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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특집기획: 6.25전쟁 62주년] 인천상륙작전 본문

Guide Ear&Bird's Eye/한국전쟁과 유엔군 16개국 자료 발굴

[특집기획: 6.25전쟁 62주년] 인천상륙작전

CIA bear 허관(許灌) 2012. 6. 27. 10:17

6.25 전쟁 중 ‘크로마이트작전 (Chromite)’이란 이름으로 단행된 인천상륙작전은 미군이 불리한 전세를 극적으로 역전시킨 탁월한 군사작전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당시 유엔군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전략적 직관과 신념이 절대 무모한 일이란 비판을 샀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지적합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6.25 전쟁 62주년을 맞아 한국전쟁의 영웅 맥아더 장군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관한 특집방송을 오늘부터 3차례에 걸쳐 보내 드립니다

보도에 유미정 기자입니다

1.맥아더의 신념이 이뤄낸 성공

인천 바다.

62년 전인 1950년 6월, 한국의 서해 바다. 수도 서울에서 서쪽으로 20마일 떨어진 인천 쪽을 향해 한 노련한 미군 지휘관의 눈길이 고정됩니다.

인천의 찬물 때와 간물 때의 차이는 무려 10 미터. 전세계에서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큰 지역의 하나인 이 곳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물이 빠지면 소라와 고동이 지천으로 널린 광활한 갯벌이 해안에 끝도 없이 펼쳐집니다.해안에 배가 닿을 수 있으려면 수심이 깊은 만조 때여야만 한다는 것을 노련한 노장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침묵 속에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가늠하는 맥아더 장군의 마음은 분주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소련제 탱크 등 압도적인 화력으로 무장한 북한 군은 기습적인 남침을 통해 파죽지세로 진격을 이어갔습니다.

사흘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됐고, 개전 41일만에 부산과 진해 등 낙동강 이남을 빼놓은 남한 전역이 북한 군에 함락됐습니다. 마지막 남은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지 못한다면 신생 대한민국은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질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맥아더 장군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곧바로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고 말합니다. 미 해군전쟁대학 도널드 치섬 박사의 말입니다.

[녹취: 도널드 치섬 박사] A couple of days after the war began…

전쟁이 시작되고 며칠 뒤 맥아더 장군은 서울 남쪽의 한 작은 공항으로 날아가 직접 전황을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이 자리에서 한국 군이 북한 군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남쪽으로의 전면방어 (Perimeter Defense)를 준비하면서 병력을 결집해 인천을 통한 총 반격을 구상했다고 치섬 박사는 말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 주 노폭에 위치한 맥아더 장군 기념관의 제임스 조벨 씨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2차 세계대전의 전략을 따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제임스 조벨] All of his operations by amphibious maneuver to bypass…

모든 상륙작전 병력을 적이 몰려있는 최전방을 피해 후방공격에 참가시키고 적의 병참선을 차단한다는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방어가 강화된 섬이나 진지는 우회하고, 일본군이 예상치 못한 곳을 공격해 적을  고립, 압박하는 이른바 ‘와도 전략 (Island Hopping)’을 성공적으로 전개했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해병연대 전투단과 육군부대가 돌격부대로 인천에 상륙해 내륙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하고 동시에 미 제 24, 제25 사단이 남부전선에서 정면 반격을 가해 적을 38도선 이북으로 구축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합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미 합동참모본부의 강한 의구심과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1950년 8월 일본 도쿄의 극동군사령부에서 열린 고위급 회의에서는 군 수뇌부 뿐아니라 맥아더 휘하의 일부  장군들까지 상륙작전을 극구 반대했습니다.

특히 매튜 리지웨이 육군 참모차장은 작전의 성공률은 5천 대1이라며 상륙이 용이한 군산 등 남쪽 지역을 제안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인천이 상륙작전에 최악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다시 미 해군전쟁대학 도널드 치섬 박사의 말입니다.

[녹취: 도널드 치섬 박사] What you need at that time in 1950….

병력과 탱크, 트럭 등을 실은 상륙용주정 (LST)이 해안에 닿으려면 수심이 8 미터는 넘어야 하는데 인천의 경우 수심이 8 미터 이상 되는 날이 한달에 단 며칠 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천은 또 상륙부대가 한꺼번에 상륙할 수도 없었습니다. 밀물이 들어와서 썰물이 되기까지의 가용시간은 겨우 3시간 뿐인데 먼저 상륙한 부대는 상륙 중 썰물이 되어 빠지면 12시간 동안 후방부대의 증원 없이 완전히 고립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비판가들은 또 인천이 높은 방파제로 보호되어 있는 점, 그리고 부산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상륙부대와 미 8군이 제대로 연계되기 어려운 점 등 수많은 문제점을 들어 반대했습니다.

