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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마지막 황제 溥儀 사망 본문

Guide Ear&Bird's Eye/중국 동북3성

중국 마지막 황제 溥儀 사망

CIA bear 허관(許灌) 2018. 10. 20. 22:26


                   만주국 황제 시절, 일본군과 만주국 대신들에게 둘러쌓인 푸이(계단 가운데 안경 쓴 사람). 1933년 가을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 지금의 長春).


 1967년 10월 17일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 아이신자오뤄 · 푸이[愛新覺羅 · 溥儀(보의)]가 베이징(北京)에서 사망했다. 향년 61세.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는 청나라를 멸망시킨 신해 혁명 발발 56주년 일주일 뒤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푸이는 광서제(光緖帝)의 이복동생인 순친왕(醇親王) 재풍(載?)의 아들이다. 1908년 11월 광서제와 자희태후(慈禧太后 : 서태후)가 하루 간격으로 사망하자 불과 2세의 푸이가 제위를 승계하고 부친이 섭정을 맡았다. 즉위한 다음 해 연호를 ‘선통(宣統)’으로 고쳤다.

                                                                               순친왕(좌)과 푸이(우), 푸제(1907년)
1911년 10월 10일 우창(武昌)에서 폭동이 일어나 각 성이 이에 호응하면서 혁명의 격량이 전국을 휩쓸었다. 1912년 2월 12일 청조는 마침내 푸이의 퇴위를 선언하였다. 이로써 260년 동안 중국을 통치해 왔던 청나라가 막을 내렸고 2,000여 년 동안 지속돼온 제정체제 역시 끝을 맺었다.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청조의 신하였던 때문인지 푸이에 대해 각별한 예우를 취했다. 아니면 위안스카이가 내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이유였는지 모른다.

푸이에 대해 퇴위한 뒤애도 황제의 존호 사용을 허용하였으며 외국 군주의 예로 대우하였다. 또한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 외에 자금성(紫禁城), 즉 현재의 고궁(故宮)의 다른 지역은 청 황실의 소유로 하여 그 곳에 거주하도록 했다.

위안스카이 사망(1916년) 후 정국 혼란이 계속되던 1917년 7월 1일 장쉰(張勛) 등 복벽(復?)세력의 추대로 황제 복귀를 선언하였으나 인민들의 거센 반대로 7월 12일 다시 퇴위를 선언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1924년 정변을 일으켜 베이징(北京)을 장악한 펑위샹(馮玉祥)은 그해 11월5일 푸이의 황제칭호를 폐하고 당일로 자금성을 떠나도록 명령했다. 펑위상은 '크리스찬 군벌'로 불리던 인물로 복고주의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던 인물이다.

다음해 톈진(天津)으로 옮겨가 은거 생활에 들어갔다.

1931년 만주사변(9 · 18 사변) 후 푸이는 일본의 호위 아래 동북(東北)지방으로 옮겨갔다. 그는 1932년 3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연출 아래 일본 관동군이 주축이 되어 세운 괴뢰국 만주국의 명목상 최고 지도자 집정(執政)의 위치에 올랐으며 1934년 3월에는 황제를 칭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괴뢰국가의 허수아비 수장이라는 위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만주국 황제에 즉위한 푸이(1934)


                                                                               타임의 표지에 등장한 푸이(오른쪽 위, 1936년 2월 24일)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 8월 17일 일본으로 도망하려다 소련군에게 체포됐다. 도쿄(東京) 전범 재판에 출석 증언하였다.

                                                                                                    푸이와 소련군 장교(1946년)
1950년 공산 중국에 인도된 푸이는 재판을 거쳐 동생인 푸지에(溥杰)와 함께 노동개조를 받다가 1959년 최고인민법원의특사령으로 석방됐다.

푸이는 1964년 정협 제4기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정협 문사자료(文史資料)연구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나의 전반생(我的前半生 )』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푸이와 모택동(사진)

                       저우언라이(周恩來·오른쪽)는 푸이를 각별히 챙겼다. 1960년 1월 22일, 베이징 정치협상회의 접견실. 맨 왼쪽은 푸이의 숙부 자이타오(載濤).


푸이는 1962년 4월 30일에 리셴수(李賢淑)와 재혼, 황제가 아닌 일반 공민으로서 지내다가 신장암으로 사망했다.

말년에 그를 방문한 한 외국인이 과거 황제였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지 않느냐 질문에 대해 그는 “황제, 그 칭호는 나에게 수치심을 주는 칭호이다. 내가 자부심을 갖는 것은 이제 내가 중국 공민이 되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외교적 수사인지 아니면 그의 진정한 본심인지는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푸이의 일생이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1987년 제작된 이탈리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가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기저에는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이탈리아 공산당원인 베르톨루치의 편향된 역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영화를 만들 당시 베르톨루치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구사회의 파시즘 잔재에 환멸을 느끼고 중국 공산당에게서 활로를 찾으려 했다. 푸이가 감옥에서 석방된 뒤 쓴 자서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황제를 평민으로 성공적으로 개조했다’라는 중국 공산당의 주장을 비판없이 수용했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푸이는 말년에 외국인과 만난 자리에서 황제라는 칭호가 수치라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문제가 있다.

‘마지막 황제’ 제작을 위해 막대한 물량이 퍼부어졌다. 이탈리아, 중국, 영국에서 모인 스텝만도 270명이었고, 동원된 엑스트라가 연인원 1만 9,000명에 달했으며 약 9,000벌의 의상제작을 위해 100여명의 인원이 매달렸다. 중국 정부가 물심양면으로 이 영화제작을 지원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영화는 비록 편향된 역사관에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뛰어난 영상미학으로 인해 그 해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음악상 등 9개부문을 석권했다.

중국 공산당의 역사관을 성공적으로 홍보하고 또한 작품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장이머우(張藝謀)가 감독한 ‘영웅’의 전신 격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