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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타:개성지역 개요(槪要). 연구 자료과 개성공단 자료 본문

Guide Ear&Bird's Eye/유엔평화유지군(연합군-한국 국방부,NATO)

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타:개성지역 개요(槪要). 연구 자료과 개성공단 자료

CIA bear 허관(許灌) 2006. 8. 8. 22:25
개성은 38도선 이남으로 국제법상(유엔입장)으로는 대한민국의 땅이며 정전협정상으로는 조선민주인민공화국의 땅이다
그러므로 남과 북이 정전협정에서 평화협정으로 체결될 때는 개성이 조선민주인민공화국 땅이 아닌 대한민국 땅이다
-남과 북은 국제법상(유엔입장) 남쪽은 대한민국이며 북쪽은 조선민주인민공화국이다 하나의 민족이면서 국제법상 두 개의 나라가 운영되는 형태이다 아랍민족이 다수의 국가로 운영하거나 아리아민족이 3개 국가를 운영하는 것와 비슷한 입장이다
예:한민족<대한민국과 조선민주인민공화국>, 아리아민족(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등), 아랍민족(사우디, 이라크, 쿠웨이트, 이집트등)
-북위 38도선은 한반도의 중부를 횡단하는 선인데 8.15해방이전에는 이 선을 기준으로 북반부는 만주에 주둔한 일본의 관동군사령관의 지휘하에 있었고 남반부는 조선군사령관의 관할 아래 있었다
1945년 제2차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한 후 미국과 소련양국이 한반도을 분할 정령한 경계선이다 개성은 38도선 이남으로 미군의 통치를 받았고 대한민국 건국 후 개성시로 운영되어왔다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침을 감행하여 개성을 점령하였고 그 후 연합군 힘으로 개성을 수복했지만 중국군의 참전으로 또 다시 개성이 북한 땅이 되었다
1951년 3월 또 한 차례 국군과 연합군이 38도선 탈환작전을 추진하여 38도선을 넘어서자 이에 당황한 소련은 유엔대표부 Y.A 말리크를 통해 1951년 6월 2일 북위 38도 선상에서의 휴전을 제의해왔다 유엔군 사령관 M.B 리지웨이는 그해 6월 30일 휴전제의를 받아들여 7월 8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개막되고 10일에 유엔군수석대표 해군준장 조이와 북한 수석대표 남일이 참석한 본회의가 열렸다 그런 과정에서도 중국 인민군은 이른바 4월 5월 춘계대공세를 감행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 뒤 1951년 11월 회담장소를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옮겨 38도선이 아닌 전선을 기초로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그때부터 개성은 대한민국 땅이 아닌 조선민주인민공화국 땅이 되었다

