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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이란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을가?(중국 국제방송) 본문
http://korean.cri.cn/740/2007/10/29/1@108868.htm
1.아란이슬람공화국 국가 개요(槪要)
(1)국명: 이란 회교공화국(The Islamic Republic of Iran)<이란이슬람공화국>
(2)위치: 중동, 페르시아만 연안
(3)면적:164만 8000평방 km<한반도 면적의 7.5배>
(4)국경선:5,440km
(5)해안선:2,440km
(6)영해:12해리(어업전관수역 중간선)
(7)인구:6,827만 8,826명(2003년)
(8)수도:테헤란
(9)공용어(언어) 페르시아어(이란어,페르시아족 51%)를 대부분이 사용하면서 터키어(터키족 18%), 쿠르드어(쿠르드족), 아랍어(아랍인 3%)등도 사용하고 있다 이란국가도 언어와 종족 분쟁으로 국가발전 장애와 중동지역 분쟁 갈등으로 문제화 되어 왔다
(10)종족구성 주민의 대다수는 이리아계의 이란인이며 그 밖에 7세기 이후 이란에 정착한 아랍인, 11세기말 중앙아시아에서 들어온 투르크인, 소수민족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앗시리아인이 살고 있다 아랍인은 주로 이라크와 인접한 지역인 후제스탄 지방, 투르크인은 투르크메니스탄과 접하는 고르간지방 및 터키와 인접하는 아제르바이잔지방에 많다 이란계. 투르크계. 아랍계로 부속조직을 가지고 있는 주민도 있다 이란계의 부족으로는 쿠르드.루르. 바흐티야리. 발루치의 여러 부족이 있다 쿠르드족의 거주지는 이란. 터키. 이라크의 3개국에 걸치며,이란에서는 북서부인 코르데스탄. 서(西)아제르바이잔. 케르만샤한주에서 사는데 인구는 약 350만명으로 짐작된다 그들의 대부분은 19세기 후반에 유목을 그만두고 정착했다 루르족은 이란 서부의 로렌스탄에서 살며, 바흐티야리족은 파르스.에스파한. 후제스탄의 자그로스 산지에서 산다 루르와 바흐티야리를 합친 인구는 약 250만명이다 발루치족은 남동부의 발루치스탄에서 산다 파키스탄령에도 많은 발루치족이 사는데 이란쪽의 인구는 약 60만명이다 투르크계의 부족으로는 북동부의 고르간과 호라산에서 사는 투르크멘족이 있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옛 소련에도 있는데 총인구가 약 100만명은 될 것으로 짐작되며 이란령에 속한 인구는 약 10만명이다 그 밖에 카슈카이. 아프샤르. 샤사반등의 부족이 있다.. 페르시아족(51%-아리아계의 이란인). 아제르바이잔족(24%, 터키인=투르크인). 길락-마란다란족(8%) 쿠르드족(7%). 아랍족(3%)등
(11)종교:회교(시아파) 회교(시아파 89%, 순니파 10%), 조로아스터교, 유태교, 기독교 등
(12) 교육:의무교육 8년
(13)문맹률:25%
(14)국경일:2.11 <회교혁명기념일>
(15)헌법:1979년 12월 7일 제정 그리고 1989년 7월 개정
(16)정부형태:회교공화국<최고지도자 중심제>
(17)원수:하타미
(18)수상:하메네이
(19)실권자:하메네이 최고지도자<군 통수권자>
(20)대의기구:단원제(정원:290명, 임기 4년)
(21)정당:없음
(22)정부성향:중도중립(中道中立)
(23)UN가입:1945년 10월 24일
(24)비동맹가입:1979년 9월 3일
(25)국기:가로 세로 7:4비율의 직사각형을 위로부터 청, 백, 적 삼색으로 균분하여 <하나님은 위대하다:Allah Akbar>는 이란 글자 22개<혁명 기념일 Bahman 월 22일을 상징>를 청, 적 바탕에 11개씩 기입하고 백색바탕 중앙에 <하나님은 하나다>라는 글자를 형상화하여 삽입
(26)GDP와 1인당 GDP ㄱ.GDP---1,116억불(2003년) ㄴ.1인당 GDP---1,680불(달러)
(27)화폐단위--리얄
(28)무역(2003년 기준) ㄱ.수출---3,536,400만불(원유, 카페트등) ㄴ.수입---2,997,000만불(수송장비 및 기계, 철강 및 공산품등)
(29)주요자원 석유 매장량(세계 5위), 천연가스 매장량(세계 2위)
(30)국방비: 410,000만불(2002년)
(31)군사력<2002년> 이란의 병역제도는 의무병제(16세 이상)로 복무기간은 2년이다 이란 군사제도도 병정분리주의 국가형태로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며 군 통수권자는 최고지도자이다 군사조직은 정규군, 혁명군
