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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알(I)센타:이라크 국가 개요와 국가사회주의자 후세인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자 임시정부 초대총리로 유엔연설을 한 이야드 알라위 前 총리 본문

Guide Ear&Bird's Eye/이라크

동아시아 알(I)센타:이라크 국가 개요와 국가사회주의자 후세인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자 임시정부 초대총리로 유엔연설을 한 이야드 알라위 前 총리

CIA Bear 허관(許灌) 2006. 8. 18. 05:41
1.이라크 국가 개요(槪要)
이라크는 서남아시아에 위치한 나라이고 정식명칭은 이라크공화국이다
면적은 43만 8000평방 km로 한반도 면적 2배 규모이고 인구는 2,400만명 규모이다
이라크 북쪽은 터키이고 동쪽은 이란, 서쪽은 시리아와 요르단, 남쪽은 사우디아바리아와 쿠웨이트에 인접해 있으며 남부일부가 퍼르시아만에 면(面)해 있다 이라크의 수도는 바그다드이다
(1)위치--중동, 아라비아반도 북동부
(2)면적---434,920평방 Km
(3)국경---3,668km
(4)해안선---58km
(5)영해----12해리
(6)인구----약 2,400만명(2003년)
(7)수도---바그다드(Baghdad)
(8)공용어--아랍어, 쿠르드어
아랍어는 이라크 주민 대부분이 사용하고 있으며 쿠르드어는 쿠르드족이 사용하고 있다
쿠르족은 대부분 아랍어와 쿠르드어등을 2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언어의 공용어인 아라비아어(아랍어)가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한편 북부에서는 쿠르드어와 터키어가 일반적이며 동부 부족 사이에서는 페르시아어의 방언도 쓰이고 있다
(9)문맹률---50%
이라크 주민 50%가 문맹자이다 문맹률 50% 때문에 각종 테러나 군사쿠데타 발생등이 자주 일어나고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수행의 장애물이다
이라크 주민들 스스로 문맹자 퇴치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10)종족구성---이랍인(75%), 쿠르드인(페르시아계 주민,15-20%), 터키인(5-10%), 앗시리아인등
주민이 많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랍인이전체의 75%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소수민족 가운데서는쿠르드인이 가장 많으며 총인구의 17%이상을 차지한다 북서쪽 쿠르디스탄지방에 주로 거주하고 있는데 아란.터키.시리아에 걸친 페르시아계 주민이다
이 밖에 북이라크의 터키인(5%-10%), 중앙부의 이란인을 비롯하여 아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야지디인, 사바크인, 유대인등이 거주하고 있다
(11)종교와 국교
ㄱ.종교--회교(시아파 55%, 순니파 40%0, 기독교 4%
이라크 전체인구의 95%이상이 이슬람교도이며 정통파 수니파와 분파 시아파로 양분된다 수니파는 바그다드와 바스라 시민을 비롯해 아랍인과 쿠르드인이고 시아파는 그 성지(聖地) 카르빌라 주변의 아랍인과 이란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도(기독교도)는 네스토리우스파. 그레고리우스파. 그리스정교. 아르메니아정교등 각파를 합하여 20만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그 밖에 약간의 유대교도도 있다

ㄴ.후세인정부의 국교와 기본규정--국교는 이슬람교이고 헌법은 인민민주주의 헌법으로 사회주의에 기초한 경제건설을 기본규정으로 삼았다
(12)독립---1932년 10월 3일(영국)
(13)헌법---2004년 3월 임시헌법(TAL) 제정
(14)정체---2005년 1월 총선이후 신정부 출범때까지 준비--공화제 내각책임제
대통령은 의례적 상징, 수상은 행정부 책임자
(15)정부형태---대통령 중심제이나 내각제적 요소(총리 및 내각)가미
(16)원수---야와르(Al Yawar)대통령(2004년 6월 1일 취임)
알 야와르 대통령은 다양한 종파서 폭넓은 지지 받고 있으며 미국과 사우디등지에서 교육 받고 사업을 해온 분으로 친미 친서방 인물이다
2004년 5월 당시 차량 폭탄 테러로 IGC의장이던 에제딘 살림이 사망하자 후임 IGC의장에 오른 뒤 이라크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항상 아랍 전통 복장을 입고 다닌다
(17)수상---이야드 알라위(Iyad Allawi)총리(2004년 6월 1일 취임)
알라위 총리는 원래 이라크 정보장교 출신이었으나 1971년부터 레바논과 영국등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영국에서 공부한 의사이기도 한 그는 후세인 정권 당시 망명한 군 장교가 주축이 된 조직인 <이라크민족합의>를 이끌었다
1990년 초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손잡고 무장 조직원을 이라크에 잠입시켜 정부기관을 공격하는 등 반정부활동을 벌였다
1996년에는 CIA의 지원을 받은 군부쿠데타 시도에 참여하는 등 외국에서 반후세인 활동을 계속해 왔다
2003년 4월 미군이 후세인 정권을 축출한 뒤 망명을 끝내고 이라크에 돌아왔으며 이후 군, 경찰, 정보기관을 창설하는 등 안보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8)실권자---이야드 알라위 총리
(19)대의기구---2004년 7월 중 국민회의(1,000명) 소집 후 자문위원회(100명) 구성예정
(20)정당---이라크 국민회의(INC), 이슬람혁명최고위원회(SCIRI), 쿠르드민주당(KDP), 이슬람다와당, 쿠르드애국동맹등
(21)정부성향--중도중립(中道中立)
(22)UN가입---1945년 12월 31일
(23)비동맹가입--1961년 9월 5일
(24)GDP--260억불(2003년), 1인당 GDP--2,400불(달러)
(25)화폐단위--Dinar신화폐발행(2003년 10월 15일)
(26)무역(2002년도 기준)
수출--206억불(원유), 수입--112억불(기계, 장비, 원자재, 식료품등)
(27)국방비와 군사력
육군 4만명, 민방위군 4만명, 국경수비대 3만 4,000명, 시설경비대 7만명등 26만명 규모 보안군 육성 중
2005년 총선이후 신정부 출범이루 30만명 육군과 5만 해군, 5만 공군 육성
(28)군사동맹관계---34개국 연합군 주축으로 군사관계 수립
(29)남북관계--연합군축으로 외교관계 수립과 경제,문화등 정책적으로 협조
이라크 임시정부와 신정부는 항미론자나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NLPDR)정부와 외교적 단절--미국과 영국축으로 외교관계 수립(연합군 34개국 중심으로 외교관계 수립)

