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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도에 표지석 설치 영유권 주장 본문
한국 경상북도 지방정부는 19일 오전 독도(일본명 다케시마)에 독도수호표지석을 설치해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을 주장했습니다.
표지석의 제막식은 독도의 동도전망대에서 진행됐습니다.
한국 행정안전부 맹형규장관은 연설에서 한국 국민의 뜻이 담긴 표지석은 독도에 대한 한국의 주권을 상징하고 있고 독도를 지키는 정신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높이 115cm, 너비와 두께가 각기 30cm의 표지석 정면과 뒷면에는 이명박대통령이 친히 쓴 "독도"라는 글자와 "대한민국"이라는 글자가 각기 쓰여져 있으며 이명박대통령의 친필서명이 있습니다.
독도는 한반도의 동북부해역에 위치해 있는 면적이 0.18평방킬로미터인 섬입니다.
일본과 남북한은 모두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고 독도는 현재 한국이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있습니다. (중국 국제방송)
한국, 다케시마에 한국 영토 주장하는 표지석 세워
일본 시마네 현 다케시마, 한국명 독도에 19일 한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새로운 표지석이 세워져 한국정부의 각료도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이 열렸습니다.
이는 한국의 경상북도가 제작한 높이 1 미터 가량의 표지석으로, 다케시마의 한국명인 '독도'라는 섬의 명칭과 '대한민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19일 오전에 열린 제막식에는 경상북도 지사 외에도 한국정부에서 지방자치단체를 관할하는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과 국회 부의장도 참석했습니다.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은 "국민의 뜻이 담긴 표지석은 한국 주권의 상징이 되고, 섬을 지키는 정신이 될 것"이라며 새 표지석이 갖는 의의를 강조했습니다.
제막식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기념일인 지난 8월 15일로 예정돼 있었으나, 기상 악화로 연기됐었습니다.
다케시마와 관련해서는 지난 10일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상륙해, 일본정부는 다케시마의 영유권과 관련해 국제법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위한 절차에 들어가기로 방침을 굳히고, 한국측에 공동제소에 응하도록 요구했습니다(일본 NHK)
*독도(獨島)의 개요와 주요 자료, 지형학적 역사적 언어학적 입장에서 한국
1.독도(獨島)의 개요(槪要)
(1)위치
북위 37도 14분 18초. 동경 131도 52분 22초 지점(한국 동해 최동단에 있는 섬)
한국 울릉도 섬에서는 88km이고 일본 오끼군도(섬)에서는 158km 거리이다
울릉도에서는 독도의 조망이 가능하나 일본 오끼섬에서는 조망이 불가능하다
(2)행정구역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37번지
(3)면적----5만 6301평(18만 6,121평방m)
ㄱ.독도는 동도(東島)와 서도(西島)라는 2개의 섬과 주위에 흩어져 있는 36개의 암도(巖島)와 암초로 이루어져 있다 암도나 암초들은 각각 가제바위, 독립문 바위, 구멍바위, 지네바위,미륵바위등의 이름들이 붙어 있다 이렇게 볼때 독도는 아주 작은 규모의 바위 군도라고 하겠다
(ㄱ)동도(東島)
동도의 면적은 6만 4,800평방m이고 최고 높이 99.4m의 섬으로 꼭대기의 비교적 평탄한 부분에 등대. 경비초소등이 설치되어 있다
-울릉도 경찰서 독도경비대 대원 근무
(ㄴ)서도(西島)
서도의 면적은 9만 5400평방m이고 최고높이 174m로 가장 크고 높은 섬이나 산정이 뾰족하고 사면 경사가 급하여 장비 없이는 오를 수 없다
-서도에는 주민 김성도 외 그의 가족 1명 거주
ㄴ.독도 땅 1평의 최고 31만원 공시지가 첫 경북 울릉군은 2000년 7월 4일 독도의 땅값(공시지가)을 산정 발표했다 34개 섬으로 이뤄진 독도의 총면적은 5만 4천 7백 22평으로 이번에 확정된 공시지가를 적용할 경우 독도 전체의 땅값은 2억 6천 2백 92만 1천여원이며 한평의 가격은 평균 4천 8백 4원이다 가장 비싼 곳은 접안 시설이 있는 독도리 산 27. 28번지와 헬기장이 있는 산 35번지 평지로 31만 4천 51원이다
(3)인구(주민)
주민으로는 서도에는 김성도외 그의 가족 1명이 전입해 살고 있고 동도에는 울릉경찰서 독도 경비대 대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4)자연환경
ㄱ.지질. 지형. 기후
(ㄱ)독도(獨島)는 석도(石島, 돌섬)이라고 한다 많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 암도(巖島)와 암초이다
(ㄴ)비가 자주 내리고 있으며 늘 거센 파도가 출렁거리고 바람이 심하다
(ㄷ)1965년에 서도의 동북쪽에 해안에 있는 약 5미터 높이의 한 동굴에서 하루 10드럼 정도의 맑은 물이 나오는 것으로 발견됐다 그 이후 이 물로 이곳에 조업하는 어민들은 물론 바다에서 조업하는 어민들의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ㄹ)독도에는 나무와 풀이 제대로 살수 없는 곳이다 나무의 겨우, 소나무과와 장미과 및 노박덩굴과등 세 종류로 목본식물이 자라는 것으로 보고 되어 있다
ㄴ.생태. 해류
(ㄱ)소나무과와 장미과 및 노박덩굴과 등 세 종류가 분포하고 있으며 초본식물 여뀌과와 명아주과 및 질경이과등 �몇종이 비탈이 완만한 곳에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분포는 돌섬으로 비약하다
(ㄴ)독도에는 많은 새들이 모여 살고 있다 바다제비, 슴새, 괭이갈매기, 황초롱이, 물수리, 노랑지빠귀등이 대표적이다 바다제비와 슴새 및 괭이갈매기의 번식지는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돼 있다 흔히 괭이갈매기를 천연기념물 제336호라고 말한다
(ㄷ)곤충류로는 잠자리, 집게벌레, 메뚜기, 매미, 딱정벌레, 파리, 나비등 7목 26과 37종이 보고되어 있다 국내에서 독도에서만 발견되는 것도 3종이 있다
(ㄹ)독도에서 서식하는 자연산 육상 포유류는 전혀 없다 경비대가 1973년에 본토에서 토끼 열마리를 가져다가 놓아먹인 것이 지금은 번식해 그 수가 매우 많아졌다
ㄷ.어업환경
(ㄱ)독도의 주변 바다 암초에는 물개가 서식하고 있다 이 물개를 울릉도 주민들은 가제라고 부른다 이 때문에 한때 독도를 가제도라고 부르고 한문으로 가지도(可支島)라고 썼다 서도 북쪽에 있는 가제바위도 물개가 자주 나타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직도 가제가 많이 분포하고 있다
(ㄴ)독도의 주변에는 많은 수산 자원들이 있다 전복. 소라. 게. 홍합등이 대표적인 보기들이다 미역과 다시마등 해조류도 다양하다
독도나 울릉도에 6월 7월에 가장 많이 포획되는 것은 오징어이다
괭이 갈매기 먹이가 오징어이다 그러니 독도주변에는 오징어와 괭이 갈매기가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다
(5)역사
독도와 울릉도는 모자(모자) 관계에 있는 섬이고 오랫동안 무인도로 있었으므로 그 역사를 살피기 위해서는 울릉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울릉도가 고려현종 이후 중앙정부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관원이 여러 차례 파견되었고 조선시대에도 자주 관원이 파견되어 동해상에 울릉과 우산(독도) 2섬이 있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을 예방하기 위한 공도정책으로 한동안 주목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가 17세기말 일본에 피랍된 동래의 어부 안용복의 울릉도 영유권 주장을 계기로 다시 관심을 끌게 되었다 안용복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1697년 대마도 도주(島主)가 일본 어민의 울릉도 어로활동을 금지한다는 일본 바쿠후(幕府)의 결정을 알려주어면서 울릉도 영유권 분규는 일단 매듭지어졌다
그러다가 1881년 일본인이 다시 울릉도를 왕래하자 조선은 일본에 항의하는 한편 울릉도 개척에 착수하여 이듬해 4월에 16가구가 54명을 울릉도에 이주시켰다
1901년(고종 38년)에는 울릉도를 울도(鬱島) 개칭하고 울도군의 관할구역에 석도(石島)를 포함시켰다 석도를 훈독(訓讀)하면 독섬 또는 돌섬이 되는데 지금도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를 이렇게 부른다
1905년 1월 일본은 시마네현(島根懸) 고시 제40호로써 독도를 죽도(竹島)로 명명하고 일본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에 참정대신 박제순이 지령을 퉁해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임을 명백히 했으나 당시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접수된 상태였으므로 독도의 영유권과 관련한 외교교섭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뒤 울릉도는 1907년 교통상의 편의를 이유로 강원도에서 경상남도로 이속되었고 1914년 다시 경상북도로 이속되었다
