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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권력과 군 장악과정 주요 자료 본문

Guide Ear&Bird's Eye/유엔평화유지군(연합군-한국 국방부,NATO)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권력과 군 장악과정 주요 자료

CIA bear 허관(許灌) 2006. 7. 2. 10:49

 

1.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권력을 잡기까지

1964년 봄, 김일성 종합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한 김정일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처 참사실에서 근무하면서 정치 수업

을 받기 시작합니다. 김정일의 첫 근무처였던 당 중앙위원회

비서처라는 곳은 당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한눈에 파

악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김정일은 당 조직부장이였던 숙부 김영주의 도움을 받아 당 내부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1년 동안 당에서 근무한 김정일이 다음으로 옮겨간 자리는 내각 제 1부수상 참사실이었습니다. 김정일은 이곳에서 정부 행정의 전반적인 업무를 배우게 됩니다.

그가 2년 동안에 걸쳐 당과 내각에서 업무 파악을 한 후 맡은 직책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 지도부 중앙기관 지도와 책임지도원'이란 요직입니다. 당시 김정일의 나이는 스물 네 살이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수령의 아들인 김정일은 자기 밑에 수명의 지도원들을 거느리며 중앙기관과 당 조직을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이와 함께 김정일은 김일성의 현지 지도에도 함께 동행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대외적으로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김정일은 1974년 32세의 나이로 당 정치 위원회 제5기 중앙위원회 8차 회의에서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후계자 기반을 완전히 닦고, 80년 6차 당대회에서 당 정치국 서열 4위, 당 비서국 서열 2위, 당 군사위원회 서열 3위로 호명되면서 후계자 지위를 공식화했습니다. 지난 2003년 남한에 입국한 탈북자 김철혁(가명)씨는 김정일은 후계자가 되기 위해 김일성의 마음을 얻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다고 말했습니다.

김철혁: 김정일은 1980년 10월 10일 당 대회 6차 대회때 정식 후계자로 선포됐습니다. 그는 아버지 후광에 얻으려고 악착스럽게 자기 기반을 닦았습니다. 80년대쯤 들어서서 후계자 선정에 대두되니까 이미 김정일의 세력은 김일성을 흔들 만큼 세져 있었습니다.

김정일의 권력 장악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가 후계자로 공식 지명되기까지 몇 차례 어려운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는데요, 그 첫 번째 장애는 1967년 일어난 소위 '갑산파 사건'입니다. 김일성의 직계는 북한내 공산당 계열인 갑산파와 빨치산파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국방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추진하려고 했는데 갑산파는 경제우선정책을 요구하며 이를 반대했습니다.

갑산파는 또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에 대해서 반발하면서 대신 당내 서열 4위였던 박금철을 김일성의 차세대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박금철의 업적을 선전하는 영화 '일편단심'을 만들었습니다. 김일성은 갑산파의 이러한 움직임을 부자간 권력 세습의 필수적 요소인 개인숭배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갑산파 숙청을 결심했습니다. 그때부터 대규모 숙청은 2년 동안 계속됐고 갑산파는 완전히 몰락하고 맙니다.

