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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무가베 전 짐바브웨 대통령 사망 본문

남부 중앙아프리카 지역/짐바브웨(Zimbabwe)

무가베 전 짐바브웨 대통령 사망

CIA bear 허관(許灌) 2019. 9. 7. 08:03


95세를 일기로 사망한 로버트 무가베 전 짐바브웨 대통령.

세계 최장기 독재자로 불렸던 로버트 무가베 전 짐바브웨 대통령이 95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진행자)남아프리카 국가죠.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전 대통령이 사망했군요.

기자) 37년간 짐바브웨를 통치했던 로버트 무가베 전 짐바브웨 대통령이 6일 싱가포르의 한 병원에서 95살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무가베 전 대통령은 아프리카 독립 투쟁의 상징적 인물이었지만 전 세계 최장기 독재자라는 오명도 갖고 있는데요. 에머슨 음낭가와 짐바브웨 대통령은 6일, 트위터를 통해 무가베 전 대통령 사망 소식을 알렸습니다.

진행자) 로버트 무가베 전 대통령, 짐바브웨 건국의 아버지로 불렸던 인물이죠?

기자) 맞습니다. 짐바브웨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의 식민지였는데요. 교사였던 무가베 전 대통령은 백인 정권 지배에 항의하며 짐바브웨 독립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이 일로 10년간 수감 생활도 했는데요. 이후 무장 투쟁을 전개한 끝에 1980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에 성공해 짐바브웨의 건국을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부정 선거와 무제한 대통령 연임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하는 등 37년 간 짐바브웨를 장기 집권하며 '사상 최악의 독재자'라는 오명을 얻었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무가베 전 대통령이 사망한 곳이 짐바브웨가 아니라 싱가포르였네요?

기자) 네, 무가베 전 대통령은 2년 전인 2017년 군부 쿠테타로 축출된 후 망명 생활을 해왔습니다. 무가베 전 대통령이 실각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41살 연하의 부인에게 권력을 넘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군부의 반발로 사임하기로 했는데요. 사임하는 대신 가족 면책 특권 등을 보장받았습니다.

진행자) 그 후임이 현 음낭가와 대통령이죠?

기자) 맞습니다. 무가베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데요. 음낭가와 대통령은 이날 무가베 전 대통령 사망 소식을 트위터에 알리며 “짐바브웨 건국의 아버지이자 전 대통령 무가베의 사망 소식을 알리게 돼 대단히 슬프다”고 적었습니다.

진행자) 하지만 무가베 전 대통령 가족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많지 않습니까?

기자) 네, 특히 무가베 전 대통령의 부인은 각종 사치품을 사들이며 초호화스러운 생활을 했는데요. 하지만 반면 무가베 전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짐바브웨는 실업률이 80%를 넘어서고 기대수명은 60세에 불과한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로 전락했습니다.

진행자) 짐바브웨 국민들은 무가베 전 대통령 사망 소식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기자)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 시민들 사이에서는 엇갈린 반응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현재 짐바브웨의 상황이 더 악화하고 있다며 무가베 통치 시절을 회상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하지만 무가베 전 대통령이 자신의 욕심으로 짐바브웨를 파탄으로 이끌었다며 그의 죽음이 슬프지 않다며 대부분 싸늘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짐바브웨 공화국


짐바브웨 공화국(Republic of Zimbabwe 리퍼블릭 오브 짐바브웨이)은 아프리카 남부 잠베지 강과 림포포 강 사이에 있는 내륙국이다. 1967년에 영국으로부터 로디지아라는 이름으로 독립했으며 1980년에 현재의 짐바브웨로 새롭게 독립하였다. 남쪽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서쪽으로 보츠와나, 북쪽으로 잠비아, 동쪽으로 모잠비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1.역사

짐바브웨의 첫 주민들은 수렵·채집을 하던 호이산족이었다. 하지만 반투족의 대이동이 시작된후 호이산족은 반투족으로 대체되었다. 9세기와 13세기 사이에는 짐바브웨 남부에 쇼나족들이 나라 이름의 근원이 된 그레이트 짐바브웨 석조 건축물이 세워졌다. 19세기 초에는 마타벨레인들이 옮겨와 이 지역을 장악하였다.