일본정부가 제2차대전에서 패배한 후 침략으로 약탈한 독도가 제2차대전의 전후 처리과정을 통해 한국의 독립 및 주권의 회복과 동시에 법적으로도 원상회복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96년 들어 독도에 안전하게 물자를 공급하고 독도경비대를 설치하기 위하여 독도 접안지설을 설치 장기적으로 울릉도 주민이 독도에 터전을 잡도록 하였다
-1996년 1월 제336호 독도관리지침--문화재관리청
이 지침은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내 입도, 시설물 설치 및 관리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을 정함으로써 국가 유산인 독도를 효율적으로 보존하고자 함
-동해안 울릉도나 독도는 군사적으로 별 가치가 없고 대마도가 누가 점령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많은 영향력을 받고 있다 대마도는 동해안 진입로이다 대마도는 인구 10만에서 5만명까지 거주할 수 있는 섬이다
러.일전쟁때 군사적 기지로 사용한 섬이 대마도 있고 대마도의 해군병력으로 러시아 군함을 격침했다 울릉도나 독도는 군함 기지로 사용할 수 없으며 대마도는 군함기지로 사용할 수 있다
항공모함이 바다를 장악하고 있는 요즘에서는 큰 섬이 아닌 한 군사적 가치는 별로 없다
제주도와 거제도 그리고 대마도등은 군사적 경제적 가치가 높이 평가하고 있다
(6)독도(獨島)의 다른 명칭
ㄱ.한국
(ㄱ)조선 말기 고종이전---삼봉도(三峰島). 우산도(于山島). 가지도(可支島)
(ㄴ)고종 18년 1881년 이후---독도(獨島)
1901년(고종)에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울도군의 관할구역에 석도(石島)를 포함시켰다 석도(石島)를 훈독(訓讀)하면 독섬 또는 돌섬이 되었는데 지금도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를 이렇게 부른다
*鬱--막힐 울(鬱)
ㄴ.일본---다케시마(竹島). 마쓰시마(松島)
*竹-대 죽(竹)
*松-소나무 송(松)
-독도에는 소나무등은 있지만 대나무는 거의 없다
ㄷ.영국----호넷(Hornet) 이름으로 해도 기입
독도를 발견한 영국 호넷선박을 본뜬 이름
ㄹ.프랑스--리앙쿠르(Liancourt)
독도를 발견한 프랑스 리앙쿠르 선박을 본뜬 이름
2. 독도는 지형적 역사적 언어학적 입장에서 한국 땅
(1)지형학적 입장 독도
ㄱ.한반도 울진군 죽변과 독도 거리 127km
ㄴ.울릉도와 독도 거리 88km(약 49 해리에서 59해리)
-한반도 죽변과 울릉도 거리 131km-
ㄷ.일본 오끼군도와 독도 거리 158km(약 87해리)
ㄹ.일본 도근현(島根懸:시마네현)과 독도의 거리 210km
독도의 지형학적으로 한국 땅이라는 입장 자료
독도는 일본 오키섬(오끼군도)보다 대한민국의 울릉도에 68km나 더 가까운 것이다
지형학적으로 독도는 한국 땅이다
(2)역사학적 입장 독도
독도는 한국사에 편입한 것은 13세기 조선초라면 일본사에 편입된 것은 17세전후이다 한국정부는 그 시기에 대마도까지 점령한 태종과 세종 시기로 일본 열도까지도 한반도 굴욕의 시대였다
일본이 독도을 일본역사로 취급한 시기는 임진왜란 시기로 그 후 대마도와 각 연안지역을 점령하였다 독도는 울릉도의 한 부분의 섬에 불과하다
대마도는 언어학적으로 일본어를 사용하지만 19세기 근대이전까지는 자치국가로 운영되어왔다
(3)언어학적 입장 독도
독도에 거주하는 분은 언어학적으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분이다
지형학적으로 대마도는 부산에서 45km이고 부산에서 선박으로 40분 거리이다 그러지만 대마도 주민들은 일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일본 영토이다
한국이 소련과 미국 도움이 없이 자주적 독립국가로 탄생했다면 대마도는 한국영토로 편입되었을 것이며 지금쯤 대마도 주민들 대부분은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4)한국정부의 독도 영유권 근거
ㄱ.한국측 사료
(ㄱ)숙종실록, 1728년
안용복이 독도에 머무르고 있던 일본 어민들에게 이 섬에 출입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일본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일본에 두번 건너간 사실을 기록
(ㄴ)정조실록, 1805년
안용복 사건 이후 울릉도, 가지도(독도)에 3년마다 <수토관> 파견 사실 기록
(ㄷ)대한제국 칙령 제41호, 1900년
울도(울릉도의 군 명칭)는 울릉도, 죽도와 석도(독도)를 관할한다고 규정
ㄴ.일본측 자료
(ㄱ)朝鮮國交際始末來探書(조선국교제시말래탐서), 일본 명치정부 외무성 자료. 1869-1870년
울릉도와 독도는 朝鮮附屬領(조선부속령)임을 확인
(ㄴ)일본 명치정부(明治政府) 내무성 자료, 1877년
독도는 명백하게 조선영토이며 일본과는 관계없는 곳이라고 결정
(ㄷ)<조선동해안도, 일본해군성 1876년> <일본전쟁실기, 동경박물관 1905년> <지도구역일람도, 일본육군참모본부 1936년>
독도를 한국 영토로 표기
ㄷ.국제선언 및 조약
(ㄱ)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1946년
이 령의 목적상 일본은 일본의 4개 주요 도서..를 포함하는 겻으로 정의되며..울릉도와 독도 그리고 제주도는 제외한다(제677호)
일본 선박과 선원의 독도 접근을 금지(제1033호)
(ㄴ)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 제2조(a) 1951년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權原)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규정
한국인은 간도와 만주로 이주하여 살아가기를 원했고 중국인들은 대륙에서 살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니 한국은 대마도를 소홀히 했고 중국은 대만을 소홀히 했다
그러니 대마도와 대만은 일본 통일국가 영향력에 들어가게 되었다
1945년 8월 이후 2차대전 종결 원칙에 따라 유엔입장을 존중하는 바탕으로 국경선을 획정하는 것이 올바른다 독도은 언어학상으로 한국 영토이며 대마도는 일본 영토이다
3.자료
(1)독도역사찾기운동 본부
http://www.dokdocenter.org
(2)코리아 독도---언론사. 독도자료실, 독도현황 소개
http://www.koreadokdo.org
(3)"독도 화보집" 독도 유일 민가
http://script.imnews.imbc.com/news/photoNews/pn_content.asp?content_id=6552
어민들의 대피소, 휴게소 역할을 하기도 했던 이 집은 <87년 여름> 태풍으로 파손되어 지금은 다소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좌측상단에 고(故) 최종덕 선생이 앉아 있다
(4)일본정부내 독도 전문가인 나이토세이추(來藤正中) 시마네대학 명예 교수의 말
일본은 1905년 독도를 영토로 편입했을 때 무주지선점(無主地先占-주인없는 땅을 먼저 점거)이론을 적용했지만 한국은 1900년 칙령으로 독도가 울릉도 지역임을 명확히 했다 현(縣) 의회(議會)의 고유 영토 주장은 문제가 많을 뿐 아니라 현민(縣民)들을 납득시키기도 어렵다 시마네현이 1976년 독도를 현(縣)에 포함시키기 위해 막부에 조회를 요청했을때 당시 막부의 태정관은 다케시마(당시 울릉도)와 작은 섬(독도)은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회답한 적도 있다
(5)미국 CIA "일본, 평화조약에 독도 포기 최종 결정"
http://www.yonhapnews.co.kr/news/20050324/040301000020050324140722K9.html
일본은 지난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독도를 포기하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하고도 두 달 뒤 한국전쟁의 혼란을 틈타 첫 독도분쟁을 야기한 것으로 당시 미국중앙정보국(CIA)가 파악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같은 사실은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1951년 11월 30일자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일일요약보고서(Daily Digest)에 나타나 있다
북한 287대 연합부대 소속 독도방어부대 "287대는 원산해안, 독도 방어 주임무와 동해 잠수함 3-4척 주둔"
북한영화 "독도는 우리의 땅이다- 반일 애국투쟁노선 영화"
287대 연합부대 소속 독도방어부대는 "287대는 원산해안과 독도 방어 주임무"로 동해 잠수함 3-4척 주둔해오고 있습니다 일본이 독도을 무단 점령할때 장거리 미사일과 잠수함등 육해공군 연합부대 주축으로 동해를 사수하겠다는 입장이며 일본 본토도 공격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김정은과 북한 인민군 지휘부 287대 연합부대 소속 독도방어부대 시찰(사진)
*대마도(對馬島) 개요(槪要)와 군사적 가치 그리고 주요 자료
