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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군' 오노다 히로오 소위 91세 사망 본문
Hiroo onoda is born on March 19, 1922, in Kainan, Wakayama Prefecture, Japan. Graduating from the Japanese army’s Nakano School in 1944, he was assigned to active duty in the Philippines. After the U.S. army had landed on the Lubang Island in February 1945, he hid in the island jungle and waged his own guerilla war there for 29 years, ignoring the surrender order given by the Allied Forces[오노다 히로오는 일본, 와카야마 현, 카이 난에서 1922년 3월 19일 태어나다. 1944년 일본 육군 나카노 학교를 졸업 한 그는 필리핀에서 현역으로 지정되었다. 미 육군은 1945 년 2 월에 Lubang 섬에 착륙하고 난 후에, 그는 섬의 정글에서 숨어 연합군에 의해 주어진 항복 순서를 무시하고 29년 동안 거기에 자신의 게릴라 전쟁을 벌였다]
'마지막 황군' 오노다 히로오가 사망했다고 AFP통신이 17일 보도했다. 향년 91세.
오노다 구(舊) 일본군 소위는 16일 오후 4시 반께 입원중이던 도쿄도 내 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필리핀 루방 섬에 주둔중이던 오노다 소위는 1945년 2월 연합군이 필리핀을 탈환하고 그 해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투항을 거부한 채 밀림에서 지냈다. 이후 29년만인 1974년 주변의 권유로 투항하며 문명세계로 나왔다. 투항 당시에도 그는 구 일본군 군복을 입은 채 일본도와 소총, 수류탄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일본 우익 진영의 영웅대접을 받으며 귀국한 오노다는 한때 브라질 이민 생활을 하기도 했다
육군사관 시절의 오노다 히로
*오노다 히로
오노다 히로(小野田寛郎, 1922년 3월 19일 ~ 2014년 1월 16일)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는데도 29년 동안 필리핀의 정글에 숨어서 항복하지 않았던 일본 장교이다
오노다 소위는 필리핀 루방 섬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의 정보장교였다. 1945년 2월 연합군이 루방 섬을 점령하면서 대부분의 일본군은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하였는데, 오노다 소위와 몇명은 정글 깊이 숨어 들었다. 오노다 소위는 처음에 세명의 동료와 함께 산에서 살았다. 그 중에 한명은 필리핀 정부군에 항복했고, 나머지 두명은 각각 1954년과 1972년에 지방 순찰대와 교전중에 총에 맞아 사망했다. 오노다 소위는 2차 대전이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끝끝내 29년 동안이나 투항을 거부하며 정글에서 홀로 지냈다. 2차 대전중 연합군이 살포한 선전물은 물론 2차대전이 끝나고 필리핀 정부군이 뿌린 '전쟁은 끝났으니 항복하라'는 내용의 선전물까지 자신들을 기만하는 계략이라고 굳게 믿었다. 일본 정부와 오노다의 가족들도 필리핀에 와서 항복을 권유했지만, 이것도 연합군의 계략이라고 생각하여 응하지 않았다. 결국 1960년 일본 정부는 오노다가 사망한 것으로 공식 판정했다
스즈키 노리오 교수는 필리핀의 정글에서 행방불명된 오노다 소위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느끼고 그를 직접 찾겠다고 결심했다. 1974년 루방 섬을 방문한 스즈키는 결국 오노다를 찾는데 성공했다. 스즈키는 일본이 패망하면서 2차대전이 끝났으니 항복하라고 오노다를 설득했으나, 오노다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그렇다고 해도 직속상관의 명령이 없으면 투항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스즈키는 일본으로 돌아와서 오노다의 직속상관 타니구치 소령을 찾았고, 제대후 도서 판매상이 된 타니구치는 스즈키와 함께 루방 섬에서 오노다를 만나 투항을 명령했다. 오노다는 2차 대전에서 끝내 일본군이 패망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오랜 설득끝에야 투항을 결심했다. 투항 당시 오노다는 일본군 복장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으며, 사격이 가능한 상태로 99식 소총을 정비해 놓고 500여발의 탄환과 대여섯개의 수류탄도 가지고 있는등 장비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오노다가 29년 동안이나 정글에 숨어서 지역 순찰대와 게릴라전을 벌이느라 30명의 필리핀 사람을 죽이고 100여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나, 당시 필리핀 대통령이었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오노다의 범죄를 사면해줬다. 22세에 조국을 떠났던 청년은 52세가 되어서 일본에 돌아왔고, 일본국민들에게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패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일본 국민들은 오노다에서 '살아있는 일본 정신을 보았다'고 열광했고 극우파들은 오노다야말로 옛 일본의 가치를 그대로 간직한 진정한 사무라이라고 칭찬했다. 30년 동안이나 필리핀의 정글에서 숨어지냈던 오노다는 현대화된 일본에 적응하지 못하고, 브라질로 떠나서 목장을 경영하였다가, 1984년 오노다 자연학교(小野田自然塾)를 설립하여 아이들을 자연속으로 살아갈수 있도록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1996년 루방 섬을 다시 찾아가 현지 학교에 1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그 뒤 다시 일본으로 귀국하여 결혼하였다.
