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맥아더 장군의 연설문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본문
대통령! 양하원 의장! 고명하신 국회의원(양하원 의원) 여러분!
나는 지금 깊이 겸허하는 마음과 자랑스러운 생각(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이 연단에 섰습니다.
나 보다 먼저 이 자리에 연설을 하던 우리 나라의 위대한 건설자들의 말 없는 압력을 느끼는지라 자연히 겸허한 생각이 나고, 이 입법은 인류가 오늘날까지 창안해 낸 것 가운데 가장 순수한 형식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대표한다는 것을 반성한지라 자연히 자랑스런 생각이 떠 오릅니다.
온(全) 인류의 희망, 포부, 신념이 오늘 이 자리에서 집중되어 있습니다. 나는 오늘 어떠한 당파적 목적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 하면 제가 말씀드리려는 이 문제들은 근본적인 것으로서 당파적 이해 영역을 훨씬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방법이 건전해지고 우리의 미래가 보호되기 위해서는 이 문제들이 국가 이익이라는 최고수준에서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앞으로 말씀 드리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동포 미국인이 깊이 고려해 온 그 견해를 표명하는 것이라고 여러분께서 공정하게 받아 주실 것을 나는 믿습니다.
나는 지금 저물어가는 인생의 황혼기를 마지하여 아무런 원한도 미움도 없이 오로지 나라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오직 한 가지 의도 밑에서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박수 소리)
이 문제들은 범세계적인 것들로,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한 부문의 문제들을 다른 것들과 무관하게 고려한다면 결국 모두에게 재난을 초래하고 말 것 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시아는 유럽의 관문이라 하지만, 유럽이 아시아의 관문이라는 것도 역시 진리입니다
그런지라 한 지역에 나타나는 광범위한 영향이 다른 한지역에 대해서도 큰 영향을 주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군사력은 양쪽 전선을 다 보호하기에는 역부족이며, 우리의 노력을 분산시켜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패배주의적 발언이 어디있겠습니까. (박수 소리)
가령 우리의 가상의 적(敵)이 병력을 두개의 전선(戰線)에 분산시킨다면, 이에 맞서 반격을 가하 는 것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온(全) 세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 한 지역에서 공산주의 진출이 성공하면 다른 지역까지 파괴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유화책을 쓰거나 또는 굴복하고 만다면 그 즉시 공산주의의 유럽 진출을 막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은 필연코 무산되고 말 것입니다. (박수 소리)
너무 자명한 이치들을 지적하기보다는 아시아 전반에 걸친 지역으로 국한시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현(現) 아시아 정세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면 그에 앞서 아시아의 과거, 그리고 지금의 아시아가 있기까지 그들이 겪은 혁명적인 변화에 관해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른바 식민지 강국들에게 오랫동안 착취를 당하여 사회의 정의라던가, 개인의 존엄성이라던가, 생활수준의 향상 같은 것을 성취할 기회를 거의 박탈당했던 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은 식민지 잔재라는 질곡을 벗어버릴 기회를 얼마 전 끝난 세계 2차 전쟁(태평양 전쟁)에서 겨우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새로운 기회,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존엄성, 그리고 정치적 자유라는 자존심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 세계 천연자원의 60%를 보유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 주민들은 정신적, 물질적 양면에 있어서 새로운(新) 세력을 급속히 결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힘으로써 그들의 생활표준을 향상시키며 현대적 진보의 은신처를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적 환경에다가 적응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식민지화라는 개념에 집착하든 하지 않든 간에, 오늘의 아시아가 걸어가는 이런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고, 이를 멈출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 정세의 중심점이 시발점으로 순환 회귀함에 따라 세계 경제의 최전선이 바뀌면서 생기는 당 연한 결과입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현실을 도외시한 채 한 방향을 쫓기보다는 기본적 인 발전 상황에 맞추어 정책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식민지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고, 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은 이제 자신의 운 명을 자유롭게 개척해 나갈 권리를 열망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지금의 현실 입니다. 이제 그들이 원하는 것은 명령조의 지시가 아닌 우호적인 안내 역할과 이해, 그리고 지원입니다. 그들은 피정복자로서의 수치감이 아니라 평등이라는 존엄성을 원하고 있습니다(박수 소리)
원래 말할 수 없게스리 저열하던 그들의 생활수준은, 戰前(전전)에도 비참할 정도로 낮았지만, 지금은 전쟁 이 할퀴고 간 폐허 속에서 한없이 악화되었습니다. 세계의 이데올로기는 아시아 사람들의 두뇌 속에서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고 제대로 이해되지도 않고 있습니다.
이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배를 조금이라도 더 채워 줄 음식, 좀 더 따뜻하게 해 줄 옷, 머리 위를 가려 줄 좀더 견고한 집, 그리고 정상적인 민족적 염원인 정치적 자유의 실현입니다.
이같은 정치·사회적 상황은 우리 국가 안보에는 단지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뿐이지만 우리의 현재 계획과 관련된 배경을 형성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비현실주의라는 함정을 피하려고 할 때 반드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 입니다.
보다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우리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으로는 戰後(전후) 상황에서 태평양이 갖는 전략적 잠재력으로 인해 야기된 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미국의 서쪽 전략적 전선은 미국 본토의 해안선과 하와이, 미드웨 이 제도, 괌 등의 섬을 잇는 돌출부로 설정되어 공격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이 돌출부는 병력의 거점이 아니라, 적들이 공격해 올 가능성이 있거나, 실제로 공격을 감행해 온 적이 있는 취약한 통로임이 증명되었습니다 . 태평양은 인접한 육지를 노리는 침략군들이 누구나 진격해올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우리가 태평양에서 승리를 거둠에 따라 바뀌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전략적 전선은 태평양 전 지역(全域)을 포함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이곳은 우리가 장악하고 있는 한 우리를 보호해 줄 거대한 垓字(해자)가 된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아메리카 대륙 전체와 태평양 지역의 모든 자유 국가를 지키는 방패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자유 맹방들이 장악하고 있는 알류산 열도에서 마리아나 제도까지 弧(호) 모양으로 펼쳐진 일련의 섬들에 의해 아시아의 해안까지 이르는 태평양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고리처럼 연결된 이들 섬을 통해 우리는 해군력과 공군력을 가지고 블라디 보스토크에서 싱가포르에 이르는 아시아의 모든 항구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 해군력과 공군력으로, 방금 말씀드렸듯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싱가포르 에 이르는 모든 항구를 말입니다 -- 그리고 태평양으로 진입하려는 어떤 적대 행위도 막을 수 있습니다
어떤 약탈적 군대가 아시아에서 침공해 올 때는 반드시 수륙 양면으로 공격해 올 것입니다. 수륙 양면 공격은 진격 코스의 해상 통로와 그 위의 공중 통로를 장악하지 못 하면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制海權(제해권)과 制空權(제공권), 그리고 기지를 방어할 수 있는 적당한 지상군을 갖추고 있으면, 대륙 아시아에서 우리나라나 태평양의 우리 우방으로 몰려오는 어떤 대규모 공격도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같은 상황에서 태평양은 더 이상 가상 침략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위협적인 공격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평화로운 호수와 같은 친근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일본 국민들은 현대사에 기록될 최고의 개혁을 수행해 왔습니다. 대단한 의지와 배우고자 하는 열정, 놀라운 이해력으로 일본인들은 전쟁의 참화가 남긴 잿더미 속에서 개인적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드높일 수 있는 체계를 건설해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과정에서 정치적 도덕성, 경제 활동의 자유, 사회 정의의 高揚(고양)이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진정한 代議(대의)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일본은 지금 지구상의 많은 자유 국 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며, 이제 다시는 세계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 이 없을 것입니다. 일본은 일본이 아시아에서의 정세 변화에 매우 중대하고 유익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해도 좋다는 점을 당당히 증명해냈습니다. 일본 국민들은 외부로부터의 전쟁, 혼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혼동 등 외부로부터의 도전에 훌륭하게 대처해 왔을 뿐만 아니라 발전의 기세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내부 전선에서 공산주의를 막아냈습니다.