1.개성직할시
(1)위치--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한 직할시
북쪽은 황해북도 토산군(兎山郡). 금천군(金川郡) 및 강원도 철원군(鐵原郡), 서쪽은 황해남도 배천군(白川郡), 동쪽과 남쪽은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경기도 연천군(連川郡). 파주시(坡州市)와 접해 있다
(2)인구--40만 4,000명(1991년)
(3)개성의 역사(連革)
고구려 때 부소갑(扶蘇岬), 통일신라 때 송악(松嶽)으로 불리다가 919년(태조 2년)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개성군(지금의 개풍군)을 합하여 개주(開州)라고 하였다
935년 신라를 복속한 뒤 국도(國都)로 하였으며 960년 (광종 11년) 개경(開京)으로 995년 개성부(開城府)로 고쳤다
1010년(현종 1년) 거란의 침입으로 폐허화되자 1018년에 부(府)를 폐지하고 현령(縣令)을 두어 정주(貞州). 덕수(德水). 강음(江陰)의 3현으로 관할하게 하였다가 1062년(문종 16년) 개성부사(開城府使)를 부활시켰고 정주(貞州).덕수(德水)등 11현을 예속시키고 황해도의 우봉군(牛鳳郡)을 이속시켰다 1308년(충렬왕 34년) 개성부로 승격시켰고 따로 개성현령을 두어 도성 밖을 다스리게 하였다
조선이 개국하여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뒤 관제개편으로 1405년(태종 5년) 개성유후사를 1438년(세종 20년) 개성유수를 두었으며 1467년(세조 13년)에는 경기(경기도)에 예속시켰다
1892년 (고종 33년) 관찰부로 개칭하였다가 1년만에 폐지하고 다시 개성부윤을 두었다
1906년 부윤을 폐지하고 군수를 임명했으며 1914년 송도면으로 개칭하였다가 1930년 개성부로 하였다 광복 후 남한( 대한민국정부)은 1949년에 개성시로 개칭하였으며 1951년 개풍군을 병합하여 개성지구라 하고 중앙행정기관에 직속시켰다
1953년 휴전협정으로 북한지역이 되었으며 1955년 개풍군. 장풍군.판문군등을 포함하여 직할시가 되었고 1960년 황해남도와 강원도의 일부 지역을 편입되었다 1995년 현재 개성시. 장풍군. 판문군. 개풍군의 1시 3군으로 되어 있다
*扶--도울 부
*蘇--깨어날 소
*岬--산허리 갑
(4)개성의 자연
북에서 남으로 마식령(馬息嶺) 산맥(山脈)의 끝 부분이 뻗어 있고 여기에 천마산(天摩山). 송악산(松嶽山). 용수산(龍岫山). 진봉산(進鳳山)등이 솟아 있다 남쪽은 한강(漢江)과 예성강(禮成江)의 하류지역으로 개성분지를 이루며 서남부에 풍덕평야. 삼성평야. 신광평야등 넓고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다
개성시의 남부경계에서 한강. 임진강(臨津江).예성강이 합류하고 시내로는 임진강의 지류인 사천(砂川)이 흐른다 개성시 일대는 시생대(始生代) 하부원생대(下部原生代) 하부고생대(下部古生代) 신생대(新生代) 지층과 중생대(中生代)에 관입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금. 아연. 구리. 석회석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개성시 면적의 반 이상이 산림이며 소나무가 주종을 이룬다
기후는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이나 대체로 따뜻하고 습윤하며 연평균 기온은 10.3도, 연강수량은 1300-1400mm이다
*岫--산굴 수
(5)개성의 산업
토양이 비옥하고 수자원이 풍부한 데다 따뜻한 기후조건까지 갖추어 북한의 주요 벼 생산지로 꼽힌다 쌀. 보리등의 주곡 외에 콩. 수수등의 잡곡이 생산되며 원예농업이 발달하여 배추. 참외. 사과. 감. 복숭아등의 생산이 많다 예부터 이름 높은 개성인삼은 주로 개풍군과 판문군에서 재배되며, 인삼가공업이 활발하여 인삼탕, 꿀삼, 인삼정액, 인삼주사약등 100여 가지의 제품이 개발되었다
공업은 방직. 편직. 피복생산이 전국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식료. 일용품공업등도 활발하다 방직공업이 발달하여 60여 가지의 천을 생산햐 러시아 등지로 수출하나 외화획득은 저조하며 식품으로는 개성간장, 개성고추장이 알려져 있다
그 밖에 주요 생산시설로 금속제품공장, 자동용품공장, 기계공장, 유리공장, 원구생산 협동조합, 학용품생산협동조합등이 있다
(6)개성의 사회.문화
개성시의 중심거리는 송도거리, 청년거리, 통일거리등으로 불리며 주요시설로는 고대국가의 노예제적 계급관계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는 개성역사박물관을 들 수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개성의과대학, 개성교원대학, 개성공업대학 및 13개 고등중학교가 있다 광복 당시만 해도 서울-평양-신의주에 이르는 경의선(京義線)이 통과하였으나 38선이 생긴 뒤 남한과의 교통은 끊겼다
개성 북쪽의 토성(土城)에서 해주(海州)로 황해선(黃海線)이 분기하며 도로 또한 매우 발달하여 각지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7)개성의 유적. 유물
송악산 기슭에 고려의 왕궁터인 만월대(滿月臺)가 있는데 현재 그 초석(礎石) 남아 있으며 그 서쪽에 첨성대(瞻星臺) 터의 기석(基石) 있다
개성 남대문에는 3대 명종(名鐘) 하나인 고려 때의 연복사(演福寺) 종이 걸려 있으며 정몽주(鄭夢周) 피살되었다는 선죽교(善竹橋)와 그의 신위를 모신 숭양서원(崇陽書院)이 있다
조선을 섬기기를 거부한 고려의 충신 72인이 숨어 살던 두문동(杜門洞)과 수려한 경치를 이루는 채하동(彩霞洞)이 있으며 그 밖에 대흥산성(大興山城) 천마산성(天摩山城) 현릉(顯陵, 玄陵) 박연폭포(朴淵瀑布)등이 있다
*瞻--쳐다볼 첨
*杜--막을 두
*霞--놀 하
- 고려의 수도 개경의 수도
http://www.chungdong.or.kr/highroom/history/map(중세/개경도)
-개성지도, 명칭의 변화, 개성지역의 경제.공업.유물.유적소개
http://nk.joins.com/map/i031.htm
-평양 대동문과 개성 남대문 소개
http://www.ocp.go.kr/l_guide/school/04.html
-개성의 개요, 주요문화 유산소개. 선죽교, 개성남대문과 연복사종, 만월대, 개성 첨성대, 고려박물관, 공민왕릉, 대흥산성등
http://home.hanmir.com/~uri1004/tour-c-2.htm
-개성지역에서 가볼만한 곳
http://uniedu.go.kr/dataroom/n_guide/fin6_b.html



