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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관심을 받는 아이누 민속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세계적 관심을 받는 아이누 민속

CIA bear 허관(許灌) 2023. 1. 3. 05:07

아이누 문화를 기록한 귀중한 책이 세상의 빛을 본 지 약 100년 만에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지리 유키에 씨가 엮은 ‘아이누 신요집’, ‘신의 아이누 노래 모음집’은 최근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됐습니다.

'영원한 보석'

1923년에 처음 발행된 이 모음집은 일본 고유의 아이누 문화 속 신화인 ‘유카르’ 13편을 담고 있습니다. 지리 씨가 10대 때 기록한 이 이야기들은 홋카이도에서 함께 살았던 할머니가 찬트 형식으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지리 씨는 19세에 요절했지만, 아이누족의 믿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아이누족은 고유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지리 씨는 일본어 번역문을 병기하면서 로마자를 사용해 소리를 표현했습니다.

이 책은 일본 정부의 동화 정책으로 아이누 문화가 급속히 사라지던 시기에 쓰였습니다. 아이누족이 쓴 최초의 서적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독특한 자연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지리 씨에게 집필을 권유한 언어학자인 긴다이치 교스케 박사는 이 작품을 ‘영원한 보석’으로 묘사했습니다.

지리 유키에 씨

지리 씨는 1903년에 홋카이도 노보리베쓰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섯 살 때 부모 곁을 떠난 지리 씨는 아사히카와에서 할머니, 큰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지리 씨는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워야 했지만, 집에서는 아이누어를 썼습니다. 언어학자인 긴다이치 씨는 지리 씨의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집을 찾았다가 그녀를 만났습니다. 긴다이치 씨는 그녀에게 할머니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보라고 제안했습니다.

지리 씨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이야기를 종이에 옮겨 적었습니다. 하지만 작품 출간을 얼마 남기지 않고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리 유키에 기념관

지리 씨의 고향에 있는 기념관은 그녀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 기념관은 12년 전에 일본 전역에서 답지한 기부금으로 세워졌습니다.

기념관은 지리 씨의 일기와 그녀가 부모에게 보낸 편지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평상시 운영은 현지 자원봉사자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가네자키 시게야 씨

올해 76살인 가네자키 시게야 관장. 6년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난 지리 씨의 조카인 요코야마 무쓰미 씨의 뒤를 이어받았습니다.

가네자키 씨는 원래 13,000년 전부터 일본에서 10,000년 동안 이어진 조몬 시대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누족의 정서와 자연관이 조몬인으로부터 계승됐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아이누족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교장직을 은퇴한 가네자키 씨는 개관 때부터 기념관 운영에 관여했습니다.

가네자키 씨는 아이누로서 긍지를 갖고 정부의 차별적인 동화 정책에 맞선 지리 유키에 씨의 삶에 크게 감동했다며 아이누족이 목소리를 내지 못할 때 그들의 이야기를 글자로 옮긴 작업은 동족에게 엄청난 힘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울러 그녀의 삶을 배운다면 많은 사람이 큰 영감을 받을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가네자키 씨는 지리 씨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그녀가 자신의 저서에서 쓴 서문을 꼭 읽어봐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오래전 드넓은 홋카이도는 우리 조상의 자유가 숨쉬는 세계였다.”

지리 씨는 아이누족의 삶과 말이 사라지는 데 대한 불안과 슬픔을 표현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조상이 일상생활에서 서로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썼던 수많은 말, 우리에게 물려준 아름답고 유서 깊은 말, 그런 말조차 의지를 잃고 소멸하는 모든 약자와 함께 사라져야 하는 걸까? 아, 너무나 안타깝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이별이다."

세계로 울려 퍼지는 감성

지리 씨의 글은 국경을 뛰어넘어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3년 전 홋카이도의 한 중국인 유학생이 서문을 중국어로 번역하면서 관심이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리 유키에 기념관은 해당 구절을 다른 언어로 번역해 달라는 요청을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그러자 많은 학생과 연구자가 화답했고, 현재 영어, 프랑스어, 스와힐리어, 바스크어를 포함한 30개 언어로 번역돼 있습니다.