2.이라크 역사
Al-Jumhuriyat Al-Iraq http://my.netian.com/~coolsul/iraq.htm

메소포타미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을 가지고 잇는 곳이다
BC 3000년 무렵 수메르는 자신들의 문자를 가진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하였다
이어서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바빌로니아왕국과 신(新) 바빌로니아왕국이 티그리스강 상류에는 아시리아왕국이 일어나 번영하였다
그러나 BC 539년 아란의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가 정복한 이후 이라크는 알렉산드로스대왕, 파르티아왕, 사산왕조 페르시아등 외부세력의 침입과 지배를 받았다
7세기 중엽 이슬람교가 아라비아반도에서 일어났는데, 세력을 확장한 이슬람교도단은 이라크를 지배하고 사산왕조의 군대를 물리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초기 옴미아드왕조시대에 이슬람제국의 중심은 시리아에 있었으나 749년부터 아바스왕조시대가 시작되면서 수도는 이라크의 알쿠파.바그다드에 설치되어 당나라의 장안(長安),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번영을 누렸다
그 뒤 아바스왕조는 차츰 세력을 잃었고 이란.중앙아시아. 이집트.북아프리카에서 계속해서 독립정권이 생겨나자 경제적 주도권도 이집트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1258년 아바스왕조는 몽골에게 멸망당했으며 바그다드는 황폐화 되었다
더욱이 14세기 말에 티무드가 이끄는 몽골군이 공격해 들어와 생명선이라고 할 수 있는 관개시설을 파괴하였다
1534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 동안 이라크는 오스만 투르크의 속주(屬州)로서 지배를 받게 되어 여러 차례 터키군과 사파비왕조의 이란군이 싸우는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한편 제1차세계대전 때에는 터키가 독일. 오스트리아측에 참전하였는데 영국군과 인도군이 바스라 부근에 상륙하여 1918년 터키를 제압하고 이라크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이 무렵 이라크 내에서는 민족운동이 고조되어 많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920년 산레모회의에서 이라크의 위임통치를 승인 받은 영국은 1921년 메카의 하심가 출신인 파이살(파이잘) 1세를 국왕으로 맞아들여서 위임통치를 실시 하였다
파이살(파이잘) 국왕은 그 뒤 여러 차례 영국과의 조약을 개정하면서 독립으로 나아갔으며 1932년에는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독립을 성취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과 전쟁 뒤의 혼란이 석유이윤으로 인해 경제가 윤택해지기 시작한 1953년에 젊은 파이살(파이잘) 2세가 즉위하였다
국왕의 지지 아래 누리 아사이드가 총리로서 독재적인 지도력으로 정국도 안정되는 것 처럼 되었다
그러나 1958년 7월 카셈소장이 이끄는 군사쿠데타로 국왕, 황태자와 많은 왕족과 총리등이 살해되도 공화국정권이 수립되었다.


(1)하심왕조(파이잘 1세 1885년-1933년)--친서방 왕조
파이잘 1세는 이라크 국황(1921년부터 1933년까지 즉위기간)이며 헤자즈 출생이다
그는 하심 집안 후세인의 아들이다
그는 이스탄불에서 자랐으며 1908년 마카(메카)로 돌아왔다
1916년에 시작된 아랍반란을 지휘, 1918년 다마스쿠스로 들어왔다
1920년 아랍. 시리아국민회의에서 추대되어 시리아 왕국의 국왕이 되었으나 프랑스군 침공으로 추방되었다
파리평화회의에 출석해 아랍국가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영국의 후원으로 1821년 이라크 국왕이 되어 1925년 헌법을 발포, 1930년 영국. 이라크와의 조약을 체결하여 1932년 국제연맹에 가입해 이라크 왕국의 <독립>체제를 정비하였다
1933년 앗시리아인(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 교도) 탄압문제를 둘러싼 무질서 속에서 죽었다
손자인 파이잘 2세(1935년-1958년, 재위 1939년-1958년)는 섭정 아브드 알루이라프와 함께 1958년 이라크혁명(군사쿠데타)으로 처형되었다
-1932년 10월 3일 파이살을 국왕으로 한 이라크 왕국 탄생, 영국으로부터 독립

(2)이라크혁명과 카셈소장,알프레드대령등 군부쿠데타(반서방노선 추구)
--1958년 7월 카셈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붕괴 공화국정권을 수립--
ㄱ.이라크 혁명
1958년 7월 14일 이라크에서 일어난 군사쿠데타로 하심왕제를 타도하고 공화제를 수립하였다 이라크혁명의 의의는 왕정을 타도함으로써 영국 군사지배와 봉건적 색채가 짙은 비민주주의적 국가체제를 와해시킨 데서 찾을 수 있다
제1차세계 대전 뒤인 1922년에 이라크는 영국의 위임통치국으로서 1932년부터는 하심왕국으로 출발하였으나 일관되게 중동에서 영국의 군사적 경제적 거점 역할을 맡아왔다
모술. 키르쿠크.바스라의 석유자원(앵글로이라크 석유회사의 지배)과 인도루트의 중간지점인 페르시아만의 바스라 기지는 중동을 지배하는 영국의 생명선이었다
이라크의 국경선을 획정할 때 쿠르드인 자치가 허용되지 않았고 또한 하심왕조 자체가 영국의 획책으로 억지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이라크의 다수파인 이슬람교 시아파 주민들의 의지도 무시당 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독립할때부터 저항이 끊이지 않았다
왕정은 왕족이나 유력한 부족지배층이 차지하는 군과 의회(친영 정치가 누리 아사이드를 중심으로 구성)를 기반으로 비민주적 체제를 만들었고 대외적으로 영국의 권익을 보장함으로써 체제의 안정을 추구해왔다
또한 유럽 군사블럭의 일환으로 중동의 민족운동 억압을 겨냥한 바그다드 조약(1955년 체결)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여 이집트혁명의 영향 아래 민족운동이 고양된 중동국가들 중에서 이라크는 반혁명의 거점이 되었다
그러나 1958년 쿠데타의 성공으로 이라크는 바그다드조약을 파기하고 아랍민족운동의 일익을 당당하게 되었다
쿠데타 지도자 A.K 카셈 육군소장(총리)은 사회개혁을 중시하여 1958년 8월 토지개혁에 착수하였다 반면 카셈총리는 쿠르드인의 자치요구를 경시하여 1961년 쿠르드인의 반란에 시달렷다
또한 같은 해 독립을 맞이한 쿠웨이트에 대하여 합병을 꾀하는 등 민족주의적 경향을 나타내었고 또한 쿠데타 뒤 혁명지도부 내의 대립도 표면화 되었다
아랍통일의 원칙을 주장하는 바트당세력이 이집트. 이라크 합병을 주장하는데 반하여 카셈정권은 공산당 세력을 유지하면서 아랍 안에서 이라크의 자주노선을 포기하지 않아 대립은 권력투쟁화 되었다
두 세력간의 항쟁은 1963년 알레프(아리프)등 아랍사회주의 바트당 세력에 의한 쿠데타로 발전하여 카셈총리의 처형과 공산당 좌익세력의 대량 숙청이라는 사태로까지 파급되었다
이라크의 자결과 민주주의의 과제를 담당하고 있던 이라크 혁명상은 이 시점에서부터 바트당 독재색이 짙은 이라크 관료국가의 모습(국가사회주의 체제)으로 변모하였다

ㄴ.카셈소장(1914-1963)
--아랍연합 불참과 반낫세르노선 그리고 자주노선 견지<군부와 공산당 지원>--
카셈 육군 소장은 이라크 군인. 정치가이다
그는 바드다드 출생이고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에 참전했고 1956년자유장교단 위원장이 되었다
1958년 7월 군사쿠데타를 지휘하여 친서방주의의 입헌군주제를 타도하고 공화정체를 수립하여 스스로 총리 겸 국방장관 대리가 되었다
그는 아랍민족주의를 주창하였으나 아랍연합과는 대립하였다 또한 국내의 바트당원 및 낫세르주의자와 대항하였으며 1959년 3월 모술에서 일어난 군부반란 후 한때 공산주의자와 손을 잡았으나 곧 결별하였다
1960년대 초 입헌군주제의 부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 그 이후로 쿠르드족의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1963년 2월 문민파(이랍민족주의 학생운동권 출신) 바트당원과 반공파 장교들의 쿠데타로 실각, 처형되었다

