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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부인들과 자녀 본문

Guide Ear&Bird's Eye/유엔평화유지군(연합군-한국 국방부,NATO)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부인들과 자녀

CIA bear 허관(許灌) 2006. 6. 29. 13:03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가족관계는 철저히 비밀에 가려져왔지만 지금까지 모두 네 명의 여자로부터 3남 2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지기론 김정일 위원장의 첫 번째 부인은 남한출신으로 지난 1948년 월북한 성혜림입니다 성혜림은 김정일 위원장보다 5살 많았으며 김정일위원장과 만났을 당시 평양 예술단 소속의 여배우였습니다 둘은 1960년대 말 혹은 1970년대 초부터 정식 결혼을 하지 않고 같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성혜림은 유부녀였습니다 성혜림은 김정일위원장과 살면서 장남인 "김정남"을 낳았습니다 성혜림은 지난 2002년 5월 모스크바에서 65살의 나이로 사망된 뒤 현지에 안장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경상남도 전처 성혜림 살던 집 지방문화재 지정

-성혜림과 김정남 모습




김정일 위원장은 아버지 김일성 전(前)주석이 모르는 사이에 김정남을 얻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숨겨왔으나 결국 김정남이 4살 때 김일성에게 김정남을 데려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정남은 지난 2001년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려다 추방된 이후 북한과 중국, 유럽등을 오가며 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김정남과 닮은 인물이 중국 베이징 시내 고급호텔과 한국 음식점들에서 잇 따라 목격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두 번째 부인으로 지목되는 홍일천이라는 역성은 혁명가의 자식으로 김정일위원장과 1966년 정식 결혼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으로서는 첫 결혼인 셈입니다 그러나 둘 사이는 오래 가지 못했으며 둘 사이에 김혜경이라는 딸이 있다는 소문이 있으나 사실 확인은 되지 않았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세 번째 부인으로 알려진 인물은 김정일 위원장이 33살이었던 1975년 그와 정식으로 결혼을 한 김영숙입니다 김정일 위원장과 김영숙 사이에는 김설송이란 딸이 하나 있습니다 김영숙에 대해서는 김일성 집무실 타자수였다는 사실 이외에 구체적인 신상이나 얼굴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한 통일부는 지난 1월 발간한 "2005 북한의 주요 인물"에서 김영숙을 퍼스트레이디 곧 영부인으로 지명하고 있습니다 통일부는 이미 사망한 성혜림이나 김정일위원장의 네 번째 부인인 고영희가 훨씬 더 알려져 있지만 동거등으로 맺어진 이들과 달리 김정일위원장과 정식으로 혼인한 김영숙을 영부인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김정일의 네 번째 부인으로 알려진 고영희는 재일교포로 1960년 대 초 북한에 왔으며 만수예술단 무용단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김정일위원장은 고영희와의 사이에 김정철과 김정운 형제를 뒀습니다 고영희는 1980년대 들어 평양에 위치한 김정일위원장의 저택에 들어가 살았으며 김정일위원장이 각지에 이동할때마다 수 차례 동행하는 등 실제 영부인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고영희는 지난 2004년 6월 사망했으며 사인은 심장마비. 암등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고영희와 김정철 모습











김정일 위원장과 고영희 사이에서 난 차남 김정철은 김정일위원장의 유력한 후계자로 주목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익명을 요구한 남한 국가정책 연구기관 소속의 북한 전문가는 2006년 2월 13일 남한 기자들에게 김정철이 여성호르몬 과다분비증세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를 정보기관 관계자들로부터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외에 김정일위원장은 현재 마카오에 거주하고 있는 정일선이라는 여인과의 사이에 5살 되는 아들이 하나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김정일 직계자료




