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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선택의 자유'로 눈물의 빵을 먹다 본문

Guide Ear&Bird's Eye/몽골

갑작스런 '선택의 자유'로 눈물의 빵을 먹다

CIA bear 허관(許灌) 2009. 12. 20. 22:10

PHOTO courtesy of Daum Foundation

몽골의 재래시장 모습.

‘몽매한 야만인’이라는 의미의 ‘몽고’는 이제 옛말에 불과합니다. ‘용감한’이란 뜻의 ‘몽골’은 이제 긴 잠에서 깨어나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자신들의 지도자를 뽑고 서구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는 등 개혁, 개방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공산 체제를 버리고 자유 민주주의 체제로 돌아선 몽골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짚어보는 ‘몽골을 본다,’ 오늘 이 시간에는 갑작스러운 시장경제 체제의 전환으로 눈물의 빵을 먹어야 했던 몽골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1991년, 구소련이 마침내 붕괴하자 구소련의 지원에 크게 의존했던 몽골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받아들여 시장경제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 전환 과정에서 그 거센 물결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이들도 있지만, 자본주의에 잘 적응한 사람도 있습니다.

몽골 복지부의 오윤 르카그바스렌 국장은 망설임 없이 이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변화와 개혁’을 갈구하는 20대의 젊은 층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르카그바스렌 국장은 당시 구소련과 몽골 정부의 장학금으로 시베리아 동부에 있는 이르쿠츠크 국립의학대학교에서 유학하는 등 기존 체제로부터 혜택받은 계층이었습니다.

오윤 르카그바스렌: (The year 1990 was the time when I had a baby...) 1990년에 첫 아이를 가져서 다음 해에 고향으로 돌아와 낳았어요. 갓 태어난 아기에게 먹일 우유를 사러 상점이란 상점은 다 가봤는데 눈 씻고 찾아봐도 구할 수 없었어요. 그렇게 무섭고 어려웠던 일은 제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며칠 뒤, 몽골 정부가 신생아와 산모를 대상으로 긴급 우유를 제공했는데요, 아침 9시에 나가서 줄을 서서 오후 1시나 돼야 우유를 살 수 있었어요.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장 필요한 기저귀, 분유, 옷 등의 비용은 물론 정부의 지원이 끊긴 남편과 자신이 먹고살 길이 막막했던 겁니다. 할 수 없이 친정집에 들어가서 살았지만, 부모님의 연금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생전 처음 신문에 구직광고라는 걸 내봤습니다.

오윤 르카그바스렌: 제가 구소련에 유학했기 때문에 러시아 어를 잘했습니다. 러시아 어를 몽골어로 번역하겠다고 했죠.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해서 영어를 몽골어어로도 번역했어요. 제 영어가 당시 형편없었죠. 하지만 다행인 게 1990년대 초반에는 영어를 하는 사람이 몽골에 별로 없었어요. 수요가 많아서인지 번역일로 돈을 좀 벌었어요.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당과 정부는 더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몽골인들은 이렇게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유로 전혀 다른 체제와 환경 속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적응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고, 1990년대에 미국의 주몽골대사를 역임한 알 라 포르타 씨는 자유아시아방송(RFA)과 한 회견에서 말합니다.

알 라 포르타 대사: 당과 국가가 알아서 다 해주는 세상에서 살다가 뒤통수를 크게 맞은 거죠. 그동안 시켜서 하는 일만 해왔는데, 소위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모두 스스로 선택합니다. 교육, 의료, 직업, 식량, 주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 하는 겁니다. 사회주의 70년간의 세상에서 살던 몽골인들이 불안에 떨던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불안에 떨다 못해 몇 날 며칠을 눈물로 보낸 이들도 많습니다. 고향을 떠나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작은 방을 얻어 같이 살던 산그도르지 오돈구아 씨와 여동생, 그리고 형부네 가족들은 갑자기 식량 배급이 끊기고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통에 굶기를 밥 먹듯 했습니다. 오돈구아 씨는 최근 한국에서 공부해 한국어를 잘하는 편입니다.

산그도르지 오돈구아: 식품을 사려고 하면 엄청 비싸서 못 샀어요. 초콜릿 하나가 한국 돈으로 250원. 그때 한국 돈 250원은 정말 큰돈이었어요. 250원이면 우리가 바지도 사고, 신발도 살 수 있는 액수인데, 초콜릿 하나가 그렇게 비싸니까요, 정말 뭘 사먹고 싶어도 제대로 먹지를 못했습니다. 정말 너무 배가 고파 고향집에 전화해서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배가 너무 고프다’ ‘참을 수가 없다’고요.

오돈구아 씨네 가족이 당시 내릴 수 있었던 선택은 그냥 앉아서 굶어 죽거나, 장사를 하거나 둘 중의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갖은 시행착오 끝에 손에 잡힌 게 길거리에서 하는 아이스크림 장사였습니다.

산그도르지 오돈구아: 당시 한국 돈 16원으로 아이스크림을 사서, 20원에 팔았습니다. 이렇게 하면 한 개에 4원의 이익이 남았는데요, 돈을 벌기 위해서 한겨울에도 바깥에서 벌벌 떨면서 서서 팔았어요. 최소한 100개를 팔아야 버스 값이 나왔죠.

번역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오윤 르카그바스렌 국장, 그리고 아이스크림 노점상으로 간신히 입에 풀칠했던 산그도르지 오돈구아 씨처럼 2-3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체제전환에 적응하는 데 비교적 성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꽤 있습니다.

체제전환을 전후해 식료품 가격이 62배나 폭등하고, 교육비는 무려 89배나 오르는 등 전체적으로 약 51배나 오른 소비자 물가는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과거 사회주의 제도 아래서의 생활을 동경하도록 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한국의 한국에 있는 단국대학교 몽골학과의 강신 교수의 말입니다.

강신: 제가 만나본 사람 중에 50대 이후, 그러니까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혜택을 누렸던 이런 세대는 90년대 이후 시장 경제를 받아들이고, 그야말로 무한경쟁 시대에 살아가는 고충을 많이 느끼는 이런 사람들은 옛날 사회주의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특히 이 사람들이 사회주의 시절에 좋았던 게 뭐냐? 라고 물으면, 제일 먼저 이야기하는 게 무상 의료 혜택이라던지 자녀양육을 하는데 국가가 다 책임져 줬다든지, 혹은 무상으로 교육을 시켜줬다든지, 그리고 오늘날 만연하는 실업자 문제가 그때는 전혀 없었다든지 하는 이런 이유로 사회주의 시절이 좋았다고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변화에 저항하는 사람들도 이제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는 엄중한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몽골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세계화의 흐름에 합류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몽골 경제의 현주소를 알아보기로 하고요, 오늘은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장명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