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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아웅산 폭탄 공격: 잊혀진 생존자, 강민철 본문

Guide Ear&Bird's Eye/테러단체,간첩등 수집.조사연구

아웅산 폭탄 공격: 잊혀진 생존자, 강민철

CIA bear 허관(許灌) 2019. 10. 21. 19:17


"아웅산 테러는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특공대인 정찰중대 소속의 진모 소좌(본명:김진수), 강철민(본명:강영철) 상위, 신기철 상위 등으로 밝혀졌었다. 이들이 소속된 부대(강창수부대)의 지휘관 강창수 소장은 6.25 당시 인민군 총참모장으로 있다가 전사한 강건의 아들이다[전두환 회고록2. 청와대 시절 자료]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은 소련 극동군 제88독립저격여단(소련군 각 민족 빨치산부대)을 모방한 특수부대이다 소련 극동군  제88독립저격여단은 중국 공산당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해방 후 만주파 김일성, 김책, 강건, 최현, 오진우 등 빨치산부대로 지금까지 그들의 후손들이 북한 권력을 장악해오고 있다"


1983109일 아침, 버마 랑군(현재의 미얀마 양곤)엔 가는 비가 내렸다.

아웅산 묘소에선 당시 한국 전두환 대통령 일행의 참배가 예정돼 있었다.

오전 1028, 행사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현장은 폭발음과 화염으로 뒤덮였다.

북한 공작원 세 명의 폭탄 공격으로 현장에 있던 장·차관과 정치인 등 21명이 숨졌고, 전 전 대통령은 행사장에 늦게 도착해 3분 차이로 목숨을 건졌다.

체포 당시 28, 북한군 대위 강민철은 사건 주범 중 유일한 생존자로 2008년 미얀마에서 사망했다.

BBC 코리아와 BBC 버미즈는 아웅산 폭탄 공격 36주기를 맞아 강민철의 행적을 되짚어 봤다.

사건 25년 이후 양곤 도로 한복판에서 숨을 거두기 전까지, 그에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는 왜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을까. 그가 마지막까지 그리워했다는 조국은 한반도 어느 쪽이었을까. [BBC 자료


전두환 회고록2. 청와대 시절 자료(514-517쪽 내용)

아웅산 폭탄 테러사건  자료

 버마정부는 사건발생 25일 만인 11월 4일 최종수사 결과를 발표한 데 이어 생포한 범인 2명을 특별재판에 회부했다. 이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을 퉁해 범인 3명의 신원은 개성에 있는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특공대인 정찰중대 소속의 진모 소좌(본명:김진수), 강철민(본명:강영철) 상위, 신기철 상위 등으로 밝혀졌었다. 이들이 소속된 부대(강창수부대)의 지휘관 강창수 소장은 6.25 당시 인민군 총참모장으로 있다가 전사한 강건(姜建)의 아들이다

1983년 8월 강창수는 부대원 가운데 가장 우수한 이들 3명을 선발해서 "최고위층의 특별한 명령"이라며 임무를 부여했다 

진모 소좌(김진수)를 조장으로 한 3인조 특공대원은 개성에서 특수훈련을 받고 9월 9일 옹진항에서 화물선으로 위장한 북한의 공작선 "동건애국호"를 타고 9월 15일 랑군항에 도착했다  동건호는 하역작업을 끝냈지만 선박을 수리한다는 이유로 며칠간 더 체류할 수 있도록 허가 받았다 그 사이에 9월 22일 이들 3인은 랑군시에 잠입해서 북한 대사관 정무참사관 전창휘 집에 은신했다는 것이다

이후 10월 6일 현장을 답사하고 다음날 새벽 2시에 진모 소좌(김진수)의 지휘로 아웅산 묘소 지붕에 3개의 폭발물을 설치했다

한 개는 원격조종으로 터지게 되어 있는  고성능 폭탄 그리고 나머지 한 개는 증거인멸을 위해 화재를 일으키도록 하는 소이탄이었다

 

북한 공작원들이 고도의 특수훈련을 받은 테러리스트였고, 또한 북한이 외국의 주권이나 국제법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 폭력집단이라고 하지만 아웅산 폭발 사건 같은 무지막지한 테러가 자행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버마 사회의 허점과 하급관리들의 부패 고리가 개재되어 있었다

다음해인 1984년 1월 "워싱턴포스트"는 버마정부가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과 관련해서 20여명의 하급관리와 민간인을 체포했다고 보도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사건이 있기 2주일 전 랑군항에 정박한 북한 선박으로부터 북한 테러범들의 불법 상륙을 도와준 세관 및 출입국 관리, 나룻배 사공,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성역인 아웅산 묘소에 돈을 받고 북한 공작원들을 출입시킨 묘소 관리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묘소 관리인은 평소에도 돈을 받고 연인들이 아웅산 묘소에서 데이트를 즐길 수 있게 해주었고, 심지어 창녀들이 매춘장소로 이용하는 일도 돈만 받으면 묵인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보를 입수한 북한 공작원들은 묘소 관리인을 매수해서 밀회를 가장하여 여자들을 데리고 들어가 폭발물을 설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1월 22일부터 시작된 1심 재판은 12월 9일 10차 공판까지 이어져 두 명 모두 사형이 선고됐다. 국선변호인들이 제기한 상고와 재심청구는 다음 해인 1984년 초 각각 기각됐고, 마지막 절차로써 구명을 청원했는데, 진모 소좌(김진수)에 대해서는 탄원이 기각되어 1985년 4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러나 강민철(강영철)에 대해서는 집행을 보류했다 자백을 해서 수사에 협조한 점이 참작이 된 것일 터였다 진모 소좌(김진수)는 처음부터 묵비권을 행사하며, 자신의 신원조차 밝혀지 않았다  이에 비해 강민철은 처음에는 허위로 진술하고 비협조적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버마 수사당국은 완강하게 버티는 진모 소좌보다는 강민철이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고 특별한 대책을 세웠다

여자 간호사를 강민철에게 배치해서 정성을 다해 친절하게 돌봐주도록 했다 북한 사회에서 자라고 특수부대의 훈련만 받아 온 젊은 강민철로서는 그처럼 따뜻하고 인간적인 대접은 처음 받아보는 일일 터였다.

체포된지 3주쯤 지난 11월 3일 드디어 강민철은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강민철이 이처럼 심경변화를 일으키게 된 데에는 또 한 가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조국인 북한에 대해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강창수 부대장이 이들 공작원들에게 지급한 수류탄은 적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할 무기가 아니었다. 안전핀을 풀고 버튼을 눌러야 터지는 것이 아니고, 안전핀만 풀면 바로 폭발하는, 말하자면 자폭용 수류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모소좌도 그랬듯이 강민철도 자폭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데, 자신의 수류탄이 터지는 바람에 부상한 것이었다. 북한은 이들에게 범행한 후 랑군항에 정박해 있는 동건호로 복귀하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 날짜에 동진호는 이미 출항하고 그 곳에는 없었다

북한은 이들이 임무를 수행한 뒤 버마를 탈출해서 돌아오기를 기대한 것이 아니고, 북한 소행이라는 증거를 남기지  않도록 없어져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뒤늦게 이 같은 경위를 알게 된 강민철은 북한에 대해 배신감을 느껴 자백을 하게 된 것이다

 

 강민철과 관련해서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강민철이 2000년을 전후해서 한국으로 오기를 희망했고 미얀마정부도 강민철을 석방할 의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정부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끝내 옥사하게 만든 사실이다

김대중 대통령 때 국가정보원 해외담당 차장과 국가안보 보좌관 등을 지낸 나종일 박사는 "아웅산 테러리스터강민철"이라는 책에서 강민철이 우리나라에 오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을 풀지 못한 채 옥사한 경위를 밝히면서 깊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김대중 노무현정부 시절 우리의 정보당국에서는 강민철과의 접촉을 통해 그가 처벌을 각오하고라도 한국에 갈 의사가 있음을 확인했다. 정보당국의 고위 관계자가 강민철의 희망대로 한국에 데려오라고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북한의 눈치를 보는 김대중정부에서는 실현될 수 없었고, 노무현정부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미얀마정부는 석방해줘도 갈 곳이 없는 강민철을 20년 이상 장기복역시킬 수 밖에 없었고, 결국 강민철은 옥중생활 25년째인 2008년 5월 병사하고 말았다

 김대중 노무현정부 시절 KAL기 폭파범 김현희를 우리 정부가 조작해낸 범인이라고 몰고 가려던 일련의 책동과 함께, 지금까지도 아웅산 폭탄 테러가 조작된 것이라고 억지 쓰는 북한이 더 이상 궁지에 빠뜨리지 않으려고 배려해야 경위가 언젠가는 밝혀져야 할 것이다 [ 전두환 회고록 내용]


 

한국영화 "조총련[朝總聯]"

1974년 일본 요코하마항에 북한 선박 만경봉호가 나타난다. 이 소식에 접한 조총련 본부는 긴장된 분위기에 휩싸인다.
한편 조총련 내부의 의장 한덕수와 부의장 김병식 사이의 보이지 않는 세력다툼은 만경 봉호의 선장 강명수의 등장으로 새로운 양상이 전개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덕수의 경호원 김창욱과 그의 애인이자 한덕수의 비서인 이정숙은 희생의 제물이 된다. 또한 강명수 역시 김병식의 계략으로 입장이 난처해지기에 이른다.
결국 조총련은 이러한 갈등을 모면하고자 1975년 8월 15일 문세광을 파견하여 대한민국 대통령을 저격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조총련[朝總聯]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 중에서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

   

-한덕수(韓德銖)

한덕수(1907218~ 2001221)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초대 중앙상임위원회 의장이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경상북도에서 태어나 1927년 성악가가 되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니혼 대학 중퇴후 노동운동에 참가했다. 1934년 조선인 노동자의 파업을 이끌었다가 체포됐다. 19451015일에 결성된 재일본조선인련맹(조련)에 참가해 총무부 담당 위원에 선출됐다. 1955525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결성후 의장단 6명에 포함됐다. 19585월 제4회 전체대회에서 의장단이 해체되고 단일 의장, 부의장제가 도입되자 의장에 선출됐다. 2001년 사망할 때까지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있었다. 1967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됐다. 1972년에는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4년 김일성이 죽었을 당시 기준으로 서열 4위였다.

 

 

-문세광(文世光)

문세광(19511226~ 19741220)은 박정희 전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던 재일 한국인으로, 일본식 통명은 난조 세이코(일본어: 南条 世光)였다.

 19511226일 일본 오사카 시에서 석면 제품 제조업자로 일하던 문병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적은 경상남도 진주(진양)이다. 세이키 상업고등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강성숙과 결혼했다. 문세광은 원래 오사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이쿠노키타(生野北) 지부에 가입했지만 고등학교 시절에 김일성 선집(통일혁명당 그룹), 마오쩌둥 어록(적군파 그룹) 등을 탐독하면서 좌익 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19739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이쿠노니시(生野西) 지부 정치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김호룡(金浩龍)을 처음 만난 문세광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하고 있던 박정희를 암살해서 인민 봉기의 기폭제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197310월경에는 자신의 여자 친구이자 공범인 요시이 미키코(吉井美喜子)에게 대한민국에서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전달했고 197311월에는 공작금 50만 엔을 받았다.

문세광은 19742월에 도쿄도 다이토 구 히가시우에노(東上野)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인 가와카미 유지(川上勇治)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병원에 입원했다. 19745월에는 오사카에 정박 중이던 만경봉호에서 사상 교육을 받았다. 문세광은 1974717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 사이에 오사카 시 주오 구 고즈(高津) 파출소의 창문을 깨고 침입했다. 문세광은 경찰관 4명이 잠을 자고 있던 사이에 실탄 5개가 들어간 권총 2자루를 빼냈다.

문세광은 자신의 여자 친구였던 요시이 미키코의 남편이었던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의 호적 등본을 이용해서 여권을 신청했다. 81일에는 오사카 경찰이 문세광이 작성한 "전투 선언"이라는 문서를 발견했다. 86일에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트랜지스터 라디오 속에 권총을 감췄고 88일에 김포국제공항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위조된 여권을 이용해서 대한민국에 입국한 문세광은 815일 광복절 경축행사가 열린 국립극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저격하였다. 1심 최후진술을 통해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해줄 것"이라고 말한 문세광은 항소심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국민전체에게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지금 과오를 깊이 늬우치고 있으니 올바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면 감사하겠다"고 했으나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옥중수기를 통해 "나는 조국의 하늘 아래 살고싶다 암살목적으로 고국 땅을 밟았을 때 조국의 하늘이 이처럼 푸른 것을 처음 알았다"고 말했지만 1974121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고 그로부터 3일이 지난 1220일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74년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북한이 영향력을 뻗치고 있던 일본의 해외동포단체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의 지령을 받았다."고 한다. 다른 쪽에서는 문세광이 공산주의를 믿었던 단순한 공산주의자로 분류하기도 한다.

출생

19511226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 시

사망

19741220(22)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

사인: 교수형

성별: 남성

부모

아버지 문병태, 어머니 육말란

배우자: 강성숙

 

-일본지역 통일혁명당(한국민족민주전선) 대표부
북한정부는 4.19혁명 후 노동당 <3호청사>내 대남공작부서 중 통일전선부 조국통일위원회 산하 조직으로 1964년 무렵 남한지역에 <통일혁명당>을 창당하였고 1968년 경 간첩 김종태등을 검거 된 후 와해되었고 그후에도 북한정부는 세계 각국 북한정부 비공식조직으로 통일혁명당 대표부를 조직 설치하여 반미투쟁과 대남공작활동을 해왔다
일본지역 통일혁명당 대표부가 1960년 후반기 창당하였고 1986년 8월 8일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로 개칭하였다
문세광이가 활동한 조총련 산하 한국청년동맹이 북한정부 <3호청사> 통일전선부 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인지가 규명돼야 할 부분이다
통일혁명당(한민전)이 남한지역 출신 친북 김일성주의자들의 모임이고 투쟁 단체이다
박정희정부는 1974년 8월 15일 문세광 저격사건 이전에 남북협상으로 김성주와 이후락 남북회담이 추진되었고 남북냉전분위기보다는 화해분위기었다 남북화해분위기에서 유신헌법 공표와 유신선거로 남북냉전분위기로 전환과정에 일어난 사건이다


-만경봉호(萬景峰號)

만경봉호는 북한에서 건조한 페리선이다. 처음의 만경봉호는 1971년 건조되어 재일 조선인의 북송선으로 이용되었으며, 처음의 만경봉호가 노후화됨에 따라 1992년에 김일성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해서 만경봉-92가 건조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원산시에 있는 해운회사가 소유한 여객선으로, 주로 일본의 니가타와 북한의 원산시를 운항하였다. 여객선명은 평양직할시 교외에 위치한 만경봉에서 따왔다.

만경봉-921992년에 건조되었으며, 만경봉호의 건조비용은 모두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자금에 의해서 조달되었다.

 

2002년 아시안게임 당시 북한 응원단을 태운 만경봉호가 부산 다대포항에 입항한 바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1585번지 일원에 통일아시아드 공원이 2008127일 준공되었다.

 

2018년 동계 올림픽 당시 응원단과 인력을 태운 만경봉호가 임시로 묵호항에 입항하였다.

 

2011년에는 나진~고성(장전) 금강산지구간 항로에 투입되는 여객선으로 활용되었다. 2014년 보도에 따르면, 나진항 2번 부두에 정박된 채 녹슬어가고 있다고 한다.



-대외연락부[對外連絡部]

조선로동당 내에는 대외연락부(사회문화부), 통일전선부(통전부), 작전부,35호실(대외조사부) 4개의 대남 관련 부서가 존재해 왔다. 그 중 대외연락부는 남한 내 지하당 구축을 전담해온 대표적인 대남부서이다.

 

통일전선부는 대남외교를 주관하는 부서로서,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 간의 접촉과 교류·협력의 전면에 나서고 있는 관계자들이 전부 통일전선부 소속이다. 35호실은 해외정보를 수집하고 해외인사를 포섭·매수해 남한에 투입시키는 등 제3국에서의 대남사업을 주관하며, 작전부는 남한 내 고정간첩을 통한 정보획득이나 임무부여, 대남침투요원 안내 및 호송 요인 저격·납치 등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7년 북조선로동당 ‘5로 창설되었다. 6·25전쟁기 남한지역내 게릴라부대의 지하당공작 과정에서 대남공작기구를 확대하면서 당 조직부내의 연락부를 분리했다. 19614차 당대회에서 남한에서의 지하당 조직확대와 통일전선 강화 등의 결정과 함께 내무성 등의 대남공작기구를 통합해 중앙당 연락국을 신설했다. 1964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48차 전원회의에서 ‘3대 혁명력량 강화노선을 채택하면서 종래의 연락국을 대남사업총국으로 개칭했다.

 

19661012일 당중앙위원회 414차 전원회의에서 비서국이 신설되면서 대남사업담당비서 산하에 연락부’, ‘문화부’, ‘조사부’, ‘인민무력부정착국’, ‘조총련부서를 두었으며, 19781월 통일전선부가, 1990년대 후반 35호실(대외정보조사부)과 작전부가 신설됨으로써 대남담당부서의 체계가 구축되었다. 남한 내 정당, 사회단체, 군부에 대한 공작거점 및 공작전술 연구개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간첩교육과 파견을 직접 담당하고 있으며, 조총련에 대한 활동지도도 담당하고 있다

   

1.대외연락부 주요 책임자

(1)정경희( 1987년까지 대외연락부 부장 출신)

남한출신으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 위원까지 올랐다가 은퇴한 거물 여간첩 정경희가 부장으로 있던 부서도 대외연락부였다

.이름--정경희(사망)

.출생일과 출생지---1928년생이며 남한출신

.직책--전 당 중앙위 연락부장

.학력--금강정치학원과 당 중앙당 학교, 송도정치경제대학 수료

--이선실과 정경희등은 대남공작원 교육원 금강정치학원 출신--

.경력

1960년 함남도당 선전부 지도원. 도당 교육부 부부장

1967년 당 중앙위 연락부 과장

197011월 당 중앙위 연락부장

1973년 당 중앙위 문화부 부부장

19755월 당 중앙위 연락부장

198010월 당 중앙위 위원과 당 중앙위 정치국 후보위원

19822월 최고인민회의 제7-8기 대의원

19966월 사망


(2)강관주(강주일, 현직 대외연락부 부장)

()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강주일(본명 강관주)이 대외연락부장으로 발탁되면서 통일전선부가 관할하던 재일 조총련 관리 업무도 대외연락부에서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다

강주일은 사회문화부를 개편 확대하여 대외연락부로 개편했으며 대남공작부서 대외 연락 업무등을 취급하고 있다.

.이름--강주일(본명 강관주)

.출생일와 출생지--193075일생이며 남한 출신

.학력--김일성종합대학교 졸업

.주요 경력

()755월 대외문화연락 위원회 국장

()904월 최고인민회의 제9--10기 대의원

()908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947월 당 통일전선부 제1부 부장

()971월 당 대외연락부 부장

()987월 최고인민회의 제 10기 대의원

()9912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20013월 당 비서국 통일전선부 제1부 부장

.주요동정

강주일(본명 강관주) 대외연락부장은 대일교섭이나 활동 그리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활동등이 뚜렷하다 일본통으로 알려지고 있다

()775월 최고인민회의 대표 단원 자격으로 일본 방문

()833월 평양 학생 소년 예술단 고문 자격으로 일본방문

()909월 평양예술단 일본 공연시 동행

()919월 보천보 경음악단 단장으로 일본 방문

()925월 만성간염 치료차 방일, 도리노몽 병원 입원

()977월 조총련 업무지도차 일본 요코하마 방문

 

 

2. 대외연락부 주요 대남공작 활동

대외연락부(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으로는 199210월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2개월 앞 두고 터져나온 남한 조선노동당 사건의 주역인 여간첩 이선실, 신세대 공작원으로 불리는 무장간첩 김동식(9510, 충남 부여서 체포), 15대 대선직전 적발 체포된 부부 간첩 최정남, 강연정등이 있다

 (1)한국민족민주전선과 대외연락부 관계

한국민족민주전선은 통일전선부 지하조직이며 북한정부 대외정책을 추진하는 정찰 요원이다 대외연락부는 통일전선 조직 한국민족민주전선을 각 단위별로 연락으로 장악하고 있다

통일전선부가 남한정부의 통일부라면 대외연락부는 반미통일구국전선을 배후에서 총지휘하는 단체이다

ㄱ.이선실과 중부노동당(한민전 서울대표부내 중부지역당)

ㄴ.김동식과 삼민투위 관련자 조직사업(한민전 서울대표부내 반제그룹조직화)

ㄷ.최정남과 영남위(한민전 서울대표부내 영남지역 주체사상파 조직화)

ㄹ.민혁당 사건---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반미청년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남한재야세력 중 친북세력(주체사상파나 반미인민전쟁론자) 구심체가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로 표현하며 그 세력들을 북한노동당과 연락선이 바로 대외연락부 소속 공작원이라는 뜻이다

통일전선부는 대외적으로 통일전선 구축으로 오픈화(합법화)하고 있다 친북 통일관련 단체들이 바로 통일전선부 산하 남북 외곽단체들이다

 (2)대외연락부 활동 요원들의 주요 경력 특징

ㄱ.정경희나 이선실 모두 남한 출신이라는데 특징적이다

ㄴ.금강학원 출신 대부분이다(이선실이나 정경희 모두 금강학원 출신이다)

ㄷ.대외연락부 공작원들은 남한 친북세력과 연계 도중에 체포나 검거 되었다

ㄹ.통일혁명당이나 민혁당 모두 대외연락부 공작원 활동 주 무대로 알려져왔다(대외연락부 공작원을 남로당 정치고문단으로 표현하는 것이 올바른다)

 

-일본 적군파([赤軍派, Red Army)

본래 이름은 연합적군(聯合赤軍).

1969년 2개의 극좌파가 연합하여 이루어진 일본의 테러리스트 단체..

1948년 형성된 일본학생운동의 통일체인 전일본학생자치회연합이 60년대 안보투쟁을 벌인 뒤 분열되자, 이 중 마오쩌둥식 무력투쟁을 주장하며, 트로츠키주의를 신봉하는 공산동맹에서 분리, 69년 발족한 단체이다. 4백여 명의 호전분자들로 구성된 이들은 일체의 기존체제를 파괴한다는 폭력제일주의를 주장하였다.

1970년초에 적군파는 일본 항공의 항공기를 여러 대 납치하고,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로드 공항에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으며(1972), 여러 나라에서 대사관을 점거하는 등 주요 테러 작전을 잇따라 감행했다

72년 적군파 내의 호전적인 다원들이 동료 온건파 14명을 처형하고 경찰과 대치한 연합적군사건이 있은 뒤,내부적으로 심각한 분쟁을 겪었고, 이 파벌 싸움은 일본 사회는 충격에 빠졌고 정부는 단원 대부분을 체포했다. 폭력 대상을 해외로 돌려 팔레스타인인민해방 전선(PFLP)과 유대를 맺고, 74년까지 공동테러를 벌여왔다. 74년 이후 시게노부후사코를 두목으로하여 싱가포르·네덜란드·말레이시아 등지에서 테러를 일으켰으나, 국제경찰의 추적과 조직 이탈로 거의 와해 되어오다가 소련붕괴 이후 조직이 거의 해체되고 있다

일본 적군파는 모택동주의자들이다

적군파는 미군을 몰아내고  일본 입헌군주국을 타도하고 로동계급(공산당, 좌익연합)이 령도하고 로농동맹에 기반을 둔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의 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 공화국)를 건국 목표로 구성된 조직이다

적군파는 모택동주의자들이다

통일혁명당은 김일성주의자들이다

적군파나 통일혁명당의 주요이론은 아시아의 사회주의 총사령관 모택동의 사상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이론이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그를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후에 그는 바트당(아랍 사회당)을 조직한 사담 후세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 북한의 주체사상 김일성, 리비아의 카다피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련 공산당 스탈린 일국 사회주의 이론이 독일 노동자당 히틀러 국가사회주의 이론 비슷한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국영 자본체제) 이론이다  소련 공산당은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과 소련 공산노동당 그룹이 있다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이 수정주의자(실용주의자)라면 공산노동당 그룹이 교조주의자들이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은 북한의 정치 단체이다. 흔히 조국전선으로 약칭한다.

1.개요

19496월에 평양에서 남한의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북한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통합하여 창립되었다. 북한 노동당을 포함하여 북한의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단체이다.  

단체의 목적은 북한 노동당의 정책, 특히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정책을 지지하며 옹호, 관철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남한에 대한 대남 활동을 펼치는 것이 주요 기능이었지만, 현재는 정당 및 사회단체의 연합체로서 총선거 후보자를 배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2.배경

민전의 통합은 남조선로동당과 북조선로동당의 합당으로 조선로동당이 탄생한 것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미군정 시기인 19462월에 박헌영과 여운형, 허헌 등이 만든 단체이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소군정 영역에서 김일성과 김두봉, 최용건 등이 주축이 되어 구성되어 있었다. 모두 사회주의 계열의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해 창립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다. 이에 1949625일부터 평양에서 회의가 열려 두 단체는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으로 통합했다.

 

3.기능

북한에서는 이 단체를 "노동계급이 영도하는 노농동맹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우리나라의 모든 애국적 민주주의 역량을 묶어 세운 강력한 정치적 조직체"로 규정한다. 북한 노동당의 통일전선 전술의 전위를 맡고 있었으며, 대한민국 내의 북한 노동당 지지 세력을 단합시켜 북한 노동당과 연계 활동을 펼치는 것이 목적이었다.

 

주요 활동은 대한민국에 대한 성명과 담화, 기자회견 등을 통해 여러 제의와 선전 활동을 펼치는 것이었다. 한국 전쟁 전의 대표적인 제의로는 19505월의 총선거 실시 제의가 있다. 남북한의 통일된 입법기관을 설립하기 위한 총선거를 함께 실시하자는 내용이었다.

 

최고 기구는 중앙위원회이며 산하에 하부조직과 단체를 두고 있다. 북한 노동당 비서를 지낸 김용순과, 여운형의 딸 여원구, 남한 출신인 류미영 등이 공동 의장을 역임한 바 있다.

 

1961년 창설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과 유사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현재는 각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총선거 후보자를 배출하는 연합체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북한 선거에는 후보자가 한명밖에 입후보하지 않는다.

 

일본 조총련이나 남한 친북세력 김일성 김정일주의(주체사상이나 선군사상) 단체[한국민족민전선 서울대표부] 그리고 해외 친북세력 김일성 김정일주의(주체사상이나 선군사상) 단체들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통일전선] 하부조직으로 활동하면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1.제1공화국 헌법[인민회의정부론-인민민주주의 노선]

(1)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내각수반 김일성 수상]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48825일에 열린 북한의 최초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572명을 선출하였다.

1948629일부터 75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2차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서는 먼저 1차 협상의 성과를 재확인했다. 그에 따라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고, '남북조선 대표자들로 조선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이 결정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북에서는 총선거를 통하여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남에서는 공개선거가 불가능한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이중 비밀 지하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ㄱ.선거

(ㄱ)이북 선거

북쪽에서는 825일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오전 6시에 시작한 투표는 여섯시간만인 오후 12시에 마감되었다. 투표율은 99.97%였다. 선거구 212개에 후보는 모두 1217명이었다. 그중 227명이 북한 노동당을 비롯한 주요정당들의 연합체인 북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후보였다. 단일 후보로 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15개 지역에서 복수 후보가 출마했다. 투표는 흑백함에 찬성 또는 반대표를 던지는 찬반 투표였다. 유권자들은 212명의 공동 후보에게 98.49%의 찬성표를 던졌다. 이렇게 이북지역의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212명이 당선되었다

 (ㄴ)이남 선거

 이남에서는 공개선거가 불가능한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이중 비밀 지하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해 7월 중순부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거할 대표자들을 선출하는 '예비선거'에 돌입했다. 선거관리는 남쪽의 남한 노동당과 중도파 정당들이 연합하여 만든 '조선최고인민회의 남조선대의원선거지도위원회'에서 담당했다. 선거방식은 선거운동원들이 후보자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다니며 찬성하는 사람들의 도장이나 손도장을 받는 것이었다. 선거가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공정성이나 대표성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남조선 대표자' 1080명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823일부터 25일까지 해주에 모여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위한 남조선 인민 대표자대회' 본회의를 개최했다. 대회 마지막날 북측의 8.25 총선에 맞춰 대표자들은 대의원 360명을 선출했다. 남과 북에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572명이 선출된 것이다[

ㄴ.선거결과

선출의석: 572

과반의석: 287


북한 노동당(김일성 노동당 비서)  157석 

북한 민주당(최용건 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35

북한 천도교청우당(김달현 천도교청우당 당수)  35

인민공화당 20

근로인민당 20석 

인민공화당 20석 

기타 정당 171

무소속 114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는 다음과 같다

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소련 육군 극동사령부]은 스탈린 부대(일국 사회주의노선, 자국사회주의 성향 사회주의(민주사회주의) 그룹]이며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은 모택동부대[신민주주의 노선, 인민민주주의 그룹],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은 레닌부대[공산주의 노선, 마스-레닌주의 공산당 그룹]이다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조선공산당 출신이 과반수 이상 의석을 획득했다


(2)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내각수반 김일성 수상]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57827일에 열린 북한의 2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215명을 선출하였다.

19568월 종파사건 이후, 한국 전쟁으로 실시되지 못했던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치뤄졌다. 전쟁으로 인해 휴전선 이남에 대한 선거가 완전히 불가능해짐에 따라 휴전선 이남 지역구에 대한 선거는 실시되지 않았다.

선거 결과

선출의석: 215

과반의석: 108


북한 노동당 (김일성 노동당 비서)  178

북한 민주당(최용건 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1

천도교청우당(김달현 천도교청우당 당수)   11

근로인민당 3

인민공화당 3

불교연합 2

건민인민연합 1

민주독립당 1

기타 5



한국전쟁 이후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북한 군부를 장악한 북한 노동당이 크게 압승했다 


(3)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내각수반 김일성 수상]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62108일에 열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3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383명을 선출하였다

선거결과

선출의석: 383

과반의석: 192


북한 노동당 (김일성 중앙위원장) 371석 

북한 민주당(최용건 중앙위원장)  4석 

천도교청우당(박신덕 중앙위원장)  4석 

근로인민당 1석 

불교연합 1석 

건민인민연합 1석  

민주독립당 1


 제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북한 군부를 장악한 북한 노동당이 크게 압승했다 


(4)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내각수반 김일성 수상]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671125일에 열린 북한의 4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457명을 선출하였다. 최초로 재외국민에 대한 선거권이 인정되어 조총련이 진출하였다

선거결과

선출의석: 457

과반의석:229

 

노동당(김일성 노동당 총비서)  288

조총련(한덕수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의장)  7

천도교청우당(박신덕 중앙위원장)  4

북한 민주당 1

불교연합 1

기타 156


김일성 수상의 장기집권에 대한 거부감과 중공의 대미, 대일수교 정책으로 반미전선이 위축되어 북한 군부세력 기반이 위축 되었다.


2.제2공화국 헌법[사회주의 공화국-자국 사회주의 주체사상]

(1)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 수반 겸 행정부 수반 김일성 주석]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721212일에 열린 북한의 5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541명을 선출하였다


선거결과

선출의석: 541

과반의석: 271


노동당(김일성 노동당 총비서)  127

조총련(한덕수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의장)   7

천도교청우당(박신덕 중앙위원장) 4

북한 민주당 1

불교연합 1

기타 401석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노동당이 크게 패배하고 인민민주주의 노선 인민회의정부론 인민공화국을 포기하고 자국 사회주의 국가 주체사상과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21227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회의에서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을 채택하여 북한 제2공화국을 선포했다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닉슨 독트린 정책으로 베트남 전쟁의 포기와 중화인민공화국(중공)과의 관계개선, 주한 미군의 부분적 철수및 동아시아에서 냉전기류의 해체경향의 영향을 받아 남북간의 관계를 모색하고 경제적 현실을 고려하여 '선건설 후통일' 정책에서 평화통일 3원칙을 통해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남북간 경직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선평화 후통일' 정책으로 바꾸어 현재까지 통일정책의 기본원칙이 되고 있다. 7·4 남북 공동 성명 남북 간 합의문서를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내외적인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곧 박정희 정부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장기 집권을 꾀하였고, 북한도 주체사상 헌법을 개정하여 유일 지도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친미 친서방 친남한 평화공존세력보다는 반박정희, 반미세력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주체사상) 성향 인사들이 대거 당선 되었다



 

(2)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 수반 겸 행정부 수반 김일성 주석]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771111일에 열린 북한의 6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579명을 선출하였다.


(3)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 수반 겸 행정부 수반 김일성 주석]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82228일에 열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7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15명을 선출하였다


(4))제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 수반 겸 행정부 수반 김일성 주석]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86112일에 열린 북한의 8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55명을 선출하였다


(5)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 수반 겸 행정부 수반 김일성 주석]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90422일에 열린 북한의 9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87명을 선출하였다.

