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암살범은 북한과 남한을 넘나든 이중 스파이 출신의 조모씨라는 주장이 나왔다. 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이 7월초 시판되는 자신의 신간 저서 『박정희 시대의 마지막 20일』(인물과사상 펴냄)에서 조씨의 증언 내용을 내용을 공개했다고 조선일보가 27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김 전 의원은 “조씨의 말을 종합해 보면 암살은 차지철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며 “2005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가 밝힌 조사 결과는 상당 부분 왜곡됐다”고 주장했다. 조씨는 책 발간 직후 기자회견 개최를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조씨의 증언을 토대로 한 김 전 의원의 저서 내용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암살 실행조는 2명이었고 이들은 중정(中情ㆍ국가정보원의 전신) 요원 3명의 도움을 받았다. 1979년 10월 7일 김형욱은 파리 중심부 ‘르 그랑 세르클’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던 중 이곳에서 중정 요원을 만났다. 중정 요원은 밖에서 한국 여성이 기다린다는 말을 전했다. 중정은 김형욱이 미국으로 망명한 뒤 프랑스로 올 때까지 계속 그를 관리하고 있었다. 중정 요원은 김형욱에게 “부장님, 저쪽 차에서 여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차(캐딜락)를 타고 따라가시면 됩니다”라는 말을 했다. 김형욱은 아무 의심 없이 중정 요원이 문을 열어준 두 번째 캐딜락 승용차에 탑승했다. 그 순간 뒷좌석에 앉아 있던 조씨가 김형욱의 목을 꺾었다.
합기도, 태권도 등 무술 합계가 20단이 넘는 조씨의 완력 앞에 김형욱은 속수무책이었다. 순간 “우두득!”하며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김형욱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조씨는 김형욱의 몸에서 혁대, 지갑 등 소지품을 꺼냈다. 신원을 감추기 위해서다.
암살조는 파리에서 서북부 방향으로 4㎞ 떨어진 양계장에 도착했다. 현장에는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에 파견돼 훈련을 받고 있던 청와대 경호실 직원 곽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양계장의 관리인은 알제리 출신 노인이었다. 곽모씨는 전날 닭을 구입하는 척하며 노인과 안면을 텄다. 암살 당일 곽씨는 노인에게 술을 사준 뒤 취해 잠들게 했다. 앙계장을 지키던 개도 곽씨가 약을 먹여 재웠다. 암살조는 김형욱을 닭 사료용 분쇄기에 넣어 처리했다.
조씨와 곽씨는 김형욱을 암살한 뒤 곧바로 자신들이 묵던 허름한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긴 뒤 스페인 쪽으로 빠져나왔다. 조씨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뒤 도쿄에서 이스라엘 텔아비브행(行) 비행기를 탔다. 조씨는 그곳에서 다시 이스라엘 북부 하이파항(港)까지 간 뒤 동원수산 선적(船籍)의 ‘씨월드’호(號)를 탔다. 씨월드호는 곡물과 목재 수송을 하는 화물선이다. 그는 이 배로 벨기에의 항구도시 안트베르펜에 도착했다. 거기서 승용차를 타고 10월 1일 프랑스 파리로 잠입했다.
조씨는 김형욱을 암살한 뒤 그는 곧바로 스페인 국경까지 갔다. 거기서 1주일간 걸어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모로코까지 갔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씨월드호를 타기 위해서였다. 조씨는 잠입 루트의 역순(逆順)으로 하이파항~텔아비브~도쿄 코스를 되돌아왔다.
조씨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서울의 한 사립대 사학과를 나왔다. 그의 아버지는 어릴 적 일본으로 밀항했으며 교토(京都)에서 조총련 고위 간부를 지내고 있었다. 조씨는 한일회담 반대로 촉발된 6ㆍ3사태 데모 때 신동아 화보에 크게 사진이 찍혔다. 조씨의 아버지는 그 사진을 우연히 일본에서 보고 자기 아내와 조씨, 딸을 일본으로 밀항시켰다. 조씨는 이후 북한으로 가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을 만났다.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은 자신과 ‘의형제를 맺자’고 했을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조씨는 이후 김일성(金日成) 전 주석도 면담했다. 북한에서 각종 훈련과 임무를 부여받은 그는 다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귀환했으나 거리에서 한국인 여성을 희롱하는 일본 건달과 싸우다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 조사를 받던 중 불법체류자임이 발각돼 한국으로 추방 당한 조씨를 김포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정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그는 중정으로 끌려가 북한에서 박지만 납치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는 전향 선언 뒤에도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다 북파공작대 요원이 됐다.
북한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 납치 임무를 맡았던 조씨는 중정의 회유로 전향한 것이다. 조씨는 1971년 청와대에서 처음 만난 박 대통령으로부터 “자네가 내 아들을 살렸다”는 격려를 들었다.
1979년 박 전 대통령은 조씨를 다시 불러 술을 함께 마셨다. 이 자리에서 조씨가 “김형욱을 제가 처리하겠습니다”라고 했지만 박 대통령은 “뭐, 그럴 것 없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위험한 발언을 하는 김형욱 전 부장에 대해 “내가 믿었던 이놈이 나쁜 놈이로구나”라는 말을 했지만 구체적인 암살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다.
조씨가 김 전 부장 암살의 진상을 밝히기로 한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 북파 공작원에 대한 처우가 형편없이 낮아진 데 따른 불만 때문이다. 조씨가 이런 불만을 토로하고 다니자 의문의 사건이 잇따랐다.
DJ정권 중반 무렵 서울 은평구 진관내동 근처에서 조씨는 승용차에 치였는데 운전자가 중정 요원 출신이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노무현 정권 당시 국정원장은 조씨가 가짜라던 입장에서 돌변해 조씨에게 거액의 정착자금과 함께 고급 시계까지 선물했다.
2005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는 김형욱 암살은 중정이 프랑스 중정 책임자 이상열 주불(駐佛)공사에게 지시했으며, 이 공사가 파리에서 어학 연수 중이던 신현진ㆍ이만수(이상 가명)씨를 ‘살해 실행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신ㆍ이씨는 동구권 출신의 제3국인 두 명을 끌어들여 소음(消音)권총으로 김 전 부장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정 소속인 이 공사와 신ㆍ이씨는 지원을 맡았을 뿐이고 동구권 출신이라는 2명은 바로 조씨와 곽씨였다. http://news.joins.com/article/998/3664998.html?ctg=1000&cloc=home|list|list1
*30년 만에 밝혀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암살 사건'
- ▲ 1967년 7월 8일 '북괴대남적화공작단사건(동백림사건)'을 발표하고 있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손에 증거물을 들고 있다
김형욱은 분쇄기 속으로… 그 분쇄기 뒤엔 킬러가
조씨 "제가 처리하겠습니다"…박 前 대통령 "뭐, 그럴 것 없어"
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김형욱(金炯旭) 전 중앙정보부장이 이중(二重) 스파이 출신의 프로페셔널 킬러에게 암살당한 사실이 30년 만에 밝혀졌다. 이 사실은 김경재(金景梓) 전 민주당 의원이 7월 초 발간할 책 '박정희 시대의 마지막 20일'(인물과 사상)에 수록돼있다.
이 책은 200자 원고지 1300장 분량이다. 김 전 의원은 1985년 박사월(朴思越)이란 필명으로 전 3권의 김형욱 회고록을 출간한 바 있다. 김 전 의원의 책에 따르면 암살범은 조모씨다. 그의 일본명은 구로이 다카기리(黑井身切)이며 여권에는 김승(金勝)이란 가명을 썼다.
김 전 의원의 책에서 조씨가 밝힌 암살 정황에 따르면, 암살 실행조는 2명이었고 이들은 중정(中情·국가정보원의 전신) 요원 3명의 도움을 받았다. 납치 직전까지 파리의 '르 그랑 세르클' 카지노에서 도박 중이던 김형욱은 중정 요원들로부터 한국 여성이 밖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밖으로 나왔다.