저는 駐日(주일) 미군 4개 사단 모두를 한국 전선에 투입했습니다. 병력 공 백이 일본에 미칠 결과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저의 신 념을 확고하게 정당화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주변 지역에 대한 이같은 통찰을 바탕으로 이제 한국 전쟁에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지원 개입 결정에 앞서 제게 자문을 구했던 일은 없었지만, 그 결정은 군사적 견지에서 볼 때 결과적으로 타당한 것이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극히 명료하고 타당한 결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침략자들을 신속히 몰아내고 병력을 무력화시켰으니까요. 우리의 승리는 완벽했고, 우리의 목표는 거의 손 안에 잡힐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중공이 수적으로 우세한 지상군을 이끌고 개입했습니다
그로인해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고 전혀 새로운 국면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미군이 북한의 침략자들과 맞설 당시에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상황, 그리고 군사전략을 현실적으로 재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외교적 차원의 새로운 결단이 요구되는 상황이 대두된 것입니다. 그러한 결정은 내려진 바 없 습니다.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우리의 지상군을 중국 대륙에 보내 는 것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작전은 검토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하 지만 새로운 상황의 전개로 군사전략의 과감한 수정이 다급하게 필요했습 니다. 우리가 과거에 적을 물리쳤던 것처럼 이 새로운 적을 물리치는 것이 우리의 정치적인 목표라면 말입니다
압록강 이북 지역 적군의 성역(聖域)을 무력화시킨다는 군사적 필요성과는 별개로, 저는 전쟁수행과정에서 다음의 몇가지 군사적 행동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첫째 중국에 대한 경제 봉쇄 강화, 둘째 중국 해안에 해상 봉쇄 강행, 셋째 중국의 해안 지역과 만주에 대한 공중 정찰 제한 철폐, 넷째 대만의 중화민국 자유중국군에게 내려진 제한의 철폐와 중국 본토에 대한 효과적 작전 수행을 위한 병참 지원 등입니다. (박수 소리)
이러한 견해는 사실 모두 한국에 있는 우리 미군을 지원하고 최대한 신속히 적대 행위를 종식시키되 수많은 미군 및 연합군의 목숨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서 전문적으로 연구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를 가졌다는 이유로 저는 비전문가 집단, 특히 외국인들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 제가 알기로는 군사적인 견해에서 보았을 때 앞서 말한 의견들이 우리 합동참모본부를 포함해, 과거 사실상 한국전과 관련이 있는 모든 군사 지도자 들이 이미 의견일치를 보았던 견해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저는 병력 증강을 요구했습니다만 군사력 증강은 불가능하다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저는 분명히 밝혔습니다. 만약, 압록강 이북의 적군 기지 파괴나, 대만에 있는 약 60만의 우방 중국군의 활용을 허락받지 못하거나, 중국의 해안을 봉쇄해 중공군이 외부로부터 지원을 얻지 못하게 막도록 허락을 받지 못한다면, 그리고 병력이 대폭 강화될 것이라는 희망이 전혀 없다면, 군사적인 견지에서 볼 때는 명령권자의 입장이 승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지속적인 작전을 통해 버틸 수 있고, 우리 補給線(보급선 )의 우위와 적군 보급선의 불리함이 비슷하게 균형을 이루는 어떤 지역에서 계속 버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기껏 해야 지지부진한 전투뿐입니다. 게다가 적군이 군사 병력을 전면 동원할 경 우 끊임없이 심각한 병력 소모를 감당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새로운 정치적 결단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습니다. 저의 입장을 왜곡하려는 시도가 계속 있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전쟁광(狂)이라는 말까지 합니다. 진실이 이보다 더 심각하게 왜곡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현존하는 사람들 중에 저만큼 전쟁을 아는 사람도 드뭅니다 -- 그러나 제게 그 어느 것도 -- 그 어느 것도, 전쟁만큼 혐오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저는 전쟁의 완전한 폐지를 오랫동안 주장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우방과 적 모두에게 미치는 무서운 파괴성 때문에 전쟁은 국제 분쟁 따위의 해결 수단으로서는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단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상항이 닥치면, 전쟁을 신속히 종결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는 것 외에 다른 代案(대안)이 없습니다. 전쟁의 목적은 바로 승리이지, 질질 끄는 우유부단함이 아닙니다. 전쟁에서는 승리 이외에 아무 代案(대안)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중공에 대해 유화책을 쓰려는 사람들이 일부 있습니다. 이들은 역사의 명백한 교훈에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유화 정책은 새롭 고 더욱 처참한 전쟁을 초래할 뿐이라는 교훈을 역사는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목적에 의해 수단이 정당화되거나, 유화정책이 거짓 평화보다 더 나은 상황으로 발전한 예는 역사의 어디에도 없습니다. 공갈과 마찬가지 로, 유화정책은 새로이 교묘하게 더 큰 것을 계속 요구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마침내는 폭력만이 유일한 代案이 되는 상황을 초래하고 맙니다. 저 의 병사들이 제게 물었습니다, 왜 전장에서 적에게 군사적 우위를 내주느냐고. 저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과의 전면전으로까지 분쟁이 확대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서라고 말할 것입니다. 또 소련의 개입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설명도 타당성이 없습니다. 중국은 이미 동원 가능한 최대한의 병력으로 교전을 벌이고 있고, 소련은 공연히 우리의 조처와 맞물려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코브라 뱀처럼, 새로운 적들은 누구나 군사적인 면에서건 다른 힘에서건 全세계적으로 자신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하다고 느끼면 언제든지 공격해 올 것입니다. 한국의 비극은 한반도 내에서밖에 군사적 행동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하려고 하는 그 나라가 해군과 공군의 전면적인 폭격으로 인해 초토화되는 참상을 겪도록 형벌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적군의 聖域은 이런 공격과 참화로부터 안전하게 보호 받고 있는데 말입니다.
全(전)세계 국가들 중에서 한국만이 지금까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워 온 유일한 나라입니다. 한국 국민들이 보여준 그 대단한 용기와 불굴의 의지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노예 상태를 택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무릅쓰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내게 한 마지막 말은 『 태평양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전투중인 여러분의 아들들을 한국에 두고 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모든 시련을 견뎌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이 모든 면에서 정말 훌 륭하다고 주저없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보호하고 이 야만적인 분쟁을 명예롭게, 그리고 시간 손실과 인명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끝내고자 끝없이 노력했습니다. 점차 심각해지는 유혈참사는 저를 깊은 고뇌와 근심 속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이 용감한 젊은이들은 저의 마음속 에 그리고 항상 저의 기도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시절의 모든 희망 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제가 웨스트 포인트 연병장에서 임관하던 그 날 이후로 세상은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희망과 꿈도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저는 그 시절 가장 즐겨 부르던 어느 軍歌(군가)의 후렴 한 구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노래는 『老兵(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 속의 老兵처럼 이제 저는 제 軍생활을 마감하고 사라지려 합니다. 神(신)께서 의무에 대한 깨 달음을 주신 바에 따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애쓴 한 노병으로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한민족(조선족)의 3개 정부
남한(대한민국)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길림 연변조선족 자치정부 등 한민족(조선족)의 3개 정부입니다. 중국에 한국어(조선어)를 사용하는 조선족이 약192만명에서 약 200만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한족, 만주족(동북3성), 몽골족(내몽골), 위구르족(후이족=회족, 신장), 티베트족(티벳) 등 5개 큰 민족과 50개 소수민족으로 건국한 연합국가입니다
만국(만주국)은 한족,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일족(일본족, 야마토민족) 등 5개 종족 연합국이었습니다
만주국의 국기에는 노란색(만주족) 바탕 왼쪽 상단에 네 가지 색[빨간색(일본 민족), 파란색(한족), 하얀색(몽골족), 검정색(조선인)]의 가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오족협화의 이념을 뜻합니다
조선족이 만주국에서도 조선족 자치정부로 참여하여 상류층으로 생활했습니다
중국 길림성 조선족 연변자치주와 장백 자치현
두만강과 압록강 맞은 편에는 중국 길림성 조선족 연변자치주와 장백 자치현이 있다
남한(대한민국)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길림 연변조선족 자치정부(길림성 조선족 연변자치주와 장백 자치현)등 한민족(조선족)의 3개 정부가 존속하고 있다
1.길림성 조선족 연변자치주
옌볜 조선족 자치주(연변조선족자치주, 延邊朝鮮族自治州)는 중화인민공화국 동북 지역 지린 성(吉林省)의 자치주이다. 중심지는 연길(延吉)이다. 자치주의 면적은 43,474 km2, 2009년 인구는 217만9천명이다.