선출의석: 687

과반의석: 344

 

북한 노동당(김정일 총비서)  601

북한 사회민주당(이계백 중앙위원장)  51

천도교청우당(류미영 중앙위원장)  22

조총련 13


3.제3공화국 헌법[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

(1) 김정일정부- 세습제 좌익군정-주체연호와 선군정치

ㄱ.제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군 통수권자 최고사령관 김정일 국방위원장]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98726일에 열린 북한의 10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87명을 선출하였다.

유훈통치가 끝나면서 1994년 김일성 사망으로 연기되었던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결과

선출의석: 687

과반의석: 344

 

노동당(김정일 총비서)  594

북한 사회민주당(이계백 중앙위원장)  53

천도교청우당(류미영 중앙위원장)  23

조총련 7

기타 10

 

ㄴ.제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군 통수권자 최고사령관 김정일 국방위원장]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200383일에 열린 북한의 11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87명을 선출하였다.


ㄷ.제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군 통수권자 최고사령관 김정일 국방위원장]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200938일에 열린 북한의 12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87명을 선출하였다.

선거결과

선출의석: 687

과반의석: 344

 

북한 노동당(김정일 총비서)  606

북한 사회민주당(김영대 중앙위원장)  50

천도교청우당(류미영 중앙위원장)  22

조총련 6

기타 3


(2) 김정은정부-김일성 ,김정일 헌법

 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201439일에 열린 북한의 13대 최고인민회의 선거다. 대의원 687명을 선출하게된다.

선출의석: 687

과반의석: 344

노동당(김정은) 607의석

북한 사회민주당(김영대) 50의석

천도교 청우당(류미영) 22의석

조총련 5의석

기타 3의석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在日本朝鮮人総聯合会)는 일본에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강한 소속감을 갖는 재일 조선인의 단체이다.

 

약칭은 조선총련(朝鮮総聯), 총련(総聯)이며, 대한민국에서는 조총련(朝総聯)이라고 부른다. 재일본조선인련맹을 모태로 1955525~ 526일 도쿄도 다이토구 아사쿠사 공회당에서 한덕수 의장의 발기에 의해 결성되었다.

 

일본 내의 사실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부이다. 련합회는 총련의 강령과 규약을 승인하는 모든 재일 조선인에게 개방되어 있다. 중앙 본부는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후지미 2-14-15에 있다

 

1.역사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는 1955525일에 결성되었고, 초대의장은 한덕수(韓德銖)이다. '재일본조선인상공인동맹''재일본조선인노동자동맹', '재일본조선인민주여성동맹' 등의 각 소수의 계층을 대표하는 단체들과 '재일본조선인인권위원회''재일본조선인평화통일위원회' 같은 시민단체들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 수가 수십여 개가 되고 있다. 그 중에서 학회는 고고학계의 전문학자들이 결성한 '고고학자동맹''사회과학연구소' 등이 있는데, 이 단체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단체들과 교류를 맺고 있다.

 

총련에서는 각 단체들을 운영하는 것 외에도 기관지인 조선신보를 발행하고 있다. 이 신문은 194510월에 창간되었는데, 처음에 이름은 우리신문이라고 불렸다. 그 후 1960년도에 민중신문과 해방신문으로 이름을 바뀌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 조선신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조선신보는 월요일과 목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발행되며, 영문판으로 The People's Korea(인민조선)을 발행하고 있다. 자매지는월간 조국(月刊 祖國)이다.

 

한편,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에서는 '조선학교'로 불리는 교육기관들을 운영하고 있는데, 초등교육기관인 '초급학교', 중고등교육기관인 '중급학교''고급학교', 대학교육기관인 '대학교'를 갖추고 있다. 이 학교들은 대부분 지방에 펼쳐져 있다. 대학교는 조선대학교가 있다.

 

2003년에 한덕수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의장이 사망하자, 서만술(徐萬述)이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의장이 되었다.

 

2012년에 현재 의장은 허종만이다.

 

2.개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재일본공민단체라고 자칭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및 조선로동당 지도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2013년 이후 조선로동당 소속 정보 기관인 통일전선부 산하 제225(구 대외연락부)의 지도를 받고 있다. 설립 당시는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조선적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민족학교의 운영과 조선적조선인 경영자를 대상으로 융자를 시행하는 등 일종의 상조회 조직으로 기능했으나 본국의 정치상황에 연동하여 그 실태는 변모해 갔다. 도쿄도에 중앙본부를 두고 일본 전역에 본부가 설치되어 있으며, 각지에 지부 조직이 있다. 중앙본부의 소재지는 도쿄도 지요다 구 후지미 2-14-15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법률상으로 조선총련 구성원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이지만, 그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실제 수는 알지 못한다. 일본에서는 국가로서 승인되지 않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은 인정되지 않고 있다. 조선총련의 구성원은 일본 법률상 조선적에 해당하는 사람이 많고, 또 대한민국 국적과 일본 국적을 가진 사람이 많으나, 대부분은 지리적으로는 지금의 대한민국 출신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지연, 혈연이 없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사실상 재일 자국민에 대해서는 이중국적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018년 현재, 허종만 의장을 비롯해 5명의 간부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국회의원)으로 되어 있다. 조선총련 출신자 중에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단장이 된 예도 있으며, 재일한국 조선인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발족 당시부터 공산주의를 지지했고, 그 후 냉전기 공산주의 진영을 지지하는 단체로서의 성격을 명확히 했다. 이것이 일본 정부와 경찰 등 치안기관과의 긴장감을 낳게 한 요인이 되었다.

 

(1)공안조사청의 조사

불법활동의 혐의가 있어서 공안조사청의 감시를 받고 있다.

 

(2)과세감면조치 철폐의 흐름

조선총련은 비자와 여권 발행 대리업무를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구로서, ‘외교기관에 준하는 기관이라는 명목 하에 과세감면조치를 받고 있었으나, 2002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총리대신의 방북 시 납치문제에 관여하였음을 인정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 내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련 조직과 시설에 대한 우대조치가 재검토되게 되었다. 도쿄 도의 고정자산세 감면조치 철폐 발표 후, 조선총련 시설이 사적 시설이며, 대일·대남 공작기관이다라는 현상에 관심이 향해지게 되었다.

 

2009년 현재, 전국 130개 지자체 가운데 전액감면하고 있는 지자체는 홋카이도 쿠시로 시 뿐이다. 또한 70% 이상의 지자체가 무감면조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도쿄 도의 조선총련 중앙본부의 부동산에 대한 고정자산세 등의 과세처분을 둘러싸고 등기상의 부동산 소유자인 합자회사 조선중앙회관관리회가 도쿄 도에 과세처분 취소 등을 요구하여 제소하였다. 1심과 2심은 청구를 기각하였다. 2009812일 대법원도 상고를 기각하여 총련측의 패소가 확정되었다.

 

(3)일본 정당과의 관계

조선총련 창립 이전에 재일조선인이 일본공산당에서 활동하였던 적도 있어서 일본 공산당과의 관계가 깊었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는 일본 사회당에도 접근하여 우호관계를 쌓았다. 일본사회당 좌파를 계승한 사회민주당과는 계속 우호관계에 있다. 사회당 출신의 민주당 의원에게 정치헌금을 했던 것도 판명되었다[2].

 

(4)지방 참정권

영주외국인에 대한 지방선거 참정권 부여 문제에 관하여는, 일본에서의 정치 참여가 재일동포의 민족의식을 희박하게 하여 일본사회로의 동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반대주장을 펴면서, 참정권 획득 운동의 중심인 민단과 정면대립하고 있다. 참정권이 야기할 당파분열을 우려하는 목소리와는 결론이 일치하고 있지만, 일관되게 일본에서의 정치 참여에 반대하는 의견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지 않고 있다.

 

(5)조선학교 수업료 무상화에 대한 공작활동

2010612, 조선총련이 조선학교 학부모들에게 문부과학성에 조선학교의 고등학교수업료 무상화를 요청하는 전화공세를 걸도록 할당량을 부과하였던 것, 또한 동시에 여러 명의 일본인 행세를 하여 전화횟수를 늘리도록 지시하였던 것이 내부문서에서 밝혀졌다. 산케이 신문은 총련의 무상화운동이 도덕성을 크게 일탈하였으며, 북한처럼 통제된 조직동원의 형태로 전개되었다는 실태가 명백해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조은신용조합의 불법송금에 조선총련 관계자의 관여가 의심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일본인 납치문제 추적이 진행되는 가운데, 납치사건을 비롯한 일본 국내에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불법활동(간첩, 불법송금, 마약, 권총판매 등)에도 많은 수의 조선총련 관계자가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 같은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추궁에 대해 조선총련은 악성 유언비어라고 주장하고 있고, 조선총련 관계 시설에 대한 강제수사에 대해서도 재일 조선인의 권리를 침해한다며 항의를 반복하여 왔다. 또한, 비판기사를 쓴 보도기관 직원에게 많은 항의를 하거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비판적인 단체의 집회를 조직원들이 폭력적으로 방해하였던 적이 있고,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재일조선인의 주권을 인정하면 역차별 등으로 이어진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1972년 당시 미노베 료키치 도쿄 도지사가 외교기관에 준하는 기관이라고 인정한 이래, 많은 지자체가 조선총련 시설을 사실상 외교 공관이나 공공시설에 준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고정자산세와 부동산취득세의 감면조치를 하여왔다. 이는 일본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이 국교를 정상화하게 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으로서 사용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기 때문이었다[4].

 

2003년 도쿄도는 조선총련 관련시설에 대해 소유자 대부분이 관련 기업(조선총련이 법인이 아닌 이유로)이거나, 외교와는 무관한 것으로 방침을 변경하여 일부에 대해 고정자산세를 부과하기로 하였다. 다른 지자체도 이에 따라 고정자산세 감면을 해제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한편, 종래대로 계속하려는 지자체도 있다. 조선총련과 일부 법학자는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여 행정소송에서 다투고 있다. 고정자산세 등의 감면조치를 둘러싸고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구마모토 모임加納良寛 회장이 구마모토 시장을 상대로 조선총련 시설 과세감면조치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하였고, 200622일 후쿠오카 고등법원이 공익성이 없는 조선총련의 활동에 대해 조세를 감면하는 것은 위법하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구마모토 시장이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기 때문에 최종적 결정은 대법원에 맡겨졌다.

 

또한 방위청(현 방위성)의 미사일 정보 유출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보도되었다. 조선총련 측은 이를 사실을 왜곡한 보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1)납치사건 관여

1973년 행방 불명된 사이타마현 가미후쿠오카 시 (현 후지미노 시) 여자의 조선족 아동 2명이 납치(2아동납치사건)되었는데, 그 여성의 남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작원이었고, 게다가 그 남편이 근무하였던 도쿄 무역회사 유니버스 트레이딩의 전직 여직원이 경찰당국의 조사에서 북한 본국의 판단을 요청했다등으로 진술하였다 일본 정부는 조선총련의 개입을 분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19786월 발생한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납치사건에 관여한 것이 명백하다

19806월 발생한 신광수(辛光洙) 사건(하라 다다아키(原敕晁) 납치사건)에 관여한 것이 명백하다

2007425일 경찰청 공안부는 가미후쿠오카 시 사건에 관하여 국외이송목적 유괴 혐의로 사건에 관여하였던 혐의가 강한 공작원들이 한때 활동에 참가하였던 재일본조선류학생동맹 중앙본부’(류학동) 등 조선총련 산하단체와 관련단체 등 4개소를 가택수색하였다[7]. 수색시 재일 조선인 남성이 공무집행방해로 체로되어 도미사카(富坂)경찰서에 연행되었으나(당시 혐의사실 고지는 하지 않았음), 5월 말 불기소처분되어 석방되었다[8]. 이에 관하여 가택수색 당시 수사관이 진입하는 것을 방해한 사람이 몇 사람 있었으나 TV에는 보도되지 않았었다.

 

또한 공안부는 도쿄도내 무역회사에 다수의 공작원이 입사한 경위 등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조선총련 서만술 의장, 허종만 책임부의장, 남승우 부의장을 참고인으로 조사하기 위해 같은 날 서면으로 출석을 요구하였으나 같은 해 426일 고덕우 부의장이 보도용 기자회견에서 거부하는 취지를 발표하였다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주장

1973년 재일조선인자제 실종사건에 대하여 일본 정부의 아베 신조 정권이 일련의 일본인납치사건에 결부시킨 정치적 민족 탄압이라고 주장하였다[10].

 

(2) 대대한민국 공작 협력

조선총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대남공작에 협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4815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기념일인 광복절 축하행사가 서울 국립극장에서 개최되던 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인 박정희의 처 육영수가 재일교포 문세광에게 사살당했다(문세광 사건). 문세광은 박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한국 경찰의 수사에 의하면 조선총련의 관여가 명백하였다. 이것은 적화통일을 목표하였던 문세광이 조선총련의 지원을 받아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 高津파출소에서 권총을 훔쳤고 한국 위조비자와 위조여권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대한민국 측의 주장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조선총련의 관여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대한민국 내에서는 반일감정이 높아져 한일 관계는 국교정상화 후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 일본이 이러한 태도를 취했던 것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정상화를 맺은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조선총련을 자극하지 않으려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실제 이 시기의 중조관계는 문화대혁명의 영향과 김일성이 중소분쟁에서 소련측에 붙었던 까닭으로 냉각되고 있었기 때문에 진위는 불분명하다.

 

또한,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북한을 방문하였을 때 김정일 총서기가 북한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죄하였기 때문에 조선총련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 공작에 관여하였다는 증거가 되었다.

 

(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우표에 등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종종 기념우표에 등장하고 있다. 1965427총련결성 10주년기념우표가 발행되었고 총련 건물을 배경으로 한일기본조약체결반대운동을 하는 군중이 그려지기도 하였다. 또한 북한 우정 당국은 1970, 1975, 1985, 2005년에도 총련 건물이 그려진 우표를 발행하였다.

 

(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귀환 운동

1950년부터 1980년대에 걸쳐 조선총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상낙원등으로 선전하여 재일조선인과 그 가족을 영주귀국, 이주시켰다. 1959년에는 대한민국 공작원의 방해 폭파테러와 조선총련 간부에 대한 테러 미수사건이 발생하였다(일본 적십자사 폭파미수 사건). 이것이 원인이 되어 2000년대 들어 탈북자를 중심으로 잇따라 조선총련에 대한 소송이 제기되고 있다.

 

재일조선인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귀환운동에는 산하단체인 중외려행사(中外旅行社)가 일부 개입하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20086월에는 일본 거주 탈북여성이 조선총련에 대해 오사카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소송을 제기한 여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지상낙원이다.’라는 조선총련의 거짓선전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환하였지만, 실제로는 가혹한 노동, 고문, 차별을 강요당하였고, 죄수나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강요당하였으며 ‘(조선총련은) 사람을 속여 조직적으로 유괴하였다. 인권과 자유를 무차별적으로 빼앗은 악마와 같은 단체이다.’,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강제수용소 안에서 필사적으로 삶을 연명해가는 사람이 있다.’라고 호소하였다. 조선총련은 이러한 소송에 대해 동포사회와 일북 관계를 해하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하였다[12].

 

(5)영화 동해의 노래

귀환사업 5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총련이 공동제작한 영화 동해의 노래’(2부작)200912월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상영되었다 영화는 주인공의 모델이 된 한덕수 의장을 비롯한 제1세대 재일조선인 활동가들이 이국땅에서 애국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계기가 된 김일성 노선전환방침(1952)과 총련 결성,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으로 인한 민족교육의 발전과 귀국 실현까지 1940~50년대 재일조선인운동의 주된 사건을 그렸다. 김일성의 총애를 받아왔던 한덕수 의장에 대해서 북한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구체적 업적과 생애 및 재일조선인의 활동에 관한 홍보작품이기도하다.

 

(6)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첩과의 관계

20088월 대한민국에서 탈북자로 위장한 여간첩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대한민국 검찰의 기소장에 의하면, 이 여간첩은 대한민국 국군 장병과 성적관계를 맺고 기밀정보를 얻는 허니트랩을 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에서도 정보수집활동을 하였던 사실이 밝혀졌는데, 20076월부터 20085월까지 3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여 최장 2개월 이상 체류하였다. 기소장에는 일본 협력자로 조선총련 산하단체 간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인물과 사장직함을 가진 오사카 거주 인물 등 2명의 실명이 기소장에 기재되었다.

 

기소장에 올려진 산하단체 간부는 조선총련 관계 단체 간부로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라고 말하면서 피고와 만난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 보위부에도 아는 사람이 없으며 전혀 관계가 없다. 멋대로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라며 관련을 부정하였다

 

(7)연평도 포격

조선총련은 2010년에 일어난 연평도 포격에 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조선총련은 조직원 내부교양자료에서 연평도에서 숨진 민간인 2명은 연평도 주민이 아니라 해병대 시설 공사에 동원된 본토 사람이고, 숨진 장소도 군사시설 내부이므로 민간 희생자는 없었다고 발표하였다. 그 이후로 일본 정부는 조총련계 조선학교에 대한 지원을 공식적으로 미루었다. 일본 사회의 연평도 포격 비난 여론으로 20101226일 일본 16개 도·현의 고교 무상화 적용 대상에서 조선학교가 제외되었다.

 

 

4.중앙본부 건물 매각 문제

중앙본부(도쿄도 지요다구 후지미) 토지와 건물은 미쓰이 다다오 전 부동산회사 사장의 중개로, 2007531일 오가타 시게타케 전 공안조사청장관가 대표로 근무하는 하베스트 투자고문 주식회사에 매각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중개자인 미쓰이 다다오는 조선총련으로부터 수수료 명목으로 49천만 엔이 전달되었다.

 

중앙본부 건물(지상 10, 지하 2층 철골철근콘크리트 구조. 연면적 11700평방미터)과 토지(2390평방미터)는 약 40억 엔을 초과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매각대금은 35억 엔) 도쿄지검 특수부는 당초 조선총련이 정리회수기구로부터 제기된 소송에서 패할 경우 압류를 벗어나기 위해 탈법, 불법행위를 할 의도가 있다고 보고 전자적공정증서원본 부실기재 등 혐의로 수사하고 있었다.

 

수사 결과, 조선총련이 소유권 매각양도 후에도 임대물권으로 인정받아 사용할 수 있는 매각처를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실제로는 조선총련측이 피해자였다면서 오가타 시게타케와 미쓰이 다다오는 자금조달 목표가 서지 않았음에도 토지, 건물 및 수수료를 편취하려 하였다라는 이유로 2007628일 사기혐의로 체포되었다. 또한 수수료 명목으로 사취한 금전 중 절반밖에 반환되지 않았다고 보도되었다.

 

-조선신보(朝鮮新報)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중앙상임위원회의 기관지로, 주로 조선어로 발간되고 있다. 본사는 일본 도쿄에 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에 지국을 두고 있다.

19451010민중일보(民衆日報)로 창간했으며, 19469월에 해방신문(解放新聞)으로 이름을 바꿨다. 19508월에는 한국 전쟁의 여파로 인해 연합군 최고사령부, 일본 정부에 의해 정간 조치를 받았다가 19525월에 조선민보(朝鮮民報)로 복간했다. 19611월에는 조선신보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55월에는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처음에는 격주간, 주간으로 발간되었다가 19619월부터는 일간, 8면으로 발간하고 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발행하지 않는다. 잡지 조국과 일본어문 잡지 이어는 모두 조선신보사에서 발간한다. 1980년대 초에는 컴퓨터 식자를 들어와 디지털 방식으로 출판되고 있다.

일본어와 중국어로 편집하는 지면도 있으며, 영문판인 인민조선 (The People's Korea)을 발간하고 있다. 조선신보는 중국어, 조선어, 일본어로 발간하고 재일 조선인들에게 보다 다양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1999년부터 생활정보지의 역할도 튼튼히 하고 있으며, 가끔씩 문예면을 통해 재일 조선인 작가들이 발표한 문학 작품들을 연재한다.

본사 및 지국

본사

일본의 기 일본 도쿄도 아라카와구 히가시닛포리 2-26-1

평양지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중구역 오탄동 평양호텔 5

 

-조선대학교(朝鮮大學校, 영어: Korea University)는 재일 조선인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가 운영하고 있는 대학교이다. 줄여서 조대라 부르기도 한다

조총련 조선대학교가 1956년 6월 8일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조총련계 인사들에 의하여 2년제 대학교로 설립하여 지금까지 13,000명졸업생을 배출하여 운영 되어오고 있다
전(全) 학생이 기숙사제로 조선연극부등 총 8학부로 1,000명 정도의 학생이 현재 수학하고 있었으며 졸업생들은 주로 조선학교의 교원 및 총련신보나 잡지의 기자로 취직하며 총련 동포가 경영하는 금융기관에도 취직하고 있다

1.개요

조선학교의 최고 교육 기관이다. 대학 수준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지만, 일본 문부과학성에서 대학으로의 승인을받지 못하여, 법적으로 각종학교 취급을 받고 있다. 일본 사립학교법에 근거한 학교법인 도꾜조선학원이 운영하고 있으며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고있다.

 

전후의 개방대학에서 50여년의 역사가 있고 제반 조직 개편을 거쳐 현재는 4년제 8학부 (일부 3년제)로 구성이 되어있다. 강의는 기본적으로 한국어로 진행되며, 일본인 강사도 많이 채용하고 있다.

 

재학생의 대다수가 조선고급학교 출신이지만, 일부 일본의 고등학교 졸업생도 다니고 있다. 일본학교 출신자는 편입반으로 불리는 반에 들어가(유학생 별과에 상당), 한국어 습득 등 교육을 받는다. 조선적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적, 일본 국적의 학생도 재학하고 있다.

 

졸업생의 진로는 조선총련직원, 조선학교교원, 재일동포 기업등에의 취직이 많다. 한편 타대학의 학부, 대학원 진학자도 있어 국내의 대부분의 사립 대학과 일부를 제외한 국공립 대학은 졸업생에게 대학원(법과대학원을 포함한다) 수험 자격의 문을 열고 있다.

 

재학생은 일부 기숙사생활이 곤란한 사람을 제외한 전원이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기숙사에서 학외로의 출입은 폐문시간 전까지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방과후는 아르바이트에 힘쓰는 학생도 많다. 평상시 외부인의 캠퍼스 입장은 제한되고 있어 방문자는 소정의 수속을 거쳐야 한다. 다만 학원제 기간중에는 캠퍼스가 개방되어 인근 주민등에서 활기를 보이고 있다.

 

2.연혁

1956- 도꾜조선중고급학교(도쿄도 기타구) 부지에서 2년제로 설립

1958- 4년제로 전환

1959- 도쿄도 코다이라시에 이전(교사는 1962년도의 일본 건축 연감상을 수상)

1964- 도서관 및 강당을 준공

1964- 문학부·역사 지리학부·정치 경제학부(정치 경제학과이학부(물리 수학과사범 교육학부(사범과, 체육과, 음악과, 미술과)5 학부 체제가 된다

1967- 공학부(기계공학과, 전자 공학과)를 설치

1968- 당시 도쿄도 지사에 의해 각종학교 취급이 된다

1968- 공학부에 금속 공학과를 신설

1970- 조선어 연구소를 신설

1970- 외국어 학부(영어과, 불어과)를 설치

1974- 연구원(일본의 대학의 대학원에 해당한다), 민족 교육 연구소를 신설

1975- 역사 지리학부에 역사학과와 지리 학과를 신설

1977- 정치 경제학부에 경영학과를 신설

1978- 정치 경제학부에 철학과와 사범 교육학부에 보육과를 신설

1982- 창립 25주년 기념관 준공

1982- 정치 경제학부 경영학과가 경영학부에 승격 설치, 사회과학 연구소를 신설

1985- 사범 교육학부에 3년제의 사범과를 신설

1990- 3 연구동과 체육관을 준공

1999- 이학부와 공학부를 통합해이공학부로 개칭, 이공학부에 정보처리 학과를 신설, 정치경제학부에법률학과를 신설, 사범교육학부를교육학부로 개칭해 교육학과를 4년제와 3년제로 개편, 연구원을 전기 2·후기 3년으로 개편

2003- 단기학부를 신설, 문학부와 역사지리학부를 통합해문학 역사학부로 개칭

2004- 단위제를 도입

2006- 창립 50주년을 맞이한다

2007- 축구부가 도쿄도 대학 축구·리그 우승, 칸토 대학 축구 리그(2)에 승격

 

3.개설학과

정치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

법률학과

 

문학역사학부

어문학과

역사지리학과

 

경영학부

 

외국어학부

영어학부

일본어학부

 

이공학부

이학과

전자정보공학과

 

교육학부

 

체육학부

 

단기학부

생활과학과

정보경리과

 

   

일본 도쿄 소재 재일 조선대학교(조대)에서 지난 11일 제60회 졸업식이 진행되었다고 <조선중앙통신>19일 보도했다.

 

허종만 총련중앙상임위원회 의장과 배익주 부의장, 강추련 부의장 겸 재일본조선민주여성동맹 위원장, 송근학 교육국장, 장병태 조선대학교 학장과 학부장들, 각 지역 조선고급학교 교장들, 조선대학교 졸업생들과 학부모, 교직원·학생 등이 졸업식에 참가했으며, 북한 교육위원회와 김일성종합대학을 비롯한 대학에서 축전을 보내왔다고 통신은 소개했다.

 

허종만 의장은 축하발언을 통해 '공화국의 유일한 해외대학'인 조선대학교 졸업생들에게 재일 조선인운동의 미래가 달려있다면서, "총련의 모든 조직과 재일동포들은 공화국창건 70돌을 맞이하고 총련 제24차 전체대회가 진행되는 뜻깊은 해에 조선대학교 졸업생들이 애족애국운동에서 청춘의 열정과 기개를 남김없이 발휘할 것을 크게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졸업식에서 장병태 조선대학교 학장의 보고에 이어 졸업생들에게 북 교육위원회와 총련 상임중앙위원회, 조선대학교의 표창장이 수여되었으며, 졸업생들의 결의토론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보내는 편지가 낭독되었다.

 

재일 조대는 지난 1956410일 재일 조선인 민족교육의 최고학부로 창립되어 19584년제 대학으로 전환되었으며, 지난 2016년 창립 60돌을 맞이했다.

 

 *7·4 남북 공동 성명

-7.4남북 공동성명은 남북 일본 라인(남북 일본축 대외조직)으로 추진 되었다-

7·4 남북 공동 성명(7·4 南北 共同 聲明)197274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이 국토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발표한 공동성명이다. 1972년 박정희의 지시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파견되어 김일성과 만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 원칙을 제정하였다.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와 주한미군 철수선언, 군비경쟁 축소를 위해 제정되었으나 이후 통일논의를 통해 남북 양측이 자국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이용되었다.

1.배경

공산주의 진영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프라하의 봄, "사회주의가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되면, 어느 사회주의 국가든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 1969년 중소 국경 분쟁 등으로 인해 공산권의 분열이 초래되었다.

 

자유주의 진영은 닉슨 독트린으로 핵문제 이외의 공격에 대해서는 당사국이 1차적 방위 책임을 진다는 등 자유 진영에도 위기감이 들었다. 한반도에서는 미군의 부분 철수, 미ᆞ중의 화해 무드로 양국과 동맹 관계에 있던 남북은 변화하는 국제정치환경에 적응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3]

 

대한민국의 경우 당시 박정희가 이끌던 제3공화국의 정치적 위기가 가장 큰 배경이었다. 전태일 열사 사건 등 대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 남한의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 및 개별적 인사들과 아무 때나 접촉할 용의를 표명했는데 이는 1971년 국제 연합의 성격 변화(중화민국의 제명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가입)에 아우른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화해무드를 등에 업은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당시는 미국과 중공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해가던 시기와 맞물리면서 1972년에는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과 중화인민공화국 수상 저우언라이가 상하이에서 공동성명을 통해 미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와 한반도 긴장 완화, 교류증진에의 노력을 지지하는 것과 중공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평화통일 8개항 방안과 언커크 해체 요구입장의 지지를 주 내용으로 함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 세계적 데탕트 분위기를 이용하여 주한미군 철수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대화에 임했다. 국가예산 지출액의 30%선을 상회하는 국방비를 줄이기 위해서 남북대화를 통해 군사문제를 우선 해결하여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그에 따라 군사비를 동결하여 남는 재원을 경제부문에 투입하겠다는 의도였다. 이러한 대외적 상황을 배경으로 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북회담 제스처에 대한민국 정부가 부응함으로써 1971920일 비밀리에 남북 적십자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후 서울과 평양 간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문제 협의를 위한 여러 회담이 진행되어 공동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한편 당시 CIA의 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이 대화에 응한 이유가 북한이 남북대화를 통해 남한 여론을 분열시키고 미군 철수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북한의 의도를 일시적으로 저지하려 했기 때문이며, 그가 후에 정상회담을 할 의향은 없을 것이라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 부장을 추가로 북한에 보내지 않을 것이고, 공동성명을 통해 설치되는 남북조절위원회는 고위급이 없는 실무진 위주로 구성되며, 남북적십자회담 지원 및 비무장지대 충돌 방지 목적으로만 할 것이라고 했다.

 

2. 경과

성명 발표 이후, 남북은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하고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여러 차례 회의를 하였다. 그러던 1973828일 북한은 평양 방송을 통해 남북조절위원회 평양 측 김영주 공동위원장 명의로 남북대화를 중단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남한의 ‘6·23선언‘2개 조선을 획책하는 분열주의 노선이라며 맹비난을 했으며, 이를 빌미로 진행되어 오던 남북대화를 중단하였다.

 

3. 주요 내용과 남북 해석 차이

(1)주요 내용

7개 항이 있으며, 쌍방은 1항에서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 원칙을 합의하였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2)남북 해석 차이

공동 성명에 대해 남북간 해석 차이가 있다 이는 후에 있을 남북 대립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자주: 대한민국은 남북이 당사자가 되어 민족문제를 해결해 나가되,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토대로 하는 열린 자주로 해석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외세 배격을 통한 배타적 자주로 해석한다.

 

평화: 대한민국은 북한의 무력도발 포기와 상호 불가침으로 해석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한의 자주국방력 강화에 제동,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중단을 원했다.

 

민족대단결: 대한민국은 자유와 민주의 바탕에서 민족적 이질화를 극복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한의 반공정책 포기, 국가보안법 폐지를 원했다.

 

4. 의의와 계승

남북의 양 정권이 통일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최초의 합의로서 의의를 가진다. 최초의 남북회담이다. 또한 기존의 외세의존적이고 대결지향적인 통일노선을 거부하고 올바른 통일의 원칙을 도출해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한편 이는 2000년 남북 정상 회담으로 이어져 6·15 남북 공동선언으로 계승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이해는 정권별, 시기별 이해보다 거시적인 역사적 제도적 차원에서 조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970년대까지 남북 사이에는 1·21 사태 등 특수공작대를 보내 상대를 타격하는 무장도발이 지속되었으며, 이에 따른 전쟁 재발의 두려움과 특수공작대 유지에 대한 부담이 증가하여 7·4 남북 공동 성명 2항에서 무장도발을 자제하기로 타협하였다.

 

5. 한계와 비판

양측은 이 선언을 자신들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용하였다.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한 지 3개월 만에 성명을 구실삼아 대한민국은 10월 유신을 발표하여 헌법을 이용한 독재를 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첫 남북간 대화의 물꼬를 튼 분위기속에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여 주체사상을 확립하였다. 공동 성명을 통해 남북관계를 근원적으로 개선, 해결하지는 못했다. 공식적인 정부 당국 간의 회담이 아닌 준공식적 회담이기 때문에 무게감 있는 구속력은 없었다는 한계가 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보좌단이 72년 11월 김일성을 방문한 뒤 북한 내각 청사에서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요인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왼쪽부터 한응식, 김덕현, 강인덕 국장, 김중린, 최규하 특별보좌관, 김일, 이후락 부장, 김일성, 장기영 부총리, 박성철, 정홍진 국장, 유장식, 이경석

-이후락이나 최규하등은 대일외교팀이다

-북한 대남비서만 '3'한 김중린 

북한의 대남비서는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자리다. 한 때는 당 작전부(대남 공작원 훈련 및 요인 암살), 35호실(엘리트 간첩 양성), 당 대외연락부(비밀지하조직 구축 및 간첩 관리), 통일전선부(대남공작 및 남북대화 등) 4개 기구를 총괄할 정도로 막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초라해졌다. 현재는 대남비서가 통일전선부만 관장하고, 나머지 조직은 2009년 총참모부 정찰국과 함께 총참모부 정찰총국으로 확대 개편됐다

김중린(1923~2010)은 대남비서를 3차례 역임했다. 첫 번째는 694~769, 두 번째는 781~8312, 세 번째는 8811~901월이다. 대략 13년 정도를 맡았다. 북한의 대남비서 가운데 최장수다. 그는 대남 강경파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웅산 테러 사건을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지휘를 했다

김중린은 자강도 우시군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나 해방 이후 46년 평안북도 벽동군 당위원회 부장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우시군은 52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이전까지 벽동군 우시면으로 있다가 54년 자강도에 편입됐다. 김중린은 고향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52년 노동당 지도원으로 들어가면서 중요 직책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했다. 54년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윈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됐으며 제네바의 국제적십자회에 북한대표로 참석했다. 김중린이 김일성의 눈도장에 찍히는 것은 재일동포의 북한 귀환에 공을 세우면서부터다. 592월 제네바에서 열린 북·일 적십자회담의 북한 대표로 참석해 성과를 올린 것이다. 김중린은 그 해 12월 재일동포 975명을 소련 선박 클리리온호와 토보르스크호에 태워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 청진항으로 데려왔다.

