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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납치단체 "아프가니스탄 다수민족 파슈툰 부족 무장단체" 본문

CIA.FBI(귀가 빙빙 도는 뇌 감청기)

한국인 납치단체 "아프가니스탄 다수민족 파슈툰 부족 무장단체"

CIA Bear 허관(許灌) 2007. 7. 29. 09:11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 23명을 인질로 잡고 있다가 1명을 살해한 납치단체는 정통 탈레반인가 아니면 단순한 무장세력인가.
  
  탈레반을 납치세력으로 간주한 것은 과거 탈레반 대변인을 자처한 카리 유수프 아마디라는 인물이 납치 다음날인 20일부터 줄곧 한국과 독일인 납치사실을 공개하고 주둔군 철수와 인질 맞교환 등을 요구하며 납치세력을 대변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독일인 인질 2명을 사살했다고 발표했으며 실제 1명이 총상을 입은 사체로 발견됐다. 독일 외무부도 22일 인질 1명의 시신에서 총상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당시 탈레반은 웹사이트 성명을 통해 독일인 2명을 살해한 것은 탈레반 지도부인 '지도자 위원회'의 사형 선고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인 인질을 둘러싸고 당초 23일로 설정됐다가 연장된 협상시한도 '지도자 위원회'의 성명을 인용, 대변인을 자처하는 아마디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이러한 정황에 따라 한국인 납치단체가 탈레반 무장단체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것으로 간주됐다.
  
  '지도자 위원회'는 탈레반 최고지도자인 물라 모하마드 오마르가 서방 군대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위해 2003년 10명으로 조직한 지휘부. 군인들로 구성돼 있으며 대개 남부 파슈툰 부족 출신으로 알려졌다. '얼굴없는 두령'으로 불리는 오마르는 9.11 테러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빈 라덴에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으며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으로 탈레반 정권이 붕괴한 뒤 파키스탄으로 탈출, 저항활동을 지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을 납치한 세력의 실체를 둘러싸고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22일 독일 일간 디 벨트의 보도 때문이다. 이 신문은 독일인 2명의 납치세력이 탈레반 무장세력이 아니라 파슈툰 부족 무장세력(bandit)이라고 보도했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도 아프간 정보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독일인을 납치한 세력이 친탈레반 성향의 다른 무장단체라고 전했다.
  
  독일인 인질 2명과 아프간인 5명을 모두 살해했다는 아마디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독일 정부는 자체 정보를 종합한 결과 아직 1명은 생존해 있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다른 1명도 살해된 것이 아니라 당뇨병을 갖고 있는 그가 납치 상황의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독일 정부가 탈레반 측의 거짓 정보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광범위하게 축적된 정보와 정보 수집 능력에 기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아프간에 배치된 독일의 토네이도 정찰기는 납치 사건 발생 직후부터 정보 수집 활동을 벌여 납치범과 인질의 행로와 현재 위치를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아프간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일연방정보국(BND) 및 군사정보 기관은 납치범들의 실체 파악에 나서 이들이 탈레반 정통 조직이 아니라 탈레반과 연계돼 있는 파슈툰 부족 무장세력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독일 정보기관은 그 동안의 이라크 및 아프간에서의 인질 석방 교섭 경험에 비추어 납치범들의 납치 동기는 정치적인 것보다는 인질교환이나 몸값 등 실제적인 이유가 더 큰 것으로 파악했다.
  
  납치세력의 대변인을 자처한 아마디가 한국과 독일인들을 납치한 세력이 동일한 탈레반 무장단체라고 주장한 가운데 이런 독일 언론의 보도가 맞다면 한국인을 억류한 세력 역시 정통 탈레반이 아닌 현지 무장세력이나 군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특히 이 납치세력은 그동안 다양한 요구를 해왔는데 초반의 '한국군 철수'에서 '한국인 인질과 같은 수의 탈레반 죄수 교환', 나아가 '가즈니주(州) 내 수감 탈레반 무장대원 전원 석방'으로 요구조건을 더욱 까다롭게 했다.
  
