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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광청사(光淸寺) 본문

-국가주석이나 대통령 임기제한/로마교황청

거제도 광청사(光淸寺)

CIA bear 허관(許灌) 2008. 5. 11. 10:16

경상남도 거제시 하청면 앵산() 중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화엄종에 속하는 사찰이다. 신라 때 창건되었다고 한다. 인근에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신라 때에는 북사()라 하였으며 경상도 4대 사찰의 하나였으나 빈대가 너무 많아서 불태웠다고 한다. 1623년(조선 인조 1)에 중창하고 절 근처에 약수터가 있으므로 정수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1740년(영조 16)에는 통제사 조경이 이 사찰 승려들에게 제승당을 지키게 하였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폐사되었다. 1980년 부산에 사는 신도 지청숙님이 법당과 산신각·용왕각·요사를 세우고 현재의 이름으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본래 절터는 60여 평으로 지금도 대법당 자리에 주춧돌이 남아 있다. 한편 이 절의 전신인 북사 시절에 만들어진 동종(銅鐘)이 일본 사가현]에 전한다. 동종(銅鐘)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1026년(고려 현종 17) 조성되었으며 높이 73cm, 입지름 51.5cm의 크기로 1374년(공민왕 23)에 왜구가 약탈해갔다. 유물로는 부도(浮圖) 1기가 있다. 주위에는 정수사 시절 세웠던 물레방아터와 유명한 약수터가 남아 있다.

 

 

 

 

 

 

*앵산(鶯山)

고현만의 북쪽 하청면 유계와 연초면 한내 뒷산으로 산의 생김새가 새가 날아 하늘로 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앵산, 즉 꾀꼬리산 이라고 한다. 산의 서남쪽에 연초, 한내, 오비 마을이 있고 계룡산을 감싸고 있으며 해발 507.4m의 이 산 북쪽 중 허리에는 신라시대 때 -고려시대라는 설도 있다. - 하청북사의 절터가 있다. 그 평수가 어림짐작으로 60여평 됨 직하고 그 당시 사용했던 맷돌과 기와조각, 주춧돌이 있어 그 당시의 사찰규모를 짐작케 한다. 이 절은 믿기 어려운 얘기이지만 빈대 때문에 폐하였다고 전해진다. 1982년에 그 자리에 '광청사' 란 절을 지었다.

그 바로 밑에는 조선시대 정주사 절터와 물레방아터, 부도탑 과 약수터가 있다. 특히 이 약수는 피부병과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며 약수터 옆에 물레방아 골이 있는데 그 당시 사용한 물레방아, 절구통이 남아 있으며 부처등에는 사리탑인 부도가 도굴꾼에 도굴 당한 채 나 뒹굴고 있다. 앵산은 아름다운 산으로 100년생 박달나무가 무성한 산으로 그 봉우리에는 숫돌로 쓰이는 돌을 발굴하고 있으며 거제주민은 모두 앵산 숫돌로 농기구를 갈고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채석하는 바람에 지금은 채석을 금하고 있다고 한다.

앵산에는 산삼(일명 동삼 動參)과 자초(紫草 일명 주초 朱草) 사삼(沙參, 더덕)이 유명하다. 이 산삼을 캐어 먹으면 不老 不病 不死한다는 것이다. 鶯山 三山樂이 3천만민족을 3일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육지의 인삼열매를 앵산 흙에 심어서 4년만 되면 육지인삼의 10년치이상의 효력을 낸다는 것이다. 童男童女 3천명을 거느리고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던 서시(徐市)가 이 곳을 못찾고 김해 강변으로 과차(過此)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낙수천에는 음력 7월7일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약수를 마시고 머리를 감거나 목욕을 한다고 한다.

 

 

 

*동종(銅鐘)

 사찰의 종루에 걸어놓고 당목(撞木)으로 쳐서 때를 알리거나 대중을 모을 때 사용하는 큰 종.

 

 

光淸寺華嚴新鐘(광청사화엄신종)

 

聞鐘聲 煩惱斷  智慧長 菩提生(문종성 번뇌단 지혜장 보리생)
離地獄 出三界 願成佛 度衆生(이지옥 출삼계 원성불 도중생)

破地獄眞言(파지옥진언)

 

이 종소리 듣는 이여,
번뇌를 끊고 지혜는 자라나며,
깨달음을 얻고 지옥세계 떠나며,
삼계를 벗어나 부처를 이루어,
중생을 제도하소서.

지옥을 파하는 진언.(옴 가라지야 사바하-후렴구)

 

 

*부도(浮圖)

고승(高僧)의 사리(舍利)나 유골을 안치하는 묘탑(妙塔).

*법당(法堂) 

법을 말하는 집, 또는 불상을 봉안한 전각에 대한 총칭.

