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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중단 관련Q&A | 북 주장 및 조치의 위법 부당성 본문

Guide Ear&Bird's Eye/통일부 정책모니터링조사 패널(수집)

개성공단 중단 관련Q&A | 북 주장 및 조치의 위법 부당성

CIA bear 허관(許灌) 2016. 2. 24. 22:03

 

 

 

 

 

"북한 김정은과 군부 강경파들이 핵 미사일 개발에 주력해오고 있다.
미사일이든 인공위성이든 로켓(추진체)으로 쏘아 올리는 원리는 같다. 단순화하면 장거리 미사일에 핵탄두를 탑재하면 핵미사일이 되는 것이고, 인공위성을 실으면 우주발사체가 된다. 발사체를 탄도 미사일로 바꾸려면 대기권 재진입시 고열과 고압을 견뎌낼 수 있는 특수제어장치가 필요하다. 발사체의 경우 탄도 미사일보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미사일보다 추진력이 더 높은 연료를 사용한다는 특이점도 있다
북한 전략로켓부대 인공위성과 지상레이다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인 '사드(THAAD)'가 필요하다"

 

1996년 5월 23일 이철수대위가 남한으로 미그 19 전투기를 몰고 넘어 왔다

 

 

 

북한, 가드의 군사 분계선에서 군인 중 일부는 비밀리에 직접 남한으로 도망 도움이 된다. 따라서, 북한 인민군 군인을 피하기 위해 남북한  당국이 억지 휴전 역할 지역을  이용하여 쉽게 남한으로  달아 날 수 있다. 인민군 공군 조종사가 쉽게 남한으로 귀순 장비의 장점은  "북한 상공을 날아" 남북한 휴전선을 넘는 것이다  중무장한 미그기를 격추하기는 어렵다

 1983년 2월 미그 19 군사 전투기 조종사 이웅평씨가 한국으로 망명한 것이 북한 인민군  첫 번째 파일럿(공군 조종사)이다. 1996년 5월 23일 다음 이철수대위가 남한으로 미그 19 전투기를 몰고 넘어 왔다

 

                                           1996년 5월 23일 북한 이철수 대위 미그(Mig)-19 전투기로 수원 공군 비행기장 도착

*비무장지역 서해5도

서해 5도(西海五島)는 남한의 관할 아래 있는 섬들 가운데 북한 황해남도의 남쪽 해안과 가까운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를 묶어 일컫는 말이다.

서해 5도의 대부분은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옹진군에 속하지만, 우도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속한다.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된 우도 대신 유인도소연평도를 넣어 서해 5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 북방한계선(남한)
    : 조선 서해 해상 군사분계선(북한)

 

1.개요

서해 5도는 본래 황해도 장연군(백령도·대청도·소청도)과 벽성군(연평도)에 속해 있었다. 1945년 9월에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점령한 후 황해도 옹진군경기도에 속하게 되면서, 38선 남쪽에 위치한 서해 5도는 경기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한국 전쟁의 결과, 옹진군의 육지지역인 옹진반도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이 되었으나, 서해 5도는 섬 주민들과 해병대의 노력으로 군사분계선 이남에 남았다.

서해 5도에는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북한의 공격 등 유사시에는 섬 주민들에게도 화기를 지급하도록 되어 있다.

 

2.논란

1953년 7월 27일, 당일 오후 10시의 교전선을 군사분계선(MDL)으로 하는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이 발효되었다. 그러나, 해상분계선에 관하여는 정전협정에 명확한 규정 없이 "연해의 섬 및 해면에 관한 통제권은 1950년 6월 24일 이전을 기준으로 하되, 서해5도는 UN군 사령관 관할 아래 둔다"는 단서규정을 두었다.