이 곳은 80만명의 재중동포가 거주하는 중국 최대의 조선족 거주 지역이다. 자치주 전체 인구 가운데 조선족 인구 비율은 36.7%이며, 조선족이 전체인구의 2%에 불과한 둔화 시를 제외한 연변 지역의 조선족 인구비율은 46.5%이다
민족분포: 조선족 32%, 한족64%, 만주족2.4% 등
(1)지리
남쪽은 북한 함경북도와 량강도, 동쪽은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지방, 북쪽은 헤이룽장 성 무단장, 서쪽은 지린 성 바이산에 접해 있다. 백두산은 이 지역의 남서쪽 끝에 있으며 해란강(海蘭江)과 가야하(嘎呀河) 등 주요 하천이 남쪽으로 흘러 두만강에 합류한다. 수계는 쑹화 강(송화강) 수계와 무단 강(목단강) 수계, 두만강 수계가 주이며 라즈돌나야 강(쑤이펀허) 수계도 존재한다.
(2)역사
이 곳은 고대에는 부여와 북옥저, 고구려, 발해의 영역이었다. 지금의 둔화 시에 있던 동모산(東牟山)은 발해 건국의 출발지였다. 이 지역은 발해의 중심지였던 만큼 현재도 발해 관련 유적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1949년에 발견된 정혜공주묘(둔화 시 육정산(六頂山) 고분군 제1구역 2호분)와 1980년에 정효공주묘가 발견된 허룽 시(和龍市)의 룽터우 산 고분군(龍頭山古墳群) 등이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조선의 함경도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이 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881년, 옌볜(延邊, 연변)지역의 조선인은 약 1만명이었다. 1907년에는 옌지(延吉, 연길)에만 조선인 가구수가 5만호(戶)에 이르렀는데 한족(漢族)은 조선인의 4분의 1도 되지 않았고, 3·1 운동 전인 1916년에 연변의 조선인은 이 지역 총인구 26만5천명 중 약 20만명이었다. 1930년에는 옌지 현, 허룽 현, 훈춘 현, 왕칭 현 등 4개 현의 조선인은 39만명으로 해당 지역 총인구의 76.4%를 차지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1952년에 9월 3일에 조선민족 자치구(自治區)가 설치되었는데, 자치구 성립 직후였던 1954년에 이 지역의 총인구 85만4천명 중 조선인은 53만명으로서 전체의 62%였다. 1955년에 조선족 비율이 2%에 불과한 둔화 현이 편입됨과 동시에 자치주(自治州)로 격하되었다. 조선족 자치주가 성립된 9월 3일을 기념하여 자치주 차원의 공휴일로 지정하였으며, 매년 9.3절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있다. 201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60주년을 맞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주요 인사들과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등 세계 각국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하여, 연길 시 체육관에서 약 3만 명이 참여하는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3)경제
연길은 목재 생산지로 광물 자원이 풍부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러시아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경과 가까운 훈춘은 변경 개방 도시로 지정되어 있다.
연길시에 연길 공항이 있다. 이 공항에서는 중국 국내선 및 인천국제공항과의 국제선 정기편이 운영되고 있다. 자치주라는 특성 때문에 정기편 이외에도 김해국제공항이나 제주국제공항과 같은 한국 노선의 부정기편이나 전세편 취항이 잦은 편이다.
(4)민족 구성
조선족 36.7% : 약 80만명으로, 이 중 84%가 연길, 용정, 화룡, 도문, 훈춘에 거주한다.
연길 시(延吉) - 58%
용정 시(龍井) - 67%
화룡 시(和龍) - 60%
도문 시(圖門) - 58%
훈춘 시(琿春) - 45%
왕청 현(汪淸) - 30%
안투 현(安圖) - 25%
돈화 시(敦化) - 2%
한족(漢族) 60.4%
기타(몽골족 등) 0.1%
연변에 가장 많은 성씨는 김(金)씨이다
2.길림성 장백 자치현
장백은 백산시에 속한 현으로 중국 길림성 조선족 자치현이다
장백자치현은 상류로 올라 오면서 큰 개울 수준이 된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의 양강도 혜산시(惠山市)와 마주보고 있다
창바이 조선족 자치현(長白朝鮮族自治縣, 장백 조선족 자치현)은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바이산 시에 위치한 자치현으로 중국에서 유일한 조선족 자치현이다. "장백 현"으로 불리기도 한다. 면적은 2,497.6 km², 총인구 8만5천여 명 중 한민족은 1만4천여 명이다.
지린 성 남부 압록강 상류로, 백두산의 서남쪽에 인접해 있다. 현(县)의 남쪽은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 양강도 혜산시 · 삼지연시 · 보천군 · 삼수군 · 신파군 · 후창군과 접하며, 북쪽은 린장 시 · 푸쑹 현과 접해 있다. 국경선의 길이가 260.5Km로 지린 성에서 국경선의 길이가 제일 긴 현이다.
1677년: 청나라가 이곳을 봉금지로 설정하고, 주민을 퇴거시켰다.
1875년: 청나라 정부가 봉금령을 해제하고, 개발정책을 시행했다.
1908년: 창바이 부치가 설치됨.
1949년: 창바이 현이 퉁화 전서에 편입됨.
1958년 9월 15일: 창바이(長白) 조선족 자치현이 성립, 지린 성 퉁화행서에 속했다.
1964년: 지린 성 퉁화 전구에 편입됨.
1985년 4월: 현이 독립함.
-길림성 조선족을 이용하여 역사적 알려진 전투는 일제 식민지 시대 동북항일연군의 보천보 전투와 한국전쟁 때 북중연합군의 장진호전투이다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이다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 내부 제 88독립저격여단)이다
만주파(滿洲派)란 북한에서 김일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유격대 활동을 한 인물들을 가리킨다. 김일성이 지휘했던 부대인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 6사에서 활동하지 않은 동북항일연군의 요인들 중에서도 최용건 등 같이 만주파에 포함된 인물들이 있다(김일성과 함께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 출신자들로 이루어진 세력. 주요 인물로 김일성, 김책, 최용건, 최현, 김일 등이 있다)
이 만주파는 해방이후 갑산계 소련계 남로당계 등을 정권투쟁에서 몰아내고 북한의 정치·군사 분야를 이끌어가는 핵심세력이 되었으며 북한의 현대사는 김일성과 만주파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8월 종파사건 이전까지 김일성은 북한과 조선로동당의 전체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고 만주파의 영수에 불과했다.
1.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1936년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만주에서 만들어진 항일 빨치산 조직(소련군의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성격)으로 지금까지 만주에서 활동하던 공산당계의 조선인, 중국인 빨치산 부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문호를 넓혀 우파 항일 무장단체를 받아 들여 1936년부터 개편되어 갔다.
주보중이나 김일성 등 중국인과 조선인의 유명한 파르티잔(Partizan, 빨치산) 소속으로 나중에 소련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조직으로 개편하여 그 구성원 중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한 권력의 중추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동북항일연군을 만주파로 지칭하고 있다)
(1)성립
1930년대 초반에서 만주국(満州国, 1932년 3월 1일 건국일)에서 중국 공산당 지도하에 조선인, 중국인의 항일 빨치산 부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편성되어 있었지만, 조선인 대원 400명 이상이 친일 스파이로 의심 받고 숙청된 민생단 사건(民生団事件) 등으로 탈출도 잇따라 조직이 효과적으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한편,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통일 인민전선(統一人民戦線)의 결성을 호소되면서 중국 공산당도 8월 테제를 발표하고 제2차 국공합작(第2次国共合作)을 호소했다. 이에 따라 만주에서도 “항일 반만(抗日反満)” 구호로 내세우면서, 국민당 계열의 독립 무장단체를 포함한 모든 단체와 합작하여 흡수를 목표로 정책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 이미 1934년경부터 국민당계열의 마적(馬賊, 말 타고 다니는 소수 무장단원의 군벌)이나 의용군(義勇軍)도 공산당의 지도하에 정리하려고 시도했던 것이지만, 토착 무장단체는 주로 부농(富農), 부호(富豪)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해 공산주의 색깔(노동자 계급 령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을 싫어하여 국가자본주의(국가사회주의) 일만측(日満側, 일본과 만주국)에 돌아는 경우가 많았다. 최대한 공산주의 색깔을 엷게 하여(통일전선 구축) 존속하고 있는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소규모 마적과 독립 무장단체를 흡수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재편되어 갔다.