한편, 갑산파 사건은 김정일이 영화예술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은 갑산파들이 영화예술분야에 많이 포진하고 있는 것을 알고 갑산파들이 이 분야에 끼친 '반당적 해독'을 뿌리 뽑을 것을 지시했는데, 당시 유독 영화를 좋아?던 김정일은 이일을 자신이 맡겠다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김정일은 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으로 승진되었고 이 때부터 소설이나 영화를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하는 등 '사상부문'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김정일이 만든 영화 '피바다'와 '꽃파는 처녀'등은 김일성 우상화 작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김일성은 이들 영화를 보고나서 김정일의 능력을 인정해 줬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함께하던 갑산파 인사들을 제거한 뒤인 70년대에 들어와 자신의 1인 지배 체제가 실질적으로 구축되자 본격적으로 후계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이 후계자 문제로 진통을 겪는 과정을 보면서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후계구도를 확실하게 해둘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당시 김정일은 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으로 있으면서 영화와 소설을 이용해 김일성 우상화 작업을 구축함으로써 이미 아버지로부터 그 공로를 높이 인정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에게는 강력한 내부의 경쟁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계모인 김성애와 그가 낳은 평일, 영일, 경진 등 이른바 곁가지들이였습니다. 김정일은 70년부터 74년 당 중앙위원회 5기 8차 회의에서 위원으로 선출돼 후계자 기반을 완전히 닦기까지 약 4년 동안 이들과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69년 1월 당 중앙위원회 4기 4차 회의 직후 김정일의 계모 김성애가 중앙여성동맹위원장에 올랐습니다. 이때부터 김성애는 여맹과 함께 위세를 떨치기 시작합니다. 북한 신문과 텔레비전에서는 김일성과 똑같은 크기의 김성애 사진이 실리고 '김일성의 교시'와 '김성애 여사의 말씀'을 구분하지 못하고 똑같이 '교시'로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김성애의 지위가 이렇게 높아진 것은 김일성의 발언 때문이기도 한데요, 김일성은 '김성애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김성애의 지시는 나의 지시와 같다'고 말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김성애의 말을 잘 듣지 않던 사람들도 김성애의 말이라면 다 '교시"로 받아들이기 된 것입니다.

김성애는 권력을 잡게 되자 김일성의 본처이자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에 대한 숭배 사업도 중지시킵니다. 대신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 따라 배우기'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김성애는 이 운동을 펼치면서 김일성 가계에 자신이 정통성이 있음을 내세우려 했습니다.

또한 시어머니를 잘 모시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김일성에게도 점수를 따려 했던 것입니다. 김성애가 이처럼 권력을 잡기 위해 애썼던 것은 모두 자신의 첫 아들 김평일을 후계자로 올려보자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성애는 나이 어린 평일이 성년이 될 때까지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유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탈북자 김철혁씨는 김평일은 아버지 김일성을 빼닮았다는 평을 받으며 후계자 감으로 주목받고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김철혁: 김평일은 김정일보다 인격도 지도자적인 자질도 대중에 대한 신뢰도도 높았고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성품도 좋았고...

김정일도 김성애의 야망을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김정일은 자신이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김성애의 위세를 꺾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모에 대해 섣불리 불만을 표출했다가는 아버지의 불만을 살 수도 있어 신중을 기했습니다. 김정일은 김성애의 활동을 비밀리에 뒷조사하는 등 김성애의 활동을 예의주시했습니다. 그런데 1973년 중순 김정일에게 곁가지를 제거할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73년 여름, 김일성이 당 간부들을 데리고 김일성 광장 뒤에 있는 언덕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은 김일성이 인민대학습당을 지으려고 했던 명당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지에 웬 저택이 들어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 집은 김성애의 남동생 김성갑이 어머니 고영칠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평양시당 책임 비서인 강성산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김성애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김성갑과 그 어머니가 살 수 있는 집을 지어준 것이었습니다. 강성산은 김일성의 장모가 그 집에 살고 있으니까 김일성이 알게 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불같이 화를 냈으며 이 일을 두고 김성애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김정일은 아버지와 계모 사이에 불화가 생긴 틈을 타서 그동안 자신이 비밀리에 뒷조사 했던 계모의 비리와 월권행위들을 아버지께 모두 고해 바쳤습니다. 또 김성애의 남동생 김성갑이 아편을 맞고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렸습니다.

김정일은 이 사건이 터진 후 공개적으로 평양시당과 중앙여맹에 검열단을 보내 대대적인 내부 검열을 벌였습니다. 평양시당 검열단은 김성갑의 비행을 그리고 중앙여맹 검열단은 김성애의 비행과 그 추종자들을 가려냈습니다. 김정일은 5개월간에 걸친 검열 자료들을 김일성에게 보냈고, 이에 따라 74년 평양시 당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이들에 대한 공개비판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평양시당 책임비서 강성산은 자아비판을 통해 검열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김일성은 관련자들을 모두 직위해제 시키라고 지시했습니다.