<6.25 Special 06/ 21 MJH (Act 10) BGM(Background Music)>

하지만 맥아더 장군의 결심은 단호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의 지형적 악조건이 미군과 연합군에게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재단의 사무총장 윌리엄 데이비스 예비역 해병 대령의 말입니다.

[녹취: 윌리엄 데이비스 사무총장] “The greatest advantage it had was the least likely…

인천의 가장 큰 장점은 그 곳이 상륙작전이 이뤄지리라고는 예상하기 어려운 지역이란 것이었다는 설명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은 적의 허를 찌르는 예상치 못한 기습의 효과 (element of surprise)를 얻을 수 있었다고 데이비스 씨는 말했습니다.

후일 맥아더 장군은 회고록에서 인천상륙작전 결정 배경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더빙:맥아더 장군] “나는 적들이 인천 방어를 준비하지 못했다고 확신한다. 인천상륙의 모든 악조건은 놀라움의 요소가 되며, 적이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야 말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주도권을 빼앗아야 한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맥아더 장군의 신념과 성공에 대한 확신은 워싱턴을 설득시켰고, 마침내 현대 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작전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는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됐습니다.

‘크로마이트작전’으로 명명된 인천상륙작전의 공격 개시일은 9월 15일.

기함 마운트 맥킨리호에 몸을 실은 맥아더 장군은 검은 밤바다를 헤치며 2백 61척의 대전단을 이끌고 인천으로 진격했습니다

 

                                               6.25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공적에 대해 설명하는 윌리엄 데이비스 맥아더 재단 사무총장(오른쪽).

 

2.허를 찌른 기습이 거둔 대승

인천 바다

1950년 9월 13일. 인천상륙작전 이틀을 앞둔 한국 서해 앞바다는 전세계 7개국 소속 군함 수 백 척들로 까맣게 뒤덮였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이 작전을 위해 미 육군과 해병대, 해군으로 구성된 제10군단을 창설하고 7만 4천 여 병력을 동원했습니다. 2만 5천t에 달하는 물자와 6천6백대의 차량, 2백 61척의 함선도 동원됐습니다.

한군전쟁 종군기자였던 미국 ‘뉴욕 헤럴드 트리뷴’ 신문의 극동지국장 마가렛 히긴스 씨는 회고록에서 당시의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전세계 외신 기자들이 팔미도 등대의 불빛을 따라 인천 앞바다에 포진한 유엔군 함대의 모습을 보고, 세기의 장관이었다고 타전했다.”

월미도. 맥아더 장군은 상륙작전의 첫 번째 목표로 인천항 입구에 있는 이 반달 꼬리 모양의 섬을 확보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새벽 밀물시간에 상륙해 월미도를 장악하고, 이어 월미도를 교두보로 저녁 밀물시간에 인천에 상륙한다는 전략입니다.

월미도 상륙 개시 전 48시간 동안 격렬한 함포 사격이 계속됐습니다. 미 순양함 톨레도호와 로체스터호, 영국 순양함 케냐호와 자마이카호의 포격으로 천지가 진동했습니다.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해군 항공기들도 폭격에 가세했습니다.

9월 15일 새벽. 마침내 붉게 물든 여명을 배경으로 월미도를 향한 상륙작전이 시작됐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마운트 맥킨리호 함상에서 직접 작전을 지휘했습니다.

6시 33분. 1차 상륙 병력인 5연대와 3대대가 월미도의 녹색 해안으로 명명된 지점에 상륙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연합군의 함포사격과 공습으로 이미 월미도에서 북한 군의 전력은 무력화됐다고 말합니다. 미국 버지니아 주 노폭에 위치한 맥아더 장군 기념관 제임스 조벨 씨의 말입니다.

[녹취: 제임스 조벨]

월미도 점령이 아주 쉽게 이뤄졌으며, 북한 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미군은 상륙 30분만에 월미도 섬의 정상을 차지하고 성조기를 내걸었습니다. 월미도 교전에서 북한 군은 사상자 3백 20명, 포로 1백36명이라는 피해를 입었지만, 미군은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밀물 때는 12시간 후. 제 10군단이 상륙을 기다리는 동안 콜세어 전폭기들은 인천 시가지에 융단폭격을 가했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깔리면서 본격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됐습니다. 밀물 때를 맞춰 인천의 적색 해안과 청색 해안에 연합군 상륙정들이 속속 도착했습니다.

미군은 1시간 30분만에 적색 해안을 완전히 장악한 데 이어 청색 해안을 점령했고, 다음 날인 16일에는 인천 전 지역을 수복했습니다. 상륙작전 개시 24시간만에 인천은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왔고, 연합군 전사자는 단 20명에 불과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적의 허를 찌르는 ‘기습의 효과 (element of surprise)’였다고 말합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재단 윌리엄 데이비스 사무총장의 말입니다.

