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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진실위 김형욱 사건 중간발표 요약 자료와 김형욱실종 관련 인물 각종 자료 본문
1.국정원 진실위 김형욱사건 중간 발표 요약
http://www.yonhapnews.co.kr/news/20050526/021200000020050526125022K2.html
다음은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2005년 5월 26일 오전 발표한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중간발표의 주요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1)사건 개요
김형욱 전중앙정부은 1963년 7월 이래 중정부장으로 재직하던 중 1969년 10월 발정희 던대통령이 3선 개헌의 1등 공신인 자신을 전격 해임하고 1973년 3월 유정회 국회의원 명단에서도 제외하자 1973년 4월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김형욱은 1977년 6월 <뉴욕타임즈>기자회견 및 미국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박정희 전대통령을 강력 비난한데 이어 박정희정부의 치부를 고발하는 회고록 출간을 추진하였다
이에 박정희정부는 1977년 6월 민병권 무임소장관을 대통령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여 김형욱을 설득, 회유하는 한편 국무총리 주재 김형욱 대책회의를 3차례 개최한데 이어 김형욱을 실질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1977년 12월 "외국정부에 대하여 도피처 또는 보호를 요청한 자"와 "외국에서 귀국하지 아니하는 자로서 죄상이 현저히 중(重)한자"를 처발할 수 있는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였고 당시 박정희 정부는 김형욱 회고록 출판을 저지하기 위해 여러 경로를 통해 김형욱에 대한 회유와 협박을 시도하였으며 동(同) 과정에서 김형욱은 1979년 10월 1일 단신으로 프랑스 파리에 도착 10월 7일 저녁 파리 시내 카지노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이후 실종 되었다
그간 각종 언론보도등 통해 국제 범죄조직 또는 정치적 보복에 의하 프랑스 현지 살해, 국내 압송 살해등 각종 의혹들이 유포되어 왔고 그 배후에는 당시 박정희 정부와 그 예하에 있는 중정이 이를 주도하거나 개입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어 왔다
(2)조사내용--관련 인물 면담조사: 총 33명
ㄱ.사건당시 중정 주(駐)프랑스 거점 요원 및 연수생:8명
(ㄱ)이상열 공사(76세,당시 주프랑스 중정 거점장)
3차례 면담 조사와 함께 김형욱 실종 사건에 개입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사건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진술 거부 의사를 표명
(ㄴ)신현진(가명, 당시 주프랑스 중정 연수생)
7차례 면담조사와 김형욱 살해 과정에 직접 참여하였음을 시인하면서 동(同) 살해 진해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진술함 다만, 사체유기 장소애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술 회피
(ㄷ)이만수(가명, 당시 주프랑스 중정 연수생)
6차례 면담조사와 김형욱살해사건에 직접 가담하였으며 하급자로서 부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시인하였으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진술을 회피함
(ㄹ)김철진(가명) 및 이일만(가명): 당시 중정 주프랑스 거점 요원
김철진은 1차례, 이일만은 3차례 면담조사를 하였으며 두 사람은 사건 당시 파리 현지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연수생등 일부 김형욱 살해 사건 가담자들은 이일만이 동(同) 사건의 기획임무를 담당하였다고 진술