이후 김중린은 승진의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는 694월 대남공작 실패 등의 이유로 숙청된 허봉학을 대신해 항일 빨치산 장군 출신이 아닌데도 대남비서로 전격 발탁됐다. 냉전 시절에 항일 빨치산 출신이 아닌 사람이 대남비서를 맡기 어려웠다. 앞선 이효순-허봉학은 모두 항일 빨치산 출신들이었다. 김중린은 급기야 7011월 제5차 노동당 대회에서 권력 서열 10위로 급부상했다. 10년 전 제4차 노동당 대회의 87위에 비하면 괄목할만한 성장이었다.

김중린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725월 평양을 방문해 그를 만나면서다. 두 사람은 비밀협상을 가졌으며 이후락은 김일성과 그의 동생 김영주 당 조직지도부장을 만났고 두 달 뒤에 7·4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김중린이 김일성과 김영주를 도와 실무작업을 진행했다.

승승장구하던 김중린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김정일이 74년 후계자로 확정되면서 모든 권력기관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했다. 김정일은 766월 대남 공작부문을 대상으로 집중 사찰을 시작했다. 사찰은 5개월간 지속됐고 김정일은 진행 상황을 하나씩 확인했다. 대남사업을 총괄했던 김중린도 자기비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김정일은 “50년대 이래의 대남공작은 한 마디로 0이라고 질책했다. 아울러 김정일은 과거의 공작 활동은 모두 백지화해야 한다. 새로운 전략 전술적 방침을 가지고 새로운 각오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몰아붙였다.

사찰은 다음 해 4월까지 계속됐고 그 결과 김중린 769월 노동당 산하단체인 남조선연구소의 소장으로 좌천됐다. 김정일이 대남서기를 겸하며 대남공작기관을 지휘했다. 남조선연구소에서 찌그려져 있던 김중린은 781월 다시 대남비서에 복귀했다. 북한은 사람을 한 번 버렸다가 능력에 따라 복귀시키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 대남비서 시절에는 악역을 맡았다. 그 악역은 8310월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이었다. 서석준 부총리 등 한국 각료 4명을 포함해 17명이 사망해 세계를 놀라게 한 참극이었다. 아웅산 테러는 감독 김정일, 각본 김중린, 기술감독 김격식 등이 진행됐다. 김격식은 2010년 연평도 포격을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로 당시 총참모부 정찰국 소속으로 테러를 직접 지휘했다.

김중린은 아웅산 테러 사건을 또 다시 을 먹었다. 북한은 입을 다문 채 늘 하던 대로 오리발을 내밀었지만 체포된 공작원이 범행을 털어놓으면서 탄로가 났다. 버마 정부가 테러는 북한 부대에 의한 범행이라고 발표했고 69개국이 북한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 내부에서도 아웅산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는 것이 퍼지면서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했다.

김중린은 또 다시 정치적 시련을 겪어야 했다. 8312월 대남비서를 허담(1929~1991)에게 물려주었으며 843월 정치국 위원에서 후보위원으로 강등됐다. 851월에는 정치국 후보위원마저 탈락됐다. 김정일의 미움이 그 만큼 컸다. 김정일은 아웅산 테러범들이 붙잡혀 범행을 털어놓는 바람에 국제적 망신을 당한 책임을 김중린에게 돌렸던 것이다.

 

그러나 김중린은 868월 조선중앙통신사 사장으로 복귀했다. 조금 엉뚱했던 임명이었다. 김중린이 대남비서를 ‘3를 하게 된 것은 8811월이다. 이번에는 고작 12개월 정도였다. 그 이후 그는 901월부터 당 근로단체비서를 맡았다. 근로단체비서는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조선직업총동맹(직총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 등을 지도한다. 노동당 내에서 비중이 떨어지는 부서다. 김중린이 근로단체비서로 언제까지 있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당에서 중요직책을 맡았던 그는 2010428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20165월 제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노동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해 헌신한 인물로 허담, 연형묵 등과 함께 김중린을 언급했다.



-박정희정부때 남북대화 실무자 대남통 경북 경주출신 박성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명예 부위원장.

박성철은 경북 경주출신으로 1913년 9월 2일 태어났으며 그는 일본 상지대를 졸업했다
그는 1936년 동만주에서 소련군 극동저격여단[소련군 붉은여단 삘치산부대, 김일성 항일유격대]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광복 후 입북했으며 조선인민군 제15사단장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였다
1954년 주(駐) 불가리아대사로 부임하면서 외교관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것을 시작으로 1958년 8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부장, 1959년 10월 외무성 부상으로 실질적인 외교활동의 제일인자가 되었다
1961년 9월 조선노동당 제4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66년 10월 내각 부수상, 1967년 12월 부수상 겸 외무상이 되었다 1970년 11월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당 권력핵심부인 정치위원회 정치위원에 선임되었다 외무상으로 중동. 아프리카등과 외교관계 수립에 힘써고 1970년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당정부 대표단장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1972년 5월 극비리에 서울을 방문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 하였으며 뒤이어 열린 남북조절위원회에서는 평양측 공동위원장 김영주를 대리를 맡아 평양측 공동위원장인 김영주 대신 남북대화에 임했다
1976년 4월에 정무원 총리에 선임, 1977년 12월 국가부주석에 선출되었다
1980년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도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82년 4월 김일성훈장을 받기도 했다
일본상지대 출신이며 항일유격대 출신으로는 드물게 외교방면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1984년 2월 당.정부 대표단장으로 소련공산당 서기장 안드로포프 장례식에 참석했고 1985년 1월 니카라과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는 등 대외활동을 활발히 했다
1991년 8월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의장,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을 맡았다

1.성명----박성철(朴成哲, PARK Sung-Cheol)
2.생년월일--1913년 9월 2일
3.출생지---경북 경주
4.학력---일본 상지대 졸업
5.주요 경력
ㄱ.김일성항일유격대 출신으로 한국전쟁때 인민군 제15사단장으로 참전 그리고 남한점령 주도
(ㄱ)항일유격대 출신
(ㄴ)한국전쟁 당시 제15사단장으로 참전
ㄴ.일본상지대 출신으로 일본통으로 외교분야 활동을 했으며 대남통으로 1960년대 통일혁명당 사업과 박정희정부때 남북대화 주도
(ㄱ)노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부장과 외무성 부상, 외무상 역임
(ㄴ)1972년 서울방문과 박정희 전대통령 비밀회담
(ㄷ)1960년대말 통일혁명당 사건 협상력 과시
(ㄹ)1991년 8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은 대남 북한 정치조직단체로 조국전선이라고도 한다
노동계급이 영도하는 노동동맹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조직체로서 종래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통합된 것이다
8.15 뒤 남북한에 각각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되었는데 남한에서는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40여 정당.사회단체들로 <남조선민주주의 민족전선>이 조직되었으며 북한에서는 북조선노동당을 중심으로한 13개 단체로 조직된 <북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 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 불법단체로 규정되자 1949년 평양에서 남북한의 두 단체가 통합 현재의 명칭으로 개편되었다 산하에 각종 직능단체. 종교단체. 정치단체등 19개가 있다 주로 한국의 정치정세가 변동할때 마다 대남위장평화공세를 일관해 오다가 1961년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창설 이후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전위대로 활동해오고 있다
경북 경주출신 박성철이나 서울 출신 유미령등이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의장을 맡았다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은 19496월에 평양에서 남한의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북한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통합하여 창립되었다. 북한 노동당을 포함하여 북한의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단체이다.  

단체의 목적은 북한 노동당의 정책, 특히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정책을 지지하며 옹호, 관철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남한에 대한 대남 활동을 펼치는 것이 주요 기능이었지만, 현재는 정당 및 사회단체의 연합체로서 총선거 단일 후보자를 배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

아래와 같은 단체가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소속 단체이다

노동당(김정은) 607의석

북한 사회민주당(김영대) 50의석

천도교 청우당(류미영) 22의석

조총련 5의석

기타 3의석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은 각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총선거 단일 후보자를 배출하는 연합체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북한 선거에는 후보자가 한명밖에 입후보하지 않는다.

 

일본 조총련이나 남한 친북세력 김일성 김정일주의(주체사상이나 선군사상) 단체[한국민족민전선 서울대표부] 그리고 해외 친북세력 김일성 김정일주의(주체사상이나 선군사상) 단체들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통일전선] 하부조직으로 활동하면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ㄷ.남한출신으로 공화국 영웅 칭호
그리고 김일성 국가장의위원, 오진우 국가장의위원 역임




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 인물 저우바오중(周保中, 주보중)-붉은 군대 예하부대 각 민족 빨치산(공산당 무장단체) 부대 

1943105일 야전 훈련 후 촬영한 제88독립저격여단(국제여단, 각 민족 빨치산 부대) 대원 사진. 1열 좌로부터바탈린( N. S. Batalin, 巴达林, 소련), 정치 부여단장 이조린(李兆麟, 일명 張壽籛[张寿篯], 중국), 왕일지(王一知, 주보중 부인), 여단장 주보중(周保中, 중국), 김일성(金日成, 1영장, 조선), 부여단장 시린스키(Timofei Nikitovich Shirinsky, 什林斯基, 1904~?)2장광적(张光迪, 중국), 풍중운(冯仲云, 중국), 왕효명(王效明, 중국), 왕명귀(王明贵, 중국), 팽시로(彭施鲁, 중국)3양청해(杨清海, 중국), 서철(徐哲, 조선), 강신태(姜信泰, 강건, 조선), 김광협(金光侠, 조선), 수장청(隋长青, 중국)4: 안길(安吉, 조선), 박덕산(朴德山, 조선), 최용진(崔勇进, 조선), 도우봉(陶雨峰, 중국), 김경석(金京石, 조선)[사진: 소련 제88국제여단 소속원 - 중국 길림성 도서관]



주보중(周保中, 1902- 196422)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 중국 남서부 윈난성(雲南省, 운남성)에 사는 소수민족 바이족(白族, 백족) 출신이다 건국 전에 김일성, 최용건 등 조선인의 항일 빨치산도 소속한 동북 항일련군(東北抗日聯軍)의 제2군로군(第二路軍)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고 동북항일련군(東北抗日聯軍)이 적군(赤軍, 소련군)의 제88 독립저격여단(88独立狙撃旅団)으로 조직 개편할 때 제88 독립저격여단(88独立狙撃旅団)의 여단장이 되었고 소련군 제88독립저격여단의 만주침공 이후 소련군의 장춘위수부사령관(長春衛戍副司令官)이 된다. 국공 내전에서 동북 인민해방군의 부사령관으로 활동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윈난성 인민정부 부주석,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 위원 등을 역임한다.

 

주보중(周保中)1902년 윈난성(雲南省, 운남성) 다리시(大理市,대리시)에서 태어났다.

1917 15세의 나이에 호법운동(護法運動,에 참여했고, 1922년부터 1924년까지 윈난성(雲南省, 운남성) 육군강무당(陸軍講武堂)에서 수학(修學)했다.

1926년부터 북벌(北伐)에 참가했고 국민 혁명군 제6(国民革命軍第6)으로 활동했다.

19277월에 우한시(武漢市, 무한시)에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2712월 후난성(湖南省, 호남성), 저장성(浙江省, 절강성), 허베이성(河北省, 하북성) 등으로 수송과 연락 임무에 종사했다. 국민혁명군(国民革命軍) 6군의 제18사단의 부사단장을 맡고 있었다.

1928년 소련 모스크바 국제 레닌 학교에 유학했다.

 

1931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귀국하여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만주지역의 랴오닝성(遼寧省,요녕성) 등으로 김일성과 최용건등의 조선인과 협력하여 항일 게릴라를 조직 하였고, 1935년 동북항일연군이 조직되면 제2군 군장(2軍軍長)에 취임하였고, 1937년 연군 개편시(聯軍改編時)에 제3로군장(3路軍軍長)이 되었다

길림성 동부(吉林省東部)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의 소탕작전에 의해 큰 타격을 받게 되면서 1940년에 소련의 극동 지방에 탈출하여 소련군의 산하 제88독립 저격여단(88独立狙撃旅団)의 여단장(중령)이 되었다. 김일성은 대대장(대위)이었다.

 

19458월 소련군의 만주침공과 함께 만주로 돌아와 소련군 장춘 위수 부사령관((長春衛戍副司令官)에 임명된다 같은 해 9월 이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동북인민자위군(東北人民自衛軍)으로 개칭되고, 총사령관에 임명 되었다

1031일 이전 항일련군(抗日聯軍)과 토착 무장조직을 규합하여 새로운 동북 인민자치군(東北人民自治軍)이 편성되면서 임표 총사령관에서 주보중 부총참모장에 임명 되었다.

 

1946114일 동북인민자치군(東北人民自治軍)이 동북민주련군(東北民主連軍)으로 개칭되면서 임표 사령원(司令員)에서 주보중 부사령원(副司令員)에 임명 되었다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과의 국공내전이 시작되면서 1946년부터 1948년 국공내전에서 중국 동북부 장춘시 해방 전투에서 활약했고. 194810월 제2차 장춘시 해방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19481월에 민주련군(民主連軍)이 동북 인민해방군(東北人民解放軍)으로 개칭 된 뒤 11월 제4야전군(第四野戦軍)으로 개편되면서 주보중 부사령원을 해임 되었다

 

194910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19502월부터 윈난성 인민정부 부주석(雲南省人民政府副主席), 서남 군정위원회 정법위원회 주임 겸 민정부장(西南軍政委員会政法委員会主任 兼 民政部長) 등을 역임했다.

195110월부터 19575월까지 운남대학 교장(雲南大学校長)을 역임했고 또한 19538 월부터 195410월까지 서남정법학원 원장 겸 당 위원회 위원장(西南政法学院院長兼党委員会書記)을 역임했다

1954929일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의 결정에 따라 국방위원회 위원에 임명 되었고, 1955년에는 일급팔일훈장(一級八一勲章), 일급독립자유훈장(一級独立自由勲章)을 수여 되었다.

1956년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대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으로 선출 되었다. 19569월 중국 공산당 제8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후보 위원에 선출 되었고, 1959428일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민족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됨과 동시에 동 회의의 결정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재임 되었고 196422일 베이징시에서 질병으로 사망했다

 

북한 노동신문에서도 칭찬되고 있는 북중 관계의 상징이자 김일성의 친밀한 상관이고 소련에 소개한 은인이기도 한 주보중과 그의 일족은 광물 자원과 예술과 무기 거래 등 외화 획득에 중요한 사업으로 다양한 편의를 도모하고 북한 경제의 버팀목이 되어 있는 것이 해외 언론에 보도 되고 있다

 

                                                                           1946년 8월 길림성 연길 주보중 장군

                                                                                             주보중 장군이  착용한 비옷

*호법운동(護法運動

1917년에 중국의 북양 군벌 돤치루이에 반대하여, 남방의 혁명 세력이 일으킨 운동. 돤치루이가 정권을 장악하여 안후이파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회를 구성하자, 쑨원 등 남방의 혁명 세력이 옛 국회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일으켰다


*주보중 약력

1902년 운남성 대리시에서 태어났다.

191715세의 나이에 호법 운동에 참가했다.

1922~ 1924년까지 운남육군강무학당에서 수학했다.

1926년 국민혁명군 제6군에서 활동, 북벌에 참가했다.

19277월 우한시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2712월 국민혁명군 제6군 제18사단 부사단장을 역임하여 호남성, 절강성, 하북성 등에서 수송 및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28년 소련 모스크바의 국제레닌학교에 유학했다.

19319월 만주 사변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만주 요녕성 등에서 항일 게릴라 조직을 결성했다.

1935년 동북항일연군이 조직되면서 제2군 군단장에 취임했다.

1937년 동북항일연군이 개편되면서 제3로군 군장에 취임하여 길림성 동부의 산악 지대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다. 일본 관동군의 대대적인 소탕 작전 때문에 1940년 소련 연해주로 피신했다. 그리고 소련군 산하 제88독립저격여단의 여단장(중령)이 되었다.

19458월 소련군의 만주 침공과 함께 만주로 돌아가 소련군 장춘위수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459월 동북항일연군이 동북인민자위군으로 개칭되면서 총사령에 임명되었고, 1031일 동북항일연군과 토착 무장조직들이 규합하여 동북인민자치군이 편성되자 총사령 린뱌오 밑에서 부총참모장을 역임했다.

1946114일 동북인민자치군이 동북민주연군으로 개편되자 린뱌오 사령원 밑에서 부사령원을 역임했다.

1946~ 1948년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중국 동북부의 장춘시 전투에서 활약했고, 194810월 제2차 장춘시 해방 전투에도 참가했다.

19481월 동북민주연군이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된 후, 11월 제4야전군으로 개편되면서 부사령원에서 해임되었다.

1949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19502월부터 운남성인민정부 부주석, 서남군정위원회 정법위원회 주임 겸 민정부장을 역임했다.

195110~ 19575월까지 운남대학 교장을 역임했다.

19538~ 195410월까지 서남정법학원 원장 겸 당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54929일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의 결정에 따라 국방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55년 일급팔일훈장 및 자유독립훈장이 수여되었다.

1956년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69월 중국공산당 제8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고, 1959428일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민족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및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재임되었다.

196422일 베이징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1936년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만주에서 만들어진 항일 빨치산 조직(소련군의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성격)으로 지금까지 만주에서 활동하던 공산당계의 조선인, 중국인 빨치산 부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문호를 넓혀 우파 항일 무장단체를 받아 들여 1936년부터 개편되어 갔다.

주보중이나 김일성 등 중국인과 조선인의 유명한 파르티잔(Partizan, 빨치산) 소속으로 나중에 소련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조직으로 개편하여 그 구성원 중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한 권력의 중추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동북항일연군을 만주파로 지칭하고 있다)

 

1.성립

1930년대 초반에서 만주국(満州国, 193231일 건국일)에서 중국 공산당 지도하에 조선인, 중국인의 항일 빨치산 부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편성되어 있었지만, 조선인 대원 400명 이상이 친일 스파이로 의심 받고 숙청된 민생단 사건(民生団事件) 등으로 탈출도 잇따라 조직이 효과적으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한편,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통일 인민전선(統一人民戦線)의 결성을 호소되면서 중국 공산당도 8월 테제를 발표하고 제2차 국공합작(2次国共合作)을 호소했다. 이에 따라 만주에서도 항일 반만(抗日反満)” 구호로 내세우면서, 국민당 계열의 독립 무장단체를 포함한 모든 단체와 합작하여 흡수를 목표로 정책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 이미 1934년경부터 국민당계열의 마적(馬賊, 말 타고 다니는 소수 무장단원의 군벌)이나 의용군(義勇軍)도 공산당의 지도하에 정리하려고 시도했던 것이지만, 토착 무장단체는 주로 부농(富農), 부호(富豪)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해 공산주의 색깔(노동자 계급 령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을 싫어하여 국가자본주의(국가사회주의) 일만측(日満側, 일본과 만주국)에 돌아는 경우가 많았다. 최대한 공산주의 색깔을 엷게 하여(통일전선 구축) 존속하고 있는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소규모 마적과 독립 무장단체를 흡수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재편되어 갔다.

 

그러나 통화성(通化省)을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계열의 최대의 항일 무장단체 왕봉각(王鳳閣)

의 반만항일군(大刀会, 대도회)과 만주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조선인 민족주의자 무장단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우파는 공투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집단의 참여를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큰 세력이 될 수 없었다.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제1. 2군이 남만주, 4. 5. 7. 8. 10군이 동만주, 3. 6. 9. 11군이 북만주로 확장했다

1936년 우선 남만주군(南満)이 제1로군(第一路軍)이 되고, 이것이 두고 두고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주력부대인 것으로 계속되어 나가게 되었다. 남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거주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간도는 민생단 사건이 꼬리를 이어 내분이 계속되고 좀처럼 재편은 부진했지만 1937년에는 동만주군 제2로군(東満軍 第二路軍)이 되었고, 1939년 북만주군 제3로군(北満軍 第三路軍) 것으로, 일단의 재편을 하게 되었다[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제1군으로부터 제11군까지 존재했으며, 1, 2군이 남만주에서, 4, 5, 7, 8, 10군이 동만주, 3, 6, 9, 11군이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다. 후에 남만주의 군은 제1로군으로 동만주의 군은 제2로군으로 북만주의 군은 제3로군으로 재편성되었다]

 

2. 편성

편성 당시의 제1로군(1路軍)의 인원은 중국 공산당측 자료 "中共延辺党組織活動年代記(중공연초당조직활동연대기)“ ”동북항일연군투쟁사(東北抗日聯軍闘争史)“ 6,000여명 추측되고 일본측의 만주공산 비적의 연구(満州共産匪研究)“에 따르면 1,630명 정도에서 상당한 차이가있다.

 

또한 동북항일연군 아래의 인물은 사사키 하루타카(木春隆) "한국전쟁 이전의 한국 독립운동 연구와 강재언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에 따라했다.

서대숙 "김일성 사상과 정치 체제가 자세 하지만, 동북인민혁명군 시대(東北人民革命軍時代)에 전사 한 인물이 실리는 등 착오가 보여 자료로 피했다.

해방 이후 최현(崔賢), 김일성(金日成), 최용건(崔庸健), 김책(金策), 강건(姜健), 최용진(崔勇進). 김일(金一), 이영호(李永鎬)은 살아남아 나중에 북한의 요직을 차지한다[동북항일연군을 만주파로 지칭하고 있으며 제88독립저격여단을 소련군으로 지칭하고 있다]

 

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第一路軍 総司令-楊靖宇]

부총사령 왕덕태 [副総司令-王徳泰]

정치위원 위증민[政治委員魏拯民]

 

1로군 군단장 양정우[ 第一軍 軍長-楊靖宇]

1사단 사단장 정빈[第一師 師長-程斌]

· 3여단 정치부 주임 이질수[3 政治部主任-李鉄秀]

4여단 단장 수상태 [4 団長-隋祥太]

6여단 단장 유인봉[6 団長-劉仁鳳]

2사단 사단장 조국안[第二師 師長-曹国安]

8여단[8]

3사단 사단장 왕인재[第三師 師長-王仁斎]

5여단[5]

7여단[7]

 

2로군 군단장 왕덕태[第二軍 軍長-王徳泰]

정치주임 오성륜(),이청()[政治主任-呉成崙. 季青]

4사단 사단장 안봉학[第四師 師長-安鳳学]

1여단 단장 최현[1 団長-崔賢]

2여단[2]

3여단[3]

5사단 사단장 진한장[第五師 師長-陳翰章]

4여단[4]

5여단[5]

6여단[6]

6사단 사단장 김일성[第六師 師長-金日成]

7여단 단장 김주현[7 団長-金周賢]

8여단 정치위원 박덕산(김일)[8 政治委員朴徳山金一]

9여단[9]

10여단[10]

 

독립여단 여단장 방진성[独立旅 旅長-方振声]

1여단 단장 최춘국[1 団長-崔春国]

2여단[2]

 

교도여단[教導団]

 

2로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주보중[第二路軍 総司令兼政治委員-周保中]

  참모장 최용건(최석천)[参謀長-崔庸健崔石泉]

4군 군단장 이연평[第四軍 軍長-李延平]

부군단당 왕광우[副軍長-王光宇]

1사단 사단장 관서범[第一師 師長-関書範]

1여단[1]

2여단[2]

3여단[3]

2사단[第二師]

2사단 정치위원 도정비[第二師 政治委員-陶浄非]

4사단 정치위원 김광협[4 政治委員-金光侠]

5여단 정치위원 박동화[5 政治委員-朴東和]

6여단[6]

3사단 사단장 이문빈[第三師 師長-李文彬]

8여단[8]

9여단 정치위원 강신태(강건)[9 政治委員姜信泰姜健]

 

7군 군단장 이학복[第七軍 軍長-李学福]

군단장 대리 최석천(최용건), 경낙정[軍長代理-崔石泉,景楽亭]

정치주임 정로암, 포림(政治部主任-鄭魯岩,鮑林)

1사단 사단장 왕여기[第一師 師長-王汝起]

  정치부 주임 팽시노[政治部主任-彭施魯]

1여단 여단장 최용진[第一団団長-崔勇進]

2사단 사단장 유기창[第二師 師長-鄒其昌]

7여단 정치위원 이영호[第七団政治委員-李永鎬]

3사단 사단장 경낙정,운학영, 수장청[第三師 師長-景楽亭,雲鶴英隋長青

 

8군 군단장 사문동[第八軍 軍長-謝文東]

10군 군단장 왕악신[第十軍 軍長-汪雅臣]

구국군[救国軍]

의용군[義勇軍]

 

3로군 총사령관 장수전(이조린)[第三路軍 総司令-張寿籛李兆麟]

참모장 허형식[参謀長-許亨植]

정치위원 빙중운, 김책[政治委員-馮仲雲, 金策]

3군 군단장 허형식[第三軍 軍長-許亨植]

6군 군단장 장수전[第六軍 軍長張寿籛]

7군 군단장 이화당[第九軍 軍長李華堂]

11군 군단장 기치중[第十一軍 軍長祁致中]

정치부 주임 김정국[政治部主任金正国]

 

                                                                                             1932년 3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만주국 지도] 

3.활동 상황

(1)1일로군 제1(一路軍第一軍)의 서쪽정벌

1936년 남만주에서 제1일로군(第一路軍)이 성립한 당시 중국 공산당은 소위 장정(長征) 한창이었지만, "항일동정(抗日東征)“ 깃발을 들고 산서성(山西省)에서 하북성(河北省)에 진출하여 동쪽으로 향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1일로군 1(第一路軍第一軍)의 첫 번째 활동은 이에 잇따라 움직을 하여 서쪽을 정벌하는 것이었다.

 

1차 서쪽 정벌은 제1사단(第一師)에 의해 이루어졌다. 19366월 하순, 번시(本渓,본계-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동부의 중공업도시)와 안동성 봉성현(安東省鳳城県)의 경계에 있는 화상 모자산(和尚帽子山)을 출발하여 요양(遼陽)에서 남만주 철도와 요하(遼河)를 넘어 요서(遼西)에서 열하(熱河)로 나아 가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 요녕성 수암현(岫岩縣)의 산악 지대에서 만주국군(満州国軍)에 포위되어 뚫고 탈출했지만, 다수의 도망자, 전사자를 내고 돌아갔다.

 

2차의 서쪽정벌은 제3사단(第三師)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전원이 기마대(騎馬隊)가 되어 결행(決行) 하게 되었고, 193611월 하순 싱징현(흥경현,興京県) 경계에서 기마로 출발하여 만주국군(満州国軍)의 추격을 받으면서 청원(清原)에서 철령(鉄嶺)을 넘어 요하(遼河)유역에 도달 하였다

그러나 따뜻한 겨울을 위한 요하(遼河)가 결빙(氷結, 물 따위가 얼어붙음) 되지 않고, 한달의 행군으로 피폐 결국 되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 기간 동안 400명의 대원이 백 수십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3사단(第三師)의 대원 수가 400명이었다고 한다면, 6개사단(6個師) 모든 동일 숫자라고 하는 단순 계산으로 제1일로군 전체(第一路軍全体)2400명 정도가 6000여명으로 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과대 포장되었다고 알 수 있다

 

이듬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1로군 제1(一路軍第一軍)은 서쪽 정벌에 실패하면서도 또한 팔로군(八路軍)과의 연계를 지향 일본군의 후방을 위협하는 목적으로 제3사단(第三師)의 생존을 중심으로 청원(清原), 서풍(西豊), 개원(開原) 일대로 활동을 계속하였고 별동대가 심양(瀋陽), 무순(撫順) 일대에 진출하는 등 소모(消耗)를 거듭했다.

 

(2)김일성 부대에 의한 보천보 습격

한편, 1936년 제1로군의 제2(第一路軍 第二軍)은 장백지구(長白地区)에 근거지를 만들려고했다. 4사단 사단장(第四師 師長) 안봉학(安鳳学)체포되어 투항하였고 제2군 군단장(第二軍軍長) 왕덕태(王徳泰)이가 만주국군에 포위되어 전사하는 등 상당한 희생하면서 우선 김일성이가 사단장을 맡고 있는 제6사단(第六師)의 근거지 개척에 성공하여 1937년에는 제1로군(一路軍)의 제1군 제2사단(第一軍第二師)과 제2군 제4사단(第二軍 第四師)이 장백(長白)에 근거지를 옮기고 있었다.

 

원래 1932년에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을 시작한 것은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반석현위원회(中国共産党満州省委磐石県委)이었지만, 그 당시부터 고참 조선인 멤버에 오성륜(呉成崙) [全光, 전광]], 이상준(李相俊)[이동광(李東光)]이가 있었다.

오성륜(呉成崙) 2(第二軍)의 정치주임이었고 이상준(李相俊)도 제2군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보여지지만, 그들은 민생단 사건(民生団事件)의 반성에 따라 정치 위원 위증민(魏拯民)의 지지를 얻고 조선인의 민족의식에 호소하기 위하여 재만주지역 조선인 조국광복회(祖国光復会)를 조직하는 방침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장백(長白) 침공은 이에 따른 것으로 제6사단(第六師)의 지지기반 구축 공작을 시작하고 그 일환으로 압록강 유역의 조선반도 내부 함경남도 (현재 양강도) 갑산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박금철(朴金喆), 박달(朴達) 등 공산주의 단체 (후에 조선 노동당 갑산파)와 연락을 하게 되었다.

 

19376월 제6사단(第六師)은 압록강을 건너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甲山郡普天面保田里)[보천보(普天堡)]의 습격(보천보 전투)에 성공했지만, 이것은 갑산그룹 안내와 참가해서 성공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은 조선뿐만 아니라 조선반도를 단속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일본측에서도 공비[共産党匪賊(공산당 비적)]으로 거물시 되는 것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이 권력을 독점 하는데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고도 한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이 전년(前年) 6사단(第六師)의 장백(長白, 백두산) 근거지 만들기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수 십명 규모의 소대 김일성 부대를 자칭 무송(撫松)과 장백(長白)에 출몰하여 약탈을 반복 만주군 수비대와 충돌을 거듭하고 있었다. 또한이 해()에 들어서는 갑산 그룹의 활동도 활발해 지고 조선인 부호(朝鮮人富豪)에서 금품을 갈취 등의 사건도 있었다. 또한, 최현를 단장으로하는 제4사단 제1여단(第四師第一団)이 두만강을 넘어 함경북도 무산(茂山)에 진입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미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을 전년(前年) 조선반도의 신문은 김일성 부대의 동향을 전했다. 1936911일자 매일신보는 "혜산 건너 편에 출몰하는 적단(賊団, 도적 단체)150 - 160명으로, 3분의 1이 만주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이고 ... 관헌과 같은 복장으로 소련식 중국식의 소권총, 강한 기병2(軽機二丁), 대포1(大砲一門)을 가지고 있었다

동북항일연군계(東北抗日聯軍系)에서 장백현(長白県) 방면에 파견된 이 부대의 수령(首領) 김일성이라고 한다. 이들은 15-20 명씩 소대 약탈반을 꾸어 조선인 부락에서 식량을 약탈하였다"와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고 정보를 싣고 있다. 참고로 뒤를이었다 경성일보 기사에서는 "비수(匪首, 도덕의 두목) 김일성 일당이 있고, 6사단(第六師)'김일성 부대'를 자칭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19375, 최현 부대(崔賢部隊)가 무산(茂山)에서 남하(南下) 하여 혜산 경찰서 관내(恵山署関内),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태리 상흥경수(上興慶水) 부락 고뢰조재목작업소(高瀬組材木作業所,)을 습격했다

금품 많은 것을 약탈 한 후, 주 임무인 일본인 1, 조선인 5, 중국인 30명을 납치해 강유역으로 도망친 후 몸값을 요구했다.

그에 이은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이다. 보천보 300호 남짓의 마을에서 일본인 26, 중국인 2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인이다. 그래서 무차별 적으로 금품을 강탈하고 동사무소 나 소방 회관, 우체국, 초등학교 등에 방화하고 도망한 것은 충격을 받은 단속측 조선총독부는 김일성과 최현에 거액의 상금을 걸고 수배하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크게 보도했다. 이 신문의 논조는 그들을 비적(匪賊)으로 비난하고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동정(同情)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이 시기의 조선에서는 관헌 (조선 총독부)에 의한 검열을 위해 항일운동을 긍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곤란이기도 했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중국 공산당과의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소련의 원조도 얻고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물자 보급을 위해 종종 일본인, 조선인, 현지인의 구별없이 금품강탈이나 몸값 목적의 유괴 등 폭력적인 약탈 행위도 했다. 또한 몸값 목적 외에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주민을 납치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불어 넣어 인원 충당하고 있었다. 물자와 인력의 공급 수단에 있어서는 비적(匪賊)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하는 연구자도 있다


보천보전투 양강도는 중국 장백산과 한국 백두산으로 접경을 두고 있으며 두만강, 압록강이 양국으로 접경하고 있다  

(3)혜산사건과 제1로군(第一路軍)의 편성 기준

김일성부대의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에서 추격한 혜산경찰서의 경찰부대는 매복을 받아 32 명 중 7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상에 급히 함흥 보병 제74연대 김인욱(金仁旭) 소좌(소령)이 혜산 수비대장으로 임명 되었다.

