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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한국전쟁 왜곡 심각...마오쩌둥 전쟁 지지와 북한 남침 사실에 침묵"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중국의 한국전쟁 왜곡 심각...마오쩌둥 전쟁 지지와 북한 남침 사실에 침묵"

CIA bear 허관(許灌) 2020. 10. 28. 05:45

지난 2910년 5월 한국 서울에서 열린 한군전쟁 관련 전시에 전쟁을 일으킨 인물들로 북한 김일성(왼쪽부터)과 중국 마오쩌둥,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다.

최근 시진핑 국가주석 등 중국 지도부가 대대적으로 한국전쟁을 미제의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승리로 주장하는 데 대해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지원으로 북한 정권이 일으킨 것으로 이미 입증됐고, 미군 참전도 유엔 결의에 따라 합법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중국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지적입니다. 

모건 오테이거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23일 인터넷 사회관계망 서비스인 ‘트위터’에 중국 지도부의 한국전쟁 왜곡 주장을 공개적으로 반박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70년 전 한국전쟁이 단순히 발발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1950년 6월 25일에 마오쩌둥의 지지를 받은 북한이 남침했다”는 겁니다.

이어 “자유 국가들이 이에 맞서 싸우자 중국 공산당은 압록강을 건너 수십만 명의 병력을 보내 한반도의 참화를 불러왔다”고 밝혔습니다.

오테이거스 대변인의 발언은 최근 시진핑 국가주석과 중국 공산당이 한국전쟁을 미 침략에 맞서 북한을 돕고 평화를 지킨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며 중국인들에게 애국주의를 대대적으로 강조하는 가운데 나왔습니다.

시 주석은 23일 ‘항미원조(미국의 침략에 맞서 조선을 지원함) 출국작전 70주년’ 행사 연설에서 미국에 맞서 “제국주의 침략 확장을 억제”하고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지켰다”고 주장했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23일 베이징에서 열린 한국전 참전 70주년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중국 지도부는 각종 뉴스는 물론 거금을 투입한 영화와 장편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항미원조의 정당성과 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중국 외교부는 홈페이지에서 미국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병력을 바로 파견해 북한을 침공했고, 파병 결의안 채택을 위해 유엔 안보리를 선동하고 조작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중국 외교부] “After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the United States immediately dispatched its troops to invade Korea. It instigated and manipulated the Security Council of the United Nations to adopt a resolution on dispatching.”

그러나 한국전쟁에 대한 이런 중국 지도부의 주장은 유엔 등 국제사회의 역사적 평가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소련과 중국 지도자의 지원 속에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했다는 것은 이미 유엔과 기밀해제된 수많은 옛 소련 정부 자료들을 통해 광범위하게 입증됐기 때문입니다.

옛 소련과 중국의 한국전쟁 관련 자료를 대거 수집해 증거 자료집을 냈던 캐스린 웨더스비 아메리칸대 교수는 과거 서울에서 연 강연에서 마오쩌둥이 북한의 남침을 지지한 것은 옛 공식 자료들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웨더스비 교수] “So the middle of May Kim Il-sung went to Beijing, as required by Stalin met with Mao. Mao agreed to the plan, explaining that he understood the Soviets couldn't send forces to Korea but the Chinese could do so.”

김일성 북한 주석이 1950년 5월 중순(15일)에 스탈린의 요구로 베이징에 가서 마오쩌둥을 만나 남침 계획에 대해 동의를 받았고, 마오쩌둥은 추후 병력 지원까지 약속했다는 겁니다.

아울러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 과거 김영삼 한국 대통령에게 제공한 300여 종에 달하는 문서에도 마오쩌둥이 스탈린과 함께 남침을 지지한 사실이 자세히 담겨있습니다. 

미 국가기록원은 미국이 앞서 방어경계선 밖에 설정했던 한국을 지원해 전쟁에 개입한 이유는 소련과 중국이 공산주의 영역을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하려는 의도에 대한 트루먼 대통령의 우려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미 국가기록원] “The invasion of South Korea made Truman genuinely fearful that the Soviet Union and China intended to expand the sphere of communism throughout Asia. 

유엔이 한국전쟁 직후 채택한 파병안 등 3개 결의안 역시 미국의 조작이 아닌 적법한 표결 과정을 거쳐 승인됐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한국전쟁 전문가인 한국군사문제연구원의 허남성 석좌연구위원입니다. 

[녹취: 허남성 위원, ‘6·25 전쟁의 개관’ 동영상 중] "“북한이 1950년 6월 25일에 기습 남침을 하자 그 직후부터 유엔 안보리는 아주 중요한 3개의 결의안을 잇달아 채택합니다. S1501호 결의안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38선 이북으로 즉각 철수하라는 요구안입니다. 이틀 후 27일에 S1511호 결의안을 채택했는데, 유엔 회원국들로 하여금 침략당한 대한민국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라는 권고안이 채택됐습니다. 7월 7일에는 S1588호가 채택됐는데, 유엔군사령부를 창설하는 결의안이었습니다.”

김계동 한국 건국대 초빙교수는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통상적으로 특정 국가가 다른 국가의 분쟁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국제법적으로 사전에 승인을 받아야 한다며, 서방국가들의 한국전쟁 개입은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른 참전이기 때문에 국제법적 하자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중국은 이런 국제법적 절차 없이 한반도에 군대를 보내 참전했기 때문에 불법적인 개입이 된다”는 설명입니다. 

한국의 강경화 외교장관과 서욱 국방장관도 26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시 주석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을 미 제국주의 침략으로 규정한 것은 역사 왜곡이란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녹취: 서욱 장관] “명백한 남침이고 스탈린과 모택동의 사주를 받아 남침한 것으로. (의원 질문: 시진핑은 70년 전 항미원조의 승리는 정의의 승리이고 평화의 승리이며 인민의 승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지 않습니다.”

에이브러햄 덴마크 전 국방부 부차관보는 지난 2017년 미 의회 미-중 경제안보검토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중국 공산당이 한국전쟁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활용하는지 자세히 밝힌 바 있습니다. 

덴마크 전 부차관보는 중국은 일반적으로 한국전쟁을 계속 “전략적 승리”로 보고 있다며, 이는 중공군이 서방국에 대응해 처음으로 버티면서 어떤 전투에서는 승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중국에서는 한국전쟁(항미원조)을 공산당 지도하에서 강대국으로서의 중국의 재등장, 서방의 패권과 지배 시도에 항거하는 의지와 능력의 과시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덴마크 전 부차관보] “Thus, the Korean War is still seen in China as a demonstration of its reemergence as a great power under the Chinese Communist Party, and its will and ability to reject supposed Western attempts at hegemony and domination.”

덴마크 전 부차관보는 한국전쟁 중 중공군 전사자가 40만 명, 부상자가 48만 6천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지만, 중국 정부는 이런 정치적 의도 때문에 사상자 규모도 많이 축소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시진핑 주석은 이번 항미원조 70주년 연설에서 중국군 19만 7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김영권입니다.

 

김정은, 한국전쟁 중국인민군 참전 70주년에 앞서 전사자묘 방문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과 싸우기 위해 파견한 '인민의용군'이 참전한지 오는 25일로 70년이 됩니다.
이를 앞두고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이 북한 서부에 있는 중국인민군 전사자묘를 방문했다고 22일자 북한 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이 보도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중국의 병사들은 제국주의의 침략자를 격퇴하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으며, 우리는 그들의 희생정신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중국인 전사자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북한으로서는 중국과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경제제재와 더불어 코로나19 감염대책에 의한 국경봉쇄와 태풍으로 인한 수해로 경제가 타격을 받은 가운데, 최대의 지원국인 중국의 경제적 지원에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중국 베이징에서도 23일 시진핑 국가주석이 참석해 한국전쟁 참전 70주년 기념식이 열릴 예정으로,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에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역사를 강조해 국위를 선양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 한국전쟁 70주년 '미국 대치' 강조

중국은 이달로 한국전쟁 참전 70주년이 되는 데 맞춰, 베이징의 박물관에서 특별전을 열었습니다.

특별전을 찾은 시진핑 국가주석은 당시 미국 측과 싸운 점을 강조해, 미중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민의 애국심을 고무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과 싸우기 위해 대규모 '인민의용군'을 파견한 지 이달로 70년이 됩니다.

이에 맞춰 중국은 베이징에 있는 군사박물관에서 한국전쟁을 회고하는 특별전를 개최해, 첫날인 19일에는 시진핑 국가주석 등 최고지도부 전원이 관람했습니다.

국영 중국중앙텔레비전에 따르면 시 주석은 "중국은 북한 인민군과 함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싸워 승리했으며 이 정신은 중요한 재산으로 중국 인민을 고무시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중국으로서는 미국 측과 싸운 것을 강조함으로써 국민의 애국심을 고조시키고 북한과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진핑 등 지도부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출국 작전 70주년展 관람

19일 당과 국가 지도부 시진핑(習近平), 리커창(李克強), 리잔수(栗戰書), 왕양(汪洋), 왕후닝(王滬寧), 자오러지(趙樂際), 한정(韓正), 왕치산(王岐山) 등이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에서 열린 ‘위대한 승리 되새김, 평화정의 수호-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抗美援朝) 출국 작전 70주년 테마전’를 관람했다

시진핑, 한국전 참전 기념식서 미국 맹비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3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출국 작전 70주년 기념대회’에서 연설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전쟁을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전쟁이라고 평가하며 미국을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시 주석은 오늘(23일) 오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출국 작전 70주년 기념대회’ 연설에서 “1950년 6월 25일 북한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며 “미국 정부는 한국 내전에 무력간섭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시 주석은 이어 중국은 “북한의 요청에 응해 항미원조를 하기로 결정했다”며 중국과 북한은 생사를 같이하며 우의를 맺었고, 힘겨운 전투를 통해 미군에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고 주장했습니다.

현재 미-중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시 주석은 미국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갔습니다.

시 주석은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일방주의, 보호주의, 극단적 이기주의가 통하지 않는다”며 “어떤 협박이나 봉쇄, 극단적 압박, 독선적이고 패권적 횡포도 결코 통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시 주석은 또 미국이 타이완과 군사적 협력을 강화하는 상황을 겨냥해 “중국은 조국의 영토를 침범하고 분열하는 그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엄중한 상황이 발생하면 이에 응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VOA 뉴스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이다

1943 년  10 월  5 일 야전 훈련 후 촬영한 제 88독립저격여단( 국제여단, 각 민족 빨치산 부대) 대원 사진 .  제 1 열 좌로부터 : 바탈린 ( N. S. Batalin,  巴达林 ,  소련 ),  정치 부여단장 이조린 ( 李兆麟 ,  일명  張壽籛 [ 张寿篯 ],  중국 ),  왕일지 ( 王一知 ,  주보중 부인 ),  여단장 주보중 ( 周保中 ,  중국 ),  김일성 ( 金日成 ,  제 1 영장 ,  조선 ),  부여단장 시린스키 (Timofei Nikitovich Shirinsky,  什林斯基 , 1904~?) 。 제 2 열 : 장광적 ( 张光迪 ,  중국 ),  풍중운 ( 冯仲云 ,  중국 ),  왕효명 ( 王效明 ,  중국 ),  왕명귀 ( 王明贵 ,  중국 ),  팽시로 ( 彭施鲁 ,  중국 ) 。 제 3 열 : 양청해 ( 杨清海 ,  중국 ),  서철 ( 徐哲 ,  조선 ),  강신태 ( 姜信泰 ,  강건 ,  조선 ),  김광협 ( 金光侠 ,  조선 ),  수장청 ( 隋长青 ,  중국 ) 。 제 4 열  :  안길 ( 安吉 ,  조선 ),  박덕산 ( 朴德山 ,  조선 ),  최용진 ( 崔勇进 ,  조선 ),  도우봉 ( 陶雨峰 ,  중국 ),  김경석 ( 金京石 ,  조선 )[사진: 소련 제88국제여단 소속원 - 중국 길림성 도서관]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 내부 제 88독립저격여단)이다

만주파(滿洲派)란 북한에서 김일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유격대 활동을 한 인물들을 가리킨다. 김일성이 지휘했던 부대인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 6사에서 활동하지 않은 동북항일연군의 요인들 중에서도 최용건 등 같이 만주파에 포함된 인물들이 있다(김일성과 함께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 출신자들로 이루어진 세력. 주요 인물로 김일성, 김책, 최용건, 최현, 김일 등이 있다)

이 만주파는 해방이후 갑산계 소련계 남로당계 등을 정권투쟁에서 몰아내고 북한의 정치·군사 분야를 이끌어가는 핵심세력이 되었으며 북한의 현대사는 김일성과 만주파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8월 종파사건 이전까지 김일성은 북한과 조선로동당의 전체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고 만주파의 영수에 불과했다.

 

1.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1936년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만주에서 만들어진 항일 빨치산 조직(소련군의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성격)으로 지금까지 만주에서 활동하던 공산당계의 조선인, 중국인 빨치산 부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문호를 넓혀 우파 항일 무장단체를 받아 들여 1936년부터 개편되어 갔다.

주보중이나 김일성 등 중국인과 조선인의 유명한 파르티잔(Partizan, 빨치산) 소속으로 나중에 소련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조직으로 개편하여 그 구성원 중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한 권력의 중추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동북항일연군을 만주파로 지칭하고 있다)

 

(1)성립

1930년대 초반에서 만주국(満州国, 1932 3 1일 건국일)에서 중국 공산당 지도하에 조선인, 중국인의 항일 빨치산 부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편성되어 있었지만, 조선인 대원 400명 이상이 친일 스파이로 의심 받고 숙청된 민생단 사건(民生団事件) 등으로 탈출도 잇따라 조직이 효과적으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한편,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통일 인민전선(統一人民戦線)의 결성을 호소되면서 중국 공산당도 8월 테제를 발표하고 제2차 국공합작(2次国共合作)을 호소했다. 이에 따라 만주에서도 항일 반만(抗日反満)” 구호로 내세우면서, 국민당 계열의 독립 무장단체를 포함한 모든 단체와 합작하여 흡수를 목표로 정책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 이미 1934년경부터 국민당계열의 마적(馬賊, 말 타고 다니는 소수 무장단원의 군벌)이나 의용군(義勇軍)도 공산당의 지도하에 정리하려고 시도했던 것이지만, 토착 무장단체는 주로 부농(富農), 부호(富豪)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해 공산주의 색깔(노동자 계급 령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을 싫어하여 국가자본주의(국가사회주의) 일만측(日満側, 일본과 만주국)에 돌아는 경우가 많았다. 최대한 공산주의 색깔을 엷게 하여(통일전선 구축) 존속하고 있는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소규모 마적과 독립 무장단체를 흡수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재편되어 갔다.

 

그러나 통화성(通化省)을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계열의 최대의 항일 무장단체 왕봉각(王鳳閣)

의 반만항일군(大刀会, 대도회)과 만주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조선인 민족주의자 무장단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우파는 공투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집단의 참여를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큰 세력이 될 수 없었다.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제1. 2군이 남만주, 4. 5. 7. 8. 10군이 동만주, 3. 6. 9. 11군이 북만주로 확장했다

1936년 우선 남만주군(南満)이 제1로군(第一路軍)이 되고, 이것이 두고 두고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주력부대인 것으로 계속되어 나가게 되었다. 남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거주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간도는 민생단 사건이 꼬리를 이어 내분이 계속되고 좀처럼 재편은 부진했지만 1937년에는 동만주군 제2로군(東満軍 第二路軍)이 되었고, 1939년 북만주군 제3로군(北満軍 第三路軍) 것으로, 일단의 재편을 하게 되었다[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제1군으로부터 제11군까지 존재했으며, 1, 2군이 남만주에서, 4, 5, 7, 8, 10군이 동만주, 3, 6, 9, 11군이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다. 후에 남만주의 군은 제1로군으로 동만주의 군은 제2로군으로 북만주의 군은 제3로군으로 재편성되었다]

 

(2) 편성

편성 당시의 제1로군(1路軍)의 인원은 중국 공산당측 자료 "中共延辺党組織活動年代記(중공연초당조직활동연대기)“ ”동북항일연군투쟁사(東北抗日聯軍闘争史)“  6,000여명 추측되고 일본측의 만주공산 비적의 연구(満州共産匪研究)“에 따르면 1,630명 정도에서 상당한 차이가있다.

 

또한 동북항일연군 아래의 인물은 사사키 하루타카(木春隆) "한국전쟁 이전의 한국 독립운동 연구와 강재언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에 따라했다.

서대숙 "김일성 사상과 정치 체제가 자세 하지만, 동북인민혁명군 시대(東北人民革命軍時代)에 전사 한 인물이 실리는 등 착오가 보여 자료로 피했다.

해방 이후 최현(崔賢), 김일성(金日成), 최용건(崔庸健), 김책(金策), 강건(姜健), 최용진(崔勇進). 김일(金一), 이영호(李永鎬)은 살아남아 나중에 북한의 요직을 차지한다[동북항일연군을 만주파로 지칭하고 있으며 제88독립저격여단을 소련군으로 지칭하고 있다]

 

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第一路軍 総司令-楊靖宇]

부총사령 왕덕태 [副総司令-王徳泰]

정치위원 위증민[政治委員魏拯民]

 

 1로군 군단장 양정우[ 第一軍 軍長-楊靖宇]

1사단 사단장 정빈[第一師 師長-程斌]

· 3여단 정치부 주임 이질수[3 政治部主任-李鉄秀]

4여단 단장 수상태 [4 団長-隋祥太]

6여단 단장 유인봉[6 団長-劉仁鳳]

2사단 사단장 조국안[第二師 師長-曹国安]

8여단[8]

3사단 사단장 왕인재[第三師 師長-王仁斎]

5여단[5]

7여단[7]

 

2로군 군단장 왕덕태[第二軍 軍長-王徳泰]

정치주임 오성륜(),이청()[政治主任-呉成崙. 季青]

4사단 사단장 안봉학[第四師 師長-安鳳学]

1여단 단장 최현[1 団長-崔賢]

2여단[2]

3여단[3]

5사단 사단장 진한장[第五師 師長-陳翰章]

4여단[4]

5여단[5]

6여단[6]

6사단 사단장 김일성[第六師 師長-金日成]

7여단 단장 김주현[7 団長-金周賢]

8여단 정치위원 박덕산(김일)[8 政治委員朴徳山金一]

9여단[9]

10여단[10]

 

독립여단 여단장 방진성[独立旅 旅長-方振声]

1여단 단장 최춘국[1 団長-崔春国]

2여단[2]

 

교도여단[教導団]

 

2로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주보중[第二路軍 総司令兼政治委員-周保中]

  참모장 최용건(최석천)[参謀長-崔庸健崔石泉]

4군 군단장 이연평[第四軍 軍長-李延平]

부군단당 왕광우[副軍長-王光宇]

1사단 사단장 관서범[第一師 師長-関書範]

1여단[1]

2여단[2]

3여단[3]

2사단[第二師]

2사단 정치위원 도정비[第二師 政治委員-陶浄非]

4사단 정치위원 김광협[4 政治委員-金光侠]

5여단 정치위원 박동화[5 政治委員-朴東和]

6여단[6]

3사단 사단장 이문빈[第三師 師長-李文彬]

8여단[8]

9여단 정치위원 강신태(강건)[9 政治委員姜信泰姜健]

 

7군 군단장 이학복[第七軍 軍長-李学福]

군단장 대리 최석천(최용건), 경낙정[軍長代理-崔石泉,景楽亭]

정치주임 정로암, 포림(政治部主任-鄭魯岩,鮑林)

1사단 사단장 왕여기[第一師 師長-王汝起]

  정치부 주임 팽시노[政治部主任-彭施魯]

1여단 여단장 최용진[第一団団長-崔勇進]

2사단 사단장 유기창[第二師 師長-鄒其昌]

7여단 정치위원 이영호[第七団政治委員-李永鎬]

3사단 사단장 경낙정,운학영, 수장청[第三師 師長-景楽亭,雲鶴英隋長青

 

8군 군단장 사문동[第八軍 軍長-謝文東]

10군 군단장 왕악신[第十軍 軍長-汪雅臣]

구국군[救国軍]

의용군[義勇軍]

 

3로군 총사령관 장수전(이조린)[第三路軍 総司令-張寿籛李兆麟]

참모장 허형식[参謀長-許亨植]

정치위원 빙중운, 김책[政治委員-馮仲雲, 金策]

3군 군단장 허형식[第三軍 軍長-許亨植]

6군 군단장 장수전[第六軍 軍長張寿籛]

7군 군단장 이화당[第九軍 軍長李華堂]

11군 군단장 기치중[第十一軍 軍長祁致中]

정치부 주임 김정국[政治部主任金正国]

 

1932년 3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만주국 지도] 

(3)활동 상황

ㄱ.1일로군 제1(一路軍第一軍)의 서쪽정벌

1936년 남만주에서 제1일로군(第一路軍)이 성립한 당시 중국 공산당은 소위 장정(長征) 한창이었지만, "항일동정(抗日東征)“ 깃발을 들고 산서성(山西省)에서 하북성(河北省)에 진출하여 동쪽으로 향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1일로군 1(第一路軍第一軍)의 첫 번째 활동은 이에 잇따라 움직을 하여 서쪽을 정벌하는 것이었다.

