.

 

한편 스탈린은 예술 공연에도 정책적으로 개입하였다. 1934 1 <레이디 맥베스>가 소련에 상륙, 초연과 함께 흥행을 거두었다. 스탈린은 1936 <레이디 맥베스>를 직접 보러 극장을 찾았다가, 레이디 맥베스 관람 중 극중 노골적인 성적 묘사와 치정 살인 부분이 나오자 이를 불쾌히 여겨 1막이 끝나자 역정을 내면서 자리를 떴다. 며칠 뒤 소련의 최대 일간언론이자 당의 충실한 기관지인 <프라우다>에는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를 강하게 비난하는 글이 실렸고 <레이디 맥베스>는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상영금지조치되었다.

 

                                                                                                                              스탈린 초상화 (1937년작)

(4)반혁명 재판과 권력 강화 (1936 ~ 1939)

그러나 성급한 산업화는 농업과 환경을 파괴하여 홀로도모르와 같은 재앙을 불렀고, 집단농장화로 성과 없는 농업생산에 회의적이던 농민들의 생산물 수는 감소했고, 우크라이나에는 대기근이 발생하여 식량사정을 악화시켰다.

 

하지만 스탈린은 기근 지역에 급송해야 할 식량을 계속 수출했다. 이 때문에 당과 군대 내에서 정치적 반대파가 많아졌다. 이때 대중적 인기를 가지고 있었던 레닌그라드시 지구당의 당서기였던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당하자, 이를 트로츠키의 음모로 선전하였고, 이른바 트로츠키주의자를 뿌리뽑는다는 명목하에 스탈린에게 도전했거나 도전할만한 자들에 대한 대숙청이 시작되었다.

 

                                                                    스탈린과 세르게이 키로프 (1934)

 

스탈린이 이의 배후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1956년 제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 당 제1서기가 스탈린 격하연설 도중 '스탈린 자신이 숙청을 단행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고 암시한 바 있다. 이 숙청 작업을 담당한 곳은 내무인민위원회(NKVD) 였으며, 당내는 물론 군부나 심지어는 내무인민위원회 내부에서도 숙청작업이 광범위하게 실시되었다. 군부에서는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를 비롯한 여러명의 장군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34 12 1일 스탈린에 맞먹을 만큼의 권력을 가졌던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당했는데, 키로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권력과 인기가 높아짐을 두려워한 스탈린의 사주한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되자 이에 연루된 암살자 레오니드 니콜라예프와 옛 혁명 주역이던 지노비예프, 카메네프가 체포되어 고문당한 뒤, 재판정에 끌려나와 허위자백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총살당했다.

 

1934년 제17차 당 대회에서 뽑힌 중앙 위원과 후보 위원 139명 중 98명을 처형했고 17명을 강제 수용소로 쫓아냈으며 제17차 당 대회 대의원 1961명 중 무려 1108명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1937 1월과 1938 3월 또다시 대규모의 마녀재판을 감행했는데, 트로츠키를 따르던 31명의 사람을 처형하고 심지어 1936년과 1938년에는 이전에 숙청을 지휘했던 전직 내무인민위원장인 겐리흐 야고다와 니콜라이 예조프가 도리어 반혁명분자로 몰려 처형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그가 자신을 암살하면 회고록을 폭로하겠다고 꾸준히 협박하여 스탈린의 정적숙청의 칼날을 피해갔다.

 

1937 6월 한 달에만 미하일 투하체프스키를 포함해 8명의 장군을 간첩 혐의로 처형한 것을 비롯해 육군 원수, 군 사령관, 군단장, 사단장, 여단장 등 1500명을 처형했는데 이 수가 붉은 군대 간부 최고 군사회의 멤버의 75%에 달했으며 원수 5명 중 4, 군사령관 15명 중 13, 군단장급 85명 중 62, 사단장급 195명 중 110, 여단장급 406명 중 220, 연대장급 고급 장교 중 70% 이상이 숙청당했다. 대숙청은 점점 절정으로 치달아 1938년 바실리 블류헤르과 니콜라이 부하린, 야코프 페테르스, 1939년 알렉산드르 예고로프와 카를 라데크, 1940년 알리 쇼겐추코프와 니콜라이 예조프, 1950년 그리고리 쿨리크 등까지 강타했다.

 

특히 스탈린의 혁명동지이기도 했던 니콜라이 부하린(Nikolaj Bukharin)의 경우 130개 항목의 죄명으로 법정에 기소당했는데, 이는 고문에 의한 자백들이었다. 부하린은 '고난받는 인민대중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자본주의적, 퇴폐적인 생활을 향유한 부도덕한 이중인격의 가식적인 인물이었고 사치를 일삼았다는 분위기를 풍긴다'는 이유로 스탈린에 의해 고소당하였다.

 

이외에도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는 초기 작품 저녁(ВЕЧЕР)(1912), Anno Domini MCMXXI(1922) 등으로 당국으로부터 부르주아적이란 비판을 받고 활동을 거의 중단당했다. 196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던 레프 란다우는 UPTI 사건으로 조사받은 뒤 모스크바를 탈출했으나 1938 5 27일 구속되어 내무인민위원회에 유형당했다. 이후 1939 5 29일 동료 표트르 카피차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위의 사진은 1938년 공산당 간부들과 인민의원, 그리고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임원들이 모여 찍은 사진이다. 아래사진은 1949년 조작되어진 사진이다. 뒷줄의 몇몇 인물들이 사라졌다. 역시나 정치적으로 숙청되었거나 사상적으로 스탈린과 대치되던 정적들이다

1939년 열린 제18차 당대회에 참석, 그는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였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팽창하면서 위협을 느낀 그는 서방국가들과 반() 히틀러 동맹을 결성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거절당했다. 스탈린은 1939 8월 히틀러와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유럽 대륙을 전전하다가 1937년 멕시코로 망명한 레프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독재성과 레닌의 유언을 들어 그를 비판했는데, 이것이 국제 공산주의자 사이에서 자신의 반대 여론으로 확장될 것을 두려워한 멕시코에 자객을 보내 트로츠키의 암살을 계획했다. 트로츠키 암살 계획은 성공하여 1940 8 20일 트로츠키는 멕시코 시티 남부 코요아칸의 자택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 라몬 메르카데르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는 스탈린 사후 1972년 트로츠키의 암살(The Assassination Of Trotsky)이라는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구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의 숙청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러시아 모스크바의 옛 KGB 본부 앞 기념비에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모여들고 있다. 이 기념비는 굴라크 정치범 수용소가 세워졌던 솔로베츠키섬에서 나온 큰 호박돌로 만들어졌다.

 

 

구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에 숙청된 희생자들을 기리는 연례행사가 29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의 옛 국가보안위원회(KGB) 본부 밖에서 열렸다. 사람들이 촛불 켜진 기념물 주변으로 모여 있다. 이 기념물은 구소련 강제수용소 '굴라크'가 처음 세워진 솔로베츠키 제도에서 운반된 바위다

 

(5)소련 총리 (1941~1945)

 

                                                                                                        1939, 스탈린과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

1939 8월 스탈린과 조약을 체결한 것으로 용기를 얻은 독일의 히틀러는 폴란드를 공격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새로 동맹국이 되기는 했지만 스탈린은 결코 믿을 수 없는 국가였던 독일이 서방국가들과 교전하고 있는 동안 소련 내의 산업화를 추진하는 한편 서부전선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추진해 나갔다. 이후 폴란드 동부와 발트3, 루마니아의 일부를 병합하여 편입시켰다. 한편으로는 핀란드를 공격하여 승리하면서, 핀란드에 영토 할양을 강요하기도 했다. 1941 5월 스탈린은 독일이 소련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스스로 소비에트 연방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1941년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 스탈린은 연방의 총리를 겸했다. 이 해에 동방으로 팽창하려던 독일의 히틀러와 전쟁하게 되었다.

1940년 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 등 북유럽 3국이 소비에트연방 편입 문제를 놓고 국민투표를 했다. 그런데 투표 하루 전에 만장일치라는 투표 결과였다. 이는 분명한 조작이었지만, 당시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소련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를 거절했다. 소련 국내에서는 이를 '전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이나 행할 수 있는 기적으로 받아들여져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발트 3국의 소련 합병은 얄타 회담 이후 더욱 분명하게 정해졌으며, 이후 1991년 무너질 때까지 소련의 영토로써 인정된다. 현재 발트 3국은 소련의 합병이 분명한 "불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소련에 속해있던 시기를 '강제 점령기'로 규정하고 있다.

 

                                            일소 중립 조약에 서명하는 일본 제국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와 지켜보는 스탈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뒷줄 가운데)

 

1941 4 13일 스탈린은 일본의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와도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중국 공산당 동북항일연군은 소련이 중일전쟁때 중화민국 지원국일때  1937년부터 1941년까지는 활동이 대단했고 소련이 공식적으로 만주국을 승인할 시기에는 1941년 부터는 만주국 내부에서 공산당 활동이 침체되었고 협력자들이 등장했다 1944년 경부터  소련이 연합군으로 가담하여 반일투쟁을 주도할때는 만주국 내부 공산당 세력들이 반만주국, 반일 투쟁 활동과 만주국 점령 군사훈련을 주도했다

만주 전략공세작전은 제1전선 구축 소련군 주도, 제2전선 구축 소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 극동지역 공산주의자 주축으로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만주국 오족협화] 소련 제1극동전선군  88독립 저격여단 연합으로 추진 되었다

 

(6)독소 전쟁

1941 6 22일 히틀러가 정당한 이유 없이 소련을 기습 공격한 이후 독일군은 소련 영토 깊숙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대략 1200대 이상이나 되는 소련군 항공기가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수십만명의 소련군이 독일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신뢰하지는 않았으나 독-소 불가침 조약에 입각하여 영국을 굴복하기 전에는 소련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히틀러의 기습공격에 충격을 받았고 공황상태에 빠졌다. 흐루쇼프는 그가 한동안 무력증에 빠졌음을 증언했으나, 스탈린은 바로 기력을 회복하고 스스로 소련군 최고사령관이 되고, 소비에트 연방의 국방위원회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41년 겨울 독일군이 소련 국경을 깊숙히 쳐들어와 모스크바를 위협하였으나, 그는 피신권고를 물리치고 수도 모스크바에 머무르면서 일대 반격을 위한 준비작업을 지시했다. 1941 7 19일 소비에트 연방의 인민위원회 국방담당 인민위원에 취임했다.

 

                                                                                                                                   이오시프 스탈린 (1942)

 

1941년 독소 전쟁 발발을 틈타 체첸인들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반()소련 게릴라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여 큰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1941 11 7일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혁명 기념 퍼레이드를 그대로 진행했고,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까지 들어왔음에도 크렘린을 끝까지 사수했다. 산업화 시기 중공업 위주의 성장을 했던 스탈린의 소련은 독소전쟁이 터지자 탱크와 비행기를 비롯한 군수문자를 초고속으로 대량생산해냈다.

 

1941 7월부터 11월까지 총 1523개 공장(이 가운데 군수 공장이 1360)이 볼가 강 유역과 시베리아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이전했고, 여기에는 총 150만 대의 철도 차량이 동원되었다. 중공업 시설 대규모의 이전과 재조직은 인내력과 조직력의 측면에서 놀라운 성과였다.

 

1941 12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이 연합군 편에 서게 되자 미국의 수많은 물자가 소련으로 들어가게 됐고,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물자를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모스크바 공방전 승리 이후 소련군은 1942년 겨울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1943년 여름의 쿠르스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스탈린이 총지휘하는 소련군은 독일군과 맞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대세는 역전되어 쿠르스크 전투 이후의 독일군은 반격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후퇴하게 되었다.

 

1943 12월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서 개최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처칠 등 연합국 수뇌들의 회담에 참석하였다. 1944년 여름 영미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한 이후 스탈린이 총 지휘하는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이라 하여 동부전선 전역에서 독일군을 격퇴시켰다.

 

(7)2차대전 후반

체첸의 반발이 가라앉자, 스탈린은 체첸의 독립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1944년 봄, 비밀리에 체첸인들을 전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주 과정에서 반발하는 자는 사살했고, 체첸인구의 10%가 강제 이주 당시 사망했다고 한다. 타인을 신뢰하지 않던 그는 몇번의 쿠테타 이후 동료들을 믿지 못했고, 특히 군대를 불신하여 장군을 다수 죽였으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이 고전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전쟁 초기에 그는 아돌프 히틀러처럼 군사 업무에 수시로 관여하고 전화를 이용한 부적절한 지령으로 군사업무에 간섭하다가, 점차 군사적인 결정을 현지의 지휘관들에게 위임하였다.

 

(8)2차대전 종전

1945년 루스벨트, 처칠과 함께 얄타 회담을 추진했다. 스탈린은 이 회담에서 대단한 협상가로서 이 외국 정치가들의 의중을 파악하고 협상했는데, 그의 우수한 협상 기술을 당시 영국의 외무부 장관 이든이 칭찬하기도 했다. 1945 8월 연합군 측의 승리로 독소 전쟁의 최종 승리는 당연 스탈린의 차지가 되었다. 일본의 항복 직전 8월 초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도움 요청으로 일본의 식민지에도 소련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10여 일 만에 일본은 항복했고, 스탈린은 아시아에서도 소련의 몫을 요구하였다. 국제사회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소련의 성과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스탈린은 소련군 부상자와 사망자가 수천 명임을 들어 대가를 요구하였다. 1945년 소비에트 연방의 총리에 재선출되었다. 1945 6 27일에는 소련군 대원수에 취임하여 소련군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1945년 여름 미국으로부터 연합군 파병에 동참을 제안받자 그는 수락하였다. 뒤에 미국 내부에서는 그를 끌어들인 것에 부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고, 8 15일 일본 항복 직후, 미국은 소련군이 2차 대전 종결에 끼친 영향이 없다고 비난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7월과 8월에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2천여 명의 병력 손실을 예로 들며 소련군 역시 2차 대전 해결에 기여했음을 강변했다. 1946 2 25일 소련 인민위원회 국방담당위원직에 세묜 티모셴코를 임명했고, 1947 3 3일에는 자신이 겸하던 국방부장관직에 니콜라이 불가닌을 임명했다.

 

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자 그는 스탈린 평화상을 제정하여 외국의 국가 원수와 및 내빈에게 수여했다.

 

5.생애 후반

(1)종전 직후

1946년 이후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수시로 소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 자격을 심사했다. 최종 결론은 김일성이었다. 또한 스탈린은 이 무렵부터 아돌프 히틀러가 숨어서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고 생각하여 1950년까지 히틀러를 잡아내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히틀러는 이미 자살하고 없었지만, 스탈린의 이 명령을 어길 수 없었던 NKVD는 히틀러를 찾아내 죽이기 위해 아르헨티나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한편 1945년과 1948년 그는 노벨평화상 후보로 확정된 일도 있었다.

 

1947년 북유럽 3국에서 개최된 최고 소비에트 선거에서 스탈린은 140%의 득표율을 얻었다.민망했던 선거당국은 선거 다음 날 스탈린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표명하려고 이웃 선거구 유권자들이 투표에 참여했기 때문이라는 해명을 내놓았다.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는 계속 간섭거부를 추진했고, 1948년 유고슬라비아는 티토주의를 표방하며 소련 진영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스탈린이 주도하는 단일체로서의 세계공산주의, 일국공산주의 정책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연방 내 다른 14개의 피지배 국가들이 티토주의의 선례에 따라 분리 독립운동을 하는 것을 염려한 그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소비에트 연방 내 각국(각공화국)에서 여론 재판이 일어나도록 배후 조종하고, 1930년대 소련의 대숙청 때와 같은 조작을 하여 공산 위성국 지도자들이 스스로 티토주의자임을 자백하게 만들어 다수의 위성국 지도자들을 재판에 회부하여 처형시켰다.

