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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태평양전쟁과 미국, 일본군 피해상황 모습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태평양전쟁과 미국, 일본군 피해상황 모습

CIA Bear 허관(許灌) 2011. 12. 4. 16:00

 

                                                   1942년 8월 솔로몬 군도에서 일본군과 미국군 전투에서 사망한 일본군 전사자들의 시체 모습

1937년 7월 7일 일본 제국중화민국을 침략한 이후 1941년미국은 일본 제국에 경제 제재와 석유 금수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반발한 일본 제국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이 참전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까지 태평양아시아의 영역에서 벌어진 전쟁을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영어: Pacific War, 일본어: 太平洋戦争 (たいへいようせんそう))이라 한다.

 

1.일본과 중국의 충돌

19세기 말 중국의 혼란과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화로 일본 제국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1910년) 만주를 제국의 영향권에 넣는 동안 중국은 군벌의 난립으로 그 영향력이 약해져 있었다.

이 상황은 1920년대에 들어와 조금씩 바뀌게 된다. 1927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북벌에 나섰고, 장제스는 군벌들에게 충성을 요구하게 된다. 위협을 느낀 장쉐량이 장제스 쪽으로 기울자, 일본은 만주 사변을 통해 푸이를 황제로 하여 만주국을 세우게 된다. 일본은 국제 연맹을 탈퇴한다.

 

2.중일전쟁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중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중일 전쟁부터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처음에는 일본군이 순식간에 베이징을 점령하고 더 나아가 중화민국 수도였던 남경을 점령한다. 거기서 일본군은 남경 대학살을 저질러 지금까지도 이슈가 되고있다.

하지만 중화민국도 수도를 내륙도시인 충칭(중경)으로 이전하고 영국령 버마와 연결되는 루트로 미국과 영국에 무기지원을 받았으며 곳곳에서 중국 게릴라들이 나타나 일본군을 괴롭혔다. 결국 중일전쟁은 장기적으로 봉착하게 된다.

 

 3.전쟁의 확전

일본중일 전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면서 전쟁을 위한 지하자원 및 원료의 부족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게다가 미국중일 전쟁을 치르던 일본 정부에게 중국 등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군대의 완전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온갖 노력을 기울여 일으킨 전쟁이기에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1939년 미일 통상 조약은 파기되어 양국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으며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철광 등 지하자원 수출을 완전히 중단한다.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철·석유·고무 등 전쟁 공업품이 부족해졌기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조선이나 만주 등에서 나오는 지하자원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한다. 그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프랑스 식민지 인도차이나 침공이었다.

석유·고무·철광 등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이 선택한 방법이다. 그 당시에 유럽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독일군이 네덜란드, 벨기에, 폴란드 등을 모두 무너뜨리고 파죽지세로 서진, 프랑스를 정복하여 페탱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 괴뢰 정부를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이때 영국에서 망명 정부를 세우고 독일에 항전 중이던 드골로서는 인도차이나를 도저히 사수할 수 없었다. 결국 인도차이나에 있던 프랑스 세력은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철수하게 된다

인도차이나 점령이 성공한 후에도 일본은 더욱 많은 곳을 침공하길 원했다. 그리고 1941년 군인 출신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수상으로 한 군부 내각이 들어섰다. 이들은 군부의 여러 인사 중에서도 매우 강경파로서 미국과 전쟁도 불사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진주만 공격(1941년 12월)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사건으로 만 4년 8개월 동안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일본군 사령관들은 애초부터 운으로 승전을 희망한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4.미국 참전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말미암아 국내 여론이 비등하자,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일본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참전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세계 1차대전 이후로 기술의 발달, 군부대의 양적 발전에 비해 전선의 전술적으로 발전이 없던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에서 연이은 전투에서 후퇴를 반복해면서 전세는 미국에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는 듯하였으나, 전쟁을 거듭할수록 전술적 교리가 급속도로 발전한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1942년 6월 5일), 과달카날 전역(1942년 8월~1943년 2월) 등의 국지적 승리를 기반으로 미국은 역습을 계속하여 전황은 이후 일본에 결코 유리하지만은 않게 전개되었다.

