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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라종일 전 한국 국정원 차장] “아웅산 테러범 강민철은 남북 대치의 희생자” 본문

국가정보원 안보모니터

[인터뷰: 라종일 전 한국 국정원 차장] “아웅산 테러범 강민철은 남북 대치의 희생자”

CIA bear 허관(許灌) 2014. 6. 7. 23:59

 

                                  지난 1983년 10월 9일 북한의 버마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사건으로 부상한 한국 수행원을 현지 경찰이 구조하고 있다(사진)

버마에서는 지난 6일, 31년 전 아웅산 폭탄 테러로 숨진 한국 순국사절 추모비가 건립됐습니다. 이를 계기로 북한이 저지른 당시 테러 참사가 다시 주목 받고 있는데요, 희생자 외에 25년 간 복역한 뒤 사망한 북한 군 정찰국 소속 테러범 강민철도 새삼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강민철은 특히 지난해 관련 책이 한국에서 출간되면서 관심을 끌었는데요. 저자인 라종일 전 한국 국가정보원 1차장은 강민철이 추악한 테러범이지만 남북 대립의 희생자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김영권 기자가 라종일 교수를 인터뷰했습니다.

기자) 아웅산 테러 순국사절 추모비가 지난 6일 세워졌습니다. 우선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십니까?

라종일 교수) 국가의 중요한 일을 하시던 분들이 그 곳에서 그렇게 무도하게 테러에 희생됐습니다. 그 분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를 세운 것은 당연하고 옳은 일입니다.

기자) 작년에 테러범 강민철에 대한 책을 쓰셨습니다. 어떤 계기로 강민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셨습니까?

라종일 교수) 말할 것도 없이 강민철은 흉악한 테러범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남북 간 갈등의 희생양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북한에서 태어난 사람은 특별한 고려를 해야 하는 것이, 북한에서 태어나면 국가가 제공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정보도 접하기 힘듭니다. 외부 세계에 전혀 무지하게 되죠. 어릴 때부터 국가에서 제공하는 강도 높은 정치교육을 받고 자라게 되죠. 이 사람은 특히 10대 말에 특수부대에 들어가서 심한 훈련 과정을 겪었는데, 그 사이에 자체적으로 외부 정보에 기초해서 행동할 수 있는 사고능력이 없었다고 봐야죠. 그런 면이 감안이 됐어야 했습니다. 가해자이기도 하지만 희생자가 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기자) 버마와 한국의 당시 합동조사 결과 북한 인민군 강창수 소장의 지시로 테러를 감행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김정일의 친필 지령이 있었다는 지적도 나왔구요. 북한 정권이 당시 왜 테러 공격을 한 건가요?

라종일 교수) 광주 사태의 영향으로 볼 수 있습니다. 광주 사태라는 것은 북한 입장에서 거의 교과서적인 일입니다.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의 전략이란 것은, 남한의 혁명적인 역량이 성숙되는 것과 북한의 군사적 무력이 결부돼서 통일을 이룬다는 것이 북한의 변함없는 통일 전략입니다. 그런데 남한에서 광주 사태가 일어나니까 북한에는 거의 교과서적 문제였죠. 북한 지도부에게는 광주 사태에 대해 그냥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죠. 그렇지만 무력으로 개입하기에는 어려운 일이 있었는데, 제일 결정적인 요인은 미국이 북한에 개입하면 가만히 안 있겠다는 의지를 표시했어요. 그러니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테러였어요. 아웅산 테러는 북한이 4번 째 시도한 테러입니다. 그 이 전에 세 번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어요. 필리핀, 캐나다, 가봉에서 실패한 다음에 결국 버마에서 기회를 잡은 거죠. 결국 실패했지만요.

기자) 북한 정찰국 소속으로 밝혀진 테러범 3 명 가운데 신기철은 총격으로 즉사하고 리더인 진모 소좌는 자백을 거부해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그런데 강민철은 자백을 했습니다.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습니까?

라종일 교수) 복합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 째는 부상을 회복하는 도중에 아주 친절한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누그러졌을 겁니다. 두 번째는 처음으로 외부 세계 정보를 많이 접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꼭 옳았던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 또 국제적 반응을 보니까 북한이 잘했다는 것은 하나도 없지 않았습니까? 남한 내부까지도요. 그리고 세 번째로 정말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제 책에도 잘 설명돼 있지만 자기네들이 적한테 사용하기로 돼 있는 수류탄이 일종의 부비트랩이었어요. 그러니까 수류탄을 뽑으면서 바로 폭발했습니다. 다시 말해 위급한 상황에서 자기네들을 죽이기 위해서 북한 당국이 조작한 무기였죠. 그래서 김진수와 강민철 모두 왼쪽 팔을 잃었어요.

기자) 테러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폭탄을 지급한 것이군요.