선사(禪寺)에서 대법(大法)을 펴고 종지(宗旨)를 연설하는 등 온갖 법식을 행하는 곳이다. 다른 종파의 강당에 해당하는 것으로 칠당가람(七堂伽藍) 제도에 의하면 불전(佛殿)의 뒤에 있다. 불전이 있는 절에서는 이 법당에 불상을 봉안하지 않지만, 불전이 없는 작은 절에서는 법당 안에 본존불을 봉안해놓고 본당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흔히 불상을 봉안한 곳을 법당이라 한다. 법당은 주존불(主尊佛)에 따라 대웅전·영산전·응진전·대적광전·극락전·약사전·용화전·천불전·관음전·적멸보궁 등으로 나뉘며, 이외에 명부전·조사당·사천왕문·금강문·산신각·칠성각·독성각·삼성각 등이 있다. 대웅전·영산전·응진전은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하며,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 극락전(무량수전)은 아미타불, 약사전은 약사여래, 용화전은 미륵불, 천불전은 천불 혹은 삼천불,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다.
*산신각(山神閣)
산신(山神)이 모셔져 있는 건물
불교사찰 내에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2가지 경우가 있다. 불교의 사찰과 관계없이 지어진 산신각은 산악숭배(山岳崇拜)나 마을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이때 산신각은 대체로 1평 정도의 집으로 산신당이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산신은 보통 호랑이와 함께 있는 백발에 수염이 있는 신선의 모습으로 그려지며, 위패는 '○○산신위(山神位)' 또는 '○○산령위(山靈位)'라 해서 산의 이름을 적어놓는 경우와 산의 이름은 없이 그냥 산신위 또는 산령위라 적어두는 경우가 있다. 건물 정면에 현판이 걸려 있는데, 산신각이라는 명칭 외에 산신당·산명당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도 한다. 산신은 지역수호신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 보통으로 산뿐만 아니라 산 주변의 지역을 관장하는 신으로 여겨졌다. 산은 한 지역공간의 중심이며, 산신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살펴주고 지켜주는 존재로 믿어졌던 것이다. 한편 산신각에 모셔지는 산신의 모습이 일반적으로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으로 그려지는 것을 생각해볼 때, 산신신앙이 신선사상(神仙思想)과도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불교사찰에 있는 산신각은 고유신앙의 수용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민간의 신앙이 두터운 칠성(七星)도 같이 모셔졌다. 그 명칭은 산신각·칠성각(七星閣)·삼성각(三聖閣) 등 일정하지 않다. 현재 불교에서는 산신을 가람수호신과 산 속 생활의 평온을 지켜주는 외호신(外護神)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대부분의 사찰에는 산신각이 갖추어져 있으며, 자식과 재물을 기원하는 신신기도가 많이 행해지고 있다. 산신각은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을 모시는 건물이기 때문에 전(殿)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閣)이라 하는데, 이는 한국 불교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로 한국 불교의 토착화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용왕각(龍王閣)

용왕(龍王)이 모셔져 있는 건물

용왕(龍王)은 불교의 민간전승에 전해지는 상상의 존재이다. 인도 신화의 뱀신 나가중국이 뒤섞여 용왕이라는 존재가 등장하게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바다, 강, 호수 및 기타 갖가지 과 그곳에 사는 생물들을 관리하고 지배하도록 옥황상제에게 명령을 받은 물의 이다. 또한 신통력을 가지고 있어, 불법에 합당한 소원을 들어줄 수가 있다.

중국 사방의 바다를 지키는 용왕을 사해용왕(四海龍王)이라 하는데, 동해용왕은 청룡(靑龍)인 창녕덕왕(滄寧德王) 오광(敖光), 남해용왕은 적룡(赤龍)인 적안홍성제왕(赤安洪聖濟王) 오윤(敖潤), 서해용왕은 백룡(白龍)인 소청윤왕(素淸潤王) 오흠(敖欽), 북해용왕은 흑룡(黑龍)인 완순택왕(浣旬澤王) 오순(敖順)이라 불렀다.

*요사(舍)

[불교]절에 있는 거처하는

*쓰시마 섬 광청사(光淸寺)

 韓語司한어사光淸寺(고우세이지) 광청사를 찾아서(아메노모리 호슈가 설립한 3년제 조선어 학교...禁足(긴소쿠)이라 읽는데 광청사 담장에서 내려다 본 이즈하라 여객 터미널(페리-發着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는 시가현에서 태어나,22세에 스승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의 추천으로 쓰시마에 진문역(眞文役)이라는 관직을 얻어 부임했는데,2년 동안 부산에 와서 조선어를 배웠다. 그는 1727년에 3년과정의 조선어학교를 개교하여 수많은 조선어 역관들을 육성했으며. 식량을 자급할 수 없었던 쓰시마 사람들은 왜관에 나와 무역하거나 조선통신사의 역관직을 수행하며 넉넉한 생활을 유지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갔던 1711년이나 1719년에는 수석 통역을 맡아 외교 일선에 나서기도 했다. 쓰시마에서 에도까지 왕복길에 동행했던 것이다. 그가 조선어에 능통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에 나와 살았기 때문이니, 유학생을 보낼 수 없었던 조선과는 너무나도 형편이 달랐다.

그의 외교정책은 ‘교린수지(交隣須知)’라는 조선어회화 교과서의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웃나라와 사귀자는 것이다. 그래서 늘 성신(誠信) 두 글자를 강조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여년 뒤에 쓰시마의 광청사라는 절에 한어학소(韓語學所)가 설치되었다.1872년 10월25일에 개교했는데, 이번에는 조선 침략의 선봉인 통역관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쓰시마 고위층 자제 34명이 입소해서 1년 동안 배우고 졸업했는데, 이 가운데 10명이 조선어를 더 잘하기 위해 부산 초량왜관으로 유학왔다. 초량관 어학소는 일종의 조선 분교였는데,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에 투입된 자객 가운데 통역 2명이 이 어학소 출신이다.1880년 도쿄외국어학교에 조선어학과가 생기면서 초량관 어학소는 자동 폐소되었다.(역관 오세창이 도쿄외국어학교에 1년 동안 파견되어 조선어를 가르친 이야기는 29회에 이미 소개하였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의 쓰시마 여행 글 자료>

 

 

 

 

 

 

 

*세계 각국 정상들의 불교에 대한 애찬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