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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저족의 역사, 문화와 예술, 전통명절, 세시풍속과 금기 본문

Guide Ear&Bird's Eye/중국 동북3성

허저족의 역사, 문화와 예술, 전통명절, 세시풍속과 금기

CIA bear 허관(許灌) 2019. 10. 12. 21:31


허저족은 중국에서 인구가 적은 민족 중의 하나이다. 2000년 전국 제5차 인구보편조사결과로 보면 중국 경내 허저족 인구는 4675명이었다. 러시아 경내에 약 2만명의 허저족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허저족은 인구가 적지만 오랜 역사속에서 찬란한 문화를 창조한 민족이다. 이들은 흑룡강과 송화강, 우수리강 양안에 거주하면서 주로 어렵을 생계수단으로 해왔다. 허저족의 제일 직접적인 조상은 수,당 시기에 “혁말(革末)”이라 지칭했다.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떄에 허저족의 조상들은 “여진(女眞)”, “여직(女直)”으로 지칭했고 청나라 강희황제 때인 1663년이 되어서야 삼강유역에 살고 있던 토착민들은 “허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허저족은 물고기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개를 잘 부렸기 때문에 한동안은 “어피부(魚皮부)”와 “사견부(使犬部)”로 지칭되기도 했다.

허저족은 부지런하고 용감하며 총명하고 질박하다. 이들의 총명함을 “널판자 두장이면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널판자 석장이면 강과 바다를 넘나든다”고 평가한다. 인구가 적은 허저족은 역사적으로 여러가지 고난을 겪고 또 차르러시아와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받았으나 완강한 저항정신을 보여주었으며 지금까지도 중국민족대가정의 한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지속적인 유동과정을 거쳐온 허저족은 지금에 와서 대다수가 흑룡강성 동강시의 가진구허저족향, 팔차허저족향, 요하현의 사패허저족향, 가목사교외의 오기허저족촌과 무원현의 조길허저족촌에 집중적으로 살고 있다. 그외 흑룡강성의 가목사, 쌍압산, 장춘, 할빈, 베이징 등 시와 내몽골, 산동, 운남, 광서 등 성급지역에도 일부 살고 있다.

청나라 이전 시대의 허저족(1911년 이전)

허저족은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이며 그 조상은 상고시대의 순임금 때 식신의 구성부분이었으며 이들을 숙신, 직신이라고도 불렀다. 한나라, 위나라 떄에는 이들을 “읍루”라 불렀고 남북조 떄에는 “물길”이라 지칭했다.

수나라 때에는 물길을 말갈이라 불렀으며 말갈은 7개 부로 나뉘었는데 그중 율말부와 흑수부의 세력이 제일 강했다. 흑수말갈은 당나라 초에 방대한 연합체를 형성했으며 그 세력범위는 흑룡강유역 동쪽에서 동해해변지역까지 포함했다. 이들은 중원의 왕조와 긴밀한 연관성을 유지해왔다. 당나라 개원 10년(722년)에 흑수말갈의 두령이 장안에 와서 조공을 바쳤고 당현종은 그를 발력주자사로 임명했고 그 관아는 우수리강의 백력(지금의 러시아하바롭스크)에 정했다. 이는 중원의 왕조가 처음으로 흑룡강유역에 지방행정기구를 설치하여 이 넓은 변강지역을 통치한 것으로 된다.

허저족의 역사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당나라 초반 고구려 정벌에 나섰는데 이를 틈타 흑수말갈이 그 세력을 송화강중류지역과 목단강, 우수리강유역에까지 신속히 확장했다. 당나라는 이 지역에 대한 관할을 중시하여 개원 12년에 흑수말갈에 흑수군을 설치했으며 개원 14년에 흑수부를 설치하고 자사를 두었다. 개원 18년에 흑수말갈의 두령 18명이 장안에 와서 공물을 바쳤고 이들은 중랑장이라는 관직을 받았다.