  그러다 일본의 교도통신이 24일 아프가니스탄 정부측 대표의 발언을 인용, 이들이 한국정부에 피랍자들과 전화통화를 하는 대가로 10만 달러를 요구했다고 보도하면서 이들의 실체에 대한 의혹도 커졌다.
  
  납치사건 발생 엿새 만에 처음으로 금전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납치세력이 요구조건을 상향조정한 시점에서 인질 접촉 대가로 구체적인 돈 액수가 제시된 것은 탈레반이 이번 사태 이후 금전적 이익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교도통신은 25일 아프가니스탄 정부 당국자의 말을 인용,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탈레반측에 거액의 몸값을 지불했으며, 수감중인 탈레반 요원 8명의 석방을 약속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익명을 요구한 이 아프간 당국자는 교도통신에 "그들은 우리들은 이슬람의 종복들이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으며 도둑들이다, 그들은 돈을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고"고 전한 것도 납치세력이 이슬람 반군이 아니라 친탈레반 성향의 무장세력일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감자 석방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한국인 인질 1명을 살해했다고 아마디가 주장한데 이어 총상입은 시신까지 발견된 점에 비춰 정통 탈레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1.아프가니스탄 종족구성
파슈툰(파쉬툰)족 42%, 타지크족 27%, 우즈벡족 9%, 하자라 9%, 기타 13%이고 언어는 파슈툰(파쉬툰)어 50%, 다리어 35%, 터키어 11% 등으로 분포하고 있다
(1)파슈툰(파쉬툰)족(42%)---파슈투어
아프간남부 (칸다하르) 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아프간인구의 38%를 차지하고 있는종족이다 원래 50%였는데 전쟁으로 인해 많이 죽은탓이란다.. 파쉬툰종족은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좋다... 1747년-‘로야지르가’를 열어 국왕을 세운 지역이기도 하고, 아래 여섯번째 사진에도 보이듯이  "아흐마드샤 바바" 가 국왕으로

선출되어 나라의 국부가 나온 지역이기도 하다(현재<2006년>정치계에서도 크게 영향권있음)

칸다하르는 탈레반 본거지며 (이슬람 근본주의 신학생들)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 테러조직의 기지로 세운지역이기도하고, 9.11테러후 빈라덴의 은신처이기도하다..

아편집산지의 중심지라서 양귀비를 세계적으로 수출하는 지역이기도 하고 오랜 무정부 상태에서 2004년 카르자이 대통령이 출범한 지역이기도 하다

 

-알렉산더의 대제국 이후로, 아프가니스탄은 동족과 서쪽으로부터 침입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파쉬툰족은 아프리카의 이슬람교만이 아니라 인도의 불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10세기 이후로는 아프가니스탄의 주된 종교가 (이슬람교)였다. 현재 파쉬툰족의 99%가 이슬람교도이다 파쉬툰족은 끊이없는 전쟁으로 알려진 종족이다. 1979년 소련은 아프간 사람들에 대한 공산주의의 통제력이 상실되는 것을 우려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탱크와 3만군의 군대를 보냈다. 그때 이후로 수많은 아프간인들이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파쉬툰 종족이었다(아프간 인구의 50%를 차지하던 파쉬툰 종족이 전쟁으로 38%로 줄은 상태다) 아프간은 소련의

점령과 계속되는 내전(22년간 내전)으로 극심한 소동 속에 있었다

 

(2)타지크족[― 族, Tadzhik]--2아프가니스탄 전체인구의 27%분포

Tajik라고도 씀.
아프가니스탄과 투르키스탄에 사는 이란계 민족.

타지키스탄 주민의 약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1980년대말 타지키스탄에 235만 명, 우즈베키스탄에 65만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아프가니스탄에도 320만 명이 살고 있는데, 이는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약 1/5에 해당한다. 그밖에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 서부에도 약 3만 명이 살고 있다.