한 중정 요원은 김형욱에게 "부장님, 저쪽 차에서 여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차(캐딜락)를 타고 따라가시면 됩니다"라는 말을 했다. 김형욱은 의심하지 않고 캐딜락에 오르자마자 조씨에게 목이 꺾여 실신했다. 조씨는 김형욱의 혁대, 지갑 등 소지품을 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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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발언 도중 안경을 고쳐 쓰고 있다. 1979년 10월 7일 그가 암살된 후, 이 사건은 30년 동안 미궁에 빠져 있었다. 김형욱 회고록을 낸 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이 마침내 킬러의 신원과 당시 상황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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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년 10월 필리핀 방문 당시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에서 두번째)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보고를 듣고 있다. / 조선일보 DB
암살조는 파리에서 서북부 방향으로 4㎞ 떨어진 양계장에 도착한 뒤 김형욱을 닭 사료용 분쇄기에 넣어 처리했다. 현장에는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에 파견돼 훈련을 받고 있던 청와대 경호실 직원 '곽씨'가 있었다고 한다.
김 전 의원은 "조씨의 증언을 3년간 확인해 김형욱 사망 30주년을 맞아 출간했다"며 "그의 말을 종합해 보면 암살은 차지철(車智澈)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2005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가 밝힌 조사 결과는 상당부분 왜곡됐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책을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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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7일김형욱은 파리 중심부 카지노에서 중정 요원을 만났다. 중정은 김형욱이
미국으로 망명한 뒤 프랑스로 올 때까지 계속 그를 관리하고 있었다. 김형욱은 아무 의심 없이 중정 요원이 문을 열어준 두 번째 캐딜락 승용차에 탑승했다. 그 순간 뒷좌석에 앉아 있던 조씨가 김형욱의 목을 꺾었다.
합기도, 태권도 등 무술 합계가 20단이 넘는 그의 완력 앞에 김형욱은 무력했다. 순간 "우두득!"하며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김형욱은 정신을 잃었다. 조씨는 김 전 부장의 몸에서 혁대, 지갑 등 소지품을 꺼냈다. 신원을 감추기 위한 조치였다.
양계장의 관리인은 알제리 출신 노인이었다고 한다. 조씨와 한 조였던 곽모씨는 전날 닭을 구입하는 척하며 노인과 안면을 텄다. 암살 당일, 곽씨는 노인에게 술을 사준 뒤 취해 잠들게 했다. 김 전 의원은 "앙계장에 개가 있었지만 곽씨가 약을 먹여 잠들게 했다"고 했다.
조씨와 곽씨는 김형욱을 암살한 후 곧바로 자신들이 묵던 허름한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긴 뒤 스페인 쪽으로 빠져나왔다. 김 전 의원은 "수년 전 MBC PD수첩팀이 문제의 양계장을 취재했지만 당시 광우병의 여파로 닭 사료용 분쇄기가 치워진 상태여서 현장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김형욱이 아무 의심 없이 따라 나올 만큼 푹 빠졌던 미모의 한국여성은 누굴까. 항간에는 이국적인 마스크로 뭇 남성을 설레게 했던 유명 여배우와 가수 이름이 거론된 적이 있지만 김 전 의원은 "그 사람은 아니다"고 했다. 다만 그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만 책에는 쓰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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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잠입과 탈출 루트암살 주역인 조씨의
프랑스 잠입과 탈출 행적은 웬만한 스파이 영화를 뺨칠 정도다. 김 전 의원이 조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바에 따르면 조씨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뒤
도쿄에서
이스라엘 텔아비브행(行) 비행기를 탔다.
조씨는 그곳에서 다시 이스라엘 북부 하이파항(港)까지 간 뒤 동원수산 선적(船籍)의 '씨월드'호(號)를 탔다. 씨월드호는 곡물과 목재 수송을 하는 화물선이라고 한다. 그는 이 배로 벨기에의 항구도시 안트베르펜에 도착했다. 거기서 승용차를 이용해 10월 1일 프랑스 파리로 잠입했다.
10월 7일 김형욱을 암살한 후 그는 곧바로 스페인 국경까지 갔다. 거기서 1주일간 도보(徒步)로 피레네 산맥을 주파한 뒤 스페인~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모로코까지 갔다. 자신을 태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씨월드호를 타기 위해서였다.
조씨는 잠입 루트의 역순(逆順)으로 하이파항~텔아비브~도쿄 코스를 되짚어 귀환했다. 김 전 의원은 조씨에 대해 "대단한 완력의 소유자이며 지금도 한번에 300회 이상 푸시 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힘과 민첩함, 완력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말했다. 조씨는 책 발간 후 기자회견을 열 것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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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 / 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조씨는 누구?
조씨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서울의 한 사립대 사학과를 나왔다. 그의 아버지는 어릴 적 일본으로 밀항했으며 교토(京都)에서 조총련 고위 간부를 지내고 있었다. 조씨는 한일회담 반대로 촉발된 6·3사태로 데모를 할 때 동아일보가 발간하는 신동아 화보에 크게 사진이 찍혔다.
김 전 의원은 당시 사진이 매우 상징적인 것이라고 했다. 즉 데모에 참가하고 있던 조씨를 경찰이 연행하려는 순간, 주변에 있던 할머니가 조씨를 붙잡는 장면이 포착된 것이다. 이는 당시 정권에 대한 민심(民心)을 잘 보여주는 사진으로 평가받았다고 한다.
조씨의 아버지는 신동아에 실린 그 사진을 우연히 일본에서 보고 자기 아내와 조씨, 딸을 일본으로 밀항시켰다. 조씨는 이후 북한으로 가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을 만났다. 조씨에 따르면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은 자신과 '의형제를 맺자'고 했을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조씨는 이후 김일성(金日成) 전 주석도 면담했다. 북한에서 각종 훈련과 임무를 부여받은 그는 다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귀환했으나 우연한 사건으로 신분이 드러났다. 거리에서 한국인 여성을 희롱하는 일본 건달과 싸우다 경찰에 붙잡힌 것이다.
*김중린
1924 평북 벽동~.
1969년 이후 조선노동당 비서국 비서로서 주로 대남혁명사업을 지휘한 인물.
8·15해방 전 중국에서 민족해방동맹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8년 북조선노동당 함경북도 도당위원회 부장으로 당료생활을 시작했으며, 1959년 조선적십자회 중앙상무위원으로 재일교포 북송사업에 깊이 관여했다.
북한이 1·21사태,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사건 등 일련의 무장 게릴라 중심의 대남사업에 실패하자 1969년 허봉학(許鳳學)의 뒤를 이어 조선노동당 대남담당 비서로 선임되었다. 1970년대 대남사업을 담당하면서 적극적인 군사개입정책을 지양하고 남한에 혁명여건을 조성하는 데 치중하는 방식으로 기본전술을 전환했다. 조선노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정치위원회 위원으로, 1974년 정치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80년 6월 당이론지인 〈근로자〉에
〈항일의 기치 밑에 전민족을 굳게 결속시킨 반일민족통일전선〉이라는 논문을 기고하여 통일사업에서 민족통일전선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역설했다.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비서국 비서로 재선되었으나 1984~86년 1년 간격으로 비서직에 기용·해임이 엇갈리다가 1987년 3월 관영 조선중앙통신사 사장 겸 공보위원장에 취임했고, 1988년 11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기 4차 전원회의에서 비서국 근로단체담당 비서로 재기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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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대통령은 암살 지시 내리지 않았다!경찰 조사를 받던 중 불법체류자임이 발각돼 한국으로 추방당한 조씨를 김포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중정 요원들이었다. 그는 중정으로 끌려가 북한에서 "박지만 납치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는 전향 선언 뒤에도 이중스파이 노릇을 하다 북파공작대 요원이 됐다.
북한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고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志晩)씨 납치 임무를 맡았던 조씨는 중정의 회유로 전향했다. 조씨는 1971년 청와대에서 처음 만난 박 대통령으로부터 "자네가 내 아들을 살렸다"는 격려를 들었다.
1979년 박 전 대통령은 조씨를 다시 불러 술을 함께 마셨다. 이 자리에서 조씨가 "김형욱을 제가 처리하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박 대통령은 "뭐, 그럴 것 없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는 항간에 나돌던 박 전 대통령 암살 지시 의혹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조씨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위험한 발언을 하는 김형욱 전 부장에 대해 "내가 믿었던 이놈이 나쁜 놈이로구나"라는 말을 했지만 구체적인 암살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조씨는 암살 동기에 대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고 해 '신념에 따른 암살'이었음을 분명히 했다.