-1958년 7월 카셈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붕괴 공화국 정권을 수립

ㄷ.아레프(알레프)대령--아랍연합 참여와 낫세르 노선--아랍 바트당과 낫세르파 그리고 쿠르드 민주당 지원
알레프(아리프))대령은 1958년 카셈소장과 함께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하심왕조 파이잘 2세와 총리 아브드 알루이라프등 살해하고 영국식 입헌군주제 왕정을 붕괴시키고 공화국 정권을 수립했다
이라크의 최초의 반군활동은 1930년대부터 정권을 잡아 친서방 노선을 견지해온 보수세력이 1958년 7월 군부 쿠데타로 와해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보수세력의 친서방 노선에 불만을 품고 있던 카셈소장과 알레프 대령등은 군부쿠데타를 통해 국왕과 누리 파샤 수상을 살해하였으며 이로 인해 이라크의 왕정이 소멸됨과 아울러 아랍 최대의 친서방 정권이 붕괴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이라크내의 무정부 상태를 야기함으로써 결국 각 파벌간의 권력투쟁과 내전의 계기가 되었다
반서방 노선을 견지한 군부쿠데타가 발생하게 되자 미국과 영국은 주변국가에 군대를 파견하여 새로 출범한 이라크공화국을 압박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아랍권의 지도국가를 자처해온 이집트의 낫세르대통령이 아랍연합 구상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쿠데타 주체인 카셈과 알레프는 노선의 선택을 놓고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카셈은 아랍연합에 불참입장을 견지하였음에 반해 알레프는 참여를 주장한 것으로 분석된다 마침내 1959년 3월 낫세르 노선을 지지하는 군인들이 알레프 편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쿠르드 민주당이 이에 가세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군대와 공산당은 카셈측을 지원하였다 이로써 이라크내에서 내전이 본격화 되었다
이러한 내전은 각 파벌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이합집산하면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카셈측은 국지전으로 승리하여 정권을 장악하자 같은 편에 가세하였던 공산당이 정부 각료자리의 양보를 강력히 요구하였고 이로써 양측은 대립의 위치로 돌아서게 되었다
알레프측에 가담 하였던 쿠르드민주당도 결국은 독자노선을 걸었다
이렇게 하여 밀려난 쿠르드민주당과 공산당은 자신들의 무장집단을 결성하여 투쟁을 시작하였다 쿠르드 민주당은 쿠르디스탄 산악지역으로 후퇴하여 자신들의 독립과 카셈정권의 타도를 위한 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쿠르드족 분리독립운동의 시발이다
한편, 카셈정권은 반낫세르 투쟁활동을 강화하면서 이라크 석유회사의 국유화를 추진하였다 이에 서방국가들은 이라크로부터의 석유공급 중단을 우려하여 알레프대령으로 하여금 1963년 2월 바트당 장교단 중심의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이 쿠데타의 성공과 함께 카셈은 처형되었고 아랍바트당과 낫세르파의 지지를 받은 알레프 정권이 출범하였다 1963년 2월 바트당 장교단 쿠데타에 바크르장군과 후세인등도 가담하였다
그러나 공산당은 알레프정권에 반기를 들고 투쟁을 계속 하였다
이로써 알레프정부군과 바트당을 한편으로 하고 공산당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내전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내전에서는 알레프정권의 승리로 끝났으며 바트당 무장세력에 의해 공산당 세력 수천명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레프정권이 내전에서 승리하게 되자 그 실질적 후원세력인 바트당이 알레프를 대통령으로 옹립시키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독재정치를 시도하였다
이에 알레프정권의 또 다른 지지세력인 낫세르파가 바트당의 세력확정을 견제하면서 다시 투쟁에 나섰다 이로써 바트당과 낫세르파간의 내전이 일어났다 이 내전에서 바트당이 승리함으로써 이라크에는 1963년 9월 바트당 독재정권이 탄생 하였다
바트당정권도 내부의 분열로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아랍연맹 가입을 주장하는 범아랍세력과 이라크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비동맹세력이 대립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범아랍세력이 알레프와 연합하여 그 반대파에 있는 사디부수상의 추출을 기도하였고 그로 인하여 이라크는 다시 내전에 휩싸이게 되었다
결국은 대부분의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알레프가 사디 부수상파를 추방하고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1966년 4월 비행기 사고로 사망과 그의 형 모하메드 알레프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지만 이라크의 정국은 다시 혼란 상태로 빠졌다 1968년 7월 17일 하산 알 바크르 예비역 장군과 후세인등의 바트당 주도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여 버트당 중심으로 한 바크르정권이 탄생하였다

-1963년 2월 바트당 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리프 대령이 이끄는 새로운 정권 수립
-1963년 11월 알레프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바트당 세력을 숙청한 후 전 정권 장악
-1966년 4월 알레프대통령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 그의 형 모하메드 알레프가 대통령에 취임


(3)바스당과 반공파 장교들의 군사쿠데타와 바크르장군, 후세인
ㄱ.바크르 장군(Ahmad Hasan al-Bakr 1914-1982)
바크르장군은 이라크 군인이며 정치가이다 그는 이라크군 장교였으나 1958년 7월 카셈소장의 공화혁명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혁명 뒤 카셈정권과 대립하여 군에서 쫒겨났다
1963년 2월 알레프등과 혁명으로 카셈을 쓰러뜨리고 알레프 대통령 밑에서 바트당 정권의 총리가 되었으나 같은 해 1963년 11월 알레프대통령의 쿠데타로 바트당의 쿠데타로 바트당의 실력자들이 축출되자 권력 중추에서 멀어졌다
1966년 4월 아레프대통령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게 되면서 이라크의 정국은 다시 혼란상태로 빠졌다
아레프의 사망으로 권력공백이 발생하게 되면서 그때까지 잠복해 있던 대립이 한꺼번에 분출되었다 <ㄱ>낫세르파와 그 반대파의 대립 <ㄴ>바트당 주류파 내의 권력암투 <ㄷ>舊소련지지파와 아랍민족주의자 사이의 대립 <ㄹ>親서방파의 출현 <ㅁ>쿠르드족의 분리운동 전개 등이 그러한 것 들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1968년 7월 17일 바트당 우파와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하였으며 하산 알 바크르 장군이 실권을 장악하였고 1969년 7월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고 바트당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취임하고 요직을 장악하였다
바크르정권은 국내정치의 안정, 쿠르드족문제의 해결, 아랍 및 기타 우호조약국가들과의 관계 강화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정책을 발표 하는 한편, 아레프정권의 관료들을 포함한 다수의 정치인을 체포하는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면서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그는 바트당을 장악함과 동시에 국가원수, 수상, 최고사령관, 혁명평의회 의장 겸임등 전권을 장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서는 반대정파들의 투쟁활동과 쿠르드족등 소수민족들의 저항이 지속되었다
1970년 1월에는 바르크정권의 탄압에 반대하여 퇴역군인이 쿠데타를 기도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집권 바트당 내부에서도 분란이 지속되었다
1970년에는 다크리트 부통령, 1971년 9월에는 암마슈 부통령 및 샤이후리 외상이 권력에서 밀려난 사담 후세인 혁명평의회 부의장이 사실상 바트당 정부의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바트당의 관료출신인 후세인은 군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을 중심으로 관료체제를 강화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였다
후세인은 1976년 5월 전면적 개각을 통해 자신의 측근 세력을 대거 등용하면서부터 최고 실력자로 부상하였으며 1977년 1월 당 지도부의 대폭적 재편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1979년 7월 16일 바크르대통령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자 후세인이 마침내 대통령과 바트당 서기장 및 혁명평의회 의장직을 계승 하였다