 

1차 서쪽 정벌은 제1사단(第一師)에 의해 이루어졌다. 1936 6월 하순, 번시(本渓,본계-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동부의 중공업도시)와 안동성 봉성현(安東省鳳城県)의 경계에 있는 화상 모자산(和尚帽子山)을 출발하여 요양(遼陽)에서 남만주 철도와 요하(遼河)를 넘어 요서(遼西)에서 열하(熱河)로 나아 가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 요녕성 수암현(岫岩縣)의 산악 지대에서 만주국군(満州国軍)에 포위되어 뚫고 탈출했지만, 다수의 도망자, 전사자를 내고 돌아갔다.

 

2차의 서쪽정벌은 제3사단(第三師)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전원이 기마대(騎馬隊)가 되어 결행(決行) 하게 되었고, 1936 11월 하순 싱징현(흥경현,興京県) 경계에서 기마로 출발하여 만주국군(満州国軍)의 추격을 받으면서 청원(清原)에서 철령(鉄嶺)을 넘어 요하(遼河)유역에 도달 하였다

그러나 따뜻한 겨울을 위한 요하(遼河)가 결빙(氷結, 물 따위가 얼어붙음) 되지 않고, 한달의 행군으로 피폐 결국 되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 기간 동안 400명의 대원이 백 수십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3사단(第三師)의 대원 수가 400명이었다고 한다면, 6개사단(6個師) 모든 동일 숫자라고 하는 단순 계산으로 제1일로군 전체(第一路軍全体) 2400명 정도가 6000여명으로 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과대 포장되었다고 알 수 있다

 

이듬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1로군 제1(一路軍第一軍)은 서쪽 정벌에 실패하면서도 또한 팔로군(八路軍)과의 연계를 지향 일본군의 후방을 위협하는 목적으로 제3사단(第三師)의 생존을 중심으로 청원(清原), 서풍(西豊), 개원(開原) 일대로 활동을 계속하였고 별동대가 심양(瀋陽), 무순(撫順) 일대에 진출하는 등 소모(消耗)를 거듭했다.

 

ㄴ.김일성 부대에 의한 보천보 습격

한편, 1936년 제1로군의 제2(第一路軍 第二軍)은 장백지구(長白地区)에 근거지를 만들려고했다. 4사단 사단장(第四師 師長) 안봉학(安鳳学)체포되어 투항하였고 제2군 군단장(第二軍軍長) 왕덕태(王徳泰)이가 만주국군에 포위되어 전사하는 등 상당한 희생하면서 우선 김일성이가 사단장을 맡고 있는 제6사단(第六師)의 근거지 개척에 성공하여 1937년에는 제1로군(一路軍)의 제1군 제2사단(第一軍第二師)과 제2군 제4사단(第二軍 第四師)이 장백(長白)에 근거지를 옮기고 있었다.

 

원래 1932년에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을 시작한 것은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반석현위원회(中国共産党満州省委磐石県委)이었지만, 그 당시부터 고참 조선인 멤버에 오성륜(呉成崙) [全光, 전광]], 이상준(李相俊)[이동광(李東光)]이가 있었다.

오성륜(呉成崙) 2(第二軍)의 정치주임이었고 이상준(李相俊)도 제2군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보여지지만, 그들은 민생단 사건(民生団事件)의 반성에 따라 정치 위원 위증민(魏拯民)의 지지를 얻고 조선인의 민족의식에 호소하기 위하여 재만주지역 조선인 조국광복회(祖国光復会)를 조직하는 방침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장백(長白) 침공은 이에 따른 것으로 제6사단(第六師)의 지지기반 구축 공작을 시작하고 그 일환으로 압록강 유역의 조선반도 내부 함경남도 (현재 양강도) 갑산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박금철(朴金喆), 박달(朴達) 등 공산주의 단체 (후에 조선 노동당 갑산파)와 연락을 하게 되었다.

 

1937 6월 제6사단(第六師)은 압록강을 건너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甲山郡普天面保田里)[보천보(普天堡)]의 습격(보천보 전투)에 성공했지만, 이것은 갑산그룹 안내와 참가해서 성공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은 조선뿐만 아니라 조선반도를 단속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일본측에서도 공비[共産党匪賊(공산당 비적)]으로 거물시 되는 것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이 권력을 독점 하는데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고도 한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이 전년(前年) 6사단(第六師)의 장백(長白, 백두산) 근거지 만들기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수 십명 규모의 소대 김일성 부대를 자칭 무송(撫松)과 장백(長白)에 출몰하여 약탈을 반복 만주군 수비대와 충돌을 거듭하고 있었다. 또한이 해()에 들어서는 갑산 그룹의 활동도 활발해 지고 조선인 부호(朝鮮人富豪)에서 금품을 갈취 등의 사건도 있었다. 또한, 최현를 단장으로하는 제4사단 제1여단(第四師第一団)이 두만강을 넘어 함경북도 무산(茂山)에 진입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미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을 전년(前年) 조선반도의 신문은 김일성 부대의 동향을 전했다. 1936 9 11일자 매일신보는 "혜산 건너 편에 출몰하는 적단(賊団, 도적 단체) 150 - 160명으로, 3분의 1이 만주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이고 ... 관헌과 같은 복장으로 소련식 중국식의 소권총, 강한 기병2(軽機二丁), 대포1(大砲一門)을 가지고 있었다

동북항일연군계(東北抗日聯軍系)에서 장백현(長白県) 방면에 파견된 이 부대의 수령(首領) 김일성이라고 한다. 이들은 15-20 명씩 소대 약탈반을 꾸어 조선인 부락에서 식량을 약탈하였다"와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고 정보를 싣고 있다. 참고로 뒤를이었다 경성일보 기사에서는 "비수(匪首, 도덕의 두목) 김일성 일당이 있고, 6사단(第六師) '김일성 부대'를 자칭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1937 5, 최현 부대(崔賢部隊)가 무산(茂山)에서 남하(南下) 하여 혜산 경찰서 관내(恵山署関内),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태리 상흥경수(上興慶水) 부락 고뢰조재목작업소(高瀬組材木作業所,)을 습격했다

금품 많은 것을 약탈 한 후, 주 임무인 일본인 1, 조선인 5, 중국인 30명을 납치해 강유역으로 도망친 후 몸값을 요구했다.

그에 이은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이다. 보천보 300호 남짓의 마을에서 일본인 26, 중국인 2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인이다. 그래서 무차별 적으로 금품을 강탈하고 동사무소 나 소방 회관, 우체국, 초등학교 등에 방화하고 도망한 것은 충격을 받은 단속측 조선총독부는 김일성과 최현에 거액의 상금을 걸고 수배하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크게 보도했다. 이 신문의 논조는 그들을 비적(匪賊)으로 비난하고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동정(同情)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이 시기의 조선에서는 관헌 (조선 총독부)에 의한 검열을 위해 항일운동을 긍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곤란이기도 했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중국 공산당과의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소련의 원조도 얻고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물자 보급을 위해 종종 일본인, 조선인, 현지인의 구별없이 금품강탈이나 몸값 목적의 유괴 등 폭력적인 약탈 행위도 했다. 또한 몸값 목적 외에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주민을 납치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불어 넣어 인원 충당하고 있었다. 물자와 인력의 공급 수단에 있어서는 비적(匪賊)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하는 연구자도 있다

 

보천보전투 양강도는 중국 장백산과 한국 백두산으로 접경을 두고 있으며 두만강, 압록강이 양국으로 접경하고 있다  

ㄷ.혜산사건과 제1로군(第一路軍)의 편성 기준

김일성부대의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에서 추격한 혜산경찰서의 경찰부대는 매복을 받아 32 명 중 7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상에 급히 함흥 보병 제74연대 김인욱(金仁旭) 소좌(소령)이 혜산 수비대장으로 임명 되었다.

이 혜산 수비대가 경찰부대와 협력하여 최현 부대와 합류하고 있는 김일성 부대를 급습하여 타격을 주었다. 이는 김일성 부대가 다시 국경을 넘어 조선에 침공하는 것은 없어졌지만, 갑산 그룹의 활동은 운흥면(雲興面) 금광을 습격하여 사금(砂金)을 강탈 하였다. 도적단이 김일성 부대를 자칭하는 삐라를 뿌리고 있던 것으로부터, 동조(同調) 갑산 그룹의 존재가 드러나고, 갑산측에서 162, 장백현에서 59명이 검거됐다. 혜산사건의 시작이다 .박금철도 이 때 검거 되었다.

혜산사건(恵山事件) 1차 검거의 자백도 이듬해 1938년에는 박달을 포함한 279명이 검거 돼 만주국 주재 조선인 조국광복회(在満韓人祖国光復会)와 거기에 기담한 갑산그룹이 괴멸했다.

한편, 1938년 초에 제1로군(第一路軍) 주력군은 주로 집안현(輯安県)의 삼림 지대에 있었다. 중국인 총사령관 양정우(楊靖宇)와 정치 위원 위증민(魏拯民)은 팔로군과 연락을 고집해 여러 번 서쪽 정벌을 계획했다.

그런데 그 중에 제1사단(第一師)의 사단장 정빈(程斌)과 그의 부대가 일만토벌부대(日満討伐部隊)에 투항했다. 일만측(日満側)은 투항자를 처형하지 않고 상금이나 직장을 보장하는 귀순 전략을 취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한 것이다. 따라서 서쪽 정벌은 중지(中止)가 다음과 같이 제1로군(第一路軍)의 편성 기준이 이루어졌다.

인원의 숫자는 강재언(姜在彦)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에 따른다.

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 정치위원 위증민, 군수처장 오성륜, 총서령부경위여 여장 방진성 (500 )[第一路軍 総司令楊靖宇 政治委員魏拯民 軍需処長呉成崙 総司令部警衛旅 旅長方振声 (500]

1방면군 지휘 조아범(250)[第一方面軍 指揮曹亜范 (250]

2방면군 지휘 김일성(350)[第二方面軍 指揮金日成 (350]

3방면군 지휘 진한장(300여명)[第三方面軍 指揮陳翰章 (300人余)]

이 중 제2방면군(第二方面軍), 3방면군(第三方面軍)은 기존 제2로군(第二路軍)의 활동 범위로 되어 있던 동만주의 화룡(和竜), 안도(安図), 연길(延吉), 왕청(汪清), 혼춘(琿春) 등 조선인이 많이 사는 지역 이 활동 구역으로 통합 되었다.

 

ㄹ.1로군(第一路軍)의 괴멸

중일전쟁이 발발했던 1937년 소련은 만주국, 조선과 접하는 국경을 경계하여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조선인) 모두 친일세력으로 간주하고,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렇게 한 것은스탈린의 대숙청에 처음부터 관계 당국 극동 내무 인민위원회(국가 정치부) 장관에 있었다

극동 내무 인민위원회(국가 정치부) 장관 겐리후 류시코후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몸이 위태로워 것을 헤아려 1938 6월 연해주에서 국경선을 넘어 만주국로 망명했다. 류시코후는 혼춘( 琿春)헌병대에 연행 된 후 도쿄의 참모 본부에 보내 망명 기자 회견을 열었다.

 

이 망명 사건에서만 아침의 국경은 극도로 긴장하여 소련군과 일본군 수비대가 충돌하는 장고봉사건이 일어난다.

 

또한 이듬해 1939년 노몬한 사건이 일어나 일단 휴전은 되었지만, 일본측의 경계가 높아져 관동군에 의해 만주 국내 항일세력에 대한 철저한 단속이 시작 되었다. 2 독립수비대 사령관 노조에(野副昌德) 소장에 만주국군(満州国軍) 7개여단, 경찰대 30개 대대가 배속되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대하여 대적 하게 되었다

 

노조에(野副昌德) 토벌대의 작전은 군, 경찰, 행정기관, 민간조직의 연락을 긴밀히하여 그물망을 잘게 치고 게릴라 활동을 봉쇄 민중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 일반 주민에게 토벌대와 게릴라 부대가 교대로 나타나는 상황에서 신변안전을 위해 쌍방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지만, 토벌대가 게릴라 부대를 몰아 약탈과 납치 위협을 완전히 봉쇄하여 치안을 유지한다면 게릴라 부대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적극적으로 토벌대에 협력하게 된다. 결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사람이 없는 삼림 지대에 몰려 식량과 의류의 확보도 곤란해 질 것이다

 

토벌대 중에서도 가장 유능하게 움직인 것은 정빈(程斌) 등 투항한 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 구성하고 있는 경찰부대였다. 그들의 활약으로 제1로군(第一路軍)은 점차 멀리 분산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940년 초에는 경위여장(警衛旅長) 방진성(方振声) 체포되어 처형, 투항들도 잇 따랐다. 그 투항자 때문에 총사령관 양정우의 동정(動静)이 알려져 단신 행동을 강요 될 때까지 되었다. 양정우는 몽강현(濛江縣)[현재는 양정우을 따서 정우현으로 개명 됨]에서 산 일에 들어간 주민과 접촉하여 통보돼 투항을 거부 사살 되었다. 토벌대는 최후의 절개에 흠모하여 불교행사를 영위하고 영혼을 달랬다.

 

양정우 사후, 1로군(第一路軍) 지도자로 추대된 위증민(魏拯民)은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주력 부대를 북상시키기 위해 제1방면군(第一方面軍)은 남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계속한다는 방침을 내놓았지만 그 직후 지휘관 조아범(曹亜范)이가 대원에 의하여 살해 되었고 제1방면군(第一方面軍)은 내분에 의해 해체 되었다.

 

그런 중에도 김일성이가 이끄는 제2 방면군(第二方面軍) 100 ~ 300명 정도의 집단 활동을 유지하고 습격, 약탈, 납치를 성공시키고 있었다. 1940 3월에는 안도현(安図県) 대마록구(大馬鹿溝) 산림 경찰대(森林警察隊)를 습격하여 사상자 각 2명의 피해를 주고 금품 2 3천엔을 약탈하고 대충 약 140명을 납치했다. 이틀 뒤 피랍자 중 25(일본인 1, 조선족 13, 만주족 9, 백계 러시아인 2)을 석방. 나머지 납치 인질 70여명과 함께 도망을 계속했기 때문에 만주 경찰과 마에다군단(前田隊)의 쫓는 곳이 되었지만, 2 방면군(第二方面軍)의 매복으로 마에다대(前田隊) 140명 중 일본측 문서 전사자 수 58, 전상자 27, 실종자 9명이라는 엄청난 타격을 주고 건재함 인상을 남겼다.

 

이 가을에서 노조에(野副昌德) 토벌대의 활동은 다시 활발해지면서 제2 방면군을 주요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김일성 부대도 소수 부대에 분산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의식(衣食)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제1로군 중추의 위증민도 연락이 취하지 못하고 김일성을 포함한 수십명은 8월에서 10월경에 자신의 판단으로 소련령으로 도망쳤다. 소련 측과의 연락도 없이 갑자기 입소였기 때문에 김일성은 억류 돼 한때 투옥 되었다.

 

3 방면군(第三方面軍) 1939년 제2로군 제5(第二路軍第五軍)과 대규모 공동 작전에서 한때 안도현 대사하진(安図県大沙河鎮)을 점령하는 등의 활약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 해 겨울부터 군 단위(軍単位)의 활동은 불가능하므로, 전사, 전상(戦傷), 도망, 투항자가 이어 괴멸 상태가 되었다. 1940년말 지휘관의 진한장은 추격에 의하여 전사한다.

그러나 활동을 계속 되어 김일성 부대 입소 이후 소수 인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소련에 입국했다. 13여단(十三団)을 이끌던 최현도 그 안에 포함돼 있다.

 

1로군 총사령부(第一路軍総司令部)도 괴멸 상태였지만, 1940 11월경에는 군의관 처장 서철(徐哲)도 경위대 살아남은 몇 명을 데려 입소했다. 만주에 남은 제1로군 수뇌부에 관해서는 1941 1월에 오성륜(呉成崙) 투항 귀순. 3월 질병에 시달리고 고립되어 있던 위증민이 토벌대에서 발견되어 전사 혹은 병몰 후 발견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제1로군의 만주에서의 활동은 거의 끝났다.

 1939 年秋,魏拯民(左二)與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指戰員在一起 。

                            

ㅁ.2로군(第二路軍), 3로군(第三路軍)과 소련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원래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재편 된 것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있었지만, 소련의 극동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대한 대응은 상황에 따라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1로군(第一路軍)의 활동 범위는 소련 국경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원래 지원을 받을 수도 적었지만 국경 근처의 동만주나 북만주에 있던 제2로군(第二路軍), 3로군(第三路軍) 밀접하게 소련과 염려 했다.

 

국경선이 긴장하고 있던 1938년 말에는 개편 이전의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제65(第六軍五師)가 일본군에 쫓겨 부대마다 월경했지만 사단장(師長)이 체포 될 뿐만 아니라 전원이 신장성(新疆省)으로 보내졌다.

 

2로군(第二路軍), 3로군(第三路軍)은 함께 대규모 내분을 안고 있었지만, 그 조정(調整)에 지도력을 발휘하고 양군 통해의 중심이 되어 있던 것은 제2로군(第二路軍) 총사령관 겸 정치 위원 주보중(周保中)이었다. 1940년의 1월 그가 중심이 되어 소련 극동당국과 1차 하바롭스크 회의를 받고 중국 공산당 중앙과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상황 소련 극동당 조직과 극동 방면 군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임시 지도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 합의가 성립했다.

 

1940 11월 주보중과 참모장 최용건은 사전에 소련측의 연락을 받고 부대마다 입소하고 살아 있던 제2로군(第二路軍) 다른 대원도 그 뒤를 이었다. 투옥되어 있던 김일성의 신원을 보증한 것은 주보 중이다.