 

1888년에는 세실 로즈가 창립한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가 마타벨레 왕국으로부터 광업 이권을 받아내 로즈의 이름을 따 로디지아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이 지역에 영국인들의 정착이 시작하였다. 이들의 수가 많아지자 분쟁이 일어나 결국 마타벨레 왕국과 영국인들간의 전쟁으로 이어져 영국인들이 승리하였다.

 

1923년에는 영국 연방의 자치 식민지인 남로디지아가 되고 1953년에는 북로디지아(현재의 잠비아)와 니아살랜드(현재의 말라위)와 함께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을 구성하지만 1963년 잠비아와 말라위가 독립하면서 로디지아라는 이름으로 영국의 직할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다 1965년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 전선 당이 소수 백인이 장악한 국회에서 모든 의석을 차지하고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영국은 이를 위법이라 선언하고 제재를 가하였고 이웃 국가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마저도 로디지아의 일방적인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다.

 

1970년대에는 이언 스미스가 이끄는 소수 백인 지배에 대항하는 ZANUZAPU 등의 반군의 게릴라 투쟁이 심해져 많은 사상자를 냈다. 1975년 모잠비크와 앙골라가 독립하면서 지역 정세가 바뀌자 미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도 로디지아 정부를 설득하여 결국 1979년 짐바브웨 로디지아라는 과도기를 거쳐 영국의 식민지로 복귀했으나 1년 후, 1980418일 다수인 아프리카인이 지배하는 짐바브웨로 독립하였다.

 

ZANU를 주도한 로버트 무가베는 초대 총리에 거쳐 1988년 대통령으로 취임, 수차례 재선하면서 2017년까지 장기집권하고 있다. 무가베는 1997년 총파업으로 궁지에 몰리자 백인 농장 몰수 정책을 실시하고 2005년 무람바츠비나 작전(Operation Murambatsvina 오퍼레이션 무람바츠비나[*])을 통해 빈민굴의 무허가 건축물을 철거하여 도시 빈민들의 주거 공간을 빼앗는 등 반대파들을 겨냥하는 것으로 비난받는 정책을 폈다.

 

2008년 짐바브웨는 콜레라 사망자가 500명에 달하기 시작하면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짐바브웨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인근 국가들로 퍼지기 시작했다. WHO는 짐바브웨 콜레라 사태의 근본원인은 훼손된 배관 시설의 박테리아이며, 물을 통해 전염되고 있다고 밝혔다.

 

2017년 쿠데타로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이 축출되고, 에머슨 음낭가과가 대통령이 되었다.

    

2.짐바브웨의 행정 구역

짐바브웨는 8개 주와 2개 시로 구성되어 있다.

1.불라와요

2.하라레주

3.마니칼랜드주

4.중앙마쇼날랜드주

5.동마쇼날랜드주

6.서마쇼날랜드주

7.마스빙고주

8.북마타벨랜드주

9.남마타벨랜드주

10.미들랜즈주



3.경제

2008년 미화 1달러에 대한 짐바브웨 달러화의 가치는 무려 200억 달러이다. 이렇게 화폐가치가 워낙 빠른 속도로 떨어지다 보니 지폐에 올 해 말까지만 사용하도록 유통기간을 표시할 정도이며, 또한 짐바브웨 정부는 돈을 한꺼번에 찾지 못하도록 하루 인출 금액을 1000억 짐바브웨 달러(미화로 5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로 제한하고 있다. 이렇게 화폐가치가 땅에 떨어지면서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연평균 물가 상승률이 220%에 이르렀다.

 

2009924(한국 시각), KBS 뉴스 보도에 따르면 짐바브웨 정부는 자국의 화폐(짐바브웨 달러)를 없애고 미국과 유럽 등지의 다른 나라 화폐를 통용시킴으로써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지폐만이 통용되고 있어 거스름돈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였으며, 농촌 지역에서는 화폐 사용 대신에 물물교환이 거래수단이 되어가고 있다. 게다가 주요 공산품 가격이 여전히 주변 국가들의 3~4배에 달하는 상황이어서 안정이 깨질 것처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짐바브웨 정부는 불편하긴 해도 짐바브웨 내의 경제가 제 궤도에 오를 때까지 자체 화폐 사용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짐바브웨 정부는 당분간 자국의 화폐를 대신하여 US 달러로 화폐를 대체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짐바브웨 달러화의 가치는 수직하강을 하고 있기 때문으로, 2010년에는 달걀 한개가 3500억 짐바브웨 달러, 1조 짐바브웨 달러로 달걀 3개조차 구매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2015611(현지시간) 짐바브웨 중앙은행은 자국의 화폐를 폐지하고 미화로 교체한다고 밝혔다. 35000조 짐바브웨달러가 미국 1달러로 교체된다.


