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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당국, 빈라덴 메시지 주시"< ABC > 본문

Guide Ear&Bird's Eye/테러단체,간첩등 수집.조사연구

"정보당국, 빈라덴 메시지 주시"< ABC >

CIA Bear 허관(許灌) 2008. 10. 31. 21:48

미 정보당국은 국제테러조직 알 카에다의 최고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이 오는 4일 미 대선을 전후한 시점에 메시지를 발표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ABC방송이 30일 다수의 고위 정부 관리들의 말을 빌려 보도했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많은 정보 분석가들은 빈 라덴이 단순히 건재함을 알리는 차원에서 모습을 드러내거나 육성 메시지를 발표할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지난 2004년 대선 때도 빈 라덴은 대선 직전 메시지를 발표한 바 있다. 당시 그의 메시지는 일부의 예상과 달리 대선 결과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일부 관리들은 또한 이번 대선에 빈 라덴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일부에선 그가 사망했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것으로 보고 있으며, 실제로 정보당국은 지도력에 관해 이슬람 과격파들 사이에 일부 혼란이 있다는 징후를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관리들은 감청장비와 정보원들을 총동원해 빈 라덴의 성명이 나올 것이라는 어떤 암시라도 찾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지금까지는 루머 수준일 뿐 메시지가 나온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고, 미국 본토를 목표로 한 알 카에다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구체적이고 신뢰할 만한 정보도 없다고 말했다.

   jahn@yna.co.kr
(끝)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사나이’ 오사마 빈 라덴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오사마 빈 라덴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조상은 대대로
예멘의 하드라마우트(Hadramaut)에서 살았다. 하드라마우트는 산악과 사막으로
이루어진 광대한 땅으로, 일년 내내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곳이다.
깊은 신앙심을 가진 하드라마우트 주민들은 주로 무역과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로 이주해 거부가 된 사람도 적지 않다.
빈 라덴 가문은 그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그 가문 사람들은
부호임에도  생활이 검소하고 정직을 최고의 미덕으로 꼽았다.

 

짐꾼에서 거부가 된 아버지

오사마 빈 라덴의 부친 무하마드 빈 라덴은 1930년경 사우디아라비아로 이주했다.
처음에는 제다 항구의 짐꾼으로 일하다 1931년 건설회사를 차렸는데 많은 하청을
따게디어  단시일 내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50년대, 무하마드 빈 라덴은 왕궁 건설 프로젝트를 땄고 뛰어난 건축실력으로
사우디 국왕 알 사우드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사우디 왕족 중 특히 알 사우드의 동생인 파이잘과 친했다.
1964년 알 사우드와 파이잘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져 알 사우드 국왕은 물러나고
파이잘이 국왕이 됐다. 이 과정에서 오사마 빈 라덴의 부친은 상당한 역할을 했고
그 공으로 공공사업부 장관이 됐다.
장관직을 수행하는 동안 그는 억만장자가 되었다.

율법에 엄했던 부모의 이혼

오사마 빈 라덴은 1957년 3월10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 태어났다.
오사마는 아랍어로 ‘젊은 사자’란 뜻이다. 무하마드 빈 라덴은 여러 명의 아내로부터 50명의 자녀를 보았는데 오사마 빈 라덴은 17번째 아들이다.

무하마드 빈 라덴은 종종 자식들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혼동을 일으켰다.
시리아 사람인 오사마의 모친은 딸도 여럿 낳았으나 아들은 오사마가 유일했다.

오사마의 모친은 나중에 무하마드 빈 라덴과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그러나 아들과의 연락은 계속돼, 1990년대 초반 오사마가 수단에 머무를 때도
아들을 찾았으며, 2001년 초 손자인 오사마의 아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결혼식을
치를 때도 참석했다.

빈 라덴 가문 사람들은 대체로 신앙심이 깊다. 또한 이슬람 3대 성지인 예루살렘,
메카, 메디나의 이슬람 사원 재건축을 맡아 한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무하마드 빈 라덴은 자식들을 엄격히 훈육했다. 오사마 역시 어린 시절부터
종교 교육을 받았다.

오사마가 10세이던 1967년, 그의 부친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유산은 주식 형태로 자손들에게 분배되었는데, 오사마 빈 라덴보다 열살 많은
장남인 살림 빈 라덴이 가문의 사업을 꾸려갔다.

장남 살림은 어린 시절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영국 귀족가문 출신인 캐롤라인
카레이(Caroline Carey)와 결혼했다. 사업관계로 미국 텍사스를 자주 방문했던
그는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Orlando)에도 저택을 갖고 있었다.
살림은 기타를 잘 쳤으며 자가용 비행기를 스스로 몰고 다니기 좋아하는
파일럿이었다.

 

그는 가문의 기업을 국제적 재벌로 키웠다. 빈 라덴 가문은 건설뿐 아니라
발전소 건설, 석유 탐사, 광업, 통신업에도 진출했다.
살림은 1998년 미국 텍사스에서 소형 비행기를 몰다 추락 사고로 죽었다.
수년 후 캐롤라인 카레이는 아랍의 관습대로 살림의 동생인 할리드와 결혼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청소년기에 방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과장된 것이다. 1975년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에 내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레바논은 중동의 파리(Paris)’로 불렸다. 중동 지역의 부유층은 레바논으로 자주 휴가를 갔다.
엄격한 금욕 생활을 강요받던 아랍인들이 이곳의 나이트클럽, 카지노, 술집 등 향락업소를 자주 출입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사마 빈 라덴도 레바논을 여행할 때 몇 번 향락업소에 출입했으나 호기심 차원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1971년 여름, 14세의 빈 라덴은 두 형과 함께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어 연수를 받았다. 이때 가깝게 지냈던 한 스페인 여성은 빈 라덴에 대해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은 소년이었다”고 말한다. 이 여성은 빈 라덴이 록 음악이나 패션에는 관심이 없었고 런던 풍경을 싫어했다고 전했다.

17세가 되던 해에 빈 라덴은 시리아인 어머니의 인척인 아가씨와 결혼한다(빈 라덴은 이후 3명의 처를 더 얻었다). 그리고 곧 제다에 있는 명문 킹 압둘 아지즈 대학에
입학해 1981년 경제학 및 행정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빈 라덴은 대학에 다닐 때 이슬람주의자 조직의 하나인 무슬림형제단을 알게 되고
뛰어난 이슬람 학자들인 압둘라 아잠, 무하마드 쿠트브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는다.
이 두 사람이 빈 라덴에 끼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압둘라 아잠은 이후,
참된 의미의 국제 지하드 네트워크를 최초로 조직하며 명성을 떨쳤다.
저명한 이슬람주의 학자인 무하마드 쿠트브는 사이드 쿠트브의 형제다.
사이드 쿠트브는 지하드 운동 핵심 교재인 ‘사인포스트(Signpost)’의 저자. 1966년
사이드가 이집트에서 처형되자 무하마드 쿠트브가 죽은 형제의 일을 떠맡았다.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오사마 빈 라덴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소련군이 침공한지 몇 주 지나지 않은 시점인 1980년 1월, 빈 라덴은
파키스탄으로 가서 아프간 무자헤딘 지도자인 부르하누딘 라비니와 압둘 사이아프를 만났다. 빈 라덴은 오래전 성지 순례중 이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사우디로 돌아온 그는 가족에게 무자헤딘 지원자금을 모으자고 제의했고 파키스탄에도 자주 가 모금 활동을 벌였다.

아프가니스탄 침공 소련군에 대항해 이슬람 세계가 벌인 투쟁은 1930년대 일어난 스페인 내전과 닮은 점이 많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사회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이
전세계에서 몰려와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을 상대로 싸웠다. 마찬가지로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독실한 무슬림들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 소련군과 맞섰다.

빈 라덴은 모금 활동과 참전할 이슬람 전사 모집 운동에 열중했다. 파키스탄을 비롯한 몇몇 이슬람교 국가에는 무자헤딘 훈련캠프가 세워졌다. 미국의 CIA도
비밀리에 이슬람 전사들의 대소 항전을 도왔다.

 

스타가 된 빈 라덴
1980년대 중반이 되자 빈 라덴은 직접 對소련 항쟁에 참전했다. 당시 이슬람권에서 아프간에 온 전사들은 1만6000명이 넘었다. 빈 라덴은 용감한 전사로 이름을 떨쳤다. 빈 라덴의 전우인 어떤 사람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전사로서의 빈 라덴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영웅이었다. 그는 항상 최선두에 서서 어느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웠다. 그는 자신의 재산뿐 아니라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스스로 왕궁
같은 자신의 집에서 걸어내려와 아프가니스탄 농민, 이슬람 전사들과 함께 했다.
그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고 식사하고 참호를 팠다. 그것이 바로 민중과 같이 하는
‘빈 라덴의 방식’이었다.”

