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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고려 25대 충렬왕릉 발굴한 듯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북한, 고려 25대 충렬왕릉 발굴한 듯

CIA bear 허관(許灌) 2022. 5. 22. 15:48

개성시 해선리에 있는 명릉군 제2릉의 전경. 무덤의 주인은 확인되지 않지만 고려 25대 충렬왕의 경릉일 가능성이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20일 개성시 해선리에서 고려 25대 충렬왕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새로 발굴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문화성 민족유산보호국 조선민족유산보존사, 송도사범대학 역사학부가 공동으로 유적 조사와 발굴을 진행했다고 보도했다. 

 

왕릉의 위치는 개성시 해선리 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1.2km 정도 떨어진 곳이며 고려시기의 왕릉급 무덤벽화가 함께 나왔다고 한다. 

 

통신에 따르면 왕릉은 계단식으로 쌓은 3개의 화강암 축대에 의하여 4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으며, 제일 높은 1구획에는 돌난간을 갖춘 무덤무지와 망두석(무덤 앞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이 있고 그 아래 2구획과 3구획에는 각각 돌사람상이 하나씩 서있으며 4구획에는 제당 터가 있다고 한다.

 

또 무덤칸의 크기는 남북길이 365cm, 동서너비 300cm, 높이 235cm이며 동쪽 벽에는 일부 부부무덤들에서 볼 수 있는 구멍(‘혼’이 드나드는 구멍)이 있으며 바닥에서는 무덤천정과 벽들에 그렸던 벽화 조각들이 드러났다고 통신은 보도했다.

 

또 왕이나 왕비에게 존호를 붙여줄 때 그의 덕망을 칭송하는 글을 새긴 옥책의 일부분과 금도금한 철제품 등 여러 유물이 함께 발견되었다고 한다.

 

북한 고고학학회는 ▲무덤의 건축형식과 규모, 유물로 보아 14세기에 만들어진 왕릉급 무덤이라는 점 ▲무덤의 동쪽으로 250여m 떨어진 곳에 충렬왕의 아내 안평공주의 무덤(1979년 발굴)이 있는 점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도 충렬왕릉이 개성부에서 서쪽으로 12리 정도 떨어져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 등을 토대로 이 왕릉이 고려 25대 왕인 충렬왕(1236~1308년)의 능이라고 결론 내렸다. 

 

충렬왕(광문선덕 경효대왕)은 원종의 아들로 1274년 왕위에 올랐다. 

 

충렬왕은 즉위 전에 원나라에서 쿠빌라이 칸의 여섯째 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는데 이 때문에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고, 이후 고려왕들도 원나라 황족의 딸과 결혼하였다. 

▲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고려와 원나라의 왕실 혼인으로 권신의 견제에 억눌려 온 고려 왕실의 지위가 오를 수 있었는데 원나라 성종 테무르 즉위식에서 충렬왕은 서열 7위의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반면 원나라의 종속국이 되어 많은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원나라의 요구로 일본 정벌에도 동원되었다. 

 

충렬왕은 매사냥을 즐겼는데 지금의 인천 계양산에 매 사냥터를 만들고 개성에서 임진강을 건너와 매사냥을 했다고 한다. 

충렬왕[忠烈王]

충렬왕은 원 세조 쿠빌라이의 막내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함으로써 원나라의 부마가 된 최초의 고려국왕이다. 고려는 충렬왕의 치세에 두 차례에 걸친 원나라의 일본 정벌에 동참했고, 카다안의 침공으로 대몽항쟁기에 버금가는 참화를 입었다. 평생 사냥과 향락에 빠져 정사를 멀리하면서 아들 충선왕과 극심한 불화를 겪었다

충렬왕의 치세에 고려는 세계제국 원나라의 부마국으로서 국체를 보전하고 오랜 무신정권의 그늘에서 벗어났지만 잦은 공출과 두 차례의 걸친 일본 정벌로 인해 국력이 피폐해졌다. 게다가 원 황실의 내분에 기인한 카다안 반군의 침입으로 인하여 대몽항쟁기에 버금가는 타격을 입었다.

