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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타:일본 적군파 JAL기(요도호) 납북자료와 요도호 실행범 아내 일본 귀국 준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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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타:일본 적군파 JAL기(요도호) 납북자료와 요도호 실행범 아내 일본 귀국 준비..
CIA Bear 허관(許灌) 2006. 8. 24. 19:22Prime Minister of Japan and Mis Cabnet(일본수상) http://www.kantei.go.jp
1.일본 적군파(日本 赤軍派)
적군파는 일본 테러단체이다
1948년 형성된 일본 학생운동의 통일체인 전일본학생자치연합(전학연)이 1960년대 안보투쟁을 벌인 뒤 분열되자 이 중 마오쩌둥식(모택동식) 무력투쟁을 주장하며 트로츠키주의를 신봉하는 공산동맹에서 분리 1969년 발족한 단체이다
일본적군파는 국제공산주의 노선 트로쯔키노선이 아닌 일국사회주의 운동 또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운동(NLPDR) 노선 스탈린.모택동.김일성주의 노선 신봉자들이다
4백여 명의 호전분자들로 구성된 이들은 일체의 기존체제를 파괴한다는 폭력제일주의와 무장혁명 그리고 일본왕정타도와 일본 사회주의 국가수립등을 주장하였다
1972년 적군파 내의 온건파 14명을 처형하고 경찰과 대치한 연합적군사건이 있은 뒤 폭력대상을 해외로 돌려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과 유대를 맺고, 1974년까지 공동테러를 벌여왔다 1974년 이후 시게노부후사코(重信房子)를 두목으로 하여 싱가포르. 네덜란드, 말레이시아등지에서 테러를 일으켰으나 국제경찰의 추적과 조직 이탈로 거의 와해되었다
적군파는 NLPDR론자들로 북한정부 대남공작부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과 연계되어 국제적으로 활동해왔다
-일본에서 1969년 도쿄(동경)대학 학내문제로 인한 학생운동이 반전운동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좌파학생조직인 전(全)일본학생자치회연합(전학연)과 그 뒤를 이은 일본 적군파(赤軍派) 의해 주도되어 어느 나라에서보다 격렬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강경하였다
2.일본 적군파 JAL기(요도호) 납북사건과 항공기불법탈취(Hijacking)
(1)일본 적군파 JAL기(요도호) 납치사건 개요(1970년 4월 3일)
1970년 3월 31일 도쿄 하네다공항에서 탑승객 129명을 태우고 후쿠오카로 가던 일본 항공 소속 여객기 요도호가 일본도등으로 무장한 적군파 요원 9명에게 공중 납치되어 김포국제공항에서 불시착했다
납치범들은 승객을 인질로 북한행을 요구, 탑승객 전원을 석방하는 대신 일본운수성 정무차관 <야마무라 신지로>를 인질로 잡고 1970년 4월 3일 북한으로 넘어갔다
http://www.koreascope.org/ks/kor/main/hanbandoFocus/07/sn3-8.jsp
-일본정부측 일본인 납치 배후 북한정부 책임자 처벌요구, 일본 항공기 요도호 납치범의 무조건 인도와 북핵 6자회담 조기 복귀등 요구
(2)항공기 불법탈취(Hijacking)
항공기불법탈취(航空機不法奪取, Hijacking)은 항공기를 불법 탈취하여 운항의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이다 보통 하이재킹(Hijacking)이라고 한다
항공기 자체의 강탈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항공기의 운항을 강제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특징이다 형태에 따라 망명형(亡命型), 아랍 게릴라나 일본적군파에 의한 정치활동형, 무목적(無目的) 충동적인 것으로 미국에 많은 이상형, 불황의 상황에서 몸값 요구를 목적으로 하는 불황형등으로 나눌 수 있다
1930년 페루 혁명파의 국내선 여객시 탈취사건이 최초이며 기록으로 남아 있는 최초의 사건은 1948년 6월 마카오-홍콩간 상공에서 발생한 캐세이퍼시픽 항공 납치사건이다 이 사건은 범임을 체포하기 위한 총격전으로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태까지 빚었다
