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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책--북한정부 초대 산업상과 부수상 역임 본문
"지도자 김은 스티코프가 주도한 소련군 극동사령부 작품이었다 1946년 8월 30일 소련군정 지도부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을 합당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한 후 당 고위간부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쪽에는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뒷 줄 오른쪽에는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등"
1.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과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소련군 연해주관구 제25군단 사령부 정치위원과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니콜라이 레베데프(Nikolai G Lebedebv)
(1)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2)소련군정은 극동사령부 예하 제1전선 군사령부 T.F 스티코프 상장 지시를 받았다
-평양주둔 소련군 사령관 스티코프 대장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
-초대 북한주재 소련대사
(3)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대일선전포고전에 한반도 침투조와 선발대를 투입했고 1945년 8월 9일부터 북한지역에 파견된 첩보대 조선인 박창우등과 조선인 소련군 극동정찰국 대원이었다
북한 김일성이가 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대대장 출신이며 북한잠입 활동때는가명 김영환으로 사용했다
(4)중국내전과 한국전쟁때 소련군 극동사령부가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만주국을 점령한 후 임표에게 일본군 무기를 인계했으며 임표을 동북 3성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북한지역을 점령한 후 김일성에게 총사령관을 임명했으며 한국전쟁때는 임표등의 조선의용대 지원으로 남침을 추진했다
(5)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요원(사진 인물)---김일성(김영환). 김책등
2.연안파---중국 공산당(사진인물,김두봉. 최창익)
(1)정치조직 독립동맹(주석 김두봉. 부주석 최창익)과 군사조직 조선의용대(총사령관 무정)
(2)주석 김두봉(부산 동래 출신). 부주석 최창익(허정숙의 남편)
(3)김무정(무정)----함북경성출신이며 중앙고보 중퇴 그리고 북방군관학교 포병과 졸업, 한국전쟁때 팽덕회등 중국 인민군사령관과 친교, 제2군단장으로 낙동강까지 진격 그리고 후퇴 중에는 평양방위사령관으로 재직 중 패전으로 해임. 51년 47세로 죽음..
(4)한국전쟁 주도는 해군이나 공군등을 소련군 극동사령부가 주도했으며 탱크나 포병등은 중국의용대 출신 조선의용대 출신이 주도했다
소련군 극동사령부는 민주국을 점령한 후 중국인민군에게 일본관동군 무기를 인계하여 중국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했으며 중국내전에서 모택동부대가 승리하자 동북3성 총사령관 임표등을 한국전쟁 참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한국전쟁을 추진했다 남침주력부대는 조선의용대었다
3.소련파----소련군 대일참전 정찰국 출신(사진인물, 김일성. 김책)과 소련공산당 출신(사진 인물, 허가이)
(1)소련지역에서 소련공산당이나 소련정부에 참여한 인사들
(2)분류
소련군 정찰국이나 대일참전부대---김일성. 김책등 소련군 극동사령부 정찰국 요원
기술자---공군이나 해군등 기술진이나 북한정부 행정요원으로 귀순
당과 행정. 외교관료---허가이(로모노소프대학 출신이며 우즈벡공화국 타슈겐트주 당비서) 등
허가이는 소련정치담당 고문으로 노동당 조직부장으로 남로당과 북로당 합당을 총지휘했으며 허가이는 남로당 박헌영 보증인으로 한국전쟁이후 남로당 패전 책임과 박헌영등과 무장봉기 시도를 하다가 미국의 간첩으로 박헌영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소련 공산당 계열이 박헌영과 허가이등으로 스탈린 사후 한국전쟁이 중국인민해방군 주도로 추진돼 전쟁이후 숙청돼고 중국 공산당 계열이면서 동북 3성 항일무장세력 소련군 대일참전 정찰국 출신 김일성등이 북한권력을 장악했다)
4.조선공산당-----북조선 공산당 출신(사진인물,주영하)
주영하등은 김용범이나 현준혁등과 다르게 김일성을 지원했다
*김책
김책(金策, 1903년 8월 14일 ~ 1951년 1월 30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 정치인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산업상(1948년 9월-1951년 1월)과 부수상을 지냈다
함경북도 학성군 출생으로, 일찍이 가족을 따라 중국 옌지(延吉)에 이주하여 거기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옌지에서 성장하다가 반일 활동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만주 지린성(吉林省) 동흥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동흥중학교 재학 중 반제지하청년단체에서 활동하다가 1927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고, 동흥중에서는 퇴교당하였다. 이후 만주 봉천, 길림 등에서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풀려나오기를 반복하면서 무장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초기에는 엠엘파(NL계열)와 대립되는 화요파 계열로서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어 요직을 맡았고, 이후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했다.
출감 후 북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1936년 조국광복회를 조직하는데 가담했다. 1940년대 동북항일연군 때 김일성을 만나 같이 행동하였으며 당시 인연으로 공화국 수립후 김일성 주석의 측근이 됐다. 동북항일연군이 소련에 들어와 재편된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도 함께 있었다. 당시 직급은 김일성, 강건, 안길과 동급이었다.
광복후 김일성과 함께 귀국한 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위원을 시작으로, 1946년 평양정치군사학원 원장이 되었다. 이후 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1948년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평양학원 초대 원장 등을 지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북조선측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참석하였고, 6월 남북 로동당이 통합되어 조선로동당이 결성되자 그는 로동당 정치위원에 선거되었다. 9월 공화국 내각수립후 부수상 겸 산업상을 역임하는 등 북조선 정권의 핵심으로 활동했다.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한국 전쟁을 맞았으며,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선사령관을 겸하여, 군사위원회 위원 및 전선사령관으로 참전했다가, 전쟁 중이던 1951년 1월 30일 최전선에서 전사했다. 또는 평양에서 심근경색 또는 가스 중독으로 급사했다고도 하며 권력 투쟁 중 암살당했다고도 한다
사후에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국가훈장 제1급을 추서하였다. 최고인민회의는 그의 사후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고향인 성진을 개명한 김책시, 청진제철소를 개명한 김책제철소와 평양의 김책공업종합대학 등 시설물에 그의 이름을 명명한 것이다.
함북 학성군은 김책군으로 유자녀 군사학원은 유자녀 김책군사학원으로, 인민군 제2정치군관학교는 김책군관학교로, 서울근위 제4사단은 김책 서울근위 제4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아들인 김정태 역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청와대 습격 사건을 담당한 당시 124군 부대의 정찰국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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