[녹취: 윌리엄 데이비스 사무총장]

북한 군도 연합군이 상륙할 가능성이 있는 여러 지역을 검토했지만 인천은 지형과 조수 등 악조건 때문에 가능성이 가장 낮은 것으로 판단하고 방어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또 맥아더 장군이 성공률 5천 대 1로 여겨졌던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것은 논리보다는 전략적 직관에 따른 결정이었다고 말합니다. 미 해군전쟁대학의 한국전쟁 전문가 도널드 치섬 박사의 말입니다.

[녹취: 도널드 치섬 박사]

한국전쟁에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됐을 때 이미 70살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군 역사에 대해 아주 해박한 지식과 세계대전 참전 등으로 풍부한 경험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천을 장악한 연합군은 서울과 수원으로 진격합니다. 한반도 남쪽 낙동강 전선에서도 연합군의 총 반격이 시작됐습니다.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소식이 전해지면서 북한 군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패잔병들이 앞다퉈 투항했습니다. 연합군은 패주하는 북한 군을 추격해 서울과 38도선을 향해 파죽지세로 북진했습니다.

1950년, 9월 27일 오전. 서울 중앙청에 감격어린 태극기가 게양됐습니다. 유엔군은 6.25 전쟁 발발 90여일만에 서울을 공산 치하로부터 다시 되찾았습니다.

서울을 수복한 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압록강까지 북진합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참전 결과 38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의 분단이 고착됐습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의 대담한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전세를 극적으로 역전시켜, 꺼져가는 대한민국의 운명에 빛을 던져준 역사적인 대작전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지휘함에서 전황을 살피는 맥아더 장군.

3. 한국인이 바라보는 맥아더

 

6.25 한국전쟁 62주년을 맞은 지난 6월 25일, 인천광역시 연수구에 자리잡은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은 한국전쟁을 기억하기 위해 찾아온 많은 시민들로 붐볐습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체험한 참전용사에서부터 지나온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알고 있는 젊은이들까지 다양한 세대의 감회가 교차했습니다.

[녹취: 기념관 방문객] “오늘 6.25날이니까 우리가 군대 나가서 여기서 와서 기념관을 관람하고 있는 거야. 옛날을 모르는 사람들도 얘기도 해주고. 여기 여섯 차가 왔어. 여섯 대가.”  

[녹취: 기념관 방문객] “저는 인천에 살고 있는데요, 뜻 깊은 날이라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 있다고 해서 방문해봤습니다.”   

현장학습을 나온 어린이들은 기념관 측에서 준비한 편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녹취: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어린이프로그램 현장]  “싸워주신 분들 감사하다고…” “감사하다고 편지 썼죠. 우리. 자, 다 쓴 사람”

이 기념관은 지난 1983년 인천시의 지원과 더불어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건립돼 지금까지 1년 365일 무료로 개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마련된 여러 전시물들은 시민들의 안보의식을 고취시키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동맹국과의 유대를 돌아보게 합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 김인숙 관리소장입니다.

[녹취: 김인숙 인천상륙작전기념관 관리소장]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은 통일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된 기념관입니다. 또 우리나라를 도와준 참전국가와의 유대를 강화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사실을 문화적 차원에서 기념하기 위해서 1983년 5월 1일에 착공해서 84년 9월 15일에 준공과 동시에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참전용사들은 매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6월 25일과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됐던 9월 15일, 기념관에 모여 전우의 넋을 기립니다. 또 이곳을 찾은 시민들에게 안보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80대 중반을 넘어 거동마저 불편해진 노병들. 하지만 나라를 지켜냈다는 자긍심은 62년 전 그 때와 다를 바 없습니다.

[녹취: 6.25 참전용사] “인천상륙작전에서 처음 팔미도 등대에 불을 붙인 것이 우리 부대원들, 불빛이었기 때문에 맥아더 장군이 신호를 받고 인천상륙작전을 한 거에요. 맥아더 장군이 아니었으면 지금 여기 공산화가 됐죠.”

참전용사들에게 있어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입니다.

[녹취: 6.25 참전용사] “맥아더 장군은 정말 우리 대한민국에는 존경 받을만한 큰 인물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인천상륙을 진두지휘 해서 압록강까지 진격을 할 수 있었다고 하는 그 굳은 의지가 우리 대한민국을 지금 이렇게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하는 기반을 조성해주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분을 존경하는 겁니다.”

기념관 방문객들은 대체로 맥아더 장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녹취: 시민] “인천상륙작전은 제가 정말 좋게 보고 있어요. 인천상륙작전 때문에 중공군을 무찌르고 조금 위로 올라갈 수 있었는데 안타깝게 사실 내려왔잖아요. 맥아더 장군 되게 존경스럽죠.”

[녹취: 시민] “참 고마운 분이라고 그 맥아더 장군, 월미도 작전 없고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을 못했다고. 근데 요즘 젊은이들은 모르겠어.”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있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습니다.