알려진 것으로는 김정일 위원장은 4명의 여자로부터 4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얻었습니다 첫번째 부인은 성혜림으로 그와 낳은 아들이 올해 35살 김정남입니다 성혜림은 지난 2002년 5월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뒤 현지에 안장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두번째 부인이자 정식 결혼을 한 김영숙과의 사이에는 32세된 김설송이란 딸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김영숙은 최근까지 북한 고위층이 거주하는 평양시 보통강 구역 서장동 관저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세번째 부인은 고영희입니다 고영희와의 사이에는 25세 된 김정철과 23세 된 김정운 그리고 김여정으로 알려진 딸이 하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일선이라고 알려진 여인이 마카오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여인과의 사이에도 5살 정도 된 아들이 하나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시아뉴스 2006년 2월 16일 Hur Kwan)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 북한노동당 총비서 주요 자료와 남북관계 군사우위 체제유지 입장에서 정경분리(政經分離) 원칙입장

김정일은 1942년 2월 16일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바트스코예 마을에서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에서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 당시의 그의 러시아 이름은 유라이고 여동생의 이름은 슈라었다 그의 아버지 김일성은 항일 빨치산 출신으로 극동사령부 소련군 88여단에 소속돼 3대대 중 1개 대대를 지휘하는 대대장 출신이었고 그의 어머니 김정숙도 항일 빨치산 출신이면서 소련군인이었다 극동사령부 88여단은 한국인. 만주인(여진족). 중국인들으로 구성된 사할린. 일본열도 그리고 만주. 한반도등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기 위하여 조직화된 공산주의자 중심의 군대조직이었다
그의 여동생 슈라는 3-4세때 하바로프스크 바트코스예 마을 우물(못)에 빠져 죽었다 아직도 슈라의 무덤이 있다
김정일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그의 부모들과 평양으로 왔어 정착하였다가 한국전쟁 발발과 인천상륙작전으로 평양이 국군의 손에 수복되자 피난하여 길림학원에서 공부하다가 다시 중국인민군 도움으로 평양을 점령하여 1953년 되돌아 왔어 인민무력부 산하 어린이 빨치산부대 학교 만경대혁명가 유자녀학원 3학년에 편입하였다
그는 1959년 1월 그의 아버지 김일성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공산당 제21차 대회 참석하였고 1960년도 남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64년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자 마자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권력의 핵심으로 들어간 그는 이후 선전선동부 과장. 부부장을 거쳐 부장으로 고속승진을 계속했고 1960년대 후반부터 김일성의 후계자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1973년 당 중앙위조직 및 선전선동담당 비서로 선출되고 이어 1974년 권력의 핵심인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면서 사실상 김일성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당 중앙>이라는 호칭으로 불렀고 1980년 6차 당대회를 계기로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이라는 지위까지 확보함으로써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불리며 명실상부한 실권자로 부상하였다
그는 1990년에 들어서면서 수령의 지위를 차례로 이양받기 시작하여 1990년 12월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에, 1993년 4월에는 군사주권의 최고지도기관인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각각 취임함으로써 당.정.군을 장악하여 후계자가 되기 위한 지도체계를 구축하였다
그런 가운데 1994년 7월 김일성의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권력 계승하여 1997년 10월 당 총비서가 되었다
1998년 9월 북한이 헌법을 개정해,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하고 주석제를 폐지함에 따라 국가수반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행정수반은 내각총리, 최고 통수권자는 국방위원회로 규정하였다 김정일은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98년 재추대 되었다
2003년 1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성명을 발표하여 핵무기 생산 및 수출을 통한 핵확산 우려를 낳았다 미국이 북한이 핵개발 프로그램을 원천적으로 포기하면서 경제적 원조를 해주겠다는데 대해 북미간 적대관계의 종식과 외교관계 수립, 경제제재 해제를 포함하는 일괄타결을 주장하였다 북미불가침조액을 요구하여 미국의 대북적대시 정책포기를 기도하고 주한미군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연쇄적 파급효과를 노리고 있다 미국이 다자간 협의를 주장 북핵문제는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등 주변국 나아가 세계 전체의 문제로 어느 한 나라의 일탈에 대해 자국적 제제를 가해 핵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에 한반도 핵문제는 미국과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고집하며 군사우위강화로 체제유지에 힘쓰고 남북관계은 정경분리원칙을 지키고 있다
김정일은 1974년 그의 여비서 김영숙과 결혼하여 딸 김설송을 두고 있다