1.대마도 개요(槪要)
대마도는 한반도와 일본 규수(九州) 사이의 바다에 있는 섬이다
대마도의 면적은 706.43평방km이고 인구는 4만 5,000명(1993년)이다
대마도는 6개의 유인도와 70여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행정상 나가사키현(長崎縣)에 속하며 주로 사암(砂岩)으로 구성된 완만한 산지로 섬 중앙부의 아소만을 기준으로 남쪽을 우에시마(上島), 북쪽을 시타시마(下島)라고 한다
중세 이후 소씨(宗氏)의 지배지였던 이즈하라(嚴原)는 소씨의 성곽을 중심으로 발달한 소도읍으로서 한국과의 무역항이었으며 동해의 출입구로서 대륙과의 교통. 군사상 중요지점이었다
제2차대전 때에는 이 섬 전체가 요새지대였으며 특히 러.일전쟁 때의 쓰시마해전은 유명하다 동해안에서는 오징어잡이, 아소만에서는 진주양식이 활발하다
농업은 자급적 성격이 강하고 논은 대부분 간척지이다
일찍이 목탄. 납. 아연등을 생산했으나 지금은 조림과 표고버섯재배를 하고 있다
중심 취락지는 우에시마의 이즈하라와 시타시마의 히타카쓰(比田勝)이며, 하카다(博多)와 고쿠라(小倉) 사이에 각각 정기 여객선이 취항하고 있다
미쓰섬(美津島)에는 공항이 있어 후쿠오카(福岡)와 나가사키를 연결하고 있다 또한 아소만 연안과 북부 해안들은 이키쓰시마국정공원(壹岐對馬國定公園)에 속하며 특히 아소만연안에는 경승지가 많다
(1)위치
한반도와 일본 규슈(九州)사이의 바다에 있는 섬
대마도는 동경 129도, 북위 34도 규슈본상(구주본상)에서는 132km, 부산에서는 불과 45km의 위치하고 있는 섬으로 위치상으로는 한국 땅이면서도 언어상으로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는 규수(九州) 최북단의 국경의 섬이다
부산에서 선박으로 40분 거리에 위치한 섬으로 근대이전에는 한반도의 민족 거주지
(2)면적
706.43(709)평방 km로 제주도보다는 작고 거제도 보다는 넓은 섬들
6개의 유인도와 70여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3)인구
4만 6,000명(2002년), 대마도의 수도인 이즈히라는 17,00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4)행정상 구분
나가사키현(長崎縣)에 속해 있으며 크게 상도와 하도로 구분 6개의 주로 나누어져 있으며 중심지는 모원주이다
(5)모국어--일본어
(6)대마도의 역사
대마도는 고대로부터 한반도와 일본을 이어주는 고리의 역할을 해왔다 심지어 일본이 쇄국정책을 쓰고 있을때도 이곳을 통하여 학술과 문화가 활발하게 전파되었다 그 중에도 아메노모리호쑤는 쓰시마(대마도)에서 활약한 유학자로서 한일교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교린수지라는 불리우는 당시의 한국어 입문서를 만들었으며 <서로 싸우지 말고 속이지 말며 진실을 갖고 교류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학술과 문화 뿐만 아니라 불교도 전래 되었으며 유명한 미키와치, 하사미 도자기도 이곳을 통하여 한반도로부터 전해졌다
1993년에는 <나가사키현 서울사무소>가 개설되어 더욱 깊은 우호관계에 있다
ㄱ.대마도 8월초 열리는 아리랑 축제
대마도 8월초 열리는 아리랑 축제를 볼때 대마도 원주민들이 가야족 중 아리나(허씨족)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리(阿里)-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ㄴ.조선통신사의 비
토요토미의 조선침략 임진왜란 후 쓰시마번(대마도) 국교회복을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그 결과 토쿠가와 막부시대 200년간 통신사가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였다 통신사의 방문으로 이루어진 활발했던 교류와 우호적인 관계를 21세기 한일우호의 지향점으로 삼고자 이즈하라에는 조선통신사의 비가 세워져 있다
ㄷ.고려문
ㄹ.최익현 선생의 순국비
ㅁ.동상여래 좌상
9세기경 통일신락시대에 제작된 귀중한 불상으로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ㅂ.바이린지 절
538년 백제 성왕에 의해 일본에 불상과 경전이 전파되었고 그 최초로 불교가 전파된 연고로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 고찰이다 남북조시대의 오래된 경전과 8세기경에 제작되었다는 난생불이 있다
ㅅ.아메노모리 호슈
아메노모리 호슈는 17세기 당시의 일본의 한국어 담당 외교관으로 국가간의 교류에 있어 중요한 것은 진실된 믿음이라고 주창하고 선린외교를 몸소 실천한 위대한 국제인이었다 그가 저술한 교린수지는 일본 최초의 한국어 교재로 메이지시대까지 사용되었다
ㅇ.성신교린의 비
호슈선생이 주창한 외교정신을 새긴 성진교린의 비
(7)대마도의 특징
대마본섬을 외에 109의 섬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사람이 사는 곳은 5곳이고 전 섬의 89%가 산악이고 원시림에는 본토에 볼 수 없는 많은 대륙계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산해진이 또한 풍부하고 인정이 많으며 특히 옛부터 대륙(한반도)과의 인적, 물적 교류의 창구로서 많은 사적등 문화유산이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는 역사의 섬이기도 하다
-한반도와 일본열도 길 목(대마도를 어느 나라가 소유하는냐에 따라 태평양지역과 일본열도 지역 해상장악)
-태평양에서 동해의 출입구로서 대륙과의 교통. 군사상 중요지점(러일전쟁때의 쓰시마해전과 제2차대전 때에는 이 섬 전체가 요새지대로 사용함)
(8)대마도의 생산품
ㄱ.농업--쌀 농사(간척지 논으로 쌀생산이 잘 되지 않아 엣부터 쌀 수입을 대부분로 한반도에서 했다)
ㄴ.어업--동해안(오징어잡이), 아소만(진주양식)
ㄷ.산림과 광물--목탄, 납, 아연등을 생산했으나 요즘은 조림과 표고버섯재배를 하고 있다
(9)대마도 향토음식---회와 흑돼지 음식
2.대마도의 군사적 가치
(1)대마도의 군사적 가치
-대마도는 고대로부터 한반도와 일본을 이어주는 고리의 지위와 역할을 해왔다 대마도는 한국과의 무역항이었으며 동해의 출입구로서 대륙과의 교통. 군사상 중요한 지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때에는 이 섬 전체가 요새지대였으며 특히 러.일전쟁 때의 쓰시마해전 전투지역이다
-일본정부의 한반도 군사적 행동의 기지었다 그리고 한반도(조선반도)정부의 일본 열도 군사적 행동의 기지이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45km이고 규슈본상(구주본상)에서는 132km이다 일본과 대한민국 정부간의 해상전쟁에서 승패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섬이다
-대마도 사람들은 대부분 대륙계 한반도 주민이면서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다
(2)한반도(조선반도)의 대마도 정벌
대마도 정벌은 고려말, 조선초에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세 차례에 걸쳐 대마도를 정벌한 일이다
왜구는 13-16세기 한반도와 중국연안에서 활동한 일본인의 해적집단을 총칭하는 것으로 이들은 주로 대마도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 하였다
대마도(對馬島) 도주(島主) 종씨(宗氏, 일본어 무네씨 또는 소씨)로서 이들이 대대로 대마도를 관리하며 살았는데 대마도는 인구가 적고 농토가 척박하여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기근을 면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더구나 당시 일본은 국내의 내환으로 식량의 구입이 어려운 상태였고 빈민이 증가하여 비상수단에 의한 물자의 공급이 요청되었기 때문에 중국과 한반도에서 왜구의 창궐이 극심하였다
이러한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추진된 대마도 정벌은 수군의 확충과 화기의 발달이 뒷받침해 주었다 즉 고려는 초기부터 수군을 양성하였고 현종 때에는 도부서를 설치하여 전함을 건조하는 등 조직과 군비를 강화하였으며 말기에는 수군을 제정비하였다
화기는 1377년(우왕 3년) 최무선이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20여 종을 제조하였고 후에 화포를 전함에 배치하여 왜구를 섬멸하였다
한편 최초의 대마도정벌은 1389년(창왕 1년) 박위에 의해서였다 박위의 정벌은 특히 우왕 재위 14년간 378회나 침입한 왜구 소굴이 대마도이기 때문인데 그는 1만의 군대를 이끌고 대마도에 도착하여 왜선 300여 척과 관사. 민가를 불태웠다
조선의 대마도 정벌은 1396년 조선태조와 태종 그리고 1419년 세종 1년도 있었다
태조는 조선초에 5도의 병선을 모아 대마도를 정벌하였는데 이 때 많은 왜구들이 투항하였다
왜구를 근절시키고 이들을 평화적 내왕자로 만든 것이 1419년의 기해동정(己亥東征)이었다 기해동정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비인현(庇仁縣)의 도두음곶(都豆音串)의 침탈이었다 이에 태종은 이종무를 3군도체찰사로 임명하고 중군을 거느려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그 결과 대규모의 왜구가 없어지고 나아가 왜구가 평화적 내왕자로 변하게 되었다