ㄱ.육군----32만 5,000명 육군은 4개 기계화 사단, 6개 보병사단 및 특수전여단, 공수여단으로 구성, 전차 1,400대 보유
ㄴ.해군----1만 8,000명 잠수함 3척, 구축함 3척, 프리깃함 5척을 보유
ㄷ.공군----5만 2,000명 약 300대의 전투기 보유
ㄹ.혁명수비대---12만 5,000명<육군 10명, 해군 2만>--이란혁명군 출신..
ㅁ.민병대---50만명(혁명군 산하)---민방위군
ㅅ.대이라크 전쟁시 경험과 이스라엘, 파키스탄의 미사일 위협에 대비 미사일 개발 적극 추진 (사정거리 1,300킬로미터인 Shahab-3 중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1998년 7월 1차 시험. 2000년 7월 2차 시험)
(31)남북관계--등거리 외교원칙
ㄱ.남한--1989년 1월 24일 수교 수출(원유). 수입(자동차, 선박, 철강 제품등) 대림. 대우. 삼성등 15개업체 체류 이란은 한국의 중동지역 건설 진출이 제일 먼저 이루어진 나라로 건설수주는 1987년 3월까지 48건에 15억달러였다 2001년 교민수는 39명, 체류자 수는 680명이며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41명의 선수단이 참가했었다 이란 외무부의 국제연구소와 테헤란대학. 팔레비대학등에서는 한국학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1996년 이란으로부터 도입한 원유량은 7,800만 배럴이었다
ㄴ.북한--1973년 4월 15일 수교 반미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북한과는 여러부문에서 교류가 활발한 가운데 핵기술 분야의 협력, 북한의 스커드 미사일 수출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군사요원 파견, 트롤어선 2척 파견, 조업등 그리고 1991년 2월 원유공급협정과 1996년 11월 치안협력협정등을 체결했다
2.이란의 역사
(1)이슬람 이전
BC 1000년 무렵 아리아민족이 몇 세기 동안 이란고원에 침입하였고 북서부 이란에 정착한 메디아인은 BC 7세기 엑바타나<지금의 하마단>를 수도로 메디아왕국을 세웠다 BC 550년 파르스지방에서 일어난 아케메네스왕조는 메디아를 쓰러뜨리고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는 세계제국을 형성한 뒤 오랫동안 그리스와 전쟁을 했다 그러나 BC 331년 알렉산드로스대왕에 의해 멸망되었다 BC323년에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은 뒤로는 셀레우코스왕조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BC 250년 전후 북부 이란에서 세력을 떨친 이란계 유목민인 파르티아왕조가 셀레우코스왕조를 물리쳤다 파르티아는 500년간 이란을 다스리는 한편 서쪽에서는 로마와 대치했으나 226년 사산조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되었다 사산페르시아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고 아케메네스왕조시대의 전통을 이어 받아 이란문화의 융성기를 이루었다
(2)이슬람 시대
사산페르시아는 642년 아랍군에게 멸망되었다 옴마아드왕조. 아바스왕조 밑에서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추진되었고 아리비아어(아랍어)가 공용어로 되었다 그러나 부하라를 수도로 9세기에 번영한 사만왕조 아래에서 고대의 문예가 부흥하고 근세 페르시아문학이 생겨났다 사만왕조를 대신해 동(東)이란을 지배한 가즈니왕조는 투르크계 왕조였지만 이 왕들도 이란문화의 보호자가 되어 궁정에 많은 학자와 문인을 불러들였다 왕서<王書>를 쓴 피르다우시, 과학자 비루니는 이 시대의 사람이다 10세기 중반 무렵 중앙아시아에서 남하한 투르크계의 셀주크족은 가즈니왕조를 멸망시키고 이란의 지배자가 되었다 투르크인의 서아시아 유입(流入)은 이때 시작되었다 셀주크왕조의 여러 왕들도 페르시아문화를 보호해 가잘리. 우마르하이얌등 유명한 학자. 