1.성명--김정일(金正日)--성(姓)은 전주(全州)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정일(正日)이다
(1)러시아 이름---유라<1세-4세 때 사용한 이름>
(2)북한 이름---김정일(金正一)<1946년경부터 1980년 10월까지 사용한 이름>
(3)김일성 후계자로 추대한 이후 이름--김정일(金正日)<1980년 10월이후>
김정일이라는 이름도 1980년 10월, 정일(正一)에서 정일(正日)로 바꿨다 어머니 김정숙(金正淑) 이름의 정(正)과 아버지 김일성(金日成)의 이름 일(日)자를 합성해서 직접 만든 이름이다 이는 김정일 자신이 김일성. 김정숙의 유일한 적자(嫡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그의 이복동생 서자(庶子)들은 모두 한 일(一)자를 쓰고 있다
*적자(嫡子)--정실(正室, 본처)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 *서자(庶子)--후처(後妻)나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

2.출생일(생년월일)--1942년 2월 16일생(日生)

3.출생지---러시아 하바로프스크 바트스코예 마을 출신---유라와 슈라 쌍둥이로 태어남
김정일은 김일성과 김정숙 부부 항일 빨치산이면서 소련군 극동사령부 소련 88여단에 소속된 3개 대대 중 1개 대대장 출신 부친(父親) 김일성 쌍둥이 아들(유라). 딸 (슈라) 중 아들(유라)로 태어났다
(1)하바로프스크 인근 바트스코예 마을에 살고 있는 아우구스타 세르게예브나 할머니의 증언
김정일은 1942년 2월 16일 하바로프스크 바트스코예 마을에서 쌍둥이로 태어났으며 그의 동생은 3-4세때 쯤 못(우물)에 빠져 죽었다 김정일의 러시아 이름은 유라이며 그의 동생 이름은 슈라로 불렀다 슈라의 무덤이 아직도 이곳 하바로프스크 바트스코예 마을에 있으며 지난 1953년까지 북한 사람들이 이 곳을 잘 관리해 왔지만 최근 방치돼 있어 안타깝다
(2)하바로프스크 바트스코예 마을
하바로프스크 바트스코예 마을은 하바로포스크에서 약 70km 떨어진 곳으로 한때 160가구가 살았다지만 지금은 약 40가구만이 살고 있는 초라한 마을이다
김일성은 1942년부터 1948년까지소련 88여단에 소속된 3개 대대 중 1개 대대를 지휘했다는 것은 하바로프스 바트스코예 마을 사람들의 증언으로 나타나고 있다(1942년부터 북한정부 수립까지 김일성은 소련군 극동사령부 88여단 1개 대대장 직책)

4.현(現) 직책---조선노동당 총비서. 국방위원장
(1)북한정부 실권자---조선노동당 총비서
(2)최고 지도자-----최고사령관 국방위원장
북한에도 군 출신으로 북한정부 원수급(지도자급)이 많이 있다 그 중에 오진우 원수(사망)나 이을설 원수(생존)등이다

5.학력
(1)1949년 9월 평양 남산인민학교 입학
(2)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 이후 만주로 피납 그리고 길림학원에서 공부함
(3)1953년 11월 인민무력부 산하 군사학교 만경대혁명가 유자녀 학원(만경대혁명학원 前身) 3학년 편입
(4)1953년 8월 평양근교 삼석인민학교 전학 그리고 평양 제4인민학교 5학년 전학
(5)1960년 평양 제1초급 중학교를 거쳐 남산고등학교 졸업
(6)1959년 1월 소련 공산당 제21차 대회 참석(김일성과 함께 모스크바 방문)
(7)1964년 3월 김일성종합대학교 정치경제학부 졸업
ㄱ.대학논문---삼국통일과 외세개입에 대하여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외세 당나라를 한반도 내전(삼국 통일)에 요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입장 논문
ㄴ.졸업논문--군(郡)의 지위와 역할(정치경제학과 졸업논문)
북한 행정구역 군(郡)을 기초자치단체로 도시와 농촌의 교량적 지위와 역할로 중요성을 역설한 논문이다 그리고 면과 읍단위를 행정구역에서 없애고 군 단위로 행정업무와사회나 문화등을 통합화하려는 정책이다 독일행정구역 참고한 논문: 주--도(광역시)---시. 군. 구