김 전 의원은 김 전 부장 암살 지시의 주역이 차지철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라고 추정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에 파견돼 훈련을 받고 있던 한국의 요원이 조씨와 합류했는데 당시 모사드와 훈련 협정을 맺은 것은 중정이 아니라 경호실이었다는 것이다. 김 전 의원은 "중정은 당시 김형욱이 미국 하원에서 한 일련의 발언들을 제지하지 못해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며 "차 전 실장이 이 일을 계기로 확고한 2인자로 발돋움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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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폭로를 결심했나?조씨가 김 전 부장 암살의 진상을 밝히기로 한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 북파 공작원에 대한 처우가 형편없이 낮아진 데 따른 불만 때문이다. 조씨가 이런 불만을 토로하고 다니자 의문의 사건이 잇따랐다.
DJ정권 중반이 넘어갈 즈음, 서울 은평구 진관내동 근처에서 조씨는 승용차에 치였는데 운전자가 전 중정 요원이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노무현 정권 당시 국정원장은 조씨가 가짜라던 입장에서 돌변해 조씨에게 거액의 정착자금과 함께 고급 시계도 선물했다고 김 전 의원은 주장했다.
김 전 의원은 2005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가 밝힌 조사 내용도 의혹에 가득찬 것이라 주장했다. 당시 진실위는 김형욱 암살은 중정이 프랑스 중정 책임자 이상열 주불(駐佛)공사에게 지시했으며, 이 공사가 파리에서 어학 연수 중이던 신현진·이만수(이상 가명)씨를 '살해 실행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진실위에 따르면 신·이씨는 동구권 출신의 제3국인 두 명을 끌어들여 소음(消音)권총으로 김 전 부장을 살해했다. 하지만 정작 살해 실행조로 지목된 신씨가 시체 유기장소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 의문이 제기됐다. 핵심인물인 이상열 공사는 당시 진술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김 전 의원은 "중정 소속인 이 공사와 신·이씨는 지원을 맡았을 뿐이고 동구권 출신이라는 2명이 바로 조씨와 곽씨였다"고 주장했다. 김 전 의원은 또 조씨의 신상을 공개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나와 직선 거리 4㎞쯤에 있으며 책 발간 전까지는 모습을 안 나타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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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은 누구?김씨는 1925년 1월 16일생으로 고향은 황해도 신천이다. 1948년 육사 8기로 입학했으며 1961년 5·16 때 중령의 신분으로 쿠데타에 참가했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최고위원이 됐고 1963년 7월 중앙정보부장이 됐다.
김씨는 3선 개헌 등의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의 정적을 가차없이 처리해 원성을 샀다. 박 전 대통령은 이만섭(李萬燮) 의원의 해임건의를 받고 1969년 10월 20일 그를 해임했다.
김씨는 공화당 의원으로 활동했지만 1972년 10월 17일 유신(維新) 선포 후 의원직을 상실하자 박 전 대통령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1973년 4월 15일 미국으로 망명했다.
김씨는 1977년 '코리아게이트'사건이 터지자 미국 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유신정권의 비화를 폭로했다. 김씨가 프랑스로 간 것은 1979년 중앙정보부 해외담당 차장의 권유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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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는 누구?전남 순천생으로 1942년생.
서울대 정치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를 거쳐 사상계에서 일하다 15년간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귀국해 14·15대 의원을 지냈다. 그가 '박사월'이라는 필명으로 낸 김형욱 회고록은 당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수십종의 해적판이 나돌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 책은 1980~89년에 발간된 책을 대상으로 한 '10년간의 명저' 조사에서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 김홍신의 소설 '인간시장', 도종환의 시집 '접시꽃 당신'에 이어 4위에 올랐다. 그는 현재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에서 집필을 하고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26/2009062601243.html?Dep0=chosunmain&Dep1=news&Dep2=headline1&Dep3=h1_02
*김형욱 전(前)중앙정보부장과 김형욱 전(前)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 자료
1.김형욱 전(前) 중앙정보부장
(1)성명: 김형욱(金炯旭)
(2)생년월일: 1925년 1월 16일(양력, 쥐띠)
(3)출생지: 황해도 신천
(4)학력
ㄱ.육사 졸업
ㄴ.육군대 졸업
ㄷ.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ㄹ.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
(5)경력
ㄱ.5.16군사쿠데타 최고회의 최고위원
ㄴ.1963년 7월----1969년 10월 제4대 중앙정보부 부장 역임
ㄷ.1971년 4월----1972년 10월 제8대 국회의원(공화당 전국구)
ㄹ.1973년 4월 미국 망명
ㅁ.1979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
(6)가족관계
배우자 ---- 신영순(申英順, 1932년생)
2.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진실위) 김형욱 실종사건 중간조사 발표내용
조사결과에 따르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1979년 9월말 이전 중정의 프랑스 거점장이던 이상열 주프랑스 공사에게 김형욱 실해를 지시했으며 이에 따라 이상열 공사가 적임자로 선정한 중정 연수생 신현진(가명)이 살인청부를 받은 제3국인 2명과 함께 1979년 10월 7일 승용차로 납치, 파리 근교로 끌고가 제3국인이 권총으로 살해했다
이들은 당시 김형욱 전부장의 시신을 낙엽으로 덮어놓은 채 현장에서 빠져나온 것으로 파악됐으나 신현진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사체유기 장소를 진술하지 않아 추가조사가 필요하다고 진실위는 설명했다
-이상열 공사가 김형욱 전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돈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받고 전주를 소개시켜주겠다며 1979년 10월 7일 샹젤리제 거리에서 만나기로 한 뒤 신현진이 제3국인 2명과 함께 이상열공사의 차량을 이용해 납치한 것으로 조사됐다
-제3국인 2명은 김형욱 전중앙정보부장을 살해한 뒤 신현진과 함께 사건에 연수행인 이만수(가명)로부터 미화 10달러가 든 돈을 받은 것으로 파악됐다
-이상열공사는 관저에서 신현진으로부터 결과를 보고받고 김형욱 전중앙정보부장의 여권과 지갑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 소지품은 철저히 인멸한 뒤 귀국할 것을 지시했고 신현진은 귀국 후인 1979년 10월 13일께 김재규 부장에게 결과를 보고했다고 진실위는 설명했다
김재규 부장은 당시 신현진의 보고를 받고 격려한 뒤 그를 중정부장 직속기관인 정책연구실로 발령하고 300만원과 20만원이 든 봉투 두개씩을 지급 이만수와 나눠갖도록 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와함께 김형욱 전중앙정보부장을 파리로 유인하는 과정에 관련된 것으로 의혹이 제기됐던 연예인 최모, 정모씨등 여성 3명을 면담한 결과, 개입정황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진실위는 덧붙였다
-진실위는 당시 중정 주프랑스 거점 요원 및 연수생8명과 박정희전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본부장 전두환 전대통령을 포함해 관련인물 33명에 대한 면담을 실시했으며 이상열공사에 대해 3차례 면담조사를 했으나 사건 개입 사실은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관련내용에 대해서는 진술을 거부했다
-국정원 진실위 김형욱 사건 중간발표 요약
http://www.yonhapnews.co.kr/news/20050526/021200000020050526125022K2.html
3.신문보도 내용 자료
(1)김형욱 전(前)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 개요와 쟁점(연합뉴스 자료)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은 김대중 납치사건이나 정인숙 피살사건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3대 미스터리 사건으로 꼽힌다
김형욱 사건은 폭력집단이나 북한 또는 국가권력등 납치실체에 대한 의문점 못지 않게 국가권력이 자행한 것이라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배후인가 아니면 그와 충성경쟁을 벌이던 차기철 경호실장의 소행인지 여부도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10.26사건 3주 전인 1979년 10월 7일 오후 7시 프랑스 파리 <르 그랑 세르클> 카지노를 나선 이후 (당시 54세) 실종됐다