1989년 2월, 거의 10년 만에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소련은 나지불라를 수반으로 하는 사회주의 정권을 카불에 세우고 돌아갔다. 소련군이 철수한 후에도
아프가니스탄은 나지불라 정권, 여러 이슬람 정파의 세력다툼으로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

1989년 말, 빈 라덴은 영웅이 되어 사우디로 돌아왔다. 사우디 정부는 빈 라덴을
아프간 성전의 이상적인 모델로 받들었다. 빈 라덴은 수없이 많은 이슬람 사원
집회에 초대돼 연설했다. 그의 격정적 연설이 녹음된 카세트 테이프는 공식적으로만 25만 개 이상 팔려나갔다. 지하조직이 복사 배포한 테이프 수도 엄청났다.

빈 라덴은 “이슬람의 가르침을 올바로 실천한다면 그 무엇도 이슬람교 국가를
이길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아프간 성전은 이교도 초강대국에 대한 이슬람의
위대한 승리라고 주장했다. 이슬람교의 두 성지(메카와 메디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통해 권력의 정통성을 이어온 사우디 왕가는 빈 라덴의 연설을 마음에 들어 했다.
사우디 정부는 빈 라덴 가문의 사업체가 외국정부와 민간기업에게서 많은 계약을
따낼 수 있도록 지원했다.

사우디에 돌아온 빈 라덴은 자신이 주장해온 이슬람적 생활방식을 실천했다.
호화 저택에서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침대도 없이 마루에서
잠을 잤다. 이때 그의 집을 방문한 이집트 언론인 에삼 데라즈는 빈 라덴이 마루
귀퉁이를 사무실로 삼고 가족들 또한 마루 한켠에서 생활하는 것을 목격했다.
에삼 데라즈도 방문 기간 내내 침대가 아닌 마루바닥에서 잠을 자야 했다.

1990년 8월2일, 이란과의 8년 전쟁으로 재정난에 시달리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 하루 만에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침공으로 빈 라덴이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있음이 입증됐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후 대중 연설을 통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할 것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사담 후세인은 파드 국왕에게 사우디를 침략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전달했으나,
이라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사우디 왕가는 겁에 질려 전전긍긍했다.
막대한 국방비 지출에도 불구하고 사우디군은 이라크군의 상대가 못 됐기 때문이다. 쿠웨이트 왕족을 비롯해 쿠웨이트 난민이 물밀듯 밀려오자 사우디는 더욱 공포에
휩싸였다.

빈 라덴은 즉시 국방부장관인 술탄 왕자를 만나 이라크의 침공에 대비한 그의 계획을 전했다. 10페이지에 달하는 상세한 계획서에서 그는 빈 라덴 가문의 건설회사 중장비를 동원해 신속히 방어 요새를 구축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취약한 사우디군을 아프간 전쟁에 참전했던 ‘사우디 이슬람전사’들로 보강할 것을 제의했다. 그들은 실전으로
단련된 백전노장들이었다. 빈 라덴은 이들을 쿠웨이트에 침투시켜 민중 지하드를
전개하자는 의견도 덧붙였다.


빈 라덴은 이 같은 계획을 사우디 정보부장인 투르키 왕자에게도 전했다. 이슬람국가가 소련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쫓아낼 수 있다면 사우디도 이라크를 격퇴할 수 있으며, 같은 이슬람교도인 이라크 병사들도 지하드에는 저항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빈 라덴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미군 등 ‘이교도’의 군대가 사우디의 신성한 땅에 발을 들여놓도록 허용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경고했다. 외국군의 사우디 주둔은 이슬람 율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사우디 국민의 정서상 도저히 정서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라크의 침략이 우려되는 위기상황에서 빈 라덴은, 여전히 나라를 걱정하는 사우디 왕가의 매우 충성스런 신하였다그러나 공포에 사로잡힌 파드 국왕은 결국 미군을 불러들이고 말았다. 빈 라덴을
비롯한 많은 사우디의 엘리트, 종교지도자들은 이를 반대했다. 사우디 왕실은
이들에 대한 설득에 나섰다. 결국 메카에서 열린 종교지도자 회의에서 이라크를
쿠웨이트에서 격퇴할 때까지만 외국군 주둔을 용납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빈 라덴은 사우디에 계속 머물며 중간 노선을 택했다. 한편으로는 이라크를 비난하고 병력 철수를 요구했다. 동시에 신성모독을 내세워 외국군의 사우디 영토 내 주둔을
맹비난했다. 그는 미국 상품 불매운동 같은 시민운동을 활발히 벌였다.
“우리가 미국 상품을 사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살해하는 공범자가 된다.
미국기업들은 아랍 세계에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여 미국 정부에 세금으로 낸다.
미국 정부는 그 돈으로 이스라엘에 매년 30억달러를 원조하고 있다.
결국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죽이는 데 사용되는 것”이라고 빈 라덴은 역설했다.



1991년 이라크군이 철수했는데도 미군주둔은 계속되었다.  빈 라덴은 사우디 당국의
이런 조치에 크게 반발하였다.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지닌 빈 라덴은 이제
사우디 왕가의 위험한 인물이 되었다.  사우디 정부는 빈 라덴가의  전재산을
몰수하고 집안의 모든 사업체를 파산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사우디에서는 신변마저 위태로워진 빈 라덴은 가족들과 함께 1991년 여름, 수단으로
망명하였다.  수단에서의 그는 역량을 발휘하여 외자유치 통로이자  이슬람 무자헤딘을
키우는 지도자였다.  고속도로를 닦고 농업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등 수단 경제에
기여하는 바도 컸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몹시 검소한 생활을 솔선하여 집에는
에어컨, 냉장고, 자동차 아무것도 없이 살았다.
1996년 말, 빈 라덴은 별도의 엄격한 종교교육을 받지않앗음에도 이란의 테헤란
에서 열린 이슬람주의자 회의에서 종교지도자로 공인되었다.
그는 장문의 바얀(bayan, 종교지도자의 정책교서)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그의
첫번째 對美 선전포고였다. 
걸프전에서 명성을 떨친 CNN 의   Peter Arnett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빈 라덴은
말 했다.



