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 62주년을 맞은 지난 6월 25일, 인천광역시 연수구에 자리잡은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은 한국전쟁을 기억하기 위해 찾아온 많은 시민들로 붐볐습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체험한 참전용사에서부터 지나온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알고 있는 젊은이들까지 다양한 세대의 감회가 교차했습니다.
[녹취: 기념관 방문객] “오늘 6.25날이니까 우리가 군대 나가서 여기서 와서 기념관을 관람하고 있는 거야. 옛날을 모르는 사람들도 얘기도 해주고. 여기 여섯 차가 왔어. 여섯 대가.”
[녹취: 기념관 방문객] “저는 인천에 살고 있는데요, 뜻 깊은 날이라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 있다고 해서 방문해봤습니다.”
현장학습을 나온 어린이들은 기념관 측에서 준비한 편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녹취: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어린이프로그램 현장] “싸워주신 분들 감사하다고…” “감사하다고 편지 썼죠. 우리. 자, 다 쓴 사람”
이 기념관은 지난 1983년 인천시의 지원과 더불어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건립돼 지금까지 1년 365일 무료로 개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마련된 여러 전시물들은 시민들의 안보의식을 고취시키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동맹국과의 유대를 돌아보게 합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 김인숙 관리소장입니다.
[녹취: 김인숙 인천상륙작전기념관 관리소장]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은 통일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된 기념관입니다. 또 우리나라를 도와준 참전국가와의 유대를 강화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사실을 문화적 차원에서 기념하기 위해서 1983년 5월 1일에 착공해서 84년 9월 15일에 준공과 동시에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참전용사들은 매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6월 25일과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됐던 9월 15일, 기념관에 모여 전우의 넋을 기립니다. 또 이곳을 찾은 시민들에게 안보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80대 중반을 넘어 거동마저 불편해진 노병들. 하지만 나라를 지켜냈다는 자긍심은 62년 전 그 때와 다를 바 없습니다.
[녹취: 6.25 참전용사] “인천상륙작전에서 처음 팔미도 등대에 불을 붙인 것이 우리 부대원들, 불빛이었기 때문에 맥아더 장군이 신호를 받고 인천상륙작전을 한 거에요. 맥아더 장군이 아니었으면 지금 여기 공산화가 됐죠.”
참전용사들에게 있어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입니다.
[녹취: 6.25 참전용사] “맥아더 장군은 정말 우리 대한민국에는 존경 받을만한 큰 인물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인천상륙을 진두지휘 해서 압록강까지 진격을 할 수 있었다고 하는 그 굳은 의지가 우리 대한민국을 지금 이렇게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하는 기반을 조성해주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분을 존경하는 겁니다.”
기념관 방문객들은 대체로 맥아더 장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녹취: 시민] “인천상륙작전은 제가 정말 좋게 보고 있어요. 인천상륙작전 때문에 중공군을 무찌르고 조금 위로 올라갈 수 있었는데 안타깝게 사실 내려왔잖아요. 맥아더 장군 되게 존경스럽죠.”
[녹취: 시민] “참 고마운 분이라고 그 맥아더 장군, 월미도 작전 없고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을 못했다고. 근데 요즘 젊은이들은 모르겠어.”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있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습니다.
[녹취: 시민인터뷰] “맥아더장군이 한국전쟁 업적에 대해서는 인정할만하지만 그렇게까지 우상화하고 신격화할 필요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녹취: 시민인터뷰] “글쎄 뭐, 그렇게 호평만 하는 건 아닌 걸로 그런 얘기를 조금 하시더라고요.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죠. 젊은 세대들은 그런 생각이 많은 것 같은데…”
인천광역시 중구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은 1957년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 7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2002년 7월 경기도 양주에서 여중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지는 사건이 일어난 이후 반미감정이 고조되면서 이 동상에 대한 철거논란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각기 철거와 보존을 주장하는 단체 간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논란이 점차 격화되며 맥아더 동상은 진보 대 보수라는 이념갈등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녹취: 시민인터뷰] “동상철거, 해야죠. 미국 쪽에서 그렇게 영웅시 되는 사람도 아니고 굳이 이렇게 몇 십 년이 지난 후까지도 동상 만들고 기념관 만들고 할 필요 있나요?”