 

경공업의 생산력 증대 외에 그는 물리학자들에 대한 지원을 늘렸다. 과학원의 우주 탐사 프로젝트를 수립 계획하고 적극 관심을 갖고 지원하였으나, 우주선의 발사는 그의 생전에는 볼 수 없었다. 비록 스탈린의 생전에는 우주 탐사를 볼 수 없었으나, 1957 10 4일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러시아어: Спутник) 1호를 발사했다. 반공주의자이며 그를 심히 경멸하였던 비오 12세는 친서를 써서 특사편에 보내 핵 전쟁만은 중단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2)전후재건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소련은 경제적으로 많은 타격을 받았다. 독소전쟁 기간 동안 무려 2500만 명의 인구가 살 집을 잃었고, 1700여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 2000개의 공장, 6 5000km의 철도,  10만의 콜호스와 소프호스가 파괴 또는 소실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동맹관계는 깨졌고, 그들은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과 서방은 소련의 전후재건을 돕지 않았었다.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 소련은 전후 재건에 나섰다. 4 5개년계획 마지막 연도인 1950년에는 공업 생산고가 전쟁 전인 1940년 수준을 73%나 상회할 만큼 빠른 경제회복과 성장을 보였다. 경제개발 2년차인 1947년 소련의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 결과 외국에 거의 의존하지 않고도 자체생산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으며, 다소 뒤진 소비재 부문도 꾸준히 성장하여 1947년 전시에 시행되던 배급제가 폐지됐다. 배급제 폐지에 있어서 소련은 영국보다 7년이나 더 앞섰다.

 

1946년부터 1955년까지 두 차례 5개년 계획기간에 소련의 공업생산은 서방측의 계산으로도 연평균 12~14%의 고도성장을 기록했는데, 이는 서방세계의 성장속도를 두 배 이상 뛰어넘는 수치였다. 당시 전력생산도 크게 늘었는데, 1954년에는 세계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지고, 세계 최대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를 비롯해 수천 개의 발전소가 건설되어, 모든 산업에 충분한 전기를 제공해줄 수 있게 됐다.

 

(3)한국전쟁 개입

 

                               1950 2월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지켜보는 가운데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겸 외교부장이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1949 3 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침공과 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인민군이 대한민국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대한민국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대한민국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1950 1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1 30, 스탈린은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4,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공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5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공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1950 6 25일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했다. 1949년 갑자기 대한민국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 것을 언급하며 혹시 모를 미국과 자본주의 진영의 함정이라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그러나 무려 48회에 달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끝까지 남침을 고집한 탓에 스탈린이 이를 허락했는데[23] 그렇게 발발한 한국 전쟁은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스탈린은 공식적으로는 한국 전쟁 관여를 부인하였지만 포스트 냉전 시대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스탈린의 명시적 허가와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무려 48번이나 시도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시한 입장은 아니고 김일성이 남침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해서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 김일성이 남침을 끈질기게 고집했을 때 스탈린은 애초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제관으로 임명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김일성에게 한반도 북부의 통치를 책임지게 한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김일성이 파견되자마자 한반도 북부지역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이후였기 때문이였다.

 

한국 전쟁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던 그는 뇌질환과 중풍 증세로 손과 발을 쓰는 것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고 체력이 소모되었음을 알고는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의심과 망상증세가 한층 강화되었다. 모스크바와 소련의 대도시에는 오직 스탈린 자신만이 리모콘과 장비로 열 수 있는 건물이 건립되었는데, 그 건물들에는 같은 모양의 방이 여러 개가 있어 아무도 스탈린을 쉽게 찾기 어려운 구조였다. 또한 그는 비행기와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장거리 여행도 열차로 했다.

 

 

 

                                            1945년 8월경부터 1991년 12월까지 마스-레닌-스탈린주의(일국사회주의 ,자국 사회주의) 노선 통치국가

 

(4)말년과 독살설

1953 3 1일 스탈린은 공산당 간부인 니키타 흐루쇼프 등 공산당 정치국원 4명과 만찬을 하던 도중에 쓰러졌다. 스탈린은 자신을 암살한 거라 염려하여 자신의 비밀별장에 데려다 달라고 명한다. 그리고 별장에 도착한 뒤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4일 만인 3 5일 숨졌다. 3 4일에는 별장의 비밀 방에서 식사를 시켰으나, 그 날의 식사는 먹지 않고 첫 번째 비밀 방에 방치해두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시간은 알 수 없다.

 

집권기간 동안 사적으로 뇌물을 받거나 축재를 하지 않았다. 비교적 청렴한 생활과 종교를 부정하는 다른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러시아 정교회에 호의적이었다는 점 역시 그의 정적들로부터 그에 대한 비판을 신중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죽기 직전, 스탈린은 자신의 건강상태를 폭로하거나 암살할 것을 우려하여 자신의 주치의들을 숙청하였다. 이 때문에 주치의들이 체포, 고문 등으로 끌려가면서 스탈린 자신이 발작을 일으켰는데도 손을 쓸 수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공식 발표된 스탈린의 사망 원인은 뇌졸중이었다. 그러나 세간에는 독살됐다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일설에는 목이 졸려 죽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사망 장소는 자신의 관저였는데, 그곳의 위치는 자신을 암살할 것을 우려한 스탈린이 찾지 못하도록 깊숙하고 복잡한 곳에 위치한 숲속에 별장을 지은데다가 주택도 암살방지를 위해 미로처럼 복잡한 형태로 되어 경비원들조차 스탈린의 위치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병원에 옮길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결국 사망 후 3일이 지난 3 8일에 식사담당 파출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1951 5 1일 메이데이 기념식 뒤. 왼쪽부터 흐루쇼프, 스탈린, 말렌코프, 베리야, 몰로토프. 스탈린 사망 뒤 흐루쇼프는 사진 속 인물을 단계적으로 퇴진시키고 권력 정상에 오른다

(5)사후

1953년 스탈린이 죽자 김일성은 장문의 애도문을 소련에 보냈다. 사후 시신은 미이라화 되어 레닌 묘 옆에서 보존되다가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시에 화장되어 크렘린 벽묘지에 묻혔다

스탈린은 사후 1956년 초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에 의해 비판받은 뒤 격하당하였다. 이후 스탈린의 동상, 흉상, 초상화, 비석 등 각종 기념물들은 철거되어 사라졌다. 스탈린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스탈린그라드가 됐던 차리친 시는 1962년 이후 볼고그라드(Volgograd)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스탈린비판은 복잡한 반응을 일으켜 ' ·소논쟁', '헝가리사건' 등과 소련-중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관계에 금이 가는 등의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흐루쇼프가 실각하면서 스탈린 격하논쟁은 주춤해지다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스탈린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영웅에서 독재자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러시아와 독립국가 연합 14개국의 경제 사정이 악화되면서 경제발전과 부국강병을 달성한 스탈린에 대한 향수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스탈린은 조지아 출신이었지만 러시아에서도 그에 대한 존경심은 각별하였다. 2008 8월 러-조지아 전쟁 당시 러시아군이 스탈린의 고향인 조지아에 진입했을 때 다른 시설은 무수히 파괴됐지만 스탈린의 생가와 스탈린 박물관은 손상되지 않았다

 

스탈린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세계 각국 봉건제 신분제를 폐지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스탈린의 치하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농업국에서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산업국으로 탈바꿈했고, 결과적으로 이는 소련이 독소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후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되었다. 2차 세계 대전에서의 모스크바 사수 및 연합국 지위 획득 역시 그의 치적으로 기록된다. 또한 독소 전쟁에서 초반의 패배에 큰 책임이 있긴 하지만, 여러가지 정치적, 군사적인 정책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소련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또한 서방 연합국과의 흥정을 통해 중앙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권을 확인함으로써 전후 미국과 함께 소련이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하였다

 

경제적으로는 국가 중심의 통제 경제와 중소 수공업을 양성하면서 대량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소련의 경제를 살린 인물로 평가된다. 사상적 측면에서는 레닌주의를 더욱 구체화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교리적인 혁명이론으로 전개하였다. 소련은 물론 다른 국가의 공산주의자들은 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스탈린적 해석을 학습하였고, 이를 혁명의 전략전술로 논리로 삼았다. 스탈린의 생전에 편찬된 볼셰비키당사의 제4 변증법적유물론과 사적유물론은 스탈린주의의 핵심적문서임과 함께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로동당 정권의 주체사상의 핵심적 사상적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그를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한편 무모하게 추진해서 막대한 사상자를 내기는 했지만, 스탈린이 강력하게 밀어붙인 기간산업의 국영화로 소련 국내의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산업화 정책으로 농업이 주류이던 소련을 산업화했으며 소련의 산업화를 완성시켜 독일에 반격할 수 있는 전력을 마련했다는 평가도 있다.

 

소련 붕괴 이후에도 현재 러시아에서는 그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부정적 평가보다 높으며[25] 그의 고향 조지아에서도 국가적, 민족적 영웅으로 칭송된다. 조지아의 역사 교과서는 스탈린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을 종식시키고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26]

 

일부 러시아 국민들 중에는 스탈린을 생각하면서 피와 편집증, 잔혹함이 아니라 승리와 힘, 무사무욕, 국가의 존재이유를 떠올린다. 또한 러시아의 청년 층 중 일부는 스탈린을 나치를 물리친 강력한 군주로도 기억된다.

 

1990년 이후 러시아의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스탈린을 그리워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고르바초프나 보리스 옐친 등은 당초 스탈린에 대한 찬양을 제재하였으나 스탈린에 대한 국민들의 향수 여론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2000년대 이후에는 모스크바를 사수한 전쟁 영웅, 산업화를 통해 소련의 국가적 기틀을 마련한 영웅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스탈린의 재평가를 놓고 그의 인권 탄압과 정적 숙청에 관련된 비판과 잡음이 일고 있다. 2019년 러시아에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70%가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스탈린은 성실하고 애국심이 투철했고 청렴한 사회주의자이면서 집권 과정, 집권 이후에 많은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고 비판을 받았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독재자 또는 살인마라는 비판도 있다

스탈린 치하에서 높은 공업 생산이 달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가운데서 소련의 보통 시민이 소비재나 생활의 편의품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없었다. 국가 자원의 상당한 비율(어떤 평시 자본주의 국가의 역사에서도 전연 전례가 없을 만큼 높은 비율)이 국가에 의해 군사비와 경찰기구 유지비 및 공업화의 계속적인 추진을 위한 재원으로 충당되었다.

 

스탈린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국가(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 민영자본체제)보다도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전제정치) 사회주의 국가(공산주의 국가) 옹호하여 국 가사회주의, 군국주의나 국영자본체제 그리고 러시아 국민 중에 붉은 귀족계급 등장을 가능하게 하였다

후에 스탈린주의는 바트당을 조직한 사담 후세인,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 리비아의 카다피, 김일성 주체사상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소련)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자발적 협회의 기초 위에서 형성된 연방국가이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The Russian Soviet Federated Socialist Republic)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Ukrai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벨라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Byeloruss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Azerbaidjan Soviet Socialist Republic)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Georg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Arme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Turkmen Soviet Socialist Republic)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Uzbek Soviet Socialist Republic)

타지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Tadjik Soviet Socialist Republic)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azakh Soviet Socialist Republic)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irghiz Soviet Socialist Republic)

카렐로-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arelo-Finnish Soviet Socialist Republic)

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Moldav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Lithua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Latv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Esto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1.아르메니아 2.아제르바이잔 3.벨로루시 4.에스토니아 5.그루지야 6.카자흐 7.키르기스 8.라트비아 9.리투아니아 10.몰도바 11.러시아 12.타지크 13.투르크멘 14.우크라이나 15.우즈베크..

 

소비에트(сове́т)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농민·인민들의 민주적 자치 기구이다. 소비에트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를 뜻한다. 1905 10월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창설되었으며 이후에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자주적인 소비에트가 설립되었다.

1917 3월에 일어난 러시아 2월 혁명 당시에는 노동자 소비에트와 농민 소비에트 간의 연합 세력이 형성되었고 혁명 이후에 탄생한 러시아 임시 정부에서 소비에트가 실권을 잡았다. 1917 11월에 일어난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정권을 잡았다. 이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은 소비에트 러시아가 되었고 1922년 소련(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했다.

 

1.2월 혁명 전의 소비에트

최초의 노농평의회는 러시아 왕정이 평화적 시위를 무력으로 짓밟은 피의 일요일 이후 1905 5월에 왕정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노동자와 농민, 인민들이 이바노보를 기점으로 모스크바 북부에 민주적으로 결성한 지역평의회이다. 원래 이러한 지역평의회 결성은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것은 아니었고, 러시아 인민주의자들(민주공화국파)과 사회적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형태였다. 러일 전쟁으로 러시아가 전시 체제에 들어가자 다수의 노동자들은 이에 파업으로 대처했고, 그 결과 수많은 공산주의자들도 노농평의회를 결성하여 이바노보와 유사한 정치 결성체를 만들었다.

 

1917 2월 혁명이 진행될 당시에도 러시아 제국 내엔 이미 수많은 노농평의회가 결성된 상태였다. 이들은 명목상 자유주의 혁명인 2월 혁명에 관여하여, 혁명의 실질적인 세력으로 부상했다.

 

2. 러시아 임시정부 시기

2월 혁명으로 멘셰비키(러시아 사회민주 노동당) 주도의 임시 정부가 들어섰지만, 전쟁은 멈추지 않았고 자본가들의 탄압은 다를 바 없었다. 이 당시 노농평의회에 속한 노동자, 농민은 갖가지 노동, 농민 쟁의를 일으켰으며, 케렌스키 정부에 대항했다. 케렌스키 임시 정부의 무능한 정책으로 인해 러시아의 상황이 좀처럼 나아지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차르 체제로의 회복'을 주장한 러시아 군대 내 왕당파(반동주의자)들이 주가 되어 쿠데타가 일어나자 케렌스키 정부는 볼셰비키에게 이들을 진압해줄 것을 부탁했으며, 이 응답에 승락하여 노농평의회는 자치적인 무장 능력을 통해 '붉은 군대'가 되었다.

*멘셰비키 [Men’sheviki]: 지도자 중심의 엄격한 당을 만들자는 주장에 반대하여 개인적 활동의 자유와 점진적인 혁명을 주장하였던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의 자유주의적 온건파

*볼셰비키[Bol’sheviki]: 다수파라는 뜻으로,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에서 레닌을 지지한 세력

 

3.소비에트 연방 성립 이후

1917 10월 혁명 이후 내전을 통해 승리를 한 레닌 주도의 볼셰비키가 정권을 확실히 잡게 되자, 정치적 권리는 일부 제한이 되었고, 기존의 자치, 생산 업무에서 조금 더 분화된 임무를 맡았다. 볼셰비키는 거대하게 불어난 생산수단과 토지를 관리할 수 있는 체계, 그리고 더 많은 수의 인민들의 요구를 반영할 수 있는 풀뿌리 민주주의, 또는 직접 민주주의적 체제를 대변하는 임무를 노농평의회의 본 임무로 상정했다.