 

3로군(第三路軍)은 총사령관 이조린(李兆麟) 등의 간부는 입소했지만, 소련에 불신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있고, 참모장의 허형식(許亨植)의 지휘 아래 부대의 절반이 북만주에 남아 싸움 계속했다

.허형식(許亨植) 1942년 경안현 청봉령(慶安県青峰嶺)에서 장렬한 전사를 이루었다. 일단 입소했던 정치 위원의 김책은 허형식(許亨植)의 의지를 이어 1943년 연말까지 입소를 거부하고, 봉산현(鳳山県)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1941년의 시점에서 제1로군에서 입소한 인원은 88명 정도 제2로군에서 110명 정도로,  200여명이 소련령에 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939년 김일성(앞줄 좌로부터 네번째)과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지휘부 전투지휘자들이 함께 촬영한 사진

[金日成前左四與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第二方面軍指揮部指戰員攝於1939金日成於1932年春到安圖創建游擊隊先後擔任汪清反日游擊大隊政委東北人民革命軍第二軍獨立師第三團政委第二軍第三團政委東北抗日聯軍第二軍第三師後改為第六師師長第一路軍第二方面軍指揮]

東北抗日聯軍第第一路軍女戰士 。 左三為金貞淑 。

          

                                       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警衛旅部分指戰員攝於1939年夏

 

(3)그 후

소련에 망명한 구성원은 제88 특별여단(교도 여단, 88독립저격여단)에 편입 되었다. 이 여단은 소련군에 흡수된 형태였지만, 소련 사람을 섞으면서 그 구성원이나 직책 등 주보중이 여단장되는 등 대체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조직 구조를 유지하고 있어 중국 공산당은 이 여단을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이라고도 호칭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대원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서 분리 된 소련군 정보국 직속되어 만주국에 침투해 공작에 종사했다. 위험한 임무에 종사한 그들이었지만, 숙청과 일본군의 스파이로 간주 형을 받은 사람도 있다.

 

또한 김일성은 스스로의 조선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에 편입 된 것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출판)"로 인정하지만 소련군과는 연계된 것만으로 제88 특별여단(교도 여단, 88독립저격여단)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고 소련군이 조선반도의 해방군이 되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조선인 대원은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38 도선 이북의 조선)에 돌려 보내 북한 인민위원회와 조선 공산당 (이후 조선 로동당) 및 조선 인민군의 요직에 올랐다.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후 동북항일연군 출신은 만주파 (파르티잔파, 빨치산파)라는 파벌이 되어 남로당파 (남조선 노동당 출신), 연안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중국에서 귀국 한 자, 조선의용군) 소련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소련에서 파견 된 자. 소련군 출신이나 행정,기술관료 출신), 갑산파(보천보 전투 등으로 동북항일연군과 공동 투쟁 한 자)을 잇따라 숙청하고 북한 권력을 독점했다. 조선 로동당에서 정적을 제거하고 구축한 만주파는 1967년에 당의 지도 이념으로 유일사상 체계를 채택하고 이후 북한은 주체 사상에 기초한 독자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걸어 가게 된다.

 

김일성은 만주국(만주지역 조선족 자치정부) 조선 공산당 활동가에서 소련군 예하 각 민족 빨치산부대로 그리고 2차대전 때는 소련측(좌파진영) 연합군 조선인(한국인) 부대로 활동했다

김일성은 민족주의자보다는 철저한 마스-레닌주의 노선 공산주의자이며 스탈린 추종세력이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스탈린을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후에 스탈린은 바트당(아랍 사회당)을 조직한 사담 후세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 북한의 주체사상 김일성, 리비아의 카다피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련 공산당 스탈린 일국 사회주의 이론이 독일 노동자당 히틀러 국가사회주의 이론 비슷한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국영 자본체제) 이론이다  소련 공산당은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과 소련 공산노동당 그룹이 있다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이 수정주의자(실용주의자)라면 공산노동당 그룹이 교조주의자들이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사회주의 공화국(사회주의 국가) 세력은 국가자본주의 일본제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수립할 때 민족해방과 왕권신수설 전체주의 군주, 지주계급이나 매판 자본가를 타도하고 노동자 계급 령도 노농연맹 인민민주주의 혁명 체제 사회주의 국가 승리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개인 우상화, 신격화로 1인 장기집권으로 왕권신수설에 도취되고 있다

 

2.제88독립 저격여단 

88독립 저격여단 (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 소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 극동지역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 1개이다

88독립 저격여단은 극동전선 정보과 직속 만주, 한반도에서 정찰 , 파괴 공작임무을 수행했다[소련군 특수부대 빨치산]

88독립 저격여단 원래 동북 항일연군(聯軍) 장병 핵심이 주로 중국인과 조선인에서 편성 되었다. 후일 북한 국가 주석 김일성  여단  1 대대장 맡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 공식 견해에서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 조직하여 동북 항일연군 본체 공투하면서도 다른  행동이었다고 하고 다음 88독립 저격여단  사실 무시되고 있다(부정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자주노선과 주체정부 노선으로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군 참여를 부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부대 동북 항일 연군 교도여단이라고 칭하고 있다.

 제88독립 저격여단 핵심 동북 항일연군(聯軍) 1939년경부터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만국)군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수 많은 전사자가 등장했고 내부적으로는 일본 당국 귀순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남은 자들 물자 부족으로 인해 활동 계속이 곤란해 졌다. 따라서 그들은 소련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12월 말 동북 항일연군(聯軍)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 영내에 들어갔다. 소련 영내에서는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의 활동 지원을 위해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과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두 곳에 분산 수용했다

남야영과 북야영은 각각 B 캠프와 A 캠프로도 불리는데, 보로쉴로프(Вороши́лов)와 아무르(Амур)강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

당초 100여명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후 200 ~ 300명으로 증가했다
독소전 발발 후 1941년 7월 중순, 소련 정부는 일본의 북진에 대비하여 이 야영지에 따라 제88 독립 저격 여단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여단은 하바로프스크시의 부쯔코에나 나아무레 (Вятское-на-Амуре)에 배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21일 극동 전선사령관 이오 시프 아빠나센코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0132호에 따라 여단의 편성 기간은 같은 해 7월 28일부터 9월 15일까지로 정해졌다.

부대 편성 동북 항일연 중국인 병력과 조선인 병력 외부 중국계 · 조선계,  소련인, 기타 소수 민족 (몽골족, 민주족등 )에서 열렸다. 여단 대원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조선인은 10% 불과했다. 그 후, 후속하여 소련 영내 들어간 부대도 합류해, 88독립저격여단 병력 수는 1,500 명을 넘어 섰다.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에서 온 많은 사람들 소련 군사 학교 촉성 지휘 과정 또는 관구 소위 과정 받은 적군 계급 수여했다 (여단장 주보중 중령, 김일성은 대위). 일반적으로 여단 지휘 관직에는 중국인이었고, 지휘 관직 붉은 군대(소련군) 장교 임명 되었다. 병사 적군 군복 착용했다.

 

1944  4  현재 편제.
여단 본부 - 여단장 : 주보 중령, 참모장 : V. 사마루첸코 소령
정치 과학 - 정치 위원 : V. 세레긴 소령
방첩 - 스 메르시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2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효명 대위
 3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명귀 대위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자동소총 대대
무선대대
독립 박격포 중대
독립 공병 중대
독립 대전차 소총 (PTR) 중대
독립 경제 중대
독립 기관총 소대
군사 통역 과정 특수 분대
 독립 저격 대대는 3 개 중대로 구성되어  중대는 3 개 소대에서 되었다.

 

장비 (1942  9  ~ 1943  7  현재) 소총 x4,312 테이, 자동 소총 x370 , 중기관총 x48 자루, 경기관총 x63 정,  화포 x21 문, 대전차 소총 x16 테이, 자동차 x23 .
 88 여단 병사 만주, 한반도 지역에서 정찰과  파괴 공작활동에 종사했다.  자세한 것은 불명이지만, 여단장 주보 1940  ~ 1943  사이  89 명의 감원 (손해)이 있었음 보고하고 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 2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9명
제 1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26명
미 귀환 - 24명
스 메르시에 인도 - 6명
환자를 위한 후송 - 15 명
사망 - 2명
여단 복귀 - 7명
1945년 7월 소련 대일 참전에 대비하여 여단에서 무전기를 장착 한 100명을 투입하는 전투 행동 계획이 수립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급속한 진격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 88 독립저격여단  1 독립 저격 대대  대대장 김일성이 한반도의 해방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가 되었고 소련군과 함께 방문했다.
1945년 8월 29일 제 2 극동 전선 사령관 막심 뿌루카에후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10 호 / n에 따라 "일본 침략자와 싸우는 전선에서 전투 지휘 임무의 모범적인 수행과 이 때 발휘 된 용기"에 김일성에게는 적기 훈장이 수여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88 독립저격 여단 장병 21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9 월 10 일에 더욱 58 명 추가).

  88여단(외국인군단, 대일연합군) 1945 10 12일자 극동군관구 사령관  042호에 의해 해산 되었다.

 

이 사진은 김일성이 토벌군에 쫓기다가 소련으로 도주했을 당시 오케얀스카야에서 좌로부터 김철호(최현의 부인), 리영숙(안영의 부인), 김정숙(김일성의 부인), 황순희(류경수의 부인 조선혁명박물관장)의 모습이다.

 

                                                           1941년 동북항일연군 전투지휘자들이  소련 남부 야영 훈련장에서 촬영한 사진

[在南野營整訓的部分東北抗日聯軍指戰員攝於1941

前右金日成

一排右李英淑第七軍戰士)、右三金貞淑第二軍戰士)、右四黃順姬第二軍戰士)、右五金哲鎬第二軍戰士)。

二排右沈鳳山第一路軍警衛旅一團團部警衛員

三排右一沈鳳山第一路軍警衛旅一團團部警衛員三排右一柴世榮右二季青。]

 

                                    제88 독립저격여단 시절 사진. 좌로부터 김일성(金日成), 계청(季青, 중국인), 최현(崔贤), 안길(安吉)

88독립 저격여단 소부대 활동시기 촬영한 사진[在小部隊活動時期的合影]

金日成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營長

季青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四營政治副營長

崔賢曾任東北抗日聯軍第二軍第一師後改為第四師第一團團長第一路軍第三方面軍第十三團團長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第一連連長

安吉曾任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第三方面軍第十四團政委第三方面軍參謀長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政治副營長

 

                                          동북항일연군 지도여단의 일부[東北抗日聯軍教導旅部分乾部]

일렬(一列)심태산(沈泰山)최명석(崔明錫)김경석(金京石)서철(徐哲)장광적(張光迪)

두렬(二列)바슈코비츠(瓦什科維茨,와십과유자)최춘국(崔春國)강신태(姜信泰)양청민(楊清海)도우봉(陶雨峰)주암봉(周岩峰)

삼렬(三列)장석창(張錫昌)유철석(劉鐵石)범덕림(范德林)고만유(高萬有)교수귀(喬樹貴)유안래(劉雁來)진덕산(陳德山) [19457月的合影(1945 7월 촬영)]

 

1947 5, 왕효명. 팽시로, 왕일지 등 동북항일연군 관계자는 조선인 출신 동북항일연군 인사를 조선인민군 총사령부에서 만났습니다

[19475王效明彭施魯王一知分另受有關部門委派先後赴朝鮮平壤圖為他們與原東北抗日聯軍的朝鮮戰友在朝鮮人民軍總司令部合影留念]

앞열(前排)김일(金一)주위(周偉)왕일지(王一知)왕효명(王效明)안길(安吉)팽시로(彭施魯)

가운데열(中排)이영호(李永鎬)최광(崔光)김광협(金光俠)심태산(沈泰山)최춘국(崔春國)유창권(柳昌權)이을설(李乙雪)

뒷열(後排)박우섭(樸禹燮)김려중(金麗重)최용진(崔勇進)강상호(姜尚鎬)유경주(柳京珠)오진우(吳振宇)김창봉(金昌鳳)오백룡(吳伯龍)전문섭(全文燮).

 

 

 

 

 

소련군을 환영하는 김두봉 북한 초대 국가수반과 북한지역 지도부들  

 

모스크바 거주 레베데프씨가 제공한 사진 내용물 중 소련군정과 북로당 간부들...


<지도자 김은 스티코프가 주도한 소련군 극동사령부 작품이었다 1946년 8월 30일 소련군정 지도부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을 합당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한 후 당 고위간부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쪽에는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뒷 줄 오른쪽에는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등>

소련공산당과 소련군이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6일부터 진주하여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그리고 1948년 10월 19일부터 철수하여 1948년 말까지 철군했다 

 

-한국전쟁 남침은 노동당 계열 내부 대남 강경파 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복조선분국 김일성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박헌영) 계열 주도로 추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 부대 또는 저격여단) 등 이다[빨치산부대를 소련에서는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공수부대로 표현하고 있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전선사령관 김책[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총참모장 강건[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조선의용대 중국 팔로군 출신]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을 임명했다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는 다음과 같다

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소련 육군 극동사령부]은 스탈린 부대(일국 사회주의노선, 자국사회주의 성향 사회주의(민주사회주의) 그룹]이며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은 모택동부대[신민주주의 노선, 인민민주주의 그룹],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은 레닌부대[공산주의 노선, 마스-레닌주의 공산당 그룹]이다

 

 

(1)스탈린의 한국 전쟁 개입

1949 3 5, 북한의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인민군이 남한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남한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 12월 남한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남한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1950 1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북한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남한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1 30, 스탈린은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4,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공(중국 공산당)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5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공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1950 6 25일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했다. 1949년 갑자기 남한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 것을 언급하며 혹시 모를 미국과 자본주의 진영의 함정이라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그러나 무려 48회에 달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끝까지 남침을 고집한 탓에 스탈린이 이를 허락했는데 그렇게 발발한 한국 전쟁은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스탈린은 공식적으로는 한국 전쟁 관여를 부인하였지만 포스트 냉전 시대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스탈린의 명시적 허가와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무려 48번이나 시도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시한 입장은 아니고 김일성이 남침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해서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 김일성이 남침을 끈질기게 고집했을 때 스탈린은 애초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제관으로 임명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김일성에게 한반도 북부의 통치를 책임지게 한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김일성이 파견되자마자 한반도 북부지역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이후였기 때문이였다.

 

한국 전쟁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던 그는 뇌질환과 중풍 증세로 손과 발을 쓰는 것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고 체력이 소모되었음을 알고는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의심과 망상증세가 한층 강화되었다. 모스크바와 소련의 대도시에는 오직 스탈린 자신만이 리모콘과 장비로 열 수 있는 건물이 건립되었는데, 그 건물들에는 같은 모양의 방이 여러 개가 있어 아무도 스탈린을 쉽게 찾기 어려운 구조였다. 또한 그는 비행기와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장거리 여행도 열차로 했다.

 

(2)모택동의 한국전쟁 개입에 대한 후회

1950년 한국전쟁 기간부터, 친소련파였던 김일성으로는 북한에 영향력을 미치기 어렵다고 본 마오쩌둥(모택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 김두봉, 김무정 김원봉등의 조선의용대(독립동맹-모택동의 신민주주의와 중국 공산당 계열)을 통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그러나 이들과의 교류는 김일성에 의해 차단된다.

그는 1948년에 이미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고려 공산당 계열) 박헌영을 통해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영향력 행사를 기도하였으나,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은 김일성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수반으로 낙점한다. 한국전쟁 기간 중 그는 김일성의 견제세력으로 박헌영과도 연결을 시도했는데, 박헌영을 김일성의 대안으로도 고려했다. 1953년부터 1955 8월 종파 사건으로 북한의 남노동당원들이 대규모 감금, 체포, 처형당했을 때 그는 북한 외무성을 통해 압력을 넣어 박헌영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김일성의 박헌영 처형 의지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전쟁 중 국군과 유엔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김일성은 북한 인민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중공군과의 상의도없이 멋대로 북한 인민군을 후퇴시켜 결국 중공군은 유엔군의 기습으로 막대한 인명피해와 보급 손실을 받았다. 마오쩌둥(모택동)은 그 소식을 듣고 분노하였다. 그후 북중 관계는 악화되었다. 1975년 김일성은 베트남 공산화와 남한 박정희 유신정부 혼란으로 남침을 할 수 있는 국내외 상황의 기회로 보고 마오쩌둥(모택동)에게 찾아가 다시 한국전쟁을 일으키려 했지만 마오쩌둥(모택동)은 거절하였다. 이유는 1972년 마오쩌둥은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고백을 했고 김일성은 매우 무례하고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망나니놈이라고했고 북한에 군대를 파병보내 김일성과 북한을 도운 것을 후회하였고 한국(남한)이 통일되게 나뒀어야 했다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남북통일이 군사력보다는 신민주주의(민주화) 입장에서 남북통일을 지지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은 남북통일을 개인 우상화와 자주노선 국가사회주의 성향 군사력에 치중함으로 남북 주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남한 제6공화국 수립이후 남한정부 주도 민주화 정책으로 남북통일을 주도하고 있으며 남북 주민들이 지지하고 있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인민의(民有,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그리고 쿠바 등 4 개국에 불과하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 3 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6069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3485

*베트남 헌법(2013년 개정)[민주공화국 형태 사회주의 헌법]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는 인민에 의한(民治), 인민을 위한(民享) 인민의(民有) 사회주의 법치국가이다-

http://blog.daum.net/007nis/15876070

*북한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3공화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476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

 한국전쟁 추진 세력  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김일성(인민군 총사령관), 최용건(방어총사령관), 김책(전선총사령관), 김일(인민군 문화부 사령관), 강건(인민군 총참모장) 모습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는 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과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이다
한국전쟁 이후 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이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 그룹과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 그룹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 그룹은 한국전쟁 패전 책임과 박헌영등 미국간첩으로 제거 되었고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 그룹은 종파주의자로 제거 되었다

아직도 북한 권력층은 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 후손들이 장악하고 있다

김일성은 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 주도 인물로 소련군 도움므로 권력을 장악했다

중국에서는 김일성을 만주 조선족자치정부[만국 조선족자치정부] 공산주의(사회주의) 세대로 평가하고 있으며 일본 좌파는 김일성을 김광서(일본육사 23기 기병과 출신)으로 평가해왔다

소련에서는 한족과 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등  혼성 용병부대 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 조선인 지휘관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일성주의 주체사상도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이론 도입으로 구소련이나 중국처럼 붕괴 되어가고 있다

 

1.8.15해방과 한국전쟁 당시 국제정세

(1)중국 국민혁명군 제8로군 깃발[소비에트 홍군에서 국민혁명군 팔로군으로 개편]

 

 

                                                       중국 국민혁명군 제8로군 깃발[소비에트 홍군에서 국민혁명군 팔로군으로 개편]

1937년 7월 27일 마오쩌둥(毛澤東), 장원톈(張聞天)이 중공중앙을 대표하여 국공합작에 따른 홍군개편 원칙을 발표하였다. 이는 항일전 기간 홍군이 ‘8로군’으로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홍군 통솔기구의 명칭에 대해서 양보할 수 있지만 홍군과 소비에트 지구에 대해서는 전권을 보유한다고 천명했다. 국공합작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이 홍군의 인사에 간여할 수 없다는 것이 이날 천명된 원칙의 요체였다.