충렬왕은 재위 초기부터 제국대장공주의 월권 때문에 정사에 흥미를 잃고 향락에 심취하다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한 아들 충선왕과 마찰을 빚었고, 이후 원 황실의 정치적 향배에 따라 부자간에 왕위를 뺏고 빼앗기는 누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민족적 정체성을 잃고 강대국의 주구로 전락한 고려 왕실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원 세조 쿠빌라이의 사위가 되다

고려의 제25대 국왕 충렬왕(忠烈王)의 이름은 거(昛), 초명은 심(諶) 또는 춘(賰)이다. 1236년 2월 계축일에 원종과 정순왕후 김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충렬왕은 정비인 제국대장공주와 정신부주 왕씨, 숙창원비 김씨 등 3명의 부인과 시비 반주로부터 충선왕을 비롯하여 4남 2녀를 얻었다.

아버지 원종이 원나라에 머물던 1259년 6월, 할아버지 고종이 승하하자 태손이었던 그가 원종을 대신하여 국사를 처결했다. 1267년 태자에 책봉되자 연경으로 들어가 황제를 숙위했다.

충렬왕의 장인 원 세조 쿠빌라이

1269년 4월 원종이 무신집권자였던 임연에 의해 폐위되자 황제에게 군사 동원을 간청했다. 결국 원종은 5개월 만에 복위되었고, 고려 왕실은 무신정권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1274년 5월, 충렬왕은 39세의 나이에 16세였던 쿠빌라이의 막내딸 제국대장공주(홀도로게리미실)와 혼인했다. 그로 인해 정비 정화궁주가 후비로 물러나고 말았다.

두 사람의 혼인과 함께 원나라와 고려 양국은 본격적인 동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울러 후대의 고려 국왕은 칭기즈칸의 직계인 쿠빌라이의 혈통을 이어받음으로써 대내외적으로 막강한 위상을 갖게 되었다.

그해 6월 원종이 승하하자 변발과 호복 차림으로 귀국한 충렬왕은 신료들에게 노골적으로 몽골 풍습을 강요했다. 1274년 10월, 대도에 머물던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에 들어오자 충렬왕은 서북면까지 나아가 맞이했는데, 변발을 하지 않은 수행원들을 심하게 질책했다.

개경에 도착해서는 국청사 앞으로 환영 나온 관원 가운데 호복을 입지 않은 자를 끌어내 구타하기까지 했다. 그로 인해 관리들은 모두 변발에 호복을 하게 되었고, 그 여파로 사회 전반에 몽골 풍습이 퍼지게 되었다.

고려 최초의 몽골인 왕비로 등장한 제국대장공주는 황제의 딸답게 오만방자한 행동으로 눈총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정사에 무심한 충렬왕을 질책하는 등 일국의 국모다운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녀가 낳은 세자 왕원은 고려 최초의 혼혈왕자이자 쿠빌라이의 외손자로서 원나라의 황족 대접을 받았고, 장성한 뒤에는 원 황실의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하면서 아버지 충렬왕을 뛰어넘는 권세를 누렸다.

허무하게 끝난 제1차 일본 정벌

그 무렵 중국 대륙에서 남송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복속시킨 원 세조 쿠빌라이는 1267년 9월 고려인 반부를 일본에 보내 조공을 강요했다. 1268년 3월에는 사신 흑적과 은홍이 대마도에 가서 왜인 2명을 연경으로 데려온 다음 내조를 명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그 와중에 일본이 남송과 외교관계를 지속하자 분개한 쿠빌라이는 마침내 일본 정벌을 명했다. 그리하여 충렬왕이 즉위한 1274년에 이르러 원나라와 고려군으로 구성된 대규모의 일본정벌군이 편성되었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장면을 그린 〈몽고습래회사〉

