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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미국이 이란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을가?(중국 국제방송) 본문

CIA.FBI(귀가 빙빙 도는 뇌 감청기)

미국이 이란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을가?(중국 국제방송)

CIA Bear 허관(許灌) 2007. 10. 30. 01:19

미국과 유럽연합등 연합군이 이란 군사공격이 가능성이 있는가? 중동에서 유태인 이스라엘와 아랍인 사우디, 시리아, 이라크등 국가들 그리고 페르시아인 이란국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페르시아인 이란인들이 중앙아시아와 중동지역에 분포하면서 중동과 남부아시아 분쟁이 일어나는데 원인제공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중동지역에서 다수종족 아랍인를 견제하기 위하여 과거에는 후세인정부보다는 페르시아인 이란혁명정부를 지원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란은 국경지역 국가 수니파 이슬람국가인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보유한 후 핵무기 개발에 주력해왔습니다 이란정부는 최고지도자가 실권자로 군을 장악하고 있으며 대통령은 행정이나 대내외적 상징적 인물입니다 이란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중동 평화입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병정분리주의 군사정책을 포기하고 병정통합주의로 나아가야 합니다 만약 이란이 침략주의 군사모델로 나아갈 때는 미국이나 유럽연합 그리고 러시아등 자유민주국가 단결로 군사작전을 감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군 통수권자는 대통령이 아닌 최고지도자라는 개념은 국가사회주의 병정분리주의 국가에서만 가능합니다 (중동지역 연구가 I요원)       

 

 

오늘 이 시간에는 미국이 이란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데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근 이란에 대한 미국 부시정부의 태도가 점점 강경해지고 있고 군사위협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이런 정세는 사람들로 하여금 미국이 진정으로 이란과 전쟁을 치르려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17일 부시 미국대통령은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은 세계평화에 대한 "크나큰 위협"이라고 표시했습니다. 이날 부시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만약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 세계의 안전에 엄중한 위협으로 될 것이며 제3차 세계대전을 유발할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체니 미국 부대통령도 21일 만약 이란이 계속 핵무기보유를 고집한다면 "엄중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라이스 미 국무장관도 지난주 국회에서 이란이 미국의 안전에 대해 최대의 도전으로 될 가능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라이스 국무장관은 지난주 이란의 20여개 정부기구와 은행, 개인에 대해 경제제재를 실시한다고 선포했는데 그중에서 이란 국방성과 이슬람혁명수비대는 중요한 제재목표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는 양국이 1979년에 국교를 단절한 이후 미국이 이란에 대해 실시하는 제일 엄한 제재조치인 동시에 미국이 처음으로 한 나라의 군대를 테러와 관련이 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이와 함께 부시정부가 이라크전쟁을 발동하는 것을 지지하고 권장해왔던 미 국내의 신보수파 세력들도 다시 활약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부시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신보수파의 대표인물과 40분이상 이야기를 나누고 이란문제와 관련해 자문을 구했습니다. 모임에서 신보수파의 대표인물은 조속히 이란에 대해 군사행동을 취할 것을 부시대통령에게 촉구한 동시에 글을 발표해 네쟈드 이란대통령을 히틀러에 비유했습니다. 그는 이란은 혁명을 발동해 현유의 국제체계를 전복하고 이슬람파시즘을 이용해 세계를 통치하려 시도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미국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몇사람도 이란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취하는 것을 찬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란이 테러주의를 지지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비난하고 군사타격을 포함한 강경한 정책을 취해 이란의 핵계획을 막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줄리야니 전임 뉴욕시장은 만약 자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이란의 핵무기 보유를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표시했습니다. 그는 이란과 같은 나라에 대해 미국은 유사시에 군사타격을 진행하는 것도 불사하는 강경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분석가들은 미국 정부와 정계인사들의 이런 언론에 대해 분석해보면 부시정부의 현재 언론은 이라크전쟁을 발동하기전과 매우 비슷하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음 단계에 가서 이들은 미국이 이미 외교와 경제수단을 모두 동원했다고 할 것이며 이란이 핵무기를 발전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전쟁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분석가들은 이란에 대한 미국의 군사타격이 눈앞에 닥쳐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미국의 일부 군사분석가들은 부시정부가 이란을 폭격하게 될것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미국이 이란국방성과 혁명수비대를 테러주의세력으로 규정한 이상 이란문제는 미국의 세계반테러행동의 대상으로 되었으며 이는 실제상 군사행동을 위한 준비로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이란에 대한 미국의 위협과 제재조치는 외교수단의 일부이고 그 목적은 이란이 핵프로그램을 포기하고 이라크내의 반미세력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하려는 것이지 전쟁을 발동하려는 신호가 아니라고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시정부도 외교방도를 통해 이란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부시정부의 대 이란정책이 점점 강경일변도로 나아감에 따라 일부 미국인들은 미국과 이란관계의 전망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미국이 이란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데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http://korean.cri.cn/740/2007/10/29/1@108868.htm

 

 

1.아란이슬람공화국 국가 개요(槪要)

(1)국명: 이란 회교공화국(The Islamic Republic of Iran)<이란이슬람공화국>

(2)위치: 중동, 페르시아만 연안

(3)면적:164만 8000평방 km<한반도 면적의 7.5배>

(4)국경선:5,440km

(5)해안선:2,440km

(6)영해:12해리(어업전관수역 중간선)

(7)인구:6,827만 8,826명(2003년)

(8)수도:테헤란

(9)공용어(언어) 페르시아어(이란어,페르시아족 51%)를 대부분이 사용하면서 터키어(터키족 18%), 쿠르드어(쿠르드족), 아랍어(아랍인 3%)등도 사용하고 있다 이란국가도 언어와 종족 분쟁으로 국가발전 장애와 중동지역 분쟁 갈등으로 문제화 되어 왔다