기원 947년 요나라가 북상하여 발해정권을 접수하였고 말갈을 통치범위에 넣었으며 이들을 여진이라 불렀다. 후에는 요나라 흥종의 명휘를 피한다는 이유로 여직이라 개명했다.

거란족의 요나라는 여직의 여러 부에 대한 압박이 극심했고 이로 하여 여직의 여러 부는 분연히 일떠나 반항했다. 기원 1115년 여직의 여러 부는 수령 완연아골다의 인솔하에 거란왕조를 뒤엎고 금나라를 세웠다. 금나라는 허저족 거주지역에 후얼하로라는 군정합일의 기구를 설치했다. 흑룡강하류에는 하리빈천호 등 관리기구를 세웠다. 이런 기구는 기층 군정합일의 준군사조직이었다.

원나라 때에 와서 동북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해 흑룡강입해구지역에 정동원수부를 세워 흑룡강, 우수리강과 동북의 광대한 지역을 관할 했다. 원나라 정부는 허저족이 집거한 송화강하류지역에 다섯개의 만호부를 세웠다. 원나라 때는 흑룡강하류 출해구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여 이곳에 관청을 세우고 대량의 선박을 건조했으며 수상교통선을 개통함으로써 이 지역의 경제문화의 발전을 추진했다.

명나라 때에 와서는 북방 여러 민족에 대해 회유정책과 이이제이의 정책을 펴면서 동북변경에 대한 관할과 통치를 강화했다. 특히는 송화강, 흑룡강, 우수리강 유역에서 동해에까지 이르는 지역에 대한 관리를 보강했다. 명나라 영락 7년(기원 1409년)에 흑룡강입해구의 특림에 누르간도사라는 기구를 설치했다.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기 위해 영락 11년(1413년)에 누르간지역에 영녕사비석을 재건하여 명나라가 이곳에서 주권을 행사한다는 점과 소수민족에 대해 안무정책을 실시한 업적을 기록했다.

명나라 떄는 여진의 여러 부가 재조합을 하는 시기였다. 명나라 초반 여진 여러 부의 명칭을 보면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이 있었다. 그중 건주여진은 장백산과 수분하, 목단강유역에, 해서여진은 금나라 완연씨의 후손으로 송화강중류, 아스하류역에 살았다. 야인여진은 송화강하류지역, 흑룡강중하류지역, 우수리강류역에 주로 살았다. 이중에서 야인여진의 세력이 재빨리 커졌고 이들은 목단강하류지역에서 건주여진과 전쟁이 발발했고 결과 건주여진이 패해 남쪽으로 이주했다. 건주여진은 50여년간 떠돌다가 요녕 쑤커쑤호하 지역에 정착했고 이들은 후에 만주족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야인여진은 건주여진을 쫓아낸후 여러 부락들을 점차 통일시켰고 후에 “허저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청나라 초반에 허저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후르하부”, “워집부”,”와르카부”, “사견부”, “싸하린부”로 정했다. 청태조 누르하치는 명나라와의 일전을 준비하면서 후방을 공고히 하기 위해 북방의 여러 부족을 병탄했다. 1599년부터 1644년까지의 기간에 허저족 거주지역에 대해 17차에 달하는 정벌을 감행했다. 이는 허저족의 여러 부락이 청나라의 침탈에 완강히 저항해 왔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후 청나라는 책략을 바꿔 회유정책을 펼쳤으며 그 정책이 효과를 보자 1644년 정월에 북방 여러 부락에 대한 병탄전쟁을 끝냈다.

청나라  강희 53년에 삼성성에 협령아문을 세웠고 군사를 관리하는 세관좌령을 임명했다.

삼성아문의 관할범위는 송화강하류,목단강, 흑룡강하류,우수리강류역에서부터 동해가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었다. 때문에 청정부는 이 지역과 주변지역에 대한 관리와 통치를 강화했고 부락과 마을에 관리도 강화되었다. 청정부는 이곳에서 비교적 개명한 민족구역자치성격을 띤 조치를 취했기에 2백여년간 변강건설을 공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민족단결을 촉진했고 중원문화가 널리 퍼지고 생활수준이 점차 제고되었다.