1419년 세종 1년때에는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하고 일본열도정부의 항복을 받았으며 그 이후 대마도 도주를 조선정부에서 임명하였다 세종은 북진정책과 남진정책으로 국토를 회복하고 삼한의 후예로 구주지역까지 점령하려고 했지만 왜구의 저항과 일본 열도 정부의 항복으로 그만두었고 백두산과 두만강지역을 회복했다
-1389년 고려 창왕때와 우왕때 박위장군에 의하여 대마도 정벌
-1396년 조선 태조 5년때 대마도정벌
-1419년 세종 1년 대마도정벌과 조선정부 인사로 대마도주(총독) 임명
1419년 세종 1년 이종무 장군이 왜군을 추격하여 대마도를 정벌하고 일본본토의 항복을 받았던 곳이고 그 이후 조선정부 소국으로 다스렸다
-1945년 해방 후에는 해양대학교 초대 학장이셨던 정문기 박사가 이승만대통령에게 이곳을 한국 영토로 포함시킬 것을 권유하였으나 최남단을 울릉도(독도), 제주도, 거문도를 기준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대한민국 영토에서 제외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마도(對馬島)의 뜻은 마산(馬山)를 마주보는 섬(島)이라는 뜻이다
조선초기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해 마산포를 출발하였다
*對-마주설 대(對) *馬--말 마(馬) *島--섬 도(島)
(3)<대마도 신라 속지> 해외 역사서 존재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5/03/005000000200503240654031.html
대마도는 신라의 속지였으며 토지가 척박해 연례적으로 신라의 원조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기록한 해외 역사자료가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돼 독도분란 해법과 관련해 주목된다
특히 이 사료를 공개한 일본인 교수는 최근 악화되고 있는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 감정적 대웅 보다는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분란을 해소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충고해 양국 국민사이의 공감대 형성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2005년 3월 24일 서울대 이현복 명예교수에 따르면 미국 출신의 선교사이자 한국사 전문가인 H. Hulbert(헐버트)씨가 1905년 출간한 "한국 역사(History of Korea)"에 대마도와 신라의 관계를 보여주는 내용들이 실려있다
35쪽 분량의 이 책에는 "It is important to notice that the island of Tsushima, whether actually conquered by Sil-la or not, became a dependency of that Kingdom"(대마도<쓰시마>가 신라에 정복됐든 아니든 그 왕국<신라>의 속지<屬地>가 됐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기술돼 있다
이 책은 일본 구마모토대의 시미즈 기요시 교수(언어학)가 "최근 독도분란이 한일관계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한국 학자와 국민이 이 사실을 알기 바란다"는 내용의 e-Mail(이 메일)을 이현복 교수에게 보내면서 공개됐다
시미즈 교수는 <최근 독도문제로 한일관계가 나빠지고 있는데서 서로 싸우지만 말고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 때가 때인지라 우리 모두 알아야 할 내용을 한국민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현복 교수는 <일본이 독도에 대해 터무니없는 주장을 일삼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감정적 대응보다는 역사적 근거와 기록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는 것이다 조선이나 고려가 아닌 삼국시대에 신라가 대마도에 대해 실질적 지배를 해왔다는 점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며 독도분란의 해법을 제시했다
이 책의 저자 헐버트는 1986년 미국에서 태어나 뉴 햄프셔주(州) 다트먼트대학을 졸업한 뒤 1886년(고종 23년)에 소학교 교사로 초청받아 한국에 입구간 것을 계기로 한반도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을사늑약 체결 후 고종의 밀서를 들고 미국 대통령과 면담을 시도하고 1907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한국대표단의 호소문을 세계에 알리는 등 한국의 국권 회복운동에 적극 나섰으며 1949년에는 국빈으로 내한했다 병으로 숨져서 서울 마포구 양화진의 외국인 묘지에묻혔다
(4)일본열도의 대마도 군사기지로 러일전쟁 승리 그리고 한반도. 중국등 침략기지
일본과 중국 한국등이 안보적으로 경쟁적이고 대결구도일때는 대마도는 한반도와 중국 대륙 침략기지이기 때문에 한국정부의 해군력으로 제압하거나 섬을 해체(폭파)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일본, 중국, 한국등이 협력과 평화적 공존으로 군사적으로 동맹군이 될때는 대마도는 일본과 한국를 연결하는 길목으로 양국(兩國)의 지원으로 고도소비사회 문화 자유항구로 지정하여 독자적인 경제 사회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고 본다
대마도와 부산은 45km로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협조가 필요하다
3.대마도의 주요 자료
(1)(주)대마도 투어(對馬島 TOUR)
http://www.thusima.com
(2)대마도 정보
http://my.netian.com/~dblue1/f-1.html
(3)대마도(대마도 재발견>--독도역사찾기운동본부
http://www.dokdocenter.org
(4)한국, 샌프란시스코 조약때 대마도 영유권 공식 요구
http://script.imnews.com/world/article.asp?SeqNo=322089&CntsCode=A010000&CateCode=B040000
대마도는 부산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경제적 경체적 문화적으로 부산 김해에 종속되어왔다 그러나 대마도는 정치적으로 일본열도 지배를 받아왔고 모국어는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다 부산과 대마도 거리는 45km이고 구주와 대마도 거리는 132km이다
대마도가 경제적 문화적으로 풍부한 고도소비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유항으로 부산과 구주의 자유왕래 지역으로 규정화 할 필요가 있다
-마산시 의회, <대마도의 날> 조례 제정
경남 마산시 의회는 2005년 3월 18일 일본 시마네현 의회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에 대응해 <대마도의 날> 조례를 제정했다 시의회는 이날 오후 109회 임시회를 열고 <대마도의 날 조례>안을 긴급 상정해 30명의 의원 가운데 출석 의원(29명) 전원 찬성으로 가결했다
이날 제정된 조례는 대마도가 우리 영토임을 대내외에 각인시켜 영유권 확보를 목적으로 하고 조선조 초기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해 마산포를 출발한 6월 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정한다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시의회는 당초 이날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폐기 촉구결의안을 논의하다 공격적으로 하자는 분위기가 강해 <대마도의 날> 조례 제정을 추진했다
*사할린과 쿠릴열도 북방 4섬 그리고 러.일 북방영토 문제 개요
1.사할린(Sakhalin)
사할린은 러시아연방 동부 하바로프스크 지방의 한 주(州)를 이루는 섬이다
면적은 쿠릴열도와 그 밖의 섬 포함 8만 7100평방 km이고 인구(쿠릴열도 포함) 64만 8000명이고 행정중심지는 유주노사할린스크이다
오호츠크해와 동해에 둘러싸였으며 러시아연방 본토와는 타타르해협과 나비 7.3km의 네벨스코고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고 일본과는 라페루즈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다
ㄱ.위치
하바로프스크 지방의 한 주를 이루는 섬(오호츠크해와 동해에 둘러싸였으며 러시아연방 본토와는 타타르해협과 나비 7.3km의 네벨스코고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고 일본과는 라페루즈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다)
ㄴ.면적(쿠릴열도와 그 밖의 섬 포함)
8만 7,100평방 km(87,100평방 km)
ㄷ.인구(쿠릴열도 포함)
64만 8,000명(2000년)
ㄹ.행정중심지
유주노사할린스크
ㅁ.종족구성