구스타보 비드

아르헨티나의 대학교에서 일본 문학을 가르치는 구스타보 비드 씨는 2019년에 서문을 스페인어로 옮긴 후 지난해 4월에는 원문 전체의 번역을 끝냈습니다.

구스타보 씨는 일본을 여행하다가 ‘아이누 신요집’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습니다. 그는 표현의 아름다움과 현재와의 연관성에 곧바로 사로잡혔다고 말합니다.

올해 56살인 구스타보 씨는 지리 씨가 느낀 아픔과 황량함이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작품은 변화하는 세상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는 문화, 언어, 서사 등 현대 사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이는 아르헨티나의 원주민과 관련돼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아이누족의 존재를 알 수 있도록 하겠다는 지리 씨의 바람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함께할 수 있습니다."

 

지리 유키에 사후 100년

비드 씨는 지리 씨의 작품이 일본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는 도쿄에 있었을 때 ‘아이누 신요집’의 사본을 찾아 유명 서점 여러 곳을 들렀습니다. 하지만 그와 이야기한 누구도 제목이나 저자에 관해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비드 씨는 ‘아이누 신요집’이 위대한 문화 및 문학 자산이라며 이처럼 소중한 문학 작품을 아는 일본인이 거의 없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서문의 번역본은 영어판과 독일어판과 함께 기념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가네자키 관장은 저자 사후 100주년을 기념하려는 많은 사람이 기념관을 찾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리 유키에 씨가 품위 있는 아이누의 삶을 살겠다는 고결한 소망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며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는 만큼 국적을 불문하고 많은 이가 공감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렇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그녀의 존재와 그녀의 생각을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누 민족

아이누 민족 "일본 홋카이도와 혼슈의 도호쿠 지방(東北地方), 러시아의 쿠릴 열도, 사할린 섬, 캄차카 반도에 정착해 살던 선주민"

이들은 일본본토 사람들과 비교해 월등히 체격이 좋고 체모가 많으며, 눈이 깊고 콧대가 선명한 외모 때문에 코카소이드로 인식되었으나 최근의 형질인류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몽골로이드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아이누 민족 후손들 모습

아이누(러시아어: Айны 아이늬, 일본어: アイヌあいぬ 아이누)은 오늘날의 일본 홋카이도와 혼슈의 도호쿠 지방(東北地方), 러시아의 쿠릴 열도, 사할린 섬, 캄차카 반도에 정착해 살던 선주민이다. 일본의 주를 이루는 야마토 민족과는 다른 북방 몽골리안의 한 민족으로, 역사적으로 개별적인 부족 국가 형태를 지녔으며, 독자적인 언어인 아이누어를 가지고 있다.

 

'아이누'는 신성한 존재인 '카무이'와 대비되는 '인간'이라는 의미의 홋카이도 지방의 아이누어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어로는 '에미시', '에조(蝦夷)'로 불리는데, 이는 사할린 아이누의 '인간'을 뜻하는 '엔츄' 또는 '엔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아이누'란 단어가 일본 내에서 차별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생각에서 스스로를 우타리(Утaри: 친척, 동포라는 뜻)라고 부르는 아이누 사람들도 일부 있다.

 

이들은 류큐민족과 함께 일본의 근대화 이후 대동아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에 편입되었다. 일본 내 아이누족은 대부분 일본에 동화되어 일본어를 쓰지만, 현재도 홋카이도에 살고 있는 고령자들 중 일부는 아이누어를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아이누 문화가 보존되어 아이누어가 쓰이고 있으며, 일부 러시아화된 아이누족은 러시아어를 쓴다. 종교로는 샤머니즘이 대다수이고, 러시아에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 아이누족도 소수 있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일본 내의 아이누족은 약 25천 명이다. 그러나, 극심한 차별 때문에 아이누족임을 숨기거나 인종차별로부터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부모가 알려주지 않아 아이누족 출신임을 모르는 경우도 있어서 정확하지는 않으며, 비공식적으로는 20만 명까지 추산되기도 한다. 러시아에는 약 5만 명이 살고 있다.