[녹취: 시민인터뷰] “외국인이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워줬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요. 그 업적을 기리면서 동상까지 세운 것만 봐도 큰 업적을 남겼다고 봐요.”
[녹취: 시민인터뷰] “철거하기에는 우리나라가 한미수교 관계도 있고 해서 그것보다는 보존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 학계와 재야에서는 6.25 한국 전쟁과 맥아더의 역할에 대해 비판적 관점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일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미래 지향적이고 건전한 역사관 확립을 위해서 한국사회가 맥아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보다 객관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합니다. 한국현대사 전문가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입니다.
[녹취 :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 당시의 상황 속에서 ‘맥아더 장군의 역할을 어떻게 봐야 되는가’라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리고 또 체계적으로 조명한 연구는 많지 않은 것 같고요. 그런 부분들이 사실 어떤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시각을 제공하지 못하는 요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분단과정에서 냉전적인 상황들이 계속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맥아더 장군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제기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던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좀 더 자료에 근거한 핵심적이고 객관적인 연구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의 상징적 인물로 한국인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마다 불거지는 맥아더 장군의 전시업적에 관한 평가 논란과 동상철거 분쟁 또 이에 뒤따르는 이념갈등은 분단상황이 계속되는 한 한국 사회에서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서울에서 미국의 소리 황진영입니다.
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특집기획: 6.25전쟁 62주년] 인천상륙작전 본문
[특집기획: 6.25전쟁 62주년] 인천상륙작전
CIA bear 허관(許灌) 2012. 6. 27. 10:176.25 전쟁 중 ‘크로마이트작전 (Chromite)’이란 이름으로 단행된 인천상륙작전은 미군이 불리한 전세를 극적으로 역전시킨 탁월한 군사작전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당시 유엔군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전략적 직관과 신념이 절대 무모한 일이란 비판을 샀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지적합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6.25 전쟁 62주년을 맞아 한국전쟁의 영웅 맥아더 장군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관한 특집방송을 오늘부터 3차례에 걸쳐 보내 드립니다
보도에 유미정 기자입니다
1.맥아더의 신념이 이뤄낸 성공
인천 바다.
62년 전인 1950년 6월, 한국의 서해 바다. 수도 서울에서 서쪽으로 20마일 떨어진 인천 쪽을 향해 한 노련한 미군 지휘관의 눈길이 고정됩니다.
인천의 찬물 때와 간물 때의 차이는 무려 10 미터. 전세계에서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큰 지역의 하나인 이 곳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물이 빠지면 소라와 고동이 지천으로 널린 광활한 갯벌이 해안에 끝도 없이 펼쳐집니다.해안에 배가 닿을 수 있으려면 수심이 깊은 만조 때여야만 한다는 것을 노련한 노장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침묵 속에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가늠하는 맥아더 장군의 마음은 분주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소련제 탱크 등 압도적인 화력으로 무장한 북한 군은 기습적인 남침을 통해 파죽지세로 진격을 이어갔습니다.
사흘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됐고, 개전 41일만에 부산과 진해 등 낙동강 이남을 빼놓은 남한 전역이 북한 군에 함락됐습니다. 마지막 남은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지 못한다면 신생 대한민국은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질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맥아더 장군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곧바로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고 말합니다. 미 해군전쟁대학 도널드 치섬 박사의 말입니다.