2.개성은 남과 북 누구의 땅인가
개성의 국제법상(유엔헌장) 대한민국의 땅이며 정전협정상으로는 조선민주인민공화국 땅이다

(1)삼팔선(三八線, 북위 삼십팔도선 약칭)---미국과 소련 입장(유엔과 국제법)
개성은 대한민국의 땅이다
삼팔선(三八線)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한 후 미소양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경계선 <북위 삼십팔도선>의 약칭
ㄱ.획정 경위
북위 38도선은 한반도의 중부를 횡단하는 선인데 8.15이전에는 이 선을 기준으로 북반부는 만주에 주둔한 일본의 관동군(關東軍) 사령관의 지휘하에 있었고 남반부는 조선군사령관의 관할 아래 있었다 그런데 1945년 8월에 미국과의 약속에 따라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남쪽으로 계속 진출, 1945년 8월 12일에는 청진(淸津)에 상륙하고 16일에는 원산(元山) 상륙작전을 벌였다
이때 미군은 가장 가까운 부대가 한반도에서 6000마일 이상 떨어진 오키나와(沖繩) 주둔하여 한반도에 상륙하는 데 상당한 시일을 필요로 했으며 한반도 전체가 러시아군에 의해 장악되는 것을 막기 위해 38도선을 경계로 한 분할점령을 소련에 제의했다 이에 소련은 1개월 전 포츠담회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수뇌가 한국의 신탁통치 필요성과 분할 점령에 대해 인식을 같이했고 또한 미국의 양해를 받아야 일본 훗카이도(北海道)의 일부를 쉽게 점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제안에 동의 이미 서울까지 진출해 있던 일부 소련군을 38도선 이북으로 철수시켰다 그리하여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 각각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을 받았으며 군정(軍政)을 실시하였다
*沖--화할 충, 빌 충
*繩--노승, 줄승, 곧을 승

ㄴ.획정결과
처음 38도선은 일본의 관동군과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을 받은 뒤 신탁통치로 옮겨가기 위해 일시적으로 획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1948년 남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결국 실질적인 국경선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6.25사변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모든 분야의 발전을 가로막아 신생독립국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하였고 국제적으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대치선으로 긴장의 초점이 되었으며 민족적으로는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에 의해 차츰 적대감이 심화되었다
38도선은 1950년 6.25사변으로 인하여 무너졌으나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38도선 대신 <휴전선>이라는 군사경계선이 설정되어 남북의 분단이 고착되었을 뿐 아니라 민족적으로 거의 이질사회(異質社會)를 만들게 한 경계선이 되었다