원나라 군사는 몽고족과 한족 연합군 2만 5천 명으로 구성되었고, 지휘관으로는 도원수 흔도, 우부원수 홍다구, 좌부원수 유복형이 임명되었다. 고려의 군사는 8천 명으로 중군사·좌군사·우군사의 삼익군을 편성한 다음 김방경, 김선, 김문비를 각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여기에 안내인과 수군 6천7백 명이 합세하면서 총병력은 4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해 10월, 일본정벌군은 합포에서 9백여 척의 전선을 타고 대마도로 건너가 단숨에 섬을 장악했다. 이어서 일기도로 건너가 1천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한 다음 본토를 향해 진군했다. 하지만 본토에 상륙하기도 전에 대규모 일본군의 조직적인 반격으로 피해가 속출하자 지휘관들이 철수를 고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해상에 엄청난 태풍이 엄습했다. 이른바 가미카제(神風)였다. 그로 인해 정벌군이 타고 있던 전선 대부분이 침몰하고 13,500명의 군사들이 수중고혼이 되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군사들은 일본군의 거친 공세에 시달리다가 11월 들어 태풍이 잦아들자 합포로 퇴각했다.

원의 내정간섭이 심화되다

충렬왕 대에 고려는 원나라의 풍습과 문물,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통문관을 설치하여 몽골어 교육을 강화하고 경사교수도감을 설치하여 경학과 사학 진흥에 힘썼다. 유학자 안향은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도입하여 고려 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1275년 6월부터 〈선전소식(宣傳消息)〉이란 문서를 만들어 시행했다. 이전에는 국왕이 명을 내리면 사신을 지방에 보냈는데 그들을 접대하는 향리들의 원성이 빗발쳤다. 그 때문에 충렬왕은 이분성의 건의에 따라 왕명을 문서로 만들어 서명한 뒤 각 도의 안찰사와 수령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때부터 ‘소식(消息)’이란 말이 생겨났다.

원나라는 당시 고려의 관제 개혁과 함께 왕실의 전통이었던 족내혼 풍습을 파기토록 하고 원 황족과의 통혼을 정례화하며 부마국의 지위에 걸맞은 관직과 왕실의 칭호 변경 등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고려는 우선 왕실에서 사용하는 칭호를 제후국의 수준에 걸맞게 조정했다.

그때부터 고려 왕실에서는 국왕의 묘호 앞머리에 변함없는 충성의 뜻으로 ‘충(忠)’ 자를 붙였고, 끝머리에는 ‘조(祖)’나 ‘종(宗)’ 대신 ‘왕(王)’을 칭했다. 왕의 교서인 ‘성지(聖旨)’는 ‘선지(宣旨)’나 ‘왕지(王旨)’로 바꾸었고, ‘짐(朕)’을 ‘고(孤)’로, ‘사(赦)’를 ‘유(宥)’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낮추었다.

관제개편도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전의 3성 6부제를 폐기하고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로 단일화했으며, 추밀원은 밀직사로, 어사대는 감찰사, 한림원은 문한서로 격하했다. 또 6부를 폐합, 변경하여 전리사와 군부사, 판도사, 전법사의 4사로 축소했다.

원나라와의 관계에 따라 새로운 관직도 만들어졌다. 야간순찰을 도는 순마소, 매 잡는 일을 하는 응방, 귀족 자제 가운데 국왕을 쫓아 원에 독로화로 끌려갔다가 순번제로 숙위하는 홀지(忽只), 원나라 공주를 보필하는 겁령구(怯怜口) 등이 그것이었다.

원나라는 그 무렵 공물로 금, 은, 포와 함께 인삼, 잣, 약재, 해동청 등 고려의 특산물을 싹쓸이해 갔다. 원종 때부터 시행된 공녀의 수위도 강화하여 1275년 10월에는 차녀들의 혼인을 금지하는 초유의 조치가 내려졌고, 원 황실에 소요되는 동녀와 환관까지 데려갔다.