 

이후 노농평의회는 '지역평의회'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주로 한 도시 내의 자치 행정에 관한 업무를 맡았다. 지방 분권 사회에서의 '지방 자치제도'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권한은 미세하게 다르다. 노농평의회는 정식적인 입법권이 없지만, 한 지역의 생산 방향 결정, 행정 단위 내 인민의 요구 견지, 공산당 견제 등의 추가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공산당이 또다른 엘리트 세력으로서 비당원 인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정책을 강요할 것을 염려해서 만든 민주적 시스템이었다. 공산당 지역당 위원들은 이들과 의견 대립을 통해 정책을 결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9년 지역평의회를 해체할 때 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몇몇 시기에는 지역평의회가 사실상 공산당 관료 조직의 하부 조직 역할을 맡았던 적이 있다. 보통 현실공산주의 국가에선 이들은 공산당과 노동조합과 더불어 3대 권력기관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소비에트(сове́т)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농민·인민들의 민주적 자치 기구이다. 소비에트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를 뜻한다. 1905 10월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창설되었으며 이후에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자주적인 소비에트가 설립되었다. [노농평의회(지역평의회)]

 1.회의제 정부(의회정부제) 특징

a.민선의회에 권력이 집중

b.집행부는 의회에 예속 종속됨

의회는 내각을 불신임하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하지 못한다

2.인민 회의제(인민 회의정부론, 인민민주주의)

PDR(인민민주주의 혁명)은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이다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은 의회(인민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이며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지만 내각(정부)는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회의제 정부 형태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의회가 권력을 장악하여 내각은 의회 정책수행 시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각(정부)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왔다

소련헌법은 인민회의제(인민민주주의) 헌법으로 명목상 국가원수 소비에트 최고 회의 간부회 의장이고 실권자는 소련공산당 지도자 당 서기장과 내각 수장 총리(수상)이다 소련헌법은 소련 공산당 일당 독재를 인정함으로 소련 연방 최고회의(최고 의회)는 공산당이 장악하게 되었고 내각도 소련 공산당에 예속 종속돼 왔다

 인민 의회정부론(인민 회의정부론)이 의회보다 지도자론(영도론)으로 나아갈 때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1인 전체주의 정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국가주석이나 대통령(최고지도자)의 임기제한을 해야 인민회의정부(인민의회정부)가 될 수 있다. 중국 등소평헌법이나 쿠바 신헌법은 국가주석 임기를 제한하고 있다 베트남도 형식상 국가주석 4년 중임제이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주의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계급이 령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hwp

 

1.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社會勞動民主黨)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社會勞動民主黨, Российская социал-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рабочая партия, 1898 ~ 1918)은 러시아에서 최초로 마르크스주의를 선택한 혁명당이었다. 1898 3 14일 민스크에서 개최된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 전러시아 대회에서 기초가 마련되고, 1903년의 브뤼셀, 런던의 사회민주노동당 제2회 대회에서 확립되었다. 사회혁명당과 더불어 노동운동을 지도하였는데, 사회혁명당이 나로드니키[인민주의-인민의 속으로 (브 나로드)]의 후계자임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서 계급투쟁에 의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하려 했다. 2회 대회에서 레닌에 의해 기초된 강령이 채택되고, 당의 규약, 중앙위원회, 중앙기관지 이스크라 및 평의회가 성립되었는데 동시에 당은 레닌이 인솔하는 볼셰비키와 마르토프 등의 멘셰비키로 분열하였고, 런던에서의 제3회 당대회에는 멘셰비키가 참가하지 않았다. 1906년의 스톡홀름 대회에서 양파의 결합이 시도되었으나, 멘셰비키는 카데트와의 제휴를 주창하고 대립, 1907년 제5회 대회에서 결정적으로 분열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멘셰비키 세력들은 대거 탈당하여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멘셰비키)를 창당하면서, 남은 볼셰비키 세력들은 1918년 부터 당명을 소련 공산당으로 변경하였다.

이후 남은 멘셰비키 세력들이 창당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불법 조직이 되어 지하정당으로서 소련에 저항하였다.

 

상징색: 빨강

이념: 마르크스주의, 혁명적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내부 정파:볼셰비키. 멘셰비키

*멘셰비키 [Men’sheviki]: 지도자 중심의 엄격한 당을 만들자는 주장에 반대하여 개인적 활동의 자유와 점진적인 혁명을 주장하였던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의 자유주의적 온건파

*볼셰비키[Bol’sheviki]: 다수파라는 뜻으로,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에서 레닌을 지지한 세력

스펙트럼: 중도좌익 ~ 극좌

 

 

2.볼셰비키(большеви́к)

볼셰비키(большеви́к)는 블라디미르 레닌이 인솔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분파이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2차 전당대회에서 다수파인 볼셰비키와 소수파인 멘셰비키가 분열함으로써 탄생하였다. 폭력에 의한 혁명, 철저한 중앙집권에 의한 조직 통제를 주장하였다. 이 특징은, 그대로 후신인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소련 공산당) 으로 인계되었다. 러시아 내전 종전 후에도 소련을 포함한 유럽 내에서 실질적·형식적으로 꾸준히 공산당 지지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으며, 스탈린 사후부터 이 명칭은 소련 내에서 공식적으로 폐지된다.

(1)역사

1903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분열돼 나온 다수파(多數派)이다. 분열의 원인은 당원 자격문제인데, 레닌 등은 당원은 당의 일정한 기관에 속하고 언제나 당의 지휘 명령에 복종하며 노동 계급의 전위(前衛)인 자에 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06년 스톡홀름에서 연합대회가 열리고, 1907년에 런던 대회가 개최되었으나, 국회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에 멘셰비키와 분열된 후 1912년 독립적인 당()임을 선언하였다.

 

1차 세계 대전 때는 멘셰비키가 조국 방위를 주창했음에 대해 볼셰비키는 전쟁을 하기보다는 노동자 계급의 해방과 공산주의 혁명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기 위하여 자본가와의 타협과 기회주의를 배격하고 국제적으로 수정공산주의(修正共産主義)와도 대립했다.

 

1917 2월 혁명 당시에는 소비에트내에서 극소수(極少數)에 속했으나, 4월 레닌의 귀국과 더불어 세력이 증대하였다. 7월에 수도 페트로그라드를 중심으로 일어난 무력시위에 애초에는 반대했으나 시위가 시작되자 참가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두고, 볼셰비키가 유혈사태를 막아 때이른 봉기로 수도가 고립되고 혁명이 실패할 것을 막았다고 평가한다. 이후 대대적인 반()볼셰비키 캠페인으로 일시 열세(劣勢)로 떨어졌으나, 8월말 코르닐로프 반란을 전기(轉機)로 하여 10월에는 20만 명의 당원으로 팽창하여 정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1918 3월 급진공산주의파(急進共産主義派)를 눌러 독일과 단독강화(單獨講和)를 맺고 당명(黨名)을 러시아 공산당이라 했다. 그 후 국내전(國內戰)시대에는 혁명의 성과를 지키는 데 노력하는 한편, 밖으로는 1919년 제3인터내셔널을 조직하여 공산주의의 수출을 시도하였다. 1921년에는 네프(신경제정책)를 실시했다. 1926년에 전연방공산당(全聯邦共産黨), 1952년 소비에트연방공산당으로 개명하였다.

(2)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a.상징색: 빨강 

b.이념: 공산주의, 레닌주의, 혁명주의, 중앙집권

c.스펙트럼: 극좌

d.준군사조직: 노동자적위대

노동자 농민의 붉은 군대(러시아어: Рабоче-Крестьянская Красная Армия) 약칭 붉은 군대(러시아어: Красная Армия 크라스나야 아르미야 또는 노농 적군(勞農赤軍) 그리고 소비에트 공산주의 노동자 군대 또는 공산주의 노동자 군대는 1946 2 25일 이전 소련의 정식 군대이다. 1946 225일 소비에트군(蘇聯軍)으로 개칭되었다.

e.분파[교조주의-마스 레닌주의 노선]

스탈린주의, 마오쩌둥 사상, 호치민 사상, 티토주의, 주체사상, 호자주의, 게바라주의, 카스트로주의,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주의

-흐루시초프나 등소평, 고르바초프, 옐친 등은 수정주의 노선이다

    

3.소련 공산당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공산당(蘇聯邦 共産黨)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유일한 합법 정당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주의 조직이었다. 이 당은 1917 10월 혁명을 이끌어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한데 이어 인류 역사상 최대의 공산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수립했으며, 이후 74년 가까이 반대당(야당)을 허용하지 않는 유일 집권당의 지위를 가졌다.

그러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공산당은 1991 8월 쿠데타 실패 이후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과 함께 소련의 공화국을 이루었던 나라들의 공산당의 전신이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통치체는 1~5년마다 열리는 전당(全黨)대회였으나, 1939년부터 1952년 사이 13년이나 열리지 않은 적도 있었다. 최후의 전당대회는 1990 7 2일부터 11일간 열렸던 제28차 전당대회였다. 전당대회는 중앙위원회 위원을 선출하고, 또 그들 중에서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을 선출했다. 또한 그 산하에 기관지 프라우다, 청년 조직으로 콤소몰, 아동 조직으로 피오네르 등을 거느리고 있었다. 한편 당원의 수는 1986년 당시 1900만 명이 넘었다.

(1)역사

1889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러시아어: Росси́́йская Социал-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Рабо́чая Па́ртия, РСДРП이 민스크에서 창당)

1912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나뉨. 볼셰비키는 1918년 당명을 러시아 공산당(러시아어: Росси́йская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большевико́в), РКП(б)로 바꿈.

1925 : 전연방 공산당 (볼셰비키)로 당명을 바꿈. (러시아어: Всесою́зная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большевико́в), ВКП(б)

1952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으로 당명을 바꿈.

1991 8 24 : 8월 쿠데타 실패.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당 서기장직 사임 및 소련 공산당 해체를 발표.

a.창당

1912 1 1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파)

1918 3 (러시아 공산당 다수파)

1925 12 (전연방 공산당)

1952 10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b.해산

1991 8 29

 

(2)소련 공산당의 후신

러시아 연방 공산당

우크라이나 공산당

카자흐스탄 공산당

키르기스스탄 공산주의자당

몰도바 공화국 공산주의자당

그루지야 통일 공산당

투르크메니스탄 공산당

아르메니아 공산당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4.러시아 연방 공산당

 

러시아 연방 공산당(러시아어: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은 러시아 연방의 정당이다.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다. 1993 2 14일 러시아의 2차 의회에서 설립되었다. 소상공인계층과 지방노농계급을 중심으로 러시아의 '새로운 공산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러시아 연방에서 두 번째로 큰 정당이다.

(1)역사

러시아 연방 공산당은 예고르 리가체프와 아나톨리 루카노프에 의해 공동 설립되었고, 이후 겐나디 쥬가노프에 의해 주도된다. 주가노프는 소련의 붕괴 이후 좌파민족주의 계열인 '러시아 애국운동'의 국가 구원 전선의 회장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 공산주의 외에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러시아 연방 공산당은 푸틴의 독재에 염증을 느낀 많은 유권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2011년 두마 선거에서 단 92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이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의 역대 최다 의석수이기도 하다. 2011 12 18 2011년 두마 선거 결과를 부정선거라 주장하며, 전국적 집회를 열었고 많은 지지자들이 참석하였다.

 

2008, 겐나디 주가노프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으나 패배하였고, 2012년에 또한 겐나디 쥬가노프를 다시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으나 낙선하였다.

 

2018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2018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공산당의 후보 파벨 그루디닌의 지지율이 73%로 나와 1위를 기록하였다. 이로 인해 몇몇 러시아 매체에서는 이번에 러시아 공산당이 세대교체를 할수 있을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11%를 득표하며 낙선하였다

 

(2)이념

겐다니 쥬가노프는 과거 "오늘날의 주요한 투쟁은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서가 아니라 서방에 의존적인 자유주의자들과, 자주권을 지키려는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라고 천명한 바 있다. 이것은 과거와 다른 시대정세 하에서 계급문제는 뒤로 물러나고 민족문제가 부상했음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러시아공산당은 스스로를 서구의 매판 자본주의세력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세력으로 규정하며 노동자의 복지를 증진시키되, 노사협력을 통해 서방세계에 대항해야 한다는 반제국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표어: 러시아! 노동! 인민의 힘! 사회주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상징색: 빨간색

이념: 공산주의, 소비에트 민족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사회민주주의(수정주의, 2018년 대통령 선거때 도입)

스펙트럼: 중도좌익-극좌

 

 

5.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주의[MLM, 중국 공산당 내부 교조주의 노선(모택동 계열)]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MarxismLeninismMaoism, MLM)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결합한 정치 사상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2세대 노선이라고 할 수 있으며, 2000년대 후반부터 정통 공산주의자들의 새로운 이념으로 주목받고 있다.  

(1)개요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는 1993년에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 더욱 더 프롤레타리아 혁명적인 노선으로서 창시되었으며 현재에는 국제혁명운동이라는 대표적 마오쩌둥 사상 단체가 이를 추구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인도 공산당이 이 이념을 추종하고 있다. 여기에 프라찬다 노선과는 구별된다.

 

a.군중노선

기존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당 중앙위원회 '사회주의 국가에서 '간부회'의 역할을 했던 모든 종류의 중앙 집행 기관'의 활동을 중점으로 사회주의 건설, 그리고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에로의 투쟁을 서술하였지만, MLM 노선은 사회주의 혁명과 공산주의 혁명 과정에서 당과 인민 사이의 강력한 연대, 대규모 군중 직접 행동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노선은 혁명당  흔히 '공산당'이라 불리는  이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강력한 전위력을 갖춘 전위당의 역할을 급진적으로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과 이어진다. 이러한 군중 노선으로 당은 인민의 의지를 투쟁 과정에 적절히 반영할 수 있으며, 인민은 당의 영도권에서 이반하지 않을 수 있다.

 

b.신민주주의

MLM 노선은 기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반제국주의 노선을 강화하여 반제 투쟁의 한 예외적 계급인 '민족부르주아'(national-bourgeois)의 역할과 통제에 대해 심도있게 논하고 있다. 민족부르주아는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화에 저항할 수 있으며, 통일전선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계급이지만, 본질적으로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이므로 생산 관계의 모순을 청산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통일전선을 꾀할 때 이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통제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며, 이는 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오늘날 공산주의 진영이 쇠퇴한 시점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이들(넓게는 자유주의자들)과 언제든지 협력하고, 협력한 상태에서 다변화된 전략을 구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MLM 노선이 시사하는 바이다.

 

역사적으론 중국 국민당과 연합을 했던 중국 공산당의 예를 들 수 있으며, 블라디미르 레닌이 잠시 도입했던 신경제정책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2차 세계 대전 시기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성립된 인민전선도 통일전선의 한 예로 들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천두슈 주도의 중국 공산당은 민족부르주아 세력인 중국 국민당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으며, 이에 대한 무지는 상하이 쿠데타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무참히 학살된 것과 관련이 크다. 마오쩌둥은 제2차 국공합작에서 이 민족부르주아들을 통제하고 자신들의 혁명 전략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지식을 갖춘 상태였으며 결과적으로 그는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민족부르주아와의 부분적인 타협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MLM 노선은 현대 공산주의 운동이 퇴조한 시점에서 수많은 개발도상국(왜냐하면 선진자본주의 정체에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의하는 '민족부르주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의 혁명을 지도하는 이념으로, 새로운 통일노선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c.문화대혁명

1990년대 중반에 구체화된 MLM 노선은 과거 존재하던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 현상에 대해 분석해야 했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 것은 당의 수정주의화, 관료주의였다. 그들은 이러한 것의 원인을 대규모 대중 운동을 배제하고 중앙위원회에 모든 것을 맡기는 기존의 현실사회주의의 특유의 제도 때문이었다고 보고 있으며, 당의 수정주의화를 막기 위해 일정한 기간마다 전체적인 문화대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군중 노선에 근거해야 한다.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공산주의로의 투쟁 과정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 내부의 반동 공작 문제보단 외부적 문제에 모든 것을 쏟았다면, MLM 노선은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통제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하부 구조의 변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상부 구조 변형을 급진적으로 진행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이를 '계속혁명론'(繼續革命論)이라고 부른다.