(10)종족구성 주민의 대다수는 이리아계의 이란인이며 그 밖에 7세기 이후 이란에 정착한 아랍인, 11세기말 중앙아시아에서 들어온 투르크인, 소수민족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앗시리아인이 살고 있다 아랍인은 주로 이라크와 인접한 지역인 후제스탄 지방, 투르크인은 투르크메니스탄과 접하는 고르간지방 및 터키와 인접하는 아제르바이잔지방에 많다 이란계. 투르크계. 아랍계로 부속조직을 가지고 있는 주민도 있다 이란계의 부족으로는 쿠르드.루르. 바흐티야리. 발루치의 여러 부족이 있다 쿠르드족의 거주지는 이란. 터키. 이라크의 3개국에 걸치며,이란에서는 북서부인 코르데스탄. 서(西)아제르바이잔. 케르만샤한주에서 사는데 인구는 약 350만명으로 짐작된다 그들의 대부분은 19세기 후반에 유목을 그만두고 정착했다 루르족은 이란 서부의 로렌스탄에서 살며, 바흐티야리족은 파르스.에스파한. 후제스탄의 자그로스 산지에서 산다 루르와 바흐티야리를 합친 인구는 약 250만명이다 발루치족은 남동부의 발루치스탄에서 산다 파키스탄령에도 많은 발루치족이 사는데 이란쪽의 인구는 약 60만명이다 투르크계의 부족으로는 북동부의 고르간과 호라산에서 사는 투르크멘족이 있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옛 소련에도 있는데 총인구가 약 100만명은 될 것으로 짐작되며 이란령에 속한 인구는 약 10만명이다 그 밖에 카슈카이. 아프샤르. 샤사반등의 부족이 있다.. 페르시아족(51%-아리아계의 이란인). 아제르바이잔족(24%, 터키인=투르크인). 길락-마란다란족(8%) 쿠르드족(7%). 아랍족(3%)등

(11)종교:회교(시아파) 회교(시아파 89%, 순니파 10%), 조로아스터교, 유태교, 기독교 등

(12) 교육:의무교육 8년

(13)문맹률:25%

(14)국경일:2.11 <회교혁명기념일>

(15)헌법:1979년 12월 7일 제정 그리고 1989년 7월 개정

(16)정부형태:회교공화국<최고지도자 중심제>

(17)원수:하타미

(18)수상:하메네이최고지도자<1989년 6월 취임>

(19)실권자:하메네이 최고지도자<군 통수권자>

(20)대의기구:단원제(정원:290명, 임기 4년)

(21)정당:없음

(22)정부성향:중도중립(中道中立)

(23)UN가입:1945년 10월 24일

(24)비동맹가입:1979년 9월 3일

(25)국기:가로 세로 7:4비율의 직사각형을 위로부터 청, 백, 적 삼색으로 균분하여 <하나님은 위대하다:Allah Akbar>는 이란 글자 22개<혁명 기념일 Bahman 월 22일을 상징>를 청, 적 바탕에 11개씩 기입하고 백색바탕 중앙에 <하나님은 하나다>라는 글자를 형상화하여 삽입

(26)GDP와 1인당 GDP ㄱ.GDP---1,116억불(2003년) ㄴ.1인당 GDP---1,680불(달러)

(27)화폐단위--리얄. 1달러=8,600리얄(2004년 7월)

(28)무역(2003년 기준) ㄱ.수출---3,536,400만불(원유, 카페트등) ㄴ.수입---2,997,000만불(수송장비 및 기계, 철강 및 공산품등)

(29)주요자원 석유 매장량(세계 5위), 천연가스 매장량(세계 2위)

(30)국방비: 410,000만불(2002년)

(31)군사력<2002년> 이란의 병역제도는 의무병제(16세 이상)로 복무기간은 2년이다 이란 군사제도도 병정분리주의 국가형태로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며 군 통수권자는 최고지도자이다 군사조직은 정규군, 혁명군으로 2원화 되어 있으나 Armed Forces Act법(1987년)제정 장규군과 혁명군의 지휘계통을 일원화 함 정규군은 팔레비 왕정시기의 군조직을 계승한 것이며 혁명군은 1979년 회교혁명 후 발족 국경수비 및 치안유지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체제수호세력으로 성장 정규군은 대통령 지지세력이며 혁명수비대는 최고지도자 지지세력이다

ㄱ.육군----32만 5,000명 육군은 4개 기계화 사단, 6개 보병사단 및 특수전여단, 공수여단으로 구성, 전차 1,400대 보유

ㄴ.해군----1만 8,000명 잠수함 3척, 구축함 3척, 프리깃함 5척을 보유

ㄷ.공군----5만 2,000명 약 300대의 전투기 보유

ㄹ.혁명수비대---12만 5,000명<육군 10명, 해군 2만>--이란혁명군 출신..

ㅁ.민병대---50만명(혁명군 산하)---민방위군

ㅅ.대이라크 전쟁시 경험과 이스라엘, 파키스탄의 미사일 위협에 대비 미사일 개발 적극 추진 (사정거리 1,300킬로미터인 Shahab-3 중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1998년 7월 1차 시험. 2000년 7월 2차 시험)

(31)남북관계--등거리 외교원칙

ㄱ.남한--1989년 1월 24일 수교 수출(원유). 수입(자동차, 선박, 철강 제품등) 대림. 대우. 삼성등 15개업체 체류 이란은 한국의 중동지역 건설 진출이 제일 먼저 이루어진 나라로 건설수주는 1987년 3월까지 48건에 15억달러였다 2001년 교민수는 39명, 체류자 수는 680명이며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41명의 선수단이 참가했었다 이란 외무부의 국제연구소와 테헤란대학. 팔레비대학등에서는 한국학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1996년 이란으로부터 도입한 원유량은 7,800만 배럴이었다

ㄴ.북한--1973년 4월 15일 수교 반미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북한과는 여러부문에서 교류가 활발한 가운데 핵기술 분야의 협력, 북한의 스커드 미사일 수출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군사요원 파견, 트롤어선 2척 파견, 조업등 그리고 1991년 2월 원유공급협정과 1996년 11월 치안협력협정등을 체결했다

2.이란의 역사

(1)이슬람 이전

 

BC 1000년 무렵 아리아민족이 몇 세기 동안 이란고원에 침입하였고 북서부 이란에 정착한 메디아인은 BC 7세기 엑바타나<지금의 하마단>를 수도로 메디아왕국을 세웠다 BC 550년 파르스지방에서 일어난 아케메네스왕조는 메디아를 쓰러뜨리고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는 세계제국을 형성한 뒤 오랫동안 그리스와 전쟁을 했다 그러나 BC 331년 알렉산드로스대왕에 의해 멸망되었다 BC323년에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은 뒤로는 셀레우코스왕조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BC 250년 전후 북부 이란에서 세력을 떨친 이란계 유목민인 파르티아왕조가 셀레우코스왕조를 물리쳤다 파르티아는 500년간 이란을 다스리는 한편 서쪽에서는 로마와 대치했으나 226년 사산조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되었다 사산페르시아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고 아케메네스왕조시대의 전통을 이어 받아 이란문화의 융성기를 이루었다