(ㅁ)여타 연수생 3명
김형욱 실종사건 당시 연수생 6명 중 사건 가담자인 신현진, 이만수와 사망자 1명을 제외한 생존자 3명에 대해 각각 면담조사했으며 연수생 1명은 김형욱실종사건에 이상열공사, 공관원 이일만, 연수생인 신현진과 이만수가 관요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술하였으며 다른 연수생 2명은 사건 내용을 알지 못한다고 답변
ㄴ.중정본부 지휘계통 간부 및 직원:5명
중종 본부 차원의 조직적 가담 여부를 규명하기 위해 1979년 10월 당시 그 직위에 있던 윤일균 해외담당 차장, 김00 해외담당 국장, 이00 해외담당 부국장, 조00 유럽담당 과장, 황00 유럽담당과 주무관등을 각각 면담 조사하였다 상기명(上記名) 모두 사건 당시 중정차원에서는 조직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이상열공사는 개입된 것으로 본인다고 진술하였으며 김형욱 실종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시점인 1979년 10월 16일경 사건 진상파악 노력을 시작한 점으로 보아 사건 개입 가능성 희박하다고 본다
ㄷ.지원업무 담당 및 여타 해외거점 근무 중정 직원:4명
사건당시 해외통신등 지원업무 담당자 및 여타 해외거점 근무 직원 4명에 대한 면담조사한 결과, 김형욱 실종사건 개입 정황 미발견함
ㄹ.합수부 관계자 및 특파원 등 사건 주변 인물:16명
1979년 10.26사건 직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조사했던 전두환 전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이학봉 전 합수부 수사국장은 각각 면담시 10.26사건 당시 김형욱사건을 조사하거나 보고받은 사실이 전혀 없다고 진술하였고 신00(조선), 주00(중앙), 박00(동아)등 사건 당시 파리주재 특파원등 언론인 8명을 면담한 결과 그간 제기된 의혹이상의 구체적 정황이나 진술은 없었다 김경재 민주당 전의원은 2차례 면담, 송진섭 안산시장 1회면담으로 청와대 경호실 개입설 진위여부등을 문의하였으나 사건진상 규명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은 없었으며 김형욱을 파리로 유인하는 과정에 관련된 것으로 의혹이 제기된 연예인 최00, 정00등 여성 3명을 면담한 결과 개입 정황 미발견되었다 10.26사건 당시 김재규 부장으로부터 김형욱사건의 진상을 직접 득문 하였다고 주장하는 보안사 서빙고 분실의 김재규 부장 감시 헌병 박00을 2차례 면담조사하였으나 사건 실체를 알고 있진 못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3.조사결과
조사결과 김형욱은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의 지시에 의해 중정 주(駐)프랑스 거점 요원들과 이들이 고용한 제3국인들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밝혀짐
(1)살해동기
윤일균 전 중정 해외담당 차장의 진술에 의하면 김형욱이 김경재(필명:박사월)를 통해 박정희 정부의 비를 폭로하는 회고록 집필(김형욱 회고록 1. 2.3권)을 추진하자 박대통령은 1978년 12월 김형욱과 동향으로 친분관계에 있던 자신(윤일균)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급히 방미하여 김형욱과 회고록 관련 협상을 추진토록 지시하였으며 이에 따라 자신니 방미 김형욱에게 미화 50만불을 주고 회고록 원고를 받아내었으나 1979년 4월경 일본의 한 군소 출판사가 동(同) 회고록 문고판을 출간함으로 책내용이 국내와 일본, 북한 지식층에 전파되었고 박정희정부의 김형욱에 대한 분노가 고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형욱회고록 1.2권은 1982년경부터 지하서적으로 읽어지고 있다가 1985년도내 왔어는 일반화 되었다(북한에서도 김형욱 회고록 내용이 삐라유형으로 제작하여 바람 풍선으로 남한지역 살포되는 실정이었다)
(2)살해지시