6.경력
-1964년 6월 중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
-1973년 9월 당 조직담당 비서
-1974년 2월 당 정치위원(현 정치국원에 해당)
-1980년 10월 당 정치국 상무위원(현직)
-1991년 12월 인민군 최고사령관(현직)
-1993년 4월 국방위원장(현직)
-1997년 10월 당 총비서(현직)
-1998년 7월 최고인민회의 제7-11기 대의원(현직)
-1998년 9월 국방위원장 재추대
-2003년 9월 국방위원장 재추대(현직)

7.주요동정
-2000년 3월 주북(駐北) 중국대사관 방문
-2000년 5월 중국 비공식 방문(2000년 5월 29일-31일)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2000년 6월 13일-15일)
-2000년 6월 정주영 명예회장 일행 접견
-2000년 7월 푸틴 러시아대통령과 정상회담
-2000년 8월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 일행 접견
-2000년 9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 대외연락부 대표단 접견
-2000년 9월 현대아산에서 개발한 금강산관광지구 시찰
-2000년 10월 당 창건 55돌 즈음 경축 열병식 및 군중시위등에 참석
-2000년 10월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과 회담 및 집단체조관람, 환영만찬 참석
-2000년 10월 중국 고위군사대표단 접견 및 중국군 참전 50년 기념 군중대회 참석
-2001년 1월 1일 새해아침 금수산기념궁전 참배
-2001년 1월 중국 비공식 방문(2001년 1월 15일-20일)
-2001년 3월 중국 대표단 (당 조직부장) 일행 접견
-2001년 5월 스웨덴 페르손 총리 일행 접견
-2001년 7월-8월 러시아 방문(2001년 7월 26일-8월 18일)
-2001년 9월 강택민 주석과 정상회담(9월 4일)
-2002년 2월 러시아 극동대통령 대표 <풀리콥스키>와의 면담
-2002년 3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5차회의 참석
-2002년 5월 중국 공산당 대표단 접견
-2002년 8월 8.15대집단체조와 아리랑결속공연 관람
-2002년 9월 고이즈미 쥰이치로와 회담
-2002년 12월 평남도 토지정리사업현장 시찰
-2003년 1월 새해를 맞아 군 공훈합장단 공연 관람
-2003년 5월 4.25예술영화촬영소 연출 경희극 <철령> 관람
-2005년 2월 21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대외연락부장 왕가서 일행 접견
-2005년 3월 저녀 북한주재 러시아대사관 방문과 러시아전쟁 60돌 기념메달 받아
러시아 2차대전 승전 기념메달, 왜 각국 정상 중 김정일만 받았을까? 정답: 김일성을 소련군 참전용사로 규정 아들에 수여
제2차세계대전 승전기념 메달은 지난해 3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제작됐다 러시아와 당시 동맹국 국민 중 생존한 참전용사 및 그 후손이 수여 대상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여기에 포함된 것은 아버지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2차대전 참전용사>였기 때문이다 당시 김일성주석은 한인과 중국인, 만주인(여진족)으로 구성된 극동의 소련군 88특별여단의 제1교도영(대대)장이었다 88여단은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했으나 일본이 갑자기 항복하는 바람에 정작 참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88여단 인사들은 광복 후 북한에 25만명 소련군과 함께 진주해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88여단 출신의 중국인 생존자 27명과 몇몇 북한인사들도 이번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메달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구리로 만들어진 지름 32mm의 이 메달에는 승리라는 단어와 <1941-1945>이라는 연도가 새겨져 있다 10만여 개가 제작됐으며 제작 단가는 20달러(한국 돈 약 2만원)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8.가족관계
(1)김영숙(正室-큰 집)--김정일과 김영숙 사이에 1녀 출생
김정일이 김영숙과 결혼한 건 1974년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김설송이란 딸이 하나 있다 김영숙은 노동당 중앙당 김정일 집무실에서 근무하던 서기(타자수) 출신이다 김영숙의 고향은 황해도로 1947년 빨치산 출신 김철만(인민군 대장으로 국방위원. 대의원) 딸로 태어나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일설에 의하면 김영숙이 김정일의 아내가된 이후 고향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득을 보았다고 한다