러시아인(80%), 우크라이나인(6%), 한국인(5%), 벨로루시인, 모르도바인 및 아이누. 길랴크. 오로촌족등 소수민족등
(1)자연
사할린 북부는 습지와 저지대가 많지만 남부는 두 줄기 산맥이 나란히 남북으로 뻗은 (최고점 1,609m) 산악지대이다 또한 중부 동쪽의 테르페니야곶과 남단부 동쪽의 아니바곶, 남단부 서쪽의 크릴리온곶은 모두 남쪽을 행해 돌출해 있다
딸려 있는 섬들은 적은 편인데 테르페니야곶 앞바다의 튤레니섬과 크릴리온곶 앞바다의 모네론섬등이 있다 월평균 기온은 북부에서는 1월에 -23도, 7월에는 15도이며 남부에서는 1월 -9도이고 7월에는 17도이다 습도가 높고 여름에는 안개끼는 날이 많다
동해안은 반년동안 유빙(流氷)으로 폐쇄되며 서해안은 11월부터 3월까지 결빙된다
(2)역사
사할린 남부에서는 신석기 시대 유적이 많이 발굴되고 있는데 정주(定住)의 역사는 BC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할린을 맨 처음 지배했던 나라는 중국으로, 원(元)나라 때는 이곳에 경비대를 상주시켰으며 명(明), 청(淸)나라 때에도 관할기구를 설치하였다
원주민들은 이들에게 조공을 바치고 모피를 중국상품과 교환하였고 이것을 일본인과의 교역에 사용하였다
러시아는 청나라 땅인 극동과 사할린을 강제로 점령했고 그 후 1855년 러일통상수호조약에 의거한 국경선, 1878년의 사할린 치사마교환조약에 의거한 국경선등으로 사할린은 러시아 땅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1905년 포츠머스조약에 의거한 국경선에서는 남부사할린을 일본정부 땅으로 인정되었다 사할린 남부는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영토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일본과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옛 땅과 일본 북방 4섬을 강제로 빼앗았다
(3)산업
수산업이 활발하여 청어, 연어, 송어,대구, 소라게, 명태등의 어획량이 많다
또한 구릉과 산지에는 가문비나무등의 침엽수가 많고 특히 남부의 여러 도시에는 펄프공업이 발달하였다 북쪽 기슭의 오하에서는 석유. 천연가스가 산출되었는데 이것은 파이프라인을 통해 네벨스코고해협을 건너 아무르강 연안의 콤소몰스크로 보내지고 북쪽 끝의 모스칼보에서 배로도 운반된다(사할린이 중동의 쿠웨이트로 부르지고 있다 그 만큼 사할린지역에서 석유. 천연가스 생산이 많다는 뜻이다)
우글레고르스크에서는 석탄도 채굴된다
산악성의 지형과 추운 기후로 농업은 낙후되어 있고 축산을 위주로 하며, 티미포로나이저지(低地)와 남부지방 평야지대에서는 호밀. 밀. 감자등이 지배된다 남부지방은 유주노사할린스크 외에 홀름스크. 코르사코프. 네벨스크 등의 도시가 발달하였다
서부에는 탄광업과 임업이 활발한 우글레고르스크와 사할린의 옛 주도(主島)였던 알렉산드로프스크사할린스키가 있으며 동부에는 임업이 발달한 포로나이스크, 북부에는 석유와 천연가스유전이 있는 오하등의 도시가 있으며 각각 2만-4만명의 인구가 있다
(4)사할린의 한국인
사할린 거주 한국인은 현재 약 4만명으로 사할린 전체 인구의 10%정도이다
사할린 남부는 1905-1945년까지 일본 영토였기 때문에 당시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정부에 의해 이주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의 지배하에 있게 된 사할린에는 당시 조사로 4만 3000명명의 한국인과 약 30만명의 일본인이 있었는데 미-소인양협정(引揚協定)과 일소(日蘇)공동선언에 의해 일본인은 전원 소환됐으나 한국인은 방치되었다
여기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의 최대 희망은 전쟁 중에도 고향으로의 귀국과 가족 상봉이었지만 장기간에 걸쳐 불가능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소련의 정치적 변화(1987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서울올림픽(1988년), 한소국교수립(1990) 또한 소련의 붕괴등 정세의 변화는 사할린 교포들에게 희망을 갖게 하였다 한국에는 사할린 교포를 돕기 위한 이산가족회가 있고 일본에는 일본인 부인의 동반가족으로서 일본에 귀환한 한국인들의 모임과 그들을 지원하는 시민단체들이 있다
3국의 협력에 의해 1986년-1990년에는 약 1000명이 일본에 초대되어 한국인 가족과의 재회가 실현되었다 1990년 이후 한국. 일본 두 적십자사의 협조하에 한국-사할린간에 가족상봉을 위한 전세 비행기가 월 1회 취항하고 있다
1990년-2000년의 10년간 약 1만 2400명의 고향방문이 실현됐고 약 1500명이 한국에 영구귀국했다 1999년 3월 인천시에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요양원이 건설되고 2000년 2월에는 안산기에 아파트 8동, 500세대가 입주할 수 있는 <고향의 마을>이 완성되어 약 1000명의 영주 귀국자들이 노후생활을 보내고 있다
2.쿠릴열도
(1)쿠릴열도(Kuril'skie Ostrova)
쿠릴열도는 러시아연방 동부 사할린주(州) 동쪽에 있는 화산열도이다
면적 1만 5,600평방 km이고 영어와 러시아어로는 쿠릴이고 일본령이었을 때는 지시마(千島)라고 하였다
태평양과 오호츠크해를 양쪽으로 나누며 캄차카반도와 일본 홋카이도(북해도) 사이 1,200km에 이르고 해상에 줄지어 있다
30개 이상의 섬으로 되어 있고 파라무시르섬을 주도(主島) 하는 북부, 시무르섬을 주도(主島) 하는 중부, 구나시르섬과 이투루프섬을 주도(主島) 하는 남부로 크게 나뉜다
섬들의 대부분은 화산. 용암대지, 칼데라등이 있으며 전부 16개의 활화산이 있다
기후는 차고 습기가 많으며 여름에 안개가 많이 낀다
주요산업은 어업. 임업. 바다포유동물사냥업이고, 송어. 연어. 대구. 다시마등이 풍부하다
1854년 러.일강화조약으로 이투루프 해협을 경계로 우루프섬 이북은 러시아 영토로 되었으나 1875년 가라후토. 지시마 교환조약(樺太千島交煥條約)으로 모든 섬이 일본영토로 되었고 제2차세계대전 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소련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쿠나시르섬과 이투루프섬 이남을 일본영토라고 주장 이른바 북방 4도의 반환을 요구해 왔다
러시아대통령 B.N 열친이 일본과 경제지원을 조건으로 북방 4도 문제를 협상한 바 있다
푸틴 대통령께서는 북방 섬 하보마이와 시코탄등 2개 섬을 반환하겠다는 입장을 표방해오고 있다
(2)쿠릴열도 북방 4섬
쿠릴열동의 북방 4섬은 홋카이도(北海道) 네무로(根室) 반도의 북동쪽에 위치한 4개 섬이다
미국 알래스카주에서 일본 쪽으로 뻗어 나온 알류션 열도와 일본의 홋카이도가 만나는 해역의 섬에 에토로후, 구나시리, 시코탄, 하보마이를 일본은 북방영토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옛소련이 전후 점령한 곳으로 일본이 과거 소련, 현재는 러시아에 대해 반환을 요청하고 있는 곳이다
이 지역은 2차대전 중 카이로선언에서 <폭력 및 강요>에 의해 악취한 모든 지역으로부터 일본을 구축한다는 규정에 의거 1945년 2월 얄타협정에서 <사할린 남부와 입접한 제도를 소련에 반환한다>고 규정되면서 전쟁 후 소련령에 편입됐다
전쟁전 이곳에서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전후 모두 일본으로 쫓겨났다
이에 대해 일본은 홋카이도의 코앞에 있는 시코탄과 하보마이는 홋카이도에 속한다고 주장 두 곳은 돌려받고 두 곳은 소련령을 인정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그 뒤 네 곳 모두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협상 결렬 후 소련은 냉전시대 이곳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아예 <일본과의 사이에 영토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고 일본은 매우 강력하게 그리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영토문제를 제기해 왔다
소련붕괴 후 러시아는 영토문제의 존재마저 부인하던 자세를 버리고 영토문제가 있다고 인정하고 있으며 한 때 두 곳은 협의할 수 있다는 자세를 보였다
일본도 궁박에 몰리고 있는 러시아에 대해 경제적 지원을 미끼로 영토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치권에서 보수세력이 강화되고 군부가 강력히 반대하면서 영토협상론은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ㄱ.하보마이(齒舞)제도
ㄴ.시코탄(色丹) 섬(島)
ㄷ.구나시리(國後)섬(島)
ㄹ.에토로후(擇捉)섬(島)
(2)쿠릴열도의 군사적 가치
쿠릴열도는 일본과 사할린 그리고 극동지역을 연결하는 교량적 교통완충지대이다
대륙 극동지역에서 일본 열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사할린과 쿠릴열도 북방 4섬을 점령해야 하고 일본이 극동과 만주지역 그리고 알래스카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쿠릴열도 북방 4섬과 사할린을 점령해야 한다
사할린과 쿠릴열도는 중국과 한반도 완충지대 만주와 극동지역을 누가 지배하는냐에 따라 그 지역의 지배자도 결정되어왔다
-쿠릴열도는 사할린, 극동과 만주지역 진출 군사적, 상업무역적 항구기지