 

d.적대적 모순/비적대적 모순

마오쩌둥 사상은 기본적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반하며, 스탈린의 공산주의 정립을 정설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마오쩌둥 사상은 중국 현실에 맞는 발전된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가치를 내세우고 있기에 일부 이론에서 스탈린의 이론과 차이점이 존재한다. 특히, 모순론(생산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변증법적 모순에 대한 이론) 1920년대 데보린 학파에 의해 전개된 유물변증법과 더불어 이오시프 스탈린이 레닌주의의 기초와 레닌주의의 제문제에서 밝힌 모순론과 비교되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모순과 사회주의 사회에서 그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모순의 본질은 제반경제투쟁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일치하며, 그것은 어떻게 하든 현실에서 계급 투쟁(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의 형태로 발생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해 지도되는 사회주의 정체는 모순이 있을 수 없다.

 

반면, 마오쩌둥은 모순을 적대적 모순(敵對的矛盾, Antagonistic contradiction)과 비적대적 모순(非敵對的矛盾)으로 나눈 다음, 전자의 모순은 처음부터 끝의 과정까지 모순의 과정을 관통하며,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모순, 즉 본질적 모순에 해당하고, 후자는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모순이라고 하였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에 따르면, 전자의 경우는 계급 전쟁에서 최일선에 해당하는 모순인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모순이므로, 서로의 계급 전쟁에서 나름대로의 전략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또한, 갖가지 양태를 갖고 있는 모순으로 변화하게 된다.

예를 들면, 그것은 백인과 유색인종 사이의 싸움이 될 수 있으며, 제국주의자와 반제국주의자, 남성 권위주의자들과 여성 사이의 투쟁, 심지어 노동자와 농민 및 빈곤노동자 사이의 투쟁으로도 양태화될 수 있다. 마오쩌둥은 이것들이 본질적인 모순에 해당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구분하기 위해서는 결국 매개 모순의 특수성, , 모순의 진행도를 인식하고 그것을 정합(整合)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모순의 진행도가 제각각인 것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자연변증법(Dialektik der Natur)에서 논한 자연물 사이에서의 모순을 포함하여 모든 본질적인 모순이 가진 보편적인 것(보편성)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주요 모순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에 따르면, 주요 모순은 모순성의 특수성을 정합성에 따라 인식한 후에 판단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상황에 따라 또 유동적으로 변한다. 이러한 입장은 혁명에 현실성을 부여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의 정식을 받아들인 기존의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양태를 갖고 있는 모든 본질적 문제를 단적인 경제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투쟁으로 환원시키고 그것들의 속성을 근시안적으로 바라보는 경험주의적 단견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수많은 본질적 분쟁인 사건을 비본질적 분쟁으로 취급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했다. 실제로 마오쩌둥의 비판 대상인 교조적인 공산주의자들은 농민은 소부르주아이기에 본질적인 혁명 동력이 없다고 봤으며,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양분적 대립 등을 비본질적 모순으로 보아 그것들의 중요성을 무시했다.

마오쩌둥은 이러한 기조가 본래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취지에 어긋나며, 교조주의자들의 입장을 '혁명에서의 소극주의 경향'으로 규정하고 단죄하였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계급 투쟁 관계를 단순히 무산자-임금노동자와 유산자-사업가의 싸움으로 표시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그것의 본질은 사실 무산자와 유산자 사이라는 간극보다는 혁명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세력과, 반동으로 나가는 세력 사이의 간극이라고 본 것이다.

마오쩌둥이 혁명의 시기인 1920년대에서 1940년대 사이에 농촌에 기반한 농민운동에 중점을 둔 것도 바로 위와 같은 철학적 지론에서 나온 것이다.

 

MLM 노선은 기존의 교조적 계급론으로 모든 사회 현상을 쉽게 설명하기 힘들며, 대중에게도 와닿지 않으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마오쩌둥의 모순론을 새로운 혁명론적 모순관으로 채택하였다. 이 새로운 형태의 변증법적 견해에 따르면, 공산주의 운동은 반식민주의 투쟁·반인종주의 투쟁·여성해방투쟁에 보다 유연하게 동행할 수 있을 것이다.

 

e.반수정주의

기본적으로 MLM 노선은 반수정주의를 지향한다. 이들은 공산주의 운동 쇠퇴의 원인을 수정주의로 보고 있다. 비록, 스탈린의 DIAMAT 원리에 마오쩌둥의 모순론을 첨가하여 새로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주장하고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혁명 노선에 있어서 볼셰비키당의 유산을 간직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MLM 노선을 지지하는 당 또는 단체는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강력한 반수정주의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와 흐루쇼프 이후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도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2)마오쩌둥주의와의 차이

MLM 노선은 마오쩌둥주의에 크게 영향받았으나, 기본적으로 공업 사회에 적용하기 위해 형성된 혁명 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MLM 노선 자체도 마오쩌둥주의의 특수성보단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성을 추구하고 있다. , 마오쩌둥주의는 혁명 전의 중국 상황과 유사한 국가들에서 '특수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 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MLM 노선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은 이 노선이 공업 사회, 농업 사회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는 수정주의 노선으로 나아가야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

수정주의 노선은 국영자본체제와 노농조합(지역 지방 의회) 도입 그리고 노동계급이 령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프롤레타리아독재체제)와 국가주석이나 대통령의 임기제한 등이다

국영기업이나 농장이 노농조합(지역 의회)에 의한 운영과 함께 개인의 사유재산, 이윤추구, 시장경쟁원리의 자본주의 3원칙을 인정하고 상업적 공농(工農) 생산품을 생산하여 판매하여 그 수익으로 세금과 경영 비용, 노동자나 농민들에게 임금으로  분배하는 것이다

국영기업이나 농장의 부패와 관료주의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노농조합(지역의회)애 의한 책임자 선출과 임기제한 그리고 사업 의결권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인민 의회정부론(인민 회의정부론)이 의회보다 지도자론(영도론)으로 나아갈 때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1인 전체주의 정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국가주석이나 대통령(최고지도자)의 임기제한을 해야 인민회의정부(인민의회정부)가 될 수 있다. 중국 등소평헌법이나 쿠바 신헌법은 국가주석 임기를 제한하고 있다. 베트남도 형식상 국가주석 4년 중임제이다

당이나 노농조합(지역의회) 독재나 우위는 인정하지만 국가주석이나 대통령, 농장 책임자나 국영기업 책임자 개인의 독재는 인정하지 않는다

노농조합이나 지역의회 그리고 연방의회(중앙의회)에서 선출된 국영기업(농장) 책임자나 국가주석(대통령)의 임기는 제한이 돼야 세습화나 부패를 척결할 수 있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hwp

 

 

민주공화국 형태 연방제 러시아연방공화국 [민주국가]

국정(國政)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이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개인과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이를 준수하며 수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국민투표와 자유선거는 국민에 의한 최고의 직접적인 권력행사이다.

러시아연방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이 허용된다.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국가이념이나 의무적 이념으로 규정될 수 없다.
러시아 연방에서는 정치적 다양성과 복수정당이 허용된다.
모든 사회단체들은 법앞에 평등하다. [러시아연방 헌법]"

 러시아연방 헌법.hwp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hwp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hwp

 미합중국 헌법.hwp

 

 

 

                                                                                                              1989년까지의 동유럽내 공산권 국가

 

 

민중당은 친북 좌파단체인가 아니면 한국정부의 독자적 사회주의 정당인가

 

 

 

 

 

 

민중당은 노농동맹 령도 사회주의 국가론 NLPDR 친북 좌파단체인가 아니면 일본 공산당처럼  한국정부의 독자적 사회주의 정당인가

한국재야세력인 민주노총이나 전농, 전국대학생진보연합 등 연합단체 민중당도 일본 공산당처럼 독자노선이 필요하다

남북협력시대에서 북한 추종세력 주사파는 남북한 권력자의 앞잡이가 될 수 밖에 없다

북한은 주체연호 3대 세습제 좌익군정 독재정부이다

한국 진보세력도 노농연맹 령도 사회주의 국가이론 좌파노선을 폐기하고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 이론 우파 노선 입장에서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과 사회주의(생존권, 사회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국가)에서 사회주의(생존권 우선) 노선  진보세력이 돼야 할 시기이다

1980년대나 1990년대 사회주의 노동자동맹(사로맹)의 사회주의 국가이론이나 NLPDR 한국민족민주전선의 주체사상(북한식 사회주의 국가이론:주체연호, 김일성 김정일주의)을 타도하고  국정(國政, 民國)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정의당 노선은 좌파 노농연맹 주도 사회주의 국가이론 내부 일본공산당 등 처럼 독자노선으로 반주파 그룹 PD그룹 성향(북한 제1공화국 헌법 인민민주주의 헌법)이라면 민중당 노선은 좌파 노농연맹 주도 사회주의 국가이론 내부 친북 김일성노선 NL그룹으로 NLPDR그룹 성향(북한 제2공화국 헌법이나 제3공화국 헌법, 주체사상과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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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자주’를 앞세운 민중당은 ‘미국 때리기’ 전략을 쓰고 있다. 민중당은 지난 2일 서울 광화문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 출정식을 열며 한·미 방위비분담금 협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민중당은 “미군이 한국사회에 주둔하는 것 자체가 재난”이라고 주장했다.

 

-민중당[좌익]: 사회주의 표방 

-민중당은 민주노총, 전농, 한국대학생진보연합 등의 연합단체이다

민중당은 자주시보와 함께 친북 좌파성향이다 

자주시보는 친북 좌파신문으로 PD계열보다는 NLPDR(NL)계열이다

지난해 10월 김유진 한국 민중당 비례대표 후보 등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회원들이 서울 주한미국대사관저 담을 넘어 무단 침입했다.

 

       ▲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단은 9일 민중당 당사를 방문해 이상규 상임대표와 면담하고 범민련의 민중당 지지입장을 전달했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가 “유일한 자주통일 정당 민중당을 지지한다”라고 밝혔다.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단은 9일 민중당 당사를 방문해 이상규 상임대표와 면담하고 범민련의 민중당 지지입장을 전달했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면담에서 “유일한 자주통일 정당이며 노동자 민중과 함께 투쟁하는 민중당을 지지하기로 하고 회원들의 선거운동 지원, 연고자 파악, 정당 지지 운동을 벌여나가기로 했다”라고 전했다.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은 “범민련이 우리나라 유일한 자주통일 정당인 민중당을 지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면서 민중당을 격려했다.

 

이에 이상규 민중당 상임대표는 “범민련의 지지 결정을 환영하고 격려에 감사하다”라고 인사를 전하며 “자주통일 정당으로서 더욱더 힘차게 일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90년 초, 최초로 결성된 남북 해외 통일운동 상설 연대단체이다. 이날 면담에는 범민련 이규재 의장, 노수희 부의장, 김영옥 고문, 권오헌 고문, 원진욱 사무처장과 송영현 대외협력국장이 참석했다.[자주시보]

 

-조국통일범민족연합[祖國統一凡民族聯合]

1990 11 20일 조국통일을 목적으로 결성된 재야운동단체.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결성하자는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88 8 1일로, 남한의 각계 인사 1,014명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 및 범민족대회추진본부 발기취지문을 발표하면서 논의가 일어났다. 이들은 남한과 북한,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모두 참가하는 범민족대회를 통해 조국통일방안과 통일실천과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같은 해 12월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서 지지 성명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가 시작되었다. 1989 3월 범민족대회 개최를 위한 남한과 북한 및 해외 인사들로 구성된 예비 실무회담이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남한 당국이 이를 불허하고 남측 대표를 전원 연행하면서 대회가 무산되었다.

 

1990 7 27일 해외대표단이 서울에 도착했으나 남한 당국에서 북측 대표단의 서울 방문을 불허하자, 다음 달인 8 15일 판문점 북측 지역에서 열린 범민족대회에 황석영이 남한 대표로 참가하여 북한·해외 대표단과 함께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결성하기로 결의했다. 이러한 결의를 바탕으로 1990 11 20, 독일의 베를린에서 남한·북한·해외 대표가 통일의 주체로서 3자회담을 갖고 범국통일범민족연합을 결성했다.

 

같은 해 12 17일 재독음악가 윤이상을 의장으로 하여 범민련 해외본부가 결성된 데 이어, 남한에서는 1991 1 23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국도시빈민협의회(전빈협),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31개 단체가 참가하여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를 꾸렸다.

 

하지만 다음 날인 24일 준비위원장 문익환과 실행위원장 이창복이 구속되면서, 결국 범민련 남측본부(초대 의장 강희남) 1995 2 25일에 결성되었다. 이에 반해 범민련 북측본부(초대 의장 윤기복) 1991 1 25일에 결성되었다.

 

범민련은 민족자주, 민족대단결을 기본노선으로 남한·북한·해외 동포를 하나로 묶는 3자 연대 조직체로서, 7·4공동성명에서 천명한 자주·평화통일·민족 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과 6·15공동선언 정신을 기본 활동 원칙으로 삼고 있다. 주요 기구로는 범민족회의, 해외본부 중앙위원 연석회의, 공동의장단회의, 공동사무국 등이 있으며, 산하에 부문별·계층별 조직이 있다. 범민족회의는 최고의결기구로서 남한·북한·해외 각 지역의 범민련 대표로 이루어진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1997년 대법원에서 연방제 통일 지지, 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등의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이적단체 판결을 받았다.

 

또한 범민련이 발행하는 기관지 민족의 진로는 이적 표현물로 분류되었다.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실은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618-174 2층에 있다.

 

-전민족의 대단결과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거족적인 통일운동 연합체이다(규약 2조). 범민련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지지하고 본 연합의 강령과 규약을 승인하는 남과 북(북과 남), 해외의 애국적인 정당, 단체 및 개별 인사들로 구성한다(규약 4조).

 

-범민련 남측본부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제호는 민족의 진로, 범민련 북측본부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제호는 북조선을 대변하는 우리민족끼리(과거에는 민족대단결)이다

 

민중당 "촛불의 이름으로 한미관계 불평등부터 갈아앞겠다"

  ▲ 중당은 2일 오전 광화문 미 대사관 앞에서 선거대책위 출정식으로 4.15 총선 첫 공식 일정을 진행했다. [사진출처-민중당]   

 

4월 2일 21대 국회의원 본 선거운동 기간이 시작되었다.

 

민중당은 2일 오전 광화문 미 대사관 앞에서 선거대책위(이하 민중승리 선대위) 출정식으로 4.15 총선 첫 공식 일정을 진행했다. 

 

최근 한미 방위비분담금 협상 타결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있는 가운데 방위비분담금 반대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미 대사관 앞에서 첫 일정을 진행한 것이다. 