김영숙은 공식 석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북한에서는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이란 게 없다 외국 국빈이 와도 특별한 경우외에는 공식석상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김정일은 그동안 외국원수를 공식적으로 접견한 사실도 없었기 때문에 김영숙의 존재는 더욱 더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추진된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는 혹시나 김영숙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역시 그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추진된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는 혹시나 김영숙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역시 그녀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2)부실(副室, 작은 집)
ㄱ.첫사랑 성혜림--김정일과 성혜림 사이에서 1남 출생
김정일은 1968년 무렵, 문화예술지도과장으로 영화제작지도를 맡으면서 "첫사랑"으로 일컬어진 한 여인을 만났다 그는 바로 영화배우 출신 성혜림이다 성혜림은 당시 딸을 하나 둔 유부녀로 김정일보다 다섯 살 위인 연상의 여인이었다
성혜림은 1937년생으로 경상남도 창녕에서 창녕 성씨(成氏) 부자집 집안 부친 성유경(成유경, 1982년 사망)과 김원주(김원추, 1994년 사망) 사이의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나 서울에서 서울사대 부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풍문여중을 다니다 1948년 부친 성유경 가족들과 함께 월북했다
그녀는 평양 제3여자중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예술학교를 나왔다
성혜림은 미인인데다 예의가 밝아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소설 <땅>으로 알려진 유명한 월북 작가 이기영(李箕永, 前 문예총위원장 84년 사망)의 장남 이평(李平)과 결혼해 딸 이옥돌을 낳은 뒤 다시 평양연극영화대학 연출과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성혜림은 이 대학 졸업반 때 김일성주석이 호평한 영화 <분계선 마을에서> 첫 여주인공을 맡았고 이를 계기로 문화예술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상인 <인민상>을 받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영화 <백일홍> <인민교원> <안개 흐르는 언덕>등에서도 여주인공을 맡아 북한 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그러나 이평과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성혜림은 영화에만 몰두했고 그 와중에 그녀는 프놈펜 국제영화축전에 두 차례 참가하면서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과 김일성 주석을 자연스럽게 접촉하도록 유도한 것이 김정일을 만난 계기가 되었다
성혜림과 김정일이 동거에 들어간 건 1969년 무렵, 김정일은 성혜림에게서 아들을 얻었다 그가 바로 1971년 5월 10일생 아들 김정남(金正男)이다 김정일은 성혜림과 동거하는 사실을 극비에 붙였다
그러나 성혜림이 김정일의 아이를 갖자 영화계를 비롯한 문화예술계에서 소문이 안날 수 없었다 이 사실은 성혜림의 시아버지 이기영의 귀에 들어갔다 꼿꼿한 선비였던 이기영은 끝내 붓을 꺾어버리고 이후 한줄의 글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김정일과 성혜림의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곡절이 많았다 또한 성혜림과 김정일의 갈등도 적지 않았다 김정일의 동생 김경희는 성혜림에게 "아이는 내가 키울테니 나가달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충격을 받은 성혜림은 아이를 데리고 나가버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정일이 공개적으로 성혜림을 찾을 수도 없어 애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성혜림은 1974년경부터 언니 성혜랑과 함께 모스크바의 한 아파트에서 살게 됐다 김정일은 그런 성혜림에게 옷과 음식은 물론 수백만 달러를 모스크바에 공수해 주었다고 한다
성혜림은 언니 성혜랑과 그의 가족일행이 함께 1996년 2월 모스크바를 탈출, 서방으로 망명할때 스위스까지 따라갔으나 그 후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모스크바로 되돌아 갔다 모스크바를 탈출한 성혜랑은 프랑스 정보기관 보호를 받았으며 성혜림은 2002년 5월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ㄱ)성혜랑
성혜랑은 성혜림의 언니이고 이태선과 재혼해 한명의 아들 이일만(이한영, 1997년 서울 사망)과 한명의 딸 이남옥을 두었고 이들은 서울과 서방으로 망명했다
(ㄴ)김정남(金正男)
김정남은 김정일과 성혜림 사이에서 1971년 5월 10일 태어났다 그는 그의 모친 성혜림의 병 치료차 모스크바로 떠난 이후 그의 외할머니 김원주와 이모 성혜랑등이 도맡아 키웠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 종합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국가보위부 간부로 활동하면서 국제문제와 첨단 산업등에 종사해왔다