다음 날인 28일에 8월 15일까지 홍군의 재편성을 마치고 같은 달 20일에 항일전에 출동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어 장제스(蔣介石)에게 전문을 보내 홍군을 국민혁명군으로 개명하여 장제스의 지휘 아래 항일전쟁에 동참시킬 뜻을 전달하였다.

공산당은 이 제안에서

①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실현

② 국민당정권의 전복을 위한 모든 폭동정책과 지주의 토지몰수 정책 취소

③ 소비에트정책과 홍군 명칭의 취소

④ 국민혁명군으로의 개편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명령 수용 등의 4개항을 제시하였다.

8월 장제스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장제스는 홍군을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지휘부를 인선하였다. 하지만 이 인선은 공산당이 결정한 것을 추인하는데 불과했다.

8로군 총사령관은 주더(朱德)이고 부사령관은 펑더화이(彭德懷)였다. 정치부를 설치하여 런비스(任弼時)를 주임에 덩샤오핑(鄧小平)을 부주임으로 하였다.

그 아래 3개 사단을 두었는데 115사 사단장에 린뱌오(林彪), 120사 사단장에 허룽(賀龍), 129사 사단장에 류보청(劉伯承)이 임명됐다.

8로군 개편 당시 총병력은 4만 5,000명이었다.

한편 주력군을 8로군으로 개편한 뒤 따로 1만 명의 병력으로 보안대를 창설하고 사령관에 가오강(高崗)을 임명했다.

8로군은 이후 국민혁명군 제 18 집단군으로 개칭됐으나 계속 8로군으로 불렸다. 화베이(華北) 일대에서 활동한 중공 계 정규군과 유격대의 총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항일전쟁 개전 직후 8로군은 맹렬한 전투와 유격전으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항일전쟁 종전 뒤에는 신사군(新四軍)등과 합쳐져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였다.

‘3대 기율 8항주의(三大規律 八項主義)’로 대표되는 인민에 봉사하는 엄격한 규율에 의해 민중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것이 중일전쟁 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는 최대요인이 되었다

 

                                                             1930년 말기와 1945년 8월까지 동북아 지도[동북3성과 내몽골 만주국]


 

 

 

                                                                                              1945년 8월 15일 이후 지도

팔로군(八路軍), 중국 국민혁명군 제8로군은 1937년 제2차 국공합작후에 중국 공산당 휘하 독립적 성향을 가진 부대로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설립되었고 신사군과 함께 화베이 지방에서 항일전의 최전선을 담당한 부대이다. 적극적인 항일전과 민심도모로 인해 중일 전쟁 기간에 중국 공산당에 큰 발전을 기여했다

ㄱ.개요

마오쩌둥은 군벌이나 열강에 대항하려면 민중에 의한 혁명 운동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편 중국 국민당에서는 1920년대 1차 국공 내전 당시 빈약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군대의 수나 그 재정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장개석은 군대를 이용해 상하이 쿠데타(중국어: 四·一二事件)를 부흥시켰고, 제1차 국공 합작을 붕괴시켰다. 중국 공산당은 이 씁쓸한 경험으로부터 독자적인 군대의 창설을 해야했다.

중국 공산당에 있어서 큰 기회로 바뀌었다. 마오쩌둥에 의한 인민전쟁 이론(「점화한 적군을, 인민의 바다안에 매장한다」―인해전술)에 따라, 공산당은 중국 각지에의 침투 공작을 적극적으로 행했다. 공산당에 협조적인 지역을 넓히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공산당 세력은 풀뿌리적으로 증식하였고 중일 전쟁이 끝난 1945년 980,000명 정도의 게릴라 군을 모으게 된다.

그러나 1937년에 중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후 8년동안 중국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다. 무기와 군사력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국민당 정부군은 전쟁발발 직후부터 일본에 밀리기 시작하여 충칭으로 임시수도를 옮기고 서부 산악지대를 근거로 지구전을 펼쳐야만 했다. 팔로군은 일본군에 제대로 반격 한번 해보지 못했다. 반면 일본은 동부해안지대에서 북경-서안-장사-계림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고 중국군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갔다. 중국 국민당의 국민 혁명군과 중국 공산당 휘하에 있던 팔로군은 전쟁기간동안 일본에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했다.

1945년 8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소련이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일본의 패전 후, 국공 내전이 재개하면서 팔로군은 더욱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만주의 할힌골 전투(러시아어: Бои на Халхин-Голе)에서 승리한 소련군은 관동군의 장비를 접수하였고 이것을 그대로 팔로군에게 주었다. 또 일본군의 군인이나 민간인을 팔로군에 가세하는 것으로 군사 기술이나 전문 기술을 얻을수 있었다. 공군이 없었던 팔로군은 일본군의 항공 부대의 장교를 회유하여 항공대원 양성하였고, 포병 전술, 전략 측이 미비하여 기본적으로 체계화 된 일본군의 포병 전략을 베이스로 하였다. 또한 팔로군 내 조선인이 간호, 의사들 그리고 좌익 아나키스트 계열의 항일군이었던 조선의용대를 필두로 국공 내전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승리하고도 팔로군은 긴 세월에 걸쳐 징용 했고 팔로군은 국민당군과의 싸움에서 최종 승리하여 1949년 10월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큰 역할을 완수했다.

ㄴ.활동 지역

팔로군은 주로 관동군 점령지역의 후방 교란과 게릴라전을 담당했다. 1940년 8월에는 화북에서 백단 대전이라고 하는 철도나 탄광에 대한 대규모 게릴라 공세를 실시했지만, 관동군은 이 팔로군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특수치안부대, 간도특설대를 미리 조직하였고 팔로군 일부는 백단 대전에서 금세 소탕되었다.

ㄷ.승전국(勝戰國)

2008년 현재, 중국 국민의 대부분이「중공은 일본과의 전투로 승리했다」라고 믿고 있다.「중공은 일본과의 전투로 승리했다」라고 하는 이유는 원래 장개석의 국민당군을 상대로 해서 이길 확률이 거의 없었으나, 갑자기 터진 중일 전쟁에 의해 중국 공산당은 활발한 게릴라 작전등을 펼쳤고 이에 대해 지지를 얻었다는 애매모호한 주장들을 펼치고 있다.

ㄹ.전신 체계

당초 조직 된 홍군(중국 공산당군)은 마오쩌둥 지휘하의 중국공농홍군과 남창 봉기로 주덕 밑의 홍군인 정강산에서 합류해 중국공농혁명홍군 제4군이 되어 후에 중국공농홍군 제4군이 되었다. 제4군은 서금의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에 본거지를 두었지만, 5회에 걸치는 국민당군의 포위 공격에 맞아, 근거지를 떠나고 대장정을 시작하게 된다

 

ㅁ.규모 및 규모 변화

팔로군은 비정규적인 게릴라 전을 구사하였으나 정규 전술을 썼던 국민당에 비해선 사상자가 적었다. 중국측 자료주장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 휘하의 팔로군의 경우는 약 300,000명의 사상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팔로군은 소련에 의해 압수된 수 많은 일본군측의 장비와 무기들을 소련측으로부터 흡수함으로써 장비로서 정규적 전술을 펼칠수 있는 군대를 만들수 있었으며, 팔로군의 숫자를 계속 늘릴수 있었다.

(ㄱ)국민혁명군 제8로군

1937년 - 120,000명

1938년 - 156,000명

1940년 - 400,000명

1944년 - 600,000명

1945년 - 980,000명

(ㄴ)중국 공산당

1946년 - 1,200,000명

 

ㅂ.조직

(ㄱ)지휘부

사령관:주더

부사령관:펑더화이

참모장:예젠잉

정치부(제8로군정 지부) 주임:런비스

(ㄴ)예하 부대

제115 사단장 린뱌오, 부사단장 네룽전, 부대 주 지휘관 뤄룽환

제120 사단장 허룽, 부사단장 샤오기, 부대 주 지휘관 관웅

제129 사단장 류보청, 교위단장 쉬샹첸, 부대 주 지휘관 장하오

각 사단은 각각 2개 여단이 있다.

독립단- 조선인으로 구성 된 여단이다. 조선의용대 또는 1940년대 초반에 차출된 동북항일연군이 주축을 이뤘다.

기병단 - 주로 측면을 교란하던 기병대였다.

포병단 - 팔로군이 숲속이나 농촌지에 요새를 구축할 때 그 수성전은 주로 포병단이 맡았다.

타격단 - 팔로군의 주력 여단이었으며 게릴라 전술을 통한 관동군 후방 교란이 주요 목적이었다.

교도단 - 주로 경비 또는 죄수 교도를 맡았다.

특무단 - 지금의 헌병대의 역할이며 팔로군 내 군경 역할을 했다.

국민당군은 미국으로부터의 원조를 받았기 때문에 중일 전쟁 기간 내에 장비는 우수했지만 병력 보존에 우위를 두어서 일본군과의 정면 결전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관동군이 전략 요충지로 결정하고 쳐들어 오는 곳에서는 격렬히 저항하였고 정규 전술을 펼쳤다. 그러나 항상 소규모 전투에서 패전을 했으며, 같은 국민 혁명군에 속했던 팔로군을 간접적으로 탄압하였다. 또한 팔로군에 대해서 적극 공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예로 신사군 사건이 일어났다.

국민당군이 병력 보존을 고려한 것은 중일 전쟁이 끝난 후 공산당을 무력으로 즉각 없애버리려는 의도였지만, 이 전략은 완벽하게 실패가 되어 버린다. 항일전에서 과감하게 일본군과 싸운 팔로군은 화북을 중심으로 민중의 지지를 모은 것이었다. 그에 비해 국민당군에 대한 민중의 평판은 확고히 돌아서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국민당을 돕던 미군도 사실상 팔로군과 주로 작전 수행을 하였다.(미국 육군으로부터 파견되었던 죠셉 스티르웨르 중장의 해임사건도 이것이 원인이 되었다.)

팔로군은 군복과 군모의 색은 함께 황토색.하지만 홍군시대의 남색의 군복의 군인도 많았다. 왼팔에 「8로」라고 쓰여진 완장을 붙인다. 군화는 신지않고 포화나 짚신을 신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팔로군은 점령지에서 어느 정도의 소지를 소유한 농민을 「부농」이라고 판단해 인민재판에 걸쳐 처형했다. 이것은 팔로군의 힘을 과시해 주민에게 공포심을 안게 하기 위한 목표였고 팔로군에 대한 부정적 측면으로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잔학행위는 지역 내의 빈곤한 자의 질투심, 복수심을 채우는 일로도 판단되어, 오히려 대중의 지지를 모으는 일에 공헌한 면도 있다.

ㅅ.3대 기율과 8항주의

중국 공산당 휘하의 팔로군에는 「3대 기율 8항주의」(三大纪律八项注意)라고 하는 규칙이 있었다. 이는 팔로군이 대중에게 지지를 받은 결정적 요인이 되었으며, 후에 한국전쟁 당시 중국에서 파견된 인민지원군에게도 나타났다. 이 규율을 어긴 팔로군은 중형을 받게 되었고 심하면 총살형에 처해졌다. 팔로군은 장개석 휘하의 국민혁명군과는 반대로 이 엄격한 군대 교조로 인해 게릴라 전으로 큰 전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

(ㄱ)3대 기율[三大規律]

1.모든 행동은 명령에 따라야한다

2.인민의 바늘 하나, 실 한 오라기도 공짜로 취하지 않는다.

3.모든 전리품은 공유하여야 한다.

(ㄴ)8항주의[八項主義]

1.병사를 구타하거나 욕하지 않고 불필요한 상명하복 관계를 만들지 않는다[사람은 때리거나 모욕하지 말아야 한다]

2.부녀자를 희롱하지 않는다.

3.공평하게 사고 판다[매매는 공정하게 하여야 한다]

4.포로를 학대하지 않는다.

5.말할 때는 온화하게 한다[말을 부드럽게 하여야 한다]

6.빌린 것은 반드시 되돌려 준다.

7.파손한 물건은 반드시 배상한다.

8.농작물에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ㅇ.소멸

1947년에 제2차 국공합작이 국민당군의 선공으로 붕괴하면서 팔로군은 신사군과 함께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편입되었다. 현재 중국 인민해방군은 중국 공산당의 당군이며, 사실상 중화인민공화국의 정규군이다.

*신사군 사건(新四軍事件) 또는 원난 사건(皖南事变)은 중일 전쟁중인 1941년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이 공동 항일 전선을 펼 당시 일어난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은 사실상 결렬되었고 이론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이사건을 두고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가들의 평가가 나뉘는데 중화민국 쪽에서는 이를 공산군의 불복종에 대한 징벌이라고 보는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쪽에서는 국민당의 배신행위라고 보고 있다.

제2차 국공 합작이후 양쯔 강 남쪽에서는 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신사군이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공산군과 공산당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는 것에 불안을 느낀 장제스는 점차 공산군과의 협력을 꺼리게 되었고 1940년 12월 신사군을 안후이 성 및 저장 성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산당은 이에 동의하고 병력을 양쯔 강 이북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처음에 신사군 공산당 장교들은 이 명령에 반발했으나 결국 이동에 합의했다.

예팅이 이끄는 신사군의 정예 병력 9,000명은 3개 방면으로 나눠 양쯔 강을 도하하기 시작했고 1월 5일 도하를 마치고 집결하였다. 이때 갑자기 8만명의 국민혁명군이 나타나 이들을 포위하고 다음날 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숫적 열세에 밀려 신사군은 병력의 상당수를 잃었고 부대장 예팅은 부하를 살리기 위해 1월 13일 국민당군측과 협상을 시도하였다. 예팅이 협상하러 오자 갑자기 국민당측은 그를 체포해 버렸고 결국 신사군의 부부대장도 전사하고 2,000명의 병사만 살아서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1월 17일 장제스는 신사군의 해체를 명령했고 예팅은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그러나 1월 20일 옌안의 공산당 군사위원회는 부대를 재건하기로 결정하고 천이가 새로운 부대장이 되었고 류샤오치는 정치위원이 되었다. 신사군은 7개 사단 및 1개 여단으로 구성된 9만병력의 규모로 재편되었다.

이 사건으로 사실상 제2차 국공 합작은 결렬되었고 국민당은 항일전선을 깨뜨렸다는 비난에 당면한 반면 공산당은 항일의 영웅으로 인식되었다. 비록 공산당은 이 사건으로 인해 양쯔강 남쪽의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지만 인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신사군(新四軍) 깃발

1938년 1월 6일 신사군(新四軍)이 난창(南昌)에서 정식으로 구성됐다.

신사군은 1934년 10월 홍군의 주력이 장정(長征)을 시작, 서천북상(西遷北上)한 뒤 화중(華中), 화난(華南)에 남아서 유격전을 계속해 온 홍군 잔존 부대로 구성되었다.

신사군이란 명칭은 2차 국공합작 후 국민당 정부가 1937년 10월 이들 잔존 게릴라 부대의 재편을 허용하고 이 부대에 '국민혁명 신편 제4군(國民革命新編第四軍)'이란 부대명칭을 붙인데서 비롯됐다.

군장(軍長)에 예팅(葉挺), 부군장에 샹잉(項英), 참모장에 장윈이(張雲逸), 부참모장에 저우쯔쿤(周子昆), 정치부 주임 위안궈핑(袁國平)이 임명됐으며 4개 지대를 관할했다.

3년 뒤인 1941년 1월 6일환난(皖南), 즉 안후이(安徽)성 남부에서 활동 중이던 신사군 9,000명이 장제스(蔣介石)의 명령을 받고 양쯔강(揚子江) 이북으로 이동하던 도중, 국민당 군 7개 사단 8만 명의 포위공격을 받는다.

2,000명만이 포위망을 돌파했으며 부군장 샹잉과 7,000여 명은 전사하고 군장 예팅도 포로가 되었다. 이는 공산군 세력이 강화되고 있는데 대한 국민당군의 초조감의 발로로 ‘환난사변(皖南事變)’으로 불린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적인 일본군을 앞두고 벌인 동족상잔에 대해 조식(曹植)의 ‘칠보시(七步詩)’를 빗대 ‘千古奇冤 江南一葉; 同室操戈 相煎何急’ 이라는 시를 신화일보(新華日報)에 발표하기도 했다.

중국 공산당은 천이(陳毅)를 대리군장으로, 류샤오치(劉少奇)를 정치위원으로. 장윈이(張雲逸)을 부군장으로 삼아 신사군 재건에 나섰으며 한층 강한 군대로 발전했다. 항일전쟁 후 내전 당시 화둥(華東)야전군으로 활동했다.

 

 

(2)미군시찰단 연안(延安) 방문

1944년 7월 22일 미군 대령을 단장으로 한 미군 시찰단이 주중 미군총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홍군의 최고 지도부가 위치한 옌안(延安)을 방문했다. 8월 7일에는 2차 시찰단이 비행기 편으로 옌안에 왔다.

이들의 시찰 목적은 전선 후방 지역에서 8로군(八路軍)과 신4군(新四軍)의 작전 상황을 파악하고 군사적 협력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젠잉(葉劍英)과 양상쿤(楊尙昆)의 영접을 받은 이들은 마오쩌둥(毛澤東),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을 만났으며 펑더화이(彭德懷)와 천이(陳毅) 등으로부터 8로군과 신4군의 전투 활약상황을 브리핑 받았다이들 시찰단은 옌안 외에 진찰기(晋察冀)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허베이성 일대), 진수(晋綏) 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네이멍구 일대) 등 홍군의 항일 근거지 등을 시찰했다.

이들 시찰단은 시찰을 마치고 미국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중국 공산당과 그 무장역량을 중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시 이들 미군 시찰단을 맞아 옌안에서 발행되던 해방일보(解放日報)는 ‘우방 미국 군사사절단 환영’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시찰단이 미국에게 중국공산당과 그들의 저항운동에 대한 호의적 평가를 제공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주중 미군 총사령부의 군사시찰단 파견은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움직임과 연계된 것이었다.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미국은 중국에서의 제2전선 역량 강화를 위해 모든 중국 군대의 통합을 희망했다.

헨리 월레스(Henry Wallace) 미국 부통령은 1944년 6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개선하여 항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7월 초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를 포함한 전 중국군 지휘자로 스틸웰(Stilwell) 장군을 제안했다.

이는 미국이 한국전 초기 한국군의 작전권을 요구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협정을 통해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렇게 절박한 상황은 아니어서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루스벨트의 이 제안은 필연적으로 공산당이 참여한 중국의 연합정부 창설 제안으로 이어졌다. 공산당은 이 일련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러한 배경 하에서 미군 시찰단의 옌안 방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루스벨트는 결국 장제스와 심한 불화를 보였던 스틸웰을 소환하고 웨드마이어(Wedmeyer) 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또 공산당을 포함한 연합정부를 제안한 가우스(Gauss) 대사도 이해 11월 30일 스틸웰의 소환을 주장했던 패트릭 헐리(Patrick Hurley)로 교체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시도가 좌절된 셈이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은 유럽에서 처칠이 추구한 유고 정책 을 본 뜬 것이다. 유고에서는 나치 침공 후 왕정 세력의 게릴라와 티토가 이끄는 공산 세력 게릴라가 별도로 활동했는데 처칠은 티토의 게릴라가 적 후방에서 제2전선을 구축하는데 더욱 효과적인 역할을 하자 그들이 공산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적극 지원햇다.

이 결과 2차 대전 기간 티토의 게릴라는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티토의 게릴라 세력은 종전 후 벌어진 유고 내전에서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왕정 세력을 격파하고 자체적으로 유고를 공산화하였다.