911 피습 이후_ 최초로 알자지라 방송에 나타난 모습
Osama bin Laden on
27 December 2001.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이다...사우디 정부는 미국에게 충성함으로서
이슬람 세계에 반역하고 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무슬림이 승리하리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예언자 무하마드에게 내린 계시대로 통치하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우리는 미국이 팔레스틴, 레바논, 이락크에서 저질러진 무슬림 학살에 직접적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미국정부는 이 소름끼치는 범죄들을 저질러므로써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포기하였다.  .......유대인에 굴종하는 미국의 오만함은 사우디를 점령할
정도로 극에 달했다.  이러한 침략적이고 불의한 행위에 대하여, 우리는 미국에
지하드를 선포 했다.  지하드를 수행해 신의 말씀이 높이 찬양되도록 하고 미국군인
들을  모든 이슬람 국가에서 몰아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1.빈 라덴의 알 카에다(Al-Queda)
ㄱ.알 카에다이란
알 카에다는 아랍어로 <기지>라는 뜻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이 조직한 국제적 테러단체이다
ㄴ.설립 연도--1968년
ㄷ.설립 목적---이슬람전선 구축 및 대미 대소(러시아) 테러 단체
ㄹ.알 카에다조직 이론-- 프랑스 아민 교수의 제3세계 자주노선 사회주의 이론
ㅁ.주요활동---아프간 사태 참여(반소련 투쟁),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후 미국등연합군의 사우디. 쿠웨이트 주둔 후 반미 테러
ㅂ.규모와 테러병력---제세계 34개국에서 3000명이상 보유
ㅅ.자금줄---빈 라덴의 개인 자산 3억 달러와 이슬람교도들의 지원
ㅇ.내용
빈 라덴에 의하여 1968년도 설립한 알 카에다는 1979년 소련(현 러시아)군이 아프가니스타을 침공하였을 때 아랍 의용군으로 참전한 오사마 빈 라덴이 결성한 국제적인 테러 지원 조직이다
1991년 걸프전쟁이 일어나면서 반미세력으로 전환한 이 조직은 빈 라덴의 막대한 자금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파키스탄.방글라데시.중국신장. 필리핀, 아프가니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인도네시아.체첸.이라크.리비아. 시리아.예멘.레바논. 터키. 말레이시아.미얀마.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아제르바이잔. 쿠웨이트등 이슬람교도세력은 물론 미국, 영국. 캐나다등 총 34개국에 달하는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세계 각국에 이슬람교가 있는 국가에는 거의 다 알 카에다 조직이 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
이들은 철저한 점조직으로 움직이면서 계속 활동영역을 확장해 비(非)이슬람권 국가에까지 세력을 뻗치는 한편 1998년에는 이집트의 이슬람원리주의 조직인 지하드와 이슬람교 과격단체들을 한데 묶어 <알 카에다 알 지하드>로 통합 하였다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항하는 국제 이슬람전선으로 일컬어지며 조직원은 3,000명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세계 각지의 산간이나 오지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부 소재지나 활동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3,000명이상 조직원 활동 규모를 볼때 국가적 지원으로 조직화 되어 있는 것으로 내다보고 있으며 근거지는 이슬람 사원이다
주요 목적은 비(非)이슬람 국가의 제거 또는 이슬람국가들의 영향력 확대이며 이를 위해 다양한 국적의 테러조직과 연결해 3억달러에 달하는 빈 라덴의 막대한 자금력을 이용, 각종 테러에 자금을 지원해 왔다
특히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 맨해튼의 110층 짜리 쌍둥이 건물인 세계 무역센터와 미국 국방부(펜타곤)에 대한 항공기 납치 자살 테러 사건의 배후 조종자가 이 조직의 수뇌인 빈 라덴으로 의심 받으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 이 테러사건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만 알 자와히리 역시 빈 라덴의 주요 추종자로 알려져 있는데 미국에서는 이들의 점조직이 개입해 테러범을 조직화하고 실행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빈 라덴등 알 카에다 노선은 주체노선 즉 자주노선이다 북한 김일성 김정일 노선과 비슷하다 반소.반미. 반중 핵무기 독자보유 자주노선 주체사상과 일맥 상통한다)
(ㄱ)중국신장 주요 테러지역
(ㄴ)미얀마 주요 테러지역
(ㄷ)필리핀 주요 테러지역
(ㄹ)인도네시아 주요 테러지역
ㅈ.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
빈 라덴은 1957년 사우디아리비아 남서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지다에서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예멘에서 사우디아라비아로 이주해 사우디아라비아 최대의 건설 회사를 세워 막대한 부를 축적 하였다 빈 라덴은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초까지 킹압둘아지즈대학교에서 이슬람교 스승들의 영향을 받아 정치와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우디 건설회사 부자 아버지 덕분으로 그는 토목기사가 되었으며 또한 아랍지역의 귀족들의 종교인 계급제 바탕인 이슬람원리주의자가 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직 후 아프가니스탄으로 건너가 아랍의용군을 조직하고 도로건설 및 난민구호, 병참의무등을 담당하면서 소련(러시아)군에 맞섰다 이후 점차 전투로 전향해 1986년부터 실전에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명성을 얻었으나 1989년 잘랄라바드에서 파키스탄의 지지를 등에 엎고 친소련정부와 맞서다가 큰 희생을 치르고 자신도 부상을 당하였다
1989년 사우디아라비아로 귀국해 아프가니스탄 참전용사를 위한 복지기구를 건립하고 1991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사우디아라비아의 방어를 자청하였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 왕가가 이교도인 미국인들에게 방어를 맡기자 이에 반대하다가 제다에 연금 되었고 1992년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수단의 하르툼으로 건너 갔다 이때부터 반미(反美)인사가 되어 이집트 과격단체들과 동맹을 맺고 막대한 재산(富 )를 바탕으로 자신이 조직한 테러 조직 알 카에다를 통해 국제적인 테러를 지원하기 시작 하였다
1993년 발생한 소말리아인들의 미국평화유지군 살해 사건에 빈 라덴의 부하 일부가 가담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1996년 미국 국무부의 주요 테러 재정지원자로 지목 되었고 같은 해 수단에서 축출되자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건너갔다 이 곳에서 그는 미국인과 유대인을 적대시 하라는 교시를 내리고 성전(聖戰)을 선언한 뒤 지하드등 다양한 회교테러 조직들과 함께 전세계 미국시설들에 대한 공격을 촉구하였다
1998년 8월 224명이 사망한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의 배후로 지목되었고 미국정부는 그에게 50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에 머물면서 자신이 이끄는 알 카에다를 중심으로 전세계 이슬람 테러 조직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이에 따라 미국은 1998년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빈 라덴의 기지와 수단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화학무기 공장에 미사일 공격을 명령하기도 하였다
1999년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숨어 지내면서 계속 대미 테러활동을 벌여왔는데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 맨해튼의 110층짜리 쌍둥이 빌딩인 세계무역센터와 미국 국방부(펜타곤)에 대한 항공기 납치 사건 자살테러 사건 역시 그가 조종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세계인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이 테러 사건으로 인해 수천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증권시장을 포함한 세계경제에 일대 혼란이 일어남으로써 미국과 동맹국들의 첫번째 응징대상으로 떠올랐다 2001년 10월 말 현재 그가 숨어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전면전 공격선언과 국제테러조직들에 대한 응징선언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아랍전체가 이슬람교원리주의를 버리고 다른 세계각국처럼 종교적 다원주의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인지는 아직도 미지수이다

 

2.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ㄱ.1994년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주(州)에서 결성된 무장 이슬람 정치단체
ㄴ.구분--무장 이슬람 정치단체이며 게릴라와 테러단체
ㄷ.설립연도--1994년10월
ㄹ.소재지--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ㅁ.설립목적--이슬람공화국 건설
ㅂ.주요활동--아프가니스탄 과도정부 수립 및 이슬람공화국 선포 그리고 이슬람교가 아닌 종교인이나 종교단체 시설등 처형이나 파괴등 급진적 이슬람정책 수행
ㅅ.내용
탈레반은 1994년 10월 2만 5000여명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에서 결성한 수니파 무장 이슬람 정치조직을 가리킨다 결성 당시부터 군정세력으로 출발해 1994년에 이미 이프가니스탄 국토의 80%정도를 장악한 뒤 이듬해 수도 카불(Kabul)을 점령, 14년간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내전과 4년 동안의 모자헤딘(Mojahedin:무장 게릴라 조직)권력투쟁을 종식시켰다
이어 과도정부인 이슬람공화국을 선포하면서 결속력 있는 세력으로 등장, 아프가니스탄내 반군조직을 무장해제시킨 뒤 약탈과 강도, 부정부패를 없애는 데 힘을 쏟는 한편 일상 상업활동을 재개함으로써 전통적인 아프가니스탄 가문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내전이 계속되면서 국가접수(接收)가 어려워지자 지역지휘관들과 전략적 협정을 체결, 지역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위법 사항과 이에 따른 각종 인권침해들 도외시함으로써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더욱이 이슬람교에 대한 엄격한 해석으로 인해 갈수록 사회차별이 심해지고 여학교 폐쇄,텔레비젼(TV)시청이나 사용금지, 가혹한 이슬람식 처벌제도 부활, 아동학대등 많은 부작용을 낳음으로써 국제사회의 비난을 샀다 또 2001년 3월에는 군대를 동원해 로켓과 탱크등으로 아프가니스탄내 불교 유적과 불상등을 부수는 등 유례없는 유적파괴행위를 공개적으로 일삼기도 하였다
더욱이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 뉴욕 쌍둥이 빌딩 테러사건의 배후자인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국제 테러리스트 오사만 빈 라덴과 그의 추종조직인 알 카에다를 숨겨 둔 채 미국에 인도하지 않음으로써 미국 영국 러시아등 연합군에 의하여 점령당 하였다 지금은 아프가니스타인 연합군 과도정부 수립으로 탈레반 잔당은 사라지고 있다
ㅇ.오마르(Omar Muhammad)
오마르는 출생에서 신상에 이르기까지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인물로 나이 역시 2001년 현재 32세에서부터 39세 또는 40대 초반이라는 설등 다양하다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 있어 아프가니스탄의 얼굴없는 지도자로 일컬어진다 소련(러시아)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1980년대부터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해 1989년에는 전투 도중 로켓탄 파편에 맞아 오른쪽 눈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 들어 이슬람학생들로 조직된 무장단체 탈레반(Taleban)을 이끌고 자신의 고향인 아프가니스탄 남서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해 1996년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이어 국토의 3분의 2를 장악한 이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왔다 탈레반 내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자 철저한 이슬람원리주의자로서 이슬람 율법의 이름으로 율법에 위배되는 모든 행위를 금지하는 등 유례없는 폭압정책으로 인해 국제적인 지탄을 받아왔다
아프가니스탄내 힌두교도들에게 이슬람교도와 구별할 수 있는 인식표를 부착하도록 하는 한편 여성의 취업금지, 의무교육 폐지는 물론 친척남성이 동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떠한 외출도 할 수 없도록 하였다 또 여성은 온 몸을 검은 천으로 둘러야 하며 턱수염을 깎은 남성은 다시 자랄때까지 감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그 밖에 도박금지와 텔레비젼.비디오 시청등 어떠한 형태의 오락도 금지하고 2001년 3월에는 세계적 문화유산인 바미안석불을 파괴하도록 지시한 뒤 석불 파괴가 예상보다 늦어졌다는 이유로 속죄를 위해 소 100마리를 희생물로 바치는 연이은 폭압정책을 펼쳐 왔다
2001년 9월에는 미국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미국 국방부(펜타곤)에 대한 항공기 납치 자살테러사건의 배후자로 알려진 국제 테러 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을 보호하였다는 이유로 미국과 연합군들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3.팔레스타인해방기구내의 알파타에서 분리된 극좌파 게릴라단체 검은 9월단(Black September) ---좌익군정체제 지지자들의 모임(친시리아 계열 김일성주의자)--
ㄱ.검은 9월단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내의 알파타에서 분리된 극좌파 게릴라 조직이다 친(親)시리아 계열이나 김일성주의 모델 좌익군정체제를 지지하는 단체이다
ㄴ.구분--테러와 게릴라 조직
ㄷ.설립연도---1970년
ㄹ.설립목적---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게릴라 활동
ㅁ.주요활동--테러. 요인암살. 항공기등 납치
ㅂ.내용
PLO(Palestin Liberation Organization:팔레스타인 해방기구) 가운데 알파타에서 분리된 가장 과격한 극좌파 무장조직이다 지도자나 조직 인원등의 내부사정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제3차 중동전쟁 이후 1970년 6월 미국이 주도한 평화협상에 이집트와 요르단등이 참여하려는 자세를 보이자 PFLP(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는 이에 항의하며 요르단을 발판으로 항공기 납치투쟁을 벌였다
이에 후세인 국왕군은 요르단내 팔레스타인에 대한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1971년 9월에 팔레스타인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검은 9월이란 아랍 게릴라가 1970년 9월 요르단 정부군의 토벌작전으로 큰 타격을 받은 요르단 내란의 시기를 뜻하는데 같은 해 11월 4명의 아랍 게릴라가 요르단의 총리인 탈을 카이로의 호텔에서 암살하면서 자기들 조직을 스스로 <검은 9월단>이라 부른데서 유래하였다
그들은 1972년 9월 5일 제20회 올림픽 경기대회(뭔헨올림픽)에서의 이스라엘 선수 납치사건, 같은 해 12월 28일 태국의 이스라엘 대사관 습격사건등의 과격한 행동을 벌여왔다
검은 9월단은 김일성주의처럼 좌익군정을 지지하고 친시리아계열들이다

