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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연평해전 본문
제2연평해전서 출동했던 참수리 357호 모형,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서방 14마일 해상에서 북방한계선(NLL)을 무단 침범한 북한 경비정이 이를 저지하려는 한국 해군 고속정 참수리정 357호를 기습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아군 4명이 전사하고 1명이 실종됐으며 19명이 부상했다. 실종한 1명은 침몰한 선체에서 발견되고 부상자 중 1명이 추가로 사망, 전사자는 총 6명으로 늘었다.
그들은 정장(艇長)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이다.
북한은 전투가 우발적으로 벌어진 것이라고 주장했고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도 이를 받아들여 남북간의 긴장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날은 한국이 월드컵 3, 4위전을 갖는 날이었다. 예상과 기대를 뛰어넘는 한국 축구팀의 선전에 남한 전역이 축제분위기에 빠져 있던 날에 벌어진 이 전투는 54년 전 일요일에 이루어진 6.25 기습남침을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한 발발원인이 어디에 있건 결과적으로 북한 해군은 이 전투에서 3년 14일 전인 1999년 6월 15일에 치러진 제1 연평해전에서의 참패를 설욕했다고 자위할 수 있는 전과를 거두었다.
1999년 6월 15일 역시 NLL 무단 침범으로 야기된 제1 연평해전에서 북한측은 함정 4~5척이 침몰, 대파되고 수많은 병사가 전사상한 반면 한국측은 손가락 부상 등 경상자 몇 명만이 발생했을 뿐이었다(한 일본 언론은 북한군의 전사상자가 무려 70~80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연평대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당시 첨단화한 한국의 경비정에 대해 북한은 무모하게 정면으로 해상 인해전술을 감행하다 참담한 패배를 당한 것이다. 한 해 뒤인 2000년 역사적인 남북 공동성명의 발표일자는 공교롭게도 6월 15일, 제1 연평해전 1주년이었다. 남북한의 화해 무드가 고조되면서 우리 해군의 대승은 잊혀져야만했다.
그리고 다시 2년 14일 뒤 북한군은 "우발적" 기습 공격을 통해 남한측에 상당한 타격을 가했다. 제2 연평해전이 북한의 공식적인 설명처럼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작위적인 것이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북한해군은 수상 해군 전력 면에서 압도적인 전력상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남북화해 분위기를 최대한도로 이용, 상대방을 방심하게 한 뒤 기습적으로 급소를 찌르는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우발적" 첫 1격이 정장 윤영하 소령을 겨냥한 것이었고 더군다나 그 첫 가격이 윤영하 소령을 단번에 절명케 할 정도로 정확한 조준 사격이었다는 점, 부근 또 다른 참수리 함정으로부터의 집중적인 반격을 받으면서도 이에 대응하지 않고 타격을 받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은 참수리1호 만을 공격한 사실은 북한측의 주장을 무색케 하는 정황증거이다.
제2 연평해전에서도 북한측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윤영하 소령의 참수리1호는 침몰하고 말았다. 3년 전의 제1 연평해전과 비교해 보면 우리 해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이다.
지휘관을 잃은 참수리 1호에 대한 북한 함정의 집중 공격 행태를 두고 "나는 죽어도 한 놈만 패겠다는 식이었다"는 표현이 나오기도 했다. 우발적으로 벌어진 전투 상황에서 취해질 수 있는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다. 사전의 작심이 읽혀지는 대목이다.
이로써 남한 국민들의 기억 속에 북한이 일방적으로 당한 제1 '연평해전'은 깨끗이 지워지고 남북한이 서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며 북한측이 내부적으로 승리한 것으로 주장하기에 충분한 제2 연평해전('한동안 제2 연평해전은 제1과 구별하기 위해 서해교전'으로 명명되기도 했다)이 심어 졌다. 제2 연평 해전이 작위적인것이라면 북한은 심리전에서 승리한 것이다.
북한은 제2 연평해전을 통해 남한 국민들 사이에서제1 연평해전 대승으로 은연중 자리잡기 시작은 "북한 별 것 아니네"를 "기습공격해오면 크게 당할 수 있다"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제2 연평해전 이후 서해상에서의 북한의 군사적 도발은 참여 정부임기 말까지 없었다. 집권당 정치 지도자의 대북 인식과는 별도로 해군이 해상 도발을 더이상 방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은 대신 제2 연평해전 프리미엄을 철저히 활용하며 대남 NLL 공세를 취했다. NLL을 북한에 유리하게 재설정 해야 한다는 북한의 드라이브는 상당히 먹혀들었다.
10.4 제2 남북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하는 뉘앙스의 발언을 햇는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김정일이 제2 연평해전의 프리미이엄을 충분히 누린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또 다시 대청도 부근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이는 붃한으로 하여금 더 이상 해상 도발에서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결국 북한은 2010년 3월말 잠수정 공격으로 우리 해군의 천안함을 폭침시키는 해저 도발을 감행했다. 비대칭적 전려을 동원,심맂전 차원에서 대남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천안함 폭침은 장거리 로켓 및 실험 도발의 '해저 버전'인 셈이다.
제2 연평해전이 벌어진 날 한국 축구팀은 한일 월드컵 3-4위 전에서 터키에 2:3으로 져 4위를 차지했다. 이날 한국팀이 먹은 첫 골은 수비진이 방심한 가운데 어이없게 허용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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