문인이 배출되었다 1258년에는 몽골인에 의해 일한국(汗國)이 1370년에는 티무르왕조가 수립되어 이란의 지배자가 되었다 왕조 교체때는 침략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해졌으나 새 왕조가 생겨난 뒤에는 국토의 부흥이 추진되어 이란 이슬람문화가 크게 일어났다 1501년 페르시아인 이란민족국가 사파비왕조가 성립, 시아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했는데 이 왕조는 샤 아바스 때 전성기를 맞았다 수도 에스파한은 인구 70만의 대도시였다 그러나 1722년에는 아프간족(아프가스탄)의 침입으로 사실상 무너졌다 아프샤르왕조의 나디르 샤의 지배를 거쳐 잔드왕조가 수립되었는데 이 왕조는 카림칸 밑에서 번영과 평화로운 시대를 맞았다 18세기 말 투르크계 카자르가 왕조를 세웠다 이 왕조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두 번이나 영토를 잃었을 뿐 아니라 1828년의 조약에서는 치외법권까지도 인정해야만 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유럽의 원료공급지와 공업제품의 시장이 되어 이란 경제는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또 영국. 러시아에 대한 이권 공여가 이어져 이것이 반왕제운동의 근원이 되었다 1906년에 격렬한 입헌운동으로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1908년 입헌제를 탄압하려 한 정부군과 입헌파가 심하게 대립한 결과 입헌파가 승리를 거두었다 제1차세계대전 중에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서부이란은 전쟁터가 되었다 1921년 2월 코사크여단의 장군 리자 한이 수도 테헤란을 무혈점령한 뒤 1925년에는 카자르왕조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리자 샤 팔레비라 칭하면서 팔레비왕조를 세웠다 *땀 한(汗)
(3)팔레비 왕조
리자 샤 팔레비는 중앙집권적 행정기구를 갖추고 군사. 사법.교육제도의 근대화를 도모했다 그 밖에 이란종단철도의 완성, 차도르(여성 겉옷)폐지등도 실행했다 강권에 의하여 서구화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고대 이란의 전통부활을 도모하였으며 양탄자 짜기등 전통공예를 보호 하였고 이슬람력(曆,달력) 대신에 전통적 역법을 공용력으로 채택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란은 중립을 선언했으나 1941년 영국. 소련군대가 이란으로 침입하자 라자 샤는 퇴위한 뒤 모리셔스로 망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이란은 연합군 측에 협력해 병참공급로가 되었다 1951년에는 총리 M.모사데크를 지도자로 하는 석유국유화운동이 일어나 석유사업에서 이권을 갖고 있던 영국과의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났고 1953년에는 자헤딘장군에 의한 모사데크 타도 군사쿠데타가 성공했다 그 뒤 1954년에는 미국의 석유회사를 포함한 국제석유재단이 석유사업을 경영하게 되었다 모사데크가 실각한 뒤 귀국한 팔레비왕조 2대 국왕 모하마드 리자 샤(팔레비국왕)는 1962년부터 농지개혁, 여성참정권 부여등 6항목으로 이루어진 내정개혁(백색혁명)을 실시해 경제도 순조롭게 발전햇다 경제성장률은 1950년에 4.5%였으나 1960년대에는 9--10%, 1971년애는 14.3%, 1974년에는 51%로 고도성장을 실현했다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1967년에는 국왕의 대관식을 거행했고 1971년에는 건국 2500년 축제를 거행하여 국위를 과시 하였다 ㄱ.