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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야스쿠니 공물 봉납...한·중 반발 본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21일 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범죄자 14명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했습니다.
기시다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의 춘계 예대제 첫날인 이날 오전 직접 참배 대신 공물을 봉납했습니다.
한편, 아베 신조 전 총리와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은 직접 참배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논평을 통해 “일본의 식민 침탈과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정부와 의회 지도자들이 또다시 공물을 봉납하고 참배를 되풀이한 것에 대해 깊은 실망과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습니다.
또 한국 정부는 “일본의 지도급 인사들이 역사를 직시하고 과거사에 대한 겸허한 성찰과 진정한 반성을 행동으로 보여줄 것을 촉구한다”며, “일본은 이것이야말로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발전의 근간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한편, 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야스쿠니 신사 공물 봉납과 참배는 “일본 스스로의 도발 역사에 대한 그릇된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중국 측은 일본 측에 진실되게 약속을 지키고, 자국의 도발 역사를 직면하고 반영하며, 군국주의로부터 완전히 단절해 실질적인 행동을 통해 아시아 이웃국가들과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길 촉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편, 마쓰노 히로카즈 일본 관방장관은 이와 관련해 입장을 내놓길 거부했습니다.
VOA 뉴스
*군국주의 대일본제국 헌법 전문과 평화주의 입헌군주제 일본국 헌법 전문[민주국가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4623
군국주의 대일본제국 헌법 전문과 평화주의 입헌군주제 일본국 헌법 전문[민주국가 헌법]
First snow of the season falls on the Japanese Peace Bell, a gift to the United Nations by the UN Association of Japan. 15 November 2018. United Nations, New York. 大日本帝國憲法 全文 公布:1889年2月..
blog.daum.net
진주만 기습공격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에 의한 진주만 기습이 이루어졌다
일본군은 이날 총 354대의 함재기를 동원, 2차례의 파상공습을 감행했다. 제1차 공습비행대 183대는 새벽 5시 30분(이하 하와이 현지 시간)에 , 제2차 171대는 30분 뒤인 6시에 각각 일본군 함대로부터 출격했다.
당시 하와에는 임무를 수행중인 3척의 항공모함을 제외한 94척의 각종 함정이 정박 중이었고 장병들은 일요일을 맞아 대부분 외출 하였다.
또한 섬 내의 387대의 각종 군용 비행기도 비행장에 정렬되어 있었으며 조종사들 역시 대부분 외출 중이었다. 방공포대에도 일부 병력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7시 30분에 미국 레이다 병이 여러 차례 대규모 비행단이 접근하는 것을 발견 하였으나 아군의 비행기로 오인하는 바람에 방어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7시 45분에 공습을 시작한 1차 공습대는 8시 40분에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환했으며 2차 공습은 8시 55분부터 시작됐다. 2차 공습과 함께 하와이에 접근해 있던 일본군의 잠수정들이 미군 함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2차에 걸친 공격은 9시 55분 모두 끝났다.
이 공습으로 태평양 함대는 8척의 전함, 10척의 기타 대형함정, 20여척의 소형함정이 격침됐다. 비행기도 180대가 파괴됐다.
미군 사상자는 3,500명에 달했다. 이중 사망자는 2,000여 명이었다. 반면 일본 측 사망자는 100 여명으로 집계됐다.
항내와 섬내의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되어 진주만은 6개월 동안 기능을 상실했다.
미국은 일본이 유럽에서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힘입어 프랑스 비시 정권을 압박,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 베트남의 해, 공군 기지를 확보하여 동남아로의 군사 진출을 도모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석유 수출 중단의 보복 조치를 가해 일본과의 전쟁을 예상하고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었지만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함대에서 전폭기를 출동시켜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태평양 함대의 핵심 전력인 항공모함들을 곧 있을 것으로 예상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 작전 운항시켜 아무런 손상 없이 보존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불과 6개월 뒤에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 1942년 6월 5일 ~ 6월 7일)에서 일본이 보다 우세한 함대 전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미국은 함대 전력을 빠르게 회복시킬 수 있어 일본 연합 함대를 대패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해전 뒤 정찰에 나섰던 진주만 기습의 입안자 야마모토 이소루쿠연합함대 사령관의 탑승 정찰기를 격추, 그를 사망케 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청일전쟁, 러일 전쟁의 패턴을 쫓아 기습 공격으로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청일전쟁과 러일 전쟁에서는 최종 승리를 거두었으나 태평양 전쟁에서는 패배로 끝이 났다.