 

(3)포츠담 선언과 소련군 대일참전

포츠담 선언문에서 연합군(미국정부) 청탁으로 소련군이 일본과의 전쟁 참여가 서명되었다. 서명된 내용대로 5월 9일 유럽 전쟁에 승리한 지 정확히 3개월 후 소련군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얄타, 포츠담에서 진행된 연합군 회의 국제 문서 내용에 있다.

8월 폭풍 작전은 미국을 상대로 한 본토 결전에만 대비하고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던 일본제국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원자폭탄 투하만으로도 국가 멸망 및 민족 멸절의 위기를 맞이하는 상태에서 소련의 참전은 일본군 수뇌부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8월 19일 관동군 사령관 야마타 오토조 대장이 항복조칙에 따라 무조건 항복하였고, 8월 30일까지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있던 일본 관동군에 대한 전면 무장 해제가 이루어졌다. 불과 1주일(1945년 8월 9일~15일)의 짧은 기간동안 8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전사했으며, 60만 명이 넘게 포로로 잡혔다. 반면, 소련군의 전사자는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8월 13일에 청진시에서 소련과 일본이 싸우면서 소련은 300명이 죽었고, 일본은 500명이 죽으면서 2500명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한다

소련은 이 작전을 통해 일본 제국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과 몽강국을 붕괴시키고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서방 연합국과의 사전 약속에 따라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자국 영토로 흡수하였다. 또,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 북부에 군대를 진주시켜 미국과 함께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하였다

 

 

(4)한국전쟁의 불씨(유인) 애치슨 라인

미국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언급했다.

애치슨은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 이후 이를 '애치슨 라인'으로 지칭됏다)으로 정한다고 하였다. 즉 방위선 밖의 한국과 대만 등의 안보와 관련된 군사적 공격에 대해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애치슨은 이 발언으로 6개월 뒤 일어난 한국전쟁을 유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한국전 수정주의론자들 중에서는 '유발'이 아닌 ''유도' 더나아가 '유인' 했다는주장까지 나왔다. 이런 주장은 소련 해채 후 한국전 관련 소련 측의 비밀 문서들이 공개 되면서 소멸됐으나 판단착오에 따른 미필적 고의의 '유발 '비판은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겨냥한 목표는 이와는 무관한 전혀 다른 데 있었다. 그 것은 ‘마오의 농민정권’을 유고화 하자는 것이었다.

‘애치슨 라인’이 미국의 전통적인 대아시아 군사전략이었던 ‘도서방위선(島嶼防衛線) 전략’을 재확인 하면서도 섬인 대만을 방위선 밖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도는 누가 보아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대만 섬으로 쫓겨 온 국민 정부를 보호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이는 그가 소련과 같은 볼세비키정권이 아니라 토지 개혁 정권으로 판단하는 '마오의 공산 정권'이 유럽에서의'티토의 유고'처럼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고수하며 소련의팽창주의를 견제하는 기능을 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엇다.

애치슨은 공산당도 국민당도 강하게 견지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그 원칙의 주인공을 국민당 정권에서 공산당 정권으로 바꾼 것이다.

'애치슨 국무부' 내의 친중국 공산당 성향의 이른바 '스틸웰 그룹'이 입안한 2대 중국 전략은 한국전 발발로 파탄이 났다.

중국 대륙의 변화에 미국이 '애치슨 라인'으로 '장군'하자 그 바로 한 달 이틀 뒤에 ' 스탈린의 소련'이 '중소우호동맹 상호 원조조약'이라고 '멍군' 하며 응수햇다. 이는 한반도에서 동서 진영의 제로섬 게임을 불러일으키고 말앗다.

이후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정신 분열' 증상에 빠져 버렸다. 겉으로는 '하나'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두개'의 현실을 수용하고 유지하려 애썻다.


한국전에서 잠시 '하나의 한국'을 추진하다 너무나 큰 비용을 강요당하게 되자 '두개의 한국'을 유지하는 선으로 후퇴했고 중국 대륙에서는 대만 섬을 '하나의 중국'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정하며 새로운 중국의 주인공이 된 공산 정권을 무시하는 전략을 장기간 고수했다. 베트남에서도 한반도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데도 불구 '2개의 베트남'을 무리하게 유지하였다. '
'애치슨라인'의 '중국 대륙 구상'은 그러나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라지지도 않았다. 1972년 2월 리처드닉슨과 헨리 키신저의 중소 미중화해로 기나긴 동면에서 깨어났다.
유엔군

1950년 6월 25일 비가 내리는 평화로운 새벽의 정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야포와 자동화기의 굉음과 함께 북한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되었다. 침략군은 이내 38선을 넘어 반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 경찰군을 밀어내며 수도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틀 후 유엔은 북한군의 침략 저지를 위한 회원국의 단결과 원조를 요청하였다. 유엔 안보이사회는 결의안을 통해 미합중국을 결의안 내용의 실행과 한국 내 유엔군 작전 지휘를 담당할 집행국가로 선정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미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자유 세계에 대한 위협을 인지하고, 공산세력이 자유국가를 짓밟는 행위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음을 천명하였다. 당시 미 육군 극동사령부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침략을 격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는 명령에 따라 미 공군 및 해군을 투입하고 7월 24일 일본 도쿄에서 유엔 사령부 총 사령본부를 설치하였다.

(5)유엔의 호소

한편, 유엔은 모든 회원국에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항전 노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군사 및 기타 원조 제공을 촉구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미 보병 24사단 21 보병연대가 유엔 지상군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른바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로 명명된 이들은 일본 내 주둔지로부터 공수된 병력으로 7월 5일 오산에서 북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한-미 양국의 군대는 우세한 전력의 북한군을 상대로 점차 남쪽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유엔 사령부는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즉, 수적으로나 장비 측면에서 열세인 가운데 유엔의 다른 회원국이 약속한 지원을 기다리며 조금씩 후퇴하면서 시간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 8월 29일, 영국 제 27여단이 부산에 도착, 한국군 및 미군으로 구성되어 있던 유엔 사령부에 합류하였으며 곧 대구 서쪽의 낙동강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호주, 벨기에, 캐나다, 콜롬비아, 이디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터키가 자국 병력을 파병하였고, 남아프리카 연합은 공군병력을, 덴마크, 인도, 노르웨이, 스웨덴은 의무부대를 지원하였고, 당시 비회원국이던 이탈리아는 병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자유세계의 자유를 수호하다

3년 간의 한국전쟁을 통해 연합군에 소속된 장병들은 유엔 사령부의 일원으로서 목숨을 바쳐 싸웠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침략행위 저지를 위한 유엔의 의지를 확인시켰다.

한국 땅의 혹서기와 혹한기를 견뎌내면서 영국, 이디오피아, 한국, 태국, 터키, 미국 등을 비롯한 연합국 출신의 젊은이들은 북한과 중국 인민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이야말로 현대 전쟁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의 능선, 장진호, 함흥, 단장의 능선, 화천호, 철의 삼각지, 펀치볼, 부산 등은 한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격전지들이다. 연합군의 용맹스런 장병들이 흘린 피는 불모고지의 흙먼지와 한강과 임진강의 흐르는 강물도 붉게 물들였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총성은 멈췄다. 판문점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은 전투의 종결과 함께 정치적 타협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비록 전투는 끝났으나 군대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양측은 휴전선으로부터 2,000미터씩 물러나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두고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야만 했다.

자유의 대가

부산항 부근에 위치한 당곡 평야에는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수많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빛 바랜 터키와 이스라엘의 '초승달과 별'과 '다윗의 별' 문양 옆에 세워진 하얀 십자가들은 33,629 명의 미군과 수많은 한국 병사들, 717명의 터키 병사들, 그리고 1,109 명의 영국군이 치열한 전투 속에서 산화해 간 흔적인 것이다. 이 곳은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죽어간 12 개국 병사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영광의 장소이기도 하다.

휴전협정과 함께 유엔 사령부 회원국들은 전쟁으로 피폐한 한국의 경제를 재건하는 데 힘을 쏟기 시작했다. 도시와 농촌을 온통 폐허로 만들어버린 전후 한국의 재건과 복구를 돕는 일은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 거대한 작업이었다.

병력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당시 유엔 연합군의 병력은 932,964 명으로 최대규모를 이루었다. 각국별 병력사항은 다음과 같다.

한국 - 590,911

콜롬비아 - 1,068

미 합중국 - 302,483

벨기에 - 900

영국 - 14,198

남아프리카 - 826

캐나다 - 6,146

네덜란드 - 819

터키 - 5,455

룩셈부르크 - 44

호주 - 2,282

필리핀 - 1,496

뉴질랜드 - 1,389

태국 - 1,294

이디오피아 - 1,271

그리스 - 1,263

프랑스 - 1,119


 

2.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소련 육군 극동사령부)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스탈린부대[민주사회주의 노선, 국가사회주의 성향 사회주의 그룹]

 

제2전선 구축을 위해서 미영정부의 원조로 창설한1944년 소련령의 동북항일연군(88독립 저격여단) 부대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김일성.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흑룡강성당사자료> 10집에 수록[1943년의 金日成(김일성) 첫 공개된 金日成(김일성)의 88여단 시절 사진. 이 사진은 지난 1943년 초여름, 하바로프스크부근 브야츠크촌에 있는 88여단본부앞에서 여단장 周保中(주보중)중좌와 조선인 대원들이  함께 촬영한 것. 88여단은 42년 스탈린의 지시로 소련, 중국, 조선인등으로 구성, 對日戰(대일전) 준비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당국은 지금까지  金日成(김일성)이 88여단에 소속됐던 사실을 부인해 왔다. 앞줄  한가운데가 周保中(주보중), 그 오른쪽이 金日成(김일성), 세번째줄 왼쪽부터 徐哲(서철)(前(전)북한검열위원장), 姜健(강건)(前(전)인민군총참모장), 金光俠(김광협)(前(전)북한민족보위상), 네번째줄 왼쪽부터 金一(김일)(前(전)북한제1부수상), 崔勇進(최용진)(前(전)북한제1부수상), 한사람건너 金京錫(김경석)(前(전)북한노동당조직부장)] 

88독립 저격여단 (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 소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 극동지역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 1개이다

88독립 저격여단은 극동전선 정보과 직속 만주, 한반도에서 정찰 , 파괴 공작임무을 수행했다[소련군 특수부대 빨치산]

88독립 저격여단 원래 동북 항일연군(聯軍) 장병 핵심이 주로 중국인과 조선인에서 편성 되었다. 후일 북한 국가 주석 김일성  여단  1 대대장 맡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 공식 견해에서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 조직하여 동북 항일연군 본체 공투하면서도 다른  행동이었다고 하고 다음 88독립 저격여단  사실 무시되고 있다(부정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자주노선과 주체정부 노선으로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군 참여를 부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부대 동북 항일 연군 교도여단이라고 칭하고 있다.

 제88독립 저격여단 핵심 동북 항일연군(聯軍) 1939년경부터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만국)군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수 많은 전사자가 등장했고 내부적으로는 일본 당국 귀순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남은 자들 물자 부족으로 인해 활동 계속이 곤란해 졌다. 따라서 그들은 소련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12월 말 동북 항일연군(聯軍)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 영내에 들어갔다. 소련 영내에서는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의 활동 지원을 위해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과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두 곳에 분산 수용했다

남야영과 북야영은 각각 B 캠프와 A 캠프로도 불리는데, 보로쉴로프(Вороши́лов)와 아무르(Амур)강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

당초 100여명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후 200 ~ 300명으로 증가했다
독소전 발발 후 1941년 7월 중순, 소련 정부는 일본의 북진에 대비하여 이 야영지에 따라 제88 독립 저격 여단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여단은 하바로프스크시의 부쯔코에나 나아무레 (Вятское-на-Амуре)에 배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21일 극동 전선사령관 이오 시프 아빠나센코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0132호에 따라 여단의 편성 기간은 같은 해 7월 28일부터 9월 15일까지로 정해졌다.

부대 편성 동북 항일연 중국인 병력과 조선인 병력 외부 중국계 · 조선계,  소련인, 기타 소수 민족 (몽골족, 민주족등 )에서 열렸다. 여단 대원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조선인은 10% 불과했다. 그 후, 후속하여 소련 영내 들어간 부대도 합류해, 88독립저격여단 병력 수는 1,500 명을 넘어 섰다.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에서 온 많은 사람들 소련 군사 학교 촉성 지휘 과정 또는 관구 소위 과정 받은 적군 계급 수여했다 (여단장 주보중 중령, 김일성은 대위). 일반적으로 여단 지휘 관직에는 중국인이었고, 지휘 관직 붉은 군대(소련군) 장교 임명 되었다. 병사 적군 군복 착용했다.

 

1944  4  현재 편제.
여단 본부 - 여단장 : 주보 중령, 참모장 : V. 사마루첸코 소령
정치 과학 - 정치 위원 : V. 세레긴 소령
방첩 - 스 메르시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2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효명 대위
 3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명귀 대위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자동소총 대대
무선대대
독립 박격포 중대
독립 공병 중대
독립 대전차 소총 (PTR) 중대
독립 경제 중대
독립 기관총 소대
군사 통역 과정 특수 분대
 독립 저격 대대는 3 개 중대로 구성되어  중대는 3 개 소대에서 되었다.

 

장비 (1942  9  ~ 1943  7  현재) 소총 x4,312 테이, 자동 소총 x370 , 중기관총 x48 자루, 경기관총 x63 정,  화포 x21 문, 대전차 소총 x16 테이, 자동차 x23 .
 88 여단 병사 만주, 한반도 지역에서 정찰과  파괴 공작활동에 종사했다.  자세한 것은 불명이지만, 여단장 주보 1940  ~ 1943  사이  89 명의 감원 (손해)이 있었음 보고하고 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 2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9명
제 1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26명
미 귀환 - 24명
스 메르시에 인도 - 6명
환자를 위한 후송 - 15 명
사망 - 2명
여단 복귀 - 7명
1945년 7월 소련 대일 참전에 대비하여 여단에서 무전기를 장착 한 100명을 투입하는 전투 행동 계획이 수립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급속한 진격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 88 독립저격여단  1 독립 저격 대대  대대장 김일성이 한반도의 해방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가 되었고 소련군과 함께 방문했다.
1945년 8월 29일 제 2 극동 전선 사령관 막심 뿌루카에후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10 호 / n에 따라 "일본 침략자와 싸우는 전선에서 전투 지휘 임무의 모범적인 수행과 이 때 발휘 된 용기"에 김일성에게는 적기 훈장이 수여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88 독립저격 여단 장병 21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9 월 10 일에 더욱 58 명 추가).

  88여단(외국인군단, 대일연합군) 1945 10 12일자 극동군관구 사령관  042호에 의해 해산 되었다.

[第88独立狙撃旅団(ロシア語: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略称88 осбр )は、ソビエト連邦が第二次世界大戦中に創設した民族旅団の1つ。極東戦線情報科に直属し、満州・朝鮮半島における偵察・破壊工作を使命とした。

旅団は、元東北抗日聯軍将兵が中核となり、主として中国人と朝鮮人から編成された。後の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国家主席、金日成は、同旅団の第1大隊長を務めていた。ただし、朝鮮労働党の公式見解では、金日成は朝鮮人民革命軍を組織して東北抗日連軍本体とは共闘しつつも別行動であったとしており、その後の入ソの事実は無視されている。中国共産党は、この部隊を東北抗日連軍教導旅団(抗連教導旅)と称している。

後に旅団の中核となる東北抗日聯軍は、1939年頃から関東軍と満州国軍の大規模な掃討作戦により、多数の戦死者を出した外、日本当局に帰順する者も出始めた。周保中、崔庸健、金策、金日成等、残った者達も物資の不足により、活動の続行が困難となった。そのため、彼らはソ連に脱出することを決定した。

1940年12月末、聯軍はアムール川を渡って、ソ連領内に入った。ソ連領内では、聯軍の活動支援のため、沿海地方のヴォロシーロフ・ウスリースク郊外に北(A)野営(Северный лагерь又はлагерь А)、トルクメニスタンのケルキ郊外に南(B)野営(Южный лагерь又はлагерь Б)を設営した。当初、約100人がここで訓練を受けたが、後に200~300人にまで増加した

独ソ戦勃発後の1941年7月中旬、ソビエト政府は、日本の北進に備えて、これらの野営地に基づき、第88独立狙撃旅団を編成することを決定した。旅団は、ハバロフスク市のヴャツコエ・ナ・アムーレ(Вятское-на-Амуре)に配置することが決定された。1942年7月21日付極東戦線司令官ヨシフ・アパナセンコ上級大将の命令第00132号に基づき、旅団の編成の期間は、 同年7月28日から9月15日までの間と定められた。

部隊の充足は、東北抗日聯軍の中国兵と朝鮮兵の外、中国系・朝鮮系ソ連人、その他の少数民族(ナナイ人、エヴェンキ人等)から行われた。旅団隊員の大部分は中国人で、朝鮮人は10%に過ぎなかった。その後、後続してソ連領内に入った部隊も合流し、第88旅団の兵員数は、1,500人を超えた。

聯軍から来た多くの者は、ソ連の軍事学校の促成指揮課程か、管区少尉課程を受け、赤軍の階級を授与された(旅団長周保中は中佐、金日成は大尉)。通常、旅団の指揮官職には中国人が、副指揮官職には赤軍の将校が任命された。兵員は、赤軍の軍服を身に着けた。

1944年4月現在の編制。

旅団本部 - 旅団長:周保中中佐、参謀長:V.サマルチェンコ少佐

政治科 - 政治委員:V.セレギン少佐

防諜科 - スメルシ

第1独立狙撃大隊 - 大隊長:金日成大尉

第2独立狙撃大隊 - 大隊長:王效明大尉

第3独立狙撃大隊 - 大隊長:王明貴大尉

第4独立狙撃大隊 - 大隊長:姜健大尉

自動小銃大隊

無線大隊

独立迫撃砲中隊

独立工兵中隊

独立対戦車銃(PTR)中隊

独立経済中隊

独立機関銃小隊

軍事通訳課程特殊分隊

各独立狙撃大隊は3個中隊から成り、各中隊は3個小隊から成った。

装備(1942年9月~1943年7月現在)は、小銃x4,312挺、自動小銃x370挺、重機関銃x48挺、軽機関銃x63挺、火砲x21門、対戦車銃x16挺、自動車x23両。

第88旅団の兵士は、満州・朝鮮半島地域において偵察・破壊工作活動に従事した。その詳細は不明だが、旅団長の周保中は、1940年~1943年の間に計89人の減員(損害)があったことを報告している。その内訳は以下の通り。

第2極東戦線の諜報業務に派遣 - 9人

第1極東戦線の諜報業務に派遣 - 26人

未帰還 - 24人

スメルシに引渡し - 6人

傷病のため後送 - 15人

死亡 - 2人

旅団復帰 - 7人

1945年7月、ソ連対日参戦に備えて、旅団から無線機を装備した100人を投入する戦闘行動計画が立案された。しかしながら、ソ連軍の急速な進撃と日本の降伏のため、この計画は実行されなかった。かくして、第88旅団、その大隊長である金日成が朝鮮半島の解放に参加する機会は訪れなかった。

1945年8月29日、第2極東戦線司令官マクシム・プルカエフ上級大将の命令第010号/nに従い、「日本の侵略者との戦いの前線における戦闘指揮任務の模範的遂行と、この際に発揮された勇敢さと勇気」に対して、金日成に赤旗勲章が授与された。同命令により、第88旅団の将兵216人に、各種勲章とメダルが授与された(9月10日に更に58人追加)。

第88旅団は、1945年10月12日付極東軍管区司令官令第042号により解散された.]