 

1.기원

아이누족은 조몬 시대 이후의 일본의 원주민인 조몬인(縄文人)으로 여겨진다. 아이누의 전설인 '유카 우포포'에는 "아이누족은 태양의 아이들이 오기 10만 년 전에 이 곳에 살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1만 년 전, 조몬인들은 일본 열도에 거주하였다. 2,500년 전, 야요이인들이 아시아의 중국 대륙 및 한반도로부터 도래하였다. 두 개의 문화는 열도 내에서 섞이게 되었고, 아이누인들은 점차적으로 북쪽의 홋카이도와 남쪽의 류큐(오키나와) 지역으로 이주하여 그들의 인류학적, 종교적 정체성을 지켜냈다.

 

아이누족은 서력 기원 초기에도 사냥 못지않게 농사에도 주력하였다.

 

아이누족 남자들은 대체적으로 머리카락이 짙다. 예전에는 이들이 카프카스 인(Caucasian)의 후손인 것으로 추측하였으나, 최근의 유전자(DNA) 검사로는 카프카스 인의 조상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들에 대한 유전적 검사는 주로 하플로그룹 D (Y-DNA)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 외의 Y-하플로그룹 D가 흔한 지방은 티베트와 인도의 안다만 제도 뿐이다. 1/8의 아이누 남자들은 하플로그룹 C3 (Y-DNA)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러시아 동부와 몽골에 가장 흔하다.

 

일부 연구자들은 아이누족의 소수가 하플로그룹 C3을 갖고 있는 것은 어느 정도 니브히족(Nivkhs)으로부터 단일방향성의 유전적 영향을 받았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추측하는데, 아이누족은 이들과 지속적인 문화 교류를 가져왔다. 타나카 외의 의견(2004)에 따르면, 이들의 '미토콘드리아 DNA'(mtDNA) 혈통은 주로 하플로그룹 Y (21.6%) 와 하플로그룹 M7a (15.7 %) 로 구성되어 있다.

 

또 다른 연구자들은 아이누족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의 조상격인 고대 종족의 후손일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 스티브 올슨의 Mapping Human History(인류 역사의 지도 그리기)에서는 1만 년 전의 조몬인 화석의 발견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얼굴의 특징이 뉴기니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닮았다고 한다. 2,300년 전의 한반도로부터의 야요이(弥生)인들의 몇 차례의 이주로, 순수한 조몬인들은 일본의 북쪽으로 밀려났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유전자 자료는 현대 일본인들은 이들 야요이인과 조몬인의 후예임을 시사하고 있다.

1904년에 찍은 아이누족의 모습

2.아이누 민족의 역사

아이누 민족의 역사는 일본 열도의 홋카이도와 혼슈, 사할린 섬과 쿠릴 열도에 정착하면서 거주했던 민족인 아이누 민족의 역사를 가리킨다.

 

(1)선사시대

홋카이도는 수만년전 빙하기에 시베리아에서 사람들이 건너왔으며 기후가 온난한 까닭에 혼슈에서도 도래했다. 구석기 시대를 거치면서 토기를 중심으로 한 조몬 문화가 생겨났다(조몬 시대).

 

(2)야마토인(일본인)의 진출

옛날에는 일본서기에서 와타리시마(渡島)로서 등장하고 아베노 히라부와 접촉했으며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에는 데와 국과 교역을 행했다. 당시의 주민은 도호쿠 지방 북부의 주민과 함께 에미시로 불리고 있었다. 아마 양자는 동일 민족으로 홋카이도측의 에미시가 후의 에조, 현재의 아이누의 선조라고 생각되고 있다.

 

중세 이후 홋카이도의 주민은 에조로 불렸고 홋카이도의 땅은 에조의 섬, 에조치(蝦夷地) 등 여러가지로 불렸다. 고대의 에미시는 농경을 생활의 주축으로 하고 있었지만 점차 수렵·어업을 특화해 쌀이나 철 등을 일본인(야마토인)과의 교역으로 얻게 되어 갔다.