이후 1944년의 사이판 상륙, 이오지마 점령(1945년 2월~3월) 등으로 태평양에 항공 기지를 확보한 미국은 B-29 등의 고고도 폭격기를 동원한 일본 내 대도시에 대한 전략 폭격을 개시하게 되고 급기야 1945년 8월 6일 및 8월 9일에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기에 이른다.

일본 천황은 더 이상의 전쟁 지속은 전 국토의 황폐화는 물론이며,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울수 있다고 판단, 전쟁을 종결하기로 마음먹는다. 1945년 8월 14일에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 의사를 전달한 뒤, 이튿날인 8월 15일에 항복을 선언하여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5.ABCD포위망

ABCD 포위망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을 포위했던 나라들을 일컫는 말로써 미국(American), 영국(British), 중국(Chinese), 네덜란드(Dutch)의 앞글자를 따서 ABCD 포위망이라고 부른다

 

                                                    1944년 3월 미국 육군이 전차부대 보호 아래 일본군 공격 모습

                                                           1942년 6월 25일 미국 공군 어뢰(魚雷)공격 명중으로 일본군 함대 침몰

 

 

                                                                   1942년 10월 31일 호주 배치한 일본군 저격수 모습

 

 

                                                     1942년 9월 25일 태평양 상공 저공으로 미국해군 함대 정찰 공격하는 일본 공군 폭격기 모습 

 

 

 

 태평양 전쟁 때 미국군 모습

 

미군 전사자들의 시체 모습

 

중국에서 아무 소득도 없이 오랫동안 계속된 전쟁에 싫증난 일본은 유럽의 상황을 이용하여 동아시아에 있는 유럽 식민지를 강탈하기로 결심했다. 네덜란드령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및 영국이 차지하고 있는 말레이 반도에는 일본의 산업 경제에 필요한 원료(주석·고무·석유)가 있었다. 일본이 이 지역을 빼앗아 일본 제국에 병합할 수 있다면 사실상 경제 자립을 이룩할 수 있고, 그리하여 태평양의 지배세력이 될 수 있었다. 1940년말까지 일본 전략가들은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도 일본이 상대할 적은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41년이 되자, 영국·네덜란드·미국도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의 침략 행위를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연합 함대 사령장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를 주축으로 한 일본 전략가들은 대담한 전쟁 계획을 새로 세웠다. 일본은 태평양 확전(擴戰)의 주된 상대국으로 예측한 미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1941년 12월 7~8일에 하와이 진주만과 필리핀에 있는 미국의 군사시설을 공격했다.

야마모토의 계획에 따라 일본의 항공모함 기동 타격대는 미국 정찰대에 포착되지 않은 채 하와이 북쪽 440km 지점에 이르렀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이 항공모함에서 급강하 폭격기와 뇌격기(雷擊機) 및 약간의 전투기로 이루어진 360여 대의 항공기가 새벽 공기를 뚫고 2패로 나뉘어 날아올랐다. 이 항공기들은 진주만에 있는 거대한 미국 해군 기지로 기수를 돌렸다. 당시 이 기지에는 미국 전투함 70척과 보조함정 24척 및 300여 대의 항공기가 있었다. 미국인들은 완전히 기습당했고, 정박중이던 전함 8척이 모두 공격받았다(그러나 이 가운데 6척은 수리되어 다시 해군에서 활약했음). 순양함 3척과 구축함 3척, 기뢰 부설함 1척을 비롯한 수많은 함정이 파손되었고, 180대가 넘는 항공기가 파괴되었으며 나머지도 손상되었다. 2,000명이 넘는 장병이 죽었고, 부상자도 1,000명이 넘었다. 그러나 일본의 공격은 1가지 중요한 점에서 실패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당시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은 바다에 나가 있어서 피해를 면했고, 이 항공모함들은 그후 미국 해군의 초기 태평양 방위체제에서 핵심이 되었다. 진주만 해안에 있는 군사시설과 유류 저장 설비도 피해를 면했다. 일본이 예고 없이 감행한 진주만 기습공격은 미국국민을 단결시켰고, 미국이 전쟁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말끔히 없앴다. 12월 8일 미국의회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반대한 의원은 단 1명뿐이었다.