라종일 교수) 그렇죠. 죽도록 강요한 겁니다. 무의식 중에 자살한 것으로 만들려는 거였죠.

기자) 강민철 입장에서는 조국에 강한 배신감도 느꼈을 수 있겠군요.

라종일) 그렇습니다. 배신감도 느끼고 또 북한이 자기네들 존재도 부인하고 당시 도와주려고 한 게 전혀 없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자백을 하기로 결심한 것 같습니다.

기자) 강민철을 접촉했을 때 그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라종일) 제가 직접 접촉한 것은 아니구요. 버마 정보부에 협력을 요청해서 처음으로 면회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외교관이 강민철을 면회 갈 수 있도록 했죠. 강민철은 15년 만에 감옥에서 한국 사람을 처음 만난 겁니다. 그래서 한국 외교관이 음식물과 용돈 같은 것도 조금 도와주고 그랬죠. 첫 반응은 굉장히 반항적이었다고 그래요. 남한이든 북한이든 모두 증오를 보인 거죠. 자기 일생을 모두 망친 민족이다 하면서 강한 거부감과 증오 표시를 했답니다. 그러니까 우리 외교관이 당신 얘기를 들을 테니 내 얘기도 좀 들어봐라 하면서 친절하게 대하니까 마음이 침착해졌다고 합니다. 특히 그리웠던 한국말을 15년 만에 처음으로 했으니까 반가웠겠죠. 결국 태도가 부드러워지고 우리 측 외교관을 형님으로까지 불렀다고 해요. 또 온몸에 부상당한 흔적들도 보여 주고 자기 개인 사정도 얘기하고 그랬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기자) 강민철의 석방을 위해 많이 노력하셨고 한국행도 추진하신 것으로 압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라종일 교수) 당연하지 않았겠습니까? 우선 흉악한 테러범이지만 하나의 사람이고 동족이고 남북관계 갈등의 희생자입니다. 그 사람 한 명에게만 죄를 묻고 그 사람을 감옥에 넣은 채로 그대로 두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자) 그런데 한국 정부는 강민철의 석방과 입국을 거부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었습니까?

라종일 교수) 대략 그랬을 겁니다. 그 때는 북한과 화해하고 협력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죠. 이른바 햇볕정책의 시기니까요. 그런데 강민철이 한국에 오면 북한과의 관계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게 있었고 일부에서는 너무 시간이 지나서 정보 가치가 없다는 얘기도 있었던 것으로 그렇게 들었습니다.

기자) 북한은 당시 테러를 부인하고 한국 안기부의 조작이란 주장도 했는데, 그런 배경도 영향을 미친 겁니까?

라종일 교수) 그런 얘기도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데려오면 북한에서 아이고 거 봐라, 남한이 조작한 사건이다 하는 그런 얘기가 있을 수가 있었죠.

기자) 결국 강민철은 25년간 복역한 끝에 2008년 간암으로 사망했습니다. 그 뒤 어떤 조치들이 있었습니까?

라종일 교수) 전혀 없었습니다. 25세에 감옥에 들어가서 25년 복역하고 죽었습니다. 장례식도 전혀 없이요. 죽음 다음에 제가 버마 관리들에게 시신 처리를 어떻게 했냐고 물었더니 그냥 화장해서 재를 버렸다고. 그래서 어디에 버렸냐고 하니까 모른다고 그저 강가에 뿌렸다고 했습니다.

기자) 아웅산 테러 30주년이었던 지난해 강민철에 관한 책을 쓰셨습니다.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셨습니까?

라종일 교수) 우선 국가권력의 비정함입니다. 남쪽에서는 광주 사태가 있었고 북한에서는 자기들 대남사업, 혁명과 남한의 혁명적 역량을 구축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테러를 시켰죠. 강민철은 도구로 쓰였죠. 도구로 쓰인 다음 버려져 버렸어요. 그 다음에 더 흥미로운 것은 전두환 대통령하고 김일성 주석은 그 후 좀 지나 굉장히 친해졌어요. 상당히 친해서 서로 사절도 교환하고 선물도 교환하고 그랬죠. 아웅산 사건의 배경이 된 두 주역은 민족의 통일을 의논하면서 버마에 갇혀 있는 그 젊은 사람은 일체 언급이 없어요. 그 사람을 좀 도와주자는 말 한 마디도 없이 전두환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은 상당히 정치적으로 친해진 겁니다. 이런 일은 국가의 권력과 관련이 돼서 세계 도처에서 지금도 발생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강민철을 통해 그런 국가권력의 비정함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기자) 끝으로 남북한 정부에 어떤 조언을 하고 싶으십니까?