[녹취: 시민인터뷰] “맥아더장군이 한국전쟁 업적에 대해서는 인정할만하지만 그렇게까지 우상화하고 신격화할 필요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녹취: 시민인터뷰] “글쎄 뭐, 그렇게 호평만 하는 건 아닌 걸로 그런 얘기를 조금 하시더라고요.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죠. 젊은 세대들은 그런 생각이 많은 것 같은데…”

인천광역시 중구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은 1957년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 7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2002년 7월 경기도 양주에서 여중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지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반미감정이 고조되면서 이 동상에 대한 철거논란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각기 철거와 보존을 주장하는 단체 간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논란이 점차 격화되며 맥아더 동상은 진보 대 보수라는 이념갈등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녹취: 시민인터뷰] “동상철거, 해야죠. 미국 쪽에서 그렇게 영웅시 되는 사람도 아니고 굳이 이렇게 몇 십 년이 지난 후까지도 동상 만들고 기념관 만들고 할 필요 있나요?”   

[녹취: 시민인터뷰] “외국인이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워줬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요. 그 업적을 기리면서 동상까지 세운 것만 봐도 큰 업적을 남겼다고 봐요.”

[녹취: 시민인터뷰] “철거하기에는 우리나라가 한미수교 관계도 있고 해서 그것보다는 보존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 학계와 재야에서는 6.25 한국 전쟁과 맥아더의 역할에 대해 비판적 관점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일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미래 지향적이고 건전한 역사관 확립을 위해서 한국사회가 맥아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보다 객관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합니다. 한국현대사 전문가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입니다.

[녹취 :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 당시의 상황 속에서 ‘맥아더 장군의 역할을 어떻게 봐야 되는가’라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리고 또 체계적으로 조명한 연구는 많지 않은 것 같고요. 그런 부분들이 사실 어떤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시각을 제공하지 못하는 요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분단과정에서 냉전적인 상황들이 계속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맥아더 장군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제기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던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좀 더 자료에 근거한 핵심적이고 객관적인 연구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의 상징적 인물로 한국인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마다 불거지는 맥아더 장군의 전시업적에 관한 평가 논란과 동상철거 분쟁 또 이에 뒤따르는 이념갈등은 분단상황이 계속되는 한 한국 사회에서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서울에서 미국의 소리 황진영입니다.

 

                                                                    인천상륙작전 기념일에 맥아더 장군 동상 앞에서 열린 헌화행사.

 

노병(老兵)은 결코 죽지 않는다

대통령!  양하원 의장!  고명하신 국회의원(양하원 의원) 여러분!

나는 지금 깊이 겸허하는 마음과 자랑스러운 생각(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이 연단에 섰습니다.

나 보다 먼저 이 자리에 연설을 하던 우리 나라의 위대한 건설자들의 말 없는 압력을 느끼는지라 자연히 겸허한 생각이 나고, 이 입법은 인류가 오늘날까지 창안해 낸 것 가운데 가장 순수한 형식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대표한다는 것을 반성한지라 자연히 자랑스런 생각이 떠 오릅니다.

 

온(全) 인류의 희망, 포부, 신념이 오늘 이 자리에서 집중되어 있습니다. 나는 오늘 어떠한 당파적 목적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 하면 제가 말씀드리려는 이 문제들은 근본적인 것으로서 당파적 이해 영역을 훨씬 초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방법이 건전해지고 우리의 미래가 보호되기 위해서는 이 문제들이 국가 이익이라는 최고수준에서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앞으로 말씀 드리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동포 미국인이 깊이 고려해 온 그 견해를 표명하는 것이라고 여러분께서 공정하게 받아 주실 것을 나는 믿습니다.
나는 지금 저물어가는 인생의 황혼기를 마지하여 아무런 원한도 미움도 없이 오로지 나라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오직 한 가지 의도 밑에서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박수 소리)

 

이 문제들은 범세계적인 것들로,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한 부문의 문제들을 다른 것들과 무관하게 고려한다면 결국 모두에게 재난을 초래하고 말 것 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시아는 유럽의 관문이라 하지만, 유럽이 아시아의 관문이라는 것도 역시 진리입니다

그런지라  한 지역에 나타나는 광범위한 영향이 다른 한지역에 대해서도 큰 영향을 주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군사력은 양쪽 전선을 다 보호하기에는 역부족이며, 우리의 노력을 분산시켜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패배주의적 발언이 어디있겠습니까. (박수 소리)


가령 우리의 가상의 적(敵)이 병력을 두개의 전선(戰線)에 분산시킨다면, 이에 맞서 반격을 가하 는 것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온(全) 세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 한 지역에서 공산주의 진출이 성공하면 다른 지역까지 파괴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유화책을 쓰거나 또는 굴복하고 만다면 그 즉시 공산주의의 유럽 진출을 막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은 필연코 무산되고 말 것입니다. (박수 소리)

 