 

4.이란 친위 중동지역 시아파 정보기관의 헤즈볼라
헤즈볼라는 레바논의 이슬람교 친(親) 이란정부 친위대 시아파 무장세력이다 이란 정보기관의 배후 조종을 받은 약 3,000명의 대원을 보유한 중동최대의 테러단체이다.신(神)의 당(黨), 이슬람 지하드라고도 부른다
호메이니의 이슬람 원리주의에 영향을 받아 1983년 이슬라믹 아말(Islamic Amal)과 레바논 지구당인 다와파티(Dawa Patty)가 합쳐 창설되었고 활동본부는 레바논 동부쪽 비카에 위치한다
이슬람 공동체로서 중동전역을 통일하기 위해 시아파 이슬람교 이데올로기와 상반되는 개인. 국가. 민족등을 대상으로 테러활동을 한다 주로 미국인과 미국 자산을 대상으로 테러를 자행 1983년 10월 23일 베이루트 소재 미국 해병대 사령부 건물 정면으로 헤즈볼라 자살 특공대가 약 1만 2000파운드의 폭약을 실은 벤츠 트럭을 몰고 돌진하여 미군 241명을 살상 하였다
1992년 3월 17일에는 유사한 방법으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이스라엘 대사관을 침범하여 29명이 죽고 242명이 부상당 하였다 1983년 이후부터는 중동지역에서 상징적인 테러 활동만 하고 있다.


*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터:오사마 빈 라덴은 누구인가?

미첼 초수도브스키 (by Michel Chossudovsky)
오타와대학 경제학과 교수
(Professor of Economics, University of Ottawa)

지구화 연구센터(Centre for Research on Globalisation (CRG)), 몬트리올
2001년 9월12일 globalresearch.ca에 올려짐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 테러 공격이 발생한 지 단 몇시간만에 부시 행정부는 증거도 없이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알카에다 조직이 주요 용의자"라고 결론냈다. 중앙정보국의 조지 티네트(George Tenet) 국장은 빈 라덴이 "경고를 거의 안하거나 아예 안하면서 연쇄 공격"을 계획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밝혔다. 외무장관 콜린 파월(Colin Powell)은 이 공격을 "전쟁 행위"라고 불렀고, 부시 대통령은 전국을 대상으로 한 저녁 텔레비전 연설에서 "이번 일을 저지른 테러리스트와 그들을 보호해주는 이들을 구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인했다. 전직 중앙정보국장 제임스 울시(James Woolsey)는 "국가 차원의 후원"을 지목하면서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외국 정부가 공모했을 수 있다고 암시했다. 전직 국가안보보좌관 로렌스 이글버거(Lawrence Eagleburger)는 "우리가 이런 공격을 당하면 우리가 엄청난 힘을 갖고 있으며 엄청난 보복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반면 공식 발언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서방 언론의 주술문은 중동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징벌 행위(punitive actions)"의 개시를 승인했다. 뉴욕타임스에 쓴 윌리엄 사피어(William Saffire)의 글은 "우리가 공격자들의 기지와 캠프를 합당하게 확정했을 때는 그곳을 분쇄해야 한다. 부차적인 피해의 위험을 최소화하되 인정하면서 말이다. 또 테러를 수용하는 국가들을 공개적으로 또는 은밀히 흔들어 놓아야 한다"고 되어있다.

이 글은 오사마 빈 라덴의 역사와 냉전시기 이슬람 "지하드(성전, Jihad)"와 미국 외교정책 형성의 상관관계 및 그 여파에 대해 약술한 것이다

 

뉴욕과 워싱턴에 대한 테러 공격의 핵심 용의자이며, 아프리카 지역 미국 대사관 폭탄 공격 때문에 연방수사국이 "국제 테러리스트"라고 이름 붙여준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은, 소련과 아프간 전쟁기간 중에 "역설적으로도 미국 중앙정보국의 후원 아래 소련 침략자들에 맞서 싸우도록" 불려 나왔다. [1]

1979년 소련이 친공산 정부인 바브라크 카말(Babrak Kamal)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에 대응해 "중앙정보국 사상 최대 규모의 비밀 공작"이 벌어졌다. [2]

아프간의 성전(지하드)을 소련에 대항하는 전체 무슬림 국가가 참여하는 전세계적 전쟁으로 만들고 싶어한 중앙정보국과 파키스탄의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ISI, 인터 서비시스 인텔리전스)가 적극적으로 부추기는 가운데 40개 나라에서 3만5천명의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이 1982년부터 1992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전투에 참여했다. 수만명은 또 파키스탄의 마드라사(madrasahs, 이슬람교 대학)에 유학을 왔다. 결국 10만명 이상의 외국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이 아프간 성전의 영향을 직접 받은 것이다. [3]

이슬람의 "성전"은 미국과 사우디 아라비아가 후원했으며 그 자금의 상당 부분은 황금 초승달 지역(the Golden Crescent) 마약 거래를 통해 확보한 것이었다.

1985년 3월, 레이건 대통령은 국가안보 결정 명령(National Security Decision Directive) 166호에 서명했다... 이는 점차 늘고 있는 무자헤딘에 대한 비밀 군사지원을 승인하는 것이었으며 비밀 아프간 전쟁의 새로운 목표가 정해졌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 목표란 비밀 공작을 통해 아프간에서 소련군이 패배하게 만들고 소련의 철수를 부추기는 것이다. 미국의 새로운 비밀 지원은 군수 물자를 크게 늘리는 것에서 시작됐다. 군수 물자 공급은 1987년에 연간 6만5천톤에 달할 때까지 꾸준히 늘어났다... 파키스탄 라왈핀디(Rawalpindi) 근처 간선도로변에 있는 파키스탄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의 비밀 본부로 향하는 중앙정보국과 국방부의 전문가들의 "끊임없는 행렬"도 진행됐다. 거기서 중앙정보국 전문가들은 파키스탄 정보기관원들과 만나 아프간 반군의 작전 수립을 도왔다. [4]

중앙정보국은 파키스탄의 군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를 이용해서 무자헤딘을 교육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결과 중앙정보국이 후원하는 게릴라 훈련은 이슬람의 가르침과 합쳐졌다.

주제는 이슬람교가 완벽한 사회-정치적 이념이며 성스런 이슬람이 무신론자인 소련 군대에 의해 침해당했으며,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교도들은 모스크바가 지원하는 좌파 정권을 타도함으로써 독립을 다시 외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5]

파키스탄 정보기관 (Pakistan's Intelligence Apparatus)

파키스탄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는 "중개자"로 이용됐다. 미국 중앙정보국의 "성전" 비밀 지원은 파키스탄 아이에스아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뤄졌다. 중앙정보국은 직접 통로를 통해 무자헤딘을 지원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비밀 공작이 "성공"하기 위해 워싱턴은 소련 파괴라는 "지하드"의 궁극의 목표가 드러나지 않게 조심했다.