진주만을 공격한 바로 그날, 타이완[臺灣]에 기지를 둔 일본 폭격기들은 필리핀에 있는 클라크 군용비행장과 이바 군용 비행장을 공격했다(현지 시각으로는 12월 8일). 미국 극동군이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의 50% 이상이 파괴되었다. 2일 뒤, 일본은 다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미국 전투기를 더 많이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역시 필리핀에 있는 카비테 해군기지도 파괴했다. 그러나 미국 아시아 함대의 일부는 11월에 이미 남쪽으로 내려갔고, 살아남은 주요함정과 폭격기는 보호해 줄 전투기가 없어서 공격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후 2주간 더 남쪽에 있는 안전한 기지로 철수했다. 필리핀에는 지상군 이외에 전투기 몇 대와 잠수함 30여 척, 그리고 몇 척의 소형 선박이 필리핀을 방어하기 위해 남았다.

마닐라는 1942년 1월 2일 일본군에 함락되었지만, 그때 이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휘하의 미군과 필리핀군은 바타안 반도(작은 만을 사이에 두고 마닐라와 마주보고 있는 반도)와 코레히도르 섬(마닐라 만에 있는 섬)을 지킬 태세를 갖추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바타안 반도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했지만, 일본은 그후 8주간 계속 병력을 증강했다. 맥아더는 3월 11일 오스트레일리아로 전속 명령을 받고 떠나면서, 바타안 방어를 조너선 M. 웨인라이트 중장에게 맡겼다. 웨인라이트 중장과 그의 부하들은 4월 9일에 항복했다. 코레히도르 섬은 5월 5~6일 밤에 함락되었다. 그리고 필리핀 남부는 3일 뒤에 항복했다. 정확한 사상자 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양쪽의 전사자는 각각 5,000명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일본 폭격기들은 1941년 12월 8일에 이미 홍콩에 있는 영국 공군력을 파괴했고, 영국과 캐나다 수비대는 크리스마스에 광둥 반도[廣東半島]에서 건너온 일본 지상군의 공격을 받고 항복했다. 일본군은 남쪽의 말레이 반도로 진격하는 동안 측면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12월 9일에 방콕을 점령했고 12월 16일에는 미얀마(버마) 남쪽 끝에 있는 빅토리아 곶을 점령했다. 12월 8일부터 일본군은 여느 때처럼 공습과 함께 말레이 반도에 상륙하여, 소규모의 오스트레일리아군과 인도군을 압도했다.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호와 순양함 리펄스호는 일본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싱가포르를 떠났지만, 12월 10일 일본군 항공기의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1942년 1월말 일본군 2개 사단은 공군과 기갑부대의 지원을 얻어 싱가포르 섬을 제외한 말레이 반도 전체를 점령했다.

일본은 순식간에 필리핀을 점령했고, 동남아시아와 미얀마의 대부분 지역,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태평양의 많은 섬들을 점령했다. 1942년 2월 25일 일본군에 점령되지 않은 곳은 자바 섬뿐이었다. 연합군은 자바 섬을 침략하는 일본 함대를 차단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썼지만, 2월 27일 자바 해에서 벌어진 7시간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연합군은 전함 5척을 잃었고, 일본군은 구축함 1척만 약간의 손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3월 9일 자바 섬에 주둔해 있던 연합군 2만 명이 항복했다. 그 직후 태평양 지역에는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전략 지시를 받는 미국·영국 통합 참모부가 설치되었다. 맥아더는 남서태평양 지역의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주요임무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을 잇는 병참선을 지키고, 일본군을 태평양 안에 가두어놓고, 북아메리카 방위를 지원하고, 육해공군 합동 작전에 따른 대규모 반격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당초 계획은 자바 섬 점령으로 실현되었지만, 미국 태평양 함대는 1942년 2월 1일에 마셜 제도를 공격했고 2월 23일에는 웨이크 제도를 공격했으며, 3월 1일에는 마커스 섬을 공격했다. 이와 함께 2월 23일에는 라바울을 폭격했고, 오스트레일리아에 기지를 세워 남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병참선을 확립했다. 그러자 일본은 계획을 확대하여,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이어진 연합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인들은 누벨칼레도니, 피지 제도 및 사모아 섬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고, 뉴기니 동부도 차지하여 포트모르즈비에 비행기지를 만들면 오스트레일리아를 위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또한 일본은 북태평양의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고 알류샨 열도에 비행기지를 만들 계획도 세웠다.