왕실의 분란과 실지 회복

1276년, 제국대장공주는 자신을 저주했다는 구실로 후비인 정화궁주와 왕숙, 김방경 등을 잡아 가두었지만 문신 유경이 무고임을 국구 간언하여 풀려났다. 이듬해 7월에는 환관 양선과 태수 장이가 선왕 원종의 제2비 경창궁주 유씨와 순안공 왕종이 승려이자 장남인 종동에게 충렬왕의 수명을 줄이는 의식을 치르게 했다고 고발하자 경창궁주를 폐서인하여 사가로 내쫓은 다음 왕종과 종동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

그처럼 제국대장공주가 국왕인 자신을 무시하고 권세를 휘두르자 실의에 빠진 충렬왕은 정사를 멀리하고 사냥과 주색잡기로 울화를 풀었다.

제국대장공주의 월권 못지않게 부원세력의 전횡도 잇따랐다. 그해 12월 대장군 위득유와 중랑장 노진의, 김복대 등이 원로대신 김방경을 반원세력으로 모함했다. 그러자 평소 그를 고깝게 여기고 있던 원나라 장수 홍다구가 그를 체포하여 심한 고문을 가하고 섬으로 귀양 보냈다.

이 사건은 이듬해 연경으로 끌려간 김방경이 원 세조 쿠빌라이 앞에서 당당하게 결백을 주장하고 충렬왕이 그를 극구 변호하면서 무죄방면되었다.

거듭되는 부원파들의 농단과 홍다구의 행패에 경각심을 느낀 충렬왕은 1278년 연경에 들어가 쿠빌라이에게 그 동안 국내에서 벌어진 홍다구의 월권과 비리를 고발하여 고려에서 쫓아냈다. 그는 또 중서성에 공문을 보내 과거 최탄 등이 원나라에 바친 동녕부를 되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해 8월에는 별장 이봉을 연경에 파견하여 과거 원이 점유한 수안과 곡주 땅을 되돌려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쿠빌라이가 충렬왕의 요청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고려는 대몽항쟁 시절 잃었던 서경 일대의 영토를 모두 회복했다. 이 모두가 충렬왕이 쿠빌라이의 막내사위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제2차 일본 정벌

몽골은 2차례에 걸쳐 여몽연합군을 결성하여 일본을 침략했지만, 여름에 부는 태풍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1279년, 남송을 완전히 멸망시킨 원 세조 쿠빌라이는 동아시아 일통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두 번째 일본 정벌을 계획했다. 원나라는 이미 1277년부터 정벌에 소요되는 병마를 사육하기 위해 탐라에 목마장을 설치한 바 있었다. 쿠빌라이는 1280년 개경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일본 정벌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281년 5월, 쿠빌라이는 아랄한을 행성 우승상, 한족 출신의 대장 범문호를 행성 우승에 임명하고 대규모 일본정벌군을 발진시켰다. 이때 고려는 김방경, 박구, 김주정 등을 대장으로 삼고 병선 9백 척, 안내인과 뱃사공 1만 5천 명, 군사 1만 명, 군량 11만 석을 동원했다.

정벌군은 4,400척의 병선을 타고 일본 본토를 향해 진군했다. 그런데 도중에 아랄한이 갑자기 병사하자 쿠빌라이는 중서성 우승 아탑해를 보내 임무를 대신하게 했다. 범문호는 아탑해가 도착하기 전에 흔도와 홍다구에게 몽고족과 한족 연합군 5만 명을 주어 선발대로 내보내고, 자신은 10만 명의 남만군을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원나라의 침공에 맞서 일본군은 해안에 목책과 진지를 설치하고 방어태세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윽고 6월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정벌군은 일본군 3백여 명을 사살하는 등 기세를 올렸지만 홍다구의 부대가 대패하며 많은 군사를 잃었다.