그러나 통화성(通化省)을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계열의 최대의 항일 무장단체 왕봉각(王鳳閣)
의 반만항일군(大刀会, 대도회)과 만주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조선인 민족주의자 무장단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우파는 공투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집단의 참여를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큰 세력이 될 수 없었다.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제1. 2군이 남만주, 제4. 5. 7. 8. 10군이 동만주, 제3. 6. 9. 11군이 북만주로 확장했다
1936년 우선 남만주군(南満)이 제1로군(第一路軍)이 되고, 이것이 두고 두고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주력부대인 것으로 계속되어 나가게 되었다. 남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거주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간도는 민생단 사건이 꼬리를 이어 내분이 계속되고 좀처럼 재편은 부진했지만 1937년에는 동만주군 제2로군(東満軍 第二路軍)이 되었고, 1939년 북만주군 제3로군(北満軍 第三路軍) 것으로, 일단의 재편을 하게 되었다[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제1군으로부터 제11군까지 존재했으며, 제1군, 제2군이 남만주에서, 제4, 5, 7, 8, 10군이 동만주, 제3, 6, 9, 11군이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다. 후에 남만주의 군은 제1로군으로 동만주의 군은 제2로군으로 북만주의 군은 제3로군으로 재편성되었다]
(2) 편성
편성 당시의 제1로군(第1路軍)의 인원은 중국 공산당측 자료 "中共延辺党組織活動年代記(중공연초당조직활동연대기)“ ”동북항일연군투쟁사(東北抗日聯軍闘争史)“ 등 6,000여명 추측되고 일본측의 ”만주공산 비적의 연구(満州共産匪研究)“에 따르면 1,630명 정도에서 상당한 차이가있다.
또한 동북항일연군 아래의 인물은 사사키 하루타카(佐々木春隆) "한국전쟁 이전의 한국 독립운동 연구“와 강재언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에 따라했다.
서대숙 "김일성 사상과 정치 체제“가 자세 하지만, 동북인민혁명군 시대(東北人民革命軍時代)에 전사 한 인물이 실리는 등 착오가 보여 자료로 피했다.
해방 이후 최현(崔賢), 김일성(金日成), 최용건(崔庸健), 김책(金策), 강건(姜健), 최용진(崔勇進). 김일(金一), 이영호(李永鎬)은 살아남아 나중에 북한의 요직을 차지한다[동북항일연군을 만주파로 지칭하고 있으며 제88독립저격여단을 소련군으로 지칭하고 있다]
제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第一路軍 総司令-楊靖宇]
부총사령 왕덕태 [副総司令-王徳泰]
정치위원 위증민[政治委員・魏拯民]
제 1로군 군단장 양정우[ 第一軍 軍長-楊靖宇]
제1사단 사단장 정빈[第一師 師長-程斌]
· 제3여단 정치부 주임 이질수[第3団 政治部主任-李鉄秀]
제4여단 단장 수상태 [第4団 団長-隋祥太]
제6여단 단장 유인봉[第6団 団長-劉仁鳳]
제2사단 사단장 조국안[第二師 師長-曹国安]
제8여단[第8団]
제3사단 사단장 왕인재[第三師 師長-王仁斎]
제5여단[第5団]
제7여단[第7団]
제2로군 군단장 왕덕태[第二軍 軍長-王徳泰]
정치주임 오성륜(前),이청(後)[政治主任-呉成崙. 季青]
제4사단 사단장 안봉학[第四師 師長-安鳳学]
제1여단 단장 최현[第1団 団長-崔賢]
제2여단[第2団]
제3여단[第3団]
제5사단 사단장 진한장[第五師 師長-陳翰章]
제4여단[第4団]
제5여단[第5団]
제6여단[第6団]
제6사단 사단장 김일성[第六師 師長-金日成]
제7여단 단장 김주현[第7団 団長-金周賢]
제8여단 정치위원 박덕산(김일)[第8団 政治委員・朴徳山(金一)]
제9여단[第9団]
제10여단[第10団]
독립여단 여단장 방진성[独立旅 旅長-方振声]
제1여단 단장 최춘국[第1団 団長-崔春国]
제2여단[第2団]
교도여단[教導団]
제2로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주보중[第二路軍 総司令兼政治委員-周保中]
참모장 최용건(최석천)[参謀長-崔庸健(崔石泉)]
제4군 군단장 이연평[第四軍 軍長-李延平]
부군단당 왕광우[副軍長-王光宇]
제1사단 사단장 관서범[第一師 師長-関書範]
제1여단[第1団]
제2여단[第2団]
제3여단[第3団]
제2사단[第二師]
제2사단 정치위원 도정비[第二師 政治委員-陶浄非]
제4사단 정치위원 김광협[第4団 政治委員-金光侠]
제5여단 정치위원 박동화[第5団 政治委員-朴東和]
제6여단[第6団]
제3사단 사단장 이문빈[第三師 師長-李文彬]
제8여단[第8団]
제9여단 정치위원 강신태(강건)[第9団 政治委員・姜信泰(姜健)]
제7군 군단장 이학복[第七軍 軍長-李学福]
군단장 대리 최석천(최용건), 경낙정[軍長代理-崔石泉,景楽亭]
정치주임 정로암, 포림(政治部主任-鄭魯岩,鮑林)
제1사단 사단장 왕여기[第一師 師長-王汝起]
정치부 주임 팽시노[政治部主任-彭施魯]
제1여단 여단장 최용진[第一団団長-崔勇進]
제2사단 사단장 유기창[第二師 師長-鄒其昌]
제7여단 정치위원 이영호[第七団政治委員-李永鎬]
제3사단 사단장 경낙정,운학영, 수장청[第三師 師長-景楽亭,雲鶴英、隋長青
제8군 군단장 사문동[第八軍 軍長-謝文東]
제10군 군단장 왕악신[第十軍 軍長-汪雅臣]
구국군[救国軍]
의용군[義勇軍]
제3로군 총사령관 장수전(이조린)[第三路軍 総司令-張寿籛(李兆麟)]
참모장 허형식[参謀長-許亨植]
정치위원 빙중운, 김책[政治委員-馮仲雲, 金策]
제3군 군단장 허형식[第三軍 軍長-許亨植]
제6군 군단장 장수전[第六軍 軍長・張寿籛]
제7군 군단장 이화당[第九軍 軍長・李華堂]
제11군 군단장 기치중[第十一軍 軍長・祁致中]
정치부 주임 김정국[政治部主任・金正国]
(3)활동 상황
ㄱ.제1일로군 제1군(一路軍第一軍)의 서쪽정벌
1936년 남만주에서 제1일로군(第一路軍)이 성립한 당시 중국 공산당은 소위 장정(長征) 한창이었지만, "항일동정(抗日東征)“ 깃발을 들고 산서성(山西省)에서 하북성(河北省)에 진출하여 동쪽으로 향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제1일로군 1군(第一路軍第一軍)의 첫 번째 활동은 이에 잇따라 움직을 하여 서쪽을 정벌하는 것이었다.
제1차 서쪽 정벌은 제1사단(第一師)에 의해 이루어졌다. 1936년 6월 하순, 번시(本渓,본계-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동부의 중공업도시)와 안동성 봉성현(安東省鳳城県)의 경계에 있는 화상 모자산(和尚帽子山)을 출발하여 요양(遼陽)에서 남만주 철도와 요하(遼河)를 넘어 요서(遼西)에서 열하(熱河)로 나아 가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 요녕성 수암현(岫岩縣)의 산악 지대에서 만주국군(満州国軍)에 포위되어 뚫고 탈출했지만, 다수의 도망자, 전사자를 내고 돌아갔다.