1953년 8월 30일, 마크 웨인 클라크 UN군 총사령관이 정전협정의 취지에 따라 남북간의 군사적 충돌을 억제할 목적으로 대한민국 서해 5도와  북한 황해도 사이의 해상에 북방한계선(NLL)을 설정하였다. NLL은 1973년 9월까지 남북 사이의 특별한 마찰 없이 해상 경계선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1973년 10월과 11월에 북측 선박들이 수십차례 NLL을 침범하였고, 같은 해 12월에 개최된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북측은 서해 5개 섬 주변수역이 북한의 관할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수역을 항행하려면 사전 승인을 받으라고 요구하였다. 또한, 북측은 제1연평해전 직후인 1999년 9월에 북한 서해 해상 군사분계선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

 

3. 중요성

서해 5도는 북한이 경기만을 통해 남하하여 남한을 침공하는 것을 막는 1차 방어선이며, 북한 해군, 공군의 활동 범위를 좁혀 인천항인천공항이 안정적 기능을 유지하고 경기만 일대에서 조업하는 어민들이 평화롭게 생업을 도모할 수 있게 해주는 남한의 군사적 요충지이다.

반면에, 북한입장에서는 이 지역이 첨단무기로 요새화(fortification)된다면 황해남도황해북도는 물론 평양까지도 위협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천광역시의 섬
(1, 2, 3번이 서해 5도)

 

*옹진반도(甕津半島)
옹진반도는 황해남도 남서부에서 황해로 돌출한 반도이다
동쪽은 해주만, 서쪽은 대동만을 건너 백령도와 접하고 있다
옹진반도는 동쪽의 강령반도, 서쪽의 용천반도, 중앙의 동남반도로 나뉘어져 있다
리아스식해안으로 주변에는 간석지가 발달해 있고 강령만. 대동만등의 연안을 따라 옹진평야에 펼쳐져 있어 벼농사가 발달하였다 행정적으로는 벽성군의 일부와 옹진군 전역으로 되어 있다 황해해류의 영향으로 기후가 온화하며 조기. 멸치. 넙치. 숭어. 가자미. 김. 조개.대합등이 많이 잡힌다 금. 석탄등이 산출되고 옹진온천이 있어 휴양지로도 유명하다
-옹진반도는 한국전쟁때 북한군이 맨 먼저 장악한 곳으로 황해도 지역 전략요충지이다
남과 북에서 옹진반도를 누가 장악하는냐에 따라 38도선 이북 황해 바다를 누가 장악하는냐에 달려 있다 한국전쟁 종결기에 한국군과 유엔군이 해군력의 강화로 황해(黃海)지역은 장악할 수 있었지만 중국 인민군의 저항으로 옹진반도 즉 개성등은 북한 땅이 되고 말았다
-개성공단 개발이 진척되고 발전되면 옹진반도 지역으로 확대되어 황해 연안 항구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甕--독 옹
*津--나무 진

 

개성은 남과 북 누구의 땅인가? 개성은 황해도가 아닌 경기도이다
개성의 국제법상(유엔헌장) 남한(대한민국)의 땅이며 정전협정상으로는 북한(조선민주인민공화국) 땅이다

 

 

(1)삼팔선(三八線, 북위 삼십팔도선 약칭)---미국과 소련 입장(유엔과 국제법)
개성은 대한민국의 땅이다
삼팔선(三八線)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한 후 미소양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경계선 <북위 삼십팔도선>의 약칭
ㄱ.획정 경위
북위 38도선은 한반도의 중부를 횡단하는 선인데 8.15이전에는 이 선을 기준으로 북반부는 만주에 주둔한 일본의 관동군(關東軍) 사령관의 지휘하에 있었고 남반부는 조선군사령관의 관할 아래 있었다 그런데 1945년 8월에 미국과의 약속에 따라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남쪽으로 계속 진출, 1945년 8월 12일에는 청진(淸津)에 상륙하고 16일에는 원산(元山) 상륙작전을 벌였다
이때 미군은 가장 가까운 부대가 한반도에서 6000마일 이상 떨어진 오키나와(沖繩) 주둔하여 한반도에 상륙하는 데 상당한 시일을 필요로 했으며 한반도 전체가 러시아군에 의해 장악되는 것을 막기 위해 38도선을 경계로 한 분할점령을 소련에 제의했다 이에 소련은 1개월 전 포츠담회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수뇌가 한국의 신탁통치 필요성과 분할 점령에 대해 인식을 같이했고 또한 미국의 양해를 받아야 일본 훗카이도(北海道)의 일부를 쉽게 점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제안에 동의 이미 서울까지 진출해 있던 일부 소련군을 38도선 이북으로 철수시켰다 그리하여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 각각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을 받았으며 군정(軍政)을 실시하였다
*沖--화할 충, 빌 충
*繩--노승, 줄승, 곧을 승

