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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남침, 공산권 문서로도 사실" 본문

Guide Ear&Bird's Eye/한국전쟁과 유엔군 16개국 자료 발굴

"6.25 남침, 공산권 문서로도 사실"

CIA bear 허관(許灌) 2012. 6. 23. 22:41

북한은 21일 관영매체인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통해 `6.25전쟁은 미국이 도발한 전쟁’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했습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자료를 통해 본 조선전쟁 도발자의 정체’란 글에서, “조선전쟁은 미제가 2차 세계대전 후 세계 제패를 위한 첫 걸음으로 도발한 전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은 몇몇 근거 자료를 제시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발간된 ‘전쟁, 대답없는 질문’이란 제목의 책을 인용해 당시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이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북조선을 공격할 준비가 돼 있다면 미국은 유엔을 통해 도와주겠다고 시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대한 좌파적 시각으로 잘 알려진 미국 시카고대학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 조차 북한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브루스 커밍스 교수] “AMERICANS CLEARLY HAD TOLD SEUNG-MANN RHEE..

당시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대북 도발을 하지 말도록 분명한 입장을 밝혔었다는 겁니다.

지난 1981년 `한국전쟁의 기원’이란 책을 펴냈던 커밍스 교수는 그러면서 미국과 남한이 북한을 먼저 공격했다는 북침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브루스 커밍스 교수] “THERE IS NO EVIDENCE THAT SOUTH KOREA INVADED..”

남한이 미국의 사주를 받아 북한을 침공했다는 북침설을 뒷받침하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겁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6.25 전쟁의 기원과 관련해서는 그동안 세 가지 견해가 있었습니다.

우선 소련과 중공의 팽창주의 정책에 따라 한반도를 공산화하기 위해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다는 전통주의 이론이 있습니다.

또 다른 것은 북한이 주장하는 북침설로, 남한이 미국의 사주를 받아 북한을 공격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수정주의 이론으로, 6.25전쟁은 1930년대부터 시작된 한민족 내부의 좌우 갈등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북침이냐 남침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나 1990년대 공산권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북침론은 자취를 감추게 됐습니다.

특히 1994년6월 당시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에게 비밀로 분류됐던 옛 소련의 문서들을 넘겨주면서 과거 베일에 가려졌던 6.25의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서강대학교의 북한 전문가 안찬일 교수입니다.

[녹취: 서강대 안찬일 교수] “옐친은 자유주의적인 지도자로 김영삼 대통령에게 6.25와 관련된 모든 문서 즉, 스탈린의 밀약과 중공군의 참전과 관련된 자료를 넘겨줘서 6.25가 철저하게 준비된 남침이라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러시아가 넘겨준 3백 여종의 문서에는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소련 외무부와 북한 외무성간에 오간 외교 전문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회의록 등 한국전쟁의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극비자료가 포함돼 있었습니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1949년 3월5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나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스탈린은 당시만 해도 남침을 허락하지 않고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0년 2월9일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 계획을 승인했습니다. 스탈린이 50년5월14일 마오쩌둥에게 보낸 외교 전문에는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인 (북한)들의 제창에 동의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이어 50년 5월29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당시 평양주재 소련대사를 면담한 자리에서 “소련이 지원한 무기와 장비가 모두 북한에 도착했다”며 “6월까지 완벽한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겠다”고 통보했습니다.

북한 인민군이 6.25 개전 당시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진격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소련은 전쟁이 발발한 뒤에도 북한에 대한 지원을 계속해, 51년3월에는 북한에 2개 항공사단과 트럭 6천 대를 제공했습니다.

이렇듯 소련의 비밀문서가 대거 공개되면서 전세계 학계에서 6.25는 ‘김일성이 기획하고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후원한 전쟁’으로 이미 결론이 난 상태라고 워싱턴의 민간단체인 윌슨센터의 로버트 헤서웨이 연구원은 말했습니다.

[녹취: 윌슨센터 로버트 헤서웨이 연구원] “KOREAN WAR WAS PROVOKED BY KIM IL-SUNG…

북한 전문가들은 공개된 공산권 문서 외에도 6.25가 남침이라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전쟁 발발 사흘만에 서울이 북한 인민군에 점령된 것은 6.25가 남침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는 겁니다. 다시 안찬일 교수의 말입니다.

[녹취: 서강대 안찬일 교수] “만약에 남한이 먼저 침략을 했다면 평양을 점령했겠지만, 당시 남한은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반면 북한은 철저한 준비와 기습공격을 감행했기 때문에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는 결과를…”

브루스 커밍스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북한이 지금이라도 6.25전쟁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소리 최원기입니다.