 

(2)이슬람 시대

사산페르시아는 642년 아랍군에게 멸망되었다 옴마아드왕조. 아바스왕조 밑에서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추진되었고 아리비아어(아랍어)가 공용어로 되었다 그러나 부하라를 수도로 9세기에 번영한 사만왕조 아래에서 고대의 문예가 부흥하고 근세 페르시아문학이 생겨났다 사만왕조를 대신해 동(東)이란을 지배한 가즈니왕조는 투르크계 왕조였지만 이 왕들도 이란문화의 보호자가 되어 궁정에 많은 학자와 문인을 불러들였다 왕서<王書>를 쓴 피르다우시, 과학자 비루니는 이 시대의 사람이다 10세기 중반 무렵 중앙아시아에서 남하한 투르크계의 셀주크족은 가즈니왕조를 멸망시키고 이란의 지배자가 되었다 투르크인의 서아시아 유입(流入)은 이때 시작되었다 셀주크왕조의 여러 왕들도 페르시아문화를 보호해 가잘리. 우마르하이얌등 유명한 학자. 문인이 배출되었다 1258년에는 몽골인에 의해 일한국(汗國)이 1370년에는 티무르왕조가 수립되어 이란의 지배자가 되었다 왕조 교체때는 침략전쟁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해졌으나 새 왕조가 생겨난 뒤에는 국토의 부흥이 추진되어 이란 이슬람문화가 크게 일어났다 1501년 페르시아인 이란민족국가 사파비왕조가 성립, 시아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했는데 이 왕조는 샤 아바스 때 전성기를 맞았다 수도 에스파한은 인구 70만의 대도시였다 그러나 1722년에는 아프간족(아프가스탄)의 침입으로 사실상 무너졌다 아프샤르왕조의 나디르 샤의 지배를 거쳐 잔드왕조가 수립되었는데 이 왕조는 카림칸 밑에서 번영과 평화로운 시대를 맞았다 18세기 말 투르크계 카자르가 왕조를 세웠다 이 왕조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두 번이나 영토를 잃었을 뿐 아니라 1828년의 조약에서는 치외법권까지도 인정해야만 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유럽의 원료공급지와 공업제품의 시장이 되어 이란 경제는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또 영국. 러시아에 대한 이권 공여가 이어져 이것이 반왕제운동의 근원이 되었다 1906년에 격렬한 입헌운동으로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1908년 입헌제를 탄압하려 한 정부군과 입헌파가 심하게 대립한 결과 입헌파가 승리를 거두었다 제1차세계대전 중에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서부이란은 전쟁터가 되었다 1921년 2월 코사크여단의 장군 리자 한이 수도 테헤란을 무혈점령한 뒤 1925년에는 카자르왕조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리자 샤 팔레비라 칭하면서 팔레비왕조를 세웠다 *땀 한(汗)

(3)팔레비 왕조

리자 샤 팔레비는 중앙집권적 행정기구를 갖추고 군사. 사법.교육제도의 근대화를 도모했다 그 밖에 이란종단철도의 완성, 차도르(여성 겉옷)폐지등도 실행했다 강권에 의하여 서구화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고대 이란의 전통부활을 도모하였으며 양탄자 짜기등 전통공예를 보호 하였고 이슬람력(曆,달력) 대신에 전통적 역법을 공용력으로 채택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란은 중립을 선언했으나 1941년 영국. 소련군대가 이란으로 침입하자 라자 샤는 퇴위한 뒤 모리셔스로 망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이란은 연합군 측에 협력해 병참공급로가 되었다 1951년에는 총리 M.모사데크를 지도자로 하는 석유국유화운동이 일어나 석유사업에서 이권을 갖고 있던 영국과의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났고 1953년에는 자헤딘장군에 의한 모사데크 타도 군사쿠데타가 성공했다 그 뒤 1954년에는 미국의 석유회사를 포함한 국제석유재단이 석유사업을 경영하게 되었다 모사데크가 실각한 뒤 귀국한 팔레비왕조 2대 국왕 모하마드 리자 샤(팔레비국왕)는 1962년부터 농지개혁, 여성참정권 부여등 6항목으로 이루어진 내정개혁(백색혁명)을 실시해 경제도 순조롭게 발전햇다 경제성장률은 1950년에 4.5%였으나 1960년대에는 9--10%, 1971년애는 14.3%, 1974년에는 51%로 고도성장을 실현했다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1967년에는 국왕의 대관식을 거행했고 1971년에는 건국 2500년 축제를 거행하여 국위를 과시 하였다 ㄱ.레자 샤 팔레비(Riz Sh h Pahlevi 1878-1944) 레자 샤 팔레비 왕은 이란 팔레비 왕조의 시조(재위기간 1925년--1941년)이다 이란 마잔다란 주(州) 알라슈트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카자흐 여단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제1차세계대전 뒤 나라 안이 몹시 어지러울 때 그는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수도로 가 테헤란을 점령하였다 이어 왕에게 1919년에 맺어진 영국과 페르시아 조약을 무효로 선언하게 하였다 그리고 국민의회를 움직여 카자르 왕조의 폐지를 통과시켰다 1925년에 국민의회에서 레자 샤 팔레비 칭호를 받고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그는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였으며 국제연맹에 가입하였다 1941년에 나라 이름을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바꾸었다 제2차세계대전 때는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영국과 소련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두 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자 이에 맞서 싸웠다 1941년에는 영국, 소련의 압력으로 황태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망명하던 중 아프리카에서 죽었다 ㄴ.모하마드 레자 파흘라비(1941-1979) 모하마드 레자 파흘라비는 이란 팔레비 왕조의 마지막 국왕(1941-1979)이다 그는 레자 샤 팔레비왕 아들이고 테헤란 출생이다 1925년 이란 팔레비왕조를 창건한 레자 샤 팔레비의 황태자로서 스위스제네바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1935년 이란으로 돌아왔다 1941년 제2차세계대전 중 영국과 옛 소련은 이란이 독일과 연합할 것을 우려하여 이란을 점령, 국왕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1941년 8월 팔레비느 부왕을 대신하여 즉위하였다 1950년대 초 국왕과 민족주의자인 M.모사덱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이란은 정치위기를 맞았다 1953년 3월 모사덱이 이란에 있어서 영국 석유기업을 국유화하는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그의 세력이 증가하자 4월 말 그를 총리로 임명하였다 그 뒤 2년간 긴장과 갈등이 계속되다가 1953년 8월 모사덱을 해임하려 하였으나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팔레비는 국외로 떠나야 하였다 며칠 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자헤디 장군의 쿠데타로 복귀한 뒤 민족주의 노선을 완전히 바꾸었다 미국의 원조로 <白色革命:백색혁명>이란 국가발전계획을 실시하여 도로. 철도. 항공망의 확장건설, 댐건설, 관개수로 사업,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의 근절, 산업성장의 장려 및 지원, 토지개혁등을 추진하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독재정치, 정부의 부패, 석유자본의 불공정 분배 및 사바크(SAVAK:비밀경찰)의 활동에 대한 정치적 비판세력과 서구화가 이슬람 종교에 배치된다고 주장하는 종교적인 비판세력이 1978년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A.R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결집되어 이란혁명이 일어나자 1979년 1월 국외로 탈출하여 망명생활을 하였다 이란혁명은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이후 친소(親蘇) 사회주의 세력 성장으로 가능했다