중화민국 초에 이란현성과 부근 여러 마을에 사는 허저족의 대부분 사람들이 만족을 따라 민족성분을 만족이라 했다. 특히는 여러 마을들에서 농사일에 종사하는 허저인들은 청나라 옹정제이래 약 2백년을 거치면서 생산생활방식에 큰 변화가 생겼고 어릴 때 민족언어를 상실한 일부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만족에 동화되었다. 당시 혼동강 연안에 사는 허저족이 1700명,우수리강류역에 400명으로 총 인구가 2100명에 달했다.

1931년 “9.18사변”이 일어나 일본 제국주의가 동북을 강점하고 그후 위만주국을 세운후 허저족인들은 반침략과 반노역, 반박해의 투쟁을 견지했다. 일본침략자들은 허저족들에게 흡연증을 발급하고 이들이 아편을 피우도록 유도함으로써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편중독과 아편의존증이 생겼는데 이는 실제적으로 만성적인 학살이었다. 1932년에는 허저족의 거주지역이 일본침략자들에게 강점된지 8개월말에 송화강특대홍수가 발생했고 이어 역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1945년 9월 3일에 중국인민은 소련홍군과 함께 전 동북을 해방했고 이때부터 허저족은 일본과 괴뢰반동세력의 통치에서 완전히 탈리했고 다른 곳에 쫓겨갔던 사람들도 고향에 돌아왔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하면서 허저족인들은 새로운 역사시기에 진입했다. 


허저족의 문화와 예술

허저족의 언어는 알타이어계-퉁구스어족 만주어갈래에 속한다. 역사적으로 허저족은 언어만 있고 문자가 없었던 관계로 역사와 문화는 대부분 구전으로 보류되었다. 허저족의 언어는 치렁어와 허진어 두가지로 나뉘며 그 중에서 치렁어를 사용하는 허저족이 다수이다. 조사에 따르면 지금에 와서 허저족의 민족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노인들 외에 중년,청년 층에는 많지 않다

사서의 기록을 보면 “허저족은 장식예술이 특별히 발달했다. 민족학에서 도안예술을 논할라 치면 허저족을 언급한다. 이들의 옷이나 모자, 신발 및 사용도구 등에서 많은 도안을 쉽게 발견할수 있다”고 했다. 흑룡강하류의 싸카치-아량촌의 돌에서 허저족 조상들이 불과 태양, 뱀에 대한 토템숭배를 보여주는 암반화가 발견되었다. 이는 허저족이 역사적으로 선진적인 미학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현대에 와서 허저족의 미술사가 계속 발전해왔고 우영귀, 조수명, 기미연 등 유명한 미술인들이 나타났다.

허저족의 전통적인 그림으로는 복장도안, 풍속회화 등이 있다. 복장도안으로는 동물형상도안, 소용돌이, 마름형, 나선형 등을 볼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나선형도안이 제일 많다. 봇나무껍질제품에도 장식도안 혹은 꽃무늬를 새겼다. 이런 도안들은 그 조형이 독특하고 구도가 대범하며 색채가 강렬해 민족적인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암반화는 오랜 그림이 암반에 남아 있는 것이다. 사카치-아량촌의 암석에 있는 그림중에는 불꽃과 뱀모양, 해 등이 그려져 있으며 이는 원시종교예술의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고대 허저족 조상들의 정신세계에 대한 진솔한 기록이다. 또 수렵장면을 담은 암반화가 있는데 그 중 사람과 달리는 말 그리고 동물을 살아 있는 듯 그려놓았다.

허저족은 종이오림에도 능하다. 이들은 장시기동안 어렵생활을 해왔기에 여러가지 새들과 야생동물, 화초수목을 잘 알고 있고 자신의 출중한 손 재간으로 창공을 날아 예는 새들과 달리는 동물들, 화초들을 종이오림 작품으로 만들어 내었다.