역대 중앙장보부장 중 최장수인 6년 3개월간 막강한 자리를 지키다 전격 경질된 김형욱은 1973년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박동선 로비 사건을 조사 중인이던 미국 의회의 프레이저 청문회 등에 나가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표적이 됐다
그는 실종 전 항공편으로 뉴욕에서 파리에 도착 특급호텔인 리츠호텔에 머물다 2류호텔인 웨스트앤드 호텔로 옮긴 뒤 카지노에 들렀다가 행방불명 됐다
박정희 정권은 김형욱이 3공화국이나 유신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는 회고록을 출간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977년-1979년 윤일균 당시 중정차장(해외담당), 이용운 전(前) 해군제독(작고)등 친분이 있는 인사들을 밀사로 미국에 보내 1백 50만 달러 제공, 여권보장 등 구체적인 조건을 놓고 막후 협상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형욱 사건은 4반 세기를 지난 지금도 파리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살해되어 무거운 추에 매달려 센느강에 던졌다느니 비밀리에 청와대로 압송돼 청와대 지하실에서 사살당했다 등의 구구한 억측만 자아낼 뿐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김형욱씨는 1991년 서울가정법원에서 <1984년 10월 8일 사망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실종선고 판결을 받은 뒤인 1996년 특별조치법에 대한 위헌결정 후 형사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김형욱 실종사건의 핵심은 국가권력의 개입여부, 마피아등 조직범죄 집단이나 북한의 개입 가능성 등 배후세력의 실체에 모아진다
범행 주체를 둘러싼 논란에서 카지노와 관련된 폭력집단이 금품을 노리고 범행을 했거나 북한이 관련됐을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이며 당시 여러자기 정황을 고려할때 국가권력의 개입 가능성이 가장 높다
ㄱ.김형욱 실종사건 관련 일지
-1973년 미국 망명
-1979년 9월 김경재(金景梓)전(前)의원의 <박사월> 필명으로 김형욱 회고록 <권력과 음모> 출간 <권력과 음모> 상.중. 하 3권
-1977년 6월 22일 김형욱, 미국의회 프레이저 청문회 출석 증언
-1982년 3월 궐석재판에서 <반국가행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혐의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형 선고 그리고 전재산 몰수
-1991년 서울가정법원 <1984년 10월 8일 사망으로 간주>한다는 실종선고 판결
-1996년 특별조치법에 대한 위헌결정 이후 형사재판에서 무죄선고
-1998년 부인 신영순씨, 법정투쟁 3백억원으로 추정되는 재산 되찾음
ㄴ.김형욱 실종 사건 배후세력 실체
(ㄱ) 한국정부--국가권력 개입여부
(ㄴ) 마피아등 범죄조직 소행설
(ㄷ) 북한정부와 연계된 남한 반체제인사들의 소행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재직때 각종 인권침해와 간첩사건이 일어남
ㄷ. 김형욱 살해 사체---암매장설과 센느강 유기등 제기되고 있음
(2)"김형욱 실종" 기관개입 확인때 유신정권 도덕성 치명타
http://www.donga.com/fbin/output?f=todaynews&code=a_&n=200502040301&main=1#
ㄱ.김재규 전(前) 중앙졍보부장 말
사형 전(前) 강신옥 변호사에게 한 말---나와는 관계없다
김형욱 부장의 납치사건 직접 지시자로 일각에서 지목
ㄴ.이종찬 전 국정원장 말씀(김형욱 납치사건 당시 중정 총무국장 재직함)
나는 모른다 김형욱은 갱단에 의해 죽었을 것이다 박종규씨가 워낙 도깨비 같은 사람이라서 국정원에서 관련 기록을 본 적도 없다
ㄷ.김경재 전(前) 민주당 의원 말(1980년대 김형욱 회고록 출간)
경호실장이나 박종규 전 경호실장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ㄹ.윤일균 국제항공연맹 명예회장 말(당시 중정 해외담당 차장 재직)
정상적인 지시계통으로 (김형욱 납치)지시를 받은 일이 없다 김재규가 당시 어떤 목적인지 몰라도 자기 일에 별도 조직을 만들었다 차기철이 해외공작을 하긴 힘들었을 거다
ㅁ.이상열 전(前) 이란대사 말(당시 중정소속의 프랑스공사 재직)
나는 이 사건과 무관하다
ㅂ.송진섭 안산시장의 말(1979년 서대문구치소에서 투옥 중 옆방에 투옥된 박선호 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의 말)
대통령 경호실 간부들이 김형욱을 살해했다--박선호 중앙정보부 전(前) 의전과장의 말
*박선호--중정 의전과장
-예비역 해병대 대령 출신
-해병간부후보생학교 해병대학 수석 졸업
-해병간부후보 동기생 중 긴급이 가장 빨랐던 만큼 성실하고 충직했다
ㅅ.김형욱 중정 청부 받은 파리 조폭에 살해
http://www.donga.com/fbin/output?f=todaynews&code=a_&n=200502180101&main=1#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프랑스 유학생으로 위장한 중정요원과 한 여성 연예인에 의해 파리로 유인돼 1979년 10월 7일 파리에서 현지 조직폭력배에게 살해됐다고 한 시사월간지가 보도했다
월간조선 3월호는 중정 고위간부 출신인사들과 김형욱 회고록을 대필한 김경재 전(前) 민주당 의원등의 증언을 인용해, 파리 조폭은 김형욱을 살해한 뒤 사체를 처리했으며 유학생으로 위장한 중정요원은 이를 확인한 뒤 돈을 지불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미국 뉴저지에 머물고 있던 김형욱을 파리로 유인하는 데는 여성 연예인이 동원됐고 유학생으로 위장한 중정요원은 김형욱을 파리조폭에게 넘겼다
김경재 전 의원은 <김형욱씨가 실종 직전 한 연예인이 자신에게 보내준 러브레터성 편지를 보여줬다>면서 <김형욱은 한국출신 연예인을 만나 즐기기 위해 파리로 간 것>이라고 말했다
중정간부 출신 인사들은 <유학생으로 위장한 중정요원은 김형욱을 유인 살해한 이틀 뒤에 파리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고 당시 프랑스의 정보기관들이 의혹만 가졌을 뿐 적극적으로 수사할 수 없없다>며 <김대중 납치사건의 실패를 교훈 삼아 김형욱을 살해 제가하는 작업에 중정이 직접개입하지 않고 현지 조폭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ㅇ.재미 언론인 문명자씨의 쓴 책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내용
-김형욱의 부인 신정순씨의 말
"(유럽으로 떠나는 김형욱에게) 파리에 혼자 가느냐"고 물었더 "이상열 공사가 다 알아서 해줄 것"이라고 대답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상열씨는 "나도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일권 전 총리가 파리에서 믿을 만한 사람에게 "김형욱이 경복궁에서 청와대로 이어지는 지하벙커를 통해 박정희 앞에 끌려갔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죽여 주십시오>라고 빌었으나 서울근교 폐차장 압착기 아래에서 최후를 맞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ㅈ.김형욱은 내가 죽었다(중앙정보부 비선조직-- 박종규. 차기철등 대통령 비서실 중앙정보부 비선조직 가능성)
http://ucc.media.daum.net/uccmix/zine/mega/sisapress/200504/11/sisapress/v8807826.html?u_b1.svcid=02y&u_b1.objid1=16602&u_b1.targetcate=4&u_b1.targetkey1=20184&u_b1.targetkey2=8807826
우리는 김형욱 전(前) 중앙정보부장을 1979년 10월 7일 밤 파리 시내의 한 카지노 근처 레스토랑에서 납치했다 김형욱이 한국 여배우 000씨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에 레스토랑 입구를 지키고 있다가 그 여배우가 보낸 안내자 행세를 하며 납치하는데 성공했다 캐딜락승용차 안에서 김형욱을 마취시킨 다음 밤 11시께 파리시 서북 방향 외곽 4km 떨어진 외딴 양계장으로 가서 분쇄기에 그를 집어 넣어 닭모이로 처리했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박종규 아니면 차기철 비선을 의심하던데 그쪽 소속 아니었는가? 누구의 비선도 아니었다
-파리로 가기 전 언제 어디서 누구와 박 대통령을 만났는가?
1979년 초 밤에 불려갔는데 청와대 별관으로 알고 있다 경호하는 분들이 옆에 있었지만 나는 대통령 말씀을 듣느라 긴장돼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술을 따라 주셨다 그것 뿐이었다
-박대통령이 술을 따라며 김형욱을 제거하라고 하던가?
"나쁜 놈이로구나 내가 믿었던 김형욱 이놈이 나쁜놈이로구나"말했다
--->김형욱 실종사건이 이란혁명, 박대통령 살해와 관련여부는 프랑스 정부에서 밝혀야 할 부분이다
4.김형욱 전(前) 중앙정보부장에 관한 각종 자료
(1)세계경찰 사상 정확한 탐문과 수사를 자랑하는 프랑스 국립경찰도 <We don't know>가 김형욱 파리 실종사건에 대한 공식 최후 발표문
http://user.chol.com/~songwoo/today012.htm
(2)신동앙(동아닷컴)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3/12/26/200312260500041/200312260500041_1.html
1969년 12월 19일 서울, 윌리엄 포터 당시 주한 미국대사와 김형욱 전(前) 중앙정보부장이 마주 앉았다 "이제 한국도 북한과 대화에 나설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군사와 산업 모든 측면ㅇ에서 북한보다 우위에 선 한국이 독일이나 베트남처럼 적극적으로 남북접촉에 응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방국들은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한국 지도층은 이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김형욱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3)1999년 11월 28일(일) MBC 특별기획 제 10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년의 침묵--김형욱 실종사건
http://www.imbc.com/broad/tv/culture/cantell/1252751_1590.html
(4)나는 왜 황태성 사건을 미국에 고발했나?
