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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터:오극렬 당작전부장의 아들 오세욱의 망명 자료 "김정일의 비자금 폭로" 본문

Guide Ear&Bird's Eye/유엔평화유지군(연합군-한국 국방부,NATO)

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터:오극렬 당작전부장의 아들 오세욱의 망명 자료 "김정일의 비자금 폭로"

CIA bear 허관(許灌) 2005. 6. 28. 20:14

지금까지 많은 군인들이 북한으로부터 망명해 왔지만 최고위급으로 되어 있는 인물은 인민군 대좌(대위) 경험자였다 그 가운데 작년 김정일의 측근이며 인민군 총참모장 경험도 있는 오극렬 당 작전부장의 아들 오세욱의 미국으로 망명했다는 정보가 흘러나왔다 오세욱의 망명이 사실이라면 최초의 수퍼거물 군인 일족의 망명이며 미국은 북한의 최고 기밀을 잡은 것이 된다 저널리스트 惠谷治( 에야오사무)가 미국의 의도와 거물 망명사건의 진상에 다가선다

 

작년(2004년) 11월 1일에 발매된 주간지 [아에라](11월 8일호)는 서울의 정보 소식통 주변의 이야기라면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북한군부의 초거물의 친족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군 내부를 상세하게 알고 있는 인물 같다 취재과정에서 부상된 인물은 오진우 당 작전부장의 아들이다]

그로부터 3일 후 NHK는 [당작전부장인 오극령 대장의 장남인 오세욱씨가 작년 2003년말 북한의 청진에서 배로 탈출하여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망명했을 가능성이 있다 오세욱씨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위대의 일원으로서 활동하였고 그의 직접적인 지시로 군 내부의 움직임을 조사했다]며 망명한 인물을 특정하여 전했다

  

그 후의 계속된 보도애는 오극렬 본인이 망명이라는데 까지였지만 지금에는 망명한 것은 오극렬부장의 장남인 오세욱이라는 것이 밝혀져 있다 이 보도가 있은 지 몇 주 후 나는 우연하게도 일본의 공안관계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거침없이 말했다

[오극렬의 아들이 극비리에 일본에 들어왔습니다 10월 초순 동경 도내(都內)에 있었음이 확인 되었습니다 IT관련을 담당하는 김정남은 지금 마카오에 있는데 그 대신의 시찰이었던 것이 같습니다]   

그 공안관계자는 오세욱이라는 이름은 모르고 망명사건과는 아무런 관계 없으며 극비정부를 밝혀주었다 그의 정보에 의하면 오세욱은 일본을 경유하여 망명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나는 미국 국방정보국(DIA) 소식통에 가까운 친구에게 사건의 내용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실은 나도 오세욱 망명사건에 대해 미국 국방정보국(DIA)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미국 국방정보국(DIA)는 [그 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질문하지 말라]는 말뿐이었습니다 때문에 이 망명사건은 대단히 중요하고도 미묘한 것이라는 것밖에는 알고 있지 못합니다]   

 

지난 3월 서울을 방문한 나는 오세욱의 망명에 대해 취재하는 중에 한국의 정보관계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정찰위성의 사진으로 해석하면 청진으로부터 탈북한 오세욱이 타고 있은 배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총수가 40명 정도이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정보내용의 정확도가 높은 것은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실증이 되었지만 그가 덧붙인 다음의 정보에는 다소 의문이 남는다 그것은 그의 정보출처의 정보 그 자체가 틀렸기 때문에 그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오세욱의 부친인 오극렬의 고향은 대구로 오극렬은 남조선 노동당 당원의 주선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전년인 1949년 실가(實家-本家)의 앞까지 간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오세욱에게는 미국에 사는 3명의 배다른 누이동생이 있어 그녀들이 탈북한 오세욱을  만나기 위해 은밀히 방일(防日)했습니다]

 

1.김부자(金父子,김일성 김정일부자)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온 오씨(吳氏) 일족(一族)

오세욱망명사건의 진상에 접근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오세욱의 가계(家系)를 아는 것이다

사건의 제1보에서 망명한 자가 오진우 또는 오극렬의 그 어느 편의 자식이라고 애매하였던 것은 두 사람 모두 김일성과 김정일의 부자독재(父子獨栽) 정권을 지탱해 온 오씨 일족이었기 때문에 다름이 아니다