(2)휴전선(군사분계선)---전쟁상태 중 정전협정---전시상태
개성은 대한민국 땅인데 조선민주인민공화국 불법으로 점령한 지역
ㄱ.휴전회담(休戰會談)
휴전회담은 6.25전쟁을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개최한 회담이다
1951년 3월 북진을 계속하는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서자 중공군은 이른바 4월, 5월 춘계대공세를 감행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에 소련은 유엔주재 소련대표 J. 말리크를 통하여 휴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 사령관 M.B 리지웨이는 그 제의에 따라 휴전회담 개최를 요구하였다
이에 1951년 7월 8일 양쪽은 개성에서 예비회담을 열고 이어서 10일 정전회담 본회의를 개최하였다
군사분계선과 포로 교환문제로 난항을 거듭한 이 회담은 1951년 9월 6일부터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겨 11월 전선을 정전선(停戰線)으로 할 것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포로교환 문제는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사건등으로 합의를 보지 못하여 회담 자체가 정돈상태에 빠졌다 이에 6월 25일 D.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국무장관보 로버트슨을 한국에 보내 이승만 대통령과 협의하게 하여 <한.미 양국은 정전 후에도 긴밀한협력을 계속하고 송환을 원하지 않는 공산포로는 한국에서 석방하며 한미(韓美)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는 조건으로 한국의 정전반대운동을 일단 진정시켰다
이리하여 7월 27일 오전 10시 제 159차 본회의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W.K 해리슨 중장과 공산군측 대표 남일(南日)이 3조 63항의 휴전조인문에 합의. 서명함으로써 한국전쟁은 정전(停戰)으로 끝맺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표는 최후까지 휴전에 반대 휴전협정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ㄱ)개성회담(開城會談)
개성회담은 1951년 개성에서 6.25전쟁의 휴전을 위해 유엔군측과 공산군측간에 열렸던 회담이다 1951년 6월 23일 소련의 UN대표 J, A. 말리크의 제의에 의한 것으로 같은 해 7월 8일부터 예비회담이 7월 10일 본회담이 개최되었다 그후로 2차에 걸친 중단이 있었으나 9월 6일 유엔군측의 제의에 따라 10월 8일 판문전으로 회담장소를 옮겨 회담이 계속되었다
(ㄴ)판문점 휴전회담(板門店休戰會談)
판문전휴전회담은 6.25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열렸던 회담이다
판문점은 경의선 위의 한 촌락으로 개성 동쪽 8km 지점에 있으며 북위 38도 남쪽 5km 지점에 위치한다. 중공군(중국 인민군)과 유엔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대규모화되자 이에 당황한 소련은 유엔대표 Y.A 말리크를 통해 1951년 6월 2일 북위 38도 선상에서의 휴전을 제의해 왔다
유엔군 사령관 M.B 리지웨이는 그 해 6월 30일 휴전제의를 받아들여 1951년 7월 8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개막되고 10일에 유엔군 수석 대표 해군준장 조이와 북한 수석대표 남일이 참석한 본회의가 열렸다
그 뒤 휴전선상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는 이 회담장소에서 토의되었다
1953년 6월 26일 미국 D.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국무차관보 R.B. 로버트슨을 한국에 보내어 (a)한미(韓美) 양국은 정전 후에도 긴밀한 협력을 계속하고 (b)송환을 원치 않는 공산군 포로는 석방하며 (c) 한미(韓美)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는 조건으로 한국인의 정전반대운동을 중지케 한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 그 해 7월 27일 전문 5조 36항으로 된 정전협정이 조인되어 회담 개기 2년 1개월만에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ㄴ.휴전선(休戰線, 군사분계선)
휴전선은 휴전 또는 정전시(停戰時) 대치하고 있는 양군의 태세를 고정화시키거나 전선에서 병력을 분리시키기 위해서 설정하는 기준선이다
약칭 MDL, 보통 휴전이 성립된 시점의 전선을 분사분계선으로 삼는다
휴전과 정전에 수반해서 적대행위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서 군사분계선을 따라 병력을 분리시키고 완충지대(緩衝地帶:buffer zone)를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비무장지대를 군사분계선의 양측에 설치해서 비무장지대 내에서의 무장을 금지시키고 이행 여부를 국제적인 감시위원회에서 감시하게 한다 또는 쌍방의 병력을 철수시킨 뒤에 유엔군등 제3자가 현장에 주둔해서 감시하기도 한다 6.25사변의 경우에는 휴전시에 군사분계선을 설정함에 있어서 양군의 주장이 대립되었는데 양군의 현실적인 접촉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결정함으로써 휴전협정이 성립되었다 다시 양군은 군사분계선에서 각각 2km씩 후방으로 철수해서 비무장지대를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동전쟁에서는 정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였으나 그 후 병력분리협정이 체결될때마다 당시의 정세에 따라 군사분계선이 다시 조정되었으며 조절될때마다 그 곳을 중심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군 사이에 4-10km의 완충지대가 설치되고 유엔군이 주둔해서 정전(停戰)을 감시했다
ㄷ.비무장지대
ㄹ.판문점(板門店)
판문점은 경기도 파주시(坡州市) 진서면(津西面) 비무장지대 군사분계건상에 있는 공동경비구역이다
판문점은 서울 서북쪽 48km, 개성 동쪽 10km 지점에 있으며 북한 행정구역상으로는 개성직할시 판문군(板門郡) 판문점리(板門店里)에 해당한다
6.25동란 전에는 널문(板門)이라는 지명으로 의주가도(義州街道)에 초가집 몇 채만 있던 한촌이었으나 1951년-1953년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세계에 알려졌다
1953년 7월 이곳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된 뒤 국제연합측과 북한측의 <공동경비구역>이 되었으며 그해 8월-9월에는 1개월에 걸친 포로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주로 휴전을 관리하는 장소로 이용되었으나 1971년 9월 20일 열린 남북적십자예비회담을 계기로 군사정전위원회의 회담장소 뿐 아니라 남북한간 접촉과 회담을 위한 장소 및 남북을 왕래하는 통과지점으로도 활용되어 왔다
공동경비구역 안에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과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을 비롯하여 <자유의 집> <판문각>등 10여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고 1980년대 남쪽에 <평화의 집> 북쪽에는 <통일각>이 세워져 남북대화용 건물로 이용되고 있다
1971년 남북적십자예비회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등으로 1990년대에는 범민족대회등으로 국내외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북한측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집회장, 선전장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1976년에는 북한경비병에 의한 <8.15되 만행사건>이 일어나기도 하는 등 남북한 대립의 긴장을 나타내는 상징적 장소로 인식되어 왔으나 남북대화 창구의 역할이 커져왔고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 뒤부터는 이곳을 통해 남북당사자의 직접 왕래도 이루어지고 있다