1960년대 이후 사고가 빈발하였는데 당시 친소(親蘇)적이었던 쿠바를 목적지로 하는 항공기를 대상으로 미국에 거주하는 쿠바인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많았다
1960년대 말 이후 팔레스타인 게릴라에 의한 사건, 1970년대 3월 일본적군파 9명이 나고야 상공에서 일본 여객기를 납치하여 북한 평양으로 망명한 요도호사건등 1970년대를 거치면서 정치적 목적의 불법탈취사건이 많아졌다
이 시기부터 사건이 급증하기 시작 많은 해는 100건이 넘어 항공회사에 큰 위협이 되었으나 방지대책이 강화되면서 점차 줄어들고 있다 사건방지를 위해서 경찰의 단속체제 강화, 위험물 반입금지, 국제협력등의 방법이 동원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경호인이나 경관의 순찰과 탑승, 항공기내 조종실의 보안, 금속성 무기 탐지장치와 X선투시 TV활용, 승객과 수하물에 대한 검사등이 행해지고 있다
-1930년 페루 혁명파의 국내선 여객기 탈취사건(최초)
-1948년 6월 캐세이퍼시픽 항공기 납치사건
-1960년말 팔레스타인 게릴라에 의한 사건
-1970년4월 3일 일본적군파 9명에 의한 요도호 사건
-2000년 9월 11일 알카에다에 의한 비행기 납치와 뉴욕참사
3.요도호 실행범 자녀 귀국과 아내 일본 귀국 준비 자료
(1)요도호 실행범 자녀들의 일본 귀국(2004년 1월 13일 한겨레신문 보도내용)
북한 평양에 거주해 온 요도호 납치범 그룹의 자녀 6명이 2004년 1월 13일 일본귀국길에 올랐다고 <교토통신>이 보도했다
이들은 이날 오전 평양을 출발해 중국 베이징에 도착한 뒤 현지 일본대사관 직원들의 본인 확인작업을 거쳐 일본국적 항공기편을 이용해 이날 밤 나리카공황에 도착했다
이번에 귀국한 사람들은 1983년 유럽에서 유학 중이던 아리모토 게이코(당시 23살)의 납치에 관여했음을 인정한 요도호 납치범의 전처 야오 메구미의 차녀(23세)와 <요도호 납치그룹>의 대표였던 다미야 다카마로(1995년 사망)의 장남(20세)등 모두 6명이라고 통신은 전했다
<요도호 납치 그룹> 자녀들의 귀국은 2001년 5월과 2002년 9월에 이은 세번짜가 된다 <요도호 납치그룹> 자녀들은 총 18명이며 이 가운데 이미 8명이 귀국했다
(2)요도호 실행범 아내 귀국 준비(2005년 1월 6일 NHK 보도)
북조선의 납치사건에 관여한 혐의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요도호 납치사건 실행범의 아내 두명이 올 5월쯤에 북조선에서 잇따라 귀국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경시청은 귀국할 경우 여권법 위반혐의로 체포하고 납치사건에 대해서도 조사할 방침입니다
귀국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은 요도호납치사건 실행범으로 북조선에서 사망한 다이먀 다카마로 전(前) 간부의 아내인 51살 모리 요리코 용의자와 실행범 와카바야시 모리아키 용의자의 아내인 50살 사키고 용의자 두사람입니다
사키고 용의자는 도항을 허가하지 않았던 당시 북조선에 건너갔으며 모리 요리코 용의자는 여권 반납 명령에 따르지 않아 여권법 위반 혐의로 국제수배 중입니다
조사에 따르면 두 사람은 25년전인 1980년 스페인의 동물원에서 실종되기 직전의 이시오카 도오루씨와 함께 사진을 찍었으며 마스키 가오루씨와도 접촉한 것으로 보여 경사청은 납치에 관여한 혐의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4.요도호(號) 사건 자료
(1)실종 두 남성 <속아서 북한에> 요도호 전(前) 아내가 최근수기
-아사히(朝日) 2002년 6월 22일(토요일)-
http://www.bandy.pe.kr/japancity/news_200206.html
<요도호> 하이재크 사건 멤버의 아내였던 八尾惠(팔미혜) 전 스넥주인(46세)이 최근 발표하는 수기에서 1980년 유럽에서 실종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입국했다고 보여지는 홋카이도 출신과 쿠마모토현 출신의 2명의 남성에 대해 <속았다>고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고 쓰고 있었다 2명의 실종경위에 불명확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경찰청은 납치사건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수기는 <사죄합니다>라는 제목으로 2002년 6월 26일에 분게이슌쥬에서 발매된다
그 수기에서 전(前) 아내는 북한에 있었을 무렵 관계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로서 2명을 언급 요도호 멤버의 아내들에 이끌려 1개월 정도 여행할 생각으로 북한에 왔지만 <북한이 쉽게 돌려 보내주지 않을 것을 알고 매우 화를 냈다> <속았다며 노발대발해. 폭행사건을 일으켰다>고 한다