ㄴ.획정결과
처음 38도선은 일본의 관동군과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을 받은 뒤 신탁통치로 옮겨가기 위해 일시적으로 획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1948년 남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결국 실질적인 국경선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6.25사변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모든 분야의 발전을 가로막아 신생독립국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하였고 국제적으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대치선으로 긴장의 초점이 되었으며 민족적으로는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에 의해 차츰 적대감이 심화되었다
38도선은 1950년 6.25사변으로 인하여 무너졌으나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38도선 대신 <휴전선>이라는 군사경계선이 설정되어 남북의 분단이 고착되었을 뿐 아니라 민족적으로 거의 이질사회(異質社會)를 만들게 한 경계선이 되었다

(2)휴전선(군사분계선)---전쟁상태 중 정전협정---전시상태
개성은 남한(대한민국) 땅인데 북한(조선민주인민공화국) 불법으로 점령한 지역
ㄱ.휴전회담(休戰會談)
휴전회담은 6.25전쟁을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개최한 회담이다
1951년 3월 북진을 계속하는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서자 중공군은 이른바 4월, 5월 춘계대공세를 감행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에 소련은 유엔주재 소련대표 J. 말리크를 통하여 휴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 사령관 M.B 리지웨이는 그 제의에 따라 휴전회담 개최를 요구하였다
이에 1951년 7월 8일 양쪽은 개성에서 예비회담을 열고 이어서 10일 정전회담 본회의를 개최하였다
군사분계선과 포로 교환문제로 난항을 거듭한 이 회담은 1951년 9월 6일부터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겨 11월 전선을 정전선(停戰線)으로 할 것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포로교환 문제는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사건등으로 합의를 보지 못하여 회담 자체가 정돈상태에 빠졌다 이에 6월 25일 D.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국무장관보 로버트슨을 한국에 보내 이승만 대통령과 협의하게 하여 <한.미 양국은 정전 후에도 긴밀한협력을 계속하고 송환을 원하지 않는 공산포로는 한국에서 석방하며 한미(韓美)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는 조건으로 한국의 정전반대운동을 일단 진정시켰다
이리하여 7월 27일 오전 10시 제 159차 본회의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W.K 해리슨 중장과 공산군측 대표 남일(南日)이 3조 63항의 휴전조인문에 합의. 서명함으로써 한국전쟁은 정전(停戰)으로 끝맺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표는 최후까지 휴전에 반대 휴전협정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ㄱ)개성회담(開城會談)
개성회담은 1951년 개성에서 6.25전쟁의 휴전을 위해 유엔군측과 공산군측간에 열렸던 회담이다 1951년 6월 23일 소련의 UN대표 J, A. 말리크의 제의에 의한 것으로 같은 해 7월 8일부터 예비회담이 7월 10일 본회담이 개최되었다 그후로 2차에 걸친 중단이 있었으나 9월 6일 유엔군측의 제의에 따라 10월 8일 판문전으로 회담장소를 옮겨 회담이 계속되었다
(ㄴ)판문점 휴전회담(板門店休戰會談)
판문전휴전회담은 6.25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열렸던 회담이다
판문점은 경의선 위의 한 촌락으로 개성 동쪽 8km 지점에 있으며 북위 38도 남쪽 5km 지점에 위치한다. 중공군(중국 인민군)과 유엔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대규모화되자 이에 당황한 소련은 유엔대표 Y.A 말리크를 통해 1951년 6월 2일 북위 38도 선상에서의 휴전을 제의해 왔다
유엔군 사령관 M.B 리지웨이는 그 해 6월 30일 휴전제의를 받아들여 1951년 7월 8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개막되고 10일에 유엔군 수석 대표 해군준장 조이와 북한 수석대표 남일이 참석한 본회의가 열렸다
그 뒤 휴전선상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는 이 회담장소에서 토의되었다
1953년 6월 26일 미국 D.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국무차관보 R.B. 로버트슨을 한국에 보내어 (a)한미(韓美) 양국은 정전 후에도 긴밀한 협력을 계속하고 (b)송환을 원치 않는 공산군 포로는 석방하며 (c) 한미(韓美)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는 조건으로 한국인의 정전반대운동을 중지케 한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 그 해 7월 27일 전문 5조 36항으로 된 정전협정이 조인되어 회담 개기 2년 1개월만에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ㄴ.휴전선(休戰線, 군사분계선)