타지크는 옛날부터 페르시아어의 하나인 타지크어를 사용하거나 현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카프카스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타지크족은 이미 선사시대에 이란 고원으로부터 카스피 해와 중국 국경에 이르는 지역으로 널리 확산된 중앙 아시아의 정착문화를 받아들여 지붕이 납작한 흙집이나 돌집을 지어 마을을 이루고, 물을 끌어 밀·보리·수수 등을 경작했다. 타지크족이 가꾸는 밭은 멜론과 다양한 과일로 유명했다. 이들의 수공예 기술은 고도로 발달된 수준에 있었고, 이들 마을은 페르시아·중국·인도를 잇는 대상들의 교역로 연변에 자리잡고 있어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후 터키인이 서쪽으로 이주하여 타지크족의 거주지역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터키 문화에 동화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이란어를 사용했다.
 
(3)우즈벡족

우즈벡족(우즈베크어: O‘zbek/O‘zbeklar)은 우즈베키스탄의 주요 민족이다. 대부분이 우즈벡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신봉한다.

생업은 목축을 주로 하고 농업·수공업·상업에도 종사한다 우즈벡족은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러시아, 우크라이나,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독립국가연합과, 에스토니아, 서유럽국가들, 미국, 중국, 중동,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도 거주한다.

 

 

 

2.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1)1994년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주(州)에서 결성된 무장 이슬람 정치단체
(2)구분--무장 이슬람 정치단체이며 게릴라와 테러단체
(3)설립연도--1994년10월
(4)소재지--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5)설립목적--이슬람공화국 건설
(6)주요활동--아프가니스탄 과도정부 수립 및 이슬람공화국 선포 그리고 이슬람교가 아닌 종교인이나 종교단체 시설등 처형이나 파괴등 급진적 이슬람정책 수행
(7)내용
탈레반은 1994년 10월 2만 5000여명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에서 결성한 수니파 무장 이슬람 정치조직을 가리킨다 결성 당시부터 군정세력으로 출발해 1994년에 이미 이프가니스탄 국토의 80%정도를 장악한 뒤 이듬해 수도 카불(Kabul)을 점령, 14년간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내전과 4년 동안의 모자헤딘(Mojahedin:무장 게릴라 조직)권력투쟁을 종식시켰다
이어 과도정부인 이슬람공화국을 선포하면서 결속력 있는 세력으로 등장, 아프가니스탄내 반군조직을 무장해제시킨 뒤 약탈과 강도, 부정부패를 없애는 데 힘을 쏟는 한편 일상 상업활동을 재개함으로써 전통적인 아프가니스탄 가문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내전이 계속되면서 국가접수(接收)가 어려워지자 지역지휘관들과 전략적 협정을 체결, 지역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위법 사항과 이에 따른 각종 인권침해들 도외시함으로써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더욱이 이슬람교에 대한 엄격한 해석으로 인해 갈수록 사회차별이 심해지고 여학교 폐쇄,텔레비젼(TV)시청이나 사용금지, 가혹한 이슬람식 처벌제도 부활, 아동학대등 많은 부작용을 낳음으로써 국제사회의 비난을 샀다 또 2001년 3월에는 군대를 동원해 로켓과 탱크등으로 아프가니스탄내 불교 유적과 불상등을 부수는 등 유례없는 유적파괴행위를 공개적으로 일삼기도 하였다
더욱이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 뉴욕 쌍둥이 빌딩 테러사건의 배후자인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국제 테러리스트 오사만 빈 라덴과 그의 추종조직인 알 카에다를 숨겨 둔 채 미국에 인도하지 않음으로써 미국 영국 러시아등 연합군에 의하여 점령당 하였다 지금은 아프가니스타인 연합군 과도정부 수립으로 탈레반 잔당은 사라지고 있다
(8)오마르(Omar Muhammad)
오마르는 출생에서 신상에 이르기까지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인물로 나이 역시 2001년 현재 32세에서부터 39세 또는 40대 초반이라는 설등 다양하다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 있어 아프가니스탄의 얼굴없는 지도자로 일컬어진다 소련(러시아)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1980년대부터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해 1989년에는 전투 도중 로켓탄 파편에 맞아 오른쪽 눈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 들어 이슬람학생들로 조직된 무장단체 탈레반(Taleban)을 이끌고 자신의 고향인 아프가니스탄 남서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해 1996년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이어 국토의 3분의 2를 장악한 이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왔다 탈레반 내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자 철저한 이슬람원리주의자로서 이슬람 율법의 이름으로 율법에 위배되는 모든 행위를 금지하는 등 유례없는 폭압정책으로 인해 국제적인 지탄을 받아왔다
아프가니스탄내 힌두교도들에게 이슬람교도와 구별할 수 있는 인식표를 부착하도록 하는 한편 여성의 취업금지, 의무교육 폐지는 물론 친척남성이 동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떠한 외출도 할 수 없도록 하였다 또 여성은 온 몸을 검은 천으로 둘러야 하며 턱수염을 깎은 남성은 다시 자랄때까지 감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그 밖에 도박금지와 텔레비젼.비디오 시청등 어떠한 형태의 오락도 금지하고 2001년 3월에는 세계적 문화유산인 바미안석불을 파괴하도록 지시한 뒤 석불 파괴가 예상보다 늦어졌다는 이유로 속죄를 위해 소 100마리를 희생물로 바치는 연이은 폭압정책을 펼쳐 왔다
2001년 9월에는 미국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미국 국방부(펜타곤)에 대한 항공기 납치 자살테러사건의 배후자로 알려진 국제 테러 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을 보호하였다는 이유로 미국과 연합군들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한국인 납치 탈레반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슬람 원리주의 극단 통치로 악명 높아
탈레반을 알기 위해서는 탈레반의 탄생과 몰락, 흥망성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9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의 친소 사회주의 정권을 보호하다는 명목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1978년 공산주의 정당인 아프간 인민민주당은 모함마드 다우드(Mohmmad Daoud) 정권의 탄압에 맞서 쿠데타를 감행하였으며 다우드를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런데 신정권의 급진 정책은 무슬림들의 저항에 부딪쳐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에 1979년 소련은 개입을 선언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수도 카불을 점령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국민들은 즉각 ‘성전’을 선포하고 대소항쟁에 들어갔다. 1985년에 이르러 이슬람반군들은 연합전선을 형성, 이슬람동맹저항운동인 ‘무자헤딘’을 결성하였으며 소련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약 10년 동안 이어진 거센 저항에 소련은 결국 굴복하였으며 1989년, 마침내 철수를 결정하였다.