이 혜산 수비대가 경찰부대와 협력하여 최현 부대와 합류하고 있는 김일성 부대를 급습하여 타격을 주었다. 이는 김일성 부대가 다시 국경을 넘어 조선에 침공하는 것은 없어졌지만, 갑산 그룹의 활동은 운흥면(雲興面) 금광을 습격하여 사금(砂金)을 강탈 하였다. 도적단이 김일성 부대를 자칭하는 삐라를 뿌리고 있던 것으로부터, 동조(同調) 갑산 그룹의 존재가 드러나고, 갑산측에서 162, 장백현에서 59명이 검거됐다. 혜산사건의 시작이다 .박금철도 이 때 검거 되었다.

혜산사건(恵山事件) 1차 검거의 자백도 이듬해 1938년에는 박달을 포함한 279명이 검거 돼 만주국 주재 조선인 조국광복회(在満韓人祖国光復会)와 거기에 기담한 갑산그룹이 괴멸했다.

한편, 1938년 초에 제1로군(第一路軍) 주력군은 주로 집안현(輯安県)의 삼림 지대에 있었다. 중국인 총사령관 양정우(楊靖宇)와 정치 위원 위증민(魏拯民)은 팔로군과 연락을 고집해 여러 번 서쪽 정벌을 계획했다.

그런데 그 중에 제1사단(第一師)의 사단장 정빈(程斌)과 그의 부대가 일만토벌부대(日満討伐部隊)에 투항했다. 일만측(日満側)은 투항자를 처형하지 않고 상금이나 직장을 보장하는 귀순 전략을 취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한 것이다. 따라서 서쪽 정벌은 중지(中止)가 다음과 같이 제1로군(第一路軍)의 편성 기준이 이루어졌다.

인원의 숫자는 강재언(姜在彦)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에 따른다.

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 정치위원 위증민, 군수처장 오성륜, 총서령부경위여 여장 방진성 (500 )[第一路軍 総司令楊靖宇 政治委員魏拯民 軍需処長呉成崙 総司令部警衛旅 旅長方振声 (500]

1방면군 지휘 조아범(250)[第一方面軍 指揮曹亜范 (250]

2방면군 지휘 김일성(350)[第二方面軍 指揮金日成 (350]

3방면군 지휘 진한장(300여명)[第三方面軍 指揮陳翰章 (300人余)]

이 중 제2방면군(第二方面軍), 3방면군(第三方面軍)은 기존 제2로군(第二路軍)의 활동 범위로 되어 있던 동만주의 화룡(和竜), 안도(安図), 연길(延吉), 왕청(汪清), 혼춘(琿春) 등 조선인이 많이 사는 지역 이 활동 구역으로 통합 되었다.

 

(4)1로군(第一路軍)의 괴멸

중일전쟁이 발발했던 1937년 소련은 만주국, 조선과 접하는 국경을 경계하여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조선인) 모두 친일세력으로 간주하고,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렇게 한 것은스탈린의 대숙청에 처음부터 관계 당국 극동 내무 인민위원회(국가 정치부) 장관에 있었다

극동 내무 인민위원회(국가 정치부) 장관 겐리후 류시코후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몸이 위태로워 것을 헤아려 19386월 연해주에서 국경선을 넘어 만주국로 망명했다. 류시코후는 혼춘( 琿春)헌병대에 연행 된 후 도쿄의 참모 본부에 보내 망명 기자 회견을 열었다.

 

이 망명 사건에서만 아침의 국경은 극도로 긴장하여 소련군과 일본군 수비대가 충돌하는 장고봉사건이 일어난다.

 

또한 이듬해 1939년 노몬한 사건이 일어나 일단 휴전은 되었지만, 일본측의 경계가 높아져 관동군에 의해 만주 국내 항일세력에 대한 철저한 단속이 시작 되었다. 2 독립수비대 사령관 노조에(野副昌德) 소장에 만주국군(満州国軍) 7개여단, 경찰대 30개 대대가 배속되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대하여 대적 하게 되었다

 

노조에(野副昌德) 토벌대의 작전은 군, 경찰, 행정기관, 민간조직의 연락을 긴밀히하여 그물망을 잘게 치고 게릴라 활동을 봉쇄 민중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 일반 주민에게 토벌대와 게릴라 부대가 교대로 나타나는 상황에서 신변안전을 위해 쌍방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지만, 토벌대가 게릴라 부대를 몰아 약탈과 납치 위협을 완전히 봉쇄하여 치안을 유지한다면 게릴라 부대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적극적으로 토벌대에 협력하게 된다. 결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사람이 없는 삼림 지대에 몰려 식량과 의류의 확보도 곤란해 질 것이다

 

토벌대 중에서도 가장 유능하게 움직인 것은 정빈(程斌) 등 투항한 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 구성하고 있는 경찰부대였다. 그들의 활약으로 제1로군(第一路軍)은 점차 멀리 분산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940년 초에는 경위여장(警衛旅長) 방진성(方振声) 체포되어 처형, 투항들도 잇 따랐다. 그 투항자 때문에 총사령관 양정우의 동정(動静)이 알려져 단신 행동을 강요 될 때까지 되었다. 양정우는 몽강현(濛江縣)[현재는 양정우을 따서 정우현으로 개명 됨]에서 산 일에 들어간 주민과 접촉하여 통보돼 투항을 거부 사살 되었다. 토벌대는 최후의 절개에 흠모하여 불교행사를 영위하고 영혼을 달랬다.

 

양정우 사후, 1로군(第一路軍) 지도자로 추대된 위증민(魏拯民)은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주력 부대를 북상시키기 위해 제1방면군(第一方面軍)은 남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계속한다는 방침을 내놓았지만 그 직후 지휘관 조아범(曹亜范)이가 대원에 의하여 살해 되었고 제1방면군(第一方面軍)은 내분에 의해 해체 되었다.

 

그런 중에도 김일성이가 이끄는 제2 방면군(第二方面軍)100 ~ 300명 정도의 집단 활동을 유지하고 습격, 약탈, 납치를 성공시키고 있었다. 19403월에는 안도현(安図県) 대마록구(大馬鹿溝) 산림 경찰대(森林警察隊)를 습격하여 사상자 각 2명의 피해를 주고 금품 23천엔을 약탈하고 대충 약 140명을 납치했다. 이틀 뒤 피랍자 중 25(일본인 1, 조선족 13, 만주족 9, 백계 러시아인 2)을 석방. 나머지 납치 인질 70여명과 함께 도망을 계속했기 때문에 만주 경찰과 마에다군단(前田隊)의 쫓는 곳이 되었지만, 2 방면군(第二方面軍)의 매복으로 마에다대(前田隊) 140명 중 일본측 문서 전사자 수 58, 전상자 27, 실종자 9명이라는 엄청난 타격을 주고 건재함 인상을 남겼다.

 

이 가을에서 노조에(野副昌德) 토벌대의 활동은 다시 활발해지면서 제2 방면군을 주요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김일성 부대도 소수 부대에 분산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의식(衣食)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제1로군 중추의 위증민도 연락이 취하지 못하고 김일성을 포함한 수십명은 8월에서 10월경에 자신의 판단으로 소련령으로 도망쳤다. 소련 측과의 연락도 없이 갑자기 입소였기 때문에 김일성은 억류 돼 한때 투옥 되었다.

 

3 방면군(第三方面軍)1939년 제2로군 제5(第二路軍第五軍)과 대규모 공동 작전에서 한때 안도현 대사하진(安図県大沙河鎮)을 점령하는 등의 활약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 해 겨울부터 군 단위(軍単位)의 활동은 불가능하므로, 전사, 전상(戦傷), 도망, 투항자가 이어 괴멸 상태가 되었다. 1940년말 지휘관의 진한장은 추격에 의하여 전사한다.

그러나 활동을 계속 되어 김일성 부대 입소 이후 소수 인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소련에 입국했다. 13여단(十三団)을 이끌던 최현도 그 안에 포함돼 있다.

 

1로군 총사령부(第一路軍総司令部)도 괴멸 상태였지만, 194011월경에는 군의관 처장 서철(徐哲)도 경위대 살아남은 몇 명을 데려 입소했다. 만주에 남은 제1로군 수뇌부에 관해서는 19411월에 오성륜(呉成崙) 투항 귀순. 3월 질병에 시달리고 고립되어 있던 위증민이 토벌대에서 발견되어 전사 혹은 병몰 후 발견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제1로군의 만주에서의 활동은 거의 끝났다.

 

                                  1939年秋魏拯民左二與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指戰員在一起

(5)2로군(第二路軍), 3로군(第三路軍)과 소련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원래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재편 된 것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있었지만, 소련의 극동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대한 대응은 상황에 따라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1로군(第一路軍)의 활동 범위는 소련 국경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원래 지원을 받을 수도 적었지만 국경 근처의 동만주나 북만주에 있던 제2로군(第二路軍), 3로군(第三路軍) 밀접하게 소련과 염려 했다.

 

국경선이 긴장하고 있던 1938년 말에는 개편 이전의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제65(第六軍五師)가 일본군에 쫓겨 부대마다 월경했지만 사단장(師長)이 체포 될 뿐만 아니라 전원이 신장성(新疆省)으로 보내졌다.

 

2로군(第二路軍), 3로군(第三路軍)은 함께 대규모 내분을 안고 있었지만, 그 조정(調整)에 지도력을 발휘하고 양군 통해의 중심이 되어 있던 것은 제2로군(第二路軍) 총사령관 겸 정치 위원 주보중(周保中)이었다. 1940년의 1월 그가 중심이 되어 소련 극동당국과 1차 하바롭스크 회의를 받고 중국 공산당 중앙과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상황 소련 극동당 조직과 극동 방면 군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임시 지도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 합의가 성립했다.

 

194011월 주보중과 참모장 최용건은 사전에 소련측의 연락을 받고 부대마다 입소하고 살아 있던 제2로군(第二路軍) 다른 대원도 그 뒤를 이었다. 투옥되어 있던 김일성의 신원을 보증한 것은 주보 중이다.

 

3로군(第三路軍)은 총사령관 이조린(李兆麟) 등의 간부는 입소했지만, 소련에 불신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있고, 참모장의 허형식(許亨植)의 지휘 아래 부대의 절반이 북만주에 남아 싸움 계속했다

.허형식(許亨植)1942년 경안현 청봉령(慶安県青峰嶺)에서 장렬한 전사를 이루었다. 일단 입소했던 정치 위원의 김책은 허형식(許亨植)의 의지를 이어 1943년 연말까지 입소를 거부하고, 봉산현(鳳山県)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1941년의 시점에서 제1로군에서 입소한 인원은 88명 정도 제2로군에서 110명 정도로, 200여명이 소련령에 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939년 김일성(앞줄 좌로부터 네번째)과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지휘부 전투지휘자들이 함께 촬영한 사진

[金日成前左四與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第二方面軍指揮部指戰員攝於1939金日成於1932年春到安圖創建游擊隊先後擔任汪清反日游擊大隊政委東北人民革命軍第二軍獨立師第三團政委第二軍第三團政委東北抗日聯軍第二軍第三師後改為第六師師長第一路軍第二方面軍指揮]


                                                 東北抗日聯軍第第一路軍女戰士左三為金貞淑


                                       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警衛旅部分指戰員攝於1939年夏


3.그 후

소련에 망명한 구성원은 제88 특별여단(교도 여단, 88독립저격여단)에 편입 되었다. 이 여단은 소련군에 흡수된 형태였지만, 소련 사람을 섞으면서 그 구성원이나 직책 등 주보중이 여단장되는 등 대체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조직 구조를 유지하고 있어 중국 공산당은 이 여단을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이라고도 호칭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대원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서 분리 된 소련군 정보국 직속되어 만주국에 침투해 공작에 종사했다. 위험한 임무에 종사한 그들이었지만, 숙청과 일본군의 스파이로 간주 형을 받은 사람도 있다.

 

또한 김일성은 스스로의 조선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에 편입 된 것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출판)"로 인정하지만 소련군과는 연계된 것만으로 제88 특별여단(교도 여단, 88독립저격여단)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고 소련군이 조선반도의 해방군이 되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조선인 대원은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38 도선 이북의 조선)에 돌려 보내 북한 인민위원회와 조선 공산당 (이후 조선 로동당) 및 조선 인민군의 요직에 올랐다.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후 동북항일연군 출신은 만주파 (파르티잔파, 빨치산파)라는 파벌이 되어 남로당파 (남조선 노동당 출신), 연안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중국에서 귀국 한 자, 조선의용군) 소련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소련에서 파견 된 자. 소련군 출신이나 행정,기술관료 출신), 갑산파(보천보 전투 등으로 동북항일연군과 공동 투쟁 한 자)을 잇따라 숙청하고 북한 권력을 독점했다. 조선 로동당에서 정적을 제거하고 구축한 만주파는 1967년에 당의 지도 이념으로 유일사상 체계를 채택하고 이후 북한은 주체 사상에 기초한 독자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걸어 가게 된다.

 

김일성은 만주국(만주지역 조선족 자치정부) 조선 공산당 활동가에서 소련군 예하 각 민족 빨치산부대로 그리고 2차대전 때는 소련측(좌파진영) 연합군 조선인(한국인) 부대로 활동했다

김일성은 민족주의자보다는 철저한 마스-레닌주의 노선 공산주의자이며 스탈린 추종세력이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스탈린을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후에 그는 바트당(아랍 사회당)을 조직한 사담 후세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 북한의 주체사상 김일성, 리비아의 카다피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련 공산당 스탈린 일국 사회주의 이론이 독일 노동자당 히틀러 국가사회주의 이론 비슷한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국영 자본체제) 이론이다  소련 공산당은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과 소련 공산노동당 그룹이 있다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이 수정주의자(실용주의자)라면 공산노동당 그룹이 교조주의자들이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사회주의 공화국(사회주의 국가) 세력은 국가자본주의 일본제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수립할 때 민족해방과 왕권신수설 전체주의 군주, 지주계급이나 매판 자본가를 타도하고 노동자 계급 령도 노농연맹 인민민주주의 혁명 체제 사회주의 국가 승리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개인 우상화, 신격화로 1인 장기집권으로 왕권신수설에 도취되고 있다

   

만주국을 승인한 국가

중국은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무역, 교통, 통신을 위해서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33년 국제연맹이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를 채택하여 만주가 중국의 일부임을 선언하자 일본은 연맹에서 탈퇴한다. 미국은 만주국이 건립하자 무력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 관계의 변화를 거부하는 스팀슨 독트린(Stimson Doctrine)을 선언한다.

 

국제 연맹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은 엘살바도르(193433)와 도미니카 공화국(1934), 소비에트 연방(사실상 1935323, 법률상 1941413), 이탈리아(19371129), 스페인(1937122), 독일(1938512), 헝가리 (193919)에 승인되었다.

 

2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 만주국은 일본의 동맹국 독일의 지배를 받거나 영향하에 있던 국가인 슬로바키아(194061), 프랑스(1940712), 루마니아(1940121), 불가리아(1941510), 핀란드(1941718), 덴마크(19418), 크로아티아 독립국(194182)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일본의 영향하에 있던 중국 왕징웨이 정권(19401130), 태국(194185), 필리핀도 만주국을 승인했다


만주국 인구와 오족협화

만주인(한족·만주족·한민족) 30,190,00097.8%

일본인 590,7601.9%

타인종(러시아인·몽골인 등) 98,4310.3% 

-1932년 3월 1일 만주국 건국이후 만주지역 항일운동은 만주국 협화회(의회) 조선족 협화회(만주국 의회 조선족 의원, 조선족 자치조직)를 파악해야 잘 이해할 수 있다

만주국 협회(만주국 의회)는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한민족(조선족), 일족(야마토 민족의 연합정부 오족협화를 의미한다

만주국은 강덕제를 원수로 하는 국가로서,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한민족(조선족), 야마토 민족의 오족협화로 이루어진 만주인에 의한 민족자결의 원칙에 기초에 둔 국민국가를 표방했다. 그러나 실제 통치는 관동군이 주도하였다.

김일성(김성주)은 만주국 건국 이후 남만주나 동만주 지역에서 반일이나 반만주국(반만국) 활동을 했다 그리고 그의 동생 김영주는 관동군 헌병 보조원[만주군 통역 ]으로 생활했다

만주국과 조선총독부는 다른 성격이다

만주국은 자치를 보장된 위성국가이며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직할지역이다

만주국 협화회에 가담한 조선족 자치조직이 만주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만주국 협화회 조선족 자치협화회가 조선족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종일전쟁 때 중화민국 지원국과 일본제국 괴뢰국

중화민국 지원국:

미국 (1941-)

소련 (1937-1941, 1944-)

영국 (1942-)

나치 독일 (1933-41)

공동 교전국

몽골 몽골 인민공화국 (1945)

비시 프랑스 비시 프랑스 (1940)


일본제국 괴뢰국가:

만주국 (1932-)

몽강연합자치정부 (1936-)

왕징웨이 정권 (1940-)

둥방공자치정부 (-1938)

중화민국 임시정부 (-1940)

중화민국 유신정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파쇼 인민전선론'이 채택되면서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여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기조가 일어나자, 당시 만주에 존재하던 공산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에 의해 '인민전선론'이 대두됐다

조국광복회 간부들은 대부분이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간부들로 채워졌으며, 군사활동뿐 아니라 국내 정치활동에도 주력, 기관지 <3·1월간>을 발간하는 등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반일 성향을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자·천도교·지주까지 참가시켰다[조국 광복회와 보천보 전투]

북한 공산주의자 김일성, 김책, 강건 등 은 만주지역에서 만주국 조선 공산당  항일 운동이 소련정부의 대일정책에 따라 움직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이 중일전쟁때 중화민국 지원국일때 1937년부터 1941년까지는 활동이 대단했고 소련이 공식적으로 만주국을 승인할 시기에는 1941년 부터는 만주국 내부에서 공산당 활동이 침체되었고 협력자들이 등장했다 1944년 경부터  소련이 연합군으로 가담하여 반일투쟁을 주도할때는 만주국 내부 공산당 세력들이 반만주국 반일 투쟁 활동과 만주국 점령 군사훈련을 주도했다

만주 전략공세작전은 제1전선 구축 소련군 주도, 제2전선 구축 소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 극동지역 공산주의자 주축으로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만주국 오족협화] 소련 제1극동전선군  88독립 저격여단 연합으로 추진 되었다


193777일 중일전쟁과 소련의 만주국 승인 그리고 만주국 협화회 조선족 자치협화회 등을 정리될 때 정확하게 만주지역 조선족 좌파(소련 원조 공산당)나 우파(중국 장개석정부) 항일운동을 재정리할 수 있다


한민족(조선족)의 3개 정부

남한(대한민국)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길림 연변조선족 자치정부 등 한민족(조선족)의 3개 정부입니다. 중국에 한국어(조선어)를 사용하는 조선족이 약192만명에서 약 200만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한족, 만주족(동북3성), 몽골족(내몽골), 위구르족(후이족=회족, 신장), 티베트족(티벳) 등 5개 큰 민족과 50개 소수민족으로 건국한 연합국가입니다 

만국(만주국)은 한족,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일족(일본족, 야마토민족) 등 5개 종족 연합국이었습니다

만주국의 국기에는 노란색(만주족) 바탕 왼쪽 상단에 네 가지 색[빨간색(일본 민족), 파란색(한족), 하얀색(몽골족), 검정색(조선인)]의 가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오족협화의 이념을 뜻합니다

조선족이 만주국에서도 조선족 자치정부로 참여하여 상류층으로 생활했습니다



                                                                                   동북3성 다수민족 한족,만주족과 소수민족 조선족, 거란족, 몽골족 자치정부

-동북항일연군의 보천보전투는 연군이 만주국 조선족자치와 연합으로 국내 진공작전에 성공한사례이다[인민전쟁 모델]

-1950,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지원 요청으로 비밀리에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중공군의 일부를 한반도로 비밀리에 투입한다. 여기서 쑹스룬은 '인민지원군'으로 위장한 인민해방군 9병단을 이끌고 장진호 전투에서 미 10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쑹스룬은 성격이 불같았기 때문에 올리버 스미스장군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를 전멸시키려고만 했기 때문에 미 해병대를 상대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반면 후퇴하는 미 육군과 대한민국 국군을 추격하는 데에는 실패했다[북중연합군 중국 모택동정부 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 만큼 평가하면서 큰 성과로 선전하는 전투가 바로 장진호 전투이다 장진호 전투는 중국정부 내 조선족 자치정부 중심으로 산악으로 잠입작전으로 성공한 한반도 전쟁에서 두번째 큰 전투이다 [동북항일연합군 인민전쟁 모델]




                                                                                                            장진호 전투


북한 전략 로켓군 배치도(미사일 사거리)는 다음과 같다

전방구역(남한전역 공격 목표)과 중앙구역(주일미군과 일본지역 공격목표), 후방구역(괌과 태평양 미군기지 공격 목표) 으로 나누어 배치 돼 오고 있다

북한  3개의 탄도 미사일이 태평양 괌에도 도달할 수 있다

       

*파르티잔(Partizan, 빨치산)

1943, 소비에트 유격대.

파르티잔(러시아어: партизан, 영어: partisan)은 무장한 전사로서 정규부대의 정식부대원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파르티잔을 음차한 빨치산이라는 단어로도 부른다. 제복이나 계급장 등도 없기 때문에 인식 내지 판별이 어렵다. 파르티잔 전투는 거의 예외 없이 침략군 내지 정복군, 점령군, 식민주의자 등에 대한 방어 전쟁을 수행한다. 또한 내전이나 기타 국가 내부의 분쟁에서도 볼 수 있다. 파르티잔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국민의 해방 요구에 응하여 전투 등을 수행한다. [소련군 2극동전선군 제88독립저격여단이 각 민족 지역 빨치산부대이다] 

단체

-소련 유격대

-조선인민유격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빨치산파

 

유사 단어

-시민군

-의병

-레지스탕스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점령한 것은 19414월이었지만, 그 해 6월 독일의 소련 침공이 시작된 뒤에야 유고슬라비아의 공산당원들이 파르티잔 분대를 조직화하여 추축국의 점령에 대한 민중 봉기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19419월까지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걸친 넓은 지역이 파르티잔과 체트니크에 의해 해방되었지만 이 두 운동단체가 주로 체트니크의 도발로 이내 내전에 휘말렸으며, 194111월 독일군이 두 저항군 세력을 세르비아에서 모두 축출했다. 그 후 2년 동안 파르티잔은 독일군을 상대로 군사적으로 힘든 싸움을 벌였는데 체트니크가 기반을 잃은 반면 파르티잔은 수적으로 세력이 불어났다.

 

이것은 침략 추축군에 대한 통일된 저항정책으로 모든 인종의 유고슬라비아인을 흡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체트니크들은 세르비아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기본적으로 독일군과 싸우기를 원하지 않았다.

 

1943년말까지 연합군이 보기에 파르티잔은 독일군에게 맹렬히 저항하는 반면 체트니크는 상당수가 사실상 독일군과 협력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연합군측의 정부들은 체트니크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고 티토를 유고슬라비아 저항군의 지도자로 인정했다. 그때부터 영국과 미국의 무기와 장비가 파르티잔에게 계속 증량·공급되어 파르티잔들의 병력이 증강되었다.

 

1943년말까지 파르티잔이 약 30만 병력으로 늘어나 독일군 20개 사단을 물리칠 수 있었다. 파르티잔은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7차례 유도하여 다수의 적군이 다른 연합군 전선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1944년 여름에는 파르티잔이 유고슬라비아의 산악지방을 대부분 장악했으며, 10월에는 소련 적군(赤軍)의 베오그라드 해방전에 파르티잔 부대가 참가했다. 대전중에 파르티잔은 2차례의 정치회담(194211월의 비하치 회담과 194311월의 자즈체 회담)을 개최하여 그들이 해방시킨 지역들 내에 지방과 연방의 임시정부들을 수립했다. 파르티잔이 장악한 이 지방정부망은 공산당이 전후에 정치적 성공을 거두는 데 기여했다. 1945년까지 티토의 공산당은 정치적·군사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대전중 파르티잔 사이에 형성된 티토에 대한 충성심과 국민적인 감정이 1948년 티토가 스탈린의 정치적 공격에 저항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이 파르티잔의 발음이 전와되어 빨치산이 되었다.빨치산

 




88독립 저격여단 

88독립 저격여단 (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 소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 극동지역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 1개이다

88독립 저격여단은 극동전선 정보과 직속 만주, 한반도에서 정찰 , 파괴 공작임무을 수행했다[소련군 특수부대 빨치산]

88독립 저격여단 원래 동북 항일연군(聯軍) 장병 핵심이 주로 중국인과 조선인에서 편성 되었다. 후일 북한 국가 주석 김일성 여단 1 대대장 맡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 공식 견해에서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 조직하여 동북 항일연군 본체 공투하면서도 다른  행동이었다고 하고 다음 88독립 저격여단  사실 무시되고 있다(부정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자주노선과 주체정부 노선으로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군 참여를 부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부대 동북 항일 연군 교도여단이라고 칭하고 있다.

 제88독립 저격여단 핵심 동북 항일연군(聯軍) 1939년경부터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만국)군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수 많은 전사자가 등장했고 내부적으로는 일본 당국 귀순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남은 자들 물자 부족으로 인해 활동 계속이 곤란해 졌다. 따라서 그들은 소련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12월 말 동북 항일연군(聯軍)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 영내에 들어갔다. 소련 영내에서는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의 활동 지원을 위해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과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두 곳에 분산 수용했다

남야영과 북야영은 각각 B 캠프와 A 캠프로도 불리는데, 보로쉴로프(Вороши́лов)와 아무르(Амур)강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

당초 100여명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후 200 ~ 300명으로 증가했다
독소전 발발 후 1941년 7월 중순, 소련 정부는 일본의 북진에 대비하여 이 야영지에 따라 제88 독립 저격 여단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여단은 하바로프스크시의 부쯔코에나 나아무레 (Вятское-на-Амуре)에 배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21일 극동 전선사령관 이오 시프 아빠나센코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0132호에 따라 여단의 편성 기간은 같은 해 7월 28일부터 9월 15일까지로 정해졌다.

부대 편성 동북 항일연 중국인 병력과 조선인 병력 외부 중국계 · 조선계,  소련인, 기타 소수 민족 (몽골족, 민주족등 )에서 열렸다. 여단 대원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조선인은 10% 불과했다. 그 후, 후속하여 소련 영내 들어간 부대도 합류해, 88독립저격여단 병력 수는 1,500 명을 넘어 섰다.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에서 온 많은 사람들 소련 군사 학교 촉성 지휘 과정 또는 관구 소위 과정받은 적군 계급 수여했다 (여단장 주보중 중령, 김일성은 대위). 일반적으로 여단 지휘 관직에는 중국인이었고, 지휘 관직 붉은 군대(소련군) 장교 임명 되었다. 병사 적군 군복 착용했다.

 

1944 4 현재 편제.
여단 본부 - 여단장 : 주보 중령, 참모장 : V. 사마루첸코 소령
정치 과학 - 정치 위원 : V. 세레긴 소령
방첩 - 스 메르시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2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효명 대위
3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명귀 대위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자동소총 대대
무선대대
독립 박격포 중대
독립 공병 중대
독립 대전차 소총 (PTR) 중대
독립 경제 중대
독립 기관총 소대
군사 통역 과정 특수 분대
독립 저격 대대는 3 개 중대로 구성되어 중대는 3 개 소대에서 되었다.

 

장비 (1942 9 ~ 1943 7 현재) 소총 x4,312 테이, 자동 소총 x370 , 중기관총 x48 자루, 경기관총 x63 정,  화포 x21 문, 대전차 소총 x16 테이, 자동차 x23 .
88 여단 병사 만주, 한반도 지역에서 정찰과  파괴 공작활동에 종사했다. 자세한 것은 불명이지만, 여단장 주보 1940 ~ 1943 사이 89 명의 감원 (손해)이 있었음보고하고 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 2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9명
제 1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26명
미 귀환 - 24명
스 메르시에 인도 - 6명
환자를 위한 후송 - 15 명
사망 - 2명
여단 복귀 - 7명
1945년 7월 소련 대일 참전에 대비하여 여단에서 무전기를 장착 한 100명을 투입하는 전투 행동 계획이 수립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급속한 진격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 88 독립저격여단  1 독립 저격 대대  대대장 김일성이 한반도의 해방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가 되었고 소련군과 함께 방문했다.
1945년 8월 29일 제 2 극동 전선 사령관 막심 뿌루카에후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10 호 / n에 따라 "일본 침략자와 싸우는 전선에서 전투 지휘 임무의 모범적인 수행과 이 때 발휘 된 용기"에 김일성에게는 적기 훈장이 수여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88 독립저격 여단 장병 21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9 월 10 일에 더욱 58 명 추가).

  88여단(외국인군단, 대일연합군) 1945 10 12일자 극동군관구 사령관 042호에 의해 해산 되었다.


이 사진은 김일성이 토벌군에 쫓기다가 소련으로 도주했을 당시 오케얀스카야에서 좌로부터 김철호(최현의 부인), 리영숙(안영의 부인), 김정숙(김일성의 부인), 황순희(류경수의 부인 조선혁명박물관장)의 모습이다.


                                                           1941년 동북항일연군 전투지휘자들이  소련 남부 야영 훈련장에서 촬영한 사진

[在南野營整訓的部分東北抗日聯軍指戰員攝於1941

前右金日成

一排右李英淑第七軍戰士)、右三金貞淑第二軍戰士)、右四黃順姬第二軍戰士)、右五金哲鎬第二軍戰士)。

二排右沈鳳山第一路軍警衛旅一團團部警衛員

三排右一沈鳳山第一路軍警衛旅一團團部警衛員三排右一柴世榮右二季青。]


                                    제88 독립저격여단 시절 사진. 좌로부터 김일성(金日成), 계청(季青, 중국인), 최현(崔贤), 안길(安吉)

88독립 저격여단 소부대 활동시기 촬영한 사진[在小部隊活動時期的合影]

金日成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營長

季青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四營政治副營長

崔賢曾任東北抗日聯軍第二軍第一師後改為第四師第一團團長第一路軍第三方面軍第十三團團長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第一連連長

安吉曾任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第三方面軍第十四團政委第三方面軍參謀長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政治副營長


                                          동북항일연군 지도여단의 일부[東北抗日聯軍教導旅部分乾部]

일렬(一列)심태산(沈泰山)최명석(崔明錫)김경석(金京石)서철(徐哲)장광적(張光迪)

두렬(二列)바슈코비츠(瓦什科維茨,와십과유자)최춘국(崔春國)강신태(姜信泰)양청민(楊清海)도우봉(陶雨峰)주암봉(周岩峰)

삼렬(三列)장석창(張錫昌)유철석(劉鐵石)범덕림(范德林)고만유(高萬有)교수귀(喬樹貴)유안래(劉雁來)진덕산(陳德山) [19457月的合影(19457월 촬영)]


19475, 왕효명. 팽시로, 왕일지 등 동북항일연군 관계자는 조선인 출신 동북항일연군 인사를 조선인민군 총사령부에서 만났습니다

[19475王效明彭施魯王一知分另受有關部門委派先後赴朝鮮平壤圖為他們與原東北抗日聯軍的朝鮮戰友在朝鮮人民軍總司令部合影留念]

앞열(前排)김일(金一)주위(周偉)왕일지(王一知)왕효명(王效明)안길(安吉)팽시로(彭施魯)

가운데열(中排)이영호(李永鎬)최광(崔光)김광협(金光俠)심태산(沈泰山)최춘국(崔春國)유창권(柳昌權)이을설(李乙雪)

뒷열(後排)박우섭(樸禹燮)김려중(金麗重)최용진(崔勇進)강상호(姜尚鎬)유경주(柳京珠)오진우(吳振宇)김창봉(金昌鳳)오백룡(吳伯龍)전문섭(全文燮).






소련군을 환영하는 김두봉 북한 초대 국가수반과 북한지역 지도부들  





만주 전략공세작전

만주 전략공세작전(러시아어: Манчжурская стратегиче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만츠주르스카야 스트라테기체스카야 나스투파텔나야 오페라치야[*]) 또는 줄여서 만주 전역(러시아어: битва за Маньчжурию), 다른 명칭으로 소련의 만주 침공은 194589일 소비에트 연방이 일본 제국의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침공해 벌어진 전투이다. 일본 제국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종전되었다. 이 전투는 일본 제국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앞당기는데 기여했다.

 

이 전투는 일본 제국의 또 다른 괴뢰 정권인 몽강국(내몽골 지역), 일본의 점령지였던 한반도, 사할린, 쿠릴 열도에 대한 공격도 포함된다. 이 전투는 1939년 할힌골 전투 이후 맺은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이루어졌다. 얄타 회담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유럽 전쟁이 끝난 3개월 후,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기로 이미 다른 연합국과 약속한 바 있었다. 공격은 정확히 나치 독일이 항복한 58(모스크바 표준시로 59043)에서 3개월이 지난 89일에 이루어졌다. 86일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졌고, 8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공격은 이 두 원자 폭탄 투하 못지않게 일본에게 충격을 주었다.