제2차의 서쪽정벌은 제3사단(第三師)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전원이 기마대(騎馬隊)가 되어 결행(決行) 하게 되었고, 1936년 11월 하순 싱징현(흥경현,興京県) 경계에서 기마로 출발하여 만주국군(満州国軍)의 추격을 받으면서 청원(清原)에서 철령(鉄嶺)을 넘어 요하(遼河)유역에 도달 하였다
그러나 따뜻한 겨울을 위한 요하(遼河)가 결빙(氷結, 물 따위가 얼어붙음) 되지 않고, 한달의 행군으로 피폐 결국 되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 기간 동안 400명의 대원이 백 수십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3사단(第三師)의 대원 수가 400명이었다고 한다면, 6개사단(6個師) 모든 동일 숫자라고 하는 단순 계산으로 제1일로군 전체(第一路軍全体)는 2400명 정도가 6000여명으로 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과대 포장되었다고 알 수 있다
이듬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1로군 제1군(一路軍第一軍)은 서쪽 정벌에 실패하면서도 또한 팔로군(八路軍)과의 연계를 지향 일본군의 후방을 위협하는 목적으로 제3사단(第三師)의 생존을 중심으로 청원(清原), 서풍(西豊), 개원(開原) 일대로 활동을 계속하였고 별동대가 심양(瀋陽), 무순(撫順) 일대에 진출하는 등 소모(消耗)를 거듭했다.
ㄴ.김일성 부대에 의한 보천보 습격
한편, 1936년 제1로군의 제2군(第一路軍 第二軍)은 장백지구(長白地区)에 근거지를 만들려고했다. 제4사단 사단장(第四師 師長) 안봉학(安鳳学)체포되어 투항하였고 제2군 군단장(第二軍軍長) 왕덕태(王徳泰)이가 만주국군에 포위되어 전사하는 등 상당한 희생하면서 우선 김일성이가 사단장을 맡고 있는 제6사단(第六師)의 근거지 개척에 성공하여 1937년에는 제1로군(一路軍)의 제1군 제2사단(第一軍第二師)과 제2군 제4사단(第二軍 第四師)이 장백(長白)에 근거지를 옮기고 있었다.
원래 1932년에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을 시작한 것은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반석현위원회(中国共産党満州省委磐石県委)이었지만, 그 당시부터 고참 조선인 멤버에 오성륜(呉成崙) [全光, 전광]], 이상준(李相俊)[이동광(李東光)]이가 있었다.
오성륜(呉成崙) 제2군(第二軍)의 정치주임이었고 이상준(李相俊)도 제2군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보여지지만, 그들은 민생단 사건(民生団事件)의 반성에 따라 정치 위원 위증민(魏拯民)의 지지를 얻고 조선인의 민족의식에 호소하기 위하여 재만주지역 조선인 조국광복회(祖国光復会)를 조직하는 방침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장백(長白) 침공은 이에 따른 것으로 제6사단(第六師)의 지지기반 구축 공작을 시작하고 그 일환으로 압록강 유역의 조선반도 내부 함경남도 (현재 양강도) 갑산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박금철(朴金喆), 박달(朴達) 등 공산주의 단체 (후에 조선 노동당 갑산파)와 연락을 하게 되었다.
1937년 6월 제6사단(第六師)은 압록강을 건너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甲山郡普天面保田里)[보천보(普天堡)]의 습격(보천보 전투)에 성공했지만, 이것은 갑산그룹 안내와 참가해서 성공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은 조선뿐만 아니라 조선반도를 단속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일본측에서도 공비[共産党匪賊(공산당 비적)]으로 거물시 되는 것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이 권력을 독점 하는데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고도 한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이 전년(前年) 제6사단(第六師)의 장백(長白, 백두산) 근거지 만들기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수 십명 규모의 소대 김일성 부대를 자칭 무송(撫松)과 장백(長白)에 출몰하여 약탈을 반복 만주군 수비대와 충돌을 거듭하고 있었다. 또한이 해(年)에 들어서는 갑산 그룹의 활동도 활발해 지고 조선인 부호(朝鮮人富豪)에서 금품을 갈취 등의 사건도 있었다. 또한, 최현를 단장으로하는 제4사단 제1여단(第四師第一団)이 두만강을 넘어 함경북도 무산(茂山)에 진입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미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을 전년(前年) 조선반도의 신문은 ‘김일성 부대’의 동향을 전했다. 1936년 9월 11일자 매일신보는 "혜산 건너 편에 출몰하는 적단(賊団, 도적 단체)는 150 - 160명으로, 3분의 1이 만주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이고 ... 관헌과 같은 복장으로 소련식 중국식의 소권총, 강한 기병2정(軽機二丁), 대포1문(大砲一門)을 가지고 있었다
동북항일연군계(東北抗日聯軍系)에서 장백현(長白県) 방면에 파견된 이 부대의 수령(首領) 김일성이라고 한다. 이들은 15-20 명씩 소대 약탈반을 꾸어 조선인 부락에서 식량을 약탈하였다"와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고 정보를 싣고 있다. 참고로 뒤를이었다 경성일보 기사에서는 "비수(匪首, 도덕의 두목) 김일성 일당“이 있고, 제6사단(第六師)가 '김일성 부대'를 자칭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1937년 5월, 최현 부대(崔賢部隊)가 무산(茂山)에서 남하(南下) 하여 혜산 경찰서 관내(恵山署関内),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태리 상흥경수(上興慶水) 부락 고뢰조재목작업소(高瀬組材木作業所,)을 습격했다
금품 많은 것을 약탈 한 후, 주 임무인 일본인 1명, 조선인 5명, 중국인 30명을 납치해 강유역으로 도망친 후 몸값을 요구했다.
그에 이은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이다. 보천보 300호 남짓의 마을에서 일본인 26호, 중국인 2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인이다. 그래서 무차별 적으로 금품을 강탈하고 동사무소 나 소방 회관, 우체국, 초등학교 등에 방화하고 도망한 것은 충격을 받은 단속측 조선총독부는 김일성과 최현에 거액의 상금을 걸고 수배하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크게 보도했다. 이 신문의 논조는 그들을 비적(匪賊)으로 비난하고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동정(同情)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이 시기의 조선에서는 관헌 (조선 총독부)에 의한 검열을 위해 항일운동을 긍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곤란이기도 했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중국 공산당과의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소련의 원조도 얻고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물자 보급을 위해 종종 일본인, 조선인, 현지인의 구별없이 금품강탈이나 몸값 목적의 유괴 등 폭력적인 약탈 행위도 했다. 또한 몸값 목적 외에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주민을 납치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불어 넣어 인원 충당하고 있었다. 물자와 인력의 공급 수단에 있어서는 비적(匪賊)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하는 연구자도 있다
ㄷ.혜산사건과 제1로군(第一路軍)의 편성 기준
김일성부대의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에서 추격한 혜산경찰서의 경찰부대는 매복을 받아 32 명 중 7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상에 급히 함흥 보병 제74연대 김인욱(金仁旭) 소좌(소령)이 혜산 수비대장으로 임명 되었다.
이 혜산 수비대가 경찰부대와 협력하여 최현 부대와 합류하고 있는 김일성 부대를 급습하여 타격을 주었다. 이는 김일성 부대가 다시 국경을 넘어 조선에 침공하는 것은 없어졌지만, 갑산 그룹의 활동은 운흥면(雲興面) 금광을 습격하여 사금(砂金)을 강탈 하였다. 도적단이 김일성 부대를 자칭하는 삐라를 뿌리고 있던 것으로부터, 동조(同調) 갑산 그룹의 존재가 드러나고, 갑산측에서 162명, 장백현에서 59명이 검거됐다. 혜산사건의 시작이다 .박금철도 이 때 검거 되었다.
혜산사건(恵山事件) 제1차 검거의 자백도 이듬해 1938년에는 박달을 포함한 279명이 검거 돼 만주국 주재 조선인 조국광복회(在満韓人祖国光復会)와 거기에 기담한 갑산그룹이 괴멸했다.
한편, 1938년 초에 제1로군(第一路軍) 주력군은 주로 집안현(輯安県)의 삼림 지대에 있었다. 중국인 총사령관 양정우(楊靖宇)와 정치 위원 위증민(魏拯民)은 팔로군과 연락을 고집해 여러 번 서쪽 정벌을 계획했다.
그런데 그 중에 제1사단(第一師)의 사단장 정빈(程斌)과 그의 부대가 일만토벌부대(日満討伐部隊)에 투항했다. 일만측(日満側)은 투항자를 처형하지 않고 상금이나 직장을 보장하는 귀순 전략을 취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한 것이다. 따라서 서쪽 정벌은 중지(中止)가 다음과 같이 제1로군(第一路軍)의 편성 기준이 이루어졌다.
인원의 숫자는 강재언(姜在彦)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에 따른다.