 

오인환 종로구 후보는 연설에서 “정부의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이 9조 1천억 원인데 반해 2020년 올 한해에만 주한미군에 들어가는 돈이 9조 5천억”이라며 “미군이 한국 사회에 주둔하는 것 자체가 재난”이라고 꼬집었다.

 

오 후보는 협상 과정에 대해서도 “주한 미군기지 한국인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볼모로 잡은 미국이 결국 협정문에 도장을 찍게 압박하고 있다. 동맹 관계 간의 협상이 아닌 불평등하고 일방적인 협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불평등을 엎어야 촛불 혁명을 완수라 할 수 있는데, 부의 불평등뿐 아니라 한미관계 불평등도 포함된다.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 들었던 시민의 이름으로 한미관계 불평등부터 갈아엎겠다”라고 말했다.

 

출정식에는 이상규 민중당 상임대표를 비롯한 민중당 비례대표 후보들이 함께했다. 

 

특히 방위비분담금과 관련해 지난해 해리해리스 주한 미국대사의 망언을 규탄하며 미 대사관저 담벼락을 넘어 구속 수감되었다가 얼마 전 보석으로 석방된 김유진 비례대표 후보도 참석해 이목을 끌었다

 

▲ 민중당 후보 일동 (왼쪽부터 김재용 비례후보, 오인환(종로구), 김영호 비례후보, 윤희숙 비례후보, 손솔 비례후보, 김유진비례후보, 이상규상임대표(비례후보), 김선경(노원병_방위비분담금 특위장)  

-좌파신문 자주시보-

 

김은희 민중당 용산구 후보 "미국의 내정간섭, 총선개입 규탄한다."

김은희 민중당 용산구 국회의원 후보가 미국의 인권보고서에서 조국 장관을 부정부패 사례로 뽑은 것에 대해 지난 16일 '미국의 인권보고서 조국 전 장관 언급은 내정간섭, 선거개입 행위이며, 이를 강력히 규탄한다'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지난 20일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1인시위를 진행했다.

 

성명서

 

<미국의 인권보고서 조국 전 장관 언급은 내정간섭, 선거개입 행위이며, 이를 강력히 규탄한다.>

 

미 국무부는 지난 11일(미국시간) ‘2019 국가별 인권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국가별 인권보고서에서 조국 전 장관 사건을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정부의 부패와 투명성 부족 사례로 뽑았다.

 

조국 전 장관이 의혹을 받는 사건들은 인디언 기우제식 압수수색과 무리한 기소로 논란이 있으며, 실제로 검찰개혁을 위해 백만이 넘는 시민들이 모여서 촛불집회를 하기도 하였다. 또한, 아직 1심판결조차 나지 않아, 조국 전 장관은 무죄 추정원칙에 따라 법적으로 무죄다.

 

이렇게 결론이 나지 않아 한국 사회에서 갑론을박이 이뤄지는 사건을 미 국무부가 정부의 부패사건으로 결론을 내어 대표사건으로 뽑아 버린 것은 정치검찰과 문재인 정부를 무너트리기 위해 갖은 난도질을 일삼던 미래통합당, 성조기 부대를 비롯한 보수 적폐 세력들에게 힘을 실어준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번 ‘2019 국가별 인권보고서’ 외에도 주한 미국대사 해리스는 문재인 대통령이 종북좌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며 무례한 소리를 지껄였으며, 최근에는 정부의 개별관광을 비롯한 남북협력 구상에 대해 협의해야 한다고 내정간섭에 해당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2019 국가별 인권보고서’는 결국 대한민국 정부를 흔들고 싶어 하는 미국의 속내가 드러난 명백한 증거이다.

 

우리는 미국의 내정간섭, 선거개입 행위를 강력히 규탄한다.

 

최소한의 의료보험도 보장하지 않아 국민의 생명권조차 지키지 못한 미국은 지금까지 인권과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다른 나라 정치에 개입해왔다.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전쟁을 일으켰던 이라크까지 가지 않더라도, 미국 CIA가 가장 성공적인 해외 공작이라고 자평한 5.16 군사 쿠데타, 전두환의 계엄군 이동을 묵인한 광주학살 등 우리나라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땅에서 진행된 모든 내정간섭행위는 국민의 투쟁으로 파탄이 나고야 말았다. 우리는 촛불혁명을 만든 위대한 국민과 함께 미국의 내정간섭, 선거개입 행위를 파탄을 내고, 자주와 평화, 민주주의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고야 말 것이다.

 

미국은 내정간섭, 선거개입 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이 땅을 떠나라

 

2020년 3월 16일

용산구 국회의원 예비후보 민중당 김은희 선거운동본부

 

-친북 좌파신문 자주시보-

 

親北学生団体米大使公邸侵入奇襲デモこの!」

                    米大使公邸横断幕げる韓国大学生たち=18ソウル(AP)

 

韓国親北朝鮮団体韓国大学生進歩連合大進連)」所属する男女1718ソウルにある米大使公邸敷地侵入米国在韓米軍駐留費負担増要求していることを非難するデモをった警察侵入しようとした19建造物侵入などのいで拘束した

 

大進連昨年来北朝鮮金正恩キム・ジョンウン朝鮮労働党委員長礼賛する集会開催日韓対立今年には三菱重工業系列会社日本メディアのソウル支局それぞれが入居する建物不法侵入してデモを強行した

 

聯合ニュースによると、17はしごで公邸建物前横断幕げてハリス米大使はこのなどと主張したハリス大使らは不在だった米大使館懸念韓国側公館保護強化めた

 

釜山日本総領事館でも大学生らが侵入してデモを事件があった

 [ 한국의 친북 단체 '한국 대학생 진보 연합"에 소속 된 남녀 17 명이 18일 서울에 있는 미 대사관저 부지에 침입하고 미국이 주한 미군주둔 비용의 부담 증가를 요구하고있는  것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침입하려고 한 2 명을 포함한 총 19 명을 건조물 침입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한국 대학생 진보 연합은 작년 이래 북한의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예찬하는 집회를 개최. 한일 갈등에 관련되어, 올해 7 월에는 미쓰비시 중공업의 계열사와 일본 언론의 서울 지국에 각각 입주한 건물에 불법 침입해 시위를 강행했다.

  

연합 뉴스에 따르면, 17 명 사다리에서 관저의 담을 넘어 건물 앞에서 현수막을 펼치고 "해리스 (미 대사)은이 땅을 떠나라"라고 주장했다. 해리스 대사들은 부재였다. 미 대사관은 강한 우려를 표시 한국정부측에 공관의 보호 강화를 요구했다.

  

부산 일본 총영사관에서도 7 월에 대학생들이 침입 해 시위를 벌이는 사건이 있었다.]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 18일 오후 서울 중구 주한 미국대사관저에서 방위비분담금 협상 관련 기습 농성을 하기 위해 담벼락을 넘고 있다. 2019.10.18.

 

 

 

 한국대학생진보연합 소속 회원들이 미국 대사관저 앞에서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반대하는 기습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페이스북 갈무리]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 4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에 올라 지소미아 파기 방해, 방위비 분담금 인상 압박 등을 주장하며 미국 규탄 기습시위를 하고 있다. 2019.10.04. photocdj@newsis.com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학생들이 31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초청 한국 대학생 특별 대강연회 요청 기자회견에서 연설 초청장 전달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19.1.31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회원들이 23일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환영하는 캠페인을 열고 행진을 하고 있다

 

한국대학생진보연합 관계자들이 29일 오후 서울 중구 미쓰비시 상사 앞에서 열린 '강제징용 사과 안하는 일본 및 전범기업 규탄 기자회견'에 참석해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의 사진을 찢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19.07.29.

 

 

                                                          한국대학생진보연합 "조선일보 폐간하라"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회원들이 11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4대 매국노 선정발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분석과전망>양정철이 선거전략으로 실행한 폼페오의 한국지배전략

 

민중당만 빼고’ <분석과전망>양정철이 선거전략으로 실행한 폼페오의 한국지배전략

1-시민당은 진보를 거세했다.   

18일 창당된 더불어시민당은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이다. 미래통합당의 미래한국당과 다를 게 1도 없다. 민주연구원장 양정철이 주도하고 있다. 시민당은 진보개혁진영의 비례연합정당을 최초로 제기해 추진하던 정치개혁연합당을 내치면서 출범을 했다. 그 과정에서 특히 민중당 등을 배제했다. 치명적이다.

양정철은 머지않아 다수의 민주당 현역의원들을 불러들일 것이다. 당선 가능한 비례후보에 넣을 인사도 애초 7명에서 더 많이 늘릴 것이다. 손혜원 정봉주의 열린민주당의 약진이 계속될 경우 이를 저지한답시고 민주당 비례후보를 앞 번호에 배치할 수도 있다.

 

양정철은 왜, ‘정치개혁연합당을 내쳤으며 민중당을 배제했을까?”

시민당은 정개련에 속해있던 민중당에 대해 이념논란이, 녹색당에 대해서는 성소수자 의제가, 미래당에 대해서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문제가 된다고 했다. 중도층 표심 잡기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극히 현실적이다. 양정철은 그 논리에 따라 왼쪽 자리인 진보를 과감하게 거세했다. 그 자리에 들어올 수 있었던 재야 원로 등 정개련을 내치고 미니정당들로 채워놓았다. 시민당은 시민사회진영을 아우르고 있다는 말을 한다. 정치수사조차 되지 못하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시민당에 집결해있는 원외정당들은 시민을 위하여만 빼면 시민사회진영을 전혀 대표하고 있지 않다. 선거 시기에 급조된 것들로 듣도 보도 못한 미니정당들이다. 전형적인 선거공학적 셈법이다. 양정철이 정개련을 내치고 민중당을 배제한 것은 이처럼 우선, 의회지형에서 친문세력을 넓히려는 의중이다. 양정철이 정개련을 내친 것은 명백히 선거공학이다. 그렇지만 민중당 배제에 대해서는 선거공학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가 없다.

 

2-핵심은 폼페오다.

 

한국은 미국의 승인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

2년 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한 말이다. 한국이 미국에 얼마나 높은 수준에서 종속돼 있는 지를 이만큼이나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말은 그리 흔치 않다. 트럼프 입장을 충실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집행하는 게 주한 미 대사 해리 해리스다. 해리스는 주한미군 방위비 6조원 인상을 그대로 수용할 것을 문재인 정부에 대놓고 압박했다. 그는 최근에는 문 대통령이 남북협력 사업으로 제기한 개별방북에 대해 한미워킹그룹에서 논의해야한다며 빗장을 걸기도 했다. 사실, 정상적인 국가 간에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많은 국민들이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냐며 분노했다. ‘해리스가 총독이냐’. 민주당 내에서는 그러한 극단적 반발이 나오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종북좌파에 둘러쌓여 있다는 말이 있다

해리스가 몇 달 전 한국의 정치인들을 불러놓고 했다는 말이다. 내정간섭을 훌쩍 뛰어넘는 발언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총독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역시 정상적인 국가 간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형사고라 해도 된다. 대형사고는 더 있다. 미 국무부가 최근 인권보고서를 통해 조국사건에 대해 문재인 정부 하에서 일어난 대표적 부패사례라고 규정한 것이다. 재판이 채 끝나지도 않은 다른 나라의 사건에 대해 규정한다는 것은 법리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그리고 국제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트럼프의 승인 발언이 한미관계가 식민지 같은 주종관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해리스의 주한미군 주둔비 인상 압박과 종북발언 그리고 미 국무부 인권보고서의 조국사건 규정은 미국이 문재인 정부를 얼마나 심하게 압박하고 있는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국의 한국지배전략을 기획하고 있는 자가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오라는 것도 보여준다. 폼페오가 지휘하고 있는 미국의 한국지배전략은 이처럼 총체적이며 촘촘하다. 이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가랑이 밑을 기고 있다는 말은 수정돼야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폼페오의 가랑이 밑을 기고 있는 것이다.

 

폼페오를 비롯해 미국의 지배주의자들이 한국지배전략 상 한국 정치흐름과 관련해 주목하고 있는 대목이 있다. 촛불항쟁이 시대적 의제로 제기한 적폐청산.사회대개혁이다. 미국다운 태세다. 그만큼 전략적이다. 적폐청산.사회대개혁은 본질적으로 한국사회의 자주와 우리겨레의 통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성질이다. 한국사회의 적폐는 민주주의 차원에서의 일반적폐로서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더 깊게 들어가면 친일적폐와 친미적폐, 반통일적폐 등 본질적으로는 반민족적폐이기 때문이다.

적폐청산.사회대개혁이 자주.통일의 궤도로 올라서게 되면 미국은 한반도에서 손을 떼야 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 상황을 미국은 쉽게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단순 추측이나 가정이 아니다. 4.19 이후 상황을 비롯해 1979년 부마항쟁 이후 그리고 6월항쟁 이후 상황에서 확인되는 역사적 사실들이다. 미국은 민중항쟁이 한국사회의 근본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을 가로막고 왜곡하기 위해 4.19에 대해서는 5.16쿠데타로 부마항쟁에 대해서는 12.12신군부 쿠데타로 대응했다. 6월항쟁에 대해서는 직선제 개헌은 허용하되, YS 3당합당과 DJ DJP연합을 통해 6월항쟁의 의의를 오도.왜곡하는 것으로 대응을 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들은 미국의 현 시기 한국지배전략이 적폐청산.사회대개혁이 자주.통일의 궤도로 올라서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저지하거나 왜곡시키는 데에 맞춰져 있을 것임을 확정해준다. 적폐청산.사회대개혁을 자주.통일과 분절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략이다. 구체적으로는 한국 민중이 치고 있는 반적폐전선 무력화다.

 

3-양정철의 민중당 배제는 반적폐전선을 약화시키려는 폼페오의 기획이다.

 

적폐청산.사회대개혁을 자주와 통일로 발전시켜나갈 주체는 촛불항쟁 그리고 그 이후 촛불항쟁을 완성시키려는 수많은 흐름들이 확정해주고 있듯 진보개혁적 국민들이다. 촛불인 것이다. 그 주체 중에 하나가 민중당이다. 한국전선운동이 치고 있는 반적폐전선의 요구에 따라 민중당은 적폐청산을 성과적으로 진행하고 그것을 사회대개혁으로 귀결시키되 핵심적으로는 그 전반의 활동을 자주와 통일로 올라서도록 하는 데에 이바지 하게 된다. 민중당의 이러한 역할은 한국민중의 반적폐전선을 무력화시키려는 폼페오의 전략과 정면에서 충돌한다. 이를 정확히 간파한 게 양정철이다. 양정철은 더 나아가 폼페오의 전략을 실천적으로 접수하기까지 했다. 그게 민중당 배제의 본질이다. 폼페오는 결국, 양정철을 통해 민주당이 적폐청산.사회대개혁이 자주와 통일로 발전하는 것에 역할을 못하도록 하는 가운데 민중당이 적폐청산.사회대개혁을 자주와 통일로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작동할 수 없도록 민중당 배제를 결정한 것이다. 반적폐전선의 약화를 의미한다. 시민당의 민중당 배제는 단순히 선거공학을 뛰어넘어 폼페오가 기획하고 대통령 문재인의 복심 양정철이 실행한 미국의 정치인 것이다.

 

4-진보개혁적 국민들은 반적폐전선을 굳건하게 칠 것이다.