-중앙정보부 창립멤버 조웅목사의 현대사 X 파일 3탄-
http://www.khistory.or.kr/exhume/read.asp?num=9&page=1
"김형욱이 나에게 귀뜸해 준 정보에 따르면 황태성의 존재에 대해서 박정희나 김종필 측근 중에서 누가 폭로할까봐 그들 속에서 서로 이중삼중으로 감시했다는 겁니다 김형욱에 따르면 미국측에서 황의 존재를 알고 신병인도를 강력하게 요청하는 바람에 자기가 박정희와 미국 사이에 끼어서 샌드위치가 되어 죽겠다고 했습니다 미국측이 자꾸 황을 넘기라고 하니까 박정희가 피우던 담배를 던지고 고함을 치면서 절대로 넘겨줄 수 없다고 했다는 겁니다 김형욱이 황을 넘겨주고 다른 방법으로 한미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 낫겠다는 얘기를 수차 건의했는데 번번이 묵살당했다는 얘기를 직접 들었습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황태성과 비밀회담을 통해 통일문제를 논의했던 사실과 민주공화당 창당 관련 20만불 조달문제등이 탄로나면 국민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을 두려워해서 미국에 넘기지 않으려고 했다고 봅니다"
(5)김형욱이 도박한 Las Vegas "씨저스 팔래스 호텔"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ld=10117&logld=261057
미국 CIA는 걱정했다
김형욱이 저렇게 오만방자하게 놀다간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암살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서 CIA요원을 붙인다 미국에서는 절대 암살 같은 일은 일어날 수 없도록 조치한다 그래서 그런지 김형욱은 미국의 뉴저지주 거대한 저택에 살며 라스베가스를 제집 같이 드나들기 시작한다(당시 한인들에게는 거대한 주택이없음) 와중 프랑스 파리도 이따금 갔다 프랑스는 미국정보부의 힘이 미국과 같이 미치니 않는 곳이다
그러니 그를 쥐도새로 모르게 처치하려면 미국보다 프랑스가 더 나은 장소로 떠오르는 것
(6)인터넷 신문 경향뉴스 윈
http://www.newsone.co.kr/New/index_org4.php?id=157042&code=61&pa=c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3선 개헌을 주도했다 3선 개헌에 반대했던 이만섭 전(前)국회의장은 "당시 김형욱 부장이 지휘하는 정보부가 김영삼씨가 타고 가던 자동차에 초산을 뿌렸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7)국민복지회사건(國民복祉會事件)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2g2530a
1968년 김종필계의 민주공화당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당시 당 의장인 김종필을 1971년의 선거에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시키려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발각된 사건
-김용태가 회장인 국민복지회는 친선단체로 가장하여 정계. 금융계. 경제계. 언론계등의 엘리트들을 총망라하여 구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관인 유승원의 부관이 국민복지회에 가담함으로써 알려졌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1968년 5월 18일 박정희의 명령에 따라 김용태의 동태를 살피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애초에 중앙정보부가 김종필에 의해 만들어졌던 만큼 중앙정보부내에는 김종필 및 김용태와 친화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따라 김형욱은 검찰실장인 방준모를 중심으로 특수조를 편성하여 김용태에 관한 조사를 진행시켜 나갔다 당황한 김용태가 국민복지회와 관련된 중요서류들을 굴뚝 속에 감추었으나..
(8)움직이는 세계-한겨레 21
http://h21.hani.co.kr/section-021019000/2000/021019000200009270327062.html
1960년대 3선 개헌 과정에서 야당의원 포섭공작에 나섰던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야당의원의 약점을 잡느라 <몰래 카메라>를 활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9)창경이의 미스터리-악마의 섬, 실미도
http://popcom_1.hihome.com/mi/mi.html
실미도 특수부대는 당시 권력실세였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대북 공작책 제1국장 이철희에 의해 만들어졌고 부대관리와 훈련은 공군이 맡았다
(10)2백자 원고지 5천 7백매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 <김형욱 회고록> 전 3권을 집필한 김경재 전(前)의원
http://kiss.breaknews.com/sub_read.html?uid=124§ion=section9
(11) 김형욱 회고록 저자 "김경재 전의원" 이제는 그들이 입을 열 때이다
사건에 근접했던 3인 지목
http://zine.media.daum.net/mega/newsmaker/200502/18/newsmaker/v8401977.html
김형욱 실종사건과 관련 김경재 전의원이 입을 열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3인이다
첫째는 당시 프랑스대사관의 정보담당자인 이상열 공사 그리고 소환당해 귀국한 이상열씨를 곧바로 중앙정보부로 데려가 심문을 담당했던 이종찬 전국정원장 그리고 김형욱씨에게 <여행을 하자>며 편지를 보낸 여성 연예인이 그들이다
-김형욱 미스터리는 그 동안 3가지 설이 있다
첫째 회고록을 출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중앙정보부로부터 150만달러를 밤기로한 김형욱이 50만달러를 미리 받고 남은 돈을 파리에서 받으로 갔다가 살해됐다는 것
둘째는 과격한 성격의 차지철이 <박대통령에게 과잉 충성>을 하기 위해 납치해 서울로 데려와 모처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사살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카지노에서 단순강도가 돈을노려 살해했다는 설이다
(12)김형욱 살해. 중정이 미파아 통해 청부한 듯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5/02/005000000200502181546001.html
-김대중정부 시절 국정원 고위간부를 지낸 J씨
김형욱부장은 김재규의 지시를 받은 유학생(중정 직원)이 유인해 죽였다
김대중 정부때 국정원 고위직을 지낸 한 관계자는 2005년 2월 18일 <김형욱 전 중정 부장은 당시 중정이 청부를 줘 미피아가 살해한 것으로 들었다>며 <당시 공작에 참여한 중정 요원들이 8명 정도이며 이를 모두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애초 중정내의 관련자가 3명 정도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모두 8명이며 팀장급은 현재 81살쯤 됐을 것>이고 말했다 그리고 이 관계자는 <김형욱의 주검이 프랑스에 암장됐을 가능성이 높을 만큼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프랑스 현지조사를 통해 이를 발굴하고 DAN검사를 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중정이 마피아를 통해 청부살해한 후 프랑스 암매장했다는 입장
http://www.hani.co.kr/section-001001000/2005/02/001001000200502181728232.html
-당시 중앙정보부 간부 출신 A씨
김형욱(당시 55세) 전 중앙정보부 부장은 김재규 중정 부장의 지시에 의해 살해됐습니다
(13)재미 언론인 문명자씨가 쓴 책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내용 자료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5/02/005000000200502141737082.html
-김형욱의 부인 신정순씨의 말
(유럽으로 떠나는 김형욱에게) "파리에 혼자 가느냐"고 물었더니 "이상열 공사가 다 알아서 해줄 것"이라고 대답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상열씨는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문명자씨의 책자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서 김형욱이 서울 근교 폐차장에서 살해됐다는 주장을 폈다
정일권 전(前) 국총리가 파리에서 믿을 만한 사람에게 <김형욱이 경복궁에서 청와대로 이어지는 지하 벙커를 통해 박정희 앞에 끌려갔고 "잘못했습니다 죽여 주십시오"라고 빌었으나 폐차장 압착기 아래에서 최후를 맞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강신옥 변호사의 말
중정보다는 청와대 경호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10.26사건 당시 김재규를 변호했던 강신옥변호사는 <나도 개인적으로 금금해서 김재규부장에게 여러 차례 "김형욱실종은 어떻게 된 것이냐"는 질문을 했지만 "정말 모른다"는 답변만 반복해 들었다>며 사형으로 죽어가는 김재규 말< 박정희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에 불타던 차기철 경호실장 쪽일 가능성이 크지 않갰냐>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김형욱씨가 국내에서 죽었다면 경호실팀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보며 프랑스에서 살해되었다면 중정팀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부마사태와 10.26사태와 깊은 연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형욱의 책자 내용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14)김형욱 서울서 피살설 제기( 김형욱씨 맏며느리 공개)
김형욱씨가 서울에서 살해됐다는 주장은 현재 미국 뉴저지에 살고 있는 맏며느리 48살 김모씨가 제기했다 김형욱씨 실종사건과 관련해 직계 가족이 진술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씨는 오늘 YTN 뉴욕리포터와의 전화통화에서 시아버지는 프랑스 파리에서 살해된 것으로 아니며 중정요원들에 의해 한국으로 와 서울에서 살해됐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또는 시아버지 살해는 당시 프랑스에 파견된 전 중정요원 이모씨가 주도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가족들이 인사이드 인포메이션 즉 중앙정보부 내부로부터 이 같은 내용을 입수했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피살장소를 아느냐는 질문에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김형욱씨 맏 며느리 김모씨 인터뷰 내용
(질문) 사망장소가 한국입니까?