라종일 교수) 제가 늘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한국 민족들은 모두 통일을 바랍니다만 왜 통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통일을 그저 강대한 국가를 만들겠다 하는 정치적 어젠다로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통일을 휴먼 어젠다로 생각해 달라는 겁니다. 통일을 통해 여기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또는 주변에 사는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도 생활의 질이 더 좋아지고 도덕적 수준이 좀 더 좋아지는 방향으로, 휴먼 어젠다로서 인간의 문제에 관한 입장에서 통일을 생각해 달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아웅산 테러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허락을 받아 인민군 정찰국 산하 특수 8군단 소속 특공부대 강창수 소장에게 지령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강창수는 6.25 남침 때 戰死한 강건 장군의 아들. 폭파임무를 맡은 3人1組의 組長은 진모 소좌(생포 후 사형), 組員은 강민철(최근 옥사), 신기철(체포과정에서 사살됨) 상위였다.
 
 세 사람을 태운 배 愛國동건호는 1983년 9월9일 밤 황해도 옹진항을 출항, 8일만인 9월17일 오후 미얀마 랭군항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내린 세 공작원은 駐 미얀마 북한 대사관 전창휘 참사관의 집에 도착하였다. 세 사람은 이곳에서 2주일간 머물면서 테러 실행 계획을 세웠다. 폭약과 조종장치는 다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 정보기관은 애국동건호가 입항, 수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미리 탐지, 본부에 보고하였다. 盧信永 안기부장은 全斗煥 대통령에게 미얀마 방문 취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6일 테러범들은 숙소를 나와 전 참사관의 안내를 받으면서 아웅산 묘소를 정찰하였다. 다음날 새벽 세 사람은 全斗煥 대통령 일행이 참배할 아웅산 묘소 건물의 천장에 폭발물(폭탄 3개)을 설치하였다. 강민철과 신기철이 천장으로 올라가 설치하는 사이에 진모는 밑에서 망을 보았다.
 
 이 폭탄들은 1~2KM 이내에서 원격조종으로 터지도록 했으며 유효 살상 범위는 80m 내였다. 세 사람은 이틀간 묘소 주변 숲속에서 잤다.
 
 10월9일 오전 범행에 성공한 세 사람은 항구로 탈출, 북한 선박편으로 귀환하기로 하고 흩어졌다. 組場 진모는 10월10일 저녁 강을 헤엄쳐 바다로 향하다가 주민들에게 발각되었다. 주민들이 포위망을 압축해오자 수류탄을 터뜨렸다. 그를 건져냈더니 살아 있었다.
 
 강민철과 신기철은 11일 어선에 편승, 항구로 가려다가 수상하게 여긴 어부들의 신고로 경찰관들에게 연행되었다. 경찰이 초소로 끌고 온 두 사람을 수색하려 하자 두 사람은 수류탄을 던지고 응사하면서 탈출하였다. 신기철은 경비병에 의하여 현장에서 사살되고 강민철은 도망쳤다가 다음날인 12일 군인들에게 붙들리기 전에 수류탄을 터뜨렸다. 왼쪽 팔뚝이 날아갔으나 목숨을 건졌다.
 
 강민철은 수사에 협조하였고 진모는 거부하였다. 두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진모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강민철은 협조한 점이 참작되어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강민철은 복역중 한국측 인사를 만나 "한국에 귀국하여 살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 강민철이 몇달 전에 사망하였다.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1983년 10월 9일버마의 수도 랑군에 위치한 아웅 산 묘역에서 미리 설치된 폭탄이 터져 한국인 17명과 미얀마인 4명 등 21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무력부 정찰국의 폭탄 테러 사건이다. 대한민국서석준 부총리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등 각료와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기타 수행원들이 부상당하였다. 사건 직후 대한민국대통령 전두환은 공식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1983년 10월 8일에 대한민국대통령 전두환은 공식 수행원 22명, 비공식 수행원 등을 데리고 동남아 5개국의 공식 순방길을 출발했다. 버마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순방길의 첫 방문지였으며, 이 날은 버마독립운동가 아웅 산의 묘소에서 참배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10월 9일, 부총리 서석준을 비롯한 수행 공무원들과 경호원들은 행사 준비 및 예행 연습을 하고있었고. 같은 시각인 오전 10시, 전두환은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출발한다. 예행연습을 끝내고 대통령을 맞이할 준비를 한 서석준을 비롯한 수행원들은 오전 10시 26분에, 전두환 측근으로부터 무전 연락을 받아 "차량 정체로 인해 전두환 대통령이 약 30여 분뒤에 지연도착" 한다는 연락을 받고 한번 더 애국가의 예행 연습을 한다. 그런데 미리 대기해 있던 폭탄테러 용의자중 1명인 신기철전두환 대통령이 오전 10시30분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첩보를 통해 파악한 상태였고 예행연습중에 나온 음악을 듣고 전두환이 도착했다고 착각하여 오전 10시 28분에 미리 설치해 두었던 폭탄을 터트린다. 이 폭발로 예행연습중이던 서석준과 수행공무원 기자를 포함하여 17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한다. 전두환은 차량정체로 인해 애당초 도착예정인 10시 30분에서 30분뒤인 11시에 도착했다. 따라서 30분에 정상적으로 도착을 했다면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다. 이후 전두환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한다.