또 프랑스의 음식점에서 일하고 있던 당시 25세의 남성을 <획득활동>으로서 북한에 데리고 가려했던 것을 밝혔다 도중에 임무를 떠났기 때문에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전(前) 아내는 금년 3월 코베시 아리모토 케이코씨 납치에 관여했고 토쿄 지방법원에서 증언했다
(2)대남공작(사단법인 혜성사회윤리문제연구소)
http://www.hses.com/operator.html
방중(訪中) 중인 일중우호의원연맹(日中友好議員聯盟)은 8일, 호금도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했다 회담에서 호금도(胡錦濤) 국가주석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에 대해서 <해결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북정구간 교섭에서 납치피해자의 가족 8명의 조기 귀국에 대해서 해결을 향한 진전이 있었다는 정보를 북한 측으로부터 얻었을 가능성도 있다(야후 Japan 2004. 5. 8)
(3)김정일의 대남공작-3호청사
일본인 납치와 그리고 남한 주민들을 납치하여 간첩교육을 시켜서 공작원으로 파견하는 곳이 바로 북한정부 3호청사로 알려져왔다
<3호 청사>란 북한정부 건국이래 지배해온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직속의 대남공작부서를 총칭한다 <3호 청사>는 통일전선부(범민련, 범청련등 조직), 대외정보조사부, 대외연락부(사회문화부), 작전부라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직속의 네개의 부(部)로 되어 있다
납치는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부터 본격화 되었다
납치대상은 일본인을 비롯해 한국인, 아랍인, 중국인, 유럽인등이 다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4년 김정일이 후계자로 지목된 후 김정일 정치군사대학의 <주체철학>을 교육 교재로 활용할 만큼 김정일가 <3호 청사>를 실질적으로 운영해왔다고 알려지고 있다
납치목적은 남한등의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기술, 생활습관, 언어습관등을 가르쳐야 하고 공작원이 현지화 양성체계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일은 일본에 가면 일본인, 중국에 가면 중국인, 캄보디아에 가면 캄보디아인이 되어 언어. 습관. 직업문제를 합법적으로 해결해야만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김정일은 현지인과 동화될 수만 있다면 공작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4)조명록 차수 방미와 남북평화체제(국제테러에 관란 북-미 공동선언)
http://www.peacekorea.org/kang/002.html
미국은 그 동안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의 조건으로 ㄱ.테러반대 서약 ㄴ.테러방지 국제기구 가입 ㄷ.요도호 납치범 석방등을 요구해왔다
(5)북한의 가짜 유골 송환, 급속히 냉각되는 북-일관계 그리고 일본 국민들이 북한에 제재촉구
지난 2002년 북한은 간첩 훈련용으로 13명의 일본인들을 납치해 갔다고 시인한 뒤 일본으로 돌아간 5명을 제외한 8명 모두 사망한 것으로 밝히고 있으나 일본측은 다른 두명이 더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은 피납된 일본인들의 행방에 대한 의혹이 풀리지 않는다면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가질 수 없다고 밝혀왔다
북한이 피납 일본인의 유해라며 일본정부에 인도한 두번째 유해 역시 다른 사람의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북한-일본관계가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북한정부는 지난달 평양에서 열린 북한과 일본 피랍자 실무회의 당시, 지난 1970년대와 1980년대 간첩교육을 위해 납치했다고 시인했던 8명의 일본인 중 한명인 마츠키 카오로씨의 유해라며 일본정부에 유골을 인도했으나 그 유골 DAN검사 결과 가짜임이 밝혀졌다