 

전쟁이 계속 되었더라면 소비에트 연방은 다른 연합군이 규슈에 도달하기 전에 사할린을 거쳐 홋카이도까지 점령할 생각이었다. 독소 전쟁으로 경험을 쌓았고 질적으로 크게 발전한 소련군과 비교하여, 일본군은 전력의 태반이 남방으로 가 있는 데다가 새로 모집한 병력은 훈련 부족과 10만 명 이상이 소총조차 지급받지 못하는 물자 부족 상태에 있었다. 이 때문에 만주 곳곳에서 일본 관동군은 격파되었고 일본은 815일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지만, 소련군의 공격은 8월 말까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8월의 폭풍 작전(Operation August Storm)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1983년 미국의 군사역사학자 데이비드 글랜츠의 논문에서 처음 등장한 표현으로 2차대전 당시 소련군은 이러한 이름을 전혀 쓰지 않았다.

1.배경

할힌골 전투에서의 참패를 계기로 일본은 소련군의 강력함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소련과의 충돌을 가급적 삼가고자 하는 것이 군부의 일반적 의견이었다. 반면, 소련에게 있어서 일본은 잠재적인 적국임이 분명했지만, 머나먼 아시아보다 당장 눈앞의 나치 독일이 더 큰 위협적 존재임이 분명하였기에, 소련 역시 일본과 굳이 충돌하려 하지 않았다.

 

이처럼 양국의 이해가 일치하여, 19414월에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독소전쟁 발발 이후에 더 심화되었다. 당장 모스크바가 함락될 위기에 처한 소련에게 일본은 관심쓸 겨를이 없었다. 일본 역시 그 시기에 대미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독일의 희망사항이던 소련 뒤통수치기 식의 선전포고는 할 여력이 없었다. 덕분에 소련은 극동과 시베리아의 병력을 모두 유럽으로 돌려서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양국의 이해관계는 19455월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최대 주적인 독일을 제거한 소련은 일본을 공격할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동시에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결사 항전에 생각보다 큰 희생을 치른 미국은 거듭해서 소련에 대일전 참전을 요구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 침공 작전인 올림픽 작전이 벌어지면 서방 연합국은 백만 명 정도의 엄청난 인적 손실이 예정된 마당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이 손실을 없애는 데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일본의 위협을 제거하고 극동에서 전략적 위치를 점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미국의 요구와 소련의 필요가 맞물리자 스탈린과 소련군 지도부는 유럽에서 승리한 뒤 3개월 이내에 만주의 일본군을 공격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자 소련은 만주 공격을 결정하고 그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 스타브카는 8월 중순 만주지역에 전면적인 공세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미국이 86일 히로시마에 핵공격을 단행하자, 일본이 조기에 항복해 향후 전리품 분배에 참여할 수 없게 될 거라는 불안감은 소련의 공세 계획을 앞당기게 했다.

 

88일 오후 5(모스크바 현지시각, 서울·도쿄 시각으로는 오후 11)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사토 나오타케 주소 일본 대사를 불러 소비에트 연방-일본 불가침 조약의 파기와 선전포고를 통보했다. 89일 오전 0시에 만주 전역에서 소련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1) 관동군의 상황과 소련군의 딜레마

만주를 관할하는 일본 중 25개 사단이 1945년 창설된 신규사단이고, 그 병력 자원의 질적 수준도 최하였다. 게다가 관동군의 사단 편제는 당시 세계적으로 표준이 된 3개 연대+1개 포병연대의 삼각편제가 아닌 제1차 세계 대전식의 4개 연대 편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관동군이 아무리 장비나 병력이 빈약하더라도 만주국군까지 합하면 90만 명에 가까운 병력 수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독소전쟁에서 군인 1천만 명을 포함해 약 3천만 명 이상에 이르는 인적 손실을 입은 소련으로서는 관동군과의 싸움에서 다시 큰 인적 손실을 낸다면 더욱 힘든 세월을 보내야 할 판국이었다.

 

또한 만주의 지형 또한 소련군의 공격을 어렵게 하는 한 요소가 되었다. 만주의 주위 삼면은 산과 삼림으로 에워싸여 있어 통행이 어려운데, 특히 서쪽의 대싱안링 산맥은 해발 1,900m에 이르고 산 너머 내몽골 지역은 광활한 반사막 지대이다. 몇 안 되는 고개도 늪지인 데다가 장마철이 되면 더 심해져서 습도, , 진흙으로 작전을 펼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통행의 어려움에 더해서 만주의 엄청난 크기는 잠재적인 공격 측의 기를 꺾어 놓았다. 만주 북쪽 끝에서 황해까지의 거리는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코 앞까지의 거리였다. 관동군 사령부는 이 험한 지형을 이용, 인적 물적 열세를 지형적 이점으로 상쇄해 소련군을 격퇴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소련군이 대싱안링 산맥을 넘기 힘들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병력의 대부분을 동쪽, 북쪽, 북서쪽의 철도를 따라 집중시켰다. 이 지역의 국경은 수많은 국경 요새들로 보호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제1방면군은 종심 방어를 위해 휘하 부대들을 후방으로 물렸다. 3방면군은 만주의 서부를 담당했는데, 휘하 병력은 만주 평원 안쪽에 넓게 퍼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붉은 군대가 마냥 물량만으로 관동군을 이기기에는 감수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2) 소련군의 공격 준비

대일전 시작 전 극동 지역에는 종래에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둔 극동전선군(Far Esatern Front)과 보로실로프(현 우수리스크)의 연해주군단(Primorsky Group of Forces)이 있었다.

 

스탈린은 만주에서 한참 떨어진 모스크바에서 작전을 지휘할 수 없자 극동의 전선군들을 효율적으로 지휘할 자체 사령부인 극동군 총사령부(Far East Command)를 하바로프스크에 설치하고, 그 아래에 만주동부 전선을 담당하는 연해주군단을 개편한 제1극동전선군, 만주북부 전선을 담당할 종래의 극동전선군을 개편한 제2극동전선군과 만주서부 전선을 담당할 트랜스바이칼 전선군을 설치한다. 극동군 총사령관에 전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를 임명하고 공격 준비에 착수하게 했다. 할힌골 전투에서 관동군과의 전투 전력이 있는 총사령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가 적임자라는 말이 많았으나 스탈린은 바실렙스키를 택했는데 이는 스탈린이 독소전쟁에서 높아질 대로 높아진 주코프의 위신을 제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렙스키는 위의 딜레마들을 고려하며 단독으로 8월의 폭풍 작전을 입안하고 작전에 따른 전선군의 진군 방향과 사령관들 교체를 시작했다.

 

극동의 각 전선군 사령관들이 스타브카에 의해 교체되었는데 제1극동전선군에는 북부에서 핀란드군과 독일 북부 집단군을 상대로 많은 경험이 있었으며 경보병 군단의 창설자인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가 임명되었고 트랜스바이칼전선군에는 쿠르스크 전투 직후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에서 명성을 쌓고 중앙유럽 중부를 석권하며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점령한 로디온 말리놉스키 원수가 임명되었다. 2극동전선군에는 종래 극동전선군의 사령관인 막심 푸르카예프 대장이 임명되었다. 극동함대 사령관에는 해군대장 이반 유마셰프 제독이 임명되어 쿠릴 열도와 사할린 상륙 작전을 책임질 예정이었다.

 

한편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수송 능력이 제한된 데다가 극동에 전방 배치된 소련군이 별반 활동을 보이지 않자, 일본은 19458월에도 공격은 없을 것이라고 보았고, 심지어 1945년 봄까지도 소련의 공세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연히 이와 달리 소련군 지도부는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된 최정예 부대 약 90여 개 사단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은밀하게 극동 지역으로 전개시켰다. 부대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부담을 덜 주기 위해 자신들의 차량으로 이동했다. 4년 동안이나 나치 독일을 상대로 생사를 건 전쟁을 하고 겨우 살아남은 소련으로서는 이 작전은 엄청난 역작이었다. 이 작전에 참여한 많은 부대가 대개 중년과 소년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2. 전개

소련군은 보로쉴로프(현재의 우수리스크)의 제1극동전선군, 하바로프스크의 제2극동전선군, 그리고 시베리아와 몽골에 전개한 트란스바이칼전선군을 통해 만주를 좌우로 협격하는 것을 시도했다.

 

트랜스바이칼전선군은 제6근위전차군을 주력으로 하여 고속 진격과 이를 통한 만주와 중국 본토의 단절, 일본군의 분산 및 포위를 시도했다. 이들의 좌측을 엄호하는 제36군은 하이라얼을 공략하는 한편, 다른 부대로 남하하여 일본군을 대싱안링 산맥으로 거세게 밀어붙였다.

 

1극동 전선군은 동쪽에서 만주의 중심으로 진격하며, 813일에는 무단장까지 진출,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여 815일에 도시를 함락시켰다. 1극동전선군 예하 제25군은 주력부대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로 진격하여 함경북도 일대의 일본군을 격파했다.

 

조공 성격인 제2극동전선군은 15군과 2군을 투입해 각각 하얼빈과 치치하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러한 소련군의 공세에 맞서, 일본 관동군은 나름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장비, 물자, 병력, 화력 등 모든 면에서 소련군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독일을 상대로 단련된 소련군의 고속 진격은 독일이 1940년에 보여준 전격전의 재현이라고 할 정도였다. 소련군의 전차 및 기계화부대의 쾌속 진격 앞에 관동군은 산산조각이 났고, 주요 도시나 요새는 보병들의 맹공격으로 하나하나 함락당했다.

 

815일 일본의 항복 당시, 소련군은 이미 만주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관동군에 대한 전과확대 단계에 진입한 상태였으며, 한반도에서도 89일에 총공격을 개시하여 811일 웅기(선봉)를 시작으로, 812일에는 나진을 점령하고 813일에는 청진으로 진격했는데 이곳은 일본의 항복 후에도 전투가 계속되어 816일이 돼서야 점령했고 소련의 고려인 정상진도 소련 부대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웠다.[4] 소련군은 일본의 항복선언을 무시하고 계속 진격해서 한반도의 함흥을 거쳐 중부의 개성시(823일 진주, 92일에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 38선 분할 점령에 합의하면서 철수)와 랴오닝 반도의 끝인 뤼순까지 진출했다. 트랜스바이칼 전선군은 베이징을 공격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3. 결과

8월 폭풍 작전은 미국을 상대로 한 본토 결전에만 대비하고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던 일본제국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원자폭탄 투하만으로도 국가 멸망 및 민족 멸절의 위기를 맞이하는 상태에서 소련의 참전은 일본군 수뇌부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819일 관동군 사령관 야마타 오토조 대장이 항복조칙에 따라 무조건 항복하였고, 830일까지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있던 일본 관동군에 대한 전면 무장 해제가 이루어졌다. 불과 1주일(194589~15)의 짧은 기간동안 2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전사했으며, 60만 명이 넘게 포로로 잡혔다. 반면, 소련군의 전사자는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소련은 이 작전을 통해 일본 제국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과 몽강국을 붕괴시키고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서방 연합국과의 사전 약속에 따라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자국 영토로 흡수하였다. ,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 북부에 군대를 진주시켜 미국과 함께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하였다.

쿠릴 열도 상륙 작전(러시아어: Курильская десантная операция, 영어: Invasion of the Kuril Islands, Kuril Islands Landing Operation)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8월 소련군이 일본 제국이 지배하던 쿠릴 열도에 상륙한 작전이다. 이 작전이 성공하여 쿠릴 열도는 소련의 영토가 되었다


                                                                             Soviet marines or infantry are loading on a ship[쿠릴 열도 상륙 작전]


2극동전선군


                                                                              아무르강을 건너는 제2극동전선군 예하 제2적기군


2극동전선군 (2-й Дальневосточный фронт)은 서구의 군집단과 같은 규모인 소련 육군의 전선군 중 하나였다. 이 군단은 만주 전략공세작전 직전에 창설되어 194585일 임무를 시작했으며 같은 해 101일 해산되었다.

1.역사

창설된 직후 제2극동전선군은 일본 제국의 제1방면군과 제5방면군, 4군을 상대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2극동전선군이 상대해야 할 일본군은 만주, 사할린섬, 그리고 쿠릴 열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전선군이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을 건너 일본군의 저항을 무력화하는데 성공했다. 820일 전선군의 제15군이 하얼빈을 점령했으며, 이후 제2적기군이 칼로찬과 륜츠전 지역에 입성했다. 15군은 이 사이에 산신 군을 점령했고, 5소총군단은 볼리 지역에 입성했다. 대부분의 일본군은 820일 이후 소련군에 항복하기 시작했다.

한편 811, 16군은 남부 사할린에 공세를 가해 818일까지 섬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819일부터 25일까지 제16군은 홀름스크 항구에서 상륙작전을 개시하였고 코르사코프에서 공정작전과 상륙작전을 동시에 수행했다. 825일 소련군은 사할린의 행정중심지인 유즈노사할린스크를 점령했다. 9월 초 일본군의 저항은 끝났지만 소련군의 침공이 지연되어 일본 본토에 위치한 홋카이도 침공 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다. 한편 제101소총사단은 쿠릴 열도를 점령했다.

1945101, 스타프카 VGK의 지시로 전선군은 해산되어 극동군관구로 재조직되었다.

 

2.19458월 구성부대

T2극동전선군은 194589일에 아래와 같은 예하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2적기군

-제5소총군단

-제15

-제16

-제10항공군

-캄차카 방어군단 제101소총사단

-아무르 군사전단

-북태평양 전단

 

3.참전

만주 전략공세작전의 주요 공격군[역할]

-만주 전략공세작전 남사할린 침공

-쿠릴 열도 상륙작전

-슘슈 섬 전투



막심 푸르카예프


                                                                                                                           1940년대의 막심 푸르카예프 대장

막심 알렉세비치 푸르카예프(Максим Алексеевич Пуркаев, Maxim Alekseevich Purkayev, 1894.08.14~1953.01.01)는 소련의 군인이다. 1940년대 전반 소련 하바로프스크의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 사령관으로 김일성이 소속되었던 제88국제여단을 관할하였고, 19458월의 소련의 만주 침공 작전 당시 만주 북부 전선을 담당한 제2 극동전선군을 지휘하였다.



 

푸르카예프는 1915년 러시아 제국 군대에 징집되었고, 1918년 적군에 가담하였다. 1936년부터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Frunze Military Academy)에서 공부하였다. 1943425일부터 194584일까지 하바로프스크의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 사령관을 지냈다. 소련이 만주 침공을 단행할 때인 194585일부터 101일까지는 만주 북부 전선을 담당한 제2 극동전선군(2nd Far Eastern Front) 사령관으로 소련의 만주 침공 작전을 지휘하였다.[1][2] 전후에는 19471월까지 제2 극동전선군이 개편된 극동군관구(Far Eastern Military District)의 사령관을 지냈다.

 

그는 김일성이 소속되었던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제88국제여단을 관할하였고, 19458월말 또는 9월초 극동군 총사령부에서 북한 지도자 후보로 김일성을 면접 심사할 때 이오시프 쉬킨 상장과 함께 면접위원이었다. 이후 평양의 소련군정은 제25군이 소속된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 휘하의 제1 극동전선군(1st Far Eastern Front)이 개편된 보로실로프(지금의 우수리스크)의 연해주군관구(Primorsky Military District) 사령부가 관할하였다.


키릴 아파나시예비치 메레츠코프


키릴 아파나시예비치 메레츠코프(Кирилл Афанасьевич Мерецков, 189767~ 19681230)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야전군 지휘관이었으며,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후에는 극동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을 격파하고 한반도 북부에도 진주했다.

1.성장과정

메레츠코프는 모스크바 남동쪽 라잔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66월에 러시아 제국군에 자원입대하여 정비병으로 복무했으나, 19178월에 볼셰비키 당원이 되었다. 이듬해인 1918년에 붉은 군대에 입대했고, 붉은 군대의 전신인 적위대에서 참모장이 되었다. 내전 중에 군사학교에 입학했으나 여러 차례 전투에 투입되어 졸업하는데 시간이 걸려 1921년에 졸업했다.

1924년부터 1931년까지 모스크바 군관구에서 근무했으며, 1936년 에스파냐 내전이 발발하자 1년여간 군사고문관으로 공화파를 지원했다. 1937년에 귀국한 메레츠코프는 1939년에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소련군은 대숙청의 홍역을 치렀지만, 메레츠코프는 별 탈 없이 넘겼다.

 

2.겨울전쟁

소련은 그 해 12월에 보로실로프를 사령관으로 하여 핀란드와 전쟁을 시작했다. 핀란드의 접경지대인 레닌그라드 군관구를 맡고 있던 메레츠코프도 이 전쟁에 참전한다. 그러나 전쟁은 12월 중순에 이르러 모티 전술과 같은 효율적인 전투 방식을 개발한 핀란드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었다. 손실에 대한 비난에서 야전군 지휘관인 메레츠코프도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 책임은 메레츠코프의 탓으로만 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이 무렵 소련군은 전략적 지침도 존재했고, 당시 서방과 다른 군사전략을 수립하고 있었지만, 대숙청의 여파로 경험 부족의 장군 및 장교들이 지휘하는 사단급 및 그 이하 제대의 전술 수행 능력과 전투 능력 자체에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스탈린은 메레츠코프를 다시 7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다시 한 번 전쟁을 지휘하도록 했다. 세묜 티모셴코가 보로실로프를 대신하여 레닌그라드군관구 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19402, 소련군은 재차 공세를 가했고, 이번에는 크게 승리했다. 메레츠코프도 소련 국가영웅 칭호를 수여받았고 더 나아가 총참모장이 되었고, 방위위원회 멤버가 되었다.

 

3.독소전쟁

1941622,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메레츠코프는 소련군 최고사령부인 스타브카(STAVKA)의 구성원이 되었고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노력을 계속 경주했다. 그러나 19419NKVD 수장인 라브렌티 베리야가 그를 반역자로 체포했다. 체포된 메레츠코프는 10월까지 구금되었고,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유능한 장군이 부족했던 스탈린은 그를 석방시켰고, 12월에 북쪽의 볼크호프(Volkhov)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9442월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볼크호브 전선군 사령관으로서 메레츠코프는 북쪽 방면의 독일군 북부집단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레닌그라드가 완전히 포위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레닌그라드는 라도가 호수를 통해 소량의 보급품을 어느 정도 공급받을 수 있었다). 메레츠코프와 볼크호프 전선군은 레오니트 고보로프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협동으로 독일군의 포위망을 깨고자 노력했고, 마침내 19432, 두 전선군은 시니아비노(Siniavino)에서 서로 연결되었다. 이후 두 전선군은 독일군을 서쪽으로 몰아내고 레닌그라드 포위망을 깨기 위한 일련의 공세를 개시했다. 이 시도들은 19442월에 마무리되었다.

19442, 메레츠코프는 볼크호브 전선군을 떠나 더 북쪽의 카렐리안 전선군으로 부임했다. 여기서는 그는 핀란드를 공격하려는 고보로프의 레닌그라드 전선군을 지원했다. 10, 메레츠코프는 핀란드 북부를 통해 노르웨이로 철수하는 독일군을 추격했다. 10, 메레츠코프는 핀란드 북부의 페차모를 쓸어버리라는 명령을 받아 그가 가진 극지전에 관한 지식을 활용하여 페차모-키르케네스 작전(Petsamo-Kirkenes Operation)을 실시했다. 이 작전으로 독일군은 완전히 밀려났으며, 이 공로로 메레츠코프는 원수로 승진했다.

 

                                                                     1944년 핀란드 전선. 붉은 색 화살표는 소련군의 진격이고, 검은색은 독일군의 후퇴다


왼쪽 지도에서 붉은 화살표는 소련군의 공격 방향이며, 검정색은 독일군의 후퇴 방향이다. 스웨덴이 나름대로 야무진 군대를 가진 중립국인데다가 독일의 주요한 철광석 공급원인 관계로 독일군은 스웨덴을 거칠수 없었고 핀란드를 관통하여 노르웨이로 철수해야 했다. 붉은 화살표중 위쪽의 것이 메레츠코프이다.

소련은 노르웨이까지 독일군을 추격할 심산이었으나, 전후 처리 문제에서 소련이 노르웨이를 장악하는 것을 영국이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스탈린은 노르웨이-핀란드 국경에서 진격을 중지시켰다. 이후 종전 때까지 이 전선은 큰 전투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메레츠코프에게는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4.만주 전략공세작전

메레츠코프의 다음 부임지는 만주였다.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메레츠코프는 1 극동전선군을 이끌고 만주 전략공세작전이라는 작전명으로 만주를 공격했다. 메레츠코프의 부대는 손쉽게 관동군을 격파했다. 이미 1938년 노몬한 사건에서 게오르기 주코프가 일본 관동군을 무참하게 격파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이 무렵의 소련군은 독일과 4년간 격전을 치르면서 단련된데다가 걸작 T-34/85로 대표되는 기갑 전력 또한 일본을 충분히 압도했다. 메레츠코프는 만주를 거쳐 한반도 북부에도 진주했다. 평양에 입성한 25군 및 치스차코프 25군 사령관도 메레츠코프의 휘하였다. 이후 메레츠코프는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극동군관구 사령관으로서 군정사령관 치스차코프를 지휘했다.

 

5.전후

전쟁 후 메레츠코프는 극동군관구 사령관직을 수행한 후 여러 군관계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9681230일에 사망했다. 그의 시체는 화장되어 현재 크렘린 궁에 묻혀 있다.

 

메레츠코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장 유능한 장군들 중 한 명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하며, 소련 국가 영웅 호칭을 비롯하여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인물 중 한 명이다. 러시아군 전차학교는 현재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고, 모스크바, 노보고로드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존재한다.

  


소련 군정 북한 최고지도자 시티코프 중장(中將)과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 레베데프 소장(小將)

             1947년 7월 서울의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담소하는 미소 양군 대표: 좌로부터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 중장, 소련측 대표 레베데프 소장과 스티코프 중장 [사진]

.소련 군정 북한 최고지도자 스티코프 중장(中將)

테렌티 포미치 시티코프(러시아어: Терентий Фомич Штыков, 벨라루스어: Цярэнцій Фаміч Штыкаў 차렌치 파미치 슈티카우, 1907228~ 19641025)는 소련의 군인이었다. 그는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있으면서 해방 후 북한의 소련 군정을 총지휘했다. 그의 유고 "시티코프 일기"는 해방 직후 남북한 역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1.생애

(1)생애 초기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고교 졸업후 레닌그라드의 기관차 수리공장에 취직하여 노동자로 근무하였다.

 

(2)공산당 입당

22세 때인 1929년 소련공산당 레닌그라드시당에 입당했다. 그는 곧 소련공산당 레닌그라드시 지구당 제1서기이자 소련공산당 중앙당 정치국원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측근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눈에 들어 가까운 사이가 되고, 고속승진하여 평당원에서 얼마 뒤 레닌그라드시당 제2서기로 올라갔다. 시티코프가 즈다노프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다는 루머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1941년 겨울부터 약 900일 동안 진행되었던 레닌그라드(페체르부르크) 포위전 때 '식인단속 기동타격대' 대장을 역임한 바 있다. 당시 굶주린 시민들이 인육을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시티코프는 식량배급, 방첩 부대, 즉결처형부대 운영, 외부 연결통로 운영 등 생사여탈권을 휘둘렀다

 

(3)소련군정 지도자

소련은 19453월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둔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에서 분리하여 보로실로프(오늘날 우수리스크)에 연해주 군단(Maritime Group of Forces)을 설치하였다. 19458월 초 대일본전을 위해 보로실로프의 연해주 군단은 제1극동전선군으로, 하바로프스크의 종래의 극동전선군은 제2극동전선군으로 개편하고, 만주서부를 침공할 트랜스 바이칼 전선군 등을 설치하며, 3개 전선군을 총지휘할 극동군 총사령부(Far East Command)를 하바로프스크에 두었다. 일본전이 끝난 후인 930일에 제1극동전선군은 연해주군관구(Primorsky Military District)로 개편된다. 시티코프는 19454월 보로실로프의 연해주군단으로 부임해와 제1극동전선군, 연해주군관구로 명칭이 바뀌는 동안 줄곧 사령관인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 휘하의 군사위원으로 있었다.

 

시티코프가 한국문제에 관여한 시기에 그의 정치적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1945920일 스탈린이 연해주군관구와 25군 사령관에게 하달한 명령서에 북한의 민간행정에 대한 지도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에서 수행할 것을, 즉 시티코프가 총괄할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은 제1극동전선군(연해주군관구) 산하 부대이다. 평양 소련군정의 최고사령관은 표면적으로는 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1900~1979) 대장이었지만 그는 정치를 잘 모르는 야전군인이라, 실제로는 연해주 군관구의 군사위원 시티코프가 보로실로프와 평양을 오가며 소련군정을 총지휘하였다. 평양에 상주한 25군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는 뒷날 증언에서 시티코프에 대해 '그가 조선에 있건 연해주군관구에 있건 또는 모스크바에 있건 간에 그의 참여 없이 38선 이북 조선에서 이뤄진 조치란 하나도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4)북한 주재 대사

a.북한의 전쟁 준비 동향 보고

한편 남한의 미군정을 빨리 철수시킬 생각으로 38선 이북 북한에 임시인민위원회를 세우라고 하고 정권을 이양했지만 미군은 1949년까지도 남한에 머물러 있었다. 북한 주재 소련 대사로 있던, 시티코프는 1949115~25일 중 남한의 군인과 경찰이 수차에 걸쳐 38선을 넘어 침입해 온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고(127)했다. 그러나 그는 대내외상황을 고려할 때 현시점에서 남한군의 침입이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고 보고 남한의 38선 부근 병력 집결은 북한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했다.

23일에는, 38선 부근에서 일어난 북한군 초소에 대한 남한군의 공격에 관해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북한군은 1명당 소총 탄약이 3~10발 정도밖에 없어 대부분의 경우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하고 극동군구 사령부가 북한의 2개 여단에 대한 무기공급을 지연시키고 있는 바 무기가 조속히 공급될 수 있도록 몰로토프 외무장관이 개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다음 날(24)에도, 그는 남한군의 초소 공격과 관련해 북한 내무성이 상세한 사실을 알리는 문서를 25일 발간할 예정임을 보고하였다. 이 문서는 이러한 무력도발이 유엔 한국위원단의 도착에 즈음해 발생하고 있음과 미군의 한국철수를 늦추기 위한 책략임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827, 그는 812~14일의 김일성과의 면담내용을 스탈린에게 보고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북한의 대남공격이 불가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1. 현재 한반도에는 두 나라가 존재하며 그중 남한은 미국 및 기타 국가에 의해 승인됨. 북의 공격시 미국은 남쪽을 무기탄약 공급뿐 아니라 일본군의 파견을 통해 지원할 가능성이 있음. 2. 북의 대남공격은 미국이 대소련 모함선전에 이용할 수 있음.

3. 정치적 측면에서 북의 공격은 남북한 인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으나 군사적 측면에서 북은 아직 남에 대해 압도적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

4. 남한은 이미 상당수 강한 군대와 경찰력을 창설하였음.(시티코프는 김일성이 제의한 강원도 지역의 '해방구역' 창설계획에는 찬성하고 또한 인민군에 의한 옹진점령계획도 군사적으로 타당하다고 보고했으나 남한의 반격시 이 작전이 지구전이 돼버릴 수 있다고 언급)

스탈린에게 제출한 915일자 보고서에서, 그는 김일성과 박헌영은 현 정세하에서는 평화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북이 남한 정부를 무력공격하면 남북양쪽의 인민들이 이를 지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지금 무력통일을 안하면 통일이 연기될 뿐이고 그동안 남한 정권은 좌익세력을 탄압하면서 북진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통일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진을 시작할 때 소련과 중공이 원조해줄 것을 기대하는 듯하다.”고 썼다. 그의 견해는 남북의 내전은 북에 유리하나 북한군이 남한 공격을 개시하면 소련이 국제적 비난을 받게 되며 미국이 끼어들 것은 물론 남한을 적극 지원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 물론 북한이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을 강화하는 것은 좋다. 옹진작전은 유리한 상황하에서는 실시 가능하고, 이를 위해 38선 지역에서 남쪽의 도발을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그러나 이에 대해서 소련 공산당 중앙위는 현재의 대내외적 상황으로 보아 남한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지침을 시티코프에 하달하였다.(924)

 

b.소련의 한국전쟁 승인 중개

시티코프는 1950117일 박헌영 관저에서 열린 리셉션에 참석하여, 김일성의 전쟁 승인 요청을 받았다. 129일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비공개회의(16)의 내용을 외무부에 보고했다. 그 내용은

1) 분쟁 발생시 미국이 한국을 도와줄 희망은 별로 없다는 것,

2) 미국은 대만방어를 위해 장제스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

3) 영국의 중국 승인(195016)은 서방의 북한 승인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320, 김일성은 시티코프와의 면담에서 4월 초에 자신과 박헌영이 스탈린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김일성은 이번 방문을 46년의 방문처럼 비공식(비밀)으로 할 것을 제의하였다. 김일성은 남북한 통일의 방법, 북한 경제개발의 전망, 기타 공산당내 문제에 관해 스탈린과 협의하기를 원하였다

 

(5)소련으로 소환

한국전쟁 시기 북한 주재 소련대사의 직을 맡고 있던 시티코프는 1951년 초 갑자기 모스크바로 소환 당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한 전세 역전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보인다. 그는 1964102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심한 증세가 아니었으나 그날이 일요일이라 병원에 의사도 없고, 제때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것이 주된 사인이다. 김일성은 그가 사망했을 때 조전(弔電)조차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2.스티코프 일기

그가 기록한 "시티코프 일기"가 구소련 붕괴 후에 발굴되었는데, 소련군정의 북한 통치와 대남공작에 대한 주요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1. 스티코프는 누구인가 게 재 일 : 1995050910(40)

454월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부임하면서 한국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한 스티코프는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47~48), 북한주재 초대 소련 특명전권대사(48~51)를 지냈다.

북한에서의 경력에서 보듯 북한정치문제를 담당하면서 북한정권수립(48)과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정권수립이후에는 특명전권대사를 맡는 등 사실상 북한 최고 실력자다. 그는 김일성. 김두봉. 박헌영 등 북한의 정치지도자 뿐 아니라 남로당 등 남쪽 좌익까지 떡 주무르듯 했고 북한의 모든 것이 그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1,2美蘇공동위원회(463~5,475~8) 소련 측 수석대표로 나서 군정과의 협상에서도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929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스티코프는 한국에오기전 38년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2비서, 39년 소련. 핀란드전쟁시기에 제7군 군사평의회 위원, 43년 볼호프스키 전선 군사평의회위원, 44년 카렐스키전선 군사평의회위원 등을 역임했다. 군인이면서 철저한 공산주의자요, 노련한 정치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는 56~61년 소련공산당중앙위원, 63년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 당국가검열위원회 부위원장 등 당 경력도 화려하다. 64년 휴가차 레닌그라드에 갔다가 지병인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2. 9월총파업과 10월폭동 게 재 일 : 1995050910(40)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가 발굴한 스티코프 비망록은 북한정권 수립 기에 북한의 최고실권자였던 스티코프가 그날그날 있었던 구상과 생각들을 꼼꼼히 일기형식으로 적어놓은 중요 사료(史料).

이 비망록은 스티코프를 정점으로 한 소군정이 북 한을 이미 완전히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은데 이어 남한 정세에까지 깊숙이 개입한 사실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스티코프 비망록은 이런 점에서 북한정치사는 물론 남한정치사의 또 다른 이면적 진실을 밝혀주는 실마리를 제공한 셈이다.

따라서 비망록은 기존 가설을 문서로 입증해주거나 전혀 새로운 사실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해방정국에서 매몰되고 유실된 우리역사를 복원, 한국 현대사를 다시 쓰게 하고 있다.

이로써 중앙일보는 지난해 12월 소25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에 이어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스티코프 비망록까지 발굴함으로써 북한정권수립의 내막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게 됐다.스티코프 비망록의 주요 내용을 주제별로 분류, 6회에 걸쳐 해설과 함께 연재한다. [편집자]

19469월 좌익계열의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全評)가 주도한 9월 총파업 때 북한의 군정이 2백만엔을 , 뒤이어 발생한 10월 폭동때는 3백만엔의 자금을 지원한 것은스티코프비망록에서 처음 밝혀진 사실이다. 이는 당시 남한정세 에 소련이 깊숙이 개입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까지 9월 총파업은 조선공산당 지시에 따라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왔다. 10월 폭동에 대해서도 일부 학자는 조선공산당의 개입사실을 부인해 왔다. 그러나 비망록은 9월 총파업이 조선공산당의 지시 차원을 넘어 군정의 지시에 따른 것 이고, 10월 폭동에도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물론 군정까지 직접 개입한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그동안 조선공산당과 소련의 개입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불식시킨 셈이 됐다.

9월 총파업은 467월 조선공산당이 군정에 대한 종래의 우호정책을 철회하고 군정의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운동을 강력히 전개하기 위해 채택한 신 전술의 구체적인 행동표현이었다.