중앙정보국의 밀턴 비어드먼(Milton Beardman)의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아랍인들을 훈련시키지 않았다." 카이로의 알아람 전략연구센터(the Al-aram Center for Strategic Studies)의 아브델 모남 사이달리(Abdel Monam Saidali)에 따르면, 빈 라덴과 "아프간 아랍인들"은 "중앙정보국이 허용한 고도의 세련된 훈련"을 받았다. [6]

비어드먼은 이 점에 대해서 오사마 빈 라덴이 워싱턴을 위해서 하고 있는 임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확인해줬다. (비어드먼이 인용한) 빈 라덴의 말로 표현하면 "나와 내 형제들 누구도 미국의 지원을 보여주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7]

민족주의와 종교적 열정으로 무장한 이슬람 전사들은 그들이 미국을 위해서 소련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정보기관의 고위층에서는 접촉이 있었지만, 현장의 이슬람 반군 지도자들은 워싱턴이나 중앙정보국과 전혀 접촉하지 않았다.

중앙정보국의 후원과 대규모의 미국 군사지원으로 파키스탄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는 "정부기관 모든 곳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수평적인 구조"를 만들어 냈다. [8] 이 기관은 15만명에 달하는 군인, 정보부원, 관료, 비밀 공작원, 정보제공자들로 구성된 스태프를 갖췄다. [9]

한편 중앙정보국의 공작은 지아 울 하크(Zia Ul Haq) 장군이 이끄는 파키스탄 군사정권 또한 강화시켰다.

중앙정보국과 아이에스아이의 관계는 지아가 부토를 축출하고 군사정권을 세운 이후 더욱 긴밀해졌다... 아프간 전쟁 기간 내내 파키스탄은 심지어 미국보다도 더 강한 반 소련 성향을 띄었다. 소련군이 1980년 아프간을 침공한 직후 지아는 소련의 중앙아시아 지역을 동요시키기 위해 아이에스아이의 우두머리를 파견했다. 중앙정보국은 1984년 10월에 이 계획에 동의했다... '중앙정보국은 파키스탄보다 훨씬 조심스러웠다.' 파키스탄과 미국은 뒤에서는 군사활동 확대가 최선이라는 데 합의했으면서도 표면적으로는 협상을 내거는 위장술을 폈다. [10]

황금 초승달 마약 삼각지대 (The Golden Crescent Drug Triangle)

중앙 아시아의 마약 거래 역사는 중앙정보국의 비밀 공작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소련-아프간 전쟁 이전에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아편 생산은 그 지역내 소규모 시장으로 향했다. 헤로인은 생산되지 않았다. [11] 이 점에 대해, 알프레드 맥코이(Alfred McCoy)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중앙정보국이 아프간에 대한 맹공격을 벌이기 시작한 지 2년 안에 "파키스탄과 아프간 국경지역은 세계 최대의 헤로인 생산지역이 돼 미국내 수요의 60%를 공급했다. 파키스탄에서 헤로인 중독자는 1979년 사실상 전무했으며... 1985년에 120만명에 달했다. 그 어느 나라보다 급격하게 증가한 것이다." [12]

중앙정보국 요원들이 다시 이 헤로인 무역을 통제했다. 무자헤딘 게릴라들이 아프간쪽 국경 지역을 장악했을 때 농민들에게 혁명 세금 차원에서 아편을 재배하도록 명령했다. 국경 넘어 파키스탄쪽에서 아프간 지도자들과 지역 조직들은 파키스탄 정보기관의 보호 아래 수백개의 헤로인 제조 공장을 운영했다. 이 완전 개방된 마약거래 기간동안 이슬라마바드 주재 미국 마약청은 주요 마약사범 체포에 앞장서지 않았다... 미국 관리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마약 정책은 소련 영향권에 대항한 전쟁에 종속되어 있다"며 아프간 동맹국들의 헤로인 거래 혐의 조사를 거부했다. 1995년 전직 중앙정보국 아프간 담당 책임자 찰스 코건(Charles Cogan)은 중앙정보국이 냉전을 위해 마약 전쟁을 희생했음을 인정했다. '우리의 주요 임무는 소련에 가능한 한 최대의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마약거래를 조사할 자원도 시간도 정말 없었다. 나는 이 점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상황은 예기치 않은 부산물이 있게 마련이다... 마약이라는 부산물이 있었다, 맞다. 그러나 주 목표는 달성됐다. 소련이 아프간을 떠난 것이다.' [13]

냉전의 흔적을 좇아서 (In the Wake of the Cold War)

냉전의 흔적을 좇아보면 중앙 아시아 지역은 단지 광대한 원유 매장량 때문에만 전략적 요충이 아니다. 기업이나 금융기관, 정보기관, 조직 폭력단에게는 수십억 달러의 자금을 의미하는 세계 아편의 4분의 3을 생산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황금 초승달 지역의 연간 마약 거래 규모 (1천억에서 2천억 달러 규모)는 국제연합이 5천억 달러로 추정하는 전세계 마약류 거래의 3분의 1에 달한다. [14]

소련 붕괴와 함께 마약 생산이 다시 급격하게 늘었다. 국제연합 추산으로는 구 소련 연방내 무장 반란이 시작된 때인 1998년에서 1999년 사이 아프가니스탄의 아편 생산량은 4600톤으로 사상 최고치에 달했다. [15] 구 소련의 조직 폭력단과 연합한 강력한 기업 집단들이 헤로인 통로를 전략적으로 장악하려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

파키스탄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의 광범한 군 정보 네트워크는 냉전이 끝난 뒤에도 해체되지 않았다. 중앙정보국은 여전히 파키스탄 발 이슬람 "지하드"를 지원했다. 새로운 비밀 공작이 중앙 아시아, 코카서스, 발칸 지역에서 시작됐다. 파키스탄의 군, 정보 기관들은 본질적으로 "소련 해체와 중앙 아시아 지역 6개 무슬림 공화국 건설의 촉매제 구실을 했다." [16]

한편, 사우디 아라비아의 와하비(Wahhabi)파 선교사들은 세속 국가 기구를 잠식하면서 러시아 연방은 물론 이들 무슬림 공화국에서도 자리를 잡았다. 반미 이념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이슬람 근본주의는 구 소련내 워싱턴의 전략적 이해에 크게 기여했다.

1989년 소련군의 철수 이후에도 아프간 내전은 약화되지 않았다. 탈레반은 파키스탄 데오반디스(Deobandis)와 그들의 정당인 자미아트 울 울레마 에 이슬람(Jamiat-ul-Ulema-e-Islam, JUI)의 지지를 받았다. 1993년 제이유아이는 베나지르 부토(Benazzir Bhutto) 총리의 연정에 참여했다. 제이유아이와 군부, 군 정보기관의 끈이 형성됐다. 1995년 카불의 헤즈브 이 이슬라미 헥트마티아르(Hezb-I-Islami Hektmatyar) 정권이 무너지자 탈레반은 강경 이슬람 정부를 출범시키고, "제이유아이 파벌에게 아프간 내부 훈련소의 통제권을 넘겼다..." [17]

사우디 아라비아의 와하비 운동의 지지를 얻은 제이유아이는 발칸 지역과 구 소련 지역에서 싸울 자원자들을 모집하는 데 핵심 임무를 맡았다.

제인 디펜스 위클리(Jane Defense Weekly)는 이에 대해 "탈레반의 인력과 장비의 절반은 정보기관 지배를 받는 파키스탄에서 보낸 것"이라고 확인했다. [18]

사실, 소련의 철수 이후 아프간 내전을 벌인 두쪽 모두 계속 파키스탄 아이에스아이를 통해 비밀 지원을 받은 것 같다. [19]

다른 말로 하자면, 미국 중앙정보국의 통제를 받는 파키스탄 군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의 후원을 등에 업은 탈레반 이슬람 정권은 미국의 지정학적 이해에 주로 봉사한 것이다. 황금 초승달 지역 마약 거래는 (1990년대초에 등장한) 보스니아 무슬림 군대와 코소보 해방군을 지원하는 데 쓰였다. 마지막 몇달 동안 무자헤딘 용병이 마세도니아를 침공한 코소보 해방군 테러리스트들에 섞여 싸웠다는 증거가 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이것은 왜 미국이 노골적인 여성 인권 침해, 소녀들의 교육 금지, 정부기관내 여성의 해고, "샤리아 처벌법"의 시행 등을 포함한 탈레반의 폭력적 통치에 눈을 감았는지를 설명해준다. [20]

 

체첸 전쟁 (The War in Chechnya)

체첸과 관련해서 주요 반군 지도자인 샤밀 바사예프(Shamil Basayev)와 알 카탑(Al Khattab)은 중앙정보국이 지원하는 아프간 및 파키스탄 캠프에서 훈련을 받았다. 미국 의회의 테러리즘과 비재래식 전쟁에 대한 특별팀 팀장인 요세프 보단스키(Yossef Bodansky)에 따르면 체첸 전쟁은 1996년 소말리아의 모가디슈에서 열린 히즈브알라(HizbAllah) 국제 비밀 정상회담 중에 계획됐다. [21] 이 회담에는 오사마 빈 라덴과 이란 및 파키스탄 아이에스아이의 고위 정보기관 관리들이 참석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파키스탄 아이에스아이의 체첸 사태 개입은 "무기와 전문적 기술을 제공하는 차원을 넘는 것이었다. 파키스탄 정보기관과 이 기관의 급진 이슬람 대리인들은 실제로 전쟁을 지휘했다." [22]

러시아의 주요 송유관은 체첸과 다게스탄(Dagestan)을 지난다. 워싱턴이 형식적으로 이슬람 테러리즘을 비난하긴 했지만, 체첸 전쟁의 간접적인 수혜자는 카스피해 유역의 석유 자원과 송유관 통제권을 놓고 경쟁하는 앵글로섹슨 계열의 석유 메이저들이다.