너무 자명한 이치들을 지적하기보다는 아시아 전반에 걸친 지역으로 국한시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현(現) 아시아 정세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면 그에 앞서 아시아의 과거, 그리고 지금의 아시아가 있기까지 그들이 겪은 혁명적인 변화에 관해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른바 식민지 강국들에게 오랫동안 착취를 당하여 사회의 정의라던가, 개인의 존엄성이라던가, 생활수준의 향상 같은 것을 성취할 기회를 거의 박탈당했던 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은 식민지 잔재라는 질곡을 벗어버릴 기회를 얼마 전 끝난 세계 2차 전쟁(태평양 전쟁)에서 겨우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새로운 기회,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존엄성, 그리고 정치적 자유라는 자존심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 세계 천연자원의 60%를 보유하고 있는 아시아 국가 주민들은 정신적, 물질적 양면에 있어서 새로운(新) 세력을 급속히 결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힘으로써 그들의 생활표준을 향상시키며 현대적 진보의 은신처를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적 환경에다가 적응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식민지화라는 개념에 집착하든 하지 않든 간에, 오늘의 아시아가 걸어가는 이런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고, 이를 멈출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 정세의 중심점이 시발점으로 순환 회귀함에 따라 세계 경제의 최전선이 바뀌면서 생기는 당 연한 결과입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현실을 도외시한 채 한 방향을 쫓기보다는 기본적 인 발전 상황에 맞추어 정책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식민지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고, 아시아의 여러 민족들은 이제 자신의 운 명을 자유롭게 개척해 나갈 권리를 열망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지금의 현실 입니다. 이제 그들이 원하는 것은 명령조의 지시가 아닌 우호적인 안내 역할과 이해, 그리고 지원입니다. 그들은 피정복자로서의 수치감이 아니라 평등이라는 존엄성을 원하고 있습니다(박수 소리)

 

원래 말할 수 없게스리 저열하던 그들의 생활수준은, 戰前(전전)에도 비참할 정도로 낮았지만, 지금은 전쟁 이 할퀴고 간 폐허 속에서 한없이 악화되었습니다. 세계의 이데올로기는 아시아 사람들의 두뇌 속에서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고 제대로 이해되지도 않고 있습니다.
이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배를 조금이라도 더 채워 줄 음식, 좀 더 따뜻하게 해 줄 옷, 머리 위를 가려 줄 좀더 견고한 집, 그리고 정상적인 민족적 염원인 정치적 자유의 실현입니다.
이같은 정치·사회적 상황은 우리 국가 안보에는 단지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뿐이지만 우리의 현재 계획과 관련된 배경을 형성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비현실주의라는 함정을 피하려고 할 때 반드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 입니다.
보다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우리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으로는 戰後(전후) 상황에서 태평양이 갖는 전략적 잠재력으로 인해 야기된 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미국의 서쪽 전략적 전선은 미국 본토의 해안선과 하와이, 미드웨 이 제도, 괌 등의 섬을 잇는 돌출부로 설정되어 공격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이 돌출부는 병력의 거점이 아니라, 적들이 공격해 올 가능성이 있거나, 실제로 공격을 감행해 온 적이 있는 취약한 통로임이 증명되었습니다 . 태평양은 인접한 육지를 노리는 침략군들이 누구나 진격해올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우리가 태평양에서 승리를 거둠에 따라 바뀌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전략적 전선은 태평양 전 지역(全域)을 포함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이곳은 우리가 장악하고 있는 한 우리를 보호해 줄 거대한 垓字(해자)가 된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아메리카 대륙 전체와 태평양 지역의 모든 자유 국가를 지키는 방패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자유 맹방들이 장악하고 있는 알류산 열도에서 마리아나 제도까지 弧(호) 모양으로 펼쳐진 일련의 섬들에 의해 아시아의 해안까지 이르는 태평양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고리처럼 연결된 이들 섬을 통해 우리는 해군력과 공군력을 가지고 블라디 보스토크에서 싱가포르에 이르는 아시아의 모든 항구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 해군력과 공군력으로, 방금 말씀드렸듯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싱가포르 에 이르는 모든 항구를 말입니다 -- 그리고 태평양으로 진입하려는 어떤 적대 행위도 막을 수 있습니다