*쿠릴열도의 군사적 가치
쿠릴열도는 일본과 사할린 그리고 극동지역을 연결하는 교량적 교통완충지대이다
대륙 극동지역에서 일본 열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사할린과 쿠릴열도 북방 4섬을 점령해야 하고 일본이 극동과 만주지역 그리고 알래스카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쿠릴열도 북방 4섬과 사할린을 점령해야 한다
사할린과 쿠릴열도는 중국과 한반도 완충지대 만주와 극동지역을 누가 지배하는냐에 따라 그 지역의 지배자도 결정되어왔다
-쿠릴열도는 사할린, 극동과 만주지역 진출 군사적, 상업무역적 항구기지
-쿠릴열도는 사할린과 함께 아메리카대륙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는데 전초기지
쿠릴열도와 사할린은 북태평양지역으로 알래스카나 캐나다 북미등을 군사적이나 상업 무역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지역이다
-진주만기습(眞珠灣奇襲) 총지휘부 군사기지
진주만기습은 1941년 12월 7일 일본해군 기동부대가 하와이 오아후섬 진주만에 있는 미국 태평양함대기지를 기습공격한 사건이다
이때 일본은 교섭을 중단한다는 최후통첩을 미국에 하지도 않은 상태였으므로 그것은 일본의 속임수 공격이었다
미국의회는 그날 한 표를 제외한 만장일치로 대일선전포고를 가결하였다
일본은 1941년 초부터 태평양전쟁의 도화선이 된 이 기습계획을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연합함대 사령관 지휘로 수립하였으며 1941년 11월 26일 쿠릴열도 에토로후섬(擇捉島) 하토가쓰부만(單冠灣)에서 출발, 일본 해군의 항공기와 특수잠항정으로 기습공격을 하여 출항 중에 있던 항공모함을 제외한 미국 태평양 함대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일본열도의 혼란기에는 쿠릴열도는 중국의 지배세력이 지배자였고 일본열도의 통일국가 등장때는 일본정부 통치를 받아왔다 사할린, 쿠릴열도와 몽고,만주족의 친근감으로 중국내전의 유발되어왔다
한반도 북방지역은 해군력 강화와 해상권 장악으로 쿠릴열도와 사할린 상업 무역적 군사적 협력을 강화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반으로 북태평양과 알래스카. 카나다. 북미로 이어지는 무역항 개척에도 주력해야 하며 해오고 있다
소련-일본 중립 조약
소비에트 연방-일본 중립 조약 또는 일소중립조약(日ソ中立条約)은 일본 제국이 미국의 하와이를 공격할 때에 소비에트 연방이 중립을 지키자는 내용을 말한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항복한 후, 소비에트 연방이 포츠담 회담에서 일본 제국에게 선전 포고하고 8월 8일에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점령함으로써 이 조약은 파기되었다.
소련과 일본간의 중요한 외교조약. 정책조정과 정보교환의 실패는 제2차세계대전 동안 추축국과 동맹국들사이에서 특징적인 것이었다. 1939년 8월 23일 소련과 독일이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했을 때,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일본외무장관 마쓰오카 요스케가 1941년 3월에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아돌프 히틀러는 그에게 소련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해 알려주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도쿄로의 귀국길에, 마쓰오카는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1941년 4월 13일 일소중립조약을 성립시켰다. 이 조약은 상대국의 영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과 각국이 제3국과 적대관계에 돌입할 경우에 중립을 보장했다. 이같은 합의는 심오한 결과를 초래했고,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일본의 중립을 가져왔던 것이다. 조약은 5년동안 유효한 것이었고, 상대방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경우, 5년 후 추가로 5년동안 자동연장될 것이었다.
1939년 이래, 일본은 소련과의 타협을 추진해 왔고, 이는 중국 정복을 위한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측이 먼저 1940년 5월, 6월에 불가침조약을 제안했고, 당시는 프랑스의 항복으로 일본이 동남아시아의 유럽 식민지로의 진출을 고민하던 때였고, 이를 위해서 소련의 중립이 중요했다.
일본과 소련의 협상은 1940년 8월에 시작되었다. 협상과정에서, 소련은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고, 불가침조약 대신에 중립협정을 제안했고, 이는 서양열강과의 관계에 긴장을 유발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반면, 일본은 남방진출이라는 자신의 공공연한 야망을 드러내면서,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모델로 삼은 보다 구속력있는 조약을 제안했던 것이다. 일본측 안은 독소불가침조약의 비밀의정서의 내용과 유사했고, 소련이 내몽고와 만주국을 포함하는 중국 북부의 3성에서 일본의 전통적 이해관계를 인정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일본의 세력권임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 답례로, 일본은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이란)으로의 소련의 진출을 지지하는데 동의한다는 것이었다.