제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 정치위원 위증민, 군수처장 오성륜, 총서령부경위여 여장 방진성 (500 명)[第一路軍 総司令・楊靖宇 政治委員・魏拯民 軍需処長・呉成崙 総司令部警衛旅 旅長・方振声 (500人]
제1방면군 지휘 조아범(250명)[第一方面軍 指揮・曹亜范 (250人)]
제2방면군 지휘 김일성(350명)[第二方面軍 指揮・金日成 (350人)]
제3방면군 지휘 진한장(300여명)[第三方面軍 指揮・陳翰章 (300人余)]
이 중 제2방면군(第二方面軍), 제3방면군(第三方面軍)은 기존 제2로군(第二路軍)의 활동 범위로 되어 있던 동만주의 화룡(和竜), 안도(安図), 연길(延吉), 왕청(汪清), 혼춘(琿春) 등 조선인이 많이 사는 지역 이 활동 구역으로 통합 되었다.
ㄹ.제1로군(第一路軍)의 괴멸
중일전쟁이 발발했던 1937년 소련은 만주국, 조선과 접하는 국경을 경계하여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조선인) 모두 친일세력으로 간주하고,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렇게 한 것은스탈린의 대숙청에 처음부터 관계 당국 극동 내무 인민위원회(국가 정치부) 장관에 있었다
극동 내무 인민위원회(국가 정치부) 장관 겐리후 류시코후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몸이 위태로워 것을 헤아려 1938년 6월 연해주에서 국경선을 넘어 만주국로 망명했다. 류시코후는 혼춘( 琿春)헌병대에 연행 된 후 도쿄의 참모 본부에 보내 망명 기자 회견을 열었다.
이 망명 사건에서만 아침의 국경은 극도로 긴장하여 소련군과 일본군 수비대가 충돌하는 장고봉사건이 일어난다.
또한 이듬해 1939년 노몬한 사건이 일어나 일단 휴전은 되었지만, 일본측의 경계가 높아져 관동군에 의해 만주 국내 항일세력에 대한 철저한 단속이 시작 되었다. 제2 독립수비대 사령관 노조에(野副昌德) 소장에 만주국군(満州国軍) 7개여단, 경찰대 30개 대대가 배속되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대하여 대적 하게 되었다
노조에(野副昌德) 토벌대의 작전은 군, 경찰, 행정기관, 민간조직의 연락을 긴밀히하여 그물망을 잘게 치고 게릴라 활동을 봉쇄 민중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즉, 일반 주민에게 토벌대와 게릴라 부대가 교대로 나타나는 상황에서 신변안전을 위해 쌍방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지만, 토벌대가 게릴라 부대를 몰아 약탈과 납치 위협을 완전히 봉쇄하여 치안을 유지한다면 게릴라 부대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적극적으로 토벌대에 협력하게 된다. 결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사람이 없는 삼림 지대에 몰려 식량과 의류의 확보도 곤란해 질 것이다
토벌대 중에서도 가장 유능하게 움직인 것은 정빈(程斌) 등 투항한 전(前)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 구성하고 있는 경찰부대였다. 그들의 활약으로 제1로군(第一路軍)은 점차 멀리 분산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940년 초에는 경위여장(警衛旅長) 방진성(方振声) 체포되어 처형, 투항들도 잇 따랐다. 그 투항자 때문에 총사령관 양정우의 동정(動静)이 알려져 단신 행동을 강요 될 때까지 되었다. 양정우는 몽강현(濛江縣)[현재는 양정우을 따서 정우현으로 개명 됨]에서 산 일에 들어간 주민과 접촉하여 통보돼 투항을 거부 사살 되었다. 토벌대는 최후의 절개에 흠모하여 불교행사를 영위하고 영혼을 달랬다.
양정우 사후, 제1로군(第一路軍) 지도자로 추대된 위증민(魏拯民)은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주력 부대를 북상시키기 위해 제1방면군(第一方面軍)은 남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계속한다는 방침을 내놓았지만 그 직후 지휘관 조아범(曹亜范)이가 대원에 의하여 살해 되었고 제1방면군(第一方面軍)은 내분에 의해 해체 되었다.
그런 중에도 김일성이가 이끄는 제2 방면군(第二方面軍)은 100 ~ 300명 정도의 집단 활동을 유지하고 습격, 약탈, 납치를 성공시키고 있었다. 1940년 3월에는 안도현(安図県) 대마록구(大馬鹿溝) 산림 경찰대(森林警察隊)를 습격하여 사상자 각 2명의 피해를 주고 금품 2만 3천엔을 약탈하고 대충 약 140명을 납치했다. 이틀 뒤 피랍자 중 25명(일본인 1명, 조선족 13명, 만주족 9명, 백계 러시아인 2명)을 석방. 나머지 납치 인질 70여명과 함께 도망을 계속했기 때문에 만주 경찰과 마에다군단(前田隊)의 쫓는 곳이 되었지만, 제2 방면군(第二方面軍)의 매복으로 마에다대(前田隊) 140명 중 일본측 문서 전사자 수 58명, 전상자 27명, 실종자 9명이라는 엄청난 타격을 주고 건재함 인상을 남겼다.
이 가을에서 노조에(野副昌德) 토벌대의 활동은 다시 활발해지면서 제2 방면군을 주요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김일성 부대도 소수 부대에 분산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의식(衣食)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제1로군 중추의 위증민도 연락이 취하지 못하고 김일성을 포함한 수십명은 8월에서 10월경에 자신의 판단으로 소련령으로 도망쳤다. 소련 측과의 연락도 없이 갑자기 입소였기 때문에 김일성은 억류 돼 한때 투옥 되었다.
제3 방면군(第三方面軍)은 1939년 제2로군 제5군(第二路軍第五軍)과 대규모 공동 작전에서 한때 안도현 대사하진(安図県大沙河鎮)을 점령하는 등의 활약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 해 겨울부터 군 단위(軍単位)의 활동은 불가능하므로, 전사, 전상(戦傷), 도망, 투항자가 이어 괴멸 상태가 되었다. 1940년말 지휘관의 진한장은 추격에 의하여 전사한다.
그러나 활동을 계속 되어 김일성 부대 입소 이후 소수 인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소련에 입국했다. 제13여단(十三団)을 이끌던 최현도 그 안에 포함돼 있다.
제1로군 총사령부(第一路軍総司令部)도 괴멸 상태였지만, 1940년 11월경에는 군의관 처장 서철(徐哲)도 경위대 살아남은 몇 명을 데려 입소했다. 만주에 남은 제1로군 수뇌부에 관해서는 1941년 1월에 오성륜(呉成崙) 투항 귀순. 3월 질병에 시달리고 고립되어 있던 위증민이 토벌대에서 발견되어 전사 혹은 병몰 후 발견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제1로군의 만주에서의 활동은 거의 끝났다.
ㅁ.제2로군(第二路軍), 제3로군(第三路軍)과 소련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원래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재편 된 것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있었지만, 소련의 극동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대한 대응은 상황에 따라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제1로군(第一路軍)의 활동 범위는 소련 국경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원래 지원을 받을 수도 적었지만 국경 근처의 동만주나 북만주에 있던 제2로군(第二路軍), 제3로군(第三路軍) 밀접하게 소련과 염려 했다.
국경선이 긴장하고 있던 1938년 말에는 개편 이전의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제6군5사(第六軍五師)가 일본군에 쫓겨 부대마다 월경했지만 사단장(師長)이 체포 될 뿐만 아니라 전원이 신장성(新疆省)으로 보내졌다.
제2로군(第二路軍), 제3로군(第三路軍)은 함께 대규모 내분을 안고 있었지만, 그 조정(調整)에 지도력을 발휘하고 양군 통해의 중심이 되어 있던 것은 제2로군(第二路軍) 총사령관 겸 정치 위원 주보중(周保中)이었다. 1940년의 1월 그가 중심이 되어 소련 극동당국과 1차 하바롭스크 회의를 받고 중국 공산당 중앙과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상황 소련 극동당 조직과 극동 방면 군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임시 지도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 합의가 성립했다.
1940년 11월 주보중과 참모장 최용건은 사전에 소련측의 연락을 받고 부대마다 입소하고 살아 있던 제2로군(第二路軍) 다른 대원도 그 뒤를 이었다. 투옥되어 있던 김일성의 신원을 보증한 것은 주보 중이다.