 

폼페오의 반적폐전선 무력화에 대해 한국사회의 진보개혁진영은 그러나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촛불시민들이 촛불항쟁 이후 여러 투쟁을 벌이는 과정은 미국의 본질을 비롯해 한미관계의 종속적 관계 그리고 그것이 한국의 정치지형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촛불들은 투쟁을 통해 미국이 적폐의 본산이며 사회대개혁의 결정적 걸림돌이라는 인식을 얻어가고 있는 것이다. 소중하다. 머지않아 자주통일시대와 맞물려 분단을 넘어 통일로 지향될 역사적 흐름이다.

 

촛불들은 투쟁과정에서 적폐청산.사회대개혁이 쉽게 실현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굳게 인식할수록 적폐청산.사회대개혁을 활동의 기치로 더욱 굳게 움켜쥐고 있다. 시민들은 양정철이 정개련을 내치고 민중당을 배제하는 것에서 적폐청산.사회대개혁을 홀시하는 걸 읽었다. 그 안에 질펀하게 흐르는 민주당의 오만함 혹은 욕심도 제대로 짚어냈다. 아울러 폼페오의 가랑이 밑에서 박박 기는 꼴사나운 모습도 들여다봤다. 민주당 내에, 시민당이 민주원로를 내치고 그 자리에 정체성도 불분명한 신생 급조 미니원외정당으로 채우고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이유다. 심하게는 양정철이 오만 바이러스 욕심 바이러스 그리고 사대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면서 총선이 끝날 때까지 자가격리를 시켜 치료해야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정당하다

촛불들은 이번 총선에서 반적폐전선을 강력하게 치고 있다. 친일적폐와 친미적폐 그리고 반통일적폐를 정면에서 겨냥하는 전선이다. 그 전선은 아울러 적폐청산.사회대개혁에 불철저한 기회주의자들을 퇴출시켜내는 투쟁이기도 하다

-친북 좌파 자주통일연구소-

 

 

미 국무부, '주한대사관저 월담' 인사 국회의원 출마에 "자유 선거 지지"

지난해 10월 한국의 대학생들이 서울 주한미국대사관저 담을 넘어 무단 침입했다.

미국 국무부는 주한 미국 대사관저를 무단 침입한 한국 시민단체 회원이 국회의원 출마 자격을 얻은데 대해 자유 선거의 원칙을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일부 정당의 반미 공약에 대해서도 표현의 자유를 존중한다며 미국과 한국의 민주주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국무부는 미 대사관저 침입으로 구속됐던 김유진 씨가 한국 민중당 비례대표 후보로 나선 것과 관련해 “미국 정부는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자유롭고, 공정하며, 투명한 선거를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국무부 관계자] “The U.S. government supports free, fair, and transparent elections around the world, including in the Republic of Korea.”

김 씨 등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회원들은 지난해 10월 미-한 방위비분담금 협상과 관련해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를 규탄하면서, 미국 대사관저에 담장을 넘어 침입한 뒤 농성을 벌인 혐의 등으로 기소됐습니다.

사건 직후 국무부는 “14개월 만에 일어난 두 번째 대사관저 불법 침입 사례”라며 강한 우려를 표명했었습니다.

지난 16일 보석 허가로 석방된 김 씨는 앞서 민중당의 청년 비례 후보 경선에 참가해 2위를 차지했고, 지난 5일 민중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7번을 배정받았습니다.

해리스 대사 추방을 요구해온 민중당의 총선 후보들은 16일 선거 출정식을 열고 “미국의 부당한 협박에 맞서는 국회의원이 될 것”이라고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국무부 관계자는 민중당과 한국 일부 시민사회단체의 해리스 대사 추방 요구와 관련해 “표현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나타냈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미국과 한국 같은 민주 사회가 공유하는 근본적인 가치”라는 설명입니다.

[국무부 관계자] “Freedom of expression is a fundamental value shared by democratic societies like the United States and the Republic of Korea. The State Department has full confidence in Ambassador Harris in his ongoing efforts to advance U.S. policy and strengthen the U.S.-ROK alliance.”

그러면서도 “국무부는 미국의 정책을 진전시키고 미-한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하는 해리스 대사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기존 입장을 거듭 확인했습니다.

VOA 뉴스

 

 

 

"전략투표란 선거구 연합후보 투표는 지역구에서 단일후보로 추대하고 후보를 출마하지 않은 곳에서는 출마한 연립정당 후보자를 전략 투표하고 비례의원 후보자에게는 자당(自黨) 후보자에게 투표하게 하는  방법이다"
-국회의원선거의 경우 득표율 15%이상을 기록하면 선거에 사용한 모든선거비용을 100%돌려받을 수 있으며, 10%이상 득표하게 되면 선거비용의 50%를 돌려받을 수 있다
-비례대표 국회의원선거에서는 후보자명부에 올라 있는 후보자 중 당선인이 있는 경우 당해 정당이 지출한 선거비용의 전액을 보전 받을 수 있다[선거와 부도정당]

 

한국은 민주국가(민주공화국)로 진보세력을 인정하지만 좌파 사회주의 국가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파는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를 지지하는 분들을 말한다면 좌파는 노동계급의 령도 노농연맹(勞農聯盟)의 사회주의 국가(인민공화국이나 사회주의 공화국)를 지지하는 분들을 말한다

우파는 입헌군주국을 인정하지만 좌파는 공화국만을 인정한다

한국정부 내부 좌파는 친북세력 즉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북한정부(주체사상, 김일성주의)를 인정하는 세력을 지칭하고 있으며, 우파는 북한 김일성 정부(김일성 가계 김정일, 김정은정부)를 사회주의 국가 독재체제나 전체주의 독재정부로 인정하는 세력들을 지칭하고 있다

우파와 좌파에서 진보와 보수와도 구분해야 한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전체주의(독재주의)이며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이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 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국가)는 우파세력으로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 자유무역)를 지향하는 세력을 보수세력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생존권, 보호무역)를 지향하는 세력을 진보세력으로 지칭하고 있다"

 

 

-우파 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 이론[民營資本體制]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聯邦共和國)

-국정(國政, 民國)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이다

-중화민국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기초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이다.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있다.

-국정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 [일본국 헌법]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프랑스 국민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규정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 보완된 인권과 국민주권의 원리, 그리고 2004년 환경헌장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상기의 원리들과 각 국민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공화국에 결합하기를 희망하는 해외영토들에게 자유· 평등· 박애의 보편적 이념에 입각하고 그들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제도들을 제공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자유· 평등· 박애를 국시로 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원칙으로 한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개인과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이를 준수하며 수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국민투표와 자유선거는 국민에 의한 최고의 직접적인 권력행사이다.

러시아연방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이 허용된다.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국가이념이나 의무적 이념으로 규정될 수 없다.

러시아 연방에서는 정치적 다양성과 복수정당이 허용된다.

모든 사회단체들은 법앞에 평등하다. [러시아연방 헌법]

*미합중국 헌법[민주국가 헌법]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http://blog.daum.net/007nis/15876066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전문

http://blog.daum.net/007nis/15871495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성향 독일 바이마르 헌법(1919)과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로부터 해방법률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독일 통일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048

*군국주의 대일본제국 헌법 전문과 평화주의 입헌군주제 일본국 헌법 전문[민주국가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4623

*러시아 연방 헌법[Конститу́ция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민주국가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6072

*中華民國 憲法(중화민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57658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

http://blog.daum.net/007nis/15875575

*몽골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1736

 

-좌파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공화국) 이론[國營資本體制]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라오스 그리고 쿠바 등 5개국에 불과하다.[노동계급의 노농동맹(공산당) 령도(領導, 지도) 인민의회정부론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주의 국가](많은 분들은 노동자 국가를 지향ㄹ하고 있는 이탈리아 파시즘이나 독일 나찌즘을 극우라고 표현하지만 좌익 파시즘으로 표현하고도 있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 3 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6069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3485

*베트남 헌법(2013년 개정)[민주공화국 형태 사회주의 헌법]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는 인민에 의한(民治), 인민을 위한(民享) 인민의(民有) 사회주의 법치국가이다-

http://blog.daum.net/007nis/15876070

*북한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3공화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476

 

1957년 10월 15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중공중앙)이 ‘우파분자 분류 표준에 관한 통지’를 발표하였다.[모택동주의 노선 중국 공산당이 분류한 자본주의민주주의 세력(수정주의자) 우파와 극우세력 동향]
이에 따른 우파는 다음과 같다.
1) 사회주의 제도를 반대하는 자 .
2) 무산계급의 독재와 민주집중제를 반대하는 자 .
3) 공산당의 국가 정치생활 중의 영도적 지위를 반대하는 자 .
4) 사회주의와 공산당을 반대함으로써 인민의 단결을 분열시키려는 자 .
5) 사회주의를 반대하고 공산당을 반대하는 소집단을 조직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 일부 분야 혹은 일부 계층 단위에서의 공산당의 영도를 뒤엎으려는 자 공산당과 인민정부를 반대하는 소란을 선동하는 자.
6) 앞에서 규정한 우파분자의 범죄활동을 지지하고, 관계를 맺으며 또 통신하여 혁명조직의 기밀을 보고하는 자.

통지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극우분자로 분류했다.
1) 우파활동 중의 야심가, 지도분자, 주모분자와 핵심 분자.
2) 공산당과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강령성 의견을 제출하고 이 같은 의견을 적극적으로 고취한 자.
3) 사회주의 반대활동에 특별히 악랄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한 분자.
4) 역사적으로 일관되게 반공산당, 반 인민 활동을 전개해 왔으며 최근의 우파활동 전개 시에 적극적으로 반동활동을 한 자.

 

중공중앙의 이 통지는 반우파 투쟁을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건국 후사회주의 개조과정에서 후펑(胡風본명은 장광런張光人) 비판 등의 부르주아사상 비판 캠페인으로 위축되어 있었던 지식인의 활동을 적극화시키기 위해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운동을 제창했다.
중국문화가 꽃핀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자유로운 언론활동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마오쩌둥(毛澤東)이 명명했고, 1956년 5월 중국공산당 선전부장 루딩이(陸定一)가 '백화제방·백가쟁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 지식인의 자유로운 발언을 호소했다.
당초 지식인의 반응은 매우 소극적이었으나 1957년 5월 '언자무죄(言者無罪 : 무엇을 말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라는 방침에 고무, 일제히 발언하기 시작, 중국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속출했다.
마오의 생각은 이 운동을 통해 이왕의 사회주의 건설을 정당화하고 강화하자는 것이었으나 순식간에 체제를 부정하는 단계로까지 치닫자 자신이 고무한 이들의 발언을 "'우파' 분자에 의한 반당·반사회주의적 '독초'"라고 매도하고, 같은 해 6월 '반우파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의 모순을 비판했던 공산당원들 다수가 반우파 분자로 몰려 숙청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였다. 29세이던 1957년 당적박탈과 강등 조치를 당한 주룽지는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이 ‘우파분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5년 동안 노동개조를 받기도 했다. 그는 마오쩌둥이 사망한 2년 뒤인 1978년 당적을 회복하고 사회과학원 공업경제연구실 주임에 임명되면서 ‘개혁 총리’로서의 미래를 예비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일본 공산당 "2단계 민주연합정부론과 미래에 사회주의적 변혁을 목표"

http://blog.daum.net/007nis/15875883

일본 공산당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당의 기본 방침으로 한다

일본 공산당은 2단계 혁명이론 NLPDR노선으로 우선 대미 종속과 대기업의 지배에 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미래에 사회주의적 변혁을 목표로 한다

1단계로는 반미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며 2단계로는 노동계급 령도 노농동맹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 국가 수립이다

1단계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革命)

2004 1월 제 2 차 당대회 개정 강령에서 일본 사회가 필요로 하는 변화는 사회주의 혁명(社會主義 革命)이 아니며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 革命)과 민주연합정부(民主聯合政府)'의 목표로 내세웠다

대기업 재계와 대미 종속 세력으로부터 일본 국민(日本 國民)의 이익을 대표하는 세력에 권력 이양을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혁명이라고 평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가능한 민주적 개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대기업 재계와 대미 종속 세력에서 일본 국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세력으로의 권력 이양을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혁명으로 자리매김하고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가능한 민주적 개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일본 공산당은 현재 일본 사회가 요구하는 변화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다음의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하였다

.국가의 독립 · 안보 · 외교 분야(分野)

대미 종속을 타파하고 미일안전보장조약(日米安全保障条約)의 폐기(廃棄)와 비동맹(非同盟 중립(中立)의 일본을 실현한다. 미국과 대등 평등(対等平等)

의 우호 조약(友好条約)을 맺는다 등등

.헌법(憲法)과 민주주의(民主主義) 분야(分野)

()헌법 전문을 포함한 모든 내용을 지키고, 특히 평화적 민주적 조항(平和的民主的諸条項)의 완전한 이행을 목표로 한다.

()의회 민주주의의 체제 반대 당을 포함한 복수 정당제 선거에서 다수를 얻은 정당 또는 정당 연합이 집권하는 정권 교대(政権交代)는 당연히 견지한다.

()18세 선거권을 실현한다.

()일본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억압하는 모든 시도를 제거한다. 남녀평등(男女平等)의 권리(權利)를 모든 분야에서 옹호하고 지킨다.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고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에 철저를 도모한다. 등등

.경제적 민주주의(経済的民主主義)의 분야(分野)

()장시간 노동과 일방적 해고 규제를 포함해 유럽 주요 자본주의 국가와 국제조약 등의 도달점도 근거로 '규칙 있는 경제사회'를 실현한다.

()대기업(독점 자본)에 대한 다양한 민주적 규제(民主的規制)와 군축(軍縮), 불필요한 공공 사업의 중지, 대기업 · 재벌 우대 세제의 재검토를 재원으로 한 사회보장의 충실 등등.

 

이상(以上)의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革命)에 의해 일본은 미국의 사실상의 종속국의 지위에서 벗어나 진정한 주권을 회복하고, 국내적으로도 국민이 처음으로 나라의 주인공이 된다. 또한 일본은 군사적 긴장의 근원임을 멈추고 평화의 견고한 초석으로 바뀐다.

 

이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 革命)에 대한 입장 1961년 강령에서는 ""일본의 당면한 혁명은 미국 제국주의와 일본의 독점 자본의 지배, 두 적()에 반대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혁명, 인민민주주의 혁명(人民 民主主義 革命)이다"라고 되어 있고, 1994년의 강령까지 거의 동일한 표현을 했다

2004년 강령 개정 당시에는 '다수자 혁명'이나 '의회의 다수를 얻어 혁명의 노선'이라는 설명이 이루어졌다

 

민주주의 혁명의 과정: 통일전선에 근거한 민주연합정부(民主連合政府) 구상(構想)

일본 공산당은 일본 공산당(日本共産党)과 통일전선(統一戦線)의 세력이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어 국회에서 안정된 과반수를 차지한다면 통일전선(統一戰線)의 정부(政府) 즉 민주연합(民主聯合) 정부(政府)를 만들 수 있다는 입장으로 단독 정권(単独政権)이 아닌 통일전선(統一戦線)에 기반한 연합정권(連合政権)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 "국회를 명실상부한 최고기관으로 하는 의회제 민주주의 체제(議会制民主主義 体制)

, 반대당(反対党)을 포함한 복수정당제, 선거에서 다수를 얻은 정당 또는 정당연합이 정권을 담당하는 정권교대제(政権交代制, 정권교체)는 당연히 견지한다.