1941년 4월의 일소중립조약은 남동 태평양으로의 일본의 진출과 미국에 대한 일본의 공격을 용이하게 했다. 1941년 여름과 가을, 스탈린의 대일정책은 1941년 6월 이전의 그의 독일에 대한 입장과 유사했다. 그는 극동의 소련군 장군들에게 만주와 몽고 국경에서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라고 명령했다. 일본이 공격을 한다면, 소련의 태평양함대는 북쪽으로 후퇴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약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941년 가을 소련 침공을 심사숙고 했다. 특히 만주의 관동군 지휘부는 이를 지지했지만, 일본은 동남아시아에서의 유럽열강의 일시적 쇠약이라는 권력의 공백상태를 이용하는, 남방진출을 선호했다. 일본은 노몬한사건이라는 소련과의 과거의 충돌 결과, 시베리아의 험악한 날씨 그리고 이 지역에서 석유와 고무라는 당시 일본이 매우 절실하게 필요로한 자원이 없다는 점 등을 고려,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1941년의 일소중립조약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소련에게 큰 도움을 제공했다. 만약 독일과 일본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협력했다면, 소련이 패배했을지도 모르고, 추축국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의 중립 덕분에, 소련의 극동지역은 소련의 서부전선에 1941년과 1944년 사이에 25만명의 병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조약은 또한 소련이 미국의 무기대여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보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동시에, 일본도 이 조약을 통해 큰 이익을 보았다. 미국과의 전쟁 동안, 일본은 소련으로부터 4천만톤의 석탄, 1억4천만톤의 목재, 5천만톤의 철, 천만톤의 어류 그리고 시베리아와 소련 극동지방의 금을 공급받았다. 소련과의 무역이 미국과의 일본의 전쟁을 도왔던 것이다.
이후 소련은 1945년, 일본과의 중립조약을 파기했다. 1945년 2월의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그의 서양 동맹국들에게 극동에서의 영토적 양보의 대가로,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고 2-3개월안에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동참할 것이라 약속했다. 유럽에서 승리를 거둔지 3달 후인,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다.
-일본이 소련과 중립조약 체결이후 한반도 지역 조선군사령부나 만주지역 관동군 사령부 일부 병역들이 태평양지역으로 이동하였고 태평양전쟁 이후 한국인 등을 강제 징병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하였다. 이런 자료를 볼때 일본은 소련공격보다는 태평양전쟁(영국이나 프랑스등 식민지 점령 전쟁)을 몇 년간 준비했다는 의견이다
-일본 2차대전 총지휘부 대본영은 독일 히틀러 나찌즘처럼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노선으로 스탈린 일국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노선과 비슷하다
대본영(大本營): 태평양 전쟁 때, 일본 천황의 직속으로 최고의 통수권을 행사하던 지휘부(군사평의회 성격 최고 권력기구, 북한 국방위원회 성격)
대본영(大本營)은 전시(戰時) 중 또는 사변(事變) 중에 설치된 일본 제국 육군 및 해군의 최고 통수 기관이다. 일본 천황의 명령(봉칙 명령, 奉勅命令)을 대본영 명령(대본영 육군부 명령(大陸命), 대본영 해군부 명령(大海令))으로 발하는 최고 사령부로서의 기능을 가지는 기관이다.
대본영은 대부분의 기관이 참모본부 및 군령부에 속해있는 조직이었다. 대본영 회의는 천황과 참모총장, 군령부 총장, 참모 차장, 군령부 차장, 참모본부 제1부장(작전 부장), 군령부 제1부장, 육군 대신, 해군 대신에 의해서 구성되었다. 대본영 조직에는 내각총리대신과 외무 대신등 일본 정부측의 문관(文官)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대본영과 일본 정부와의 의사 통일을 꾀하기 위해 대본영 정부연락회의가 설치되었다.
또한, 대본영은 전과(戰果) 홍보도 하고 있었는데, 전황의 악화에 수반해서 일본군이 계속 패주하자 진실을 전하지 않는, 이른바 대본영 발표를 하기도 한다
태평양전쟁 때 대본영이 내각총리도 겸직했다[대본영이 내각을 장악하여 군인정치를 했다]
도조 히데키 내각총리(1941년 10월 18일 ~ 1944년 7월 18일. 육군대장-관동군 사령부),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총리(1944년 7월 22일~1945년 4월 7일. 육군대장-조선군 사령부) 등으로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다
1945년 4월 7일 오키나와 함락 이후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내각총리 사임 이후 대본영 주도 군국주의 군인정치가 쇠퇴하고 문관 주도의 협상세력이 일본 내각을 장악해 나아가게 되었다
스즈키 간타 총리(해군 출신이면서 추밀원 의장 역임)는 1945년 4월 7일 오키나와 함락 이후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가 사임한 이후 그는 77세의 나이로 수상에 올랐다. 그는 전황이 기울었음을 느끼고 소련의 중재를 통한 종전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고,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대일전에 참전하자,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의 수용이 불가피함을 각의를 통해 밝혔다. 그는 이를 정리하여 이미 무조건 항복을 수용하려던 쇼와 천황에게 상신했고 히로히토는 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계속을 주장하는 일부 청년 장교들은 이에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여 쇼와 천황의 육성 방송 전인 8월 15일 새벽 그를 암살하려는 쿠데타 음모가 있었으나, 관저에 들어오지 않아 암살 음모를 피하였다.
항복이 공포된 이후 그는 사임했고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친왕(東久邇宮稔彦王)이 차기 총리로 취임, 이후 1948년 자연사했다. "군인은 정치에 간여하면 안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일본 A급 전범 사형집행 보여주는 미군문서 발견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A급 전범 7명에 대한 사형집행 절차와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미군 공문서의 복사본이 일본인 학자에 의해 발견됐다.