-짐바브웨 달러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통용이 정지된 상태이다. 현재는 미국 달러, 남아프리카 공화국 랜드, 보츠와나 풀라, 파운드 스털링, 유로, 인도 루피, 오스트레일리아 달러, 런민비, 일본 엔, 대한민국 원 등이 대신하고 있다. 미국 달러는 정부의 공식적인 통화로 지정되어 있으며 거래 목적으로 사용된다

4.지리

짐바브웨는 남아프리카에 자리잡은 내륙국이며 남쪽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서쪽으로 보츠와나, 북서쪽으로 잠비아, 동쪽으로 모잠비크와 접한다. 또한 나미비아는 짐바브웨랑 서쪽에서 딱 한 부분 만난다. 북서쪽 국경은 잠베지 강으로 나뉜다. 짐바브웨의 가장 높은 곳은 냥가니 산(Mount Nyangani)이며 해발 2,592 m이다. 동쪽 부분에는 냥가니 국립 공원이 있다. 가장 낮은 곳은 룬데 강, 사베 강과 접한다. 빅토리아 호수는 가장 중요한 관광지이다. 강수가 불규칙적인 탓에 가뭄이 잦으며 폭풍과 같은 기상 피해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

 

5.환경 문제

가장 중요한 환경 문제는 무분별한 삼림 채벌으로 인한 토양 침식과 화전민으로 인한 대기 오염, 수질 오염 등이 있다. 또한 짐바브웨 일대에서 가장 많은 개체수를 누렸던 검은 코뿔소가 사냥으로 인해 개체 수가 급감하면서 이 또한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외에도 광물 채취와 이에 대한 대책 부재로 폐기물이 처리되지 않고 방치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6.기후

국토의 대다수가 열대기후이지만 고도차이가 나서 기후가 달라지기도 한다. 11월에서 3월까지가 우기로서 비가 잦다. 짐바브웨 국토의 대다수가 고원 지대이고 이 고원에도 고도 차이가 나다보니 산 지대 인근에는 비가 많이 오는 경향이 나타나며 동쪽 지대에 그래도 비가 잦은 편이다. 짐바브웨는 전국이 사바나로 덮여 있고 이 나라의 별명은 '동물의 왕국'이다. 이렇게 짐바브웨가 동물의 왕국이다 보니, 많은 동물학자들이 이곳을 찾는다.

 

7.사람과 언어

20002월의 헌법안의 41항에 보면 "공용어는 영어, 쇼나어, 은데벨레어, 벤다어, 남뱌어, 샹간어, 칼랑가어, 수투어, 퉁가어이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동조 2항에 보면 "영어는 기록 언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위 헌법안은 2000212일과 13일에 걸쳐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54.68%가 반대하여 부결되었다. 현행 헌법은 일부 수정을 하여 20050914일에부터 효력이 발생한 것인데 위 2000년 헌법안에 포함된 언어에 관한 4조는 폐기되었다. 다만,‘판사의 자격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는 82조와 87조에 영어는 하나의 공식어다.”는 규정만 있을 뿐이다.

 

8.종교

짐바브웨는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기독교, 이슬람, 전통종교를 믿고 있다. 짐바브웨 기독교 교파로는 개신교(최대교단 짐바브웨 하느님의 성회), 짐바브웨 성공회(남아프리카 성공회에 속해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 아프리카 토착 기독교(아프리카 사도교회)가 있으며, 전 종교인의 61.7%가 기독교인이다. 이슬람은 인도사람과 렘바족이 믿고 있으며, 전 종교인의 1.6%를 차지한다. 전통종교는 전 종교인의 32.6%가 믿는다.