소련이 철수한 1992년, 부르하누닌 랍바니(Burhanuddin Rabbani)는 소련이 남기고 간 나지불라 정권을 전복하는데 성공하여 권력을 인수하였다.

그러나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결성된 탈레반의 급성장으로 랍바니 정권도 1996년 와해되고 만다. 수도 카불에 입성한 이슬람 수니파 무장학생조직 탈레반은 나지불라 전 대통령을 끌어내 공개처형하는 등 과격한 선동과 행동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결집하였다.

북부동맹 미영 연합군과 탈레반 축출

한편 정권을 빼앗긴 랍바니는 1997년, 서로 다른 민족 종교에 기반을 둔 7개 정파를 연합해 반탈레반 저항조직인 ‘북부동맹’을 결성한다. 북부동맹은 러시아와 이란의 원조 속에서 탈레반을 공격하였으나 상황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으며 탈레반에 계속 밀린 가운데 아프간 영토의 10% 미만을 통제하는 데 그쳤다.

그후 붕괴직전까지도 내몰렸다가 이들이 극적으로 다시 기사회생한 것은, 9.11 테러 사태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대한 공습을 계획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북부동맹은 미국과 영국 등 동맹국들의 합동 작전 속에서 15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탈레반을 공격하였으며 약 한 달 만에 북부의 헤라트, 북동부의 마자르 이 샤리프, 동부의 잘랄라바드, 중부의 수도 카불 등을 잇달아 점령하였다.

마침내 12월 6일, 탈레반 정권은 탈레반 전사들에 대한 사면과 최고지도자 물라 모함마드 오마르(Mullah Mohammad Omar)의 안전보장을 조건으로 최후 거점 칸다하르를 양도하기로 합의하고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슬람 원리주의 신정 국가를 표방한 탈레반은 그 폭정으로 더욱 악명높다. 탈레반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근거해 지구상에서 가장 순수한 이슬람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인터넷은 물론 TV 시청도 못하게 하였다. 서양 음악과 영화 같은 것은 악마적인 것이라며 금지시켰다. 사람들은 반이슬람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사진촬영에도 응해서는 안 된다.