ㅁ.옹진반도(甕津半島)
옹진반도는 황해남도 남서부에서 황해로 돌출한 반도이다
동쪽은 해주만, 서쪽은 대동만을 건너 백령도와 접하고 있다
옹진반도는 동쪽의 강령반도, 서쪽의 용천반도, 중앙의 동남반도로 나뉘어져 있다
리아스식해안으로 주변에는 간석지가 발달해 있고 강령만. 대동만등의 연안을 따라 옹진평야에 펼쳐져 있어 벼농사가 발달하였다 행정적으로는 벽성군의 일부와 옹진군 전역으로 되어 있다 황해해류의 영향으로 기후가 온화하며 조기. 멸치. 넙치. 숭어. 가자미. 김. 조개.대합등이 많이 잡힌다 금. 석탄등이 산출되고 옹진온천이 있어 휴양지로도 유명하다
-옹진반도는 한국전쟁때 북한군이 맨 먼저 장악한 곳으로 황해도 지역 전략요충지이다
남과 북에서 옹진반도를 누가 장악하는냐에 따라 38도선 이북 황해 바다를 누가 장악하는냐에 달려 있다 한국전쟁 종결기에 한국군과 유엔군이 해군력의 강화로 황해(黃海)지역은 장악할 수 있었지만 중국 인민군의 저항으로 옹진반도 즉 개성등은 북한 땅이 되고 말았다
-개성공단 개발이 진척되고 발전되면 옹진반도 지역으로 확대되어 황해 연안 항구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甕--독 옹
*津--나무 진

-휴전선 155마일 http://www.njoyschool.net/chehum/textbook/chehum_text_38.asp
-DMZ 관광(휴전선관광 전문업체, 비무장 지재 DMZ, 남침용 땅굴, 서부전선, 중부전선, 동부전선, 판문점등)
http://www.koreadmztour.com
-2003년 휴전선 155마일 횡단체험 http://155.pocarisweat.co.kr
(3)평화협정--38도선으로 남북국경선 확정
국제법과 유엔입장에 따라 38도선으로 남북 국경선 인정..
개성은 대한민국의 땅으로 인정...

3.개성공단 자료
(1)개성공단의 지도모습
http://image.search.daum.net/img/imgdetail?q=%B0%B3%BC%BA%C1%F6%BF%AA&img=1_507180&p=0&i=1&sort=0&list=0&autocvt=0
(2)개성공단사업 본격화 현황과 전망
http://www.pyung.co.kr/timephoto/041108.htm
(3)개성은 경협. 화해의 특구(한반도 평화의 길)
http://www.pyung.co.kr/peace4.htm
(4)개성공단, 북한 기습남침 전략엔 <바이케이드>
http://www.hani.co.kr/section-003100000/2004/12/0031000002004122510300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