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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이 만주국 집정...다루가치 가게무샤 본문

Guide Ear&Bird's Eye/중국 동북3성

푸이 만주국 집정...다루가치 가게무샤

CIA bear 허관(許灌) 2018. 3. 18. 11:45





                                      1931년 3월 1일부터 1945년 8월 18일까지 동북아 한반도(일본 식민지 조선총독부)와 만주(일본 자치 괴뢰정부 만주국)지도만주국을 세운 일본 제국주의자의 꿈은 몽골제국이 금나라를 징검다리로 하여 남송을 멸망시켜 중국 전역을 차지 하였듯이 만주국을 디딤 발판으로 하여 중국 남부를 세력 기반으로 한 장제스의 중화민국을 무너뜨려 중국 전토를 차지하자는 것이었다.
기마군단의 몽골처럼 상무적이며 기동성이 뛰어난 일본도 거의 성공할 뻔 했다.


그러나 일본에게는 몽골제국이 처했던 세력 상황과는 전혀 딴판인 아주 불리한 상황에 있었다. 광대한 해자(垓字)인 동시에 사통팔달 물의 초원인 태평양을 사이에 둔 거대한 해양세력이 뒤통수를 노려 보며 버티고 있었다.

비극의 발단 만주국의 설계자는 누구인가. 중국 입장에서 '외부의 적'은 일본 광동군 참모본부 장교들이었고 내부의 적은 '중국의 이완용' 정샤오쉬였다.

만주국을 사실상 통치한 이들은 일본 관동군과 일본 관료였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로 전후 일본국 총리를 역임하게 되는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 행정의 '덴노'였다

그렇다면 명목적으로 만주국의 최고지도자는 실질적으로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만주국 집정을 거쳐 만주국 황제를 역임하는 푸이는 허수아비이자 꼭두각시였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로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의 피를 이어받았으나 '겉은 진짜나 속은 전혀 딴판'인 가게무샤였다.

푸이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일본 관동군 영관급 장교가 푸이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고 사실상 '지시'했다. 이 관동군 장교는 '만주국의 다루가치'였다.

북한 김씨왕조의 3대 김정은이 8일 워싱턴에 지난 5일과 7일 평양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특사를 통해 비핵화와 회담 의사를 전달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5월 안에 만나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한반도 북한 핵위기 상황을 반전시킬 수도 있는 이러한 진전 상황에서 김정은은 설계자이며 집행자일까.

아니면 34세의 젊은 지도자는 단지 북한 실질적 집권 세력의 아바타나 가계무샤는 아닐까.

전자라면 실천하는데 '매우 매우' 험난하고 후자라면 '대단히 대단히' 위험하다.


1932년 3월9일 =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장춘(長春)에서 일본이 세운 괴뢰국‘만주국(滿洲國)’의 국가원수에 해당하는 직책인 집정(執政)에 취임했다.

민국 당시 중국 최고의 시인이자 서예가로 평가받던 정샤오쉬(鄭孝胥)(1859∼1938)가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정샤오쉬는 청말 철도국유화를 건의하였으며 후난포정사(湖南布政使)로 이를 강행,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직접적 계기를 마련한 장본인이다.

그는 1924년 이후 톈진(天津)에서 푸이를 가르치는 어전교육에 종사하며 만주국 건국에 참여하였다.

정샤오쉬가 뛰어난 서예가였다는 점은 역시 글씨로 이름을 날렸던 한말의 민족 반역자 이완용을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이완용은 개화파와 수구파가 대립할 때 개화파에 속하엿다. 정동구락부의 일원으로 처음에는 친미파였다.

1895년 을미사변 후 1896년에 이루어진 아관파천에 참여하면서 친로파로 변신했다. 이완용은 독립협회에도 참여, 독립문의 글씨가 그가 쓴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그는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을사늑약체결에 학부대신으로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1910년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으로서 일본이 한일합방 조약을 강제하는데 적극적으로 협조, 민족 반역자로 자신의 최종적인 역사적 위치를 자리매김했다.

이완용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완용은 이처럼 정샤오쉬의 완벽한 전철(前轍)이었다.

푸이는 수도 장춘을 신경(新京)으로 개칭했고 연호를‘대동(大同)’으로 하였다. 푸이는 다음 해인 1933년 만주국을‘만주제국’으로, 집정을‘황제’로 개칭한 뒤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양과는 달리 만주국의 실질적 권한은 일본 관동군이 장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