신 전술이 채택된 같은 달 중순 전평 상무위원회는 당의 신 전술 지령에 입각해 4610월 파업투쟁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이 계획을 바꿔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길 것을 지시했다. 김남식(金南植.평화연구원)연구위원은조선공산당이 군정 운수부가 운수부 노동자 25%를 감원하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기로 한 기회를 이용하려 했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비망록은 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 있다. 총파업일정을 앞당긴 결정은 바로 군정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이다. 비망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4699일 박헌영(朴憲永)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했다.이에 대해 스티코프는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시위를 벌이고 항의집회를 개최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비망록에는 스티코프의 이런 지시가 9 11일과 16일 두 차례에 걸쳐 내려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전평 지도부의 긴급회의가 910일 소집돼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길 것을 결정한 점으로 미뤄 볼 때 아마도 스티코프의 지시는 박헌영이 이 문제에 대해 질의한 99일이나 아니면910일 이른 아침에 하달됐을 가능성이 크다.

계획대로 총파업은 46923일 부산철도 노동자 7천여명이 일급제 반대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감으로써 불을 댕겼다.

다음날 서울을 비롯한 철도종업원 4만명이, 925일에는 출판노조가, 연이어 전신관계 종사자들이 동조파업을 단행함으로써 파업여파는 각 부문으로 확산됐다.

총파업 기간에 대한 비망록 내용 중 주목을 끄는 대목은 군정이 총파업이 최고점에 달한 926일과 28일 두 차례나 파업투쟁 방향을 지시한 점이다.

특히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등 정치문제를요구조건 속에 포함시켜 이를 관철할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하라고 지시한 것은 총파업을 정치투쟁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군정이파업투쟁 자금으로 2백만엔을 긴급 지원한 사실 역시 파업투쟁을 고취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총파업이 각 지역에서 계속되는 가운데 101일 대구에서는 1천 여 명이 식량 배급을 요청하며 시위를 벌였다. 파업노동자 등의 가세로 시위가 점차 확대되자 경찰은 진압을 위해 발포했다. 이 와중에 시위군중 한명이 숨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

다음날 흥분한 대규모 시위대가 경찰서 무기를 탈취하는 등 극렬 행동을 서슴지 않자 군정 당국은 대구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출동시켜 소요를 진압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부터 시위는 대구인근 지역으로 번졌고 급기야 11월 중 순까지 경북전지역과 경남 강원. 전남 등지에서 계속됐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교량. 철도가 파괴됐으며 우체국 등이 방화돼 통신망이 두절 됐다. 왜관에서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수명의 경찰관이 학살됐다.

그러나 시위는 군정과 경찰, 그리고 우익단체들의 적극적인 진압노력으로 11월 중순을 고비로 그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이제까지 일부 학자는 10월 폭동에 조선공산당 지도부가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주장해 왔다. 그러나 비망록은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물론 군정까지 10월 폭동에 깊이 관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망록에 따르면 10월 폭동이 시작된 그 다음날 스티코프는 남조선 투쟁기금으로 3백만엔을 보낼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조두원(趙斗元)은 폭동이진행중인 1021군정에 대해그들의 향후 투쟁방침에 대한 교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이런 사실들은 10월 폭동 역시 조선공산당이 상황전개에 따라 군정과 교감을 가지면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3. 스티코프비망록 1. 일지 게 재 일 : 1995050910(40)

박헌영은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하고 있다(4699)

남조선 정세와 지원조치. 로마넨코 . 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항의집회를 조직할 것(46911)

북조선에서 남조선으로 반입할 출판물을 증대시킬 것을 요청하고 있다. 대중적인 시위와 항의를 조직할 것. 미군정과 남조선 반동파의 행동을 폭로하는(46916)

레베데프에게 전화 걸었다. 남조선 좌익의 활동방향에 대해(46921)

로마넨코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달하다.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은 공산당지도부에 대한 체포명령의 취소, 좌익의 석방, 테러중지를 요구할 것. 로마넨코. 4만 명의 철도종업원들이 파업에 돌입. 남조선에서는 파업투쟁이 진행 중이다. 철도종업원들이 파업을 시작했다.

925일 오후부터 출판인쇄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됐다(46926)

로마넨코. 남조선에서 파업투쟁이 확산되고 있다. 학생들이 파업투쟁에 합류했다. 요구조건의 관철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경제적인 제 요구,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권력의 양도 요구를 잠시 철회. 5백만엔을 요청하고 있다. 재정지원을 위해 2백만 엔을 지급.

남조선 파업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경제적인 제 요구, 임금인상,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에 의해 폐간된 좌익신문들의 복간,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 철회 등의 요구가 완전히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할 것. 이 요구가 충족될 때 파업투쟁을 중지할 것. 인민위원회에 권력을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 미군정과 협상을 지속할 것이라고 성명할 것(46928)

남조선 사태에 대한 북한의 반응. 남조선 인민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집회 개최와 남조선 인민을 지원하기 위해 매일 두 시간씩 노동시간을 늘려 그 임금액을 남조선 지원기금으로 공제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서울 에서 시위를 시작할 예정이다. 3백만엔을 더 요청하고 있다. 불가닌에게 전화하다. 우리의 (남조선)동지들에게 3백만엔의 재정지원을 제공하는 문제 및 집회개최와 공제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듣다(46101)

3백만엔의 지원과 집회개최를 위해 작업시간을 단축하는 문제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46102)

46106일 박헌영이 남한을 탈출해 북한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9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 했는데, 그를관에 넣어 옮겼다. 박헌영이 휴식을 취하도록 지시했다(46107)

부산에서는 농민들의 진출이 시작됐다. 지금 파업운동은 어느 정도 축소됐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조두원은 향후 투쟁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문의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빨치산부대들이존재하고 있으며, 반동진영과 민주진영 사이에 전투가 전개되고 있다. 그는 빨치산투쟁을 본격적으로 개시해야 할지 혹은 자제해야할지를 문의하고 있다. 박헌영. 파업투쟁은 폭동으로 성장 진화했다.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다. 그들의 향후 투쟁방침에 대한 교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가까운 시일에 농민 투쟁이 개시될 수 있다(461021)

발라사노프와 샵쉰을 호출해 남조선 정세에 대한 그들의 정보보고를 청취했다(461022)

김일성. 박헌영과 회담할 것. 회담 때 남조선에서 전개되고 있는 제반 사태에 대한 평가를 전달할 것(46114)

(정체불명)은 박헌영에게 39만엔이 지출됐다고 보고했다. 더 지급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46126)

로마넨코. 그의 계좌에 있는 122만루블에 대해 논의했다. 그 돈을 박헌영에게 전달하고 계좌를 정리할 것을 명령했다(46127)

 

4. <인터뷰>스티코프 장남 빅토르씨 게 재 일 : 1995051109(40)

중앙일보 현대사 자료 발굴 팀이 7개월간에 걸친 수소문 끝에 찾아낸스티코프비망록은 스티코프의 장남 빅토르(61)의 집 차고 먼지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안성규 모스크바 특파원, 전현수 연구위원 등 본사자료 발굴 팀은 빅토르를 끈질기게 설득, 비망록을 본사에 기증하게 됐다. 한국현대사를 다시 쓰게 하는 귀중한 사료가 비로소 빛을 본 순간이었다.

자료팀은 아버지의 화려한 삶과는 달리 평범한 노동자로 쓸쓸히 노후생활을 보내고 있는 빅토르를 만나 아버지 스티코프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아버지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습니까.

아버지가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위원으로 북한문제에 깊이 개입하셨고 초대 북한주재 소련대사를 지내셨다는 사실 외에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가 너무 어렸을 때니까요.

 

-아버지가 자료를 많이 남겼다고 들었습니다.

상당히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앨범. 문서. 노트. 사진들을 많이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년 뒤인 66년 북한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자료들을 거의 모두 가지고 갔습니다.

 

-자료유실이 어느 정도입니까.

86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부터는 모든 자료를 제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이사를 40번이상이나 다녀야 했고 제가 이 분야를 잘 알지 못해 관리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상당한 양이 없어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아버지는 평소 심장병을 앓았지요. 아버지는 64년 여름휴가를 레닌그라드에서 보냈는데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아버지가 이날도 시내 러-일전쟁 기념비를 촬영하러 가다가 네프스키 프로스펙트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습니다. 같이 있던 당시 운전사 의 말에 의하면 심한 증세는 아니었는데 그날이 일요일이라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바람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평양을 다녀오신 적이 있습니까.

472차 미소공위가 진행 중일 때 여름방학을 이용해 아버지와 함께 평양과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평양과 서울 모두작지만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한국이 어째서 아직도 합쳐지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일기가 공개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광일 뿐입니다. 지면에 공개되면 꼭 보내주십시오.

빅토르 스티코프는 중령까지 군 생활을 하다 아버지가 외무부고문으로 있을 때 퇴역, 열차운전사로 일했다. 얼마 전 은퇴하고 지금은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는 부인 잉가 니칼라예브나(61)와 함께 상트 페테르부르크 변두리의 두칸짜리 아파트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그나마 페레스트로이카가 몰고온 생활고 때문에 연금으로는 모자라는 생활비를 벌 기 위해 열차관리소에서 야간수위를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모스크바=안성규 특파원. 전현수 연구위원]

 

5. 스티코프비망록 2. 3당합당 게 재 일 : 1995051109(40)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을 두 달 앞둔 19467월 남북 좌익세력의 새로운 판짜기가 시작됐다. 북에서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당해 북조선노동당(북로당), 남에서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 좌익3당이 합당해 남조선노 동당(남로당)을 결성하는 작업이 추진된 것이다. 공산당이 유일집권당으로 등장해 사회주의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였고, 남에서는 흩어져 있던 좌익세력들을 통합해 구심점을 형성한 후 군정과 본격투쟁에 나서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북로당의 결성은 군정의 후원을 받아 8월 말 순조롭게 완성됐지만, 군정의 탄압과 3당간의 이해관계가 얽힌 남로당결성은 예정보다 3개월이나 늦게 이루어졌다. 그만큼 좌익 3당 합당을 통해 남로당이 결성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 을 겪어야 했다. 3당 합당이 지연되자 군정 최고지도부와 북로당은 합당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직접 남쪽 정치상황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발굴한스티코프 비망록은 이러한 상황을 세세한 부분까지 보여준다. 3당 합당 과정에 군정이 직접 개입했음이 문서로 처음 밝혀진 것이다.

남쪽에서 3당 합당은 박헌영(朴憲永)이 비밀리에 평양과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46712일 서울로 돌아온 직후 갑작스럽게 여운형(呂運亨)에게 좌익 3당 통합문제를 통보하면서 시작 됐다. 이 소식을 들은 여운형도 7월말 북쪽의 진의파악을 위해 급거 평양을 방문했다.

83일 인민당은 합당을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공산당. 신민당에 합당제안문을 발송했다. 이에 공산당과 신민당이 즉시 합당교섭을 개시하자는 회답을 보내면서 3당 합당이 구체화됐다. 그러나 군사령부. 북로당의 지시에 따라 순조롭게 출발한 합당작업은 잠재돼 있던 공산당 내부의 갈등이 폭발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반전(反轉)됐다.

85일 이정윤(李廷允). 강진(姜進)박헌영간부 6인이 합당을 하기 전 당대회를 열고 지도체계를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반대파를 제명. 무기 정권시켰다. 이후 당대회 소집을 둘러싼 논란이 확대되면서 공산당은 완전히 두 파로 갈라졌다.

이렇게 되자 인민당과 신민당도 합당을 신중하게 추진하자는 의견이 대두돼 좌익3당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상태에 직면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박헌영은 94일 합당을 지지하는 세력만으로3당 합당을 추진해 남로당 준비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인민당 당수 여운형과 신민당 당수 백남운(白南雲)등이 반발하자 3당 합당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당황한 군정의 움직임도 바빠졌다.스티코프비망록은 스티코프가 910일 북로당위원장 김두봉(金枓奉)을 호출해 남쪽의 3당 합당문제 및 지원대책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사실을 보여준다. 밀사를 파견해 남쪽의 정세를 파악한 사실도 드러났다.

스티코프는분파주의자들은 북조선의 압력과 관련하여 잠잠해졌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박헌영 반대파들은 9월 총파업 진행 중인 28일 당 대회 준비모임을 갖고 총파업반대와 당대회 소집을 주장했다. 다른 당의 대표들도 평양의 소련군사령부를 직접 방문해 박헌영의 독선적 태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비망록은 남조선신민당 중앙위원 고찬보와 여운형의

평양방문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스티코프는 923일부터 30일까지 평양을 방문한 여운형에게 각별히 신경을 썼다. 여운형은 새로 만들어진 남로당의 당수로 내정돼 있었다. 스티코프가 여운형에게 북조선 지도자들과의 회담을 허용하고 북조선이 그를 신뢰하고 있다고 말 할 것을 지시한 것은 여운형이 정치력을 발휘해 좌익정당 내부의 분열을 수습해 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또 비망록은 신민당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합당에 비판적인 백남운을 물러나게 하고 합당에 적극적인 정노식(鄭魯湜)을 신민당 위원장으로, 무소속이며 박헌영 지지자였던 허헌(許憲)을 부위원장으로 추대하는 작업이 군정과의 교감 속에서 추진되었음을 보여준다. 107일 이그나치예프 대령은 합당사업이 수준까지진척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1016일 백남운. 강진등 박헌영의 독주에 반대하는 세력이 남로당과는 별개로 사회노동당을 결성하면서 3당 합당은 두 갈래로 추진되는 혼선을 빚게 된다. 좌익세력의 단결을 위해 추진된 3당 합당이 분열의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6. 스티코프비망록 2. 일지 게 재 일 : 1995051109(40)

김두봉(金枓奉.북로당 위원장)을 호출하다. 남조선의 정세 ,남조선 3당 합당 문제 및 지원대책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다.(46910)

보로실로프에서 로마넨코(蘇軍民政사령관)와 남조선정세에 대해 전화 논의. 아널드(군정장관)가 여운형(呂運亨.조선인민당 당수)을 호출해 미군사령부는 남조선 좌익3당의 통합을 현재로서는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명했다.(916)

로만넨코 보고. 남조선에서 912일 밀사가 도착했다. 여운형은 아마도 곧 합당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백남운(白南雲.남조선신민당 당수)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분파주의자들은 북조선의 압력과 관련해 잠잠해 졌다. 이강국(李康國.남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사무국장)은 자신의 거처와 관련해 북조선으로 활동공간을 옮기는 것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합당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남조선에 좌익3당을 그대로 존속시킬 것을 요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두 명의 지도자, 여운형과 백남운이 반대한다면 합당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919)

로마넨코. 오늘 남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가 김일성(북로당 부위원장)을 방문했다. 그들은 변장을 하고 머리. 수염 등을 깎았다. 찬보(高贊輔)는 신민당 중앙위원이자 인민당 중앙위원이다. 그는 3일간의 일정으로 북조선을 방문했다. 그는나는 북조선에 의지하고 있지만 북조선은 나를 신임하지 않는다. 나는 좌익이다. 미군정은 나를 못살게 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당분간 통합을 추진하지 말 것을 제기했고,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에 입당하고 있는데, 그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하게끔 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또한 박헌영(朴憲永.조선공산당 당수)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박헌영이 무엇인가 일을 추진하면 10일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그에게 3명의 지도자를 추천했는데 이중 2명이 공산주의자였다. 그는내가 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의 서신들을 접수했지만 나는 그것들을 당신의 서한으로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 스탈린 동지 앞으로 암호전문을 보내 여운형에게 어떠한 답변을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령을 요청했다(921)

로마넨코 보고. 김일성과 여운형의 회담이 있었다. 여운형은 재차 소련군사령부 지도부와의 회담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여운형에게 어떠한 답변을 줄 것인가에 대해 지시를 하달(925)

로마넨코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들을 하달했다.

 

 

-북조선 지도자들과 여운형의 회담을 허용할 것.

-남조선 좌익3당의 합당을 잠시 중단할 것.

-공산당은 반드시 합법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체포명령의 취소, 감옥으로부터 좌파의 석방, 테러중지를 요구할 것.

-북조선의 상황과 북조선에서 실시되고 있는 민주주의적 제 개혁에 대해 설명해 줄 것. 북조선은 여운형을 신뢰하고 있다고 말할 것.

로마넨코 보고. (신원불명)와 중앙위원회 위원 2, 김일성, 김두봉, 영하(朱寧河.북로당부위원장), 장주익, 허가이(許哥而. 북로당 조직부장)등 회의.

인민당과 신민당 두 정당의 합법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공산당은 지하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는 남조선의 정세에 대해 보고했다. 남조선의 정세에 대해 논의했다. 종파주의자들이 대회를 소집했고, 2백명이 대회에 출석하였다. 대회에서 어떠한 문제들이 심의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신민당은 대회를 개최해공산당 지지자들을 모두 당에서 축출했다. 대회는 백남운을 위원장으로 하는 중앙위원회를 선출했다(926)

 

로마넨코 보고. 서울에서 남조선신민당 조직부장 심운(沈雲)의 연락원이 도착했다. 신민당 중앙위원회의 다수는 백남운에게 사퇴를 요구했다. 백남운은 미군정과 경찰의 보호 하에 당 대회를 소집했는데, 대회에는 당에서 제명당한 사람들이 참석했다. 김두봉은 대회를 무효로 인정할 것과 부위원장 정노식(鄭魯湜)을 위원장으로, 허헌(許憲)을 부위원장으로 승인할 것을 제안했다(102)

이그나치예프 대령(민정부 정치부 차장). 합당사업은 도 수준까지 진척되었고 지하에 정치위원회가 조직되었다(107)

 

7. 스티코프비망록 3. 3당합당 게 재 일 : 1995051610(40)

박헌영파(朴憲永派)가 남로당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수습 기미를 보였던 좌익 3당 합당은 1016일 박헌영 중심의 합당에 반대하는 강진. 백남운 등이 독자적으로 반대파를 규합해 사회노동당(사로당)을 결성하면서 또 한 차례 폭풍에 휩싸이게 된다. 뜻밖의 사태전개에 당황한 군정과 북로당은 남쪽 상황에 더욱 깊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스티코프비망록은 이러한 개입의 사례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우선 로마넨코와 김일성. 김두봉이 반대파의 대부격인 강진. 백남운을 각각 만나왜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가를 추궁했다. 지금까지 반대파들이 북으로부터 비판당했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그 구체적 내용이 밝혀진 것은 처음이다.

군정과 북로당의 호된 질책을 받은 백남운과 강진은 남으로 내려오자마자 사로당이 자신들과 관계가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사로당 해체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111일 사로당은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백남운. 강진이 포함된 중앙위원을 선출했지만 여운형. 강진. 백남운은 참석하지 않았다.

북로당 중앙위원회는 개별인물에 대한 비판 외에도 사로당을 공식 비판하는 결정서를 채택했다.

1116일 북로당은 남로당 정치노선 절대지지와 강진등을 분열주의자로 규정하는사로당에 관한 북로당의 결정서를 발표했다. 이것은 군정의 지지를 기대했던 사로당에는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군정의 입장이 강력하게 표명되자 사로당에 참여한 공산주의자들이 급속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간부들의 탈당성명이 잇따랐다.

 

결국 남로당은 1123~24일 양일간 결성대회를 갖고 공식 출범했고, 사로당은 472월 당 대회를 열고남조선 민주진영의 세력을 분열시키는 역할을 했다 는 자기비판과 함께 해체를 선언했다. 군정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박헌영의 승리가 확정된 것이다.

스티코프는 122성공적으로 그러나 어렵게 성취된 합당사업에 대해 박헌영에게 축하할 것을 지시해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어렵게 결성된 남로당은 합법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군정의 기대와는 달리 이미 10월 폭동을 겪으면서 불법화된 상태였다. 대중적 기반도 약화됐다.

남로당과 북로당 창당 작업이 완료되자 두당간의 원만한 관계 정립이 현안으로 등장했다. 스티코프가김일성과 박헌영은 업무상 긴밀한 연계를 확보해야한다고 지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티코프는 126일에도 같은 지시를 내렸다.

이와 관련, 461212일자비망록은 전혀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박헌영이 남북조선노동당의 단일한 비합법적 중앙을 창설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고 이에 김일성도 동의했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진 것이다. 이것은 48825 일 만들어진남북노동당 연합중앙위원회구성을 북로당이 남로당을 흡수하기 위해 강요했다는 통설을 뒤집는 내용이다.

박헌영은 월북 후 자신의 당내입지를 마련하기 위해 남북노동당의 연합중앙위원회 구성을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46123일 스티코프는 모스크바로3당 합당에 대한 보고서를 보냈다.

이로써 4개월간에 걸쳐 파란을 겪었던 3당 합당이 사실상 마무리 됐다. 그러나 남한 좌익정당의 단결과 강화를 위해 추진된 3당 합당은 좌익세력 내부의 갈등과 분열의 앙금만을 남겼다.

단일한 좌익정당을 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군정에 대한 투쟁을 강화하려던 군정의 의도도 합당 전에 10월 폭동이 발발함으로써 사실상 좌절됐다.

 

8. 스티코프비망록 3. 일지 게 재 일 : 1995051610(40)

로마넨코(蘇軍民政사령관)와 대화했다. 강진(姜進.조선공산당 중앙위원)1029일까지 북조선에 머물도록 약속 했다. 로마넨코와 강진의 회담 후에 김일성(金日成.북조선노동당부위원장)이 강진과 대담할 것이다.(461019)

김일성 보고.

종파주의자들과 강진은 인민대중을 기만했다. 그들은 170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소집,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반대파의 통합이라는 구실 하에 대회를 개최해 다시 한 번 인민대중을 기만했다. 여운형(呂運亨. 조선인민당 당수)도 대중을 기만 했다. 그는 사회노동당(사로당)중앙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두 조직의 중앙위원회 성원은 모두 종파주의자들과 친미분자들로 구성되었다. 여운형을 비판할 것. 그러나 너무 과격하지 않게.(1021)

김일성의 보고.

김두봉(金枓奉.북로당위원장)이 백남운(白南雲.남조선신민당 당수)과 만났다. 과 함께 3명이 북조선에 도착했다. 은 사로당을 정당화하기위해 북조선으로 왔다. 여운형은 그가 북조선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 하지(미군사령 관)가 불러 좌우합작의 필요성을 인정할 것을 요청했다며 편지를 보내왔다.

는 우리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고 북조선을 방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김두봉은 에게 왜 좌우합작에 동조 했으며,왜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가를 물었다. 은 자신이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로당을 조직했다고 대답했다.

강진과 만났다. 나는 합당사업이 결렬된 모든 책임이 강진에게 있다고 말했다. 또 나는 그에게 제국주의의 주구인지 아닌지는 확증할 수 없지만, 미국인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당신에 의해 소집된 대회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와의 통합을 위한 것이 아니라 투쟁을 위한 것이었다.

당신은 대회를 소집할 자격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에서 제명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합당을 방해할 목적으로 대회를 소집했다. 박헌영 동지의 결정은 그 자신만의 견해가 아니라 북조선 40만당원의 견해이기도 하다. 당신은 당으로부터 권한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당신은 박헌영 동지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을 구실로 삼고 있지만, 당에 손실을 입힐 권한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당신이 지금까지 행동해왔던 것과 다른 진정한 혁명가가 되고자 한다면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가. 그는 조언을 구하러 왔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좋게 평가하기를 원한다면 당신 스스로가 분파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당신을 전에 이미 호출했지만, 당신은 오지 않았다. 그는 남조선노동 당과 사회노동당을 통합시키겠다고 대답했다.(1022)

김두봉과 대담하다. 그는 남조선 정세에 대해 동요하는 입장을 보였고 남조선 반동파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1025)

로마넨코, 3당 합당 상황에 대해 보고. 수준에서통합이 완료되었다. 준비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고 중앙위원회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중앙위원회 대표가 허헌(許憲.남로당 당수)을 만나 박헌영의 지시를 전달했다. 반대파들은 사로당을 결성했다. 사로당의 강령이 발표된 후 대중들은 이 당을 거부하고 있다. 사로당이 우익과 합동을 도모하고, 입법기관의 조직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좌익정당의 분개를 사고 있다.

사로당은 파업과 무장봉기를 이유로 공산당을 비난했다. 백남운은 사로당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며, 사로당의 선언이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성명했다. 강진도 자신의 오류에 대한 비판을 표명하고 있다. 여운형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성명했다.(1112)

로마넨코, 남조선 노동당대회 총괄보고. 지시를 내리다.

1.성공적으로, 그러나 어렵게 성취된 합당사업에 대해 박헌영에게 축하할 것.

2.다른 정당들이 파악할 수 없도록 당중앙위원회를 구성할 것.

3.박헌영은 향후 행동방침에 대한 지령을 허헌에게 하달해야한다.

4.박헌영이 수행할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선전사업에 대한 방침을 숙고할 것.

5.김일성과 박헌영은 업무상 긴밀한 연계를 확보해야 한다.

6.급사를 통해 일체의 당대회 자료를 보내도록 지시를 내릴 것.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로 보낼 남조선 3당 합당 사업총결 보고서를 준비하도록 크라프초프에게 지시를 내리다.

박헌영은 남북조선노동당의 단일한 비합법적 중앙을 창설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나는 김일성의 의향을 알아보았다. 그도 역시 동의했다.(1212)

크라프초프가 전화했다. 사로당 문제로 서울에서 보고가 있다고 알려왔다. 우리의 지시가 대개는 전적으로 받아 들여졌으며, 사로당의 붕괴가 계속되고 있다. 당 축소의 지지자는 강진이다.(1217)

9. 스티코프비망록 4. 좌우합작 추진 말라 게 재 일 : 1995051810(40)

19465군정이 김규식(金奎植)과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추진할 때 소군정(蘇軍政)이 이를 강력히 저지하려 한 사실이스티코프비망록에서 처음 밝혀졌다.

또 좌우합작 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미군정이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하려 하자 소군정이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 주장등 그에 대한 대응책을 남조선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직접 지시한 사실 역시 새롭게 드러났다.

이 같은 사실들은 당시 박헌영(朴憲永)이 이끈 남한의 좌익계열이 좌우합작에 반대하고 입법의원선거를 전면 거부한 배경을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군정은 난항에 빠진 한국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좌우합작이라는 새로운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남한에 소련 측이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세력을 등장시켜 이들로 하여금 남한의 정치적 통합을 주도하게 함으로써 장차 소련과의 협상을 원만히 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또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온건좌파를 분리시킴으로써 공산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도 함께 포함됐다.

한편 여운형의 측근이었던 이만규(李萬珪)여운형은 자신이 좌우세력을 통합시켜야 한다는 개인적 사명 때문에 좌우합작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당시 좌파의 지도권을 놓고 박헌영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터에 미 군정으로부터 좌우합작 추진 제안을 받자 박헌영을 고립시킬 수 있는 기회로 판단하고 이를 수락한 측면이 강했다.

반면 김규식은독립정부를 수립해보겠다는 의욕에서 좌우합작에 뛰어들었다고 스스로의 입장을 밝혔다.

좌우합작운동은 46525일 좌우익 지도자들 간에 첫 회합을 가진 이래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같은 해107좌우합작7원칙이라는 합의점을 도출해 냈다.

지금까지 김일성(金日成)을 비롯한 북한지도부가 좌우합작에 반대한 것은 알려져 왔다. 그러나 소군정이 좌우합작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비망록에 따르면 스티코프는 46924일 북한을 방문한 여운형에게 무슨 답변을 주어야 할지 스탈린의 지령을 요청했고, 이틀 후 소군정 민정(民政)사령관인 로만넨코에게남조선 좌우합작을 추진하지

 

                                                         북한 정권 수립의 막후 인물인 스티코프 中將(왼쪽)과 니콜라이 레베데프 少將(오른쪽).


                                                               1946년 미소공위에 참석하러 서울에 온 시티코프가 덕수궁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가운데가 스티코프중장


                                                19465, 1차 미소공위 미국측 대표인 브라운 소장과 악수하는 여운형(가운데가 스티코프 중장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왼쪽부터 이승만, 김구, 스티코프, 안재홍



19451014'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뒤의 소련군 장성들 중 맨 오른쪽이 레베데프 소장이다. 그리고리 메클레르 중좌가 개회를 선언하고, 이어 레베데프 소장이 등단하여 소련군이 온 의의와 진의를 설명하고 조선인민에게 축하와 격려의 말을 하였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 레베데프 소장(小將)

니콜라이 게오르기예비치 레베데프(러시아어: Николай Георгиевич Лебедев, 1901~ 1992510)[1]는 소련군 장성이다. 1945년 해방 당시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평양의 소련군정에서 김일성 정권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N. G. 레베데프는 1901년 러시아 칼루가 주(Калужская область) 지즈드린스키 군(Жиздринский район)의 부다(Буда) 마을에서 태어났다. 1916년까지 부드스크 젬스트보 학교(Будская земская школа)에서 공부했다. 1920년부터 적군(Красная армия)에 복무했다. 1941615일에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고, 1942126일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58월 제1극동전선군 산하 제25군의 대일본전 지도자의 한명으로 북한에 진주하였다. 평양 소련군정의 명목상 최고 책임자는 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 대장이었으나 그는 정치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았고, 소련군정을 실제로 총지휘한 사람은 보로실로프(지금의 우수리스크)의 연해주 군관구 군사위원 테렌티 스티코프였다. 레베데프 소장은 25군의 군사위원으로 평양 현지에서 스티코프 등 상부의 지시를 받아 이행하는 실질적 책임자였다.

 

그는 국내에서 무명 인사에 지나지 않았던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드는 여러 정치 공작을 지휘했다. 당시 김일성대 부총장으로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교습한 박일(朴一)은 레베데프 소장이 최초로 김일성 우상화 공작을 시작한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1948910일 공식적인 북한 정부 수립 후 소련으로 귀환하는 그에게 김일성은 훈장을 수여하였으며, 이후 한동안 매년 그를 북한으로 초청하였다 한다.

 

그는 비교적 장수하여 199010월 한-소 국교수립 직후인 1991년에 모스크바의 자택으로 찾아간 중앙일보 특별 취재팀에게 소련군정 당시의 여러 일들에 대해 많은 증언을 해 주었고,[7] 이듬해인 1992510일 모스크바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남긴 레베데프 비망록은 소련군정의 북한통치 및 대남공작과 관련한 중요한 역사 자료이며 구 소련 붕괴 후에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에 응하여 남긴 증언도 많이 있는데, 평양의 소련군정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

 

레베데프는 한반도 분단의 한 축을 담당했던 소련 점령군 사령부 핵심인물이다. 그는 북한의 소비에트화를 위해 정열적으로 일했으며 그 내용을 소상하게 일기로 쓴 것이 바로 이 비망록이다.
편자는 이 비망록을 통해 북한 정권창출에 소련이 어느 정도 개입했으며, 그리고 남북협상의 추진 내막과 진행과정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책을 통하여 한국현대사 연구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1946828일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한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주석단. 오른쪽 부터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김일성, 박정애이다.


               1947년 김두봉,김일성과 소련군 장성들이 담소하는 장면 사진. 오른쪽 끝이 김일성, 가운데서 왼쪽을 보며 이야기하는 사람이 레베데프 소장이다.


                                             북한 정권 수립후 1948년 말 소련으로 귀환하는 레베데프 소장에게 김일성이 메달을 달아주는 장면



. 소련 제25군의 사령관이며 평양 소련군정의 최고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 대장(大將)

이반 미하일로비치 치스차코프(러시아어: Иван Михайлович Чистяков 이반 미하일로비치 치스탸코프, 1900914- 197937)는 소련의 군인으로, 19458월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의 사령관이었으며, 평양 소련군정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소련 제1극동전선군 산하 제25군은 소련의 대일전 개시와 함께 194589일 북한지역으로 침공해 들어온다. 1945815일 일왕이 라디오로 무조건적인 태평양 전쟁 항복선언을 하였다. 8월말까지 소련 제25군은 북한 전역을 장악하고, 사령관인 이반 치스차코프 대장은 북한 소련군정의 명목상 최고 책임자가 된다. 826일 비행기로 평양에 도착한 그는 일본군 평양사관구(平壤師管區)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竹下義晴) 중장을 숙소인 평양 철도호텔로 불러 항복을 받는다. 그 장소에는 조만식도 입회하였다. 같은 날 밤 후루카와 가네히데(古川兼秀) 평안남도 지사를 역시 철도호텔로 불러 행정권을 이관 받았다.

 

하지만 그는 야전군인이라 정치문제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고, 소련군정을 실질적으로 총지휘한 사람은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테렌티 스티코프 상장이었다. 평양 현지에서는 25군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이 스티코프의 지시를 이행하는 책임자였다.

 

평양에 온 그가 발한 이른 바 치스차코프 포고문은 맥아더 포고령[5]과 대비되어 오늘날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치스차코프 포고문의 내용과는 달리 소련은 주민들의 의사와는 아무 관계없이 대중의 지지가 높은 조만식을 제거하고, 각종 정치공작을 통해 자신들이 88 국제여단(88독립 저격여단)에서 교육시킨 대리인 김일성을 지도자로 내세워 북한을 공산화시킨다는 확고한 정책을 강제로 밀고 나갔다.

 

이외에 소련군정 사령관으로서 치스차코프가 한 결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의 수도를 함흥과 평양 중 어디로 할지를 결정하라는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키릴 메레츠코프 원수의 지시를 받고 평양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는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 병사들이 벌인 민간인 약탈, 강간 등의 만행, 일제가 남긴 산업시설들을 해체하여 소련으로 반출한 것, 반탁 데모와 반공 의거를 강제 진압하면서 많은 인명 피해를 낸 것 등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그는 19473월 소련으로 귀국했고 후임 사령관으로 겐나디 페트로비치 코로트코프(Gennadii Petrovich Korotkov, 1898 1982) 중장이 부임했다.

