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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 김수환 추기경 선종 긴급 타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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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 김수환 추기경 선종 긴급 타전

CIA bear 허관(許灌) 2009. 2. 16. 20:03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인물인 김수환 추기경이 16일 87세를 일기로 선종(善終ㆍ서거를 뜻하는 천주교 용어)하자 APㆍ로이터 등 외신들은 관련 사실을 긴급 타전했다.

   AP 통신은 "한국 최초의 가톨릭 주교 선종"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김수환 추기경은 군부 독재에 저항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대표적인 인물이자 동아시아의 첫번째 추기경이었다"고 소개했다.

   로이터 통신 역시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추기경 타계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든든한 인권 수호자이자 수십년간 군부정권이 지배해온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해 온 인물 중 하나인 김수환 추기경이 타계했다"고 전했다.

 

 

 

*김수환 추기경

세례명 스테파노. 194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했다. 1944년 1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8·15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1947년 가톨릭대학의 전신인 서울 성신대학(聖神大學)에 입학해 신학을 전공하고 1951년에 졸업,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후 안동 천주교회에서 주임신부로 사제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1953~55년 대구 대주교의 비서신부·재정부장, 해성병원 원장을 지냈다. 1953년에는 대구교구가 설립재단인 김천시 성의(聖義)중·고등학교 교장과 김천시 황금동 천주교회의 주임신부를 겸임했다. 1956년 10월 독일에 유학하여 뮌스터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1964년 귀국했으며, 그해 1964년 6월부터 2년 동안 주간 가톨릭 시보 사장을 지냈다. 1966년 2월 15일 마산교구의 주교로 서임되었으며, 5월 31일 마산교구장으로 서품되었다. 196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으로 승품되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 쇄신의 기류 속에서 노기남(盧基南) 대주교의 뒤를 이었다. 1969년 4월 25일 교황 파울루스 6세에 의하여 당시 전세계 추기경 가운데 최연소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1970~75년까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으로 1차 부임했다. 1970년에서 3년간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위원장으로 재임했고, 1981~87년까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으로 2차 부임했다. 1974년 2월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1977년 5월 미국 노틀담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1988년 11월 일본 조치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1990년 5월 고려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1990년 10월 미국 시튼홀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취임의 자리에서 그는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라고 말함으로써 교회쇄신과 현실참여의 원칙을 분명히 했다. 또한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종교적인 양심으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교회는 정치적·사회적인 권력보다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근본적인 신념으로 삼아 사회와 인류 안에서 빛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종교적 현실 참여를 강조했다. 따라서 교회는 절대로 불의와 부정과 타협하는 교회 공동체가 아닌 인간 모두가 순수한 양심에 따라 내면의 회심으로써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과도기의 혼란한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즉 물질만능주의의 현대 사회를 염려하여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비워 서로 밥이 되어주는 길이 인간회복의 길이며 민주화의 길임을 호소하여 사회인사들을 각성시켰고 소외계층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또한 아시아 주교회의와 세계 주교회의에 참석하여 세계 속에 한국의 위상을 정립하여 국위선양에 이바지했다. 1984년 5월 6일에는 100만 신도가 운집하고 교황 요한네스 파울루스 2세가 집전한 가운데 한국천주교200주년기념성회를 개최, 세계 최초로 교황청 밖의 시성식을 열어 한국의 순교자 103위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으며, 1989년 10월 9일에는 교황과 세계의 가톨릭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로 가톨릭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세계적 행사인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03위 성인). 이 자리에서는 또한 헌혈, 안구·장기(臟器) 등의 기증으로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근본적인 나눔의 실천운동을 전개했으며, 이 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는 국가의 민주화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 많은 사목교서를 발표했다. 1998년에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났다. 저서로 〈사회정의〉·〈평화를 위한 기도〉·〈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등 여러 신앙수상록이 있다.