(4)이란이슬람공화국의 성립

 1978년 1월 이라크에 망명 중인 종교지도자 호메이니에 대해 정부가 비판하자 시아파의 성지(聖地)인 쿰에서 항의 시위가 발생했는데 이때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각처에서 시위가 계속 일어나 정치적 긴박한 상황이 되었다 1978년 9월이후 시위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규모가 커져서 12월 10일 아슈라의 애도제 때는 150만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반(反)팔레비의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자 팔레비는 1979년 1월 16일 망명하였다 1980년 2월 1일 망명해 있던 호메이니가 파리에서 귀국했다 1980년 2월 5알에는 M.바자르간이 호메이니에 의해 총리로 지명되어 팔레비가 임명한 바흐티야르정권과 2중정권의 상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1980년 2월 11일 반(反)팔레비세력이 니야바란 궁전을 공격했을 때 군대는 바흐티야르정권의 방위에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이리하여 바흐티야르내각이 자연히 소멸되었고 왕제는 허물어졌다 1980년 3월 30일에 국민투표가 시행되고 4월 1일에는 호메이니에 의해 이란이슬람공화국(이란회교공화국)의 성립이 선언되어 최고지도자에 호메이니가 취임했다 망명중인 팔레비 전(前) 국왕이 미국으로 입국한 것을 계기로 11월 4일 호메이니 지지 학생들에 의한 미국대사관 점거 사건이 일어났다 점거는 1981년 1월 20일까지 444일이나 계속되었다 1980년 2월 4일 바니사드르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종교계가 주도하는 이슬람공화당과의 사이에서 대립과 항쟁이 일어나 1981년 6월 해임되었다 이슬람공화당는 사법권, 입법권 뿐만 아니라 행정권도 장악했다 이슬람공화당와 반(反) 이슬람공화당세력 상호간의 대립은 점차 격화되어 이슬람공화당본부와 총리부의 폭파등 테러활동이 계속되었으며 많은 요인이 죽었다 이에 대해 정부는 반체제파에 대한 대량체포와 처형으로 대응했다 국제사면위원회의 발표(1981년 11월)에 따르면 혁명 뒤 3,350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새 헌법은 1979년 12월 2일의 국민투표에로 채택되었다 이 헌법에서의 최고지도권은 국민의 신망을 받는 종교법학자에게 부여되며 모든 자유는 <이슬람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은 한>에서만 인정된다 이슬람법의 원칙에 위반되는 법?活? 제정할 수 없다 이를 감시하기 위하여 성직자로 구성된 헌법옹호평의회가 설치되어 있다 헌법에 의회 해산 조항은 없으나 삼권분립이 규정되어 있으며 입법권은 일원제인 국민의회에 의해 행사되는데 중요한 문서에 대해서는 국민투표에 의한 입법권 행사도 인정하고 있다 의원의 임기는 4년이며 정원은 270명이다 행정부의 장(長)인 대통령은 최고지도자 다음 가는 지위에 있으며 국민의 직접투표에 의해 선출되는데 임기는 4년이다 또한 이란혁명과 시아파에 충실할 것이 자격으로 되어 있다 내각수반은 총리이며 대통령이 임명하는데 의회의 신임을 받아야 한다 국무장관은 총리가 제안하고 대통령이 승인함으로써 임명되는데 의회의 신임을 받아야 한다 사법권은 최고법원장, 검찰총장 및 3명의 이슬람재판관으로 이루어지는 최고사법평의회에 주어져 있다 최고법원장과 검찰총장은 반드시 이슬람법학자여야 하며 법관은 이슬람법에 바탕을 두고 판결을 내린다 1978년에는 팔레비왕조 아래에서 비합법으로 되어 있던 반왕제(反王制)인 국민전선(國民戰線)이 부활해 혁명의 실현에 공헌함으로써 바자르간이 총리에, 산자비가 외무장관이 되는 등 혁명 뒤 한때 나라의 중심이 되었다 페다인할크. 무자헤딘 할크등의 좌익정치집단도 혁명에 참가했으나 호메이니의 지지를 받는 이슬람공화당과의 항쟁에 패배함으로써 지하활동으로 변모했고 이슬람공화당 간부 암살등 테러활동을 하였다 1980년 이후 이라크와의 8년 전쟁의 결과로 국제적 고립과 크나큰 인적. 물적.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1989년 호메이니가 사망하고 나서 후임으로 하메네이가 최고지도자에 취임하였으며 1989년 7월 대통령 선거에서 라프산자니가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라프산자니는 전후복구 및 경제사회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실용주의 정책을 채택하였다 1997년 강경 개혁파 하타미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경제난 회복을 위한 개방, 개혁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성직자와 보수파의 반대로 개혁은 지지부진했다 2001년 6월 대통령 선거에서 하타미가 압도적 지지로 다시 선출되었다 ㄱ.