-쿠릴열도는 사할린과 함께 아메리카대륙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는데 전초기지
쿠릴열도와 사할린은 북태평양지역으로 알래스카나 캐나다 북미등을 군사적이나 상업 무역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지역이다
-진주만기습(眞珠灣奇襲) 총지휘부 군사기지
진주만기습은 1941년 12월 7일 일본해군 기동부대가 하와이 오아후섬 진주만에 있는 미국 태평양함대기지를 기습공격한 사건이다
이때 일본은 교섭을 중단한다는 최후통첩을 미국에 하지도 않은 상태였으므로 그것은 일본의 속임수 공격이었다
미국의회는 그날 한 표를 제외한 만장일치로 대일선전포고를 가결하였다
일본은 1941년 초부터 태평양전쟁의 도화선이 된 이 기습계획을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연합함대 사령관 지휘로 수립하였으며 1941년 11월 26일 쿠릴열도 에토로후섬(擇捉島) 하토가쓰부만(單冠灣)에서 출발, 일본 해군의 항공기와 특수잠항정으로 기습공격을 하여 출항 중에 있던 항공모함을 제외한 미국 태평양 함대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일본열도의 혼란기에는 쿠릴열도는 중국의 지배세력이 지배자였고 일본열도의 통일국가 등장때는 일본정부 통치를 받아왔다 사할린, 쿠릴열도와 몽고,만주족의 친근감으로 중국내전의 유발되어왔다
한반도 북방지역은 해군력 강화와 해상권 장악으로 쿠릴열도와 사할린 상업 무역적 군사적 협력을 강화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반으로 북태평양과 알래스카. 카나다. 북미로 이어지는 무역항 개척에도 주력해야 하며 해오고 있다
3.일-소공동선언(日-蘇共同宣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과 소련의 전쟁상태 종결과 국교회복을 위한 공동선언이다
1955년 6월부터 교섭을 개시 하였으나 영토문제로 1956년 3월 중단되었다가 1956년 5월 국교회복과 동시에 발효될 일.소 어업조약을 위하여 10월 하토야마 이치로 총리가 소련을 방문하여 영토문제 이외의 현안을 해결하고 조인 하였다
그 내용은 소련의 배상청구권 포기, 일본의 유엔 가입지지, 평화조약 체결 교섭의 계속등이며 영토문제는 평화조약 체결 후 하보마이군도(齒舞群島), 시코탄 군도(色丹群島)를 인도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일본측이 구나시리섬(國後島)과 에토로후섬(擇捉島)의 인도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평화조약은 체결되지 않았다
한편, 공동선언 후 일본은 유엔에 가입하여 국제사회에 복귀 하였다
4.북방영토문제의 개요
(1)러시아정부 입장
러시아 푸틴대통령께서는 2004년 12월 23일 기자 회견에서 평화조약 체결 후에 하보마이와 시코탄등 2섬을 반환한다고 정한 1956년의 일-소공동선언을 언급하고 일본이 요구하고 있는 4개 섬을 반환하는 것이 아니라 2섬을 반환해 최종매듭을 짓겠다는 러시아측의 입장을 거듭 강조하였다
푸틴대통령께서는 기자회견에서 먼저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평화조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양국관계의 발전을 저해한다며 평화조약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푸틴대통령께서는 1956년 일-소 공동선언에 대해 2섬 반환으로 최종적인 매듭이 지어지는 것이라며 러시아측으로서는 2섬 반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원칙적인 입장을 강조했다
(2)일본정부 입장
일본정부는 4개섬의 귀속을 확인해 평화조약을 체결하기로 한 1993년의 도쿄선언에 입각해 하보마이, 시코탄, 구나시리, 에토로후등 4개 섬에서 일본의 주권을 인정하도록 요구해왔다
-북방영토문제의 개요
http://www.kr.emb-japan.go.jp/other/other_015.htm
* 동북 3성(만주)과 만주지역 역사 자료
1.동북 3성(만주)
동북3성(東北三省)은 중국의 6대 중국영토지역의 하나로서 동북부 지역을 말하며 과거에는 만주(滿洲)로 불렸던 지역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랴오닝 성(遼寧省, 요녕성), 지린 성(길림
동북 3성(만주지역)은 200만 명 이상의 조선족(한국인)이 거주하고 있고 고조선,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어 한민족(조선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동북 3성(만주지역) 역사적 지배세력은 조선족(한민족)과 만주족(여진족), 거란족, 몽골족 그리고 한족(
*한국의 성씨(
금나라(청나라) 민족 말갈(여진, 만주족)이 가야(금관가야) 멸망 이후 만주지역으로 이주하여 성장해온 민족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만주족은 일본지역과 밀접한 민족으로 인도, 중국등 남방지역 최대 민족 지원으로 성장해 온 민족이다
*만주지역 지배자가 중국 본토 지배자로 역사적으로 등장해왔다
2. 동북 3성(만주)의 역사
중국의 한족(漢族), 한국의 한민족 및 여러 북방민족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세워진 곳이며,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전신은 여진족)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청나라 말기 중국이 한창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침략을 당하던 시기에 러시아에 뤼순(旅順, 여순)을 조차하였고, 청나라 멸망 이후에는 중화민국의 영토가 되었다. 1931년에 일본이 일으킨 만주사변으로 일본에 점령되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괴뢰국가인 만주국(滿洲國)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1949년 이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 Northeast China (traditional Chinese: 中國東北=
Gojoseon[B.C 2333-B.C 108, Korea People:고조선]->Han[B.C 108-A.D 313, Han China People:
*Goguryea[Goryeo]-고려(
*Gojoseon[Joseon]-조선(
*
*
*동북 3성(만주지역)은 한국인(조선족), 한족(중국인), 만주족(여진족), 거란족, 몽고족들이 자치구를 설치하여 거주하고 있다
한반도나 중국본토는 만주지역이 소수민족 즉 여진족이나 거란족, 몽골족등이 지배하는 것을 싫어하고 있으며 독립국가로 등장하여 동북아 전쟁을 유발하기를 경계해오고 있다
그리고 한반도 민족은 꾸준히 고구려 후예를 자청하여 고려국가(고구려의 줄임이 고려)를 건국이론이나 삼한정통설(
*고구려(
3.거주지역 종족
동북 3성(만주지역)의 인구는 현재 약 1억 명으로, 이는 중국 전체 인구의 8%에 해당한다.
동북 3성(만주지역) 지방의 민족 구성은 한족(漢族)이 92.4%를 차지하는데, 그 대부분은 청조(淸朝) 300년 간, 특히 19세기 말 이후에 이주하여 왔다. 19세기 말의 동북 3성 인구는 300만 미만이었으나, 그 후 1년에 50∼100만의 인구가 주로 산둥성[山東省] ·허베이성으로부터 유입하였다. 소수민족은 787만인데, 그 중 210만이 만주족(滿洲族)으로 주로 랴오닝성(요녕성)에 살고, 113만이 한족(韓族)으로 지린성(길림성) 동부 국경지대에 옌볜[延邊] 한족자치주를 형성하고 있다. 또 몽골족 32만은 네이멍구 지역에 살고, 후이족[回族] 23만은 대도시에 분산거주하며, 그 밖에 퉁구스계(系)의 다구르족 ·오로촌족 ·시보족 ·오웽크족 및 러시아인 등이 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약 100만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으나, 종전 후 거의 전부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4.거주지역 언어
동북 3성(만주지역)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동북3성 중국어나 북경에서 사용하는 표준 중국어가 통용된다. 조선족 사이에서는 조선어가 사용된다. 이와는 달리 만주어를 아는 만주족은 많지 않으며, 대부분의 만주족들은 중국어를 사용한다.(만주족의 만주어와 문자를 사용해왔다 만주지역 소수민족은 대부분 한자나 중국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조선족은 한글과 한국어를 사용해오고 있다 만주족이나 거란족등은 자치구를 운영하고 있지만 중국어를 사용해오고 있다)
5.동북 3성(만주지역) 산업
동북 3성은 일본의 지배 시기에 공업의 기반이 잘 조성되어 초기에는 중국 최대의 중화학 공업 지대가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중국이 외국 자본을 도입하면서 광둥 성(廣東省) 등지의 산업이 급격히 발달하자 동북 3성의 공업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나, 최근에 한국과 일본 등지의 자본이 밀려오면서 다시 활력을 되찾고 있다. 지하자원으로는 푸순(撫順, 무순)의 탄전과 다칭(大慶)의 유전이 있다.