김일성의 지시로 김성애의 동생 김성갑과 김성호는 직위해제 되어 연금상태에 들어갔고 김성애는 일절 공개 석상에 참석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김성애는 이와 함께 6개월간 김일성하고 떨어져 자모산 별장으로 보내져 근신해야 했습니다. 또 김성애의 추종자들은 전원 농촌과 탄광으로 쫓겨 갔습니다. 이 사건으로 김성애는 자신의 첫아들 김평일을 후계자로 세우려 했던 야망을 포기해야 했고, 김정일은 성공적으로 곁가지를 제거하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북한에서 신문 방송 출판물에서 김성애의 이름과 사진은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됩니다.

한편, 김정일이 후계자 자리를 확고히 하는 데는 빨치산 원로들의 지지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과 함께 활동했던 빨치산 1세대들은 김정일 편이였습니다. 탈북자 김철혁씨는 김정일은 자신을 지지해준 빨치산 원로들에게 지금도 최대한의 대우를 해주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김철혁: 김일성은 당시 측근 속에서 김평일을 지지하는 사람과 김정일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파가 갈리었어요. 그런데 김정일이가 김평일이보다 사악하니까 김일성한테 갖은 아첨을 다해서 본인이 공식 후계자로 지명되자마자 김평일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싹 다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두둔해준 김일성의 측근들은 아직도 대단한 호강을 하고 있습니다.

김정일은 빨치산 원로 가운데서도 특히 자신을 적극 지지해준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이 사망하자 혁명열사능에 묻어주고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도 제작해 주었습니다.

 

당시 김정일에게는 경계해야할 또 다른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김일성의 친동생이자 김정일에게는 삼촌인 김영주입니다. 김영주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비서겸 조직부장이라는 핵심 요직에 있으면서 김일성 다음가는 실세였습니다.

남한에 망명한 황장엽 전 조선 노동당 비서는 한때 김정일과 김영주간에 권력 다툼이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남한 고려 대학교 북한학과 유호열 교수는 김영주는 김일성의 후계자로 강력히 거론되던 인물이었으나 건강이 나빠 후계자 자리를 김정일에게 뺐길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유호열: 김영주가 김일성 후계자로 거론이 되던 인물 중에 하나였는데 김정일이 후계자로 선정되는 과정에서 밀려나서 숙청됐다는 가능성, 또 하나는 김영주가 건강상의 이유로 김일성이 볼 때 김영주가 쉬는 것이 좋겠다. 권력투쟁이건 자질면에서 김일성이 판단을 했던 김정일이 후계자가 되면서 김영주는 자연스럽게 물러나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신경계통에 질병을 앓던 김영주는 1973년 조직비서 자리를 김정일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한직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신병치료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1975년 가족과 함께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자강도 강계로 떠납니다. 당시 김영주의 맏딸은 김일성 종합대학에 그리고 아들 둘은 남산 고급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북한에서 제일 좋다는 학교에 다니던 자식들까지 모두 지방으로 전학시켰습니다. 그 후 그는 93년 다시 평양에 돌아와 부주석겸 정치위원을 맡기까지 20여년 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고 칩거했습니다.

김정일은 이처럼 후계구도에 방해가 될 만한 세력을 모두 제거한 후에도 그들에 대한 감시와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이를 위해 김정일은 당 조직지도부 내에 '제10호실'을 운영하며 이들의 동향을 낱낱이 보고받고 있습니다. 특히 김정일은 김성애의 큰 아들이자 이복동생인 김평일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김정일은 결국 1979년 말 김평일을 유고주재 북한 대사관으로 보내더니 그 후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 폴란드 등 동북구 유럽을 전전하게 했습니다. 김정일은 심지어 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도 김평일을 장의 위원회 명단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부친상을 당했는데도 장의위원회에서 빼버린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김정일이 이처럼 김평일을 경계한 것은 김평일의 뒤에는 김일성과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라는 막강한 지지자가 있었기기 때문으로 풀이합니다. 김일성은 키도 크고 얼굴도 자신을 빼닮은 평일을 유난히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게다가 평일은 성격이 과묵하고 신사적이라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대중적 성품이어서 김일성은 이런 김평일을 장차 조선인민군을 이끌 장군감으로 마음을 두고 그에 대한 교육도 일찍이 군사쪽으로 방향을 잡아 주었습니다. 김일성의 구상은 당은 정일, 군은 평일이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김정일은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군부의 확고한 지지세력을 갖게 됩니다.