호메이니(Ruhallah al Mousavi Khomeyni 1900-1989) 종교 정치 지도자 호메이니는 이란 정치가이며 시아파 종교지도자이다 그는 이란 호메이니 출생이며 여러 이슬람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30년 무렵 고향 이름을 자신의 성(姓)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 후반 국왕 팔레비의 종교세력 탄압에 저항하였고 1941년 <비밀의 폭로>를 저술, 왕정과 외국침략을 비난하였다 1950년 후반 아야톨라<종교심과 학식이 뛰어난 종교 지도자에게 주는 존칭>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1960년대 초 이란 내 시아파 종교공동체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팔레비가 토지개혁으로 종교영지를 축소시키고 여성을 해방시키려는 조치를 취하자 이에 반대하는 데모를 조직하여 1963년 체포되었다 이듬해 터키로 강제추방 되었고 1965년 이라크의 나자프로 가서 팔레비 퇴임과 이슬람공화국 설립을 계속 요구하였다 1978년 반팔레비 연설을 하여 이라크에서도 강제추방된 뒤 프랑스 파리 교외의 노플르샤토에 정착하여 이란혁명을 지도하였다 1979년 이란혁명이 승리하자 귀국하여 이슬람공화국을 수립하고 종신 종교. 정치지도자가 되었다 반대세력을 억압하고 서양음악과 음주를 금지시키고 이슬람 법률에 규정된 형벌을 부활시켰으며 시아파 국민들에게 카리스마적 권위를 행사 하였다 이슬람공화국 건국으로 이란 전체가 쇄국주의로 변모되었고 서방과 미국등을 적으로 규정했고 자유화 개방화와 이슬람교 이외 모든 사상, 문화등을 적으로 규정하여 세계통합에 저해 세력으로 규정되었다 ㄴ.하메네이(Hojatoledlam S. Ali Khamenei 1938--) 종교 정치 지도자 하메네이는 이란 정치가이며 종교지도자로 지금은 최고지도자로 이란정부 실권자이다 그는 나자흐.콤신학교에서 공부하였고 호메이니에게 배웠다 1963년 이래 호메이니의 반왕정(反王政) 투쟁에 참가 하였다 1979년 이란혁명 직전 회교공화당(일명:이슬람공화당,IRP) 창당에 참여하였고 혁명 후에는 테헤란 금요 예배 지도자, 회교혁명평의회 의원, 혁명경비대 사령관등을 지냈다 1981년 라자이대통령이 암살된 뒤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1985년 호메이니 사망 후 대통령 임기를 끝내고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ㄷ.자유화 개방화 개혁 인물 하미타(1943--) 대통령 하타미 대통령(1943년-)은 1943년 이란 중부의 아르다칸에서 유명한 종교 교육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콤과 에스파한의 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철학과 교육학으로 학위를 얻었다 그는 페르시아어(모국어=이란어) 이외에 아랍어, 영어, 독일어를 구사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모하마드 레자 샤 팔레비의 통치에 반대하는 소논문들을 쓰기도 했다 1979년 하타미는 독일 소재 함부르크 이슬람선터의 소장에 임명되었고 1979년에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친정부 성격을 지닌 신문의 대표가 되었다 1982년부터 10년 동안 이란의 문화장관을 맡았지만 1992년 다소 과격한 성향의 서적,잡지, 영화를 지나치게 묵인한 데 대한 문책으로 강제 해임되었다 그런 다음 국립도서관 관장, 교사, 정부 고문등으로 역임했다 하타미는 중급 성직자 지위를 의미하는 <호아톨이슬람>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예언자 무하마드의 직계 후손으로서 머리에는 검은 터번을 썼다 하타미는 사임하는 온건파 대통령 호야톨이슬람 알리 아크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의 지지를 얻었지만 하타미의 적수이자 의회 대변인인 알리 아크바르 나테크누리는 이란 정치. 종교 지도자 아야톨리 사예드 알리 하메네이를 암묵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압도적으로 하타미를 선택했다 분명 그것은 사회를 더 너그럽게 바라볼 줄 아는 그의 태도와 국내의 높은 인플레이션율과 실업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그의 공약에 대한 지지였다 8월 3일 그는 대통령직에 취임했는데 그가 구성한 내각에 개혁적 인물을 기용했다 하타미가 전에 맡았던 문화장관직에 기용된 인물로 미국과의 대화를 주장하고 나선 경력이 있는 아타올라 모하제라니였고 다른 한명은 사회관습에 대한 정책 결정을 도와줄 온건주의자인 아브돌라 누리 내무장관이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란의 국제연합(UN)대사로 있던 카말 하라지를 외무장관으로 선택한 데 대해서도 반대가 있었지만 보수적인 의회는 모든 지명자들을 승인했다 12월 하타미는 미국과 <진실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기를 휘망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관측자들은 정책을 기획하는 이란 대통령의 권한이 엄격하 제한되어 있고 특히 외교정책은 정신적 지도자 하메네이의 수중에 주어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1997년 5월 23일 강한 카리스마의 소유자 모하마드 하타미는 현재의 이슬람교 정권에서는 최초로 치러진 자유 경선 대통령 선거에서 청년과 여성, 지식인층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 거의 70%에 이르는 표를 얻었다