그런데 범문호의 후발대가 진영에 합류한 8월 1일, 갑자기 태풍이 바다를 뒤엎으면서 정벌군의 전함 대부분 침몰하고 수많은 병사들이 수장되었다. 이때 고려군은 김방경의 지휘 아래 급히 안전한 해안으로 대피하여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며칠 후 바다가 가라앉자 범문호는 태풍을 피해 오룡산에 상륙한 남만군 병사들을 외면한 채 전함을 타고 도망쳐버렸다. 그렇듯 지휘관으로부터 버림받은 병사들은 장백호를 사령관으로 뽑은 다음 배를 만들어 철수하려 했지만 퇴로를 막아선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전멸당하고 말았다.

《원사》에 따르면 당시 10만 군사 가운데 살아 돌아온 사람은 3명뿐이었다. 그처럼 두 차례에 걸친 원나라의 일본정벌은 참담한 실패로 마감되었다.

카다안의 침공

1285년, 원 세조 쿠빌라이는 요양에 동경행성을 설치하고 세 번째 일본정벌을 추진했다. 그러자 당시 요양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옷치긴의 현손 나얀이 쿠빌라이의 조치에 반발하여 1287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나얀을 지지하던 제왕 카다안까지 합세했다.

분개한 쿠빌라이는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직접 진압에 나서 나얀을 죽이고 반란를 평정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반란의 여파가 고려를 강타했다.

1290년 1월, 원나라 장수 나만대에게 쫓겨 요동 지방을 맴돌던 카다안의 잔적들이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 압록강을 건너왔다. 깜짝 놀란 고려 조정에서는 중군만호 정수기를 금기산동에, 좌군만호 박지량을 이천에, 한희유를 쌍성에, 우군만호 김흔을 환가에, 나유를 통천 등지에 파견해 카다안의 반군을 막아섰다. 급보를 들은 원나라에서도 도리첩목아를 보내 쌍성 지역의 수비를 강화했다.

그해 3월, 충렬왕은 쿠빌라이를 설득해 동녕부를 폐지하고 서북의 여러 성들을 되돌려 받았다. 그런 가운데 5월부터 카다안 반군의 기세가 오르더니 10월에는 서경을 넘어 개경 방면까지 진출했다.

깜짝 놀란 충렬왕은 비빈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대피했다. 그해 12월 화주와 등주를 점령한 카다안의 반군들은 인육을 먹고 부녀자들을 윤간한 뒤 죽여 포를 뜨는 등 잔학 행위를 일삼았다.

1291년 카다안의 반군이 철령을 넘어 교주도와 양근성에 이르자 연경에 있던 세자 왕원이 쿠빌라이에게 원병을 청했다. 그러자 쿠빌라이는 나만대에게 1만 명의 군사를 주어 고려에 급파했다. 이윽고 전열을 정비한 고려군이 나만대와 함께 반격에 나서 그해 5월에 연기와 교주에 있던 적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카다안의 반군이 북쪽으로 물러나면서 고려는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참혹한 전란의 여파로 백성들이 기아와 질병에 시달렸다. 연경에서 그 소식을 전해듣고 안타깝게 여긴 세자 왕원은 쿠빌라이에게 원조를 간청했다.

그러자 쿠빌라이는 해도만호 황흥에게 명하여 강남의 쌀 10만 석을 보내주었다. 그해 9월 카다안의 반군이 고려 땅에서 완전히 물러났음을 확인한 충렬왕은 개경으로 환도했다. 그러나 1년 6개월여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는 쑥대밭이 되었고 살아남은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다.

갑작스런 하야와 복위

1294년 1월, 원 세조 쿠빌라이가 세상을 떠났다. 그때 연경에 머물러 있던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는 양 열 마리와 말 한 마리를 제물로 빈전에서 제사지냈다. 당시 원나라의 국상에는 이민족의 접근이 금지되었지만 부마인 고려 국왕만은 예외였다.

그해 4월 상도에서 전통적으로 몽골의 칸을 추대하는 쿠릴타이가 열렸다. 이때 황태자 친킴의 셋째아들 테무르 올제이투가 남송 정벌의 영웅 바얀의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원나라의 2대 황제 성종의 등장이었다.