 

 

"정전협정조인장-1950년 6월 25일 조선에서 침략전쟁을 도발한 미제국주의자들은 영웅적 조선인민 앞에 무릎을 꿇고 이곳에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조인하였다"(북쪽 판문점 내 정전협정조인장 앞에 서 있는 중국인 관광객 모습)

 

*북침론(정의의 전쟁): 미국과 남한이 전쟁을 도발했다는 입장

유엔은 북한이 남침을 하여 유엔안보리 결의에 의하여 16개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했습니다 구소련(러시아)도 남침 사실을 인정했으며 유엔안보리 결의에 기권(중립)을 했습니다

머리소리함 한국전쟁 조사에 따르면 한국전쟁 이전에 남북 국경선 지역에서 지역분쟁이 연일 일어났고 북한은 모택동(한중연합군) 부대에 편입돼 있었던 조선인(한국인) 주도로 백범 김구선생 첫번째 제사날 6월 25일 남침을 했습니다 유엔이 한국전쟁 참전으로 이북지역으로 진격함으로 중국 인민군과 체코슬로바키아등 2개국이 북한군에 참가하여 사실상 국제전쟁이 되었습니다

전쟁은 명분론입니다

남북협력세력이 제거와 함께 북한정부 내 강경파 주도로 일어날 것이 한국전쟁입니다

그 후 남북은 남북협력세력이 항구적으로 제거돼 왔고 김일성과 박정희 중심의 군정(군사정부)이 실시돼 왔습니다 

제6공화국 헌법과 김영삼 문민정부 등장이후 남북전쟁세력이 제거돼 오고 있으며 남북협력세력 중심으로 남북 평화통일이 준비돼 오고 있습니다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남침도 민족해방전쟁론으로 정당성 확보를 논리 제공을 해오고 있는 노선입니다

1단계 민족해방전쟁(반미전선)-좌우익연합전선[반미전선]

남한-반미성향 단체나 반미투쟁 단체(민족주의와 김일성주의자 구분이 잘 되지 않는 것이 특징)

2단계 인민민주주의 혁명-사회주의 국가 수립(좌파정권 수립-군정분리주의 좌익군사정부 수립)[김일성주의-우리식 사회주의(주체사상=자주노선)]

남한-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그룹 중 김일성주의자 그룹(주체사상-자주노선)

 

*한국전쟁 유엔군

6ㆍ25 전쟁 당시 한국을 도운 국가가 당초 알려진 41개국이 아닌 60개국에 달한다는 최종 연구결과가 공개됐다. 국방부는 산하 군사편찬연구소가 최근 비밀이 해제된 미국 정부 문건과 유엔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16개국이 6ㆍ25 전쟁에 참전하고 5개국이 의료지원을, 32개국이 전쟁 중 물자지원을, 7개국이 전후 복구를 지원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15일 밝혔다.
당시 독립국 93개국 가운데 63%가 한국을 지원한 셈이다. 그동안 정부는 전쟁 중 41개국이 한국을 도운 것으로 파악해왔으나 지난해 민간단체 월드피스자유연합이 67개국을 주장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연구결과 참전국과 의료지원국 수에는 변동이 없으나 물자지원국에 오스트리아ㆍ베트남ㆍ이집트 등 13개국이 추가됐다.
 전후 복구를 지원한 나라도 과거 리히텐슈타인 1개국만 알려졌었으나 실제로는 독일ㆍ아이티ㆍ페루 등 6개국이 늘어 모두 7개국으로 확인됐다.
 월드피스자유연합이 지원국으로 분류한 브라질과 볼리비아 등은 기록이 확인되지 않아 제외됐다.
 연구를 맡은 양영조 박사는 "물자 또는 구호자금 지원 사실을 유엔과 관련기관의 보고서 등 1차 자료를 상호 교차해 확인한 결과"라면서 "국방부 입장에서 이를 공식 규명한 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내년 3월 외교통상부와 교육과학기술부 등 관련부처 및 전문가들과 함께 포럼을 열고 내용을 최종 확정한 뒤 국가공식기록물과 교과서 수정 작업에 착수할 계획이다.


*한국전쟁(6.25 동란) 중 북한을 지지하고 도왔던 국가들은 어떤 나라들입니까? 공식적으로 중국과 체코슬로바키아등 2개국

북한의 전격적인 남침은 유엔내에서는 유엔군을 구성하여 북한의 불법적 남침을 격퇴하려고 하였습니다. 소비에트연방(소련의 정식명칭)은 유엔의 투표에서 국제여론을 의식하고 기권(중립)을 하였으며 반대가 없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결성되어 전장에 투입되었습니다.