-1968년 7월 17일 하산 알 바르크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 바스당을 중심으로 한 바르크정권 탄생
-1969년 1월-9월 바르크정권, 이스라엘 간첩 용의자 54명 처형
-1970년 1월 퇴익군인에 의한 대규모 쿠데타 발생
-1972년 4월 소련과 우호협력조약체결(기한 15년) 그리고 親동구권 노선을 강화하고 6월 이라크 석유(IPC)의 국유화 선언
-1975년 3월 이란 팔레비정부와 알제협정(아르제협정) 체결 그리고 이라크 영토내 쿠르드반군세력에 대한 이란정부의 지원 중지 성사
-1975년 6월 이란과 이라크 국경획정조약 조인
-1975년 12월 이라크 국내석유의 완전 국유화로 국가지배 확립

ㄴ.후세인(Saddam Hussain Takriti 1937sus-)
-후세인 고향 티크리트 인근 2m지하 땅굴서 잠자다 저항없이 투항한 후세인 자료-
http://www.pyung.co.kr/whosein.htm

후세인은 1937년 4월 28일생으로 바그다드 북부 티크리트 출생하여 이집트 카이로대학교와 바그다드 무스탄시리아대학을 졸업하였다
1957년 바트당(바스당)에 입당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했으나 1959년 카림 카셈 대통령의 암살 혐의, 1964년 알프레드 정권 전복 음모로 체포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1965년 옥중에서 국회의원 당선되었고 1968년 바크르장군등 군부와 손잡고 쿠데타에 참가하여 이듬해 혁명평의회 부의장,그리고 1979년 7월 16일 바크르대통령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자 후세인이 마침내 대통령과 바트당 서기장 및 혁명평의회 의장직을 계승하여 취임하였다1979년 8월 8일 반국가 음모죄로 바스당원 및 정부 고위관리를 체포하여 1일만에 전격적으로 처형하는 등 독재정치를 추구해 나갔다
1980년 이랍 강경노선에서 이탈하여 샤트 알 아랍수로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이란 공격에 나서 8년동안 이란. 이라크 전쟁을 치렀다
1990년 쿠웨이트를 무력침공 하였고 그 다음에 1991년 소련군부쿠데타를 지지했다

-1979년 7월 사담 후세인 대통령에 취임
-1979년 8월 8일 이라크 후세인 정부,반국가음모죄로 바트당 및 정부 고위관리등의 친(親) 구(舊)소련 공산당 당원 21명 처형 그리고 27명 이상 체포
-1980년 9월 17일 알제협정(아제르협정) 파기 선언과 22일 이라크군 이란국경 침략
-이란과 이라크 전쟁 1980년 9월부터 1988년 8월 <이라크와 이란군 100만명 전사자가 발생하였고 이라크에 의해 사용된 화학무기 1987년 5월 동안 가스에 감염된 이란인 2만 7천명 중에 2만에서 262명 사망했다>
-걸프전쟁 1990년 8월부터 1991년 2월 28일 <미국등 다국적군 전사자 125명과 이라크군 15만명 전사>
-1995년 1월 10일 PUK와 KDP 정전선언 및 양측간 충돌로 100명 사망
-1995년 2월 정부군과 반군간의 전투로 정부군 4,000여명 사망
-1999년 1월 15일 이라크공화국 경비대 소속 장성 3명 반란 혐의로 처형
-1999년 8월 20일 이라크정부, 이라크 공산당에 소속된 이라크군 36명 체포 공산당 소속은 군법에 의해 무조건 처형
-1999년 12월 22일 퇴역장군 1명과 현역 중령 2명 반란혐의로 처형
-2000년 1월 4일 PUK 쿠르드어 위성방송 시작
-2000년 5월 13일 이라크 반군, 대통령궁에 120mm 로켓공격 민간인 1명 사망
-2001년 1월 4일 이라크 군 장성 2명 처형, 한명은 후세인을 권좌에 올린 1968년 혁명을 후회한다는 소견을 밝힌 것이 이유로 처형된 것으로 알려짐
-2001년 2월 25일 바그다드에서 폭탄이 폭발하여 1명 부상, 반군의 소행으로 추정
-2001년 8월 16일 반이라크단체,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이라크내 위성방송 시작
-2001년 9월 26일 Jund al-islam, PUK가 점령하고 있는 지역마을을 공격하여 PUK소속 30여명 살해. Juand al-islam은 오사마 빈 라덴의 아프간 캠프에서 훈련받은 이슬람 쿠르드독립단체로 이란에 기지를 두고 있음
-2001년 10월 25일 이라크정부, 예비역 육군장교와 바트당 당원을 포함한 23명 처형
-2001년 11월 6일 사담 후세인 대통령의 후계자인 둘째 아들 쿠사이(Qussay)에 대한 보안요원 2명의 암살 기도 실패
-2002년 10월 27일 이라크 정부 선거, 선거를 취재하던 500여명의 외국언론인들을 추방 그리고 후세인 대통령 재추대
-2003년 3월 20일 부시대통령 대(對)이라크 개전 선언 그리고 미국, 영국, 한국, 스페인등 30여개국 이상 연합군 참전
-2003년 4월 9일 이라크 전쟁 15일 후 2003년 4월 9일 바그다드 완전 함락
-2003년 5월 1일 이라크전쟁 종전 선언(미국 영국 스페인등)
-2003년 7월 22일 후세인의 두 아들 쿠사이, 우다이 사망
-2003년 9월 3일 이라크 과도내각 설립
-2003년 10월 16일 유엔안보리, 이라크 재건에 관한 결의안 채택
-2003년 12월 13일 후세인 체포

ㄷ.바트당(아랍 바트 사회당)
1947년 다마스카스에서 창설한 범아랍사회주의 정당이다
아랍전체의 운동을 횡단적으로 하는 <민족지도부>와 나라별로 지부를 두는 <지역 지도부. RC=기지, 알카에다>가 있다 시리아의 바트당과 이라크의 지역 지도부는 후세인 대통령이 서기장이다 정원은 약 10만명이었다
정당은 바트당 중심으로 공산당. 쿠르드민주당등의 통일전선인 <민족진보전선>을 조직하고 있다
<민족진보전선=국민진보전선>은 1973년 7월 바트당과 이라크 공산당이 통일전선 조직으로 구성하여 창설되었으며 1975년 쿠르드 각 정당에 가맹했다 1979년 3월 이라크 공산당이 탈퇴하여 비합법화 됨
민족진보전선은 인민전선 투쟁조직이다