제3로군(第三路軍)은 총사령관 이조린(李兆麟) 등의 간부는 입소했지만, 소련에 불신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있고, 참모장의 허형식(許亨植)의 지휘 아래 부대의 절반이 북만주에 남아 싸움 계속했다
.허형식(許亨植)은 1942년 경안현 청봉령(慶安県青峰嶺)에서 장렬한 전사를 이루었다. 일단 입소했던 정치 위원의 김책은 허형식(許亨植)의 의지를 이어 1943년 연말까지 입소를 거부하고, 봉산현(鳳山県)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1941년의 시점에서 제1로군에서 입소한 인원은 88명 정도 제2로군에서 110명 정도로, 총 200여명이 소련령에 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金日成(前左四)與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第二方面軍指揮部指戰員攝於1939年。金日成於1932年春到安圖創建游擊隊。先後擔任汪清反日游擊大隊政委,東北人民革命軍第二軍獨立師第三團政委、第二軍第三團政委,東北抗日聯軍第二軍第三師(後改為第六師)師長、第一路軍第二方面軍指揮]
(3)그 후
소련에 망명한 구성원은 제88 특별여단(교도 여단, 제88독립저격여단)에 편입 되었다. 이 여단은 소련군에 흡수된 형태였지만, 소련 사람을 섞으면서 그 구성원이나 직책 등 주보중이 여단장되는 등 대체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조직 구조를 유지하고 있어 중국 공산당은 이 여단을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이라고도 호칭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대원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서 분리 된 소련군 정보국 직속되어 만주국에 침투해 공작에 종사했다. 위험한 임무에 종사한 그들이었지만, 숙청과 일본군의 스파이로 간주 형을 받은 사람도 있다.
또한 김일성은 스스로의 조선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에 편입 된 것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출판)"로 인정하지만 소련군과는 연계된 것만으로 제88 특별여단(교도 여단, 제88독립저격여단)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고 소련군이 조선반도의 해방군이 되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조선인 대원은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38 도선 이북의 조선)에 돌려 보내 북한 인민위원회와 조선 공산당 (이후 조선 로동당) 및 조선 인민군의 요직에 올랐다.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후 동북항일연군 출신은 만주파 (파르티잔파, 빨치산파)라는 파벌이 되어 남로당파 (남조선 노동당 출신), 연안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중국에서 귀국 한 자, 조선의용군) 소련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소련에서 파견 된 자. 소련군 출신이나 행정,기술관료 출신), 갑산파(보천보 전투 등으로 동북항일연군과 공동 투쟁 한 자)을 잇따라 숙청하고 북한 권력을 독점했다. 조선 로동당에서 정적을 제거하고 구축한 만주파는 1967년에 당의 지도 이념으로 유일사상 체계를 채택하고 이후 북한은 주체 사상에 기초한 독자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걸어 가게 된다.
김일성은 만주국(만주지역 조선족 자치정부) 조선 공산당 활동가에서 소련군 예하 각 민족 빨치산부대로 그리고 2차대전 때는 소련측(좌파진영) 연합군 조선인(한국인) 부대로 활동했다
김일성은 민족주의자보다는 철저한 마스-레닌주의 노선 공산주의자이며 스탈린 추종세력이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스탈린을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후에 그는 바트당(아랍 사회당)을 조직한 사담 후세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 북한의 주체사상 김일성, 리비아의 카다피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련 공산당 스탈린 일국 사회주의 이론이 독일 노동자당 히틀러 국가사회주의 이론 비슷한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국영 자본체제) 이론이다 소련 공산당은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과 소련 공산노동당 그룹이 있다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이 수정주의자(실용주의자)라면 공산노동당 그룹이 교조주의자들이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사회주의 공화국(사회주의 국가) 세력은 국가자본주의 일본제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수립할 때 민족해방과 왕권신수설 전체주의 군주, 지주계급이나 매판 자본가를 타도하고 노동자 계급 령도 노농연맹 인민민주주의 혁명 체제 사회주의 국가 승리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개인 우상화, 신격화로 1인 장기집권으로 왕권신수설에 도취되고 있다
2.제88독립 저격여단
제88독립 저격여단 (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는 소련이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한 극동지역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의 1개이다
제88독립 저격여단은 극동전선 정보과 직속 만주, 한반도에서 정찰 , 파괴 공작임무을 수행했다[소련군 특수부대 빨치산]
제88독립 저격여단은 원래 동북 항일연군(聯軍) 장병이 핵심이 주로 중국인과 조선인에서 편성 되었다. 후일 북한 국가 주석 김일성은 동 여단 제 1 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의 공식 견해에서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동북 항일연군 본체와 공투하면서도 다른 행동이었다고 하고 다음의 제88독립 저격여단 사실은 무시되고 있다(부정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자주노선과 주체정부 노선으로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군 참여를 부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이 부대를 동북 항일 연군 교도여단이라고 칭하고 있다.
제88독립 저격여단의 핵심 동북 항일연군(聯軍)는 1939년경부터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만국)군의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수 많은 전사자가 등장했고 내부적으로는 일본 당국에 귀순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등 남은 자들도 물자의 부족으로 인해 활동의 계속이 곤란해 졌다. 따라서 그들은 소련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12월 말 동북 항일연군(聯軍)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 영내에 들어갔다. 소련 영내에서는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의 활동 지원을 위해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과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두 곳에 분산 수용했다
남야영과 북야영은 각각 B 캠프와 A 캠프로도 불리는데, 보로쉴로프(Вороши́лов)와 아무르(Амур)강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
당초 100여명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후 200 ~ 300명으로 증가했다
독소전 발발 후 1941년 7월 중순, 소련 정부는 일본의 북진에 대비하여 이 야영지에 따라 제88 독립 저격 여단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여단은 하바로프스크시의 부쯔코에나 나아무레 (Вятское-на-Амуре)에 배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21일 극동 전선사령관 이오 시프 아빠나센코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0132호에 따라 여단의 편성 기간은 같은 해 7월 28일부터 9월 15일까지로 정해졌다.
부대의 편성은 동북 항일연군 중국인 병력과 조선인 병력의 외부 중국계 · 조선계, 소련인, 기타 소수 민족 (몽골족, 민주족등 )에서 열렸다. 여단 대원의 대부분은 중국인이었고 조선인은 10%에 불과했다. 그 후, 후속하여 소련 영내에 들어간 부대도 합류해, 제88독립저격여단의 병력 수는 1,500 명을 넘어 섰다.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에서 온 많은 사람들은 소련의 군사 학교 촉성 지휘 과정 또는 관구 소위 과정을 받은 적군의 계급을 수여했다 (여단장 주보중 중령, 김일성은 대위). 일반적으로 여단의 지휘 관직에는 중국인이었고, 부지휘 관직에 붉은 군대(소련군)의 장교가 임명 되었다. 병사는 적군의 군복을 착용했다.
1944 년 4 월 현재의 편제.
여단 본부 - 여단장 : 주보중 중령, 참모장 : V. 사마루첸코 소령
정치 과학 - 정치 위원 : V. 세레긴 소령
방첩과 - 스 메르시
제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제 2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효명 대위
제 3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명귀 대위
제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자동소총 대대
무선대대
독립 박격포 중대
독립 공병 중대
독립 대전차 소총 (PTR) 중대
독립 경제 중대
독립 기관총 소대
군사 통역 과정 특수 분대
각 독립 저격 대대는 3 개 중대로 구성되어 각 중대는 3 개 소대에서 되었다.
장비 (1942 년 9 월 ~ 1943 년 7 월 현재)은 소총 x4,312 테이, 자동 소총 x370 정, 중기관총 x48 자루, 경기관총 x63 정, 화포 x21 문, 대전차 소총 x16 테이, 자동차 x23 양.
제 88 여단의 병사는 만주, 한반도 지역에서 정찰과 파괴 공작활동에 종사했다. 그 자세한 것은 불명이지만, 여단장의 주보중 1940 년 ~ 1943 년 사이에 총 89 명의 감원 (손해)이 있었음을 보고하고 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 2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9명
제 1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26명
미 귀환 - 24명
스 메르시에 인도 - 6명
환자를 위한 후송 - 15 명
사망 - 2명
여단 복귀 - 7명
1945년 7월 소련 대일 참전에 대비하여 여단에서 무전기를 장착 한 100명을 투입하는 전투 행동 계획이 수립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급속한 진격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 88 독립저격여단 제 1 독립 저격 대대 대대장 김일성이 한반도의 해방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가 되었고 소련군과 함께 방문했다.