2. 김정일국방위원장의 군장악 과정

김정일이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던 계모 김성애와 삼

촌 김영주 등 방해세력을 모두 제거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자신의 걸림돌을 제거한 직후인 1974년,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5기 8차 회의에서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선출됐습니다. 노동신문은 이 시점부터 김정일에게 '당중앙'이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이로써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정치위원회 위원이자 중앙당 조직비서겸 조직지도부장, 그리고 사상담당 비서겸 선전선동부장이라는 막강한 직책을 가지며 실질적인 후계자로 공식 등장한 것입니다. 당시 김정일의 나이는 33살이었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 다음으로 권력의 2인자 된 이후 가장 신경 쓴 부분은 바로 군에 대한 영향력 확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 승계에 대한 내부적 반발에 대비해 가능한 빨리 권력의 기반인 군을 장악해야할 필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한 고려대학교 북한학과 유호열 교수는 김정일은 군 경력이 전혀 없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당시 군대 내 핵심간부들을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이면서 군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고 설명했습니다.

유호열: 김일성이 김정일을 데리고 군부대 시찰을 하다보면 군 핵심 간부도 알게 되고 군의 실정을 알게 되고, 그리고 그 이후로는 집중적으로 군의 실력자들과 인맥을 쌓고.. 현역으로 군대 생활을 안했을 뿐이지 군에 대한 여러 가지를 충분히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김정일은 먼저 군내 당 조직 계통을 이용해 이용무 총정치국장, 김응도 선전부장 등 총정치국 핵심 간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군부내 최고 실세인 오진우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오진우는 김일성이 빨치산 시절 데리고 있던 당번병 출신으로, 76년부터 95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20여년 동안 인민무력부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김일성과 같이 담배를 피울 수 있을 정도로 수령의 절대 신임을 받고 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진우는 처음부터 김정일보다는 이복동생인 김평일을 낳은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의 집안과 더 가까웠습니다. 오진우의 집은 김성애의 남동생 김성갑의 집의 바로 옆집이여서 두 집안이 왕래가 잦았습니다.

또한 오진우의 차남과 김평일의 동생 영일이 친구여서 아들을 통해 김평일에 대한 얘기를 듣곤했습니다. 당시 오진우는 김일성이 평일을 군사의 재목으로 키우고자 한다는 뜻을 알았기에 김평일을 눈여겨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일의 신임을 받던 총정치국장 이용무가 오진우에 의해 숙청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진우는 김정일만 믿고 권력을 남용하던 이용무의 비리를 김일성에게 보고했고 김일성은 즉각 이용무를 직위 해제했습니다. 그리고 오진우에게 이용무가 맡던 총정치 국장직을 겸임토록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총정치국장을 통해 군내부 세력을 확장하려 했던 김정일의 계획은 차질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되자 김정일은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오진우를 제거하든지 아니면 내편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김정일이 오진우를 제거하기 보다는 자기편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북한 군을 장악하게 됩니다

 