교도통신을 비롯한 일본 언론은 8일 "극동 국제군사재판에서 교수형 판결을 받은 도조 히데키 전 총리를 비롯한 A급 전범 7명의 형집행 절차를 구체적으로 정한 미군 공문서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수형자들의 형집행'이라는 제목의 4페이지 분량의 문서는 당시 헌병대 사령관이었던 빅터 펠프스 대령이 작성한 것으로, 원본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
사형제도를 연구하는 나카타 겐지 간사이대 교수가 이번에 일본의 국립국회도서관에서 이 문서의 사본을 찾아냈다.
1948년 12월 23일 도쿄의 스가모 형무소에서 이뤄진 도조 전 총리를 비롯한 A급 전범들의 사형집행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공문서가 난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교도통신은 전했다.
사형집행 절차를 규정한 자료 뿐 아니라 사형이 집행된 A급 전범 7명의 지문 등 신원을 알 수 있는 자료와 이들의 시신 수령에 관한 자료도 발견됐다.
일본의 전범재판 전문가인 아와야 겐타로 릿쿄대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미군의 공문서는 A급 전범들의 형집행 절차와 방법에 대한 최초로 확인된 구체적인 미군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미군 공문서에 따르면 1948년 12월 21일 저녁 전범 7명에게 사형집행 시간이 통보됐는데, 사형 집행 시간은 `23일 오전 0시 또는 가능한 한 0시 직후'로 명시되어 있다.
이 공문서의 내용은 사형집행 과정에 입회한 하나야마 신쇼(1898∼1995) 스님이 남긴 기록과도 일치한다.
하나야마 스님은 자신의 저서에서 1948년 12월 23일 오전 0시 1분과 0시 30분에 사형대의 발판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앞서 극동 국제군사재판소는 1948년 11월 12일 이들 A급 전범 7명에게 교수형 판결을 내렸는데 이 문서는 판결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형자들의 형집행'이라는 문서는 사형집행이 '비공개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사진이나 영상 촬영도 이뤄져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문서는 또 "사형 집행장소는 허가받지 않은 사람이 입장하는 것을 막고 어떤 종류의 소란이 발생하는 것을 막도록 엄중하고 확실하게 방어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와 함께 문서에는 A급 전범 7명을 각각 4명과 3명으로 나눠 두 차례에 걸쳐 사형집행을 하도록 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사형집행을 두 차례로 나눠 실시하기로 한 이유는 스가모 형무소의 교수대가 한 번에 최대 5명까지 사형집행을 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문서는 또 사형집행에 앞서 24시간 이내에 모든 필요한 준비가 최적의 상태에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철저한 사전점검'을 실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만일 기술적인 결함 때문에 사형집행이 성공적으로 이뤄지지 못하면 반복해서 사형집행을 하도록 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나카타 교수는 "당시 일본의 법률에 관련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독자적인 방법'으로 형을 집행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손으로 쓴 기록에 몇몇 오탈자가 있는 것으로 미뤄볼 때 시간적인 여유 없이 교수형을 집행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극동 국제군사재판소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극동지방의 전쟁범죄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1946년에 일본 도쿄에 설치됐다.
*일본의 A급 전범 7명
1.이타가키 세이시로 - 육군 군인, 제1차 고노에 내각·히라누마 내각 육군 대신, 만주국 군정부 최고 고문, 관동군 참모장
2.기무라 헤이타로 - 육군 군인, 버마 방면 일본군 사령관, 도조 내각 일본 육군 차관
3.도이하라 겐지 - 육군 군인, 펑텐 특무 기관장, 제12방면 군사령관
4.도조 히데키 - 육군 군인, 제40대 내각총리대신
5.무토 아키라 - 육군 군인, 제14방면군 참모장 (필리핀)
6.마쓰이 이와네
7.히로타 고키 - 문관, 제32대 내각총리대신
처형된 전범 7명의 사체는 요코하마의 구보야마 화장터 (久保山火葬場) 에서 화장되었고, 유골은 미군에 의해 도쿄만에 버려졌다. 하지만, 12월 25일에 고이소 구니아키의 변호사였던 자가 화장장 인부들을 시켜 은밀히 빼돌렸다가 가까이에 있는 고젠지 (興禅寺) 라는 절에 맡겼고, 1949년 5월 이즈 산의 고아 관음에 은밀하게 매장되었다.
그 후 1960년 8월 16일에 아이치 현 하즈 군 (幡豆郡) 하즈 정 (幡豆町) 에 위치한 산가네 산 (三ヶ根山) 의 산꼭대기 부근에 옮겨졌다. 산가네 산에는 "순국 7사묘"가 설치되었고, 무덤에는 뼈가 분골되어 안치되었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
극동 국제 군사 재판(極東國際軍事裁判, 영어: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IMTFE, 일본어: 極東国際軍事裁判 きょくとうこくさいぐんじさいばん)은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동아시아의 전쟁 범죄인을 심판한 재판이다. 도쿄 재판이라고도 한다. 60여 명 이상의 전쟁 범죄 용의자로 지명된 사람 중 28명이 기소되어, 판결 이전에 병사한 사람 2명과 소추가 면제된 1명을 제외한 2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당시 일본 천황이자 최대 책임자였던 쇼와 천황과 난징 대학살의 지휘관이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를 비롯한 주요 일본 황족들은 처벌을 면했고, 황족으로선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만이 유일하게 전범 지명자 명단 안에 포함되었다.