(4)이라크와 이란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은 1979년 7월 바크르 대통령이 퇴임한 직후 후세인 혁명평의회 부의장이 새 대통령에 취임햇다 1980년 9월 17일 후세인 대통령은 알제협정의 파기를 선언했다 1980년 9월 22일 이라크군은 이란군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1982년 6월 이라크군은 이란영내에서 철수했으며 1984년 3월 이란탱커에서의 공격을 개시하여 전화(電火)는 페르시아만을 뒤덮었다
1988년 4월에 이라크군은 빼앗긴 땅을 회복하고 8월 20일 정전(停戰)이 실현됐다
1990년 8월 이라크는 알제협정의 재수락등 이란측의 평화조건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다

(5)걸프전쟁(만안전쟁)
걸프전쟁은 1990년 8월 2일 이라크군은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만안위기는 1991년 1월 15일, 무력행사를 용인하는 안보리 결의 678호의 기한이 끝나 17일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다국적군이 이라크에 대한 공습을 개시 만안전쟁이 시작됐다
이라크는 이스라렐과 사우디아라비아에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하여 응전했으나 다국적군의 압도적인 공군력에 눌려 개전직후부터 패색이 농후했다
다국적군은 1991년 2월 24일에 지상전을 개시하여 이라크군은 패배했고 쿠웨이트는 이라크군 이 쿠웨이트 침략 6개월만에 1991년 2월 26일 해방됐다
부시 前 미국대통령은 1991년 2월 28일 전투정지를 명령했다
1991년 4월 2일 안보리는 항구적인 휴전결의 687호를 채택하고 이라크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1991년 4월 11일 정전(停戰)이 정식으로 발효됐다

-1991년 4월 11일 停戰 정식발효
-1992년 2월--6월 핵시설 파괴
-1992년 4월 화학병기 폐기
-1992년 8월 26일 북위 32도 이남 비행금지구역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등 UN상임이사국 4개국이 이라크후세인정부에게 정식통보>
-1992년 8월 27일 오전 10시 15분부터 남부지역 비행금지구역 발효 <미군의 조기경계관제기등 초계작전>
-1992년 12월 27일 민주당 클린턴정부 이라크 재공습(비행금지구역 침범한 이라크 공군 미그전투기 2대 발견 그리고 1대 격추, 이라크 재공습)
-1993년 1월 17일 클린턴정부 핵병기 관련시설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 공격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연합군 이라크 남부와 북부의 비행금지구역 공습
-1994년 10월 초순 이라크군 쿠웨이트지역으로 남하 그리고 안보리 경고, 미국 해군 함선 4척와 2,000여명 해병대 대원 파견
-1993년 10월 13일 러시아 코즈이레흐외상 이라크 방문과 후세인 회담 <석유금지조치해제 조건으로 쿠웨이트 승인>
-1996년 5월 20일 이라크가 6개월마다 20억달러어치의 원유를 수출하고 그 대가로 식량과 의약품을 구입토록하는 유엔의 석유-식량 프로그램 서명

(6)이라크전쟁---이라크 자유작전(自由作戰)<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고후세인정권 타도하여 이라크 주민 보호와 자유보장, 세계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뜻>

-1998년 12월 16일-19일 클린턴정부 사막의 여우작전
미국정부, 아라크에 500여발의 미사일 공격
-낫세르 아랍 민족주의와 아랍통일론자 등장--빈 라덴등의 알카에다 그리고 후세인의 바트당
<반제국주의, 반군주제 투쟁으로 사우디등 왕정타도, 반식민주의, 반시오니즘, 사회주의, 세속주의 이슬람근본주의로 회교국가수립, 범이랍주의 이랍통일등>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과 워싱턴에서 초대형 동시 다발 테러 공격 발생
-2001년 11월 26일: 조지 W 부시대통령, 이라크에 무기사찰 재개 거부시 무력 사용 가능성 경고
-2002년 9월 9일 영국전략문제연구소(ISS) 이라크가 수개월내 핵무기를 제조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
-2002년 9월 16일 이라크정부, 무기사찰단 복귀 무조건 수용
-2002년 10월 2일 미국정부, 이라크 대통령궁 무제한 사찰 요구
-2002년 10월 7일 부시대통령 전국 연설을 통해 후세인이 무장해제하지 않으면 미국 <국제연대를 이끌고 무장해제 시킬 것>이라고 공언
-2002년 10월 10일-11일 미국하원은 296대 133, 상원은 77대 23으로 부시 대통령이 필요할 경우 무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
-2002년 10월 12일 미국 육군 제5군단 및 해군 제1해병원정대(MEF)사령부 요원이 쿠웨이트로 이동 명령
-2002년 10월 21일 미국, 이라크 무장해제 결의안 유엔안보리에 제출
-2002년 10월 15일 후세인 7년 임기의 대통령 선거에서 100% 참석 100%지지로 당선
-2002년 11월 8일 유엔안보리, 이라크 결의안 만장일치로 채택
-2002년 11월 13일 이라크정부, 유엔결의안 전격 수용
-2002년 11월 27일 유엔무기사찰단, 이라크 사찰 재개
-2002년 12월 7일 이라크정부, 1만 2천쪽 분량 무기실태 보고서 유엔에 제출
후세인, 90년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공식사과
-2003년 1월 16일 유엔사찰단, 이라크측 보고서에 누락된 빈 화학탄두 11기 발견
-2003년 1월 27일 한스 블릭스 유엔무기사찰단장, 이라크가 유엔무장해제 결의를 수용하지 않았다고 보고
-2003년 1월 28일 부시대통령 국정연설 통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은닉 및 알 카에다와 연계 주장 미국의 對 이라크 군사행동 경고
-2003년 2월 10일 프랑스,독일, 러시아등 이라크 사찰 강화 요구하는 공동선언 발표
-2003년 2월 12일 걸프지역 운집한 미군 병력 총 15만명 육박
-2003년 2월 14일 블릭스 단장, 이라크에서 대량파괴무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 안보리 이사국 대다수 사찰연장 지지
-2003년 2월 19일 나토, 이라크 전쟁 대비한 터키방어계획 승인
-2003년 2월 24일 미국 영국 스페인등, 이라크가 평화적 무장해제의 마지막 기회 놓쳤음을 선언하는 2차 결의안을 안보리에 제출
-2003년 3월 1일 이라크정부, 유엔사찰단이 명령한 알-사무드 2기 미사일 파기 시작, 터키의회 이라크전 투입 미군 주둔 허용안 부결
-2003년 3월 7일 미국 영국 스페인등 3월 17일을 이라크 무장해제 시한으로 못박는 최후통첩 수정 결의안을 안보리에 제출
-2003년 3월 16일 미국 영국 스페인 정상, 아조레스 긴급회담
-2003년 3월 17일 미국정부 유엔 2차 결의안 철회 그리고 부시대통령 대국민 담화 통해 후세인 대통령에게 24시간안에 <이라크 떠라> 최후통첩
미국 전국적으로 테러비상체제 돌입
-2003년 3월 18일 이라크 지도부, 부시대통령의 최후통첩 공식거부
이라크 활동 중인 유엔무기사찰단원 136명 전원 이라크 철수, 영국의회 對이라크 무력사용 승인
-2003년 3월 19일 이라크 의회, 부시대통령의 최후통첩 만장일치로 거부
-2003년 3월 20일 부시대통령, 對 이라크 개전 선언<이라크 자유작전>
-2003년 4월 9일 바그다드 함락
-2003년 5월 1일 부시 미국대통령과 토니 블레이어 영국 총리, 이라크 전쟁 종전 선언
-2003년 9월 3일 이라크과도내각 설립
-2003년 12월 13일 후세인 체포
-2004년 6월 1일 이라크임시정부 출범 야와르 대통령, 이야드 알라위 수상