1942년 4월 18일에 미군 폭격기 16대가 도쿄[東京]를 공격했다. 이 공습은 일본정부의 위신을 떨어뜨렸을 뿐 진정한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연합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5월 7일 일본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전투기들이 미군 구축함 1척과 유조선 1척을 격침했다. 그러나 미군 전투기들도 일본군의 소형 항공모함 쇼호호와 순양함 1척을 침몰시켰다. 이튿날 일본 전투기들은 미국 항공모함 렉싱턴호를 격침하고 항공모함 요크타운호에 손상을 주었지만, 일본군의 대형 항공모함 쇼카쿠호는 심한 손상을 입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군은 전투에서 너무 많은 항공기를 잃었기 때문에 포트모르즈비 점령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미드웨이 해전은 아마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이었을 것이다. 일본군은 싸움에 결말을 내기 위해 대형 항공모함 4척과 소형 항공모함 3척, 수상비행기를 탑재한 항공모함 2척, 전함 11척, 순양함 15척, 구축함 44척, 잠수함 15척, 그리고 잡다한 소형 함정들을 집결시켰다. 미국 태평양함대는 대형 항공모함 3척과 순양함 8척, 구축함 18척, 잠수함 19척만 갖고 있었지만, 함대를 지원해줄 항공기를 115대가량 보유하고 있었다. 6월 3일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기 위해 출발한 일본 전함들이 목표 지점에서 800km 떨어진 곳에 이르자, 미국 폭격기들이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일본군은 6월 4일 새벽에 항공기를 보내어 미드웨이 섬을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미군은 일본의 대형 항공모함 4척을 모두 격침하고, 대형 순양함도 1척 침몰시켰다. 6월 4~5일 밤에 일본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 이미 손상을 입었던 미국 항공모함 요크타운호는 6월 6일에 어뢰를 맞고 침몰했지만, 미드웨이 섬은 안전했다. 일본은 미드웨이에서 가장 중요한 항공모함과 가장 우수한 해군 조종사를 거의 다 잃어버렸다. 이것이야말로 연합국이 미드웨이에서 거둔 승리의 중요한 측면이었다. 그후 일본과 연합국의 해군력은 사실상 대등해졌다. 일본은 전략의 주도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누벨칼레도니와 피지 제도 및 사모아 섬의 침략 계획을 취소했다.

일본이 서방 연합국에 대항하여 전쟁에 참여한 것은 중국에 영향을 주었다. 1941년 12월 9일 장제스[蔣介石] 정부는 정식으로 일본에 선전포고했을 뿐만 아니라(이는 오래 지체시킨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음), 독일과 이탈리아에게도 했다. 이것은 군사적 의도보다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선전포고였다. 이어서 중국의 3개 야전군은 미얀마 국경으로 몰려갔다. 미얀마 공로(公路)는 서방 연합국이 중국에 보급품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육로였기 때문이다. 1942년 1월 3일 장제스는 중국 전투 지역의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인정되었다. 미국의 조지프 W. 스틸웰 장군이 장제스의 참모장으로 파견되었다. 장제스와 스틸웰은 일본군의 미얀마 진격을 저지하는 일에 몰두했다.

 