휴전선은 휴전 또는 정전시(停戰時) 대치하고 있는 양군의 태세를 고정화시키거나 전선에서 병력을 분리시키기 위해서 설정하는 기준선이다
약칭 MDL, 보통 휴전이 성립된 시점의 전선을 분사분계선으로 삼는다
휴전과 정전에 수반해서 적대행위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서 군사분계선을 따라 병력을 분리시키고 완충지대(緩衝地帶:buffer zone)를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비무장지대를 군사분계선의 양측에 설치해서 비무장지대 내에서의 무장을 금지시키고 이행 여부를 국제적인 감시위원회에서 감시하게 한다 또는 쌍방의 병력을 철수시킨 뒤에 유엔군등 제3자가 현장에 주둔해서 감시하기도 한다 6.25사변의 경우에는 휴전시에 군사분계선을 설정함에 있어서 양군의 주장이 대립되었는데 양군의 현실적인 접촉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결정함으로써 휴전협정이 성립되었다 다시 양군은 군사분계선에서 각각 2km씩 후방으로 철수해서 비무장지대를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동전쟁에서는 정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였으나 그 후 병력분리협정이 체결될때마다 당시의 정세에 따라 군사분계선이 다시 조정되었으며 조절될때마다 그 곳을 중심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군 사이에 4-10km의 완충지대가 설치되고 유엔군이 주둔해서 정전(停戰)을 감시했다
ㄷ.비무장지대
ㄹ.판문점(板門店)
판문점은 경기도 파주시(坡州市) 진서면(津西面) 비무장지대 군사분계건상에 있는 공동경비구역이다
판문점은 서울 서북쪽 48km, 개성 동쪽 10km 지점에 있으며 북한 행정구역상으로는 개성직할시 판문군(板門郡) 판문점리(板門店里)에 해당한다
6.25동란 전에는 널문(板門)이라는 지명으로 의주가도(義州街道)에 초가집 몇 채만 있던 한촌이었으나 1951년-1953년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세계에 알려졌다
1953년 7월 이곳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된 뒤 국제연합측과 북한측의 <공동경비구역>이 되었으며 그해 8월-9월에는 1개월에 걸친 포로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주로 휴전을 관리하는 장소로 이용되었으나 1971년 9월 20일 열린 남북적십자예비회담을 계기로 군사정전위원회의 회담장소 뿐 아니라 남북한간 접촉과 회담을 위한 장소 및 남북을 왕래하는 통과지점으로도 활용되어 왔다
공동경비구역 안에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과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을 비롯하여 <자유의 집> <판문각>등 10여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고 1980년대 남쪽에 <평화의 집> 북쪽에는 <통일각>이 세워져 남북대화용 건물로 이용되고 있다
1971년 남북적십자예비회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등으로 1990년대에는 범민족대회등으로 국내외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북한측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집회장, 선전장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1976년에는 북한경비병에 의한 <8.15되 만행사건>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남북한 대립의 긴장을 나타내는 상징적 장소로 인식되어 왔으나 남북대화 창구의 역할이 커져왔고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 뒤부터는 이곳을 통해 남북당사자의 직접 왕래도 이루어지고 있다

 

The complex employs more than 50,000 North Koreans, who are paid a total of about $80m in wages each year. Some $470m of goods were produced there in 2012.

 

 

남한과 친구 도시 개성(開城)
 

개성공단 2015년 5억 달러 이상 상품 생산

2015년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상품 가격이 처음으로 5억 달러를 돌파했다고 오늘 한국 통일부가 발표했다.

''개성에 소재한 한국 공장들이 작년 1월부터 11월까지5억 1,540만 달러 상품을 생산했다. 1년을 총합하면 5억6,000억 달러로 예상된다.''

이 수치는 2014년도보다 20% 증가된 수치다. 북한 지뢰에 한국군 2명이 부상당한 8월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사건들 조차 개성공단의 집약적 생산성장에 영향을 미치지않았다. 당시 작업제한조치가 가해지긴 했으나, 차후 해제됐다

-sputniknews[sputnik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