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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의 ‘열려라 참깨’ 주문된 ‘샤보프스키 실언’ 본문

중부 유럽 지역/독일[獨逸,德意志國=德國]

베를린 장벽의 ‘열려라 참깨’ 주문된 ‘샤보프스키 실언’

CIA Bear 허관(許灌) 2015. 12. 27. 17:22

11월 9일자를 업데이트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자료를 서핑하던 중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도화선의 불을 댕긴 귄터 샤보프스키가 장벽 붕괴 26주년을 8일 앞둔 11월 1일에 86세로 타계한 사실을 뒤늦게 접했다.

베를린 붕괴 뒤 그의 여생은 한마디로 '새옹지마(塞翁之馬)‘이었다. '냉전의 신전'을 무너뜨린 '삼손' 대접을 받기도 했으나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독일 통일 7년 뒤인 1997년 동독 시기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주하는 동독인을 사살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드러나 수감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몇 해 동안 투병을 하다 베를린의 한 요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쳤다.

샤보프스키는 생전에 자신의 과오를 시인하고 사과했으며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자숙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자신의 말실수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데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샤보프스키 모멘트'라는 말이 한동안 회자됐는데 이는 사태가 의도와는 달리 급진전되어 어쩔 수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을 초래한 계기를 뜻한다.

독일 통일과 동구권의 눈사태 몰락 그리고 소련 해체라는 '역(逆) 도미노 현상'의 첫 도미노 패가 된 베를린 장벽 붕괴는 조급함에서 비롯한 말실수와 희망과 기대감이 유발한 과장 보도가 촉발시켰다.

1989년 11월 9일 저녁 샤보프스키 동베를린시 서기는 지도부가 개편된 동독 공산당(사회주의 통일당) 새 중앙위원회의 선전담당 서기 자격으로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당 중앙위원회가 동독인에 대한 여행 자유화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 중앙위원회는 동독 국민의 자유로운 해외여행을 보장하였다. 여행에 필요한 여권과 비자 발급은 최소한의 간편한 행정 절차를 거쳐 신속하게 처리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샤보프스키는 메모지를 들고 황급한 태도로 또 흥분한 어조로 발표했다. 그를 둘러싼 각국 기자들은 술렁거렸다.

당시 동독인은 소련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 영향으로 자유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국경선이 느슨해진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 등을 통해 서독으로 대거 망명하고 있었다.

이 같은 동독인의 우회 탈출 사태는 훈족에 쫓겨 로마제국 영내로 몰려든 게르만 민족 대이동 사태처럼 동구권 전체를 뒤흔들었다. 동서독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구권과 소련 등 공산 국가 전체의 현안이 되었다.

이해 동독 정부 수립 기념일에 동독을 찾은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주의 노선을 고수하는 에리히 호네커 동독 서기장에게 강력하게 개혁을 촉구했다. 이런 국내외의 압력에 밀린 호네커는 10월 18일 사임했고 후임에는 '황태자'로 불리어 온 '준비된 지도자' 젊은 에곤 크렌츠가 선출됐다. 새 동독 지도부는 여행 자유화 조치를 통해 주민의 대규모 이탈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던 것이다.

발표 직후 기자들이 술렁대며 어수선한 가운데 "언제부터냐"라는 영어 질문이 이탈리아 기자로부터 던져졌고 샤보프스키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내가 알기로는...... 지체 없이 지금부터(As far as I know ...... effective immediately, without delay)”라고 답했다. 여행 자유화 조치의 구체적 절차는 기관을 설치해 여행 비자를 심사한 뒤 발급받은 사람에 한하여 허가하는 것이었다.

샤보프스키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당황하다가 메모에 '즉시'라는 문구를 보고 이렇게 답변한 것이다. 뒤에 알려진 바로는 그 문제의 메모 문구는 '지금 즉시 발표하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샤보프스키는 당 중앙 결정의 발효 시점이 '지금 즉시'라고 살짝 앞질러 나가자는 생각에 이같이 말했으나 그는 산 정상의 조그만 눈덩이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커지고 속도도 빨라지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기자의 질문은 동독인의 우회 엑서더스로 더욱 철저하게 봉쇄된 베를린 장벽 검문소에서 언제부터 다시 왕래가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는 아주 디테일한 것이었다. "이에 "지체없이 지금부터"라는 답변이 돌아오자 회견장 각국 기자의 흥분에 기름을 끼얹었다. 기자들은 이 답변을 '베를린 장벽 검문소에 대한 즉각적인 전면 개방'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보도되는 과정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로 순식간에 수렴됐다. 이는 다시 동독 국민에게 부메랑처럼 전해졌다.

이에 동베를린 시민은 눈사태 나듯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갔다. 동독 경비병은 몰려든 인파에 어리둥절하다가 결국 길을 터주었고 시민은 베를린 담벼락 위로 올라갔다.

이들은 담 위에서 망치 등으로 장벽을 부서뜨리는 퍼포먼스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실수와 과장이 엄청난 역사를 만든 것이었다. 이는 프랑스 대혁명의 모멘텀인' 바스티유 점령' 을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파리 민중이 대규모 정치범 수용소라는 선동에 바스티유를 점령했으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잡범 몇 명뿐이었다. 그러나 혁명은 멈추지 않았고 도리어 더 거세게 폭발했다. .

‘지체 없이 지금부터'라는 샤보프스키의 말이 베를린 장벽 붕괴의 대장정의 '남상'이었다면 그 대단원은 "환상의 종말이자 눈물 없는 작별"이 아닐까. 이는 동독의 마지막 총리 토마스 드메지에르가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 이루어지던 날 냉전이 최고조로 달했던 1961년 베를린 장벽을 세우면서까지 지켜내고자 햇던 동독에 대한 만사(輓詞)에서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