3.이라크 바트당 아랍민족주의 노선
아랍민족주의는 아랍주의 또는 아랍통일을 의미한다
1954년 2월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낫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주창한 이론이 이랍민족주의이었다
"낫세르의 아랍민족주의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실행하면서 아랍급진주의자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반군주제(반왕정), 반식민주의(반제국주의), 반시오니즘(반이스라엘투쟁), 사회주의, 세속주의, 범아랍주의(아랍통일)등 여러 이데올로기들을 합친 것이다"
낫세르의 추종자로 이라크의 후세인과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팔레스타인의 야세르 아라파트, 시리아의 하피즈 알- 사다드 같은 아랍권의 1970년대 젊은 지도자들이 이러한 낫세르의 주장에 고무된 인물들이다
낫세르의 추종자들의 아랍통일과 반군주제 사회주의 운동도 이라크 바트당과 후세인의 패권주의에 대한 아랍인 스스로 전쟁불안(내전에 불안), 미국등의 연합군의 이라크 점령등으로 60년동안 투쟁해온 운동이 국제적 질서에 편입되어가고 있다 아랍인은 중동지역(서남아시아지역)에 전체 주민 60%를 차지하고 있다 서남아시아지역에도 아랍인, 터키인, 페르시아인(이란인), 쿠웨이트인, 이집트원주민, 쿠르드인, 유태인등으로 다양하면 언어도 아랍어가 전체 서남아시아인 50%을 차지하고 있다 서남아시아 국가들이 고도소비사회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공존 복지사회로 나감으로써 언어상으로 각 지역장벽으로 유럽처럼 다양 문화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아랍통일이나 아랍민족주의는 아랍인 이외 쿠르드나 페르시아(이란인), 터키인,쿠웨이트 원주민, 이집트원주인, 유태인들을 학살하는 한편 다른 종족에 대한 말살행위이다 그리고 아랍민족주의와 아랍통일이 반군주제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할때 사우디나 요르단 그리고 쿠웨이트등 왕정국가 아랍인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1)이집트와 이라크 합병론---이집트 낫세르와 1958년 7월 카셈 알레프등의 왕정타도와 공화국 수립론자 중 낫세르파(바트당 이랍민족주의자 그룹)
(2)쿠웨이트와 이라크 합병론---이라크 바트당과 후세인등
(3)낫세르주의와 아랍통일 그리고 왕정타도와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이론--빈 라덴등의 알카에다 이론
ㄱ.사우디 왕정타도와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
ㄴ.아랍주의와 아랍통일--아랍인은 지배자로 규정하여 페르시아인(이란인), 유태인, 쿠웨이트인, 쿠르드인, 터키인등은 피지배자로 규정
ㄷ.반제국주의 또는 반식민주의 운동
ㄹ.세속주의와 이슬람교 국가 수립(이슬람근본주의)
ㅁ.범이랍주의--무력으로 아랍통일 지지
아랍인은 사우디(90%),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등지에 다수민족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이란, 터키, 아프가니스탄, 리비아등지에서는 소수민족으로 분포하고 있다
ㅂ.반군주제와 반제국주의 운동


4.후세인정부의 대량살상무기 자료와 후세인의 범죄행위 자료
(1)후세인정부의 대량살상무기 자료
ㄱ.이라크정부 자료
(ㄱ)핵시설 파괴--국제연합과 국제원자력기구는 이라크의 대량파괴병기의 폐기를 요구하는 UN결의 687호에 의거하여 1991년에 합동사철을 계속요구하자 이라크측은 1992년 2월 스커드미사일의 파괴를 거부해오던 태도를 변화시켰다 이로 인해 안보리는 이라크가 파괴를 방해할 경우에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영국등의 국제적 압력에 의해서 이라크측은 1992년 3월 21일 미사일 제조시설의 파괴에 동의, 대량파괴병기에 관련된 새로운 정보를 UN에 제출하고 파괴거부의 방침을 전환했다
국제원자력기구는 1992년 4월 7일 이라크정부가 핵 개발을 중단하고, 알아실에 있는 핵시설의 파괴에 동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12일 동안 폭탄작업을 진행시켜 1992년 6월 1일에는 해체작업을 완료했다
(ㄴ)화학병기 폐기--유엔 화학병기 사찰단은 1992년 4월에 화학병기탄두 4만발, 화학병기 약제 2,000-3,000만톤을 바그다드 교외에 집적시켰다 사찰단의 만리단장은 1992년 4월 9일 화학병기에서 약품류를 추출해 내는데 반년이 걸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스타드 가스, 신경가스등의 관련물질을 처리하기 위한 처리 플랜트를 건설 중에 있어서 폐기완료에는 1년 전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ㄷ)1993년 1월 17일 미국 민주당 클린턴정부 바그다드 교외의 자아파라니에에 있는 <핵 병기 관련 시설>을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로 공격
(ㄹ)대량파괴병기 장기 감시카메라 설치 합의--유엔의 이라크 대량파괴병기 폐기 특별위의 에케우스 위원장은 1994년 7월 대(對)이라크 석유금수조치 해제로의 최후의 조건으로 남아 있는 대량파괴병기의 장기감시를 시작하기로 이라크측과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10월에 감시카메라 설치작업이 완료했지만 이라크측의 병기 감시를 위한 협력현황을 조사하는데에만 반년정도가 필요하다
ㄴ.유엔과 연합군 자료
(ㄱ)1981년 6월 7일
이스라엘 공군의 오시라크 핵원자로 공격(바빌론작전)
(ㄴ)1987년 5월
이라크정부에 의해 사용된 화학무기 1987년 5월 동안 가스에 감염된 이란인 2만 7천 명 중에 2만에서 262명 사망
(ㄷ)1988년 3월 28일
이란-이라크전쟁에서 이란을 지지하는 쿠르드족 마을에 화학무기 사용 5천명 학살
(ㄹ)1991년 걸프전 당시
이라크군은 1991년 39발의 스커드미사일을 발사해 이스라엘 시설을 파괴하고 2명의 이스라엘인을 숨지게 했다
(ㅁ)2002년 9월 8일
체니부통령,후세인이 핵폭탄을 제조하려 하며 미국이 그 표적이 될 것이라고 주장
(ㅂ)2002년 9월 12일
부시 대통령,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안전보장이사회의 이라크 결의안 채택 필요성을 강조, 이라크에 모든 대량살상무기의 즉각 폐기를 촉구
(ㅅ)2003년 1월 16일
유엔사찰단, 이라크측 보고서에 누락된 빈 화학탄두 11개 발견
(ㅇ)2003년 1월 27일
한스 블릭스 유엔무기사찰단장, 이라크가 유엔무장해제 결의를 수용하지 않았다고 보고
(ㅈ)2003년 2월 14일
블릭스 단장, 이라크에서 대량파괴무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 안보리 이사국 대다수 사찰연장 지지
(ㅋ)2003년 3월 1일
이라크, 유엔사찰단이 명령한 알-사무드2 기 미사일 파기 시작
(ㅎ)유엔무기사찰
후세인은 1990년 무조건적인 무기사찰을 요구한 유엔결의를 위반