 당시 유엔군은 한국을 제외한 16개국이 군사적 지원을 하였으며 비공식적 지원국은 2개국, 의료지원국은 5개국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북한의 경우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지원을 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은 비공식 지원국이었습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가 의료지원을 하였습니다

 

 

북한정부의 반미투쟁 6.25전쟁관-한국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묘사하여 반미인민전쟁과 인민민주주의 혁명론(NLPDR)을 정당화 해오고 있습니다 미국과 영국등 유엔군을 제국주의자로 규정하여 침략자로 북한주민들에게 교육해오고 있습니다

 

*한국전쟁과 유엔군사령부

1950년 6월 25일 비가 내리는 평화로운 새벽의 정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야포와 자동화기의 굉음과 함께 북한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되었다. 침략군은 이내 38선을 넘어 반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 경찰군을 밀어내며 수도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틀 후 유엔은 북한군의 침략 저지를 위한 회원국의 단결과 원조를 요청하였다. 유엔 안보이사회는 결의안을 통해 미합중국을 결의안 내용의 실행과 한국 내 유엔군 작전 지휘를 담당할 집행국가로 선정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미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자유 세계에 대한 위협을 인지하고, 공산세력이 자유국가를 짓밟는 행위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음을 천명하였다. 당시 미 육군 극동사령부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침략을 격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는 명령에 따라 미 공군 및 해군을 투입하고 7월 24일 일본 도쿄에서 유엔 사령부 총 사령본부를 설치하였다.

유엔의 호소

한편, 유엔은 모든 회원국에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항전 노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군사 및 기타 원조 제공을 촉구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미 보병 24사단 21 보병연대가 유엔 지상군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른바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로 명명된 이들은 일본 내 주둔지로부터 공수된 병력으로 7월 5일 오산에서 북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한-미 양국의 군대는 우세한 전력의 북한군을 상대로 점차 남쪽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유엔 사령부는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즉, 수적으로나 장비 측면에서 열세인 가운데 유엔의 다른 회원국이 약속한 지원을 기다리며 조금씩 후퇴하면서 시간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 8월 29일, 영국 제 27여단이 부산에 도착, 한국군 및 미군으로 구성되어 있던 유엔 사령부에 합류하였으며 곧 대구 서쪽의 낙동강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호주, 벨기에, 캐나다, 콜롬비아, 이디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터키가 자국 병력을 파병하였고, 남아프리카 연합은 공군병력을, 덴마크, 인도, 노르웨이, 스웨덴은 의무부대를 지원하였고, 당시 비회원국이던 이탈리아는 병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자유세계의 자유를 수호하다

3년 간의 한국전쟁을 통해 연합군에 소속된 장병들은 유엔 사령부의 일원으로서 목숨을 바쳐 싸웠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침략행위 저지를 위한 유엔의 의지를 확인시켰다.

한국 땅의 혹서기와 혹한기를 견뎌내면서 영국, 이디오피아, 한국, 태국, 터키, 미국 등을 비롯한 연합국 출신의 젊은이들은 북한과 중국 인민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이야말로 현대 전쟁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의 능선, 장진호, 함흥, 단장의 능선, 화천호, 철의 삼각지, 펀치볼, 부산 등은 한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격전지들이다. 연합군의 용맹스런 장병들이 흘린 피는 불모고지의 흙먼지와 한강과 임진강의 흐르는 강물도 붉게 물들였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총성은 멈췄다. 판문점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은 전투의 종결과 함께 정치적 타협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비록 전투는 끝났으나 군대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양측은 휴전선으로부터 2,000미터씩 물러나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두고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야만 했다.

자유의 대가

부산항 부근에 위치한 당곡 평야에는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수많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빛 바랜 터키와 이스라엘의 '초승달과 별'과 '다윗의 별' 문양 옆에 세워진 하얀 십자가들은 33,629 명의 미군과 수많은 한국 병사들, 717명의 터키 병사들, 그리고 1,109 명의 영국군이 치열한 전투 속에서 산화해 간 흔적인 것이다. 이 곳은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죽어간 12 개국 병사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영광의 장소이기도 하다.

휴전협정과 함께 유엔 사령부 회원국들은 전쟁으로 피폐한 한국의 경제를 재건하는 데 힘을 쏟기 시작했다. 도시와 농촌을 온통 폐허로 만들어버린 전후 한국의 재건과 복구를 돕는 일은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 거대한 작업이었다.

병력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당시 유엔 연합군의 병력은 932,964 명으로 최대규모를 이루었다. 각국별 병력사항은 다음과 같다.

한국 - 590,911

콜롬비아 - 1,068

미 합중국 - 302,483

벨기에 - 900

영국 - 14,198

남아프리카 - 826

캐나다 - 6,146

네덜란드 - 819

터키 - 5,455

룩셈부르크 - 44

호주 - 2,282

필리핀 - 1,496

뉴질랜드 - 1,389

태국 - 1,294

이디오피아 - 1,271

그리스 - 1,263

프랑스 - 1,119

*유엔묘지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6.25참전 유엔군 전사자 묘지--
부산광역시 남구(南區) 대연동(大淵洞)에 있는 6.25참전 유엔군 전사자의 묘지이다
1951년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설립안이 채택되어 참전 16개국 1만 1,000명이 안장되었는데 유해를 본국으로 이장하기도 하여 11개국 2,300여구가 남아 있다
1955년 이후 UN에서 관리해 오다가 1974년부터 이곳에 유해를 남기고 있는 참전국과 한국이 공동관리하고 있다
참전국 국민에게 널리 알려져 해마다 많은 내외국인이 방문, 참배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3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