레자 샤 팔레비(Riz Sh h Pahlevi 1878-1944) 레자 샤 팔레비 왕은 이란 팔레비 왕조의 시조(재위기간 1925년--1941년)이다 이란 마잔다란 주(州) 알라슈트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카자흐 여단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제1차세계대전 뒤 나라 안이 몹시 어지러울 때 그는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수도로 가 테헤란을 점령하였다 이어 왕에게 1919년에 맺어진 영국과 페르시아 조약을 무효로 선언하게 하였다 그리고 국민의회를 움직여 카자르 왕조의 폐지를 통과시켰다 1925년에 국민의회에서 레자 샤 팔레비 칭호를 받고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그는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였으며 국제연맹에 가입하였다 1941년에 나라 이름을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바꾸었다 제2차세계대전 때는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영국과 소련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두 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자 이에 맞서 싸웠다 1941년에는 영국, 소련의 압력으로 황태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망명하던 중 아프리카에서 죽었다 ㄴ.모하마드 레자 파흘라비(1941-1979) 모하마드 레자 파흘라비는 이란 팔레비 왕조의 마지막 국왕(1941-1979)이다 그는 레자 샤 팔레비왕 아들이고 테헤란 출생이다 1925년 이란 팔레비왕조를 창건한 레자 샤 팔레비의 황태자로서 스위스제네바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1935년 이란으로 돌아왔다 1941년 제2차세계대전 중 영국과 옛 소련은 이란이 독일과 연합할 것을 우려하여 이란을 점령, 국왕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1941년 8월 팔레비느 부왕을 대신하여 즉위하였다 1950년대 초 국왕과 민족주의자인 M.모사덱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이란은 정치위기를 맞았다 1953년 3월 모사덱이 이란에 있어서 영국 석유기업을 국유화하는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그의 세력이 증가하자 4월 말 그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그 뒤 2년간 긴장과 갈등이 계속되다가 1953년 8월 모사덱을 해임하려 하였으나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팔레비는 국외로 떠나야 하였다 며칠 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자헤디 장군의 쿠데타로 복귀한 뒤 민족주의 노선을 완전히 바꾸었다 미국의 원조로 <白色革命:백색혁명>이란 국가발전계획을 실시하여 도로. 철도. 항공망의 확장건설, 댐건설, 관개수로 사업,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의 근절, 산업성장의 장려 및 지원, 토지개혁등을 추진하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독재정치, 정부의 부패, 석유자본의 불공정 분배 및 사바크(SAVAK:비밀경찰)의 활동에 대한 정치적 비판세력과 서구화가 이슬람 종교에 배치된다고 주장하는 종교적인 비판세력이 1978년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A.R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결집되어 이란혁명이 일어나자 1979년 1월 국외로 탈출하여 망명생활을 하였다 이란혁명은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이후 친소(親蘇) 사회주의 세력 성장으로 가능했다
(4)이란이슬람공화국의 성립