 

저서로 25군의 전투행로가 있다.

I.M.치스챠코프, 25군의 전투행로, 소련과학아카데미 편, 레닌그라드로부터 평양까지 : 조선해방에 있어 소련장성 11인의 회고록(서울: 함성, 1989.05.01)에 수록됨.

소련으로 망명한 전 북한 외무 부상 박길용 (朴吉用, 1920~1997은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일본군을 물리치고 조선을 해방시켰다는 북한 역사책들의 주장은 치스차코프의 회고록 25군의 전투행로에 나오는 내용중 소련군 25(88독립 저격여단)조선인민혁명군으로 바꾸어 옮겨적은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19458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이 일본군 평양사관구(平壤師管區)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竹下義晴) 중장()을 숙소인 철도호텔로 불러 항복을 받는 장면으로 그 장소에 조선인 대표로 조만식()도 입회하였다


정권 이관의 광경: 1945826일 밤 철도 호텔에서 왼편의 소련 제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Ivan Chistyakov) 대장이 오른 편의 후루카와 가네히데(古川兼秀) 평안남도지사로부터 행정권 이양을 받는 모습


1945824일 함흥에 도착한 치스차코프가 환영나온 군중들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이때까지 함흥과 평양 중 어디를 수도로 할 지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함흥에 먼저 들린 것으로 보인다. 평양을 북한 수도로 결정한 사람은 치스차코프로 알려져 있다


  모스크바 거주 레베데프씨가 제공한 사진 내용물 중 소련군정과 북로당 간부들...
<지도자 김은 스티코프가 주도한 소련군 극동사령부 작품이었다 1946년 8월 30일 소련군정 지도부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을 합당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한 후 당 고위간부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쪽에는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뒷 줄 오른쪽에는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등>

소련공산당과 소련군이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6일부터 진주하여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그리고 1948년 10월 19일부터 철수하여 1948년 말까지 철군했다 


-한국전쟁 남침은 노동당 계열 내부 대남 강경파 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복조선분국 김일성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박헌영) 계열 주도로 추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 부대 또는 저격여단) 등 이다[빨치산부대를 소련에서는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공수부대로 표현하고 있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전선사령관 김책[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총참모장 강건[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조선의용대 중국 팔로군 출신]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을 임명했다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는 다음과 같다

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소련 육군 극동사령부]은 스탈린 부대(일국 사회주의노선, 자국사회주의 성향 사회주의(민주사회주의) 그룹]이며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은 모택동부대[신민주주의 노선, 인민민주주의 그룹],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은 레닌부대[공산주의 노선, 마스-레닌주의 공산당 그룹]이다



-스탈린의 한국 전쟁 개입

194935, 북한의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인민군이 남한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남한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12월 남한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남한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19501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북한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남한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130, 스탈린은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4,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공(중국 공산당)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5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공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1950625일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했다. 1949년 갑자기 남한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 것을 언급하며 혹시 모를 미국과 자본주의 진영의 함정이라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그러나 무려 48회에 달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끝까지 남침을 고집한 탓에 스탈린이 이를 허락했는데 그렇게 발발한 한국 전쟁은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스탈린은 공식적으로는 한국 전쟁 관여를 부인하였지만 포스트 냉전 시대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스탈린의 명시적 허가와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무려 48번이나 시도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시한 입장은 아니고 김일성이 남침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해서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 김일성이 남침을 끈질기게 고집했을 때 스탈린은 애초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제관으로 임명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김일성에게 한반도 북부의 통치를 책임지게 한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김일성이 파견되자마자 한반도 북부지역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이후였기 때문이였다.

 

한국 전쟁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던 그는 뇌질환과 중풍 증세로 손과 발을 쓰는 것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고 체력이 소모되었음을 알고는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의심과 망상증세가 한층 강화되었다. 모스크바와 소련의 대도시에는 오직 스탈린 자신만이 리모콘과 장비로 열 수 있는 건물이 건립되었는데, 그 건물들에는 같은 모양의 방이 여러 개가 있어 아무도 스탈린을 쉽게 찾기 어려운 구조였다. 또한 그는 비행기와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장거리 여행도 열차로 했다.

 

-모택동의 한국전쟁 개입에 대한 후회

1950년 한국전쟁 기간부터, 친소련파였던 김일성으로는 북한에 영향력을 미치기 어렵다고 본 마오쩌둥(모택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 김두봉, 김무정 김원봉등의 조선의용대(독립동맹-모택동의 신민주주의와 중국 공산당 계열)을 통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그러나 이들과의 교류는 김일성에 의해 차단된다.

그는 1948년에 이미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고려 공산당 계열) 박헌영을 통해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영향력 행사를 기도하였으나,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은 김일성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수반으로 낙점한다. 한국전쟁 기간 중 그는 김일성의 견제세력으로 박헌영과도 연결을 시도했는데, 박헌영을 김일성의 대안으로도 고려했다. 1953년부터 19558월 종파 사건으로 북한의 남노동당원들이 대규모 감금, 체포, 처형당했을 때 그는 북한 외무성을 통해 압력을 넣어 박헌영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김일성의 박헌영 처형 의지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전쟁 중 국군과 유엔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김일성은 북한 인민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중공군과의 상의도없이 멋대로 북한 인민군을 후퇴시켜 결국 중공군은 유엔군의 기습으로 막대한 인명피해와 보급 손실을 받았다. 마오쩌둥(모택동)은 그 소식을 듣고 분노하였다. 그후 북중 관계는 악화되었다. 1975년 김일성은 베트남 공산화와 남한 박정희 유신정부 혼란으로 남침을 할 수 있는 국내외 상황의 기회로 보고 마오쩌둥(모택동)에게 찾아가 다시 한국전쟁을 일으키려 했지만 마오쩌둥(모택동)은 거절하였다. 이유는 1972년 마오쩌둥은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고백을 했고 김일성은 매우 무례하고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망나니놈이라고했고 북한에 군대를 파병보내 김일성과 북한을 도운 것을 후회하였고 한국(남한)이 통일되게 나뒀어야 했다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남북통일이 군사력보다는 신민주주의(민주화) 입장에서 남북통일을 지지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은 남북통일을 개인 우상화와 자주노선 국가사회주의 성향 군사력에 치중함으로 남북 주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남한 제6공화국 수립이후 남한정부 주도 민주화 정책으로 남북통일을 주도하고 있으며 남북 주민들이 지지하고 있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인민의(民有,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사회주의 국가 헌법[국영자본체제(國營資本體制)]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그리고 쿠바 등 4 개국에 불과하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hwp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hwp

북한헌법.hwp

베트남 헌법.hwp


*민주국가(민주공화국, 입헌군주국, 연방공화국) 헌법[민영자본체제(民營資本體制)]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聯邦共和國)

 국정(國政, 民國)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이다


-중화민국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기초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이다.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있다.

-이 헌법을 확정한다. 국정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中華民國 憲法.hwp

일본국 헌법.hwp

대한민국 헌법.hwp

몽골헌법.hwp

러시아연방 헌법.hwp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hwp

미합중국 헌법.hwp




1989년 혁명과 국영자본체제 붕괴[동유럽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모습, 독일 재통일의 시초이자 1989년 혁명의 대표적인 사례다



1989년 혁명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 초까지 발생한 혁명의 물결의 일부로 동유럽과 기타 지역의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게 된 결과를 낳았다. 이 혁명은 국가들의 가을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1848년 혁명을 언급할 때 때때로 사용되는 국가들의 봄이라는 용어에 초점을 둔 것이다.

 

1989년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붕괴되면서 전체적인 혁명의 사건들이 발생했다. 이는 헝가리 인민공화국, 동독,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도 혁명이 발생했다. 이러한 혁명의 전개 과정 중 거의 대부분의 사건들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시민 저항운동의 광범위한 사용으로, 일당제의 지속에 대해 대중적인 반대여론을 형성하고, 변화의 요구를 거세게 주장하는데 기여했다. 루마니아는 동구권 국가 중 공산정권이 폭력적으로 붕괴된 유일한 국가였으며, 루마니아와 몇몇 다른 국가들의 정권은 대중에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1989년 톈안먼 사건은 중국에서 주요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실패했지만, 시위 동안 용기 있는 저항들의 모습은 전세계의 다른 지역에 또다른 시위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날인 64, 폴란드의 연대자유노조는 부분자유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어 1989년 여름 평화로운 정권 이양에 성공했다. 헝가리는 물리적인 철의 장막을 걷어내어 동독의 난민들이 헝가리로 이주하게 되었고, 이는 동독 정부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는 라이프치히를 비롯한 동독 내 여러 도시의 대규모 시위와 베를린 장벽 철거의 계기가 되었고, 1990년 독일 재통일의 상징적 길잡이 역할을 했다.

 

1991년 말 소련의 해체로 조지아, 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몰도바,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11개국이 그 해 동안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발트 3국은 독립을 인정받았다. 나머지 소련의 영토는 199112월 러시아로 재탄생되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에서 공산주의가 폐지되었다. 1992년 유고슬라비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슬로베니아와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으로 분리되었다.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국명을 고쳤고, 이 국가 역시 2006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분리되었다. 2008년 세르비아는 다시 세르비아와 코소보로 분리되었지만, 코소보는 현재 미승인 국가로 남은 상태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당 통치를 폐지한지 3년 후인 1992년 해체되어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도 이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에티오피아 인민민주주의공화국, 남예멘, 몽골 인민공화국이 1990년대 후반까지 공산주의를 폐지했다. 공산주의의 폐지로 냉전도 종결되었다.

 

시장경제의 다양한 형식을 채택한 이후, 구 동구권 및 공산주의 국가들은 초기에 삶의 질이 일반적으로 쇠퇴했다. 정치적 개혁도 동반되어 공산당이 일당체제를 유지하는 국가는 중국, 쿠바, 라오스, 베트남이다. 북한의 경우 헌법 개정을 통해 공산주의 체제가 아님을 밝혔지만 사실상 이들의 통치 체계는 스탈린주의에 가깝다. 서구의 많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조직은 사회민주주의의 원칙을 견지하며 기본 이념을 바꾸었다. 이탈리아와 산마리노의 공산당은 타격을 입었고, 마니 풀리테는 1990년대 초 이탈리아 전체를 휩쓸었다. 그러나 분홍색 물결은 1999년 베네수엘라에서 시작된 이래 1990년대 말 남아메리카에서 시작되었고, 2000년대 초까지 이 지역을 휩쓸었다. 유럽의 정치 구조도 크게 개편되어 동구권 국가 다수가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유럽 연합에 가입해 더욱 강한 경제 및 사회적 통합을 이룩했다.

   

1. 혁명 전조

1980년 말 발트 3국과 캅카스 산맥의 국민들은 모스크바의 정부에 자치를 요구했고,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의 몇몇 지역과 정당에서 통제권을 잃고 있었다. 198811월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자치를 선언했고, 이는 소비에트 연방 내의 다른 공화국들의 자치 선언에도 영향을 미쳤다.

 

19864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1989년 혁명의 주된 원인 또는 부분적인 원인이 될 정도로 소비에트 연방 내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낳았다. 정치적으로 재앙적인 결과가 나온 또다른 이유는 소련의 새로운 정책인 글라스노스트가 채택되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경제적인 피해는 추산하기 어렵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따르면 소련은 180억 루블을 오염 및 정화에 사용했고, 결정적으로 이것이 소련의 파산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2. 개요

혁명의 역사적인 순간은 1989년 폴란드 인민공화국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혁명은 헝가리 인민공화국, 동독,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등 다른 동유럽 국가들로 퍼졌다. 이러한 혁명의 공통점은 시위가 거대한 봉기로 이어졌고, 일당 정치의 지속에 대한 민중의 반대와 변화의 압력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혁명 중 루마니아만이 유일하게 유럽 동구권에서 공산 정권이 폭력에 의해 몰락한 국가였다. 루마니아 정권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민중에 폭력이 가해진 사건이 여럿 있었다. 1989년 톈안먼 사건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적 변화를 유도하지는 못했지만, 세계 곳곳의 다른 민중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같은 날인 64, 폴란드의 부분적 자유 선거에서 폴란드 자유 노조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1989년 여름 폴란드의 공산 정권은 평화적으로 몰락했다. 헝가리는 철의 장벽을 해제하여 동독 주민들이 헝가리로 이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는 결국 동독 지역의 불안정화를 야기했다. 이는 라이프치히와 같은 대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 것의 한 원인이 되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짐에 따라 1990년 독일의 재통일이 이뤄지는 계기가 되었다.

 

1991년 말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가 이루어짐에 따라 14개국이 독립했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조지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은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1990년과 1991년 사이에 독립을 선포했고, 나머지 영토는 신생 공화국인 러시아 연방에게 199112월 넘어갔다. 1990년부터 1992년 사이에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도 공산주의를 폐지했다. 1992년 유고슬라비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슬로베니아,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으로 분리되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국명을 변경했다. 이후 2006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분리되었고, 2008년 세르비아는 다시 코소보와 세르비아로 분열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89년 공산주의가 붕괴된 이후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로 1992년 평화롭게 분리되었다. 기타 사회주의 국가에게도 혁명은 영향을 미쳤다.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에티오피아 인민 민주주의공화국, 남예멘이 공산주의를 버렸고, 몽골 인민 공화국에서는 혁명이 발생해 공산주의의 일당 체제가 붕괴되었다. 소련과 사회주의의 붕괴는 냉전의 공식적인 종식을 알렸다.

 

다양한 형태의 시장 경제를 채택하는 동안 생필품의 가격이 일반적인 수준으로 낮춰졌다. 정치적 개혁은 여러 지역에서 다양화되었지만, 중국, 쿠바, 라오스, 베트남, 북한은 전세계에서 일당 체제를 유지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서구의 수많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단체가 그들의 이념을 사회 민주주의로 변경하였다. 이탈리아와 산마리노의 공산당은 이탈리아 정치 개혁으로 1990년 위기를 맞이했다. 유럽의 정치도 상당히 바뀌었는데, 과거의 동구권 국가들이 북대서양 조약 기구, 유럽 연합 등에 가입하여 유럽 대륙 간의 경제적, 사회적 통합이 강화되었다.

 

   

3. 동구권 외부의 세계

19862월 필리핀에서는 독재 정권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피플 파워 혁명을 통해 몰아내고 새로운 대통령으로 코리 아퀴노를 선출했다. 1989년 혁명의 도미노 효과로 세계 각국의 다른 정권들도 영향을 받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헤이트 정권과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은 1990년대부터 서구의 자금 및 정치적 지원이 미약해지자 서서히 약화되었으며, 대한민국, 수리남, 중화민국, 니카라과, 인도네시아, 가나, 북예멘, 남예멘을 비롯한 여러 정부에서 민주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1991년 인도 정부는 사회주의 노선을 버리고 신자유주의를 채택했다.

 

4. 배경

(1)공산주의에 대한 반대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동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침공하고 점령했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이후 독일은 폴란드를 병합했지만, 이후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소련을 침공했다. 소련은 이후 미국과 더불어 연합국에 가담하여 독일군과 맞서 싸웠고, 폴란드와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오스트리아 등으로 진격하며 독일군을 압박했다. 1945429, 소련군은 나치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에 입성했고 194558일 나치 독일이 소련에 항복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나치 독일이 반공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에 동유럽 곳곳에서 나치 독일은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고, 이 결과 반나치 저항 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이후 테헤란 회담과 얄타 회담에서 연합국은 중부 및 동부 유럽에서 소련의 지위를 인정했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은 미국에 맞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5년부터 스탈린은 중국 내 공산당을 지원하여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데 기여했고, 1950년 한국 전쟁에서 북한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소련은 아프리카 및 중동 지역에 개입해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아랍 국가들을 지원하고 앙골라 내전과 모잠비크 내전, 에티오피아 내전 등에 개입했다. 아시아 지역에서도 베트남과 라오스, 캄푸치아 민주 전선을 지지하고 미국과 동맹을 맺은 파키스탄을 견제하기 위해 이란 및 인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동유럽을 비롯한 각국에서는 공산당에 대한 반대 운동이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소련에 무력으로 점령당한 발트 3국은 1956년까지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지지를 받으며 정글 작전을 비롯한 각종 게릴라 전쟁을 수행했다. 동독에서도 스탈린의 죽음 이후 지나치게 전개되었던 스탈린화에 반대해 동독 노동자들이 1953616일부터 파업 시위를 벌였지만 소련군과 동독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같은 해 체코슬로바키아의 플젠에서도 공산당의 화폐 개혁 및 정치에 반대하여 봉기가 일어났다. 더 큰 규모의 봉기가 1956년부터 발생했다. 19563월 조지아의 트빌리시에서는 탈스탈린화에 힘입어 학생들과 국민들은 소비에트 정부의 변화와 조지아의 독립을 요구했다. 사태는 6일 만에 진정되었지만 조지아 정부와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566월 폴란드 포즈난에서 시민 봉기가 일어나 정부의 정책 변화를 촉구했고 같은 해 10월 폴란드 당국은 국민들에게 사회주의의 새로운 길을 약속했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은 소련의 동유럽 정책에 위기를 가져왔다. 새로 집권한 임레 너지는 공산주의 채택 이후 헝가리의 경제 악화 및 스탈린의 죽음으로 소련 중심의 정책에서 탈피하고자 했고, 미국의 지지로 봉기를 일으켰다. 헝가리에서는 범국민적인 반소 운동이 제기되었고, 병사들과 무장한 시민들이 헝가리 정부에 맞섰다. 그러나 소련군의 개입으로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헝가리 혁명 이후 소련에 대한 반대 운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으나 1960년 중후반부터 다시 반소 운동이 재개되었다. 아르메니아에서 1965년 아르메니아 집단학살에 대한 신원 복구 및 서아르메니아 합병을 소련 측에 요구했지만 이것이 묵살되자 봉기가 일어난 것이었다. 이후 소련 정부는 이를 일부 수용해 치체르나카베르드를 건립했다. 더 큰 규모의 반소 운동은 1968년 프라하에서 발생했다. 이것이 프라하의 봄으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은 정부의 민주화 및 탈스탈린화를 요구했지만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의 침공으로 민주화 운동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반소 운동은 이후 폴란드, 소련 등지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이후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 소련의 중앙집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2)폴란드 자유 노조 수립

1980년대 폴란드에서 노동자 조합이 독립적인 노조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는 19809월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자유노조의 설립으로 이어졌으며 이 노조는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81년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수장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는 연대자유노조를 약화시키고 폴란드에 계엄령을 선포해 노조를 탄압했다. 노동조합의 모든 인원들이 투옥되었지만 공산주의 역사상 노동 조합이 국가의 기능을 반영하지 않고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했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3)고르바초프의 등장

몇몇 동구권 국가들의 개혁적 정책이 무산되었지만, 1950년대부터 제한적으로 정치 및 경제면에서 개혁이 시작되었다. 뒤이어 1985년 집권한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부분적 개혁에서 전반적인 개혁을 생각하고 있었고, 조금 더 거대한 자유화를 향한 동향을 나타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소련의 젊은 지식인들인 아파라트치크 계층이 고르바초프의 주도 하에 브레즈네프 침체기 동안 일어났던 여러 문제들을 되돌리기 위해 기능적 개혁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심각한 경제적 후퇴에 직면했고, 이를 되돌리기 위해 서구권의 기술과 신용이 필요했다. 소련을 유지하는 군대의 비용은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기에 소련의 위성국들에게 맡겨졌다.

 

주요 개혁의 첫 신호는 1986년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추진하고, 페레스트로이카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등장했다. 글라스노스트는 개방을, 페레스트로이카는 경제 구조의 재편을 의미한다. 1989년 봄이 되면서 소련은 언론의 자유화를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다당제 후보제를 처음으로 도입하여 소련인민대표대회를 개최했다. 글라스노스트가 개방과 정치적 비판을 지지했지만.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입장과 궤를 같이 하여 허용된 것이었기에 여전히 제한은 많았다. 동구권의 다른 국가들은 여전히 비밀 경찰과 정치적 압력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모스크바 정부의 가장 큰 장애물은 서방 국가들을 철의 장막으로부터 차단하면서도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이었다. 소련의 군사적 개입이 중앙 유럽이나 동유럽 일대에서 시작될 것처럼 보였지만 모스크바 정부가 국가의 개편을 위해 서방 국가의 경제적 지지를 얻는 것은 어려워보였다. 고르바초프는 중앙 유럽 및 동유럽의 위성국가 정부에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따라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헝가리와 폴란드의 개혁주의자들은 동에서 서로 확산되는 자유화의 물결에 의해 지나치게 고무되었고, 다른 동유럽 국가들은 회의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개혁의 혐오감을 주장했다. 과거 경험 상 소련의 개혁은 통제가 가능했지만 기타 국가에서 변화에 대한 압력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이러한 정권은 소련의 군대와 그들의 지지자들의 지원을 받으며 소련식 권위주의를 통해 정권을 유지시켰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실패로 끝날 것처럼 보였는데, 그 이유는 정통 공산주의자들인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불가리아의 토도르 지프코프, 체코슬로바키아의 구스타우 후사크, 그리고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정권을 유지하며 변화에 대한 요구를 묵살했기 때문이다.[28] 이는 동독의 중앙위원회 중 한 사람이 "만약 당신의 이웃이 새로운 벽지를 붙일 때, 당신도 그렇게 할 필요는 없죠."라고 말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5.공산국가의 변화

(1)중화인민공화국: 톈안먼 시위

 

베이징대 학생들은 '민주살롱(Democracy Salon)'이라는 동아리를 조직하고 중국민주의 앞날에 대해 열렬한 토론을 벌리곤 했다. 6.4민주운동의 주역 왕단(王丹)이 이날 모임에서 발언하고 있다

 

                                                                                   Students carry a memorial banner to Hu Yaobang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 서거 

 

 

 

 

 

 

 

 

 

 

 

 

 

 

                                                    Students on Tiananmen Square 23 years ago were dispersed with tanks and bullets

 

                         Twenty-three years after the massacre at Tiananmen Square, Chinese authorities continue to suppress the memory of it

 1982년부터 집권한 중국의 새 지도자 덩샤오핑은 1984년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발달시켜 지역 시장주의를 도입하였지만, 정치적 변화는 정지된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중국 학생들의 첫 시위가 198612월 헤페이에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해외 유학의 기회 제공 및 캠퍼스 내에서의 선거, 그리고 서구 팝 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접근 허용을 요구했다. 그들의 시위는 정치적 분위기가 완화되고 개혁의 국면이 지연될 시기를 이용한 것이었다. 의장이자 덩샤오핑의 피보호자, 그리고 개혁지지자였던 후야오방은 시위에 대한 책임으로 중국 공산당에서 19871월 사임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톈안먼 시위는 1989415일 후야오방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다. 후의 국장 당시 10만 명의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에서 그것을 지켜보기 위해 모였다. 그러나 대강당에서 어떠한 지도자들도 나오지 않았다. 운동은 7주 동안 지속되었다. 고르바초프가 시위 중 315일 중국을 방문할 당시, 많은 해외 언론 기자들이 베이징에 있었고, 그들은 시위자들의 생생한 모습을 담으며 유럽에서 있었던 자유의 영혼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소련보다 먼저 급진적 경제 개혁을 시작한 중국의 지도자들과 그리고 공산당의 국무위원인 자오지양은 정치적 개혁을 추구하겠다고 밝혔으며 색깔 혁명처럼 무질서를 유발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은 시도하지 않았다. 198964일 전차가 톈안먼 광장에 진입하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베이징에서 시위에 대한 군사적 진압은 많은 시민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사상자는 여러 통계치에 따라 달랐기에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2)폴란드






                                                  폴란드를 방문한 부시 대통령과 회담을 하는 레흐 바웬사 폴란드 대통령

19884월과 5, 폴란드에서는 전국적으로 파업이 벌어졌다. 이후 두 번째 파업이 815일부터 시작되었다. 8월의 며칠 동안 17개의 광산이 파업에 들어갔고, 이후 822일부터는 그단스크 정박항의 노동자들을 비롯한 각지의 정박항 노동자들도 파업을 시작했다. 이는 1980년대 초 불법이었던 연대자유노조에 대해 노동자들이 다시 합법 노조임을 인정하라고 요구한 것이 발단이었다. 1988831일 연대자유노조의 지도자 레흐 바웬사는 공산주의 당국의 초청으로 바르샤바로 가서 그들과 회담을 했다. 1989118일 제10차 폴란드 연합노동당에서 울프리히 자루젤스키 의장은 합법화를 위해 연대자유노조와의 공식적인 협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것이 좌절될 경우, 모든 당 지도부가 사퇴할 것을 압력받았을 때 달성될 수 있었다. 198926일 공식적인 회담이 바르샤바 대회의실에서 시작되었고 44, 역사적인 폴란드 원탁회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서 연대자유노조는 합법성을 인정받았고, 198964일까지 폴란드 자유 의회 선거에 대해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연대자유노조는 폴란드의 모든 선거에 압승을 거두었고, 이들은 대통령 직을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1989, 공산당의 두 동맹체였던 폴란드 연합인민당과 폴란드 민주당은 폴란드 연합노동당과의 동맹을 깨뜨리고 연대자유노조에 대한 지지를 선포했다. 폴란드의 마지막 공산당 총리였던, 체스와프 키슈차크는 비 공산당 계열이 행정부를 편성할 수 있도록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노조자유연대가 정부를 만들 유일한 정치적 집단이 되자, 노조자유연대에서 총리가 나올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1989819, 반공주의 편집자이자 노조자유연대의 지지자인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가 폴란드의 총리로 임명되었고, 1968년의 프라하의 예처럼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개입해야 한다는 요청에도 소련은 어떠한 반대 의사도 나타내지 않았다. 1989824일 폴란드의 의회는 40년 동안 이어진 일당제를 폐지시켰다. 의회에서 마조비에츠키는 378표의 찬성과 4표의 반대, 그리고 41표의 불참으로 총리 직을 인정받았다. 1989913, 새로운 비공산당계 정부가 의회의 승인을 받았고, 이는 유럽 동구권 역사상 처음으로 수립된 민주정부였다. 19891117, 체카의 설립자이자 공산주의 탄압의 상징이었던 펠릭스 제르진스키의 동상이 바르샤바 은행 광장에서 철거되었다. 19891229일 폴란드는 국가의 명칭을 폴란드 인민공화국에서 폴란드 공화국으로 변경했다. 공산주의 단체인 폴란드 연합노동당은 1990129일 해산한 후 사회민주주의 단체로 개편되었다.

 

1990년 야루젤스키가 폴란드 대통령에서 사임하고 대통령직은 1990년 대선에 승리한 레흐 바웬사에게 넘어갔다. 바웬사의 대통령 취임은 19901221일로, 이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식적인 종식과 현대의 폴란드의 시작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19911027일 폴란드 의회 선거는 1945년 이후 처음으로 전면 자유제로 실시되었다. 이것은 폴란드의 공산주의 체제가 서구식 민주주의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소련군은 단계적으로 철수를 시작했지만 1991년 러시아 연방 수립 이후에도 러시아군은 주둔해 있었고 마지막 러시아 군대는 1993918일 폴란드에서 철수했다

 

(3)헝가리

 

                                            In the 1980s, Hungary still had raw memories of Russian tanks putting down the 1956 revolution

 

Hungary's role in the 1989 revolutions


다른 동구권 국가들과는 달리 헝가리는 1980년대 지속적으로 경제적 개혁을 추구해 성과를 얻었고, 제한적이었지만 정치적 자유를 허용했다. 그러나 주요 개혁은 1988523일 공산당 총서기가 카다르 야노시에서 그로츠 카를로시로 바뀐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19881124, 네메트 미클로시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이후 1989112일 의회는 "민주주의 패키지"를 채택했다. 민주주의 패키지에는 무역 다원주의,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 헌법의 적극적 개정, 새로운 선거 제도 등을 포함되었다. 1989129, 헝가리 공산당이 30년 동안 주장했던 역사의 공식적인 관점과는 모순되게 중앙위원회 의장 포츠게이 임레는 헝가리의 1956년 반란이 반혁명을 위한 외국 사주의 시도보다는 인민 봉기임을 선언했다. 대규모 시위가 315일 국경일에 발생해 공산당 정권과 비공산당 정치 세력의 협상을 요구했다. 헝가리 원탁회의가 422일 시작되어 918일 협상은 성공리에 종결되었다. 회담에서는 공산당을 비롯해 새로 등장한 피데스,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동맹, 헝가리 민주주의 포럼, 헝가리 인민당, 헝가리 기독교 민주주의 인민당 등이 초청되었다. 이 회담에서는 헝가리의 미래 정치적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대표적인 예로 소욤 라슬로, 안탈 요제프, 오르반 빅토르 등이 있었다.

   

                                                       Taking down Hungary's border fence was to have far-reaching consequences 

198952일 철의 장막의 실질적인 첫 해제가 헝가리 인민공화국이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펜스를 철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수 만명의 시민들이 여름부터 가을까지 불법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을 넘어 서방 국가들로 이주하면서 두 정부의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198911, 공산당은 옛 총리인 너지 임레를 사면하였다. 이는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혁명의 책임으로 짧은 재판 이후 그를 불법적으로 처형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1989616일 너지 임레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부다페스트의 광장에서 국장을 받았다

 

1989918일의 원탁 회의의 내용은 6가지 법 조항에 반영되었다. 이는 헝가리 헌법의 전반적 개정, 헝가리 입헌 의회의 설립, 정당의 기능과 통제, 선거에서의 다당제 도입, 국가 원수와 의회의 분립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거 제도 또한 협정의 내용에 포함되었다. 절반 이상의 당원들은 비례제로, 나머지 절반은 다수결로 선출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권한도 약화시키기로 결정되었지만, 누가 대통령에 선출되어야 할 지와 언제 선거를 치를 지는 합의되지 않았다. 1989107, 공산당은 스스로 대규모의 의회를 재소집해 헝가리 사회주의 정당을 설립했다. 19891016일부터 20일까지 의회에서 다당제 선거와 직접선거를 채택했고, 1990324일 헝가리에서 첫 민주적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후 헝가리는 인민공화국에서 헝가리 공화국으로 변경되었고, 정부는 인간의 존엄성 및 민권을 보장하고 삼권 분립의 실현을 위해 법적 제도를 마련했다.[54] 헝가리를 점령했던 소련군도 1991619일 헝가리에서 철수했다.

 

(4)동독






                                                         베를린 장벽 중 브란덴부르크 문 구간에서 찍은 사진. 19891110

198952,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철거하기 시작하자, 철의 장막 일대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동독 주민들은 이 구멍을 통해 서방 국가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19899월 말에는 3만 명 이상의 동독 주민이 서방 국가로 도주했고, 이후 동독 정부는 헝가리 여행을 금지했다. 이러한 조치에 동독 주민들은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동독 주민들 수천 명은 중부 유럽과 동유럽 수도에 산재한 서독의 행정 기관을 통해 서쪽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특히 헝가리 대사관과 프라하 대사관의 독일의 정치적 개혁을 기다리는 수천 명의 독일인들이 8월부터 11월까지 대사관에서 캠프를 치고 대기했다. 독일 민주공화국 정부는 103일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을 폐쇄했고, 이로 인해 동독은 이웃 국가들로부터 고립되고 말았다. 도주의 마지막 기회가 차단되자 더 많은 동독 주민들이 114일 라이프치히에서 발생한 동독 월요 시위에 참여했다.



 

102일 라이프치히의 동독 월요 시위는 1만 명의 시위자들이 참여해 성공리에 끝났다. 그러나 동독의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이자 동독 총리인 에리히 호네커는 동독 군대에 시위자들의 사살을 명령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대규모 경찰과 군대, 동독 국가보안부, 그리고 노동 전투군을 주둔시켰고, 109일에는 톈안먼 광장 식의 학살이 계획되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기도 했다.

 

1989106일부터 7일까지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독일 민주 공화국 수립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동독을 방문했다. 그는 동독 지도자들에게 개혁의 수용을 요구했다. 그는 독일어로 "Wer zu spät kommt, den bestraft das Leben" (너무 늦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는 유명한 속담을 인용했다. 그러나 호네커는 내부 개혁에 반대하였고, 그의 정권은 소련 출판물을 체제 전복용이라 판단하고 판매를 금지했다. 공산주의자들의 대량 학살이 유언비어로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1097만 명의 시민이 라이프치히에 모여 시위를 했다. 이들은 정부 당국에 발포를 금지했다. 1016일에는 12만 명의 시민이 라이프치히에 모여 시위했다.

 

에리히 호네커는 소련군이 동독으로 진입하고,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지지로 공산 정부를 복귀시키고 시민들의 시위를 탄압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1990년 이것은 실행하기 어렵다는 것이 밝혀졌다. 소련 정부의 시나트라 독트린에 의해 소련은 동구권에서의 영향력을 종식시키겠다고 선언했고, 동독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서 소련은 중립을 유지했다. 계속되는 시민들의 봉기 및 시위로 동독 공산당은 1018일 호네커를 축출하고 그를 대신해 에곤 크렌츠를 서기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시위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1023일 월요일에 라이프치히의 시위 참가자는 30만 명이 되었다. 111일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개방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모든 동독 주민들의 서독 이주를 아무런 제재 없이 허락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지역 내의 철의 장막을 113일 철거하기 시작했다. 114일 동독 정부는 베를린 시위를 재가하기로 결정했고, 베를린 시민들은 최대 규모의 시위에서 자유를 요구하며 수도를 퍼위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한 피난민의 흐름을 막을 수 없었기에 동독 정부는 1989119일 시민들에게 서독으로 직접 여행하는 것을 허용했다. 귄터 샤보브스키가 TV 회담에서 정부의 계획 중인 변화는 지연 없이 즉각적으로 실현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서베를린으로 이동할 수 있게 요구해달라며 국경으로 집결하는 원인이 되었다. 국경 보위대는 무력을 사용하지 못한 채 주민들을 서베를린으로 이주시켰다. 이후 베를린 장벽이 시민들에 의해 붕괴되었다.