[녹취: 도널드 치섬 박사] A couple of days after the war began…
전쟁이 시작되고 며칠 뒤 맥아더 장군은 서울 남쪽의 한 작은 공항으로 날아가 직접 전황을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이 자리에서 한국 군이 북한 군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남쪽으로의 전면방어 (Perimeter Defense)를 준비하면서 병력을 결집해 인천을 통한 총 반격을 구상했다고 치섬 박사는 말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 주 노폭에 위치한 맥아더 장군 기념관의 제임스 조벨 씨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2차 세계대전의 전략을 따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제임스 조벨] All of his operations by amphibious maneuver to bypass…
모든 상륙작전 병력을 적이 몰려있는 최전방을 피해 후방공격에 참가시키고 적의 병참선을 차단한다는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방어가 강화된 섬이나 진지는 우회하고, 일본군이 예상치 못한 곳을 공격해 적을 고립, 압박하는 이른바 ‘와도 전략 (Island Hopping)’을 성공적으로 전개했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해병연대 전투단과 육군부대가 돌격부대로 인천에 상륙해 내륙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하고 동시에 미 제 24, 제25 사단이 남부전선에서 정면 반격을 가해 적을 38도선 이북으로 구축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합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미 합동참모본부의 강한 의구심과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1950년 8월 일본 도쿄의 극동군사령부에서 열린 고위급 회의에서는 군 수뇌부 뿐아니라 맥아더 휘하의 일부 장군들까지 상륙작전을 극구 반대했습니다.
특히 매튜 리지웨이 육군 참모차장은 작전의 성공률은 5천 대1이라며 상륙이 용이한 군산 등 남쪽 지역을 제안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인천이 상륙작전에 최악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다시 미 해군전쟁대학 도널드 치섬 박사의 말입니다.
[녹취: 도널드 치섬 박사] What you need at that time in 1950….
병력과 탱크, 트럭 등을 실은 상륙용주정 (LST)이 해안에 닿으려면 수심이 8 미터는 넘어야 하는데 인천의 경우 수심이 8 미터 이상 되는 날이 한달에 단 며칠 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천은 또 상륙부대가 한꺼번에 상륙할 수도 없었습니다. 밀물이 들어와서 썰물이 되기까지의 가용시간은 겨우 3시간 뿐인데 먼저 상륙한 부대는 상륙 중 썰물이 되어 빠지면 12시간 동안 후방부대의 증원 없이 완전히 고립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비판가들은 또 인천이 높은 방파제로 보호되어 있는 점, 그리고 부산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상륙부대와 미 8군이 제대로 연계되기 어려운 점 등 수많은 문제점을 들어 반대했습니다.
<6.25 Special 06/ 21 MJH (Act 10) BGM(Background Music)>
하지만 맥아더 장군의 결심은 단호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의 지형적 악조건이 미군과 연합군에게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재단의 사무총장 윌리엄 데이비스 예비역 해병 대령의 말입니다.
[녹취: 윌리엄 데이비스 사무총장] “The greatest advantage it had was the least likely…
인천의 가장 큰 장점은 그 곳이 상륙작전이 이뤄지리라고는 예상하기 어려운 지역이란 것이었다는 설명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은 적의 허를 찌르는 예상치 못한 기습의 효과 (element of surprise)를 얻을 수 있었다고 데이비스 씨는 말했습니다.
후일 맥아더 장군은 회고록에서 인천상륙작전 결정 배경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더빙:맥아더 장군] “나는 적들이 인천 방어를 준비하지 못했다고 확신한다. 인천상륙의 모든 악조건은 놀라움의 요소가 되며, 적이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야 말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주도권을 빼앗아야 한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맥아더 장군의 신념과 성공에 대한 확신은 워싱턴을 설득시켰고, 마침내 현대 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작전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는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됐습니다.
‘크로마이트작전’으로 명명된 인천상륙작전의 공격 개시일은 9월 15일.
기함 마운트 맥킨리호에 몸을 실은 맥아더 장군은 검은 밤바다를 헤치며 2백 61척의 대전단을 이끌고 인천으로 진격했습니다
6.25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공적에 대해 설명하는 윌리엄 데이비스 맥아더 재단 사무총장(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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