(1)인민무력부장 오진우와 김정일의 관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권력장악 과정 중에서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김정일이 아무리 김일성의 후계자로 하더라도 김일성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군을 통솔하던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는 벅찬 상대였습니다. 남한 Daily NK의 김영환 논설위원은 김정일이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서 오진우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김영환: 오진우는 김일성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였으니까 오진우를 쳐낼 수는 없고, 쳐내기가 어렵다면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김정일한테는 중요했던 것입니다. 항일 빨치산 출신인 오진우 입장에서는 김정일이 정통 공산주의자 같아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김정일은 오진우를 얻기 위해서 당근과 채찍, 즉 회유와 협박을 병행했습니다. 한번은 오진우의 집무실에서 도청기가 발견되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오진우는 은밀히 진행된 색출 과정에서 도청기를 설치한 사람이 인민무력부 부부장 박중국이란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박중국이 김정일의 매제인 장성택과 매일 저녁 술판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도 입수했습니다. 오진우는 바로 김일성에게 이 사실을 고했고 박중국은 직위해제 됐습니다. 그러나 박중국은 지방으로 유배돼 가지 않고 오히려 쿠바대사로 발령이 납니다. 박중국이 쿠바 대사로 간 것은 당시 김정일의 영향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였습니다. 김정일이 오진우의 일거수 일투족을 은밀히 감시하고 있었던 것임을 추정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도청기 사건 이후 1979년 군부에 오극렬 참모총장이 등장합니다. 오극렬은 김정일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인물로 48세의 젊은 나이에 인민무력부 총참모장이 된 것입니다. 그는 빨치산 시절 김일성과 가까웠던 오중성의 아들로 소련 공군대학에서 유학한 군부 엘리트 출신입니다. 오극렬은 참모총장이 된 후 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김정일에게 보고하고 그의 지시에 따랐습니다. 일부 군부 출신 탈북자들에 따르면, 김정일에게 모든 것을 고해 바치는 오극렬과 이를 못마땅해 하는 오진우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 김정일은 오진우를 견제하는 동시에 회유 작전도 폈습니다. 김정일이 1980년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무렵 그는 오진우에게 포드 승용차와 벤츠, 그리고 사냥용 승용차등 최고급 자동차 6대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또한 사회안전부 공병 1개 여단을 동원해 호화 단독 주택도 지어줬습니다. 이와 관련해 남한 Daily NK의 김영환 논설위원은 과감한 당근과 채찍을 이용한 용인술은 김정일의 통치 스타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김영환: 김정일이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가면서 쓰는데 굉장히 많은 선물을 준다든지 기념일 같은 날, 생일을 기억해서 텔레비전 냉장고 같은 귀한 물건을 주기도 합니다. 또 어떤 과오를 저질렀을 때 과감하게 내치는 일도 서슴없이 합니다. 이런 일을 통해 당신을 내 손아귀 안에 있는 사람이다 이런 것을 각인 시킵니다.

이러한 가운데 1987년 오진우가 교통사고를 당해 거의 초죽음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회생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진우는 완전히 김정일의 사람이 됩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김정일은 오진우의 교통사고를 계기로 그를 완전히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1987년 봄, 오진우는 김정일의 비밀파티에 참석한 뒤 만취한 상태에서 벤츠 승용차를 몰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다 대형 사고를 냈습니다. 가로등을 받고 부서져 있는 벤츠를 발견한 안전국 교통순찰대원은 피투성이의 오진우를 급히 평양 제 1병원으로 후송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두개골이 깨지고 갈비뼈가 여러 대 부러져 있는 등 의식불명 상태였습니다. 병원측 당직 의사는 이 의식불명 환자의 신원을 파악하려고 주머니를 모두 뒤졌지만 신원을 증명할 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의사는 노인이 팔목에 찬 김일성이라는 빨간 글자가 새겨진 순금으로 된 오메가 시계를 언뜻 발견했습니다. 의사는 그가 예사 인물이 아님을 바로 짐작하고 중앙당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곧 중앙당에서 사람이 나왔고 그 환자는 오진우로 판명됐습니다. 오진우의 사고 소식을 듣고 김정일도 급히 병원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오진우는 다시 살아나기 힘들 정도로 워낙 중상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남한 DailyNK의 김영환 논설위원은 당시 교통사고를 당한 오진우가 김정일의 절대적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얘기는 널리 알려진 일화라면서, 이 일 이후 오진우는 김정일에게 충성을 다짐했다고 전했습니다.