*동북 3성이 잘 살아야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안정에 큰 도움이 돼왔다 동북 3성의 분안이 한반도 불안과 중국 본토 불안으로 이어져왔다
1950년대 한국전쟁은 동북 3성(만주지역) 기반으로 추진한 전쟁이며 소련축 중국인, 조선족인, 만주인등의 연합군이 일본 식민지국가 만주국를 점령한 후 한반도 이북지역을 해방시킨 후 중국 내전때 중국 공산당을 도와 중국 공산혁명 이후 그 힘으로 남침을 했다(한국전쟁때 낙동강 지역 부대 북한인민군 간부 자료에 의하면 대부분이 중국 팔로군 참여 조선의둉대 출신 항일 조선인 군인 대부분)
*한국정부는 동북 3성을 중요시 하여 경제적 지원과 인적자료 협력이 필요하다
대북지원도 중요하지만 동북 3성 국가지원도 중요하다 한중육로개척(한중육로-철로나 고속도로연결)이 한중 국경개방화를 의미하며 만주지역 소수민족에게도 경제적 성장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본다
*만주족(
1.만주족(滿洲族, Manchu Nations)의 주요 분포지역과 거주지
만주족은 현재 전국 각지에 분포하는데 그 중에서도 랴오닝성(遼寧省)이 가장 많이 거주한다
만주족은 본래 랴오닝성(遼寧省, 요령성)을 중심으로 지린성(吉林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등 동북지방이 거주지였으나 청나라의 중국 진출로 전국에 퍼졌다
만족(滿族)은 긴 역사를 가지는 민족으로 그 조상은 2000년전의 수썬런(肅愼人-부족국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만족은 창빠이산(장백산, 長白山) 이북의 헤이룽강(흑룡강, 黑龍江) 중. 하류와 우쑤리강 유역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만족(滿族)의 조상은 여진(女眞)을 이루어 12세기에 금(金) 왕조를 창건했다 1583년 누얼(努爾)이 여진족 각파(各派)를 통일하고 팔기제도를 창설해 만어(滿語)를 만들고 1635년에 민족의 호칭을 만(滿-만주지역이 여진족 거주지역)으로 고쳤다
팔기제도는 정치. 군사. 생산이라는 3개 면의 직능을 가진 만족사회의 근본적인 제도가 되었다 1636년 황타이지가 황제가 되어 국호를 청(淸-맑은 물.금나라 후예 표방)으로 고쳤다 1644년 청(淸) 왕조는 중국의 통일 중앙집권의 마지막 봉건왕조가 되었다 1911년의 신하이혁명(辛亥革命)이후 만족(滿族)으로 개칭되었다 만족은 중국의 통일, 영토개척, 경제. 문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遼--멀 요(遼) *寧-편안할 령(寧)
-일부에서는 삼한(三韓)세력 중 진한(眞韓-震韓-辰韓)이 숙신(肅愼).여진(女眞) 만족(滿族)으로 규정하는 분도 있다 숙신은 부여에 편입되었고 여진은 신라와 가야의 후계자로 금(金)나라를 건국했으며 만족은 청나라를 건국했다 만족(滿族)은 조선족(한민족) 형제국으로 섬기면서 항시 유대를 원했다 김해족(金海族)이 만족(滿族)인지는 언어적.역사적으로 규명해야 입장이다 김해(金海)=금(金)나라(김-金), 청(淸)나라(淸-海)
2.만주족(滿洲族)의 언어와 문자
(1)언어---만어(滿語)와 중국어
만주족의 언어는 알타이어계, 만주. 퉁구스 어파 만주어에 속하며 남북 2종류의 방언이 있다 한족(漢族)과 함께 생활해왔기 때문에 지금의 만족(滿族)은 중국어를 사용하고 있다 소수의 만족(滿族)이 모여 거주하는 마을에서는 만어(滿語)를 사용하기도 한다
만어(滿語)는 16세기말 몽고어를 기초로한 만어(滿語)가 만들어졌다
(2)문자--한자
현재 만주족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중국 문자는 한글과 한문의 병용 글이지만 만주족의 글은 모두 한문을 사용해왔다 한글이 중국 문자와 비슷하다 한국에서 17세때 한문이 가장 발전한 것도 청나라의 한문(漢文) 영향이었다
-한국정부도 만어(滿語)에 대한 연구와 공부할 필요하며 외국어학과에 만어(滿語) 신설도 올바른다
3.만주족(滿洲族)의 인구----982만 1,180명
만주족은 대대로 동북지역에 살았으나 여러가지 역사적인 원인으로 지금은 거의 전국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1990년 현재 만주족 인구는 982만 1,180여명이다
주요 분포지역은 동북3성으로 7,185,461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 중 랴오닝성(요령성)이 4,952,461명으로 가장 많다 그 나머지는 하북. 내몽고. 영하. 감숙. 복건.산동. 신강등의 성구(성구) 및 북경. 천진. 상해. 성도. 광주. 항주. 서안등의 대도시에 흩어져 살고 있다
4.만주족(滿洲族)의 종교와 생활상
(1)만주족의 종교--샤머니즘과 조상신 숭배--유교(儒敎)
만주족은 많은 신들을 제사 지내는 샤머니즘을 신봉했으나 조상신을 숭배해왔다 만주족도 사회주의 체제의 의하여 조상의식이 무너져왔다가 지금은 농촌지역과 만주족이 모여사는 곳에서는 조상신 숭배의식이 증가하고 있으며 도시지역 만주족들은 중국화로 한족화(漢族化) 되어가는 실정이다
ㄱ.오늘날에도 만주족의 미신적 종교신앙이 과거처럼 강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조상신에 대한 제사는 여전히 대다수가 지키고 있다
ㄴ.종교 분포
(ㄱ)최대 종교:전통종교(샤머니즘) 99%
(ㄴ)기독교인:1%미만
(2)만주족의 생활상
만주족은 100개-200개의 가구로 구성된 마을 단위로 농업이나 목축업에 종사하며 관개수로를 이용하여 밀. 쌀.면화.과일등을 재배한다
5.만주족(滿洲族)이 건국한 국가(國家)
숙신. 읍루(부여)--말갈(발해)--->여진(금)--->만주(청)--->만(중국 56개 민족 중 한개 소수민족으로 편입)
(1)부여---한(韓)민족과 연합정부---숙신. 읍루
ㄱ.지배자--한민족(조선족)
ㄴ.피지배자--만주족(숙신. 읍루)
(2)발해--한(韓)민족과 연합정부----말갈
ㄱ.지배자--한민족(고구려인)
ㄴ.피지배자---만주족(말갈)
(3)금(金)
1211년 이후 칭기즈칸이 금나라에 진격하여 중도(북경)을 점령하고 허베이. 산둥지방을 공략했다 금나라는 허베이를 포기하고 군대를 허난으로 이동시켰다 금나라는 1217년 송과 전쟁을 시작했고 또 칭기즈칸이 죽은 뒤 뒤를 이은 오고타이는 1232년 카이펑을 포위했다 금나라의 애종(哀宗)은 귀덕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채주로 피했으나 이 지방에서 몽골과 송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1234년 애종이 자살함으로써 금나라는 9대 120년만에 멸망했다
ㄱ.지배자--여진족
ㄴ.피지배자--거란. 몽골. 한족(漢族, 중국인)등
(4)청----한(漢)족과 연합정부---만주
만주인은 퉁구스계 민족으로 여진이라고 불렸다 그 일부가 12세기 화베이(華北)로 진출하여 금나라를 세웠고 1234년 멸망 후 원(원). 명(명)나라에 복속되었으며 명나라 말기에는 해서(해서) 건주(건주) 야인(야인)의 3부로 나뉘어져 명나라의 간접통제를 받았다
조선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풀이진 틈을 타서 건주 여진의 수장 누르하치(노아합적)는 부족을 통합하여 1616년 칸(간)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금(금: 후금)이라 하였다
ㄱ.지배자--만주족
ㄴ.피지배자--한족(漢族, 중국인). 거란족. 몽골족등
6.만주족(滿洲族)의 역사(歷史)
숙신(肅愼). 읍루<相婁>(부여)--물길<勿吉>.말갈<靺鞨>(발해)--->여진<女眞>(금)--->만주<滿州>(청)--->만<滿>(중국 56개 민족 중 한개 소수민족으로 편입)
"만주족은 17-20세기 초에 중국을 지배한 청나라이며 만주족은 신해혁명 이후 냉대를 받았고 1930년대 만주국으로 활동했습니다 "
만주족은 대대로 동북지역에 살았으나 여러 가지 역사적인 원인으로 지금은 거의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1990년 현재 만주족 인구는 982만여명이다. 주요 분포지역은 동북 3성으로 7,185,461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 중 요녕성이 4,952,859명으로 가장 많다. 그 나머지는 하북 · 내몽고 · 영하 · 감숙 · 복건 · 산동 · 신강 등의 성구(省區) 및 북경 · 천진 · 상해 · 성도 · 광주 · 항주 · 서안 등의 대도시에 흩어져 살고 있다.
만주족은 원래부터 자신들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만주어는 알타이어계 만주퉁구스어족 만주어지(滿語支)에 속한다. 현재 대다수의 만주족들은 중국어와 중국문자를 그들의 공식 언어 문자로 사용하고 있다.
사료에 의하면 만주족의 조상은 2천여년 전의 숙신(肅愼) 및 이후의 읍루(相婁) · 물길(勿吉) · 말갈(靺鞨)과 여진 등의 고대 민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북조 · 수당 시기에(4~7세기) 숙신 · 읍루인의 후손들은 그들의 민족 명칭을 물길 · 말갈이라 했다. 물길은 경제적 발전으로 인구도 신속히 증가하여 수십개의 부락을 세웠는데, 그 중에는 속말(粟末) · 흑수(黑水) · 백산(白山) 등 7개의 큰 부락연맹이 있었다. 그 후 사서에서는 물길을 다시 말갈이라 불렀다.
7세기 말에 대조영(大祚榮)은 고구려 유민과 속말 · 말갈을 중심으로 송화강(松花江) 상류, 백두산 북쪽 기슭 일대에 '진국(震國)'을 건국한 후 713년에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개원(開元) 13년(725년), 즉 발해의 건국을 전후하여 당왕조는 흑수(黑水: 흑룡강) 말갈 지역에 흑수군(黑水軍)을 조직하고 흑수부(黑水部)를 설치하여, 흑수 말갈 각 부의 수령들에게 도독(都督) · 자사(刺史) 등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그 집권자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당왕조는 728년에 다시 그 도독들에게 황족의 성씨인 이(李)씨 성을 하사하고 운휘장군(雲麾將軍) 겸 흑수경략사(黑水經略使)에 제수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장사(長史)를 설치하여 그들을 감독하게 하였다. 유주도독(幽州都督)에 예속된 흑수부는 흑룡강 유역에 세워진 당왕조의 직속 지방기구가 되었다.
요(遼)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발해 주민들을 남쪽으로 이주시키자 흥성을 거듭하던 흑수 말갈부도 그곳을 보강하기 위하여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였다. 발해를 뒤이어 번성을 누린 흑수 말갈을 거란인들이 '여진'이라 부르기 시작한 후로 이 명칭은 점점 말갈의 대명사가 되었다.
12세기 초엽에 유명한 아골타(阿骨打)는 완안부(完顔部)를 중심으로 여진인들을 규합하여 요나라를 물리치고 금(金)을 세웠다. 그들은 세력을 계속 확장하여 요와 북송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남송과 대치하였다.