(답변)예!
(질문)청와대입니까?
(답변)예.. 어딘지는 관심이 없어가지고..
(질문)프랑스에서 실종됐는데 돌아가신 장소는 한국입니까?
예..이상열이 책임이 있다고 시어머님.. 온 가족이 확실히 말하고 있다고 알고 있거든요
(질문)가족들이 모두 밝히기 꺼려했을텐데 며느리인 김씨가 언론에 내용을 공개한 배경이 있습니까?
(답변)김씨는 남편이 오랜 지병으로 숨진 뒤 2년여 동안 자녀 3명을 데리고 혼자 살아왔으며 시아버지와 이 문제에 대해 발설하지 안기로 합의를 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재산 문제들으로 시어머지와 갈등을 빚었고 이 과정에서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됐다고 김씨는 말했습니다
김씨는 최근 가족들과의 갈등 문제를 포함해 시아버지와 관련돼 잘못 알려진 내용은 오는 2005년 3월18일 기자회견에서 밝히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김씨는 시아버지가 실종된지 1년 뒤인 지난 80년 김형욱씨 큰 아들과 결혼했습니다
(15)김형욱, 청와대 지하실서 차기철 손에 죽었다?
http://www.donga.com/fbin/output?f=todaynews&code=a_&n=200503110347&main=1#
"박정희 전대통령이 청와대 지하실에 끌려 온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배신자>라고 부르며 총을 겨눠 사살하려고 했다 김형욱은 <나는 당신을 배신했을지언정 국민을 배신하지는 않았다>고 반박했다 박전대통령은 대노했다 옆에 있던 차기철 경호실장이 <각하, 손을 더럽히지 마시오. 제가 해치우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박 전대통령의 손에서 총을 낚아채 김형욱을 사살했다"
김형욱 회고록의 저자인 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이 민주화 동지를 통해 들었다며 2005년 3월 11일 KBS라디오 <라디오 정보센터 박에스더입니다>에 출연해 밝힌 김형욱 <국내 피살설>의 핵심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김형욱 전 부장의 맏며느리가 최근 <시아버지는 파리가 아닌 서울에서 피살됐다>라고 주장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가운데 김경재 전의원은 <김형욱전부장이 한국에 끌려와서 처형되었다는 얘기를 민주화 동지인 송진섭 안산시장에게 들었다>며 이같이 밝혔다
김경재 전의원은 <송시장이 서대문 형무소에 구속되어 있을 당시 함께 수감 되어 있던 박선호 전 중정의전과장을 통해서 그 얘기를 듣고 내게 전해 주었다>고 말했다
(16)김형욱 파리서 안 죽었다
http://imnews.imbc.com/imnews/politic/1234537_512.html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돼 양계장에서 살해된 것으로 전해진 김형욱(당시 54세) 전 중앙정보부장이 최소한 파리에서는 살해되지 않았다는 근거 자료가 미국에서 나왔습니다 뉴욕한국일보는 오늘 실종 시기도 지금까지 알려진 1979년 10월 7일(이하 파리시간)이 아니라 이보다 이틀 뒤인 10월 9일이라는 사실이 담긴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를 입수해 공개했습니다
미국 국무부는 1980년 2월 29일 주한 미국대사관에 보낸 <주간 동향 보고서 한국판(Weekly Status Report-korea)>에서 "김(전 중앙종보부장)은 한인 남성 한명과 10월 9일 파리를 떠나 스위스 취리히를 경유해 사우디아라비아 다란으로 간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행적이 묘연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김 전부장이 파리 외곽 양계장 분쇄기에 살해됐다는 최근 보도와 1979년 10월 20일께 박정희 전대통령이 보낸 자객에 의해 파리 자동차 폐차장에서 압사당했다는 설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현재 국정원이 진행 중인 <김형욱 실종사건> 과거사 진상규명에도 중요 참고자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보고서는 또 <일본정부가 파리경찰을 상대로 김전부장 실종사건을 끈질기게 요구해 얻어낸 결과를 외싱턴 주일대사관이 우리(국무부)에게 전해왔다>며 <김은 한인 남성 한명과 함께 10월 9일 파리를 떠나 취리히를 경유해 다란으로 간 것이 확실하다>고 기록했습니다 보고서는 일본정부가 왜 김 전부장 실종사건에 관심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보고서는 <프랑스 경찰은 어쩔 수 없이 수사를 종결했다>고 덧붙여 프랑스 경찰이 당시 김 전부장의 실종사건을 철저히 조사했음을 암시했습니다
한편 이 보고서는 4천여 쪽에 달하는 국무부 한국관련 비밀해제 문서 중 김전부장이 거론된 유일한 것으로 1993년 비밀해제됐습니다
http://blog.daum.net/007nis/2027809
*국정원 진실위 김형욱 사건 중간발표 요약 자료와 김형욱실종 관련 인물 각종 자료
1.국정원 진실위 김형욱사건 중간 발표 요약
http://www.yonhapnews.co.kr/news/20050526/021200000020050526125022K2.html
다음은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2005년 5월 26일 오전 발표한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중간발표의 주요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1)사건 개요
김형욱 전중앙정부은 1963년 7월 이래 중정부장으로 재직하던 중 1969년 10월 발정희 던대통령이 3선 개헌의 1등 공신인 자신을 전격 해임하고 1973년 3월 유정회 국회의원 명단에서도 제외하자 1973년 4월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김형욱은 1977년 6월 <뉴욕타임즈>기자회견 및 미국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박정희 전대통령을 강력 비난한데 이어 박정희정부의 치부를 고발하는 회고록 출간을 추진하였다
이에 박정희정부는 1977년 6월 민병권 무임소장관을 대통령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여 김형욱을 설득, 회유하는 한편 국무총리 주재 김형욱 대책회의를 3차례 개최한데 이어 김형욱을 실질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1977년 12월 "외국정부에 대하여 도피처 또는 보호를 요청한 자"와 "외국에서 귀국하지 아니하는 자로서 죄상이 현저히 중(重)한자"를 처발할 수 있는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였고 당시 박정희 정부는 김형욱 회고록 출판을 저지하기 위해 여러 경로를 통해 김형욱에 대한 회유와 협박을 시도하였으며 동(同) 과정에서 김형욱은 1979년 10월 1일 단신으로 프랑스 파리에 도착 10월 7일 저녁 파리 시내 카지노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이후 실종 되었다
그간 각종 언론보도등 통해 국제 범죄조직 또는 정치적 보복에 의하 프랑스 현지 살해, 국내 압송 살해등 각종 의혹들이 유포되어 왔고 그 배후에는 당시 박정희 정부와 그 예하에 있는 중정이 이를 주도하거나 개입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어 왔다
(2)조사내용--관련 인물 면담조사: 총 33명
ㄱ.사건당시 중정 주(駐)프랑스 거점 요원 및 연수생:8명
(ㄱ)이상열 공사(76세,당시 주프랑스 중정 거점장)
3차례 면담 조사와 함께 김형욱 실종 사건에 개입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사건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진술 거부 의사를 표명
(ㄴ)신현진(가명, 당시 주프랑스 중정 연수생)
7차례 면담조사와 김형욱 살해 과정에 직접 참여하였음을 시인하면서 동(同) 살해 진해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진술함 다만, 사체유기 장소애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술 회피
(ㄷ)이만수(가명, 당시 주프랑스 중정 연수생)