 

(3)마쓰마에 번

무로마치 시대에는 오시마 반도의 남단에 야마토인이 도난 12관을 축조해 거주지(야마토지)를 마련했다. 전란을 피해 이주하는 사람이 증가하면서 현지의 아이누와의 사이에 대립이 일어났다. 그 결과 1457년에 일어난 코샤마인 봉기로 다케다 노부히로가 아이누의 지도자 코샤마인을 죽여 야마토의 승리를 결정했다. 노부히로는 가키자키 씨를 계승했고 그 자손은 후에 마쓰마에 씨를 자칭해 대대로 에조치의 남부에 지배권을 구축했다(마쓰마에 번).

 

마쓰마에 번의 경제 기반은 아이누와의 교역에 있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걸쳐 마쓰마에 씨는 쇼군으로부터 교역 독점권을 인정받아 아이누와의 교역 조건을 스스로에게 유리한 것으로 바꾸어 나갔다. 아이누는 샤크샤인의 난이나 쿠나시르·메나시 봉기와 같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마쓰마에 번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1784년부터는 에조치의 개척을 시작해 연안에 몇 개의 이주지가 건설되었다.

 

에도 시대 후기부터 시베리아로부터 러시아가 영토를 확장하면서 일본과 통상을 요구하게 되어 쇄국을 유지하려고 하는 일본과 홋카이도 부근에서 접촉했다. 안에는 바실리 골로브닌이나 다카타야 가헤에처럼 상대국의 포로가 된 사람도 있었다(골로브닌 사건). 러시아의 위협에 대한 북방 방비의 필요를 인식한 에도 막부는 모가미 도쿠나이, 곤도 주조, 마미야 린조, 이노 다다타카 등에게 에조치를{사할린(가라후토쿠릴 열도를 포함해} 탐험시켜 지리적인 지식을 획득했다. 1799년에 에조치 동부를, 1807년에는 에조지 서부를 마쓰마에 씨한테서 거두어 1802년에 에조 봉행을 설치하였다. 골로브닌 사건 해결 이후 러시아의 영토 확대와 남하가 정체되었기 때문에 봉행은 1821년에 폐지되었고 모든 에조치는 마쓰마에 번에 환부되었다

 

(4)근대

1868년에 메이지 정부는 에조치에 하코다테 재판소를 둘 것을 결정하고 곧바로 그 이름을 하코다테 부로 고쳤다. 보신 전쟁 때 에조 공화국이 건국되어 에조치는 신정부아래로 바로 통일되지 않았다. 에노모토 다케아키의 항복 후 에조치는 1869년에 홋카이도로 개칭되어 11국이 놓였다. 동년 7월 마쓰마에 번령 이외를 관할하는 개척사가 설치되고 나서 홋카이도의 개척은 본격화되었다. 1871714일 폐번치현과 함께 마쓰마에 번의 옛 영토에 다테 현이 설치되었다. 동년 9월 다테 현은 히로사키 현 등과 합병해 히로사키 현(아오모리 현)의 일부가 되어 소멸하였다. 187210월 옛 다테 현의 부분이 아오모리 현으로부터 개척사로 이관되었다. 이것에 의해 홋카이도 전역이 개척사의 소관이 된다. 개척사는 1882년에 폐지되어 대신에 하코다테 현, 삿포로 현, 네무로 현의 3현이 설치되었지만 1886년에는 다시 통일 행정 기관으로서 홋카이도청이 놓였다. 메이지 정부의 정책에 의해 많은 사람이 이주해 도내 각지에 개척의 물결이 밀려 들었다. 석탄이 생산되어 수많은 탄광이 개발되었고 이를 수송하기 위한 철도가 종횡으로 설치되었다. 무엇보다 일본인의 "개척"은 아이누에게는 토지 수탈과 강제 이주를 수반하는 것이어서 "일본에 의한 침략"이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5)현대