김재규 부장은 1979년 9월말 이전 이상열 공사에게 김형욱 살해를 지시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상열 공사가 1979년 10월 1일경 귀국시 김재규 부장에게 김형욱 살해 계획을 보고한 후 그때 소련제 소음 권총과 독침을 수령했을 것으로 판단되고 있으며 김재규부장의 지시를 받은 이상열공사는 현지 중정 연수생 2명 등에게 김형욱살해 관련 임무를 부여하고 동(同) 연수생들이 준비를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살해 지시를 했는지는 박정희와 김재규 사망으로 정확히 확인 할 수는 없지만은 1977년 6월 16일 민병권 당시 무임소장관 미국 방문이나 윤일균 전 중정해외담담 차장의 "1978년 12월 박대통령이 자신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급히 방미하여 김형욱의 회고록 출판을 저지토록 지시를 내렸다"고 진술하는 점 그리고 1977년 6월말 최규하 내각의 김형욱대책회의 3차례 개최한데 이어 1977년 12월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란 특별조치법"을 제정한 점등을 볼때 박정희대통령이 김재규부장에게 직접 또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김형욱 살해를 지시하였다고 볼수 밖에 없다
(3)살해준비
ㄱ.살해 가담자 물색
김재규 부장의 직접 지시를 받은 이상열 공사는 1979년 9월경 김형욱 납치 및 살해 임무를 연수생들에게 맡기로 하고 신현진등 당시 파리 연수중이던 중정 연수생 5-6명을 자택으로 초대하여 대화도중 "요즘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어 문제다"라는 등으로 질책, 젊은 연수생들의 정의감을 부추기면서 반응을 타진했으며 연수생들에게 파리 주재 "북한 통상대표부의 현황과 실태등에 대항 관찰결과"를 보고서로 제출토록 하여 그 내용 검토를 통해 적극성, 과단성등 개개인의 자질을 검증한 후 최종적으로 신현진, 이만수 등 2명을 적임자로 선정했다
-김형욱이 곧 파리에 온다 중정부장을 지낸 사람이 거액의 외화를 빼돌려 카지노등에서 탕진하고 있으며 국가기밀을 마구 폭로하고 있다 이런 사람을 그냥 둬서는 안된다며 상부의 지시로 김형욱 처치해야 한다고 강조
ㄴ.살해계획 수립
신현진은 김형욱을 살해하기 위해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구라파 출신 제3국인 친구 2명에게 사건을 청부키로 하고 동인들을 접촉하면서 미화 10만불 제공 조건으로 살해을 의뢰, 승낙을 받았으며 또한 평소 기질이 맞아 친근하게 지내던 후배 연수생 이만수가 임무 수행시 보조역할을 맡기로 한 후 상기 제3국인 친구 2명을 이만수와 함께 수차 접촉 상호친분관계를 형성하는 한편 파리 시내 소재 <바뇰레> 벼룩시장에서 김형욱 살해에 사용할 칼과 노끈 등을 구입하고 1979년 10월 초경 이상열 공사를 다시 접촉 임무수행에 필요하다면 미화 10만불과 권총을 준비해 달라고 요청하는 등 살해 준비를 진행했다
(4)살해과정
1979년 10월 7일 오후 늦게 신현진은 이상열공사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이상열 공사 집에 도착하자 이상열공사가 "김형욱으로부터 돈을 빌려달라는 전화가 왔는데 돈이 없다고 거절하려다가 오히려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돈이 있는 사람을 소개시켜 줄 수 있다고 하여 만나기로 하였다" "2시간 뒤 샹젤리제 거리로 김형욱이 나오기로 했는데 지금이 좋은 기회다 오늘 처치해야 하니 이만수와 일꾼들을 불러라"라고 지시하였다
신현진은 인근 공중전화를 이용 제3국인 친구 2명과 이만수에게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리도극장>앞에서 동구라파 제3국인 친구 2명과 이만수를 접촉, 동인들에게 김형욱 살해계획을 설명하였으며 이만수에게는 미화 10만불이 든 가방을 가지고 개선문 근처 <빨레 데꽁그레>빌딩과 인접해 있는 <콩크드 라파예트> 호텔 34층 <르 플랭시엘>바에서 대기하도록 지시하고 이만수를 먼저 보낸 후 조수석에는 이상열 공사, 뒷좌석에는 제3국인 친구 2명을 태운 채 신현진이 운전하여 <리도극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김형욱과의 약속 장소로 이동하던 중 차내에서 신현진은 이상열 공사로부터 미리 받아 지니고 있던 소련제소음권총 1정과 독침 중 권총을 뒷좌석의 동구라파 제3국인 친구에게 제공하였다