 

9.대한관계

로디지아로 독립한 후 이 나라는 국제적으로 제재 대상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이 나라를 승인하지 않았다. 1980년 짐바브웨가 건국되면서 대한민국은 곧바로 짐바브웨를 승인하였으나, 이 나라는 곧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만 수교하고 대한민국과의 외교관계는 수립하지 않았다. 총리와 대통령이던 로버트 무가베는 1980년대에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하는 등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계속하여 대한민국과의 수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한민국과는 경제·문화 교류를 하였으며, 1988년 서울 올림픽에도 참여하였다. 양국은 수교 이전부터 비교적 활발한 무역 거래를 하였으며, 1994년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짐바브웨는 남북한 동시수교국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1995년 주 짐바브웨 대사관을 개설하였으나, 북한은 1998년 주 짐바브웨 대사관을 폐쇄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과의 관계는 꾸준히 증가되어 2006년 한국 교민 127, 체류자 70명이다.

 

10.스포츠

축구는 짐바브웨에서 가장 인기있는 종목이다. 국가대표팀은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본선에 세 차례 진출했고, COSAFA 컵에서 네 차례, CECAFA 컵에서는 한 차례 우승한 이력이 있다. 올림픽 수영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커스티 코벤트리가 이 나라 출신이다.



짐바브웨 전 독재자 무가베 95세 사망

95세를 일기로 사망한 로버트 무가베 전 짐바브웨 대통령


세계 최장기 독재자 중 한 명이었던 로버트 무가베 전 짐바브웨 대통령이 95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에머슨 음난가그와 짐바브웨 대통령은 오늘(6일) 트위터를 통해 이 같은 소식을 전하고, “해방의 아이콘(상징물)”이자 국부인 그의 빈 자리에 “극도의 슬픔을 느낀다”는 애도 성명을 내놨습니다.

무가베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이후 싱가포르의 의료 시설에서 노환으로 인한 각종 치료를 받다가 결국 숨진 것으로 주요 매체들은 전했습니다.

무가베 전 대통령은 영국에 맞서 독립 투쟁을 주도한 인물로, 짐바브웨가 독립한 1980년부터 지난 2017년까지 최고 통수권자 자리를 지키며 ‘철권통치자’로 불렸습니다.

물러날 당시 나이가 93세여서, 세계 최고령 수반으로도 꼽혔습니다.

무가베 전 대통령은 장기간 이어진 정정 불안 끝에 지난 2017년 발생한 쿠데타 이후에도 사임을 거부하다 일주일 만에 하야했습니다.

무가베 정부가 이끈 짐바브웨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영국 신문 ‘가디언’은 “무가베의 집권 기간 짐바브웨의 실업률은 80%를 넘었고 기대수명은 60세로 전 세계 최저국가가 됐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무가베 전 대통령의 가족과 측근들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지속하며 지탄받았습니다.

VOA 뉴스


로버트 게이브리얼 무가베(영어: Robert Gabriel Mugabe, 1924221~ 201996)는 짐바브웨의 정치가이다.

 

19804월 짐바브웨가 정식으로 건국되면서 총리를 맡아 실권을 가졌으며, 1987년부터 총리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이 되어 2017년까지 30년 넘게 짐바브웨를 통치 했었다. 그러나 2008년과 2013년 대통령 선거에 대해 정통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1.생애

솔즈베리(하라레) 부근의 농촌에서 태어났고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였던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세운 학교를 다닌 후, 남아프리카 연방의 포트헤어 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1)정치 활동

학창시절부터 흑인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며, 가나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가나가 영국에서 독립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곧바로 로디지아로 돌아와 독립 운동에 참여하였다. 처음에는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 연맹(ZAPU)에 참여했으나, 결별하고 1963년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ZANU) 창립에 참여하여 간부가 되었다. 그러나 1964년 과한 언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10년간 수감되었다.

 

(2)총선거 승리

1974년 가석방되었고 ZANU 의장에 취임하였다. 1976년 그가 이끄는 ZANU와 조슈아 은코모가 이끄는 ZAPU가 연합하여 애국전선(PF)을 결성했으며, 애국전선은 모잠비크 등 외국에 근거지를 두고 백인 정권에 대해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백인인 이언 스미스 총리는 애국전선을 배제하고 국내의 흑인 온건세력과 협상하여 1979년 총선을 치렀다.

