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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 89세 무가베, 재집권 성공…정국 불안 본문

남부 중앙아프리카 지역/짐바브웨(Zimbabwe)

짐바브웨 89세 무가베, 재집권 성공…정국 불안

CIA bear 허관(許灌) 2013. 8. 4. 22:22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흑인 민족주의자로서 1당지배체제를 수립했고, 1987년에 짐바브웨의 대통령돼 국가사회주의 독재자 89세 무가베 모습

 

아프리카 최고령 장기 집권자인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89) 대통령이 7번째 집권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강력한 경쟁자인 모건 창기라이 민주변화운동(MDC) 당수가 이번 선거를 부정선거로 규정해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법적 대응에 나서기로 해 정국 불안이 이어질 전망이다. 다만 창기라이측이 장외투쟁을 선언하지 않아 지난 2008년 대선 후 발생한 유혈 폭력사태는 일단 피할 수 있게 됐다.

 

무가베 대통령의 승리는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33년 동안 통치해온 무가베가 경찰과 군, 사법기관, 언론매체 등을 동원해 승리를 놓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일간지 프리토리아뉴스는 지난달 30일 사설에서 무가베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승리할 수도 있지만 그 결과가 무가베 측이 장악한 안보 당국과 언론매체, 선거 집행 기구 및 사법체계를 동원하고 조작해 이긴 것인지 구별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안타깝다고 지적한 바 있다.

무가베 대통령은 경제 안정 등 난적한 산제를 안고 있다. 또 고령인 그의 후계 문제를 둘러싼 여당 ZANU-PF(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연맹-애국전선)의 내부 권력 투쟁도 갈수록 심각해질 것으로 관측된다.

 

먼저 일자리와 식량 문제 해결 등 경제 문제는 무가베 대통령 정부의 최대 과제다.

 

무가베 대통령은 경제정책의 실패로 지난 2008년 인플레이션이 무려 5천억%에 이르는 지경에 이르러 경제가 결딴났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지난 2009년 수도 하라레에서 계란 1개 값이 10억짐바브웨달러였다. 그러다가 같은 해 출범한 무가베-창기라이 거국 정부에서 MDC 인사로 재무장관을 맡았던 텐다이 비티가 짐바브웨달러 통용을 금지하고 미국 달러와 남아공 랜드화, 영국 파운드화 통용을 허용하면서 물가가 안정됐다.

 

이에 따라 무가베 대통령 정부가 이처럼 심각한 경제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나갈지 주목된다. 무가베 정부가 국민의 생활고를 해결하지 못하고 또다시 경제파탄 상황이 발생할 경우 심대한 국내적 압박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함께 후계 구도를 둘러싼 암투도 가시화될 전망이다. 무가베 대통령은 이번 선거 운동 기간 선거 유세에 직접 나서면서 건강을 과시했다. 하지만 워낙 고령이어서 그동안 건강이상설이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그는 정기적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해 진료를 받아왔다.

 

무가베 대통령 후계 구도는 그동안 강경파인 에머슨 므낭가과 국방장관과 온건파인 부통령 조이스 무주루(여)가 대립해왔다. 지난 2011년 무주루 부통령의 남편이자 전 군참모총장인 솔로몬 무주루가 의문의 화재로 사망하면서 강경파가 득세한 것으로 관측돼왔다.

 

이번 선거에 앞서 창기라이가 승리할 경우 군부에서 쿠데타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 때문에 무가베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승리를 '강탈'해도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를 묵인할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됐다. 군부 쿠데타가 발생해 그 여파로 남부 아프리카 지역 정세가 불안정해지기보다는 무가베가 일단 권력을 장악해 지역 안정을 도모하는 게 아프리카의 급선무라는 것이다.

지난 2008년 대선 폭력 사태에 개입해 무가베 대통령-창기라이 총리 거국정부를 중재시킨 남부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는 이번 선거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진행됐다며 당사자들이 선거 결과를 존중할 것을 촉구했다. SADC에는 남아공 등 남부 아프리카 국가들이 가입해있다.

 

                                                            짐바브웨 야당 민주변화운동(MDC) 지도자 모건 창기라이 모습

 

무가베 [Robert (Gabriel) Mugabe]

1924. 2. 21 남로디지아 쿠타마~.

구(舊)로디지아에서 재건된 짐바브웨 공화국의 초대 총리(1980~87).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흑인 민족주의자로서 1당지배체제를 수립했고, 1987년에 짐바브웨의 대통령이 되었다.

시골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로마 가톨릭 선교학교에서 교사교육을 받았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는 포트헤어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민족주의 정치학을 접했고, 1950년대 후반 몇 년을 가나에서 보냈다. 1960년 로디지아로 돌아왔으며, 1963년 은다바닝기 시톨레 신부가 은코모가 이끄는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동맹(Zimbabwe African People's Union/ZAPU)과 결별하고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동맹(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ZANU)을 설립하도록 도왔다. 1964년 '파괴적 언동'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서 10년을 보냈다. 이 기간에 통신교육과정을 통해 법률학위를 취득했고 감옥에 있으면서도 1974년 쿠데타를 일으켜 ZANU의 지도자인 시톨레를 물러나게 했다.

1975년에 석방된 뒤 아이언 스미스 총리가 이끄는 백인 통치계급의 로디지아 정부(1975~79)에 대항해 로디지아 다수의 흑인 국민을 싸우게 만든 내란기간 동안, 은코모와 더불어 짐바브웨 애국전선(Patriotic Front of Zimbabwe)의 공동지도자로 활동했다. 애국전선의 게릴라들은 이웃지역인 잠비아·모잠비크·앙골라 등에 있는 기지에서 로디지아 정부에 대항해 활동했다. 1979년 런던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협상으로 전쟁이 끝나고 1980년 2월 영국의 감시하에 새로운 의회선거를 실시했다. 그가 이끄는 당이 다른 흑인의 당들을 누르고 압도적 승리를 거두어 총리가 되었다.

총리가 된 무가베는 짐바브웨에 남아 있는 백인 농부와 사업가들의 기술이 국가경제에 필수적이었으므로, 처음에는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실용주의 노선을 따랐다. 그는 다수인 쇼나족의 지지를 받은 자신의 ZANU당과 소수인 은데벨레족의 지지를 받은 은코모의 ZAPU당의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그리고 백인들의 실질적인 의회진출을 보장한 신헌법의 법령을 준수했다. 동시에 임금인상, 공공사업의 개선, 식료품보급 등을 통해 짐바브웨의 흑인들의 생활을 개선시켰다. 1982년 연립내각에서 은코모를 축출했으며, 쇼나족과 은데벨레족의 민족싸움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짐바브웨의 경제는 무가베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점점 쇠퇴했으며, 많은 수의 백인들이 계속해서 이민을 갔다.

무가베는 항상 짐바브웨를 의회민주주의에서 1당지배의 사회주의 국가로 전환시키려고 했다. 1984년 ZANU 또는 인민전선(Popular Front/PF)으로 불리는 그의 당이 의회를 장악해 그를 유일한 지도자로 선출했다. 그리고 당과 짐바브웨를 통치하는 중앙위원회·정치국을 가진 새로운 당체제를 설립했다. 1987년 무가베의 당과 은코모의 당은 ZANU(PF)의 이름으로 통합했고, 1987년 12월 31일부터 무가베는 1당지배하에 들어가는 짐바브웨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무가베는 신당의 초대 당서기가 되어 짐바브웨에서 절대적 권력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