지난 1980년 북한에 납치될 당시 26세 마츠키씨, 그 당시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었으며 북한은 마츠키씨가 1994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고 주장해왔다 북한은 지난 2002년에도 마츠키씨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유해일부를 일본정부에 인도했었지만 일본의 전문가들은 DAN검사결과 여자노인의 것이라고 결론 내린 바 있다(NHK)
1.일본 적군파(日本 赤軍派)
적군파는 일본 테러단체이다
1948년 형성된 일본 학생운동의 통일체인 전일본학생자치연합(전학연)이 1960년대 안보투쟁을 벌인 뒤 분열되자 이 중 마오쩌둥식(모택동식) 무력투쟁을 주장하며 트로츠키주의를 신봉하는 공산동맹에서 분리 1969년 발족한 단체이다
일본적군파는 국제공산주의 노선 트로쯔키노선이 아닌 일국사회주의 운동 또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운동(NLPDR) 노선 스탈린.모택동.김일성주의 노선 신봉자들이다
4백여 명의 호전분자들로 구성된 이들은 일체의 기존체제를 파괴한다는 폭력제일주의와 무장혁명 그리고 일본왕정타도와 일본 사회주의 국가수립등을 주장하였다
1972년 적군파 내의 온건파 14명을 처형하고 경찰과 대치한 연합적군사건이 있은 뒤 폭력대상을 해외로 돌려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과 유대를 맺고, 1974년까지 공동테러를 벌여왔다 1974년 이후 시게노부후사코(重信房子)를 두목으로 하여 싱가포르. 네덜란드, 말레이시아등지에서 테러를 일으켰으나 국제경찰의 추적과 조직 이탈로 거의 와해되었다
적군파는 NLPDR론자들로 북한정부 대남공작부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과 연계되어 국제적으로 활동해왔다
-일본에서 1969년 도쿄(동경)대학 학내문제로 인한 학생운동이 반전운동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좌파학생조직인 전(全)일본학생자치회연합(전학연)과 그 뒤를 이은 일본 적군파(赤軍派) 의해 주도되어 어느 나라에서보다 격렬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강경하였다
2.일본 적군파 JAL기(요도호) 납북사건과 항공기불법탈취(Hijacking)
(1)일본 적군파 JAL기(요도호) 납치사건 개요(1970년 4월 3일)
1970년 3월 31일 도쿄 하네다공항에서 탑승객 129명을 태우고 후쿠오카로 가던 일본 항공 소속 여객기 요도호가 일본도등으로 무장한 적군파 요원 9명에게 공중 납치되어 김포국제공항에서 불시착했다
납치범들은 승객을 인질로 북한행을 요구, 탑승객 전원을 석방하는 대신 일본운수성 정무차관 <야마무라 신지로>를 인질로 잡고 1970년 4월 3일 북한으로 넘어갔다
http://www.koreascope.org/ks/kor/main/hanbandoFocus/07/sn3-8.jsp
-일본정부측 일본인 납치 배후 북한정부 책임자 처벌요구, 일본 항공기 요도호 납치범의 무조건 인도와 북핵 6자회담 조기 복귀등 요구
(2)항공기 불법탈취(Hijacking)
항공기불법탈취(航空機不法奪取, Hijacking)은 항공기를 불법 탈취하여 운항의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이다 보통 하이재킹(Hijacking)이라고 한다
항공기 자체의 강탈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항공기의 운항을 강제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특징이다 형태에 따라 망명형(亡命型), 아랍 게릴라나 일본적군파에 의한 정치활동형, 무목적(無目的) 충동적인 것으로 미국에 많은 이상형, 불황의 상황에서 몸값 요구를 목적으로 하는 불황형등으로 나눌 수 있다
1930년 페루 혁명파의 국내선 여객시 탈취사건이 최초이며 기록으로 남아 있는 최초의 사건은 1948년 6월 마카오-홍콩간 상공에서 발생한 캐세이퍼시픽 항공 납치사건이다 이 사건은 범임을 체포하기 위한 총격전으로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태까지 빚었다
1960년대 이후 사고가 빈발하였는데 당시 친소(親蘇)적이었던 쿠바를 목적지로 하는 항공기를 대상으로 미국에 거주하는 쿠바인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많았다
1960년대 말 이후 팔레스타인 게릴라에 의한 사건, 1970년대 3월 일본적군파 9명이 나고야 상공에서 일본 여객기를 납치하여 북한 평양으로 망명한 요도호사건등 1970년대를 거치면서 정치적 목적의 불법탈취사건이 많아졌다