그들은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김형욱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이상열 공사가 차에서 내려 김형욱에게 인사를 하면서 "운전하는 사람은 제가 아끼는 중정 연수생이고 뒷좌석의 두 사람은 제가 소개시켜 드리겠다고 한 전주(錢主)들입니다"라고 설명한 후 "이 분들과 어디 가까운 카페로 가서 이야기를 나눠보시죠 저는 저녁 약속이 있어 그냥 가보겟습니다"라면서 김형욱을 승용차 조수석에 앉게 하고 이상열공사 자신은 현장을 이탈하였다
김형욱은 카지노 도박 자금을 빌릴 목적으로 연수생 신현진이 운전하는 이상열 공사 관용차 조수석에 앉아 뒷좌석의 제3국인 2명과 돈 빌리는 문제를 협의할 카페로 가는 줄 알고 출발 당시 시각은 날이 어느 정도 어두워져 전조등을 켰을 때이며 신현진이 운전하는 승용차가 제3국인 친구들이 지시하는 대로 개선문 앞 로터리를 우측으로 돌아 시 외곽 순환도로를 건너 가던 중 김형욱 뒷좌석에 앉아 있던 제3국인 친구가 갑자기 김형욱의 머리 뒷부분을 주목으로 수차례 가격, 실신케 하였고 승용차는 파리 시내를 이탈, 파리교외로 이동하였으며 길가에 가로등이 켜져 있는 작은 마을을 지나 인적이 드물고 작은 숲이 내리막 방향으로 이어진 장소에 도착하여 제3국인 친구 2명이 차에서 내려 조수석에서 실신해 있는 김형욱을 양쪽에서 팔을 끼고 차에서 끌어내려 도로 우측 숲속으로 끌고 내려간 후 약 30분쯤 지나 돌아왔으며 제3국인 친구 2명은 신현진이 U턴시켜 놓고 기다리던 승용차에 탑승하여 김형욱의 바바리 코트에 여권, 지갑, 시계등의 소지품을 싸서 벨트로 묶어 건네주면서 도로에서 약 50m 떨어진 장소에서 김형욱의 머리에 권총을 쏘아 죽였으며 시체는 땅을 파지 않은 채 두껍게 쌓여있는 낙엽으로 덮어 버렸다고 보고 당시 신현진은 제3국인들이 김형욱을 살해 후 권총을 분실한 사실을 확인하였으나 신속한 현장 이탈을 위해 권총회수를 포기하였으며 계속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이었기 때문에 낙엽들에 의해 사체가 두껍게 덮여질 것이라 판단하였다 살해 당시 총성은 들리지 않았으나 제3국인들은 권총 실탄 7발을 모두 쐈다고 언급하였으며 신현진은 이들에게 불어로 <잘했어>라고 격려하고 이만수가 기다리고 있던 장소로 이동하여 이만수로부터 미화 10만불이 든 가방을 받아 제3국인 친구 2명에게 전달하면서 "내일 중으로 프랑스로 떠나라"라고 지시하였다
(5)사후조치 및 보고
ㄱ.신현진의 이상열공사에게 임무 수행 결과 보고
이상열공사 "수고했다"며 김형욱 여권, 지갑은 자신(이상열)이 가지고 다른 소지품들은 신현진에게 주면서 "철저리 인멸한 후 즉시 파리를 떠나 귀국하라"고 지시
출국 전 이상열 공사는 "그림(살해경과)에 대해서는 "신군 한테 들으십시오"라는 내용의 밀봉되지 않은 서신을 김재규 부장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ㄴ.신현진의 귀국 후 1979년 10월 13일경 김재규부장에게 김형욱 처리결과를 보고
김재규부장은 "수고했어 잘했어 우리가 그런 놈을 그냥 놔두면 우리 조직은 뭐하는 곳이야?"라며 살해에 사용한 권총을 분실하였다고 보고하자 김재규 부장은 "괜찮아, 소련제 권총이니 발견되어도 오히려 북한이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니 문제될 게 없다"면서 현금 300만원과 20만원이 든 봉투를 각각 2개씩 주어 그 중 1개씩은 이만수에게 전달하였다
ㄷ.이만수의 귀국 후 김일곤 차장보에게 김형욱 살해 결과 보고
이만수도 사건 직후 귀국하여 김일곤 차장보에게 살해결과를 보고하고 김일곤 차장보로부터 액수 미상의 상당히 많은 돈을 받았으며 김재규 부장이 준 돈도 신현진으로부터 전해받았다고 진술함
2.김형욱 실종 관련 인물 각종 자료
(1)김형욱--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사람
ㄱ.성명:김형욱(金炯旭)
ㄴ.생년월일:1925년 1월 16일(양력, 쥐띠)
ㄷ.출생지:황해도 신천
ㄹ.학력