(각각 샤밀 바사예프와 에미르 카탑이 이끄는) 두개의 핵심 체첸 반군들은 3만5천여명으로 추정되며, 직접 체첸 반군을 조직하고 훈련시키기까지 한 파키스탄 정보기관 아이에스아이의 지원을 받았다.

[1994년에] 파키스탄 아이에스아이는 바사예프와 그의 신뢰받는 부관들이 아프가니스탄 코스트(Khost) 지역의 아미르 무아위아(Amir Muawia) 캠프에서 집중적인 이슬람 교화와 게릴라 전쟁 훈련을 받게 해줬다. 이 캠프는 1980년대 초반 미국 중앙정보국과 아이에스아이가 설치했으며 유명한 아프간 군사지도자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Gulbuddin Hekmatyar)가 운영했다. 1994년 7월 이 캠프에서 교육을 마친 바사예프는 파키스탄의 마르카즈 이 다와르(Markaz-i-Dawar) 캠프로 옮겨 고급 게릴라 전술 교육을 받았다. 파키스탄에서 바사야프는 파키스탄 최고위급 군 장성과 정보기관 관계자를 만났다. 국방장관인 아프탑 샤흐반 미라니(Aftab Shahban Mirani) 장군, 내무 장관 나세룰라 바바르(Naserullah Babar) 장군, 아이에스아이의 이슬람 진영 지원 담당 지부장 자베드 아슈라프(Javed Ashraf) 장군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현재 모두 은퇴했다) 고위급 관계는 바사예프에게 아주 유용했다. [23]

훈련과 교화를 받은 이후 바사예프는 1995년 첫번째 체첸전쟁에서 러시아 연방 군대에 대한 습격을 이끄는 임무를 맡았다. 그의 조직은 알바니아 조직 폭력배, 코소보 해방군은 물론이고 모스크바의 조직폭력배와도 광범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1997~98년 러시아 연방 보안 서비스(FSB)에 따르면 "체첸 반군 지도자들은 코소보에서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위장을 위해 유고슬라비아에 부동산 업체로 등록한 몇몇 기업을 통해서." [24]

바사예프의 조직은 수많은 부정 행위에도 개입해왔다. 여기엔 마약거래, 불법 도청, 러시아 송유관 파괴, 납치, 매춘, 위조 달러 거래, 핵물질 밀매 등이 포함된다.(마피아가 알바니아의 붕괴된 피라미드 판매조직과 관련된 것을 참고하라) [25] 광범한 마약 자금 세탁과 함께, 다양한 불법 활동으로 얻은 수익금이 용병 모집과 무기 구입을 위해 흘러 들어갔다.

아프간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샤밀 바사예프는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 노병인 무자히딘 사령관 "알 카탑(Al Khattab)"과 줄이 닿았다. 알 카탑은 자원해서 아프간 전쟁에 참여한 인물이다. 바사예프가 그로즈니로 돌아간 지 채 몇달이 안됐을 때 (1995년 초) 카탑은 무자헤딘 전사들을 훈련시킬 군 부대를 체첸에 구축하기 위해 초청됐다. 영국방송공사에 따르면 카탑이 체첸에 자리잡은 것은, "체첸에 자금을 공급하는 모스크와 갑부 개인들이 재정을 책임지는 전투적 종교단체인 사우디 아라비아의 (국제) 이슬람 구제 조직(Islamic Relief Organisation)의 주선을 통해서 였다." [26]

 

마치는 말 (Concluding Remarks)

냉전 시대 이후 워싱턴은 오사마 빈 라덴을 세계 최고의 테러리스트로 지목하고 연방수사국의 "최우선 수배자 명단"에 올려놓은 동시에 의식적으로 그를 지원했다.

무자헤딘이 발칸 지역과 구 소련에서 미국을 위한 전쟁을 벌이느라고 바쁜 와중에, 미국내 경찰 조직인 연방수사국은 소련-아프간 전쟁 이후 비밀 공작을 통해 국제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한 중앙정보국과 별개로 움직이면서 국내에서 테러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

지독하게 역설적으로, 부시 행정부가 "미국에 대한 위협"이라고 지목한 이슬람 지하드가 세계무역센터와 국방부에 대한 테러 공격의 혐의를 받고 있는 와중에, 바로 그 조직이 발칸과 구 소련에서 미군과 정보기관의 핵심적인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뉴욕과 워싱턴의 테러 공격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진실이 활짝 드러남으로써, 부시 행정부가 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들과 함께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군사 모험을 강행하지 못하게 해야할 것이다.

 

주석

  • [1] Hugh Davies, International: `Informers' point the finger at bin Laden; Washington on alert! for suicide bombers, The Daily Telegraph, London, 24 August 1998.
    휴그 데이비스, 국제 뉴스: '정보제공자들은' 빈 라덴을 지목한다. 워싱턴이 자살 폭탄으로 초긴장에 돌입, 데일리 텔레그라프, 런던, 1998년 8월24일
  • [2] See Fred Halliday, "The Un-great game: the Country that lost the Cold War, Afghanistan, New Republic, 25 March 1996)
    프레드 할리데이, "위대하지 않은 게임: 냉전을 잃어버린 나라, 아프가니스탄, 뉴리퍼블릭, 1996년 3월25일을 보라.
  • [3] Ahmed Rashid, The Taliban: Exporting Extremism, Foreign Affairs, November-December 1999.
    아메드 라쉬드, 탈레반: 극단주의를 수출함, 포린 어페어스, 1999년 11-12월호.
  • [4] Steve Coll, Washington Post, July 19, 1992.
    스티브 콜, 워싱턴포스트, 1992년 7월19일.
  • [5] Dilip Hiro, Fallout from the Afghan Jihad, Inter Press Services, 21 November 1995.
    딜립 히로, 아프간 지하드의 부산물, 인터 프레스 서비시스, 1995년 11월21일.
  • [6] Weekend Sunday (NPR); Eric Weiner, Ted Clark; 16 August 1998.
    주말 일요일(NPR); 에릭 와이너, 테드 클라크, 1998년 8월16일.
  • [7] 같은 자료(Ibid)
  • [8] Dipankar Banerjee; Possible Connection of ISI With Drug Industry, India Abroad, 2 December 1994.
    디판커 바네르제; 아이에스아이와 마약산업의 연계 가능성, 인디아 어브로드, 1994년 12월2일.
  • [9]같은 책 (Ibid)
  • [10] See Diego Cordovez and Selig Harrison, Out of Afghanistan: The Inside Story of the Soviet Withdrawal,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1995. See also the review of Cordovez and Harrison in International Press Services, 22 August 1995.
    디에고 코르도베즈와 셀리그 해리슨, 아프간에서 나옴: 소련 철수의 내막, 옥스퍼드대학 출판부, 뉴욕, 1995를 보라. 또 코르도베즈와 해리슨이 인터내셔널 프레스 서비시스 1995년 8월22일치에 쓴 평론도 보라.
  • [11] Alfred McCoy, Drug fallout: the CIA's Forty Year Complicity in the Narcotics Trade. The Progressive; 1 August 1997.
    알프레드 맥코이, 마약 부산물: 미국 중앙정보국의 마약거래 연루 50년, 더 프로그레시브, 1997년 8월1일.
  • [12]같은 책 (Ibid)
  • [13]같은 책 (Ibid)
  • [14] Douglas Keh, Drug Money in a changing World, Technical document no 4, 1998, Vienna UNDCP, p. 4. See also Report of the International Narcotics Control Board for 1999, E/INCB/1999/1 United Nations Publication, Vienna 1999, p 49-51, And Richard Lapper, UN Fears Growth of Heroin Trade, Financial Times, 24 February 2000.
    더글러스 케, 변화하는 세상의 마약 자금, 기술 문서 4호, 1998 빈 UNDCP, 4쪽. 국제 마약 통제회의의 1999년 보고서, E/INCB/1999/1, 국제연합 출판부, 빈 1999, 49~51쪽, 리차드 래퍼, 국제연합이 헤로인 무역 증가에 대해 우려하다, 파이낸셜 타임스, 2000년 2월24일도 보라.
  • [15] Report of the International Narcotics Control Board, op cit, p 49-51, see also Richard Lapper, op. cit.
    국제 마약 통제회의의 보고서, 49~51쪽, 리차드 래퍼의 같은 책도 보라.
  • [16] International Press Services, 22 August 1995.
    국제 프레스 서비시스, 1995년 8월22일
  • [17] Ahmed Rashid, The Taliban: Exporting Extremism, Foreign Affairs, November- December, 1999, p. 22.
    아메드 라쉬드, 탈레반: 극단주의를 수출함, 포린 어페어스, 1999년 11-12월호, 22쪽.
  • [18] Quoted in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 3 September 1998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 1998년 9월3일에서 인용.
  • [19] Tim McGirk, Kabul learns to live with its bearded conquerors, The Independent, London, 6 November 1996.
    팀 맥거크, 카불이 수염기른 정복자와 공생하는 법을 익히다, 디 인디펜던트, 런던, 1996년 11월6일.
  • [20] See K. Subrahmanyam, Pakistan is Pursuing Asian Goals, India Abroad, 3 November 1995.
    케이 수브라흐마니암, 파키스탄이 아시아 내부 목표를 추구하다, 인디아 어브로드, 1995년 11월3일을 보라.
  • [21] Levon Sevunts, Who's calling the shots?: Chechen conflict finds Islamic roots in Afghanistan and Pakistan, 23 The Gazette, Montreal, 26 October 1999.
    레본 세번츠, 누가 지휘하는가?: 체첸 분쟁은 이슬람의 뿌리를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찾는다, 23 더 가제트, 몬트리올, 1999년 10월26일.
  • [22] 같은 책(Ibid)
  • [23] 같은 책 (Ibid)
  • [24] See Vitaly Romanov and Viktor Yadukha, Chechen Front Moves To Kosovo Segodnia, Moscow, 23 Feb 2000.
    비탈리 로마노프와 빅토르 야두크하, 체첸 전선이 코소보 세고드니아로 이동하다, 모스크바, 2000년 2월23일을 보라.
  • [25] The European, 13 February 1997, See also Itar-Tass, 4-5 January 2000.
    더 유러피언, 1997년 2월13일, 이타르타스 통신, 200년 1월 4~5일도 보라.
  • [26] BBC, 29 September 1999.