1942년 7월 2일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뉴브리튼 섬과 뉴아일랜드 섬, 솔로몬 제도뉴기니 섬 동부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3단계의 제한공격을 명령했다(→ 색인:태평양전쟁). 첫번째 단계에서는 툴라기 섬과 산타크루즈 제도를 인접 지역과 함께 점령하고, 2번째 단계에서는 솔로몬 제도 중부와 북부 및 뉴기니 섬의 북동해안을 점령하고, 3번째 단계에서는 비스마르크 제도의 라바울과 그밖의 지점들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미국의 태평양 방면 전략은 해군과 해병대를 이용하여 고리처럼 늘어서 있는 섬들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일본을 향해 진격하는 한편, 그보다 적은 규모의 지상군은 아시아 본토에서 중국군 및 영국군과 합동작전을 편다는 것이었다(→ 색인:동부솔로몬제도 전투). 1943년 1월 5일 과달카날 섬(솔로몬 제도 남부의 섬)에서는 4만 4,000명에 이르는 연합군 수비대가 일본군 2만 2,500명과 대치해 있었다. 진지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한 일본군은 2월초에 대담한 구축함 돌파 작전으로 1만 2,000명의 병력을 넘는 사상자를 냈다. 과달카날 전투의 지상 전투에서 일본군은 2만 4,000명 이상의 인명손실을 냈다. 연합군은 약 1,600명의 사망자와 4,250명의 부상자를 냈다(이 숫자에는 질병에 희생된 더 많은 수의 사상자는 포함되지 않았음). 연합군이 과달카날 섬과 파푸아 섬을 탈환함으로써 일본군의 남진은 끝났고,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까지 이어진 병참선은 이제 안전해졌다. 파푸아 섬에서 일본군은 1만 2,000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냈고, 350명이 포로로 잡혔다. 연합군 쪽에서는 3,500명이 전사하고 5,500명이 부상했다. 연합군 공군은 일본군 보급로를 차단하고 연합군의 보급품과 증원군을 수송함으로써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달카날 섬을 잃은 일본은 그때부터 수세에 몰리게 되고, 전망은 점점 어두워졌다. 라바울의 거점에서 뉴기니에 있는 라에살라마우아 진지로 증원군을 파견하려는 일본군의 마지막 노력은 바로 하나의 재앙이었다. 1943년 3월 2~4일에 벌어진 비스마르크 해전에서 일본군은 구축함 4척과 수송선 8척을 잃었으며, 7,000명의 병력 가운데 목적지에 도달한 것은 1,000명뿐이었다. 몇 주일 뒤 연합군은 뉴기니에 있는 진지를 보수했고, 일본군은 공중에서 공격하는 것 말고는 연합군의 활동을 방해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4월말이 되기 전에 일본 해군은 또다시 재난을 당했다. 3월말에 라바울에 기지를 둔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파견된 야마모토가 부건빌 섬으로 날아가다가 연합군 전투기의 습격을 받고 전사했던 것이다.

한편 북태평양에서 미국은 알류샨 열도의 일본군을 쫓아내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일본이 알래스카에 있는 미국군 기지를 넘보지 못하게 하고, 일본인들로 하여금 미국이 알류샨 열도를 통해 일본 본토를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오판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1942년 8월에 미국은 알류샨 열도의 에이댁 섬에 병력을 상륙시킨 뒤, 다음달에는 에이댁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이 키스카 섬과 애투 섬에 대한 공습을 개시하는 한편, 해군은 일본군이 수비대를 증원하지 못하도록 섬을 봉쇄했다. 마지막으로 미국군은 키스카 섬을 우회하여 1943년 5월 11일에 애투 섬을 침공했다. 3주일 동안 계속된 전투에서 애투 섬을 지키고 있었던 일본군 2,300명은 거의 전멸했다. 그후 일본군은 키스카 섬에서도 철수했다. 알류샨 열도에 기지를 얻은 연합군은 쿠릴 열도를 폭격하기가 더 수월해졌다.

미국의 필리핀 전투가 마지막 단계에 이름과 동시에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주력이 되어 일본군한테서 보르네오 섬을 탈환하는 작전이 펼쳐졌다. 그후 일본군 수비대가 궤멸됨에 따라 일본은 보르네오 남부의 석유를 공급받지 못하게 되었다.