1978년 1월 이라크에 망명 중인 종교지도자 호메이니에 대해 정부가 비판하자 시아파의 성지(聖地)인 쿰에서 항의 시위가 발생했는데 이때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각처에서 시위가 계속 일어나 정치적 긴박한 상황이 되었다 1978년 9월이후 시위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져서 12월 10일 아슈라의 애도제 때는 150만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반(反)팔레비의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자 팔레비는 1979년 1월 16일 망명하였다 1980년 2월 1일 망명해 있던 호메이니가 파리에서 귀국했다 1980년 2월 5알에는 M.바자르간이 호메이니에 의해 총리로 지명되어 팔레비가 임명한 바흐티야르정권과 2중정권의 상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1980년 2월 11일 반(反)팔레비세력이 니야바란 궁전을 공격했을 때 군대는 바흐티야르정권의 방위에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이리하여 바흐티야르내각이 자연히 소멸되었고 왕제는 허물어졌다 1980년 3월 30일에 국민투표가 시행되고 4월 1일에는 호메이니에 의해 이란이슬람공화국(이란회교공화국)의 성립이 선언되어 최고지도자에 호메이니가 취임했다 망명중인 팔레비 전(前) 국왕이 미국으로 입국한 것을 계기로 11월 4일 호메이니 지지 학생들에 의한 미국대사관 점거 사건이 일어났다 점거는 1981년 1월 20일까지 444일이나 계속되었다 1980년 2월 4일 바니사드르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종교계가 주도하는 이슬람공화당
3.이란- 이라크 전쟁(1980년 9월--1988년 8월)
이란-이라크 전쟁은 1980년 9월에 시작하여 1988년 8월에 끝낸 이란과 이라크 간의 전쟁이다 1980년 9월 17일 이라크가 이란 전(前) 국왕 팔레비와의 사이에 1975년 체결했던 알제협정( 두나라 국경선을 정한 협정)의 무효를 선언한 것이 동기이다 이라크군은 먼저 이란 서부국경을 돌파했으며 남부의 항만도시 후닌샤푸르를 점령하고 다시 이란 최대의 석유기지 아바단을 포위하는 등 전격적으로 이란을 깊숙이 진격했다 그러나 그 뒤 전선은 차츰 교착상태로 빠져들었다 1981년 이란이 공격에 나서면서 그해 9월에는 이라크군의 아바단 포위를 타파?g다 1982년 5월 후닌샤푸르를 다시 찾으면서 전황은 이란쪽으로 유리하게 기울었다 그런데 이 전쟁은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중동의 정치정세에 미치는 이란혁명의 영향력을 막고자 하는 주변 여러 나라와도 결부 되어 있었다 이슬람교 시아파 주민이 국민의 반수를 차지하고 끊임없이 쿠르드족을 탄압해 왔던 이라크로서는 정의와 이슬람교도 대중해방(大衆解放)을 주창하는 이슬람이란혁명이야말로 커다란 충격이었다 더욱이 이란혁명은 현실주의적 이슬람 논리 및 질서 아래에서 살아가는 아랍 여러 나라의 이슬람교도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1979년 12월의 메카성지(성지)습격 사건, 1979년 말 이후 소련침공과 함께 활발해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교도의 게랄라저항운동, 1981년 10월 이집트의 사다트대통령의 암살 사건, 1983년 6월 이후 이스라엘 점령에 항전을 계속하는 레바논 이슬람교도의 게릴라활동등은 모두 이란혁명의 경우와 같은 급진적 이슬람 변혁 지향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무렵 이란은 금융적 경제적 압박에 의한 이란 고립화를 노린 서방 여러 국가 및 아랍 산유국에 대하여 미국대사관 점거로 대항하고 있었다 옛 왕제(王制) 아래 중동 최대의 군사거점을 확보해 왔던 미국으로서도 이란혁명 타파는 중요 과제였다 이라크가 침공에 즈음하여 계획한 이란내 아랍주민(전체 인구 3%)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슬람 제국회의(諸國會議), 팔레스타인 인민해방기구(PLO)등에 의한 <이슬람교도> ,<이스라엘과 대결하는 동포> 차원에서의 화해 시도도 실퍄한 것과 같이 이란 회유책은 모두 좌절되었다 이란 쪽에 전쟁이 유리해지고 이란과 이집트, 이스라엘 국교수립등의 영향에서 오는 이슬람 주민의 반체제적 급진화가 겹쳐지는 가운데 페르시아만의 여러 나라는 1982년 5월 군사적, 경제적 결속을 강화함으로써 이라크 지원 강화를 시작했다 이란은 미국 군함의 잇 따른 송유 및 정유시설 파괴와 1988년 7월 이란 여객기 격추사건등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또 이라크측이 화학무기를 전쟁에 사용하자 이란은 1988년 7월 