  • *알 카에다(Al-Queda)
    http://myhome.hanafos.com/~choijae0/alka.htm
    알카에다는 국제적 이슬람 과격원리주의 테로단체이며 기지(基地)라는 뜻의 아랍어

    (1) 빈 라덴의 조직 일지
    1980년 아달라 아잠(팔레스타인 출신, 킹 압둘 아지즈대학교 교수 역임)과 무크탑 알키다마트(MAK,마크 타브 알 카다마트) 창설
    -->아프가니스탄 반군 지원
    -->미국.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에서 5천명 모병(미국 뉴욕의 브루클린에서도 MAK 전사 지원병 모집 사무소 개설)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 민병 훈련소 설치
    1988년 아잠과 헤아져 알 카에다 창설
    알카에다 결성은 1979년 소련군 아프가니스탄 침공시 아랍의용군으로 참전한 오사마 빈 라덴이 1988년 쯤 설립
    1989년 아잠 사망과 무크탑 알카다마트(MAK) 과격파 흡수
    -->아프가니스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로 귀환 그리고 건설회사 운영하며 사우디, 예멘 반정부 새력 지원
    1991년 사우디서 추방과 수단으로 근거지 이동, 1991년 걸프전쟁이 일어나면서 반미세력으로 전환
    1995년 수단서 추방 아프가니스탄 정착
    1996년 미국에 전쟁선포
    1998년 이슬라믹 지하드등 5개 단체 테러연합 <유태인과 기독교 십자군 세력에 대한 성전을 위한 국제 회교도 전선> 창설

    2)빈 라덴의 조직 알카이다 목표
    -이슬람 극단주의 그룹들과 연합해 범 이슬람 종교운동 확산
    -이슬람 지역에서 미국등 서방세력 비(非)이슬람교도, 사이비 이슬람 지도자을 몰아내는 것

    (3)빈 라덴의 조직 알카이다 세력
    옛 소련과 전투경험이 있는 5만명의 아프가니스탄 전역자 가운데 수시로 충원
    -라덴의 무장테러단체에는 마스미라는 일본여성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현재 당국이 그녀의 행방을 �고 있는데 그녀의 남편이 라덴과 관계가 깊은 알제리 출신의 하미드 아이크라는 것이다 하미드는 LA공황 미수 폭발 사검의 범인으로 지명수배된 사람이다

    (4)빈 라덴의 조직 알카이다 자금
    -사우디 건설업자의 이들로 일부 구좌에는 3억 달러가 발견되기도 했다
    -현금 동원할 수 있는 사업조직 있음
    -이외에 많은 기부자가 있음

    (5)빈 라덴의 조직 알카에다 작전 범위
    -알제리, 우즈베키스탄, 시리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필리핀, 레바논, 이라크, 코소보, 체첸, 이스라엘 서안 및 가자지구, 사우디, 수단, 아프가니스탄 등 30여개국 3000명-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

    (6)오사마 빈 라덴은 누구인가?(빈 라덴과 샤밀 바사예프등 자료)
    http://globalresearch.ca
    http://php.chol.com/~marishin/politics/laden.html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의 토라 보라산악지대를 비롯해 파키스탄 국경지대, 인도와 파키스탄 분쟁지역 카슈미르, 중국 국경 지대 등지에 은신하고 있다고 예측할 수 있는 자료

    *낫세르의 아랍민족주의와 아랍 바트 사회당(바트당)
    (1)낫세르의 아랍민족주의
    낫세르의 아랍민족주의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실행하면서 이랍 급진주의자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반군제(반왕정), 반식민주의(반제국주의=반영. 반미성향), 반시오니즘(반이스라엘 투쟁), 사회주의(반봉건주의와 사회주의 표방), 세속주의(이슬람교 국가수립=회교국가수립), 범아랍주의(아랍통일)등 여러 이데올로기들을 합친 것이다
    낫세르의 추종자로 이라크의 후세인과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팔레스타인의 야세르 아라파트, 시리아의 하피즈 알- 사다드 같은 아랍권의 1970년대에 젊은 지도자들이 이러한 낫세르의 주장에 고무된 인물들이다
    이들은 인민해방전선이나 군부쿠데타로 등장한 좌익군정체제 지도자들이다<혁명평의회나 군사평의회, 군사위원회 의장등>
    미국등 연합군이 이라크 후세인정부와 알카에다를 정복함으로 아랍민족주의 패권이론과 세속주의(기독교과 십자군 전쟁이나 회교국가수립론)등이 서남아시아지역에서 사라지고 있다
    서남아시아 전체 인구 중 50%-60%가 이랍인이며 나머지는 페르시아인(이란인), 유태인(유대인), 쿠르드인, 터키인, 쿠웨이트인등이다
    (2)아랍 바트 사회당(바트당)
    아랍 바트 사회당(바트당)은 1947년 다마스카스에서 창설한 범아랍사회주의 정당이다
    아랍 전체의 운동(아랍민족주의 사회주의 운동)을 횡단적으로 하는 <민족지도부>와 나라별로 지부를 두는 <지역지도부,RC-기지, 알카에다>가 있다
    시라아의 바트당과 이라크의 지역지도부는 후세인 전대통령이 서기장이다 정원은 약 10만명이었다
    정당은 바트당 중심으로 공산당, 쿠르드 민주당등의 통일전선인 <민족진보전선>을 조직하고 있다 <민족진보전선=국민진보전선>은 1973년 7월 바트당과 이라크 공산당이 통일전선 조직으로 구성하여 창설되었으며 1975년 쿠르드 각 정당도 가맹했다
    1979년 3월 이라크 공산당이 탈퇴하여 비합법화 하였다
    민족진보전선이 인민전선 투쟁조직이다(북한정부의 반미항전세력이 북한 노동당과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http://blog.daum.net/007nis/9305711

     