6차례 면담조사와 김형욱살해사건에 직접 가담하였으며 하급자로서 부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시인하였으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진술을 회피함
(ㄹ)김철진(가명) 및 이일만(가명): 당시 중정 주프랑스 거점 요원
김철진은 1차례, 이일만은 3차례 면담조사를 하였으며 두 사람은 사건 당시 파리 현지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연수생등 일부 김형욱 살해 사건 가담자들은 이일만이 동(同) 사건의 기획임무를 담당하였다고 진술
(ㅁ)여타 연수생 3명
김형욱 실종사건 당시 연수생 6명 중 사건 가담자인 신현진, 이만수와 사망자 1명을 제외한 생존자 3명에 대해 각각 면담조사했으며 연수생 1명은 김형욱실종사건에 이상열공사, 공관원 이일만, 연수생인 신현진과 이만수가 관요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술하였으며 다른 연수생 2명은 사건 내용을 알지 못한다고 답변
ㄴ.중정본부 지휘계통 간부 및 직원:5명
중종 본부 차원의 조직적 가담 여부를 규명하기 위해 1979년 10월 당시 그 직위에 있던 윤일균 해외담당 차장, 김00 해외담당 국장, 이00 해외담당 부국장, 조00 유럽담당 과장, 황00 유럽담당과 주무관등을 각각 면담 조사하였다 상기명(上記名) 모두 사건 당시 중정차원에서는 조직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이상열공사는 개입된 것으로 본인다고 진술하였으며 김형욱 실종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시점인 1979년 10월 16일경 사건 진상파악 노력을 시작한 점으로 보아 사건 개입 가능성 희박하다고 본다
ㄷ.지원업무 담당 및 여타 해외거점 근무 중정 직원:4명
사건당시 해외통신등 지원업무 담당자 및 여타 해외거점 근무 직원 4명에 대한 면담조사한 결과, 김형욱 실종사건 개입 정황 미발견함
ㄹ.합수부 관계자 및 특파원 등 사건 주변 인물:16명
1979년 10.26사건 직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조사했던 전두환 전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이학봉 전 합수부 수사국장은 각각 면담시 10.26사건 당시 김형욱사건을 조사하거나 보고받은 사실이 전혀 없다고 진술하였고 신00(조선), 주00(중앙), 박00(동아)등 사건 당시 파리주재 특파원등 언론인 8명을 면담한 결과 그간 제기된 의혹이상의 구체적 정황이나 진술은 없었다 김경재 민주당 전의원은 2차례 면담, 송진섭 안산시장 1회면담으로 청와대 경호실 개입설 진위여부등을 문의하였으나 사건진상 규명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은 없었으며 김형욱을 파리로 유인하는 과정에 관련된 것으로 의혹이 제기된 연예인 최00, 정00등 여성 3명을 면담한 결과 개입 정황 미발견되었다 10.26사건 당시 김재규 부장으로부터 김형욱사건의 진상을 직접 득문 하였다고 주장하는 보안사 서빙고 분실의 김재규 부장 감시 헌병 박00을 2차례 면담조사하였으나 사건 실체를 알고 있진 못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3.조사결과
조사결과 김형욱은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의 지시에 의해 중정 주(駐)프랑스 거점 요원들과 이들이 고용한 제3국인들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밝혀짐
(1)살해동기
윤일균 전 중정 해외담당 차장의 진술에 의하면 김형욱이 김경재(필명:박사월)를 통해 박정희 정부의 비를 폭로하는 회고록 집필(김형욱 회고록 1. 2.3권)을 추진하자 박대통령은 1978년 12월 김형욱과 동향으로 친분관계에 있던 자신(윤일균)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급히 방미하여 김형욱과 회고록 관련 협상을 추진토록 지시하였으며 이에 따라 자신니 방미 김형욱에게 미화 50만불을 주고 회고록 원고를 받아내었으나 1979년 4월경 일본의 한 군소 출판사가 동(同) 회고록 문고판을 출간함으로 책내용이 국내와 일본, 북한 지식층에 전파되었고 박정희정부의 김형욱에 대한 분노가 고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형욱회고록 1.2권은 1982년경부터 지하서적으로 읽어지고 있다가 1985년도내 왔어는 일반화 되었다(북한에서도 김형욱 회고록 내용이 삐라유형으로 제작하여 바람 풍선으로 남한지역 살포되는 실정이었다)
(2)살해지시
김재규 부장은 1979년 9월말 이전 이상열 공사에게 김형욱 살해를 지시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상열 공사가 1979년 10월 1일경 귀국시 김재규 부장에게 김형욱 살해 계획을 보고한 후 그때 소련제 소음 권총과 독침을 수령했을 것으로 판단되고 있으며 김재규부장의 지시를 받은 이상열공사는 현지 중정 연수생 2명 등에게 김형욱살해 관련 임무를 부여하고 동(同) 연수생들이 준비를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살해 지시를 했는지는 박정희와 김재규 사망으로 정확히 확인 할 수는 없지만은 1977년 6월 16일 민병권 당시 무임소장관 미국 방문이나 윤일균 전 중정해외담담 차장의 "1978년 12월 박대통령이 자신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급히 방미하여 김형욱의 회고록 출판을 저지토록 지시를 내렸다"고 진술하는 점 그리고 1977년 6월말 최규하 내각의 김형욱대책회의 3차례 개최한데 이어 1977년 12월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란 특별조치법"을 제정한 점등을 볼때 박정희대통령이 김재규부장에게 직접 또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김형욱 살해를 지시하였다고 볼수 밖에 없다
(3)살해준비
ㄱ.살해 가담자 물색
김재규 부장의 직접 지시를 받은 이상열 공사는 1979년 9월경 김형욱 납치 및 살해 임무를 연수생들에게 맡기로 하고 신현진등 당시 파리 연수중이던 중정 연수생 5-6명을 자택으로 초대하여 대화도중 "요즘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어 문제다"라는 등으로 질책, 젊은 연수생들의 정의감을 부추기면서 반응을 타진했으며 연수생들에게 파리 주재 "북한 통상대표부의 현황과 실태등에 대항 관찰결과"를 보고서로 제출토록 하여 그 내용 검토를 통해 적극성, 과단성등 개개인의 자질을 검증한 후 최종적으로 신현진, 이만수 등 2명을 적임자로 선정했다
-김형욱이 곧 파리에 온다 중정부장을 지낸 사람이 거액의 외화를 빼돌려 카지노등에서 탕진하고 있으며 국가기밀을 마구 폭로하고 있다 이런 사람을 그냥 둬서는 안된다며 상부의 지시로 김형욱 처치해야 한다고 강조
ㄴ.살해계획 수립
신현진은 김형욱을 살해하기 위해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구라파 출신 제3국인 친구 2명에게 사건을 청부키로 하고 동인들을 접촉하면서 미화 10만불 제공 조건으로 살해을 의뢰, 승낙을 받았으며 또한 평소 기질이 맞아 친근하게 지내던 후배 연수생 이만수가 임무 수행시 보조역할을 맡기로 한 후 상기 제3국인 친구 2명을 이만수와 함께 수차 접촉 상호친분관계를 형성하는 한편 파리 시내 소재 <바뇰레> 벼룩시장에서 김형욱 살해에 사용할 칼과 노끈 등을 구입하고 1979년 10월 초경 이상열 공사를 다시 접촉 임무수행에 필요하다면 미화 10만불과 권총을 준비해 달라고 요청하는 등 살해 준비를 진행했다
(4)살해과정
1979년 10월 7일 오후 늦게 신현진은 이상열공사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이상열 공사 집에 도착하자 이상열공사가 "김형욱으로부터 돈을 빌려달라는 전화가 왔는데 돈이 없다고 거절하려다가 오히려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돈이 있는 사람을 소개시켜 줄 수 있다고 하여 만나기로 하였다" "2시간 뒤 샹젤리제 거리로 김형욱이 나오기로 했는데 지금이 좋은 기회다 오늘 처치해야 하니 이만수와 일꾼들을 불러라"라고 지시하였다
신현진은 인근 공중전화를 이용 제3국인 친구 2명과 이만수에게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리도극장>앞에서 동구라파 제3국인 친구 2명과 이만수를 접촉, 동인들에게 김형욱 살해계획을 설명하였으며 이만수에게는 미화 10만불이 든 가방을 가지고 개선문 근처 <빨레 데꽁그레>빌딩과 인접해 있는 <콩크드 라파예트> 호텔 34층 <르 플랭시엘>바에서 대기하도록 지시하고 이만수를 먼저 보낸 후 조수석에는 이상열 공사, 뒷좌석에는 제3국인 친구 2명을 태운 채 신현진이 운전하여 <리도극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김형욱과의 약속 장소로 이동하던 중 차내에서 신현진은 이상열 공사로부터 미리 받아 지니고 있던 소련제소음권총 1정과 독침 중 권총을 뒷좌석의 동구라파 제3국인 친구에게 제공하였다