1950년 홋카이도를 개발하기 위해 조사·입안 및 실시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홋카이도 개발청이 총리부의 외국으로서 설치되었다. 홋카이도내에는 홋카이도 개발국과 각 지방에 개발 건설부가 놓여 개발에 임하였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돌아온 병사와, 구식민지로부터의 귀환자의 정착지로서 홋카이도가 주목받아 인구가 급증했다. 전후 부흥과 고도 경제성장기 초에는 홋카이도산의 석탄이 귀중한 보물이 되어 많은 탄광 노동자가 홋카이도에서 살았지만 1960년대에 석유로의 에너지 전환이 일어나 1980년대까지 대부분의 탄광이 폐광되었다. 이것에 수반해 불필요하게 된 철도가 연달아 폐지되어 시민 생활의 자동차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도로망을 정비하고 도오 자동차도를 비롯한 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3.아이누 문화의 성립

아이누 문화는 홋카이도에서 13세기에 사쓰몬 문화가 소멸한 이후 출현하였다. 이 문화는 이후 15세기에서 18세기 동안 번성하였으며, 오늘날의 아이누 민족의 문화적 요소가 이 문화 시기에 형성되었다

 

아이누인들은 일본과 러시아 양대 제국주의 세력이 밀려오기 이전 오랫동안 전통작명법에 의한 이름을 썼지만, 현재는 거의 일본 이름이나 러시아 이름을 쓰고 있는 실정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정식 이름을 붙여주기 전에 울음소리에서 아이아이(으앙으앙 또는 응애응애), 또는 티넵(젖은 녀석), 폰숀(작은 응가), 숀타쿠(응가 덩어리) 같이 일부러 더러운 뜻의 임시이름을 지어 부른다. 유아사망율이 높았던 시대에 병을 가져다 주는 역신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더러운 것을 싫어한다는 믿음에서 역귀를 쫓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레사쿠(이름없음)같이 아예 사람이 없는 것으로 쳐서 역귀를 쫓기도 한다.

 

아기가 무사히 영아기를 벗어나 어느 정도 자라고 아이의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면 정식 이름을 붙여준다. 하쿠막쿠르(덜렁이) 쿠우카르쿠르(활바치), 쿠우친코로(활과 가죽말림대 틀을 가진 이), 무이사시마츠(쓰는 여자), 카무이마시(곰 고기를 굽는 이)등이 있다.

 

병치레가 잦거나 외모가 반듯한 아이는 예쁜 것을 좋아하는 역귀의 손이 미치지 못하도록, 영아기때와 같이 천한 이름을 계속 쓴다. 투로시노(때쟁이), 에카시오톤푸이(할아버지 똥꼬) 같은 예가 있다.

 

아내는 남편의 이름을 불러선 안되었으며, 죽은 사람의 이름을 다시 쓰는 것은 그 사람에게 갈 불운이 자신에게 옮는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새롭고 독창적인 이름을 계속 짓도록 신경을 썼다. 또 큰 재앙을 맞거나, 비슷한 이름의 다른 사람이 죽거나 하는 경우에는 이름이 재앙을 불렀다 또는 이름에 재앙이 옮겨붙었다 같은 생각에서 바로바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때문에 아이누족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평범한 이름이라는 것(철수, 영희, 홍길동같은)이 없다고 한다.

 

홋카이도가 메이지 이후 일본령으로 편입되자, 호적법의 시행으로 말미암아, 뜻을 일본어로 옮기거나, 이름을 한자로 취음하여 일본식 성명을 새로 만들게 되었고, 이름은 메이지 중기까지는 전통 아이누 이름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아이누 이름에 익숙지 않은 일본인들은 이름의 성별을 어감으로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록할 때, 남자는 가타카나, 여자는 히라가나로 표기하여 적는 방법으로 구분했다고 한다.[작명법]

 

4.각 지역의 아이누족

(1)일본

ㄱ.도호쿠 아이누족

ㄴ.홋카이도 아이누족

 

(2)러시아

ㄱ.사할린 아이누족

ㄴ.쿠릴 아이누족

ㄷ.캄차카 아이누족

18세기 훗카이도 원주민 아이누족 사진

 

 

 

 

                                                                                              곰과 아이누 민족

 

 

 

 

 

 

 

 

 

 

 

 

아이누 민족의 벼농사와 불교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