 

1113일 동독 총리 빌리 슈토프와의 그의 내각은 전격 사임했다. 새로운 정부는 더욱 온건한 공산주의자인 한스 모드로프의 주도 하에 개혁을 진행했다. 121일 동독 인민의회는 독일 민주공화국의 체제에서 공산당의 주요 역할을 제거했다. 123일 크렌츠는 공산당 서기장에서 사임했고, 3일 후 국가 수반 직에서도 사퇴했다. 127일 공산당과 다른 정당 사이에 원탁 회의가 개최되었고, 19891216일 동독에서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해체된후 독일 민주사회당으로 개편했다.

 

1990115일 동독 국가보안부의 수장은 시위자들로 붐볐다. 모드로프는 1990318일 자유 선거가 이루어질 때까지 사실 상의 동독 지도자가 되었다. 이는 1933년 이래 처음으로 동독 지역에서 이루어진 자유 선거였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패배했고, 동독 기독교 민주연합의 로타르 더 메치에어가 199044일 총리가 되어 서독과의 통일 절차에 속력을 내었다. 동독과 서독은 1990103일 재통일되었다. 옛 동독 지역에 주둔하던 러시아군은 199491일 완전 철수했다.

 

(5)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의 시위, 198911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은 지역 공산주의 정부 타도 혁명 중 비폭력 혁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891117일 금요일, 프라하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의경이 진압했다. 여기서 사상자가 발생했는 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이 사건으로 19891119일부터 12월 말까지 범국민적인 시위가 연속으로 발생하였다. 1120, 평화 시위자 20만 명이 프라하에 집결했고, 다음 날에는 50만 명이 집결했다. 5일 후 레트나 광장에는 80만 명의 시위자들이 집결했다. 1124, 미클로시 자케시를 포함한 공산당의 모든 지도자들이 사임했다. 1127일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에서 2시간 동안의 파업이 성공리에 끝났다.



 

다른 공산 정부의 붕괴 이후 거리 시위가 증가했고, 이에 호응해 1128일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일당제를 종식하고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선언했다. 서독과 오스트리아에 있던 국경이 12월 초에 철거되었다. 1210일 구스타프 후자크 대통령이 1948년 이후 처음으로 비공산 정부의 수반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사임했다.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1228일 연방 의회의 대변인으로 선출되었도 19891229일 바츨라프 하벨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90년 체코슬로바키아는 1946년 이후 첫 민주 선거를 진행했고, 1991627일 마지막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철수했다.

 

(6)불가리아

198910월부터 11월까지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는 시위자들이 정치적 개혁 및 생태학적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이 시위는 탄압되었지만, 19891110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지 3일 후, 불가리아의 오랜 독재자인 토도르 지프코프가 위원회에 의해 축출되었다. 비교적 온건한 공산주의자이자 이전 외교부 장관이었던 페타르 믈라데노프가 그의 권력을 승계받았다. 소련은 지프코프가 고르바초프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지도부의 변화에 명백히 지지했다. 새로운 정부는 자유 연설과 집회에 가해진 제제를 즉각적으로 완화했고, 이는 1117일의 대규모 집회로 이어진다. 이후 불가리아에는 반공 단체도 드장하기 시작했다. 이들 대다수는 127일 불가리아 민주주의 연합에 참여했다.[59] 불가리아 민주주의 연합은 지프코프의 축출에 만족하지 않고 추가적인 민주적 개혁과 불가리아 공산당의 일당제 종식을 요구했다.

 

믈라데노프는 19891211일 공산당의 일당제 종식 및 다음 해의 다당제 선거를 선언했다. 19902월 불가리아 행정부는 공산당의 독점적 역할에 대한 헌법 조항을 삭제했다. 1990년 폴란드식 원탁 회의가 개최되기로 결정했고, 19906월 자유 선거가 예정되었다. 199013일부터 514일까지 원탁 회의가 진행되어 민주주의로의 전환이라는 합의가 도출되었다. 19904월 불가리아 공산당은 불가리아 사회주의당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렸다. 1931년 이후 최초의 민주 선거가 19906월 이루어져 사회주의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7)루마니아





































                                                                                   1989년 12월 루마니아 자유화 민주화 혁명군 모습(사진)




현재 전해지는 영상에는 사형 판결 직후 차우셰스쿠 부부를 결박하는 장면과 건물 벽을 배경으로 하여 사격이 끝나가는 때, 그리고 사형된 두 사람의 모습과 사망을 확인하고 후처리를 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찍혀있다. 정작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은 당시 사용 중인 비디오 카메라의 전원이 끊어지는 바람에 촬영되지 못했다.

당시 처형 순간을 보도한 영상. 차우셰스쿠의 나이는 71세였고 엘레나의 나이는 73세였다.[사진]


1987년 브라초프 반란에서 살아남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의 지도자로 198911월 재선출되어 5년간 집권할 수 있게되었다. 이 무렵 다른 유럽 지역을 휩쓰는 반공 봉기를 보고 그는 이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차우셰스쿠가 이란으로 국빈 방문을 준비하는 동안 그의 비서는 헝가리 개혁교회 목사인 토케스 라츨로 목사를 1216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라츨로는 포위되었지만 곧 봉기가 곳곳에서 시작되었다. 티미쇼아라가 1216일 첫 봉기를 시작했고 이는 5일 간 지속되었다. 이란에서 돌아온 이후 차우셰스쿠는 1221일 부쿠레슈티에 있는 루마니아 공산당 본부에서 그의 지지자들을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충격적으로 시민들은 야유를 퍼부으며 그를 조롱했다. 이는 루마니아 시민들이 그에게 오랫동안 실망했음을 보여주는 예였다.

 

봉기가 확산되자 보안군은 차우셰스쿠의 명령에 따라 시위자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그러나 1222일 아침 루마니아군은 편을 갑자기 바꾸었다. 이는 국방부 장관 바실 밀레아가 반역자로 누명을 쓴 이후 자살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는 것 때문이었다. 밀레아 장관이 사실상 사살되었다고 판단한 군은 혁명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군 전차는 중앙위원회 건물을 향해 진격했다. 시위자들은 중앙위원회 문을 열고 차우셰스쿠 부부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들은 건물에 대기 중인 헬리콥터를 타고 도주하였다. 다른 지역의 공산당과는 달리 루마니아 공산당은 바로 해체되었고, 현재까지도 루마니아에는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차우셰스쿠의 도주에도 불구하고 불확실성만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1225, 루마니아 텔레비전에서는 차우셰스쿠의 처형식을 공격했다. 이후 이온 일레스쿠가 이끄는 국가민주주의 전선 의회가 정권을 이양받아 19904월 자유 선거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들은 1990520일 선거를 미루었다.

 

(8)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해체와 내전 그리고 각 민족 자치정부 독자국가 수립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회원국은 아니었지만 요지프 브로즈 티토의 주도 하에 티토주의에 입각한 정치를 폈다. 이것은 티토가 형제애와 통일이라는 구호 아래 유지할 수 있는 다민족 국가의 개념과 부합했다. 그러나 1970년부터 1971년까지 일어난 크로아티아의 봄 이후 민족 간의 긴장이 증대되었다. 크로아티아는 이 때 더 많은 자치를 중앙 정부에 요구했지만 이는 묵살되었다. 1974년 헌법이 변화되고 1974년 유고슬라비아 헌법이 연방 정부의 권력을 자치 공화국과 주들에게 어느 정도 이양했다 1980년 티토의 죽음으로 민족 간 분쟁은 다시 격화되었고, 1981년 알바니아계 주민이 다수였던 코소보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1984년 이래로 점진적인 자유화 정책을 추구해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모델을 따라하려고 했다. 이는 슬로베니아 공산당 연맹과 중앙 정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으로부터 긴장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 말 수많은 시민 사회 집단이 민주화를 진척시켰고, 문화적 다양성을 위한 공간을 확장하고자 했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시민 사회 집단과 공산 정권 사이에 충돌이 빈번이 발생했고, 이 중 대표적인 예가 슬로베니아의 봄이었다. 1989년 초 몇몇 반공 정당이 기능을 수행하여 슬로베니아 공산주의자의 영향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19901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연맹은 헌법 내 정당 사의 분쟁을 막기 위해 소집되었다. 수에서 밀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공산당은 1990123일 당 연맹에서 탕퇴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종식을 가져왔다. 양당은 다당제 자유 선거를 실시하고자 했다. 199048일 민주주의 및 반유고슬라비아 정당 DEMOS 동맹이 슬로베니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990424일에는 프라뇨 투지만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 크로아티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마케도니아에서 이뤄진 199011월 선거에서 공산당과 민족주의 정당이 비슷한 표를 확보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지도부는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할 준비를 마쳤고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은 로그 혁명을 통해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19901223일 슬로베니아 독립 선거에서 88.5%의 주민들이 독립에 찬성했다. 199152, 크로아티아 독립 선거에서도 93.24%의 주민이 독립에 찬성했다.

 

(9)알바니아



1991220 알바니아의 수도인 티라나에서 스탈린주의자인 노동당 총서기이며 알바니아인민공화국 건국자 엔베르 호자의 동상을 무너뜨리는 시위대 모습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의 지도자인 엔베르 호자는 40여년 간 알바니아를 통치하고 1985411일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라미즈 알리아가 정권을 서서히 개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9년 쉬코르다에서 첫 봉기가 시작되었고, 이는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에 알리 정부는 자유화를 허용해 1990년부터 해외 여행의 자유를 제공하는 등 각종 조치를 취했으며, 헬싱키 협정에 참여해 알바니아 내 인권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65] 이러한 조치로 1923년 이래 최초로 알바니아의 자유 선거였던 19913, 공산주의자들은 다시 집권했지만, 파업과 시민들의 반발로, 비공산당 계열을 포함한 내각이 열리게 되었다. 이후 1992년 알바니아는 완전히 공산주의에서 벗어나 민주적 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6. 몰타 회담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조지 H. W. 부시가 몰타 자유항에 정박한 소련 순양함 막심 고르키에서 회동하고 있다. 이 회담은 냉전 종식의 주요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미국 대통령 조지 H. W. 부시와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몰타에서 1989122일부터 123일까지 회담을 가졌다. 이 때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며칠이 안 된 때였다. 몇몇 언론은[66] 몰타 회담을 얄타 회담 이후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이 회담을 언급했다. 얄타 회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유럽에 대해 영국의 윈스턴 처칠,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논의한 것이다.



 

7.소련의 해체



소련군부는 소련공산당 보수파(교조주의) 입장보다 개혁파(수정주의) 입장을 지지했다[소련군인들이 시민혁명을 지지했다]











199171,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이 프라하에서 회담을 가진 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같은 달, 고르바초프와 부시는 미국-소련 간의 전략적 협력을 다짐하였다. 실제로 1990년부터 발발한 걸프 전쟁 당시 미국 주도의 다국적 연합군에 소련은 지지를 보냈고, 이라크에 대한 국제 연합의 제재에서 소련은 미국과 함께 찬성에 투표했다.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역에서 소련이 단계적으로 철수하자 1989년에 일어났던 혁명의 여파가 소련 전체에 반향을 일으켰다. 자치 국가 내부의 동요가 리투아니아에서 시작되었고, 발트 3국 전체와 아르메니아가 독립을 선포하는 것에 이른다. 그러나 소련 중앙 정부는 독립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군사 행동 및 경제 제재를 통해 독립 선포 국가들을 위협했다. 19911, 소련군이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 진입하면서 분리운동을 탄압하려고 했지만, 소련군은 이후 철수했다. 이 외에도 조지아나 아제르바이잔 같은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들은 중앙집권적 통치에 맞선 약속들을 제시하라는 요구와 더불어 급속한 민심 이탈이 발생했다.


 

글라스노스트는 다국적 국가였던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 공화국들 내부에서 오랫동안 압력을 받던 민족주의적 요소들을 분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민족주의 운동은 소련의 경제가 급속히 악화됨에 따라 더욱 가속되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경제를 증진시키지 못함으로써 실패했고, 구식 소련의 계획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에 구성 공화국들은 자신들만의 경제 체계를 구축하고 소련 중심의 헌법을 지역 중심적 헌법으로 변경했다. 1990년 공산당은 70여년 간의 일당체제를 포기하는데 합의했다. 이는 소련 최고 위원회가 소련 헌법 조항에서 독재적 권위를 보장하는 내용을 폐지하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의 정책은 공산당이 언론을 장악하는 것에 실패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이는 소련의 과거 역사적 세부사항이 공개되는 것에 영향을 미쳤고, 시민들과 자치 공화국의 지도자들은 구체제를 불신하며 더욱 많은 자치 또는 실질적인 독립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소비에트 연방 내부의 회의에서 소련을 존속시키되, 조금 더 느슨한 형태의 연합으로 구성하자는 방침이 나오자 소련의 강경파들은 부통령인 겐나디 야나예프를 중심으로 19918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쿠데타에 맞서 더 많은 군대를 보내 이들의 노력을 붕괴시켰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복권되었지만, 그의 귄위는 실추했다.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이후 공산당 서기장에서 사임했고, 소련 최고위원회는 당을 해산시킨 후 모든 공산주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199196, 소련 정부는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8월 쿠데타 이후 수많은 구성 공화국들이 독립을 주장했다. 이 무렵 새로 들어선 러시아 정부가 소비에트 정부의 권력을 하나씩 승계함에 따라 소련 정부는 쓸모 없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1991121,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투표에서 찬성파가 압승을 거두면서 소련의 연방 제도가 위기를 맞았다. 이는 소련의 통일적 요소를 유지하려는 현실적인 움직임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1128일 옐친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지도자들을 만나 벨라베자 조약에 서명하면서 소련의 존재성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를 불법이라고 주장했으나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19911221, 소련을 구성하고 있던 12개의 국가 중 조지아를 제외한 11개국이 알마-알타 협정을 체결하여 소련의 해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후, 독립국가연합이라는 자발적인 협의체로 이를 대체하기로 했다. 고르바초프는 1225일 소련 대통령 직을 사임했고 1226일 소비에트 최고위원회는 벨라베자 조약을 합법이라 인정한 후 스스로 해산했다. 1991년 말 러시아로 이양되지 않은 몇몇 소련의 기구들이 해체되었고,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1993, 소련을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이 체제 위기로 확산되었지만, 러시아 정부가 이를 해결하고 지역 내 잔재한 소비에트 기구들을 완전히 해체함으로써 러시아는 완전한 민주 국가로 들어서게 되었다.

 

(1)발트 3


                                       발트의 길은 발트 3국에서 시작된 혁명으로 200만 명의 사람들이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한 사건이었다

발트 3국은 정치의 민주적 개혁을 실행하고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한 첫 국가였다. 이러한 독립의 과정을 노래 혁명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는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포함한다. 이는 에스토니아의 민족주의자이자 예술가인 하인츠 발크가 1988610부터 11일까지 탈린 노래 축전에서 벌어진 대규모 야간 시위에 대해 기사를 쓴 것에서 시작되었다. 에스토니아는 19881116일 자치를 주장했고, 리투아니아는 1989518, 라트비아는 1989728일 자치를 주장했다. 리투아니아가 1990311일 독립을 선언했고, 19일 후인 330일에는 에스토니아가 독립으로의 변환기에 들어섰다고 선언했다. 라트비아는 199054일 독립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 선언은 소련이 거부하면서 마찰이 빚어졌다. 1991년 초 라트비아에서 바리케이드 사건이라 불리는 공산주의 세력의 탄압 운동, 그리고 리투아니아의 1월 사건 등이 대표적 예였다. 그러나 8월 쿠데타 이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완전 독립을 주장했고, 더 이상 통합되지 못한 소련군은 199196일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2)카프카스 지역

                                                                 198949일 트비리시 학살의 희생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조지아와 북캅카스 지역은 민족 갈등과 분리주의 운동으로 오랫동안 신음했다. 198949일 소련군은 트비리시의 시위자들을 잔혹하게 탄압하였다. 198911월 조지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1921년 러시아의 침공과 지속되는 대량학살식 점령을 공식적으로 비난했다. 1991년부터 약 1년간 민주주의 활동가였던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가 대통령으로 복무했다. 그는 조지아의 독립을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러시아는 조지아의 독립 주장 국가인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아를 지지하였고, 러시아는 제1차 체첸 전쟁에서 조지아가 체첸 반군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조지아를 비난했다. 이후 쿠데타로 공산주의자인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가 대통령으로 집권했지만 2003년 장미 혁명으로 그는 권좌에서 물러났다.



 

아르메니아에서는 독립 투쟁이 폭력을 동반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서로 맞섰다. 아르메니아는 이후 군사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아르메니아에서 이루어진 선거는 논란이 되어 정부의 부패가 드러나게 되었다. 아르메니아의 독립은 19911221일 이루어졌지만 이후에도 호르자반의 부패는 이어졌고, 세르지 사르키샨이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아르메니아의 군대의 발전에 기여했고, 아르메니아에 민주주의적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친서구적 성향을 지닌 아제르바이잔 인민당의 엘치베이가 첫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엘치베이가 아제르바이잔 원유 생산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독점하려 하고 터키 및 유럽에 더욱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러시아와 이란이 지원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그는 축출되었다.[70] 무탈리보프가 권력의 핵심인물로 떠올랐으나 그는 부패, 아르메니아와의 전쟁 패배, 그리고 정치 구조의 미완성으로 축출되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다음 대통령으로 집권해 2003년 아들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견고한 동맹국으로 남은 아르메니아와는 달리 2008년 조지아 전쟁 이후 아들 일함 알리예프는 터키와 서유럽 국가들, 그리고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며 러시아와의 유대는 약화시키고 있다

 

(3)체첸


                                                                                                  199412월 체첸 그로즈니에서 기도 중인 여성들


                                                                                         1차 체첸 전쟁[19941211~ 1996831]

체첸의 조하르 두다예프 장군은 발트 3국의 방식을 차용해 반공주의 정당을 결집시켜 체첸의 민주화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이후 체첸 공화국은 공산당이 선출하는 대통령제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199111월 체첸 대선에서 조하르 두다예프는 압승을 거두어 체첸 대통령이 되었고, 그는 같은 해 체첸-잉구샤 지역을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으로 선포하고 독립을 주장했다. 잉구샤 공화국은 체첸과 결별하기를 원했고, 조하르 두다예프 대통령은 이를 허용했다. 그러나 체첸이 원유 사업에서 러시아를 배제시키려고 하자 보리스 옐친은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쿠데타를 지원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에 러시아는 체첸을 침공해 제1차 체첸 전쟁을 일으켜 199412월 체첸을 포위하려고 했으나, 체첸군은 무기와 병력 몇에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산악 지역에서의 게릴라전과 뛰어난 습격전을 통해 러시아군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결국 1996년 보리스 옐친 정부는 체첸과의 휴전협정에 들어가 1997년 러시아-체첸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군의 피해는 공식적으로 5,732명이지만 다른 총계치는 3,500명에서 7,500명에 이르고 가장 높은 수치는 14,000명에 이른다

 

8. 기타 세계의 변화

(1)아프리카

아프리카 지역에 남아있던 공산국가들에는 앙골라, 모잠비크 등이 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1990년부터 1991년 사이에 민주화를 실현했지만, 앙골라와 소말리아, 모잠비크 지역에서는 내전이 발발했다. 앙골라의 경우 1991년 비세세 협정을 통해 다당제 선거 도입을 약속했지만[ 1992년 선거에 불복해 2002년까지 내전이 지속되었다. 모잠비크의 경우에도 1992년 로마 평화 협정을 체결해 공산주의와 비공산당 계열의 연립 정부 수립을 합의했다.

 

(2)오세아니아

오세아니아의 바누아투는 소련, 리비아를 비롯하여 사회주의 국가들과 친한 친사회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었던 월터 리니의 통치를 받았으나, 1991년에 물러나면서 월터 리니의 독재가 종식되었다.


1989년 혁명과 국영자본체제 붕괴[동유럽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날짜:

198964- 19911226

지역:

유럽 및 구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

원인:

국영자본체제(국가자본주의 체제), 권위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의, 부정부패, 소련의 군사 점령, 경제 붕괴, 집단살해, 철의 장막, 종교 박해, 권력 남용, 강제노동, 숙청, 가난, 테러 등

목적:

경제적 자유와 민영자본체제, 유럽 통합, 자유 선거, 자본주의, 언론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인권, 노동권, 민주주의 등

 

종류:

시위 등 다양함

 

결과:

동구권의 몰락 폴란드, 동독,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평화적 정권 교체.

냉전의 종결

독일의 재통일

1989년 루마니아 혁명이 유혈 혁명이 됨

소련의 해체

소련의 초강대국 지위 몰락

1991년 인도 국민 회의가 신자유주의를 채택

러시아 연방이 탄생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

유고슬라비아 해체 및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

중국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 1989년 톈안먼 사건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해산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 철수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회의론 대두

유럽 통합의 진전

성별 선택 낙태로 동유럽의 성비 변화

동구권에 인터넷이 확산됨

동구권에서 소비자 운동이 대두함

예멘의 통일

발트 3국의 재독립

몽골, 아프가니스탄, 베냉, 예멘, 모잠비크, 앙골라, 콩고 공화국, 소말리아에서 공산주의 붕괴

북한의 고난의 행군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 종결

미국의 문화가 동구권 국가에 전파됨

NATOEU에 동구권 국가 가입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의 시장 경제 도입

미국이 전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발돋움

신세계 질서

소비에트 전후 충돌의 첫 발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종결

   

 

 

                                                           Red stars are removed as communism relinquishes its grip in central Europe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a.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국영자본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

b.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국민의(民有,Of the people), 국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국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聯邦共和國).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공화국 대통령, 국가주석이나 입헌군주국 수상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 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다.

[미합중국 수정 제22조(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
*이 수정조항은 1947년 3월 24일에 발의되어 1951년 2월 27일에 비준됨
제1절 누구라고 2회 이상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으며 누구라도 타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임기 중 2년이상 대통령직에 있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한 자는 1회 이상 대통령직에 당선될 수 없다
다만, 본 조가 효력을 발생하개 될 때에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 자가 잔여임기 중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

                                       

마지막 동독의 국가평의회 의장(국가원수)   에곤 크렌츠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Looking back on his first visit to Moscow as communist leader, Egon Krenz believes he was betrayed

에곤 크렌츠(Egon Krenz, 1937319~ )는 동독의 공산주의 정치가이며, 19891018일부터 123일까지 동독을 단기간 서기장으로서 통치하였다.

 

1.초기 생애

지금의 폴란드에 속하는 콜베르크에서 태어났으며, 1944년 동부 포메른에서 독일인들이 추방당했을 때 그의 가족은 담가르텐에 재정착 하였다

 

2.정치 경력

1955년 통일사회당에 입당하였다. 그의 경력을 통하여, 크렌츠는 통일사회당과 공산당 정부에서 다수의 요직에 있었다. 그는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에른스트 텔만 공병 기구의 지도자를 지내다가, 1973년 공산당 중앙 위원회의 단원이 되었다. 또한 국민의회의 단원(1971~90)을 지내면서, 1981년까지 그 최고 회의 간부회의 회원을 겸하였다. 1974년부터 1990년까지 공산당 청년 운동 단체인 자유 독일 청년단의 지도자, 1981년부터 1984년까지 국가의회의 의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1983년 공산당 정치국에 가입하여 중앙 위원회의 서기가 되었다. 1984년 국가의회에서 에리히 호네커의 부서기가 되었을 때 최고 현저로 올랐다. 동시에 파울 베르너를 통일사회당 지도자력에서 비공식적 두 번째 당원으로 대신하여 자신을 국가에서 두 번째로 가장 세력있는 정치인으로 만들었다.

 

크렌츠는 19896월 당시 자를란트의 사회민주당 주의장 오스카어 라퐁텐의 초청으로 처음으로 서독을 방문하였다. 소문에 의하면, 서독의 사회민주당원들은 인상을 받지 못하였다. 그의 방문 기간 동안에 그와 동행하던 사회민주당의 지휘 당수 브리기테 슐테는 크렌츠를 "완전히 냉담한 인간"으로 묘사하였다.

 

3.동독의 지도자

동독의 공산당 통치에 대항하며 항의들이 일어난 후에 호네커는 19891018일 강제로 사임하였다. 호네커의 의견에서 크렌츠는 새 통일사회당 중앙 위원회의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국민의회에서 연설하는 크렌츠

수많은 항의들이 일어남에 불구하고, 크렌츠는 국민의회에 의하여 국가의회와 국립국방의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국회의 40년 역사에서 두 번째로 투표가 만장 일치가 아니었다 - 26명의 부의장들이 대항하는 투표를 하였고, 26명은 기권하였다. 그날 밤 국립 방송에서 크렌츠는 민주적 개혁을 약속하였다.

 

117일 크렌츠는 정치국의 3분의 2와 함께 빌리 슈토프 총리와 그의 내각의 사임을 인정하였다. 그렇지만 중앙 위원회는 크렌츠를 당서기장 직위에 재선출하였다. 연설에서 크렌츠는 호네커를 비판하는 판단을 시도하였다.

 

개혁의 약속에 불구하고, 통치에 공동의 반대가 지속적으로 번창하였다. 형세를 막기 위하여 서독으로 탈출하는 동독인들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을 재개하는 위임을 하였다. 새롭게 형성된 정치국은 장관 회의의 결의의 방향에 의하여 서부로 여행을 위한 새 규정을 도입하는 데 동의하였다.

 

                                  "But who's asking us, Egon?" Three thousand people protested against the communist leader in Berlin on 24 October 1989

4.베를린 장벽의 개방

119일 저녁, 정치국 단원 귄터 샤보브스키는 중앙 의원회의 정식 결과를 발표하였다. 동독 정부가 국경의 개방을 인정함에 불구하고, 샤보브스키에 의한 오해스러운 언론이 수많은 동독인들이 서베를린으로 자발적인 탈출을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갑작스럽고 극적인 베를린 장벽의 개방이 사회민주당 통치의 정치적 붕괴로 이끌었다.

 

1118일 크렌츠는 새 연합 정부에서 욕을 하였다. 선서 대신, 단순한 악수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12월의 첫날 통일사회당 중앙 위원회의 전체와 정치국 단원들이 사임하였고, 노동 위원회는 당이 그 자리에서 지도력의 임무들을 취하였다. 기독교 민주연합과 자유민주당은 소위의 민주권을 떠난다고 선언하였다. 기독교 민주연합 최고 회의 간부회는 크렌츠를 국가의회와 국립국방의회의 의장직을 사임하도록 권유하였다. 127일 크렌츠는 모든 요직을 사임하였다.

                  The Berlin Wall was opened by accident on 9 November, when an East German Communist Party official announced that anyone could leave .


5.재판과 투옥

1997년 크렌츠는 냉전 범죄들, 특히 베를린 장벽을 넘어 공산주의 통치의 탈출을 시도한 4명의 동독인들을 학살한 죄로 징역 6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또한 다른 범죄적 위반과 함께 선거 사기에 의한 고발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재통일된 독일 국가의 법적인 틀구조가 전 동독에 일어나는 것을 적용하지 않았다는 호소, 주장하였다. 또한 전 동독의 공무원들의 기소는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비에트 연방 대통령이 독일의 재통일을 이끈 회담들에 의하여 주어진 개인적 동의서의 위반이었다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1999년 평결이 확인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크렌츠는 자신의 유죄 판결을 "승자의 정의""법정에서 냉전"으로 묘사하였다.

 

크렌츠는 자신의 징역살이를 베를린-슈판다우 교도소에서 보냈다. 그는 20031218일에 석방되었고,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 디르하겐에서 조용히 퇴직 생활을 하고있다. 그는 그의 선고 2006년까지 가석방으로 남아있었다.

   

*동독 지도부

동독 지도부는 몇 가지 정무공직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독일민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건국이 되기 전인 1948년 소련은 자신들이 점령한 독일 영토에 사실상의 정부인 독일경제위원회(DWK)를 설치하고 하인리히 라우를 그 의장으로 앉혔다.

 

1949107일 독일민주공화국(이하 동독)DWK로부터 정부 기능을 이양받았다.

 

건국 이후 1989년 가을까지 동독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은 사회주의통일당(SED) 서기장이었다(1953-1976년에는 제1서기 직함). 서기장이 장악한 공산주의 정당의 당권이 곧 정부를 장악할 수 있는 절대권력과 마찬가지였다.

 

명목상의 국가원수는 처음에는 대통령이었다. 1960년 빌헬름 피크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 대통령직은 폐지되고 국가평의회라는 집단지도기구가 설치되었으며 대개 서기장이 국가평의회 의장을 겸했다.

 

정부수반은 각료평의회 의장이었으며, 대개 총리라고 통칭되기도 했다.

 

그 외에 중요한 기구로는 입법부에 해당하는 인민의회의 수장인 인민의회 의장이 있다. 1960년부터 동독 국가방위평의회가 동독의 모든 무장병력에 대한 최고 지휘권과 전쟁시 무제한적 권위를 부여받음이 정해졌다. 국방평의회 평의원은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 및 정치국원들로만 채워졌으며, 국방평의회 의장은 서기장이 겸했다.

 

1989년 평화혁명(디 벤데)으로 동독의 정치적 지형은 급변했다. 사회주의통일당은 정치적 독점을 포기해야 했고 국방평의회와 국가평의회는 폐지되었다. 유일하게 존치된 인민의회 의장이 이후 동독이 완전히 멸망하기 전까지 국가원수직을 대행했다. 1990103일 동독이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가맹, 흡수통일되는 방식으로 멸망하고 독일은 재통일되었다.

 -실권자: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당수(중앙위원회 서기장)

-명목상 국가원수:대통령(국가평의회 의장)[사회주의 통일당 당수(중앙위원회 서기장) 겸직]

-정부수반: 각료평의회 의장(총리)

-입법부 수반: 인민의회 의장

-군부수반: 국방평의회 의장[사회주의 통일당 당수(중앙위원회 서기장) 겸직]

 

 

*독일사회주의통일당(獨逸 社會主義統一黨)

독일사회주의통일당(獨逸 社會主義統一黨, 독일어: 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SED)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이 독일의 소련군 점령 지구 내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을 강제로 통합하여 동베를린에서 1946년에 창설된 정당으로, 1990년 독일민주공화국 총선거때까지 존재했다. 독일의 재통일 후 민주사회당(독일어: Partei des Demokratischen Sozialismus, PDS)로 개편되었다가, '슈뢰더의 정책들이 신자유주의에 질질 끌려다니고 있다'며 독일 사회민주당을 탈당한 오스카어 라퐁텐 등과 함께 연합해 좌파당으로 통합되었다.

 

19464월에 독일의 소련 점령지구로 독일 공산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이 합병하여 성립했다. 그리고, 서쪽 점령지구의 독일 사회민주당은, 그대로 존속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베를린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찬반을 결정하는 투표를 했다. 그러나 동베를린에서는 소련군에 의해서 투표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실제 투표를 할 수 있던 것은 서베를린의 당원뿐이었다. 그 결과, 공산당과의 통일에 찬성한 표는 불과 12%였기 때문에 통일사회당 성립 후에도 일정기간 사회민주당이 존속했다.(서베를린의 사회민주당이 동 베를린에서도 활동이 허용되고 있었다. 한편으로 서베를린에는 서베를린 통일사회당도 존재했다)

 

통합 후, 최초에는 지도부의 반씩이 구 공산당과 구 사민당이었지만, 구 독일 사회민주당계의 당원은 서서히 제명되어 실체는 공산당 이었다. 단지 1946년 당시 존재하고 있던 정당으로서는 독일 최고인 독일 사회민주당은, 전국에 강력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 하는데 있어서의 이용가치는 매우 높았다고 여겨진다.(통합 당시, 공산당원이 60만명에 비해, 사회민주당은 68만명이었다. 사회민주당 쪽이 우세하였다.)

 

1949년 소련 점령지구가 독일 민주 공화국이 되면서, 국가를 지도하는 당으로서 사실상의 일당 독재체제를 시행해, 동독을 지배하였다.

 

1989년의 민주화와 통일로 정권을 잃어, 통일사회당/민주사회당(SED/PDS)을 거쳐 민주사회당(PDS)으로 개명했다. 후에 독일 사회민주당을 탈당한 오스카어 라퐁텐 등과 함께 연합해 좌파당으로 통합되어 연방 의회 제 4당으로서 일정한 세력을 유지해, 특히 구 동독에서는 뿌리 깊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 외에 독일 사민당의 우경화로 인해 구 서독 지역에서도 지지를 얻고 있다.

 

                                               How life used to be: In October 1989 Lenin's statue still towered over Lenin Square in East 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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