이 시기부터 사건이 급증하기 시작 많은 해는 100건이 넘어 항공회사에 큰 위협이 되었으나 방지대책이 강화되면서 점차 줄어들고 있다 사건방지를 위해서 경찰의 단속체제 강화, 위험물 반입금지, 국제협력등의 방법이 동원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경호인이나 경관의 순찰과 탑승, 항공기내 조종실의 보안, 금속성 무기 탐지장치와 X선투시 TV활용, 승객과 수하물에 대한 검사등이 행해지고 있다
-1930년 페루 혁명파의 국내선 여객기 탈취사건(최초)
-1948년 6월 캐세이퍼시픽 항공기 납치사건
-1960년말 팔레스타인 게릴라에 의한 사건
-1970년4월 3일 일본적군파 9명에 의한 요도호 사건
-2000년 9월 11일 알카에다에 의한 비행기 납치와 뉴욕참사
3.요도호 실행범 자녀 귀국과 아내 일본 귀국 준비 자료
(1)요도호 실행범 자녀들의 일본 귀국(2004년 1월 13일 한겨레신문 보도내용)
북한 평양에 거주해 온 요도호 납치범 그룹의 자녀 6명이 2004년 1월 13일 일본귀국길에 올랐다고 <교토통신>이 보도했다
이들은 이날 오전 평양을 출발해 중국 베이징에 도착한 뒤 현지 일본대사관 직원들의 본인 확인작업을 거쳐 일본국적 항공기편을 이용해 이날 밤 나리카공황에 도착했다
이번에 귀국한 사람들은 1983년 유럽에서 유학 중이던 아리모토 게이코(당시 23살)의 납치에 관여했음을 인정한 요도호 납치범의 전처 야오 메구미의 차녀(23세)와 <요도호 납치그룹>의 대표였던 다미야 다카마로(1995년 사망)의 장남(20세)등 모두 6명이라고 통신은 전했다
<요도호 납치 그룹> 자녀들의 귀국은 2001년 5월과 2002년 9월에 이은 세번짜가 된다 <요도호 납치그룹> 자녀들은 총 18명이며 이 가운데 이미 8명이 귀국했다
(2)요도호 실행범 아내 귀국 준비(2005년 1월 6일 NHK 보도)
북조선의 납치사건에 관여한 혐의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요도호 납치사건 실행범의 아내 두명이 올 5월쯤에 북조선에서 잇따라 귀국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경시청은 귀국할 경우 여권법 위반혐의로 체포하고 납치사건에 대해서도 조사할 방침입니다
귀국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은 요도호납치사건 실행범으로 북조선에서 사망한 다이먀 다카마로 전(前) 간부의 아내인 51살 모리 요리코 용의자와 실행범 와카바야시 모리아키 용의자의 아내인 50살 사키고 용의자 두사람입니다
사키고 용의자는 도항을 허가하지 않았던 당시 북조선에 건너갔으며 모리 요리코 용의자는 여권 반납 명령에 따르지 않아 여권법 위반 혐의로 국제수배 중입니다
조사에 따르면 두 사람은 25년전인 1980년 스페인의 동물원에서 실종되기 직전의 이시오카 도오루씨와 함께 사진을 찍었으며 마스키 가오루씨와도 접촉한 것으로 보여 경사청은 납치에 관여한 혐의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4.요도호(號) 사건 자료
(1)실종 두 남성 <속아서 북한에> 요도호 전(前) 아내가 최근수기
-아사히(朝日) 2002년 6월 22일(토요일)-
http://www.bandy.pe.kr/japancity/news_200206.html
<요도호> 하이재크 사건 멤버의 아내였던 八尾惠(팔미혜) 전 스넥주인(46세)이 최근 발표하는 수기에서 1980년 유럽에서 실종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입국했다고 보여지는 홋카이도 출신과 쿠마모토현 출신의 2명의 남성에 대해 <속았다>고 호소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고 쓰고 있었다 2명의 실종경위에 불명확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경찰청은 납치사건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수기는 <사죄합니다>라는 제목으로 2002년 6월 26일에 분게이슌쥬에서 발매된다
그 수기에서 전(前) 아내는 북한에 있었을 무렵 관계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로서 2명을 언급 요도호 멤버의 아내들에 이끌려 1개월 정도 여행할 생각으로 북한에 왔지만 <북한이 쉽게 돌려 보내주지 않을 것을 알고 매우 화를 냈다> <속았다며 노발대발해. 폭행사건을 일으켰다>고 한다
또 프랑스의 음식점에서 일하고 있던 당시 25세의 남성을 <획득활동>으로서 북한에 데리고 가려했던 것을 밝혔다 도중에 임무를 떠났기 때문에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전(前) 아내는 금년 3월 코베시 아리모토 케이코씨 납치에 관여했고 토쿄 지방법원에서 증언했다
(2)대남공작(사단법인 혜성사회윤리문제연구소)
http://www.hses.com/operator.html