허저족의 조각도 매우 정교하다. 주로는 배 혹은 집, 모자, 상자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그릇 등 봇나무껍질공예품에 조각한다. 내용으로는 구름무늬, 화초, 길짐승, 물고기와 벌레, 산과 강물 등이 있다.

허저족의 상징도안과 마스코트:

먼저 허저족의 상징도안을 보면 하늘을 힘차게 날아예는 백조와 수변을 튀어나온 철갑상어 그리고 서로 다른 세갈래 강물로 구성되었다. 그 뜻은 대대로 어렵을 위주로 삼강유역에서 생활해온 허저족을 상징하며 창공을 높이 날아예는 백조처럼 여러가지 일들이 현재 혹은 향후 점점 잘 풀릴 것임을 시사한다. 허저족의 마스코트인 백조는 도안의 중심에 위치하며  길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허저족인들의 소망을 보여준다.

흑룡강 철갑상어는 허저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유명한 특산품이다. 이는 허저족들이 역사적으로 어렵을 주요 생산방식과 경제적인 내원으로 해왔음을 보여주며 허저족의 물고기문화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

세갈래 길이가 서로 다른 곡선은 허저족을 키워주고 허저족의 어제와 현대의 문명을 이어주는 세갈래 강인 흑룡강, 송화강, 우수리강을 대표한다.

허저족의 무용

고니춤:

허저족 민간에는 고니춤을 비롯한 여러가지 춤이 있으며 “아캉부러”로 통칭된다. 허저족의 고니춤은 허저인들이 고니의 비행과 동작, 싸우는 자태 등을 의인화한 민간단체무용이다. 주로는 청년여성들이 단체로 추는 경우가 많으며 청년남녀들이 애정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추기도 하고 성인과 어린이가 함께 추어 아름다운 생활을 보여주는 등 여러가지 형식이 있다.

원지니:

이 춤은 허저족의 사먼이 허저족인들을 이끌고 참가하는 대형 종교민간행사이다. 이는 귀신을 내쫓고 행복을 기원하며 어렵이 대풍을 거두기를 기도하며 마을의 인구수가 늘어나기를 신령에게 비는 뜻을 담고 있다.


허저족의 물고기가죽복장:

특수한 생산생활방식과 특정된 자연생존조건 때문에 허저족은 과거 물고기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 경우가 많았으며 지어는 “어피부”라는 이름으로 지칭되기도 했다. 허저족은 세계적으로 담수어피로 옷을 만들어 입는 보기 드문 민족이며 그 오랜 역사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허저족의 이런 어피복장은 가죽 벗기기, 가죽 말리기, 재단, 봉제 등 몇가지 단계를 거친다. 허저족은 여름철에 이런 옷과 신발을 많이 착용한다. 이런 복장은 이음새가 정교하고 무늬로는 큰 비늘 무늬, 작은 비늘 무늬, 비늘이 없는 무늬로 나눌수 있다. 어피복장은 보기에도 아름답고 입으면 편안한 느낌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이런 복장은 소장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실용가치도 가지고 있다.   


허저족의 전통명절


다른 소수민족과 비할 때 허저족은 명절이 많지 않다. 한족과 함께 쇠는 설날, 정월보름과 2월 2일,  7월15일 명절이외에 “조로신(跳路神)”명절이 있고 그외 “우르공절(烏日貢節)” 등이 있다.

설(춘절):

허저족은 설을 중시하며 음력 설날은 최대의 명절로 여긴다. “음력설날” 경축규모나 행사는 다른 명절과는 확연히 다르다. 설은 1년중에서 허저족인들의 제일 즐거운 명절이다. 그믐날이면 모든 집들에서 명절 음식준비로 바삐 돌아치며 종이오림을 창문에 붙이고 초롱불을 만든다. 정월 초하루에는 처녀와 아녀자들, 어린이들은 구름무늬를 수놓은 설빔을 입고 친척친우들을 찾아 설인사를 한다. 이때면 열정적이고 손님을 반기는 허저인들은 “물고기 연회”를 차려 손님대접을 한다.