(ㄱ)육사 졸업 (ㄴ)육군대 졸업 (ㄷ)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ㄹ)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
ㅁ.경력
(ㄱ)5.16군사쿠데타 최고회의 최고위원
(ㄴ)1963년 7월-1969년 10월 제4대 중앙정보부장 역임
(ㄷ)1971년 4월-1972년 10월 제8대 국회의원(공화당 전국구)
(ㄹ)1973년 4월 미국 망명
(ㅁ)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
(2)김형욱 살해공작 지휘계통
ㄱ.김재규---김형욱 살해 지시
김재규(1926-1980)는 금녕(金寧, 김해 옛 이름) 김씨이며 경북 구미출생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고향 사람이다 그는일본육사와 육군사관학교 제2기 출신으로 5.16 이후에는 국영기업체 사장,보안사령관, 군단장, 유정회 국회의원, 중앙정보부차장, 건설부장관을 역임하고 1976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다
비록 5.16의 주체는 아니었지만 우직한 충성심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저녁 궁정동의 만찬석상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유신시대의 종말을 앞당겼다
그러나 그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1980년 5월 24일 오전 서울구치소 사형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ㄱ)성명--김재규(金載圭)
(ㄴ)생년월일--1926년 3월 6일
(ㄷ)출생지:경북 구미
(ㄹ)학력--일본육사와 육군사관학교 졸업
(ㅁ)경력
-5.16군사쿠데타 가담 그리고 국영기업체 사장
-보안사령관
-군단장
-1973년 제9대 유정회 국회의원
-중앙정보부 차장
-1974년 제13대 건설부장관
-1976년 제8대 중앙정보부장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1980년 5월 24일 서울구치소 교수형
ㄴ.이상열(李相悅)--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김형욱 공작 총지휘자
(ㄱ)성명:이상열(李相悅)
(ㄴ)생년월일:1929년 11월 13일
(ㄷ)출생지:진천
(ㄹ)학력
1949년 춘천고 졸업. 1960년 연세대 상대 졸업
(ㅁ)경력
-1970년 주(駐)말레이사아 대사관 국방무관
-1974년 주(駐)사우디 참사관
-1976년 주(駐)사우디 공사
-1976년 주(駐)멕시코 공사
-1977년 주(駐)프랑스 공사
-1983년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
-1984년 주(駐)미얀마대사
-1987년 주(駐)리바아대사
-1990년 외교안보 연구원 연구위원
-1992년-1994년 주(駐)이란 대사
(ㅂ)김형욱과 관계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505/200505260214.html
이상열은 당초 군에 몸 담고 있었던 그는 1963년 "원충연 대령 반혁명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맺은 김형욱과의 인연을 계기로 중정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김형욱의 후원 아래 승승장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열씨는 이 사건에 중정최고 책임자였던 김재규 전 중정부장과 살해사건을 실행한 신현진. 이만수 두 행동요원의 가교 역할자이자 프랑스 현지에서 공작을 총지휘한 책임자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ㄷ.1979년 10월 7일 김형욱 살해 실행조
(ㄱ)신현진(가명)---주(駐)프랑스 중앙정보부 연수생
(ㄴ)이만수(가명)---주(駐)프랑스 중앙정보부 연수생
(ㄷ)제3국에서 고용한 살인청구업자 2명
ㄹ.1979년 10월 7일 김형욱 살해사건 기획임무 담당
이일만(가명)----주프랑스 중앙정보부 거점 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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