1945년 8월 29일 제 2 극동 전선 사령관 막심 뿌루카에후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10 호 / n에 따라 "일본 침략자와 싸우는 전선에서 전투 지휘 임무의 모범적인 수행과 이 때 발휘 된 용기"에 김일성에게는 적기 훈장이 수여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88 독립저격 여단 장병 21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9 월 10 일에 더욱 58 명 추가).
제 88여단(외국인군단, 대일연합군)은 1945년 10월 12일자 극동군관구 사령관령 제 042호에 의해 해산 되었다.
[在南野營整訓的部分東北抗日聯軍指戰員攝於1941年。
前右金日成
一排右李英淑(第七軍戰士)、右三金貞淑(第二軍戰士)、右四黃順姬(第二軍戰士)、右五金哲鎬(第二軍戰士)。
二排右沈鳳山(第一路軍警衛旅一團團部警衛員)
三排右一沈鳳山(第一路軍警衛旅一團團部警衛員)三排右一柴世榮、右二季青。]
제88독립 저격여단 소부대 활동시기 촬영한 사진[在小部隊活動時期的合影]。
金日成,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營長。
季青,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四營政治副營長。
崔賢,曾任東北抗日聯軍第二軍第一師(後改為第四師)第一團團長、第一路軍第三方面軍第十三團團長,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第一連連長。
安吉,曾任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第三方面軍第十四團政委、第三方面軍參謀長、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政治副營長。
일렬(一列):심태산(沈泰山)、최명석(崔明錫)、김경석(金京石)、서철(徐哲)、장광적(張光迪)。
두렬(二列):바슈코비츠(瓦什科維茨,와십과유자)、최춘국(崔春國)、강신태(姜信泰)、양청민(楊清海)、도우봉(陶雨峰)、주암봉(周岩峰)。
삼렬(三列):장석창(張錫昌)、유철석(劉鐵石)、범덕림(范德林)、고만유(高萬有)、교수귀(喬樹貴)、유안래(劉雁來)、진덕산(陳德山) [1945年7月的合影(1945년 7월 촬영)]
[1947年5月,王效明、彭施魯、王一知分另受有關部門委派先後赴朝鮮平壤。圖為他們與原東北抗日聯軍的朝鮮戰友在朝鮮人民軍總司令部合影留念]。
앞열(前排):김일(金一)、주위(周偉)、왕일지(王一知)、왕효명(王效明)、안길(安吉)、팽시로(彭施魯)。
가운데열(中排):이영호(李永鎬)、최광(崔光)、김광협(金光俠)、심태산(沈泰山)、최춘국(崔春國)、유창권(柳昌權)、이을설(李乙雪)。
뒷열(後排):박우섭(樸禹燮)、김려중(金麗重)、최용진(崔勇進)、강상호(姜尚鎬)、유경주(柳京珠)、오진우(吳振宇)、김창봉(金昌鳳)、오백룡(吳伯龍)、전문섭(全文燮).
<지도자 김은 스티코프가 주도한 소련군 극동사령부 작품이었다 1946년 8월 30일 소련군정 지도부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을 합당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한 후 당 고위간부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쪽에는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뒷 줄 오른쪽에는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등>
소련공산당과 소련군이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6일부터 진주하여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그리고 1948년 10월 19일부터 철수하여 1948년 말까지 철군했다
-한국전쟁 남침은 노동당 계열 내부 대남 강경파 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복조선분국 김일성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박헌영) 계열 주도로 추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단),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단)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 부대 또는 저격여단) 등 이다[빨치산부대를 소련에서는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공수부대로 표현하고 있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전선사령관 김책[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총참모장 강건[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조선의용대 중국 팔로군 출신]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을 임명했다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는 다음과 같다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소련 육군 극동사령부]은 스탈린 부대(일국 사회주의노선, 자국사회주의 성향 사회주의(민주사회주의) 그룹]이며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은 모택동부대[신민주주의 노선, 인민민주주의 그룹],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은 레닌부대[공산주의 노선, 마스-레닌주의 공산당 그룹]이다
(1)스탈린의 한국 전쟁 개입
1949년 3월 5일, 북한의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인민군이 남한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남한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년 12월 남한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남한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1950년 1월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북한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남한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1월 30일, 스탈린은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공(중국 공산당)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공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했다. 1949년 갑자기 남한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 것을 언급하며 혹시 모를 미국과 자본주의 진영의 함정이라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그러나 무려 48회에 달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끝까지 남침을 고집한 탓에 스탈린이 이를 허락했는데 그렇게 발발한 한국 전쟁은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스탈린은 공식적으로는 한국 전쟁 관여를 부인하였지만 포스트 냉전 시대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스탈린의 명시적 허가와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무려 48번이나 시도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시한 입장은 아니고 김일성이 남침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해서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 김일성이 남침을 끈질기게 고집했을 때 스탈린은 애초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제관으로 임명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김일성에게 한반도 북부의 통치를 책임지게 한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김일성이 파견되자마자 한반도 북부지역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이후였기 때문이였다.
한국 전쟁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던 그는 뇌질환과 중풍 증세로 손과 발을 쓰는 것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고 체력이 소모되었음을 알고는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의심과 망상증세가 한층 강화되었다. 모스크바와 소련의 대도시에는 오직 스탈린 자신만이 리모콘과 장비로 열 수 있는 건물이 건립되었는데, 그 건물들에는 같은 모양의 방이 여러 개가 있어 아무도 스탈린을 쉽게 찾기 어려운 구조였다. 또한 그는 비행기와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장거리 여행도 열차로 했다.
(2)모택동의 한국전쟁 개입에 대한 후회
1950년 한국전쟁 기간부터, 친소련파였던 김일성으로는 북한에 영향력을 미치기 어렵다고 본 마오쩌둥(모택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 김두봉, 김무정 김원봉등의 조선의용대(독립동맹-모택동의 신민주주의와 중국 공산당 계열)을 통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그러나 이들과의 교류는 김일성에 의해 차단된다.
그는 1948년에 이미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고려 공산당 계열) 박헌영을 통해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영향력 행사를 기도하였으나,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은 김일성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수반으로 낙점한다. 한국전쟁 기간 중 그는 김일성의 견제세력으로 박헌영과도 연결을 시도했는데, 박헌영을 김일성의 대안으로도 고려했다. 1953년부터 1955년 8월 종파 사건으로 북한의 남노동당원들이 대규모 감금, 체포, 처형당했을 때 그는 북한 외무성을 통해 압력을 넣어 박헌영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김일성의 박헌영 처형 의지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전쟁 중 국군과 유엔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김일성은 북한 인민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중공군과의 상의도없이 멋대로 북한 인민군을 후퇴시켜 결국 중공군은 유엔군의 기습으로 막대한 인명피해와 보급 손실을 받았다. 마오쩌둥(모택동)은 그 소식을 듣고 분노하였다. 그후 북중 관계는 악화되었다. 1975년 김일성은 베트남 공산화와 남한 박정희 유신정부 혼란으로 남침을 할 수 있는 국내외 상황의 기회로 보고 마오쩌둥(모택동)에게 찾아가 다시 한국전쟁을 일으키려 했지만 마오쩌둥(모택동)은 거절하였다. 이유는 1972년 마오쩌둥은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고백을 했고 김일성은 매우 무례하고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망나니놈이라고했고 북한에 군대를 파병보내 김일성과 북한을 도운 것을 후회하였고 한국(남한)이 통일되게 나뒀어야 했다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남북통일이 군사력보다는 신민주주의(민주화) 입장에서 남북통일을 지지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은 남북통일을 개인 우상화와 자주노선 국가사회주의 성향 군사력에 치중함으로 남북 주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남한 제6공화국 수립이후 남한정부 주도 민주화 정책으로 남북통일을 주도하고 있으며 남북 주민들이 지지하고 있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인민의(民有,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그리고 쿠바 등 4 개국에 불과하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년 3월 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6069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3485
*베트남 헌법(2013년 개정)[민주공화국 형태 사회주의 헌법]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는 인민에 의한(民治), 인민을 위한(民享) 인민의(民有) 사회주의 법치국가이다-
http://blog.daum.net/007nis/15876070
*북한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제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제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제3공화국 헌법)-
'-平和大忍, 信望愛. > 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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