“물고기 연회”에는 새콤매콤한 “타라창”이라는 생고기요리가 오르는가 하면 만만하고 바삭바삭한 “물고기껍질 볶음”도 있고 투명하고 붉은 연어알도 있는데 그 맛이 신선하고 깔끔하다. 사람들이 존경하는 민간시인인 이마칸이 시와 노래로 아름다운 축복을 여러 사람에게 전하고 노인들이 이들에게 술을 권한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여자들은 자기들만의 게임을 하기도 한다. 청년남녀들은 스키나 빙상, 사격 등 경기종목에 참여하며 마을 곳곳마다 웃음소리 넘쳐나고 노래소리 구성지다.

“도로신”:

태평신(太平神)제사라고도 부르는 ‘도로신’은 허저족의 전통종교제사명절이다. 허저족은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이런 제사행사를 가진다. 여기서 말하는 “로신”이란 허저어로 “우스주예”인데 신령의 가호를 빌고 사람과 재산이 모두 늘어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법회의 구체적인 날자는 샤먼이 택일을 한다. 제사날이 되면 샤먼이 집에서 신에게 제를 지내고 신을 청하며 여러 사람이 샤먼의 몸에 물을 뿜는다. 이어 청년 몇명이 신의 막대기와 신령상을 모시고 샤먼의 집을 나오면서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샤먼 일행은 노래하고 춤추며 때로는 마을의 집들에 들어가 복을 기원한다. 이들 일행이 집에 들어오면 집 주인은 샤먼에게 술을 올리거나 특제한 음료를 권해 신령에 대한 경건함과 존경을 나타낸다. 샤먼 일행이 다시 샤먼의 집에 돌아오면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제물과 술 등을 보낸다. 이때 샤먼은 제사복장을 벗고 여러 사람들이 함께 북을 치고 노래와 춤으로 즐긴다. 그러다가 돼지고기가 다 익게 되면 샤먼이 다시 제사복장으로 갈아입고 계속 춤을 춘다. 춤판이 끝나면 여러 사람들이 술과 고기를 먹고 헤어진다.

“우르공절”:

우르공은 허저어로 즐거운 명절이란 뜻을 담고 있으며 오락이나 체육대회를 지칭한다. 이 명절은 2년에 한번씩 쇠며 그 시간은 음력 5월 중순 경이고 대체로 이틀에서 사흘 정도 쇤다. 그 장소로는 흑룡강성 동강시와 요하현의 허저족 집거지역이며 두 곳이 번갈아 진행한다. 이 명절이 되면 낮에는 체육경기를 진행하는데 종목으로는 수영, 배놀이, 그물 뿌리기, 줄다리기, 작살찍기, 활쏘기 등이 있다. 이런 경기종목들은 허저족의 어렵생활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그중에서 풀로 만든 공을 작살로 찍는 경기는 허저족들이 작살로 물고기를 잡는 어렵기술을 육지에서 재현하는 것이다. 명절날 밤에는 강변에서 우등불야회와 단체연회가 있다. 사람들은 고니춤과 샤먼춤 등을 춘다. 이때면 열정적이고 호방한 춤사위와 구성진 노래소리가 어우러져 명절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허저인들의 명절음식에는 “날고기”가 빠질수 없다. 세계적으로 물고기를 날로 먹는 민족이 적지 않으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허저인들을 따라 올수 없다. 종류가 다른 물고기마다 날로 먹는 방법도 다양한 특징을 가진다. 이런 물고기들은 몇킬로그람씩 무게가 나가기에 잔가시가 없어 먹기에도 편하다. 물고기알은 투명한 빗갈이고 콩알만큼 굵다. 귤색의 연어알도 있고 초록색의 철갑상어알도 있으며 여기에 소금과 식초, 생강, 마늘, 고추 등을 넣으면 영양만점 요리를 먹을수 있다.