평소 충렬왕과 가까웠던 성종은 그의 공이 크고 나이가 많다 하여 연경에 오면 수레를 타고 황궁에 출입하도록 하고 은 3만 냥을 하사하는 등 각별히 대접했다. 충렬왕은 그와 같은 황제의 신임을 바탕으로 삼별초의 난 진압 이후 원나라에 복속되어 있던 탐라를 고려 영토에 귀속시킨 다음 제주로 이름을 바꾸고 목사를 파견했다. 아울러 포로와 유랑민으로 원나라에 끌려갔던 수많은 고려인들을 귀환시켰다.

그렇듯 격동의 시기가 지나가고 평화가 찾아들자 방만해진 충렬왕은 정사를 외면하고 사냥과 연회로 소일하기 시작했다. 마제산에 별궁인 수강궁을 짓고 미녀 무비와 밀회를 즐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세자 왕원이 부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아야 될 지경이었다. 1296년 11월, 세자는 진왕 가말라의 딸 계국대장공주(보타시리)와 혼인하면서 쿠빌라이의 외손자이며 왕실의 사위로서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었다.

이듬해인 1297년 5월, 세자의 혼례를 마치고 충렬왕과 함께 귀국했던 제국대장공주가 39세의 나이로 돌연 세상을 떠났다. 비보를 듣고 달려온 세자 왕원은 모후의 죽음에 무비가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충렬왕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무비와 환관 도성기, 최세연, 전숙, 방종저, 중랑장 김근을 잡아 죽이고 관련자 40여 명을 귀양 보낸 다음 연경으로 돌아가 버렸다.

갑작스런 세자의 폭거에 분개한 충렬왕은 1298년 1월 왕위를 내던지고 물러나버렸다. 그로 인해 세자 왕원은 고려 국왕이 되었지만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가 조인규의 딸 조비를 가까이 하자 계국대장공주가 원 황실에 그 사실을 알리며 처벌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원나라 조정에서는 조인규와 조비를 연경으로 압송한 다음 충선왕으로부터 국왕의 인을 회수하여 충렬왕에게 되돌려주었다.

폐위 7개월 만에 복위한 충렬왕은 이전과 다름없이 음풍농월의 세월을 보냈다. 이에 부화뇌동하여 유학자인 오잠, 김원상은 내시 석천보와 함께 가무에 뛰어난 기녀, 무당, 관비 등을 모아 여성악대를 만들었다.

이 악대는 대원들이 남장으로 출연했으므로 남장대라고 불렸다. 남장대는 쌍화점, 삼장사, 우물, 술집 등 퇴폐적인 노래를 불렀고, 지방에서 채집한 가요를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고려의 귀족사회에 퇴폐적인 문화가 확산되었다.

부자간의 불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다

제국대장공주와 무비의 죽음으로 어긋나기 시작한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의 관계는 점차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러자 1303년 왕소유와 송린, 오기, 석주 등이 노쇠한 충렬왕에게 왕위를 10촌 종제인 서흥후 왕전에게 물려주고 충선왕의 부인 계국대장공주를 이혼시켜 서흥후에게 개가시키라고 꼬드겼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충선왕은 원나라 조정에 역적들의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자 그해 7월 중서성에서 단사관 첩목아불화와 한림학사 임원을 고려에 보내 석주와 그의 아들 석천보, 석천경, 석천기를 체포했고, 8월에는 홍자번과 원충갑이 오기를 체포하여 연경으로 압송했다.

측근들이 연이어 숙청되자 충렬왕이 연경에 들어가 항의하려 했지만 이미 그에게 실망한 황제가 입조를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원나라 내부에서는 충렬왕과 충선왕의 불화가 공공연한 웃음거리가 되어 있었다. 그해 12월 형부상서 탑찰아와 왕약이 들어와 충렬왕에게 부자간에 화해를 종용하고 그들을 이간질한 송린과 오기의 형제들을 정동행성에 가두었다. 그러자 마음이 약해진 충렬왕은 제안공 왕숙을 연경에 파견하여 충선왕의 귀국을 요청했다.