ㄴ.사랑스런 여인 고영희---김정일과 고영희 사이에 2남 1녀 출생
고영희(고영자)는 제주(濟州) 고씨(高氏)로 1953년 6월 16일 일본에서 태어나 1960년 초 부친 고태문등 가족들과 함께 어린 나이에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녀의 본명은 <영자>로 북한이 1970년대 일제 잔재 차원에서 <자>가 들어간 이름을 전부 고치도록 조치함에 따라 고영희로 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의 부친 고태문은 북한 유도의 창시자이다 그리고 고태문은 유도선수 역도산(김광호)과도 절친한 친구 사이었다 그리고 고영희의 형제로는 남동생과 여동생 1명씩 있으며 여동생 고영숙은 1990년대 말 서방으로 망명했고 남동생은 고영희가 살고 있던 창광사 관저의 부과장 직책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영희는 만수대 예술단이 1973년 일본 공연을 가질때 단원으로 참가, 일본 언론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때 처음 일본언론에 고영희의 얼굴이 공개되었다 김정일은 고영희가 만수대 무용단원으로 활약할 당시 반했고 김정일이가 고영희를 집에 들어앉힌 것은 1976년경이다 김정일 옆에 앉던 고영희는 1977년부터는 파티에 나오지 않았다가 아예 살림을 차린 것이다
고영희와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 아들 두명을 두었고 딸 한명을 두었다 아들이 바로 1981년생 김정철과 1983년생 김정운이고 딸은 1986년생 김여정이다
고영희는 2003년 1월 8일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평양에서 교통사고로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상처를 입은 후 혼수상태로 있다가 2004년 6월경 사망했다
(ㄱ)김정철---1981년생 스위스 국제학교 졸업하고 노동당 선전부 간부로 활동함
(ㄴ)김정운---1983년생
(ㄷ)김여정---1986년생
-김정일 체제이며 고영희의 여동생 고영숙. 박건부부는 지난 1998년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9.현주소--평양시 중구 남산동 중앙당사

10.인물 평가자료
(1)신장과 체중--키가 중간 편이고 몸 무게 큰 비만형 몸 형체
ㄱ.신장---165cm
ㄴ.체중---85kg
(2)혈액형--A형
(3)취미. 건강관리--승마. 수영(전담연구소 운영). 영화감상. 사격등
ㄱ.즐거 보는 영화--007시리즈
ㄴ.1968년 노동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때 영화제작과 연출---피바다. 꽃 파는 처녀등
(4)성격
결단력과 추진력이 있으나 감정변화 심한 편(혁명가나 지도자보다는 김일성 후광으로 이미지형 인물로 평가됨. 김영남 북한정부 국가수반은 김일성처럼 입지전형적 인물이라면 김정일은 최고지도자로 상징적 인물로 평가 됨)
-김정일의 첩 아들 서자(庶子)출신 김정남등을 김일성주석에게 직접 소개하여 후계자로 키울 수 있게 할수 있는 김일성과 김정남의 만남 사진이 없다는 사실
-김정일이가 북한 국가원수로 외국방문을 한 예가 없고 그리고 비행기로 서방이나 국제회의 참석한 예가 없다

11.남북관계--군사우위입장에서 정경분리(政經分離) 원칙 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