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주덕과 호지명 본문
1950년 1월 3일 호지명(右)과 주덕(左)
베트남 공산당 지부는 "주덕장군의 인민해방전쟁이론[지역전쟁과 게릴라 유격전]"을 전수 받아 베트남전쟁에서 승리했다 주덕장군의 인민해방전쟁론이 농업사회에서 가능한 전쟁방법론이다 아직도 민심이 국가정책의 최우선시 돼 오고 있다
"주덕은 마오쩌둥과 함께 중국공산당 홍군을 창설하여 현대전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분전술이었던 유격전술을 주요전략개념으로 부상시키는 데 공헌했으며 특히 제3세계의 무력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지도 아래 홍군은 농촌지역에서의 활약을 통해 뛰어난 기동성과 유연성을 가진 자급자족적 군대로 발전했으며, 엄격한 규율, 용감성, 책임감을 지니게 되어 인민의 지지를 얻었다. 그의 전략은 대규모의 적군과 단기전으로 맞서는 것을 피하고, 적을 분산시킨 후 이를 섬멸하는 지구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또 많은 희생을 내면서 대도시를 공격·점거하는 것보다 농촌지역을 장악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아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완성한 대규모 게릴라 전술은 1946~49년의 국공내전에서 홍군이 국민당군을 격멸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주덕(朱德, 1886년 12월 11일~1976년 7월 6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 중국공산당 지도자이다. 자는 위제(玉阶)로 중국 10대 원수 중의 한 사람이다. 개국원수라고 불릴만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공을 세웠다.
쓰촨 성 이룽 현 출생이다. 백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사숙(私熟:조선시대의 향교같은 곳)에서 유교경전을 공부했고, 슈차이(秀材:과거 예비시험, 조선의 생원과 유사)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근대교육을 선망하던 그는 1906년 청두로 가서 청두고등사범학당(현재 쓰촨대학)에서 체육교육을 공부하고 짧은 기간 동안 체육교사로 일했다. 이후 정국의 정세가 심상치 않자, 윈난 성의 윈난강무당(군사학교)에 들어가 군사학을 공부하였다. 재학중 쑨원(손문)의 동맹회에 가입했고, 졸업후 이 학교의 교관으로 지내다 1911년 신해혁명이 터지자, 혁명에 참가하였다.
1915년 차이어(蔡锷)군벌군에 들어가 위안스카이의 제정에 반대하는 "호국전쟁"에 참가하였다. 젊은 나이에 차이어 군벌군의 소장까지 출세한 그는 다른 군벌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아편중독자에 여러 명의 여인을 거느린 호화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후견인이었던 차이어가 죽고 농민들의 참혹한 생활을 본 그는 1921년 홀연히 마약을 끊고, 재산도 정리하고, 군벌군을 떠나 상하이로 가서 공산주의를 공부하며 쑨원과 공산당지도자 천두슈를 만났다. 그는 천두슈에게 공산당 입당을 신청했으나, 천두슈는 주의 군벌경력을 문제삼아 거절하였다. 이후 1922년 독일의 베를린과 괴팅겐대학교에 유학하여 역사와 철학을 공부했다. 1925년 학생소요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독일에서 추방되었고, 이때쯤 저우 언라이(주은래)의 지지를 받아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후 소련에서 군사학을 공부했고, 1926년 중국으로 돌아와서 제1차 국공합작에 의해 난창의 국민당군을 지휘하였다. 1927년 국공합작이 붕괴되자, 국민당 정부로부터 난창 봉기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지만, 그는 오히려 부대를 이끌고 이 봉기에 가담하여 국민당군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봉기 실패이후, 그는 군벌 판스셩의 비호로 자신과 자신의 부대의 안전을 확보하였다.
1928년 마오쩌둥의 징강 산의 공산당 해방구에 1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가담하였다. 그와 마오는 홍군을 조직하고, 게릴라전으로 토벌군을 격파하며 해방구를 늘리기 시작했다. 홍군은 주와 마오의 이름을 따서 "주마오 군"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주는 신출귀몰하게 군을 지휘하여 축지법을 쓰는 초능력자라는 전설마저 생겨났다.
1930년-1932년 국민당의 4차에 걸친 토벌작전을 분쇄하고 계속 해방구를 늘려 300여만 명의 인구를 갖는 장시 소비에트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1934년 제5차 토벌작전에서 국민당군의 진지전에 말려들어 큰 피해를 입어 해방구를 포기하고, 장정을 개시하였다. 그는 장정 기간중 장궈타오와 함께 제2, 제4방면군을 지휘하여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쓰촨 성과 윈난 성을 거쳐 1936년 간쑤 성에 도달하였다.
1937년 시안사건에 의해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고, 항일공동전선이 구성되자, 그는 홍군이 개편된 국민 혁명군 제8로군의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각지에서 항일작전을 지휘하였다. 1940년 100여개의 연대를 동원한 "백단대전"을 입안하여,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일본군이 이에 대해 "삼광작전"(三光作戰:게릴라 배후가 될 수 있는 민간인 마을에 대해 모두 죽이고,모두 불태우고, 모두 약탈하는 정책)으로 응수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1945년 일본제국의 패망으로 국민당과 내전이 벌어지자, 팔로군이 이름을 바꾼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을 맡아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국민당군을 격파하고 대만으로 패주시키는 데 공헌을 하였다
이후 공직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부주석, 중앙군사위 부주석, 당직으로는 공산당 부주석을 맡았고, 군에서는 원수 계급을 받았다. 1959년 군직에서 물러나고, 1966년 문화대혁명의 광풍속에서 중국공산당의 상무위원직에서 해임되지만, 저우언라이(주은래)의 도움으로 체포되지는 않았다
1971년 다시 상무위원직에 복귀하였다. 1976년 베이징에서 사망하였다.
모택동, 호지명, 주은래 모습
'-平和大忍, 信望愛. > 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차대전에 참가한 일본 여성들 모습 (0) | 2011.09.30 |
---|---|
강청[江靑, 본명-이청운] (0) | 2011.09.13 |
중국 광동성 중산시 공원에 있는 일선(逸仙) 손문선생 동상 (0) | 2011.09.13 |
김책--북한정부 초대 산업상과 부수상 역임 (0) | 2011.09.11 |
왜구(倭寇) 등장--려몽(고려, 몽고)연합군 일본점령 전쟁에 대한 복수와 일본지역 혼란, 분열 (0) | 2011.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