장제스는 유능하지만 성격이 맞지 않아 마찰을 자주 일으키는 스틸웰의 소환을 요구했고, 이 요구는 1944년 10월에 받아들여졌다. 그후 동남아시아의 연합군 사령부가 일부 개편되었다. 1945년 5월초에 인도군 1개 사단이 미얀마 양곤에 상륙했지만, 마침 우기에 접어들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그 도시를 점령할 수 있었다. 양곤의 점령으로 미얀마 탈환은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필리핀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미국군은 마지막 목표인 일본 본토로 직접 진격하기 위해 중대한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공중폭격은 일본을 침공하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일본 침공은 일본의 주요섬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규슈[九州] 상륙으로 시작될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했다. 미국군은 마리아나 제도에 확고한 기반을 잡았기 때문에, 장거리 폭격기 B-29는 1944년말부터 1945년까지 일본을 꾸준히 폭격했다. 그러나 사이판과 도쿄는 2,400km나 떨어져 있어서, B-29한테도 이것은 긴 비행거리였다. 그래서 전략 입안자들은 마리아나 제도와 일본의 중간쯤에 있는 오가사와라 제도[小笠原諸島]의 작은 화산섬 이오지마[硫黃島]에 관심을 집중했다(→ 색인:이오 섬). 일본군 기지가 있는 이오지마를 빼앗을 수 있다면, 이 섬은 대형폭격기를 엄호하는 미국군 전투기 기지로 엄청난 가치를 가질 수 있었다. 일본군은 이오지마를 지키기로 작정했다. 태평양의 다른 섬에서도 그랬듯이, 일본군은 자연동굴과 바위 투성이의 험준한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이 섬에 지하 방호시설을 만들었다. 이 섬을 지키는 일본군의 수는 2만 명이 넘었다(→ 색인:이오지마 전투).

 

                                                     1944년 11월 8일 일본 본토 폭격을 주도한 미국 공군 조종사 모습

미국군은 실제로 섬에 상륙하기 전에 해군 함포와 로켓포, 그리고 네이팜 탄을 이용하여 날마다 이 섬을 집중포격했다. 그러나 그결과는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완벽한 방호시설이 일본군을 보호해주었기 때문에, 재래식 폭탄이나 포탄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일본군에게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미국 해병대가 1945년 2월 19일에 이오지마에 상륙했지만,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동안 공중에서 가미카제의 공격으로 수많은 연합군 함정이 파손되었다. 미국군은 2월 23일에 이오지마의 스리바치 산[拉鉢山]에 성조기를 세웠지만, 이 섬을 완전히 확보한 것은 3월 16일이었다. 이오지마는 미국 해병대 6,000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일본군 수비대는 거의 전멸했다. 그러나 그후 5개월 동안, 2,000대가 넘는 B-29 폭격기가 이 섬에 착륙할 수 있었다. 한편 미국군은 마리아나 제도의 기지에서 일본을 폭격하는 새로운 전술을 찾아냈다. 대낮에 높은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하면 산업 중심지에 별로 많은 피해를 주지 못했기 때문에, 밤에 낮은 고도에서 네이팜 소이탄을 투하하는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여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1945년 3월 9~10일 밤 도쿄에 대한 최초의 야간 공습으로 도쿄 건물의 25%가량이 파괴되었고, 8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으며, 100만 명이 집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 이결과는 대규모 지상군의 침공이 없이도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다른 대도시에 대해서도 비슷한 야간 공습이 이루어졌다. 일본은 전쟁으로 파괴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전술이 성공을 거두고 있었는데도, 임기중 사망한 루스벨트 후임으로 미국의 대통령이 된 해리 S. 트루먼은 일본 본토를 침공하는 재래식 방법보다 미국군의 생명을 덜 희생시키면서 일본을 무찌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연합군의 항복요구에 대해 일본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것이 문제를 결정지었다. 1945년 8월 6일, 1941년부터 미국에서 은밀히 개발해온 원자폭탄이 혼슈[本州] 남단의 히로시마[廣島]에 떨어졌다. 열기와 돌풍은 폭발 지점에 있던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었고, 자연 화재를 일으켜 거의 11㎢에 이르는 지역을 완전히 불태웠으며, 7만 명 이상이 죽고 7만 명 이상이 다쳤다. 8월 9일에 나가사키[長崎]에 떨어진 2번째 원자폭탄은 3만 5,000~4만 명을 죽이고, 비슷한 수의 부상자를 냈으며, 4.6㎢를 폐허로 만들었다(→ 색인:핵무기).