 

 '통일전선(統一戦線)'은 역사적으로 1945년의 강령에서는 모든 민주주의 세력의 결집에 의한 인민전선(人民戰線)의 결성 올바른 실천적 목표 아래 협동할 수 있는 모든 단체 및 세력과 통일전선(統一戰線)의 결성한다고 되어 있다

1947년의 강령에서는 광범위한 민주전선으로 1961년부터 2004년까지 강령에서는 '민족 민주 통일전선(民族民主統一戦線, NLPDR)'으로 표현 되었다

 '민족민주통일전선 정부(民族民主統一戦線政府)' '혁명정부(革命政府)'로 전환한다고 하고 있었지만, 2004년 강령 개정에서는 이 규정은 삭제 되었다.

 

2단계 사회주의적 변혁(社会主義的変革)

일본 공산당은 즉각 민주주의 혁명 이후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의 합의를 전제로 국회의 안정된 과반수를 얻어 사회주의를 위한 권력을 만들고 다음의 사회주의적 변혁(社会主義的変革, 사회주의 국가)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극복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社會)로의 진전(進展)을 도모(圖謀)

.주요 생산 수단의 소유, 관리, 운영을 사회의 손에 옮기는 생산수단(生産手段)의 사회화(社会化)

.민주주의와 자유의 성과(成果), 자본주의 시대의 가치 있는 성과(成果)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 발전시킨다

.사상 신앙의 자유, 반대 정당을 포함한 정치 활동의 자유를 엄격하게 지킨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사상 신조의 자유, 반대 정당을 포함한 정치 활동의 자유는 엄격하게 보장된다."며 일당 독재(一党独裁制)와 지도 정당제(指導政党制)는 채택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또한 소련형 사회주의(連型社会主義)의 관료주의·전제(専制)의 잘못은 반복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선언"에 더 자세히 설명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주로 이념적인 내용이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헌법(憲法), 정부(政府), 군비(軍備), 의회(議会), 사유 재산제(私有財産制)의 범위 등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일본 공산당은 이러한 미래 세대가 창조적으로 해결 과제이며, 지금부터 고정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가 고도로 발전하면 착취와 억압을 모르는 미래 세대는 "원칙적으로 일체의 강제가 없는 국가 권력 자체가 불필요하게 되는 사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도 없고 억압도 전쟁도 없는 진정한 평등 자유로운 인간 관계로 이루어진 공동 사회에 대한 전망이 열린다고 한다.

또한 이 사회주의적 변혁' 1961년 강령에서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표현이었다는 것으로, 1994년에 사회주의적 변혁이라는 표현으로 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의 낮은 단계이다라고 하는 두 단계 발전론이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정설이었으나 마르크스, 엥겔스 자신은 그런 구별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두 단계 발전론을 그만두고 2004년 강령 개정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라는 표현으로 변경되었다 .

 

 

대북정책(先 북한개혁, 後 남북통일)

1단계 북한지역의 민주연합정부 구성

북한지역의 민주연합정부론은 북한정부 입장으로 북한 내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를 지지하는 민주세력이 노동계급의 령도 노농연맹(勞農聯盟)의 사회주의 국가(인민공화국이나 사회주의 공화국)를 지지하는 전체주의 김정은 독재정부를 타도하고 개혁개방세력  즉 민주화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북한정부에서도 북한정부 의회 내부 민주연합정부론 우파세력이 권력을 장악해야 가능하다

-주체연호(주체사상, 김일성 김정일주의) 폐지

-김일성 가계 권력(주체연호 세습제 좌익군정) 타도

-김정은 퇴진과 민주정부 수립

-북한 김정은 독재정부 붕괴는 국제적으로 친북 좌파세력 붕괴를 가져올 수 있다

 

2단계 남북민주연합 공동정부(민주국가) 수립

북한 지역 민주정부와 남한지역 민주정부의 연합으로 공동정부(민주국가)를 수립하는 방법이다

-노동계급의 령도 노농연맹(勞農聯盟)의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공화국) 타도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공화국) 수립

 

1989년 혁명과 국영자본체제 붕괴[동유럽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전체주의)!!

날짜:

1989 6 4 - 1991 12 26

지역:

유럽 및 구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

원인:

국영자본체제(국가자본주의 체제), 권위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의, 부정부패, 소련의 군사 점령, 경제 붕괴, 집단살해, 철의 장막, 종교 박해, 권력 남용, 강제노동, 숙청, 가난, 테러 등

목적:

경제적 자유와 민영자본체제, 유럽 통합, 자유 선거, 자본주의, 언론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인권, 노동권, 민주주의 등

 

종류:

시위 등 다양함

 

결과:

동구권의 몰락 폴란드, 동독,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평화적 정권 교체.

냉전의 종결

독일의 재통일

1989년 루마니아 혁명이 유혈 혁명이 됨

소련의 해체

소련의 초강대국 지위 몰락

1991년 인도 국민 회의가 신자유주의를 채택

러시아 연방이 탄생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

유고슬라비아 해체 및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

중국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 1989년 톈안먼 사건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해산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 철수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회의론 대두

유럽 통합의 진전

성별 선택 낙태로 동유럽의 성비 변화

동구권에 인터넷이 확산됨

동구권에서 소비자 운동이 대두함

예멘의 통일

발트 3국의 재독립

몽골, 아프가니스탄, 베냉, 예멘, 모잠비크, 앙골라, 콩고 공화국, 소말리아에서 공산주의 붕괴

북한의 고난의 행군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 종결

미국의 문화가 동구권 국가에 전파됨

NATO EU에 동구권 국가 가입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의 시장 경제 도입

미국이 전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발돋움

신세계 질서

소비에트 전후 충돌의 첫 발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종결

   

 

 

                                                           Red stars are removed as communism relinquishes its grip in central Europe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a.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국영자본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

b.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인민의(民有,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聯邦共和國).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공화국 대통령, 국가주석이나 입헌군주국 수상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 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다.

[미합중국 수정 제22조(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
*이 수정조항은 1947년 3월 24일에 발의되어 1951년 2월 27일에 비준됨
제1절 누구라고 2회 이상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으며 누구라도 타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임기 중 2년이상 대통령직에 있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한 자는 1회 이상 대통령직에 당선될 수 없다
다만, 본 조가 효력을 발생하개 될 때에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 자가 잔여임기 중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hwp

 미합중국 헌법.hwp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

미합중국은 공화당 출신 링컨정부의 노예폐지와 민주정부 수립 이래 민주공화국(민주국가) 형태 연방국가이다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신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며,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본래 공화당은 미국식 자본주의(실용주의)와 공화 연방제를 우선시 했고 민주당은 미국식 민주주의(, 자치정부와 의회정치)를 우선시 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공산주의 반대는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 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이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링컨의 민주국가 수립)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생존권=사회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에서는 개인의 생존권을 우선시 하는 중도 진보성향인 민주당과 개인의 자유권을 우선시 하는 중도 보수 성향인 공화당 등 두 정당이 선거정치의 중심을 이룬다.

각 정당은 폭 넓은 유권자층의 지지와 정치적으로 광범위한 이해관계자들을 모색하므로 양 정당은 일반적으로 중도적인 정책을 표방한다. 양 정당의 유권자층은 비교적 독립적인 유권자층으로 서로 중복된다.[미국 민주당은 민주국가 입장에서 자유민주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로 공존하고 있으며 미국 공화당은 민주공화제 연방국가 입장에서 자본주의자(실용주의자), 애국주의자와 자유민주주의자(서민 민주주의자)로 종존하고 있다]

 

오늘날 중도 진보냐 종도 보수냐는 정책개발에 달려 있다

 

평민층 지지하는 성향 정책은 진보이며 중산층 지지하는 성향 정책은 보수이다

 

 

1. 미국의 공화당

공화당(共和黨, Republican Party)은 민주당과 함께 미국의 양대 정당 중 하나이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정치만평가 토머스 네스트가 자신의 정치만평에서 민주당을 당나귀로, 공화당을 코끼리로 표현한 이래 코끼리가 당의 상징이 되었다.

 

1950년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이래 1994년까지 40여년 동안 미국 의회에서 소수당으로 있었다. 1994년 중간 선거에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켰는데 이를 깅그리치 혁명이라고 부른다. 뉴트 깅그리치가 이끌었던 공화당은 40년 만에 미국 의회의 다수를 장악하는 전대미문의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2006년에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게 다시 역전되었다. 2010년에 치러진 중간 선거에서 티파티 운동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민주당을 누르고 미국 하원 제1정당이 되었다.

 

(1) 공화당의 노선

보수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우파 정당이다. 따라서 수년 동안 공화당원들은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을 강력히 반대해왔으나 결국 찬성을 표명한 이후에는 다소 덜 보수적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연방 상원의원이 이끈 보수주의 개혁 운동 이후 더욱 강경하고 보수적인 성격을 갖게 되고 미국 민주당과의 정치적 대립이 더욱 격화 되었다. 2010년 중간선거에서 티파티 운동이 공화당 하원선거 경선에 대거 참여하면서 더욱 보수적으로 이동하였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은 연방 정부의 축소, 사회 보수주의, 친 재벌 정책 등의 강경적 보수 노선을 이어가고 있다.

공화의 이념 주류는 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사회보수주의이고 비주류는 중도주의, 재정보수주의, 자유지상주의, 우익대중주의, 신보수주의, 고보수주의 등이다

정치성향은 중도우파에서 우익이다[중도 보수에서 보수이다]

 

(2) 공화당의 역사

공화당의 전신은 현재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토머스 제퍼슨이 이끈 민주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친()앤드루 잭슨파와 반()앤드루 잭슨파로 분열되었다. 이후에 1828,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반잭슨파는 연방주의자, 남부 민주공화당원, 보수주의자들을 결집하여 휘그당을 창당하였다. 휘그당은 민주당과 양대 정당으로 거듭났으나, 밀러드 필모어 이후 대통령 당선자를 배출해내지 못했다. 공화당은 1854년 캔자스 네브래스카 법이 입법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노예제 찬성론자와 노예제 반대론자들 간의 타협으로 여겨지던 1820년 미주리 타협과 1850년 타협이 무효화 되어버림으로써 일어난 정치적 파국과, 이것이 일으킨 민주당과 휘그당의 분열로 창당된 반노예제를 기치로 건 정당이었다. 이런 정당이 2세기를 거치면서 보수 가치를 내건 정당으로 발달한 데에는 1896년부터 1932년까지 진행되었던 미국의 진보운동의 영향이 컸다. 이 진보운동 기간동안 공화당은 보수 정당으로 거듭났고, 민주당은 진보(리버럴)정당으로 노선이 옮겨 갔다. 이후 대공황이 오고, 뉴딜정책을 기점으로 다소 진보주의으로 옮겨갔으나 1960년대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연방 상원의원이 이끈 보수주의 개혁 운동을 겪으면서 다시 강경적 보수주의로 이동하였다.

 

공화당은 1854 3 20일 휘그당과 자유토지당이 통합하여 창당한 정당이다

 

a.자유토지당(Free Soil Party) 1848년에서 1852년 사이에 존속했던 미국의 정당이다. 마틴 밴 뷰런 전() 미국 대통령의 주도로 창당되었으며, 주로 뉴욕 일대에서 세력의 기반을 형성했다. 휘그당과 민주당의 옛 노예제 반대론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자유토지당의 주요 정책은 서부 개척지에 대한 노예제 확산의 반대였으며, 노예로부터 해방된 자유민들이 자유롭게 토지를 영유하는 것이 도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노예제보다 더 나은 방법이라 주장하였다. 자유토지당은 1854년에 공화당으로 흡수되었다

-노예제 반대

-서민 민주주의

 

b.휘그당(Whig Party) 1833년에서 1860년까지 존재했던 미국의 정당이다. 앤드루 잭슨의 정책에 반대하여 조직되었다. 왕정에 반대하는 영국 휘그당과 정치적으로 유사하다. 이 정당은 노예제와 노예제도를 둘러싼 남북의 날카로운 정치적 대립의 와중에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다가 결국 해산되었다. 미국 역사에서 1833~54년에 활동한 주요 정당이다

국가 발전 계획을 지지했지만, 점점 높아지는 지역 감정의 물결 속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휘그당이 정식으로 결성된 것은 1834년이었다.

 

존 퀸시 애덤스의 국민공화당은 1828, 183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잔당(미국 민주당)의 잭슨에게 참패를 당하여 큰 타격을 입었다(이 두 파는 민주공화당의 분열로 생겼음). 그러나 잭슨이 제2미국은행과 싸우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연방법거부에 정면으로 대항하자 반대파들이 결집할 기회가 생겼다. 헨리 클레이는 재정에 대해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및 남부 주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모아 여전히 보호관세나 연방정부가 지원하는 국내 개량사업의 추진 같은 국민 공화당의 정책이 타당하다고 믿는 사람들과 제휴시켰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휘그당에는 1830년대 중엽에 사라진 반()프리메이슨당 출신의 반프리메이슨 운동가들도 합류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을 '앤드루 왕'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독재적인 행정에 반대하여 느슨한 제휴관계를 맺고 있던 집단들이 휘그당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휘그당이라는 이름은 왕의 특권에 반대하는 영국 정당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러나 휘그당은 오로지 잭슨과 그의 정책에 대한 공통된 혐오(그리고 나중에는 공직에 대한 갈망)만으로 뭉친 휘그당은 결정적인 선거 공약을 하나도 개발하지 못했다. 1836년에 휘그당은 각각 동부와 남부 및 서부를 대표하는 3(대니얼 웹스터,  L. 화이트,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대통령 후보를 내세워 각 지역에 호소하는 한편, 표를 분산시켜 하원에서 결선 투표를 하려는 전략을 세웠지만 실패했다.

 

1840년에는 지역적인 접근 방식을 버리고 전쟁 영웅인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해리슨은 '통나무집' 이미지를 앞세운 유세에서 지지자들의 지속적인 선거 운동을 바탕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1840년에 휘그당은 백악관과 의회를 장악한 뒤 미국의 가장 유력한 정당이 될 준비를 갖추고 헨리 클레이의 국가주의적 계획안을 법제화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해리슨은 취임한 지 한 달도 채 지나기 전에 죽었고, 그의 후임자인 부통령 존 타일러는 미국은행 재설립을 비롯한 휘그당의 주요입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존 타일러는 당을 탈당하였다.

 

1844년에 휘그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클레이는 국민들에게 퍼져 있던 팽창주의의 인기를 과소평가하고 텍사스 병합에 반대했기 때문에 선거에서 제임스 포크에게 패배했다. 1840년대말에 이르자 '양심적인'(노예제에 반대하는) 휘그당원과 '면화'(노예제에 찬성하는) 휘그당원이라는 파벌이 나타나면서 휘그당의 결속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 색인 : 면화 휘그당원). 1848년에 휘그당은 다시 전쟁영웅인 재커리 테일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노예제에 대한 남북 갈등에서 헨리 클레이가 제안하고 밀러드 필모어(1850년에 테일러가 죽자 부통령으로 대통령직을 승계)가 서명하여 입법화된 '1850년의 타협'은 양심적인 휘그당원들을 당에서 완전히 소외시켰다.

 

휘그당은 다시 전직 장군에게 관심을 돌려 1852년에 윈필드 스콧 장군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북부와 남부가 노예문제를 둘러싸고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기 때문에 '미국 헌법과 연방에 대한 변함없는 애착'이라는 휘그당의 슬로건은 더이상 전국적인 호소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남부의 많은 휘그당원들은 주권(州權)을 주장하는 민주당(주권 민주당)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으며, 스콧이 얻은 선거인은 고작 42명뿐이었다. 1854년까지 대다수의 북부 휘그당원들은 새로 결성된 미국 공화당에 합류했다. 당이 존속하는 동안 휘그당을 계속 지지한 지역은 남부의 주 가운데 연방 탈퇴보다는 타협을 택한 경계주들뿐이었고, 휘그당을 계속 지지한 계층은 지역 갈등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기를 거부한 보수주의자들뿐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휘그당원들은 대부분 1850년대 후반에 국수주의적인 노우 낫씽당(不知黨)에 들어갔고, 1860년에 정당들이 남북으로 분열 된 뒤에는 입헌연방당을 지원했다.