[오극렬의 부친은 오중화(吳仲和)라하며 구(舊) 만주의 간도성 왕청현 석현출신입니다 김일성이 아직 중국 공산당 당원도 아니었던 1930년 당시 오중화는 이미 왕청오구(汪淸五區)의 당서기를 하고 있던 확고한 신념의 공산주의자였습니가 오중화는 7명의 형제로 동생인 오중흡(吳仲洽)은 김일성이 이끌고 있던 제1로군 제2방면군의 제7연대장을 하였고 1939년에 전사(戰死)했습니다 막내인 오중립(吳仲立)을 제외하고 형제 6명은 항일 빨치산 투쟁에서 전사했습니다]    

오극렬과 같은 세대로 항일 빨치산 투쟁인 내실(內實)에 정통한 길림대학의 임창배교수는 오씨일족의 가계에 대하여 나의 질문에 이상과 같이 답했다 임창배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오중화의 부친인 오태희(吳泰熙)는 4명의 형제로 오씨 일족은 왕청에 살았으며 일대에서는 유명한 가계였다고 한다(오씨 일족이 대구 경북에서 이주하였다고 한다 강건도 경북출신이었다 오세욱은 강건군관학교 출신이다)

덧붙이자면 1996년 출판된 김일성회고록 7권 속편에도 오태희와 오중흡의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거기에는 오중흡은 [형(兄)]이 아닌 [從兄인 吳仲和] 영향을 받고 항일 빨치산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전기작가들의 취재가 날림으로 오씨 일족의 가족관계도 파악하지 않은 듯하다

 

조선인민군에는 "근위(近衛) 서울 김책-서울 방어군" "근위(近衛) 서울 유경수" "금성친위(金星親衛)-경주지역 방위군"등 부대에 수여된 명예칭호가 있는데 항일 빨치산이었던 오증흡은 "충성의 화신(化身)" 으로 되어 그 미담(美談)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현재에는 오증흡 제7연대라는 명예칭호의 쟁탈전이 전개되고 있다

 

[인민무력부장이었던 오진우도 오씨일족으로서 오증흡이나 오중화의 조모(祖母)의 생질에 해당합니다 오극렬은 원래 비행사로서 공군사령관등을 역임하였고 동생인 오성렬은 정무원의 해운부장(海運部長)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형제 밑에는 누이 외에도 몇 명이 있었는데 이름은 잊어버렸습니다]

 

앞서 설명한 임창배교수는 이상과 같이 부언했다

1931년생인 오극렬은 해방 후 만주에서 평양으로 이사하여 1946년에 설립된 만경대혁명유아학원 제1기생으로 입학했다 그로부터 6년 후 10세였던 김정일이 만경대혁명학원 4학년에 편입되었다 두 사람은 제1기 동창이라 할 수 있으며 김정일쪽이 오극렬보다 11살 연하(年下)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오극렬은 19세로 공군소좌(공군소위)로 전쟁에 참가하였으며 1962년에는 모스크바의 공군대학에 유학했다(지금의 가가린공군대학) 귀국 후인 1964년 약관 33세에 장군(소장)으로 승진하였고 조선인민군 공군대학 학장에 취임 3년 후인 1967년 10월에는 공군사령관(중장)이 되었으며 다음달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초선(初選)되었다

이상과 같은 경력을 알게 되면 오극렬이 "1949년 대구의 실가(實家) 앞까지 갔다" "3명의 딸이 미국에 있다"는 등의 이야기는 신빙성을 결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오극렬은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중상으로 부재 중인 1979년 인민군총참모장에 취임했다 그는 1980년에는 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었고 1985년애는 대장까지 승진했지만 인민군의 개혁등을 둘러싸고 오진우와 대립하여 1988년에 당정치국 후보 위원과 총참모장직을 해임당하고 당 민방부장(黨 民防部長)으로 좌천되었다 (오극렬은 공군 출신으로 인민군 총참모장으로 재직 할때 남한 항공기 테러사건이 자주 발생해왔다 군개혁에서 항일 빨치산출신들의 육군 중시론자와 오극령등의 공군 중시론자의 싸움으로 좌천되었다고 본다 과거 북한의 공군은  소련 공군이 장악해왔다 구소련 자유화 개방화 정책이후 구소련 항미론자 항공기테러사건등 연루자들이 대체로 실각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김정일의 신임이 두터워 1990년 7월 3호청사(대남공작 부서)의 하나인 당 작전부장에 취임했다

