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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 그 분도 귀가 빙빙돌아가는 사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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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 그 분도 귀가 빙빙돌아가는 사람...

CIA Bear 허관(許灌) 2009. 6. 5. 16:50

 

            윤동주 시인과 문익환 목사(1930년대 은진학교 시절 교복을 입은 윤동주(뒷줄 오른쪽)와 문익환(뒷줄 가운데) 모습

 문익환 목사 그 분도 귀가 빙빙돌아가는 사람...남북통일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

문익환(文益煥, 1918~1994) 만주출생의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이자 재야운동가입니다 호는 늦봄. 만주(현재의 길림성 용정시)에서 태어나 1947년 한국신학대학교 신학과 졸업했으며 1954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한국신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구약성서학을 강의하였으며, 1970년대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의 공동번역성서 번역사업에 개신교 대표로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이자 사회운동가인 장준하(張俊河)의 의문사를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여 1970~80년대 군사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수차례 투옥되었으며 석방 후 활발한 통일운동과 강연활동을 벌이던 중 1994년 1월 18일 심장마비로 별세했습니다 1989년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귀국하였으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 되었고 2002년 민주화운동에 대한 업적이 인정되어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저서에 <통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꿈이 오는 새벽녘> 등이 있고  시집으로 <새삼스런 하루>, <꿈을 비는 마음>,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등이 있음...

 

 1.신학공부

1918년 만주(현재의 길림성 룡정시 지산진)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는 용정에서 학교를 다녔으며 윤동주와 친구였다고 한다. 평양신학교근본주의적이니,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하라는 부친의 권유로 1938년 도쿄 일본 신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신학교 입학시 문익환은 신학적인 갈등을 겪는다. 당시 일본신학교에서는 성서비평학이 활발했는데, 축자영감설을 믿고 있던 문익환에게 성서를 학문적으로 비평하여 해석하려는 성서비평학은 받아들이기 힘든 학문이었다. 쉽게 말해서 성서의 문자적 해석에 익숙하던 문익환 목사는 성서를 학문적으로 비평하고 해석하는 성서비평학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생각을 경청하지 못하면 학문을 할 자격이 없다"는 교수의 충고로 문익환은 성서비평학을 학문으로 존중하게 되었다. 1947년에 한국신학대학교(현재 한신대학교)신학과를 졸업하였다. 1954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2.신학강의와 공동번역성서

한국신학대학교연세대학교에서 구약성서학을 강의하였으며, 1970년개신교천주교공동번역성서 번역사업에 개신교 대표로 참여하였다. 문익환 목사가 공동번역성서번역에 참여한 이유는 당시 개역한글판의 단어와 문체가 한자를 모르는 독자들이 읽기에는 너무 어렵다는데 있었다. 실례로 솔로몬 왕의 성전건축을 기록한 개역한글판 성경전서 역대하 2장 4절을 읽어보면,매우 어렵게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여 구별하여 드리고, 주 앞에서 향 재료를 사르며 항상 떡을 진설하며, 안식일과 초하루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절기에 조석으로 번제를 드리려 하니 이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규례니이다"

 

그래서 문익환은 공동번역성서 번역에 동참하여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현대어성서를 만들고자 하였다.실례로 공동번역성서 역대하 2장 4절을 읽어보면 앞에서 인용한 개역한글판 문장에 비해 이해하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본인은 본인의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모실 집을 지어 바치려고 합니다. 거기에서 분향제를 올리고 거르지 않고 제사 상을 차려 올리며, 아침 저녁으로 번제물을 바치고자 합니다. 또 안식일과 매달 초하루와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 정해 주신 절기마다 번제를 드리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은 언제까지나 이렇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3.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친구이자 사회운동가인 장준하의 의문사를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 1970년대~1980년대 국민들을 군대의 힘으로 억압하는 군부독재정권에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비판(1978년)하는 등 여러차례 저항하여 수차례 투옥되었다. 1989년 통일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는 당시 진보 기독교인들의 인식에 따라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주석과 회담하고 귀국하였으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되어 1993년 석방되었다. 이후, 활발한 통일운동과 강연활동을 벌이던 중, 1994년 심장마비로 별세하였다. 부인으로 박용길 장로, 형제로 역시 재야운동가인 문동환 목사, 아들로서 극작가 문호근과 배우 문성근이 있다. 2002년에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업적이 인정되어 서남동, 안병무와 함께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 2007년 한신대학교에 신학과 87학번 동기회가 자체적으로 제작, 기증한 시비(詩碑)가 건립되었다.강도영의 만화 《26년》에서 비중있게 등장한다. 물론 《26년》은 픽션이다

 

4.시인 경력

1972년 《월간문학》에 〈추억의 커피잔〉,〈미켈란젤로의 고독〉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작품에 〈히브리서 11장 1절〉,〈십계명〉 등이 있다. 그는 《구약성서》의 히브리정신에 바탕을 두고 한국적인 정신과 감성을 융화하여 얻어지는 가락과 언어를 발굴, 투명하고 섬세한 시세계를 구축하였다. 시집으로 《새삼스런 하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