 

3.이란- 이라크 전쟁(1980년 9월--1988년 8월)

 

 이란-이라크 전쟁은 1980년 9월에 시작하여 1988년 8월에 끝낸 이란과 이라크 간의 전쟁이다 1980년 9월 17일 이라크가 이란 전(前) 국왕 팔레비와의 사이에 1975년 체결했던 알제협정( 두나라 국경선을 정한 협정)의 무효를 선언한 것이 동기이다 이라크군은 먼저 이란 서부국경을 돌파했으며 남부의 항만도시 후닌샤푸르를 점령하고 다시 이란 최대의 석유기지 아바단을 포위하는 등 전격적으로 이란을 깊숙이 진격했다 그러나 그 뒤 전선은 차츰 교착상태로 빠져들었다 1981년 이란이 공격에 나서면서 그해 9월에는 이라크군의 아바단 포위를 타파?g다 1982년 5월 후닌샤푸르를 다시 찾으면서 전황은 이란쪽으로 유리하게 기울었다 그런데 이 전쟁은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중동의 정치정세에 미치는 이란혁명의 영향력을 막고자 하는 주변 여러 나라와도 결부 되어 있었다 이슬람교 시아파 주민이 국민의 반수를 차지하고 끊임없이 쿠르드족을 탄압해 왔던 이라크로서는 정의와 이슬람교도 대중해방(大衆解放)을 주창하는 이슬람이란혁명이야말로 커다란 충격이었다 더욱이 이란혁명은 현실주의적 이슬람 논리 및 질서 아래에서 살아가는 아랍 여러 나라의 이슬람교도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1979년 12월의 메카성지(성지)습격 사건, 1979년 말 이후 소련침공과 함께 활발해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교도의 게랄라저항운동, 1981년 10월 이집트의 사다트대통령의 암살 사건, 1983년 6월 이후 이스라엘 점령에 항전을 계속하는 레바논 이슬람교도의 게릴라활동등은 모두 이란혁명의 경우와 같은 급진적 이슬람 변혁 지향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무렵 이란은 금융적 경제적 압박에 의한 이란 고립화를 노린 서방 여러 국가 및 아랍 산유국에 대하여 미국대사관 점거로 대항하고 있었다 옛 왕제(王制) 아래 중동 최대의 군사거점을 확보해 왔던 미국으로서도 이란혁명 타파는 중요 과제였다 이라크가 침공에 즈음하여 계획한 이란내 아랍주민(전체 인구 3%)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슬람 제국회의(諸國會議), 팔레스타인 인민해방기구(PLO)등에 의한 <이슬람교도> ,<이스라엘과 대결하는 동포> 차원에서의 화해 시도도 실퍄한 것과 같이 이란 회유책은 모두 좌절되었다 이란 쪽에 전쟁이 유리해지고 이란과 이집트, 이스라엘 국교수립등의 영향에서 오는 이슬람 주민의 반체제적 급진화가 겹쳐지는 가운데 페르시아만의 여러 나라는 1982년 5월 군사적, 경제적 결속을 강화함으로써 이라크 지원 강화를 시작했다 이란은 미국 군함의 잇 따른 송유 및 정유시설 파괴와 1988년 7월 이란 여객기 격추사건등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또 이라크측이 화학무기를 전쟁에 사용하자 이란은 1988년 7월 18일 정전(停戰) 및 철군을 골자로 하는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598조 결의안을 수락한다고 발표하였다 1988년 8월 20일 정전에 들어간 뒤 양측은 제네바 등지에서 두 차례에 걸쳐 샤트알 아랍수로 영유권 등의 문제에 대해 협상을 벌였으나 분쟁의 재발 소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 뒤 1991년 걸프전쟁에서 이라크정부는 자국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샤트 알 아랍수로 관할권을 포함한 대폭적인 양보조치를 단행 하였다

(1)후세인의 이라크와 쿠웨이트 침공 이유(아랍민족주의와 아랍통일)

 이라크 후세인정부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후세인의 아랍민족주의=아랍은 하나이다> 이란을 침공하면 아랍인 (이란 전체인구 3%)들이 후세인정부를 도와주는 반군 게릴라투쟁을 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리고 쿠웨이트를 침공하면 아랍인(쿠웨이트 전체 인구 30%)들이 후세인정부를 도와주는 반군 게릴라 투쟁을 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아랍인들조차 후세인을 도와주는 세력은 왕정타도세력 민주공화국세력이나 사회주의공화국 수립 세력들이었다 ㄱ.이라크지역내 쿠르드족 학살과 인종청소 ㄴ.이란인 다수종족 페르시아인 학살정책 ㄷ.아랍민족주의과 아랍통일---아랍지역 바트당사령부

(2)아란과 이라크 공통점 ㄱ.이슬람교 국가(종교--회교=이슬람교) ㄴ.쿠르드족 거주---이란(7%), 이라크(20%) ㄷ.대량의 석유 매장량

(3)이란과 이라크 차이점 ㄱ.언어--이란(페르시아어=이란어), 이라크(아라비아어=아랍어) ㄴ.종족 구성 (ㄱ)이란 페르시아족(51%), 아제르바이잔족(24%), 길락-마란다란족(8%), 쿠르드족(7%), 아랍족(3%) 등 (ㄴ)이라크 아랍족(75%), 쿠르드족(20%), 터키인(8%), 앗시리아인 ㄷ.이라크 후세인정부는 사회주의 바트당 정부로 국가사회주의 정부라면 이란 하타미정부는 이슬람교 정부이다

 

4.페르시아어 --인도. 유럽어족 이란어파의 서부그룹에 속하는 언어-- 페르시아어는 인도.유럽어족 이란어파의 서부그룹에 속하는 언어이다 이란의 공용어 및 주요문학어로서 이란국내 여러 방언 중에서 정치적 문화적으로 가장 중요하다 페르시아어를 모어로 하는 인구는 이란내에서 2,687만명(1992년) 정도이며 이란외에서도 아랍제국, 러시아연방, 특히 카프카스지방과 중앙아시아에서도 사용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이란동부의 페르시아어 방언 또는 중앙아시아의 티지크어어와 매우 가까운 언어가 쓰여지고 있으며 파슈트어 다음으로 많이 분포되어 있다