방중(訪中) 중인 일중우호의원연맹(日中友好議員聯盟)은 8일, 호금도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했다 회담에서 호금도(胡錦濤) 국가주석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에 대해서 <해결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북정구간 교섭에서 납치피해자의 가족 8명의 조기 귀국에 대해서 해결을 향한 진전이 있었다는 정보를 북한 측으로부터 얻었을 가능성도 있다(야후 Japan 2004. 5. 8)
(3)김정일의 대남공작-3호청사
일본인 납치와 그리고 남한 주민들을 납치하여 간첩교육을 시켜서 공작원으로 파견하는 곳이 바로 북한정부 3호청사로 알려져왔다
<3호 청사>란 북한정부 건국이래 지배해온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직속의 대남공작부서를 총칭한다 <3호 청사>는 통일전선부(범민련, 범청련등 조직), 대외정보조사부, 대외연락부(사회문화부), 작전부라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직속의 네개의 부(部)로 되어 있다
납치는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부터 본격화 되었다
납치대상은 일본인을 비롯해 한국인, 아랍인, 중국인, 유럽인등이 다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4년 김정일이 후계자로 지목된 후 김정일 정치군사대학의 <주체철학>을 교육 교재로 활용할 만큼 김정일가 <3호 청사>를 실질적으로 운영해왔다고 알려지고 있다
납치목적은 남한등의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기술, 생활습관, 언어습관등을 가르쳐야 하고 공작원이 현지화 양성체계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일은 일본에 가면 일본인, 중국에 가면 중국인, 캄보디아에 가면 캄보디아인이 되어 언어. 습관. 직업문제를 합법적으로 해결해야만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김정일은 현지인과 동화될 수만 있다면 공작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4)조명록 차수 방미와 남북평화체제(국제테러에 관란 북-미 공동선언)
http://www.peacekorea.org/kang/002.html
미국은 그 동안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의 조건으로 ㄱ.테러반대 서약 ㄴ.테러방지 국제기구 가입 ㄷ.요도호 납치범 석방등을 요구해왔다
(5)북한의 가짜 유골 송환, 급속히 냉각되는 북-일관계 그리고 일본 국민들이 북한에 제재촉구
지난 2002년 북한은 간첩 훈련용으로 13명의 일본인들을 납치해 갔다고 시인한 뒤 일본으로 돌아간 5명을 제외한 8명 모두 사망한 것으로 밝히고 있으나 일본측은 다른 두명이 더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은 피납된 일본인들의 행방에 대한 의혹이 풀리지 않는다면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가질 수 없다고 밝혀왔다
북한이 피납 일본인의 유해라며 일본정부에 인도한 두번째 유해 역시 다른 사람의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북한-일본관계가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북한정부는 지난달 평양에서 열린 북한과 일본 피랍자 실무회의 당시, 지난 1970년대와 1980년대 간첩교육을 위해 납치했다고 시인했던 8명의 일본인 중 한명인 마츠키 카오로씨의 유해라며 일본정부에 유골을 인도했으나 그 유골 DAN검사 결과 가짜임이 밝혀졌다
지난 1980년 북한에 납치될 당시 26세 마츠키씨, 그 당시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었으며 북한은 마츠키씨가 1994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고 주장해왔다 북한은 지난 2002년에도 마츠키씨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유해일부를 일본정부에 인도했었지만 일본의 전문가들은 DAN검사결과 여자노인의 것이라고 결론 내린 바 있다(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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