 

김일성은 88여단 창설로 1942년 7월에 남야영에서 뱌츠코예 마을로 이주하여[3] 대위 계급으로 1대대 대대장(營長)이 되어 8.15 해방 때까지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4]

이곳에 참가한 조선인 가운데 약 60여 명이 확인되며,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김일성을 비롯한 4인이 중학교 중퇴이다. 이들은 88여단에서 1940년경부터 해방까지 약 5년간 복무했으며, 소군정하에서 김일성의 측근이 되어 훗날 북한 권력층의 핵심이 된다.

이들 중 중등교육 수준의 학력을 갖추었던 사람은 대위 김일성, 상조 임춘추, 대위 안길, 대위 김책, 중위 서철의 5인이다. 이 외의 55인의 평균학력은 소학교 3학년이다

 

조선인 88독립 저격여단 출신은 다음과 같다

(1)김일성(1912년생, 평안남도 평양)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조선공작단 사령관한국전쟁 당시 북한 수상 겸 군사위원회 위원장, 인민군 총사령관

(2)최용건(1900년생, 평안북도 태천군)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부참모장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조선공작단 정치위원

한국전쟁 당시 군사위원회 위원, 민족보위성상

(3)김책(1903년생, 함경북도 학성군)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대위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조선공작단 단원

한국전쟁 당시 군사위원회 위원, 부수상, 전선총사령관[한국전쟁 당시 가스중독으로 평양 사망]

(4)강건(1918년생, 경상북도 상주)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조선공작단 단원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총참모장[한국전쟁 당시 경북 안동에서 지뢰 폭발 사고로 전사]

(5)김일[1910년생,본명 박덕산(朴德山)]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조선공작단 단원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문화부 사령관, 전선사령부 군사위원

1972년12월에 정무원 총리 겸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6)최광 (1918년생,라선시)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조선공작단 단원

1950년 6월 인민군 제13사단장

1995년 10월 8일, 인민무력부장과 인민군 원수 칭호

(7)임춘추(1912년생, 만지린성)

문인, 작가출신

88독립 저격여단 상조

1983년 1월 7일 국가 부주석

(8)안길(1907년생, 함경북도 경원군)

88독립 저격여단 대위

1947년 12월 13일 사망

(9)서철(1907년생, 함경북도 온성군)

88독립 저격여단 중위

1947년 9월에 대남공작 및 게릴라 양성소로 세워진 강동정치학원의 군사부원장

1977년 인민군 총정치국장

(10)김광협(1915년생, 함경북도 회령)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한국 전쟁 당시 동부전선 2군단장

 

남침은 노동당(공산당과 신민당, 인민당 합당) 계열 내부 대남 강경파 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복조선분국 김일성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박헌영) 계열 주도로 추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신민당 김두봉 계열이나 민주당 최용건계열, 근로 인민당 홍명희 계열 등은 남침을 반대했다가 찬성한 사람들이다.

 

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부대) 등이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전선사령관 김책[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총참모장 강건[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조선의용대 중국 팔로군 출신]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을 임명했다

 

 

 

 

3. 조선의용군(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모택동부대[신민주주의 노선, 인민민주주의 그룹]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은 1942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를 개편한 조선독립동맹의 당군(黨軍)이다.

1942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를 개편한 조선독립동맹의 당군(黨軍).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의 한커우[漢口]에서 결성한 조선민족혁명당[김원봉(金元鳳)]·조선민족해방동맹[김성숙(金星淑)]·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柳子明)]·조선혁명청년연맹[최창익(崔昌益)]등 중국본토에서 활약하던 좌파 4당의 연합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군사조직이다

(1)연원 및 변천

조선의용대의 대장은 김원봉이었다. 처음에는 제1구대(朴孝三)와 제2구대(李益星)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1940년 5월 3개 지대로 확대, 개편하였다. 이때 조선의용대는 후난성[湖南省]과 후베이성[湖北省]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한편, 조선의용대 본부는 구이린[桂林]·치장[綦江]을 거쳐 충칭[重慶]으로 옮겨 1940년 11월 4일조선의용대의 화북 이동을 결정하였다. 조선의용대 본부는 충칭에 남고 모두 허난성[河南省]뤄양[洛陽]으로 집결해 1941년 3월황하의 맹진(孟津)나루를 건너 화북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 10일린현[林縣]에서 신악(申岳)·윤세주(尹世胄)·박효삼(朴孝三)·김창만(金昌滿) 등을 중심으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하였다. 지대장에 박효삼, 제1대장에 이익성, 제2대장에 김세광(金世光), 제3대장에 왕자인(王子仁)이 임명되었다. 그 뒤 화북지대는 타이항산[太行山]일대에서후자좡[胡家庄]전투(1941.12.12.)·싱타이[邢台]전투(1941.12.26.)·편성(偏城)전투(1942.5.28.)를 치렀다. 편성전투 무렵인 1942년 5월충칭에 있던 조선의용대 본부가 임시정부의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하자 화북지대는 본부없는 지대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42년 7월 10일허베이성(河北省)타이항산 끝자락에 자리한 셰현(涉縣)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제2차 대회가 개최되었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국민혁명군 제8로군에 있던 무정(武亭)을 사령관으로 맞았다. 1942년 7월 10일 때마침 충칭에 있던 김두봉(金枓奉)이 옌안[延安]을 거쳐 타이항산으로 왔으므로 그를 맞아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조선의용군은 그의 당군이 되었다.

1943년 6월 일본군의 침공을 받아 제8로군과 함께 이른바 ‘반소탕전’을 전개하며 타이항산 속 곳곳에서 항전하며 용명을 떨쳤다.

그때 중국공산당에서 조선의용군의 옌안 이동을 결정하였다. 많지도 않은 인력을 타이항산전투에서 소모하기 보다는 전쟁 후에 조선 통치의 요인으로 보호하는 것이 중국공산당에 유익하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 같다. 조선의용군은 1943년 12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옌안 이동을 완료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옌안 교외의 뤄자핑[羅家坪] 마을에 주둔하였다. 조선의용군 사령관은 무정이었지만 그는 제8로군의 포병사령부의 책임을 맡아 있었기 때문에, 뤄자핑에 있는 조선항일군정학교가 사령부의 구실을 하였다. 군정학교는 김두봉이 교장이었고 부교장은 박일우(朴一禹), 학도대장은 박효삼이었다. 그 밑에 4개 구대가 있었다.

조선의용군은 뤄자핑에 있는 병력 외에 산둥성(山東省)에 이익성, 산시성(山西省)에 김세광, 동북(만주)지방에 이상조(李相朝)가 이끄는 선견대(先遣隊)가 별도로 있었다. 그들은 전선에서 일본군에 종군한 조선인 병사들을 초모해 조선의용군의 병력을 증강하며 정보수집활동을 하였다.

조선의용군의 병력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병력 150명 정도 외에 제8로군에 종군한 10명 내외, 1940년 최창익·허정숙(許貞淑)과 함께 조선의용대가 구이린에 있을 때 미리 온 18명, 그리고 김태준(金台俊)·김사량(金史良)처럼 망명해온 인사, 그리고 각처에서 새로 초모한 인원을 300명 정도로 보면 모두 합쳐 약 500명을 헤아린다

(2)기능과 역할

조선의용대의 활동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전지공작이었다. 전지공작은 일본군

점령지구에 잠입하거나 전선에 접근해 활동하는 초모활동·선전활동·정보활동 등을 말한다. 옌안에 있을 때는 전방에 파견된 선견대가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둘째는 교육활동이었다. 교육은 군사교육과 사상교육으로 나뉜다. 뤄자핑에 있던 조선항일군정학교가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셋째는 생산활동이었다. 제8로군 지역은 토지가 척박해 생활물자가 궁핍했으므로 ‘자력동수 풍의족식(自力動手 豊衣足食)’이라는 모택동(毛澤東)의 구호 아래 군인들이 밭을 일구어 농산물을 자급 자족하였다. 조선의용군도 그에 발맞추어 밭을 갈아 일을 하였다.

옌안지방의 주민은 야오둥[窯洞]이라는 토굴 속에서 생활하는데, 뤄자핑에 가면 지금도 조선의용군이 살던 굴집이 남아 있고 군정학교의 옛터와 의용군이 일군 밭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제8로군의 동북(東北) 정진군이 편성되어 만주로 갈 때 그 해 9월 15일 함께 옌안을 떠났다.

그 뒤 일부는 북한으로 들어 가다가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당하였다. 북한으로 들어간 조선독립동맹은 김두봉·한빈(韓斌) 등을 중심으로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해 활동하였다. 이들이 북한정계의 연안파라는 정치그룹이다. 그들은 김창만·허정숙 등 몇명 외는 모두 숙청당하였다.

만주에 남아 있던 병력은 그 곳에서 동포들을 모병해 부대를 증강하고 중국의 공산혁명전쟁에 참가했고 1950년 6·25전쟁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중국 산시성과 옌안(延安, 연안), 타이항산

 

                                                                       김두봉선생등 조선의용군이 머물렀던 자리(중국 연안 근교 모습 사진)

1942년 7월 10일 김두봉은 사회주의자로 국민당 지원을 받고 활동하는 김원봉 조선의용대(의열단)에서 탈퇴하여 중국 공산당 모택동부대 연안으로 벙어리 행세를 하면서 행군과 도착하여 김무정(중국 공산당 당군 팔로군 포병지휘관. 임표, 팽덕회 지원으로 화북조선쳥년회 조직 ), 최창익등과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했다

이때 김두봉은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최고책임자와 통수권자로서 독립동맹은 정치단체로, 의용군은 군사단체로 조직했다.

김두봉을 보고 신민주주의(인민 민주주의) 혁명 노선 모택동 부대라고 지칭했다

독립동맹에는 김두봉(주석), 최창익(부주석), 김무정, 허정숙등이 참여했다

무장군 조선의용군 총사령관에는 김무정, 부사령관 박효삼등이었다

 

"나가자 동무야 함께 뭉치여

원수를 소탕하러 나가자

총칼을 메고 혈전(血戰)의 길로

다 앞으로 동무들야

혁명의 기(旗,깃발)는 우리 앞에 날린다

(후렴)앞으로 동무들아

무거운 쇠줄을 둘러 메치고

뼈속에 사무친 원을 풀자

삼천만 대중(對衆)아 모두 다 나가자

승리는 우리를 재촉(催促)한다[의용군 소탕(掃蕩)의 노래]"

*소탕의 노래는 이국 땅에서 일제를 소탕하고 독립을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짐하는 것이다

 

                                                                                                   조선의용군 모습

조선의용군 영웅적인 투쟁과 희생을 보고 중국 공산당 당군 팔로군 총사령관 주덕은 이렇게 추모했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의 전투정신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중.조 인민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치하할 정도였다

 

23.1944년 10개의 독립동맹 분맹과 의용군 지역지대를 설치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김두봉은 독립동맹의 주석으로 중국 공산당과도 연계, 공산당의 군대인 팔로군과 연대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44년 연안(延安) 한인촌의 조선청년학교 교장이 되었고, 1945년 2월 김두봉은 학교를 군관양성소로 개조, 조선혁명군정학교로 고치고 다시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김두봉은 주은래와 친했다

 

["우리의 영도자 김두봉주석 만세"

동무들! 오늘은 기쁨의 날임에 틀림 없습니다. 삼십육년 동안 우리 동포들의 피와 땀을 아서 먹든 왜적이 넘어졌다고 합니다. 이들로 말미암아 조선의 아들 딸은 피눈물을 머금고 이역에서 헤메이게까지 되었든 것입니다.

동무들! 오늘 같은 기쁜 소식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온몸 온정신으로 이것을 마지하지 못하는 마음이 한편에 있습니다. 이 마음은 아마도 우리들을 그렇게 착취하고 압박하고 우리 동지들을 학살한 우리들의 원수를 우리 손으로 무찔으지 못하고 외국의 힘을 빌어 타도 되었다는 것, 우리들이 가진 힘을 다하여 배려온 총과 칼로써 최후의 일전을 할 기회를 노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아마도 우리들이 가지는 바 섭섭함일 겝니다.

그러나 동무들!

싸움이 이제부터입니다. 그 싸움이 비록 총과 칼로써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조선의 참된 행복을 위한 지리하고도 힘찬 싸움이 시작됩니다

밖으로는 새로운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싸움, 안으로는 인민의 이익을 위한 싸움.

왜적이 넘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느낀 감회와 앞으로 싸워야 할 내 자신의 각오와 말을 여러 동지들께 몇 마듸 였주는 바입니다.

 

"우리의 지도자 주석 동지의  옳은 영도를 힘차게 접수하자!"

"접수하자!"

"최고 지도자 주석 동지 만세!"

"만세!"

 

동무들 우리 의용군의 손으로 왜군을 쳐부수지 못한 것은 분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무기 없는 싸움이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 조국이 왜놈 손에서 해방 되었다. 이째뜬 해방일세 분명하다.

(연안에서 김두봉 조선의용군 최고지도자의 연설문)]"

 

 

"중국의 광할한 대지 우에

조선의 젊은이 행진하네

발을 마처 나가자 다 앞으로

지리한 어두운 밤이 지나고

빛나는 새 아침이 닥처오네

우렁찬 혁명의 함성 속에

의용군 기빨이 휘날린다

나가자 피 끓는 동무야

뚫어라 원수의 철조망

양자와 황하를 뛰여 넘고

피무든 만주벌 결전에

원수를 동해로 내여 몰자

전진 전진

광명한 저 압길로[조선의용군 행진곡]"

 

"조선의 완전 독립이 없이 중국의 독립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의 동지들의 목적달성은 우리보다 앞설 것이다 최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건투해 주기를 바란다[연안에서 중국 공산당 주최로 환송회때 모택동前주석의 송별사]"

 

1945년 11월 7일 러시아혁명 기념 봉천(奉天) 시가행진 때 소련의 적군(赤軍, 붉은 군대-김일성등  조선인 참여), 의용군(광복군=조선의용군- 김두봉,최창익, 김무정등), 중국군(팔로군-주덕,임표, 팽덕회등 중국 공산당군), 몽고군 그리고 일반 시민이 참여했다 의용군은 중국 만주지역 조선족 주력군으로 1만명의 완전무장으로 참여했다

소련의 적군(赤軍, 붉은 군대) 도움으로 몽고,극동(러시아 극동자치정부)과 사할린(러시아 사할린 자치정부), 만주(만주국과 만주군, 동북3성 임표 팔로군), 이북(관동군사령부, 북한-대소참전과 소련군 귀순)등을 점령했다

영국군과 미국군 도움으로 인도군(영국군)과 중국 국민당군(영.미군) 그리고 광복군(중국군-김구, 김규식, 이범석등) 등이 중국 남방(중국군-장개석부대)과 동남아(인도군과 중국군),일본(일본군사령부, 친미 일본인과 미국군-항복과 미국군 귀순)과 남한(조선군사령부, 이승만등 미국군-이승만등 조선인 참여.대미참전과 미국군 귀순)지역을 점령했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조선의용군 출신은 다음과 같다

(1)김무정(본명:김병희.1904년생,함경북도 경성군)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포병사령관, 인민군 제2군단장, 평양지구방위사령관

1952년 10월 병사

(2)박일우(1903년생,함경북도 회령 출생)

조선의용군 부사령관

한국전쟁 당시 군사위원회위원, 전선사령부 부사령관

1955년 숙청

(3)김웅(1912년생,경상북도 김천)

조선의용군 제1지대(남만지대) 지대장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제1군단 사령관

1978년 11월 남예멘 대사

(4)방호산(1916년생,함경북도)

동북조선의용군 제1지대 정치위원

1949년 7월 조선인들이 절대 다수인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 사단장으로로서 부대를 이끌고 입북하였다. 동 부대를 제6사단으로 개편하고, 초대 사단장이 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제6사단을 이끌고 호남 일대와 진주, 마산까지 진출하는 등 전공으로 제6사단은 근위사단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1950년 10월에는 제5군단장에 임명되어 동부전선 전투를 지휘하였다

1959년 연안계가 기도한 반당·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

(5)이상조(1915년생,경상남도 동래군)

동북(만주) 지방 조선의용군 선견대(先遣隊)

1945년에 입북하여 북로당 인민군에 들어갔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 중장의 계급으로 정찰국장, 부참모총장을 역임했고, 1953년에는 휴전협상에 김일성 얼굴마담역으로 나왔다. 이때, UN군측 대표로 나왔던 백선엽 장군에게 "미제의 개"라고 지껄이며, 근엄함을 보여주기 위해 얼굴에 똥파리가 한시간 넘게 앉아 있어도 험악한 표정을 유지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56년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 때 소련에 망명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한국에 와서 반김일성, 6.25남침 주장등을 적극 증언하였다

 

 

4.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레닌부대[공산주의 노선, 마스-레닌주의 공산당 그룹]

                                                                                  한국 전쟁 전 형성된 유격지구

 

                                                                            남부군 결성 전후 이현상 부대의 이동경로

조선인민유격대(朝鮮人民遊擊隊)는 한국 전쟁을 전후하여 대한민국 영역에서 유격전을 수행한 북한정부의 파르티잔 부대이다. 흔히 빨치산이라고 부르며, 남부군, 공비, 공산 게릴라라는 표현도 사용되었다

이현상은 1949년부터 지리산지구에서 인민유격대 제2병단을 편성하여 활동하였으며, 6.25전쟁시에는 광범한 지역에 걸쳐 협동작전을 벌였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지리산지구로 잠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50년 11월에는 후평리에서 남반부인민유격대로 재편한 다음 남하하였다. 같은 해 12월 제천지구에서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으로
부대를 개편한 후 덕유산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현상은 남부군단 총사령관의 직함으로 1951년 7월 중순부터 남한일대의 유격부대들을 총지휘하였다.
이들은 주로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한국군 백야전전투사령부 등의 토벌작전에 의해 대부분 토벌되었다

(1)설립목적

이현상은 1950년 11월 중순 유격대를 지휘하여 강원 후평리로 후퇴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이승엽 등과 남한지역의 당사업과 유격투쟁에 관한 문제를 토의했다. 이승엽은 6개 도당(충남북, 전남북, 경남북)에 대한 지도권한을 여운철에게 위임했고 이현상에게는 유격대의 통일적 지도를 맡겼다. 이현상은 후평리에 집결된 유격대로 남반부인민유격대를 조직하여 다시 지리산을 향했다. 이때 편성된 인민유격대는 유리사단(4백명), 혁명지대(60명), 인민여단(1백50명)과 사령부 및 기타
직속부대(1백50명) 등 약 8백 명의 병력이었다

(2)연원 및 변천

남반부인민유격대는 중공군 참전으로 1950년 12월 태백산맥을 타고 침투했다. 12월말에는 충북 단양을 거쳐 문경경찰서를 습격한 후 그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현상은 제천지구로 이동하여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으로 부대를 다시 개편했다. 이 남부군단은 1951년 2월초에 속리산을 거쳐 덕유산으로 들어갔다

덕유산에 들어간 남부군단 총사령관 이현상은 여운철과 함께 1951년 7월 중순 충남북, 전남북, 경남북의 6개 도당회의를 열기도 했다. 이후 남한일대의 유격투쟁은 이현상이 총지휘하게 되었다. 남부군단 예하에는 제1전구(전북의 북부지구와 충남)와 제2전구(전북의 남부지구)가 있었다. 제1전구에는 충남 빨치산 5백 70명을 68사단으로, 전북북부지방 빨치산 7백 명을 45사단으로 각각 개편했다. 제2전구는 전북 남부에 있는 각 유격대를 46사단, 53사단으로 개편했다. 직속부대로는 81사단, 92사단, 602사단이 있었다.
이들은 지리산에도 병기수리소를 설치하여 하루에 1천발의 탄환을 만들었으며 병원시설도 있을 만큼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1951년 7월부터 노동당은 남한지역에서 제2전선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각 지대유격대 체제로부터 당 사업을 주로 하는 지구당 체제로 개편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3)기능과 역할

남부군단 예하의 지리산 빨치산은 남부군의 직속부대인 제81, 제92사단과 경남도당 사단인 제57사단, 그리고 전북도당 사단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여순 10.19사건 당시 반란군 출신 중 생존해 있던 인원과 북한군 전투부대의 낙오병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비교적 전투경험이 많은 병력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으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과 덕유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한국군과 유엔군의 보급로 차단, 차량약탈, 지서습격, 차량기습, 통신망 절단, 살인, 방화 등을 자행하였으며, 이들의 행동은 전후방 한국군 전투력에까지 영향을 주었고 민심을 크게 동요시켰다.