18일 정전(停戰) 및 철군을 골자로 하는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598조 결의안을 수락한다고 발표하였다 1988년 8월 20일 정전에 들어간 뒤 양측은 제네바 등지에서 두 차례에 걸쳐 샤트알 아랍수로 영유권 등의 문제에 대해 협상을 벌였으나 분쟁의 재발 소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 뒤 1991년 걸프전쟁에서 이라크정부는 자국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샤트 알 아랍수로 관할권을 포함한 대폭적인 양보조치를 단행 하였다
(1)후세인의 이라크와 쿠웨이트 침공 이유(아랍민족주의와 아랍통일)
이라크 후세인정부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후세인의 아랍민족주의=아랍은 하나이다> 이란을 침공하면 아랍인 (이란 전체인구 3%)들이 후세인정부를 도와주는 반군 게릴라투쟁을 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리고 쿠웨이트를 침공하면 아랍인(쿠웨이트 전체 인구 30%)들이 후세인정부를 도와주는 반군 게릴라 투쟁을 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아랍인들조차 후세인을 도와주는 세력은 왕정타도세력 민주공화국세력이나 사회주의공화국 수립 세력들이었다 ㄱ.이라크지역내 쿠르드족 학살과 인종청소 ㄴ.이란인 다수종족 페르시아인 학살정책 ㄷ.아랍민족주의과 아랍통일---아랍지역 바트당사령부
(2)아란과 이라크 공통점 ㄱ.이슬람교 국가(종교--회교=이슬람교) ㄴ.쿠르드족 거주---이란(7%), 이라크(20%) ㄷ.대량의 석유 매장량
(3)이란과 이라크 차이점 ㄱ.언어--이란(페르시아어=이란어), 이라크(아라비아어=아랍어) ㄴ.종족 구성 (ㄱ)이란 페르시아족(51%), 아제르바이잔족(24%), 길락-마란다란족(8%), 쿠르드족(7%), 아랍족(3%) 등 (ㄴ)이라크 아랍족(75%), 쿠르드족(20%), 터키인(8%), 앗시리아인 ㄷ.이라크 후세인정부는 사회주의 바트당 정부로 국가사회주의 정부라면 이란 하타미정부는 이슬람교 정부이다
4.페르시아어 --인도. 유럽어족 이란어파의 서부그룹에 속하는 언어-- 페르시아어는 인도.유럽어족 이란어파의 서부그룹에 속하는 언어이다 이란의 공용어 및 주요문학어로서 이란국내 여러 방언 중에서 정치적 문화적으로 가장 중요하다 페르시아어를 모어로 하는 인구는 이란내에서 2,687만명(1992년) 정도이며 이란외에서도 아랍제국, 러시아연방, 특히 카프카스지방과 중앙아시아에서도 사용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이란동부의 페르시아어 방언 또는 중앙아시아의 티지크어어와 매우 가까운 언어가 쓰여지고 있으며 파슈트어 다음으로 많이 분포되어 있다
(1)페르시아어 역사 페르시아어 역사는 7세기 중엽 아랍에 의한 사산조(朝) 페르시아의 정복과 이란의 이슬람화에서 비롯된다 이를 학문. 예술분야에서 아리비아어가 통용됨에 따라 사산왕조의 공용어이며 조로아스터교의 종교용어였던 중세 페르시아어(팔라비어)는 그 기반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구어체로 남아 일반대중 속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9세기까지의 2세기에 걸친 아라비아어 채용은 페르시아어에 아라비아어가 대량으로 차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기록은 문자로서 페르시아어의 부흥은 9세기부터 10세기에 이란 동북부 호라산지방에서 바그다드의 칼리프로부터 사실상 독립한 사만왕조와 가즈나왕조등 아란계 민족왕조가 성립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 왕조의 민족부흥정책의 대시인, 과학자, 철학자, 역사학자에 의한 문필황동이 활발히 이루어져 고전 페르시아어시대가 열렸으며 이후 15세기 말까지의 시기 동안 페르시아어는 황금기를 맞이 하였다 니자미.사디.