히로시마가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도쿄에서는 빨리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 정부관리들은 대부분 나가사키가 공격받을 때까지 연합군의 새로운 무기가 지닌 위력을 올바로 평가하지 못했다. 한편 8월 8일에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런 사태 발전은 일본정부에서 지난 봄부터 강화협상을 주장해온 집단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8월 10일 일본정부는 국왕이 누리고 있는 최고통치자의 지위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연합국이 제시한 항복조건을 받아들이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연합국은 국왕의 지위에 관한 일본측의 요구는 인정했지만,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지시에는 국왕도 복종해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일본은 8월 14일에 이 단서를 받아들였고, 트루먼은 맥아더를 일본의 공식 항복을 받아들일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지명했다. 1945년 9월 9일 일본은 중국에 대해서도 별도의 절차를 거쳐 항복했다. 이 마지막 공식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1944년 10월 22일 필리핀 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 맥아더장군(中)과 트루만 부대통령(左) 모습

 

 

                                                                  1944년 미군 공격으로 사망한 일본군 전사자들의 시체모습

 

                                                                                1944년 10월 25일 미국공군 공격으로 일본군 폭격기 추락 장면

 

 

 

 

 

 

1945년 2월 23일  이오지마(硫黄島)를 점령한 미국 해병대 모습

 

오키나와 [Okinawa, 沖縄]점령한 미국군 모습

 

 

 

 

역사사진으로 되돌아 보는 일본 제2차 세계대전 패배

1945년 8월 6일, 미국은 진주만 공격을 받은 뒤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 뜨리고 많은 일본 서민(庶民)을 죽게 했다.

 

69년 전(前) 오늘,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고 6년간 지속한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2차 세계대전의 전쟁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 이르렀다. 전쟁은 북아프리카와 아시아 태평양 동서 2 개의 전장에서 열렸다. 1차 세계 대전에 이은 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61개국 · 지역의 20억 명 이상이 전쟁에 휘말려 작전 지역의 면적은 2200 만 ㎢에 이르렀다. 대략적인 통계에 따르면, 전쟁에서 군인과 서민(庶民) 8,000만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차로 심문 장소에 수송되는 일본인 포로

 

                                                                                               2차 세계 대전 중 오키나와

 

1945년 8월 트루먼 미국 대통령(미국의 제33대 대통령, 1945년 4월~53년 1월)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폭탄 투하 문서에 서명하는 모습

 

                                                     트루먼 미국 대통령(미국의 제33대 대통령, 1945년 4월~53년 1월)

 

                                                  1945년 9월 2일 오전 9시 도쿄항만에 정박한 미군 미주리 호에서 항복 문서 조인식이 열렸다

 

1945년 9월 2일 도쿄만의 미주리 호에서 일본이 항복 체결문서에 정식으로 서명하여 제 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항복 조인식에서 맥아더 장관

 

 

1945년 9월 2일 일본 시게 미츠 아오이 외무장관이 천황과 정부를 대표하고 우메즈요시지로 육군참모총장(A급 전범으로 종신형)이 대본영(군부대신)을 대표 해 서명했다[항복문서에 서명중인 우메즈 요시지로의 모습]

 

                                                      1945년 9월 히로시마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대량의 일본인 병사를 태운 열차

 

                  1945년 8월 15일 히로시마에 있는 일본인 포로는 히로히토 일왕의 무조건 항복 성명을 듣고 제 2차 세계 대전의 끝을 알고 고개를 숙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총리, 육군 대장으로 제 2차 세계대전 일본 군국주의(대본영, 국방위원회=군사평의회) 국가사회주의 노선 주범 최고 지도자의 도조 히데키

 

 

                                                                          맥아더 장관 (왼쪽)과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 (오른쪽)

 

                                         아이를 데려 나가사키의 거리에 있는 전통 옷을 입은 일본인 여성. 얼굴의 상처는 원폭에 의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의 쇼와 천황은 "정전 명령"을 내고 무조건 항복했다. 천황이 발표 한 패전의 정보를 엎드려 듣는 서민들

 

미군이 기록한 1945년 8월 15일 항복 후 일본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고 같은 해 9월 2일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그리고 1952년 4월 28일까지 연합군 최고 사령관 총사령부는 일본 정부를 통해 이른바 '간접 통치'했다. 미군의 촬영 팀은 당시 일본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平和大忍, 信望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