1304년 4월, 원나라는 참지정사 홀련, 한림직학사 임원을 고려에 보내 오기와 석천보 일당의 책동을 감시했다. 그해 5월 충렬왕은 찬성사 안향의 건의로 국학의 섬학전을 설치했다. 6월에 국학의 대성전이 완성되자 충렬왕은 홀련과 임원을 대동하고 대성전에 들어가 공자의 초상에 절한 다음 밀직사 이혼으로 하여금 입학송을 짓게 했다.

1305년 11월, 충렬왕은 우중찬 김혼에게 정동행성을 맡기고 광평공과 강릉후, 한희유, 왕유소, 고세, 김문연, 한신 등을 데리고 원나라에 들어갔다.

그때 왕유소, 송방영, 송린, 한신이 황후 및 좌승상 아홀태, 평장 팔도마신에게 충선왕을 참소하면서 계국대장공주를 서흥후 왕전에게 개가시키라고 부추겼다. 그러자 충선왕의 측근 최유엄이 원의 중서성에 항의하여 왕유소를 하옥시켰다.

당시 충선왕 편에 서있던 고세, 김문연, 진양필 등은 부자간에 갈등을 조장하는 충렬왕을 귀국시키라고 원 조정에 요청했다. 그에 따라 중서성에서 귀국을 독촉하자 충렬왕은 그들이 귀로에 자신을 잡아 수장시키려 한다면서 일부러 약을 먹고 이질에 걸린 뒤 여름부터 가을까지 병석에 누워 귀국을 거부했다.

쓸쓸한 최후

1307년 1월, 원나라의 황제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회녕왕 카이산, 아유르발리파드라 형제와 안서왕 아난다 사이에 제위 분쟁이 일어났다. 그러자 중재에 나선 충선왕은 카이산이 제위에 오르게 하고 아유르발리파드라는 황태자가 되게 한 다음 이어진 안서왕 아난다의 황제 암살음모까지 분쇄하면서 일약 조정의 실력자로 등장했다.

그 결과 충선왕은 새로운 황제 무종에 의해 심왕, 태자태부, 부마도위직에 책봉되었다. 그처럼 아들이 원 황실의 계승 문제를 해결하고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자 충렬왕은 닭 쫓던 개꼴이 되고 말았다.

이윽고 고려의 정사를 장악한 충선왕은 김문연과 김유 등을 통해 80여 명에 달하는 고려 관리들의 인사를 처리한 다음, 부왕과 자신을 이간질한 왕소유와 송린, 송방영, 한신, 송균, 김충의, 최연 등을 체포하고 충렬왕의 거처를 경수사로 옮기게 했다. 그해 4월에는 서흥후 왕전, 왕유소, 송방영, 송린, 한신, 송균, 김충의, 최연 등을 모조리 사형에 처했다.

그해 5월 하릴없이 고려에 돌아온 충렬왕은 숙창원비의 저택에 머물며 쓰라린 마음을 달랬다. 1308년 7월 기사일, 35년 동안 재위했던 충렬왕은 신효사에서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충렬경효(忠烈景孝), 능호는 경릉(慶陵)이다.

충렬왕은 초강대국 원나라에 기대어 무신정권에 의해 유명무실해진 왕실의 권위를 바로잡고 대몽항쟁기에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는 등 나름의 공적을 세웠지만 평생 몽골의 습속에 사로잡혀 고려의 주체성을 훼손했고 지나친 향락에 빠져 국정을 외면함으로써 백성들의 삶을 파탄지경으로 끌고간 혼군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말년에 부원파들의 책동에 휘말려 심화된 아들 충선왕과의 불화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역사에 초라한 이름을 남기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