어떤 약탈적 군대가 아시아에서 침공해 올 때는 반드시 수륙 양면으로 공격해 올 것입니다. 수륙 양면 공격은 진격 코스의 해상 통로와 그 위의 공중 통로를 장악하지 못 하면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制海權(제해권)과 制空權(제공권), 그리고 기지를 방어할 수 있는 적당한 지상군을 갖추고 있으면, 대륙 아시아에서 우리나라나 태평양의 우리 우방으로 몰려오는 어떤 대규모 공격도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같은 상황에서 태평양은 더 이상 가상 침략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위협적인 공격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평화로운 호수와 같은 친근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일본 국민들은 현대사에 기록될 최고의 개혁을 수행해 왔습니다. 대단한 의지와 배우고자 하는 열정, 놀라운 이해력으로 일본인들은 전쟁의 참화가 남긴 잿더미 속에서 개인적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드높일 수 있는 체계를 건설해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과정에서 정치적 도덕성, 경제 활동의 자유, 사회 정의의 高揚(고양)이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진정한 代議(대의)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일본은 지금 지구상의 많은 자유 국 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며, 이제 다시는 세계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 이 없을 것입니다. 일본은 일본이 아시아에서의 정세 변화에 매우 중대하고 유익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해도 좋다는 점을 당당히 증명해냈습니다. 일본 국민들은 외부로부터의 전쟁, 혼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혼동 등 외부로부터의 도전에 훌륭하게 대처해 왔을 뿐만 아니라 발전의 기세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은 채 내부 전선에서 공산주의를 막아냈습니다.


저는 駐日(주일) 미군 4개 사단 모두를 한국 전선에 투입했습니다. 병력 공 백이 일본에 미칠 결과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저의 신 념을 확고하게 정당화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주변 지역에 대한 이같은 통찰을 바탕으로 이제 한국 전쟁에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대통령께서 대한민국 지원 개입 결정에 앞서 제게 자문을 구했던 일은 없었지만, 그 결정은 군사적 견지에서 볼 때 결과적으로 타당한 것이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극히 명료하고 타당한 결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침략자들을 신속히 몰아내고 병력을 무력화시켰으니까요. 우리의 승리는 완벽했고, 우리의 목표는 거의 손 안에 잡힐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중공이 수적으로 우세한 지상군을 이끌고 개입했습니다

 

그로인해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고 전혀 새로운 국면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미군이 북한의 침략자들과 맞설 당시에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상황, 그리고 군사전략을 현실적으로 재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외교적 차원의 새로운 결단이 요구되는 상황이 대두된 것입니다. 그러한 결정은 내려진 바 없 습니다.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우리의 지상군을 중국 대륙에 보내 는 것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작전은 검토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하 지만 새로운 상황의 전개로 군사전략의 과감한 수정이 다급하게 필요했습 니다. 우리가 과거에 적을 물리쳤던 것처럼 이 새로운 적을 물리치는 것이 우리의 정치적인 목표라면 말입니다

 

압록강 이북 지역 적군의 성역(聖域)을 무력화시킨다는 군사적 필요성과는 별개로, 저는 전쟁수행과정에서 다음의 몇가지 군사적 행동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첫째 중국에 대한 경제 봉쇄 강화, 둘째 중국 해안에 해상 봉쇄 강행, 셋째 중국의 해안 지역과 만주에 대한 공중 정찰 제한 철폐, 넷째 대만의 중화민국 자유중국군에게 내려진 제한의 철폐와 중국 본토에 대한 효과적 작전 수행을 위한 병참 지원 등입니다. (박수 소리)

