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동티모르 대통령 선거전 계속돼 본문

Guide Ear&Bird's Eye/동티모르

동티모르 대통령 선거전 계속돼

CIA bear 허관(許灌) 2007. 4. 6. 13:58
오는 9일 독립 후 처음으로 투표를 실시하는 동티모르 대통령 선거에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라모스 홀타 씨 등 8명이 입후보해 선거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를 앞두고 수도 딜리에서 어제, 일본과 미국, EU 대사 등이 공동으로 설명을 발표했습니다.

성명은 '선거 결과 등에 대해 폭력과 강압적인 방법이 용납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국민의 의사가 표명된 것이므로 , 모든 당사자가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동티모르에서는 그제, 대립진영의 지지자가 각지에서 충돌해 수십 명이 부상하는 등, 선거를 계기로 치안이 더욱 악화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동티모르[東 ―, East Timor]
공식 명칭 : 동티모르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Timor-Leste)
인구 : 925,000
면적 : 14,604 ㎢
수도 : 딜리
정체·의회형태 : 공화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총리
공식 언어 : 테툼어·포르투갈어
독립년월일 : 2002. 5. 20
화폐단위 : 미국달러(U. S. dollar/U.S.$)
국가(國歌) :

  

공식 이름은 동티모르 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East Timor/Republica Democratica de Timor-Leste).
말레이 열도의 티모르 섬 동반부에 있는 나라.
[개요]

국기
지도
티모르 섬 동부와 인근의 작은 섬인 캄빙·자코 섬, 그리고 판테마카사르 시를 껴안고 있는 티모르 섬 서북 해안의 오쿠시 암베노로 이루어져 있다. 동남쪽으로 티모르 해, 북쪽으로 웨타르 해협, 서북쪽으로 옴바이 해협, 서남쪽으로 서(西)티모르(인도네시아 누사텡가라티무르 주에 속함)와 접한다. 수도는 딜리이다. 면적 14,604㎢, 인구 778,000(2003 추계).

 

[자연환경]

티모르 섬 동부는 울퉁불퉁한 산악지대이며 최고봉인 라멜라우 산(2,963m)이 고원 한가운데 솟아 있다. 건조한 열대 기후로 건기와 우기로 뚜렷이 나뉜다. 우기는 남부 해안 지역(12~6월)이 북부 해안 지역(12~2월)보다 2배 더 길며,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발생하기도 한다. 연강우량은 약 1,500㎜이다. 연평균기온은 27~30℃이지만 건기에는 기온이 30~35℃로 매우 덥고 일교차가 거의 없다. 구릉지대에는 귀중한 백단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저지대에는 코코야자·유카리나무와 더불어 키 작은 나무와 풀들이 자란다. 온천이 여럿 있으며 계곡을 따라 많은 물이 흘러내린다. 대표적인 야생동물로는 유대류의 일종인 쿠스쿠스와 원숭이·사슴·사향고양이·뱀·악어 등이 있다. 판테마카사르 항을 끼고 있는 서북 해안의 암베노 지역은 백단나무 숲과 코코야자 숲으로 덮여 있다.

 

[국민]

국민의 대다수는 파푸아인·말레이인·폴리네시아인 혼혈이며 테툼족(33%)·맘바이족(12%)·케마크족(10%)·마카사이족(8%)·갈롤리족(8%)·토코데데족(8%) 등 36개 이상의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토착어로 약 40종의 파푸아어·말레이어 방언이 있다. 그 중 테툼어가 가장 널리 쓰인다. 테툼어는 인도네시아 강점기(1975~99)에 사용을 금지당하는 수난을 겪어 동티모르인들에게 고난과 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식민지 언어로는 포르투갈어와 인도네시아 공용어인 바하사 인도네시아어가 사용되는데, 인도네시아 강점기에 바하사 인도네시아어가 널리 보급된 반면 포르투갈어는 테툼어와 더불어 탄압을 받았다. 이 때문에 2001년 현재 포르투갈어를 구사할 줄 아는 동티모르인은 35세 이상의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1년 12월 동티모르 제헌의회는 '저항의 언어'인 테툼어와 식민지 언어인 포르투갈어를 '공식 언어'(official languages)로 채택하고, 바하사 인도네시아어와 영어는 그 하위인 공용어(working languages)로 지정했다. 인구의 91.4%가 로마 가톨릭교 신자이다. 개신교 신자도 인구의 2.6%에 이르며, 이슬람교(1.7%)·힌두교(0.3%)·불교(0.1%)가 그 뒤를 잇는다.