-경제적 민족주의

-사회보수주의

-보호 무역

-산업화

 

2. 미국의 민주당

민주당(民主黨, Democratic Party)은 공화당과 함께 미국의 양대 정당이다. 2009 1 21일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행정부)의 지도 아래 상원에서 최소 58, 하원 257석으로 입법부에서 다수당(2007년 당시 기준)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주지사도 28곳으로 모두 과반 이상을 점하고 있었으나, 2010년 중간 선거에서 여당 사상 최악으로 참패하여 주지사는 20, 상원 의석은 53, 하원 의석은 193명으로 줄었다. 2019년 현재 상원 의석은 45(원내에서는 무소속 2명과의 연합으로 47) 하원 의석은 235석이며 당의 상징은 당나귀이다.

(1) 민주당의 노선

평균적으로 중도좌익적 사회자유주의 입장을 취하는 정당이다.

미국 민주당은 빅텐트 정당이기 때문에 중도우파 성향의 온건 보수 정치인부터 사회주의 좌익 성향인 정치인들까지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지만, 주류는 주로 사회자유주의(리버럴)이다.

수 십 년 동안 민주당원들은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을 찬성해왔으며, 공화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주의적·민주주의적으로 여겨진다. 뉴딜정책 이후 공화당 내에서도 진보적인 인사가 증가하여 양당의 이념적 차이가 줄었다. 그러나 1960년대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연방 상원의원이 이끈 보수주의 개혁 운동으로 공화당이 강경한 보수주의로 성향이 바뀌면서 미국 공화당과의 정치적 대립이 더욱 격화 되었다. 일례로 빌 클린턴은 재벌들의 세금을 인상했고, 로널드 레이건은 재벌들의 세금을 인하했다. 유권자들에 대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양당 간에 뚜렷한 차이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50%로 의견이 양분된 반면 2004년에는 양당의 정책이 확연히 다르다고 생각한 비율이 76%가 되어 1972년의 46%에 비해 크게 늘었다. 1930년대 이후로 민주당은 연방 정부의 확대, 사회자유주의, 친 서민 정책 등의 유연한 진보주의 노선을 이어갔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미국 친기업 성향이나 친기득권 성향을 많이 보여서 많은 미국 백인 노동자 계층을 중심으로 중산층에게 불만이 쌓였다는 논란이 짙었다. 동성애, 임신 중절 찬성 등, 보수주의적인 공화당에 비해 상당히 진보주의적인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민주당의 이념 주류는 현대자유주의, 사회자유주의이고 비주류는 중도주의, 보수주의, 좌익대중주의, 진보주의,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이다

정치성향은 중도 좌우파에서 좌익이다[중도 보수,진보에서 진보이다]

분파

사회자유주의 분파

다수 분파이다. 대부분의 당원들은 민주당 주류의 사회자유주의적 철학을 따른다.

진보주의 분파

대표적인 인물로 엘리자베스 워런, 키스 엘리슨, 데니스 쿠시니치가 있다.

보수주의 분파

조 맨친, 지미 카터와 존 F. 케네디가 있다. 오늘날 청견민주에 의해 표현된다.

중도주의 분파

보통은 신민주연합에 의해 대표된다. 대표적인 인물로 빌 클린턴, 전 위원장 데비 와셔만 슐츠가 있다.

민주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분파

규모가 크지 않고 극소수파에 속했으나, 2016년 대선 경선에서 버니 샌더스가 잠시 활동하며 지지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2) 민주당의 역사

미국이 건국하는 무렵인 1790년대에 반연방파 토머스 제퍼슨이 창당한 공화주의자당(Republican Party)이 당의 전신이다. 당명은 점차 민주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으로 바뀌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던 제퍼슨 공화파는 친 앤드루 잭슨파와 반 앤드루 잭슨파로 분열되었다. 이후 1828년 대통령에 당선된 앤드루 잭슨 이후, 반 잭슨파는 민주공화당을 대거 탈당하여 과거 연방주의당 지지자, 민주공화당내 보수주의자, 반잭슨파를 결집해 지금의 공화당의 전신인 휘그당을 창당하였고, 친잭슨파는 당에 잔류해 당명을 지금의 당명으로 바꾸었다.

 

1801년부터 집권했으며 남북전쟁 발발 직전인 1860, 북부 민주당원을 중심으로 한 북부 민주당과, 남부 민주당원을 중심으로 한 남부 민주당으로 분열되었다. 전체적으로 민주당이 분열되어서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반노예주의를 표방한 공화당 소속 연방하원의원인 에이브러햄 링컨에 패배하였다. 이후 내전이 일어나자 당은 내홍을 겪으며, 이후 공화당에 비해 약세를 보인다. 그러나 대공황을 계기로 20년간 민주당이 연속 집권하였다.

 

1932년 대공황 와중에 당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을 통해 공황을 극복코자 했고, 강력한 복지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로 1920-1950년대에는 미국내 소득 격차가 크게 줄었다. 부유층의 소득이 감소하고, 중산층의 실질 소득이 증가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은 이러한 변화는 정치적인 변화에 큰 원인이 있다고 하였다. 뉴딜정책이후 부유층의 세금은 급증하였고, 소득세 상한은 1950년대 중반에 91퍼센트에 달했다. 기업 이익에 대한 평균 연방세는 1929년에는 14퍼센트였으나, 1955년에는 45퍼센트에 달했다. 상속세 상한은 77퍼센트에 달했다. 1929년에 국부의 20퍼센트를 소유했던 상위 0.1퍼센트는 1950년대에는 10퍼센트 정도를 소유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공화당에 진보적인 정치인이 늘어나 대화합이 가능하였다.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노동력의 부족으로 임금이 상승하였고, 높은 임금은 전후에도 지속되었다. 민주당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전후호황으로 미국의 경제는 발전하였다. 1960년대가 되자 미국에서는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연방 상원의원이 이끈 보수주의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그가 주도한 보수주의 개혁 운동은 도시 소요사태를 이용해 진보주의자들을 논리로 공격하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인종차별을 옹호하였으며 공화당 내의 진보적인 인사를 축출하였다. 그 결과 공화당은 매우 강경하고 보수적으로 되고, 민주당과 공화당은 더욱 대립이 격화되었다.

 

대공황 이후 민주당은 대개 의회의 다수당이었다. 민주당은 1994년 이래 의회에서 소수당이 되었으나, 2006년 중간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상원과 하원에서 공화당을 제치고 모두 다수당이 되었으나 2008,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집권 이후 실시된 중간선거에서 집권당으로서 사상 최대의 패배를 당하면서 하원 다수당 지위를 공화당에게 넘겨주게 되고 상원 다수당 지위를 가까스로 유지하게 된다.

 

(3)미국 공화당과 미국 민주당 노선

세계 국가들 중에서 가장 민주화. 자유화. 개방화된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사회와 세계각국 정당 구조를 연구하다가 보면 미국 공화당과 미국 민주당 노선이 일반적으로 일치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a.미국 공화당 노선---자본주의 혁명론(반공산주의)

(a)자본주의 3대월칙--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경쟁등

모든 개인에게 사유재산 인정

모든 개인에게 영리추구(이윤추구) 부여

모든 개인에게 자유시장경쟁원리(자유경쟁) 부여

(b)사회적 시장경제주의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원칙으로 하고 그기에 사회적 정의 통제적인 경제제도를 가미하는 형태이며 궁극적으로 자유무역, 자유시장원칙이다

(c)농지소작제도나 노예제 그리고 신분제 금지--자유주의 지향

(d).소비자의 보호

(e)노동자 농민 그리고 약한 자 여성. 아동. 노인등 국가적 보호--생존권 중시

민주적 제도를 일시 보류하더라도 경제적 평등과 빈곤에서 해방..

신분제와 노예제도 철폐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고도의 소비사회로 지향

 

b.미국 민주당 노선---민주주의 혁명론(반전체주의 반독재주의)

(a)민주적 기본질서

모든 폭력적 지배와 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그때 그때의 다수의 의사와 자유.평등에 의한 국민의 자기결정을 토대로 법치국가적 통치질서이다

전체주의나 국가사회주의. 독재정부 그리고 강제노역제등을 부정한다

(b)법치주의와 사법부 독립

(c)국민주권주의---대한민국 주권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있다

(d)복수정당제도 및 의회민주제 보장

(e)기본권 보장주의

(f)국제평화주의

(g)주정부와 지방자치제 실시

 

c.미국 공화당 노선과 미국 민주당 노선 주요 정책

(a)미국 공화당 노선 주요 정책

.노예제나 귀족신분제도 폐지---모든 인간에게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경쟁등 부여

.공산주의 공동생산 공동분배 제도 철폐와 자유.평등.행복추구권등 자유무역주의 표방

모든 인간에게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경쟁등 부여

()소비자의 보호나 권리보장

()국가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계획경제 철폐

국가나 어떠한 제3자 힘 있는자도 개인의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경쟁등을 침해할 수 없다

()연좌제 폐지--만민(萬民)은 평등하다

()재산권 보장--재산권 행사의 의무(재산권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해야 한다)

()주거, 직업선택의 자유 보장

.봉건주의 토지신분제도 폐지나 철폐운동

모든 인간들에게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경쟁 보장.

()농지소작제도 금지

()지주제도 폐지

.연방제나 연합정부 구성 지지-->유엔이나 세계단일공화국 수립 지지

.일부다체제도 폐지나 철폐--모든 여성에게도 사유재산.영리추구.자유경쟁등 부여

.자유. 평등. 행복추구권 --자유권과 행복추구권 보장주의자

.기본이념--자유주의

--보수적 온건주의자나 보수주의자--

 

(b)미국 민주당 노선 주요 정책

.모든 폭력적 지배와 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그때 그때의 다수의사와 자유 평등에 의한 국민의 자기 결정의 토대로 하는 법치주의..

.반전체주의--저항권 인정

,반독재주의--저항권 인정

.주와 지방자치제 실시요구

.복수정당제 요구

.사회권이나 생존권 보장주의자

.언론출판의 자유 보장

.기본사상---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연합)

--진보적 온건주의자나 진보주의자--

 

d.미국 공화당과 미국 민주당 위대한 대통령들

(a)미국 공화당 대통령

.미국 초대 조오지 와신톤 전대통령---미합중국은 위대한 것이다

미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대영제국으 밑에 있다가 독립된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대통령이며 미합중국에서의 국부로 영원한 자본주의 독립 혁명의 선구자이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하여금 크신 열매을 맺게 할 지어다 그리하여 우리정부는 인권을 보호하는 성벽이 되게 될 지어다>

 

.아브라함 링컨 전대통령--자유의 전사여! 영광있으라!

미국의 남북전쟁 <케 티스버크>전투에서 전몰한 장병 위령제를 맞아 1863 11 7일 당시의 북군 통솔자요 대통령인 <링컨> 전대통령은 일장의 연설을 하였는데 내용이 간결하지만 의미심장 하다하여 오늘날 크게 친송받고 있다

<오늘의 전란은 정의와 공도를 내용으로 하는 자유국가가 압제와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이를 영원히 지속할 수 있는냐에 대해서 처참한 철화의 시련을 받고 있습니다.. 중략.. 위기에 빠진 자유정치, 인민의 정치는 그들의 숭고한 순국에 의하여 이루어 질 것입니다>

 

.부시(Bush)대통령----자유의 작전

아프가니스탄 주민과 이라크 주민들에게 압제와 전제정치를 청산하고 자유가 있는 국가를 부여할 것입니다

 

(b)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랭크린 D 루우즈벨트 전대통령---네가지 자유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한지 1년만에 당시 미국대통령이였던 후랭크린 D 루우즈벨트님은 1941 1 6일 미국 제77회 의회에 출석하여 이번 전쟁은 단연코 민주주의 쪽의 승리로 돌아오게 하지않으면 안된다고 갈파 하였는데 그 연설은 그 뒤 <네가지의 자유>로 불리워지고 있다.

<자유라는 것은 첫째로 전세계에 걸친 언론의 자유 둘째 종교의 자유 셋째 결핍(缺乏)의 자유로부터의 자유 즉 모든 국가에 대해서 그 국민의 건전한 평화생활을 보장하는 각국간으 경제적 양해 (빈곤에서 해방과 국가나 유엔등이 생존적 경제적의 보장자유) 넷째 공포로부터의 자유 즉 세계 어느 곳에서나 한 나라가 그 이웃나라에 대해서 실제로 침략하지 못하도록 완전한 군비축소의 자유>

. F 케네디 전대통령---인류의 자유를 위하여

1961년 미국 민주당 출신의 케네디님이 공화당의 닉슨님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마사추세스주 부르크린 출생 하바드 대학교, 노틀담 대학교를 졸업하고 법학박사의 학위를 받았다

1947년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1953년에 상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제2차대전 중 해군에 종군하여 명예전상장을 받았다

저서에는 용감산 사람들과 평화의 전략등이 있다

<인류의 자유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도 압제 전제정치도 아닙니다 보수인 양식과 우리 행동의 최후 역사와 더불어 우리들은 신의 축복과 가호가 있기를 바라지만 그 지구상에서의 신의 섭리는 진실로 우리들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짐을 자인하고 우리들이 자랑하는 이 땅을 이끌고 앞으로 전진합시다>

 

.클린턴전대통령---작은 행정부와 인류 평화의 자유..

 

e.미국 공화당과 민주당 공통적인 주요정책

(a)행복추구권

.생명권

.신체훼손금지권

.인격권

.휴식권

.수면권

.애정권--결혼의 자유를 국가가 보장(주택이나 직업등 국가가 장기적으로 알선 보장)

.스포츠권--3S(섹스. 스포츠. 스크린등 자유부여)

개인 누구나 섹스나 스포츠, 스크린등을 향유할 수 있다

.건강권

 

(b)인간의 존엄성 보장

.집단추방 집단학살 금지

.고문제도 페지

.노예제도 폐지--자본주의 입장을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경쟁등은 공화당 입장 흑인해방운동이라면 인권적 입장에서는 민주주의 입장이다

.인신매매, 인간실험 금지

.마약 복용이나 강제노동 금지

.잔인하고 가혹한 형벌이나 화학적 물리적 무기 사용 금지

.인간을 최저한 생존까지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빠뜨리는 것도 금지---인간에게 최소한 의식주 해결을 국가가 보장(영양실조나 기아등 유엔이나 국가적 구호활동 부여)

.사형제도 폐지와 범죄없는 세상으로 천명

고통이 없는 상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할 수 있는 권리부여

 

 

 

 

"Form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 to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

 

"大韓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

大韓民國之主權屬於國民全體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資本主義 反對 共産主義!! 民主主義 反對 獨栽主義(全體主義)!!

資本主義民主主義革命以後, 自由主義(自由權)和社會主義(社會權, 生存權) 共存(尊重)是自由社會.-自由社會[民主國家]-"

*資本主義 三代原則(經濟):私有財産, 利潤追求, 市場競爭原理 等等.

*民主主義 三代原則(政治):民有民治民享之政府[民主國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