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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찾은 첫 중국 주석' 장쩌민의 한중관계가 현재에 주는 시사점 본문
'한국 찾은 첫 중국 주석' 장쩌민의 한중관계가 현재에 주는 시사점
CIA Bear 허관(許灌) 2022. 12. 2. 09:43
30일 사망한 중국 장쩌민 전 국가주석은 중국 최고 지도자 중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인물이다.
힌중 국교 정상화는 1992년 전임 지도자 덩샤오핑의 영향력 하에 진행됐지만, 이듬해인 1993년 국가주석이 된 장쩌민은 이후 한국과 총 10차례의 정상외교 등을 통해 양국간 교류 협력을 확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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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전 주석은 1993년 11월 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미국 시애틀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을 계기로 첫 한중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후 1995년 11월에는 중국 국가주석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 김 전 대통령과 만남을 이어갔다.
장 전 주석은 당시 방한 중 사회주의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한국 국회에서 연설하며 탈냉전 시대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을 극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과는 총 6번, 이어 취임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총 4번의 만남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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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G2로 도약할 기틀 마련.. 다자 외교 강조하며 한중 파트너십 발전에도 기여
장쩌민은 집권 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기치를 이어가 오늘날 중국이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국과 견주는 G2의 지위에 오르기까지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 전문가들은 장쩌민이 국가주석으로 취임했던 당시, 중국이 개혁·개방 추진을 통해 국제 사회의 정식적인 일원이 되는 과정을 밟아갈 여러 조건이 형성되고 있었다고 말한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강준영 교수는 "장쩌민은 상해시 서기로 일하다가 천안문 사태로 자오쯔양(중국의 3세대 정치인)이 실각하면서 중앙으로 발탁된 사람"이라며 "본래 사회주의사상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지만 개혁·개방에 대한 흐름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덩샤오핑 등 원로 등에 발탁이 됐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장쩌민이 주석으로 집권할 당시 "마침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서 개혁·개방의 기치를 제대로 펼칠 수 있었던 시대적 환경이라는 국운을 만났다"며 1997년 홍콩 반환과 1999년 마카오 반환, 2001년 중국의 WTO 가입 등을 그 환경으로 꼽았다.
전문가들은 또 장쩌민 집권 시기 한중 정상외교와 경제 협력이 활발하게 추진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중국이 대내외적으로 추진했던 개혁·개방 정책이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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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대학교 하도형 교수는 "장쩌민이 사영 기업가들도 공산당에 입당할 수 있게끔 하는 등 개혁·개방 정책을 강화했다"면서 "이런 흐름 속에서 중국이 2001년 WTO(세계무역기구, World Trade Organization)에 가입한 것은 이전까지 국제 질서에서 하나의 방관자 혹은 국외자 위치에 있던 중국이 국제 질서나 국제 경제 무역 여러 측면에서 본격적인 참여자로 활동하게 하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 교수는 또 장쩌민이 집권 시절 "책임있는 대국"으로서의 중국의 역할을 이야기하면서 중국 강대국 정치를 출발시킨 것"을 장쩌민의 정치적 업적 중 하나로 꼽았다.
1997년 한국이 국가부도 위기를 겪으며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던 당시 한국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환율이 떨어지는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중국이 인민폐의 평가절하를 할 수도 있었지만 장쩌민이 그렇게 하지 않고 "책임있는 대국"을 이야기한 것이 이후 국제 사회에서 중국의 위치를 자리잡게 하는 출발이 되었다는 것이 하 교수의 설명이다.
하 교수는 "중국이 그런 과정에서 WTO 가입까지 하면서 국제 경제나 무역의 측면에서 정상적인 하나의 행위자 혹은 참여자가 된 것"이라며 "이런 것을 바탕으로 미중 관계도 유지될 수 있었고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한중수교와 한중관계 발전도 이뤄질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국가간 상호의존성 심화의 시대.. '제로섬적 사고 지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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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집권 시기 중국은 당시 미국의 '단일극 체제'에 반해 중국도 극이 될 수 있다며 다극화 외교를 주창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이 여러 국가와 협력을 강조하며 한중관계도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전문가들은 당시에도 중국이 미국이나 한국 등 자유주의 질서를 추구하는 나라들과 이데올로기적 입장 차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한 입장차이에 집중하기 보다 교류 협력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협력 관계를 확대했다고 말한다. 특히 글로벌 공급망 등 국가간 상호의존성이 심화된 오늘날 더욱 이러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하 교수는 "과거의 냉전과 신냉전의 가장 큰 차이점은 현재 신냉전 하에서는 과거처럼 진영별로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라며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심화된다고 해도 미국이 중국에 공장을 두는 등 활발하게 경제 교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중국에 전면적인 봉쇄나 무역 제재를 가하는 식의 조치를 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하 교수는 심화되는 미중 경쟁구도 속에서 미국과 동맹국인 한국도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보다 "섬세하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지금 현재 양 진영간 여러 이견이 있음에도 교류 협력을 가능한 부분을 찾아서 확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에드가드 케이건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국장은 최근 한국이 미국, 중국과 맺는 관계에 대해 한 쪽을 얻으면 다른 쪽을 잃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고 밝히기도 했다.
케이건 국장은 29일 우드로윌슨센터가 주최한 토론회 기조연설에서 "기술협력과 지역∙국제 경제협력 등 더 많은 현안을 다루는 강력하고 현대화한 미한동맹과 생산적인 한중관계는 양립할 수 있다고 미국은 믿는다"며 "한국이 세계와 역내에서 더 큰 역할을 하고 한국의 입장을 매우 명확히 밝히는 게 중국과 더 강력하고 생산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더 쉽게 만든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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