생체 실험 부대인 731 부대의 책임자로써 각종 범죄를 일으킨 이시이 시로와 그 관계자들 역시 미국에게 연구 자료를 넘겨주는 대가로 단 한 번도 기소되지 않았다. 그 외에 만주국에서 2키 3스케를 형성했던 기시 노부스케와 아이카와 요시스케의 경우, 일본의 무조건 항복 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됐다가 석방되었다. 이 중 기시 노부스케는 그 뒤에 일본 총리를 지내기도 했다.
이 재판은 뉘른베르크 재판과 유사하다는 의미에서 ‘뉘른베르크 재판의 극동아시아 판’이나 ‘또다른 뉘른베르크’라고 불리기도 한다
1.일지
1946년 1월 19일 = 더글러스 맥아더, 극동국제군사재판소 특별 포고. 극동국제군사재판소 조례 제정.
1946년 4월 26일 = 조례 일부 개정.
1946년 4월 29일 = 기소.
1946년 5월 3일 = 재판 시작.(도쿄 이치가야 구 육군사관학교 강당)
1948년 11월 4일 ~ 11월 12일 = 판결.
1948년 12월 23일 오전 0시1분30초 ~ 오전 0시35분 = 7명 교수형 집행.
1958년 4월 = 연합국 18개국, 금고형 선고된 18명 중 옥사한 4명을 제외한 자들을 형 집행 면제하도록 일본 정부에 통보
2.개요
전범 재판 법정을 설치한 법적 근거는 직접적으로는 일본이 1945년 9월 2일에 조인한 항복 문서였다. 일본은 이 문서에서 포츠담선언의 조항을 확실히 이행한다고 약속했고, 포츠담선언 제10조는 '포로를 학대한 자를 포함한 전쟁 범죄인에 대해 엄중하게 처벌한다'고 돼있다. 법정은 도쿄 이치가야의 구 육군사관학교 2층 대강당에 설치됐다. 이 건물은 전시에 일본 육군성과 참모본부로 사용됐다.
3.재판관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재판장 윌리엄 웹 경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 대법원장
캐나다 에드워드 스튜어트 맥더걸 Former Judge, King's Bench Appeal Side
중화민국 중장 매여오 Attorney and Member, Legislative Yuan
프랑스 앙리 베르나르 Chief Prosecutor, First Military Tribunal in Paris
인도 라다비노드 팔 Lecturer, University of Calcutta Law College; Provided dissenting opinion.
네덜란드 교수 베르트 뢸링 위트레흐트 대학교 법학 교수
뉴질랜드 하비 노스크로프트 뉴질랜드 대법원 판사
필리핀 대령 델핀 하라니야 Attorney General, Supreme Court Member
영국 Hon 로드 패트릭 Judge (Scottish), Senator of the College of Justice
미국 존 P. 히긴스 매사추세츠 주 대법원장
미국 소장 Cramer Replaced Judge Higgins in July 1946
소비에트연방(소련) 소장 I.M. 자라야노프 Member, Military Collegium of the Supreme Court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
“일본에 의해 주도되고 서방 세력에 독립된 자급자족적인 아시아 각국의 블록[동아시아 지역에서 구미의 식민지 지배를 타파하고 아시아 제민족의 해방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대동아공영권 결성을 주장함]"
대동아공영권(大東亜共栄圏 다이토아쿄에이켄, 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은 쇼와 시대 일본 제국 정부와 일본군에 의해 고안, 점령지의 아시아인들에게 동아시아보다 더 큰 영역에서의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의 문화적, 경제적 통합이라고 선전된 개념이다. 이는 또한 "일본에 의해 주도되고 서방 세력에 독립된 자급자족적인 아시아 각국의 블록"을 만들어내려는 욕망을 표현한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의 외무대신 아리타 하치로의 1940년 6월 29일의 라디오 연설 "국제 정세와 일본의 위치"에서 선언되었다.
1.개념
"대동아공영권"의 용어 자체는 군국주의에 반대하던 분석 철학자 기요시 미키(三木 清)가 제창하였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일본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가 1938년 12월 22일 동북아시아에 한정해 제창한 동아신질서(일본어: 東亜新秩序 도아신치츠죠)라는 지리적으로 더 좁은 범위에 대한 개념이 영향을 주었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1940년에 일본, 만주국,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일부를 아우르는 대동아를 건설하기 위해 대동아공영권을 기획했으며, 선전에 따르면 그것은 서구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져 번영과 평화, 자유를 누릴 아시아 국가들의 "공영"을 찾기 위해 새 국제 질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팽창을 위한 군사적 목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고립과 인도양에서의 군사 작전을 포함했다.[5] 대동아공영권은 팔굉일우의 원칙을 가능하게 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1930년대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일어난 일본 제국의 동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슬로건과 개념 중 하나였고, 오늘날 "대동아공영권"은 대체로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괴뢰 정부를 내세워 지역의 주민들과 경제를 조종한 뒤 이를 제국에 이용하면서 내세웠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2.역사
일본에 의해 통합된 아시아의 개념은 1936년부터 1940년까지 일본의 외무대신직을 지낸 군 사상가인 아리타 하치로 장군에게서 비롯된 일본 육군의 개념을 기반에 두었다. 육군은 그들의 새로운 일본 제국은 먼로주의, 특히 루스벨트 계론을 아시아에 대응시킨 것이라 주장했다. 아시아의 지역들은 일본에게 미국에게 있어서의 라틴 아메리카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되었다.