 

당시 버마는 사회주의 성향으로 대한민국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가까운 국가였으나 자국의 독립 영웅인 아웅 산 묘역에서 폭탄 테러를 일으킨 것에 대해 격노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국교를 즉시 단절하였다. 또한 미얀마 경찰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의 범인 3명 가운데 신기철을 인근에서 사살하고, 진 씨라는 성만 알려진 한 사람과 강민철 두 명을 체포하였다. 진은 1986년에 사형이 집행되었고, 강민철은 미얀마에서 복역 중 2008년 5월 18일 53세를 일기로 중증 간질환으로 사망하였다. 사건 당일로 전두환은 모든 순방길을 취소하고 특별기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파편화된 시신들은 수습되었으며, 현장에서 희생된 서석준 부총리 등 17명은 합동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이 사건으로 버마를 포함한 서사모아 등의 국가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수교를 단절했고, 비동맹국 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발언권이 약화되었다. 한편 대한민국의 대학들은 가을 축제를 모두 취소하거나 연기하고, KBS, MBC 등의 방송국은 쇼 및 오락 프로그램을 취소하였다.

이후 29년 간 대한민국 대통령이 방문을 하지 않다가 2012년 5월 14일 베이징에서 한중일 정상회담을 마친 다음 이명박 대통령이 극비리에 미얀마를 방문하였고, 같은 해 10월 8일 미얀마 대통령인 테인 세인이명박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하였다
 

사망자

서석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이계철: 주 버마대사

김재익: 대통령 비서실 경제 수석 비서관

하동선: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이기욱: 재무부 차관

강인희: 농림수산부 차관

김용한: 과학기술처 차관

심상우: 국회의원, 개그맨 심현섭의 아버지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이재관: 청와대 공보비서관

한경희: 대통령 경호실 경호관

정태진: 대통령 경호실 경호관

이중현: 동아일보 사진기자

 

 

테러리스트 강민철의 삶과 죽음으로 바라보는 남과 북의 비극

아웅산 국립묘소 테러사건과 남과북『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 이 책은 정치학자 출신이자 국가정보원을 지낸 바 있는 라종일 저자의 아웅산 테러사건의 테러리스트 강민철의 삶을 통해 역사적 진실과 남북 대결의 비극적 희생을 고발하고 있다. 강민철 개인의 희생적 삶에 대한 연민의 넘어 60년 분단 상황이 만들어낸 국가폭력의 야만성과 남북의 대치 상태에 유린된 인권에 주목하고 있다.

1983년 10월 9일 ‘아웅산 국립묘소 테러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북한의 소행으로 들어났다. 남측 대통령 암살을 목표로 한 북한 공작원 3인의 테러는 실패로 끝났고 생포된 2인 중 1인은 사형이 강민철에겐 무기형이 언도되어 25년 동안 버마의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이방의 감옥에서 유폐된 채 오십대 중반의 몸으로 숨졌다. 강민철이 벌인 테러는 용서될 수 없는 사건이지만 명령에 복종했던 테러 가해자는 국가폭력의 희생자이며 남한의 외면도 인도주의적 관점의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우리 역사의 비극적 이면과 국가권력의 폭력을 환기하고 반성할 수 있을 때 남북 관계의 개선도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아웅산 테러사건"을 저지른 북한 공작원 강민철(53·[사진])씨가 2008년 5월 18일 숨졌다.

<에이피>(AP) 통신은 이름을 밝히길 꺼린 미얀마(버마) 수감당국 관계자의 말을 따, 미얀마 인세인 교도소에서 25년간 수감 중이던 강씨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이 관계자는 강씨가 미얀마 감옥에 수감된 외국인 최장 수형자였으며, 사망 전 간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밝혔다.

강씨는 1983년 10년,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일행을 겨냥해 폭탄 테러를 일으킨 3명의 공작원 중 유일한 생존자다. 강씨 등의 테러로 당시 대통령을 수행하던 각료 등 21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로 인해 미얀마는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하지만 최근 북한이 미얀마군을 지원하면서 양국간 관계 개선이 이뤄져, 두 나라는 지난해 4월 외교관계를 회복했다.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은 강씨가 송환을 바라고 있다며, 국정원이 나서 그를 데려와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지만, 미얀마와 동남아 일대 뉴스를 전문으로 다루는 <이라와디>는 “그는 지금 남북한 어디에도 가기 싫어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