(4)현황

한국군은 남부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2개 사단 규모의 토벌부대를 편성하여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군단급 ‘백야전전투사령부’ 창설을 명령하였다. 토벌작전이 개시되자, 기동타격부대는 지리산을 남북으로 양분하여 북쪽은 제8사단이, 남쪽은 수도사단이 담당하여 공비 주력을 타격하였고 저지부대는 빨치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백야사 예하 부대들은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 일대 전투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대부분 토벌하였고, 핵심지도자 대부분을 사살하거나 포획하였다. 백야사의
전과는 작전기간 동안 사살 포로 투항 등을 포함하여 1만 6천여 명에 달했고 노획무기도 3천여 정을 상회하였다

(5)의의와 평가

6.25전쟁 기간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단은 지리산, 덕유산 일대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전체 전선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과 국민들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한국군이 빨치산 토벌작전을 위해 군단급 규모의 부대를 전선에서 이동시키게 하여 한국군의 전투력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남부군  주도세력은 일제시대부터 국내에서  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 활동을 해온 조선공산당 (박헌영)계열로 알려지고 있다 남부군은 한국전쟁 이전에는 각 지역에서 폭동과 반정부 투쟁을 주도했고 인민전쟁론을 주도했다 인민전쟁론은 주민들의 민심과 함께 지하정부(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인민군이 남침을 할때 무장투쟁으로 각 지역을 점령하는 전쟁이론이다

일부에서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남부군 주도세력을 북한 인민군으로 확인하고 있지만 본래 남부군은 조선공산당 주축 남로당의 지하정부(인민위원회)이다 지하정부는 한국전쟁 이전에는 폭동과 반정부 투쟁 그리고 남침이후에는 합법화 각 지역 인민위원회 구성,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남부군으로 빨치산 투쟁과 월북으로 어어졌다

박헌영의 한국전쟁 패전 책임과 미국간첩으로 처형됨으로서 남로당계열 내부 조선공산당은 사실상 와해 되었다

남로당 이후 당(黨) 수준 조직으로는 1960년대 박정희 군부의 5.16 쿠데타이후 김일성주의 노선 통일혁명당이 등장했고 1990년대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민혁당)가 등장했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남부군(조선 공산당) 출신은 다음과 같다

ㄱ.박헌영(1900년생, 충남 예산군)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총비서

한국전쟁 당시 군사위원회 위원, 인민군 총정치국장[육군 중장]

한국전쟁 패전 책임과 미국 간첩 총살형(1958년)

ㄴ.이승엽(1905년생, 경기도 부평군)

조선공산당 활동과 남조선노동당 경기도 책임자

한국전쟁 당시 서울시장, 인민유격대 총사령관(강동정치학원 운영. 강동정치학원은 유격전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관이다)

반당종파분자와 미국 간첩 총살형(1954년)

ㄷ.배철(1912년생,경기도 개성)

남로당 경상북도 위원장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유격지도처장

 미국 간첩 및 정부 전복 음모 혐의로 재산 몰수형과 함께 사형 선고

ㄹ.방순표(1906년생, 경상남도 거제군)

남로당 활동, 대구 10월 1일 사건 가담

한국전쟁 당시 전라북도 도당 위원장(전북 도당 유격대장)

1954년에 덕유산에서 토벌대와 전투 중에 생포될 위기에 놓이자 자폭하여 사망했다

ㅁ.박영발(1913년생,경상북도 봉화군)

남로당 활동

한국전쟁 당시 노동당 전남도당위원장(전남 유격대장)

1953년 5월 사망

ㅂ.이현상(1905년생, 충청남도 금산군)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활동

한국전쟁 당시 강동정치학원 유격대 출신으로 남부군 사령관

남부군은 1951년 5월 26일 충북도청 소재지 청주를 기습하여 여러 관공서를 불태우고 청주형무소의 좌익수 백사십이명을 석방시켰다. 6월 초, 민주지산에 자리를 잡고 인근 도시와 경부선 군용열차를 습격하였다. 6월 중순 덕유산 송치골에서 남한 6개 도당 위원장을 소집해 남부군 결성에 합의하고 총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8월 14일 참모장 박종하가 가회전투도중 사망하자 이현상의 남부군은 지리산으로 다시 들어갔다. 11월 말부터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의 토벌 작전이 거세지면서, '조선인민유격대 독립4지대'로 개편된 이현상 부대는 어려운 처지에 몰렸다.

1952년 1월 18일 군경토벌대에 쫓기던 지리산 일대 유격대와 좌익피난민 등 이천여 명이 대성리 골짜기에서 포위되었다. 미군이 네이팜탄 등을 투하하여 천 명 이상 죽거나 체포되었고, 독립4지대도 한 달 만에 4백명이던 대원이 백오십 명으로 줄어들었다.

1953년에는 대한민국 영역에 남은 유격대의 지위에 대한 언급 없이 한국 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1953년 7월 27일에 6.25 동란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 체결 1주일 후인 8월 3일에는 평양에서 박헌영이 정식으로 구속되고 리승엽 등은 처형되었다. 남로당 지휘 계통에 있던 이현상은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경상남도 서부 지역을 책임지는 제5지구당 위원장직에서 물러나 평당원으로 돌아갔다.

이현상은 모든 직책을 잃고 하산을 계획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토벌대가 하동군 빗점골에 숨어 있던 이현상을 추적하여 대략의 위치를 파악했다. 9월 17일에 토벌대는 빗점골을 포위했고, 이튿날인 9월 18일 오전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이현상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당시에도 이현상을 사살한 공을 놓고 차일혁이 이끄는 경찰 수색대와 김종원의 국군 부대가 다툼을 벌였고, 이태 등은 북한의 지시로 암살되었다는 소문을 기록한 바도 있어 정확한 사망 경위는 알 수 없다. 사망 날짜는 국군이 시신 발견 전날인 9월 17일로 추정했다.

이현상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서울로 이송되었다. 동향 출신의 친구인 유진산 임영신 등 지인들이 시신을 찾아와 확인했다. 빨치산의 최후를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창경원과 도로변에서 바지만 입힌 채 유품과 더불어 20여일동안 전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현상의 가족들은 대부분 월북한데다, 남은 친척들은 한국 전쟁 중 고초를 당해 시신의 인수를 거부했다. 결국 토벌군 측의 차일혁이 섬진강에서 화장해 장례를 치러주었다.

 

ㅅ.김선우

전남 보성군 출생인 김선우는 일제 강점기 공무원으로 일제에 부역하다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직책상 조선로동당 전남도당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오갔으나 군사 조직에서는 전남 지역 유격대 사령관으로서 유격전을 전담하였다. 이는 전남도당 위원장인 박영발이 과거에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을 때 고문을 받아 다리를 절었기 때문이다. 박영발의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 움직임이 민첩하지 못한 신체적인 한계 때문에 군사 작전을 김선우가 주로 맡게 되었다. 김선우는 구빨치 출신으로서 풍부한 유격전 경험을 갖추고 있었다. 이현상과 박영발의 연이은 죽음 이후 조선인민유격대의 마지막 잔존 세력을 이끌던 중, 백운산 아지트에서 토벌대의 포위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김선우가 사망한 1954년 4월 5일을 조선인민유격대가 붕괴한 날로 보기도 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다.

ㅇ.김달삼

대구 출신인 김달삼은 일제 강점기부터 사회주의 운동가로 유명했던 강문석의 사위로, 제주도에서 교사로 재직한 지식인이었다.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 책임자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되어, 1948년 대한민국 제헌 국회 총선으로 단독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반대하며 봉기한 제주 4·3 사건을 총지휘했다. 태백산에서 유격대를 이끌다가 한국 전쟁 발발 전에 사살되었다고 알려졌다.

ㅈ.남도부

남도부의 본명은 하준수이며, 1921년에 경남 함양군의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 주오 대학에 재학 중 태평양 전쟁 학병 징집을 거부하며 지리산에 은거며 보광당을 결성하였으며 해방후 여운형의 건국준비 위원회에 가담하였다. 보광당은 조선인민유격대로 이어졌고 남도부는 이현상과 쌍벽을 이룬 빨치산 지도자가 되었다. 1954년 대구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다.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의 주인공이다.

ㅊ.김지회·조경순 부부

김지회는 여수·순천 사건 당시 대한민국 육군 중위로서 반란을 주도했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가 김지회 부대로 불리는 유격 부대를 이끌었다. 제1공화국 정부 수립 2개월 만에 발생한 이 사건은 전남 동부 지역을 순식간에 장악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당황하게 했고, 주변 지형에 익숙한 향토 게릴라가 정규군을 괴롭히는 전형적인 국면으로 들어섰다. 김지회는 홍순석과 함께 지리산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지휘하던 중, 1949년 4월 뱀사골 전투 후 사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간호사 출신인 김지회의 부인 조경순은 여성 유격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전향을 거부함으로써 그해 9월 사형에 처해졌다.

ㅋ.리인모

1917년 함경북도 풍산군에서 태어난 리인모는 조선인민군 종군기자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전쟁 중 낙오하여 지리산에서 조선인민유격대에 합류하면서 신빨치가 되었다가 1952년 체포되었다. 이후 총 34년 동안 복역하면서 전향하지 않고 비전향 장기수로 남았다. 리인모는 인민군 출신이며 전쟁 중 붙잡혔다는 점 때문에 전쟁 포로로 대우하여 북송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장기 방북 형식을 빌려 송환했다. 북한은 리인모를 “신념과 의지의 화신”이며 살아남아 끝까지 투쟁한 유격대원의 모범으로 높이 칭송하고 있다.

 

                                                                                           지리산의 주요 아지트 위치

 

                                                                                                     지리산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민주화 정부-"
*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사기업(私企業)[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사기업은 산업사회와 고도소비사회 기반이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
-Guide Ear[머리소리함] 許灌-

1950년 10월 19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압록강 도하

                                                                                중공군 14개 사단이 압록강을 도하하고 있는 모습

1950년 10월 19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압록강 도하를 시작했다. 이날 이후 중공군 18개 사단이 압록강을 통해 한반도로 진입, 한국전에 개입했다.
이 날은 38선을 돌파한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한 날이다(백선엽 장군이지휘하는 국군 1사단은 이보다 4일 전인 10월 15일 평양에 진입했다).

미국이 한국전 발발 이틀 뒤인 6월 27일 해군과 공군을 한국에 파병하고 제7함대를 대만 해협에 출동시키자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는 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미국이 대만을 침략한 것이라고 비난, 중국의 한국전 개입을 예고했었다.

중국은 한국전 개입을 ‘항미원조(抗美援朝)’로 부르고 있으며 ‘집과 국가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것(保家衛國)’으로 규정하고 있다.

 

서울을 점령한 북중(朝中)연합군

                                       1950년 12월 북중(朝中)연합군 창설과 중국 인민해방군 한국전쟁 개입[김일성과 팽덕회 모습]

1951년 1월 4일 북중(朝中)연합군[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북중(朝中)연합군[중공군]이 38도선 이남과 서울 그리고 한강이북을 점령한 후 축배를 즐기는 모습과 한강 이남을 점령하기 위하여 정찰하는 모습

모택동은 38도선 이남 월경과 서울 점령을 승인했다

*한국전쟁(6.25 동란) 중 북한을 지지하고 도왔던 국가들은 어떤 나라들입니까? 공식적으로 중국과 체코슬로바키아등 2개국

북한의 전격적인 남침은 유엔내에서는 유엔군을 구성하여 북한의 불법적 남침을 격퇴하려고 하였습니다. 소비에트연방(소련의 정식명칭)은 유엔의 투표에서 국제여론을 의식하고 기권을 하였으며 반대가 없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결성되어 전장에 투입되었습니다.

 당시 유엔군은 한국을 제외한 16개국이 군사적 지원을 하였으며 비공식적 지원국은 2개국, 의료지원국은 5개국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북한의 경우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지원을 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은 비공식 지원국이었습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가 의료지원을 하였습니다(소련은 유엔에서 한국전쟁 참전 결의안 선거에서 기권을 했으며 한국전쟁 개입을 하지 않았으며 한국전쟁 이후 소련 공산당 출신 허가이나 박헌영등이 북한 권력에서 제거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중국 공산당 출신 김일성이가 북한 권력을 장악했다. 한국전쟁 때 인해전술 떼거리 중국 인민해방군 100만명이 희생했다 중국도 남북지역 구분으로 한국전쟁을 지지하는 세력은 한족보다는 남부지역 1억 규모 인구 장족과 만주지역 다수 민족인 거란, 만주족등이 지지하는 입장이다 이들은 한국전쟁과 한족이 전쟁에 개입할 때 독립운동과 세력확대로 새로운 군사대국으로 등장을 시도해왔다 중국지역에서 한족 이외 다른 민족의 인구 3억에서 4억 규모이다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 출신으로 중국인, 만주인, 조선인 연합군 소련 극동사령부 88특별여단 소속 대대장 출신이다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만주지역과 한반도지역 점령한 후 중국인과 조선인 혼성군 88특별여단 주축으로 중국 내전 공산혁명에 주력부대었다 임표 동북3성 총사령관으로 만주국을 소련군과 함께 점령하는 데 큰 공헌을 했으며 중국내전 승리에  결정적  지위와 역할을 했으며 내전승리 이후 조선의용대 출신 지원과 함께 남침을 추진했다 임표, 팽덕회 동북 3성등이 한국전쟁 배후세력으로 활동했다 임표는 모택동 다음 2인자로 문화혁명 주도와 중미수교 이후 모택동을 암살하려다가 실패이후 소련으로 망명 도중 살해되었다 중국정부 내부 반미 친북 김일성세력이 소련군 지원세력이다 임표나 김일성등은 소련군 즉 KGB 조직원이었다 이들 소련방위대로 중국과 북한에서 활동해왔다 중국 동북 3성이 남침을 도와줄때 북한정부가 남침을 할 것으로 본다 중국과 미국 수교이후 조국을 소련으로 생각하는 소련 공산당 전위대가 대부분 제거되었다 중국이나 북한 내부 공산주의 세력 태자당 출신이 과거처럼 외국세력에 아부할 가능성도 있다)

 

*2차대전 때 소련측 연합군 만주국 무력점령과 동시에 동북3성 소련군 88특별여단(임표등 팔로군) 장악 그리고 소련군 88특별여단 조선족(한국인) 출신이 소련군과 함께 38도선 이북지역 점령--->동북3성 주력부대 임표등 중국내전 개입-->중국 모택동부대 본토 장악---->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동북 3성 조선족(한국인) 북한 인민군 주축으로 구(舊) 일본 관동군 탱크로 남침-->남한지역 남로당이 지하세력이 무장봉기와 인민위원회 구성--->일시적으로 남한 점령-->유엔 한국전쟁 개입과 유엔군 구성-->유엔군 38도선 이북지역 진격---->중화인민공화국(중공군) 개입과 38도선 이남지역 진격--->정전협정 체결

-중화민국 장개석부대는 중국 남부지역 장악과 인도, 영국군 연합으로 동남아 점령을 했지만 동북3성이 모택동부대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만주지역에서 세력 상실

-극동지역과 일본 북해지역 소련군 장악 

-이승만 토지개혁으로 평민층 지지기반 확대와 인민위원회 설치로 공개재판으로 남한지역 민간인(양민) 처형 학살, 전쟁물자 현지에서 조달하는 약탈전쟁 방식등으로 남한지역 평민층 저항으로 북한정부 전면적 전쟁이 패배했다고 평가.  유엔이 남한과 일본등 그리고 동남아 공산화(공산정부 등장)에 대한 우려  

 

*민주전선 입장에서 남북 평화통일 준비

남과 북 통일은 전쟁이 아닌 민주전선 입장에서 평화통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민주전선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 세력)와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세력) 연합정부입니다

민주전선 입장에서 남과 북통일은 만주지역을 중국정부 영토로 인정하며  극동지역은 러시아정부 영토로 인정합니다

만주지역이나 극동지역이 중국 소수민족 영토로 인정하여 독립국으로 등장하는 것을 사전에 와해(제거)할 수 있는 군사적 동맹을  중국, 러시아정부와 협력할 수도 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정부는 북한  좌익군정과 협력하여 만주지역이나 극동지역 소수민족 독립운동 세력 등장 그리고 전쟁을 추진하는 세력 등장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이며 공산주의 반대는 민주주의가 아닌 자본주의입니다

 

1단계 세습제 좌익군정 타도와 사회민주주의 세력 북한권력 장악[민주전선 구축]

2단계 민주연합(민주공화국이냐 연방공화국이냐)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사회민주주의 세력 연합정부 구성]

3단계 국가수립[남북한 권력분배]

동북아(아시아 태평양) 자유무역협정과 동북아(아시아 태평양) 연합군 단일군사기구 창설[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인도, 통일한국등]

남과 북 통일은 북한정부 스스로 중국 등소평정부처럼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여 남북한 합의 평화통일 하는 방법도 있고, 북한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노동계급의 령도 노농연맹(勞農聯盟)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공화국)를 타도하고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공화국)를 수립하여 남북합의 평화통일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북한정부는 대남 돈(자금 제공장소)을 원하고 있으며 친북 대남 재한총련(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서울) 합법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남북평화공존 때는 친북세력이 평화세력이 될 수 있지만 남북냉전시대 때는 친북세력이 무장투쟁 전쟁세력이 될 수 있습니다[친북 대남 재한총련(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서울)이란

한국 내부 북한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사회주의 국가(김일성 김정일주의)를 지지하는 동포들이 결성한 단체가  반제민전 중앙위원회(재한총련)이다. 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재한총련) 는 지하조직으로 실질적 친북단체이며 명목상(의례적) 친북 합법조직은 범민련(범청학련)이나 민중당 내부 NLPDR계열 단체들이다.