하등절(河燈節):

매년 음력 7월 보름이 되면 허저족인들은 물가에 가서 등을 띄워 강의 신에게 제를 지내면서 가족의 평안과 어렵의 풍수를 기원한다. 이는 허저족의 전통적인 민간명절로 현지인들은 “하등절”이라 부른다. 하등절 외에도 허저족 집거지역에서는 매년 부동한 규모의 경축행사들을 조직하여 허저족의 민속과 가무, 민간종교, 전통기예, 음식문화 등을 전승해간다.  


허저족의 세시풍속과 금기


혼인풍속:

허저족은 씨족외혼인제를 실행했다. 과거 자녀들의 혼인은 부모들이 결정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자주적으로 혼인을 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과거 혼인방식으로는 중매인소개방식, 남녀 쌍방 부모가 직접 만나서 결정하는 방식, 겹사돈을 맺는 방식, 지복위혼(指腹爲婚) 즉 아기 혼사를 미리 정하는 방식 등 네가지였다. 그외에는 민며느리를 삼는 방식도 간혹 사용되었다. 이들은 결혼에서 가정조건을 크게 따지지 않으며 빈부차이 역시 장애로 되지 않는다. 남녀 쌍방의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배우자를 선택하는 기준은 주로 어렵과 사냥에 능하고 사람됨됨이가 정직하면서도 어진 남자가 우선 선택대상이다. 여자를 선택하는 조건은 인품이 좋고 바느질솜씨가 좋으며 총명하고 현명한 여자를 선호하며 용모는 주요한 조건이 아니다.

채색배와 썰매로 영친을 하는 풍속:

허저족은 영친을 할때 봄과 여름, 가을에는 채색장식을 한 배를 이용하고 겨울에는 썰매를 이용한다. 이때면 배 혹은 썰매에 특별한 장식을 하며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신부는  오빠가 업어서 배에 오르며 신부를 호송하는 대오가 신랑집에 간다. 신랑집에 이르러 민족특색의 혼례식을 치르며 사람들은 경축연회에서 마음껏 먹고 마신다.

개가풍속:

부지런하고 질박한 허저족인들은 배우자를 고를 때 부지런하고 정직하며 현명하고 능력 있는지의 여부를 기본기준으로 삼으며 부동한 민족끼리도 통혼이 가능하다. 과거에는 부모들이 자녀들의 혼인을 도맡아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민풍이 소박하고 가정교양을 중시했기에 부부가 이혼하는 경우가 적었다. 여자의 본가나 친가 모두 자녀들의 이혼을 가족의 흠집으로 여겼다. 허저족은 과부의 개가에 대해 제한이 없었다. 젊은 과부는 시동생에게 개가를 하며 시부모들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가족 외 남자들에게 개가를 갈수 있었다. 과부들이 개가를 하는 경우에는 남편의 혼백을 위해 상을 치른 후에야 허용되며 재혼인 경우에는 결혼식을 하지 않고 친척, 친우들을 청해 연회를 차리면 혼인이 성립되었다.

장례풍속:

