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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 양계장 분쇄기로 죽였다” 진실은 본문
책 출간으로 재점화된 ‘김형욱 전 중정부장 미스터리’
중앙정보부장으로 권력을 휘두르던 1967년의 김형욱. [중앙포토] | |
서울 여의도 김경재 전 의원의 개인 사무실. 김 전 의원은 대뜸 “진실을 왜곡했고 국민의 세금을 낭비했다”고 국정원 과거사위를 성토했다. ‘중정 파리 연수생 신현진·이만수(가명)씨가 동구권 출신의 킬러 2명을 고용해 김형욱 전 부장을 살해했다’는 과거사위 조사 결과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런 주장의 핵심에는 김 전 의원에게 ‘내가 김형욱 암살범’이라고 털어놓았다는 조모씨가 있다. 김 전 의원은 “지난 4년간 조씨를 수십 차례 만나면서 그의 진실성을 확신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에게 조씨가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지금 65, 66세쯤 됐고요. 경남 진주 출신으로 고려대를 졸업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같은 61학번이지요. 일본에서 조총련 간부를 지낸 부친의 영향을 받아 일본으로 밀항한 뒤 북한에 가서 김일성 전 주석과도 만났다고 해요.”
기자는 조씨가 어떻게 남북한의 최고통치자를 모두 만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김 전 의원은 “조씨는 중국 고사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장수는 적국의 수장을 만날 수 없지만 간자(間者·간첩)는 모두 만날 수 있다’고 했다”고 전했다.
조씨는 대남 특수공작 훈련을 받고 남한에 내려온 뒤 전향해 북파 공작원으로 활동했다는 게 김 전 의원의 설명이었다. 김 전 의원은 “조씨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자료가 있느냐”는 물음에 “조씨의 상황 설명이 매우 구체적”이라고 답했다.
“79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만나 자신이 ‘김형욱을 제가 처리하겠다’고 했더니 박 전 대통령이 ‘뭐, 그럴 것 없어’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암살 방법도 마피아들이 희생자 시신을 사료용 분쇄기에 넣어 처리한 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해요.”
김 전 의원은 “국정원 과거사위는 조씨를 조사하지도 않은 채 국정원의 시나리오에 따라 발표했다”고 했다.
국정원 과거사위 입장을 듣기 위해 안병욱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가톨릭대 교수)을 만났다.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민간인 위원 간사를 맡았던 안 위원장은 “양계장 분쇄기로 살했다는 조씨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일축했다.
“2005년 한 방송국에서 조씨를 데리고 파리 현지 취재를 간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는 현지 지리를 전혀 알지 못했고 살해 장소인 양계장도 찾지 못했습니다. 조씨 주장의 신뢰도는 이미 그때 판명이 난 겁니다.”
안 위원장은 또 “만약 김 전 의원 주장대로 차지철 경호실장이 배후라면 국정원이 굳이 김형욱 살해에 자신들의 조직이 동원됐다고 거짓 고백을 할 이유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당시 파리 현지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데 대해선 “프랑스 당국과의 협조 문제, 예산 문제 등 현실적 한계 때문이었다”면서도 “아쉬움은 있지만 국가 기관(중정)의 개입이 있었다는 사건의 진상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했다.
국정원 과거사위 조사는 어떻게 진행됐을까. 당시 조사위원들은 전직 중정 요원 등 33명을 면담 조사했다. 그러나 납치·살해에 가담했다는 신현진씨 등을 민간인 위원들이 직접 조사하지는 못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민간인 위원은 “전직 중정 요원들이 외부인들과 면담하는 것 자체를 꺼렸다. 할 수 없이 국정원 내부 인사들이 조사한 다음 그 결과를 넘겨받았다”고 말했다. 한 국정원 관계자는 “국정원 고위 관계자들이 신씨 등과 술까지 마시며 ‘진실을 말해 달라’고 호소하는 등 조사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당시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이었던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김형욱 사건과 관련해 현재 뭐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다”고 했다.
당사자인 조씨가 직접 입을 열기 전까지 이번 논란은 정리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김 전 의원은 “조씨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기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다”며 “논란이 확산되면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성표 기자
◆김형욱=1963년 7월 4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신임을 등에 업고 5년3개월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72년 10월 유신 선포와 함께 국회 해산으로 국회의원직을 잃게 되는 등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자 73년 4월 미국으로 망명했다. 77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진 뒤 미국 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했다. 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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