이라크 후세인정부가 연합군의 이라크 침공 전후 대량살상무기(WMD)부품과 중거리 탄도 미사일을 해외 반출의혹과 연합군 공격때 폭격으로 매몰 가능성, 미확인 보관설등으로 판단할 수 있다
유엔무기사찰단의 데메트리우스 페리코스 단장 직무대행과 사찰단 보고서에 따르면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한 고철 야적장에서는 SA-2 지대공 미사일이 발견됐으며 요르단의 한 고철 야적장에서도 SA-2지대공 미사일 엔진 20기와 미사일 고쳬연로 부품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페리코스는 월평균 1천t의 고철이 유럽과 중동으로 반출되고 있다면서 이라크에서 반출되는 고철의 행선지에는 요르단, 네덜란드, 터키등이 포함돼 있다고 덧붙였다

(2)후세인의 범죄행위
ㄱ.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전대통령 암살미수 사건
쿠웨이트의 국가치안재판소는 1994년 6월 전년의 부시 미국 전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에 관여한 죄로 기소되었던 이라크인 5명의 피고와 쿠웨이트인 1명의 피고인에게 사형판결을 언도했다
ㄴ.이란-이라크 전쟁
이란혁명 직후인 1980년 일련의 국경분쟁 끝에 이라크가 이란을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이 전쟁에서 최소한 100만명이 사망했다
이란정부는 생포된 후세인을 포괄적 전쟁범죄혐의로 기소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이라크 국내법정이 아니라 국제전범재판에 후세인을 회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전쟁에서 최소한 2만명의 이란 군인들이 이라크가 사용한 겨자가스 및 신경작용제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란의 일부 인사들은 미국이 이라크를 지원헸기 때문에 미국 역시 후세인과 함께 법정에 서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ㄷ.쿠르드족 학살
이라크 북부에 거주하고 있는 쿠르드족의 독립운동이 절정에 달한 1988년 이라크군은 쿠르드족 마을 할라브자에 청산가리 가스를 살포해 약 5천명의 민간인을 독살했다 같은 해 2월부터 9월꺼지 진행된 이른바 <안팔작전>을 통해 이라크군은 약 10만명에 이르는 쿠르드족 성인 남자들과 소련들을 체포해 처형했다
알리 하산 알-마지드 장군은 당시 쿠르드족 마을들에서 사람들을 쫒아내기 위해 화학무기를 사용해 <케미컬 알리>란 악명을 얻었다
이라크는 수십 년간 계속된 쿠르드족 탄압정책을 펴 쿠르드족 수천 곳의 쿠르드족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정착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1991년 제1차 걸프전이 끝난 직후 이라크 군은 쿠르드족 저항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펴 수만명의 쿠르드족 주민들을 학살했으며 이 과정에서 100만여명의 난민이 발생해 인도적 재난을 맞았다
(ㄱ)1988년 쿠르드족에 대한 독가스 인종청소
사담 후세인 前대통령은 1988년 2월부터 9월까지 북부 쿠르드족에 대한 대대적인 추방작전을 명령했다 안팔작전으로 알려진 이 작전은 그의 조카인 알리 하산 알-마지드 장군이 주도했다
쿠르드족 마을 수백개가 완전히 파괴되고 사람들은 거기서 쫓겨났다 여기에서는 화학무기도 사용됐다
목격자 증언 1991년 걸프전 이후 획득한 이라크 보안문서, 국제인권단체의 정보등을 종합하면 당시 모두 18만 2천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ㄴ)1988년 할라브자에서 화학무기로 쿠르드족 공격
안팔 작전 중인 1988년 8월 이라크군은 겨자와 신경가스 혼합 화학무기로 쿠르드족으 할라브자 마을을 공격했다 여자.어린이.영아등을 포함해 민간인 약 5천명이 하루에 사망했다
알리 하산 알-마지드 장군은 당시의 화학무기 공격을 명령함으로써 <케미걸 알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ㄷ)1983년 쿠르드족의 바르자니 부족 살해
아라크 보안군은 1983년 7월 북부 아르빌주(州)에서 쿠르드족의 바르자니 부족 약 8천명을 체포햇다 이들은 이라크 남부로 보내졌으나 그 이후 생사여부가 알져지지 않고 있다
(ㄹ)1991년 걸프전 이후 쿠르드족과 시아파 봉기 탄압
ㄹ.1990년 쿠웨이트 침공
후세인은 1990년 8월 전격적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했고 이로인해 1991년 1월 걸프전이 시작됐다 이라크 군인들은 포로들을 고문하고 처형했으며 미국의 개입으로 후퇴하면서 쿠웨이트 시티를 약탈하고 700여개 이상의 유정에 방화했다
이라크는 걸프전 이후 이라크 정부에 반기를 든 이라크남부 시아파 이슬람교도(모슬렘)들과 북부 쿠르드족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ㅁ.이스라엘에 대한 스커드 미사일 공격
이스라엘정부는 1991년 걸프전 당시 스커드 미사일로 이스라엘을 공격한 후세인을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샤울 모파즈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또 팔레스타인 자살 폭탄 테러범들에게 자금을 댄 혐의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라크군은 1991년 39발의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해 이스라엘 시설을 파괴하고 2명의 이스라엘인을 숨지게 했다
1969년 1월-9월 바크르정권때 이스라엘 간첩 용의자 54명 처형했다 그 당시 바트당 2인자가 후세인이었다
ㅂ.고문.처형. 살인등 행위
이라크 전역에서 수십만명의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매장지가 270여개소가 발견됐다 유엔인권위원회는 이라크 정권이 <반체제 인사들에게 조직적으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고문을 가하고 처형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고문방법으로는 구타와 강간, 화형, 목메달기등 각종 잔인한 수단이 동원됐다
이라크는 1979년 이란혁명을 지지했던 시아파교도 수천명을 체포했으나 이들의 행방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90년에는 물이 풍부한 이라크 습지에서 거주하는 아랍인들이 반체제 세력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이라크군은 5천년간 삶의 터전이 됐던 농사지대를 파괴했다
후세인이 권력을 잡은 1979년에는 수백명의 바트당 관계자들이 투옥되거나 처형됐다
ㅅ.유엔무기사찰 유엔결의 위반
후세인은 1990년대 무조건적인 무기사찰을 요구한 유엔결의를 위반했다
후세인은 이밖에 이라크 전쟁 종전선언이후 이라크 저항세력의 연합군 공격행위에 연루된 형의를 적용받을 가능성도 있다
ㅇ.후세인과 알카에다 연계(케넥션)
ㅈ.석유와 식량 프로그램 거액착복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부는 유엔 <석유-식량 프로그램> 따른 물품구입과 석유수출 과정에서 거액을 체계적으로 착복해왔다는 자료가 나왔다
후세인정부는 <석유-식량프로그램>에 의한 식량과 의약품, 석유산업 유지부품등을 구입하면서 구매가를 부풀리고 공급업체들로부터 차액을 현금이나 외국에 개설된 비밀계좌 송금으로 돌려받았다는 사실이 후세인정부 관련 문서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후세인정부는 석유를 수출할때는 반대로 가격을 최대한 낮추는 수입업체들로부터 비밀에 웃돈을 같은 방식으로 건네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ㄱ)킥백--물품 대급 일부에서 떼낸 상납금
-공급가격보다 10% 부풀리는 가격으로 물품구입 그리고 10% 킥백으로 후세인정부에 지불함
시리아업체가 밀을 이라크 후세인정부에 5천 750만 달러어치 수출하던 그 시기에 15% 킥백을 지불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예--1997년 전후 미국 휴대폰이 10달러(한국돈 12,000원)라면 킥백으로 한국에서는 13,200원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판매 그리고 정권 비자금 1,200원 착복>
-석유등을 수출할때는 가격을 10%이상 낮추는 방식으로 수입업체들에게 비밀 옷돈을 받아왔다
<예--2004년 전후 한국 휴대폰이 40만원이라면 킥백으로 외국 수입업체에게는 30만원에 수출하면서 휴대폰 제조사는 4만원이상 리베이트를 챙기는 수법>
(ㄴ)이라크 후세인정부는 2000년도 중반부터 3연간 킥백으로 20억달러를 착복했다