그들은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김형욱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이상열 공사가 차에서 내려 김형욱에게 인사를 하면서 "운전하는 사람은 제가 아끼는 중정 연수생이고 뒷좌석의 두 사람은 제가 소개시켜 드리겠다고 한 전주(錢主)들입니다"라고 설명한 후 "이 분들과 어디 가까운 카페로 가서 이야기를 나눠보시죠 저는 저녁 약속이 있어 그냥 가보겟습니다"라면서 김형욱을 승용차 조수석에 앉게 하고 이상열공사 자신은 현장을 이탈하였다
김형욱은 카지노 도박 자금을 빌릴 목적으로 연수생 신현진이 운전하는 이상열 공사 관용차 조수석에 앉아 뒷좌석의 제3국인 2명과 돈 빌리는 문제를 협의할 카페로 가는 줄 알고 출발 당시 시각은 날이 어느 정도 어두워져 전조등을 켰을 때이며 신현진이 운전하는 승용차가 제3국인 친구들이 지시하는 대로 개선문 앞 로터리를 우측으로 돌아 시 외곽 순환도로를 건너 가던 중 김형욱 뒷좌석에 앉아 있던 제3국인 친구가 갑자기 김형욱의 머리 뒷부분을 주목으로 수차례 가격, 실신케 하였고 승용차는 파리 시내를 이탈, 파리교외로 이동하였으며 길가에 가로등이 켜져 있는 작은 마을을 지나 인적이 드물고 작은 숲이 내리막 방향으로 이어진 장소에 도착하여 제3국인 친구 2명이 차에서 내려 조수석에서 실신해 있는 김형욱을 양쪽에서 팔을 끼고 차에서 끌어내려 도로 우측 숲속으로 끌고 내려간 후 약 30분쯤 지나 돌아왔으며 제3국인 친구 2명은 신현진이 U턴시켜 놓고 기다리던 승용차에 탑승하여 김형욱의 바바리 코트에 여권, 지갑, 시계등의 소지품을 싸서 벨트로 묶어 건네주면서 도로에서 약 50m 떨어진 장소에서 김형욱의 머리에 권총을 쏘아 죽였으며 시체는 땅을 파지 않은 채 두껍게 쌓여있는 낙엽으로 덮어 버렸다고 보고 당시 신현진은 제3국인들이 김형욱을 살해 후 권총을 분실한 사실을 확인하였으나 신속한 현장 이탈을 위해 권총회수를 포기하였으며 계속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이었기 때문에 낙엽들에 의해 사체가 두껍게 덮여질 것이라 판단하였다 살해 당시 총성은 들리지 않았으나 제3국인들은 권총 실탄 7발을 모두 쐈다고 언급하였으며 신현진은 이들에게 불어로 <잘했어>라고 격려하고 이만수가 기다리고 있던 장소로 이동하여 이만수로부터 미화 10만불이 든 가방을 받아 제3국인 친구 2명에게 전달하면서 "내일 중으로 프랑스로 떠나라"라고 지시하였다
(5)사후조치 및 보고
ㄱ.신현진의 이상열공사에게 임무 수행 결과 보고
이상열공사 "수고했다"며 김형욱 여권, 지갑은 자신(이상열)이 가지고 다른 소지품들은 신현진에게 주면서 "철저리 인멸한 후 즉시 파리를 떠나 귀국하라"고 지시
출국 전 이상열 공사는 "그림(살해경과)에 대해서는 "신군 한테 들으십시오"라는 내용의 밀봉되지 않은 서신을 김재규 부장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ㄴ.신현진의 귀국 후 1979년 10월 13일경 김재규부장에게 김형욱 처리결과를 보고
김재규부장은 "수고했어 잘했어 우리가 그런 놈을 그냥 놔두면 우리 조직은 뭐하는 곳이야?"라며 살해에 사용한 권총을 분실하였다고 보고하자 김재규 부장은 "괜찮아, 소련제 권총이니 발견되어도 오히려 북한이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니 문제될 게 없다"면서 현금 300만원과 20만원이 든 봉투를 각각 2개씩 주어 그 중 1개씩은 이만수에게 전달하였다
ㄷ.이만수의 귀국 후 김일곤 차장보에게 김형욱 살해 결과 보고
이만수도 사건 직후 귀국하여 김일곤 차장보에게 살해결과를 보고하고 김일곤 차장보로부터 액수 미상의 상당히 많은 돈을 받았으며 김재규 부장이 준 돈도 신현진으로부터 전해받았다고 진술함
2.김형욱 실종 관련 인물 각종 자료
(1)김형욱--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사람
ㄱ.성명:김형욱(金炯旭)
ㄴ.생년월일:1925년 1월 16일(양력, 쥐띠)
ㄷ.출생지:황해도 신천
ㄹ.학력
(ㄱ)육사 졸업 (ㄴ)육군대 졸업 (ㄷ)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ㄹ)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
ㅁ.경력
(ㄱ)5.16군사쿠데타 최고회의 최고위원
(ㄴ)1963년 7월-1969년 10월 제4대 중앙정보부장 역임
(ㄷ)1971년 4월-1972년 10월 제8대 국회의원(공화당 전국구)
(ㄹ)1973년 4월 미국 망명
(ㅁ)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
(2)김형욱 살해공작 지휘계통
ㄱ.김재규---김형욱 살해 지시
김재규(1926-1980)는 금녕(金寧, 김해 옛 이름) 김씨이며 경북 구미출생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고향 사람이다 그는일본육사와 육군사관학교 제2기 출신으로 5.16 이후에는 국영기업체 사장,보안사령관, 군단장, 유정회 국회의원, 중앙정보부차장, 건설부장관을 역임하고 1976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다
비록 5.16의 주체는 아니었지만 우직한 충성심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저녁 궁정동의 만찬석상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유신시대의 종말을 앞당겼다
그러나 그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1980년 5월 24일 오전 서울구치소 사형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ㄱ)성명--김재규(金載圭)
(ㄴ)생년월일--1926년 3월 6일
(ㄷ)출생지:경북 구미
(ㄹ)학력--일본육사와 육군사관학교 졸업
(ㅁ)경력
-5.16군사쿠데타 가담 그리고 국영기업체 사장
-보안사령관
-군단장
-1973년 제9대 유정회 국회의원
-중앙정보부 차장
-1974년 제13대 건설부장관
-1976년 제8대 중앙정보부장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1980년 5월 24일 서울구치소 교수형
ㄴ.이상열(李相悅)--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김형욱 공작 총지휘자
(ㄱ)성명:이상열(李相悅)
(ㄴ)생년월일:1929년 11월 13일
(ㄷ)출생지:진천
(ㄹ)학력
1949년 춘천고 졸업. 1960년 연세대 상대 졸업
(ㅁ)경력
-1970년 주(駐)말레이사아 대사관 국방무관
-1974년 주(駐)사우디 참사관
-1976년 주(駐)사우디 공사
-1976년 주(駐)멕시코 공사
-1977년 주(駐)프랑스 공사
-1983년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
-1984년 주(駐)미얀마대사
-1987년 주(駐)리비아대사
-1990년 외교안보 연구원 연구위원
-1992년-1994년 주(駐)이란 대사
(ㅂ)김형욱과 관계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505/200505260214.html
이상열은 당초 군에 몸 담고 있었던 그는 1963년 "원충연 대령 반혁명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맺은 김형욱과의 인연을 계기로 중정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김형욱의 후원 아래 승승장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열씨는 이 사건에 중정최고 책임자였던 김재규 전 중정부장과 살해사건을 실행한 신현진. 이만수 두 행동요원의 가교 역할자이자 프랑스 현지에서 공작을 총지휘한 책임자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ㄷ.1979년 10월 7일 김형욱 살해 실행조
(ㄱ)신현진(가명)---주(駐)프랑스 중앙정보부 연수생
(ㄴ)이만수(가명)---주(駐)프랑스 중앙정보부 연수생
(ㄷ)제3국에서 고용한 살인청구업자 2명
ㄹ.1979년 10월 7일 김형욱 살해사건 기획임무 담당
이일만(가명)----주프랑스 중앙정보부 거점 요원
http://blog.daum.net/007nis/2031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