    *미국에서 제3세계 NLPDR 지원하는 진보운동단체 국제행동센터(IAC) 주요 자료

    1.IAC(International Action Center, 국제행동센터)
    미국에서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고 진보운동을 벌이는 국제행동센터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운동단체 지원세력
    -이라크 전쟁반대, 각종 반전(反戰) 반미(反美) 반부시 반자(反資)투쟁 단체들과 연대로 각종 집회 주도
    -급진반전행동단체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는 단체로 이라크 민족주의자 운동을 지원하고 있다(이라크 반군이나 테러단체와 연계)
    -미국내 친북세력과 연계
    재미자주사상연구소나 미국선군정치연구소조 오픈화(합법)조직이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이다
    (1)신년사(新年辭)--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 의장 (이행우)
    -노무현 정부 파병반대, 미국의 이라크 점령정책 반대 그리고 파병압력 미국 규탄
    -뉴욕에서 울려 퍼진 노무현정부 이라크 파병 반대 함성
    2003년 12월 31일, 자주연합. 노둣돌. 타민족단체 <전쟁과 인종주의를 반대하는 국제행동연대 ANSWER, 필리핀 민족해방운동 지원단체 NISPOP, 푸에토리코 민족해방 투쟁을 벌이는 푸에토리코 진보운동단체, 미국에서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고 진보운동을 벌이는 국제행동센터 IAC)등 뉴욕 맨하튼에서 촛불 집회 개최
    -미군철수 요구와 NLPDR(민족해방) 투쟁이 주요 특징
    -ANSWER
    -http://chaju.org/new/bottom.htm
    -http://chaju.org/new/1025/1025.htm
    -민족통신(MinJok-Tongshin English Edition)
    뉴욕 매하튼을 뒤흔든 이라크 파병 철회 투쟁 자료(파병철회 뉴욕연대)
    http://www.minjok.com/ywsbbs/bbs.php3?bbs_code=urgent&view=10118
    (2)국제행동센터 IAC 사무총장 새라 플라운더씨의 국내 주요 활동 자료
    -미국의 국제행동센터 사무총장이며 ANSWER 소속인 새라 플라운더스씨가 한국을 찾아 이라크 전쟁에 사용된 열화우라늄의 피해 참상을 고발하고 한국시민사회의 파병 반대운동에 동참 호소
    -미국 국제행동센터 사무총장 새라 플라운더스 초청 행사
    11월 7일 금요일 정동 프란체스코 회관에서는 <미국 국제행동 선터 IAC> 사무총장 새라 플라운더스씨를 모시고 <이라크전과 열화우라늄탄에 의한 피해>를 주제로 공개토론
    http://www.khis.or.kr/h2h/200402/text/wonseo.htm
    국제민주연대(KHIS, Korean House for International Solidarity)의 해외 한국기업 감시, 다국적 기업 감시활동(해외 한국기업인권 백서 발간이나 다국적기업의 현황 그리고 신자유주의 활동감시)주도
    http://www.khis.or.kr
    -이라크 파병, <방사능 오염>으로 비극초래 미국 국제행동센터 새라 플라운더스 연설(민중의 소리)
    http://db.voiceofpeople.org/new/news_view.html?serial=6337&category=type10
    -뉴욕에서 울려 퍼진 노무현 정부 이라크 파병 반대 함성
    12월 31일 자주연합, 노눗돌, 타민족단체 뉴욕 맨하튼에서 촛불집회개최 국제행동센터(IAC)와 ANSWER 대표로 연설하는 새라 프라운더스
    http://chaju.org/new/20031231/20031231p.htm

    2.급진 반전 행동단체 활동 주요 자료
    -현장의 감동 살아있는 뉴스(민중의 소리) 평등연대정책위원 김광수
    노동계급의 영웅적 파업투쟁이 전쟁 막는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기 위해 미제국주의자들을 패배시키자
    http://voiceofpeople.org/new/news_view.html?serial=14104&category=type16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Stupower):상반기 파병 반대 운동 평가와 전망
    http://stu.kdlp.org/bbs/view.php?id=column&no=24
    -오늘 움직이는 민중언론 미디어 참 세상
    미제국주의와 반제.반전운동
    http://cast.jinbo.net/news/view.php?board=news&id=31029
    -노동자의 힘, 반제. 반세계화. WTO반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노동해방의 기치를 높이들자
    http://www.pwc.or.kr


    3.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 주요 자료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진보코리아,현장의 소리)
    http://www.chaju.org
    전자우편 ckr@chaju.org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
    http://members.aol.com/reunikorea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전문과 강령)
    http://chaju.org/new/ckrkr.htm
    미군철수와 자주정부 수립 방안제시(주요 내용)
    -한총련 투쟁은 옳았다(뉴욕본부:자주민주통일 미주연합)
    http://user.chollian.net/~chungyy/sisafile-1-2-hanchongryu.htm
    -<민족통신> 자료
    국가보안법을 즉각 철폐하고 구속된 송학삼동지를 즉각 석방하라(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
    http://www.minjok.com/article/viewstatement.php3?code=312
    -미주 19단체 국가보안법 폐지촉구
    민족통신 자료
    http://www.minjok.com/news/viewnews.php3?code=25650
    천주교인권위원회
    http://www.cathrights.or.kr/news/read.php?idxno=2374&vsec=99
    -범민련 해외본부 소식
    http://www.bommin.net/kor/kor06.htm
    이들은 곧 뉴욕 통련을 비롯해 필라델피아, 워싱턴CD, 시카고 등지를 기반으로 한 통일운동을 강령으로 하는 협의체(동포회의)를 거쳐 1998년에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자주연합)을 결성하게 된다
    -범민련 해외본부 소식
    http://www.big.or.Jp/~bommin/Kor/Kor061.htm
    <재미청년연대>대표단의 성원은 박혜정(단장, 소속단체:노둣돌>, 육영운(노둣돌>, 조현숙(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 청년위원회)등 3인이다
    주한미군 전면 철수하라
    <김정일장군님 중국비공식방문>조중수뇌회담 협조와 평화의 흐름을 과시
    -통일학연구소(미주평화통일연구소)
    http://www.onekorea.org
    -미국선군정치연구소조 위원장 죤 폴커프(http://ndfsk.dyndns.org)
    ->선군조선(先軍朝鮮) 주요 자료
    미국 너 인권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느냐
    가장 극악한 인권유린 국가
    성조기를 불사르자
    부시와 럼즈펠드부터 제거해야 하리
    ->한국민족민주전선 구국전선이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악용하여 반미 반부시 전위대 미국선군정치연구소조 위원장 죤 폴커프 글로 선전하고 있다
    ->죤 폴커프는 반미인민전쟁론자 한국민족민주전선 미국사무소 소조 미국선군정치연구소조를 운영하고 있다 선군정치연구소조는 김일성 김정일 친위대로 북한군부 국방위원회 소속이다
    이들은 알카에다등처럼 반미투쟁단체로 무장봉기나 무장투쟁, 테러등도 자행하는 극가사회주의자들이다
    미국선군정치연구소조와 위원장 죤 폴커프는 미국을 적으로 규정하는 세력으로 미국정부 입장에서 볼때 그들은 미국의 적들이다
    ->미국선군정치연구소조는 김현환씨들의 재미자주연구소와 연계하여 연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미자주연구소가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 소속으로 알려지고 있다
    4.테러정세(국가정보원 자료)
    http://www.nis.go.kr/kr/security/terror/conditions.html
    -연도별 발생 추세
    -발생지역
    -테러성향 및 조직
    -우리의 테러대응활동

    *<김광수> 노동계급의 영웅적 파업투쟁이 전쟁 막는다(친북 NLPDR)
    ---김광수/평등연대 정책위원
    http://www.voiceofpeople.org/new/news_view.html?serial=14104&category=type16(민중의 소리 자료)

    친북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이론을 최근에 설파한 자료이다
    노동자의 총파업으로 이라크 전쟁에서 연합군이 패배시키고 미국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자는 NLPDR 지침이론 자료이다
    민족해방계열내 제3세계 민주화와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는 미국 민주당축의 반전운동 세력과 공산주의 NLPDR 세력간의 이론 차이점을 볼 수 있는 자료이다 NLPD세력 중 민족해방계열은 반전운동 투쟁을 주요 투쟁으로 하면서 부차적으로 노동자 농민, 빈민층 권익생존투쟁에 주력하고 있으며 민중계열은 파업과 노동자. 농민의 무장투쟁을 주요투쟁으로 하면서 부차적으로 반전운동으로 주력해야 국제적 NLPDR세력이 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평등연대 정칙위원 김광수씨의 "노동계급의 영웅적 파업투쟁이 전쟁 막는다"는 글을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입장의 반미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 이론 자료이다
    국가기업이나 자본가 기업등을 파업으로 때려 부수고 무장혁명으로 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하자
    -미국 대통령선거에서의 국제운동조직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세력들의 동향은 다음과 같다 NLPDR계열내 민족해방그룹(NL계열) 국제행동센터등의 주도하는 반전운동세력은 민주당 케리후보나 오마바후보를 지지하고 있으며 NLPDR계열내 민중민주주의 혁명(PD계열) 노동조합 중심의 파업투쟁 우선론자들은 케리후보 반대입장을 주도하고 있다 민중계열은 반부시(반매케인). 반케리(반오마바)입장이다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세력들은 반미 반자 반제운동 투쟁으로 미국정부의 어느 정부도 거부하고 있으며 비타협적으로 무장투쟁과 게릴라 투쟁, 인민전쟁등을 주장하고 있다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세력이 바로 김정일세력 한국민족민주전선과 빈라덴등의 알카에다, 국가사회주의자 그룹이다

    http://blog.daum.net/007nis/9856717

     

    *중동지역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는 미국정부내 인사들의 활동이 사우디정부의 반정부 단체와 연계하여 급진 민주화, 자유화 ,개방화 운동을 주도해왔다 그런 형태가 빈 라덴과 같은 급진 아랍민족주의 운동을 지원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결국 사회주의 운동과 접목하여 국가사회주의나 NLPDR 급진 민족주의 운동단체 등장을 초래해왔다

    중동지역 이슬람교도 미국 민주당의 정책 동성애 결혼(남자와 남자 결혼이나 여자와 여자 결혼)이나 극단적 낙태등이 문화적으로 불합리하여 고민하는 것 같다 그런데 중동지역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이 미국 민주당 정책 동성애 결혼이나 전면적 낙태 허용등을 지지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