 

[경제]

세계 최빈국에 속한다. 2001년 현재 인구의 40% 이상이 빈곤선(1일 0.55달러) 이하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농업이 국내총생산(GDP)의 약 90%를 차지하며 경제의 근간을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커피·코코야자·쌀·옥수수이며 목화·밀·담배·감자도 재배되나, 1975년 인도네시아의 침공 이후 농경지가 황폐해졌다. 임업·수산업의 비중은 낮다. 목재·식품가공·가죽·의류·염전·비누·향수·기계류 등의 분야에서 제조업이 행해지고는 있으나 대부분 단위사업장당 고용인원이 5명 미만으로 영세하다. 도자기·목각·상아세공, 짚 공예품, 코코야자 껍질 공예품, 바구니 등의 수공예품도 생산된다. 동티모르는 2000~2001 회계연도 예산(1억 2,800만 달러)의 80%를 국제 사회의 지원에 의존해야 했던 만큼, 티모르 해의 광대한 유전 개발에 큰 기대를 걸었다. 동티모르는 2002년 5월 오스트레일리아와 티모르갭(Timor Gap) 석유·천연 가스 개발을 위한 협약에 공식 서명했다. 2001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 478달러, GDP 증가율 18.20%이며 인플레이션율은 10. 6%, 실업률은 90%에 이른다. 총무역량은 2억 3,300만 달러 규모이며, 주요 교역상대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포르투갈이다. 2000년 1월 과도 통화(transitional currency)로 미국 달러(US$)가 채택되었다.

 

[정치·사회]

2001년 8월 독립운동의 주역인 프레틸린(Frente Revolucionaria de Timor Leste Independente/Fretilin:동티모르 독립을 위한 혁명전선)을 비롯한 16개 정당이 참여한 가운데 제헌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프레틸린이 직접선거구 13석 가운데 12석을 차지하고 인구 비례로 배분되는 전국구 75석 가운데 43석을 차지해 제1당이 되었다. 2002년 3월 제헌헌법이 제정되었다. 제헌헌법은 공화제·다당제·단원제·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대통령의 임기는 5년 중임, 의회 의원의 임기는 5년, 의원 정원은 52~85명으로 정했다. 국교는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두지 않았으며 국민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종신형 이상의 선고를 불허했다. 제헌헌법은 특히 전세계 피억압민족과의 연대를 선언하고 인도네시아 강점기에 자행된 반인륜 범죄를 국내·국제 법정에서 처벌할 것과 진실과 화해 위원회(Commission for Reception, Truth and Reconciliation)의 설치를 규정했다. 또한 인도네시아의 강점을 원천적으로 부인하는 뜻에서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의 건국일을 1975년 11월 28일로 못박았다. 한편, 독립을 하루 앞두고 발표된 UNDP의 '동티모르 인간개발 보고서'(National Human Development Report for East Timor)는 21세기의 첫 독립국인 동티모르가 직면한 사회적 과제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01년 현재 동티모르의 평균수명은 57세, 영아사망률은 1,000명당 70~75명이며 영아의 절반 이상이 표준중량에 미달했다. 또한 문자해독률은 57%에 불과하고 그나마 성인의 절반 이상은 문맹으로, 대부분 초등교육도 받지 못했다.

 

[역사]

유럽의 식민지 개척기인 1520년,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포르투갈인들이 티모르 섬에 정착했으며 1522년에 스페인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1613년에는 네덜란드인들이 들어와 이 섬의 서부를 차지했다. 1642년에 포르투갈인들은 백단나무 무역 기지를 세웠다. 1812~15년에는 섬 전체가 영국의 수중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 뒤 네덜란드인과 포르투갈인이 티모르 섬의 지배권을 두고 각축전을 벌인 결과 1860, 1893년 조약에 따라 이 섬은 동서로 양분되어 각각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에 귀속되었다(1893년 조약은 1914년에 비로소 효력을 발휘함). 동티모르는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2~45년에는 일본에 강점되어 6만여 명이 살해당하는 비운을 겪었으며,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계속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다. 동티모르인들은 식민 당국의 지배에 맞서 1719, 1895, 1959년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대체로 소극적으로 저항하면서 자신의 문화를 유지하는 길을 택했다. 1974년 아프리카 식민지들을 대상으로 곤혹스러운 전쟁을 수행하도록 강요받던 포르투갈의 군부 지도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우익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신정부를 수립했다. 포르투갈 신정부는 이듬해 7월, 자신의 식민 제국을 해체하기로 결정하고 동티모르에 대한 식민 통치를 1978년에 종식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동티모르인들의 독립 열기가 고조된 가운데 친포르투갈 세력과 독립운동 세력 간에 소규모 내전이 일어났다. 내전이 독립운동 조직인 프레틸린의 승리로 기우는 가운데 포르투갈은 같은 해 8월 동티모르에서 철수했다. 프레틸린은 동티모르 전역을 장악한 뒤 같은 해 11월 28일 마침내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새 나라를 수립한 지 불과 9일 만인 같은 해 12월 7일 수하르토 정권하의 인도네시아에 무력으로 강점되었고, 이듬해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티모르티무르 주)로 강제 합병되었다. 이는 국제 사회의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와 총회는 인도네시아의 침략 행위를 비난하고 인도네시아군의 철수와 합병 철회를 요구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를 제외하고는 어느 국가도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을 용인하지 않았다(오스트레일리아는 1978년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공식 인정함).