(1)페르시아어 역사 페르시아어 역사는 7세기 중엽 아랍에 의한 사산조(朝) 페르시아의 정복과 이란의 이슬람화에서 비롯된다 이를 학문. 예술분야에서 아리비아어가 통용됨에 따라 사산왕조의 공용어이며 조로아스터교의 종교용어였던 중세 페르시아어(팔라비어)는 그 기반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구어체로 남아 일반대중 속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9세기까지의 2세기에 걸친 아라비아어 채용은 페르시아어에 아라비아어가 대량으로 차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기록은 문자로서 페르시아어의 부흥은 9세기부터 10세기에 이란 동북부 호라산지방에서 바그다드의 칼리프로부터 사실상 독립한 사만왕조와 가즈나왕조등 아란계 민족왕조가 성립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 왕조의 민족부흥정책의 대시인, 과학자, 철학자, 역사학자에 의한 문필황동이 활발히 이루어져 고전 페르시아어시대가 열렸으며 이후 15세기 말까지의 시기 동안 페르시아어는 황금기를 맞이 하였다 니자미.사디.하피즈 등의 대시인이 참여한 고전페르시아어 문학작품의 권위는 아란이 문학어로서의 페르시아어를 받아들이는데 중요한 힘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복잡하고 난해했던 고대 페르시아어와는 달리 문법이나 발음면에서 많이 간소해져 이란은 물론 인도, 아프가니스탄, 터키, 중앙아시아등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이에 따라 발생지는 이란 서남부 파르스지방이지만 북방에서 쓰이는 파르티아어의 요소와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어적 요소도 차용되었다 (2)문법조직 현대 페르시아어의 문법조직은 인접한 아라비아어와 영어 이외의 현대 유럽의 대부분의 언어와 비교해 볼때 훨씬 단순하다 명사의 문법적 성 구별은 없으며 복수형도 규칙적인 복수어미(접미어) 하나를 붙이면 된다 격변화도 없고 격관계는 전치사나 후치사로 나타낸다 관사는 존재하지 않으나 정.부정의 관계를 표현할 수 있다 동사의 활용조직은 현대어간과 과거어간의 둘을 구별하여 여기에 전활용에 공통되는 인칭어미(1, 2, 3인칭와 단수. 복수)를 붙인다 현재와 과거 이외의 시제나 능동에 대한 수동등을 나타내는 데에는 조동사를 사용한다 명사. 형용사. 전치사등과 몇개의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는 동사가 결합하여 많은 복합동사가 형성되는 것도 페르시아어 특징의 하나이다 어순에서 동사는 특별한 경우 이외는 문장 끝에 두며 형용사는 결합사를 끼고 명사에 후치된다 이와 같이 비교적 단순한 문법조직이 페르시아어를 이슬람세계의 동부, 특히 중앙아시아에 문명어로서 보급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아라비아어계의 어휘로 인해 페르시아어의 표현력이 늘어나 주변 문화 영역에서 사용하기 에 적합한 언어로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5..쿠르드족 쿠르드족은 약 2,000만명에서 2,50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쿠르드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이라크 전체 인구 23%, 터키 전체 인구의 19%, 이란 전체 인구 10%가 쿠르드족이며 그외 시리아,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쿠르드족은 아란어 서북계에 속하는 민족(아리아 페르시아계통의 민족)이다 쿠르드족은 터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북이라크에 사는 쿠르만지와 이란. 이라크에 걸쳐 있는 쿠르디의 두 방언그룹으로 크게 나눈다 음성. 형태면에서는 옛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쿠르드말은 고유문자가 없고 문헌은 지역에 따라 아라비아(아랍)문자나 페르시아어(이란)문자, 아르메니아 문자, 라틴.키릴문자로 표기한다 쿠르드족의 인구는 약 2,000만 명에서 2,50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쿠르드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터키인구의 19%, 이란 전체인구 중 10%, 이라크 전체인구의 23%가 쿠르드족이며 그외 시리아, 구(舊)소련등지에 흘어져 살고 있다 BC 2000년전쯤 수메르 비문(碑文)에는 이미 반호수 동방민족으로 카르다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있다 BC 1000년쯤에는 쿠르티에로 알려졌으며 BC5세기의 그리스 군인. 역사가인 크세노폰은 카르다카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현재 터키에서는 퀴르트, 아랍권에서는 쿠르드, 아란에서는 코르드라 한다 거주민의 대부분은 산악지대에서 양. 염소등의 목축이나 과수. 보리. 쌀 재배에 종사한다 지연적(地緣적) 성격이 강한 부족(아시라)을 이루어 족장 아가는 의식. 재판의 집행, 구성원으로부터의 벌금, 아하티라는 세금징수, 외래자 접대등을 하고 그 지위는 장남이 상속한다 쿠르드의 활동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이슬람기 이후부터이며 그 이전에는 조로아스터교나 유대교를 믿었다 이슬람화 이후 그들의 대부분은 수니파였으며 신비주의 교단(타라카)에서는 카디리야의 영향을 받았다 시아파는 1/3쯤 된다 처음에는 아랍계. 페르시아계 왕조 아래의 부족군이었으나 10세기에는 디야르바크르를 중심으로 하는 마르완 왕조(983-1085), 아제르바이잔의 라와드왕조(10세기 초-1071)를 창립 하였다 17세기에는 오스만왕조와 사파비왕조 사이에 국경이 정해지면서 쿠르드지역이 분단되고 부족장에 의한 봉건 영주적 지배 아래 작은 국가들이 떼지어 들어서 19세기까지 그 상태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부족제는 19세기말 터키에서 305종의 부족이름이 확인된 것으로 알수 있다 16세기 이후 오스만투르크제국의 통치를 받던 쿠르드족들은 제1차세계대전 직후 패전국인 오스만제국 분할을 위해 1920년 맺어진 세브르조약에서 독립국가 청설을 승인받았다 그러나 이 조약은 터키의 반발로 국제적으로 비준되지 못했고 이를 대체한 1923년 로잔조약에서는 쿠르드국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터키공화국과 팔레비(파흘라비)왕조의 이란이 성립되고 이 두 나라와 소련령 카프카스, 아르메니아, 그루지니야, 아제르바이잔, 시리아등으로 분할된 상태가 굳어지자 각지에서 독립운동과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이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뒤 마하바드에 쿠르디스타인인민공화국이 내워졌으나 1년도 못되어 무너졌다 1979년 이란 혁명 때 여러 정당이 결성되었는데 그 중 이란쿠르드민주당(KDPI)을 줄심으로 쿠르디스탄에서의 민족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이라크에서는 1919년 영국 통치 아래 쿠르디스탄독립선언이 발표되었으나 곧 탄압 받았다 공화제 발족 뒤 헌법으로 아랍. 쿠르드의 평등이 인정되어 쿠르드어 출판물도 공인되었지만 1988년 이라크의 후세인정권은 악명 높은 화학무기까지 동원해 쿠르드족 마을의 80%를 파괴하는 초토화작전을 감행하기도 했다 터키에서는 1923년 근대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아타튀르크(케말파샤)가 쿠르드언어와 문화 말살정책을 펴면서 쿠르드독을 박해했다 이때부터 터키 쿠르드족의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저항운동이 시작됐다 그러나 구심점이 없이 지지부진하던 쿠르드독립운동은 1984년 쿠르드노동자당(PKK)과 반군 지도자 A.오잘란이 등장하면서 무장유혈투쟁의 길을 걷게 되었다 터키군사정권은 쿠르드어의 비공식 사용마저 금지시켰다가 1991년 해제됐다 1999년 오잘란이 체포되었지만 쿠르드족의 항의시위는 계속되었고 이란.아크로 거점을 이동하여 반군활동이 계속되고 있다 2003년 이라크의 후세인정권 붕괴 이후에도 쿠르드족과 인근 종족 및 나라 간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쿠르드족의 친구들** http://mission.hosanna.net/kurdistan <쿠르드족 선교단체, 모임, 쿠르드족 소개, 현지뉴스 제공>