이후 아내와 함께 우익활동가로 활동하여, 일본의 일본군 위안부의 책임을 부인하고, 일본군에 의한 남경 대학살을 중국측에 의한 조작이라고 외치며 부정하였다.
2014년 1월 16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91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복무-일본제국 육군
복무기간-1942년부터 1974년까지
최종계급-소위
근무-필리핀 군사령부 참모부, 일본제국 육군 8사단 참모부
주요 참전-루방 섬
The turning point comes on Feb. 20, 1974, when Hiroo onoda met Japanese explorer Norio Suzuki who had ventured out to the Lubang Island in pursuit of onoda. Suzuki told onoda that Japan had surrendered and the war had been over for a long time. onoda still refused to surrender, saying he wouldn’t give up until he saw with his own eyes the written order of his commander. He also said he would hand over his well-kept sword to the Emperor of Japan himself. Suzuki promised to deliver the commander’s order to onoda[전환점은 오노다 히로오는 오노 추구 Lubang 섬에 나섰다가 일본 탐험가 노리오 스즈키 교수에게 1974년 2월 20일에 발견 되었다. 스즈키는 일본이 항복했고 전쟁이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을 오노다 히로오씨에게 말했다. 오노다 히로오는 여전히 그는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지휘관 직속상관 타니구치 소령을 볼 때까지 그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항복을 거부했다. 그는 또한 일본의 천황에게 자신이 잘 보관하고 있는 칼을 넘겨 것이라고 말했다. 스즈키 노리오 교수는 지휘관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약속했다]
On March 9, 1974, Hiroo onoda finds a short note left by Suzuki, saying that his former commander Taniguchi Yoshimi had arrived in the Philippines, together with a complete photo-offset copy of the withdrawal order from Japan’s military. Two days later, onoda arrived at the arranged meeting point.[1974년 3월 9일에서 오노다 히로오는 그의 전 사령관 타니구치 요시미 함께 일본의 군사로부터 철수 명령의 전체 사진 오프셋 사본, 필리핀에 도착했다고 말하고, 스즈키교수 왼쪽으로 짧은 메모를 발견한다. 이틀 후, 오노 배치 만남의 장소에 도착했다]
Hiroo onoda salutes his commander Taniguchi Yoshimi who returns the salute and reads out the surrender order to onoda. Thereupon, onoda took off his weapons and walked straight into the Lubang Island Police Station[
On the morning of March 10, 1974, Hiroo onoda, wearing his old Japanese military uniform, arrived at Lubang Island Police Station. He bowed to the people there and laid down his weapons, saying, “I am Lieutenant Hiroo onoda and I have received orders to surrender to you.”
Onoda had killed a total of 130 Filipinos in 30 years, including soldiers, policemen and civilians. Many Filipinos suggested onoda be locked in jail and punished according to the law. However, with the Japanese government’s mediation, the then Philippine President Ferdinand Marcos pardoned him and allowed him to return to Japan[1974년 3월 10일의 아침, 오노다 히로오는 자신의 옛 일본군 제복을 입고, Lubang 섬 경찰서에 도착했다. 그는 거기에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말, 자신의 무기를 규정 "나는 중위 오노다 히로오, 그리고 난 당신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노다는 군인, 경찰과 민간인을 포함, 30년 전 130명 필리핀인을 총으로 살해했다. 많은 필리핀은 오노다가 감옥에 갇혀 법에 따라 처벌 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중재로, 당시 필리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은 그를 용서하고 그를 일본에 반환 할 수있었습니다.]
On March 12, 1974, Hiroo onoda returns to Japan together with Norio Suzuki and Taniguchi Yoshimi.[1974년 3월 12일 오노다 히로오씨는 노리오 스즈키, 타니구치 요시미와 함께 일본에 돌아왔습니다]
After his return to Japan, Hiroo onoda finds he has trouble sleeping at night. Even the noise from everyday household electric appliances, televisions and jet planes would scare him. In April 1975, he bought a farm in a forest of Brazil and settled down there. In 1984, he returned to Japan and opened up a private school to teach children survival skills in the wild. He lived out his elderly days in Tokyo and gave lectures across the country[일본에 돌아온 후, 오노다 히로오는 그의 고통이 밤에 잠을 잘 때 발견했다. 심지어 일상적인 가정 전기 제품, TV와 제트기의 소음에도 그는 놀랬다. 1975 년 4 월, 그는 브라질의 숲에있는 농장을 구입하고 거기에 정착. 1984년, 그는 일본에 반환 야생에서 어린이들에게 생존 기술을 가르치는 사립 학교를 열었다. 그는 도쿄에서 자신의 노인 일 밖으로 살고 전국 각지에서 강의를 했다]
군국주의는 軍政分離主義 국가에서 등장해왔다
軍은 국군으로 군정통합주의 국가가 돼야 文民政府(민주정부)가 될 수 있다
일본이 2차대전이후 일본 국왕은 싱징적 국가원수이고 수상이 내각수반이다
2차대전처럼 일본군이 군 통수권이 독립돼 운영해온 독자 군사기구(침략군대기구)가 없어졌다
지금도 중국이나 북한등 군정분리주의 좌익군정에서는 군사위원회나 국방위원회등으로 독자 군사기구를 두고 있다 침략전쟁은 대부분 군벌등장으로 시작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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