일본의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는 1940년 8월 1일의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대동아공영권의 개념을 밝혔으나, 개념 자체는 오랜 기간 동안 다른 형태로도 존재하고 있었다. 일본의 지도계층은 오랫동안 이 개념에 관심을 가졌다.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압력에 효과적으로 보복할 수 없어진 유럽 열강들이 중국에 대한 지원을 철회할 것을 "아시아인들의 아시아"라는 명목으로 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일본에게 주었다. 전쟁 이전 서구의 식민통치를 당하며 많은 주민들이 일본에 동감하던 대동아공영권 내부의 다른 국가들(인도네시아 등)은 전쟁 초기에 점령되었고, 대동아공영권의 나머지는 이미 일본의 통제하에 있던(만주국 등) 중이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일본을 제외한 회원국들끼리의 협력이나 권한이 부족한 상태에서의 대동아공영권의 설립을 전쟁 초반에 큰 어려움 없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일본의 선전은 "아시아인들의 아시아" 선전과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인지의 내용을 담았다. 1937년부터 지속된 중일 전쟁에서의 실패의 이유는 1941년부터, 중국이 소련으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받았음에도 영국과 미국의 동남아시아 식민지를 이용한 것 때문으로 돌려졌다. 몇몇 경우에는 일본군이 침략해 영국과 프랑스 등의 식민 정부들과 군대를 몰아냈을 때 지역 주민들이 일본군을 환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통은 특히 중국에서 많이 드러난 일본군의 잠재적 지역 이용 행태와 잔인함이 지역 주민들이 새로운 아시아의 제국주의자들이 서구 자본주의자들보다 더욱 심하다고 여기게 했다. 일본 정부는 지역 경제가 일본의 전쟁 물자의 원료 생산을 위해 강력히 규제되어야 한다고 지시했다;한 내각 인사는 "규제는 없다. 그것들은 적의 소유물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빼앗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정부 고위층의 열람을 목적으로 1943년에 완성된 기밀문서인 야마토 민족을 중핵으로 하는 세계정책의 검토에서는 대동아공영권의 창시자이자 지역 내의 최대 군사 강국인 일본이 자연스럽게 다른 국가들을 보호하에 두고 대동아공영권 내에서 우위를 차지한다고 보았다.
일본의 입장에서, 대동아공영권과 연합국과의 전쟁 이면에는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중국 시장이었다. 일본은 미국의 인가를 받던 중국 시장에 대해 일본만의 "특별한 관계"를 원했다. 이 시장들의 잠재적 부의 풍부함을 인식한 미국은 일본이 중국으로의 수출에 있어서 우위를 갖게 하는 것을 거부했다. 일본 제국은 중국 시장에서의 일본의 공식적인 이점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로, 처음에는 중국을 침략하고 나중에는 대동아공영권을 추진했다.
일본의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에 따르면, 일본이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성공한다면 지도국으로서 동아시아를 통합할 것이고,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말은 일본 제국과 동의어가 될 것이었다.
3.대동아회의
대동아회의(大東亜会議)는 1943년 11월 5-6일, 도쿄에서 개최되었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 구성국들의 국가원수들을 초대했다. 이 회의는 '도쿄 회의'라고도 불린다. 대표자들이 회의 동안 사용한 언어는 영어였다.
회의에서는 다양한 주제가 다루어졌지만, 일본의 범아시아주의 이상과 서구 제국주의로부터의 아시아의 "해방자" 역할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내포했다.
참석자들은 다음과 같다:
도조 히데키 일본 총리
장징후이 만주국 총리
왕징웨이 난징 국민정부 국가 주석
바 마우(Ba Maw) 버마국 총리
수바스 찬드라 보스 자유 인도 임시 정부 국가 주석
호세 라우렐 필리핀 제2공화국 대통령
완 와이타야쿤(Wan Waithayakon) 태국 왕자
도조 히데키는 서구의 "물질 문명"에 대항하는 아시아의 "정신적 본질"을 찬양하는 연설로 그들을 맞이했다. 그들의 회의는 주로 독자 노선의 추구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졌고, 경제적 개발과 협력에 대한 구체적 계획은 논의되지 않았다.