탈레반 이슬람 율법 원리주의 극악 통치

남자는 머리에 터번을 둘러야 하고 수염을 반드시 길러야 하며 특히 여성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 눈동자만 빼고는 검은 ‘브르콰스’로 온통 감싼 채 외출도 함부로 할 수 없다.

여자는 교육을 받아서도 안 되고 직업도 가질 수 없다. 심지어 ‘흥청거리며 노는 것’은 이슬람 율법에 어긋난다며 설날도 폐지했고,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웃어서도 안 된다.

'종교경찰'은 이러한 이상향의 이슬람 국가 건설을 위해 24시간 이들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2000년 3월에는 세계적 문화유산인 버미얀 석불을 산산조각 내버려 국제사회로부터 거센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충격을 받은 바 있는 미국은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탈레반 병참을 지원하였다. 자신들을 ‘탈렙’(‘학생’ 혹은 ‘제자’의 의미)이라고 부르고 ‘이슬람의 충직한 제자’가 되겠다는 뜻을 가진 '탈레반'은 소련군 침공 시 전쟁을 피해 파키스탄으로 피난을 떠난 난민 출신 학생으로 구성된 무장학생조직이다.

이들은 내전이 극에 달한 시점인 1994년 파키스탄에서 조직됐다. 탈레반 정권의 기반은 종교상으로는 수니 이슬람이며 종족으로는 파쉬툰족으로 구성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탈레반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의거, 지구상에 가장 순결한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목표를 위해 이슬람 원리주의에 근거한 급진적 이슬람 정책을 펼치려 하였다. 탈레반의 통제는 폭정으로 이어졌으며 그들의 반인권성을 우려한 미국과도 점점 사이가 소원해지게 되었다.

탈레반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세력 확산

특히 탈레반이 반미 테러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을 노골적으로 지원하고 그에게 훈련기지와 은신처를 제공함으로써 미국과 적대적인 관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1998년 8월에는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국 대사관 폭파 테러가 발생, 미국은 이를 알 카에다의 소행으로 지목하고 아프가니스탄의 알 카에다 훈련기지 및 지도자 빈 라덴의 은신처를 향해 75발의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하였다.

미국은 2001년 9.11 테러 사태의 충격 속에서 그 주모자로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하였으며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게 다시한번 그를 내 놓을 것을 경고하였다.

탈레반 정권은 이를 부인, 거부하였으며 2001년 10월 8일 미국은 빈 라덴 생포의 명분과 탈레반 정권 전복을 내걸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개시하였다.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전쟁의 목표가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조직의 제거, 탈레반 정권의 전복을 넘어서 전세계 테러 행위의 근절과 조직의 붕괴라고 주장했다.

12월 6일, 궁지로 몰린 탈레반 정권은 항복을 선언하였지만 빈 라덴의 생포는 실패로 돌아갔다. 22일에는 탈레반이 물러간 아프가니스탄을 이끌 과도정부가 출범하였다.

온건파 파쉬툰족 출신인 카르자이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 내각은 아프간 정파회의의 최종합의에 따라 총리 1명, 부총리 5명, 장관 24명으로 구성된 30명의 각료들로 구성되었다.

탈레반은 항복했지만 조직이 와해된 것은 아니었다. 산악지대로 숨어든 탈레반은 기회를 노리며 군대와 병참을 보강하고 군사 훈련을 지속하였다.

또한 간헐적으로 미국을 공격하는 등 후방을 교란하는 게릴라전과 테러를 병행해 왔다. 전투전은 물론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는가 하면 도로에 폭탄을 매설해 재건사업까지 방해하는 등 최근 들어 그들의 공세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작년부터는 외국인을 납치해 살해하는 테러까지 가리지 않고 있다
 
*탈레반 배후
-대소항전 투쟁: 미국이나 사우디, 파키스탄등
-소련붕괴이후
탈레반---사우디나 파키스탄등지 이슬람근본주의자 지원
북부동맹--이란과 러시아 지원 그리고 9.11테러 이후 연합군 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