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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倭寇) 등장--려몽(고려, 몽고)연합군 일본점령 전쟁에 대한 복수와 일본지역 혼란, 분열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왜구(倭寇) 등장--려몽(고려, 몽고)연합군 일본점령 전쟁에 대한 복수와 일본지역 혼란, 분열

CIA Bear 허관(許灌) 2011. 8. 1. 19:50

왜구란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중국과 우리나라 연안을 무대로 약탈을 일삼던 일본 해적을 뜻한다  왜구 등장은 려몽(고려, 몽고)연합군 일본점령전쟁에 대한 복수와 일본지역 혼란,분열이었다  2차례에 걸쳐 고려와 원의 연합군이 정벌한 바 있는 규슈[九州]와 그 주변의 쓰시마[對馬島] 등 섬 지역 주민들의 생활이 가장 곤궁하여, 고려와 중국 해안 지역을 노략질한 해적 무리는 거의 이 지역 출신이었다.

 

일찍이 삼국시대에도 우리나라에 일본의 해적이 침입한 바 있지만 침입 규모나 피해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걸친 시기에는 거의 해마다 침입했고 피해도 막대하여 '왜인(倭人)들이 노략질했다'라는 뜻인 왜구가 이때부터 일본인 해적집단을 총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왜구가 고려에 처음 침입한 것은 1223년(고종 10)이다. 이로부터 5년에 걸쳐 왜구가 7차례나 경상도·전라도 해안지역을 노략질했지만, 그뒤 100여 년 동안은 10여 차례 침입하는 데 그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1274년(충렬왕 즉위)과 1281년(충렬왕 7) 2차례에 걸친 고려와 원(元) 연합군의 일본 정벌도 왜구 침입을 뜸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왜구의 노략질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350년(충정왕 2)으로, 뒤이은 공민왕 때에는 115회, 우왕대(1375~88)에는 278회의 침입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와같이 14세기 후반에는 왜구가 자주 침입했을 뿐 아니라 때로는 500척의 함대를 이끌고 몰려오는 등 그 규모도 커졌고, 노략질하는 지역도 남부 해안지역에 그치지 않고 평안도·함경도 등 전국에 걸쳤으며, 내륙 깊숙한 지역까지 횡행하는가 하면 개경을 위협하기도 했다.

 

 특히 우왕 때에는 왜구의 침입이 절정을 이루어, 바다에서 조운선(漕運船)의 곡물을 약탈하거나 해안지역에 있는 조운 창고의 곡물과 군현의 관아 또는 부잣집의 재물을 노략질했으며, 내륙 여러 지역을 횡행하면서 민가를 노략질하고 주민을 닥치는 대로 잡아 해쳐서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시기에 왜구가 이같이 창궐한 것은 1333~92년에 일본의 왕조가 남북으로 갈라져 전란이 지속되어서 민간의 생활이 피폐해진데다가 중앙 권력이 지방을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일본사).

 

그 가운데서도 2차례에 걸쳐 고려와 원의 연합군이 정벌한 바 있는 규슈[九州]와 그 주변의 쓰시마[對馬島] 등 섬 지역 주민들의 생활이 가장 곤궁하여, 고려와 중국 해안 지역을 노략질한 해적 무리는 거의 이 지역 출신이었다. 당시 고려에서는 권력층 사이에서 치열한 정권 다툼이 계속되고 농장이 발달하는 등 정치적·경제적 혼란이 일어났고 이와 관련하여 국방이 허술해졌으며 중국도 원 왕조 말기의 내란을 겪고 있었는데, 이러한 요인도 왜구가 창궐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었다. 고려가 왜구로 말미암아 입은 피해는 막대했다. 무엇보다도 무수한 인명이 살해되고 재산을 잃었으며 노략질당한 것이 가장 큰 피해였다. 남부지역의 섬은 물론 해안지역에 살던 주민의 대부분이 피난함으로써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일어났으며, 당시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였던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해안지역 농토가 황무지로 바뀌었다. 아울러 바닷길을 통한 조운을 하지 못하여 육로로 조세를 운반하도록 했지만 왜구가 내륙까지 횡행한 까닭에 이 또한 원활하지 못해서 국가 재정에 큰 타격을 받았다.