이러한 견해는 사실 모두 한국에 있는 우리 미군을 지원하고 최대한 신속히 적대 행위를 종식시키되 수많은 미군 및 연합군의 목숨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서 전문적으로 연구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를 가졌다는 이유로 저는 비전문가 집단, 특히 외국인들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 제가 알기로는 군사적인 견해에서 보았을 때 앞서 말한 의견들이 우리 합동참모본부를 포함해, 과거 사실상 한국전과 관련이 있는 모든 군사 지도자 들이 이미 의견일치를 보았던 견해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저는 병력 증강을 요구했습니다만 군사력 증강은 불가능하다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저는 분명히 밝혔습니다. 만약, 압록강 이북의 적군 기지 파괴나, 대만에 있는 약 60만의 우방 중국군의 활용을 허락받지 못하거나, 중국의 해안을 봉쇄해 중공군이 외부로부터 지원을 얻지 못하게 막도록 허락을 받지 못한다면, 그리고 병력이 대폭 강화될 것이라는 희망이 전혀 없다면, 군사적인 견지에서 볼 때는 명령권자의 입장이 승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지속적인 작전을 통해 버틸 수 있고, 우리 補給線(보급선 )의 우위와 적군 보급선의 불리함이 비슷하게 균형을 이루는 어떤 지역에서 계속 버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기껏 해야 지지부진한 전투뿐입니다. 게다가 적군이 군사 병력을 전면 동원할 경 우 끊임없이 심각한 병력 소모를 감당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새로운 정치적 결단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습니다. 저의 입장을 왜곡하려는 시도가 계속 있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전쟁광(狂)이라는 말까지 합니다. 진실이 이보다 더 심각하게 왜곡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현존하는 사람들 중에 저만큼 전쟁을 아는 사람도 드뭅니다 -- 그러나 제게 그 어느 것도 -- 그 어느 것도, 전쟁만큼 혐오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저는 전쟁의 완전한 폐지를 오랫동안 주장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우방과 적 모두에게 미치는 무서운 파괴성 때문에 전쟁은 국제 분쟁 따위의 해결 수단으로서는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단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상항이 닥치면, 전쟁을 신속히 종결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는 것 외에 다른 代案(대안)이 없습니다. 전쟁의 목적은 바로 승리이지, 질질 끄는 우유부단함이 아닙니다. 전쟁에서는 승리 이외에 아무 代案(대안)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중공에 대해 유화책을 쓰려는 사람들이 일부 있습니다. 이들은 역사의 명백한 교훈에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유화 정책은 새롭 고 더욱 처참한 전쟁을 초래할 뿐이라는 교훈을 역사는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목적에 의해 수단이 정당화되거나, 유화정책이 거짓 평화보다 더 나은 상황으로 발전한 예는 역사의 어디에도 없습니다. 공갈과 마찬가지 로, 유화정책은 새로이 교묘하게 더 큰 것을 계속 요구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마침내는 폭력만이 유일한 代案이 되는 상황을 초래하고 맙니다. 저 의 병사들이 제게 물었습니다, 왜 전장에서 적에게 군사적 우위를 내주느냐고. 저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과의 전면전으로까지 분쟁이 확대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서라고 말할 것입니다. 또 소련의 개입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설명도 타당성이 없습니다. 중국은 이미 동원 가능한 최대한의 병력으로 교전을 벌이고 있고, 소련은 공연히 우리의 조처와 맞물려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코브라 뱀처럼, 새로운 적들은 누구나 군사적인 면에서건 다른 힘에서건 全세계적으로 자신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하다고 느끼면 언제든지 공격해 올 것입니다. 한국의 비극은 한반도 내에서밖에 군사적 행동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하려고 하는 그 나라가 해군과 공군의 전면적인 폭격으로 인해 초토화되는 참상을 겪도록 형벌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적군의 聖域은 이런 공격과 참화로부터 안전하게 보호 받고 있는데 말입니다.

全(전)세계 국가들 중에서 한국만이 지금까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워 온 유일한 나라입니다. 한국 국민들이 보여준 그 대단한 용기와 불굴의 의지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노예 상태를 택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무릅쓰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내게 한 마지막 말은 『 태평양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전투중인 여러분의 아들들을 한국에 두고 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모든 시련을 견뎌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이 모든 면에서 정말 훌 륭하다고 주저없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보호하고 이 야만적인 분쟁을 명예롭게, 그리고 시간 손실과 인명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끝내고자 끝없이 노력했습니다. 점차 심각해지는 유혈참사는 저를 깊은 고뇌와 근심 속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이 용감한 젊은이들은 저의 마음속 에 그리고 항상 저의 기도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시절의 모든 희망 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제가 웨스트 포인트 연병장에서 임관하던 그 날 이후로 세상은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희망과 꿈도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저는 그 시절 가장 즐겨 부르던 어느 軍歌(군가)의 후렴 한 구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노래는 『老兵(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 속의 老兵처럼 이제 저는 제 軍생활을 마감하고 사라지려 합니다. 神(신)께서 의무에 대한 깨 달음을 주신 바에 따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애쓴 한 노병으로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1880. 1. 26 미국 아칸소 리틀록~ 1964. 4. 5 워싱턴 D. C..

미국의 장군.

제2차 세계대전중에 남서태평양 전역(戰域) 사령관이었고, 연합군 점령기에 전후의 일본을 통치했으며, 6·25전쟁 초기의 9개월 동안 유엔군 총사령관직을 맡았다

1.초기 생애

맥아더는 후에 육군 고위장교가 된 아버지 아서 맥아더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야심적인 어머니 메리 하디 맥아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3년 웨스트포인트의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0년 동안 부관과 하급부대 장교를 지내고 이어 4년을 일반참모로 복무했다. 1914년에는 멕시코의 베라크루스를 점령한 미군 부대에서 몇 달을 지냈다. 1917~19년에 제42사단의 참모진에 배속된 맥아더는 제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전투작전과 뒤이은 라인 지구 점령군의 전투에 참여하면서 참모장·여단장·사단장 등으로 직책을 바꾸어가며 활약했다. 1920년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했고, 윌리엄(빌리) 미첼의 군법회의에 참석했다. 필리핀에서 2차례 사령관직을 맡았으며, 미국의 2개 군단을 통솔했고, 1928년에는 미국 올림픽 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았다.