이 회의에서, 참가국들은 연합국들에 대항한 정치, 경제적 협력 관계를 선전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4.구성국
구성국들은 일본의 점령지 면적이 최대에 이르렀을 당시 공식적으로 대동아공영권에 속했다.
일본 제국과 조선등 총독부들
만주국 – 1945년 8월
몽강연합자치정부 (내몽골) – 1945년 8월
왕징웨이 정권 – 1945년 8월 10일
버마국 1943년 8월 1일 – 1945년 3월 27일
필리핀 제2공화국: 1943년 10월 14일 – 1945년 8월 17일
베트남 제국 1943년 10월 14일 – 1945년 8월 23일
캄푸치아 왕국 1945년 3월 9일 – 1945년 4월 15일
라오스 왕국 1944년 – 1945년 8월
자유 인도 임시 정부 1943년 10월 21일 – 1945년 8월 18일
타이 왕국 1941년 12월 21일 –
(1)일본 직할 지역
타이완 총독부
홍콩, 필리핀, (포르투갈으로부터 구매할) 마카오, 파라셀 제도, (중국 괴뢰정부로부터 구매할) 하이난 성. 이름과는 달리, 타이완 섬을 포함할 계획은 아니었다.
남양청
괌, 나우루, 바나바 섬, 길버트 제도, 웨이크 섬.
멜라네시아 총독부 또는 남태평양 총독부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산타크루즈 제도, 투발루, 피지, 바누아투, 누벨칼레도니.
동태평양 총독부
하와이, 하울랜드 섬, 베이커 섬, 피닉스 제도, 레인 제도, 마르키즈 제도, 투아모투 제도, 소시에테 제도, 쿡 제도, 오스트랄 제도, 사모아 제도, 통가. 만주국을 모델로 해서 옛 하와이 왕국을 재건하는 것도 검토되었다. 가라후토 청을 모델로 한 하와이의 순조로운 편입은 1920년 기준 하와이 인구의 약 43%(약 16만 명)를 차지하는 지역 일본인 공동체의 영향력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하와이는 식량 공급을 자급자족할 것이었고, 설탕과 파인애플을 재배하는 하와이의 5대 사탕수수 기업은 해체될 예정이었다. 하와이가 일본에 합병될지, 꼭두각시 왕정이 설립될지, 미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패가 될지에 대한 논의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총독부
테즈메이니아를 포함한 오스트레일리아 전체.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일본 이주민을 2백만 명까지 수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와 분리되어, 미얀마, 필리핀과 같이 식민지가 아닌 위성국으로써의 오스트레일리아와 상호 평화를 추구했다는 증거도 있다.
실론 총독부
고아 주와 벵골 만을 잇는 선 이남의 인도 해안 전체.알래스카 총독부
알래스카주, 유콘 준주, 노스웨스트 준주 서부, 앨버타주,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워싱턴주. 미국 서부 해안 지역을 준 자치적인 위성국으로 만들 계획들도 있었다. 이 계획은 심각하게 고려되지는 않았다; 추축국의 전 세계적 승리에 달려 있었다.
중앙아메리카 총독부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벨리즈,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파나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의 마라카이보(서부) 지역, 에콰도르, 쿠바, 아이티, 도미니카 공화국, 자메이카, 바하마. 또한 만약 멕시코, 페루, 칠레가 일본과의 전쟁에 합류한다면, 이 국가들의 상당 부분이 일본에게 넘어갈 것이었다. 멕시코의 1942년 5월 22일, 페루의 1944년 2월 12일, 칠레의 (나치 독일이 거의 전쟁에서 패배할 무렵인) 1945년 5월 11일의 대일 선전포고는 서반구의 태평양 연안에 있는 세 환태평양 국가들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두 일본과 적대 관계에 들도록 했다. 일본의 손에 들어갈 트리니다드 섬, 가이아나, 수리남, 리워드 제도의 영국과 프랑스 소유지들의 미래는 승리한 추축국 나치 독일과의 협상에 놓일 것이었다.
(2)아시아의 괴뢰국들
만주국
만주 지역.몽강연합자치정부
만주국 서쪽의 외몽골.중화민국
일본에게 점령된 중국의 다른 지역들.동인도 왕국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크리스마스 섬,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 (포르투갈로부터 구매할) 동티모르.버마국
미얀마, 인도 아삼 주, 벵갈의 대부분.타이 왕국
말레이 반도, 미얀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까지 확장될 전전의 태국. 처음에는 계획에 들어가지 않았다.말라야 왕국
말레이 반도의 나머지.캄보디아 왕국
캄보디아와 프랑스령 코친차이나의 일부.안남 왕국
안남, 라오스, 통킹.