허저족은 대부분 토장을 실행했고 과거에는 그 장례가 비교적 간단했다. 사람이 죽으면 봇나무껍질로 잘 감싸며 나무껍질로 만든 바줄 세개로 시신을 묶은 후 매장하는 방식이었다. 후에는 장방형으로 묘혈을 파고 네면에 나무를 댄후 바닥에는 원목을 깔고 풀과 이불을 깔아 놓은 후 시신을 묘혈에 안치한다. 망자가 생전에 제일 많이 사용하고 좋아했던 물건을 수장품으로 넣으며 이를 원목으로 잘 덮고 그 위에 풀을 깐 후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든다. 후에는 만족, 한족의 영향으로 목제관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허저족의 장례의식은 사망자의 사망원인에 따라 다르다. 사냥중에 산에서 숨졌을 경우 봇나무껍질 혹은 나무가지로 시신을 싸서 나무위에 놓았다가 2,3년후 매장한다. 집에서 사망했을 경우 삼일간 시신을 모셨다가 입관한 후 매장한다. 비명에 죽은 사람은 이튿날로 매장한다. 온역이나 괴질로 죽었을 경우에는 그 날로 화장을 한다. 어린이가 죽었을 경우에는 봇나무껍질로 잘 감싼후 나무가지사이에 걸쳐 놓는다. 이는 어린이의 영혼이 작기에 지하에 묻으면 영혼이 빠져 나올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허저족의 장례과정을 살펴보자. 출빈 때는 샤먼을 청해 신에게 제를 지내고 신의 노래를 부른다. 그 내용은 망자가 염라대왕이 있는 저승에서 시달림을 받지 않도록 비는 것이다. “당즈(档子)”라는 의식이 있는데 남자가 사망한 후의 7일, 여자는 9일후 저녁에 망자의 혼이 다시 찾아온다고 여겨 제사상을 차리고 향초를 태운다. 료우당즈(撂档子)라는 제사의식은 망자의 1년제, 2년제, 3년제 때 진행한다. 료우당즈는 엄숙하고 장중한 의식이다. 이때는 샤먼을 청해 삼일간 신령제를 지내며 사흘째 되는 날 망자를 대표하는 인형을 개썰매에 태워 배웅한다. 망자의 영혼을 저승에 바랠 때는 샤먼이 높은 곳이나 높은 대우에 서서 서쪽방향으로 화살 세발을 쏘는데 이는 망자의 영혼을 세번째 화살이 가는 방향으로 인도하는 의미를 가진다.  

개썰매:

겨울이 되면 허저족인들은 개썰매를 몰고 수렵을 하거나 원행을 한다. 이들은 개를 기르거나 길들이기를 즐긴다. 집집마다 적어도 개를 몇마리 정도 기르며 많을 때는 몇십마리에 달한다. 해방 전 삼강지역은 외부와의 연계가 거의 단절되었고 겨울이면 일반차량이 다닐수 없기 때문에 개썰매가 중요한 역할을 발휘했다. 개썰매는 몇 백근에 달하는 물건을 나를수 있고 하루에 100킬로미터 정도까지 달릴 수 있다. 썰매를 끄는 개들은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았으며 그 중에서도 제일 앞에 서는 개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

금기사항:

많은 소수민족과 마찬가지로 허저족은 생산활동과 생활풍속중에 여러가지 금기사항들이 있다.

어로금기: 어망으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을 경우 “이번에 왜 이렇게 많은 물고기가 잡혔지?”라고 말해서는 안되고 물고기를 집지 못했을 경우에는 이상한 말이나 욕을 해서는 안된다. 또 과부가 어선에 타는 것도 불길하다고 여긴다.

수렵금기: 사냥군들이 새로운 사냥장소에 도착하면 인솔자가 여러 사람들을 휘솔해 산신제를 지낸다. 이때는 나무에 붉은 천을 걸어 놓고 향을 꽂으며 지면에는 음식을 차린다. 이어 손가락에 술을 묻혀 공중에 튕긴 후 산신령에게 절을 하면서 이번 사냥이 순조롭게 사냥물을 많이 내어달라고 빈다. 사냥꾼이 산에 들어선 후에는 이상한 말이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금기도 있다. 산림에서 나무그루터기에 앉아서는 안되는데 그 원인은 나무 그루터기가 산신령 할아버지가 앉는 자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앉는 것을 엄금한다는 것이다. 겨울에 산에서 사냥을 할 때면 다른 사람의 발자욱을 밟지 말아야 한다. 두 사냥팀이 산에서 만나면 상대방을 본인들의 숙영지에 청해 식사를 대접해야 한다. 또 솥이나 그릇을 두드려 소리를 내서는 안된다. 여자가 총 위에 앉아서는 안되며 총이나 탄알 및 어렵도구를 타고 넘어서는 안된다. 지어는 남자들의 사냥복장을 깔고 앉거나 건너타서는 안된다는 금기도 있다.  물론 지금에 와서 현실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전통풍습과 습관들이 많이 변한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