김영환: 오진우가 대단히 큰 교통사고를 당해서 그때 소생하기 힘들 것이라고 했는데 김정일이 병원에 즉각 달려 와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치료해라. 그리고 오진우를 데려온 교통 순찰관에게 큰 포상금도 주고 오진우를 나중에는 프랑스, 외국 병원까지 보내서 치료를 할 수 있도록 해서 살려냈다는 잘 알려진 일화가 있습니다.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다시 살아난 오진우는 88년 초 퇴원한 후 다시 일선에 복귀합니다. 그리고 오진우는 95년 사망할 때까지 쭉 군부 최고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한편, 오진우가 87년 교통사고로 모스크바와 유럽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김정일은 오진우의 빈자리를 오극렬에게 직무 대행하도록 맡겼습니다. 오극렬은 직무 대행 기간 동안 정치장교들에 대한 군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한편, 오진우는 병상에 누워있으면서도 군 개혁을 펼치는 오극렬의 활동을 낱낱이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88년 퇴원한 후 김일성에게 오극렬이 군에서 당을 떼어내려 했다며 그의 과오를 보고했고 김일성은 이 일로 오극렬을 전격 해임합니다. 당시 김일성과 오진우는 마우쩌뚱의 인민해방군처럼 정치장교들이 군을 이끌어야 한다는 사회주의 국가의 전통적 방식을 선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정일도 이 때 자신의 군부 오른팔인 오극렬을 잠시 버립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오극렬을 단 6개월 동안 김일성 고급 당학교로 보냈을 뿐, 다시 당 작전부장의 중책을 맡기며 복귀시킵니다. 이후 오진우와 오극렬 등 군부 실세들은 김정일이 북한 군부를 장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2)김정일의 통치 시대 개막

김정일은 1980년 10월 개최된 제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 위

원, 정치국 상무위원, 군사위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드디어 공

식적으로 아버지의 절대 권력을 위임받고 정치 전면에 등장했

습니다. 앞서 설명한대로 김정일은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등 권

력의 핵심인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숙청하는 등 그동안 정치 기반을 다져온 결과였습니

다. 이때부터 김정일에 대한 호칭도 '당중앙'에서 '친애하는 지

도자 동지'로 변했습니다.

고위급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당 간부들은 어떤 사안에 대해 김일성과 김정일의 의견이 다를 경우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중요 정책 사안들이 김일성에게 보고되기 전에 김정일에게 먼저 보고되는 체계로 바뀌었으며, 김일성의 시력이 안 좋아진 이후부터는 아예 김일성에게 문서 보고를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대신 필요한 부분만 수령에게 육성 보고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80년대에도 김일성은 여전히 수령으로 군림하고 있었지만 김정일은 아버지와 똑같은 동급으로 실질적 권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일이 자신의 통치 시대를 위해 가장 역점에 둔 것은 무엇보다 세습 정당화였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김일성의 신격화를 선포하고 개인숭배 선전을 대대적으로 벌였습니다. 세계최대의 인물동상인 김일성 동상과 김일성 개선문, 주체 사상탑, 15만석 규모의 5.1 경기장, 이 모두가 김일성 우상화의 일환으로 김정일의 주도하에 건설된 것입니다. 그는 또 혁명전통을 과장하고 신비화 했으며 주민들에게 북한의 정권도 경제도 문화도 다 김일성이 마련해 준 것으로 선전했습니다.

특히 그는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 10대 원칙'을 강화해 법보다 더 엄격한 규율로 만들었는데, 이 10대원칙은 사실 김정일이 지난 74년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선출돼 후계자로 등장하면서 사상교육을 위해 만든 자신의 작품입니다.

탈북자 김춘애씨는 북한 주민들은 헌법이나 형법보다 10대 원칙을 더 무서워한다고 말했습니다.

김춘애: 10대 원칙은 김정일의 말씀입니다. 10대 원칙과 어긋나게 생활하면 김정일의 권위와 위신을 훼손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도 갈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남한에 망명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그의 저서 '북한의 진실과 허위'에서 김정일은 김일성 우상화를 통해, 김일성이 만든 국가를 김일성 마음대로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나쁠 것 없다는 사상을 주입시키려 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황 전 비서는 김정일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주민들의 눈과 귀를 막고 많은 시간을 강연회와 학습회 영화 연극 감상화, 충성결의 모임 등에 참여하도록 하는 등 오직 수령 우상화 선전만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러나 우상화 정책은 주민들에게 커다란 고통과 부담을 안겨주고 북한을 몰락의 길로 몰고 있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김정일은 이후 91년 12월 인민군 최고 사령관, 그리고 93년 4월 국방위원장에 선출되면서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됩니다. 그는 김일성이 사망하자 97년 10월에는 당규약 24조에 명시된 당 전원회의 선출절차를 무시하고 당 총비서직을 승계했습니다.

 

워싱턴-이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