5.이라크 임시정부와 주요 인물
-이라크 임시정부 알 야와르 대통령과 알라워 총리
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406/200406280366.html
(1)이라크 임시정부 알 야와르 초대 대통령
일 야와르(46세) 이라크 임시정부 대통령은 이라크 모술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수니파부족인 샤마르 부족장의 아들이며 샤미르 부족 지도자 출신이다 샤미르 부족은 시아파와 수니파가 섞여 있으며 북쪽으로는 시리아에서 남쪽으로 사우디, 쿠웨이트까지 널리 분포돼 있다
그는 이라크 북부 도시인 모술에서 태어나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엔지니어출신으로 통신회사 사업가로 15년 동안 활동하다 이라크전쟁으로 사담 후세인 전(前) 정권이 붕괴하자 지난 2003년 6월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라크과도통치원회(IGC)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지난달 중순 당시 이라크과도통치위원회 (IGC)의장이던 에제딘 살림이 차량폭탄 테러로 사망하는 바람에 순번제 의장직을 승계 하였다
그리고 2004년 6월 1일에 일부 과도통치워원회 위원들의 강력한 추대에 힘입어 이라크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야와르(46세) 대통령은 2004년 8월 2일 이라크 임시정부 네스린 바르와리(34세) 공공사업부 장관과 결혼식을 치렀다
바르와리 장관은 이야드 알라위 총리 내각에 합류한 7명의 쿠르드족 출신 장관 가운데 한명으로 마수드 바르자니가 이끄는 쿠르드민주당 소속이다
바르와리 장관은 불과 수개월 전 동료들과 함께 암살공격을 받았으나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으며 당시 다수의 동료들이 부상했다 수니 무슬림인 그녀는 1991년 바그다드대학교 공대를 졸업했다..

(2)이라크임시정부 이야드 알라위 총리
이야드 알라위(59세) 총리는 1945년 시아파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영국에서 신경정신학을 공부한 의사로서 청년시절 지하운동단체이던 바트당에 가입, 정보정교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사담 후세인이 득세하자 1971년 이라크를 떠나 레바논과 영국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1978년 영국에서 암살기도로 중상을 입기도 한 그는 1991년 런던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영국 정보기관의 지원 속에 사담 후세인 정권 타도를 위한 후세인정권 당시 망명한 군 장교가 주축이 된 조직인 이라크민족합의(INA)을 창설한 이후 CIA와 손을 잡고 무장 조직원을 이라크에 잠입시켜 정보기관을 공격하는 등 반정부활동을 벌였으며 1996년 CIA가 지원한 쿠데타 시도에 간여하는 등 후세인 정권 축출을 수 차례 시도했다
2003년 4월 미군의 바그다드 함락 후 망명생활을 청산한 그는 그해 10월 이라크과도통치원회(IGC)의장을 맡아 이라크군과 경찰, 정보기관 창설등 안보분야에서 주도적인 활동해 왔다
이야드 알라위 총리는 2004년 6월 1일 이라크임시정부 실권자인 총리로 선출되어 대내외적으로 행정수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3)부통령
부통령은 대통령과 함께 내각결정 사항을 만장일치로 승인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ㄱ.이브라힘 알 자파리(57세) 부통령--시아파 정당인 <다와당> 지도자
ㄴ.로우시 샤웨이스 부통령---쿠르드족 출신 정치지도자
(4)부총리와 내각
바르함 살리(44) 국가안보담당 부총리와 호시야르 제바리(51세) 외무장관, 하젬 샤알란(57세) 국방장관등이 모두 쿠르드족 출신이다


6.이라크임시정부가 나아갈 방향
(1)후세인정부의 인민민주주의 헌법과 사회주의 경제방식을 철폐(청산)하고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복지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소비가 투자라는 고도소비사회로 이행돼 나아가야 할 것이다
(2)자유와 인권을 중시하는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해야 한다
(3)아랍 바트사회당(바트당)의 노선인 아랍민족주의(아랍통일) 철폐하고 다양한 민족이 공존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국가제도 이라크연방공화국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랍민족주의는 패권주의이며 중동전쟁을 초래한 급진적 민족주의 운동으로 회교근본주의와 함께 세계통합에 저해하는 세력들이다
(4)아랍인 중심의 조직 아랍연맹도 해체하고 서남아시아 국가내 아랍인,이집트인, 쿠웨이트인,유태인과 터키인, 이란인(페르시아인), 쿠르드인(페르시아계)등도 인정하는 서남아시아국가연합 창설이 필요하다 아랍인 중심의 결성한 아랍연맹이 아랍민족주의를 부추기고 기타 민족을 말살하는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중동지역 국가들은 국교를 철회하는 것이 올바른다
회교국가 표방은 기타 종교인들을 적으로 규정함으로 종교전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중동지역 국가만이 종교의 국교화를 하고 있다
미국,유럽이나 동아시아 국가들은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고 있다.
서남아시아 여러국가들이 화교 국가종교를 철회할때 중국과 유럽이 연결할 수 있는 교량적 선진 문화국가로 나아갈 수 있으며 중개무역상 국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7.이라크 관련 자료 사이트
-백악관 이라크 주요 자료 http://www.whitehouse.gov/infocus/iraq
-국방부 이라크전 파병<이라크전 파병의의, 파병부대의 임무와 성격 소개>
http://www.mnd.go.kr/cms.jsp?p_id=00115010000000
-이라크 파병 여군 http://cafe.daum.net/forclub
-이라크 파병 자이툰 부대(자이툰 부대 아내와 애인의 공간) http://cafe.daum.net/zaytun
-駐이라크 대한민국 대사관
http://www.mofat.go.kr/mission/emb/embassy.mof?si_dcode=IQ_IQ
-CNN이라크특집--이라크 전쟁 특집 뉴스와 이라크지역 긴급 자료
http://edition.cnn.com/SPECIALS/2003/iraq
-일렉트로닉 이라크-이라크 관련 소식 및 컬럼 이라크 문화, 미디어, 국제적 도움등의 관련뉴스
http://electroniciraq.net
-KBS 이라크전 뉴스 속보--이라크전 관련 뉴스 속보 상황일지 제공
http://iraq.kbs.co.kr



-중동지역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횃불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이어 영국 수상 그리고 몽골.폴란드등 34개국 이라크 평화유지군, 중국등 유엔 다수 이라크 전후 복구 지원국가, 이라크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자료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