고려 정부는 일본 정부가 왜구를 통제하도록 여러 차례 외교 사절을 파견하기도 하고 이를 위한 수단으로서 일본과의 교역을 금지하기도 했으나, 일본 정부 자체가 통제력을 상실한 상황이어서 큰 실효는 보지 못했다. 이에 따라 규슈 등지의 세력가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직접 왜구 금지를 요청하기도 했으나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는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고려는 차츰 군사제도 정비와 국방 강화에 힘을 기울여 농민 시위군(侍衛軍)과 수군(水軍) 등의 군대를 조직하고, 기존에 해안 지역에 설치된 수소(戍所)를 증설한 데 이어 산성(山城)·읍성(邑城) 등 방어시설을 강화하고, 화포(火砲)를 개발함으로써 왜구 격퇴에 상당한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1364년(공민왕 13)에는 진해에서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 김속명(金續命)이 3,000명의 왜구를 격파한 바 있고, 1376년(우왕 2)에는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이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대첩을 거두었다. 1380년(우왕 6)에는 금강 어구의 진포(鎭浦)에 정박한 왜선 500척을 해도원수(海道元帥) 나세(羅世)·심덕부(沈德符)·최무선(崔茂宣) 등이 화포를 써서 모두 불태웠으며, 이때 상륙하여 남부지역을 횡행한 왜구를 도순찰사(都巡察使) 이성계(李成桂)가 지리산의 황산(荒山)에서 무찌르는 대첩을 거둠으로써 왜구의 위세를 꺾을 수 있었다.

 

특히 강화된 수군이 왜구 격퇴에 크게 이바지하여 1383년에는 해도 원수 정지(鄭地)가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큰 전과를 올렸고, 1389년(창왕 1)에는 경상도 도순문사 박위(朴葳)에게 전함 100척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를 소탕하도록 함으로써 왜구 침입은 뜸해졌다.

 

그러나 왜구는 결국 고려가 멸망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조선 초기에도 간헐적으로 왜구가 침입하여 1418년 이종무(李從茂) 등을 보내 쓰시마를 다시 정벌했으며, 지속적으로 국방력을 강화하고 1426년(세종 8) 일본인들에게 3포를 개항하여 무역을 허용하는 등 무마 정책을 병행함으로써 왜구 침입을 중단시킬 수 있었다. 16세기에도 왜변(倭變) 또는 왜란(倭亂)으로 부르는 왜구 침입과 3포에 거주하는 왜인들의 난동이 몇 차례 있었다.

 

평소 명나라는 일본의 조공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1404년 명나라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10년에 한번씩 조공을 오되 인원을 200명 이내로 제한하며, 칼을 가지고 오면 도둑으로 치부해 죄를 따진다는 조건을 붙였다. 무역 장소는 절강성의 영파(寧波) 지역으로 지정했다.

이렇게 제한을 가한 것은 유황, 구리, 등 일본의 물품이 명나라에서 특별히 필요한 물산들도 아닌 데다 천황이 아닌 영주들의 배가 주로 왔으며, 체류 경비를 부담하는 것도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점차 조공 인원을 300명으로 늘려 그런대로 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16세기 초반부터 일본의 규슈 지방 상인들이 명나라 복건성 쪽 항구에 드나들면서 을 옷감과 교환하는 무역을 벌였다.

이 무렵 에스파냐 상인과 포르투갈 상인들까지 절강성, 복건성 등지에 와서 무역 행위를 하자 명나라에서는 이들을 몰아내면서 일본 상인들도 함께 쫓아냈다. 그래서 1547년 이후부터는 일본의 조공선이 명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뒤 상인들은 아오먼(澳門, 마카오)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 결과 일본 상인들의 후원을 받는 왜구의 해적활동이 더 극심해졌다. 왜구는 주로 명나라와 조선을 공격 목표로 삼아 횡행했다.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의 중개 무역을 통해 명나라 상품을 사들이는 것이 번거로워 공식 무역로를 트려고 노력하며 조선에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조선은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정권을 잡은 후 명나라와 무역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한족과 일족 관계: 일본 내각이 중국 만주족등 소수민족과 협력 여부

-조선족(한민족)과 일족관계: 일본 내각이 한족과 대립여부(한족과 조선족은 역사적으로 협력관계)

-중국 소수민족 몽고족이나 만주족등 경제적으로 잘 살아갈 때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도움

일본정부도 중국 한족이나 소수민족이 일본지역에 거주하는 분들의 의견도 수렴하여 경제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올바릅니다

중국분열정책이나 한반도 군사적 침략정책은 일본반도도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본도 북방민족 몽고족이나 만주족이 북부지역에도 거주하며 남방민족 한족이나 조선족(한민족)이 남부지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규슈나 대마도는 한국 경상도나 전라도 출신 주민들이 많이 이탈하여 거주해오고 있습니다 규슈와 대마도 경제권은 부산 경남 경제영역입니다

규슈나 대마도가 경제적으로 잘 살아갈때 부산 경남도 경제적으로 잘 살 수 있으므로 경제연합이 필요합니다

규슈나 대마도는 일본 북방지역이나 중부지역 의견보다 부산 경남의견을 존중해야 하며 부산 경남도 만주나 한국 북부, 중부지역 의견보다는 규슈나 대마도 의견을 존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