*김수환 추기경 어록

16일 오후 선종한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한국 가톨릭계의 정신적 지주로서 역할뿐 아니라 1980년대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19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등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정권에 맞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온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었다.

   김 추기경은 또 시국 관련 문제뿐 아니라 북한문제와 낙태, 사형 문제 같은 사회적 이슈가 발생할 때에도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이정표를 제시하는 역할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김 추기경이 남긴 어록을 통해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본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입니다'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위정자도 국민도 여당도 야당도 부모도 교사도 종교인도 모두 이 한 젊은이의 참혹한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부끄럽게 살아온 그의 죽음 앞에 새롭게 태어나 그가 못다 이룬 일을 뒤에 남은 우리가 이룬다면 그의 죽음은 절대 헛되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1987년 1월 26일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발생 뒤 명동성당에서 열린 '박종철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 강론 중)
▲"교회입장은 될 수 있는 대로 남북관계가 정말 호전되고, 이래서 정말 정부도…이산가족도 서로 만나게 되고 남북 교류도 있고, 이래서 점진적으로 우리가 남북이 좀 평화롭게 통일을 향해서 뭔가 노력하는 그런 것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소망이죠." (1989년 7월 1일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과 관련한 기자회견 중에서)
▲"사형은 용서가 없는 것이죠. 용서는 바로 사랑이기도 합니다. 여의도 질주범으로 인해 사랑하는 손자를 잃은 할머니가 그 범인을 용서한다는데 왜 나라에서는 그런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까?"(평화방송. 평화신문 1993년 새해 특별대담 중 사형폐지를 주장하며)
▲"현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이 언제부터 시작됐느냐고 물으면 어머니 태중에 임신된 순간부터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 생명이 그렇다면 남의 생명도 그렇게 인정을 해야겠지요."(평화방송. 평화신문 1993년 신년 특별대담 중 낙태를 비판하며)
▲"그럼 사는 길은 제가 볼 때는 자기를 여는 겁니다. 그것만이 북한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그들이 그렇게 되도록 도와야 되고요. 그래서 북한이 정말 필요한건 지금 미국이라든지 일본하고 수교를 하는거라고 봅니다."(북한의 NPT(핵무기비확산조약) 탈퇴 이듬해인 1994년 평화방송 신년대담에서 북한 핵문제 청산과 개방, 북한과 미국, 일본의 국교정상화를 이야기하며)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무슨 보복이나 원수를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 바로세우기를 위해섭니다. 책임자는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법에 의해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평화방송. 평화신문 1996년 신년 특별대담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또 평양교구의 교구장 서리로 있기 때문에 정말 목자로서 가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고 또 의무입니다. 사실은... 가봐야하는게 의무인데, 그걸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대단히 안타깝습니다."(1998년 평화방송 신년대담 중 방북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며)
▲"삶이 뭔가, 삶이 뭔가 생각하다가 너무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기차를 탔다 이겁니다. 기차를 타고 한참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웃음)"(2003년 11월18일 서울대 초청강연 중)
▲"누가 나한테 미사예물을 바칠 때 자연히 내 마음이 어디로 더 가냐면 두툼한 쪽으로 더 가요. ‘아니’라고 하는 게 자신있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안 그래요. 나는 두툼한 데 손이 더 가요. (웃음) 그리고 어떤 때는 무의식중에 이렇게 만져보기도 해요."(2005년 부제들과의 만남에서)
▲"세계 앞에 한국이, 한국 사람들이 고개를 들 수 없는... 아주 부끄러운 일이에요. (한참을 우심) 하느님이, 평소에 느꼈지만 하느님이 우리 한국 사람에게 너무 좋은 머리를 주셨어요. 그런데 그 좋은 머리를 좋게 쓰지 않고 그렇게 했으니... (눈물)"(2005. 12. 황우석 박사의 논문조작 사실이 드러난 뒤 평화방송 평화신문 성탄 특별대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