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재한총련)는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주의)를 지지하고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전선 소속단체이며 대남공작기구[ 통일전선부 산하기관인 제225부(구 대외연락부)]이다. 대표적인 단체는 통일혁명당과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이다

재한총련(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서울)도 재중총련 조직처럼 범민련 조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재일총련처럼 남한정부 대표부(북한 통일전선부 대화창구) 성격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이 돼야 민주당(공화당)과 공산당(노동당, 사회당)을 차별화할 수 있습니다

민주국가는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정부라면 사회주의 국가는 노동계급의 령도 노농연맹(勞農聯盟)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 독재정부, 프롤레타리아 독재정부)입니다

 

우파는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를 지지하는 분들을 말한다면 좌파는 노동계급의 령도 노농연맹(勞農聯盟)의 사회주의 국가(인민공화국이나 사회주의 공화국)를 지지하는 분들을 말합니다

우파는 입헌군주국을 인정하지만 좌파는 공화국만을 인정합니다

 

한국정부 내부 좌파는 친북세력 즉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북한정부(주체사상, 김일성주의)를 인정하는 세력을 지칭하고 있으며, 우파는 북한 김일성 정부(김일성 가계 김정일, 김정은정부)를 공산주의 독재체제나 전체주의 독재정부로 인정하는 세력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우파와 좌파에서 진보와 보수와도 구분해야 합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전체주의(독재주의)이며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 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국가)는 우파세력으로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 자유무역)를 지향하는 세력을 보수세력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생존권, 보호무역)를 지향하는 세력을 진보세력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지만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인정합니다 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입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국영자본체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정부입니다. 민주국가는 대부분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공화국 대통령, 국가주석이나 입헌군주국 수상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 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습니다

민주국가는 경제 토대는 자본주의이며 정치 토대는 민주주의입니다

 

한국은 민주국가(민주공화국)로 진보세력을 인정하지만 좌파 사회주의 국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친북세력이 사회주의 국가를 지지하는 좌파세력이고 좌파세력 조직도 친북성향입니다

중국 모택동 노선 마스-레닌주의(교조주의, 공산주의)는 공산주의 세력으로 사회주의 국가만을 인정하는 세력이며 등소평 실용주의 노선은 자본주의를 인정하는 수정주의로 자본주의 세력으로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사회민주주의 세력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모택동을 좌파라면 등소평은 우파입니다, 중국 실용주의 우파정부(사회주의 국가 실용주의 우파정부) 내부에서  등소평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진보파가 아닌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보수파입니다 강택민, 호금도전주석을 등소평파(실용주의자)라면 습근평(시진핑) 주석은 모택동파(마스-레닌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남한의 국정(國政)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공화국)이고 사회구성체는 민영자본체제(民營資本體制)입니다

북한의 국정(國政)은 노동계급의 령도 노농연맹(勞農聯盟)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공화국)이고  사회구성체는 국영자본체제(國營資本體制)입니다

 

-우파 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 이론[民營資本體制]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聯邦共和國)

-국정(國政, 民國)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이다

-중화민국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기초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이다.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있다.

-국정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 [일본국 헌법]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프랑스 국민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규정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 보완된 인권과 국민주권의 원리, 그리고 2004년 환경헌장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상기의 원리들과 각 국민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공화국에 결합하기를 희망하는 해외영토들에게 자유· 평등· 박애의 보편적 이념에 입각하고 그들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제도들을 제공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자유· 평등· 박애를 국시로 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원칙으로 한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개인과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이를 준수하며 수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국민투표와 자유선거는 국민에 의한 최고의 직접적인 권력행사이다.

러시아연방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이 허용된다.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국가이념이나 의무적 이념으로 규정될 수 없다.

러시아 연방에서는 정치적 다양성과 복수정당이 허용된다.

모든 사회단체들은 법앞에 평등하다. [러시아연방 헌법]

*미합중국 헌법[민주국가 헌법]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http://blog.daum.net/007nis/15876066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전문

http://blog.daum.net/007nis/15871495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성향 독일 바이마르 헌법(1919)과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로부터 해방법률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독일 통일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048

*군국주의 대일본제국 헌법 전문과 평화주의 입헌군주제 일본국 헌법 전문[민주국가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4623

*러시아 연방 헌법[Конститу́ция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민주국가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6072

*中華民國 憲法(중화민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57658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

http://blog.daum.net/007nis/15875575

*몽골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1736

 

-좌파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공화국) 이론[國營資本體制]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라오스 그리고 쿠바 등 5개국에 불과하다.[노동계급의 노농동맹(공산당) 령도(領導, 지도) 인민의회정부론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주의 국가](많은 분들은 노동자 국가를 지향ㄹ하고 있는 이탈리아 파시즘이나 독일 나찌즘을 극우라고 표현하지만 좌익 파시즘으로 표현하고도 있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 3 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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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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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헌법(2013년 개정)[민주공화국 형태 사회주의 헌법]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는 인민에 의한(民治), 인민을 위한(民享) 인민의(民有) 사회주의 법치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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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3공화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476

 

1957년 10월 15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중공중앙)이 ‘우파분자 분류 표준에 관한 통지’를 발표하였다.[모택동주의 노선 중국 공산당이 분류한 자본주의민주주의 세력(수정주의자) 우파와 극우세력 동향]
이에 따른 우파는 다음과 같다.
1) 사회주의 제도를 반대하는 자 .
2) 무산계급의 독재와 민주집중제를 반대하는 자 .
3) 공산당의 국가 정치생활 중의 영도적 지위를 반대하는 자 .
4) 사회주의와 공산당을 반대함으로써 인민의 단결을 분열시키려는 자 .
5) 사회주의를 반대하고 공산당을 반대하는 소집단을 조직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 일부 분야 혹은 일부 계층 단위에서의 공산당의 영도를 뒤엎으려는 자 공산당과 인민정부를 반대하는 소란을 선동하는 자.
6) 앞에서 규정한 우파분자의 범죄활동을 지지하고, 관계를 맺으며 또 통신하여 혁명조직의 기밀을 보고하는 자.

통지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극우분자로 분류했다.
1) 우파활동 중의 야심가, 지도분자, 주모분자와 핵심 분자.
2) 공산당과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강령성 의견을 제출하고 이 같은 의견을 적극적으로 고취한 자.
3) 사회주의 반대활동에 특별히 악랄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한 분자.
4) 역사적으로 일관되게 반공산당, 반 인민 활동을 전개해 왔으며 최근의 우파활동 전개 시에 적극적으로 반동활동을 한 자.

 

중공중앙의 이 통지는 반우파 투쟁을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건국 후사회주의 개조과정에서 후펑(胡風본명은 장광런張光人) 비판 등의 부르주아사상 비판 캠페인으로 위축되어 있었던 지식인의 활동을 적극화시키기 위해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운동을 제창했다.
중국문화가 꽃핀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자유로운 언론활동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마오쩌둥(毛澤東)이 명명했고, 1956년 5월 중국공산당 선전부장 루딩이(陸定一)가 '백화제방·백가쟁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 지식인의 자유로운 발언을 호소했다.
당초 지식인의 반응은 매우 소극적이었으나 1957년 5월 '언자무죄(言者無罪 : 무엇을 말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라는 방침에 고무, 일제히 발언하기 시작, 중국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속출했다.
마오의 생각은 이 운동을 통해 이왕의 사회주의 건설을 정당화하고 강화하자는 것이었으나 순식간에 체제를 부정하는 단계로까지 치닫자 자신이 고무한 이들의 발언을 "'우파' 분자에 의한 반당·반사회주의적 '독초'"라고 매도하고, 같은 해 6월 '반우파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의 모순을 비판했던 공산당원들 다수가 반우파 분자로 몰려 숙청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였다. 29세이던 1957년 당적박탈과 강등 조치를 당한 주룽지는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이 ‘우파분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5년 동안 노동개조를 받기도 했다. 그는 마오쩌둥이 사망한 2년 뒤인 1978년 당적을 회복하고 사회과학원 공업경제연구실 주임에 임명되면서 ‘개혁 총리’로서의 미래를 예비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일본 공산당 "2단계 민주연합정부론과 미래에 사회주의적 변혁을 목표"

http://blog.daum.net/007nis/15875883

 

일본 공산당 "2단계 민주연합정부론과 미래에 사회주의적 변혁을 목표"

일본 공산당 깃발은 박애, 우애, 동무의 상징 빨강색(공산주의 상징 붉은 색) 바탕에 하나로 합쳐진 민주주의 혁명, 민주 통일전선 ,  국제 통일 전선, 일본 공산당 건설을 각각 나타내는 4 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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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산당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당의 기본 방침으로 한다

일본 공산당은 2단계 혁명이론 NLPDR노선으로 우선 대미 종속과 대기업의 지배에 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미래에 사회주의적 변혁을 목표로 한다

1단계로는 반미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며 2단계로는 노동계급 령도 노농동맹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 국가 수립이다

 

1단계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革命)

2004 1월 제 2 차 당대회 개정 강령에서 일본 사회가 필요로 하는 변화는 사회주의 혁명(社會主義 革命)이 아니며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 革命)과 민주연합정부(民主聯合政府)'의 목표로 내세웠다

대기업 재계와 대미 종속 세력으로부터 일본 국민(日本 國民)의 이익을 대표하는 세력에 권력 이양을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혁명이라고 평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가능한 민주적 개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대기업 재계와 대미 종속 세력에서 일본 국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세력으로의 권력 이양을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혁명으로 자리매김하고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가능한 민주적 개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일본 공산당은 현재 일본 사회가 요구하는 변화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다음의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하였다

 

.국가의 독립 · 안보 · 외교 분야(分野)

대미 종속을 타파하고 미일안전보장조약(日米安全保障条約)의 폐기(廃棄)와 비동맹(非同盟 중립(中立)의 일본을 실현한다. 미국과 대등 평등(対等平等)

의 우호 조약(友好条約)을 맺는다 등등

.헌법(憲法)과 민주주의(民主主義) 분야(分野)

()헌법 전문을 포함한 모든 내용을 지키고, 특히 평화적 민주적 조항(平和的民主的諸条項)의 완전한 이행을 목표로 한다.

()의회 민주주의의 체제 반대 당을 포함한 복수 정당제 선거에서 다수를 얻은 정당 또는 정당 연합이 집권하는 정권 교대(政権交代)는 당연히 견지한다.

()18세 선거권을 실현한다.

()일본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억압하는 모든 시도를 제거한다. 남녀평등(男女平等)의 권리(權利)를 모든 분야에서 옹호하고 지킨다.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고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에 철저를 도모한다. 등등

.경제적 민주주의(経済的民主主義)의 분야(分野)

()장시간 노동과 일방적 해고 규제를 포함해 유럽 주요 자본주의 국가와 국제조약 등의 도달점도 근거로 '규칙 있는 경제사회'를 실현한다.

()대기업(독점 자본)에 대한 다양한 민주적 규제(民主的規制)와 군축(軍縮), 불필요한 공공 사업의 중지, 대기업 · 재벌 우대 세제의 재검토를 재원으로 한 사회보장의 충실 등등.

 

이상(以上)의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革命)에 의해 일본은 미국의 사실상의 종속국의 지위에서 벗어나 진정한 주권을 회복하고, 국내적으로도 국민이 처음으로 나라의 주인공이 된다. 또한 일본은 군사적 긴장의 근원임을 멈추고 평화의 견고한 초석으로 바뀐다.

 

이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 革命)에 대한 입장 1961년 강령에서는 ""일본의 당면한 혁명은 미국 제국주의와 일본의 독점 자본의 지배, 두 적()에 반대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혁명, 인민민주주의 혁명(人民 民主主義 革命)이다"라고 되어 있고, 1994년의 강령까지 거의 동일한 표현을 했다

2004년 강령 개정 당시에는 '다수자 혁명'이나 '의회의 다수를 얻어 혁명의 노선'이라는 설명이 이루어졌다

 

민주주의 혁명의 과정: 통일전선에 근거한 민주연합정부(民主連合政府) 구상(構想)

 

일본 공산당은 일본 공산당(日本共産党)과 통일전선(統一戦線)의 세력이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어 국회에서 안정된 과반수를 차지한다면 통일전선(統一戰線)의 정부(政府) 즉 민주연합(民主聯合) 정부(政府)를 만들 수 있다는 입장으로 단독 정권(単独政権)이 아닌 통일전선(統一戦線)에 기반한 연합정권(連合政権)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 "국회를 명실상부한 최고기관으로 하는 의회제 민주주의 체제(議会制民主主義 体制)

, 반대당(反対党)을 포함한 복수정당제, 선거에서 다수를 얻은 정당 또는 정당연합이 정권을 담당하는 정권교대제(政権交代制, 정권교체)는 당연히 견지한다.

 

 '통일전선(統一戦線)'은 역사적으로 1945년의 강령에서는 모든 민주주의 세력의 결집에 의한 인민전선(人民戰線)의 결성 올바른 실천적 목표 아래 협동할 수 있는 모든 단체 및 세력과 통일전선(統一戰線)의 결성한다고 되어 있다

1947년의 강령에서는 광범위한 민주전선으로 1961년부터 2004년까지 강령에서는 '민족 민주 통일전선(民族民主統一戦線, NLPDR)'으로 표현 되었다

 '민족민주통일전선 정부(民族民主統一戦線政府)' '혁명정부(革命政府)'로 전환한다고 하고 있었지만, 2004년 강령 개정에서는 이 규정은 삭제 되었다.

2단계 사회주의적 변혁(社会主義的変革)

일본 공산당은 즉각 민주주의 혁명 이후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의 합의를 전제로 국회의 안정된 과반수를 얻어 사회주의를 위한 권력을 만들고 다음의 사회주의적 변혁(社会主義的変革, 사회주의 국가)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극복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社會)로의 진전(進展)을 도모(圖謀)

.주요 생산 수단의 소유, 관리, 운영을 사회의 손에 옮기는 생산수단(生産手段)의 사회화(社会化)

.민주주의와 자유의 성과(成果), 자본주의 시대의 가치 있는 성과(成果)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 발전시킨다

.사상 신앙의 자유, 반대 정당을 포함한 정치 활동의 자유를 엄격하게 지킨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사상 신조의 자유, 반대 정당을 포함한 정치 활동의 자유는 엄격하게 보장된다."며 일당 독재(一党独裁制)와 지도 정당제(指導政党制)는 채택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또한 소련형 사회주의(連型社会主義)의 관료주의·전제(専制)의 잘못은 반복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선언"에 더 자세히 설명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주로 이념적인 내용이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헌법(憲法), 정부(政府), 군비(軍備), 의회(議会), 사유 재산제(私有財産制)의 범위 등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일본 공산당은 이러한 미래 세대가 창조적으로 해결 과제이며, 지금부터 고정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가 고도로 발전하면 착취와 억압을 모르는 미래 세대는 "원칙적으로 일체의 강제가 없는 국가 권력 자체가 불필요하게 되는 사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도 없고 억압도 전쟁도 없는 진정한 평등 자유로운 인간 관계로 이루어진 공동 사회에 대한 전망이 열린다고 한다.

또한 이 사회주의적 변혁' 1961년 강령에서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표현이었다는 것으로, 1994년에 사회주의적 변혁이라는 표현으로 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의 낮은 단계이다라고 하는 두 단계 발전론이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정설이었으나 마르크스, 엥겔스 자신은 그런 구별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두 단계 발전론을 그만두고 2004년 강령 개정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라는 표현으로 변경되었다 .

 

대북정책과 대남정책

머리소리함 Guide Ear요원들은 대북정책과 대남정책을 잘 이해하여 생활화 해야 합니다 대북정책과 대남정책을 이해하지 못할 때는 제거돼야 할 요원입니다

남한(대한민국)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이며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1.대북정책-민주연합정부(민주국가) 수립론

1단계: 북한지역의 민주연합정부 구성

북한지역의 민주연합정부론은 북한정부 입장으로 북한 내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를 지지하는 민주세력이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사회주의 국가를 지지 하는 전체주의 김정은 독재정부를 타도하고 개혁개방세력 즉 민주화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북한정부에서도 북한정부 의회 내부 민주연합정부론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민주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연합세력이 권력을 장악해야 가능하다

-주체연호(주체사상, 김일성 김정일주의) 폐지

-김일성 가계 권력(주체연호 세습제 좌익군정) 타도

-김정은 퇴진과 민주정부 수립

-북한 김정은 독재정부 붕괴는 국제적으로 친북 좌파세력 붕괴를 가져올 수 있다

-국영자본체제 해체와 민영자본체제 도입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 붕괴 원인:

국영자본체제(국가자본주의 체제), 권위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의, 부정부패, 소련 극동군의 군사 점령, 경제 붕괴, 집단살해, 철의 장막, 종교 박해, 권력 남용, 강제노동, 숙청, 가난, 테러 등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 수립 목적:

경제적 자유와 민영자본체제, 남북 통합, 자유 선거, 자본주의, 언론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인권, 노동권, 민주주의 등

 

2단계: 남북민주연합 공동정부(민주국가) 수립

북한 지역 민주정부와 남한지역 민주정부의 연합으로 공동정부(민주국가)를 수립하는 방법이다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사회주의 국가 타도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수립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 자료 http://blog.daum.net/007nis/15875575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

대한민국 헌법 Ⅰ.제1공화국[제헌헌법] 4281년 7월 12일 제정 1948년 7월 17일 공포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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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남정책-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 수립론

1단계: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반미 반일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구축].

남한지역에서 반미 반일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구축은 1차적으로 민족주의 노선 반미, 반일전선으로 좌우익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우파 민족주의 세력과 연합, 친미 친서방 세력 제거와 반미 반일정부를 수립하고, 2차적으로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구축으로 우파 민족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제거하고 공산주의자 주도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방법이다

-반미, 반일전선구축과 극렬 민족주의 노선 정부 수립(민족해방전선)

-인민 민민주주의 독재체제 구축(인민회의정부론)

의회는 내각을 불신임하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하지 못한다

권력이 의회에 집중 돼 있고 내각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있다. 공산주의 국가나 자국 사회주의 헌법 국가들은 공산당이나 노동당, 사회당의 1당 독재 국가체제로 당 총서기나 당 총비서가 내각 수상이나 국가주석이다

-미국, 일본등 서방세력을 몰아내고 우파 민족주의 세력조차도 타도한 후 자국사회주의 노선 김일성 김정일 유일사상 주체사상파 주도로 남한정부를 장악하게 하는 모델(남북한 주체사상파 연합정부론)

 

2단계: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 수립.

김일성, 김정일주의 이외 모든 주의나 세력 숙청과 김일성, 김정일 유일사상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 수립이다

-김일성, 김정일주의 이외 기타 노선이나 세력 숙청(김일성, 김정일 유일사상)

모택동주의자나 마스-레닌주의자 그리고 친중국이나 친러시아 세력 제거(숙청)

김일성 추종세력(김일성주의) 이외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숙청이나 제거

-북한 인민군이 모든 권력 장악

북한 노동당 당원은 군인이다. 현역군인이나 군() 경력이 없으면 원칙적 북한 노동당 당원이 될 수 없다

북한정부 대남정책은 1단계로 노동자계급이 령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중국식 사회주의 국가수립이며 2단계로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김일성 김정일 유일사상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북한 헌법)

*북한헌법 자료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3공화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476

 

북한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제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제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제3공화국 헌법)- Ⅰ.북한 제1공화국 헌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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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12월 중순경 머리소리함 Guide Ear로 태어날 때부터 생존 당시까지 뇌 기억이 검증된 26년 경력 머리소리함 요원 허관(許灌)[머리소리함 Guide Ear는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민족민주혁명당(반미청년회, 자주대오) 등을 해체 하는데 사용됨]-

"Form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 to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a.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국영자본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

b.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정부(민주국가)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聯邦共和國).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공화국 대통령, 국가주석이나 입헌군주국 수상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 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