 

이에 애국전선은 총선 무효화를 주장하여 1980년 다시 총선이 치러졌으며, 그가 이끄는 ZANU가 최다 의석을 확보, 그는 그 해 4월 건국된 짐바브웨의 초대 총리로 취임했다.

 

(3)총리 재직 시절

초기에 무가베는 은코모가 이끄는 애국전선과 연정을 구성했고, 백인들의 정치참여도 보장하며 유화적인 정책을 취했다. 경제 개발을 위한 정책을 내놓고 흑인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982년 은코모를 연정에서 축출했으며, 흑인들간의 민족 대립으로 혼란에 빠졌으며, 짐바브웨 경제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하던 백인들은 짐바브웨를 떠나며 국가 경제는 파탄상태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무가베는 차츰 독재 정책을 취하며 국내외의 비난을 받았다.

 

(4)대통령 재임시

1987년 자신의 ZANU와 은코모가 이끌던 애국 전선을 통합하여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 - 애국 전선(ZANU-PF)으로 개편하였고, 다른 당들의 활동을 불법화하며 1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나라 정체를 의원내각제에서 1당 독재의 대통령제로 바꾸어, 총리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에 모든 권한을 집중시키도록 하며 그 자신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후 공산주의자로써, 마오쩌둥의 계획경제체제를 받아들이고, 1990년대에는 일당독재의 마르크스주의 국가로 건설하려고 했으나, 국제 사회의 압력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903월과 19963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80~90%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국제 여론의 악화로 2000년 총선에서는 야당의 참여를 허용하였으며, 모건 창기라이가 이끄는 민주변화운동(MDC)이 약진하였다. 그런 가운데 그 무렵 그는 백인들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국가 경제를 더 큰 혼란에 빠졌으나 한편 백인 대지주들의 착취에 시달리던 흑인 빈농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어 빈농들에게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흑인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20023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모건 창기라이와 격돌했으나, 다시 다수표를 얻으며 당선되었다. 짐바브웨의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전락하였으나, 그와 그의 부인 그레이스는 호화 생활을 하며 외국으로 많은 재산을 빼돌려 물의를 빚었다. 각국의 경제 제재와 식량난으로 초인플레이션 상황에 직면하자 여러 차폐 화폐개혁을 실행했으나 경제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2007년 여당과 야당의 합의하에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임기를 6년에서 5년으로 변경하였고, 이후 20083월 총선과 대선을 맞이하였다.

 

2.2008년 대통령 선거

총선에서는 창기라이가 이끄는 민주변화운동이 최다 의석을 확보했고, 대선에서는 창기라이가 47.9%의 득표율로 43.2%를 얻은 무가베를 꺾었다. 이에 그 해 62차 투표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무가베측은 창기라이의 선거운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하였다. 창기라이는 선거에 부정이 개입되었다며 선거 무효를 주장했으나, 무가베는 선거를 강행, 창기라이가 불참한 가운데 85.5%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5번째 대통령 임기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국제 사회에서는 이 선거가 무효이며, 짐바브웨에 대한 제재 조치를 강화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국내외의 비난에 직면한 무가베는 창기라이측과의 협상을 통해 헌법을 개정하여 총리직을 부활시키고 창기라이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3.2013년 대통령 선거

2013731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61.9%의 지지로 재선에 성공했다. 모건 창기라이 후보는 득표율 33.9%2위에 올랐다. 그러나 창기라이의 민주변화운동은 선거에 부정이 개입되었다고 주장하며, 보츠와나 정부는 보츠와나 선거감시단이 여러 부정행위를 목격하였다며 남부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 회의에서 선거 검증이 필요하다는 점을 제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1] 선거 결과가 인정되면 로버트 무가베는 5년 임기를 더 수행하게 되어 8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4.군부 쿠데타로 인한 축출 

20171115, 무가베 대통령이 영부인인 그레이스 무가베에게 정권을 이양 하기 위해 군부 출신 부통령 에머슨 음낭가과를 경질한 것을 원인으로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 구금되었다. 무가베 전 대통령은 퇴진을 거부하였지만 1121일 쿠데타로 인하여 하야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