5.실패
대동아공영권은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붕괴했다. 일본은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 반서구 감정을 활성화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대동아공영권은 절대 아시아의 통합을 실현하지 못했다. 버마국 국가 주석 바 마우는 일본군을 비판했다:
"그 군국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일본의 입장에서만 바라보았고, 심지어 그들은 그들이 다루는 다른 이들 모두가 그들과 똑같이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는 어떤 일을 할 때 일본식의 방법밖에 없었다; 오직 하나의 목표와 관점, 일본의 관점 말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단 하나의 운명은 많은 수의 만주국과 한국을 영원히 일본에 종속되도록 한다. 이런 인종적 부담은...일본 군국주의자들과 우리 지역의 사람들 사이에 실제적 이해가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즉, 대동아공영권은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의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자체적 관점을 위해 작동했고, 따라서 일본인들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지원을 끌어모으는 데 실패했다. 그 기간 동안 이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민족 운동이 일어났고, 이 민족주의자들은 어느 정도 일본에 협력했다. 하지만 오하이오 대학교의 명예 정치학 교수 윌러드 엘즈브리(Willard Elsbree)는 일본 정부와 이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양측의 관점 통합을 절대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일본의 패망에 대한 아시아인들의 슬픔의 압도는 일말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의 다른 참가국들의 목표와 관점 이해에 실패한 것은 정신적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일본에 얽매인 국가들의 약한 협력의 상황을 만들었다. 바 마우는 일본인들이 "아시아인들의 아시아"의 목표에 맞게 행동했다면 일본은 매우 다른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을 거라고 주장한다. 그는 만약 일본이 전쟁 시작 때 그 격언을 선언하고 그대로 그에 맞게 행동했다면 이렇게 되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 어떤 군사적 패배도 일본에 대한 아시아 거의 대부분의 신뢰와 고마움을 빼앗지 못했을 것이며, 그것은 아시아가 그에게 스스로 다가가는, 전후 세계에서의 새롭고, 위대하며, 변치 않을 위치를 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1)계획된 영토 범위
대동아공영권의 범위를 나타내는 지도가 그려진 일본의 10센 우표. 1942년부터 1947년까지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동아시아와 태평양으로 확대되기 이전, 일본의 기획자들은 일본의 러시아(남사할린과 관동주), 독일(남양 군도), 중국(만주국)과의 이전 전쟁에서 얻은 정복지와 한국, 타이완, 최근에 얻은 중국의 일부, 점령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보유하는 것은 스스로의 운명이라고 여겼다.
(2)토지 분할 계획
대동아공영권의 지리적 차원에서의 상당히 자세한 기획은 1941년 12월 일본 육군성의 연구 기관에서 준비한 전시 문서에 상술되었다. "대동아공영권에서의 토지처분안"(大東亜共栄圏における土地処分案)으로 알려진 이 문서는 일본의 육군대신(이후 총리) 도조 히데키의 명령과 인가를 얻어 정리되었다. 문서는 일본이 점령한 중국 지역에서 이미 설립된 만주국, 몽강연합자치정부, 왕징웨이 정권이 계속 기능하는 것을 인정했다. 또한 당시 일본의 영향권 밖의 동아시아의 거의 전체, 태평양, 심지어 남아메리카와 카리브 제도 동부만큼 일본에서 먼 서반구의 상당 지역에 해당하는 넓은 범위의 지역을 정복하는 것을 구상했다.
대동아공영권의 계획된 범위에 대한 야망은 지극히 높았으나, "대동아전쟁" 동안의 일본의 목표는 계획대로의 영역을 단번에 전부 얻는 것이 아니라, 20년 후쯤 다가올 필리핀을 잃은 미국 등의 패배한 유럽 열강들의 아시아 식민지를 정복하는 것을 통한 결전을 준비하는 것이었다.[20] 도조가 귀족원에서 계획을 밝혔을 때, 그는 장기적인 전망은 모호하지만, 홍콩 같은 중요 지역에의 일본의 통치를 유지할 것이면서도 필리핀과 미얀마는 독립을 허락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이 독일 제국으로부터 얻어 Class C 위임통치를 맡은 마리아나 제도, 캐롤라인 제도, 마셜 제도 등의 적도 이북의 제도들 등은 이 계획에 맞지 않았다. 그것들은 독일과의 이전 협상에서의 의제였고, 경제적, 금전적 보상을 통해 공식적으로 일본에 할양될 예정이었다.
계획은 일본의 미래 제국을 크게 둘로 나누었다. 첫 번째 지역들은 일본의 일부가 되거나 직접적 통치하에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두 번째는 대동아의 동맹의 "공식적" 회원국으로 지명될, 만주국을 모델로 한 친일 괴뢰국들에 의해 강력히 통제될 지역들이었다.
계획의 일부는 나치 독일과의 성공적 협상과 추축국의 전 세계적인 승리에 달려 있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한 이후인 1941년 12월 11일, 일본은 군사적 협상에서 독일인들에게 동경 70도선으로 아시아 대륙의 한계를 정하는 안을 제출했다. 수직의 이 선은 북쪽으로는 오비 강의 북극 강어귀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의 호스트 주 동부와 인도의 라지코트 서부의 인도양에 이르며, 독일의 레벤스라움과 이탈리아의 스파치오 비탈레(필수권) 지역을 서쪽에 두고,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등의 지역을 동쪽에 둘 것이었다. 하지만 추축국은 지구 반대편에서 동반구와 서반구를 나눌 제2의 경계선에 대해 협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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