(1)민족명--쿠르드족(KURDS)이며 성경의 메데(Medes)인으로 알려져 있는 종족

(2)분포지역--쿠르디스탄(Kurdistan)은 시리아와 이라크, 이란, 터키, 구 소련에 걸친 평균 고도 3500m의 산악지대와 이라크 북부의 유전지대, 티그리스강 상류 평원으로 구성되는 지역 그리고 ??럽, 북아메리카, 호주등지에도 거주하고 있다

(3)인구---약 2천 5백만명에서 3천만명 ㄱ.터키--------1천 400만백명----터키 전체인구 22% ㄴ.이란--------600만명---------이란 전체인구 11% ㄷ.이라크------400만명--------이라크 전체인구 23% ㄹ.시리아------100만명--------시라아 전체인구 8% ㅁ.구(舊)소련지역-----100만명 ㅂ.그외 지역---------250만명

(4)언어---쿠르드어(Kurdish)----서부 이란어 계통

(5)종교--- 대부분 이슬람교 순니파이며 1/3은 시아파이다 ㄱ.시아파 이슬람교(쉬아 이슬람)---주로 이란 쿠르디스탄에 거주하는 쿠르드인 ㄴ.극단적 시아파--굴라트:Ghulat ㄷ.수피즘 Sufism ㄹ.알레비파 Alevis--터키의 디밀라지역의 쿠르드인 대부분이 믿고 있다 ㅁ.아흘알하끄 Ahl al-Hagg(진리의 백성)--이라크에서는 카카이(Kakai)라고 부른다 Kermanshah의 동부 Sahne 주위, Kermanshah의 서부 Kerend, Kitkuk남부지역 ㅅ.에지디 Ezidi--악마숭배자라고 불린다 쿠르만지어를 사용 극단적 순니에서 발생했으나 극단적 시아파의 특성을 많이 가짐

(6)중심도시 ㄱ,터키---디야르바크르, 비틀리스, 하카리, 이스탄불등 ㄴ.이라크---술레이마니야, 아르빌등 ㄷ.이란---마하바드, 세넨다즈등

 

 6.이란-콘트라 사건(Iran-Contra Affair)

 이란-콘트라 사건은 1986년 11월 드러난 것으로 미국이 비밀리에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고 그 대금을 나카라과의 반정부 게릴라 조직인 콘트라에게 지급한 사건이다 미국은 레바논에서 유괴된 미국인 인질을 석방시키기 위하여 1985년 9월과 1986년 2월 이스라엘을 경유하여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고 그 대금으로 스위스은행에 있는 콘트라 구좌에 약 3000만 달러를 입금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에 대한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신 R 레이건 대통령의 연루 의혹이 남았으나 타워위원회는조사 결과 사건이 발각된 1986년 11월 이전에 레이건 대통령이 알고 있었는지에 대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또한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인 O. 노스 중령이 의회 청문에서 레이건 대통령의 직접 명령을 부인하는 증언을 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노스 중령등 4명의 관련자는 기소되었다 이란-콘트라 사건 상원조사위원회 위원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존 케리 상원의원이었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지사 출신 레이건 전대통령을 보고 암흑정치로 혹평했고, 전두환 노태우정부를 독재정부로 규정하여 한국 민주화를 촉구했다 전두환 노태우정부는미국 레이건 부시정부 시대었다

 

7.이란 각종 주요 자료 사이트

(1)가려진 사람들---이란 역사. 국가개관. 지진. 여행시 주의 사항. 홍보사진, 갤러리 수록 http://www.iranphotos.net

(2)이란이안--이란어. 영어번역. 이란역사. 페르시아 문화. 이란 입출국 안내등 이란정보 제공 http://www.iranian.co.kr

(3)주(駐)이란대한민국대사관 http://www.mofat.go.kr/iran

(4)이란 영화 소개---칸다하르(KanDaHaR) http://www.nkino.com/Movies/movie.asp?id=5940 부시대통령께서 백악관에서 <칸다하르>영화를 관람했고 이프간의 현실과 아프간 여성들의 애환을 이 영화로 간접체험 했다고 한다 <칸다하르>는 캐나다로 이민간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나파스가 자살을 결심한 동생을 구하기 위해 칸다하르로 가는 여정을 담은 작품이다 <칸다하르:Kandahar>는 아프가니스탄 남동부 칸다하르주 주도시이다 인구는 23만 7,500명이고 아프가니스탄 수도는 카불 다음 가는 아프가니스탄 제2의 도시이다 주민은 아프간족과 타지크족이 반반이며 아프가니스탄에서 유일하게 파슈토어를 공통어로 쓰는 도시이다 시내 도로는 직전이며 넓다 고속도로가 카불. 헤라트 및 파키스탄의 퀘타로 통하고 국제공항도 있다 상업이 번성하고 모직물. 과일 통조림공장이 있다 도시의 기원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지역에 아라코시아라는 도시를 건설한 것에서 시작되었고 18세기 중엽에는 두라니왕조의 수도였다 이 도시에는 마호메트가 입었다는 옷을 안치된 모스크(이슬람사원)인 헤르카이 샤리프 지알리트, 바위동굴의 망루인 치힐지나, 1709년 사파비왕조에 반란을 일으킨 길자이계 아프간인 미르 와이스 및 1947년 이곳에서 즉위한 아프가니스탄 건국자 이흐마드샤 두라니의 묘와 유적등이 있다 1880년 아프간군이 영국군을 격파한 옛 전쟁터 마이완드는 북서쪽으로 수십 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페르시아인(이란인)은 아랍인과 종족이 다르지만 이슬람교로 라마단(금식월)을 준수하고 매년 Hajj기간 중 8-9만명의 순례객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 성지를 방문하고 있으며 이슬람 율법(Islamic Code)은 특히 남녀의 유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페르시아안(이란인)은 식생활 유목, 촌락생활에서 유래한 바 많으며 날 것이나 비늘 없는 해산물(뱀장어, 조개등)을 먹지 않으나 새우는 비늘이 없어도 좋아한다 그리고 돼지고기와 개고기는 금지시하고 있다 이란인들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있으며 Ferdowsi, Sadi, Hafez등 뛰어난 시인의 작품 싯 귀절을 일상생활에 새기고 있으며 이들을 민족적 영웅으로 숭상하고 있다 1997년 8월 하타미(Khatami) 신정부 출범이후 <문명간의 대화> 통한 개혁, 자유화, 개방화정책을 가속화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