13세기 초에 몽고가 금을 멸망시키고 원(元)을 세우자 여진인들은 원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원왕조는 흑룡강성 의란(依蘭)을 중심으로 송화강 유역과 흑룡강 중하류 및 우수리강 유역에 분포하던 여진인들에 대하여 그들의 풍속으로 다스리는 정책을 폈다. 처음에는 5만호부(五萬戶府)를 설치하여 관할하다가 뒤에는 흑룡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동정원수부(東征元帥府)를 설치하고 계속하여 두 개의 천호부(千戶府)와 한 개의 만호부(萬戶府)를 증설하였다.
15세기 초에는 명왕조가 동북지구를 관할하면서 여진의 각 부도 모두 명왕조에 귀속되었다. 명왕조는 여진인의 분포 지역 내에 384개의 위소(衛所)를 설립하였다. 여진 각 부의 수령들을 각각 도독 · 도지휘사(都指揮使) · 지휘첨사(指揮僉使) · 천호(千戶) · 백호(百戶) · 진무(鎭撫) 등의 관직에 임명하고 칙서(勅書) · 인신(印信) · 의관 · 금전을 하사하였으며, 조공과 마시장의 시간과 대우를 규정하였다. 그리고 노아간위(奴兒干衛)의 여진 수령 홀자동노(忽刺冬奴)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흑룡강과 항곤하(恒滾河)가 합류하는 특림(特林) 지방에 중앙 왕조 직속의 지방행정과 군사기구인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를 설치하였다. 이상의 조치들은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진과 한족 등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명대에 여진인들은 점점 남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러한 이동의 과정 중에 그들은 건주(建州) · 해서(海西) · 동해의 3부로 나누었다. 건주여진은 무순(撫順) 동쪽으로 이주하여 혼하(渾河)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동으로는 백두산 동쪽과 북쪽 기슭, 남으로는 압록강변에 이르렀다. 해서여진은 이주한 후에 휘발하(輝發河) 유역에 분포되어 살면서 북으로 송화강 중하류 지역에 이르렀다. 동해여진(명나라에서는 그들을 야인여진 野人女眞이라고도 불렀음)은 건주 · 해서 이동과 이북의 광대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대체로 송화강 중류에서 흑룡강과 우수리강 유역에 이르렀으며, 동으로는 해안까지 다달았다.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정착한 후에 농업을 위주로 하면서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동해여진은 그러지 못하고 발전 속도가 완만하였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경제 문화적으로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던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은 그들 부락 사이의 빈번한 전쟁으로 서로를 침탈하고 살육하는 참혹한 국면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평화와 통일을 갈망하였다. 건주여진 좌위(左衛)의 수령 누르하치(努爾哈赤)는 역사적 조류에 부응하여 군대를 일으켜 여진의 각 부를 점령하고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통일 과정 중에 누르하치는 군사적 · 정치적 · 생산적 기능을 갖춘 팔기제도(八旗制度)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은 청대의 기본적인 사회제도가 되었다.
1616년에 누르하치는 '영명칸(英明汗)'이라 칭하고 금나라(즉 후금 後金)를 세웠다. 여진 각 부의 완전한 통일을 따라서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을 바탕으로 일부의 동해여진과 다른 민족을 흡수한 사람들은 오랜 공동생활을 거치면서 하나의 새로운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635년에 황태극(皇太極)은 여진이라는 옛 명칭을 버리고 만주(滿洲)라고 명명하였으며, 그 후에는 일반적으로 그들을 '만족'(滿族: 만주족)이라 칭하게 되었다.
1635년 황태극은 여진이라는 이름을 '만주'로 고쳤는데, 이것은 만주족의 민족공동체가 정식으로 형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듬해에 황태극은 황제라 칭하고 중국역사상 최초의 만주족 정권인 대청(大淸)을 세웠다.
1644년 청나라는 군대를 거느리고 중원으로 들어와 단시간내에 전국을 통일하였다. 그 후 청왕조 통치자들은 명나라의 패인을 교훈으로 받아들여 일련의 행정개혁 조치를 취하고 계층간 · 민족간의 갈등을 완화함으로써 사회적 발전을 촉진시켰다.
예를 들면, 1667년 강희제(康熙帝)는 권지(圈地: 공신들이 하사받은 토지)를 폐지하였으며, 부역을 정돈하고 수리사업을 일으켜 농업을 장려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청나라는 다시 새로운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전국의 인구 · 경지면적 · 농업과 수공업은 모두 현저하게 증가되거나 향상되어 자본주의의 기틀이 더욱 많이 다져졌다.
강희제의 집권 중반기에는 대내외적으로 반정부 세력들의 활동이 창궐하였다. 이에 만주족도 다른 소수민족들과 함께 국토수호 전쟁에 참가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강희제는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삼번(三藩)'의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만주족 중심의 팔기군(八旗軍)을 친히 거느리고 출정하여, 제정러시아와 연합하여 내외몽고를 침공한 갈단 군대를 대파하였다. 이로부터 옹정제(雍正帝) · 건륭제(乾隆帝)에 이르기까지 70여년간의 분쟁을 거쳐 즁갈지역을 안정시켰다.
일찍이 17세기 중엽에 제정러시아는 중국의 흑룡강 유역을 끊임없이 침입하였다. 1685년 강희제는 만주족 도통(都統) 팽춘(彭春)을 파견하여 팔기군과 수군을 거느리고 반격하게 하였으며, 그 후 1689년 중 · 러 쌍방은 호혜평등의 원칙하에 네르친스크(Nerchinsk)조약을 체결하고 양국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18세기에 대영제국은 그들의 영원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한 후 네팔을 앞세워 티벳 중부지방을 침공하였다. 건륭제는 만주족 대학사 복강안(福康安)을 파견하여 그들을 진압하도록 명하였으며, 이에 복강안은 티벳지역의 백성들과 연합하여 네팔군을 격파하고 그곳을 안정시켰다. 19세기 초에 영국은 다시 장격이(張格爾)를 앞세워 여러 차례 중국 서북의 신강지역을 침공하였다. 이에 도광제(道光帝)는 만주족 대학사 장령(張齡)에게 신강 경내의 만주족 · 한족 군대와 동북 팔기군을 이끌고 가서 그들을 진압토록 하였다. 이에 장령은 반란군을 대파하고 장격이를 생포하여 영국의 야욕을 분쇄하였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반식민 반봉건사회로 전락하였다. 서구열강들은 부패하고 무능한 청왕조를 마음대로 유린하였으며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이에 중국의 완전한 독립과 민족해방을 쟁취하기 위하여 만주족은 다른 소수민족들과 함께 힘들고 어려운 투쟁을 전개하였다.
제2차아편전쟁 중에 제정러시아는 청왕조의 통치력이 북방에까지 미치지 않는 틈을 이용하여 100㎢에 달하는 동북변경 지역을 강제점령하였다. 이에 분개한 만주족 주민들은 한족 주민들과 합세하여 제정러시아의 침략과 식민통치에 용감하게 맞섰다.
1894년 청일전쟁의 발발로 일제는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였다. 일제가 요동지역을 점령하여 그 세력을 신속히 확장시켜 나가자 그 지역에 살고있던 만주족 · 한족 · 조선족 백성들은 함께 들고 일어나 민간자위단 의용군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반격을 가하였다. 요양(遼陽) 방어전쟁에서는 만주족과 한족 백성들의 합동작전으로 한달 동안에 일본군의 침공을 네 번이나 물리치고 일제의 봉천성(奉天城) 진입 계획을 무산시켰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만주족 정부였던 청왕조는 역사의 무대에서 종말을 고하였다. 1931년 '9 · 18사변'으로 동북지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는데, 이때 청왕조의 마지막황제 부의(溥儀)는 일제가 세운 '만주국'의 꼭두각시 황제에 올라 청왕조와 만주족의 영화를 계승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으로 만주족은 다른 소수민족들과 함께 사회주의 중국의 민족 구성원으로 편입되었다.
-만주족(거란족)이 동북 3성(만주지역) 권력을 장악할 때 한족과 한민족(조선족) 투쟁으로 동북아 전쟁이 일어났고 일본이 강력한 군사력 국가로 등장했다 한족과 조선족(한민족), 일본족이 하나의 핏줄이다(한자문화권)
-중국 한족(漢族)과 한국 韓族(조선족), 일본 일족(日族), 중국 만주족 등이 동북아 중심세력이다 일족과 만주족이 연합구도 동북아 지역에 등장할때 한반도와 중국대륙에 전쟁이 일어나고 한족과 조선족(한족)이 연합구도로 동북아지역에 등장할때 평화시대가 왔다
일본지역이나 한반도지역 내부 한자어(성씨가 있는 집안)를 사용하는 가문 친중국 한족 인맥들이 동북아 소수민족(자국)이 동북아 권력을 장악할 수 없게 견제해야 한다 일본 일족도 한국 한족(조선족)처럼 중국 다수종족 한족과 협력해야 하며 중국 소수민족을 지원하는 동북아 분열정책을 버려야 한다 동해나 만주, 극동지역등 영토에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하며 만주족등과 연합으로 전쟁을 추진하지 말아야 한다
한중일국가연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행 국경선 존중과 경제통합으로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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