[김정일과 오극렬은 아주 사이가 좋았는데 대남공작 담당비서인 김용순(2003년 사망)을 통하지 않고 직접 김정일에게 보고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예를들면 당 작전부가 암호로 정보를 수취하면 오극렬부장은 김용순대남총비서을 통해서 김정일에 보고하는 것이 규정이었지만 오극렬은 김용순에게 보고하기가 싫어서 직접 김정일에게 보고했습니다]

 

당 작전부의 전투원(공작원)이었던 안명진씨는 이상과 같이 증언했다  이상과 같이 증언했다 김정일의 술친구의 한 사람이었던 김용순이 사망한 후는 오극렬의 존재는 지금까지 이상으로 중요하게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미국으로 망명햇다고 하면 오극렬에 대한 김정일의 신뢰도가 떨어졌을 것으로도 생각된다      

 

2.망명작전에는 일본의 폭력단도 관여

김정일 총비서의 전속 요리사였던 등본(藤本)씨는 2003년 나온 회고록에서 "1998년경 오극렬의 아들이 쿠데타에 참가하여 처형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동아일보 2004년 11월 4일자는 오극렬의 아들에 대하여 이상과 같은 중요한 정보를 보도했다 기사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오극렬 의 아들은 한 사람의 쿠데타에 가담하였고 또 한 사람은 미국으로 망명이라면 두 사람이나 반역자가되었다고 하는 것이 된다

나는 등본거인(藤本健二)씨가 쓴 2권의 수기를 다시 읽어보았지만 동아일보의 기사와 같은 기술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등본(藤本)씨 본인에게 직접 확인해 본 바 " 오극렬이 누구인가요 나는 그런 이야기를 쓴 일도 없고 말한적도 없습니다"라는 답변이었다 한국의 신문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위험하다는 전형적인 예였다

1961년생인 오세욱은 1985년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부를 졸업한 후 강건종합군관학교에 입학하였고  현재는 인민군 대좌(대위)라고 한다

"군내부의 움직임을 조사했다고 하는 것으로부터 생각한다면 보위사령부에 근무하고 있은 것으로 생각된다"고 "고위급 장교출신의 탈북자"가 지적하고 있듯이(조선일보 2004년 11월 5일자) "김정일의 친위대원이 군내부를 조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NHK정보는 북한내정에 무지(無知)한 자의 오인(誤認)이다

 

앞에 나온 한국의 정보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세욱대좌는 보위사령부 요원 등이 아니라 외화벌이의 전조직(全組織)의 책임자로서 지난날에는 주석(主席)펀드로 불린 김정일자금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마약밀수라든가 위조달러와 러시아루불과의 교환도 임무였습니다 때문에 중국군부나 일본의 폭력단등과도 친했던 것이다]

 

이 정보와 관련해서 서울에서 만난 주한미군 정보관계자는 놀랍게도 극비정보를 밝혔다

[금번의 망명사건에는 중국군 간부 그리고 조총련의 일본의 폭력단이 협력하고 있습니다 오세욱은 청진에서 배로 탈출 수배를 한 것은 재일조선인 야쿠자였습니다 오세욱등은 동해 해상에서 기다려 받아들인 미국 해군의 잠수함에 이승되고 탈북한 40명 정도는 요코하마에 상륙했습니다]

배에 40명이나 탔다는 것은 다산계(多産系)의 오씨 일족 출신의 오세욱에게 많은 무리의 친족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해군의 어떠한 잠수함이 투입되었는가 흥미 있는  부분이지만 미국 해군 잠수함이 입항한 곳은 요코스카이고 "요코하마에 상륙"이라는 것은 40명이 급하게 머물은 장소로 생각된다 그는 중국 군부의 역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필시 오세욱을 직접 알고 있는 군간부가 신원을 보증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공작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말을 마지막을 매듭지었다

 

그러나 중국군 간부와 일본의 폭력단이 협력하여 미국해군의 잠수함이 북한의 탈북자를 영접하러 갔다고 하는 미중일(美中日)의 3국 공동의 비밀작전이 실제로 일어났을까 선뜻 믿어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앞서 말한 미군관계자는 미군은 오세욱이 망명정보를 일본과는 공유하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이 탈출자 회수가 대단히 중요하고도 미묘한 비밀작전이었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오세욱은 탈북한 시기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NHK정보는 2003년 말이 라고 말했으나 다리는 2003년 9월 또는 2004년 5월 6월등의 정보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사건이 보도되기 직전 한국군의 기무사령부 요원이 몰래 일본에 들어와 관서방면(關西方面)에서 정보 수집을 하고 있음을 나는 듣고 있었다   