하피즈 등의 대시인이 참여한 고전페르시아어 문학작품의 권위는 아란이 문학어로서의 페르시아어를 받아들이는데 중요한 힘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복잡하고 난해했던 고대 페르시아어와는 달리 문법이나 발음면에서 많이 간소해져 이란은 물론 인도, 아프가니스탄, 터키, 중앙아시아등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이에 따라 발생지는 이란 서남부 파르스지방이지만 북방에서 쓰이는 파르티아어의 요소와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어적 요소도 차용되었다 (2)문법조직 현대 페르시아어의 문법조직은 인접한 아라비아어와 영어 이외의 현대 유럽의 대부분의 언어와 비교해 볼때 훨씬 단순하다 명사의 문법적 성 구별은 없으며 복수형도 규칙적인 복수어미(접미어) 하나를 붙이면 된다 격변화도 없고 격관계는 전치사나 후치사로 나타낸다 관사는 존재하지 않으나 정.부정의 관계를 표현할 수 있다 동사의 활용조직은 현대어간과 과거어간의 둘을 구별하여 여기에 전활용에 공통되는 인칭어미(1, 2, 3인칭와 단수. 복수)를 붙인다 현재와 과거 이외의 시제나 능동에 대한 수동등을 나타내는 데에는 조동사를 사용한다 명사. 형용사. 전치사등과 몇개의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는 동사가 결합하여 많은 복합동사가 형성되는 것도 페르시아어 특징의 하나이다 어순에서 동사는 특별한 경우 이외는 문장 끝에 두며 형용사는 결합사를 끼고 명사에 후치된다 이와 같이 비교적 단순한 문법조직이 페르시아어를 이슬람세계의 동부, 특히 중앙아시아에 문명어로서 보급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아라비아어계의 어휘로 인해 페르시아어의 표현력이 늘어나 주변 문화 영역에서 사용하기 에 적합한 언어로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5..쿠르드족
**쿠르드족의 친구들** http://mission.hosanna.net/kurdistan <쿠르드족 선교단체, 모임, 쿠르드족 소개, 현지뉴스 제공>
(1)민족명--쿠르드족(KURDS)이며 성경의 메데(Medes)인으로 알려져 있는 종족
(2)분포지역--쿠르디스탄(Kurdistan)은 시리아와 이라크, 이란, 터키, 구 소련에 걸친 평균 고도 3500m의 산악지대와 이라크 북부의 유전지대, 티그리스강 상류 평원으로 구성되는 지역 그리고 ??럽, 북아메리카, 호주등지에도 거주하고 있다
(3)인구---약 2천 5백만명에서 3천만명 ㄱ.터키--------1천 400만백명----터키 전체인구 22% ㄴ.이란--------600만명---------이란 전체인구 11% ㄷ.이라크------400만명--------이라크 전체인구 23% ㄹ.시리아------100만명--------시라아 전체인구 8% ㅁ.구(舊)소련지역-----100만명 ㅂ.그외 지역---------250만명
(4)언어---쿠르드어(Kurdish)----서부 이란어 계통
(5)종교--- 대부분 이슬람교 순니파이며 1/3은 시아파이다 ㄱ.시아파 이슬람교(쉬아 이슬람)---주로 이란 쿠르디스탄에 거주하는 쿠르드인 ㄴ.극단적 시아파--굴라트:Ghulat ㄷ.수피즘 Sufism ㄹ.알레비파 Alevis--터키의 디밀라지역의 쿠르드인 대부분이 믿고 있다 ㅁ.아흘알하끄 Ahl al-Hagg(진리의 백성)--이라크에서는 카카이(Kakai)라고 부른다 Kermanshah의 동부 Sahne 주위, Kermanshah의 서부 Kerend, Kitkuk남부지역 ㅅ.에지디 Ezidi--악마숭배자라고 불린다 쿠르만지어를 사용 극단적 순니에서 발생했으나 극단적 시아파의 특성을 많이 가짐
(6)중심도시 ㄱ,터키---디야르바크르, 비틀리스, 하카리, 이스탄불등 ㄴ.이라크---술레이마니야, 아르빌등 ㄷ.이란---마하바드, 세넨다즈등
6.이란-콘트라 사건(Iran-Contra Affair)
이란-콘트라 사건은 1986년 11월 드러난 것으로 미국이 비밀리에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고 그 대금을 나카라과의 반정부 게릴라 조직인 콘트라에게 지급한 사건이다 미국은 레바논에서 유괴된 미국인 인질을 석방시키기 위하여 1985년 9월과 1986년 2월 이스라엘을 경유하여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고 그 대금으로 스위스은행에 있는 콘트라 구좌에 약 3000만 달러를 입금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에 대한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신 R 레이건 대통령의 연루 의혹이 남았으나 타워위원회는조사 결과 사건이 발각된 1986년 11월 이전에 레이건 대통령이 알고 있었는지에 대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또한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인 O. 