프레틸린 게릴라들은 산악지대에 은거하며 기나긴 무장투쟁에 돌입했다. 이미 무력 침공 2개월 만에 동티모르 전체 인구의 10%에 이르는 6만여 명을 학살한 인도네시아군은 이들의 저항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1만 7,000~3만 5,000명의 군인이 상주하며 대규모 진압작전과 강제이주, 초토화 작전을 펼쳤는데, 이 와중에 납치·고문·강간·즉결처분 등의 반인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1991년 11월 12일, 2주 전 시위에 가담했다가 인도네시아군에 의해 살해된 세바스티앙 고메스를 추모하기 위해 산타크루스 공동묘지에 모인 군중들이 평화시위를 벌이던 중 인도네시아군의 계획적인 무차별 발포로 271명이 죽고 382명이 부상하고 250명 이상이 실종된 이른바 '딜리 대학살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동티모르 전역으로 확산되자 인도네시아군의 피비린내나는 살육전이 며칠간 계속되었다. 인도네시아 강점기의 대표적인 집단학살 사건으로 꼽히는 딜리 대학살사건은, 여느 사건과 달리 마침 학살 현장에 있던 미국 언론인 에이미 굿먼과 앨런 네이른에 의해 몰래 녹화·반출된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딜리 대학살사건을 계기로 '동티모르 행동연대'(East Timor Action Network/ETAN)와 같은 비정부기구들이 결성되어 동티모르인들의 저항운동을 측면 지원했다. 그러나 동티모르인들의 저항운동은 남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던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권과 유착된 미국 등 강대국들의 침묵과, 국제 사회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비전투원이나 항공기를 목표로 한 테러·납치 등의 과격 행위를 일체 삼간 프레틸린의 온건한 투쟁 노선에 가려져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이윽고 1996년 동티모르의 독립운동 지도자인 카를로스 펠리페 시메네스 벨로 주교와 주세 라모스 오르타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동티모르 사태는 비로소 국제 사회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되었다.

1998년 5월 철옹성 같던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권이 경제위기와 대규모 반정부시위에 밀려 마침내 붕괴하고 바차루딘 주수프 하비비 대통령이 이끄는 신정부가 출범함으로써, 1975년 이후 인도네시아군의 잔학행위와 기근·질병으로 전체 인구의 1/4에 이르는 20만여 명이 목숨을 잃은 비극의 땅 동티모르에 희망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하비비 정권은 이듬해 1월 국제 사회의 압력에 굴복해 동티모르의 장래를 결정할 주민투표를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8월 30일 친인도네시아 민병대의 집요한 투표 방해로 2차례 연기되었던 주민투표가 UN 주관하에 실시되었다. 개표 결과 유권자의 78.5%가 인도네시아가 제안한 특별자치를 거부하고 독립을 선택했다. 그러나 친인도네시아 민병대는 주민들의 독립 의지를 꺾기 위해 닥치는 대로 살인·납치·방화 행위를 자행하는 한편 주민들을 서티모르로 대거 강제 소개했다. 이들의 난동으로 수천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가운데 마침내 같은 해 9월 말 오스트레일리아군을 주축으로 한 UN 평화유지군이 민병대를 진압하기 위해 딜리에 입성했다. 다음 달 20일 인도네시아 의회가 동티모르 주민투표 결과를 받아들여 합병을 포기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의 '24년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 UN 관리하의 비자치 지역이 되었다. 이후 동티모르인들은 UN 동티모르 잠정통치기구(UNTAET)의 통치를 받으며 독립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2001년 8월 제헌의회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2002년 3월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어 2002년 4월에 실시된 초대 대통령선거에서 독립운동 지도자 사나나 구스마오가 선출되었다. 같은 해 5월 20일 동티모르는 수백 년에 걸친 식민주의의 족쇄를 풀어헤치고 마침내 완전 독립했으며, 같은 해 9월에 191번째 UN 회원국이 되었다.

 

[한국과의 관계]

한국과는 2002년 5월 20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한국은 동티모르의 독립을 위한 국제 사회의 여론 조성에 앞장선 것은 물론 동티모르 주민투표(1999. 8) 및 제헌의회 선거(2001. 8)에 선거관리위원을 파견하고 UN 평화유지 활동(1999. 10 상록수부대 제1진 파견)에 적극 참여하고 인도적 지원과 재건 및 개발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건국 이래 처음으로 피억압 약소민족의 독립 과정에 깊이 개입하는 귀중한 경험을 쌓았다. 민간 차원에서도 1996년 11월 국제 비정부기구(NGO)인 '아시아 태평양 동티모르 연합'(Asia Pacific Coalition on East Timor/APCET)의 회원단체로 동티모르 연대모임(Korea-East Timor Solidarity)이 결성되어 동티모르의 독립을 지원했으며, 2002년말 현재 서티모르의 난민 캠프에 수용되어 있는 8만~15만 명에 이르는 동티모르 난민의 귀환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0년 1월 동티모르 독립운동 지도자 사나나 구스마오가 동티모르 저항협의회(CNRT) 의장의 신분으로 방한해 한국 정부의 동티모르 독립 지원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한 데 이어, 2002년 6월에는 동티모르 민주공화국 대통령의 신분으로 방한해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동티모르의 재건을 위한 경제협력을 요청했다.

 

  • 자연환경
  • 국민
  • 경제
  • 정치·사회
  • 역사
  • 한국과의 관계