1918년 준장으로 진급하고 7년 후에 소장이 된 맥아더는 1930년 육군 참모총장으로 발탁되면서 대장으로 승진되었다. 군의 최고수뇌로서 그후 5년 동안 그가 주력한 사업은 대공황의 타격으로 약해져가는 미육군의 군사력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그가 1932년 중엽 정규군 부대를 워싱턴으로 보내 '노병 보너스 군대'(Bonus Army of veterans)를 축출하자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1935~41년에 필리핀의 군사고문과 육군 원수로서 자금의 부족을 무릅쓰고 필리핀 방위군을 조직하는 데 전력했다. 1937년 12월 미육군 현역에서 은퇴했다. 맥아더는 1922년 루이스 크롬웰 브룩스와 결혼했지만, 아이를 갖지 못한 이 결합은 7년 후 이혼으로 끝났다. 1937년 잔 페어클로스와 재혼했고, 이듬해 마닐라에서 외아들 아서를 얻었다

2.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임무

1941년 7월 현역으로 소환된 맥아더는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필리핀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영웅적인 전투를 수행했다. 1942년 3월 남서태평양 전역 연합군 사령관직을 맡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로 소환되었다. 그는 곧 뉴기니에서 공격을 개시해 1943년 1월 파푸아로부터 일본군을 몰아냈다. 1943~44년의 일련의 작전으로 맥아더군은 라에에서 샌사포어까지 뉴기니의 전략지점들을 장악하고, 애드미럴티 제도와 뉴브리튼 서부를 점령했다. 맥아더가 지휘하는 솔로몬 제도의 남태평양군은 일제히 북진해 라바울 시를 제압하고 많은 일본군 부대를 우회했다. 다음으로 타이완보다는 필리핀으로 진공해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시킨 맥아더는 1944년 가을에 모로타이·레이테·민도로를 공격했다. 레이테 작전이 시작되고서야 전폭적인 병참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이전의 계획들은 태평양함대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인원과 장비의 빈곤을 무릅쓰고 수행되었다. 맥아더는 태평양전쟁보다 유럽 전쟁을 우선시하고 자기가 담당한 남서태평양지역보다 중부태평양 전역을 우선시하는 상부의 결정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가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최대의 작전들은 1945년의 7개월간에 걸친 루손 전투에서 벌어졌다. 그해 봄에 그는 남부 필리핀과 보르네오의 재정복에 나서기도 했다. 그동안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의 어려운 소탕작전은 오스트레일리아군에 일임했다. 그는 1944년 12월 육군 원수로 승진되고, 4개월 후 태평양지역의 미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9월 2일 그는 도쿄 만[東京灣]에서 항복 조인식에 승전국의 대표로 참석했다. 1945~51년에 일본 점령 연합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일본군의 해산, 군국주의자들의 제거, 경제복구, 자유주의 헌법의 기초(起草) 등을 독재적인 면은 있었으나 효과적으로 지휘했다. 또한 토지 재분배, 교육, 노동, 공중위생, 여성의 권리 등에서 상당한 개혁을 이루었다. 일본에 있는 동안 맥아더는 극동군 총사령관직도 맡았다

3.6·25전쟁의 유엔군 사령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맥아더는 즉시 주한 유엔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부산 근방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한 후 9월에 대담한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고 10월에 북한으로 진격했다. 북한군은 급속히 붕괴되어갔다. 하지만 11월 대규모의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38선 이북에서 양단된 맥아더군은 서울 이남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2개월 후 맥아더가 지휘하는 부대들은 공세를 전환하여 북쪽으로 재진격했다. 1951년 4월 11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이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제한전을 수행하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미국을 떠난 이래 처음으로 귀국한 맥아더는 처음에는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해임에 관한 상원의 공개청문회가 있은 후 그 열광은 가라앉았다. 1944, 1948, 1952년에 공화당의 보수세력은 연이어 맥아더의 대통령후보 지명을 따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맥아더는 1952년 레밍턴랜드사(社)의 이사회 회장직 제의를 수락했으며, 그후 회장의 직무를 보는 일 외에는 어쩌다 한번씩 공개석상에 나타날 뿐 뉴욕 시에서 은거생활을 보냈다. 그는 1964년 워싱턴 D. C.에서 타계하여 버지니아 주 노퍽에 묻혔다.

인격적인 면에서 맥아더는 불가사의했고 모순적이었다. 많은 사람에게 고압적이고 도도하며, 이기적이고 잘난체하는 사람으로 비추어졌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 특히 그의 사령부 직원들이 보기에는 다정하며 용기있고 가식이 없으며 겸손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가 우수한 지능과 보기 드문 통솔력을 갖추었고 의무·명예·조국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에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D. C. James 글

 

*동북아와 동아시아 평화와 반영: 나토모델 아시아 태평양 단일군사기구 창설

미국, 중국, 일본, 한국, 인도등 주도

*한반도(남북한), 만주, 극동지역에 관한 논의는 중국정부 입장을 존중하면서 남북통일(단일국가)과 만주지역은 중국 땅으로 인정 그리고 극동지역은 러시아 정부 입장과 유엔 전후처리에 의사결정

*미국과 영국, 러시아정부의 동아시아지역 평화와 번영에 공헌 인정하면서 단일군사안보기구 창설에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