노스 중령이 의회 청문에서 레이건 대통령의 직접 명령을 부인하는 증언을 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노스 중령등 4명의 관련자는 기소되었다 이란-콘트라 사건 상원조사위원회 위원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존 케리 상원의원이었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신 레이건 전대통령을 보고 암흑정치로 혹평했고, 전두환 노태우정부를 독재정부로 규정하여 한국 민주화를 촉구했다 전두환 노태우정부는미국 레이건 부시정부 시대었다
7.이란 각종 주요 자료 사이트
(1)가려진 사람들---이란 역사. 국가개관. 지진. 여행시 주의 사항. 홍보사진, 갤러리 수록 http://www.iranphotos.net
(2)이란이안--이란어. 영어번역. 이란역사. 페르시아 문화. 이란 입출국 안내등 이란정보 제공 http://www.iranian.co.kr
(3)주(駐)이란대한민국대사관 http://www.mofat.go.kr/iran
(4)이란 영화 소개---칸다하르(KanDaHaR) http://www.nkino.com/Movies/movie.asp?id=5940 부시대통령께서 백악관에서 <칸다하르>영화를 관람했고 이프간의 현실과 아프간 여성들의 애환을 이 영화로 간접체험 했다고 한다 <칸다하르>는 캐나다로 이민간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나파스가 자살을 결심한 동생을 구하기 위해 칸다하르로 가는 여정을 담은 작품이다 <칸다하르:Kandahar>는 아프가니스탄 남동부 칸다하르주 주도시이다 인구는 23만 7,500명이고 아프가니스탄 수도는 카불 다음 가는 아프가니스탄 제2의 도시이다 주민은 아프간족과 타지크족이 반반이며 아프가니스탄에서 유일하게 파슈토어를 공통어로 쓰는 도시이다 시내 도로는 직전이며 넓다 고속도로가 카불. 헤라트 및 파키스탄의 퀘타로 통하고 국제공항도 있다 상업이 번성하고 모직물. 과일 통조림공장이 있다 도시의 기원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지역에 아라코시아라는 도시를 건설한 것에서 시작되었고 18세기 중엽에는 두라니왕조의 수도였다 이 도시에는 마호메트가 입었다는 옷을 안치된 모스크(이슬람사원)인 헤르카이 샤리프 지알리트, 바위동굴의 망루인 치힐지나, 1709년 사파비왕조에 반란을 일으킨 길자이계 아프간인 미르 와이스 및 1947년 이곳에서 즉위한 아프가니스탄 건국자 이흐마드샤 두라니의 묘와 유적등이 있다 1880년 아프간군이 영국군을 격파한 옛 전쟁터 마이완드는 북서쪽으로 수십 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페르시아인(이란인)은 아랍인과 종족이 다르지만 이슬람교로 라마단(금식월)을 준수하고 매년 Hajj기간 중 8-9만명의 순례객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 성지를 방문하고 있으며 이슬람 율법(Islamic Code)은 특히 남녀의 유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페르시아안(이란인)은 식생활 유목, 촌락생활에서 유래한 바 많으며 날 것이나 비늘 없는 해산물(뱀장어, 조개등)을 먹지 않으나 새우는 비늘이 없어도 좋아한다 그리고 돼지고기와 개고기는 금지시하고 있다 이란인들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있으며 Ferdowsi, Sadi, Hafez등 뛰어난 시인의 작품 싯 귀절을 일상생활에 새기고 있으며 이들을 민족적 영웅으로 숭상하고 있다 1997년 8월 하타미(Khatami) 신정부 출범이후 <문명간의 대화> 통한 개혁, 자유화, 개방화정책을 가속화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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