"작년 2003년부터 기무사의 친구들이 몇 번이나 일본에 들어왔으며 카운터 파트인 방위청정보본부에서도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상해 하고 있었습니다"

친구가 가져다 준 정보로부터 생각해보면 오세욱망명사건은 2003년 가을에 일어났다고 추측된다 미군은 그해 북한의 자금원 차단과 전략적 허위정부 공작등에 의하여 북한을 혼란시켜 붕괴에 이르게 한다는 [작전계획 5030]을 책정했다  오세욱망명공작은 [작전계획5030]의 일환이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모두에 소개한 공안관계자가 [오극렬의 아들이 10월 초순에 동경시내에 있었다]고 말했을 때 그는 굳이 작년 2003년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첩보, 모략의 세계는 그 깊이가 깊은 것을  나는 다시 실감했다   

 

*경북출신 본가(本家)--강건. 박성철. 오극렬. 한덕수. 서만술등    

*상사와 북한 공작원--무역상사. 해운상사. 국제쇼핑몰이. 국제 주식펀드(동경. 서울.홍콩등) 등

중국과 일본, 남한지역등으로 구축된 무역회사 조직등

*국제 마피아 중국영화--북한 김일성 김정일 정부 대남공작이나 대일 대중국 공작

현지인 마피아와 공작원 협상(밀매), 선거(현지 북측 우호 회사 돈으로 정치자금 제공). 상권장악등    

*작전계획 5030(한미연합사)---북한지역 주민 중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신변보호(탈북자나 반체제인사등의 보호):개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사람들 보호

 

3.오극렬과 오세욱

(1)오극렬(吳克烈, 1931년생-74세)

ㄱ.대구출신

-오중화(부친):왕청오구(汪淸五區) 당서기로 공산주의자,오중흡(작은 아버지)등 6명이 빨치산 투쟁 전사

-오극렬의 할아버지 오태희는 대구에서 4명의 형제등 일족(一族)이 왕청(汪淸)으로 왔어 살았음

ㄴ.남조선노동당 당원의 주선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전년인 1949년 대구 본가 왔다감

ㄷ.경력

1946년 만경대혁명유아학원 제1기생 입학

1950년 19세때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공군소좌로 한국전쟁 참전

1962년 모스크바 공군대학(지금의 가가린공군대학) 유학

북한정부내 소련유학생 출신들이 반주체사상파로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세대로 알려져 왔다 이들은 자유화 개방화 군사혁명을 꿈꾸면서 김영춘 총참모총장등에 의하여 러시아 간첩으로 낙인 찍혀 숙청되어왔다 

1964년 33세 장군(소장)으로 승진과 조선인민군 공군대학 학장

1967년 10월 공군사령관(중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79년 인민군총참모총장

1980년 당정치국 후보 위원

1985년 대장으로 승진

1988년 당정치국 후보위원과 총참모장직 해임 그리고 당 민방부장

인민군 개혁등을 둘러싸고 오진우 인민무력부장과 대립하여 좌천

1990년 7월 3호청사 당작전부장

 

(2)오세욱(吳世郁, 1961년생) 

ㄱ.평양출신

오극렬의 아들

ㄴ.경력

-1985년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부 졸업

-강건종합군관학교 입학과 졸업(강건-경북출신) 

-인민군 대좌

ㄷ.오세욱의 미국 망명

"오세욱 대좌는 보위사령부 요원등이 아니라 외화벌이의 전조직의 책임자로서 지난달에는 주석펀드로 불린 김정일 자금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마약밀수라든가 위조달러와 러시아 루불과의 교환도 임무였습니다 때문에 중국군부나 일본의 폭력단등과도 친했던 것입니다"

"금번의 망명사건에는 중국군 간부 그리고 총련계의 일본의 폭력단이 협력하고 있습니다 오세욱이 청진에서 배로 탈출 수배를 한 것은 재일조선인 야쿠자였습니다 오세욱등은 동진 해상에서 기다려 받아들인 미국 해군의 잠수함에 이승되고 탈북한 40명 정도는 요코하마에 상륙했습니다"

    

 

 

 자료 http://www.hses.com/n05062201.htm

-항일 빨치산시절의 동료들은 김일성왕조를 뒷 받침하고 김부자의 신뢰도 두텁다(앞열 오른쪽부터 2번째가 김일성. 1943년 소련 하바롭스크 교외 브야츠코에촌에서 촬영 사진

-오극렬 일족 가계보(家系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